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4

Jongin Park - 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5 출판기념회

Jongin Park - 12월 3일 서울 종로 만회재에서 함재봉 선생 '한국사람 만들기'5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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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 서울 종로 만회재에서 함재봉 선생 '한국사람 만들기'5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어줍잖게 기념사를 맡게 돼 준비했던 원고다. 동부전선 동계훈련을 능가하는 맹추위에, 3분의2밖에 얘기하지 못했다. 평소에 흠모하던 분들을 한자리에서 뵙고 인사드린 극적인 시간이었다. 아래는 전문. 사진은 김희곤 선생 포스트에서 퍼옴.

<그물처럼 얽힌 한국사람들 – 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 출판기념회>

1. 전봉준 재판장, 서광범

서울 종로1가 보신각 건너편에 영풍문고 빌딩이 있다. 그 앞에 전봉준 좌상이 있다. 형무소에 해당하는 전옥서가 여기 있었다. 건너편 제일은행 자리에는 의금부가 있었다.
전봉준은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원래는 목을 베는 참형이어야 했는데 몇달 전 근대법이 도입되면서 교수형을 당했다. 소송법을 서둘러 입법한 사람은 당시 법부대신 서광범이었다. 서광범은 친일개혁파였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그는 1894년 갑오개혁 때 복귀해 그해 11월 21일(음력) 법부대신에 임명됐다. 그리고 그가 내놓은 개혁안에 따라 12월 27일 참형과 능지처사형이 폐지됐다. 민간인 범죄자는 교수형, 군법으로는 총살형만 남겼다. 물론 이후에도 참 많은 참형이 진행됐다. 정치범을 상대로는 참형을 부활시키는 시대에 역행하는 일도 벌어졌다.
1894년 음력 7월 12일 갑오개혁정부는 의금부를 의금사로 개칭하고 그 장인 의금부 판사를 법부대신이 겸임하도록 했다. 그리고 법부대신 서광범은 의금사를 임시재판소로 바꾸고 단심제로 운영했다.((1894년 음7월 12일, 음12월 16일 ‘고종실록’)
전봉준은 바로 이 임시재판소에서 1895년 음력 3월 29일(양력 4월 23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장은 당연직인 법부대신 서광범이었다. 처형은 다음날 새벽2시에 있었다. 최초의 근대적 ‘교수형’이다. 양력으로는 4월 24일 새벽이었다.
전봉준이 처형되기 나흘 전인 음력 3월 25일 2심제 고등재판소가 설립됐다. 상고심을 허용한 근대적 사법기관이었다. 고등재판소는 전봉준이 처형되고 사흘 뒤인 음력 4월 1일(양력 4월 27일) 법부대신 서광범이 재판소장에 임명되면서 업무가 개시됐다. 전봉준은 그 사이에 재판을 받고 단심제로 처형됐다.
서광범은 친일개화파였다. 전봉준은 위정척사파였다. 그 세계관이 맞부딪쳤는데, 전봉준에 적용된 죄명은 《대전회통(大典會通)》 〈추단조(推斷條)〉 〈군복기마 작변관문률(軍服騎馬作變官門律)〉이었다.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서 관에 대항해 변란을 일으킨 죄였다. 대전회통에는 ‘부대시참’, 즉시 목을 벤다고 규정돼 있다. 형은 넉달 전 공포된 명에 의해 교수형으로 집행됐다. 부대시, 기다리지 않고 즉각 처형이라는 율법에 따라 바로 형이 집행됐다.
나라를 위해서건 백성을 위해서건 일신영달을 위해서건, 실정법에 있는 행위에 대한 적법한 법 적용과 집행이었다. 시스템으로 공동체를 운영한다는 근대 원칙의 적용된 사례였다.
훗날 최시형에 대해서도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됐는데, 그 형을 선고한 사람은 법부대신 조병직이었고, 좌우 배석판사는 주석면과 조병갑이었다. 당시 관보를 보면 법부 민사국장이던 조병갑은 순번 또는 호선에 따라 재판부에 들어갔다. 그가 제대로 법을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재판부 배석이었다는 사실만으로는 비난할 수 없다. 탐오한 관리를 고위 공무원에 재임용한 사실이 문제였을 뿐이다. 서광범은 근대 사법제도를 들여놓고 이에 따라 전봉준을 재판하고 처형했다. 최시형도 마찬가지였다.

