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옥 경 한국의 해녀 제주 잠녀 그리고 신유학과 이중신화 |
무당 강복녀,
2016.
박 옥 경
한국의 해녀
제주 잠녀
그리고 신유학과 이중신화
목차
06 독자를
위한 주석 언어 표기
08
추천서문(Preface)
12
추천사(Foreward)
16
작가의 서문
1. 헌정과
감사의 말
2. 두
가지 화급한 이슈: 제주 정체성과 녀
3. 서부
수마트라 모계 사회에 대한 필자의 초기 연구
22 서론: 제주현실
발견
1. 표류하는
배
2. 제주의
현실: 화산섬과 척박한 환경
3. 독특한
남녀관계 형태를 만든 제주 현실과 신유학의 영향
4. 제주
정체성과 잠녀들
5. “여성-중심 사회”
6. 인용된 자료들
7. 재정
지원, 현장 연구 로케이션과 방법론
40 1장 바다의 사람들: 지리·역사적
흔적
1.
제주의 지리
2.
제주 사람들의 기원
3.
물 건너 지역
4.
역사 속의 전설과 신화의 장소
5.
삼국시대 탐라국의 해상 무역
6.
고려시대(918–1392)와 몽골족 침입
7.
조선 왕조(1392–1910)와 신유교 사상
8.
일제강점기(1910–1945)와 근대화
9.
4.3사건(1948–1949)과
한국전쟁(1950–1953)
10.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제주
58 2장 제주 친족제도에서 여성의 위치
1.
제주 정체성에서 친족
2.
신유교 이데올로기의 친족제도
3.
제주 친족제도의 모순
4.
“어느 한 쪽 성(性)도 지배적이지 않는” 제주
친족제도의 본질
5.
괸당: 제주 친족제도
6.
하우목동 마을의 괸당 관계
7.
일부 친족제도에서 볼 수 있는 제주 젠더 관계
8.
부부 중심의 핵가족 관계의 평등주의 특성
78 3장 제주 해녀(녀)
1.
한국의 아마존: 제주 여성을 바라보는 외국인의
시선
2.
한국의 카자흐스탄인: 제주 남성
3.
제주 신화에 나오는 여성 이미지
4.
잠녀에 대한 학술 논쟁
5.
역사적 배경
6.
해안 마을과 농촌의 사회-경제적 여건
7.
물질로 제주 경제 지원: 섬을 떠나 이동하면서
8.
잠녀들의 항일운동과 독학
9.
잠녀 세계와 가치 체계
10. 공동재산으로서의
어장(바다)
11. 잠녀들의 규정
12. 잠녀들의 남자들
13. "숨을 내쉬며": 제주 사회의 도덕적 충추인 녀들의 용기와 지혜
112 4장 무속과 18,000 신들
1. 제주문화의 무속신앙
2. 마을
무속 신당 (본향당) : 마을공동체의 중심
3. 제주
마을 의례의 이중구조
4. 잠녀와 무당과 신과 여신과의 관계
5. 바다
여신을 위한 의례(해신굿)
140 5장 제주에 끼친 신유학의 영향
1. 제주
사람들의 신유학에 대한 집착
2.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변화의 도구로서의 신유학
3. 부계
혈통을 강화하는 방법인 조상 숭배의식
4. 신유학
도래 이전의 고려
5. 신유학의
제주 도래
6. ”조상의 깊은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기(불휘)“
154
결론
160
용어해설과 참고문헌
172
감사의 말
한글 음가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모음
a ya ă yŏ o yo u yu ŭ i ㄱ ㄴ ㄷ ㄹ ㅁ ㅂ
ㅅ
k,
g n t, d r, l m p,
b s, sh
자음
ㅇ ㅈ ㅊ ㅋ ㅌ ㅍ ㅎ
ch,
j ch’ k’ t’ p’ h
작가의 주(註)
녀(물질하는
여성을 뜻함)는 산소 탱크 없이 물질하는 평범한 제주 해녀를 말한다.
물질하는 여성을 일컫는 용어들은 잠수(바다에서 일하는 여성을 뜻함)와
해녀(바다의 여성)와 같이 다양 하게 사용된다. 학계 논쟁은 그 용어를 통일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한 저자(Chun 1992, 487–493쪽)에 따르면, “해녀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정부가 제주 물질하는 여성들(Jeju
divers)을 멸시하여 만든 식민지 용어이다. 그러므로, '녀'나 '잠수'와 같은 용어는 제주 정 체성을 탈식민지화하는 방안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다른
저자들은(Cha and Ko 2005, 17– 18쪽), 해녀를 선호하는데, 이 용어가 관찰자, 외부인, 학자들에
의해 더 자주 사용되었기 때 문이다. 이 책에서는 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언어표기
이 책에서, 고유명사를 제외하고 한국어와 제주방언은 이탤릭체로 표기한다. 여러 저자들이 한국어 용어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기하는데 이 책은 각 저자의 사용법을 따른다. 예를
들어 몇몇 저자는 “Jeju”를 “Cheju”로, “ Joseon”을
“Choseon”으로, “이(Lee”)를 “이(Yi)” 로 표기하기도 한다.
가끔 조선(Choseon) 왕조는 조선 건국자의 성(性)을 따서 가끔 이씨(Yi) 왕조로 부르기도 한다.
한글에는 왼쪽 페이지에서 보듯이 10개 모음과 14개 자음이 있다. 일부 자음 표기는 저자에 따라서 다르다. 인명(人名)을 표기할
때, 이 책은 성(性)이
이름 앞에 오는 한국 방식을 따른 다. 이름은 보통 두 글자이며 그 사이에 하이픈(-)이 있다. 예를 들면, 성(性)씨와 정희
(Jeong-Hui)는 이름이다.
이 연구에서 사용된 다수의 참고문헌들은 한국어만 구할 수 있다. 독자들에게 이 연구들에 대 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참고문헌 제목들을
번역하여 텍스트와 참고문헌에서 대괄호로 표시해 두었다.
우도 근처 녀, 2016.
추천서문
뜻밖에 발견된 행운의 순간
브로니스와프 말리노프스키의 트로브리안드 군도 민족지학 출간 이후, 모든
곳에 있는 민족지 학자들이 민족지학에 고심해오고 있다. 이 책은 인도네시아 미낭카바우인을 연구하면서
처음 으로 모계 사회에서 경험을 쌓은 박옥경 박사가 한국의 제주 섬을 기반으로 연구를 진행한 민 족지학이다. 제주는
한국처럼 부계 전통이다. 한국의 (여성과 남성) 인류학자들은 부계사회에 서 자랐다. 내가 보기에 민족지식학의 젠더
지위는 사회구조 관점에서 사회의 본질을 해석하 는 데 있어 핵심 요소인 것 같다. 아네트 와이너는 파푸아뉴기니
트로브리안드 군도에 대한 연구에서 민족지학자의 젠더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여성의 영결식은 판도라
상자였다”[1])
사실 그 판도라 상자는 트로브리안드 군도에 대한 말리노프스키의 민족지학 안에 닫혀있었고
결국 와이너가 그 상자를 열어야 했다. 말리노프스키는 그의 연구에서 인간 사회에서 사회생 활을 "측정(평가)할 수 없는 것(imponderabilia)"이라는
흥미로운 용어를 사용했고, 반면에 와 이너는 그녀의 젠더 지식을 가지고 인간 사회의 사회생활을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나는 와이너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믿는다.
여기 한 명의 와이너가 있다. 박옥경 박사의 제주에 대한 민족지학 원고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조해정(1979)과 김창민(1992)이 펴낸 제주 섬에 대한 다른 민족지식을 살펴봐야 했다. 전
자는 여성의 생활상을 강조하여 제주 사회를 묘사하는 데 "어느 쪽 성(性)도 지배적이지 않음
(neither dominance)"이라는 용어를 최종적으로 사용했고 후자는 괸당(kwendang)으로
알려 진 친족에 오직 초점을 맞췄다. 조해정은 페미니스트 인류학의 위치를 취했고 김창민은 사회 인류학의
전통적인 위치를 지켰다. 조해정은 남성의 의례 의무와 대조를 이루는
녀(해녀)의 삶의 생산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제주 사회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것은 분명 하다. 조해정은 한국뿐만 아니라 제주 또한 여성-남성 간의 권력 관계 측면에서 남성 지배 사 회라는 관점에 성공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조해정은 사회관계에 대한 주 요 접근이 괸당이라는
친족이 있는 제주 섬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근거를 밝혀내지 못했다고 본다. 김창민은 거의 제주 민족지학
연구에서 친족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건드리는데 기여했
다. 두 민족지학에서
무엇이 누락되었을까? 그들은 사회제도로서 친족 편측성(kinship laterality)의 관점을 취했고, 그리고나서
암묵적이면서도 정확하게 두 민족지학에서 당연하게 여겨왔던 혈통 지배(the
rule of descent)에 초점을 맞춘 직계성(lineality)의 관점을 명백히 제쳐놨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둘 다 관광객 관점에 오염되어, 가족을
부양하는 일상의 일(해산물을 얻기 위한 물질)을 하는 녀에만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였다.
박옥경 박사가, 미낭카바우인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모계 사회를 비교하는 관점에서 제주 사 회의 지역적 차이를 탐구하면서 이 민족지학에서 기여한 것은 인정받아야
한다. 한국 사회에 서 제주 섬에 맞추어, 부계사회의 지역적
차이를 탐구한 그녀의 관점은 사회 과학뿐만 아니라 한국 인류학 역사상 처음 시도한 것이다. 이 연구는
국제 학계의 한국학뿐만 아니라 한국 인 류학에도 눈을 뜨게 하는 사례로 인정받아야 한다. 녀는 사실
집안 일상생활 측면에서 경제 력을 가지고 있으며, 지역사회에서 그 사회적 관계도 넓히고 있다. 그것은 부계측 거주를 규 범으로 삼는 부계 회 영역 안에서 모계 확장의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여성 중심"의 생활 방식 이 이 부계사회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 이것이 박옥경 박사의 핵심 질문이다. 이것은
한국 사회를 공시적이고 통시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이론 구축 측면에서 한국인들과 한국 학자들에 게는 뜻하지 않게 발견된 가르침이다. 한국학에 대한 이 귀중한 민족지학을 탐구하면서 비판 적인 논의가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서울대 명예교수, 인류학자, 전경수
신들린 무당, 한수리, 2016
추천사
추천사
박옥경 박사와 그녀의 지역 연구팀은 우리에게 훌륭한 사진과 지도와
그래픽 삽화를 삽입하 여, 대한민국 남해안에서 약 90km 떨어진
큰 화산섬인 제주와 제주의 작은 이웃 섬인 우도 주민들의 친족제도와 사회제도에 대한 괄목할 만한 연구를 제공한다.
예전 1980년(1979년 10월-1981년 5월)과 1986년(3월-5월) 사이 거의 2년
동안, 박옥경 박사 는 박사학위로 모계 거주지가 있는 모계 사회인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미낭카바우인에
대한 중요한 인류학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미낭카바우 사회에서는 어머니가 땅과 주택을 소 유하고
자녀들의 욕구를 채워주고, 아버지는 자신들의 어머니 혈통의 명성을 자식들에게 물려 준다. 이 연구 프로젝트를 통하여, 박옥경 박사는 서구 연구자들이 훨씬
많이 집중하는 공적 권력 관계보다도 사적인 권력 관계-집과 자원이 있는 땅의 소유권에서 관찰할 수 있는-에 더 초점을
두고 모계 사회의 젠더 관계에 대한 전문지식을 습득하였다. 이로 인하여 박옥경 박사 는 젠더 관계보다
더 균형 잡힌 관점을 가질 수 있었다.
제주도에 도착한 박옥경 박사는 많은 할머니들을 포함한 녀들이 조개류를 캐서 벌어들인 수 입으로 가족들을 부양하고 자녀들이 질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바로 주목했 다. 그녀는 이 녀들에게 관심을 갖고
제주 녀들을 미낭카바우인과 그녀가 중등교육을 받 았던 대한민국 본토에 사는 한국인들과 비교하기로 결심하였다.
한국에서 신유교의 가치가 여전히 우세하고 남성을 여성보다 우월하게
바라보는 사실을 감안 할 때, 제주와 우도 녀들이 한 나라를
규정하는 그 가치의 장애를 어떻게 극복하고, 자신들 의 가족과 지역 사회의 운영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는지 발견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 운 일이었다.
박옥경 박사는 제주대학교의 초청으로 4년 동안(2011–2014), 인도네시아에서 수행한 그녀의 연구에
대해 여름학기 수업을 가르쳤고, 이 일을 계기로 제주 지역의 역사학자와 사회 과학자 들이 제주도에 관해
출간한 모든 출판물을 참고하게 되었다. 게다가, 2016년에
그녀는 여성 무속 신앙과 남성의 조상 숭배(cult)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수집하고 녀에 대한 그녀의 데이 터를 검증하기 위하여 3개월간 우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인류학 분야에서, 제주와 같 은 섬 지역의
정치적 역사와 특정 환경을 고려함으로써 모계 사회의 진화를 그런 방식으로 분 석할 수 있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나는 이누이트와 퀘벡코이스 섬 지역을 연구하면서 저자가 “nissology”(섬 연구)를 인용한 것 에 매우 감사드린다. 그것은 점차 글로벌화되는
세계에서 지역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마 지막으로, 나는
박옥경이 북미 영어권 인류학과 프랑스와 퀘벡의 불어권 인류학과 유지해온 중요한 관계를 지적하고 싶다.
예를 들어, 그녀는 고(故) 니콜 클로드 마티외(d. 2014)가 편집한 주요한 컬렉션을 공동작업
했다, Une maison sans fille est une maison morte, la
personne et le genre en sociétés matrilinéaires et le genre en sociétés
matrilinéaires et/ ou uxorilocales (딸 이 없는 집은 죽은
집이다: 모계 사회 사람과 젠더, 모계 사회의 젠더 그리고/또는 처가 거주 사회의 젠더; 파리: Maison des Sciences de l’Homme, 2007). 이
책이 그 컬렉션에서 제기 된 문제들을 다루고 전개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살라딘 앵글루어 베르나르(Saladin
d’Anglure Bernar) 캐나다, 퀘벡, 라발 대학교 명예교수, 인류학자
용의 여신에게 음식 제공, 2016.
작가의 서문
1. 헌정과 감사의 말
2016년 12월 1일 제주 “물질하는 여성”(녀)이 유네스코 인류 무형 문화 유산 대표 목록으 로 등재되었다.
2016년 제주에는 4,500명 미만의 잠수부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녀의 수 는 지난 50년 동안 급격히 감소했다; 1969년에는 23,000명이었다.
현재 연세가 80대이거나 이 세상을 떠난 녀들을 기억하며 그들에게 이 책을 헌정한다. 제주 역사상 매우 어려운
시기에 자식들에게 음식과 집과 교육을 제공하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며 사회, 가족, 남성을 지원하기 위한 그들의 독립 정신과 투쟁을 기린다. 그 분들은
배고픔을 위 로로 바꾸면서 자녀들을 위해 오늘의 제주로 가는 다리를 놓았다[2]). 한 녀는
다음과 같이 말 한다, “나는 고된 일과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내 어머니와 우리 선배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분 들과 함께 유네스코가 우리 녀들을 인정해 준 것에 대해 함께
음미하고 싶다. 하지만 그 분 들은 더 이상 이 곳에 안 계신다.” 이
말씀은 연세가 60대이거나 그 보다 더 젊은 다른 젊은 녀들의 말이 반영된 것이다. 이 책은 제네바에 있는 바비에 뮐러 미술관 문화 재단의 재정 적 지원으로 가능했다.
2. 두 가지 화급한 이슈: 제주
정체성과 녀
필자의 제주도와의 첫 만남은
2010년으로, 근 40년의 캐나다 이민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제주도를 정착지로 선택하신 어머니를 방문하러 갔을 때였다. 어머니는 조국으로
돌 아가서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해 일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하며 사는 것이 중 요하다고 느끼셨다.
어머니께서는 이를 위한 최적의 장소로 제주도라고 생각하셨고, 제주도는 2005년 수많은 억압과 비극으로 고통을 받은 이 섬을 치유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치적으로) 한국 정부에 의해 “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다.
처음 제주를 만났을 때 필자의 관심을 끈 두 가지 주제가 있었다. 그것은 “제주 정체성”에
대 한 질문과 녀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에 대한 제주 사람들의 고민이었다. 이 주제는 제 주 미디어와 제주 학계에서 자주 논의된다. 제주 정체성에
대한 담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a) 제주 문화의 뿌리는 중국 동북에 있으며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영향 을 어느 정도 받는다. (b) 제주문화는 한국의 마지막 왕조인 조선을 형성한
신유학 원리와 육 지와는 사뭇 다른 제주 섬의 “현실”(자연환경)이 절충된 것이다. 녀는 학술회의의 빈번한 주 제이기도 하며 미디어에
등장하고, 녀 공동체와 문화와 역사에 대한 수많은 출판물이 간행 되었고, 녀와 해양 문화(nissology)에 대한 이론들이 나오고 있다. 몇 가지 다른 문화 활동 사례로 해녀
박물관과 녀들을 위한 해녀
학교개관을 들 수 있다.
이 두 담론은 겹친다. 녀들은
확실히 제주도 정체성의 일부이며 그들 없이는 섬 정체성을 상상할 수 없다; 녀들이 제주에 기여한 경제적
공헌을 무시할 수 없다. 녀들과 바다는 제 주 섬의 정체성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육지의 신유학의 가치와 제주도 현실 사이의 “타협” 으로 이루어진 제주문화에 대한 담론은 정체성의 핵심 문제를 바로잡으면서, 육지에서
실천된 신유학 원리가 제주 섬의 정체성 문제로 대두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러한 유형의 담 론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녀들을 얕잡아보는 것이다. 이런 담론을 펼치는 저자들 은 녀들을 "낮은 지위"의
"교육받지 못한 여성"으로 본다. 대신에
그 저자들은 수입된 식민 지 가치를 찬양한다.
제주 녀 공동체에
대해 최초로 이루어진 인류학 현장 연구에서 녀들의 삶, 그들의
경제적 역할과 마을 사회에서의 위치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조(Cho)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녀 공동체는 경제와 가족 관계 측면에서 여성이 지배적인 사회이다. 이러한
여성의 우세는 배 타적으로 남성의 손안에 있는 신유학 사상의 초석인 “부계 조상 숭배의식”(제사)과 균형을 이 룬다.
