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07

김련희님의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 》

국정원과의 만남

2011년 9월 16일은 내가 대한민국에 입국한 날이다. 그해 6월 3일 부모님과 형제, 남편과 딸, 친우들의 바래움을 받으며 평양역을 떠난지 3개월 만이었다. 한국에 입국되자마자 나는 인천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실려 곧바로 국정원으로 들어갔다. 독방에 감금되자마자 나는 국정원 담당자에게 내 상황을 설명했다. 브로커에게 속아 잘못 왔으니 내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려보내달라고. 그러자 담당자는 나를 보내면 북에서 남쪽에 갔다 왔다고 죽일텐데 어떻게 보내주겠냐고 하는 것이었다.

"당신의 가족은 아마 역적의 가족으로 추방되고 잡혀갔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살겠다고 하면 평양에 있는 딸도 한국에 데려와 주겠다." 이렇게 나를 유혹하였다. 나는 "설사 죽는대도 내 고향에, 내 부모 곁에 묻힐 것 아니냐. 죽어도 내 가족 곁에 가서 죽겠으니 보내만 달라."고 하소연했다. 아무리 보내달라고 해도 들어주지 않으니까 나는 밥을 먹지 않으면서 버텼다. 독방에 있었던 한 달 중 20일을 굶었다. 갇힌 내가 할수있는 유일한 항의수단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국정원은 내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겠다는 서약서를 써야 한다면서, 쓰지 않으면 죽어도 국정원에서 나갈 수 없고 내가 여기서 죽었다는 것을 알수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나는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당당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길 원해서 남한에 온것이 절대 아니었다. 당시 법을 잘 알지 못했지만, 자국민이 아닌 사람을 독방에 감금하고 자국민이 되겠다는 서약서를 강요하는 것은 분명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다.(계속)

김련희님의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 》중 첫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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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난의 행군"의 전 기간을 지방에서 보냈다. 부대주변의 농장마을 집에 가보면 하얀 이쌀은 눈에 보이지 않고 노란 강냉이 쌀이 드문드문 있고 대부분 산나물이나 감자를 썰어 넣어 만든 잡곡나물밥이었다. 어떤 집은 감자 2알로 한끼를 때우기도 하였고 손님이 오면 제일 난처해해서 일부러 식사 때를 피하군 하였다. 우리부대 군인들에게 3끼 밥이 다 차려졌지만 군인들은 아침, 점심식사를 먹고 저녁때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신에게 차례진 밥을 줴기밥(주먹밥)을 만들어 부대주변 마을 어린이가 있는 집들에 가져다 주군 하였다. 그러면 그 집 아주머니들이 다시 부대로 찾아와 제발 그러지 말라고, 우리보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먹어야 한다며 항의하군 하였다. 하지만 군인들은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그 집 문 앞에 몰래 놓고 도망가군 하였다. 군인들이 하는 말이 우리 어른들은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지만 우리의 미래인 어린이들만은 절대로 굶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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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전산후 휴일제

조선에서 출산휴가는 유급이다. 즉, 출산전후의 녀성들은 휴가기간 직장에 출근할 때와 똑같이 식량을 배급받고 월급도 지급받는다. 녀성근로자들의 출산휴가를 근속년한에 상관없이 <출산전 60일, 출산후 90일>, 즉 150일이었다. 그러나 2015년 7월 22일 조선최고인민회의(국회) 상임위원회는 출산휴가기간을 <출산전 60일, 출산후 180일>, 총 240일(약 34주)로 바꾸었다. 이는 급여가 100% 지급되는 국가들중에 가장 긴 기간을 자랑한다.


평양의 초산부들은 의무적으로 평양산원에서 애기를 낳도록 되어있는데 그것은 초산부 해산이 제일 어렵기 때문이다. 지방에 사는 임산부들도 산전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되면 평양산원으로 파송돼 치료를 받게된다.


김련희님의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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