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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준만 (지은이)   인물과사상사   2011-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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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2쪽
    • 152*223mm (A5신)
    • 605g
    • ISBN 9788959061891

책소개

노무현 정권 시절 강남 좌파 현상을 최초로 제기한 강준만 교수는 이번 책에서 더욱 풍성하고 정교한 논리를 동원해 강남 좌파의 실체와 논란을 집대성했다. ‘이념은 좌파적이나 생활은 강남 사람 같다’는 일반적인 정의를 뛰어 넘어 강남 좌파의 유형을 총 9가지로 분류해 총체적인 분석을 시도한다.

강남 좌파의 어원과 등장 배경은 물론 그 원조격이라 할 ‘강단 좌파’와 미국의 ‘리무진 진보주의자’에 대해서도 언급을 빼놓지 않는다. 아울러 왜 모든 정치인은 강남 좌파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며 2012년 대선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조국,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 오세훈, 박근혜에 대해 흥미진진한 인물비평을 가한다.

‘강남 좌파’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건 노무현 정권 중후반인 2006년 즈음이다. ‘정치적·이념적으론 좌파지만 소득수준과 라이프스타일은 강남 주민스럽다’는 부정적인 뜻으로, 일부 보수진영이 ‘386’으로 대변되는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고자 사용했다. 세간에 떠돌던 이 용어를 공론의 장으로 끄집어내 논의를 점화시킨 인물이 바로 강준만 교수였다.

저자는 『월간 인물과 사상』2006년 5월호에 「강남 좌파 : ‘엘리트 순환’의 수호신인가?」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이는 강남 좌파 논란을 공론화한 첫 시도였다. 강 교수는 이 글에서 “계급적으로 상류층에 속하면서 상류층의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사람이 진보적 가치를 역설하는 게 위선이 아니냐는 문제제기는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지적하며, 강남 좌파의 일장일단을 정리한다.

목차

머리말 모든 정치인은 강남 좌파다
강남 좌파의 명암 | 강남 좌파는 엘리트에 관한 문제 | ‘인물 중심주의’ 이분법의 재앙 | ‘편향성이 이익이 되는 장사’

제1장 강남 좌파는 강남에 사는 좌파인가?: 강남 좌파 논쟁은 엘리트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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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 지은이: 강준만 
  • 최근작 : <인문학과 손잡은 영어 공부 1>,<[큰글자책] 당신의 운명을 사랑하라>,<[큰글자책] 당신의 영혼에게 물어라> … 총 559종 (모두보기)
  •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강준만은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이다. 전공인 커뮤니케이션학을 토대로 정치, 사회, 언론, 역사, 문화 등 분야와 경계를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저술 활동을 해왔으며,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통찰을 바탕으로 숱한 의제를 공론화해왔다.
    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국의 저자 300인’, 2014년에 『경향신문』 ‘올해의 저자’에 선정되었다. 저널룩 『인물과사상』(전33권)이 2007년 『한국일보』 ‘우리 시대의 명저 50권’에 선정되었고, 『미국사 산책』(전17권)이 2012년 한국출판인회의 ‘백책백강(百冊百講)’ 도서에 선정되었다.
    2013년에 ‘증오 상업주의’와 ‘갑과 을의 나라’, 2014년에 ‘싸가지 없는 진보’, 2015년에 ‘청년 정치론’, 2016년에 ‘정치를 종교로 만든 진보주의자’와 ‘권력 중독’, 2017년에 ‘손석희 저널리즘’와 ‘약탈 정치’, 2018년에 ‘평온의 기술’과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2019년에 ‘바벨탑 공화국’과 ‘강남 좌파’, 2020년에 ‘싸가지 없는 정치’와 ‘부동산 약탈 국가’, 2021년에 ‘부족주의’, 2022년에 ‘퇴마 정치’와 ‘좀비 정치’, 2023년에 ‘정치 무당’ 김어준과 MBC의 ‘흑역사’ 등 대한민국의 민낯을 비판하면서 한국 사회의 이슈를 예리한 시각으로 분석했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당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MBC의 흑역사』, 『무지의 세계가 우주라면』, 『공감의 비극』, 『정치 무당 김어준』, 『퇴마 정치』, 『반지성주의』, 『정치적 올바름』, 『엄마도 페미야?』, 『정치 전쟁』, 『좀비 정치』, 『발칙한 이준석』, 『단독자 김종인의 명암』, 『부족국가 대한민국』, 『싸가지 없는 정치』,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 『부동산 약탈 국가』, 『한류의 역사』,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강남 좌파 2』, 『바벨탑 공화국』,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평온의 기술』, 『약탈 정치』(공저), 『손석희 현상』, 『박근혜의 권력 중독』, 『힐러리 클린턴』, 『도널드 트럼프』,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 『지방 식민지 독립선언』,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싸가지 없는 진보』, 『감정 독재』,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갑과 을의 나라』, 『증오 상업주의』,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책』(전23권), 『한국 근대사 산책』(전10권), 『미국사 산책』(전17권)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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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강준만 교수의 논쟁적 문제제기
모든 정치인은 강남 좌파다!

강준만, 이번엔 ‘강남 좌파’다!

탁월한 인물비평과 사회비평으로 숱한 의제를 이슈화로 만든 강준만 교수가 이번엔 ‘강남 좌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이미 노무현 정권 시절 강남 좌파 현상을 최초로 제기한 강 교수는 이번 책에서 더욱 풍성하고 정교한 논리를 동원해 강남 좌파의 실체와 논란을 집대성했다. ‘이념은 좌파적이나 생활은 강남 사람 같다’는 일반적인 정의를 뛰어 넘어 강남 좌파의 유형을 총 9가지로 분류해 총체적인 분석을 시도한다. 강남 좌파의 어원과 등장 배경은 물론 그 원조격이라 할 ‘강단 좌파’와 미국의 ‘리무진 진보주의자’에 대해서도 언급을 빼놓지 않는다. 아울러 왜 모든 정치인은 강남 좌파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며 2012년 대선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조국,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 오세훈, 박근혜에 대해 흥미진진한 인물비평을 가한다.

강남 좌파 용어의 등장
‘강남 좌파’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건 노무현 정권 중후반인 2006년 즈음이다. ‘정치적·이념적으론 좌파지만 소득수준과 라이프스타일은 강남 주민스럽다’는 부정적인 뜻으로, 일부 보수진영이 ‘386’으로 대변되는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고자 사용했다. 세간에 떠돌던 이 용어를 공론의 장으로 끄집어내 논의를 점화시킨 인물이 바로 강준만 전북대 교수였다. 강 교수는 『월간 인물과 사상』2006년 5월호에 「강남 좌파 : ‘엘리트 순환’의 수호신인가?」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이는 강남 좌파 논란을 공론화한 첫 시도였다. 강 교수는 이 글에서 “계급적으로 상류층에 속하면서 상류층의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사람이 진보적 가치를 역설하는 게 위선이 아니냐는 문제제기는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지적하며, 강남 좌파의 일장일단을 정리한다.

강남 좌파의 명암
강 교수가 주장한 강남 좌파의 명암은 다음과 같다.
우선 긍정론이다. 첫째, 상류층 사람이 진보적 가치를 역설하는 건 하층계급에 큰 힘이 된다. 상류층 사람이 점하고 있는 위치의 파워 덕분이다. 둘째, 갈등의 양극화를 막는 데에 도움이 된다. 모든 상층계급은 보수, 모든 하층계급은 진보라면 갈등이 살벌해지겠지만, 상층에도 진보가 있고 하층에도 보수가 있다는 건 양쪽의 충돌 예방에 도움이 된다. 셋째, 상류층에 속하면서도 하층계급을 생각하는 마음이 고맙다. 그걸 위선으로 보겠다면, 이 세상에 위선이 아닌 건 없을 것이다.
다음은 부정론이다. 첫째, 권력·금력까지 누리면서 양심과 정의의 수호자로 평가받는 이른바 ‘상징자본’까지 갖겠다는 건 지나치다. 빈털터리라도 세상을 향해 큰소리치면서 사는 맛이라는 게 있는 법인데, 그런 ‘도덕적 우월감’까지 상류층이 누린다는 건 부당하다. 둘째, 진보를 더 많은 권력·금력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 강남 좌파의 진보 프로그램은 하층계급의 절박함을 모르기 때문에 진정성이 결여돼 있으며, 상징적인 제스처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셋째, 강남 좌파의 진보 프로그램은 말로만 강경한 속성이 있어 실천보다는 당위의 역설로 그칠 가능성이 높고, 오히려 해낼 수 있는 실천마저 어렵게 만들 수 있다.

강남 좌파의 지형도
강 교수는 강남 좌파의 유형을 1. ‘강남’의 성격, 2. 주체의 위상, 3. ‘좌파’의 실천 등 3가지 관점에서 각 3가지 유형으로 총 9가지로 분류한다.

1. ‘강남’의 성격이라는 관점
1) 경제적 강남 좌파 : 부자가 좌파 성향을 갖는 가장 일반적인 유형.
2) 문화적 강남 좌파 : 부자는 아니나 라이프스타일 등에서 강남 성향을 드러내는 유형.
3) 연고적 강남 좌파 : 부자도 아니고 라이프스타일도 강남 성향이 아닐지라도 최상급의
학벌을 갖고 있어 그 학벌이 제공하는 학연 인맥의 혜택을 누리면서
엘리트 위치를 누리는 유형.

2. 주체의 위상이라는 관점
1) 공적 강남 좌파 : 지도자 · 정치인 · 고위 공직자 등의 강남 좌파.
2) 중간적 강남 좌파 : 언론인 · 시민운동가 · 대학교수 등의 강남 좌파.
3) 사적 강남 좌파 : 일반 시민 등.

3. ‘좌파’의 실천이라는 관점
1) 이타적 강남 좌파 : 자신의 좌파적 이념과 일상적 삶의 수준과 방식을 일치시키려고
애쓰는 사람들로 사심 없이 좌파적 실천을 위해 헌신하는 유형.
2) 합리적 강남 좌파 : 자신의 ‘강남성’과 이념을 분리시켜, 전자에 대해선 정당한 수준의 이기심을 발휘하지만 후자에 대해선 자신의 소신에 따라 좌파를 지향하는 사람들로 자신의 좌파적 의식이나 행동으로부터 소박한 수준의 ‘자기만족’이나 ‘인정욕구 충족’을 넘어선 사적 이익은 취하지 않는 유형.
3) 기회주의적 강남 좌파 : 사실상 좌파 성향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좌파 성향을 드러내고 이용하는 유형.

강 교수는 이 가운데 ‘공적 강남 좌파’(지도자 · 정치인 · 고위 공직자)가 ‘기회주의적 강남 좌파’ 노릇을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며, 강남 좌파에 대한 비판의 대부분도 이러한 강남 좌파를 겨냥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모든 정치인은 강남 좌파다!
강 교수는 ‘모든 정치인은 강남 좌파다’고 주장한다. 왜인가? 그의 말을 들어보자.
좌우를 막론하고 리더십을 행사하는 정치 엘리트가 되기 위해선 학력·학벌에서부터 생활수준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사회적 성공을 거두어야 하므로, 정치 영역에서 활동하는 모든 좌파는 강남 좌파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무조건 강남 좌파 자체를 비판하는 건 좌파를 싸잡아 비판하겠다는 우파의 정치적 책략이라는 혐의를 피하기 어렵다. 아니, 우파라도 서민을 상대로 포퓰리즘(populism: 민중주의) 자세를 취하는 게 ‘정치의 문법’인바, 우파 정치인에게도 강남 좌파 요소가 농후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농후하다뿐인가. 우파는 강남 좌파를 ‘위선의 화신’인 양 비난하면서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고 하지만, 그들 역시 말로는 늘 국가와 민족이 잘되게 하겠다는 이타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사실상 강남 좌파 행세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모든 정치인은 강남 좌파다”는 논리가 가능한 것이다.

강남 좌파, ‘이념’보다 ‘엘리트’ 문제다

강 교수는 강남 좌파의 문제는 ‘이념’보다는 ‘엘리트’ 문제로 접근해야 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뉴욕대 정치학 교수 버나드 마넹의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은 ‘새로운 엘리트의 부상과 다른 엘리트의 퇴조’일 뿐”이라는 말을 언급하며, 이는 마넹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민주주의 전문가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강남 좌파에서 ‘좌파’는 부차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게 강 교수의 주장이다. 기존 엘리트 지배 체제를 당연시하면서 자꾸 ‘보수 대 진보’의 이념 대결 구도로 몰고 가면 이 문제는 풀리지 않으며, ‘엘리트 대 비(非)엘리트’의 구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엘리트들의 ‘승자 독식주의’가 지속되는 한 대중은 늘 그들의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강남 좌파 프리즘으로 본 대선 주자들

제1장과 제2장에서 강남 좌파에 대한 논의와 실체를 분석한 강 교수는 제3장부터 본격적인 인물비평(실명 비판)을 가한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3장 위선에 대한 분노인가?: 노무현 시대의 강남 좌파 논쟁
‘배부른 진보’·‘강남 좌파’ 등의 용어가 노무현 정권 시절에 등장하게 된 배경과 이유를 다루었다. 이때의 강남 좌파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노 정권의 위선 또는 이미지·실체 사이의 괴리를 겨냥한 비판이었다.