제사는 그 역할을 남성에게 부여하며 남성 우월 사상을 제공한다. 제사는 지역 사회에 서
남성의 위치를 여성보다 우월한 것으로 정의한다(Cho 1979, p. 273). 조(Cho)는 제주 사 회와 정체성에서 녀의 사회적 지위와 신유학의
모호성에 대해 보다 균형 잡힌 그림을 제시 한다. 이 책에서, 필자는
제주 사회에 대한 조(Cho)의 비전을 확장하고 보완하고자 한다.
3. 서부 수마트라 모계 사회에 대한 필자의 초기
연구
필자는 이 책이 1980년과 1981년에
걸쳐 18개월, 1986년에 3개월 동안 현지연구를 했던 인 도네시아 서부 수마트라의 미낭카바우 사회와 제주의 생활 방식이 닮았다는 점에서
부분적으 로 영감을 받았다는 점 또한 언급하고 싶다. 필자는 인류학 박사 논문을 위해 필자가 태어나
고 교육받은 한국 부계 사회보다는 젠더 관계가 더 균형 잡힌 대안 사회 모델을 찾기를 희망 하여 이 모계 사회를 연구하기로 선택했다. 필자는 미낭카바우 사람들 사이에서 그 모델을 발 견했다: 자녀들은
어머니의 혈통 땅에 지어진 어머니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지만 아 버지는 밤에만 아내를 방문한다; 기혼
여성들은 어머니의 마을에 있는 어머니의 길다란 집에 서 산다. 혈통을 이어갈 딸이 없을 때, 그런 모계를 “종료된다(habis)”고 한다. 혈통의 재산 (논, 산, 언덕과 개울, 묘지)은
여성이 소유하고 있으며, 이는 그 혈통의 기혼 여성들 사이에서 나누어 갖는다. 여자는 남자를 결혼으로 교환하고, 그 반대는 성립되지 않는다(Pak 1986, pp. 29–31). 미낭카바우 사회의 모든 사람들은 신유학 사상에 기반을 둔 가부장적 한국
사회와 극 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 두 사회의 규범들은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모계 미낭카바우 사회의 흥미로운 특징 중 하나는 필자가 "남성 우월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Pak 2007). 남성은 모계 혈통 집안에 자기 공간이 없으며 그들의 삶은 여성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모계와 평행을 이루는 부계 족보를 추적해보면 고위직 남성이 신화적인 조상-미낭카바 우족의 건국 두 형제의 후손임을 보여준다. 이 신화에 따르면
그들의 아버지는 인도에서 온 힌두교 왕이었다(Pak 2007). 이 부계의 7대를 넘어, 마을 부계 족보는 고대 "중심부"인 인도 또는 마케도니아(알렉산더 대왕)의 신화적인 남성 조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추정하는데, 그 신 화의 서로 다른 버전에 따라 다르다.
모계인 미낭카바우 사회에게 있어
'남성 조상'의 중요성은 토지(생계)에 대한 권리가 없는 남 성에게 주어진 역할 때문이다(생계). 남성들은 어머니의 모계혈통의 고대 칭호인 위신을 짊어
지는 역할을 받는다. 오직 남성만이 이 칭호를 짊어지고, 이
칭호를 외삼촌(어머니의 남자 형 제)에서부터 조카(여자 형제의 아들)까지 전해주는 것이다. 이 칭호를 지닌 귀족 혈통의 남자 는 매우 바람직한 남편이며 그의 아내와 자녀의 지위를 더해준다. 그런 남편은 '그림을 둘러 싸고 있는 금테'와 같다고 한다(De Josselin de Jong 1960). 이
역할은 필자가 이 모계 사회 에서 "남성 우월성"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것의 근거이다. 남자들은 우대받고 버릇이 없어진 다. 남편이
해가 지고 잠을 자기 위해 아내 집에 올 때, 낡아빠진 바닥을 카펫으로 덮어 집안 의 어려움을 드러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남편은 번식을 위한 씨앗을 주기 위해 "빌린
사람"이 라고 한다. 그는 손님처럼 취급된다. 여성의 벼농사 경작지(모계 거주지)
소유권을 기반으로 한 모계사회조직과 나란히 하는 '남성 우월성' 이데올로기, 여성을 통한 혈통의 연장과 마을 사회 네트워크의 관리는
젠더 균형사회의 사회 모델의 근간이다.
여기서 "중심"은 지리적 중심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인 권력과 영향력의 지역 적 원천이기도 하다. 인도와 중국
두 개의 주요 문명이 동남아시아에 영향을 미쳤다. 미낭카 바우 사회의 이런 지역적 맥락은 "모계 사회에서 남성 조상"에게 주어진 중요성을
설명한다. 수마트라 섬 밖에서, 아마도 인도나 마케도니아에서
온 것으로 믿어지는 남성 조상은 외부세 계와의 필수적인 연결 고리이며, 이 고등 문명의 중심은 변방에
존재하는 미낭카바우 문명에 정통성을 부여한다.
이 책에서 보게 되겠지만, 제주의 경우는 미낭카바우족의 경우와 다소
유사한데 약간의 차이 가 있다. 제주는 모계 사회는 아니지만 여성의 경제적 자율성은 미낭카바우인과 유사하고, 신 유학 원리와 “조상 숭배의식”을
수행하는 남성의 역할에 기반한 제주의 남성 우월주의도 미낭 카바우 사회에서 남성의 역할과 유사한 논리를 갖고 있다. 어떤 사람의 기원은 오직 남성을 통해서만 “가장 깊은 뿌리”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한국의 역사에서는 보통 서로 다른 왕
조의 건국자이다. 제주 사회와 그 젠더 모델에 대한 필자의 해석은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기원 에 대한
인류학 구조이론과 미낭카바우인의 삶의 방식에 대해 그들이 명시해 놓은 것에서 영 감을 받았다. 이 책에서
제주 젠더 모델의 근거가 제주 친족 연구에 대한 나의 접근은 두 권
의 책에서 영감을 얻었다: Living Kinship in the
Pacific(2015), edited by Christina Toren and Simonne Pauwels, 그리고 What Kinship Is … And Is Not by
Marshall Sahlins (2013).
각주
2012년 처음
제주를 방문했을 때 만난 많은 대학교수들이 그들의 엄마는 잠수부들이라고 말했다. 중심주변부와 관련된 상위 및 하위 문명의 개념은 Pak 1986, 1993
and 2006을 보라.
거센 바다로 들어가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 녀, 2016.
서론
사진1. 안개로 덮인 성산일출봉, 2016.
제주 현실 발견 1. 표류하는 배
필자는 한국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지만, 제주 섬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 으며 제주 역사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제주 역사에 대한 이런 무관 심은 한국교육계에 존재한다.
2013년 발행된 한국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미국이 지원한 총선의 결과로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위 말하는 “좌익
반란”에 대한 짧은 몇 줄을 제외하고는 제주에 대한 언급이 없다.
“섬사람”이란 단어가 필자가 2010년 제주를 방문한 초기에 만난 대학교수의 명함에 적혀있었
다. 이 “섬사람”이라는 말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몇
년 후 필자는 제주에 대한 시(詩)를 읽으면서 제주 정신에 “섬사람”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갇힌" 또는
"소외된" 느낌이 이 시들의 지배적인 주제이다. 그 섬은 “짙은 안개가 하늘과 수평선의 경계를 지우고… 빛 없는 어두운 바다
속에, 제주 섬은 좌초되는, 줄 이 끊어진 표류선(관련 자료를 찾아 표현을 확인 할
것!)”에
비유되었다(Kim 2000, pp. 187– 188) (사진1). 이
현대시에 표현된 감정은 400년경 거슬러 올라가서 그 당시 국법으로 제주 사람들을 200년(1629-1830) 동안 육지에 들어오지 못 하도록 금지했을
때 제주 사람 스스로 지니고 있던 그들의 아픈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제주도는 중앙정부의 의도적인
저개 발 계몽정책에 따라 '하늘이 트인 감옥', '줄이 끊어진
채 표류하는 배'였다(Nemeth 1987, pp. 138,
165). 제주 경제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고 1900년 이전 상황은 참담했다. 1813년, 1862년, 1893년, 1901년에 오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1901년 농민 봉기는 가장 유명한 이재수의 난으로 알려져 있다.
이 대학교수는 필자가 은퇴한 인류학자라는 사실을 알자,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제주대학교 여름방학 프로그램에 몇 차례 강연을 하도록 필자를 초대했다. 인도네시아 서부 수마트라에서 연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번의 여름 강의를 했다. 이 여름 강의를 준 비하기 위하여 제주에 관련된 자료를 읽으면서, 필자는
제주의 아픈 역사, 민중의 투쟁, 풍부 한 문화와 식민의
역사(몽골, 조선, 일본과
미국), 제주 신화, 제주 신과 여신의 광대한 판테 온, 무속 의식과 제주 사람들의 “섬 정체성”에 대한 엄청난 고뇌에 대하여 배웠다(Pak 2013). 필자는 또한
제주 사람들이 말하는 '사회 조직의 모계적 측면'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필자 는 유명한 녀들에 대해서 배웠다. 필자는 초기 작업에서 연구한 수마트라의 모계사회와 제 주 녀들의
사회 조직 사이에 몇 가지 유사점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주로 제주 학자들을 중심으로 제주에 관한 많은 자료들이 한국어로
쓰여져 있지만, 다른 언어 로 번역된 출판물이 거의 없기때문에 이 담론은 널리 공유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제주 사 람들의 존재와 그들의 고민들과 내부 논쟁을 외부에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다른 많 은 마이너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제주 사람들은 지구촌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열망과 동시에 그들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관광의 증가에 따른 현대화, 그것이 섬에 끼치 는 영향에 대해 걱정한다(Shin 1987). 녀들의
인구 감소가 이 두려움의 핵심이다. 이 녀 들 때문에 제주는 “여성의 섬”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 제주의 현실: 화산섬과 척박한 환경
제주는 여자, 바람, 돌이
많은 섬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땅은 화산암과 화산토로 구멍이 많
다. 식수는 인구의 주요
문제였으며 식수를 길어오는 것은 여성의 일이었다(사진2). 돌이
많고 느슨하고 먼지가 많은 화산 토양으로, 말은 작물 재배를 위해 흙을 압축하는데 이용되었다. 땅은 돌들로 뒤덮여 있고,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땅의 양은 제한되어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육지에서는 쌀농사를 위한 땅은 신유교
부계 체제의 토대가 되었다(2장에서 다룸). 제주는 바 람이
너무 세다 보니, 때때로 전통 짚으로 만든 지붕을 밧줄과 돌로 묶어야 하고, 집들을 낮 게 지어야 했다(사진3).
태풍이 부는 계절에는, 바다가 매우 거칠고 지붕과 집들이 종종 날아 간다. 강한 바람과 태풍으로 인해 배들이 난파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아더
브라운(Arthur Brown)(1921, p.4)이 기록하기를: “바위와
암초가 무수히 많고, 조류가 이 좁은 통로를 엄청 난 힘으로 드나든다.
안개가 바위와 암초 위에 내려앉으면, 흔히 그렇듯이, 뱃사람들은
길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결과적으로 발생한 비극적인 난파선들이 많다.”
남자는 10명 중 5~6명은 바다에서 실종되어
공급이 부족했고, 따라서 딸들이 선호되었다. 아들들은 오직
물고기의 먹 이일 뿐이었다(Nemeth 1987, p. 139). 남자의 희소성 때문에, “제주 현실”로 일컬어지는 제 주의 적대적인 자연환경에 대처하는
여성들이 많았다. 이러한 운명은 조선 시대처럼 여성의 자리는 집 안에 있으며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려야 하는, 신유교 사상의 “덕을 갖춘 여 성”의 이미지와는 매우 거리가 멀다.
제주의 자연환경은 한반도의 생태계,
특히 인구의 70%가 소작농이고 비옥한 벼농사 땅인 중 남부 지방의 생태계와는 사뭇 다르다. 작고 건조한 땅은 항상 여성이 주로 경작해왔다. 해안 마을에서는, 여성들 또한 해초와 전복, 감태와 같은 다양한 조개류를 채취하기위해
물질하기 도 했다. 아마도 여성의 근면성과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제주에서 “게으른 남자”에 대한 그림 을 그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자들도 열심히 일했다. 남자들은 어부로 일했고, 말을 몰았 고, 공물을 육지로 운반하고 다른 일들을 수행했다.(Song 1998). 기록에 따르면 남자들도 잠 수부였다. 그러나 조개 공물 할당량의 부담과 할당량 미달에 대한 처벌이 너무 무거워서 남자 들은 육지 해안으로 도망쳐서
바다 유목민으로 살았다.
3. 독특한 남녀관계 형태를 만든 제주 현실과 신유학의
영향
육지의 신유학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은 제주는 섬의 고유한 현실 때문에 순응하고자 하는 욕 구와 순응이 불가능한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제주는 더 큰 세계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욕망과 하나의 섬이라는 깊은
소외감(거인 여신인 제주 창조신화에서 언급되듯이)사이에 서
갈팡질팡한다; 한편으로는 녀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섬에
대한 기여와 다른 한편으 로는 모든 신유교적 가치에 따른 여성의 열등감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이러한
모순들이 제 주 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섬의 정체성”에
열띤 지적 논쟁의 기저에 깔려있다.
한국 인류학자가 최초로 녀들의
마을에서 현지연구를 시작한 것은 1976년, 제주도 북동쪽에
있는 작은 섬 우도(배로 10분 거리)에서였다. 조(Cho)는
제주의 가혹한 자연환경과 육지 신유 학의 영향으로 인한 독특한 사회 현상을 젠더 관계로 설명했다. 조(Cho)의 박사 학위 논문에 서 남성 우월 이데올로기와 여성 우월적 현실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어느 쪽도 지배적이지 않은” 사회가 제주의 특징이라고 적고 있다(Cho 1979, p. 261). 녀 공동체는 생존과 가족 관계 측면에서 여성이 지배적인 사회이다[3]). 이러한 여성의 우세는 신유학 사상의 초석이자 전 적으로
남성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부계 조상 숭배의식”(제사)과 균형을 이룬다. 남성은 의식 (儀式)과 신유학 이데올로기의 비(非)포용적인 세계를 통해 권력을 추구한다. 제사는 남성에게 그 역할을 제공하며, 남성 우월 사상은 지역사회에서
남성의 위치를 여성보다 우월한 것으로 정의한다.
4. 제주 정체성과 녀들
이 책은 제주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녀들의 위치와 그들의 문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바다 에 의존하는 바다에 의존하는 독특한 생활방식으로, 녀들은 육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제주 도 고유의 문화라는 섬 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예이다. : 육지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제주 토착 문화가 그것이다. 그 녀들이 사라지면 그들의 문화와 생활 방식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 며, 섬의
문화도 제주를 독특하게 만드는 육지와는 다르게 만드는 요소들을 간직하지 못할 것 이다. 다시 말하면, 녀들은 제주 섬 정체성의 핵심이다. 제주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지 만, 제주 정체성에 관심을 갖는 제주학자와 주민들에 의해 충분히 강조되고 기술되지 않고 있
다. 제주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정체성 찾기에 몰두하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보물이 더 이상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겪게 될
운명이라고 인 식하지 않는 것 같다.
프랑스 역사학자 패트릭 바우처론(Patrick Boucheron)은 정체성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웅 변적인 관찰을 하였다: “"역사는 우리 시대에 살고 행동하기 위한
자원이고, 어려운 시기에도 자유의 형태를 재창조하기 위한 자원이다.
… 우리가 처한 [2015년 11월 13일 파리 테러 공 격 언급하면서] 혼란 속에서, 나는 역사가 규율로서 그리고 집단 정서로서 우리에게 우리의 정체성의 폐쇄에 대해 확신을 줄 뿐만 아니라, 동정적인 방식으로 미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 어떻게? 과거에 우리의 부를 제공했고 미래에도 부를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우리가 처리하고, 잠재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가시적인 것들을 만듦으로써. 그것은 우리의
오만한 현재에 저항하는 강력한 수단인데, 우리의 오만한 현재는 지평선을 가 로막고 우리를 작고 좁은 '우리'로 떨어뜨린다."4)
녀 공동체가 섬 정체성의
핵심이라고 할 때, 우리는 본질적으로 제주 여성을 제주 정체성의 토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설문대 할망(설문대 할머니)5)인
거인 여신의 제주 창조 신화에서 언급된다: 이 신화는 섬을 창조하고 육지와 연결하기 위한 다리를 건설하여
제주 사 람들의 가장 큰 소원을 이루려 했던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신화에 따르면, 설문대 할망은 기근 기간 동안 500명의 아들을 먹이기 위해 죽의
일부가 되었다고 한다. 이 거인 여 신과 마찬가지로, 녀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 때마다 목숨을 건다. “ 녀는 이 세상(이승)와 저 세상(저승)을 오고간다. 그녀는 (죽음의) 저 세상에서 돈을 벌어 이 세상에서 자식들을 먹여 살린다”(Chun
2010). 녀들의 너그러운 정신은 제주를 낳은 거인 여신의 영혼을 환생시킨 것이다. 설문대는 녀와 제주 여성과 제주 사람들인 조상인 할머니 로 불린다. 이 신화의
메시지는 제주도의 거대한 공원인 제주돌공원의 주제이며,
이 제주돌공 원은 가치없다고 여겨져온 것들을 제주 사람들이 되찾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새로운 의미 를 부여해달라는 간청으로 설계되었다.
5. “여성-중심
사회”
"여성 중심성"이라는
용어는 제주출신 한 인류학자를 포함한 여러 학자들이 이 독특한 제주특 성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다(Chun
2011; Kim 1999). 제주의 "여성 중심성"을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다. 녀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주요 가장이다. 제주에서 흔히 "모계 요
소"로 널리 알려진 것은 바로 이런 녀 사회의
특징인 여성의 경제적 자율성을 가리킨다. 녀 공동체의 '여성
중심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여성에게 유리한 제주 친족제도(괸당)이
다. 몇 가지 괸당의 특징으로 마을 내혼(village endogamy), 여성이 친정에 자주 드나드는 것, 외가친척에
대한 존중 등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은 부모 집에 사는 아들 가족, 아들의
재산 상속, 부계측 거주 규칙, 부계 조상 숭배의식과 같은
특정한 부계 친족관계 속에서 여성에게 유연하고 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여성이 자신의 원가족
남자와 남편에 대한 복 종과 열등의 지위로 밀려나는 육지 부계제도와 비교하면 제주 여성은 확실히 괸당이라는 가족
-마을 친족 우주의 중심에 있다.
4)
5)
여성은 (가족과 마을
수준에서) 친족 우주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영혼(귀신)과 더 불어 신들과 여신들의 초자연적 세계와 마을의 산 자들
사이에서 조상-후손 친족 우주의 중심 에 있다.: “그 후손들의
삶은 조상들의 신화적인 힘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조상들의 신화적인 힘에 책임이 있다. … 조상들은 어른, 부모 또는 다른 살아있는 친척들과 같다. 친족관계 안에 서, 귀신은 결코 길을 잃지 않고 영원히 돌아오거나 '다시 집으로 데려와' 살아있는 사람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다.”(Kim 2013, p.
