2017-11-10

99 [인터뷰] 석방된 「강철」 金永煥의 고백 : 월간조선

[인터뷰] 석방된 「강철」 金永煥의 고백 : 월간조선
11 1999 MAGAZINE




[인터뷰] 석방된 「강철」 金永煥의 고백
『탈북자 증언 통해 북한 본질 깨달았다… 金日成 만나보니 박제화된 인간… 주체사상엔 관심도 없었다』


김미영

●河永沃은 金日成이나 金正日이 설사 그렇게 비열한 사람들이더라도 한번 맺은 의리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 사나이다운 자세라고 생각하는게 아닐까 추측된다.
●엘리트를 왕따시키는 사회, 엘리트를 왕따시키는 조직은 가장 희망 없는 사회, 희망 없는 조직이라고 본다.
●북한 민주화는 통일이 되고 안 되고를 따지기 이전의 근본적 요구이자 지상과제이다. 굶어죽고 맞아죽는 그들을 구해내는 것은 그 모든것에 우선하는 것이다.
●20세기 한국 최고의 사상이론가(黃長燁)를 國精院서 만난 것이 기쁘고 감격스러웠지만 만난 장소, 만난 시간이 짧았다는 것이 아쉬웠다.
●반성문에는 내 진심이 담겨져 있다. 반성문이란 글의 형식 자체에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형식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10월15일 인터뷰
月刊朝鮮(월간조선) 1999년 6월호에는 한때 한국 親北(친북) 학생운동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주체사상파(일명 주사파)의 代父(대부) 강철 金永煥(김영환)씨의 서면 인터뷰가 실렸다.

이 인터뷰를 통해 金永煥씨는 「金正日(김정일) 정권 타도를 위한 좌우 대합작」을 제안함으로써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두 달 후 다시 전북대 전남대를 비롯한 호남의 다수 대학이 「북한 민주화 운동」을 선언하는 내용의 기사가 月刊朝鮮 8월호에 게재되었다.

이로써 우리 사회에 「북한 민주화」라는 화두가 새롭게 등장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대학가에는 아직도 親北 노선을 걷고 있는 한총련이 학생운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만큼 치열한 대자보 공방이 시작되었다. 북한에 우호적이거나 親北적인 통일운동 세력들 가운데에서도 金永煥씨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에서부터 적극적 지지에 이르기까지 甲論乙駁(갑론을박)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중 7월 말 중국에 체류하고 있던 金永煥씨가 귀국하여 전향 절차를 밟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1980년대 중반 자생적 조직으로 출발했던 주사파가 1980년대 말에 이르러 결국 북한과 연계되었음이 밝혀졌고 지금까지도 그 관계가 청산되지 못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1989년 반제청년동맹에서 출발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생명력을 이어온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이라는 지하조직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金永煥씨가 1997년 해체한 이 민혁당 조직은 그의 서울대 법대 82학번 동기 河永沃(하영옥)씨에 의해 지금껏 명맥이 이어지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 「강철서신」 이후 金永煥씨가 우리 사회에 던진 두 번째 충격파인 셈이었다.

1980년대 초 학생운동에 투신하여 한국 민주화에 일정한 기여를 했으면서도 1980년대 말 이후 통일운동의 방향을 親北으로 가져가는 심각한 오류를 범했던 金永煥씨는 1999년에 이르러 전향 의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국정원측의 공소보류 결정을 얻어냈다. 검찰 수사까지 완료된 지난 10월 7일, 아직 2년간의 보류기간이 남긴 했지만 그는 비로소 몸도 마음도 감옥을 벗어났다.

月刊朝鮮의 원고마감이 끝난 10월15일에야 金永煥씨를 만났다. 그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필자는 귀국 이후 그를 세 번째로 만났지만 이때 처음으로 그에게서 평범한 사람의 표정을 보는 느낌이었다. 해묵은 비밀을 털어버린 지하당 黨首(당수)의 빛의 세계로의 전환은 그가 새롭게 제안한 「북한 민주화운동」이라는 화두 때문에 더욱 흥미가 가는 대목이다.

또한 그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거나 주사파가 학생운동권을 장악했던 시절에 대학을 다닌 이른바 386세대에게 그의 존재는 가볍지만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촉박한 가운데 이루어졌지만 이 인터뷰는 그에게서 이 무게를 확인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강철 金永煥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분단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된다. 분단은 국방과 안보상의 主敵(주적) 개념을 성립시키는 냉혹한 현실의 장벽 그 자체이다. 그러나 당신에게 북한은 금기도 敵도 아니었던 것 같다. 북한의 金日成(김일성)까지 만났던 당신의 행적은 분단을 너무 낭만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金日成, 金正日, 노동당에 대한 誤判


『분단을 낭만적으로 봤다기보다는 북한 사회나 金日成, 金正日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해서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이다. 물론 분단은 냉혹한 현실의 장벽이며 이것을 과거에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진정한 혁명가라면 이를 뚫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과거에는 분단을 뚫고 북한측과 손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분단을 뚫고 북한정권을 붕괴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 우리의 오류는 냉혹한 현실의 장벽인 분단을 뚫으려 했던 데 있는 것이 아니라 金日成, 金正日, 노동당 등에 대해 오판하여 이들과 손을 잡으려 했던 데 있다.

NL운동권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내세우는 것이 통일이었기 때문에 통일이나 통일운동에 관해 북측과 협의하고 교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문익환 목사 訪北(방북), 임수경 양 訪北, 범민족대회 개최, 범민련 결성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북한과 연계를 가진 것은 이런 것과는 좀 다른 것이다. 운동노선이나 전략, 정책 등을 종합적으로 협의하고 협조하기 위해 연계를 가진 것이다』

―당신의 북한觀은 마치 변증법적 과정을 거친 것 같다. 고등학교까지의 즉자적 反北(반북), 이것은 한국인의 공통된 경험일 것이고 지금도 이러한 견지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견해가 주류인 것 같다. 그 다음에 親北, 그리고 반성을 거친 反北의 과정이다. 북한에 대한 현실적 시각을 얻기 위해서 비싼 대가를 치른 셈이다. 이러한 과정은 필연이었다고 보는가.

『그러한 과정이 필연이었다고까지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쨌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북한문제나 남북관계, 사회제도 문제 등에 대해 깊이 있는 풍부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失(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정신적 고통과 희생이 있기는 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경험으로 본다』

―잠수정을 타고 북으로 갈 때의 심경이 어땠나. 북한에 도착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체험을 듣고 싶다.

