邪馬台国どこに?九州説・近畿説/吉野ヶ里遺跡の最新発掘の成果は?専門家が読み解く
NHK
2023年7月4日 午後0:33 公開
邪馬台国はどこにあったのか?江戸時代から研究が続く歴史の謎です。これまで「近畿説」「九州説」に分かれて論争が交わされてきました。
そんな中、去年、吉野ヶ里(よしのがり)遺跡(佐賀県)で10年ぶりに発掘調査が始まりました。調査が行われているのは「謎のエリア」と呼ばれ、もともと「身分の高い人の墓があるのでは」と専門家の間で注目されてきた場所。見つかった石棺墓の発掘の結果、副葬品はなく、誰が葬られていたのかは謎のまま…。それでも人々の想像をかき立てる結果となりました。
いまだその所在地を巡って意見が分かれる「邪馬台国論争」。今回、半世紀以上にわたって研究を続けてきた2人の専門家に、それぞれが考える古代日本の姿と今後の議論の展望について取材しました。
(福岡放送局 ディレクター 松尾聡子)
【関連番組】~7月11日まで見逃し配信中
■高島忠平さん(写真左)
佐賀女子短期大学名誉教授。福岡県出身。これまで60年以上、吉野ヶ里遺跡の研究に携わる。邪馬台国九州説を唱え「ミスター吉野ヶ里」の名で親しまれている。
■寺沢薫さん(写真右)
桜井市纒向学研究センター所長。東京都出身。近畿説の論拠となる纒向(まきむく)遺跡(奈良県)の発掘および弥生・古墳時代の政治研究に50年近く携わる。主な著書に「弥生国家論―国家はこうして生まれた」「卑弥呼とヤマト王権」など。
九州説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のが吉野ヶ里遺跡です。柵や堀に囲まれた集落や大きな宮殿跡、物見やぐらなど、魏志倭人伝の記述と重なる建物が次々と見つかり、1989年に大きく報じられると、3か月足らずの間に100万人以上が訪れる吉野ヶ里フィーバーが起こりました。
その吉野ヶ里遺跡でことし6月、女王・卑弥呼の時代と重なるとみられる石棺墓が見つかり、再び注目が集まりました。
墓の主は、いったいどんな人?
今回吉野ヶ里遺跡から発掘されたのは、幅36センチ、長さ1メートル80センチの石棺。1枚100キロを超える石ふたには、その外側に「×」や「十」といった交差した線“線刻”が刻まれていました。底部に石は使われておらず、その形状から弥生時代後期の墓だと見られています。中は土砂で埋まっており、副葬品や人骨は見つかりませんでしたが、石棺内部全体に赤色顔料が塗られた跡がありました。
注目が集まったのは、この墓に誰が埋葬されたのかということ。
吉野ヶ里研究の第一人者である高島忠平さんは、墓の主について次のように語っています。
(高島さん)
「顕著な副葬品は発見されませんでしたが、赤色顔料が出たこともあり、墓の主が当時の吉野ヶ里地域において身分が高い人物であるのは間違いないと考えています。また、吉野ヶ里遺跡ではこれまで優れた絹織物がたくさん発見されているので、実は消えてしまった何らかの副葬品があったんじゃないかと私は想像しています。今後周辺の調査を進め、今回出土した石棺の集落における位置づけを吉野ヶ里の巨大環濠(ごう)集落と考え合わせていくと、邪馬台国へのつながりが明らかになる手がかりが見えてく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一方、近畿説の論拠となる奈良県の纒向遺跡を長年研究してきた寺沢薫さんは、今回発掘された墓の主が、際だって身分が高い人物である可能性は低いとみています。
(寺沢さん)
「弥生時代の北部九州では副葬品の量などで、埋葬されている人の地位が推測できます。5千人程度の共同体の首長である「オウ」なら、鏡一枚程度。地位が上がるにつれて、武器や宝飾品など、副葬品が増えていくのです。例えば倭国の王である卑弥呼クラスの墓であれば、その中には、数十枚の鏡や中国にしかないような特別な宝物などが入っているでしょう。副葬品が何もないのであれば、残念ながら身分はそれほど高くない人物だ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九州説を支持する高島さんは、吉野ヶ里の地域において身分が高い人物だと評価する一方、近畿説を支持する寺沢さんは際だって身分が高いとは言えないと意見が分かれました。
【九州説】邪馬台国は、外国との窓口である九州にあった?