229). 제주 여성은 제주 섬이라는 우주의 중 심에 있는데, 그들은 제주 섬과 그 가족을
보호하는 귀신과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즐겁게 하고 달래줄 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해 공급하고, 사람들을 위한 음식을 생산한다.
각 장에서는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하는 추가 자료들을 제공한다. 1장에서는
제주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 그 맥락을 제공한다. 2장에서는
제주 친족제도에 대해 논한다. 많은 제주 학자들은 제주 친족제도가 서로 다른 세대 간, 그리고 남성과 여성 사이의 평등한
관계를 제공한다고 주장해 왔다(Kim
1999b; Song 1998; Yi 1999; Hyun 1973). 이것은 상 당부분 토지 소유권이 소수 사람들의 손에 집중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소규모 여성 농 업과 여성 물질(diving)에
의존하는 부부 중심의 핵가족 제도로 남아 있다. 1913년 한 연구에 따르면, 제주 가정의 92%가 일부 토지(약 2.5에이커)를 소유하고 있었고, 단지 1%만이 12에 이커를 소유하고 있었다. 제주는 소작농이 소수인 평등사회인 반면, 육지에서는 70%의 농부 들이 소작농이었다(Song 1998, pp. 262–267).
3장은 녀들의 공동체, 그들의 공동 가치 체계와 그들의 경제적 역할을 다룬다. 필자는 일제
강점기라는 특정 역사적 시기에 가족의 주된 생계를 책임지고 섬 경제 버팀목 역할을 통해 녀들의 경제
자주성이 제주 사회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한 학자의 표현처럼
"제주 여성은 제주 사회의 물질적, 정신적 기반이었다."(Song 1998). 바다로 둘러싸인 화산 작용으 로 메마른 땅을 가진 제주 자연환경 때문에, 경제에서 여성의 역할은 필수다. 평등주의적인 제주 친족제도의 토대는
여성의 경제적 자주성이다. 그런 맥락에서 신유학 사상에 바탕을 둔 육지 부계제도가 '여성 중심'인 지역 시민사회와 병행해 공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부 학 자들은 이러한 공존을 제주 사회의 “타협”이라고 부른다.
비록 그 사회가 불안정하고, 소외되고,
식민지화된 조건 아래에서 살도록 강요될 수 있지만, 지배적인 국가 시스템과 고대 지역 시민
사회의 관계는 반드시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경우, 전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난 이전 시민사회의 부활은 매우 풍요로울 수 있다.(Foucault
2004, pp.
306–307).
4장에서는 녀들이 매년
행하는 무속 의식과 제주 문화에서 무속신앙의 위치에 대해 논한다. 무속신앙은 부계사회와 비슷한 조상의
모계를 그들에게 제공하는 여성의 종교이다. 여성들은 마을 신당 여신을 숭배하고, 이 여신들은 녀들에게 위안을 주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무속 의식을 통해 녀들은 바다 여신과의 조상-후손 관계를 주장하며, 따라서 바다 생산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그 무속 의식은 녀들이 바다에서 물질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그들의 위험한 생산 활동에 의미를 부여하며, 공동체 응집력을 제공한다(Kang 2005). 여신과 여성의 세계로서의 무속신앙은 남성 조상과 남성들의 세계와 함께 신유학에 대한 대척점이다. 1702년 조선 왕실은 제주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해 129개의 신당과
사찰을 파괴하였는데, 오늘날 “500개 신당과 500개 사찰을 파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제주 사람들의 무속신앙이 신유 학 사상과 상충한다는 것을 잘 알고 400명
무당들에게 농부가 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 러한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는데, 제주 여성들이 무속신앙을 존속시켰고, 따라서 제주 정체성 까지 살아날
수 있었다.
5장에서는 제주 사람들의
신유학에 대한 집착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중국에서 한반도 로, 그리고 결국 섬으로 수입된 당시
이데올로기의 핵심 사상을 논한다. 제주의 자연환경은 신유학 사상이 육지에서 들어온 형태로 채택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상당한 자유와 자주 성을 가진 여성들을 위한 공간을 허용하는 타협이 필요했다. 혹은 아마도 그 반대였을 것이 다: 여성의 자주성은 신유학 사상에
필수적인 남성 중심성 형태를 채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 았다. 따라서 제주 여성의 경제적 역할과 자주성으로
인하여 여성 위치에 대한 신유교적 생각 은 제주 섬에 적절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경작지가 부족하고
제주도의 생존수단이 부족하기 때문에, 부계와 그에 따른 부계제도의 남성 지배 모델이 덜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타 협된 형태 안에서조차, 신유학 사상은 남성들에게 중요한 역할-중요한 신유학 원리 가운데
하 나에 따라 조상 숭배와 의례를 맡는 역할-을 주었다.
제6장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제주 사회와 제주 사람들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노력에 대한 간 략한 논의를 통해 결론을 제시한다. 거대한
민관협력을 통해 건립된 제주 돌 공원 박물관과 함께, 거인 여신의 제주 창조 신화를 전하고, 더 이상 녀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제주 정체성 이 상실되지 않도록
제주 섬의 여성 중심 사회모델을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 사례를 소개한다.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제주 녀들의 생활양식인 생태 페미니즘의 생각을 가지고 디자이너 이자 상무이사인 분이 이 공원을 구상하고 조성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며 의미 있는 사회운동 으로 볼 수 있다.
6. 인용된 자료들
이 책에 사용된 자료는 대부분 지난 50년 동안의 학술 간행물에서 나온 것이다. 그 학술 간행 물들은
한글로 쓰여졌기 때문에, 거의 모든 것들이 한국 밖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4])
2016년 필자의 3개월간의 현장 연구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기존 문헌을 읽고 몇 가지 사실을 학인하 고 의심스러웠던 특정 분야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제주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비교적 최근의 것이다. 제주도 연구위원회는
1978년에 설립되어 정기적으로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20년 후 이 위원회는 제주학연구소로
이름을 바꿨다(Chun 1999). 이 연구소의 목적은 제주 지역의 현상을 외부 세계와의 직접적인 관계, 다시 말해서 " 세계화"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다(Song 1998). 그 전까지는 제주의 현상들이 육지 관점에 서 설명되거나
전혀 설명되지 않았다.[5])
제주 출신 인류학자 전(Chun)은 그의 『제주학 이론』 에서 제주학은 육지가 아닌 제주
섬의 관점에서 제주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를 되살리기 위한 학문적 접근을 의미한다고 쓰고 있다.(Chun
2010, p.153).
이 책에 사용된 친족, 녀, 무속신앙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1960년대부터 출판되었지만, 이 연구에 사용된 자료들 중 일부는 약 150년에서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예:
마을 탄생 기록). 이런 출처 이외에, 제주에
대해 기록된 자료는 육지 정부나 외국인 방문객과 같은 외부 출처에서 나온 것 외에는 많지 않다.
제주학자들이 우려하는 주된 문제는 세계화 시대의 제주 정체성이다. 제주
사람들은 외지인들 이 쓴 제주 섬에 대한 이전의 역사책에서 자신들만의 이미지를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왜곡 된" 혹은
"상상된" 외적인 관점이었다. 제주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들만의 이 미지를 찾아야 했다. 이것이 제주 연구의 시작이었고 지난 50년 동안 이 연구는 매력적인 자 료를 제공해 왔다. 이 책은 제주
학자들이 만든 풍부한 자료와 분석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없 지만, 제주 섬의 매혹적인 이야기와 보물들을
외부 세계에 알리려는 의도로 쓰여졌다.
7. 재정 지원, 현장 연구 로케이션과 방법론
바비에 뮐러 미술관 문화 재단의 재정적인 지원으로 2016년 봄 무속신앙이 다른 곳보다 강한 제주 동북해안 김녕 마을에서 한 달 동안 무속 의식에 참석할 수 있었고, 그해 가을 3개월 동 안 제주 북동쪽의 작은 섬인 우도에 있는 녀들의 공동체에 머물며
두 번의 현장 연구를 마 칠 수 있었다(map 1).
현장 로케이션: 필자는 인구
1,752명(2015년 725가구)인 작은 섬 우도를 현장 연구로 선택했 다. 우도(牛島)는 “소의 섬”이라는 뜻으로, 섬의 모양이 마치 소가 누워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
문이다(사진. 4).[6])
우도는 "섬 속의 섬"으로
불린다. "섬"은 고립감을 가지고 있으며, "멸시당한 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섬 속의 섬"은 "고립되고 멸시당한다"는 것을 강하게 의미 한다. 이것이 필자가 현장 연구로 우도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 선택에는 한 가지 이상의 이유가 있었다. 우선 필자는 바다 근처
녀회를 연구하고 싶었다. 평지에 있는 마을의 문화는 해안가에 있는 마을과는 다소 다르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비교 연구가 흥미 로웠겠지만, 그것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었다. 우도를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감당할 수 있는 물리적 규모와 인구
규모때문이었다. 우도 녀회에 대한 이전의 인류학 연구도
있었
다. 내 연구 목적을
위해서, 우도에 있는 12개의 “자연적인” 마을 중 하나인 하우목동 마을에 집을 빌렸다. 지도2).
2016년
봄 '바람의 여신'을 떠나보내는 무속 의식에 참석하기 위해
우도를 찾았을 때 우도는 30년 전 행정상 면(面)으로 승격된 것을 기념하고 있었다. 제주도지사가 면(面) 승격 30주년을 기념하는
우도 주민들을 축하하러 와 있었다. 2015년에는 우도 인구의 200배가
넘는 20만 명 의 관광객이 우도를 방문했다. 관광업의 이러한
엄청난 성장은 이 작은 섬의 경제가 얼마나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우도와 제주 3.8km 구간에서 사람과 자동차를 실어 나르는 여객선(사진 5)이 8척 있다. 성산
항은 일주일에 7일을 일한다. 우도 주민들은 무료지만 승객은 4000원(약 3유로), 소형차는 3 만원(약 23유로)을 내야 한다. 여객선
운영 수익의 일부는 녀들의 물질 장소 이용에 대한 보상으로 녀들
사이에서 분배된다. 하우목동에 사는 한 녀는 보상금으로
연간 100만원을 받지만, 만약 거기서 물질을 한다면 그
세 배를 벌 것이라고 말했다.
방법론: 3개월이라는
짧은 현장 연구 기간 때문에, 필자는 매우 친절하고 적극적인 필자의 집 주인(송희정)의 한 가족에게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했다. 한 가족에게 집중하기로 한 결정은 부 분적으로 봄에 머물렀던 마을에서 필자가 겪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마을에서 필자 는 마을 생활 속으로 스며 들어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 마을 사람들 은 외지인들에게 말을 잘 하지 않았고 “우호적이지
않았다”. 섬 주민과 결혼해서 30년 넘게 제주에서 살아온
육지 사람들이 섬 주민들에 의해 섬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3대가 걸린 다고 한다. 적어도 한 명의 마을 사람 중개인 없이는 마을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 능하다. 필자는 사람들, 특히 녀들을
알아가는 데 겪은 어려움이 그들의 극도로 바쁜 생활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녀들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멈추지 않는 것 같았 다. 그들의 바쁜 일정으로 인해 그들이 조급하고 성미가 급해 보일
수 있다. 그들은 말을 빨 리 하고 시간을 낭비하거나 다른 사람과 수다를 떨 시간이 없는 경향이 있다.
그 집 여주인은 필자를 자신의 가족인 남편과 젊은 두 딸에게 소개시켜 주었고, 그
다음에는 그녀의 시부모, 삼촌(시동생), 그리고 그녀와 몇 집 떨어진 곳에 사는 이모(어머니의 여동생)에 게 소개시켜 주었다. 많은 그녀의 친척들이 한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그녀 의 시아버지 여자 형제들과 남자 형제들의 이름과 그들 배우자들과 그들 출신
마을의 이름을 물어봤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가계 계보와 혼인 관계를 구축하고 하우목동에 있는 그들의
집 을 지도화할 수 있었다. 53채의 집이 있고, 그 중
몇 채는 비어 있다. 인구는 75명이다. 필자 는 그 마을의 경계가 어디인지 몰랐다. 차츰 제주 사람들이
말하는 “자연적인”[7])
마을이 마을 의 경계란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은 내가 읽은 어떤 책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필자가 발견한 '자연적인 마을'에
대해 집주인 남편에게 이야기했더니, "네, 그것은
제주에서 '축소된 우주 ‘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2016년에조차도 그 마을은 작은 자치 왕국이다. 이는 또한 수세기동안 외부의 침략과 식민지화에
저항해온 제주 사람들의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자연적인” 마을 내에서 결혼을 했꼬, 그 마을
경계 안에서 무속 의식을 치렀으며, 그 자연적인 마을 주민들 대부분은 혈연관계나 결혼을 통해 서로 관계를
맺고 있었 다. 그것은 또한 녀들이 해산물을 모으기 위해
일할 수 있는 경계이기도 하다.8 만약 그들 이 다른 마을의 바다 경계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마을들 사이에 "어장 분쟁"으로 귀결될 것이
다. 우도에서 가장 심각한 사건 중 하나는 1970년대에 법원에 회부되었다.(Udo-ji 1997, p.
348).
연구팀: 우도에서 2년 정도
살고 있는 사진작가 고성미를 만나게 된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사진.
6). 그녀는 서울 출신이지만 우도를 처음 방문했을 때 우도와 사랑에 빠졌고 우도를 그 녀의 집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전문 사진작가이자(http://blog.naver.com/kokosomi)
언론인이다. 고성미 작가는 서울의 한 온라인 신문(www.ohmynews.org.)에
우도에 관한 기사 를 게재하고 사진을 찍어왔다. 그녀는 우도와 녀들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 그녀는 또한 녀의 전기를 쓰고 있으며
우도 무속 의식, 녀, 자연 경관을 담은 사진첩을 출판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과 녀들과의 접촉에 대해서는 집주인인
송희정씨가 그들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 해 주었다(figs 7–8). 송희정씨는 또한 외지인으로서 제주
문화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
다. 송희정은 육지에
있는 남쪽 도시인 대구에서 왔다. 그녀는 우도 출신의 남자와 결혼하기 전에 연극 배우였다. 그녀는 현재 몇몇 제주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연극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침술사일 뿐만 아니라 우도 도서관을 맡고 있으며, 유기농 땅콩과 마늘을 재배 하여 온라인 판매를
한다. 이 모든 것 외에도, 그녀는 시어머니가 땅콩과 봄
양파를 기르는 것을 돕는다.
필자는 이 두 여성의 도움 없이 연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나는 연구팀을 구성하자고 제안했고 그들은 동의했다. 그들은 필자가
묻는 질문의 종류와 필자가 마을 생활을 해석하는 방법에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필자의 작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필자가 외딴 “섬 속의 섬”에서 이런 연구팀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현대성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물질적 성공과 돈벌이를 강조하는 현대 한국 사회의 압박에 저항하고 자신들의 삶을 선택하는 많은 지성인들을 만났다.
언어
필자가 한국어가 모국어이긴 하지만, 연세가 90대인 매우 연로한 녀들이 말하는 제주 사투 리를 위해서, 구두 인터뷰를 할 때 연구팀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래 각주 내용 추후에 다시
검토할 것!
각주
1) 이 해석에 대해 반대 의견이
제기되어 왔다. 권귀숙은 [제주 해녀와 현실의 신화] 논문에서 제주 젠더 관계에 대한 조(Cho)의 해석에 반대한다. 권(Gwon)에 따르면, “제주
해녀들은 신화의 소재로 생산되고 재생산된다. 조 교수가 제주 해녀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도 예외가 아니다. … 해녀와 페미니즘에 대한 연구의 앞날을 위해 이 신화를 해체하는 것이 중요하다.”(1996, p. 229). 여기는 이 두 학자 사이의 논 쟁을 해결하는 자리는 아니다. 간단히 말하면, 조(Cho)의
방법론의 일부 약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 의 가설이 타당하다고 믿는다. 권(Gwon)은 조(Cho)에
대한 비판에서 “민족지학적 분석”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민족지학적 분석은 시간도 공간도 없는 텅 빈 공간에서 “민족지학적
존재”를 임의의 방 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친족제도, 신앙제도, 경제제도와 의식 등과 같이 주어진 문화의 다른 영 역에서
가설을 검증하고 확인하는 '삼각화' 방법을 사용한다.
2) Eric
Aeschimann와의 인터뷰에서 Bouchard는 “프랑스의
역사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말한 다(Aeschimann
2016, p. 70).
3) 제주에서, 여신은 “할머니”(할망) 그리고 신은 “할아버지”(하르방)이라 부른다.
4) [제주학 저널]에 실린 논문에는 영문 초록이 실려 있다. 그 영어 초록은 제주 학자들이
자신들이 무엇 을 하고 있는지 외부세계와 소통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다.
5) 1946년과 1959년 두 차례에 걸쳐 육지 대학 연구 탐사팀이 실시한 제주에 대한 연구 기록은 남아 있 지 않다(Chun 2010, p. 161).
6) 1696년 초에 우도는 조선 통치
하에 몽골인들에 의해 말 목장으로 사용되었다. 1841년에야 사람이 거주할 수 있도록 개방되었다(Udo-ji 2007).
7) 제주에는 499개의 자연적으로 형성된 마을이 있다고 한다(Jin 2005, p.15).
우도에는 1915년 이전까 지 8개의 자연적으로
형성된 마을이 있었으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1970년
일부 마을이 2개로 나뉘어
12개가 되었다(Udo-ji 1996).
8) 자연적으로 형성된 마을의
어장 경계를 표시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바닷가의 바위에 도끼를 박아 바다 속에 가라앉은 바위에 연결하는 것이다(Udo-ji 1997, p. 348).
1장 바다의 사람들: 지리·역사적 흔적
1. 제주의 지리
제주는 오늘날 남한에서 섬으로서는 유일한 제주도(濟州道)이다. 1946년까지
전라남도에 속해 있다가 2006년에 특별자치도가 되었다. 제주는
북아시아에서 세 개의 큰 바다와 두 대양(大洋)의 해류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중국에서 남동쪽으로 약 100km, 일본해(한국인들은 동해라 고 부른다)에서 동쪽으로 약 500km, 한반도에서 남쪽으로 약 200km 떨어져 있다(지도 1). 한라산을 중심으로 해발
1,950m의 화산섬이다. 한라산의 분화구는 지름
500m, 깊이 80m로 하얀 사슴 호수(백록담)라 불린다. 제주의 자연적인 아름다움은 숨이 막힐 정도로 장관을 이룬
다. 제주 풍경을 보면 이 섬과 섬사람들이 겪은 것을 상상할 수 없다(사진 1–2).