『잠수정을 타고 북으로 갈 때 무엇보다 북한사회를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된다는 기대감 때문에 마음이 무척 설레었다. 그런데 북한에 첫 발을 내딛는 그 순간부터 낙후된 경제상과 그들의 관료주의적 태도 때문에 실망의 연속이었다. 일반 인민들은 무척 순박했으나 관료들은 탐욕스럽고 고압적인 사람이 매우 많았으며 일반 인민의 순박함이 이들의 고압적 태도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에 체류하면서 이틀에 걸쳐 金日成을 만나고 金日成 대학, 주체탑, 혁명열사릉, 만경대혁명학원, 남포갑문 등을 둘러보았으며 주체사상 전문가 등과의 토론도 있었다. 그중에서 특기할 만한 체험은 별로 없다』


『金日成과는 수평관계도 상하관계도 아니었다』


―金日成을 만났을 때 당신과 金日成은 상하관계였나 수평관계였나. 두 사람이 각자 생각이 달랐을 듯하다. 지난번 인터뷰에서 동지로 철썩같이 믿었다고 했는데 남한에서의 간첩활동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동지가 아니라 하수인으로 전락한 것인가.

『金日成을 만났을 때 金日成은 「선생」이라고 호칭하며 정중하게 접대했지만 수평관계로 보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상하관계로 보기도 힘들고 그냥 손님으로 접대받았을 뿐이다. 金日成과는 생각이 다르다기보다는, 뭐랄까… 金日成의 사고가 30~40년 전의 상태에서 박제화되어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체사상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의 이야기 내용 중에는 주체사상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주체사상에 대해 잘 모르고 입으로는 주체사상을 떠들지만 실제로는 관심조차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나와 북의 관계는 기본적으로는 대등한 관계였다. 내가 북에 갔을 때 「남한혁명의 전략적 참모부는 통혁당이나 민혁당과 같은 남한 지하당에 있다는 것이 노동당의 일관된 기본방침이니 남한혁명운동의 노선, 정책, 전략, 전술에 대한 기본결정권을 우리에게 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

북측은 그 이후 자기들의 활동 관성에 따라 이러저러한 노선상의 문제나 전략 상의 문제와 관련해서 자기들의 의견을 지시형식으로 보내왔으나 우리들이 취하고 있는 노선, 전략과 합치되는 부분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주동적으로 새로운 노선, 정책을 제안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93년에 운동발전을 위해 범민련을 해체해야 한다고 북측에 제의했고 북측으로부터 「뜻은 공감하지만 우리(사회문화부) 힘으로는 어렵다」는 취지의 완곡한 거절의사를 전달받고 난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더욱 강력하고 집요하게 범민련의 해체를 요구하였다. 이는 그 관계가 대등한 관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민혁당과 관련해서 가장 큰 의문은 왜 우리 사회의 민주 발전의 정도가 눈에 띄게 드러나기 시작했던 金泳三(김영삼) 집권기에 활동했느냐이다. 민혁당이라는 지하당 활동을 통해서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는 어떤 것이었나.

『민혁당에 대한 구상과 기본방향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1990년이었고 1991년 2월에 「민혁당 창당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고 1년 간의 준비를 거쳐 1992년 3월에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민혁당의 준비가 시작된 것은 金泳三 정부가 들어서기 2년 반 전이며 본격적으로 출범한 것은 金泳三 정부가 들어서기 1년 전이다. 민혁당이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는 당면해서는 「더 높은 수준으로 민주화되고 민족자주권이 보장되는 사회」였고 궁극적으로는 강령의 표현을 빌면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넘쳐나는 완전히 자주화된 사회」였다. 우리가 지향했던 것이 어떤 사회인지 짧은 시간에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에도 우리의 목표는 북한이나 소련식의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민혁당은 1989년까지 뿌리가 거슬러 올라가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아직도 조직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 역사에서 이례적인 지하당인 셈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북의 지원 때문인가. 아니면 조직관리에 특별한 노하우가 있었던 것인가.

『민혁당이 북으로부터 지원받은 것은 자금 이외에 특별한 것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자금도 조직의 생명력과 깊은 관련이 없다. 조직 관리의 노하우들이 있지만 이를 배워 지하조직활동에 써먹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공개할 수는 없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우리의 조직 관리방법이나 보안 방법 등을 공개하겠다. 기업 같은 데서도 활용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원들을 최대한 존중하고 아끼며 스스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도록 해주는 것과 따뜻함과 엄격함을 항상 병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당신과 조직원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나. 전향이 늦어진 것도 조직원과의 문제를 풀지 못한 탓인가.

『나와 민혁당 조직원 간의 관계는 절대적인 상호신뢰와 상호존경의 관계였다. 민혁당의 정리나 전향절차가 늦어진 것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조직원들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직접 만났던 조직원 중에는 하영옥을 제외하고는 모두 함께 사상전환했으나 하영옥이 관할하고 있는 조직원이 많아서 그 사람들이 모두 사상적으로 적대진영에 서게 되는 안타까운 결과가 나왔다』


북한 추종주의를 배격했다


―민혁당원들은 당신이 북과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대체로 민혁당원들은 당신이 북한 추종주의에 대해서 1990년대 초부터 꾸준히 반대해 왔다고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에게 보안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속인 것인가.

『나는 1980년대부터 「親北」과 「북한 추종주의」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북한 추종주의」에 빠지면 자주성과 창조성을 강조하는 주체사상의 근본원칙을 저버리게 되니 절대 「북한 추종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문제를 자기 머리로 생각해서 고민하고 판단하고 결심해야지 「북한 추종주의」에 빠져서 깊은 고민도 없이 그저 따라하기만 하면 「머저리」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북한의 사상이나 제도, 사회상 등에 대해 미화해서 선전하면서도 북한식 말투를 따라하거나 북한의 이론이나 전략전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대해서 일관되게 비판적 자세를 취했다.

내가 글을 써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 1985년부터였는데 이때부터 지금까지 15년 동안 수많은 글을 써오면서 북한식 문투를 따라하거나 북한의 이론이나 노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북한에서 범민련의 해체를 반대했지만 몇 년 동안 3~4차례에 걸쳐 북측에 범민련의 해체를 강력하게 요구했다는 것만 보아도 나와 북한측이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다. 조직원들에게 보안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속인 것이 아니다』


河永沃과의 상식적 차이


―최근 함께 구속되었던 河永沃씨와는 서울대 법대 동기이면서 공히 민혁당 중앙위원이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 같다. 현재 河永沃씨는 아직 非(비)전향파인 셈인데 하씨와 당신간에 지하당 내의 권력 암투가 있지 않았나 하는 의혹이 생긴다. 河씨를 설득하는 일은 과연 불가능한 것이었나.