では、邪馬台国の所在地についてはどのように考えられるのでしょうか。2人は邪馬台国について記述のある「魏志倭人伝」など中国の文献にその謎を解くヒントがあるといいます。
高島さんは、当時東アジア世界の盟主であった中国との関係から、邪馬台国のあった場所は九州だとみています。
(高島さん)
「北部九州では、中国と盛んに交易が行われていたことを示す出土品が多く見つかっています。私は北部九州のそうした交易圏を基盤に女王国連合が成立したのではないかと考えています。
魏志倭人伝によると、卑弥呼が都する場所には物見やぐらや城柵が設けられ、兵によって常に守られていると書かれています。これは九州の遺跡に特徴的な環濠(ごう)集落を想起させますよね。また卑弥呼が、中国・魏の王朝が遼東半島の公孫氏を滅ぼした翌年にすぐ使者を送ったことも記録があります。卑弥呼は東アジアの国際情勢に非常に詳しい、たぐいまれなる外交センスの持ち主だったのです。当時、海外の情報がすぐに入手できるような場所といえば、古くから中国や朝鮮半島と交流が盛んだった北部九州ではないでしょうか。つまり卑弥呼がいた邪馬台国は、北部九州にあったと考えるのが合理的です。ただ、吉野ヶ里遺跡がそのまま邪馬台国だったかというと、そういう話でもない。九州説を唱える専門家の間でも、その正確な所在地に関しては意見が分かれているところです」
寺沢さんも、九州にかつて大きな政治権力が存在したことは揺るぎないといいます。
(寺沢さん)
「2世紀の段階、つまり卑弥呼という人が共立される以前は、間違いなく九州に大きな政治権力がありました。九州は戦争を介在して国家の形成がとくに早く進んだ場所です。海外との交易も盛んで、副葬品も近畿では見られない立派なものがたくさん出土しています」
【近畿説】3世紀に日本の中心が近畿に移った?
しかし寺沢さんは、卑弥呼が共立された3世紀には、近畿に日本の中心が移ったと考えています。
(寺沢さん)
「3世紀になると、突然纒向(現在の奈良県)に大きな集落が現れます。当時日本最大とされる王宮跡があり、全国から土器が集まる物流の拠点で、まじないも行われていた痕跡が残っています。つまり、政治・経済・祭祀(さいし)の中心として纒向が機能し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私が描く枠組みはこうです。もともと大陸に近い伊都国(現在の福岡県)が倭国(日本)の政治と外交の中心でした。この伊都国を盟主とする体制を『イト倭国』と呼びます。ところが2世紀末に後漢王朝が衰退して権威が弱まるに伴い、この『イト倭国』も求心力を失い、政治や外交の窓口としての役割を果たせなくなりました。その後、遼東半島から朝鮮半島で勢力を持っていた公孫氏に促される形で、西日本の主要なクニが集まって話し合い、卑弥呼を新たな倭国の女王として共立したのです。このとき新たな倭国の都として建設されたのがヤマト国(邪馬台国)内の纒向遺跡というわけです。ここでポイントなのは、こうして生まれた新しい倭国=卑弥呼の政権は、これまでの『イト倭国』とはまったく異なる連立王権で、領域もはるかに拡大したものだということです。新しい倭国は私たちが今まで『ヤマト王権』と呼んできた政体そのものであり、日本が“王国”という段階に達したことを意味するものだと私は考えています」
さらに魏志倭人伝の記述と照らし合わせても、邪馬台国は近畿(纒向)にあったと考えるのが妥当だといいます。
(寺沢さん)
「3世紀には『各地に王がおり、すべて女王(卑弥呼)に統属している』という記述があります。つまり、2世紀ころに強大な権力を持っていた伊都国(現在の福岡県)は、3世紀には卑弥呼の支配下に入っているということ。それくらい卑弥呼は当時の日本において影響力を持つ存在でした。もし九州が当時の日本の中心だったというのなら、九州のどこかで伊都国をしのぐ規模の遺跡が見つからなければおかしいのです。今出ている学説は、考古学データと文献を照らし合わせ50年間積み上げてきた到達点で、そう簡単には変わらない。そろそろ邪馬台国が九州か近畿かという話を脱し、この国の成り立ちについて本質的な議論を先に進めたいと思っています」
邪馬台国の姿に迫ることで日本の成り立ちが見えてくる
両者譲らぬ邪馬台国論。その根底にあるのは「自分たちの国がどうやって成り立ち、ルーツがどこにあるのかを知りたい」という探究心です。考古学のデータと文献の解釈を照らし合わせながら仮説を立て、議論を深めることで古代日本の実像に迫っていく―