섬의 표면은 1,826㎡이고
해안선은 253km이다. 제주 주변에는 61개의 작은 섬들이 있는데 이 가운데 8개 섬에만 사람이 살고 있다. 제주는 두 개의 자치단체로 나뉘는데, 북쪽은 제주 시, 남쪽은 서귀포시이다(지도 2). 섬에는 3개의 지역(지도 3)이
있다: 산간 지역(고도
300m), 평지(고도 100~200m), 해안
지역. 맑은 날은 제주시가 44일, 서귀포시가 64일뿐이다. 제주도
는 비가 많이 내리고 태풍이 불어서 농업에 가장 적합한 곳이 아니다. 그러나 따뜻한 기온 때 문에 원예작물
재배가 가능하다. 평균 기온은 섭씨 14.7℃이며 영하 5℃ 이하로 떨어지는 경 우는 거의 없다(Kim 2010). 2. 제주 사람들의 기원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최초의 섬 주민들은 주로 해안가 사람들이었고, 해양자원으로 생계를 꾸렸을 뿐만 아니라 내륙에서 사냥과 채집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제주 남해안 인근 구석기 유 적에서 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로는 긁개 등의 도구와 함께 발견된 사슴 뼈와 멧돼지
엄니, 현재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돌칼 등이 있다. 게다가, 빌레못이라고 불리는 작은 연못 근처에서, 인간이 절개한 것으로 보이는
사슴 뼈의 파편과 함께 불곰의 완전히 화석화된 뼈대가 발견되었다(Kim 1981). 이 발견으로 초기
제주 정착민들의 발자취를 추적할 수 있다 고 한다. 2만 년 전 제주,
일본, 한반도는 모두 아시아 대륙의 일부였다고 한다(Yi
2006, p. 26). 불곰 뼈가 발견된 것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한반도, 중국, 일본 규슈를 자유롭게 이동하였 으며, 제주가 한때 대륙과 연결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 제주는 극지방 빙하가 물 러간 후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점차 섬으로 변했다. 제주가 대륙의 일부에서 섬이 되는 과정에 서 동식물의 급격한 환경 변화가 일어났다(제주국립박물관 2006). 약 1만
년 후 오늘날 제주 의 온화한 기후와 자연환경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제주 섬은 대륙에서 분리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석기 시대의 시작이었다. 제주 남부 지역에서 발견된 인간과 조류, 사슴 발자국 화석 으로 보아 화산이 여전히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인 1002년과 1007년에 화산 폭발이 기록되어 있다.
신석기 시대에, 일본, 한국, 중국 간의 산발적인 신석기 항해는 제주 인구에 기여하였고, 토착 인구가 늘어나게 되었다. 중국의 격변으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황해와 동중국해를 건너 한 반도와 제주 섬으로 피난처를 찾아 떠났고 일부는 먼 일본까지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 고학 증거를 통해서, 스펜서(Spenser)는
일찍이 바다로 나가서 일본 남부까지 북상했던 자바 섬, 수마트라섬, 남(南)보르네오 섬사람들과 말레이인들에 대하여 기록한다. 당연히, 일본으로 가는 경로에서 제주 섬이 보였을 것이다(Nemeth 1987, p. 77).
3. 물 건너 행정구역
2011년 가을, 제주에 도착했을 때, 탐라문화제라는 큰 축제가 일주일 동안 지속되었다(사진. 3). 매년 9월에
열리는 이 행사에서 녀춤, 제주 수공예(천연식물 염료로 짜고 염색한), 전통 음식과 술 만들기, 섬 역사 사진촬영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이 펼쳐진다. 이 행사는 제주에서
거의 천 년 동안 지속된 탐라 왕국을 기념한다. 나는 탐라에 대해서 처음 들었고, 탐라가 제 주 사람들에게 '꿈의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주(濟州)는 “물 건너 행정구역”을 의미한다.[8])
제주는 서기 1105년에 고려 왕조에 의해 합 병된 이후
1213년에 섬에 붙여진 이름이다. 합병 이전에, 제주는
탐라라고 불렸다. 탐라는 준 (準)독립적인 속국이었지만, 이 시점에서 군(郡) 지역으로 그 지위가 축소되었다.
탐라의 급격 한 자주권 축소는 이 섬에 반란을 일으켰고 거의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분노를 일으키 고 있다. 제주 사람들은 이것이 육지에 의한 섬의 식민지화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부
제주 학자들은 굴욕적인 식민지 역사를 연상시키는 제주 대신 탐라라는 이름을 사용하자고 제 안한다(Chun
2010).
고고학적 증거로 보아, 약 2천 년 전 철기 시대 문화를 바탕으로, 작은 왕국 탐라가 기원후 1 년경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탐라는 많은 문서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탐라가 한국 역사서 에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 후 476년
백제의 「삼국사기」에서 언급되는데, 백제 왕이 탐라로부 터 받은 조공에 기뻐하며 사신에게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4. 역사 속의 전설과 신화의 장소
"역사는 지배자의
관점에서 쓰여진다." 이것이 많은 제주 학자들의 시각이다. 외부에서
들어와 서 제주 역사에 대해 쓴 것을 듣고 읽으면서, 그 역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
각하게 되었다. 하나는 중국, 한반도, 일본에서 유래한 문헌 자료에서 제주의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다. 많은
제주 학자들은 제주에 대한 이러한 자료들에서 발견되는 정보가 다소 산발적이 고 “중앙-중심적”이어서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또한 중앙에 의해 쓰여진 역사 는, 많은 신화와 무속 서사시에서
발견되는 구전 전통을 통하여 전달되는 정보를 반영하지 못 하는데, 이 서사시는 변방에서 지배받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역사를 서술한다.
현대 제주에서 발견된 두 번째 유형의 제주 역사(2016년)는 제주 학자들이 비교적 최근에(약 1950년 이후) 섬과
바다에서 세계 지역(동북과 동남쪽)을 바라보며 쓴 것으로, 이를 '제주 관 점'이라고
부를 수 있다.[9])
혹자는 이것을 "사람들의 목소리"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 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과거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미래는 무엇이며 무엇이 되는 게 바람직한지에 대한 그들의 비전이다. 이 역사의 본질적인 부분은 그들의 구전 전통에서 다시 이야기되는 것이다. 그것은
신화 시대에 대한 이야기지만, 동시에 역사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 기도 하다(Kim 1991). 또 다른 유형은 중국과 한국의 왕실 연보에서 발견된 제주 관련 기록 이다.
이 두 유형의 역사 간에 차이를 나타내는 대목은 (구전으로 전해진) '거인 여신 설문대 제주창 조신화'를 우선 먼저 탐라국의 출발점으로
사용하였고, 삼형제-반신(半神)의 건국신화를 두 번 째로 삼은 점이다. 창조신화는 알 수 없는 시기에
태초에 거대한 여신이 탐라를 창조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당시 탐라는 모계 사회였다. 어느 시점에서 탐라의 엘리트들은 부를 축적 하고 계급 중심의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창조신화에 따르면, 제주 섬을 창조한 것은 거 대한 여신 설문대
할망이며, 반면에 건국신화에 따르면, 한라산 북쪽 비탈에
위치한 세 구멍 (삼성혈)에서 나온 삼형제가 함께 살기 시작하고, 섬 밖에서 들어온 세 명의 처녀와 결혼하였 는데, 그 처녀들은 송아지
한 마리, 망아지 한 마리와 다섯 종류의 곡식을 가져와서 정착 농 업의 시초가 되었다. 이 전설은 이러한 제주 섬의 발전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점술(divination)을 가리킨다. 그것은 아마도 초기 중국의 영향을 나타내는 신유교적 세계관을 지지한다. 이
건국신화는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건국신화는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데, 제 주 세 씨족의 시조인 삼형제가 양, 고, 부 순으로 등장한다. 세 시조 전설은 학자들이 편찬한 『고려사』 (1971, pp. 597– 600), 『영주지』(축복받은 섬기록)[10])와
양씨 가문의 역사인 『양씨족 보』(남양태보) 등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양씨 족보는 세 명의 시조 전설로 시작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태초에 제주 섬에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세 남자가 -양, 고, 부 -가 출현 순서대로 섬 표면으로 "거품처럼"을 올라왔다. 영주지가 먼저 나타난 고씨를 가졌
다. 고씨와 부씨 가문이 출현 순서를 다투는 것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세 남자가 출현한 곳에서 행해진 조상 의례는 초기 신유학 지배자들의 통치 기간에 초기
토착종교로부터 채택된 조선 왕조의 의례와 일치할 수 있다.[11])
섬사람들의 최초의 조상 숭배 장소와 조상 숭배 활동 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Nemeth 1987,
p. 78.).
5. 삼국시대 탐라국의 해상 무역
헨손(Henthorn)은 초기 제주 섬사람들이 한반도 남부 지역의 여러
소왕국과 해상 무역 접촉 을 맺었다고 전한다.(1971, p. 25) (사진. 4). 이들 작은 나라들은 보다 큰 백제(기원 후 18~660년)와 신라(기원
후 57~935년)보다 앞서 형성되었으며, 백제와 신라는 점차적으로 모 든 영토를 흡수하고 660년 신라가
백제를 정복하고 “통일신라”(660–935)를 형성할 때까지
한 반도 남쪽 지역을 공동으로 지배하였다. 탐라 왕국이 전설 속에 건국된 후 15대에 제주 섬사 람들에 의해 신라와의 첫 접촉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접촉의 절대적인 날짜는 불확실 하다; 올링거(Ohlinger)는
신라왕이 탐라라는 이름을 그 섬에 공식적으로 수여된 때를 "서기
662년경" (Ohlinger 1892, p. 95, Nemeth 1987, p. 84에서 인용)으로 인용한다. 탐라는 7세
기 이전에 미약한 주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가며 주요 동맹을 맺었고, 이런 외교적인
능수능란함은 660년 통일신라가 등장할 때까지 성공적으로 계속되었다.
수 세기의 안정적인 독립은 662년
탐라가 신라의 새로운 속국 지위를 얻으면서 시작되었다. 삼국유사-고대
한국의 세 왕국의 전설과 역사를 다룬-에 따르면: 탐라는
신라가 두려워하는 나라 중 하나였으며, 아홉 개의 적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다. 신라 시대(6~7세기) 때 60미터 높이의 황룡사 9층(9개
적을 나타내는) 탑이 경주에 세워졌는데, 이는 신라가 유념해야
하는 강한 아홉의 적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다(사진. 5). 기단에서
네 번째 층이 탐라이다. 첫 번 째 층은 일본, 두 번째
층은 중국, 세 번째 층은 베트남이다.
6. 고려 시대(918–1392)와
몽골족 침입
탐라 초기 역사 동안 백제, 신라, 중국, 일본에 대한 탐라의 속국 지위가 수 세기 동안 독립왕 국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이 섬은 고려 왕조(918–1392)가 마침내 935년에 신라를 물리치고 한반도의 4분의 3을 통일하면서 그 주권 지위를 잃기 시작했다. 938년 탐라는 고려
에 대한 조공 충성을 거부하였고, 고려인들은 군사를 파견하여 섬사람들을 무력으로 항복시켰
다. 탐라는 명목상으로는
독립을 유지했지만, 멀리 떨어진 고려 수도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급격히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탐라는 몽골인(중국의 원나라 건국자,
1260~1368년)에 의해 사 실상 점령되었다. 탐라의
정치적 지위는 처음에는 고려 군주들과 몽골의 침략자들이 외딴 섬 에 대한 다양한 수준의 직접 통제권을 행사하면서 상당히 흔들렸다(Nemeth 1987, pp. 85-86). 1153년 초 탐라군(郡)은 곧 탐라현(縣)(사진 6)으로 격하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고려의 문신 정권이 무자비한
무신정권으로 대체되었고, 탐라에 대한 실정(失政)의 시대가 시 작되면서 이후 수십 년 동안 섬 주민들이 여러 심각한 반란을 일으키는 결과는 낳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시대부터 고려 왕조의 나머지 세대와 조선 왕조, 심지어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반도의 한국 사람들은 제주 섬사람들을 "미개하고 제멋대로여서 다루기 힘든" 사람들로 특징
지었다. 제주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특징은 한국의 옛 격언에 반영되어 있다. "말[馬]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
1213년 초 탐라의 이름이 제주(濟州, 바다건너 행정구역)로 바뀌면서, 제주
섬은 부목사(a deputy governor)의
행정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1231년과 1259년 사이에
몽골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 고려군은 몽골 기병대의 기동부대에 맞서 대대적인 게릴라전을 벌여 한반도
전 역에 혼란을 일으켰다. 결국 고려는 몽골에 굴복했고 가혹한 복종 조건을 받아들였다. 고려 왕조와 몽골의 원나라 사이에 평화조약이 맺어졌다. 고려의 무신파는
평화조약 조건들을 불만 족스럽게 여겨 고려 군주에 반기를 들었다. 이 고려 무신들은 제주 섬으로 도망쳐서
고려 왕 조와 몽골에 대항하는 전투를 벌였는데, 이것이 삼별초난이다.
삼별초는 제주 섬 기지에서 몇 년 동안 적군의 연합 세력에 저항했지만 고려와 몽골 군대에 패배하였다.
1273년 삼별초의 패배로, 몽골의 제주 섬 점령이 시작되어 1375년까지 102년 동안 지속되었다. 탐라는 중국 원나라의 공식 목초지로 지정되었다. 탐라에서 몽골의
지배적인 주둔은 목축업자들과 함께 귀 중한 가축들(말, 소, 양)을 지키기 위한 평화유지군이었다(서론, 사진4 참조). 몽골의 침략은 제주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몽골 침략자들은
육식을 하는 기병들이었다. 기병대의 경제 인프라가 정치 지도자들의 통제를 벗어난 초식 패턴에 의존했기
때문에, 탐라의 광대한 목초 지는 몽골 주둔군에게는 성장하고 있는 제국의 동쪽 국경에서 가축 사육 기지를
얻을 수 있는 시기적절한 기회를 제공했다. 몽골의 제주 말 사육은 제주 섬 경제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
다. 기병의 경제 인프라가
정치 지도자들의 통제를 벗어난 초목 패턴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12], 탐라의 광대한 목초지는 몽골 주둔군에게는 성장하는 제국의 동부 국경에 가축 사육 기지를 획득하는 시기적절한
기회를 제공했다(Nemeth1987, p. 89). 몽골의 제주에서의 말 사 육은 섬 경제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고, 조선 왕조에 의해 섬이 폐쇄되기 전까지 200년
(1623년-1830년) 동안 "바다
유목민"(Yi 2013년) 현상이 일어났다. 1295년 고려는 탐라의 직 접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원나라의 통치자들과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 섬은 제주도로 개명되었고, 오늘날까지 계속 그렇게 불리고 있다.
수 천 년 동안 일반적으로 우연히 드물게 일어났던 외부인들과의 접촉 이후, 한
세기 동안의 몽골의 점령은 이 섬에 엄청난 갑작스러운 변화를 가져왔다. 이국적인 중앙아시아 기마병들은
제주 내륙 평지에서 횡포를 부리면서 점차적으로 섬 전체를 지배했다. 복장, 언어, 풍경은 몽 골 침략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에서 크게 변화되었다(Yang 1977년, pp. 48–49). 아시아 대륙 에서 온 유목
기마인들은 제주 섬의 자급자족 농민들, 교대 경작자들(shifting cultivators)과 어민 사이에서 한 세기를 보냈다(Nemeth 1987, p. 91).
7. 조선 왕조(1392–1910)와
신유교 사상
제주에서 조선 왕조의 주된 관심사는 조선의 수도와 중국 북경에 대한
세금뿐만 아니라 이국 적인 공물들의 흐름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품목은 약초와 목재제품뿐만 아니라, 해산 물(전복, 건어물, 낙지, 도미), 말, 소가죽, 펠트천, 귤, 기타 다양한 감귤류 등이 포함되었다 (사진7). 제주의 이국적인 자원에 대한 수요로 인하여 제주 섬은 1413년
조선 왕조 통치 속으 로 빠르게 통합되었다. 공물과 세금을 징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3개의 센터를 설치하여 제주에 대한 행정적인 제약을 가했다(그림). 이 세 고을은 지역 내 반란과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 하기 위하여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또한 1914년까지 계속하여
존재했던 목사(牧使)라는 지위가 만들어졌다. 조선 왕조 500년 통 치 기간 동안 285명의 목사(牧使)가
임명되었다. 여기에 덧붙어, 제주 방어 시스템은 9개의 해군 초소와 25개의 봉수대,
35개의 왜구를 보호하기 위한 해안 변방 봉수대로 구성되어 있 었다. 제주는 조선 왕조의
군사 요새였다.14)
섬과 섬사람들을 조선 왕조에 통합하는 또 다른 방법은 신유학 철학의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교육을 통해서였다. 조선 왕조는 사후세계에 사로잡힌 불교의 관념을 거부했다[13]). 조선 왕조 는 좋은 정부를 통하여 현세의 상황을 개선하려고
시도했다. 덕은 ”리더십“과
동일시되었고, 덕망 있는 리더는 신유교 사상에 따라 적절히 교육되어야 했다. 무력보다는 교육이 섬의 물리 적, 사회적, 이념적 변화를 이루기 위한 이상적인 수단이었다. 조선 왕조는 신유학
아카데미를 지원하고 인력을 배치하여 섬 주민들이 올바른 생활상을 형성하도록 하였다. 제주로 유배된 신유학자들의
역할은 제주 섬이 유배 온 학자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요했다. 그들 은 지역 문화를 변화시켰다. 이들이 영향을 미친 흔적은 『제주 유배 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
다.[14])
신유학을 흡수했던 제주 지역 엘리트들은 새로운 철학을 사회에 전달하고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유교의 영향은 안정적이고 노동집약적인 자급자족 농업경제가 이루어지는
평지인 평평한 내 륙 지역에서 가장 강했다. 평지의 마을 생활은 육지에서와 같이 부계 대가족과 위계질서가
특 징이다.[15])
조선 후기(18세기와 19세기)에, 신유학의 시행은 '신당 500개와 사찰 500곳 불태우 기'(그림 9)라고 불리는 1702년 정화 운동(129개 신당과 2개의 사찰 불태우기)을 통해 강화되 었다. 제주에서 일련의 반란(1813년, 1862년, 1893년, 1901년)이 일어났다. 섬은
고립되었고 경제가 침체되어 최저점에 이르렀으며, 섬 주민들의 출륙금지령(1629–1839)과 어업 금지가 사태를 악화시켰다. 이 시기에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미국
선박들이 인근 바다에서 무역과 경쟁을 탐색하기 시작하면서 서양 사상들이 들어오고 신유학 전제(前提)들을 도전하기 시작하 였다.
