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병합 100년
일제를 향한 ‘증오와 선망’… 지도층·지식인들, 엇갈린 시선
2010.08.29 22:00 입력
김종목 기자
한국인의 일본 인식 100년
29일로 한일강제병합조약이 공포된 지 꼭 100년을 맞았다. 경술국치일 이후 지난 100년 동안 한국인은 일본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고, 인식의 변화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한국인은 항일, 반일, 극일을 외치면서 한편으론 일본의 근대와 문명을 선망했다. 식민지배에 저항하면서 자본과 문명·상무정신은 배워야 할 모델이라는 이중적 인식이 개화기 때부터 지속됐다. 서울대 일본연구소는 반년간지 ‘일본비평’ 하반기호에서 신채호·윤치호·이광수·이승만·박정희 등 주요 인물들의 일본 인식관을 분석했다. ‘일본비평’을 바탕으로 해 한국의 일본 인식관 변천사를 살펴본다.
최제우 ‘나라 위해 멸해야할 원수’ 적대감… 동학혁명 영향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1824~64)는 강한 민족중심적 성향으로 일본에 매우 비판적이다. 수운은 이미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세력뿐 아니라 일본 세력의 확장이 조선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안심가’에서 일본인을 “개같은 왜적놈” “그 역시 원수로다”라며 적대 관계로 설정한다. 인권평등을 주장한 수운이지만 일본은 예외다. 박광수 원광대 교수는 “수운은 임진왜란 등 조선침략과 한국인 희생에 적대적 감정을 간직했고, 일본을 멸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고 분석한다. 박 교수는 “수운의 가르침은 제자들의 동학혁명과 3·1운동을 능동적으로 결행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는 친일파로 분류되는 윤치호(1865~1945)의 일본 정서를 흠모와 증오가 교차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윤치호는 강제병합 이듬해인 1911년 105인 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지만, 일제 말기 중일전쟁 자원입대를 독려하고, 칙선 귀족원의원을 지내는 등 친일파의 삶을 살았다.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한 그는 일본인의 정중함·깨끗한 거리 등을 열거하며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나라” 중 하나로 여겼다. 러일전쟁의 승리를 자랑스러워했는데, ‘황인종’이라는 동질 의식도 컸다. 한편으로는 일본인을 편협·왜소하며 힘에만 의지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친일과 관련, 박 교수는 “국가의 목적을 국민의 안녕·행복의 유지에서 찾았기 때문에 동족에 의한 가혹한 통치보다 이민족의 관대한 지배가 낫다고 여겼다”고 말했다.
이광수 일본 = 문명, 조선 = 야만, 이분법적 민족개조 발상
친일파 지식인 중에서 이광수(1892~1950)를 빼놓을 수 없다. 윤대석 명지대 교수는 이광수에 대해 “조선과의 대조 속에서 문명으로서의 일본을 발견하고, 거꾸로 일본과의 대조 속에서 야만으로서의 조선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이광수의 유학 시절 글들은 시종일관 ‘일본=문명’ ‘조선=야만’의 이분법적 인식을 보여준다. “일본은 우리가 좇아야 할 문명으로서의 거울”이란 생각은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민족 개조론으로 이어졌다. 물론 그에게 일본은 억압적 존재이기도 했다. 그가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거나 임시정부 일을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윤 교수는 “근대와 문명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본 나쓰메 소세키나 루쉰과는 달리 이광수는 문명과 근대에 맹목적이었다”고 분석한다.
신채호 ‘개화 선배’로도 여기다 훗날엔 ‘적 강도’일 뿐
신채호(1880~1936)는 항일투사이자 민족사학자다. 무장항일투쟁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고, 일제 경찰에 체포된 뒤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다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박노자 노르웨이 국립오슬로대 교수는 “신채호가 일본을 오로지 적대시만 했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그의 복합적 세계관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라며 신채호에게서 ‘근대지상주의’의 영향을 발견한다. 신채호가 1908년에 ‘대한매일신보’ ‘대한협회보’에 기고한 글을 보면 그는 일본을 “단순히 ‘적’이라기보다는 모종의 긍정적 경험을 배울 수 있는 ‘개화 선배’ ”로도 여겼다. 박 교수는 “신채호에게 고대 조선은 일본에 자랑할 수 있는 ‘스승의 나라’이자 ‘상무정신의 국민’이었지만, 근대 조선은 일본보다 열등한 ‘실패자’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이후 무장 독립투쟁 노선을 견지한 망명 시절 신채호는 ‘국권’을 빼앗아 조선민족에 ‘멸망’ ‘멸종’을 가져다줄 수 있는 ‘제국주의 침략자’라는 평소의 적대적 일본관을 더 벼려간다. 1922년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할 즈음에 일본은 ‘근대화의 모델’로서의 의미는 없어지고 ‘적 강도’일 뿐이었다.