『河永沃은 기본 인성은 순수한 사람이다. 절대 권력에 욕심을 내서 교활한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나도 지위나 권한으로 볼 때 얼마든지 河永沃을 배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심지어 河永沃이 스스로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하부조직을 나보고 맡아달라고 한 적이 세 차례(1990년 조직개편 때, 1992년 고시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1993년 河永沃에 대한 미행이 심할 때) 있었으나 河永沃을 믿었기 때문에 계속 河永沃에게 맡겼다. 권력암투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河永沃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긴 것은 순전히 사상적인 차이 때문이다.

초기에는 河永沃을 설득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북한의 주체사상 연구 속도가 너무 느리니 남한 주도로 주체사상을 연구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명분 아래 1990년께부터 북한과는 좀 다른 독자적인 이론들을 계속 제기했었고 이것이 초기에는 별다른 반발이 없었다. 그런데 1993년께에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 비판」에 관해서 내가 글을 정리해서 함께 토론을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河永沃이 내가 제기한 이론에 대해 명확한 반대의사를 밝혔다.

河永沃은 그때부터 내가 북한 체제를 비판하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그러한 이론들을 제기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한 것 같다. 설득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河永沃은 나의 관찰력이나 분석력을 비교적 높이 평가하는 편이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는 북한사회에 대한 나의 분석이 맞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머리도 좋고 생각도 깊은 편이다.

1996년 이한영의 폭로기사도 河永沃이 나보다 먼저 보았고 河永沃이 그 기사에 관해 말하는 눈빛이나 표정이나 말투를 세심하게 관찰해보니 그 기사가 사실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河永沃은 金正日이나 金日成이 설사 그렇게 비열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한 번 맺은 의리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 사나이다운 자세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나는 치밀한 분석이나 비판적 검토, 창조적 연구 등을 매우 중시하는 전형적인 지식인이고 河永沃은 북한에 대한 태도에서 의리보다 분석을 앞세우는 지식인적 태도에 대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뿌리깊은 반감을 갖고 있다. 이렇게 볼 때 河永沃과 나의 이런 비극적 결말은 처음부터 예견되어 있었던 것인가? 그렇지만 나는 河永沃을 설득하는 데 투자한 시간들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좀더 적극적으로, 좀더 세심하게 설득했더라면…」 하는 후회는 있어도 그 자체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비록 그를 설득하기 위해 우리 운동에 있어 가장 소중한 몇 년을 허비해버렸지만, 설득에도 실패하고 그 결과 그는 지금 온갖 상스러운 욕을 해가며 나를 욕하고 있지만, 안타까움과 씁쓸함은 있어도 한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몇 년을 소비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후회도 없다』


脫北者 증언이 북한觀 변화에 결정적 역할


―1997년까지 북한과의 線(선)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북한觀이 바뀌고 나서도 線을 유지해야 했던 까닭이 무엇인가.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니었나.

『線을 끊어버릴 경우 다른 조직원에게 공작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고 조직원들이 모두 사상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것이 線을 계속 유지한 주된 이유였다. 1997년에 들어와서는 내가 설득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사상적으로 전환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당분간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선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당신은 「간첩」이었나.

『형법 98조나 국가보안법 4조 2항의 간첩죄가 나에게 적용되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나는 간첩활동을 하려고 한 적도 없었고 내 기준에서 볼 때 실제로 간첩활동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기존 법원 판례가 간첩활동의 범위를 다른 나라에 비해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國情院(국정원)이나 검찰의 입장에서 볼 때 북측과 정치정세, 운동전략 등에 관해 토론하고 연락하는 과정에서 간첩죄를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과거에는 심지어 주민등록증을 보여준 것조차 간첩죄에 해당된다고 보았으니까.

그러나 미국 공산당 지도자가 소련 공산당 간부와 만나 정치정세, 운동전략, 조직방법 등에 관해 논의하고 연락했다고 해서 간첩죄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공개적이었건 非공개적이었건, 그 만나는 대상이 KGB 소속이었건 아니었건을 불문하고 그 내용에 국가기밀이 포함되지 않았다면 간첩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북측에서도 나를 지하당 책임자로 대했고 나에게 간첩활동을 요구한 적은 없었다. 나에게 간첩죄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민혁당을 조직한 것 등 국가보안법의 여러 조항의 범죄사실에 해당되고 또 나의 경우 설사 간첩죄를 적용한다고 해도 간첩죄보다 민혁당을 조직하고 이를 주도한 것이 더 중요한 범죄사실이고 더 형벌이 중하기 때문에 형벌을 정하는 데 있어서는 간첩죄를 적용하고 적용하지 않고가 큰 상관은 없다. 그리고 간첩죄를 적용하고 적용하지 않고를 떠나 북과 연계를 갖고 지하당 활동을 한 사실에 대해 분명히 반성을 하고 있으며 반성문의 내용은 모두 내 진심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크게 변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과 연계를 갖고 있으면 무조건 「간첩」이라고 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간첩활동을 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있지 않으면 「간첩」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올바르다고 본다. 따라서 나의 경우에도 「간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북한을 직접 체험해 본 것이 향후 북한관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金日成을 만난 후 전향을 결심한 것 같다는 세간의 견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북한의 직접 체험이 향후 북한觀에 당연히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북한觀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脫北者(탈북자)들의 증언이다. 金日成과의 만남이 나의 사상적 변화에 일정한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나는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된 직후인 1990년부터 기존 사회주의 체제나 기존 사회주의 이론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독자적으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한에서도 기존의 사회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사상이론적 준비가 되어 있는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북에 가보니 그것이 전혀 아니었다. 기존의 사회 체제를 극복할 준비를 하기는커녕 기존의 사회 체제를 고수하는 데 여념이 없었으며 金日成은 30~40년 전에 하던 스타일의 이야기들만 반복했다. 이러한 것들에 실망을 느낀 나는 남한 주도로 주체사상을 연구하여 북한에도 새로운 길을 제시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확한 사상이론이라면 북측에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金日成과 金正日의 야비한 본질을 깨닫지 못한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 이후의 북과의 연락과 협의 과정, 脫北者들의 이어지는 증언 등에서 북한 정권의 본질을 깨닫게 된 것이다』