8. 일제강점기(1910–1945)와
근대화
일제강점기는 제주도민들에게 극심한 고통의 시기였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화가 혜택을 가져 왔고, 또한 저항운동이 특히
문화 분야 발전에 기여하였다. 섬의 자원 착취를 늘리기 위하여 설계된 상업, 무역, 기술을 개선할 뿐만 아니라 도로, 다리, 통신, 학교를
건설하는 일본의 근 대화 프로그램으로 인하여 옛 경제적·사회적 질서가 무너졌다.
고부가가치 바다 자원의 한 예는 요오드성분이 풍부한 감태(해초의 일종)이다(사진10). 일본인 들은 감태 가루를 약과 화약f 만드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일본군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유럽에서 감태를 수입하곤
하였다. 러일전쟁 동안 유럽으로부터의 수입이 불가능해지 자, 일본은
감태 공급을 위해 제주로 눈을 돌렸다. 제주에서 비료로 쓰이던 감태는 돈으로 교 환되는 고부가가치 상품이
되었다. 일본군이 필요로 하는 감태의 양은 연간 6만~7만 파운드였
다고 한다. 일본군의 감태 수요는 제주 녀들에게는 뜻밖의
기회였다. 섬 밖에서, 육지에서, 일본, 러시아, 중국에서
일하던 녀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벌 었다. 이 아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었고, 그들이 받은
교육이 4.3항쟁으 로 이어졌거나 그들이 4.3항쟁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감태 수확은 제주 사회 변혁에 기 여했다(Ko
2016).
감태는 제도화된 신유학의 체계적인 억압을 초래한 발전을 가능하게
했는데, 예를 들어 해양 자원의 착취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해안가에서 건물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추 세는 가난한 해안 마을들에게 혜택을 가져다주었는데, 전통적인
내륙 마을에서 벗어난 새로운 경제 엘리트를 창출하였다. 섬을 둘러싼 첫 일주도로는 1917년 일본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1977년까지 포장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사진. 11). 제주 사람들의 일본으로의 대규모
이 주(1935년 20만 명 중 5만 명)가 시작되었고, 그들이
제주로 보낸 돈으로 섬의 경제가 되살아 났다. 1930년대에 제주도의 경제는 생존을 위한 농업경제에서
상업경제로 변모했다. 농업 경 영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고 근대 노동 의식과 소비주의가 제주
사회에 변화를 가져 왔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제주 섬에는 제주도민보다 일본군(10개 부대, 10만 명 이상)이 더 많았다.
9. 4.3사건(1948–1949)과
한국전쟁(1950–1953)
4.3 사건이 터지기 전 제주의 경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유용하다.[16])
한 경제학자는 일제강 점기 말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1946년의 농업 생산량은
화학 비료 부족과 일본에 서 제주로 돌아오는 한국인 이주자(노동자와
녀)의 25% 증가로 인해 1935년~1939년까지의 농업 생산량의 71%에 불과했다. 게다가 미군의 곡물 분배는 불평등했고, 상인들은 곡물 가격 을 통제하기 위해 부패한 공무원들에게 돈을 주고 있었다.
이것은 제주 사람들 사이에서 많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분노를 가중시킨 또 다른
요인은 제주 사람들이 일본에서 들어 오는 물품 밀수를 적발하고 엄벌하는 데 있어서 미군이 수행한 적극적인 역할이었다. 4.3 사 건이 확대되면서 제주 경제는 마비되었고 제주 사람들은 희생되었다(Jin
2004a, pp. 419–
439).
1948년 4월 3일 제주 섬에 이른바 ”좌익
조직“ 폭력사태가 일어났다. 한라산에서 내려온 공 산주의
게릴라 집단이 이끈 섬사람들이 한반도 남하나에 예정된 선거에 반대하며 봉기했다. 미국 임시 정부는 신속하게
대응했다. 국제 언론 기사들은 선거 준비에 참여하는 정치인에 대 한 좌익 조직폭력을 진압하기 위해 한국
경찰과 군대가 섬에 파견되었다고 보도했다. 2주 동 안 49건의
살인이 있었다. 이러한 폭력에도 불구하고 자유 선거가 실시되었고 제주 선거 결과 는 무효가 되었다.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되자, 사태는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하 는 민간인 유혈 학살로 번졌다. 그 사태가 끝나기 전에, 12개월
후, 반란은 수 만 명의 목숨 을 앗아갔다(30,000명
추산). 섬 내부에는 160개의 마을이 폐허가 되었고, 주민들은 잔인하게 학살당하거나 해안가의 난민 수용소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
살육에 대한 단편적인 설명만이 외부 세계에 전해졌다. 구조 노력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동안 그 섬은 이 승만 정부에 의해 무시된 채 가난과 무명 속에서 고통받았다. 1960년대에 이르러 마침내 회 복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에, 반란에 대한 짧은 공식적인 설명(영어와 한국어로)이 있었는 데, 두 가지 외국 이데올로기의 충돌로 보고하였다:서구 자본주의와 러시아 공산주의. 4.3 사 건을 겪고 살아난 사람들과 4.3 사건 동안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겪은 트라우마는 제주에서 20년
가까이 연구한 인류학자(김2000; 김1998)가 잘 묘사하고 있다. 2016년 학계와 종교지도 자 그룹은
제주 비극의 이야기를 국제사회와 공유하고, 한국과 미국의 희생자들을 위해 지역 사회에서 보상과 치유를
호소할 수 있도록 책을 준비했다(고 외 2016). 2016년까지
대한민국 정부는 비정부기구가 사건 희생자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것을 돕고 시민들과 협력하여 4.3 사건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적절하게 저승으로 떠나보내는 샤머니즘 의식을 조직하기 위해 도청에 사무소를 설치하였다(사진 12–13). 10.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제주
제주 경제는 1960년대
이후 큰 변화를 겪었다. 1970년대까지 제주의 가장 중요한 산업(일명 ”생명의 산업“)은 갈색
해초(Undaria pinnatifida)를 채취하여 판매하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갈색
해초 이전의 ”생명 산업“은 감태 산업이었다. 그러나 육지에서 인공재배된 갈색 해초가 개발되면서 제주의
농업생산보다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갈색 해초
시장은 쇠퇴했다. “(제민일보 1973년, 2016년 5월 5일). 섬사람들은 갈색 해초를 육지에서 공급받는 소금, 쌀, 직물과 교환하곤 했다. 녀들이
더 안전한 직업인 감귤밭에서 노동자가 되기 위해 직업을 떠 나고 있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70년대
이후 많은 서비스업 종사자를 필요로 했던 관광산 업은 녀들을 끌어들인 또 다른 산업이었다. 젊은 여성들은 더 이상 물질하면서 어머니의 발 자취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젊은 여성들과 남성들은 도시에서 살기 위 해 이주했다.
제주의 지역경제는 2010년
제주도 수입의 70%를 차지했던 관광산업 호황으로 크게 힘을 얻 고 있다(제주 위클리 2010). 이는 한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관광객이 늘어난 덕 분이다. 2005년 이전에는 평균 4460만
명의 국내 관광객들이 제주를 방문했다. 2008년 제주 섬은 관광 수입으로 2조3700억 원(대략 179억 유로)을 벌어들였고, 이는 2007년 대비 35% 이상 증가한 것이다. 중국 관광객의 급증이 제주 산업에 호재가 되고 있지만, 지역민들과
다 른 외국 관광객이 밀려나면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무비자 여행과 투자 규제
완화 등 중국 시장을 공격적으로 공략한 후, 일부 시민들은 이러한 성장이 너무 빨리 이 루어졌다고 우려하고
있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제주도의 경제에 이로울 수 있지만, 이런
현상 은 제주도민들에게 우려를 낳고 있다. 일본 점령의 유산이 아직도 그들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가운데, 일부 제주 주민들은 그들의 섬이 지금 중국인들에게 점령당하고 있다고 두 려워한다. 제주 지역 딸기 농가 신모 씨는 “중국인들을 가득 태운 비행들이
연이어 도착하고, 일부는 이 근처 땅을 사들인다.”며, “이번에 이 섬이 중국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 각이 들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두려움은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군사 활동 증가와 중국에 대한 한국의 경제적
의존도가 증가함에 따라 더욱 악화되고 있다. 제주도민들 이 처한 딜레마는 2010년 제주 현지 가게 주인인 김호산 씨가 제주 위클리 주간지 기자에게 말한 것으로 요약된다, "중국인 방문객들은 큰 쇼핑객들이다. 나는 그들이 계속
들어오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러나 김 씨는 그녀의 모든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기 싫다고 덧붙이면서, 예기치 못한 이유로 중국인들의 한국 관광이 줄어들게 된다면 수입 감소의 위험이 커진다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제주가 케익을 가지고 먹을 수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중국 관광 객들을 위한 환영 매트를 펼치는 것은 세련되고, 교육받은
부유한 관광객을 환영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광객들의 가치 또한 채택하지 않은 채 관광객들을 받아들이는 것 을 의미한다.
제주는 또한 다음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한국의 중요 인터넷 사이트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이 섬은 또한 많은 컨퍼런스와 국제 회의(예를
들어, 2008년 7월 세계 스카우트 회의, 2009년 한-아세안 기념 정상회담)를 개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010년 대한민국 중앙정부는 제주도
에 국제회의, 컨퍼런스, 전시회의 거점으로 개발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 이후로, 그 섬은 10,000 팍스 차이나 바오젠 그룹 인센티브와 8,000 팍스 암웨이 한국(남한) 인센티브와 같은 많은 중요한 행사를 개최했다. 2010년 제주는 67개의 대회를 개최하여 UIA 세계 회의 개최지 랭킹에서 전 세계적으로 27위, 아시아에서는 7위를 차지했다.
공항에서 제주시로 가는 길에 붙여진 '세계가 찾는 제주, 세계로 가는 제주'라는 슬로건에 표 현된 제주도민의 꿈이 실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가 제주로 대거 몰려오고 있다. 하지만
제주도가 세계가 주는 것으로부터 받는 혜택과 동시에 세계에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제주도가 세계에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 이것이 이 책에서 논의된다. 제주가
세계에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은 여성과 남성 간 평등, 세대 간 평등, 자연 보호와 자연 과 공생하는 사회를 위한 제주의 모델인 것으로 보인다.
Notes
“District
across water” is a pejorative term used by the Koryo-period administration.
Some Jeju scholars (for example Chun 2010) are of the view that this colonial
term should be replaced by Tamna, the original name of the island.
Some
examples are: Yi 2006; Jin 2007; Ko 2007.
Yongjuji
has been interpreted in detail by Hyun 1983, pp. 45–93.
This
debate is so serious that the two families brought it to court. The Go clan has
published a genealogy going back as far as 2337 BCE.
I
saw similar genealogy books of different clans in several villages of Jeju
(Gimnyung, Haumokdong of Udo).
During
the Choseon period, Jeju was a part of the Cholla Province.
Buddhism
came to the Korean Peninsula during the Three Kingdom Period, and it is assumed
that around this time Buddhism came to Jeju. But unlike in the Korean
Peninsula, Buddhism flourished in Jeju during the Mongol occupation. Two
Buddhist temples managed by the Mongols had slaves, one 280 and the other 130.
Jeong
In-Bong 1999. The theme of “exile culture” is alive even at present. In January
2017 the conference
–
International Scientific Exchange with the Island of Exile Culture – was held
on Jeju in January.
Major
social classes during the Choseon dynasty (on the mainland) were (1) nobles and
administrators (yangban), (2) Technicians (chungmin), (3) Commoners
(samgmin),
(4) People of low repute (chonmin). The first three groups are called
“respectable people” (yangmin).
4.3
refers to the date of the insurgency.
The
format follows the American system of month/day (April/3).—Ed.
2장 제주 친족제도에서 여성의 위치
"이 잊혀진
곳에서, 남성은 보다 낮은 지위를 차지하고 여성은 가족의 주된 버팀목이다. 여성 은 재산을 소유하고 자녀는 어머니의 성을 따른다. 여성은 공적
삶을 지배하고 남성은 용인된 다. 여성은 남편과 쉽게 헤어진다"(Sands
1931).
조선 시대 미국 외교관의 제주 가족 묘사는 다소 왜곡된 측면이 있지만, 한 제주학자는 외부 인들이 이 섬의 풍습을 여성의 노동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어머니 중심 사회”를 창조하 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Kim 1999, p. 411).
1. 제주 정체성에서
친족
학자들 사이에 제주 가족과 친족 연구의 주된 관심사 제주 친족제도(괸당)와 한국 본토의 부 계 친족제도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것이다. 한 저자는, 제주의 문화가 한국적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제주 가족과
친족제도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Kim 1999, p. 411). 조 선 시대에 확립된 본토의
부계 친족제도와 달리-혈통(lineage) 구성원의 부계
관계를 바탕으 로 하고 있어서 인척(혼인을 통한 가족 구성원)을
배제하는-, 제주 가족 구성원들은 괸당(혈통 을 통해 맺은
관계)이나 사돈(인척 관계)으로
불린다. 괸당이라는 용어는 종종 같은 혈족 관계 와 인척 관계 양쪽에 다 쓰인다(Kim 1992, p. 100).
제주 친족연구는 제주 섬의 친족제도를 본토의 친족제도와 비교하여
섬의 독특함에 초점을 맞 추어, "어머니 중심" 또는 “주변” 문화로 보는 동시에 한국 친족 제도와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학자들은 섬(주변부)의 관점에서 제주 친족제도를 분석하려고 하였으나, 신유교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본토 부계제도의 끈질긴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런 모순은 "이상 문화"와
"현실 문화"의 공존 또는 "유교
문화에 대한 매력"의 공존이라고 일컬어진다(Kim 1992,
p. 109). 학자들은 제주 친족제도를 본토(조선 왕조)의
부계 혈통 제도(유교적 이상)와 혹독한 섬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제주 현실이 절충된 것으로 보고, 제주의 독특한 양식이 출 현하게 된 것으로 본다. 제주 가족구조는 신유교 사상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 이데올로기가
모든 영향력을 잃었다고 말할 수는 없고, 오히려 그 영향력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해졌거나 그 수용이
선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신유교주의 자체가 제주 여건에 적응하면서 변모했다(Kim 1992, p. 105).
친족 지역에서, 한 집에서 성별(性別)보다는 세대별 주거 공간 구분(그림
1); 소규모 가족(핵가 족); 각 가정별 부엌과
조리시설 분리; 각 핵가족(부모와 아들)의 경제적 독립; 세대와 성별(性
別) 사이에 강한 위계질서
부재에서 제주의 특이한 양식이 보인다. 이 모든 것이 혹독한 환경 에 대한 “생존 전략”이라고 한다. 다만
유교적 이상이 가능한 곳에서는 여기저기서 채택된다 고 한다. 우리가 나중에 4장에서 보게 되겠지만, 이 생존 전략은 가족 조상의 일원으로 포함
된 신과 여신까지 수반한다. 따라서 초자연적 조상들과 부계 조상들은 제주 친족제도에서 경 쟁한다.
제주 결혼 관습에서 신유교 사상에서 벗어난 몇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결혼을 넘어선 세 대에 대한 존중; "이중 결혼"-가족 간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동일한 가정에 한 번 이상 여성과 결혼하는 것; 두 가족 간에 여성을 주고받기(사돈 간 결혼, 겹사돈); 18세기 초까 지 같은 성을 가진 가족 간의 결혼(동성동본끼리 결혼); 마을 내혼과 조상 숭배의식의 상속과 분할과 같은
특정한 “절충된” 부계 관습; 재산 상속(장남 균등 분배 원칙에서 비롯된); 아들을 낳은 것의 중요성; 여성신 조상 대(代) 부계 조상 숭배; 부계
족보; 샤머니즘 신당 대(代) 유교 제향소(포제); 장례
의식.
2. 신유교 이데올로기의
친족제도[17])2
제주 학자에 의해 “현실 문화”라고
여겨지는 신유교 이데올로기의 기본 특징은 무엇인가? 신 유교주의가 부계 친족 관계의 철학이지만, 그것은 남성과 여성의 결합을 모든 인간관계의 근 원으로 여긴다. 우주론적으로
보면, 하늘(양)은
땅(음)을 지배하고; 남자(양)는 여자(음)보다 우 선한다. 따라서 양성 간에 명확한 계층적 질서는 우주론적으로
허용되며 인간 질서의 적절한 기능을 위해 필수적이다. 유교적 관점에서,
자연법칙은 여성에게 열등한 지위를 부여했다. 여 자는 윗사람에게 순종해야 한다; 미혼일 때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고; 결혼하면 남편의 명령 을 따르고; 과부가 되면 아들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아래에서 보게 되겠지만, 이러한 생각은 제주 실제 관습과 양립할 수 없다.
계층적 질서는 성별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사회 기능에도 적용된다. 신유교 사상은 인간의 삶 과 자연현상 사이에 유기적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주적 차원에서 자연 질서를 관찰하면 서, 황제는 하늘의 축복에 의해 나라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황제와 가깝다는 것은 하늘의 축복의 일차적인 영향력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제주 섬은 우주 론적 비실체로서 중심부(티베트 고원의 곤륜산)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Nemeth 1987,p. 113)(사진 2). 조화롭고 행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사회 질서를 우리가 속한 우주 질서에 다시 맞추어야 한다. 인간을 지상에 종속시키는 보편적 질서에서 자연법이 우세 하고, 땅은
하늘로, 하늘의 후함은 땅을 통해 인간에게 흘러갔다. 간단히
말해서, 자연의 법칙 은 하늘과 땅과 인간들 사이에서 위계적이고 엘리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자연 질서에 대한 이러한 해석의 사회적 결과는 백성들의 계급이 나라에 의해 의도적으로 위계질서로 구조화되 는
것을 정당화하고, 그들 사이에 불평등하지만 하늘의 축복의 인간적인 분배를 초래했다. 이 러한 자연법칙은 위계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이며, 사회의 계층적 지위
체계를 정당화한다. 그것 은 개인보다 가족의 중요성, 그리고
씨족 족보(“덕망있는 사람들”의 계층 내에서의 각 가문의
사회적 지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신유교주의자인 조선 왕조가 개인보다 가족의 중요성을 높이 샀듯이, 풍수지리는
조상 묘지에
묻힌 조상의 영원한 “거주지”로서 가족의 상징적 중심을 강조했다. 그 혈통의 상징적인 중심 은
풍수지리학적으로 길한 곳에 묻힌 “시조(始祖, original
ancestor)”였다. 가장 바람직한 묫 자리는 바람과 물에서 멀리 떨어져서
기(氣)가 흩어지지 않고,
뒤로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물이 있는 곳이다(그림 3). 이런 원칙에서 씨족 족보의 중요성이 나온다.