제4장 오마이뉴스의 강남 좌파 띄우기: 문국현의 창조한국당
일부 진보세력이 진보정권 재창출의 전망이 부재한 가운데 정치공학적 용도로 신(新) 강남 좌파를 등장시킨 사건을 다루었다. 강남 좌파 요소가 조금 있었을망정 노 정권 상층부의 주요 구성원들은 이미지상으론 강남 좌파와는 거리가 멀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거나, “냉동실에 들어갔던 고기가 해동되면 더 빨리 썩는다”는 비아냥의 연장선상에서, 강남 좌파라는 딱지가 달라붙은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미지가 정반대인 정통 강남 좌파야말로 그런 비아냥을 원천봉쇄하는 동시에 유능하고 세련된 이미지로 노 정권에 대한 실망·좌절·환멸을 역전시킬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을 법하다. 그게 바로 오마이뉴스가 ‘강남 좌파 띄우기’를 한 배경이었다. 이는 ‘정치엘리트의 급조’라 부를 만한 것이었지만, 그 바탕엔 유권자들의 뿌리 깊은 기성정치 혐오와 새것을 좋아하는 ‘새것 신드롬’이 있었다.
제5장 왜 또다시 강남 좌파인가?: 조국-오연호의 진보 집권 플랜
오마이뉴스가 대선 시즌을 맞아 이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강남 좌파 띄우기’를 시도하는 사건을 다루었다.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이유와 배경으로 시도된 일이지만, 지난 5년간 이루어진 한국 사회의 변화상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적한 일반인 강남 좌파의 커밍아웃으로 상징되는 강남 좌파층의 확대, 이명박 정권의 ‘촌스러움’에 대한 유권자들의 절망, 여전히 상존하거니와 더욱 강해진 기성정치에 대한 혐오 등이 그 변화상의 주요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제6장 왜 박근혜는 침묵하는가?: 박근혜 인기의 비밀
박근혜 인기의 비밀 중 하나가 부정적 의미의 강남 좌파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하였다. 위선의 반대는 침묵인가? 그녀의 침묵마저 정치적 자산이 되는 이상 현상이 제기하는 질문이다. 박근혜 지지자들이 지지의 이유로 그녀의 신뢰·헌신·애국심 등을 꼽는 것은 복고적 엘리트주의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 이면엔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가 노정하는 한계에 대한 염증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7장 분당은 미리 보는 2012년 대선인가?: 손학규의 재기
좌파에서 우파를 거쳐 다시 분당 좌파로 재기에 성공한 손학규를 다루면서 분당 좌파·강남 좌파는 분당 우파·강남 우파 정권에 대한 반감과 반작용으로 부각된 면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 ‘반감과 반작용’은 한국의 모든 선거를 지배하는 철칙으로 정치 엘리트들에게 성찰을 필요 없게 만드는 주요 이유가 되고 있다. 좌우 진영을 옮겨 다니다가 유력 대선 후보가 된 ‘손학규 현상’은 전례가 없는 일이기에, 그의 정치적 행보와 운명은 강남 좌파에 대한 논의를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이다.

제8장 노무현 정신으로 돌아가자: 유시민의 국민참여당
제9장 이명박 정권이 나라를 망친다: 문재인의 분노
노무현과 노 정권에 덧쓰인 부정적 강남 좌파 이미지를 벗기고 명예 회복을 위해 분투하는 유시민과 문재인의 ‘인물 중심주의’ 정치관을 다루었다. 이들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평가는 민주화 이전의 엘리트주의와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충돌로 인해 매우 복잡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제10장 강남 우파의 강남 좌파적 언어: 오세훈의 ‘따뜻한 보수’
강남 우파이면서도 강남 좌파적 언어를 전복적으로 구사하면서 반(反)포퓰리즘 노선을 전투적으로 밀어 붙이는 오세훈의 전투적 ‘프레임 전략’을 다루었다. 소통을 희생으로 한 그의 ‘프레임 전략’은 정치엘리트의 ‘브랜드화 전략’에 대한 우리 모두의 주목을 요하는 사건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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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루  2011-07-27
  • 추천합니다.읽고나서 비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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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sigene  2011-08-08
  • 강준만이 드디어 박근혜의 빠로 등장하나...열받는다 제발 이 책 사시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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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보라  2011-08-07
  • 좌파계의 터부 혹은 암묵적 동의에 의한 눈감아주기 강남좌파에 현미경을 들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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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금연못  2011-09-26
  • 진짜 강남이라는 토양에 좌파가 자라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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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시프  2011-08-02
  • 진정성보다 가치와 정책의 실효성있는 실현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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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oosl88  2011-08-25
  • 강남좌파 보다 인물 비평이 상당량을 차지하는군요ㅋㅋ 인물 비평 너무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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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푸키  2011-09-21
  • 이 책이야 말로 인물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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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찌리릿  2011-10-11
  • 오랜만에 읽은 강준만 선생 책! 역시 재밌다. 그런데 왜 책이 뜨질 못했을까 아쉽다. 이제 강준만도 잊혀진 사람이 되는건가? 그런데 진중권과 김어준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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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보리  2012-07-04
  • 어떤 사람인지 정체성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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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huita  2022-02-13
  • 엘리트 정치의 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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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  모든사이   2011-09-04

  • 강준만의 <강남좌파>(인물과사상사)는 이른바 ‘강준만식 글쓰기’의 전형적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강준만식 글쓰기는 ‘실명비판’이나 ‘성역과 금기에 대한 도전’이니 하는 상찬들이 많았으나 나는 그것을 ‘짜깁기로서의 글쓰기’라고 부른다. 내 책장에 꽂힌 그의 책만도 30여권 정도에 이르는데, 그만큼 오랫동안 그의 책들을 읽어왔다. 처음 발간되었을 때 일인 저널룩이라는 새로운 발간형식으로 주목받았던 <인물과 사상>시리즈는 죄다 내다 버렸다. 아마 그 책까지 합친다면 더 많았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동안 꽤나 성실한 강준만의 애독자였던 셈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더 이상 그의 책을 읽지 않기로 했다. 세상에 읽을 책도 많은데, 이런 쓰레기같은 책을 읽는 것은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강남좌파>를 왜 ‘짜깁기로서의 글쓰기’라고 부르는가. 이유는 말 그대로 그의 글쓰기가 신문 기사와 칼럼, 인터넷 자료, 잡지 기사 등을 주제별로 모아 주석을 달아 펴낸 책이기 때문이다. 이 짜깁기가 그런대로 훌륭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는 그의 <현대사 산책> 시리즈일 것이다. 주제와 연도를 기준으로 주요 기사를 찾고 거기에 주석과 나름의 ‘평가’(?)를 덧붙인 이 짜깁기 시리즈는 당대의 역사를 당대의 저널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만 의미있는 책이다. <대중매체의 이론과 사상>이라는 대학원생 노트 수준의 글을 모아 전공서적이랍시고 펴내는 것을 보면, 그는 커뮤니케이션 학자라기 보다는 주제별 자료수집가 내지는 그냥 저널리스트라고 보는 게 맞다.

    그에 따르자면 <강남좌파>는 강남에 사는 좌파가 아니다. 강남은 “한국 자본주의이 농축된 형태”이고 노무현 정부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강남좌파는 실은 “엘리트”라는 이름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리무진 진보주의자, 보보스족과도 일맥상통하고 이명박 정부의 ‘촌스러움’ 때문에 반MB적 성향을 띠는 고학력 고소득층도 강남좌파다. 강준만은 이런 강남좌파를 1) 강남이 성격이라는 측면에서, 경제적 강남좌파, 문화적 강남좌파, 연고적 강남좌파로 구분하고 있고, 2) 주체의 위상이라는 측면에서 공적 강남좌파, 중간적 강남좌파, 사적 강남좌파로 구분한다. 3) 좌파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이타적 강남좌파, 합리적 강남좌파, 기회주의적 강남좌파로도 나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그의 ‘강남좌파’라는 구분은 주거지와 소득, 학력과 상관없이 진보적(좌파적?) 성향을 갖는 모든 사람을 두루 포괄하는 매우 광범위한 개념이다.

    미안하게도 이런 식의 개념은 저널적 흥미를 유발할 수는 있겠지만, 분석적인 개념으로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강남좌파’는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유복한 집의 자손이었던 엥겔스나 루카치도 강남좌파다. 최근 들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세력이 ‘촌스러움’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 외연이 더 넓어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아마 좌파적 실천을 넘어서 ‘미학적 감성’이라는 요소가 하나 더 추가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른바 래디컬한 유미주의자들은 늘 당대와 불화했다. 단적으로 오스카 와일드를 보라.)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라이프스타일이든 당대의 주류적 질서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을 쓰면 될 것이다. 이런 점은 그가 사회과학자라기 보다 저널리스트에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강남좌파’에 대한 특집기사를 내보낸 적이 있던 중앙일보는 강준만의 이 책이 나오자마자 대서특필하는 호들갑을 떨었는데, 자신들이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아젠다를 강준만이 응답한 것에 대한 반가움에서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강북우파는 여전히 계급배반 투표 성향을 보이고 있음에 비해 강남 우파의 계급투표 성향은 날로 강화되고 있다. 강북우파의 선택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바가 있지만, 휴전선 부근의 주민들이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것을 보면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른 정치적 선택은 날로 강화될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의 정당정치는 더 이상 애매모호한 정체성에 기반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물론, 우파의 문화적 헤게모니와 (가짜) 욕망의 정치가 위력적이라는 점에서 그다지 낙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강남좌파>를 보면서 가장 짜증났던 것은 강준만이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끌어들이고 있는 논거(라기 보다 인용) 때문이었다. 그는 강남좌파론에 기대어 우리시대의 대표적 정치인들을 차례차례로 불러내고 있는데, 그 정치인들의 목록은 노무현, 오마이뉴스(오연호), 조국, 박근혜,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 오세훈 등이다. 이들에 대한 강준만의 ‘비평’은 언론의 기사에 대한 인용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 범위는 한겨레와 경향을 넘어 조중동까지 이른다. 관련 기사의 진위, 칼럼의 정치적 배경, 사실 여부 같은 것은 그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듯하다. 언론의 기사는 항상 부분적 진실에 불과하다. 눈밝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국언론의 ‘사실보도’가 기실은 많은 경우 사실을 빙자한 허위이거나 과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언론의 사실에 대한 기율’은 한국언론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어느 기자에게 선배 기자가 했다는 말, “너는 기자가 아직도 ‘기사’를 믿니?”

    노무현에 대한 그의 글은 조선일보 사설(이 신문의 사설이 많은 경우 ‘사심많은’ 정파적 이념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것이다. 정파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정파성과 정파적 이익을 충실하다는 것을 은폐한채 보편타당한 주장을 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게 문제다.) , 뷰스앤뉴스의 박태견(그의 이른바 경제분석은 언제나 한국경제 붕괴론이고 망국론이다. 초치기의 전형을 보여주는 기사다.), 문화일보 논설위원 이신우(이 사람의 글이 과연 칼럼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것인가.), 서강대 명예교수 이태동(영문학을 전공한 인문학자중 이 사람처럼 공격적으로, 동시에 인문적 가치에 반하여 글을 쓰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경향신문 전남식 부국장(이 사람은 참여정부가 역대 정부중 언론에 대해 가장 억압적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유종일 KDI 교수(진보적 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노무현의 ‘아방궁’에 490억이 들어갔다는 언론의 오보를 그대로 생중계하는 사람이다.), 최장집 교수(참여정부가 사회경제적 개혁을 소홀히 했다는 최교수의 비판은 이 정부에 대한 가장 적확한 비판에 해당한다.) 등의 주장과 글들을 인용한다. 조선이나 동아, 문화와 매경, 심지어 한겨레와 경향이 동일선상에 놓이고 주제에 부합하기만 하면 장황하게 인용된다.

    박근혜에 대한 글에는 정치컨설턴트 박성민, 임철순 한국일보 주필, 조선일보 사설, 조국 교수,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 한겨레 성한용 기자, 동국대 강정구, 문화평론가 이재현,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 등등이 인용되고 예의 그, 수첩공주, 외모, 말투, 박정희 신화, 주변의 인물들이 거론된다. 언론 주변과 정치인 주변을 돌고 있는 풍문과 소문들, 뒤틀린 시각으로 본 칼럼과 정파적으로 해석된 언어와 행위들, 이 모든 것들이 강준만의 글쓰기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그래서 박근혜에 대한 강준만의 결론은? “맹목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충성파들이 쳐둔 인의 장막에 둘러싸인 박근혜의 모습, 그게 문제의 핵심이다. 박근혜의 당선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거창한 철학과 비전을 말할 필요도 없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 이 나라를 어떤 용인술로 이끌겠다는 것인지 그것이 중요하다.” 이런 정도의 비평은 따로 책으로 낼 것도 없이 그가 쓰는 신문 칼럼에 한번 쓰면 그만이다.

    소설가 이문열은 <삼국지>를 내면서 소설가로서의 역량도, 대중적 인기와 평가도 급전직하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가진 특유의 고집스러운 노골적인 우파적 시각(따라서 반페미니즘적)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이점에서 평론가 김현이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를 두고, '베끼기의 문학적 의미'라는 평론을 썼을때, 정작 김현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뒤의 이문열의 행보를 미리 짐작할 수 있었던 김현의 혜안에 감탄하게 된다. 이문열의 <삼국지>는 창작이 아니라 ‘베끼기’다. 소설가가 ‘베끼기’로 돌아섰을 때, 그것이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소설가로서는 이미 끝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문열이든, 황석영이든, 장정일이든 삼국지를 쓰면서부터 그들은 이미 퇴행의 길로 접어들었다.

