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1937 제국주의의 발아와 파시즘 대두
에도막부는 아시아에서 식민지를 확장하던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속에 위기를 맞는다. 흑선을 끌고 동아시아의 변방국인 일본까지 찾아온 강대국들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은 스스로 강한 나라가 되는 길을 택한다.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지배계급 엘리트들은 일본을 천황을 중심으로 한 근대국가로 재탄생시킨다.
- 1898년 아시아권의 서방 식민지
- 19세기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눈은 동북아시아로 향했다.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전쟁(1840~42)에 패한 이후 개항 압력에 굴복해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일본에도 개항 압력이 밀려든다.
- 1854~1859년 개항의 압력
-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 제독은 ‘흑선’을 끌고 와 일본에 개항을 요구했고, 1854년 일본은 불평등조약인 카나가와 조약을 체결했다. 외국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했고 관세자 주권도 상실했다. 일본은 이를 국치로 여겼고 국가적 콤플렉스를 갖게 됐다.
- 요시다 쇼인
- 이무렵 일본에서 우익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창시자로는 요시다 쇼인이 꼽힌다. 조슈번 하급 사무라이 출신인 그는 교육자이자 철학자였다. 젊은 시절 양학에 관심을 가진 그는 페리의 흑선 외교에 분노했고,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을 주장하며 강한 일본을 꾀했다. 그는 사립학교인 쇼카손주쿠를 운영했는데, 이곳은 ‘메이지 유신의 태동지’로 불린다. 막부체제를 타도하고 ‘존왕양이’(왕을 받들고 오랑캐를 몰아낸다)를 행동에 옮겨 훗날 메이지 유신과 일본 군국주의의 주역이 될 인물들이 이곳에서 양성됐다. 한국을 정벌해야 한다는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을 계승한 이토 히로부미는 제1대 일본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이자 조선통감부의 통감을 지냈다.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로 꼽히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총리도 요시다의 제자였다.
- 1868년 메이지유신
- 에도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1867년 천황에게 통치권 반환을 선언한 대정봉환을 선언했고,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1868년 왕정복고가 선포됐다. 메이지유신은 교육과 군사, 토지제도에서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구미 근대국가를 모델로 한 부국강병을 추구했다. 일본은 스스로 문명국을 자처하면서 아시아를 후진국으로 보는 시혜의식과 지도자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 일본 군국주의와 근대화
- 이같은 ‘위로부터의 개혁’은 무사계급 출신에 의해 주도되면서 일본의 군국주의는 근대화와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서양제국주의의 침략과 동시에 급진적 근대화에 반대하는 내부 봉기를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1873년 군 징병제가 도입됐고, 1878년 ‘군인훈계’과 1882년 ‘군인칙유’를 통해 일본군은 천황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교육받았다. 1890년 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반포된 교육칙어는 일본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가 각급 학교로까지 확장되는 계기였다. ‘충성스러운 황국 신민’을 양성하기 위한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도입된 교육칙어는 각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암송됐다. 일본 우익들은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이 급격한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1881년 도야마 미쓰루 등이 결성한 최초의 우익단체 ‘겐요샤’ 등은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 일본 우익의 등장
- 일본 우익은 ‘애국’ ‘반공’ ‘천황숭배’ ‘배외’ 등의 키워드로 요약된다. 일본학자 호리 유키오는 저서 <우익사전>(1991)에서 일본 우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 1894~1895년 청일전쟁
- 일본의 군사력이 동아시아 최대 군사강국이던 청을 압도했다는 것이 1894~95년 청일전쟁을 통해 드러났다. 전쟁에서 패한 청은 일본과 맺은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종주권 주장을 포기하고, 막대한 전쟁배상금 외에 대만 등을 넘겨줬다.