효도를 중심원칙으로 하고 『예기』를 안내교리로 하는 신유교주의적
가족조직의 권위주의적 구 조는 국민이 국가의 중앙정부에 복종하는 토대가 되었다. 사회적 통제와 번영은
고도로 계층 화된 신유교주의 사회의 모든 레벨에서 받아들여진 의례에 대한 엄격한 준수에 달려 있었다. 전통적인
유교에 뿌리를 둔 신유교 교리는 조상에 대한 숭배와 "효도"의
개념을 사회 내의 관 계에 적용함으로써, 이러한 관계는 하늘과 자연 전체의 우주적 관계와 동일시되게
되었다. 『의례서』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 있어 예절의 규칙을 제공했다. 조선 후기에 양반 관료 체제의 모순이 극에 달했다. 어떤 사람은 4대까지 지위가 높은 직계 조상을 두고 8대까지 수 평으로 대가족을 이루어 양반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행운을 가져다주는 조상의 묫자리가 후손들의 행운을 보장한다는 믿음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믿음에서
조상의 묘, "조상 숭배의식" 과 제주의
부계 족보에 대한 중요성이 생겨났는데, 제주의 부계 족보는 제주 친족제도에서 " 부계 요소"로 여겨진다(사진 3). 제주 사람들이 매년 부계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인 시제는
관 료체제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지 않았더라도 4대 내지 6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위에서 설명한 세계관에서는 제주 섬이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보잘것없을 뿐만 아니라, 제주 사람들, 특히 녀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유교에서
가족, 효, 조상 숭배가 갖는 중요성은 제주 사람들에게 다소
낯설다. 체력과 올바 른 호흡, 바람과 조수에 대한 지식, 바다와 바람의 용 여신의 보호에 의존하는 녀들에게, 비 록 그것의 요소들 중 일부가 희석된 형태로 남아있지만, 유교적
세계관의 시조(始祖)와 조상 숭배는 무관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3. 제주 친족제도의 모순
제주 친족제도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공적인 영역과 의례적인
영역에서는 부계 원칙들이
만연하지만, 실제 일상 활동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Kim 1999, p. 117). 바꿔 말하면, 제주 학자들의 언어를 사용하면, 아버지 혹은 아버지 쪽 가까운 친척들이 아이 이름을 짓거나 조상 숭배와 같은 의식처럼 공적인 문제에서 주된
역할을 하는 반면에, 일상 생활에서는 모계 와 부계 친척(괸당)들이 동등한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하자면, 제주 친족제도는 부계 요소와 비 (非)부계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제주 가족과 친족의 특징이 뚜렷해지고
이해가 되는 것은 괸 당을 통해서다.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 친족연구에서 제주 학자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이러한 연구들은 모두 제주 친족제도의 독특함이 가혹한 자연환경 때문이라는 데 동의하는 듯하다. 혈통조직이 없는 핵가족체제에 기반을 둔 친족 구조는 혈통 토지 소유 없이 각 단위가 생존을 위해 고군 분투할
수 있도록 가족 단위를 작게 유지함으로써 제주환경(건조하고 바위로 되어 있고 화산 지대와 강풍)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이 가족 단위의 실질적인 가장은 결혼한 여성인데, 결혼한 여성이 이 생산과 소비 단위의 수장이기 때문이다. 결혼한
여성은 해안 마을에서뿐만 아니라 밭과 바다에서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사진 4~6). 이런 상황에서 마을 내 여 성과 남성의 사회적 관계, 그리고
마을 생활에서 서로 다른 세대 간의 사회적 관계는 본토와 는 매우 다른 평등주의적인 경향이 있다.
이것은 벼농사가 주된 경제 활동이었던 육지와 비교하면, 이와는 전혀
다른 생태적, 경제적 사회 기반이다. 벼농사에서는 부족한
논밭의 관개 농사를 짓기 위해 남성의 결속과 협업이 가 장 중요한 필수요건이었다. 이것이 부계제도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신유교주의가 출현한 사회적 여건이었다. 15세기경 한국의 농민들이 국가
정책과 엘리트들의 문화에 의해 유교적 원칙에 따르도록 강요받았을 때 갈등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메마른 토양과 전혀 다른 생태적·경제적 현실을 가진 제주에서 유교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윤리는 여성이
일차적 경제 주체였던 사회 체계와 양립할 수 없었다(Cho 1979).
그러나 제주 친족제도의 한 가지 이상한 현상은 신유교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적 친족제도의 초 석인 부계 조상 숭배의식에
대하여 갖는 중요성이다. 본토 친족제도에서 조상 숭배의 중요성 은 토지가 남성 계통을 통해 물려받는
방식과 매우 집약적인 농사인 벼재배에 노동력을 제공 할 수 있도록 남성 조상의 후손들의 응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조상 숭배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명망 있는 선조들이 후손들에게 왕실의 관료제에서 높은 지위를 얻거나 유교적
학식과 같은 혜택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들 중 어느 것도 제주와는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남 성 조상들과 조상 숭배는 그들의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여성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수수 께끼였다. 제주도의 생활 방식은 후손들이 협력할 필요가 없었다. 제주 친족연구는
섬에서 조 상 숭배에 대하여 갖는 중요성은 변방에 사는 이 사람들이 중앙의 신유교 이데올로기를 통합 한 방식이었다고 결론짓는다. 이로 인해 남성 조상 숭배의식이 채택되었고, 이에 따라 제주도 의
남성 계통이 중요해졌다(Cho 1979).
필자가 2016년 우도에서 관찰한 김씨 가문의 조상 숭배의식 거행은
제주 남성 우월주의 이면 에 논리를 드러냈다. 여성들이 제사 음식을 준비했지만, 제사 의례는 남성 가문 구성원들이 조직하였다(사진 7~8). 이 가문은 신라 왕(기원전 57~ 기원후 927년)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2016년 김씨 가문의 조상들을 위한 시제(時祭, 가문이 해마다 집단적으로 지내는 제사)가 열 렸을 때, 그들이 실제로 하고 있던 것은 그들의 뿌리를 깊이 파고들어서 신라 천년 왕국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가문의 왕실
지위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명시적으로 언급되 지는 않았다. 이 혈통은 오직 남성 가문 구성원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 안에는
남성 우월주 의 이데올로기의 표현인 남성에게 부여되는 가치와 해마다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그들의 의례적인 역할이 들어있다.
시제는 여섯 신위로 상징되는 6대를
거슬러 올라간다(조상 위패; 사진 7의 제단에 올려진 여 섯 조상 위패를 보라). 신위는 “죽은 영혼이 기대는 곳”이라는 뜻이다(사진 9). 조상 제사 거 행 이면에 들어있는 것은, 본토 양반 부계인 경우 물질적인 부와 가문의 위신이다. 척박한 토
양과 혹독한 자연환경을 가진 제주는 사정이 매우 다르다; 부와 위신을 가진 귀족계층이 없 다. 조상 제사를 지낼 그런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제주도에서 제사를 지낼 때 남성들의 의례 상 역할은 유교적 원칙을
따르지 못할 뿐 아니라 여성들이 노동으로 가족을 위해 생필수품을 제공하고 있을 때, 그런 것들은 공허한
제스처이기도 하다(Seo 2007) 4.
“어느 한 쪽 성(性)도 지배적이지 않은” 제주 친족제도의 본질
이 장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자연환경에 의해 형성되고 신유교주의 영향이
약해진 이 제주 친 족제도의 몇 가지 특징들을 제시한다. 필자는 기존 제주 친족분석을 활용하여, 본토의 친족제 도와 비교할 때 제주 친족제도에는 평등주의적 젠더 관계 또는
“어느 한 쪽 성이 지배하지 않 고 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이러한 평등주의적인 젠더 관계는 부계조상 숭배 를 중요시하는 신유교 이데올로기에 뿌리를 둔 남성 우월 이데올로기와 녀 공동체에서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일상생활과 생계를 꾸려나가는 여성 우위로 구성되어 있다.
Cho는 우도 민족지학에
대해 쓴 글에서 유교적 윤리와 규범이 마을 사람들에 의해 일반적으 로 무시되었고 지켜지지 않았다고 썼다. 예를
들어, 노인에 대한 공손한 처신은 눈에 띄지 않 았다. 젊은이들은
마을 어른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공손 한 행동에 대한 유교적 규칙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사회적 상호작용은 기본적으로 위계적 원칙보다는 평등주의적 원칙을 따랐다. 혈통 간 협력은 강하지 않았다. 시제와 같은 행사 때 후손들 간에
어떤 협업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들은 종종 같은 혈통의 남자들 사이에 다툼과 싸움을
수반했다. 이들 싸움은 관련된 남자들의 아내들의 개입으로 해 결되었다.
한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매년 열리는 의례이 다.“(Cho 1979. p. 263).
1970년대 후반에 이
장면이 관찰됐지만, 위계적 사회적 교류의 부재는 2016년
우도에서 필자 가 매년 열리는 조상 숭배 제사에 참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성 우위 이슈와 관련해서,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제주가 ”모계“ 사회라는 뜻이 아니라고 강
조하지만, 제주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를 ”모계“ 사회라고 부른다(Kim 1999b,p. 401). 제주의 모계제도에
대해 언급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남녀를 막론하고 제주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실 제적 삶의 영역에서 여성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보다는 덜 중요하다.
필자가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보편적으로
인도네시아 모계 사회로 알려진 서수마트라 미낭카 바우족은 제주와 유사한 친족제도를 가지고 있다: 신화
속의 남자 조상들의 후손으로 묘사된 남성 우월 이데올로기와 여성들의 일상적인 마을 생활 관리와 수입 능력에서 비롯된 여성 우 위. 이러한 사회 모델에서는, 혈연관계라는 꼬리표에 관계 없이, 예를 들어 토지, 직함, 위신
과 같이 가치 있는 것들이 여성과 남성 사이에 공유되며, 이러한 모든 것이 남성에게 부여되 는 한반도와
같은 대부분의 부계제도와는 달리, 남녀 간에 균형적인 관계를 이끌어낸다.
5. 괸당: 제주
친족제도
괸당은 제주 사회의 "어느
한 쪽 성(姓)도 지배하지 않은" 편향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것 은 '문화 범주'이며 제주 문화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이다(Kim 1992, p. 96). 한국 친족연구는 주로 부계 씨족 마을과 신유교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양반 마을에서
자주 이루어진다. 한국 혈연 연구의 이러한 편향은 일가친척과 혈통을 동질적인 것으로 보지만, 일가친척을 영구적인 집단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한국에서
일가친척은 남자계열에 의한 직계존속만을 포함 하고 인척(姻戚)은
제외하기 때문이다. 즉, 서로 다른 성(性)들이 혼합된 마을과 부계 혈통이 별로 많지 않은 보통 마을은 친족연구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러한 친족에 대한 접근은 제주 친족 제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주에는 본토의 부계 혈통이라는 개념이 존재 하지 않는다. 대신, 제주 사람들은 부계 친척과 혼인으로 맺어진 모든 관계를 포함하는 괸당 개념을 사용한다. 문화 범주로서, 관계와 네트워크는 개인으로부터 시작되며, 따라서 각 개인 마다 그들 나름의 독특한 괸당을 가지고 있다(Kim
1992, p. 98).
괸당 구성원의 다섯 가지 범주는 남성의 자아에서 찾을 수 있다(Kim 1992, p. 99). 첫째는 아버지의 부계 친척(성괸당)이나 성(姓)이 같고 아무리
먼 옛날의 관계라 할지라도 원래 남성 조상과 같은 출신을 가진 사람들이다. 두 번째는 어머니의 부계
친척이다(외괸당). 마을 내혼 으로 인해, 그들은 가까운 곳에 사는 이웃이다. 어머니와 성이 같고 출신이 같은
사람을 만나 면 역시 관당이라고 한다. 세 번째는 외할머니의 부계 친척(진외괸당)으로, 외할머니의
부계 친척의 친척들이다. 이것은 어머니의 직계가족과 외할머니의 직계가족이 괸당이라는 것을 의 미한다. 넷째는 원래 남성 조상의 아내의 부계 친척(처외괸당)이나 그 아내와 성이 같고 출신 이 같은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경우
마을 내혼으로 인해 처가가 같은 마을이나 가까운 곳에 살고 있으며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늘 만나는 사람들이다. 다섯째는
원래 남성 조상의 부계와 모계 친척의 모든 구성원과 결혼한 사람들이다(사돈). 여기에는 아버지의 여자 형제의 자녀, 어머니의 여자 형제의 자녀, 할아버지의 여자 형제의 자녀, 할머니의 여자 형제의 자녀 등이 포함된다. 다시 말하면, 괸당 친척은 부모-자녀
관계, 형제-자매 관계, 결혼과
관련된 "친인척 (in-laws)"을 통해서
맺어진 사람들이다. 같은 세대의 사람을 남매(오빠, 언니), 부모 세대의 사람을 삼촌·이모(삼촌, 이모), 또는 성별과
관계없이 단순히 삼촌(삼춘)이라고 부르고, 두 세 대 이상인 사람은 할머니·할아버지(할망, 하르방)로 불리며, 한 세대 어린 사람은 조카라고 부 른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얼마나
가까운 관계에 있는지 확실치 않아도 서로를 괸당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하목동에서 볼 수 있듯이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이 괸당 일원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괸당은 어떤 구조나 공유
재산이 없다. 괸당은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영구적이지 도 않다. 주요 구성원들이 죽으면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을 중심으로 한 인적 네트워크이며, 구성원들은 그들의 주요 친척들로부터의 집단적 권리와 책임을 통해
연결된다. 그것은 종종 노동력을 동원하거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지지를 얻는 역할을 한다. 괸당의 주된 이유는 제주 환경에서 토지 소유보다 더 가치 있는 "노동력 보유고"을
제공하기 위해서이다(Kim 1992, p. 102). 김창민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하목동 혼인 관계의 괸당 네트 워크에서 볼 수 있듯이 신유교 원칙을 어기는 근친혼을 많이 낳는 잠재적 혼인
상대의 저장고 라는 점도 괸당의 또다른 중요한 역할로 보인다.
6. 하우목동 마을의 괸당 관계
우도 주민의 90%가
이 섬에서 태어났고, 50%는 이 섬에서 100년 동안
FaFaFaFa?? 살고 있다. 주민의
80% 이상이 우도 사람과 결혼한다. 결혼한 사람의
70% 이상이 우도에 처가를 두고 있다. 이 때문에 결혼 잔치가 5일 동안 벌어지곤 했으며 마을 전체 사람들을 먹이려고 최소 돼지 5마리를
잡아야 했다(우도지 2007).
하우목동 사람들은 서로 다른 괸당 범주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
대부분의 괸당관계 가 혈연관계나 혼인 관계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위 위성지도(사진13)에 나와 있는 주택 53채 중
30채는 괸당 구성원 소유이며, 6채는 비어 있 으며, 나머지 17채의 주민들은 마을 괸당 네트워크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우목동
주택의 57% 주민 사이의 괸당 관계는 아래 도표(그림14)와 괸당 관계인 가까운 이웃(사진15) 에 나타나 있다. 괸당 관계인
30채의 주민들의 거의 모든 자식들은 우도 밖, 제주시나 본토 도시에 살고 있다. 필자가 하우목동 주민들의 괸당 관계를 주택을 통해 추적하기 시작했기 때 문에 마을에 살지 않는 괸당들은 주택
차트에 나타나지 않는다. 김씨 가문의 결혼 패턴 – "근
친혼"은 아래 그림 16에 나와 있다. 이 결혼 중 어느 것도 신유교 원칙에 부합하지 않지만 그 런 결혼은 제주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Kim 1999b). 이러한 "근친" 결혼들은
규칙을 어긴 다. 신유교 원칙에 따르면, 아버지 쪽으로 10대까지, 어머니쪽으로 8대까지의
친척과 결혼해 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규칙은 종종 깨진다. 하우목동
사람들은 근친혼이 마을에서 자주 일 어나지만, 아무도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도에서 10년마다
발간되는 우도지에 따르면, 하목동과 다른 마을을 포함하고 있는 서관리에는 276개의 성씨가 있다. 이 이름들의 대부분은 사라졌다. 현재 가장 많은 성씨가 8개 있다:
고씨, 정씨, 김씨, 강씨, 홍씨, 오씨, 윤씨, 양씨.
그림 15 도표는 이들
8개 가문의 근친혼을 보여준다. 유교 이데올로기에서 묘사하는
근친상간 규정은 이들 8개 가문 사이에서 중단된다. 이 장의
앞부분 그림 9는 이러한 근친혼의 본질을 보여준다.
이런 형태의 결혼은 다른 가족 간에 권당 관계를 강화한다. 본토에서 결혼 준비할 때, 신부의 가계는 덜 중요하다.[18])
그러나 마을 내혼이 있고 두 배우자가 조혼으로 인해 관계가 맺어질 때 두 가족은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또한 외가와 처가와의 관계가 강화되고 이것은 공동체 응집력에 기여한다. 따라서
외가 쪽 친족들은 실제로 친가 쪽 친족과 같은 무게를 가지며 이 것은 의사결정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제주
지역은 본토에 비해 괸당들 간에 협력이 자연스럽 게 일어나고 부계 체제는 더 이상 강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부계 혈통에 대한 믿음이 약하 기 때문에 처가와 외가 쪽이 우세하거나 제주에 모계 중심의 전통이 만연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Kim1999b, p. 408).
7. 일부 친족제도에서 볼 수 있는 제주 젠더 관계
많은 학자들이 신유교주의에서 나 본토에서 일어나는 것과 상당히 다른 제주 친족 체계의 특 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19])
1)
어떤 마을도 같은 성씨와 출신을 가진 하나의 부계 씨족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다
2)
부계 씨족 제도보다 핵가족 제도
3)
장남의 가족은 부모 집에 머물지 않고 부모집을 떠난다.
4)
이혼, 재혼 또는 첩(mistresses)에 대한 편견이 없다.
5)
결혼식과 장례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결혼한 딸과 처가와 외가
6)
자녀 사이의 재산 균등 분배에 대한 편견
7)
아들들 간의 조상 의례 공유: 그것은 장남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특징 중 일부만 아래에 설명하겠다.