このことは、今を生きる私たちの社会のあり方を考えることにもつながっていると、取材を通して感じました。
(高島さん)
「皆さんがお宝を期待する気持ちも分かりますが、残念ながら邪馬台国論争は、くわの一掘りで決着がつくものではないのです。当時の中国・朝鮮の状況も踏まえた上で、どういう過程で日本という国家ができたかという筋書きをしっかり見通しながら考えることが、日本の歴史を考える上で最も大事なこと。とはいえ、私が30数年前の吉野ヶ里遺跡で経験したような、考古学史を塗り替える身が躍るような感動を皆さんにも味わってほしいという思いはありますね」
(寺沢さん)
「21世紀の今、世界はこんな形で動いていますが、この国の原型は戦争によってではなく話し合いで王が立てられることによって形作られました。そして最初の王と言われる人は女性だったのです。このことを現代に生きる私たちはどう捉えるのでしょうか。歴史を学ぶということは、単に過去を知る以上の意義があると私は思っています。そして私が考える考古学の魅力は、当時の現資料を目の当たりにできること。自分とそのものの間には、解釈も何も存在しないんです。一つ一つ道に落ちている石ころのようなものの中から、組み立てられそうなものを拾い、実際に一つの形あるものに仕上げていく。そういった考古学のだいご味を皆さんにも味わってほしいです」
※纒向の「纒」の字を誤って「纏」としていました。正しくは「纒」です。(2023年7月5日追記)
【関連番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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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 대국 어디에? 규슈설·긴키설/요시노가리 유적의 최신 발굴의 성과는? 전문가가 읽는다.
NHK
2023년 7월 4일 오후0:33 공개
사마 대국은 어디에 있었는가? 에도시대부터 연구가 이어지는 역사의 수수께끼입니다. 지금까지 '긴키설'과 '규슈설'로 나뉘어 논쟁이 나왔습니다.
그런 가운데, 작년, 요시노가리(요시노가리) 유적(사가현)에서 10년만에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사가 행해지고 있는 것은 「수수께끼의 에리어」라고 불려, 원래 「신분이 높은 사람의 무덤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전문가의 사이에서 주목받아 온 장소. 발견된 석관묘의 발굴의 결과, 부장품은 없고, 누가 장례되고 있었는지는 수수께끼인 채… 그래도 사람들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 소재지를 둘러싸고 의견이 나뉘는 '사마대국 논쟁'. 이번, 반세기 이상에 걸쳐 연구를 계속해 온 2명의 전문가에게, 각각이 생각하는 고대 일본의 모습과 향후의 논의의 전망에 대해 취재했습니다.
(후쿠오카 방송국 디렉터 마츠오 사토코)
【관련 프로그램】~7월 11일까지 놓치고 전달중
■타카시마 타다히라씨(사진 왼쪽)
사가 여자 단기 대학 명예 교수. 후쿠오카현 출신. 지금까지 60년 이상 요시노가리 유적 연구에 종사하고 있다. 사마대국 규슈설을 주창해 ‘미스터 요시노가리’의 이름으로 사랑받고 있다.
■테라자와 가오루씨(사진 오른쪽)
사쿠라이시 향향학 연구 센터 소장. 도쿄도 출신. 킨키설의 논거가 되는 마카무쿠 유적(나라현)의 발굴 및 야요이·고분 시대의 정치 연구에 50년 가까이 종사한다. 주요 저서에 "야요이 국가론-국가는 이렇게 태어났다" "비야호와 야마토 왕권" 등.
규슈설에 큰 영향을 준 것이 요시노가리 유적입니다. 울타리와 해자에 둘러싸인 마을이나 큰 궁전 흔적, 물건과 덩굴 등, 와시 왜인전의 기술과 겹치는 건물이 차례로 발견되어, 1989년에 크게 보도되면, 3개월 부족한 사이에 100만명 이상이 방문하는 요시노가리 발열이 일어났습니다.