- 1904~1905년 러일전쟁
- 러·일전쟁을 기회로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을 ‘주권선’으로, 만주를 ‘이익선’으로 설정했다. 러시아를 군사적으로 꺾으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식민지 건설에 돌입했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 대아시아주의
- 러시아의 패배를 전후로 일본에서는 ‘대아시아주의’가 힘을 얻고 있었다. 백인종국가들의 식민지주의에 맞서 아시아국가들이 힘을 뭉쳐야한다는 주장이었다. 1885년 다루이 도키치는 <대동합방론>에서 일본과 조선은 대등하게 합방하고 중국과는 연대해 아시아권에서 백인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범아시아주의’를 지지한 대표적인 일본 우익단체로는 흑룡회가 꼽힌다. 1901년 우치다 료헤이(사진)가 한반도와 만주, 시베리아 일대의 낭인들을 모아 만든 단체로, 대한제국 시기 대표적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배후 지원했다. 이들은 한일병합에 앞장섰고, 1920~30년대에는 정계에서 주류로 자리잡으면서 좌익사상과 자유주의를 공격했다. 이들은 목적을 위해서는 폭력과 범죄 등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천황제와 메이지 유신체제를 타도하려는 일본 공산당을 체제위협적 존재로 보고 견제했다.
- 1910년 한일병합
- 일본의 제3대 한국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형식적인 회의를 통해 한일병합조약을 통과시켰다.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됐다.
- 만주사변과 파시즘의 대두
- 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전, 승리한 일본은 베르사유조약에 승전국으로 참가했다. 국제사회의 강대국으로서 경제번영까지 누렸다. 하지만 곧 위기가 찾아왔다. 1923년 관동대지진에 이어 1929년 세계경제가 대공황에 빠지면서 일본 경제는 빈사상태에 놓이게 된다. 1931년 발생한 만주사변은 이같은 상황에 놓인 일본이 파시즘의 본색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일본 관동군은 심양 교외의 철로를 폭파한 뒤 중국 무장세력의 도발로 몰아 군사행동에 나섰다. 일본 외무성이 견제했지만 전선은 확대됐고 관동군은 만주 전역을 점령했다. 대중들은 환호했다.
- 1932년 만주국 수립
- 군부쿠데타
- 군부는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그리고 1932년 2월 이노우에 닛쇼가 조직한 우익테러 결사 ‘혈맹단 사건’이, 같은해 5월에는 해군 청년 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오시 수상을 사살하는 ‘5.15 사건’이 발생했다. 이 결과 일본의 정당정치는 사라졌고 군부 주도의 거국내각이 등장했다. 1936년 2월 26일, 육군 내 파벌 대립 속에 청년장교들이 천황을 옹립한 군사정권을 수립하려 쿠데타를 일으켰다 진압됐다. 역설적이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군비확장에 반대했던 요인들이 제거됐다. ‘태평양전쟁’을 치를 총동원체제가 마련되는 순간이었다.
-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
- 1937년 중·일 전쟁을 시작으로 일본은 침략전쟁을 본격화 했다.
1940~1945 침략전쟁과 몰락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본은 1940년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만주를 공업지역으로 하고, 원료공급과 시장으로서 동남아시아를 결합하는 광역경제권을 건설하고, 해군의 영향력은 오세아니아에까지 미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아시아의 강대국으로서 일본이 서양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킨다는 빌미였지만, 실제로는 아시아 제국주의 국가로서 일본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열강의 견제가 심해지자 일본은 1941년 미국 하와이섬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으나 미 해군력에 결정적 타격을 입히는 데는 실패했다. 태평양전쟁의 시작이었다.
- 1940년 ‘대동아공영권’ 개념 부상
- 일본은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에 아시아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하며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했다. 일본은 세계의 7분의 1에 해당하는 영토를 점령하면서 ‘해방자’를 자처했다. 처음엔 일본을 반겼던 아시아국가들은 그러나 가혹한 식민통치에 곧 등을 돌리며 저항운동을 시작했다. 1943년 비밀리 작성된 일본 정부문서에 따르면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인을 정점으로 하는 계급사회의 개념으로 추진됐다고 한다.
- 1941년 일본군, 진주만 공습
-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은 미국의 태평양함대에 타격을 입힐 목적으로 하와이주 오하우섬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일본 공군은 항공모함으로 돌아가면서도쿄의 히로히토 천황과 해군 본부에 성공을 알리는 ‘도라! 도라! 도라!’를 타전했다.