2. 당돌했던 검사 시보

1898년 겨울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다섯 흉노(五凶)으로 규정하고 처벌을 요구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름은 조병식(趙秉式), 민종묵(閔種默), 유기환(兪箕煥), 이기동(李基東), 김정근(金禎根)이다.(1898년 11월 12일 ‘고종실록’)
이 가운데 고등재판소에 자진출두한 이기동을 황국협회 회원들이 법부에 난입해 데리고 가는 사건이 벌어졌다.(‘사법품보(을)’ 13, 1898년 11월 20일) 이틀 뒤 사건을 담당했던 고등재판소 검사가 파면됐다.(1898년 11월 22일 ‘고종실록’) 파면된 검사는 12일 전인 11월 10일 독립협회 관계자들 재판 공판을 담당했던 검사였다. 대명률에 따라 이상재를 비롯한 피고인들은 태40대를 선고받았다.(1898년 11월 14일 ‘대한제국 관보’)
그 검사가 판결을 책임지는 판사는 아니었지만, 입헌군주제를 운운하던 자들이 말 그대로 ‘법대로’ 재판을 받았으니, 고종 마음은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파면도 즉흥적이지 않았을까. 결국 그 즉흥적인 결정은 닷새 뒤 철회됐다.(1898년 11월 27일 ‘고종실록’)
이 당돌한 검사시보가 법관양성소 1회 수석 졸업생 함태영이다. ‘한국사람 만들기’를 집필하고 있는 함재봉의 할아버지다.
해가 바뀌고 함태영은 독립협회 회원이던 이승만이 억울하게 구금돼 있다는 보고를 받고 법부에 선처를 요구하는 보고서를 올린다.(‘사법품보(을)’14, 1899년 1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육혈포를 들고 탈옥했다 재수감됐던 이승만은 1899년 7월 27일 평리원 재판소에서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1899년 7월 27일 ‘고종실록’, 8월 1일 ‘대한제국 관보’) 그때 평리원재판장은 20일 전 재판장에 임명된 홍종우였다. 훗날 이승만은 “내 아버지한테 홍종우가 나를 살려줄 것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3. 여기까지 등장인물을 보자.

서광범. 친일개화파다. 전봉준, 위정척사파다. 흥선대원군을 보좌해 저항한 혐의가 있다. 조병갑은 아무 개념 없는 동시대 전형적인 탐관오리다. 조병식, 민종묵, 유기환, 이기동, 김정근. 고종을 보좌하며 친미, 친일개화파들의 독립협회 활동을 반대했던 인물들이다. 함태영, 한미한 무신 집안에서 근대 법을 선택해 전문 법조인으로 성장한 인물이다. 훗날 그가 접한 기독교적 세계관은 이 땅에 근대를 착근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홍종우와 이승만. 홍종우는 근황파이면서 동시에 근대의 물을 접한 개화파였다. 비록 고종을 보위하고 독립협회를 탄압하면서 근대를 저지했지만, 나름대로 구시대적 세계관 속에서 개혁을 추구했던 인물이다. 이승만. 친미 기독교파 근대인으로 대한민국을 향한 길을 만들었다.
이렇게 얽히고 설킨 시대정신의 네트웍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대한제국 지성과 권력 지형도를 만들고 있었다. 어느 하나를 단선적으로 단죄하거나 단선적으로 미화하는 선악적 구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래가 그 사람들 앞에 놓여 있었다. 그들이 만든 세상에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다.
그 당돌한 검사 함태영의 손자 함재봉의 책에는 이러한 지성과 시대정신의 네트웍이 그물처럼 촘촘하게 그려져 있다. 선과 악, 밝음과 어둠이라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초월해 그 시대의 객관을 주워올려 쌓아놓은 실증주의적 지형도다. 