그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올해 6월, 여왕·비야호의 시대와 겹치는 것으로 보이는 석관묘가 발견되어, 다시 주목이 모였습니다.
무덤의 주님은 도대체 어떤 사람?
이번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발굴된 것은 폭 36cm, 길이 1m 80cm의 석관. 1장 100킬로를 넘는 돌 뚜껑에는, 그 외측에 「×」나 「십」이라고 하는 교차한 선 “선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닥에 돌은 사용되지 않고, 그 형상으로부터 야요이 시대 후기의 무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부는 토사로 묻혀 부장품이나 인골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석관 내부 전체에 적색 안료가 칠해진 흔적이있었습니다.
주목이 모인 것은 이 무덤에 누가 매장되었는가라는 것.
요시노가리 연구의 제일인자인 타카시마 타다히라씨는, 무덤의 주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다카시마씨)
“현저한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적색 안료가 나온 적도 있어, 무덤의 주인이 당시의 요시노가리 지역에서 신분이 높은 인물인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또, 요시노 가리 유적에서는 지금까지 뛰어난 실크 직물이 많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실은 사라져 버린 어떠한 부장품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상상하고 있습니다.향후 주변의 조사를 진행해, 이번 출토한 석관의 취락에 있어서의 자리매김을 요시노가리의 거대 환취(고우) 취락이라고 생각해 가면, 사마 대국에의 연결이 밝혀지는 단서가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한편, 긴키설의 논거가 되는 나라현의 향향 유적을 오랜 세월 연구해 온 테라자와 가오루씨는, 이번 발굴된 무덤의 주인이, 때때로 신분이 높은 인물일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습니다.
(테라자와 씨)
「야요이 시대의 북부 규슈에서는 부장품의 양 등으로, 매장되고 있는 사람의 지위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5천명 정도의 공동체의 수장인 「오우」라면, 거울 한 장 정도. 지위가 오르면 무기와 보석품 등 부장품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왜국의 왕인 비야호 클래스의 무덤이라면 그 안에는 수십장의 거울이나 중국밖에 없는 특별한 보물 등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부장품이 아무것도 없다면, 불행히도 신분은 그리 높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이 아닐까요」
규슈설을 지지하는 다카시마씨는, 요시노가리의 지역에서 신분이 높은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한편, 긴키설을 지지하는 테라자와씨는 때때로 신분이 높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규슈설】 방해대국은, 외국과의 창구인 규슈에 있었다?
그렇다면 사마 대국의 위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두 사람은 사마대국에 대해 기술이 있는 ‘위시 왜인전’ 등 중국 문헌에 그 수수께끼를 푸는 힌트가 있다고 합니다.
다카시마씨는 당시 동아시아 세계의 맹주였던 중국과의 관계에서 방해대국이 있던 장소는 규슈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카시마씨)
“북부 규슈에서는 중국과 활발하게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출토품이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
魏志倭人伝에 의하면, 비야호가 도시하는 장소에는 물견이나 구라야 성 울타리가 설치되어, 병사에 의해 항상 지켜지고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규슈의 유적에 특징적인 환호 마을을 상기시키는군요. 또 비야호가 중국·위의 왕조가 요동반도의 공손씨를 멸망한 다음 해에 바로 사자를 보낸 것도 기록이 있습니다. 卑弥呼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에 매우 상세한, 드문 드문 외교 센스의 소유자였습니다. 당시 해외의 정보를 곧바로 입수할 수 있는 장소라고 하면, 옛부터 중국이나 한반도와 교류가 활발했던 북부 규슈가 아닐까요. 즉 비야호가 있던 방해대국은 북부 규슈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다만, 요시노가리 유적이 그대로 방해대국이었는가 하면, 그런 이야기도 아니다. 규슈설을 주창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그 정확한 소재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나뉘어져 있는 곳입니다」
테라자와씨도, 규슈에 한때 큰 정치권력이 존재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테라자와 씨)
“2세기 단계, 즉 비야호라는 사람이 공립되기 전에는 확실히 규슈에 큰 정치권력이 있었습니다. 도 번성하고, 부장품도 긴키에서는 볼 수 없는 훌륭한 것이 많이 출토하고 있습니다」
【긴키설】3세기에 일본의 중심이 킨키로 옮겼다?
그러나 테라자와씨는 비야호가 공립된 3세기에 긴키에 일본의 중심이 옮겨졌다고 생각합니다.