공개적 논의를 통해 모든 주사파 사상전환시킬 수 없는 현실 아쉬워


―당신의 전향이 갑작스럽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나의 전향은 연착륙된 측면도 있지만 완전히 성공한 연착륙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운동권 전체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방향을 바꾸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많다. 주사파는 주사파의 논리로써만 설득이 가능하다. 만약 국가보안법이 없었더라면 나는 주사파 리더의 위치를 활용하여 활발한 공개적 논의를 통해 거의 대부분의 주사파를 사상전환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가보안법 때문에 말을 마음대로 못하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나지도 못하였으며 그러다 보니 내가 직간접적으로 만나서 비교적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던 사람들만 함께 사상전환하게 되었다』

―이번에 당신이 전향을 위해 國情院을 찾아간 것은 얼마만큼 자발성이 있었나. 6월호 月刊朝鮮 인터뷰 이후 입국에 이르기까지 저간의 사정이 없었다면 전향 절차를 밟을 생각이 없었던 것인가. 굳이 입국할 생각이 없었는데 들어온 것인가. 아니면 치밀한 계산이 있었던 것인가.

『月刊朝鮮 6월호 인터뷰 이후의 일련의 과정이 있기 이전에는 언제 입국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뚜렷한 계획이 없었다. 인터뷰 이후 한 달 정도 지난 후 나의 귀국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이를 말려야 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을 해야 했는데 이때 일주일 정도 고민한 다음 귀국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國情院에서 「나는 너에게 장미의 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라는 책자를 압수해 갔기 때문에 내가 어떤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런 것을 아는 조건에서 결단을 내린 것이다.

나의 진심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사상전향한 다른 동지들의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선처가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때 마침 河永沃이 말지에다 글을 써서 나에게 온갖 상스러운 욕을 하며 과거의 모든 인연을 일체 무시하기로 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 글이 전향하지 않은 과거 조직원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글이라고 생각하고 나 역시 전향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마음의 부담을 완전히 버렸다』

―북한으로부터의 테러를 경계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지금도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가. 햇볕정책이 시행되고 있고 북에서도 어느 정도 호응하고 있는 시점에서 북이 또 다시 테러를 범하겠는가. 북과 연계를 오랫동안 끌어온 것에는 테러 위협에 대비하는 측면도 있었는가. 이 점에 관해 曺裕植(조유식)씨와의 공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북한으로부터의 테러를 경계하기 시작한 것은 1995년께부터이지만 이때는 북한을 무마하는 데 일정 정도 성공했고 본격적으로 경계하기 시작한 것은 북과의 모든 선을 완전히 정리한 1997년 상반기였으며 북한 수령론을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한 1998년 5월경에는 이러한 위험이 훨씬 높아졌다고 보았다. 남북관계가 호전되는 것과 테러문제는 다른 문제라고 본다. 물론 대규모 테러와 같은 것은 힘들겠지만 개인 암살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우리나라 정부나 민간단체들이 너무 미온적으로 대응해왔다고 본다. 이한영 암살의 경우도 1997년 11월경에 북한측의 소행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는데도 이에 대한 대응이 약했다. 지금 국제사회에서는 테러에 대해 점점 더 엄격하게 대응하는 추세로 가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국제사회의 대응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북과 연계를 오랫동안 끌어온 주된 이유는 북이 다른 조직원에 대해 공작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테러 위협에 대비하는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曺裕植씨와의 공조는 모든 면에서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나나 曺裕植씨나 과묵한 성격이기 때문에 만나면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曺裕植씨는 항상 내가 쓰는 글들의 행간에 숨은 뜻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내가 북에 대해 마음 속으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일관되게 지지했고 북과의 관계도 능숙하고 적절하게 처리했다』


金日成 金正日 차별적으로 인식 안 해


―당신은 현재 진보세력의 유일한 전선은 反(반)金正日 전선이라고 했다. 이런 인식은 언제부터 가능해졌나.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91~92년께부터이지만 우리가 金正日 정권을 반대하는 투쟁을 전면적으로 벌여야 된다고 판단한 것은 1996년 하반기 혹은 1997년 초 정도일 것이다. 북한 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이 TV화면을 통해 생생하게 공개되고 이한영 증언이나 이순옥 증언 등이 언론에 공개된 것 등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일한 전선이 反金正日 전선이라고 생각한 것은 중국에 있었던 1998년 상반기부터였다. 여러 가지 문제들을 분석하고 검토한 끝에 스스로 고민을 통해 내린 결론이다』

―金日成과 金正日을 차별적으로 인식하고 있나. 金日成이야말로 개인우상화 1세대로서 현재 북한의 상황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金正日에 대해서만 비판한다는 인상을 준다.

『1970년대 이후의 역사에 있어서 金日成과 金正日을 분리해서 인식할 수 없다고 본다. 金日成은 金正日이 집권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金正日의 방탕한 생활이나 권력남용을 묵인하고 본인 스스로도 도덕적으로 타락되어 갔다. 그 뿐 아니라 북한의 경제파탄이나 심각한 인권유린에서 金正日과 함께 공동연대책임이 있다. 그런데 金日成은 1960년대 이전의 역사에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항일 빨치산이라든가 북한의 건국이라든가 6·25라든가 북한의 사회주의화라든가 북한 내부의 1950~60년대 권력투쟁 등의 주인공이다.

이러한 역사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는 철저한 사실관계의 고증과 객관적이고 치밀한 분석, 종합적인 역사의식 등이 필요하며 「金日成이 나쁜 놈이니까 金日成이 했던 일은 모두 나쁜 짓」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본다. 나는 金日成에 대해 아주 비열하고 속물적인 인간이라고 보지만 이것은 과거 역사를 판단하는 데 있어 참고자료의 하나로만 될 뿐이지 중요한 판단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처럼 金日成의 인격에 대해 아주 나쁘게 생각하고 북한식 사회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사람일수록 역사적인 문제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균형감각과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지난 6월호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남한과 북한이 모두 정통성이 있다고 했는데.