    강준만은 베끼기에서 한참 더나아간 ‘짜깁기’다. 강준만의 <이건희 시대>를 읽고 이건희를 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심한 착각이 될 것이다. 골방에 틀어박혀 좀처럼 자신을 내비치지 않고 있는 이 은둔의 CEO에 대해, 언론을 통해 소개된 몇 개의 에피소드를 근거로 제대로 그를 평가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강준만은 초기 몇 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짜깁기’만을 해왔으니 그의 짜깁기 이력도 거의 20여년이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짜깁기에 동원된 재료들이 이미 반쯤 썩은 것들이니 아무리 잘 짜깁기해봐야 그건 짜깁기일 뿐이다. 짜깁기라도, 그의 연구실에 파일링되어 있는 이 쓰레기 자료들을 전부 폐기하고 다른 재료로 짜깁기를 했으면 좋겠다. 조중동을 그렇게 비판하면서 정작 글쓰기에 조중동 기사를 주요 글감으로 삼는 모순이라니, 더구나 커뮤니케이션 학자가. 강준만 식 글쓰기의 파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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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사람   2011-08-31

  • 강남좌파는 보수다

    솔직히 나는 이런 책에 별 흥미가 없다. 온라인 서점에서의 리뷰는 리뷰를 쓰는 사람들에게나 관심이 있듯 이 책 역시 대선주자에 관심있는 자들이나 집어들 책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할 말이 별로 없을 것 같았고 읽는 동안에도 종종 지루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이 책은 늘 알고 있다고 생각해온 기존 한국의 정치판을 사회학적 시선으로 통찰하게 하는 기특한 미덕을 가졌다. 정리가 잘 되었고 문장이 예리하다. 서론을 끌지 않고 바로 본론, 결론으로 진입하는 방식은 객관적, 합리적으로 느껴지게까지 한다. 논점도 분명하고 결론도 설득력 있다. 다소 공격적인 문체를 예상했는데 튀거나 불편한 점도 없었다. 문제 제기의 범위가 넓지 않아 반복되는 단어가 많았고 지난시절 언론 기사를 복사, 편집해 상당분량을 채운 것 정도가 이 책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점은 있었지만 바로 그런 면이 일반대중의 눈높이와 흥미를 유발하기엔 무리없어 보였다. 한마디로 지금 시점에 잘 읽혀질 책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발빠른 출판기획력에 박수를 보내드린다.

    하지만 ‘나’같은 사람에게 이런 식의 정치비평 책이 읽을 만하다 느껴지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쪽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의견을 표명하는 쪽은 아니(었)다. 사람들과 대화가 오갈 땐 논쟁이 되는 사안에 대해선 침묵하는 편에 가까웠다. 지지하는 정당과 인물도 있지만 누가 물어봐서 꼭 답해야 할 경우가 아니라면 건너뛰고 보는, 은폐형 유권자에 해당한다. 이 책에 제시된 유형으로 보자면 좌파적 언어를 구사하는 강남우파에 가깝다.(그렇다고 오세훈을 지지한다는 건 아니다 ㅋ) 그렇다면 이 책은 더없이 보수적인 것이 아닐까. 책이라는 것이 그 어떠한 진보적 의제를 모아놓았다고 해도 원래 보수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장르이긴 하나 나는 요즘 거의 모든 비평장르는 결국 보수적인 결론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 책의 보편성은 냉철하고 합리적인 비평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특수성을 만족시키기는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칫 책 덮고 난후 모아진 결론으로 최초 논점과 다른 결과를 양산할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가장 예리한 칼날을 들이댄 인물은 조국과 유시민, 문재인이고 평소의 칼날은 오세훈, 그보다 무딘 칼날을 사용한 인물은 손학규, 박근혜로 보이는데 나같이 정치에 둔감한 독자가 이를 느낄 정도라면 이 책은 결국 특수로 시작된 보수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강남좌파가 ‘배부른 진보’를 말한다면 결국 이 책의 제목이 바로 이 책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할 것이다. 문체는 좌파적인데 문장은 강남적인 책이다. 한국에서 학벌에 대해 가장 시끄럽게 떠드는 동네가 강남이 아니었던가. 아니 어쩌면 강남은 침묵해왔지만 비강남이 강남을 향해 떠들어대는 소음인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내 생각에 (이 책대로라면)강남좌파는 결국 보수다. 보수가 모두 강남좌파인 것은 아니나 좌파가 강남적이면 그건 보수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건 좌파가 아니고 강남이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강남성은 학벌성이고 학벌은 기득권의 세습을 상징한다. 한국사회에서 강남 출현이후 교육은 계급과 지위를 전복하는 기회가 아니라 그 격차를 확대 재생산하는 핵심통로가 되었고 강남은 그 지름길을 의미한다. 강남은 잘못한 게 없지만 강남사람들은 상대적인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위로해주는 것이 좌파적 사고방식이다. 마음껏 누리되 약자를 배려하고 소수의 편을 들어주기.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삼십프로 더 비싼 유기농 식품을 구매하고 고급단가의 환경친화적인 인테리어로 자기 집을 꾸미는 사람들. 하와이 특급리조트로 여름휴가를 가서 진보 논객의 책을 펼쳐드는 것. 트윗을 하다보면 의사, 변호사, 교수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유시민적, 진중권적, 김진숙적 발언을 주도하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지난 몇 개월 트윗에서 투표하자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건 알라딘도 비슷한데 알라딘 서재에는 주로 진보, 좌파성향의 글들이 자주 노출되고 토론을 활성화하는 경향이 짙다. 예를 들어 트윗에서 김진숙과 희망버스건의 RT율이 높아지면 알라딘은 그와 관련된 책을 이벤트 실시하고 재빠르게 그 책에 관한 페이퍼가 서재 메인 리스트에 등장한다. (프레시안의 뉴스가 네이버에 뜨는 것과 거의 동시적이다) 그러나 알라딘 서재를 운영하지 않거나 이용하지 않는 (구매위주의)일반 이용자들이 보게 되는 홈페이지 메인화면에는 정치와는 상관없는 단순 책에 관한 페이퍼들(신간위주의)이 노출된다.(이건 엄밀히 말하면 '알라디너의 선택'은 아니고 특정 책을선택한 알라디너를선정한'알라딘의선택'이다) 사고는 좌파적이지만 외모는 상업적, 라이프스타일은 문화적, 인문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다. 알라디너를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지식인이라고 보았을 때 알라디너 역시 강남좌파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까. 이 책대로라면 모든 정치인, 지식인은 강남좌파에 속한다 볼 수 있는데 물론, 내 생각은 좀 다르다.


    강남우파는 강남좌파의 경력이다

    내 부모님은 경남출신의 YS 지지자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오랜 세월 조선일보를 읽어 왔으며 70년대 후반부터 강남 아파트에서 거주했고 90년대 이후 분당으로 이주했지만 회사생활 십여 년을 강남에서 해왔다. 학벌 역시 8학군 출신에 SKY는 아니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대학원 공부를 마쳤다. 동창 역시 의사, 변호사 마누라, 중견기업 며느리, 아나운서, 기자, 방송인등 나빼고(?) 거의 잘된 편에 속한다. 외가와 친가에 대기업 임원, 고위 공무원, 기업 CEO의 친척들까지 두었으니 스펙상으로 나는 수구보수, 기득권층, 강남우파의 이력을 이미 오래전에 보유한 셈이다. 우리 집은 70년대 후반 남쪽에서 서울로 이주해 자수성가한 전형적인 중산층으로서 아버지는 사업을 하셨고 나는 그 사업가의 외동딸이었다. 이런 내가 지난 시절 김대중,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것에 동의할 리는 없었다고 본다. 그리고 굳이 살면서 김영삼, 이회창, 이명박에 투표를 했노라 말할 필요도 없었다고 여긴다. 그래서인지 ‘강남’이라는 제목이 들어간 책들은 그다지 리뷰를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는다.(책의 반이 내 위선을 꼬집는 내용일텐데 뭐 좋을 일 있다고 그러고 싶을까) 미안하지만 강남성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경쟁력으로 인식해온 사람들이라면 이런 책은 집어 들지 않는다고 이해하면 된다.(심지어는 문재인도 모른다)

    (편의상 이 책의 좌표대로) 나같은 강남우파들은 만나서 정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만약 모임에서 정치관련 문제를 이야기하는 인물이 있다면 요즘말로 은따(왕따는 아니면서 은근히 따돌림당하는)가 될 확률이 많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선 정치를 화제로 하고 싶어하는 그 속성이야 말로 강남성을 저버리는 행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 씨, 정치에 관심있는지 몰랐네요, 정도가 그들의 답일 것이다. 물론, 그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지지자가 없어서 정치 이야기를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지난 주민투표에서도 보았듯이 선거에서 좀처럼 기권하지 않는다. 투표율로 대변되는 숫자 25.7은 굳건한 보수층, 홍수가 터지거나 폭설이 와도 생각이 잘 안변하는 골수 우파라고 보면 된다. 대략 삼십으로 여기지만 이번 투표에선 투표장에 가는 것이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에 삼십에서 좀 빠지는 수치가 (나같은)은폐된 유권자로 보면 될 듯하다. 서초구가 강남구보다 숫자가 높은 것은 강남구엔 교육 때문에 외부에서 유입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서초구 부모님들은 강남구 부모님보다 강남을 지킨 횟수가 많으신 편인데 그들은 내 자식의 미래를 생각하며 그들이 빚지게 될 것이 마음아픈 충분한 여력을 가졌다. 하지만 서초구에 속하지 않은 타워팰리스가 자기네 아파트내에 독립적인 투표소를 설치해 압도적인 투표율을 보여준 것은 강남성에 대한 오리지널리티 경쟁을 의미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강남에선 자기네가 진짜 강남이라는 (외부에서 보기엔 민망한) 자존심싸움이 팽배했다. 고등학교 대학 진학률, 교수및 국회의원 분포도, 백화점 규모, 아파트 브랜드, 자가용 댓수등등. 나는 학교다닐 때부터 서울대, 연대, 고대식의 학교 순위처럼 강남전체 아파트 순위를 보고 듣고 자랐다. 그 순위는 곧 건설업체 도급순위와도 비슷했고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일류와 이류, 삼류를 구분지어 사람을 계층화하는 일상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자라난 세대였다.

    (강남거주자로서)내 부모님 세대는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와 자식의 교육에 목숨을 건 분들이었고 이들의 교육열은 (고향을 버리고 올라온)자신들의 성공을 향한 야망과 열정과 비례했기에 사실 다른 구에 비해 유별날 수 밖에 없었다. 지방에서 상경한 외지인에게 영동, 반포, 잠실은 주거장소로서 서울에서 가장 싼 지역이었다. 그땐 강남이 변두리였기 때문에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이미 새마을 정신으로 무장된 부지런함과 반공정신이 몸에 밴 우파인 채로 상경해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큰 반감을 가지지 않았다. 서울의 성장은 강남의 성장이요, 그것은 자신들의 발전이었다. 이들의 자식들이 대학에 입학할 무렵 목동과 분당이 신도시로 등장하게 되는데 노후준비를 위해 이들은 대거 강남의 주택을 팔아 신도시로 이주하게 된다. 부동산 시세차익은 물론 그들의 자식이 수혜를 입게 되고 대학졸업과 동시에 김영삼 정권에서 비교적 쉽게 취직을 하게 된다. 그들의 자식세대가 결혼을 하고 완전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분당으로 따라가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90년대 말에서 2천 년대 초에 분당에서 둥지를 튼 사람들이 나같은 강남학군, 분당엄마 세대이다. 분당에서 새살림을 시작한 초기 정착자들은 지금 사십대 이상이 되었다. 이들은 현재 강남에 살지는 않지만 강남에서 공부하고 자라난 이력 때문에 분당에서 출신성분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들이 인맥관계에서 가장 먼저 확인하는 절차는 대학이 아니라 출신 고등학교이다. 이들의 남편이 근무하는 곳은 주로 분당에 둥지를 튼 IT기업이고 실패한 마르크스 주의자를 선배로 둔 비운동권 출신이다.(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학번) 이들이 지난 선거때 손학규를 찍은 것은 민주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한나라당에 대한 응징일 뿐이었다. 지금 이들의 최대 관심은 과연 문재인이 어디까지 치고 올라갈 것인가로 요약된다. 웃긴 건 모두 박근혜에 대해선 박근혜처럼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아무말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분당이 사실상 강남우파출신이면서 좌파적 언어로 여당을 헤깔리게 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이 살아온 나날들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 간의 괴리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이들은 박근혜와 문재인 사이에서 언제나 방황한다. 적어도 대선직전까지는.

