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03

[위안부문제] 위안부관계 자료관련 연구조사에 대해 — 박유하


[위안부문제] 위안부관계 자료관련 연구조사에 대해

박유하

“위안부 학살”에 관한 서울대연구팀의 발표에 대해서


먼저, 서울대연구팀의 위안부관계 자료관련 노력과 성과에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내용 이전에, 이번 발표는 물론 2년전 발표에서도 “버마 지역에서의 위안부의 참혹한 죽음”에 관해서 일본의 아사노교수의 20년전 연구(아시아여성기금의 연구지원)가 있다는 사실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 같아(현장에서 있었다면 알려 주시기 바란다. 2년전에 서울시가 발간한 자료집에는 전혀 없었다) 유감스럽다.
이번 발표에 대해 아사노교수가 직접 올린 글을 이하에 번역해 둔다.사실 링크된 논문을 열어보면 알 수 있는 일인데, 한국에서 유통되고 있는 사진은 대부분 아사노교수가 발견한 것이다.
나는 이 논문 외 아사노교수의 나머지 논문을 읽고, 일각에서 위안부들이 일본군의 옥쇄과정에서 희생된 경우가 없지 않은 것 같고, 개중에는 위안부들을 죽이려한 군인도 있었던 것 같지만, 그렇게 하려고 한 군인들을 비판하고 안전한 후방으로 내보내려 한 군인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그리고 그건 내가 읽은 다른 자료들이 보여주는 상황과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물론 문제는 전쟁터에 여성들마저 동원한 일 자체다.


그런데 아사노논문에 근거해 말하자면


1)이번 발표에서의 희생자여성들이 꼭 모두 조선인이라는 보장은 없어 보인다. 같은 지역에 대만인도 일본인도 있었기 때문이다.
2)영상 속 위안부들은 폭격에 의한 죽음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사실,
“일본군이 대부분의 조선인위안부들을 학살했다”는 그간의 인식은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그 점이 새롭게 인식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일본군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목적이 앞선 연구는 새로운 인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기존생각을 강화시키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
———
아사노 글 번역

이 사진은, 산(山)사면이고 더구나 매장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학살이 아니라 폭격의 희생이 된 것이라고 20년전 아시아 여성 기금 보고서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늦었지만 이 문제가 한국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되어서 감개무량하다. 이 보고서는 이후 많이 수정보완되어 이와나미에서 발간하는 <세계>99년 11월호 논문과군사사학 2008년호 중일 전쟁 재론에 게재한 논문이 되었다.
버마인이 증언한, 30명을 일본군이 쏴 죽였다는 자료가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지만, 옥쇄가 북동성벽 구석에서 이루어진 점, 바깥에 성벽을 지키기 위한 진지는 있었지만 수비대가 30명을 데리고 나가서 바깥에서 학살할 만큼의 여유를(수류탄/총알도 다 떨어졌다고 한다-번역자 주)갖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점, 시체가 성벽 바깥에 있다는 것을 사진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 성벽안에 몰려 고립되기 이전단계에서 성벽 바깥에서 학살 당했다고 한다면 시체부패가 꽤 심했을 것이라는 점, 대만인조선인일본인 위안부가 살아남아 중국 군포로가 되어 사진까지 남아 있다는 점.
이런 점들을 고려한다면 조선인위안부의 시체 사진은 성벽 안에서 마지막날 밤에 집단으로 대만/조선/일본 위안부들이 탈출 했을 때 박격폭탄을 맞고 흩어졌을 때 희생된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탈출과정 혼란속에서 사살된 위안부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일본수비대들이 옥쇄하는 과정에서 당한 일이 아닐까.
탈출 혹은 옥쇄가 교차되는 혼란 속에서 같이 죽음을 선택하도록 사살된 위안부가 있고, 그 현장을 빠져 나온 이들이, 포로가 된 대만/조선/일본위안부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무엇을 역사적 사실로 보는지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일본에서 1970 년대에 고도 성장기가 일단락 되었을 때 여기저기서 전쟁에 관한 기억이 되살아났을 때, 여러 곳에서의 옥쇄와 그에 동반되었던 강제가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문제시되었던 일이 생각난다.
하지만 전투과정의 역학을 프로세스로서 이해해 나가는 일에 의해, 소모적인 대립을 넘어서서 국민감정이 동반된 진실된 주체적사죄와 용서, 그리고 자연스러운 화해가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싶다.