(테라자와 씨)
“3세기가 되면 갑자기 뺨(현재 나라현)에 큰 마을이 나타납니다. 가 남아 있습니다.즉, 정치·경제·제사(사이시)의 중심으로서 향향이 기능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내가 그리는 틀은 이렇게입니다.원래 대륙에 가까운 이토국(현재의 후쿠오카현)이 왜국(일본)의 정치와 외교의 중심이었습니다.이 이토국을 맹주로 하는 체제를 「이트 왜국」이라고 부릅니다.그러나 2세기 말에 후한 왕조가 쇠퇴해 권위가 약해짐에 따라, 이 「이트 왜국 '도 구심력을 잃어, 정치나 외교의 창구로서의 역할을 완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그 후, 요동반도에서 한반도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던 공손씨에게 촉구되는 형태로, 서일본의 주요한 게가 모여 토론 , 비야호를 새로운 왜국의 여왕으로서 공립한 것입니다.이 때 새로운 왜국의 도시로서 건설된 것이 야마토국(사마 대국)내의 향향 유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여기서 포인트인 것은 이렇게 태어난 새로운 왜국=비야호의 정권은, 지금까지의 「이트 왜국」과는 완전히 다른 연립 왕권으로, 영역도 훨씬 확대한 것입니다.새로운 왜국은 우리가 지금까지 「야마토 왕권」이라고 불러온 정체 그 자체이며, 일본이 “왕국”이라는 단계에 이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와시 왜인전의 기술과 비추어도, 사마대국은 킨키(纒向)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합니다.
(테라자와 씨)
「3세기에는 『각지에 왕이 있어 모두 여왕(비야호)에 통속하고 있다』라는 기술이 있습니다. 3세기에는 비야호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다는 것. 에서 이토국을 능가하는 규모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으면 이상합니다.지금 나와 있는 학설은, 고고학 데이터와 문헌을 비추어 50년간 쌓아 온 도달점으로, 그렇게 간단하게는 변하지 않는다.슬슬 방해 타이국이 규슈인지 킨키라는 이야기를 벗고, 이 나라의 성립에 대해 본질적인 논의를 먼저 진행하고 싶습니다.」
사마 대국의 모습에 다가가 일본의 성취가 보인다
양자 양보하지 않는 방해대 국론. 그 근저에 있는 것은 “자신들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싶다”는 탐구심입니다. 고고학의 데이터와 문헌의 해석을 비추면서 가설을 세우고, 논의를 깊게 하는 것으로 고대 일본의 실상에 다가가는―
이것은 지금을 사는 우리 사회의 방식을 생각하는 것도 연결되어 있다는 취재를 통해 느꼈습니다.
(다카시마씨)
"여러분이 보물을 기대하는 기분도 알겠지만, 불행히도 사마대국 논쟁은, 쿠와의 한 파에서 결착이 붙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중국·조선의 상황도 근거로 한 뒤, 어떤 과정에서 일본이라는 국가가 생겼는가 하는 근거를 제대로 전망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일본의 역사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 고고학사를 바꾸는 몸이 뛰는 감동을 여러분에게도 맛보길 바란다는 생각은 있네요」
(테라자와 씨)
“21세기의 지금 세계는 이런 형태로 움직이고 있지만, 이 나라의 원형은 전쟁이 아닌 토론으로 왕이 세워짐으로써 형성되었다. 왜냐하면 이것을 현대에 사는 우리는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당시의 현 자료를 눈에 띄게 할 수 있는 것.자신과 그 사이에는 해석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워, 실제로 하나의 형태 있는 것으로 완성해 간다.그런 고고학의 맛을 여러분에게도 맛봐 주었으면 합니다」
※ 편향의 「纒」의 글자를 잘못해서 「纏」로 하고 있었습니다. 정확하게는 '증'입니다. (2023년 7월 5일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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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生真
천리대학 졸업이므로(쓴웃음) 초등학생은 킨키설을 격추하는 것이지만, 카우카타 유적의 발굴 등 최근의 고고학의 성과도 쫓아내는 것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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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반도나 중국 대륙과의 근접성을 강조하는 규슈설에 비하면 현대의 나라현은 입지라는 면에서 보고 깃발색이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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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그 주변은 순연한 농촌이며, 현대인이 「만요 로망」이라고 할 때, 내륙의 시골 지대로 화한 후세의 나라의 이미지를 과거에 투영하고 있는 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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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옛 나라 분지를 지금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대의 나라 분지에는 「나라호」라고 불리는 넓은 호수가 있어 야마토강을 통해 바다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길 '산변의 길'이 왜 나라에서 천리의 이시가미 신궁을 경유하여 삼륜으로 이어지는 산전을 달리고 있는가 하면 고대의 나라 분지의 중심부는 호수와 습지대 그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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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야마토강도 현재와 같이 똑바로 서쪽으로 흘러 오사카만에 웅덩이가 된 것은 후세(1704년)의 교체 공사의 결과이며, 원래 우에마치 대지의 동쪽에 가와치코라는 큰 호수가 있어 , 구 요도가와와 합류해 바다에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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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엽집'에도 포명천황이 향구산 위에서 '갈매기'가 날아가는 광경을 읊는 노래가 있지만, 지금의 야마토 산야마 주변에서 갈매기 