4. 숱한 여울목들

박성빈이라는 선비는 경상도 동학군 접주였다. 무과에 합격했지만 동학에 동참해 전투를 하다가 생포돼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후 초야에 묻혀 가난하게 살았다. 박성빈에게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둘째 아들은 식민시대에 사회주의 혁명을 꿈꿨다. 해방이 되고 이 아들은 남로당 당원으로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하다가 1946년 10월 대구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그 아들의 동생도 남로당원이었다. 형이 죽고 2년 뒤 국군 내 남로당 조직원으로 체포돼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고 사면됐다. 노상에서 총에 맞아 죽은 사람 이름은 박상희다. 훗날 대통령이 된 그 동생 이름은 박정희다. 박정희는 5.16을 역사적 맥락에 놓기 위해 동학에서 ‘난동’ 꼬리를 떼고 ‘혁명’이라고 명명했다.
구한말 의병장 최익현은 동학을 동비라 불렀다. 안중근은 동학을 폭동이라 규정하고 황해도에서 동학군을 토벌했다. 동학 4년 뒤인 1898년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대한제국 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재판장은 조병직, 배석판사는 주석면과 조병갑이었다. 1907년 1대 교주 최제우와 2대 교주 최시형의 죄를 없애고 사면하기를 고종에게 요청한 사람은 총리대신 이완용이었다. 이렇게 모두가 그물처럼 얽혀 있다. 역사는 그물이다. 탑이 아니라 촘촘한 그물코들이 만드는 그물이다.

5. 근대인 지석영

그 그물코는 상상보다 더 촘촘하다. 병자호란 때 항복을 선택한 사람은 최명길이다. 그 선택으로 조선은 수십 아니 수백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종두법을 조선에 도입한 사람은 지석영이다. 지석영은 최명길만큼이나 많은 생명을 구해냈다. 여기에 또 그물 같은 지성인의 네트웍이 등장한다.
지석영에게 종두법이라는 실체를 알려준 사람은 박영선이라는 사람이다. 박영선은 1876년 1차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갔던 사람이다. 일행 가운데 한 명이 병이 나서 왕진 온 의사한테 치료를 받다가 종두법 얘기를 듣게 됐다. 박영선은 곧바로 그 의사를 따라 병원으로 가서 종두법 개요를 들었다. 그리고 책과 접종할 수 있는 종두를 얻었다. 병원 이름은 준텐도(順天堂)다. 그때 박영선이 한탄한다. “이걸 받은들 조선에서는 쓸 수가 없네.”
그러고 귀국해서는 자기 제자인 지석영한테 책을 주고 종두법 배우라고 권유했다. 지석영이 열심히 독학했지만, 당연히 진도가 나가지지를 않았다.
그러다 1879년 조카딸이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 빡친 지석영이 그해 10월 일본사람이 많이 사는 동래로 내려갔다. 호주머니에 엽전 다섯냥이 있었는데, 얼마나 지독하게 아꼈는지 걸식하며 동래에 도착하니까 석냥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동래에는 1877년 일본이 만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 있었다. 병원 이름은 ‘제생병원’이다. 무조건 종두법을 가르쳐달라고 요구했다. 제생병원에 근무하던 일본 해군 군의 토츠카 세키사이(戶塚積齋)가 두 달 동안 종두법을 가르쳤다.
두 달 뒤 지석영이 종두법 지식을 품고 처가집이 있는 충주로 갔다. 장인한테 읍소해서 어린 처남한테 우두 접종했다. 나흘 만에 우두 딱지 앉았다. 성공한 것이다. 지석영이 이렇게 회상했다. “과거 급제 때와 귀양살이에서 풀려온 때도 기뻤지만 이 때 기쁨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네.”
그리고 이듬해 1880년 2차 수신사 일행으로 재차 일본으로 가서 종두 제조법을 배웠다. 귀국해서는 서울에 종두장 만들고 종두법 전파했다. 1882년 전라도와 충청도에 파견된 암행어사 박영교와 이용호가 지석영을 초빙해 자기네 도에 종두 접종을 실시했다. 이때 지석영은 개화파로 낙인찍혔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무당들이 자기네 밥그릇 뒤집는다며 종두장을 불태웠다. 지석영은 이듬해 과거에 응시해 급제했다. 1887년 사헌부 장령으로 일하던 때, 수구파들이 “박영효랑 짜고 정변 준비하고, 종두라는 정체 불명체 생산 핑계로 박영교와 당을 꾸민 놈”이라며 처단 요구했다. 지석영은 유배됐다.
1894년 갑오개혁정부에서 지석영을 불러 형조참의에 임명했다. 지석영은 “무당 진령군 참수하라”고 상소하며 왕실을 비판했다. 고종은 지석영을 동학 토벌대장으로 임명해 바깥으로 내몰았다. 1898년 지석영은 또 황해도로 유배됐다. 이번에는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한 혐의가 씌워졌다.
그런데 1899년 고종은 지석영 복귀시켜 대한의원 교장에 임명했다. 대한의원은 아관파천 때 고종 명으로 노변 처형 당한 관훈동 김홍집 집터에 설립됐다. 1902년 고종은 지석영에게 천연두 퇴치 공로 훈장을 내렸다.
1909년 지석영은 안중근에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 조문을 읽었다. 지금 지석영은 그 추도문을 읽은 대가로 2003년 대한민국 과학기술부가 선정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서 탈락했다. 이 지석영을 가운데 놓고 씨줄과 날줄을 이으면 희한하게 촘촘한 그물이 완성된다.