이승만(1875~1965)은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강한 반일의식을 표출했고, 반일 이데올로기를 통치 이데올로기의 하나로 이용했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그런데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이승만은 단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반일 의식을 표출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미국 중심의 세계 체제 속에서 미국의 일본 중심정책을 전환시켜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한국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이승만은 생각했다.
이승만이 추구한 것은 ‘반일을 통한 또 다른 일본 되기’였다. 박 교수는 “그의 반일 의식은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박 교수는 또 “이승만의 반일 의식은 북한에 대한 고려 속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승만은 미국 중심의 제1세계에서 한국이 일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미국의 대일 정책과의 괴리가 컸다. 대신 “일본이 경제적 측면에서 미국의 파트너가 된다면, 한국은 안보·군사적 측면에서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고 봤다. 박 교수는 “이런 실용적 대일 인식은 식민지 시기부터 계속된 그의 반일 인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박정희 만주국서 ‘핵심요소’ 흡수… 경제계획 계발체제 뿌리
박정희(1917~79)에 대해선 한때 만주 군관학교 시절과 일본 육사유학, 만주국군 장교 임관에 이르는 시기에 대한 언급은 금기 사항이었다. 당시 박정희와 그의 집권에 관한 연구도 빈 공간이었다. 한석정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는 박정희의 식민지 경험 중 만주국 시절에 초점을 맞춰 ‘박정희 개발체제’의 연원을 분석한다. 만주국 경험이 개발체제의 운행을 과다 결정(또는 예정)했고, 그 중요 요소가 독일·소련 등지에서 발원해 만주국을 경유한 ‘하이 모더니즘’이란 주장이다. ‘건설국가’ ‘속도와 획일성’ ‘무서운 동원체제’ ‘근검과 위생의 강조’ ‘신체의 규율’ ‘대중예술의 정치적 동원’ 같은 개발체제의 핵심 요소들이 만주국으로부터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박정희가 만주에서 목격한 것은 관동군이 밀어붙인 경제개발, 중공업, 도시·철도 건설, 위생 개선 등 발전에 대한 강박적 신념, 혹은 하이 모더니즘적 요소다. 한 교수는 “박정희 시대에 4차례나 추진된 개발계획에 깊은 영향을 드리운 것은 만주국의 계획경제”라고 말했다. 또 산업전사, 근로봉사, 증산의 정신 등 일본 제국과 만주국의 용어도 이어졌다.
박경리 ‘토지’ 속 도덕적 양극화… 독립투사 선, 일본인 악
박경리(1926~2008)의 대하소설 <토지>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다. <토지>에는 일본인이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일본(인)과 일본 문화 언급들은 넘쳐난다. 김철 연세대 교수는 <토지>를 통해 박경리의 일본과 일본인 상을 검토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잔인무도한 악당들과 영웅적 초인들의 대결이 <토지>의 서사문법인데, 특징적인 것은 ‘선(인)’과 ‘악(인)’의 이분법과 도덕적 양극화다.
“양극화된 세계 속에서 선(인)의 무리는 만주벌판을 누리는 독립투사들, 지하에서 암약하는 혁명가들, 그리고 일본(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과 혐오감을 간직하는 다수의 민중들이며, 악(인)의 무리는 일본(인)과 친일파”들이라고 김 교수는 말한다.
이어령일본문화 ‘축소지향’ 규정… 접경지대 피식민자의 사유
80년대 일반 대중의 일본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친 지식인은 이어령(1934~ )이다. <축소지향의 일본인>(82년)은 당대의 베스트셀러이자 지금도 한국의 ‘일본인론’의 대표 저서로 꼽힌다. 황호덕 성균관대 교수는 한국을 일본의 대등한 비교대상으로 설정한 이어령의 일본문화론을 제국과 식민지 사이의 ‘접경지대’에 선 피식민자의 사유로 파악한다. 황 교수는 “식민본국인에게 인정받겠다는 피식민자 특유의 열의, 이를 통해 세계성을 매개하겠다는 피식민자 특유의 보편주의”라며 “이어령의 일련의 일본문화론은 축소지향이라는 ‘작아진 일본’ 안에서 한국문화론을 세계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려 했던 후기식민지적 실천의 일종이었다”고 평가한다.
삼성 창업자인 이병철(1910~87)의 일본관은 분명하지 않다. 김영욱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단편적 기록에 의하면 식민지배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내면서도 일본인, 특히 일본인의 기질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 기업인 중에서 이병철은 일본 지향적이었고, 삼성 역시 일본 색채가 강했다. 이병철 자신은 물론 세 아들과 손자도 일본 유학파다. 기술과 자본 도입선도 일본이었다. 김 위원은 “국내외 경제 및 경영 정보를 수집하는 창구로 일본을 썼고, 이를 삼성의 경영에 적극 활용했다”며 “이병철은 치밀한 전략이 요구되는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고, 이것이 후일 후계자 이건희가 극일에 성공한 요인”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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