    내가 이렇게 (내 위주지만) 강남성의 역사와 이동경로를 언급하는 것은 이 책이 강남성을 학벌성으로 결론내리면서 마치 그것이 지금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문제적 정체성으로 귀결하는 것에 대한 불쾌감 때문이다. 이 책은 좌파성이 아니라 강남성에 대한 접근에서 시작한 책이다. 내가 보다 잘 아는 것은 좌파성에 대한 정의가 아니고 강남성에 대한 시각인지라 이 책의 논제에서 보면 부수적인 것일 수 있으나 나로선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다. 나는 강남이 부자동네가 되기 전부터 살아왔기 때문에 강남성의 오리지널리티가 서울성이고 그것이 대한민국의 욕망의 정체성이 되는 것에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강남성은 애초부터 지방성, 변두리성에 대한 열등감에서 시작되었다. 강남에 강북의 명문학교가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시기는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릴 때였고 개발독재, 군사문화의 프레임에 익숙한 지방출신 촌사람들이 엘리트 열망을 극적으로 꽃피운 결과였다. 어찌 보면 강남성이야말로 박정희 시대의 가장 큰 유산이다. 작년이 경부고속도로 개통 사십 주년인데 그건 꼭 강남이 무럭무럭 성장해 대한민국의 학벌성을 상징하게 되는 시간들이었고 그건 꼭 내 나이와 같다. 다시 말해 강남이 성장한 만큼이 곧 우리(같은 강남우파의) 나이인 것이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우리는 완전한 우파도 아닌 그렇다고 분명한 좌파도 아닌 중간적인 상태의 그야말로 중간세대가 되었다. 그러니까 강남좌파는 강남우파의 성장, 노화, 세대교체의 다른 말인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 강남우파의 경력이 없으면 강남좌파가 아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무슨 고해성사하듯 내 이력을 커밍아웃하는 심정이 된다. 강남에 살아왔고 우파였지만 좌파가 된 것이 마치 대한민국의 정치를 방해하는 집단이 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강남에 살지 않으면 강남좌파가 아니다

    저자는 강남좌파를 1)‘강남’의 성격, 2)주체의 위상, 3)좌파의 실천에 따라 각각 세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며 그 지형도를 제시했다. 먼저 강남의 성격에 따라 ‘경제적’ 강남좌파, ‘문화적’ 강남좌파, ‘연고적’ 강남좌파로 나누었다. 단순히 강남에 부동산을 보유하고 실제 거주하지 않더라도 돈이 많거나 라이프스타일이 강남적이거나 최상급의 학벌로 인해 인맥의 혜택을 누리는 경우를 모두 강남좌파의 영역에 위치시켰다. 주체의 위상에 따라 지도자, 정치인, 고위공직자등의 ‘공적’ 강남좌파와 언론인, 대학교수 등의 ‘중간적’ 강남좌파, 일반시민으로서의 ‘사적’ 강남좌파를 나누는 (직업군으로서)사회계층적 구분에 비하면 상당히 모호한 잣대라 할 수 있다. 좌파의 실천적 관점에서 이타적, 합리적, 기회주의적 강남좌파로 나누는 태도구분과 비교해서도 세밀하지 않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도식적, 논문적, 작위적이긴 하지만) 9가지로 세분화된 지형도에서 1)‘강남’의 성격은 동의할 수가 없다.

    이것은 보편화된 강남성에 대한 상징범위와 단순 해석 차이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리적으로 장소성이 분명한 ‘강남’을 타이틀화 한다는 점에서 경제와 문화를 강남과 별개로 보아도 강남성에 포함시킨다는 광범위성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강남사람들은 아무리 적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아도, 아무리 월세를 살아도 자신이 강남에 산다는 것을 가장 극명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무리 주상복합 펜트 하우스에 살아도 아무리 집이 몇 채이어도 강남에 살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강남인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행정구역상 강남을 주소로 두지 않아도 ‘라이프 스타일이 강남사람과 같다면’ 강남좌파에 속한다고 하는 저자의 잣대는 섬마을에 살아도 도시적 외모와 세련된 매너를 갖추었다면 도시인이라 칭하는 논리와 같다. 저자는 강남사람을 단순히 경제적 부와 문화 및 취미생활을 마음껏 향유하는 자본주의 수혜자로 규정지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강남은 스타일로 규정지어질 외양적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을 배경으로한 심리적 문제라 생각한다. 강남사람은 나머지를 버리고 강남을 선택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아니 나머지를 택하지 않고 강남을 못 버리는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는 강남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문화생활을 더 많이 즐기기 때문에 강남적이라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강남사람들은 전화번호가 지역을 말하는 시절에 ‘5’자로 시작하는 국번을 자랑스럽게 여기거나 서울 ‘55’로 시작하는 자동차 번호판에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개인 사무실을 오픈할 때도 강남에 사무실을 낸 사업자는 명함에 ‘강남구’라고 적는 것에 우월감을 느낀다. 그들은 빌딩 임대료를 못 낼지언정 대부분 리스로라도 외제 승용차를 끌고 다니고 바세론 콘스탄틴의 시계를 차고 거래처를 방문하며 접대할 때 꼭 강남의 일식집을 고집한다. 다른 곳이 아닌 강남에 사무실이 있는 오너라는 인식은 갑과 을 모두에게 중요하다. 나는 이십대 때 영화와 CF, 삼십대에 인테리어와 디자인, 건축쪽에 종사했다. 모두 강남에 사무실이 집중되는 업종이었고 라이프 스타일이 철저하게 강남적이었지만 사는 곳이 강남이 아니면 절대로 강남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고향이 어디 출신인지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 사는 주거지가 서울 어디인지는 같은 비중으로 중요하다. 장소의 구속성이 심리적 보상감을 제공하기 때문에 강남성을 말하는데 강남이라는 장소는 배제되어선 안 될 요인인 것이다. 이렇듯 강남성은 강남이라는 지역을 벗어나 본질을 설명하기 적절치 않은 특질을 가졌는데 저자는 처음부터 지나치게 강남을 일반화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이는 강남에 사는 사람에게도 불쾌하고 강남에 살지 않는 사람에게도 못마땅한 구분이다. 강남의 일반화는 현상의 일반화, 결론의 보편화를 위해 필요한 과정으로 보여 심층적이지 않았다고 본다. 강남좌파를 강남성의 본질과 별개로 생활패턴에 따른 정치트렌드적 용어로만 제시하기엔 깊이가 없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강남성의 본질적 연구없이 이미 결론을 도출해 놓고서 하위영역을 세분화하는 것은 전형적인 탁상공론식, 연구성과식 비평은 아니었을까.


    지식인은 지식을 남용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강남(지역)이나 좌파(정치)에 대한 논의가 아니고 미래 엘리트(교육) 방향성 논의를 위한 인물비평인 것이다. 이 책은 새롭게 대두된 강남좌파라는 프레임을 통해 오늘날의 정치현상을 진단한 책이라기보다는 대선을 앞둔 시점에 이슈가 되고 있는 인물분석을 통한 한국사회의 강준만식 미래적 패러다임을 강남좌파라는 타이틀롤로 묶었을 뿐이다. 궁극에 강남성으로 치환되는 엘리트 생성구조에 대한 질문을 함의한다. 대통령 후보는 정치인이요, 정치인은 엘리트요 엘리트는 강남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한국사회 구조적 특수성과 대안으로서 세계적 보편성을 잘 버무려 편집한 책인 것이다. 이는 기존 학벌사회를 뒤집을 의지나 용기가 없다면 굳이 좌파 프레임을 제시하지 말라는 뜻도 된다. 자식에게 일류대 가야한다고 하면서 조직에서 비정규직 철폐하라는 말 닥치라는 뜻이다. 하지만 저자가 한국사회의 학벌을 타파하자는 목적으로 이 책을 출간하였을까, 하는 부분에선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결국 그도 사람 이야기 하고 싶어서 대선주자들의 특성과 장단점을 분석, 비교한 것은 아닐까. 인물중심주의를 탈피하고 목적 중심주의로 가기 바란다는 결론이 마음에 들었을 리가 없는 이유이다. 나는 강준만도 잘 모르고 이 책에 소개된 대선주자 6인도 잘 모르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은 할 수 있었다. 이 책을 받아서 읽어 내는 동안은 ‘사실상’ 세간의 관심사에 대한 독자로서의 ‘선의’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겪었듯이 사실과 선의는 시작을 말할 뿐 절대 결과를 보장하진 않는다.

    저자가 말하길 지난 시절 문국현 현상은 ‘새것 신드롬’이었고 좌파 아이콘으로 부상한 조국은 철저한 폴리페서라 진단했다. 하지만 제 2의 김대중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흘리기도 했다. 박근혜는 강남좌파의 거울현상이며 애국심, 품격, 강단, 책임감, 신뢰를 갖춘 언행일치 정치인으로서 (그 누구도 가지기 힘든)지도자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다. 만약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다면 무엇보다 차후 용인술이 중요하다고 조심스레 충고했다. 좌우 진영을 옮겨 다니다 유력한 대선후보가 된 손학규도 경기고, 서울대, 옥스퍼드 박사라는 학력이 결국 그의 가장 큰 경쟁력이 아니냐 반문했다. 정치인과 지식인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며 자신의 이득에 따라 자세를 취하는 편의주의 유시민은 노무현 유산계승 및 정신 구현이라는 ‘집착’과 ‘집중’이 그의 장점이자 치명적 단점이라 말하며 대세추종형의 철새정치인이라 비난했다. 유시민을 우리 현대사의 업보로 보고 지속적이고도 자기성찰 없는 행보를 강도높게 지적했다. 솔솔 불어오는 문재인 대망론에 대해선 막연한 책임의식, 불투명한 비전등을 지적하며 그 평가를 유보하는 듯 보였다. 오세훈은 이타적 강남좌파를 가장한 기회주의적 우파로 보고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위해 정치를 기획하는 인물로 진단했다. 타협이 가능한 의제를 두고도 벼랑끝 전술을 지향하는 투쟁적 호전성을 박근혜와 차별화하기 위한 치밀한 전략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핵심은 한국사회에서 엘리트의 정치적 행보와 그로 인한 승자독식주의라 보편화했다.

    노무현 정권 상층부의 위선을 말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강남좌파는 한국에서 가장 치열한 계급투쟁으로서의 대학입시 전쟁을 상징하며 좌우를 능가하는 초강력 이데올로기로서의 학벌주의를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저자의 요구처럼 학벌에 유연해지기는 퍽이나 어려워 보인다. 차라리 학벌을 타파하라는 것보다는 진부하지만 학벌 가진 배운 자가 가져야 할 윤리나 대중이 현명해지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엔 우리나라가 강대국이 되면 이 모든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약소국 시민으로서 열등감, 패배감, 피해의식이 많았던 탓이다. 그런데 이제 나라의 위상이 달라졌고 세계속에서 동등하게 경쟁하는 우리나라를 보면서 학벌에 유연해지라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진다. 그렇다고 계속 학벌 중심 사회에 적응하자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그동안 학벌을 좇아온 우리들의 비애일 것이다. 학벌 이야기 하자고 하면 사회 전체적으로 거의 체념분위기에 가깝고 모순된 구조를 꼬집느니 잘 가르치는 학원을 알아보는 것이 더 현명할지 모른다. 조국 교수도 딸을 외국어 고교에 보내고 일류대를 보내기 위해 고민했다고 하는 판국에 아무것도 되지 못한 우리가 어찌 다른 고민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을 쓴 저자 강준만도 성균관대, 조지아 대학, 위스콘신 대학을 나와 전북대 교수가 되었으니 이런 책도 쓰는 것이고 독자들도 관심을 가지는 것 아닌가.

    한마디로 이 책은 지식인이 저지르는 가장 지식적인 작업으로서의 최상층의 모순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까.

    저자는 미국의 촘스키, 영국의 러셀, 프랑스의 사르트르도 상층 출신의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언급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퍼뜩 사르트르가 말했던(정확히는 변명했던) 지식인이 떠오른다. 사르트르는 60년대 말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에 대해 그 모순성을 분명하게 피력한 바 있다. 사르트르 시절 프랑스에선 기존체제에 대한 비판자라는 의미로 지식인은 대게 좌파지식인을 뜻했다. 하지만 이들의 모순은 (강준만도 지적했듯이) 중간이상의 생활수준에서 태어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학습해온 실용적 전문가로서 다시 중간이상의 계층에 놓이게 된다는 것에 있었다. 이들은 부르주아적 휴머니스트이지만 지식을 독점하고 계급을 재생산하므로 결과적으로는 휴머니스트의 평등주의를 위배하게 되어있다. 지식인은 필연적으로 사회에 노출된 모순들에 의하여 스스로의 모순을 자각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인의 직업적 활동은 사회구조의 모순을 드러내는 작업이 되고 그것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 된다.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려고 지식을 운용하는게 아니지만 자기가 가진 지식의 정점에선 그 모순속에 가장 분명하게 자신이 위치해 있음을 증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분열된 사회속에서 만들어진 지식인은 그 사회의 분열을 내면화한 까닭에 바로 그 분열된 사회의 증인이며 따라서 그는 역사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회도 자체의 불이익을 감수하지 않고는 지식인을 비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인이란 결국 그 사회가 만들어낸 존재이기 때문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사르트르는 지식인이 피해야 할 위험으로 ‘지나치게 조급히 보편화하려는 태도’를 꼽았다. 결국 보편적 전문가를 자청해 대중을 위해 봉사하는 행위, 근본적인 목적(평화, 인권, 평등등)을 수호하는 행위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 지식인은 근본적으로 영원히 좌파가 될 수 없는 운명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식인이라면 자신의 지적영역에서 오랫동안 쌓아 온 명성을 ‘남용’하여(서라도) 기존의 사회와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것이 맞다고 보았다. 지식인의 본질은 보편성의 추구가 아니라 특수한 남용이라는 것. 남용의 정도와 수준, 남용의 목적과 결과, 남용의 과정과 오류, 이 모든 범위는 지식인의 몫이고 지식인의 능력에 따른다. 남용을 비난하고 지적하는 것은 독자와 대중의 몫이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식인은 인간 각자의 모순과 사회전체의 모순을 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 바라는게 있다면학문적 모순의 영역속에서도 저자 나름의 남용이 추후 지혜를 발휘하는 긍정의 효과를 낳았으면 하는 것이다.