6. 근대인의 지도

지석영에게 천연두 공부하라고 한 박영선은 1882년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조선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 창간할 때 공동작업자였다.
박영선은 강위라는 사람이 만든 육교시사라는 단체 멤버였다. 강위는 1876년 강화도조약 조선측 통역가였다.
지석영을 2차수신사에 끼워 보낸 사람은 김옥균이다. 김옥균은 "제조법 꼭 배워오라"고 신신당부했다. 일본에서 종두 제조법 학습을 알선해준 사람은 일본 메이지유신의 주역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강위는 추사 김정희 제자였다. 김정희가 죽고 팔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들과 교류를 했다. 대표적인 친구들은 오경석, 최한기, 유대치, 김정호, 박규수, 이동인 등이다. 모두 근대와 개화에 적극적인 사람들이다.
박규수가 길러낸 사람은 북촌5인방들이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갑신정변 주모자들이다. 
박영선, 강위와 함께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를 만든 이노우에 가쿠고로라는 일본인은 이 갑신정변에 폭탄조로 투입됐다.
이노우에 가쿠고로에게 신문 만들라고 권한 사람은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후쿠자와에게서 근대를 배웠다.
강위와 친했던 승려 이동인은 이 북촌 5인방에게 근대를 알려준 사람이다.
유대치는 이 북촌5인방의 정신적 구루였다. 유대치는 정변 실패 후 오경석 아들 오세창 데리고 외출한 뒤 혼자 실종됐다.
역시 강위와 친했던 박규수는 북촌 5인방 스승이며 북학파의 계보를 잇는 개화파였다.
강위와 함께 한성순보를 만들던 우시바 타쿠조는 지지부진한 창간 준비에 지쳐 귀국했다. 그때 조선 청년 17명을 데려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만든 게이오의숙에 입학시켰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서재필이었고 동기생 상당수가 갑신정변에 참가했다.
다시 한번 등장 순서대로 이름들을 나열해보자: 박영선-지석영-일본 해군 군의관 토츠카 세키사이-강위-이노우에 가쿠고로-김옥균-이노우에 가오루-김정희-오경석-최한기-유대치-김정호-박규수-이동인-변수-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재필-서광범-후쿠자와 유키치. 그물 같이_근대인들이 얽혀 있다. 웅장하다.
1894년 김옥균이 청나라 상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될 때 김옥균을 따르던 일본 청년이 있었다. 이름은 미야자키 도텐이다. 김옥균이 이홍장을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가 거절당했다.
며칠 뒤 김옥균 암살 소식이 알려지자 미야자키는 통곡을 하며 그를 추모했다. 그리고 훗날 청나라로 가서 손문을 도와 신해혁명에 헌신했다.
국경도 없었고 민족도 없었다. 바다 건너 거미줄처럼 짜여진 근대의 네트워크가 또렷하게 보인다. 그 네트워크를 활용한 국가는 흥했다. 네트워크를 붕괴시킨 국가는 망했다. 근대를 맞아, 조선도 정체돼 있지만은 않았다. 각성한 근대인들이 있었다. 강위를 필두로 근대정신들이 모였고, 그들과 교류했던 벗들이 근대를 만들어나갔다. 