- 1942년 일본, 미드웨이 해전 참패
- 진주만 공습의 피해를 곧 복구한 미국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함대를 대파한다. 일본은 제해권과 제공권을 잃기 시작했다. 에너지와 원료의 보급루트가 막히면서 일본은 점차 열세에 놓이게 됐다. 미국은 1944년 필리핀 사이판을 점령한 데 이어 1945년 7월 1일에는 일본 오키나와 전투에서 승리를 선언한다.
- 1945년 8월6~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 1945년 8월 두 발의 원자폭탄이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가 떨어졌다. 이어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팻 맨(Fatman)’이 떨어졌다. 원자폭탄의 파괴력은 상상 초월이었다.미국 등의 ‘무조건 항복’ 강요에 완강히 버티던 일본은 원자폭탄의 버섯구름 아래서 항복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히로히토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방송을 타고 흘렀다. 충격 속에 패전을 맞은 일본 사회는 좌절감과 혼돈에 빠져들었다.
1945~1951 불철저한 과거청산
패전 이후 일본은 미국의 점령 하에 들어갔다. 미국은 일본의 ‘비군사화’와 ‘민주화’ 작업에 착수했지만, 전쟁의 실질적 책임자인 천황과 천황제는 건드리지 않았다. 일본의 효율적 통치를 위해서 천황제를 이용하는 편을 택한 것이다. 결국 동아시아 전범 처벌을 위한 도쿄재판에서 히로히토 천황은 기소 대상에서 제외돼 전쟁 책임을 면하게 됐다. 대신 일본의 전쟁 포기와 전력을 보유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평화헌법’이 제정됐다. 천황의 전쟁 책임이 면제되면서 일본은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의 기회를 잃었다. 오히려 미군 점령 하에 전범 처벌 작업이 이뤄지면서, 일본은 전쟁의 ‘가해자’가 아닌 미군 점령의 ‘피해자’라는 인식마저 배후에 자리잡게 됐다. 이는 이후 일본 우경화 움직임의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
- 1945년 패전 이후 일본 영토의 축소
- 한때 세계의 7분의 1에 달했던 일본 영토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패전 이후 미군 점령에 들어간 일본은 1951년 국제사회로 복귀하지만 오키나와 등은 여전히 미국의 점령 아래 있었다. 오키나와 등은 이후 순차적으로 일본 영토로 복귀된다.
- 대동아 공영권
- 패전후 일본 영토
- 현재의 일본 영토
- 패전후 일본 영토
- 1945~1952년 미국점령기
- 패전 후 일본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 총사령부의 점령 아래 놓였다. 1945년 10월부터 52년 4월 28일까지 6년 반 동안 미국은 사실상 일본을 단독 점령형태로 통치했다. 1945년 9월 27일 도쿄의 미국대사관을 찾은 히로히토 천황이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사령관과 함게 찍은 사진은 당시의 분위기를 설명해준다. ‘신격’이었던 히로히토 천황은 경직된 모습인 반면 맥아더 사령관은 여유있게 허리 뒤에 손을 얹었다.
(전전 우익단체의 해체) 일본의 우익단체들도 점령군의 추방지령으로 230여개 단체가 해체됐다. 한동안 ‘친미반공’과 ‘민주주의’를 내세운 ‘기쿠키동지회’같은 신흥우익단체들이 등장했다.
- 1946~48년 12월 극동국제군사재판
- 1946년 1월부터 동아시아 전쟁 범죄를 심판하기 위한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재판이 준비되는 과정에서 호주 정부가 작성한 전범 리스트 7번째에는 천황 히로히토의 이름이 올랐다. 일본 내에서도 일본 공산당이 천황제 폐지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일본에서 공산세력을 억제하고 효과적인 점령통치를 위해서는 천황을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천황제를 폐지하는 ‘극약 처방’보다는 일본인들의 천황에 대한 숭배와 경애심을 이용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 1946년 평화헌법 제정
- 미국은 천황제를 존속시키는 대신 일본의 전쟁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평화헌법’을 만들었다.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헌법 9조는 일본이 모든 전쟁을 포기하고 전력을 보유하지 않을 것을 명시하고 있다. 아울러 천황을 ‘일본 국가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했다.