『남북한이 모두 정통성이 있다고 한 것이 아니라 남북한의 건국이 모두 정통성이 있다고 했다. 국가의 정통성은 건국의 정통성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의 정통성은 金日成·金正日 정권 및 金正日 정권에 대한 평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북한 주민의 국가에 대한 태도, 북한 주민의 대한민국에 대한 태도, 통일에 대한 우리의 종합적인 전략전술 등과 관련이 있는 매우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말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오히려 金正日 정권이 붕괴된 이후의 북한정세가 어떻게 발전하느냐에 따라 신축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金正日 정권 붕괴 후에 북한에 비교적 민주적인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북한에 국가의 정통성이 없다며 총칼을 들고 쳐들어가는 것도 올바르지 않고 金正日 정권 붕괴 후에 심각한 혼란 상황이 벌어져서 우리가 전면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유혈사태가 계속되는 조건인데도 북한에 국가의 정통성이 있다며 개입하지 않고 미적미적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다. 그리고 당장 지금의 조건에서도 金正日 정권 타도를 주장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북한이라는 국가의 정통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아무 의미도 없다.

다만 「건국」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이제 조금 객관적인 자세로 보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된다. 해방 직후의 공산당 혹은 노동당은 그 적극적 지지자만 1백만명이 넘고 소극적 지지자를 포함하면 엄청난 다수였는데 이러한 세력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나라를 건국의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이며 또한 노동당의 정책을 반대하는 사람도 역시 몇 백만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반공세력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나라를 건국의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물론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양쪽 모두 반쪽짜리 정통성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우리는 많은 발전을 해서 모든 부분에서 국가로서의 완전한 기능을 하고 있고 따라서 건국의 정통성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옹호해야 할 입장에 서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건국 정통성에 관한 적극적인 주장이 최근 많아졌는데 나는 이러한 시도들에 대해서 적극 지지하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북한 건국의 정통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병행되지 않으면 역사에 있어서의 균형잡힌 시각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엘리트 도외시하는 사회는 희망없는 사회


―당신의 金正日 정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극우적」인 것인가.

『내 주장을 극우라고 보기는 어렵다. 좌파라고 해서 어떻게 金正日 정권을 옹호할 수 있나? 인민들을 굶겨죽이고 극단적인 인권탄압을 자행하고 있는 金正日 정권은 우파나 좌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분노의 대상, 투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제 親남한은 우, 親북한은 좌라는 구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지금 국제적으로는 사회복지를 중시하면 좌, 新자유주의 정책을 펴면 우로 보는 경향이 강한데 우리나라도 점차 이러한 기준으로 좌우를 나누게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앞으로 20~30년 후에는 좌냐 우냐라는 구분 자체가 없어지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사회 발전의 전반적인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는 시점에서 좌우의 구분은 점차 의미를 상실해갈 것이다』

―당신에 대해 엘리트주의자, 소영웅주의자, 그리고 극좌와 극우를 오간 사상의 소아병주의자로 보는 비판론자가 상당수 있다. 스스로 혁명가라고 칭하는 당신의 존재방식과 관련해서 해명을 한다면.

『나 스스로 나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몇 가지 간단한 해명만 해보겠다. 평소에 말이 별로 없고 남 앞에 나서기도 좋아하지 않는 나를 소영웅주의자로 보는 견해는 아마 내가 평소에 북한과 다른 어투를 사용하고 내 나름대로의 새로운 이론들을 세우고 하는 것에 대해 반발심을 느끼면서 생겨난 것 같다.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주체적인 자세이며 운동발전을 위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며 다른 의도는 없다. 견해가 다른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고 본다. 나는 「직업적으로 혁명운동에 종사하는 사람」을 혁명가로 부르며 특별히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직업적으로 북한 민주화운동에 종사하는 사람은 「북한 혁명가」라고 부를 수 있다. 혁명가이면서 혁명가가 아닌 척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본다. 과거 非합법 활동 시기에는 누구도 스스로 혁명가라는 것을 밝힐 수 없었다. 그래서 아마 이에 대해 반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은데 혁명가라는 것이 그냥 직업의 하나라고 생각해주기 바란다.

나를 소아병주의로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나에게 무수히 많은 결함이 있지만 소아병주의라는 것은 나의 결함을 거꾸로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소아병주의가 결함이 아니라 지나치게 신중한 것이 결함이다.

지난 10년 동안의 과정을 놓고 보면 한 발자국 움직이는 데도 지나치게 많은 것을 고려해서 결국 적절한 타이밍을 놓쳐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민혁당 조직 전체를 사상전환시켜 내는데 실패한 것도 바로 이러한 결함이 주 원인 중의 하나였다. 내가 반성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 나와 함께 활동해본 사람이라면 내가 소아병주의와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 중의 하나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엘리트주의라는 말은 무슨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지만 나는 평소에 「엘리트를 소중히 여기는 분위기」 와 「엘리트로서의 자부심」 등이 매우 중요하며 이러한 것들이 잘 살아날 수 있는 사회가 역동하는 사회, 발전잠재력이 풍부한 사회라고 보았으며 지금도 그러한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엘리트를 「왕따」시키는 사회, 엘리트를 「왕따」시키는 조직은 가장 희망없는 사회, 희망없는 조직이라고 본다. 엘리트주의가 「엘리트로서의 자부심」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라면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받아들이겠지만 일정 수준의 「엘리트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이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역시 변함이 없다』


북한 민주화운동은 통일운동 아니다


―당신이 주장하는 북한 민주화운동은 통일운동인가. 민족주의를 자명하게 수용하고 있을 때에는 북한에 대한 관심은 당연히 민족통일을 향한 것이었으리라 본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당신은 우리 사회에서 민족주의는 극복 대상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 민주화운동이 굳이 통일운동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민족대단결로서의 통일에 대한 전망도 수정되었는가.

『북한 민주화운동은 글자 그대로 민주화운동이다. 물론 북한이 민주화되면 통일이 앞당겨지겠지만 북한 민주화운동을 통일운동 차원에서 하는 것은 아니다. 현 상황에서 남북통일은 민족주의와 상관없이 필연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북한 민주화는 통일에 도움이 되고 안 되고를 따지기 이전의 근본적 요구이자 지상과제이다. 북한 주민은 지금 끊임없이 인간이기를 포기당하고 있다. 굶어죽고 맞아죽는 그들을 구출해내는 것은 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이다.

현 상황에서 「민족대단결」을 내세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안 그래도 중국에서 민족주의가 점차 고조되고 「민족대단결」까지는 안 갔어도 거기에 근접하는 구호들이 난무하고 있는데 우리가 옆에서 「민족대단결」을 강조해서 중국, 일본 등 이웃 강대국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것은 우리에게 득이 안 된다.

