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7

손민석 한국 보수는 제발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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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한국 보수는 제발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라

 건국전쟁 등으로 인해 언론지면이 온통 이승만으로 도배되어 있지만 실상 살펴보면 별로 건질만한 내용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논의를 보다 생산적으로 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보수 진영이 자유민주주의를 진심으로 신봉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반대로 진보진영에서도 이승만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하기보다는 그에게 '적절한' 모욕을 돌려주는 걸 목표로 해야 논의가 가능해지리라 봅니다. 아무튼 이승만을 기독교적 습속이 정착된 아시아의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정치인으로 규정해야 비로소 그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는 건 제 오랜 생각입니다. 관련해서 더 많은 논의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에 반해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시장경제의 원리에 입각해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시장경제 하에서 품질이 좋은 상품들이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 자연스럽게 잘 팔리게 되는 것과 같이, 대의제에서도 품성 좋고 능력 있는 인물들이 '선거'라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소비자=유권자'의 선택을 받아 당선될 것이라는 게 기본적인 가정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기업체들이 반드시 좋은 상품을 생산해 선택받는 게 아닐 수 있듯이 유권자들이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선거를 통해 당선된 정치인들의 권력을 견제하는 여러 장치들, 삼권분립, 을 마련해두는 것이다. '시장실패'에까지 대비하면서도 의회라는 기구가 계속해서 정치적 리더를 선출할 수 있는 기능을 살리는 방향으로 조직되어 있는 게 바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체제이다. 이 체제는 선거과정이라는 '경쟁' 속에서 인민의 '의지'가 반영되어 좋은 정치인들이 선출될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기능하고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권위주의 체제에 비해 훨씬 더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민주적'이라 주장한다."
"니얼 퍼거슨에 따르면 '네트워크 제국'으로서의 대영제국이 세계를 문명화시켰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그 결과로 인해 몰락하였다. 다시 말해서 제국주의적인 문명화 작용의 '성공'은 역설적이게도 피지배 민족의 저항운동에 의해, 탈식민화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옹호하고 애정하는 대영제국의 몰락 속에서 오히려 대영제국의 '업적'을 관찰하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들에게 이정도의 확신과 자부심이 있는가?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영훈 등의 뉴라이트 계열은 오히려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을 무시하고 폄하하기 바쁘지 않던가?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정안기 연구원은 김구를 "킬구"라고 조롱하고 있다. 이영훈은 오영섭의 입론을 그대로 수용하여 이승만을 탄핵한 신채호 등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세계정세를 파악할 줄 모르는 필부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한다. 독립운동가들이 국가를 운영할 역량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들이 그런 역량을 갖출 수 없게 했던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체제를 더욱 가열차게 비판해야 정상적인 사고방식이겠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게 없다. 같은 제국주의 옹호라 해도 니얼 퍼거슨의 옹호론은 상당히 세련된 지점이 있다. 그는 한 제국의 황혼에서 그 제국의 위업을 발견하며 제국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세련됨을 보여줄 줄 안다."
"이런 차이는 아무래도 자신이 믿는 신념, 가치 등에 대한 확신의 정도에서 나오지 않을까? 이승만이라는 "개인"을 정당화하지 않고는 자신의 신념을 표현할 수 없는 이들과 달리 이승만의 몰락에서 그의 위업을 관찰하는 이들 간에는 지성의 질적인 격차가 상당할 것이다. 이승만의 몰락 속에서 그의 업적을 찾아내는 방식의 독해를 일전에 나는 다른 글에서 시도한 적이 있다. 이 글에서 주장하였듯이 이승만은 민주주의의 성장을 이끌고, 역설적이게도 그 성취에 의해 밀려난 대통령이라 할 수 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사실관계의 오류도 많이 보이고, 나 자신 또한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아시아에서 미국적인 기독교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정치인으로 독해하는 방식 자체는 여전히 유효한 해석틀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보아야 비로소 한국적 민주주의의 문화적 토대로서의, 토크빌의 개념을 빌리자면 '습속'으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해 논의할 수 있게 되고, 이승만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도 가능해진다. 이승만의 몰락 속에서 그의 업적을 읽어내는 이러한 독해방식을 통해서만 우리는 개인에 대한 신화화나 숭배 없이 있는 그대로 사태의 진전을 바라보는 과학적 분석과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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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열전>(가제)의 첫 부분을 어떻게 구성해야 되는가 고민하다가 김용섭 사학에 대한 논의로 포문을 열기로 했다. 