Toyomi As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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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写真は、山の斜面で、しかも埋められていないことから、虐殺ではなく砲撃の犠牲になったことを20年前のアジア女性基金の報告書で紹介した。
http://www.awf.or.jp/pdf/0062_p061_088.pdf ようやく韓国社会の世論の注目を集めていることは感慨深い。しかし、この報告書は、だいぶ改良されて、岩波の世界の99年11月号の論文、および軍事史学2008年の日中戦争再論に掲載された論文となった。
 ビルマ人の証言で30人を日本軍が殺したと言う資料がある事は無視できない反面で、玉砕が北東の城壁の角で行われていること、外に城壁を守るための陣地はあったものの30人を連れ出して外で虐殺できるような余裕は守備隊になかったと考えられること、写真が城壁の外に遺体があることを示していること、城壁内に追い詰められる前の段階で城壁の外で虐殺されていたとすれば、ご遺体の腐乱は相当進んでいたはずであること、台湾人朝鮮人日本人の慰安婦が生き残って中国軍の捕虜となり写真まで取られていること。
 以上を考えると、朝鮮人慰安婦のご遺体の写真は、城壁の穴から最後の夜に集団で日韓台の慰安婦達が脱出したときに迫撃砲弾を浴びて散会した際に犠牲になった女性である可能性が高いとおもう。もしかしたら脱出の混乱の中で射殺された慰安婦がいたかもしれないけれど、それは日本の守備隊自体が玉砕する過程で道ずれにされたのではなかろうか。脱出と玉砕がせめぎあう混乱の中で一緒に死を選ぶべく射殺された慰安婦がいて、その現場から飛び出したのが日韓台の慰安婦達であったのかもしれない。
 いずれにせよ、何を歴史の事実としてみようとするのか、韓国人と日本人には相当な違いがある。1970年代にようやく高度成長が一段落して、あちこちで、戦争の記憶が再生した際に、さまざまな玉砕やそれにともなう強制が沖縄を中心に問題となったことも思い出される。しかし、戦闘の過程の力学をプロセスとして理解していくことで、不毛な対立を超えて、国民感情の伴う心からの自主的な謝罪と許しや自然な和解ができるのではないか。それを願い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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ソウル市、旧日本軍の「朝鮮人慰安婦」虐殺映像を初めて公開
ソウル市が三一節(抗日独立運動記念日)99周年を記念して27日に開催した韓日中「日本軍慰安婦国際カンファレンス」で、旧日本軍の朝鮮人慰安婦虐殺を見せる映像を初めて公開した。終戦前の1944年、中国雲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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ソウル市、旧日本軍の「朝鮮人慰安婦」虐殺映像を初めて公開

ⓒ 中央日報日本語版2018.02.27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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ソウル市が三一節(抗日独立運動記念日)99周年を記念して27日に開催した韓日中「日本軍慰安婦国際カンファレンス」で、旧日本軍の朝鮮人慰安婦虐殺を見せる映像を初めて公開した。

終戦前の1944年、中国雲南省騰沖で朝鮮人慰安婦が虐殺されて捨てられる場面を見せる19秒間の白黒映像だ。ソウル市とソウル大人権センターが2016年と17年の2回、米国立公文書記録管理局(NARA)を訪問して資料調査と発掘作業を行った結果、撮影から70余年後に映像が公開された。