마을 내혼
제주에서 마을 내혼이나 마을 이웃과의 결혼은 흔했다. 한 마을에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없다 고 한다. 제주 마을에는 성(性)씨가 많아서 마을 내에서 결혼이 가능하다. 하우목동에는 9개의 성이 있고 우도 전체에는 56개의 성밖에 없다(Udo-Ji 2007, pp. 927–929). 이것은
한 마을의 주민들이 모두 한 성을 가진 한 혈통이고, 같은 성씨와 출신을 가진 사람들과 결혼하지 않기
위해 마을 밖에서 결혼해야 하는 본토와는 매우 다르다. 제주 마을의 내혼 비율은 40%였으나 1970년 이후에는
30%로 떨어졌다. 2016년에 수집된 데이터에 따르면,
하우목동에서 내혼 비 율은 56%이다. 내혼은
마을 주민 대부분이 대가족처럼 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사회적 네 트워크가 형성되고 필요할 때 도움을 준다. 한
여성의 가족과 그녀의 결혼한 자매들은 모두 같은 마을이나 이웃 마을에 산다. 이것은 하우목동 위성 지도에서
보면 분명하다. 여성들은 친정 어머니와 자매의 집을 자주 방문하고 그들은 함께 일한다. 마을 내혼은 친정 가족이 가 까이 있기 때문에 결혼한 여성들에게 지지하고 힘을 주는 환경을 제공한다. 제주에서 며느리 는 본토 신유교주의를 따르는 이방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제주도 의 내혼은 여성들에게 많은 지지, 자유, 그리고 개인의 자율성을 허용한다.
솥의 분할: 장남은 집을 떠난다
장남은 결혼하면 부모의 집을 떠나 자신의 가정을 꾸린다. 이것을 "솥의 분할"이라고 일컫는 다. 맏아들은 부모의 집의 부지인
안채(안거리) 내에 있는 바깥집(밖거리)라는 건물에서 살았
다.[20])5
아들과 딸이 마을에 살면 자기 집이 있다. 아니면 부모가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결혼 한
아들을 위해 부모 집 옆에 집을 하나 더 지어준다. 장남이 집을 떠나는 관습은 제한된 자 원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노동력을 가능한 최소 단위로 나눈다. 동시에,
그것은 그 지역에서 결혼하는 여성들에게 많은 자유와 독립을 제공한다. 며느리가 살림을 꾸려가고
물건을 사고 요리를 하는 등 책임을 져야만 아들의 결혼이 완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혼한 여성은
첫째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친정집과 남편 집을 오간다. 제주 가족 제도는 핵가족으로 묘사될 수 있다. 핵가족 단위
"솥의 분할"이라는 제주 관습의 밑바탕에는 개인에게
더 큰 초점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가족 전체에 대한 남성 가장의 권위가 절대적이어서 아들과 부계 가족
구성원들의 삶을 좌지우지하 면서 가족 집에 초점을 둔 신유교와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위계적이고 종속적인 관계에 바탕을 둔 권위의 구조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여성은 거의 자율성을
갖지 못 한다. 하우목동에는 53채의 집에 75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이는 한 집당 평균 1.5명이 살 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사진17-18)[21]).6
대부분의 자녀는 떠났고 연로한 부모는 부부로서든 혼자든 마을에 남아 있었다(사진19).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의 집에서 활발하게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은
혹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제주 사람들의 전략이라고 한다. 이러한 개 인에 대한 초점은 결혼식이나
마을의 큰 행사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 행사에서 도움이나 선 물이 개별적으로 제공된다: 남편, 아내, 부모, 그리고 성인 자녀 모두가 가족으로서가 아닌 개별적으로 도움과 선물을 제공한다(Udo-Ji
1997, 페이지 197). 8.
부부 중심의 핵가족 관계의 평등주의 특성
이 장에서 보듯이, 제주의
자연환경은 제주도의 친족제도와 제주 사람들의 삶의 방식, 특히 여성들의 삶의 특징을 형성해 왔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혹독한 환경을 이겨내야 했다. 이러 한 생존투쟁에서
이들은 제주 현실과 신유교 이데올로기와 같은 외부로부터의 영향과 싸워야 했는데, 이는”'현실 문화“와 ”이상
문화“로 불리는 두 문화의 절충형인 제주 친족제도를 형성 했다.
여성의 노동은 생존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7세 이후 남자와 여자가 같 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과 같은 규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또한 여성의 힘은 섬의 밭의 보다 가벼운 일에 적절했지만, 본토 논의 힘든 일에는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의 노동과 그
들의 경제적 자율성은 그들이 더 독립적이게 만들었고, 따라서 부부들의 힘의 균형에 영향을 미쳤다. 각자가 의사결정에 있어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인정하는 것에서 기인하며, 높은 이혼율과 많은 재혼으로 이어진다. 이혼이나 내연 관계에 대 한 편견은 없다. 신유교 이데올로기의 3대 남자에 대한 의무(아버지, 남편, 아들)는 제주 여성 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본토 여성들에 비해 제주 여성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에 있어서 훨씬
더 자율적이고, 이것은 제주 남성들이 훨씬 더 적은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실제로 는 그렇지 않다. 남자는 신체적인 힘이 필요한 힘든
일에 필요하다. 농업과 관련한 문제나 외 부 당국과의 거래에서 남자가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제주는 ”어머니 중심“ 또는
모계 중심이고, 남성은 아무런 역할도 없다는 생각은 잘못되고 과장된 것이다. 남자는 수동적이라 고 말할 수 있다-여자는 이혼하고 남자는 이혼당한다(Kim 1999b, p. 111). 제주 남성들의 삶 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알코올 중독이나 만성 도박 때문에
그들의 수명이 더 짧다는 것이 다. 그러나 다른 이론은 풍수지리(풍수[22])7)가 남성 에너지(양)에는 호의적이지 않지만 여성 에 너지(음)에는 매우 호의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믿음은 남자들을 “귀하게” 만드는데, 남자
들의 짧은 수명과 "약함" 또는 "수동성" 때문에 남자들이 "희귀"하기 때문이다.
비록 본토에서 유지되는 많은 유교의 규칙들이 제주에서는 지켜지지 않지만, 남성
우월 사상 이 그 섬에 존재한다: 아버지의 성을 따르고 장남에 대한 약간의 선호와 다른 많은 관습들은
남자에 대한 존경을 보여준다. 동시에, 핵가족 제도는 여성들에게
가족의 가장으로서의 역할 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실제로 가족을 부양하고 가정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주석
1. 조선 이전의 고려의 친족
제도는 제주도에 가까웠지만 조선의 친족 체계와는 달랐다.
2. 2005년 가족법 개정으로 한국
가족조직의 기본원칙이 가부장적, 부계적 가족에서 동등한 개인으로 구 성된 가족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남성 가족 구성원이 가족 구성원에 대한 상징적인 권위를 차지하고 자 녀들은 생물학적인 아버지의 혈통만을
물려받는 가장 제도를 폐지했다. 새로운 가족법에 따르면, 각
개 인은 누군가의 가족 구성원이나 가족의 가장이 아닌 개인으로 국가에 등록한다. 결혼한 부부들은 아이들
의 성을 엄마의 성이나 아빠의 성으로 할지 결정할 수 있다. 개정안은 지속적인 법적 형태의 성별 위계
질서를 종식시켰다(Sin 2006).
3. 이러한 가까운 친척 결혼에서는
아내 증여자와 아내 증여자의 신분 차이가 없으며, 이는 평등주의적 사회관계의 표현이다. 한편, 해안 마을과 중산간 마을 사이에는 계급 의식이 존재한다. 일본인들이 제주 로 건너와 섬 주변 도로가 건설되기 전까지 해안 마을 여성들은 무시당했고, 평원 지역 남성들은 해앙 마을 여성들과 결혼하는 것을 꺼렸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의 산업화와 사회기반시설 도입으로 해안 마을 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바뀌었다.
4. 1950년대 제주 친족제도에 큰
변화가 있었다. 이 연구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래에서 논의된 친족 체계는 1970년대 이전의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5. 현재(2016년) 우도에서는 이러한 배치를 거의 볼 수 없다. 안채(안거리) 내에 화장실과
샤워 시설을 갖춘 집을 개조하고, 박거리에는 창고를 만든다.
6. 어떤 젊은이들은 부모님
마을에 돌아와서 산다. 이것은 내가 집주인이거나 그녀의 남편의 경우이다.
7. 중국 지리의 원리에 따른
점괘 이론.
3장 제주 해녀(녀)
1. 한국의 아마존: 제주 여성을 바라보는 외국인의 시선
제주는 "여성 풍요의
섬(여다(女多)의
섬)"이라고 불린다. 사실, 속담도 있듯이, 제주에는
역사 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았다. 이 속담은 여성의 노동이 필요한 섬의 가혹한 자연환경과 집
밖에서 여성의 적극적인 역할에 바탕을 두고 있다(Song 1998, 페이지 394). 제주도에서는 소규모 농사(보리, 고구마, 최근에는 우도 마늘, 파, 땅콩)에서 여성의 노동이 생존을 위해 필 수적이었다.
암반 화산 토양 때문에 소규모 “여성
농사 체제”(Boserup 1971)가 자리를 잡으면서, 여름철
좁씨 재배에 필요한 여성 대 남성 노동비율은 8:2로, 본토에서
논의 벼 재배에 필요한 노동비 율 3:7과 정확히 반대이다. 그리고
본토에서 마른 밭의 경우 필요한 노동비율은 4:6이다. 제
주 여성들은 따뜻하고 습한 기후에서 잡초가 빨리 자라기 때문에 끊임없이 잡초를 뽑으며 집 보다 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제주 토양의 종류는 남자들이 소나 말을 가지고 밭을 가 는 것을 제외 하고는 여자들이 혼자 밭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한다.
해안 마을에서 여성의 물질(diving)은 농업과 어업의 산업화가 시작되기 전에 거의 전적으로 가족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한 여성 노동에 기반한 생산 방식이었다. 여성들은 돈을 벌거나, 바다에서 잡을 것들을 섬에서 생산되지
않은 가장 귀한 두 가지 상품인 흰 쌀과 목화와 물물 교환하기 위하여 물질을 하였다. 제주 여성들이 물질을 할 때 집과 밭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다. 제주 여성들은 새벽 별이 뜬 아침에 집을 나섰다가 저녁별이 뜬 저 녁에 집으로
돌아왔다. 경작할 수 있는 땅이 거의 없고 자연환경이 험한 이 섬에서,
여성이 가정에서 여성의 자리를 차지하는 사회적 통념을 깨고 나오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본토의
일 반적인 성별 분업 노동으로는 섬에서 생존을 위해 필요한 더 많은 양의 바깥 일을 제공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생태적 조건 아래에서, 성별에 관계 없이, "능력 지향 노동자(ability-oriented worker)" 이론은
훌륭한 설명을 제공한다(Han 2005, p.32).
그러므로 본토와 달리, 제주 여성의 자리는 집 밖 – 메마른 들판, 바다, 마을
시장 그리고 마 을 너머에 있다. 1901년 난을 보도하기 위해 제주에 온 미국 외교관이자 조선 왕실
고문인 윌리엄 F. 샌즈는 제주를 "진정한 아마존
공동체"라고 불렀다. Sands는 다음과 같이 썼다: " 제주 남자는 열등한 존재인 반면 여자는 모두 힘이 있었다. 여성들은
가정의 가장이자 재산의 소유자였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성을 가지고 있었고 여성들은 남편과 함께 살지
않았
다."(Sands
1931). 비록 제주 여성들에 대한 샌즈의 묘사는 정확히 맞는 것은 아니지만, 제주 여성들의
활동과 에너지에 대한 그의 인상은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다. 또 다른 외국인 A. A. Pieter는 1899년 The Korean Repository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제주는 한국의 시칠리아 이다.“ 거리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세 배 더 많고 그들은 본토 여자들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강하다. 그들의 얼굴 표정은 희망과 광채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얼굴을 돌리는 본토 여성 들과는 달리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Pieter 1899). 외부인들이 목격한 제주 여성들의 얼굴에 나타난 자신감은 발라드 노래로 표현된다.
그대여, 그대여, 솔직히
말해요 사람들은 당신이 천 마일 떨어져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당신이 그곳에 없어도 새벽은 밝아요 수탉이 없어도 새벽은 밝아요 나는 수탉과 당신
없이도 살 수 있어요 (Chae 1997, p. 59).
제주 여성들의 이러한 이미지와 정신은 필자가 녀들의 삶을 통해 이 장에서 전하고 싶은 것이다(사진1-2).
2. 한국의 카자흐인: 제주 남성
송성대는 샌즈가 여성의 가시성을 이유로 제주 사회를 아마존인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남성들 이 하는 일을 빼놓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편향된 것이라고 생각한다(Song 1998, p.
400).
송(Song)에 따르면, 제주 남자들은 과소평가되고 종종 "게으르다는 것" 때문에 비난을 받는다. 제주 사람들(특히 남자들)은 "대한민국의
카자흐인"이라 불려야 한다. 카자흐인은 "자유로운 사 람들"을 의미한다. 카자흐인들은 러시아 차르의 군인이었으며, 종종 명령에 저항하고 농노들에
게 부과된 "영혼세"를 지불하기를 거부했으며
기독교로 개종하기를 거부했다. 카자흐인들에게 그들의 저항은 단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모든
것과 관련이 있는데, 이는 조선 시대인 15세기 한반도와
일본, 제주가 형성한 삼각 해상에서 제주 남성들의 모험과 고난과 동 일하다(Song1998, p. 303). 여기서 말하는 것은 바다에서 삶을 영위하여
“바다 사람들”이라 “불렸던 포작(鮑作)이라 일컬어지는 제주 남성들의 용기와 반항 정신이다. 오랫동안 그들은 바 다에서 사는 이동하는 어부였다. 일부 외국인들이
상상했던 것처럼 그들은 해적이 아니었다. 그들은 4톤 무게의
배를 소유했고 비교적 부유했다(Song 1998, p. 404). 때때로 남자 잠수라 불린 포작에 대한 언급은 서기 1480년경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그들은 임금에게 세금을 내기 위해 사용된 지역특산품 중 하나인 전복(Song 1998, p. 287)을 따기 위해 바다 깊숙이 잠수했다. 17세기까지
전복을 따는 것은 포작의 일이었고 여자들은 해안에서 해초를 채집했 다. 14세기와 15세기에, 수 천 명의 포작들이 바다 유목민처럼 한반도 남쪽 해안을
돌아다녔 고, 그들이 잡은 해산물을 팔아 배 안에서 가족들이 근근히 생계를 유지했다. 포작의 유목 생 활 방식은 중앙정부의 세금징수와 나라 방어를 어렵게 만들었다.
포작에게는 조선과 항해술이 있었는데, 조선 왕조는 이들에게 세금을 내기 위해 전복을 잡는
것 외에도 배를 만들고, 지나 가는 배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보고하도록 명령하였다. 포작들은 또한 병사로 징집되었다. 제주 남자들은 힘든 노동을 피해
섬을 떠났다. "바다 유목민"의 현상의
저변에는 "말[馬]의
사 건"으로 알려진 것이 있었다. 한 제주 역사학자는
그의 저서에서 고려 시대 공식 기록에 기술 된 제주의 경제구조와 조선 시대 “바다 유목민”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 다(Yi 2013). 1276년
원나라(몽골족) 군대가
160마리의 말을 제주로 들여와 방목하였고, 1300 년에는 14개 말 목장을 세웠다. 1372년(고려 시대)부터 1451년(조선 시대)까지 약 10만
마리 말이 사육되었고 그 가운데 6만~7만 마리가 제주에서
사육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제주경제를 망쳤고 거의 한 세기 동안 인구가(말의 인구가?) 세 배로 늘어났다. 제주의 경제는 해산물 무 역에서 말 무역으로 바뀌었다. 원나라 다음에 세워진 중국 명나라가 2천 마리의 말을 조공으 로
바치길 요구했지만 제주 목축민들은 이를 거부해 300마리만 보냈다. 그러나
이 저항은 1375년 지방 유력 가문들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들은
고려 왕실 관직의 대가로 제주 말 경제 를 고려 조정에 넘겨주었다. 1390년 고려를 계승한 조선 왕조
또한 제주의 말 무역에 큰 관 심을 가졌고 1408년에 그것을 장악했다. 말을 길러서 본토 쌀과 다른 생필품을 얻기 위해서 말을 팔았던 제주 사람들에게 이 무역의 손실은 그들의 생계를
위협했다. 1434년 제주 사람 들은 제주 섬에서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떠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제주 사람들의 출륙금지령이 공포되면서 막히게 되었다.
17세기 초 반란을 보고하기
위하여 제주를 찾은 제주 목사 김상헌(1570~1652)의 기록인 『남 사록』에 따르면, 전복을 거두는 데 드는 부담은 포작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았다. 그는
중앙정부가 그들에게 요구한 공물의 양이 과도할 뿐만 아니라, 부패한 지방관료들이 자 신들을 위해 그들에게
요구한 것 또한 포작을 무겁게 짓눌렀다고 썼다. 제주 여성들은 포작과 결혼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포작의 70% 이상이 도망가거나 바다에서 익사했다. 따라서 이 기 간에 포작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남성 인구가 점차 감소하면서 제주 사회에서는 남성 가장의 개념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게 되었다. 1600년대에는 제주에 주둔한 조선군에 복무하는 여성 군사가 남자 군사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23])
1629년 제주 사람들의 본토로의 출륙금지령은 1830년까지 유효했다. 이 법은 많은 제주 사람들이 바다 유목민으로 생계를 꾸리는 것을 막 기 위해 고안되었는데, 이것은 제주에서 공물을 바치고 군대에 복무할 노동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남자 인구가 점차 줄어들면서 남자 가장에 대한 개념은 더 이상 제주 관습이 아니었다. 남자의 씨가 말라버렸다(Song 1998, p. 290). 제주
사람들의 한반도 출륙금지령은 은 15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초까지 최고조에 달했던 포작의 유랑하는 자유로운 정신을 억압 했다.
제주 연대기 저자(Cho
1979)는 제주 남성들이 눈에 띄지 않고 “게으르게 된”
것은 남성의 높 은 사망률뿐만 아니라, 가정과 마을에서 남자들의 노동이 간헐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에 있다 고 여겼다. 남자들의 간헐적인 노동은 요리, 육아, 가축 사육, 밭 갈기, 거름
주기, 말이나 소 를 끄는 수레로 수확물 운반하기, 파종, 집과 농기구 수리, 돌담 쌓기, 유급
노동, 특히 추수 기간 동안 추가 노동을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었다(사진 3-4). 탈곡은 여성 잠수에 버금가는 집단 노동 형태(수눌음)로서 임금 노동자들에게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마을 남자 절반 이상이
수입을 위해 그런 일을 했다.