-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및 1950~53년 한국전쟁 발발
- 1949년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패전 직후 추진되던 일본의 민주화와 비군사화 정책은 중국 공산화를 계기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미국은 일본을 동아시아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보루로 삼게되고 일본의 재무장·경제부흥에 중점을 두게 된다. 일본사회의 민주화 역시 급속히 퇴행하게 된다. 동아시아 냉전의 정점을 찍었던 1950년 한국전쟁은 ‘역코스’의 기폭제가 됐다. 1950년 말 병력 7만5000명의 경찰 예비대가 창설됐다. 이는 무력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일본 평화헌법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축출됐고, 반면 1951년 추방됐던 군국주의자들이 복귀하기 시작했다. 1948년 12월, A급 전범으로 체포돼 감옥에 있던 기시 노부스케도 석방돼 정계에 복귀했다.
-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의 피점령국 지위를 종결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은 미국의 군사점령 상태를 마감하고 국제사회에 복귀하게 됐다. 미국은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기보다는 일본의 경제부흥과 재건에 중점을 뒀다. 아시아 각국에 대한 일본의 전쟁 책임과 배상문제는 제대로 따져지지 않았다. 일본의 군국주의 전쟁의 최대 피해 당사자인 중국과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과정에 참여조차 하지 못했고, 중국과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근본적 전쟁 책임 문제는 불문에 부쳐졌다.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을 계기로 전쟁 이후 추방됐던 우익단체들이 대거 부활했다. 일본 보수정권은 1954년 미국과 상호방위원조협장을 체결하면서 육해상자위대를 만들었다. 일본 내 진보세력은 미국의 전략체제에 휘말려 또다시 전쟁을 겪게 될 가능성을 우려해 재군비에 반대했는데, 이들을 견제하려 우익이 다시 조직화됐다.
- 1958년 세계 양극체제
1951~1990 경제성장과 국제지위 향상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전쟁의 발발로 대두된 냉전의 격화는 일본의 민주화와 비군사화 움직임의 키를 반대로 돌려놓았다. 동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방파제’로 일본을 활용하기로 마음먹은 미국은 일본 재무장과 경제재건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 일본 군국주의 세력들은 대거 정재계로 복귀하게 됐다.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이자 ‘A급 전범’으로 체포됐던 기시 노부스케도 이때 석방됐다. 이를 두고 ‘역코스(reverse course)’라고 부른다. 현재까지 계속되는 일본정치인의 망언과 우경화는 뿌리는 ‘역코스’에 있는 셈이다.
- 1955년 ‘55년 체제’ 성립과 전개 과정
- 1955년 11월 자유당과 민주당은 자민당이라는 이름으로 뭉쳐 다시 평화헌법 개헌을 과제로 내세웠다. 그들은 평화헌법을 부정하고 자위대를 중심으로 한 국방력 강화와 상징에 불과한 천황을 다시 국가원수로 회복시킬 것을 내세웠다. ‘55년 체제’는 보수·개헌·안보를 내건 자민당과 혁신·호헌을 내세운 사회당의 양대 정당이 경쟁하는 구조를 일컫는 말로, 1993년까지 지속됐다. 겉으로는 자민당과 사회당이 경쟁하는 구도였지만 사실상 자민당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장기집권 체제였다.
- 일본 유명한 정치인 상당수가 태평양 전쟁을 지휘한 전범이 속한 정치가문 출신이다.
각종 ‘망언’을 쏟아내며 일본의 급격한 우경화를 주도하고 있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A급 전범으로 체포됐다 석방된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다.
- 일본 경제의 고도 성장
- 일본은 5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 보수정권 집권과 미국의 보호 아래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고도 경제성장을 이루게 된다. 1968년에는 자유주의 진영 국가 가운데 미국에 이어 GNP 2위에 오르게 되며 일본의 경제성장은 ‘동양의 기적’으로 불리게 된다.
