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순 2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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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연습 >
1. 세계 곳곳의 상황이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한편으로는, 화려한 올림픽 뉴스가 온통 TV 화면을 장식하고 있다. 세계 나라들의 재력과 권력의 위계가 ‘금-은-동메달’의 수로 결정되곤 하는 화려한 올림픽이 마치 모두를 위한 ‘세계적인 축제’ 처럼 연일 우리의 눈과 귀를 장악하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미국에서, 가자지구에서, 우크라이나에서, 그리고 도처에서 예상과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한 모습의 폭력과 분쟁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2023년 통계에 따르면 세계에서 약 7억 3,500만 명이 하루에 3천 원($2.15) 이하의 돈으로 살아가야 하는 극단적인 빈곤 (extreme poverty)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2. 지금도 무수한 생명들이 전쟁으로, 폭력으로 죽어가고, 생존에 가장 기본적인 물과 음식이 없어서 기아선상에서 병들고 죽어가는 아이들, 여성들, 남성들이 도처에서 신음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나라에서 도저히 살 수 없어서 고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걸어서, 또는 작은 배로 국경을 넘다가 부상당하고 죽어가는 난민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고통당하고 있다. 이 두 극과 극의 상황이 지닌 차이는 한 가지다. 우리의 눈과 귀에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의 관점과 시각’으로 톱뉴스가 정해지는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늘 요청되는 이유다.
3. 그런가 하면 최근 한국에서는 법인 카드를 충격적인 방식으로 사용해 온 사람이 청문회에서 드러난 ‘사실’과는 상관없이, 결국 대통령으로부터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아마 이런 법인카드 사용을 소위 ‘선진국’의 공직자가 저질렀다면, 공직 임명이 아니라 법적 책임을 묻는 소환 절차를 받았을 것이다. 청문회에서 드러난 사실들과 전혀 상관없이 단지 대통령 개인의 생각만 반영되어 임명하는 것이라면, 그 많은 인력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청문회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근원적인 회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4. 이번 청문회 이후, 대통령의 반응과 그 후속 조치는 한국 공직자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조차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한다. 석·박사 논문 표절, 다층적 사기, 주가 조작을 한 사람도 버젓이 ‘영부인’으로 추대되고 있으니, 문제 많은 사람을 여전히 공직 임명한다는 행위는 그 정도의 법인카드 남용은 별일이 아니라는 ‘대통령의 공식 승인’이라는 사회정치적 함의를 지닌다.
5. 나는 승자-패자로 나누면서 비/가시적 금전적 보상이 개입되는 여타의 스포츠 경기를 포함해서, 세계 올림픽과 같은 경기에 대하여 지극히 회의적이다. 인류애를 함양하고, 모든 이들의 우애와 존중, 세계 평화, 그리고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며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다는 본래 올림픽 정신과는 상관없이, 올림픽의 화려함 뒤에는 너무나 많은 어두운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고도의 상업주의의 극치, 환경 문제, 노숙인들과 같은 사회 저변층의 인권 침해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국가 간의 권력과 자원의 불균형이 노골화되어, 국가들의 위계가 더욱 공고해지는 무대가 되어 버린 것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6. 이러한 정황에서 올림픽 때마다 등장하는 과도한 ‘배타적 국가주의(exclusionary nationalism)’는, 한나 아렌트의 ‘국가 없는 사람들 (stateless)’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1천만 명이 다양한 이유에서 무국적자로 살아가고 있다. ‘개방적 국가주의’가 아니라 ‘폐쇄적 국가주의’가 노골화될 때, 결국 외면되고, 간과되고, 무시되는 것들은 무엇인가. 이러한 근원적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7. 청문회, 올림픽, 미국 선거전과 같이TV화면에 나오는 장면들만이 아니라, 동시에 화면에 나오지 않는,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일까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소위 ‘선진국’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세계 곳곳의 TV 화면에서 계속 보이지만, 국가 간 위계 사다리에서 밑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나라들, 그리고 아예 국가조차 없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은 우리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인간 생명에도 철저한 ‘생명의 위계 주의’가 언제나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수록 오직 보이고 들리는 것에만 관심하지 말고, 소위 ‘톱뉴스’만이 아니라, ‘사소한 뉴스’로 처리되는 것들, 아예 화면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찾아서 보고,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의도적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8. 보이지 않는 사건들에 의도적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사람이 속한 지역과 국가에 따라서 구성되는 ‘생명의 위계주의’에 저항하는 방식이다. '나의 생명'만이 아니라, 무수한 '너의 생명'이 국적이나 사회적 소속에 상관없이 '모두' 중요하다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또한 어떤 국가에 소속이든, 국적이나 무국적자든 ‘모든 생명’의 가치를 상기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9. 인류 역사의 의미로운 변화는 결국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치’와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복합적인 관심을 끈기 있게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가능해 왔다고 나는 본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우리의 관심과 인지를 확장하는 것이 당장 가시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승리와 변화의 보장’이 있어서가 아니라, ‘관심해야 하기 때문에’ 관심해야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이 암담한 세계에서 우리가 부여잡고 있어야 할 ‘희망의 토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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