    앞으로 서울시장 보선과 총선 그리고 대선으로 이어지는 정치의 계절이 다가온다. 정치의 계절과 조우하는 국민은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를 떠나 정치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신기한건 오프건 온라인이건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처음엔 다들 정치엔 관심이 없다는 식의 중립적 의사를 내비친다는 것. 실제로 가치 중립적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기 싫거나 아니면 잘 모르기 때문일 경우가 많아서라 생각한다. 정치에 대해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놓고 활발하게 의사를 표현하는 쪽이 대개 진보, 좌파쪽이며 그렇기에 정치에 대해 잘 아는 쪽도 진보, 좌파라 보았을 때 바꿔 말하면 중립이라는 말, 무관심하다는 말은 보수라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안타까운건 2011년 현재 좌파는 트렌드이고 스타일이고 생활패턴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진짜 강남 사람들은 조직에서 왕따 당하기 싫어 좌파인척 하지 말 것이며 비강남 사람들은 괜히 강남을 의식해 시기심, 적대감의 표현으로 좌파적 언어를 구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좌파든 우파든 배운 사람들이라면 지식인으로서 스스로의 모순을 인정한 채로 자기 안에서 먼저 치열한 내재적 투쟁의 과정을 거친다면 어떨까. 이제 대중은 모두 지식인이고 독자는 모두 똑똑하다. 무엇이든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립다. 희망이라는 것이 전복의 가치를 일깨우는 것이라면 나는 지식인으로서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다. <강남좌파>를 모두 뒤집어 생각해 본 것, 그것이 이번 독서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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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마   2015-05-18
  • 누군가 나에게 너는 좌파냐? 라고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갸우뚱 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좌파인가?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한총련이 마지막 불꽃을 장렬하게도 피워올리던 시기였다. 개인적으로, 한총련은 96년 연대사태를 마지막으로 하향길을 걸었다고 생각한다. 한총련이 잘못해서 하향길을 걸었다기보다는, 시대가 바뀌었다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내가 대학을 들어갈 때는 한국 경제 역시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고, 대학 3학년 가을에 IMF가 터지면서 대학생들의 패러다임자체가 바뀌었으니까. 


    하여튼, 그 한총련이 마지막 불꽃을 피워올리던 그 시점에, 나는 그 흔해빠진 가투 한번 나가지 않았던 새침때기 여대생이었다. 새침하고 해맑은 얼굴로 그들과 나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부끄럽지만 1997년 대선때 나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이회창에게 표를 던졌고, 2002년 대선때는 어령샌님의 조언에 따라 또! 이회창에게 표를 던졌다. 슬프고도 부끄러운 과거다. 그때부터였나보다. 내가 표를 준 후보는 단 한번도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징크스 같은 게 생긴 게. 젠장. 내 표는 단 한번도 대통령을 만들지 못했다. (이 징크스 때문에 2012년 대선 투표때 얼마나 망설였는지는 어리석지만 나에게는 진지한 고민이었다.) 그런 나를 정치로 눈 돌리게 한 것이 노짱 탄핵사건이었다. 그때는 주로 교보문고 앞에서 촛불 집회를 했다. 나의 첫번째 가투(?)는 교보문고 앞 촛불집회였다. 


    그때부터 시작된 나의 '빠'질 역사는 유구하다. 노빠를 거쳐 유빠로 이어지고 곧 문빠에 안(철수)빠에 안(희정)빠 까지 이어졌다. 나는 정절강한 여인이므로 한번 빠질을 시작한 상대는 그 사랑을 거두지 않는바, 내 사랑의 목록은 점점 길어지고 있으되 부끄럽지 않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노짱의 탄핵사건으로 노짱에 대한 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사랑에 대한 역설이다. 


    이놈의 책 덕후는 빠질도 책으로 시작한다. 


    그때부터 우리집 책장에는 정치 경제 관련 항목이 생겨났다. 유시민의 책들을 콜렉팅하기 시작했고, 노무현 문재인의 책들에 각종 좌파(?) 정치 경제인의 책들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을 읽었다. 오바마에 노암 촘스키에 수전 손택과 하워드 진이 끼어들었다. 김어준과 이상호, 주진우의 책들도 어깨를 나란히하며 꽂혔다. 그 책들은 서재가 아닌 거실의 책장에 포진했고, 가장 당황한 사람들은 다름아닌 남편의 친구들이었다. 


    경상도에서 나고 자라 날고 기는 대학을 나와 이런 저런 대기업에 다니는 그것들은, 그 책들의 목록이 나의 것이 아닌 남편의 것으로 오해했고 당황해 했다. (뭐, 굳이 따지자면 충무공이 내 책장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책을 뽑아 읽는 것이 그 섹션이긴 하다.) 남편은 평소 정치색이 매우 희박하다. 굳이 따지면 "쏘세지보단 햄이 낫다. 둘다 난 안 먹지만." 수준이랄까. 


    아이들이 초등 고학년이 되어가고부터 다들 주거지 고민을 시작했다. 만나서 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이사의 시기라든가, 이사할 지역이라든가, 사교육의 문제라든가 아이들이 다니는 영어 어학원 이야기, 수학은 과외가 나을까 학원이 나을까. 결국 결론은 강남으로 이어졌다. 다들 조심스럽게 강남 진입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고, 그건 충무공과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나에게 남편의 친구가 강하게 태클을 걸었다. 좌파가 왜 강남을 가려 하느냐고. 


    아니. 좌파는 강남을 가면 안되나? 왜 좌파는 가난해야 하는데? 라는 질문이 읽고 덮어두었던 이 책을 다시 펼쳐들게 만들었던 시작점이었다. 


    좌파가 되기 위해서 가난해져야 한다... 라고 말한다면 나는 좌파질을 지속할 자신이 없다. 나는 내 스스로가 좌파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노무현을 좋아하고 유시민을 좋아하고 문재인을 지지하고 박원순과 안희정을 지지하는 것이 곧 좌파라면, 그래. 나는 좌파가 맞다 치자. 그렇다고 그들을 지지하기 위해 내가 강남을 가서는 안되고, 내 아이들의 사교육을 해서는 안되고, 아이들이 좋은 학벌을 가지게 하고 싶어하지 않아야 한다면 나의 좌파질은 지속될 수가 없다. 나는 좌파이기 이전에 뼛속까지 속물이니까. 


    말을 뒤집어보자. 내가 노무현과 문재인과 유시민 등등으로 대변되는 그 집단을 지지 하지 않는다해도 적어도 나는 박근혜나 이명박이 속해있는 그 집단을 지지하지는 못하겠다. 그것은 "대학나온 배운 녀자" 로서의 나의 자존심 문제다. 남편의 친구가 자신은 박정희와 박근혜를 인정하고 지지한다는 말에 내 입에서 튀어나온 첫마디는 '아니 대학 나온 사람이 왜 그래요?' 였고, 그 말은 그대로 그 사람을 자극했다. 10년이 넘는 친분관계 안에서 처음으로 피튀기는 정치 설전이 오고갔고, 나는 어영부영 "아 몰라몰라 난 노빠 유빠 문빠아아아아아 할 테니 그대는 박근혜 인정하시구랴. 끝." 하고 논쟁을 끝내버렸다. 화장실에서 뒤 안닦고 나온 기분이긴 했으나 어쩔수가 없었다. 그와 나는 평소, "흥남부두 남매" 라며 서로를 지칭하고 놀았던 사이였으니(전생에 남매였다가 6.25때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사이라고~ 남편과 그의 아내는 우릴 흥남부두 남매 또는 국제시장 남매라고 놀렸다. 게을러 터지고 이기적인-_-;;; 면이 남매라고 하지 않을수 없을만큼 꼭 닮았다고. 욕도 혼자 먹는 거 보다는 둘이 먹는게 좀 낫더라.) 이런 논쟁으로 사이가 싸해 지느니 내가 아무 생각없는 아줌마 빠순이 되는 편을 택한거였다. 


    하여튼. 울 나라에서 젤로 좋다는 대학을 나온 그 사람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업적으로 잘먹고 잘살고 있으면서 그들을 욕하는 너 그럼 북한으로 가야지" 라니. 아니. 님하. 아니. 님하. 너 그 대학 나와서 그딴 말을 하면 안되지, 님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우리 오빠가 흥남부두 시절엔 안 그랬는데 환생해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입매.......


    똥누고 뒤 안닦은 기분으로 그 논쟁에서 도망쳐 온 나는 책을 펼쳐들며 씩씩거렸다. 그래 나는 강남 좌파다 어쩔테냐. 강남 살면 좌파하면 안 되냐. 강남 가고 싶어하면서 좌파하면 안 되냐. 내가 정치를 할 것도 아닌데 좌파 코스프레라도 안하는 것보다는 하는게 낫지 않나.


    이것이 나의 변명이다. 지속 가능한 좌파질을 하기 위하여 나는 나의 속물성과 타협한다. 그게 나쁜가? 그건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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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태우스   2011-08-12

  • 책이 취미가 된 97년 이후부터

    유시민은 내게 북극성과 같은 존재였다.

    그의 말은 언제나 옳았고, 심지어 감동적이기조차 했다.

    특히 그는 토론프로에서 단연 발군이어서,

    그가 뛰어난 언변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에 넋을 잃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노무현을 구하기 위해 지식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2002년부터

    그를 욕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났고,

    노무현 집권 이후 대통령의 친위대 역할을 자임하면서

    그는 진보와 보수 모두로부터 욕을 먹는 존재가 됐다.

    사람이란 한번 갖게 된 생각이 변하기 어려운 법이라,

    진보 쪽 사람들이 유시민을 아무리 욕해도 난 별반 귀담아 듣지 않았고,

    “유시민 정도면 괜찮은 국회의원이다”는 마음이 흔들렸던 적은 한번도 없다.


    강준만이 쓴 <강남좌파>는 남들의 유시민 비판에 일리가 있다는 걸 인정하게 해 준

    첫 번째 책이다.

    이 책은 유시민이 가진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말해줬고,

    그래서 난 진보 쪽에서 왜 유시민을 욕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유시민에게 "좋은 말을 싸가지 없게 한다"고 비난했을 때

    그 말을 들은 고종석은 이런 말을 했단다.

    "유시민 씨는 흔히 옳지 않은 소리를, 또는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이

    자기 이익에 봉사하는 말을 싸가지 없이 한다."

    이 책을 읽기 전만 해도 이런 말에 동의하게 될 줄 몰랐는데

    사실에 바탕을 둔 명쾌한 주장 앞에 그를 좋아하던 마음은 여지없이 날아가 버린다.

    한때나마 유시민을 대선후보로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게 다 <강남좌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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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yrus   2011-09-27
  •    

     강남좌파의 등장

    한 달뒤에 치뤄질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그리고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이 각기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요즘 정치권에서 자주 거론되는 단어가 바로 '강남좌파' 이다.   진보, 중도. 보수성향 언론들은 앞다투어 소개할 정도로 오늘날 강남좌파 논의는 정치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통념적으로 볼 때 ‘강남 좌파’ 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다. 이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상징이 되다시피한  ‘강남’ 이라는 지명과 이념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대척점에 서 있는 진보 진영의 ‘좌파’ 라는 표현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강남좌파는 곧 부유한 진보주의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주의 전통이 깊은 서구에서는 오래 전부터 부유한 진보주의자들을 일컫는 다채로운 용어들이 사용되어 왔다. 각국 문화를 반영한 용어들은 대개 말로만 진보적인 부자들의 위선을 풍자하는 부정적 의미의 조어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계급적으로 상류층에 속하면서도 좌파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 이라는 함의도 갖게 됐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고급 승용차인 리무진을 몰고 다니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고 말하는 정치인들을 비아냥대는 의미로 ‘리무진 리버럴’ 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에서는 고급 요리인 철갑상어알을 먹으며 사회주의를 논한다는 의미로 부자 좌파들을 '캐비어 좌파' 라고 부른다.

    강남좌파 역시 처음에는 이들과 비슷한 의미의 용어로 출발했다. 다만 서구의 용어가 보수진영의 비아냥거리는 용도 이상을 넘지 못했다면, 근래 한국의 강남좌파는 수동적으로 붙여진 부정적 이미지를 넘어선다는 데에서 차이가 있다. 고학력, 전문직의 중산층이면서 적극적으로 진보적 언행을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그 사회적 영향이 커지면서 등장한 것이다. 

      

     

     '엘리트주의' 가 만들어낸 강남좌파

    강준만 교수는 2006년에 월간 <인물과 사상>을 통해 "생각은 좌파적이지만 생활수준은 강남 사람 못지않은 이들" 이라며 '강남 좌파'를 처음으로 공론화시켰다.  그리고 때마침 강남좌파의 존재가  정치적 이슈가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강남좌파를 석한 종합적인 결과물이 단행본으로 나올 수 있었다.