- 일본 지도층 인사의 한국사 관련 망언
- 미시마 사건
- 1970년 11월 25일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쿠데타를 꾀했다가 할복하며 밝힌 자신의 생각은 일본 우파의 정신을 집약하고 있다. 그는 격문에서 “우리는 오늘날 자위대에만이라도 참된 일본, 참된 일본인, 참된 무사의 정신이 남아 있기를 꿈꾸었다” (그런데) “법리적으로 자위대는 위헌임이 명백하고 나라의 근본문제인 방위가 형평주의의 법적 해석에 의해 얼버무려지고, 군이라고 하는 이름이 사용되지 않는 군으로서, 일본인의 정신의 부패, 도덕의 부패의 근본적 원인이 되어 온 것을 봐왔다. 가장 명예를 중시해야 할 군이 가장 악질적 사기 하에 방치되어 온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아사히 신문은 미시마가 “자위대를 명예로운 국군으로 만들고,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천황을 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연속성과 동일성을 구현할 유일한 상징으로 만들기 위해 일본을 개조하려고 진지하게 생각한” 끝에 저지른 행동이라고 적었다. 이같은 미시마 사건은 일본 우익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이때를 계기로 일본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서 ‘패전 이전의 체제’로 복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민족주의 성향의 신우익이 탄생했다. 그 대표적 단체인 ‘잇스이카이’도 이 무렵인 1972년 결성됐다.
- 나카소네의 등장
- 1970년대 후반기에 일본은 저성장시대에 접어들었다. 국민들은 과거의 권리에 집착하면서 급격히 보수화됐다. 일본 내에서 진보와 혁신의 목소리는 잦아들었고, 야당은 보수화됐다. 일본 우익들은 ‘집단자위권 실현를 가능하게 할 헌법개정’을 제1목표로 삼았다.
1982년, 자민당 내에서도 우익성향이 강한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총리로 집권하면서 우익들의 꿈은 한 걸음 현실과 가까워졌다. ‘개헌’ 찬성론자인 그는 1984년 1월 5일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고, 역사교과서를 개정했다. 방위비도 국민총생산(GNP)의 1% 이상으로 늘렸다. 나카소네는 1987년 퇴임했지만, ‘국제국가 일본론’같은 그의 슬로건은 이후 다케시다 내각(1987~1989)에도 영향을 끼쳤다. 1990년대 이후 일본 우경화가 본격화될 토양이 이때 마련됐다.
- 사회전반의 우경화
- 1989년, 일본 우익세력의 구심점이자 정신적 지주이던 쇼와천황(즉위 1926~1989)이 타계했다. 우익들의 주적이던 공산세력도 1990년 독일 통일과 1991년 소련붕괴에 따른 냉전시대의 막이 내리면서 형해화됐다. 미국의 일극시대가 막을 열었다.
주변정세가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게다가 1990년대 들어 일본은 장기불황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일본 국민들은 탈출구를 찾았고, 그 방안으로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메이지정신과 그 바탕이 된 사무라이 정신을 부활시키려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정치, 경제, 사회 전분야에 걸쳐 우경화가 진행됐다.
1990~2011 경기침체와 우경화 가속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시대의 막이 내리면서 미국의 군사적 일극 지배가 시작됐다. 미국은 미일안보체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1994년 한반도 위기와 1996년 대만해협 위기는 미국의 ‘미일안보체제 강화’에 힘을 실어줬다. 1997년 미일방위협력지침 개정(신가이드라인)이 상징적 조치였다. 말레이시아 전략국제연구소의 노르딘 소피 소장은 냉전해체 후 ‘미일안보 재정의’와 관련, “냉전 후에도 일본이 미국 손바닥 안에 있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 1991년 동북아 정세
- 구가이드라인이 소련으로부터의 ‘일본 방위’가 중심이었다면, 신가이드라인은 ‘주변 사태’ 시 미국과 일본의 협력에 중점을 뒀다. 냉전기 일본이 미국에 기지를 제공하고 비용을 대는 일에 국한된 수동적 구실을 했다면, 이제 더 나아가 자위대가 일본 바깥에서 미군을 도와 활동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미국은 일본의 힘을 키워서 지역 안보 부담을 나눠맡도록 했다.
- 주일미군 전력 배치 현황
- 냉전해체와 걸프전쟁은 일본 내부적으로는 ‘55년 체제’를 붕괴시키는 단초가 됐다. 냉전의 종식은 보수와 혁신 대립의 한 축이었던 사회당의 이념적 해체를 가져왔다.
서울대 일본연구소장인 박철희 교수는 <일본비평> 2014 상반기호에서 “1996년 자민당 내부는 보수적인 성향의 세력이 재결집하기 시작했고,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등장 이후 자민당 내에서도 아베 신조와 같은 강경 보수 우파들의 확산이 이뤄졌다”고 정리했다.