중국 광주역 광장에 집채만큼 큰 글씨로 「統一祖國, 振興中華」라고 써 놓았는데 밤에 지나가다가 빨간 불빛으로 번쩍이고 있는 그 글을 볼 때 섬뜩한 느낌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민족주의가 발흥하게 되면 가장 손해를 보는 것이 우리나라이다. 민족주의를 억제하는 데 가장 앞장서야 할 우리나라에서 민족주의가 무제한적으로 방치되어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민족대단결」을 내세우고 안 내세우고에 상관없이 우리나라의 통일은 필연적이다. 주변 강대국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이 통일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런 조건에서 우리가 민족주의를 고조시킬 우려가 있는 구호를 내거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를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최근 호남 지역 학생들이 한총련에서 탈퇴하고 북한 민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표방하고 있다. 당신의 영향력이 미쳤던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아직 학생운동 최대 정파조직을 이루고 있는 한총련 조직도 조직적 차원에서 바뀌지 않으면 여전히 親金正日 노선을 이어가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한총련의 변화를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전북 지역 대학들과 전남 지역의 일부 대학이 한총련에서 탈퇴하거나 북한 민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것은 나와 관련이 있다. 학생운동의 변화를 위해서는 조직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한총련의 변화를 위해 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어쨌든 내가 과거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반성하는 의미에서라도 학생들의 사상적 변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나?』


북한에 대한 상대주의적 시각이야말로 선입견


―대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한국 지식인들은 현재 북한에 대해서 대체로 金正日정권까지 포용하는 상대주의적 시각을 갖고 있다. 햇볕정책이 진보진영에 별다른 반감을 주지 않는 까닭도 이것이리라 본다. 이와 달리 당신은 분명한 반북(反金正日)의 입장이다. 북한은 절대악도 절대선도 아니라는 상대주의 또는 절충주의적 시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어떤 편향에 빠지지 말고 균형된 시각을 유지하자는 것에 대해서도 적극 찬성하고 북한에 대한 어떤 선입관을 갖지 말고 객관적으로 보자는 태도에 대해서도 적극 찬성한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상대주의 또는 절충주의적 시각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선입관을 갖고 북한을 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투명하게 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거기도 사람 사는 사회인데 설마 그럴려고…」 라고 선입관을 갖고 대하지 말고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 하나하나 규명해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의 관점에서 북한 사회를 재단해서는 안된다」는 상대주의적 관점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과거 철저한 사회주의의 입장, 철저한 주체사상의 입장에서 북한사회를 바라본 사람이다. 그런데 인민의 조그마한 자주성도 철저히 유린하고 억압하는 북한 사회는 인간의 자주성을 절대적으로 중시하는 주체사상의 입장에서 볼수록 더더욱 형편없는 사회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과거에 親北적인 활동을 한 것과 지금 金正日 정권을 반대하는 것이 모두 편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反北적인 태도는 무조건 냉전시대의 유물이라고 보는데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북한과 북한 주민에 대해 거리를 느끼는 사람들이다. 북한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니까 「외계인이 우리와 다르더라도 이해해야 해」 라고 하는 식으로 무조건 이해하자고 하는 것이다. 북한에 친근감을 느낀다면, 더 나아가 북한을 우리의 일부로 느낀다면 북한에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기준을 적용하기는 힘들 것이다.

지금의 金正日 정권은 그 非민주성이나 인권유린이 유신체제나 5공체제와는 도저히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극심하며 무엇보다 경제정책의 실패로 사람들을 굶겨 죽이고 있다. 유신체제나 5공체제에서 정권을 타도하자고 외친 사람들이 왜 그보다 더 심한 독재를 하고 있는 金正日 정권에 대해서는 눈감고 봐주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남한 진보운동권에서 당신의 북한 민주화 주장에 대해 냉담한 까닭이 무엇이라고 생각되나.

『親北인사의 경우, 현재의 북한 체제를 옹호하기 때문에 북한 민주화 주장에 대해 냉담한 것이 당연하다. 親北성향이 아닌 사람들의 경우에도 북한 민주화를 전면에 내세우면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통일은 멀어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金正日 정권과의 협상을 통해서 점진적 통일이 가능하고 金正日 체제 하에서 점진적 개혁개방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런데 지난 10여년 동안 북한에서 나온 각종 저작물이나 담화문, 대화록 등을 종합해서 평가해볼 때 북한 金正日 정권이 개혁개방을 절대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다. 개방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교류라든가 점진적 통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북한의 개혁개방을 위해서나 점진적 평화통일을 위해서나 현재의 金正日 체제가 붕괴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전제되어야만 다른 일이 가능해진다』


챔벌린과 처칠 중 누가 더 현실적인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전쟁불사론과 관련하여 묻자면 핵이나 생화학 무기의 등장까지 가능한 현실에서 전면전의 위협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나.

『나의 주장을 「전쟁불사론」이라고 표현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 나는 전쟁을 터부시해서 전술적 고려대상에서 무조건 제쳐놓는 경직성을 비판한 것이지 그렇게 과격한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북측이 대량의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핵무기 보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조건에서 저쪽에서 먼저 선제공격을 해오면 남측 군인과 민간인의 피해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따라서 전술을 연구하는 사람은 우리가 선제공격을 해서 화학무기 시설 등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키는 방법 등을 항상 연구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선제공격의 이점만을 강조하면 점점 상호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이 또한 신중해야 한다.

어쨌든 전술에 있어서는 「유연성」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은 절대 안 된다」는 터부를 만들게 되면 전술에 있어서 경직되고 피동적인 자세에 빠지게 되어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제 2차세계대전 직전 히틀러와 맺은 「不戰條約(부전조약)」을 내세우며 외교적 치적을 자랑하던 영국의 챔벌린 수상과 전쟁불사론을 주장하던 처칠 중 누구의 주장이 인명피해를 줄이고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인가를 한 번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강철 서신」은 학생운동권의 도덕성 쇄신에 부응


―1985년 이후 「강철 서신」이 급속히 학생운동권의 담론 공간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강철 서신의 신화가 형성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당시 학생들은 어떤 한계에 부딪쳐 있었던 것인가. 「강철 서신」은 이들의 어떤 갈증에 부응했던 것인가.