    자주 거론되는 강남좌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국 서울법대 교수다. 그는 전형적인 강남좌파 아이콘으로 꼽힌다. 본인 스스로 강남좌파라고 자처할 정도로 차기 총선과 대선에서 보수파에 빼앗긴 정권을 진보 세력이 탈환하기 위한 이념적 당위성과 전략을 전파하고 있다.

    그러나 강 교수는 모든 정치인은 강남좌파라고 분류하고 있다. 정치적 권력을 얻기 위해선 학벌, 학력에서 생활 수준까지 어느 정도의 사회적 성공을 거두어야 하므로 정치영역에서 활동하는 모든 좌파는 강남좌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보 좌파와 대립하는 보수 진영도 예외일수가 없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강남 지역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우파이면서도 강남 좌파적 언어를 사용하며, 반(反) 포퓰리즘적 언어로 밀어붙이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규정했다.  

    그는 강남좌파를 이념 진영의 기준보다는 엘리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권력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이 이루어지는 정계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사가 지지받기 위해서는 이와 동일한 성향을 지닌 인물과 결탁하기 쉽다.  민주화 이후에 정치적 엘리트가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우리나라 특유의 '인물 중심주의' 에  원인을 두고 있다.  최근에 줄줄이 터져나오는 MB 정부 측근 인사들의 권력형 비리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학벌, 연고 등을 통해 이루어진 자기동질적 집단의 특징에서 기인한 정치적 엘리트의 폐단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인물 중심주의가 곧 '엘리트주의' 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들에게는 민생문제보다는 승진과 사리사욕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강 교수는 상류층 사람이 진보적 가치를 역설하는 건 하층계급에게 큰 힘이 되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더 많은 권력을 얻는 수단으로 '진보' 이념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위선적일 수 있다고 했다. 하층 계급의 절박함을 모르기 때문에 실현가능한 공약이 아닌 립서비스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 중에 존재하고 있는 기회주의적 강남 좌파로 가장하는 우파 진영을 경계했다. 좌파 성향의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개인적, 정치적 이익과 결부되는 '밥그릇 지키기 싸움' 에서 이기기 위해 겉으로 좌파 성향을 드러내는 행태를 비판한 것이다. 
      

     

     강남좌파 신드롬 이면에 숨겨진 엘리트주의의 문제점

    강남좌파의 실체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복잡해지는 양상이지만 강남좌파는 ‘있는 자=우파’ , ‘없는 자=좌파’ 라는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이분법을 깨뜨리면서 환경 변화에 맞춰 자연선택적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파의 보수 진영이 두 번 연속해서 정권을 빼앗기면서 뉴라이트가 등장했듯 강남좌파는 진보주의자들이 변화된 사회 상황에 적응하며 진화한 좌파의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다.   

    강남좌파는 부와 권력에 양심과 정의라는 상징 자본까지 가지려는 위선자로만 비춰지는 부정적 인식이 강하지만 강 교수의 주장대로 모든 정치인이 '강남좌파' 라고 해서 꼭 '있는 자' 들은 양심과 정의를 지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어불성설이다.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양심과 정의는 빈부귀천을 떠나 맘껏 누려야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신좌파 사회사상가인 앙드레 고르는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생각의 나무, 2011)에서 전통 마르크스주의가 계급 해방의 주체로 제시한 프롤레타리아에 작별을 고한다.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이 이미 자본주의 가치관을 내면화한 지배질서에 편입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제 노동계급만으로 실업 및 고용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혁명의 주체' 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앙드레 고르의 주장처럼 지금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그토록 찾고자했던 양극화 해법의 열쇠가 기득권층에 있을 수 있다. ‘진보의 진보’ 를 꿈꾸는 진정한 강남좌파라면 이 지점에서 뭔가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상징적 제스처에 머물게 된다면 '엘리트주의의 옷을 입은 진보' 라는 강남좌파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인식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정치인들에 대한 신뢰도 하락와 불신은 곧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강남좌파 진영이 진보 세력에서도 환영을 못받든 간에 결국 강남좌파는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참여한 또 하나의 정치적 세력이다.    지금 우라나라 사회에는 경제적 위기와 대북관계 등과 같은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굵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치인들이 '강남좌파' 라는 이슈에만 사로잡힌채 설전이 길어지게 된다면 정작 눈 앞에 보이는 근본적인 사회적 문제들을 도외시할 우려가 있다.

    모든 정치인들이 '강남좌파' 라면 그 용어의 이면에는 숨겨져 있는 우리 사회에 작용하고 있는 엘리트주의의 문제점으로 비판적 접근이 필요하다.  정치인들은 엘리트로써의 허위의식과 정치 유혹을 떨치는 게 관건인 것이다. 그리고 이념을 기준으로 선을 그어 팽팽하게 다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념의 허상에서 벗어나 '소통' 과 '화합' 을 통해 실천적 담론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정치적 욕망의 프레임에 갇히는 순간 우리나라의 보수와 진보 진영은 결판이 나지 않은 무의미한 대립 속에서 진부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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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연   2011-09-04

  • 강남 좌파





    1.


    요즘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로 읽고 있는 책들의 거의 대부분이 외국 서적을 번역한 것이라는 점이었지요. 외국 책을 읽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읽게 되는 시간이 문제입니다. 보통 번역을 하는데 적어도 3년은 걸린다고 가정한다면 제가 2011년도에 나온 신간을 읽는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2008년의 책을 읽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출판사의 사정으로 인해서 더 늦게 나온다면 거의 5년 가까이의 세월이 지나야만 번역된 책을 읽을 수 있지요. 그러면 원래는 2006년도에 이미 외국에서 읽혀졌었던 책을 지금에 이르러 읽는 형세가 되어버립니다. 외국에서는 새로운 다른 책이 이슈가 되어있을텐데 말입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지요. 이 말도 옛말입니다. 요즘 처럼 생각의 속도가 빨리진 시대에는 10년은커녕 1년만 지나도 사람들의 생활모습과 사상이 달라져갑니다. 쉽게 IT에서만 예를 들어보아도 그 누가 스마트폰이 이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짐작했겠습니까. 애플에서 아이폰을 내놓기 전에는 거의 생각도 못했었지요.

    저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학을 열심히 공부하면 된다, 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학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전문적인 지식이 담긴 텍스트를 완전히 독해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리나라에 사는 이상 접할 수 있는 책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을 조금 전환해보면, 반대로 우리나라의 책은 우리가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그 시대의 생각을 가장 빠르게 습득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줄 거라는 이야기도 됩니다. 우리나라의 책은 당연히 우리의 모국어, 한글로 쓰이다보니 읽기에도 쉽고, 딱딱한 번역을 벗어나기에 자연스럽게 우리 의식에 녹아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강남좌파’ 라는 책은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큰 이슈인 대선과 관련된 여러 인물들을 어색하지 않게 저자인 강준만 그 자신의 생각으로 쉽게 풀어나간 책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글은 많이 써볼수록 좋다고 했던가요, 펴낸 단행본만 200권이 넘는다는 그의 다작에서 우러나온 매끄러운 문장과 반박에 대비한 논리는 정교합니다.


    2.


    제가 대학에 갓 입학하여 강의를 들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토론 수업이었는데, 주제가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내용이었지요. 한 쪽은 박정희와 그의 정책을 찬성하는 쪽, 그리고 반대쪽에는 반대하는 쪽으로 나누어 관련 자료를 찾아서 토의하는 형식의 수업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실소를 머금을 일이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모두다 박정희 대통령을 찬성하는 쪽의 편에 서고 싶어 하였습니다. 저 또한 다를 바 없었습니다. 저는 결국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반대하는 쪽의 논지를 펴게 되었지만 거의 울며 겨자 먹기로 한 것에 다름없었지요. 그런데 왜 그때는 그렇게 박정희를 찬성하는 쪽에 서고 싶어 했을까요?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대하는 점들을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요.

    그러면 그 어렸던 시절에는 제가 사회를 보는 눈이 미숙해서 그랬던 걸까요? 물론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공도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겠지만 그 공만큼이나 과가 높이 쌓여있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이제는 의식이 어느 정도 깨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저는 그렇다고 쳐도 다른 학생들은 왜 그렇게 모두 박정희를 옹호하는 쪽을 택하고 싶어 했을까요? 그들도 사회를 보는 눈이 미숙했기 때문일까요? 아직 계몽이 덜 된 걸까요?

    저렇게 개인의 미숙함을 근거로 들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요즘 계속 생각을 거듭해 본 결과 저는 개인의 미숙함보다도 주변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위의 계몽이 덜 되었다, 혹은 미숙하다, 라는 말은 사실 폭력에 가깝습니다. 그들이 그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것을 부정할 방법은 외부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쉽지만 그렇게 믿는 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가슴에 닿도록 설명을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몽이라는 말이나 미숙하다, 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말을 하는 자신도 반대편에서 본다면 그런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도덕적 우위가 뒷받침된다고 믿어서 전개되는 낮은 수준의 화법이겠지요. 따라서 저는 주변 환경에 주목해보고자 했었습니다. 여기서 마치 고해하듯이 털어놓는다면 저 또한 이 ‘강남 좌파’ 라는 책에서 다루는 ‘강남’ 의 이미지에 약간은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네, 저 또한 책에서 다루는 강남 좌파들처럼 그럭저럭 학벌은 나쁘지 않습니다. 끝끝내 학벌이 나쁘지 않다, 라고 적어두는 것은 나보다 더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과, 학벌은 사실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라는 위선 아닌 위선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나온 것이겠지요. 그리고 저처럼 ‘그럭저럭 학벌이 나쁘지 않은’ 아이들의 초기 선택은 박정희 옹호로 대표되는 우파적 경향이었지요. 그러면 이렇게 학벌이 나쁘지 않은 아이들을 이루어 낸 환경을 살펴봅시다. 과외, 학원, 부모의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지위.. 물론 예외도 있지만, 저도 사실 어떻게 보면 예외에 가까운 편이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고 학교를 다닐 때 과외를 받은 학생들이 많았지요. 그리고 학교를 원하는 곳에 가지 못했을 때 재수를 해서라도, 심지어 삼수를 해서라도 원하는 대학에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은 대개 갖추고 있었습니다. 혹은 그런 재력이 없더라도 빚을 내서라도 고학벌을 가지게 만들려는 부모들의 열의는 있었지요. 바로 이것이 이 학생들의 우파적 경향을 빚어낸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봅니다. 기존의 위계, 학벌로 따지면 스, 카, 이로 대표되는 전통에 속하고 있고 속하려는 그리고 속하게 만들려는 그런 환경이 말입니다.


    3.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저런 경향이 변해갔습니다. 박정희를 옹호하던 학생들 중에서 어느 순간 한나라당은 싫어, 라는 말을 심심찮게 내뱉기도 하고, 이전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김문수가 되자 김문수를 향해서 에잇 하면서 비난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지요. 그들 대부분의 사회적 환경이 바뀌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럭저럭 괜찮은 학벌의 소유자이고 그들의 부모님들의 수입이 떨어졌다거나 갑자기 더 늘어났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젊은 세대들은 어느 순간 기존 보수세력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이야말로 경제력을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체제에 가장 잘 순응하고 있는 집단일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이런 모습은 이 ‘강남 좌파’에서 강남 좌파로 규정된 세력들을 설명하는 것과 연관됩니다. 강남 좌파는 좌파적 이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생활양식에서는 기득권적인 면모를 보이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지금껏 냉소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생활이 그들의 사상과 일치되지 않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정말 약자를 위할까, 위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앞서게 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강남 좌파를 긍정합니다. 좌파라고 해서 그들의 욕망을 버려야 되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이 그들의 능력을 이용하여 높은 지위를 가지고 돈을 벌고 하는 것은 긍정할 수 있다, 라는 것이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말이지요. 그렇게 따진다면 우리 주변의 수많은 강남 좌파들은 모두 용인 가능한 범주입니다. 동시에 저 또한 저 구절이 저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면죄부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생각을 품은 것은 저 뿐만이 아니겠지요.


    4.


    그런데 강남 좌파인 시민들은 저렇게 면죄부를 줄 수 있다고 해도 강남 좌파인 정치인들까지도 과연 저렇게 용인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강남 좌파로 불릴만한 정치인들인 노무현, 문국현, 조국,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을 다루고, 거기에 대비하여 박근혜와 오세훈을 다룹니다. 저 중에서 특히 강남 좌파적인 면모를 보이는 사람은 조국 교수이겠지요. 세련된 면모에 학벌도 좋고, 현재 직업도 S대 법대 교수, 거기에 이념마저도 좌파라니. 정말 완벽합니다. 좌파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는, 이제 점퍼를 입고 쟁의에 나서는 모습은 구식이라고 주장하는 듯 한 모습입니다. 이 책에서도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 조국에 대한 비판은 온건한 편입니다. 저자는 조국 교수의 딸이 외고 진학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고 있는 것에 관하여 강한 반박을 합니다. 그런 비판은 반위선 근본주의이며, 사라져야 할 태도라고 말입니다. 이를 볼 때 강준만은 정치인들에게도 시민들과 마찬가지의 기준을 적용한다고 여겨집니다. 좌파라고 해서, 그들의 욕망마저도 부정할 수 없다, 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반론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강남 좌파인 시민들은 시민이기 때문에 그들의 괴리, 그러니깐 총론 진보, 각론 보수의 모습을 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들의 머리가 이념을 지향을 하든 안하든 적어도 그들의 생활은 욕망을 충족시키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혹은 정치에 가까운 지도층들은 그래서는 안 되지 않겠나, 무릇 정치란 사람들을 이끄는 일이고, 그들이 다른 사람을 이끌기 위해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머리도 이념을 따르고 그들의 행동도 이념에 쫓아가야만 하는 게 옳으리라고 말입니다.