- 사과외교에 대한 반발
- 1990년 5월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한국 여성단체들이 일본 정부에 정신대 문제 진상규명과 사죄를 요구하면서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됐다. 1993년 일본 정부가 조사한 결과 일본군과 관헌의 관여와 징집, 사역에서의 강역이 인정돼 ‘고노 담화’를 통해 사과한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는 태평양 전쟁에 대한 일본의 사과를 담고 있다. 이러한 ‘사과 외교’는 한일, 중일 관계를 매끄럽게 했지만, 자민당 내 젊은 보수 우파 그룹은 이에 반발하며 결집한다.
- 이러한 ’사과 외교‘는 한일, 중일 관계를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이시하라 신타로 등 자민당 내 강경보수 그룹을 비롯한 일본 우익세력은 강하게 반발한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주변국의 항의를 이들은 ’내정간섭‘으로 규정했고 전쟁의 역사를 가르친 교과서가 ’자학사관‘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수정 움직임도 이때 나타난다. 1997년 1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가 결성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교과서 기술 삭제를 주장했다. 일본의 잡지와 신문들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침략전이 아닌 방위전이라는 요지의 기사들을 실었다. NHK ‘신센구미’를 비롯한 대하드라마를 통해 메이지 정신의 부활을 꾀했다. 우익적 입장에서 일본을 논한 지식인, 작가 그룹에는 장편소설 <료마가 간다>의 저자 시바 료타로, 철학자인 우메하라 다케시 등이 있다.
- 1990-2007 장기불황과 우경화의 가속
- 1990년대 일본 경제는 장기불황의 늪에 빠졌다. 대출로 사들인 주식과 부동산 가격이 거품붕괴로 하락했고, 자산가치 급락으로 부동산 가격과 주가가 1980년대 말의 절반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경제성장률도 1992년부터 1% 미만대로 떨어지기 시작해 1997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일본장기신용은행, 홋카이도 척식은행, 야마이치 증권 등의 도산이 1990년대말까지 이어졌다. ‘잃어버린 20년’은 일본 사회에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 일본 부동산 버블 및 장기 불황 시작
-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대졸자의 취직은 ‘초빙하기’를 맞았다. 고도성장기 초중류화의 신화가 사라진 일본은 거품경제에 의한 자산격차 심화로 빈부격차가 대물림되는 ‘격차사회’로 변모했다. 2001년 고이즈미 정권 이후 일본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강화해 비정규직이 확산됐으며 이는 양극화 심화로 이어졌다. 2004년 반짝 좋아진 듯한 일본 경제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다시 불황 속으로 빠졌다. 2010년 일본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9%로 떨어지고 세계 2위 경제대국 지위도 중국에게 넘겨줬다. 일본은 OECD 회원국 가운데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 1위(238%)다.
- 일본의 우경화 가속도
- 20년간 지속된 장기불황은 ‘군사 강국’으로 변하려는 일본에 결정적 계기를 부여한다. 장기불황을 거치면서 ‘고도 경제성장’이 무너지고, ‘평화 헌법’이라는 기둥도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정치인들은 ‘군사 강국화’를 목표를 상실한 대중들에게 새로운 국가 전략으로 제시한다.
2008년 이후 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2010년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제2위의 경제 대국의 자리에 올랐다. 일본에게 ‘굴욕’의 순간이었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되자 일본인들은 자신의 이익과 연관된 것에만 관심을 갖고 정치에 무관심해지는 ‘생활보수주의적’ 경향을 띠게 됐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재임 중 6번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한다. 보수언론들은 1990년대 이후 과거 우익 사회운동이 내세우던 동아시아 주변 국가에 대한 멸시, 재일 한국인 등 일본 내 이질적 존재에 대한 힐난을 확산시켰다. 넷우익은 2002년 한일 공동개최 월드컵 축구대회를 전후해 한국에 대한 혐오 감정을 온라인에서 공공연하게 표출했다. 그리고 2007년 ‘재특회(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가 결성된다. 넷우익이 거리로 나온 것이다.