7. 우리 한국사람들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서 조선과 대한제국에는 그리고 식민시대 조선에는 숱한 근대인들이 있었다. 식민시대 여러 기록을 보면 서로간에 적대감 없이 교류를 하면서 서로를 빨아먹으면서 새 시대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시대인들을 선과악 혹은 친일과 애국 따위로 분류하는 방식은 객관적이지 않다. 한국사람 만들기 시리즈에 그 역사가 기록돼 있다. 큰 작업이다. 그리고 큰 가족사가 한국사람 시리즈에 담겨 있다. 할아버지 함태영에서 아버지 함병춘으로, 그리고 그 손자 함재봉에 이르는 가족사이기도 하다. 우리네 가족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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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곤

많이 배웁니다. 박 기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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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 만들기 5 - 친미기독교파 2 
함재봉 (지은이)에이치(H)프레스202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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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45,000원
798쪽

한국 사람 만들기 5 - 친미기독교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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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 만들기 4 - 친일개화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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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 만들기 2 - 친일개화파,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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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 만들기 3 - 친미기독교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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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 만들기 1 - 개정판

책소개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다룬다. 
『한국 사람 만들기 II I: 친미기독교파 1』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을 어떻게 바꿔 나갔는지를 살펴봤다면 이번에는 갑신정변(1884) 실패 후 미국으로 건너간 서재필과 윤치호 등이 10년 후 갑오경장(1894-1895)을 계기로 귀국하여 활동을 재개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서재필과 윤치호가 해외 망명길에 올라있던 10년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을 밑으로부터 바꾸기 시작한 기간이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성공적인 선교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한편 이승만, 주시경과 같은 인재들을 양성한 기간은 조선 최고의 개화파 지식인 겸 정치인들이 직접 미국을 배우고 돌아오는 기간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들이 만나서 함께 만든 것이 조선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과 조선 최초의 시민단체인 「독립협회」다.
목차
서론 • 18 

1. 독립 아닌 독립 19 / 2. 러-일 각축 21 / 3. 친미기독교파의 등장 23 / 4. 조선의 계급혁명 27 / 5. 조선의 종교개혁 31 / 6. 조선의 문 체혁명 33 / 7.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40