    이런 반론도 저자는 가볍게 막아냅니다. 애초에 이런 반론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입니다. 이런 반론이 성립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정치 행태가 인물중심주의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흐름을 깨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때 진정으로 제대로 된 정치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극단적인 당파싸움을 지양하고, 1극이나 3극 체제가 아닌 수많은 다극체제로 가자는 것이 저자의 사유 끝에 나온 변론이자 이 책의 결론이지요.

    사실 이 책의 결론은 명료합니다. 그리고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강준만의 논리 전개도 매우 유려합니다. 주장을 제기하고, 거기에 반론을 예상해서 반론의 반론을 제시합니다. 혹은 현상의 해석에 대한 반론도 제기합니다. 그리고 끝에는 본인의 제안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그 모든 문장은 그냥 쓰이지 않았고 신문 사설, 심지어 인터넷에서 보이는 글들까지도 인용해서 근거를 확보합니다. 이는 조국 교수에 대한 글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위의 정치인들을 다룰 때마다 그 정치인들 모두에게 적용이 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에서부터 조국 교수에 관한 글은 강남 좌파, 라는 개념에 대한 일관성을 보여주는 반면에 손학규부터 시작해서 유시민을 다룬 부분이나 문재인을 다룬 부분은 좀 흐름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이들을 다룬 부분은 감히 말하건대 이 책에서 빼도 괜찮을 정도이지요. 각각의 글만 놓고 본다면 크게 흠잡을 부분은 없습니다. 손학규의 자산이자 그 자신을 베는 칼날이 될 수 있는 것이 그 자신의 인맥이라고 결론지은 부분이라거나, 유시민이 너무 벼랑 끝 전술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문재인에 대해서는 그의 저서인 ‘문재인의 운명’을 거론하면서 그가 청렴할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정치인으로서 적합할까, 하는 의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이 글들은 과연 강남 좌파, 라는 제목에 묶여서 나올만한 글인지는 의문이 남습니다.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제목과 상관없이 대중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일종의 포퓰리즘적 요소를 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지요.


    5.


    그러고 보면 제가 이렇게 글을 쓰면서 ‘좌파’라는 말은 많이 사용했지만 ‘진보’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이 책에서는 좌파와 진보를 거의 같은 것으로 취급하여서 혼재한 상태로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강남 좌파’ 대신에 ‘강남 진보’라고 쓸 수 있겠느냐, 라고 말입니다. ‘진보’라는 개념은 사실 보수 속에서도 숨어 있을 수 있고, 흔히 쓰는 진보, 라는 말 속에도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간단히 생각해보아도 현재보다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려는 노력이 진보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좌파적 진보는 그 속력이 빠르게 되기를 바라고, 우파적 진보는 그 속력이 너무나 느릴 뿐이겠지요.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좌파는 진보, 우파는 보수로 굳어져 있는 게 사실이기는 합니다만 이 책의 저자가 정말 좌파와 우파를 뛰어넘는 어떤 비전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그것은 좌파에 향한 비판들(상대방을 비판하는 그 기준을 그들 스스로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살아있을때는 그를 극복하려고 하더니 떠나고 난 뒤에는 그 그늘로 다시 들어가려고 한다 등)보다도 이런 개념에서부터 시작했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저런 개념에서부터 인물중심주의를 극복하자, 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보기에 말입니다. 물론 저 비판들에는 좌파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요.

    그리고 강남 좌파의 의미 자체는 예전부터 있어왔습니다. 그것이 강남 좌파, 라는 말로 개념화되지 않았을 뿐 ‘언어의 좌향좌, 현실의 우향우’와 같은 문제 제기는 끊임없이 되어왔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개념화 된 말의 문제점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현상도 일종의 유사성만 보이면 그 개념으로 고착화시킨다는 점입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우리가 토끼를 보고 ‘토끼’ 라고 개념화시키게 되면 귀가 길고 눈이 빨갛지만 실제로 다른 동물을 ‘토끼’라고 칭하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강남 좌파’라는 개념 자체의 무용론을 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강남 좌파를 아홉 가지 유형을 들면서, 복잡한 사회적 현상을 이 단어 하나에 포괄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들게 하였습니다. 물론 저자도 그런 비판을 염두에 둔 듯, 현실에서는 상호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고 덧붙이기는 하였지만 말입니다.

    아쉬운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는 앞서 말한 면죄부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자, 저는 어쩌면 강남 좌파에 가까울 지도 모릅니다. 좌파는 모르겠지만, 강남의 이미지에는 한 발짝 가까이 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저는 강남에 살고 있지도 않고 고향도 서울이 아니지만 ‘강남성’의 핵심인 학벌은 그것에 근접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나는 과연 욕망을 추구하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가, 라고 말이지요. 제가 좌파가 아니라고 해도 저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이전에 어느 대학교에 잠시 몸담고 있을 때 어느 교수가 라이벌 대학교를 가리키면서 딱 하나 본받을 것이 있다고 말한 적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은 그 라이벌 대학교가 총장이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비정규직들을 모두 잘라버렸다는 것이었지요. 우리는 그러지 못해서 지금 비정규직 문제로 골머리 앓고 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굳이 그런 화제를 더 이상 언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침묵은 저의 학벌을 그대로 유지시켜주고(‘강남’을 유지시켜주고) 한편으로는 나는 당신에 동의하지 않는다, 라는 침묵이 되어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해주었습니다. (‘좌파’라는 허영이 저를 감싸게 놓아두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속으로는 생각합니다. 이건 옳지 않은 일일지도 몰라, 하지만 저는 끝끝내 소리 내어서 이야기를 하지 못합니다. 아마 슬픈 이야기이겠지만 앞으로도 각을 세우며 비정상적인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못하겠지요. 반은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 때문에, 반은 지금의 생활을 무너뜨리기가 싫기에. 하지만 이러한 괴리는 커져가기만 합니다. 마치 진화론을 발견하고도 그것을 20년 동안 비밀공책에다 끄적거리기만 했던, 그러면서도 진화론을 부정하는 상류층 친구들과 지내야만 했던 다윈처럼 말이지요. 강남 좌파인 시민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거리낄 것이 없는가, 하는 점에 이르면 적어도 저는 아닌 것 같다, 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욕망을 추구하되 그것을, 그리고 그 욕망의 결과로 오는것들을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저는 사람이 위대할 수 있는 이유는 개인의 능력이 모두 다르더라도 아래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두 손으로 그 사람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것에 있다고 믿습니다. 비록 위에 있는 사람이 있으면 아래에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 세속의 진리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6.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제외하고서는 이책은 확실히 이슈가 될 만한 요소들을 잘 잡았기에 요즘 시기에 읽기 좋으리라고 짐작됩니다. 그러고 보면 최근 오세훈 서울 시장이 사퇴를 선언했지요. 이 책이 오세훈 서울 시장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보면 저자의 통찰력이 새삼 대단하게 보입니다. 이 책이 출간될 때는 아직 무상급식이 어떻게 흘러갈지 불투명한 상태였지요. 결국 투표함은 열지도 못한 채 무상급식 투표는 부결되었고 이 책은 예상이라도 한 듯 오세훈에 대한 글 중 한 단락을 ‘오세훈의 무상급식 주민투표 도박’ 이라는 제목을 붙여놓았습니다. 과연 그의 행보는 도박과 같아서 잭팟을 터뜨리지 못하고 쌓아올려왔던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다른 인물들에 대한 평들도 그들의 행보도 책과 어느 정도 들어맞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사실 인물 중심주의를 경계하자는 책인데도 불구하고 인물의 행보가 더 궁금해집니다. 아직 새벽이 오기에는 멀었나봅니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런 고질적인 병폐들, 인물중심주의, 무리 짓기, 증오의 정치 등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자가 마지막장에 언급하듯이 ‘정치인들이 존경받는’ 그런 꿈이 단순히 꿈만으로 그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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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양의그림자   2011-08-05
  • 강준만 교수가 신문에 올린 글들은 많이 읽어 봤지만 책은가장 최근에 나온 이 <강남좌파>가 처음이다. 강준만 교수는 일단 한국 정치에 늘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학문적 성실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게 큰 호감을 준다. 이 책에서 강남 좌파를 정의하고 그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동안의 신문 기사와 관련 글들을 꼼꼼이 살핀 다음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는 점에서 근거 없이 자신의 생각을 늘어 놓는 그런 책은 아니라는 점이, 그리고그의 글에서 나타나는 학자로서 꼿꼿한일관성이인상적이다.


    책을 읽기 전에 먼저 그 저자를 한번 살펴보는 게 순서일 터, 한국 위키피디아를 보면 강준만 교수는 정치평론가, 사회학자, 언론인이로 소개한다. 1998년부터 발간 중인 <인물과 사상>의 주필이라고도 소개되어 있다.실명을 거론하며 한국에서는 아마 최초로 인물 비평을 시작한 학자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먼저 "강남좌파"가 무엇인지를 1장에서 정의한다. 세 가지 카테고리 밑에 다시 세 종류로, 총 아홉 가지 다른 류의 강남좌파를 분류해 놓는다. 그 중에서공적 강남 좌파가 기회주의적 강남 좌파 노릇을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그리고 이 강남좌파가 어떻게 해서 커밍아웃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지 그 배경을 2, 3장에서 설명한다.정리하면 노무현 시대를 거치면서부정적인 의미로 강남좌파가 떠오르게되었다는 말.

    이 책을 읽는 동안 날 불편하게 했던 건 오마이뉴스의 대표로 있는 오연호라는 존재다. 이명박의 대항마로 문국현 띄우기에 나섰다가 어떻게 실패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 그리고 이번에는 조국 교수를 통해 다시 한번 같은 전술을 쓰고 있다는 오연호 대표.신문이나 일상 잡지글에서는그 글의 공간적 제한 때문에 세밀하게 살피지 못한 내용들을 이 <강남 좌파>라는 책을 통해 강준만 교수는 세밀하게 추적한다. 뭐, 데자뷰 같은 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이 책에서는 뒤 이어 박근혜,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 오세훈, 모두 차기 대권에 관심 있는 정치인들의 행보와 그 말에 현미경을 갖다된다. 그리고 최종장에서는 결국 강남좌파는 학벌좌파라고 규정한다. 그러니까이 땅에 존재하는 문제 중 가장 심각한 것은 학벌이라는 것. 이 주장은 강준만 교수가신문에 기고한 글들에서 여러번 접했던 것이지만 이 책에서는 훨씬 더 강한 어조로 이 점을 비판한다.음... 11장을 읽은 다음 느낀 점. 결국 강준만 교수의 <입시전쟁잔혹사>를 사봐야 하는 건가......

    결론은현재 정치 상황을 기술한 책은 한번씩 사봐야 한다는 것. 바쁘게 사는 사람들을대신해 부지런히 살피고 있는 파숫꾼들이 전해 주는 이야기가 무언지 한번씩은 귀를 기울여 봐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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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즈엔클라임   2011-08-10
  • 오마이뉴스와 데일리서프의 열렬한 독자인 평자가 제주에 내려와 6개월을 소요하며 한 것이라곤 그저 걷기였다. 요즘 제주올레가 유행이지 않은가;;; 신문도 TV도 보진 않지만 그래도 블로그질은 한다. 올레 걸으며 사진찍은 걸 올리고 소통놀이를 하는 것이다. 최근엔 서평놀이에도 재미를 붙였다. <강남좌파>를 선택한 건 반년가까이 정치에 대한 궁금증을 덮고 살아선지 정치인에 대한 인물평이 궁금해지더라는 것이다. 인물평론하면 강준만 아닌가. 저자는 <강남좌파>를 통해 평소 그다운 어법으로 그저 손쉽게 책을 한 권 또 만들어냈다. 어차피 좀 있으면 대선게임이 시작될 것이고;;;

    신간 <강남좌파>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건 정치인들이다. 오세훈, 박근혜, 손학규, 문재인, 유시민, 노무현, 조국의 얼굴이 들어 있다. 이 정치인들을 한데 묶어주는 이념적 코드는 과연 있기나 한 걸까? 다소 막무가내 같지만 저자는 표지에 등장한 정치인 들 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인은 강남좌파'라고 규정지어 버린다. 강준만의 한국정치를 들여다보는 프리즘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왜 단 한 색깔일까;;; 물론 저자는 강남좌파를 다시 소분류해 놓고 있긴 하다. 강남좌파의 성격에 따라 구분하면 경제적, 문화적, 연고적 강남좌파란 조어가 나오고 주체의 위상을 기준으로 나누면 공적, 중간적, 사적(일반시민) 강남좌파 구분이 가능하다. 그리고 실천의 의미로 나누면 이타적, 합리적, 기회주의적 강남좌파로 구분된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 장난인가;; 이런 식의 분류라면 대한민국 국민절반 이상이 다 강남좌파다. 평자도 한 때는 강남에서 직장 다녔고 강남에서 살면서 스스로를 강남좌파 운운하고 다닌 적은 있다. 이렇게 뭉뚱그려서 모두를 한 통속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또 다른 의도가 있는 지는 잘 모르겠다. 게다가 '강남좌파'라는 프레임을 '엘리트주의' 문제로 결론짓는다. '강남좌파의 원조는 노무현'이라는 글을 필두로 시작해 정통 엘리트가 아닌 '천민엘리트'들이 득세하는 꼴을 저자는 못마땅해 한다. 세상을 바꿀 의지는 전혀 없으면서도 바꿔야 한다고 외쳐대는 것이 곧 좌파적 비젼이고 그것이 좌파적 한계라고 규정 짓는 저자도 스스로를 강남좌파라고 인정할까?