映像には朝鮮人慰安婦が旧日本軍によって殺害された後に捨てられる残酷な場面が映っている。周辺では遺体を埋葬しにきたとみられる中国軍兵士2、3人の姿も見える。連合軍164通信隊写真中隊のボルドウィン兵士が1944年9月15日に撮影したもので、映像の場所は中国雲南省騰沖と推定される。ソウル市とソウル大人権センターはこの映像資料1点をはじめ、写真資料2点、当時の米中連合軍が作成した作戦日誌をはじめ、旧日本軍の慰安婦虐殺を裏付ける文書14点も共に公開した。映像と共に公開された連合軍情報文書には騰沖が陥落する直前の1944年9月13日夜、旧日本軍が朝鮮人女性30人を銃殺したと記録されている。旧日本軍が慰安婦を虐殺したという証言、記事などが公開されたことはあるが、朝鮮人慰安婦を含む旧日本軍の慰安婦虐殺現場が撮影された映像が公開されたのは今回が初めて。

朴元淳(パク・ウォンスン)ソウル市長は「国を失って力がない祖国で女性と少女がどんな苦痛を経験したのか、あまりにも胸が痛む現実を私たちは直視している」とし「このような不幸な歴史も記録して記憶してこそ二度と繰り返さないだけに、今後もソウル市が可能なすべての力と資源を集中し、歴史を記憶して正す作業に率先していく」と述べ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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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일본군의 '조선인 위안부' 학살 영상을 처음 공개

ⓒ 중앙일보 일본어판 2018.02.27 14:450 글자 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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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운남성 치바다에서 조선인 위안부가 학살되어 버려지는 장면을 찍은 사진.  미군 사진병 프랭크 맨월렌(Frank Manwarren)씨가 촬영했다.  (서울시·서울대인권센터 제공)

중국 운남성 치바다에서 조선인 위안부가 학살되어 버려지는 장면을 찍은 사진. 미군 사진병 프랭크 맨월렌(Frank Manwarren)씨가 촬영했다. (서울시·서울대인권센터 제공)

서울시가 삼일절(항일독립운동기념일) 99주년을 기념해 27일 개최한 한일중 ‘일본군 위안부 국제 컨퍼런스’에서 구 일본군의 조선인 위안부 학살을 보여주는 영상을 처음 공개 했다.


종전 전인 1944년 중국 운남성 등바다에서 조선인 위안부가 학살당해 버려지는 장면을 보여주는 19초간의 흑백 영상이다. 서울시와 서울대인권센터가 2016년과 17년 2회 미국립공문서기록관리국(NARA)을 방문해 자료조사와 발굴작업을 한 결과 촬영 후 70여년 후에 영상이 공개된다. 했다.


영상에는 조선인 위안부가 구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 뒤 버려지는 잔혹한 장면이 비치고 있다. 주변에서는 시신을 매장하러 온 것으로 보이는 중국군 병사 2, 3명의 모습도 보인다. 연합군 164통신대 사진 중대 보르드윈 병사가 1944년 9월 15일 촬영한 것으로 영상의 위치는 중국 운남성 치바다로 추정된다.




서울시와 서울대인권센터는 이 영상자료 1점을 비롯해 사진자료 2점, 당시 미·중 연합군이 작성한 작전 일지를 비롯해 구 일본군의 위안부 학살을 뒷받침하는 문서 14점도 함께 공개 했다. 영상과 함께 공개된 연합군 정보문서에는 치오키가 함락하기 직전인 1944년 9월 13일 밤 구 일본군이 조선인 여성 30명을 총살했다고 기록돼 있다. 구 일본군이 위안부를 학살했다는 증언, 기사 등이 공개된 적은 있지만, 조선인 위안부를 포함한 구 일본군의 위안부 학살 현장이 촬영된 영상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


박원순 서울시장은 “나라를 잃고 힘이 없는 조국에서 여자와 소녀가 어떤 고통을 경험했는지 너무 가슴이 아프는 현실을 우리는 직시하고 있다”며 “이런 불행한 역사도 기록하고 기억해야만 두 번 반복하지 않는 만큼 앞으로도 서울시가 가능한 모든 힘과 자원을 집중하고 역사를 기억하고 바로잡는 작업에 솔선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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