왜 김용섭인가? 김용섭 사학에는 특수와 보편의 통일이 존재한다. 내가 며칠째 쓰고 있는 글의 결론이자 주장인데 김용섭한테는 '민족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 간의 통일 속에서 보편과 특수의, 추상과 구체의 통합이 일어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정도면 '사상가'로서의 풍모가 어느정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김용섭 사학을 온전히 긍정하는 건 당연히 아니고, 나는 김용섭 사학이 '민족주의 사학'인 이유를 밝히면서 그것이 허구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그래서 제목이 "상상된 공동체를 위한 상상의 공동체"이다. 김용섭 사학이 민족주의 사학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 뛰어난 실증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게도 비실증적인, '상상'에 기초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게 목표이다. 흥미롭지 않을까?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뉴라이트 열전> 때문이지만 이차적으로는 윤해동의 '숨은 神'을 비판할 수 있는가?'를 읽고 황당해서 그렇다. 윤해동은 김용섭의 민족주의가 박정희의 조국근대화와 공명했다고 주장하면서 마치 김용섭의 자본주의맹아론이 박정희의 근대화론을 뒷받침해주었다는 식으로 비판을 한다. 진보적 민족주의와 관제 민족주의 간의 은밀한 연계를 드러내고자 한 취지 자체는 인정한다. 흥미롭게 느껴지는 지점이 분명 있다. 윤해동이 이 글을 쓸 때 아마도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한국의 진보적 민족주의 계열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한다. 민주당을 추종하는 진보적 민족주의 사학자들을 너희도 박정희의 어용사학자들과 다를 게 없다는 식으로 비판하고 싶었던 욕망이 엿보인다고 하면 과한 비판인가? 하지만 이런 식으로 민족주의 사학을 비판해서는 곤란하다.
김용섭 사학이 민족주의 사학이 될 수 있는 바로 그 이유가 그것의 근간인 실증성을 무너뜨림으로써 역설적이게도 김용섭 사학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만든다는 역설을 드러내야 비로소 제대로 된 비판이 될 수 있고 그에 기초하여 이후의 후학들이 학술적인 분석을 통해 이데올로기성을 극복하며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윤해동이 하는 건 김용섭에 대한 '인신공격'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보아야 김용섭 사학의 대척점에서 형성된 '뉴라이트 사관'을 제대로 논파할 수 있다.
예전부터 계속 해왔던 주장인데, 이영훈 사학에는 특수와 보편의 통일이 존재하지 않는다. 애당초 그는 그러한 '사변적'인 논의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역사학자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다져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김용섭 사학과의 대립 속에서 문명사관으로 자신의 논의를 확장하고 체계화하게 되었을 때 그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법 입법 자유> 등을 읽으며 자신만의 자유주의 사관을 정립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내세우는 '자유' 개념은 기껏해야 반공주의적인 자유에 지나지 않거나 아주 추상적으로 보아도 "선택의 자유"를 넘어서지 못한다. 하이에크 등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선택의 자유'로서의 경제적 자유의 증진이 어떻게 정치적 자유로 '전화(轉化)'되는지에 대한 체계적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는데서 비롯된다. 그들은 선택의 자유의 확장이 궁극적으로 정치적 자유로 이어진다며 시장경제의 발전을 강조하지만, 사실 이 부분을 매개하는 논리는 대단히 추상적이고 선험적이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지적 계보 속에서 이걸 매개하는 건 선택의 자유라는 경제적 자유가 형성하는 '시장질서'라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하이에크 등이 기대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계몽 사조에서는 인간을 원자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하나의 거대한 자연적 질서 속에 포섭되어 있는 존재로 상정한다. 이들 주장의 핵심은 그러한 자연적 질서가 "시장경제'를 매개로 형성되고 또 그에 기초해서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자연적 질서'에 국가가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개인과 시민사회, 그리고 근대국가라는 삼중구조에 있어서 시민사회에 해당되는 영역을 시장경제=자연적 질서로 눙쳐버리고 넘어간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의 비조인 하이에크 등의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인간의 이기성을 논하면서도 인간이 절대로 이기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이에크의 진화론적 합리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극도로 합리적이지도. 효용을 극대화하지도 않는다. 개인이라는 건 언제나 사회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시대적 조건과 역사적 환경에 의해 규제된다. 시장경제 속에서 이뤄지는 개인들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는 '자생적 질서'를 한 개인 혹은 국가단체가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건 이런 맥락에서 성립하는 주장이다. 사회주의적 계획경제가 필연적으로 실패하리라 주장했던 것도 개인 간의 상호협력 속에서 나타나는 자생적 질서를 온전히 지식화하여 파악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선험적인 가정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기에 하이에크 등의 자유지상주의 계열이 상정하는 인간이란 '분별력'을 갖춘 합리적 개인이지, 무조건적으로 효용극대화만을 추구하고 최적의 선택만 지향하는 신고전파적 인간이 아니다.