    정치인들을 증오하게 만드는 건 현실감감이 결여된 정치인 스스로 자초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잘못된 언론 프레임에 의해서일 경우가 더 많다. 강준만에 의하면 그 현실감각이란 결국 소통과 화합능력이라는 거다. 이 능력이 출중하면 언론 프레임에 의한 부당한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저자는 맺는말에서 특정 이념과 노선 그리고 당파성을 앞세우는 정치인들에 의해 언로가 지배당하는 현실에서 존경받는 정치인이 나올 가능성은 극히 작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는 말자고 귀결 짓는다.

    고래로 한국사회는 사건 중심이 아니라 인물중심의 문화적 관념론에 갇혀 있다는 저자의 주장엔 동의한다. 그러나 서서히 변하고 있다. 노무현보다 더 훌륭하고 이명박보다 더 나은(?) 지도자가 나타나길 기대하는 건 넌센스라는 걸 사람들이 알아채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작금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과거의 유산을 승계하라느니 극복하라느니 '넌 이게 문제고, 넌 저게 문제야'라고 백날 떠들어 봐야 쇠 귀에 경 읽기다. 그래서 강준만은 외롭다. 그는 경 읽는 팔자이기 때문이다. 그보고 경 읽기를 그만두라는 비아냥은 아니다. 그저 그가 외로운 자리를 택했다는 의미다.

    땅덩어리가 작은 나라여서일까? 많지도 않은 인물에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제로섬게임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도 외로움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되었을지 모르나 아직도 우리는 민주적 사고 시스템이 부재한 사회에 살고 있다. 이걸 구축하는게 어느 초인이, 아니 어느 미륵이 나타나서 하루아침에 뚝딱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도대체 그 빌어먹을 미륵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새벽이 오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미륵이 오건 말건 아침은 만들어 먹어야 하고 세상은 굴러가야 하기에 역사의 새벽잠을 깨워야 한다. 독자들을 그 인식에 도달하게 한다면 그래도 이 책은 세상에 나온 보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저자의 의도이건 아니건간에;;; 그리고 미륵이 미륵을 낳는다는 '엘리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 이야기나 어서 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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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inye91   2011-08-27
  • 1

    강남 좌파란 말이 많이 들린다. 자신은 강남 사람들처럼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혜택을 누리면서도 말은 좌파적, 진보적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던 말이다. 그런 말이 요즘은 그래, 난 강남 좌파다. 내 이런 조건이 내 사상을 좌파로 규정하지 말란 법 있느냐는 말로 바뀌어 쓰이고 있기도 하다.

    하여 강준만은 이 책에서 강남 좌파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 세 가지 분류 기준을 제시한다. '강남'의 성격, 주체의 위상, '좌파'의 실천. 이렇게 세 가지 기준에 의해 다시 세 가지씩 나뉘어 강남 좌파는 9가지의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첫번째 '강남'의 성격에서는 경제적 강남 좌파(경제적으로 상류층에 해당하는 사람들), 문화적 강남 좌파(생활방식-문화향유 방식이 부유층과 유사한 사람들), 연고적 강남 좌파(소위 명문대를 나온 사람들)로 나뉜다고 한다. 이런 기준을 보면 강남 좌파가 꼭 부자일 필요는 없다.

    두번째 주체의 위상에서는 공적 강남 좌파(지도자, 정치인, 고위 공직자 등), 중간적 강남 좌파(언론인, 시민운동가, 대학교수 등), 사적 강남 좌파(일반 시민)로 나누고 있다.

    세번째 '좌파'의 실천에서는 이타적 강남 좌파(이념과 삶의 수준을 일치시키려는 사람), 합리적 강남 좌파(이념은 좌파지만, 생활은 나름의 이기심을 발휘하는 사람), 기회주의적 강남 좌파(자신의 이익을 위해 좌파의 이념을 이용하는 사람)로 나누고 있다.

    이런 다양한 강남 좌파의 개념이 칼로 무를 썰듯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고, 그때그때 이합집산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강남 좌파라는 말보다는 진보를 표방하는 엘리트 집단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2

    강남 좌파는 노무현 시대에 나왔다고 한다. 그런 개념이 예전에는 없다가 노무현 시대에 들어와서 강남 좌파라고 제 생활은 우파인데, 사상만 좌파인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용어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왜 노무현 시대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다을 강준만은 민주확 이루어진 시대 이후에는 엘리트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고, 그래서 예전에는 문제 삼지 않았던 것들이 이 시대에서는 문제로 불거지게 되었다고 한다. 즉 엘리트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한 것이다.

    예전에는 개인적인 결함이 민주화 운동이라는 대의에 묻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면 민주화 이후의 시대에는 개인적인 결함이 치명적으로 다가오게 되고, 사람들이 더 문제삼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는 건, 정치가들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했다는 이야기고, 이는 개인적인 실천과 이념을 비교, 판단할 수 있는 시대적인 여건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즉, 민주화 운동을 한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용서되던 시대에서, 이제는 개인의 생활과 자신의 신념이 얼마나 일치하느냐 하는 쪽으로 평가 기준이 옮겨갔는데, 그걸 인지 못하고, 왜 우리만 갖고 그래라고 항변한 그 시대 정치가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3

    강남 좌파는 아닐지라고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강준만 특유의 실명 비판이 시작된다. 여기서 굳이 강남 좌파로 분류된 사람만 다룰 필요는 없다. 강준만이 지적하듯이 우리나라에서 정당은 이념으로 뭉친 집단이 아니라, 인물을 중심으로 모인 집단이고, 이들은 선명한 이념을 내세우기 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증오로 그 이념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남 좌파에 속하는 인물만이 아니라, 힘을 지닌 정치 엘리트들을 대상으로 다루고 있다.

    문국현, 조국, 박근혜,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 오세훈이 그가 다루고 있는 인물이다. 이들에 대한 평들 중에 우리가 받아들일 내용이 많다. 물론 우리는 정치를 이들 중심으로 하면 안된다. 인물 중심이 아닌, 바로 우리들 생활을 중심에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정치인들에게 이야기한다. 아니 우리들에게 이야기한다. 어느 정당, 어느 인물을 중심으로 사고하지 말고, 진정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방법, 즉 민생 현안 중에서 서로 함께 공유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최대공약수를 찾자'(336쪽)고 한다.

    말로만이 아니라, 사로 함께 할 수 있는 공약수, 그 중에서도 최대공약수를 찾고, 이 최대공약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함께 행동하자고 한다. 그런 정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4

    그는 강남 좌파의 문제를 정치의 문제에서 교육의 문제로, 아니 학벌의 문제로 끌어온다. 이 학벌이 능력주의로 흘러, 결국 개인의 책임으로 문제를 돌리고 있으며, 학벌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지를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그래서 그는 학벌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최근에 이야기됐던 서울대 폐지론보다는 조세정책의 변화를 제시한다. 그는 '입시, 사교육 문제는 교육정책이아니라 조세 정책으로 풀어야 한다. 많이 버는 만큼 세금을 많이 내게 하자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워렌 버핏이 생각났다. 그가 돈을 버는 방식이 내 맘에 들지 않을지라고, 그는 자신은 세금을 너무 적게 내고 있다고, 자신의 세금을 더 많이 걷어 가라고, 자신과 같은 투자가들 중에 세금이 무서워서 투자 안한다는 사람 본 적 없다고 했다.

    부자 감세 운운되는 우리 사회에서는 참 부러운 일이다. 세금을 통해 소득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면 굳이 대학에 가려고 하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대졸과 고졸의 임금격차, 정규직 유무, 그리고 승진 유무가 심하게 차이나고 있지 않은가? 단지 공부하겠다는 열망이 아니라, 이러한 생활의 격차 때문에 대학, 특히 학벌에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있지않은가? 그리고 이런 학벌들이 정치집단 사이에서는 더욱 공고하게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 이러한 학벌 체제에 균열이 일어난다면 정치 집단에서 작동하는학벌도 많이 약화되리라고 본다.

    또한 많이 벌수록 세금을 더 내면 능력주의의 환상도 어느 정도 사라질테고, 더불어 사회적 평등도 어느 정도 당겨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대학 가려고 아둥바둥 대는 이유가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이니, 강준만의 해결책은 타당성이 있는 제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5

    최근 개그콘서트의 어느 한 꼭지가 생각이 났다. N극과 S극들이 나와 서로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내용. 의도하지 않게 다른 사람과 결합이 되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밀어내는 모습 속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꼭지다.

    그런데 이 꼭지가 우리나라 정치 현실과 너무도 비슷하지 않은가?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고 이들은 서로를 밀어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서로 잘 결합이 되어 있고, 함께 결합이 되어 있어야 할 진보와 서민들은 서로 밀어내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보이니 말이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 속에 모두 N극과 S극을 지니고 있다. 특정한 어느 극만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내 안의 극들을 내 스스로 성찰하고, 이를 남들과 소통할 때 조절할 수있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소통의 정치, 이를 말로만 하지 않고, 앞에서 이야기 했던 민생의 최대공약수에서는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 그게 정치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끼리의 정권 쟁취 싸움, 이권 쟁취 싸움밖에는 안된다.

    6

    강남 좌파를 읽으면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말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정치 엘리트들, 소위 사대부란 사람들, 양반이란 사람들의 최종 목적은 평천하다.그렇다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순차적인 개념일까? 아니면 병렬적인 개념일까?

    꼭 수신을 해야 제가를 하고 치국을 하고, 평천하를 할 수있을까? 아니면 치국, 평천하를 하면서 수신과 제가를 함께 할 수있을까?

    강남 좌파란 치국, 평천하를 하겠다는 사람이 수신, 제가에서 실패했을 때 들을 수 있는 말 아니던가?

    그렇다고 수신하고 제가한다음에 치국을 할 수있을까? 이것도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만든 것이 치국을 할 때, 제가를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즉 감시기구를 작동시키는 것 아니겠는가? 수신이야 치국, 즉 정치활동을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해야한다는 말로 대신하면 될테고 말이다.

    자신의 정책실패를 성찰하고 다시 실패하지 않도록 대안을 마련하는 정치가, 이는 수신에 성공한 정치가이리라. 그리고 가족 비리가 생기지 않도록철저한 감시기구를 작동시키는 정치가 이는 제가에 성공할 가능성이많은 정치가 이고...이들은 자신이나 가족의 문제로 발목을 잡히지 않을테니, 더 나은 정치를 할 가능성이 많다고할 수 있지 않을까...

    7

    강남 좌파란 말대신 정치 엘리트, 아니면 그냥 엘리트들이라고 썼으면 좋겠다. 엘리트란 말이 외래어라서 좀 그렇다면 지식인라고 하자. 어짜피 정치가들은이들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오지 않는가? 물론 진보 정당에서는 우리가 말하는 소위 지식인들이 아닌 사람들이 정치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이미 진보 정당에서 주요한위치에 들었을 때는 일반 민중이 아닌 지식인처럼 행동하고 사고한다고봐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지식인으로 이야기해도 별무리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식인이라는말이 부정적인 말이 아니지 않은가? 민중과 유리된 지식인이 아니라, 지배층에서도 지식인이 나오고, 민중에서도 지식인이 나와야 한다. 지식인은 계층과 분리된 개념으로 생각하면, 또다른 하나의 사회 집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들 지식인이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좌파냐, 우파냐가 결정되지 않을까?

    그람시의용어를 빌면 전통적 지식인이 되느냐, 유기적 지식인이 되느냐 하지 않을까? 강남 좌파라는 말이 이 '강남'이란 말 때문에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온다면 우리는 진보를 지향하는지식인을 유기적 지식인, 보수를 지향하는 지식인을 전통적 지식인이라고 명명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좌파란 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함의하고 있으니 말이다.

    8

    대선이 내년이다.많은 정치적인 논쟁들이 일어나고, 많은 지식인들이 정치에 참여할 것이다. 이 때 나는 어떤 입장을 지닐 것인가? 무엇이 정말많은 사람을 위하는 것인가? 생각할 수있어야 한다.

    책의 표지에'모든 정치인은 강남좌파다'란 말이 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모든은 아니다. 이 모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정치인들이 유기적 지식인이 될 테다. 그리고 그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도 좋아질테고...

    우리는 모든 정치인이 강남 좌파가 되지 않게 해야하지 않을까?

    '강남'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치하는 모습, 이건 허황된 꿈에 불과할까?

    아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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