등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거기서 이른바 '갈매기'는 물새의 총칭이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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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무렵의 나라 분지에 바다와 이어지는 큰 수역이 있었다면 나라에 갈매기가 있어 천황이 그것을 노래로 읊어도 이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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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비야호의 시대에는, 오사카만에서 구 야마토강을 거슬러 올라가 배로 나라 분지에 들어가, 지금의 우향 유적 근처까지 올 수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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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에 와서 알게 된 것이지만, 한반도의 금강하구에서 오사카까지는 배로 일주일 동안 황해를 가로질러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의 장안까지 한 달만에 갈 수 있었다고 한다. 후기 백제가 수도했던(공주·익산·부여) 금강유역은 동아시아 수운의 요충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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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라 분지에서 구 야마토강~가와치코를 통해 우에마치 대지를 가로질러 오사카만에서 세토내해를 빠져 한반도나 중국 대륙에 가는 것도 당연히 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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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해보면 대륙에서 멀다는 사마대국기 내설의 약점은 해소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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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理大学卒なので(苦笑)小生は近畿説を激推しするのだが、纏向遺跡の発掘など近年の考古学の成果も追い風になっているのがうれし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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ただ、朝鮮半島や中国大陸との近さを強調する九州説に比べると、現代の奈良県は、立地という面からみて旗色が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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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直言って今のあの辺りは純然たる農村であって、現代人が「万葉ロマン」とかいう時、内陸の田園地帯と化した後世の奈良のイメージを過去に投影している節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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しかし、昔の奈良盆地を今のように考えていてはいけない。古代の奈良盆地には「奈良湖」とよばれる広い湖があり、大和川を通して海とつながっていたという。日本最古の道「山の辺の道」がなぜ奈良から天理の石上神宮を経由して三輪へと続く山すそを走っているのかというと、古代の奈良盆地の中心部は湖や湿地帯だったからだという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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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大和川も現在のようにまっすぐ西に流れて大阪湾にそそぐようになったのは後世(1704年)の付け替え工事の結果であり、もともと上町台地の東側に河内湖という大きな湖があって、旧淀川と合流して海に繋がっていたとい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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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万葉集』にも、舒明天皇が香具山の上から「カモメ」が飛び立つ光景を詠む歌があるが、今の大和三山の周辺でカモメなど全然想像もできない。だからそこでいういわゆる「カモメ」は水鳥の総称だっ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解釈も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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しかし、その頃の奈良盆地に海と繋がる大きな水域があったとすれば、奈良にカモメがいて天皇がそれを歌に詠んでも不思議では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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まして卑弥呼の時代には、大阪湾から旧大和川を遡って船で奈良盆地に入り、今の纏向遺跡近くまで来ることもできたのではない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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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山に来て知ったことだが、朝鮮半島の錦江河口から大阪までは船で一週間、黄海を横切って黄河を遡れば中国の長安までも一ヶ月で行けたという。後期の百済が都した(公州・益山・扶余)錦江流域は東アジア水運の要衝だったわけ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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だとすれば、奈良盆地から旧大和川~河内湖を通って上町台地を横切り、大阪湾から瀬戸内海を抜けて朝鮮半島や中国大陸に行くことも当然可能だったであ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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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ように考えていくと、大陸から遠いという邪馬台国畿内説の弱点は解消されること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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