『강철 서신이 나오던 시기 학생운동은 심각한 분파싸움에 휘말려 있었고 그 과정에서 운동권의 도덕성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기 시작하였는데 강철 서신은 이러한 요구에 잘 부합하였고 둘째 그 당시에 나왔던 각종 팜플렛에는 非대중적이고 생경한 용어들로 가득하였고 이에 대해 노동운동 등 대중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거부감을 갖고 있었는데 강철 서신에는 非대중적 용어나 운동권에서만 쓰는 약어 같은 것을 일체 사용하지 않고 대중에게 좀더 다가갈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이런 측면이 호응을 많이 받았다.

셋째 당시 북한이나 주체사상과 관련된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면서도 일단 논의를 접어두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이러한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려고 했던 점이 지지를 받았으며 넷째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反美(반미)성향이 많이 고조되어 있던 조건에서 민족문제에 관해 이야기는 많이 하면서도 이 문제에 관한 정확한 이론정립이 없었고 反美운동도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러한 갈증에 적극 부응했다』

―당시 가장 대중적으로 호응을 받은 反美운동의 의의에 대해서 묻고 싶다. 북한의 反美와 남한의 反美운동은 차별성이 있으리라고 본다. 1980년대 당시 反美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이유를 묻고 싶다. 그리고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미국 비판 또는 극복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정신사적 측면의 의의가 있을 것이다. 아울러 현재의 변화된 미국觀도 듣고 싶다.

『북한의 反美는 한반도에서 미국 혹은 미군의 역할을 무력화시켜 남진통일의 유리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 그 중요한 목적이다. 남한의 反美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주적인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反美운동에서 미군철수를 주장했던 것에 대해서는 적절한 주장이었다고 보지 않지만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주적이어야 한다」는 우리 주장의 기본 내용은 정당한 측면이 있다.

1980년대 당시 反美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이유는 첫째 광주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데 미국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고 둘째 미국에 대한 비판이 오랫동안 억눌려 있었는데 이것이 한 번 터지기 시작하니 크게 확대된 학생운동의 공간을 통해 폭발적으로 분출되어 나왔고 셋째 한국인들의 민족주의 성향이 전반적으로 대단히 강하고 그 중에서도 학생시절에 민족적 정서에 특히 예민하기 때문에 한 번 불을 붙이니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국방과 경제에서 미국에 대한 의존이 매우 컸다. 우리가 미국의 도움을 받은 부분도 많지만 미국에 의존을 하다 보니 자주적인 의식이 약화된 측면이 많다. 미국과 새로운 동반자적 관계를 잘 구축하기 위해서라도 과거의 의존의식이나 열등감과 같은 것을 깨는 과정이 필요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이제 우리는 여러 측면에서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정도로 발전했다. 이제 그들과 적극 교류하고 협력해서 발전된 국제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중요한 일익을 담당해야 하며 이중에서 특히 오랫동안 긴밀한 관계를 가져온 미국과의 교류, 협력을 강화해 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직접선거제 쟁취 구호가 학생대중의 호응을 얻을 무렵 학생운동권의 논쟁구도를 간단히 설명해 달라. 이 구도에서 온건한 직선제 구호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직선제 구호가 학생대중의 호응을 얻을 무렵 학생운동권의 주된 논쟁구도는 NL-CA 구도였다. CA(Constitution Association)그룹은 「제헌의회」 그룹으로 기존 헌법이나 기존 헌법에 의해 구성된 국가기관을 인정할 수 없으니 기존 헌법을 모두 무시하고 「제헌의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제정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을 주장하는 것인지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1987년 야당분열 없었으면 학생운동 방향 달라졌을 것


시위나 집회를 해보면 대중의 냉담한 반응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NL에서 제기한 「직선제 쟁취」 구호가 당시의 특별한 정치적 상황에서 광범한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이 눈에 보이면서 급속하게 전체 학생운동권의 주된 투쟁노선으로 되었으며 학생운동의 이러한 입장이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주요 동력의 하나로 되었다』

―1986년 투옥되어 1987년 6·29 선언을 감옥에서 맞았다. 감옥에서도 학생운동권에 영향력을 발휘할 만한 통로를 갖고 있었나. 6·29 선언에 대한 판단은 어떤 것이었나.

『감옥 안에서 학생운동권에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았다. 영향력이라고 해봐야 재판정에서의 진술, 항소이유서 정도였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1986년에 내가 제기했던 전술, 노선, 구호 등이 1987년에 광범위하게 호응을 얻으면서 간접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내가 감옥 안에서 어떤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6·29 선언은 민주화운동의 큰 성과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기념비적이고 분수령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까지는 예상을 못했다』

―얼마 전 前(전) 일본 공산당 기관지 「赤旗」 출신의 한 기자가 당신의 전향을 지지하면서 학생 운동권이 親北으로 기울어진 이유를 「87년 야당의 분열이 가져다 준 학생운동권의 절망감」으로 해석하는 것을 보았다.(「正論」 1999년 10월) 감옥에서 야당후보 분열을 보는 당시의 심경을 설명해 달라.

『1987년 당시 야당이 분열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에 대해 역사적 가정과 추측을 해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명확한 것은 학생운동이 좀 다른 양태로 전개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학생 운동권이 親北으로 기울어진 주된 이유를 1987년 야당의 분열이 가져다 준 절망감으로 보기는 힘들다. 이미 1986년에 주체사상을 내세운 강철 서신이 유행하면서부터 학생운동권의 親北성향은 뚜렷해졌었다. 1987년 大選(대선)에서 야당후보 분열을 보면서 누구나 그랬겠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후보단일화가 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졌으며 그를 위해 내가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으면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 허망한 결과만을 가져왔다』

―당신이 아직도 버릴 수 없다고 말하는 주체사상은 무엇인가. 민족주의나 反美의식이 탈각되고 남은 주체사상은 인식론이나 존재론의 철학적 영역일 뿐일 듯 하다. 현실에 대한 규정력이 있을지….

『북한에서 말하는 주체사상은 주체철학에다가 수령론과 마르크스 레닌주의이론과 민족주의를 어거지로 결합시켜 놓은 것이다. 북한에서 말하는 소위 「주체사상」에서 수령론 빼고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 빼고 민족주의 빼면 철학적 영역만 남는다는 말은 맞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을 맹목적으로 신봉하고 더 나아가 이를 독재에 활용하려 하는 金日成이나 金正日의 방해로 주체사상에 기초한 사회이론들은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다.