합리적인 인간의 분별력 있는 선택을 통한 자생적 질서와 법치주의의 형성은 개인을 절대로 원자화된 존재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개인과 공동체의 통일은 바로 이런 인간관을 전제로 하여 그들 이론체계 내에서 제시된다. 하지만 그런 하이에크를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영훈 사학에서는 개인과 공동체 간의 통일적 관계의 형성에 대한 이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인간을 '사회적 동물' 혹은 '공동체적 존재'로 보는 것은 자유주의적 전통이 아니라 전근대 아시아적 사회의 감각이라 단언한다. 그에게 있어 조선왕조의 유교적 인간론의 핵심에는 개인과 공동체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 있다. 그렇기에 그는 더 강하게 개인의 존재를 강조하며 개인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식으로 논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애석하게도 그것이야말로 아시아적 사유의 전통이다. 개인이 어떻게 여러 매개 작용을 거쳐 공동체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가에 대한 이해가 없기에 이영훈 사학은 국가에 대한 강조로 귀결된다. 이영훈 사학에 있어 '개인'이란 곧 "법적 권리를 지닌 주체"를 의미한다. 그가 1912년의 조선민사령을 강조하는 이유도 국가에 의해 법적으로 공인된 존재로서의 '개인'의 '탄생'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 이르러서 나는 아시아 지식인의 비애를 곱씹게 된다. 개인과 국가 사이의 중간적 매개고리를 사유할 줄 모르는 아시아적 특질이 누구보다도 아시아적 특질을 비판적으로 사유한 경제사학자로 하여금 국가와 원자화된 개인만 존재하는 세계를 상상하게 만들었다는데 비극이 존재하는 것이다. 뉴라이트 운동은 기존의 올드 라이트, 반공주의적인 우파세력과의 결별을 지향하며 나왔다. 한국의 대립구도를 후진-중진국적인 대립인 권위주의적인 우파세력 대 반反대한민국적인 혁명적 좌파세력 간의 대립에서, 선진국형의 대립인 자유민주주의적 시장경제 세력 대 사회민주주의적인 복지국가 세력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우파 세력이 혁신되어야 한다는 게 안병직의 논리였다. 지금 와서 보면 어떠한가? 안병직의 기획은 처참할 정도로 실패하였다는 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늙고 얼빠진 안병직은 자신의 기획이 완전히 파탄난줄도 모르고 반일종족주의 좌담회에 가서 자신의 제자 이영훈이 이론적 혁신을 거듭하고 있다고 상찬만 하고 있다. 이들이 얼빠지게 된 계기를 짚어줄 필요가 있다 생각되어 책을 쓰기로 계약하고 정리하고 있는데..
이렇게 보면 한국의 뉴라이트 운동의 실패도 그렇고 임지현이나 윤해동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의 실패도 그렇고 대부분 보편과 특수의 통일을 제대로 사유할 줄 몰라서 벌어지는 문제이다. 서구적 지식인들이 우리보다 한참 뛰어나서 그들의 이론이 보편성을 지니고 그러는 건 아니다. 지젝만 보아도 얼마나 황당할 때가 많은가? 그렇다기보다는 그들이 지닌 위치, 역사적 위치, 서구가 세계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그 위치 자체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론체계에서는 자연스럽게 보편과 특수의 통일이 일어나게 유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나는 그렇게 본다.. 우리가 지금 사유해야 하는 건 더 이상 서구적 보편성이 그러한 보편적 지위를 점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 아시아가 세계사적 보편성을 쟁취할 수 있는 기회가 도래했다는 걸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재해석하는 책원고를 써서 넘겼고 뉴라이트 열전에 대해서도 제대로 좀 써보려고 한다.. "혁명읽는 사람"이라는 가제로 또 후속작이 나올텐데 그 책의 기획을 오늘 하루종일 썼다. 좀 이런 맥락에서 잘 해서 한번 우리도 제대로 무언가를 해보자는 얘기를 자신있게 해보려고 한다. 많이들 좀..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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