2011~2014 동일본 대지진과 아베 정권의 등장
오랜 자민당 체제에 염증을 느낀 일본 유권자들은 2009년 총선에서 민주당을 택했다. 59년 만의 정권교체였다. 하지만 민주당 역시 ‘잃어버린 20년’의 그늘의 지우는 데 실패한다. 그리고 2011년 3월 규모 9.0의 초대형 지진이 도호쿠 지방을 강타하면서 설상가상으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이 유출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세계 2차대전이 종결되고 65년 동안, 이것은 일본에 닥친 가장 거칠고 가장 어려운 재난”(간 나오토 당시 일본총리)이었다.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 속에 자민당의 극우 정치인 아베 신조는 2012년 12월 총선에서 승리하며 총리에 오른다.
- 2011년 3월11일 동일본 대지진 및 아베의 재등장
-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과 위기감을 안겼다. 자신감을 잃은 일본 사회에 ‘강한 일본’과 ‘아베노믹스’로 무장한 아베 신조가 대안으로 등장했다. 아베는 주변국의 반발에도 침략전쟁의 과거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베 정권은 2014년 7월 1일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허용하는 헌법 해석 변경을 강행했다. 이로써 평화헌법으로 일컫는 일본 헌법 9조의 ‘전수방위(방어를 위한 군사력만 행사)’ 원칙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아베 총리가 일관되게 밝혀온 정치적 신념인 ‘전후체제 탈피’에도 더 바짝 다가설 수 있게 됐다. 같은해 6월에는 1993년 고노담화 작성 과정에서 한일 정부간 문안 조정이 있었다는 검증 결과를 내놓아 담화의 취지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샀다.
- 일본 우익인사 망언
- ‘강한 일본’
- 일본의 이같은 움직임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일본 히토쓰바시 대학 국제공공정책 대학원 교수인 아키야마 노부마사는 “일본 민족주의자들은 더 이상 ‘좋은 패자’로 대우받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국 외교학원의 조우용셩교수는 “아베총리가 파시스트적 열망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조지프 나이는 지난해 초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930년대에는 일본의 과잉 자신감이 침략주의로 치달았지만, 지금의 우경화는 일본이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이라며 “일본은 20년 이상 저성장이 계속됐고, 일본의 민족주의는 그 반동으로 일어난 면이 있다”고 말했다.
일본 극우파의 부상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11년 천명한 ‘아시아로의 회귀’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미국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을 중동이 아닌 아시아의 ‘중국’이라는 가정 하에 일본과의 군사동맹 일체화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대해 환영 의사를 밝혔다. 미국 입장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과 중국의 군사적 부상이 이뤄지고 있는 동북아 안보 현실에서 일본의 안보 역할 증대는 반가울 수밖에 없다. 과거사에 대한 아베의 문제적 언행 역시 양국관계에 큰 변수가 되지 못하고 있다.
- 청년층의 우경화
- ‘잃어버린 20년’에 나고자란 일본 청년층은 고도성장의 수혜를 누리지도 못했고, 만성적인 디플레이션과 일자리 부족에 시달려왔다. 이들의 우경화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특히 눈에 띈다. 아사히신문이 지난해 12월 공개한 정치·사회 의식조사에서 ‘과거 전쟁은 침략전쟁이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20대의 33%가 ‘아니다’라고 응답했다. 일본근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미타니 히로시 도쿄대 교수는 “청년들에게 ‘일본이 좋은 나라’라고 말해주는 이들이 없었다. 이들은 영광이나 번영을 체감한 적도 없고 계속 고난만 겪어왔다. 현재 일본 젊은이들을 파고드는 것은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비열한 감정에 기초한 내셔널리즘으로, 아베 총리와 측근들이 조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타니 교수는 “20세기 전반의 잘못된 역사를 제대로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일본이 ‘오고 싶은 나라’라는 긍정적 내셔널리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일본 전체가 우경화되었나
- 일본 정치권의 우경화 움직임을 일본 국민 전체의 우경화와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재특회와 같은 극단적인 혐한세력은 아직 소수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아직까지 군비 팽창이 아닌 평화 유지를 더 간절히 원한다. 혐한 시위가 일어나면, 반대로 '혐한시위를 반대하는 시위'가 열린다. 아베 정권이 '전쟁이 가능한 나라' 선언을 하기 전인 지난 6월29일 일본 도쿄 시내 한복판에서 50대 일본 남성이 아베 정권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 방침에 항의하며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마이니치신문이 6월 27~28일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 결과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행사하게 되면 다른 나라의 전쟁에 휘말릴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응답이 71%였다. 그럴 우려가 없다는 답변은 19%에 그쳤다. 이는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에 일본인이 동원돼 희생을 강요받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우려를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집단자위권 용인에 대한 반대는 58%, 찬성은 32% 였다. 일본의 우익 열풍을 과대 선전하는 한국의 태도가 혐한 감정과 군사적 대결의식을 재촉하는 효과를 내는 것도 주의가 필요하다.