• 독립 아닌 독립: 아관파천 • 52 

1. 스페예르 러시아 공사 57 / 2. 고종의 첫번째 밀지 62 / 3. 고종 의 두번째 밀지 64 / 4. 파천 68 / 5.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의 죽 음 70 / 6. 친일내각의 몰락 76 / 7. 개혁의 중단 81 / 8. 고종의 보 호령 요청 86
제2장 • 러시아의 순간 • 94 1. 이토-히트로보 대화 97 / 2. 일본-독일-러시아 대화 100 / 3. 열강들의 반응 104 / 4. 야마가타-히트로보 대화 109 / 5. 사이 온지-히트로보 대화 112 / 6. 러시아-일본의 협상 개시 115 / 7. 고 무라-베베르 비밀각서 116 / 8. 야마가타-로바노프 협정 118
제3장 • 러시아의 만주 장악 • 128 1. 청일전쟁 배상금 조달하는 러시아 131 / 2. 러청동맹 138 / 3. 만주철도 141 / 4. 모스크바의 이홍장 148 / 5. 동청철도회사 계약 165
제4장 • 조선을 러시아의 보호령으로 • 180 1. 민영환 특사 182 / 2. 러시아의 군사교관 파견 222 / 3. 일본의 내정 혼란 226 / 4. 러시아의 조선 정책 혼선 228
제5장 • 고종의 환궁 • 232 1. 고종의 신변보호 233 / 2. 플랑시의 상황 분석 238 / 3. 『코리 안리퍼지토리』의 사설 244 / 4. 윤치호의 기록 246 / 5. 환궁 252
제6장 • 러시아의 후퇴 • 258 1. 일본의 협상시도 259 / 2. 가토의 고종 독대 262 / 3. 무라비요프 의 후퇴 264 / 4. 러시아의 정책 혼선 268 / 5. 일본의 대응 271 / 6. 로젠의 부임 273 / 7. 러시아의 조선군 훈련 포기 277
제7장 • 칭제건원과 대한제국 • 282 1. 칭제건원의 전말 283 / 2. 황제 즉위식 290 / 3. 열강들의 반 응 292
제8장 • 만한교환 • 296 1. 러시아의 재정 고문 문제 297 / 2. 독일 함대의 칭다오 입항과 러시아 함대의 뤼순 입항 308 / 3. 러시아의 뤼순 조차 314 / 4. 김홍 륙 사건 317 / 5. 니시-로젠 협정과 만한교환 323
제9장 • 조선의 계급혁명 • 330 1. 조선의 제2 신분 계층 331 / 2. 조선의 관료제와 신분제 340 / 3. 통리기무아문과 군국기무처 346 / 4. 갑오경장과 관료 충원제 도의 근대화 354 / 5. 제2 신분 계층과 기독교 365 / 6. 서재필과 윤치호 370
제10장 • 조선의 종교개혁 • 382 1. 종교개혁과 근대국가, 근대인 383 / 2. 개신교의 근대성 387 / 3. 유교에서 기독교로 392 / 4. 유교 격하 운동 395 / 5. 조선 체제 비판 401 / 6. 중국 격하 운동 405 / 7. 유교의 반격 409 / 8. 동양 대 서양 418 / 9. 대안: 기독교 424
제11장 • 조선의 문체혁명 • 428 1. 루터와 근대 독일어의 창제 429 / 2. 틴들과 근대 영어의 창제 439 / 3. 「언문」에서 「국문」으로 447 / 4. 「언문」의 한계 458 / 5. 조 선의 책 출판과 유통 467 / 6. 『언문 성경』 473 / 7. 문해 혁명 494 / 8. 출판 혁명 497 / 9. 「국문」 만들기 502
제12장 •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 510 1. 「조선에서 가장 시급한 것」 514 / 2. 유길준과 『독립신문』 521 / 3. 『독립신문』의 창간 525 / 4. 근대사상의 전파 532 / 5. 독립문 551 / 6. 독립협회 557 / 7. 독립문의 설계와 건립 563 / 8. 『독립협 회보』의 발간 568 / 9. 수구파의 반동과 김가진 사건 569 / 10. 토 론회로의 진화 573 / 11. 러시아의 내정간섭 비판 584 / 12. 알렉 세예프 고문 임명 사건 589 / 13. 절영도 사건 594 / 14. 스페예르 의 최후통첩 607 / 15. 만민공동회 612 / 16. 서재필의 해고 619 / 17. 독립협회 대 정부 635 / 18. 의회정치를 향하여 644 / 19. 김 홍륙 독다사건(毒茶事件) 656 / 20. 「조규 2안」 671 / 21. 황국협회 의 등장 675 / 22. 중추원 개혁안 678 / 23. 관민공동회 686 / 24. 「헌의 6조」 692 / 25. 의회민주주의 697 / 26. 수구파의 역습 700 / 27. 독립협회의 저항 705 / 28. 독립협회의 급진파 710 / 29. 보 부상의 습격 713 / 30. 고종의 타협 시도 721 / 31. 박영효 사면 탄 원 727 / 32. 폐회, 폐간 735
결론 • 746
주(註) • 748
참고문헌 • 783
색인 • 787

저자 및 역자소개
함재봉 (지은이) 

한국학술연구원장.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1992-2005),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UNESCO) 사회과학국장(2003-2005),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한국학연구소 소장 겸 국제관계학부 및 정치학과 교수(2005-2007), 랜드연구소(RAND Corporation) 선임 정치학자(2007-2010), 아산정책 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2010~2019) 등을 역임했다. 미국 칼튼대학교(Carleton College)에서 경제학 학사학위(1980), 존스홉킨스대학교(Johns Hopkins University)에서 정치학 석사 및 박사학위(1992)를 취득하였다. 접기
최근작 : <한국 사람 만들기 5>,<한국 사람 만들기 4>,<정치란 무엇인가?> … 총 16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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