북한에서 현재 적용되고 있는 주요 노선이나 정책들은 모두 마르크스 레닌주의에서부터 온 것이다. 정치에서의 「프롤레타리아독재」나 경제에서의 「국유제」와 「계획경제」 등 기본 뼈대가 모두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나온 것이고 주체사상에서 나온 것은 없다. 주체사상이 현실에 대한 규정력을 갖기 위해서는 정치이론, 경제이론, 사회발전론 등 이론적인 연구들이 주체사상과의 연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아직까지는 이러한 작업들이 초보적인 단계에 있다』


『黃長燁 첫 대면을 국정원 조사실에서 하게 돼 죄송했다』


―黃長燁 선생과 당신의 견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너무 비슷하다. 우연한 일치인가. 아니면 당신이 적극적으로 황선생을 추종해 온 것인가.

『黃선생이 월남한 직후 발표된 글들을 읽고 나서 푸른사람들 회원들이 나보고 혹시 황선생과 비밀리에 오랫동안 연계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농담삼아 물어볼 정도로 생각이 비슷한 점이 많다. 내가 내부교육용으로 작성해 놓았던 글들을 읽은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더욱 강하게 가질 것이다. 그 글들은 대부분 1995~96년에 작성한 것들인데 그 시점에 내가 黃선생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우연한 일치라고 보기도 어렵다. 주체사상의 원리를 창조적으로 깊이 연구하고 주체사상의 입장에서 기존 사회주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再(재)검토하고 주체사상의 입장에서 북한체제를 비판적으로 再검토하다 보니 서로 아무런 연계가 없었지만 결국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이렇게 보면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이라고 볼 수 있다』

―여러 언론에서 이번 조사 과정에서 黃선생을 만난 것으로 보도했다. 주체사상 이론가로서, 역사에 참여해 온 방식에서 두 사람은 마치 운명의 相同性(상동성)을 띠고 있는 듯하다. 黃선생과의 만남에서 어떤 감회가 있었나.

『나 역시 이론가로서, 20세기 한국 최고의 사상이론가를 만난다는 것이 무척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그렇지만 만나는 장소가 國情院 조사실이고 시간도 짧았다는 것이 아쉬웠다. 이런 장소에서 뵙게 되어 죄송하다고 말했다. 黃선생은 나의 사상이론 연구성과나 연구능력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었다. 나도 역시 黃선생이 건강할 때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은 함께 연구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런데 지금 黃선생이 특수한 상황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얼마나 잘 이루어질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20대 초반에 운동에 투신하여 30대 중반이 되어서 이른바 전향을 했다. 당신의 전향은 좀 역설적인 데가 있다. 1980년대 한국 사회 민주화운동의 공을 평가하는 입장에서 보면 승자의 전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주사파의 대중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전대협 前 의장이 최근 정치권에 영입된다는 신문 보도도 있었다. 주사파의 논공행상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반성문은 무엇에 대한 것인가. 당신 세대들을 위한 변론도 필요할 듯 싶다.

『내가 대학을 들어가던 1982년에는 광주란 말만 나와도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全斗煥(전두환)이란 말만 나와도 주먹이 불끈 쥐어지던 시절이었다. 이때에는 어떤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이든 全斗煥 정권을 타도하자는 데 아무런 이견이 없었고 광범위한 사람들이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우리가 1학년 말께인 1982년 말, 1983년 초 몇 사람들이 비공식 집계한 것에 따르면 서울대 1학년 중에 이념서클에 가입해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2천명 정도 된다고 했다. 3분의 1이 넘는 사람이다. 운동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도 운동에 우호적인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어떻게 보면 이때의 운동은 우리 세대 전체의 운동이었다. 직접 앞에서 뛰지 않더라도 심정적으로 동조한다면 간접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사파는 학생운동의 이론적 정립 과정에서 나타났는데 그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주사파가 나오기 전의 학생운동은 날로 과격해지기만 했는데 주사파가 등장한 이후 「직선제 개헌」이나 「민주정부수립」 등의 대중적 구호를 내걸게 되었고 투쟁방법에서도 과격한 방법을 피하였다.

이러한 방식이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그러한 성과로 인해 주사파의 명성은 더 높아졌다. 비록 그 이후의 운동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성과 자체까지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주사파는 그 속성상 親北的 성향을 띨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측면은 명백히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더군다나 나는 북과 직접 연계까지 갖지 않았나. 나의 반성문은 당연하다고 본다. 수사기관에서의 반성문이라는 글의 형식 자체에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은데 형식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거기에는 내 진심이 담겨져 있고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당신은 스스로 혁명가 이외의 삶은 꿈꾸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혁명가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낯설다. 혁명가는 非타협 정신 때문에 끊임없이 고독한 내면을 거느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혁명가적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 역사에 전범이 있었는가. 아울러 지하당 당수로서 가졌던 고뇌에 대해 묻고 싶다.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혁명가는 김옥균이나 전봉준과 같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혁명가적 인간이란 사회변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인간이며 그를 위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혁신시킬 수 있어야 한다. 민혁당을 처음 만들 때에는 모든 문제를 함께 협의해서 처리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나의 고독한 결단을 요구하는 일이 많아졌다. 가장 고민스러웠던 것은 「어떻게 모든 조직원들이 함께 사상전환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과 「민혁당 조직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들은 누구와 협의할 수 있는 성격의 문제도 아니고 혼자 고민하고 혼자 결단을 내려야 하는 일들이었다. 특히 생사고락을 함께 하던 조직원들이 사상적 차이 때문에 갈라져 나갈 때 제일 고통스러웠다. 河永沃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한 번 만나보지도 못하고 서로가 설득하고 설득당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사상적으로 적대적인 입장으로 되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國情院의 공소 보류는 파격적이다. 최근 한나라당에서는 정치적 혐의를 두기까지 했다. 이런 國情院의 결정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國情院의 공소보류 의견이나 검찰의 공소보류 결정은 한 마디로 우리 사회의 포용력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의미로 본다. 한나라당 일부 인사가 제기하는 빅딜설과 같은 정치적 혐의는 전혀 근거없는 낭설일 뿐이다. 國情院과 검찰에서는 첫째 내가 수사기관에 혐의가 포착되기 훨씬 이전에 분명하게 사상전향을 했고, 둘째 단순히 혼자만 사상전향한 것이 아니라 학생까지 포함하면 3천~5천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상전환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셋째 그냥 사상전향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북한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서고 있으며, 넷째 외국에서 자진 귀국하여 자수하였다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공소보류 결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을 다 고려하더라도 이번의 공소보류 결정은 파격적인 것이며 중요한 선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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