- 2차대전 이후 지금까지 동북아 국제 관계도
- ① 2차 세계대전 이후패전국 일본은 미국의 통치를 받게 된다. 미국은 평화헌법을 통해 일본의 군사적 행위를 봉쇄하는 한편, 동북아의 우방으로 활용하기 위해 일본 우익 정권을 지원하고 경제적 부흥을 돕는다. 1950년 한국전쟁은 일본 경제에 단비로 작용한다.
- ② 1951년 이후 냉전체제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은 국제사회에 복귀한다. 냉전 국면에서 미국은 일본을 전쟁의 가해자 입장이 아닌 냉전의 대미협조자라는 입장에 놓는 정책을 펼쳤다. 그 까닭에 일본은 한국과의 과거청산 문제에 대해 1950년대부터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로 임했고, 이는 훗날 ‘반성 없는 일본’의 뿌리가 된다. 미국은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건설, 일본을 아시아 내 병참기지로 활용한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은 ‘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마무리 짓는다. 이 회담에서 한국 측은 한일병합이 원천 무효임을 명시하지 못했다.
- ③ 1990년대 냉전해체 후냉전해체 이후 미국은 미일동맹을 강화하며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한다. 한국은 한미동맹을 유지하면서 중국, 러시아와의 수교를 맺는다. 일본은 1990년대 초중반 과거사 반성 움직임이 있었지만, 90년대 후반 역사교과서 수정 요구 등 우경화의 현상들이 도드라지기 시작한다. 일본 내부적으로는 버블경제가 붕괴하면서 경기침체에 빠져든다.
- ④ 동일본대지진 이후, 현재오랜 경기침체와 동일본 대지진으로 자신감을 상실한 일본 사회에 ‘강한 일본’을 주장하는 아베 신조 정권이 재등장한다. 한국과 중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위안부 문제 및 역사 문제 등 과거사를 부정한다. 아베 정권은 2014년 7월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 헌법해석을 강행한다. 한국과 중국은 반발하지만 미국은 세계 강국으로 떠오른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 분위기를 환영한다.
- 나오며
- 2014년 동북아시아는 1900년대 초반에 비견되는 격랑기를 맞고 있다. 중국이 아시아 패권국으로 떠올랐고 미국은 이를 견제하려 아시아 지역으로의 외교복귀를 천명했다. 일본은 미국의 ‘아시아 대리인’으로서 재무장의 기회를 마련했다. 체제가 위태로운 북한은 핵카드를 버리지 않고 있고, 러시아는 동진외교로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다. 강상중 일본 세이가쿠인대 학장은 “냉전은 완전히 과거의 것이 되고, 세계는 ‘글로벌 플랫(global flat)화’가 진행된다고 예측되었음에도 미국 일극지배의 종언 이후의 동아시아는 혼돈이 심화되고 각국이 동상이몽의 꿈을 꾸면서 동시에 대립하고 연대하는 복잡한정황으로 향하고 있다”고 지난 5월 경향신문 칼럼에서 지적했다.
반 세기 이상 냉전체제에서 곪을 대로 곪은 역사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동북아시아에서 어떤 협력도 꿈꾸기 어렵다. 그러나 ‘평화의 다리’가 될 수 있는 한국의 외교적 영향력은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전략까지 실종되며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강대국들의 이익에 휘둘리는 설움을 후대에 물려줄 수는 없다. 지금 우리의 전략은 무엇인가.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