제주 자연환경으로 인해, 여성들은 밭을 가는 일 이외의 모든 일을 해야
했으며, 반면에 남자 들은 아이를 낳는 것 외에 여자가 하는 모든 일을 해야 했다(Song 1998, p. 406). 또한, 남 자들은 조상 숭배 의례와
나중에 행정 업무가 가능해지게 되면서 사무적인 일에 대한 책임을 부여받았다. 남자들의 일은 "중요한 일"로 간주되었고, 여성들이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고 있음 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일은 "가외
소득"으로 간주되었다(Han 2005, p. 33). 이러한
우선 순위 매김은 제주 사람들이 내면화한 남성 우월이라는 신유교주의의 영향 때문이었다.
2016년 우도 현장 연구에서, 필자는
남자들이 대부분의 정부 직책과 다른 행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관찰했다. 그들은 "공인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의 "완장 찬 사람들"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직책들은 남자들이 중앙정부와 지역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는 다른 자원들과 같은 외부세계의 자금흐름에 관여할
수 있도록 하며, 이러한 연결들은 그들의 낮은 급여 외에 추가적인 수입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중앙정부는 우도 땅콩을 인증된 지역 상품으로 촉진하
기 위해 우도에 많은 돈을 할당했다. 마을 주민들은 땅콩을 팔기 위해 지어진 새 건물과 유명 한 요리사의
땅콩 조리법이 텔레비전에 광고된 것을 제외하고는 그 돈의 흔적을 보지 못했다 고 말했다. 남자들이 외부세계와의
연결로 수입을 창출하는 또 다른 예는 우도의 여객선이다. 현재 우도에는 3.8km 떨어진 제주항과 섬을 잇는 여객선 8척이 있다.[24])5
이 여객선들은 우도 를 찾는 관광객 수가 늘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구입되었다.[25])6
여객선들은 마을 출신 우도 남자들이 공동 관리하고 있지만, 여객선 구입 자금의 대부분은 녀들의 수입에서 나왔으며, 집과 같은 주요 품목을 구입할 때도 해당된다. 1920년대 우도 가족 역사에 따르면, 1920년대 우도의 가족사에
따르면 남자들은 섬을 떠나 전라남도와 같은 반도 남쪽 지역으로 가서 말과 해산물을 포함한 것들을 팔아서 소금과 쌀로 교환했다. 그들은 태풍을 만나면 물에 빠져 죽었
다. 1960년대 우도와
제주 육지 마을인 세화 사이를 항해하던 범선이 침몰해 6명이 익사했다.
남자들의 일은 해상 무역이었고 그들은 종종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남자들은, 농사를 짓는 것 외에, 잠수하는 아내를 도와서 아내가 해안으로 오면
잡아 온 것들을 끌어올리는 것을 돕 는다. 남자들은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지 않으면 아내와 가족에게
도움이 된다.
3. 제주 신화에 나오는 여성 이미지
제주 섬은 “1만8000여 명의 신과 여신의 고향”으로 불리며 제주 사회가 “여성 중심”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신전이 “여신 중심”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제주 마을 350여 개 무속 신 당 가운데 80%가
여신인 것으로 추정된다(Kim Jeong-Sook 1994). 제주 주민들은 신과 여신
인간과 같다고 본다. 즉, 신들은 인간처럼 태어나 삶의 고난을 겪고, 결국 신성을 얻는다. 제주 여신들은 제주 여성들처럼 끈질기고 독립적이다. 여신의 삶은 제주 여성의 삶을 대변하 는데, 이는 제주 출신이 아닌
사람들도 주목하는 부분이다. 제주 토박이 아닌 우도 주민인 한 여배우가 농업 여신에 대한 제주 신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을 보고 겪은 문화 충격에 대해 이 야기해 주었다. 이 연극에서 여신은 상반신이 거의
벌거벗은 채 들판에서 일하는 늙은 여자로 등장한다. 그녀는 거기서 강간당하고 임신하고 장애아를 출산한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나 장 애아이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것을 사심 없이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포용하며 계 속하여 삶을 살아간다. 이 여배우는 그녀의 고향인
보수적인 신유교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강 하게 받은 본토의 남쪽 지방에서는 이러한 여성의 이미지와 이와 같은 이야기를 묘사하는 것 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여배우는 또한 그녀를 놀라게 했던 또 다른 마을 신당 신화 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것은 세 딸을 둔 신과 여신 부부의 이야기이다. 그 부부는 매우
부유 했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부부는 딸들에게
부와 행복한 삶이 누구 덕분이냐고 물 었다. 첫째 딸과 둘째 딸은 부모님 덕분이라고 말했다. 셋째 딸은 그 모든 것이 그들의 생식 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부모는 셋째 딸을 내쫓았다. 그리고 그들은 부를 잃고 가난해 졌지만,
결국 그들은 셋째 딸의 도움으로 모든 것을 되찾았다.
제주 여신들은 세상 창조와 마을 설립에 참여했으며, 마을의 분리나 확장에
큰 영향을 미친
다. 여신들은 출산, 질병
치료, 농업, 부, 장수, 행복을 담당한다. 여신들은 가족,
마을과 후손, 그리고 녀들을 보호한다. 마을 생활에서 제주 여성의 역할과 비슷하게, 신화에서 여신들의 역할은
신들의 역할보다 훨씬 다양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마을 주민들의 삶에서 더 중요하다. 신화에서 신들의 역할은 보통 공식적인 제도, 공공 질서 유지 또는
물리적 힘과 관련이 있다
(Kim Jeong-Sook
1994, p. 214).
제주 무속 신화는 여신들의 탄생 이야기가 풍부하다. 이 이야기는 보통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노부부로 시작하고 결국 딸이 태어난다.
이 딸은 한반도에서와 달리 매우 소중하다. 딸은 자 라서 많은 시련을 겪고 집을 떠나거나
결혼을 한다. 고난과 배고픔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헤 매는 가운데, 신성한
부부는 "땅과 물을 나누어" 가른다. 이것이 보통 마을 분리와 확장의 이 유이다(Mun 1993, p. 58). 예를
들어, "송당 여신의 기원에 대한 설명"(송당
본풀이)[26])라고
불리는 한 신화에서, 사냥꾼이었던 송당 마을의 토착 남성 신이 다른 곳에서 온 한 여신과 결 혼한다.[27])
그들은 18명의 아들과 28명을 낳았으며, 마침내 378명의 손주를 두었다.
남편의 사 냥은 모든 아이들을 먹이기에는 충분하지 않았고, 여신은 남편이 농업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 하고 여신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아내의 권유로 남편은 황소로 밭을 갈기 시작한다. 남편 은 아내가 준비한 점심을 지나가는 이웃에게 주고, 배가 고프면
함께 쟁기질을 하던 소와 이 웃의 소를 먹는다. 아내는 화가 나서
"땅과 물을 나누며" 갈라서자고 제안한다. 이 이야기는 양보를 모르는 아내의 엄격한 삶의 원칙을 보여준다: 아내는
남편과의 친밀한 관계에도 불구 하고 남편이 비현실적이고 그들이 어떻게 생존할지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편을 떠 난다. 그것은 또한 현실적인 창의성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지닌 여성들의 삶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이야기는 또한 마을 신당의 신과 여신이 되는 28명의 딸, 18명의 아들, 378명의 손자들
사이에 땅과 물을 균등하게 나누면서 분리와 확장에 의해 마을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묘사하 고 있다. 분리의 근거는 첫째 아들에 대한 선호 없이 세대와 성별 간의 평등이다. 그것은
제 주에서 사냥에서 농사로의 전환, 가난과 배고픔을 극복하기 위해 농업을 위한 농경 마을 건 설, 수렵과 농경 생활 방식 간에 갈등, 여성들이 가족을 부양하고 부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 는데 직접 관여하는 이야기다. 제주 가족 제도는 아이들을 위해 독립적인 분리 단위를
마련하
여 자립, 개성, 평등주의, 공동체 의식이라는 제주 사람들의 독특한 체계를 보여준다(Kim
1994, p. 213).
4. 녀에 대한 학술 논쟁
제주 녀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 녀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서로 다른 견 해들이 있다: 어떤
이는 녀를 교육받지 못한 주부나 물질해서 가외의 수입을 버는 지위 낮 은 노동자로 여겼다. 녀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시각은 녀들이 조선 시대의 "덕을 갖춘 여 성“이라는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는 신유교주의적
편견에서 비롯되었다. 1970년대까지 녀들 은 서양 수영복과
비슷한 면으로 만든 전통적인 물옷(물소중이)(사진5, 6)을 사용하였다. 이런 복장을 하고 몸을 많이 드러내는 여성들은
신유교 이데올로기에 세뇌된 사람들의 눈에는 '천 한 존재'로
비쳤는데, 신유교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여성은 온 몸을 가릴 뿐 아니라 집 밖에서 일해서는 안 된다(사진 7). 여성에 대한 제약이 무너지고 권력이 한 성(性)에만 배분되지 않는 오늘날에도 제주 녀의 이미지는 ”전형적인 일하는 여성“으로 섬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 는다. 그들은 지속적이고 관습적인
고정관념에 따라 "낮은 계층", "교육받지
못한" 또는 "단순 한 주부"로 분류된다.(Oh 1998, p. 25). 이러한 고정관념의
기저에는 녀 공동체가 일반적으 로 경제와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중요한 역할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편견이 깔 려 있다(Han 2005, p. 102).
이와 반대되는 견해는 녀들을
초기 여성 직업군 중 하나로 간주했다(Min 1964). 녀에 대 한 현장 연구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인류학 연구 또한 최초의 젠더 연구였다. Cho(1979년) 는 녀 공동체에서 노동의 성 분할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녀가 조사한 녀 공동체는 “어느 쪽 성도 지배하지 않는” 특징을 보였다고 보고했다. 이 연구는 가정, 지역 경 제, 마을 생활 관리에서
녀들의 중심적인 역할을 충분히 인정하여 녀들의 사회적 지위를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하였다.[28])9
5. 역사적 배경
녀가 언제 제주에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녀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이야 기들이 여러 기록에 있다. 한 자료에
따르면, 녀들은 동남아시아 출신으로, 일본 해안과 제 주
섬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탐라 왕국의 해산물에 대한 자료는 또 다른 가 설로 이어졌다: 고려사절요(고려 역사서,1055년)에서, 탐라국의 왕자는 그의 아들을 보내 소라 껍데기와 같은 해산물을
고려 왕실에 공물로 바쳤다. 같은 책에서 1079년 탐라로
보내진 고 려 관리가 큰 진주 두 개를 임금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 책에는 1276년 원나라(몽골족) 사신
진주를 찾으려다 성공하지 못하자 제주 주민으로부터 진주 100개를 강제로 빼앗았다는 내
용도 나온다(우도지 2007년, p. 537). 이런 기록들에는 잠수들이 수확한 해산물이
언급되어 있지만 잠수들의 성별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Han 2005, p. 58). 녀를
최초로 언 급한 기록 중 하나는 1629년 제주 목사가 쓴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제주 기후
기록서)에 나온다. 이 기록에서 제주 목사 이건(李健)은 녀들이 거의
벌거벗고 있었기 때문에 녀들을 "천한 존재"라고 불렀다. 그는 여자와 남자가 함께 바다에 잠수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을 시 행했다. 나체에 대한 그의 통제는 남자와 여자가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고, 사방이 막힌 같은 공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신유교주의 도덕성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벌거벗은 상 태가 물속에서 훨씬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작은 옷 조각의 무게조차 물속 깊이 잠수하기 위해 버려야 했다. 그것은 또한 상어의 공격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일본 잠수들은 제주 잠수들보다 옷을 적게 입었다(사진 8).
1694년 제주 목사
이형상은 1620년대까지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된 포작을 대체하기 위해 여성 들에게 전복을 잡는 기술을
가르칠 것을 제안했다. 녀는 이형상 목사가 작성한 공식 기록인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
처음 등장한다(사진 9a~9b). 이렇게 해서 조선 중앙
조정은 남자 잠수들이 제주 해안을 떠난 아후 녀를 활용하여 수산물을 공물로 얻고자 하는 방안을 마련
하고 있었다. 이형상은 또한 "정화 운동"의 일환으로 무당 신당과 절을 불태우고 400명의 무 당들을
강제로 농민이 되도록 명하였다(1702). 이 목사와 그 가족에게 일어난 재난에 대한 많 은 전설들이
있다. 이 전설들은 제주 사람들이 저항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6. 해안 마을과 농촌의 사회-경제적 여건
해안 마을 여성들의 경험은 신유교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뿌리내렸던
산간지역 농촌 마을 여성 들의 경험과는 사뭇 다르다. 이 여성들은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이 매우 달랐다. 해안 마을 여성들은 농촌 마을 여성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했다.
산간지역 여성들의 삶은 잠수하지 않는 것 이외에는 힘든 노동의 측면에서
해안 마을 여성들 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유교의 강한 영향을 받은 산간지역 여성들의 생각은
본토 여 성과 비슷했으며, 녀들이 신유교 이데올로기의 “덕
있는 정숙한 여성”의 이미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얕봤다.
먹거리와 다른 기본적인 필수품을 거래하는 것 외에는 이들 여성 그룹 간에 만남이 많지 않았다. 농촌
여성들의 생활 방식은 전통적이고 제한적이었다. 해안 마을 여성들은 더 많은 종류의 일을 했으며 더 많이
여행을 다녔다. 그들은 똑같은 농사 를 지었지만 생존을 위해 바다에 잠수하기도 했고, 때로는 섬을 떠나기도 했다. 녀들이 제 주 경제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시대는 일제강점기였다. 당시 제주의 수익이 모두 녀들의
노 도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국내 활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 큰 상 업적 규모로 제주 경제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1910년 가공 해산물을 생산하는 일본 회 사가 있었을 때 녀들이
원료를 그 제공하고 있었다.
7. 물질로 제주 경제 지원: 섬을 떠나 이동하면서
1876년 한일조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은 한국으로 관심을 돌렸고 일본 어민들은 한국 어장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880년 당시 일본 해녀들이 137척의 어선을 보유해 매달 200여 관(120 ㎏)의
전복을 잡으면서 제주 녀들의 어획량이 급격히 줄었다. 1883년까지
일본인들은 제주 주변 바다에서 합법적으로 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그들은 제주 녀들이 평소에 잡는 전복의 10분의 1을 잡고 있었다. 동시에, 일본
상인들은 해녀들에게 그들의 어획에 대해 현금을 지불 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부터, 제주 녀들은
일본 잠수선의 남획으로 인한 해양생물의 부족이 원인이 되어, 제주 사람들이 외부세계와 구축해놓은 의사소통
덕택으로 비수기(3~9월)에 섬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 이주는 1880년에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일본, 그 다음에는 한반도의 남 쪽(1887년
최초로 부산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중국과 러시아(칭타오, 다렌, 블라디보스톡)까지
진출했다.[29])10
1970년대에 여자들에게 임금이 지급되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제주 관광과 감귤 농사의 발전으로 새로운 수입원이 생기면서, 이러한 이주는 중단되었다(Hur 2002). 조선시대 에 시작된
시장경제가 이제 발전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녀는 자본주의
이전의 경제 구조에 서 산업 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집단이다(Oh 1998, p. 96). 일제
식민주의와 자본 주의 아래 자본주의 생산 방식으로 일하는 숙련된 녀들이 등장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녀의 이미지는 일본인들과 함께 들어온 자본주의
이전에 존재했던 녀들의 이미지와 같지 않 다. 일제강점기
동안 제주의 모든 수입은 녀들의 벌이에서 나왔고, 녀들은
무려 2만 5천
명에 달하였다(Han 2005,
p. 40). 서구의 영향력이 커지면서[30])11 돈이 중요해졌고 여성들은 제주 섬 밖에서 물질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필자가 우도에서 만난 많은 녀들은 고향을 떠나 물질해서 번 돈으로 집을 지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보다시피, 녀들의 경제활동은 단 순한
집안의 과업이 아니라 더 크고 더 상업적인 규모로 제주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었다. 그들은
기술과 조직 경험을 갖춘 새로운 직업군이었다.
1900년까지 녀들은 무시당했고 그들이 사회에 기여한 경제적 공헌은 인정받지 못했다.
1937년까지만해도 내륙 마을 남자들은 해안 마을의 녀들과 결혼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풍습은 해안 지역이 더 부유해짐에 따라 점차 바뀌었다. 녀들의
경제활동은 강제부역(조 선 시대 공납제도 당시
노예노동)에서 일본 무역의 시작과 함께 현금수입을 제공하는 상품 활 동으로 변하였다. 이런 변화의 이유(녀 활동에 부가된 가치)는 그들이 해산물에 매겨지는 높 은 가격과 과 같은 어업 기술의 향상에 있었다(사진 10–11).
이러한 변화의 이유(다이버들의
활동에 부가된 가치)는 그들이 해산물[31])12에 대해 지불받은 높은 가격과 잠수를 위한 고글의 사용과
같은 어업 기술의 개선으로 그들의 어획량을 증가시 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사진 10-11).
8. 녀들의 항일운동과 독학
1920년대 말 일본 식민 지배 아래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격랑처럼 밀려들었고 무정부주의 이 데올로기가 한반도를 관통하여 폭풍처럼 진격해왔다. 초기에는 민족주의로 여겨졌던 항일운동 이 좌익운동으로 변했다. 이러한
사상들은 제주에 전해져서 비밀리에 전파되었다. 우도에는 좌익 사상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몇몇
남자들이 있었는데, 이 사상은 나중에 공산 주의 이데올로기라는 라벨이 붙었다. 우도 출신으로 교육을 잘 받은 신재홍(1899년생)은 1914 년에 설립된 야학(영명의숙)에서 “우도의 세 천재”로
알려진 두 친구와 함께 녀들과 농민들 을 조직하여 그들의 권리와 자기 보호의 중요성을 가르쳤다(Udo-Ji 1996)(사진 12). 그의 철 학은 "아는 것이 힘이다"였다. 그는 녀들의 항일 투쟁을 이끌었고 1932년에 이 일로 5년 동 안 투옥되었다. 야학은 김씨 일가(필자의 집주인 할아버지) 사람 중 한 명인 우도 주민의 집에 서 시작됐다.34)13
우도의 세 천재 중 한 명이 녀들의 일본 저항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녀 노래'를 작곡했다(사진 13).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제주도의 가이 없는 녀들 불쌍한 살림살이 세상도 안다. 추운 날 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 저 바다 물결 위해 시달리는 몸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 우는 아이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 하루
종일 헤엄치나 번 것은 기막혀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
이른 봄 고향산천 부모형제 이별하고 온 가족 생명줄을 등에 다 지어 파도 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각처 울산(조선)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
배움 없는 우리 녀 가는 곳마다 저 몸들은 착취기관 설치 해 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도다. 가없는 우리 녀 어데로
갈까.
그 다음 세대인 두 사람(1918년 우도 태생인 고성화와 일본군을 피해
우도로 건너와 우도 여 성과 결혼한 1920년 조천 태생인 김시원)이
있는데, 이들은 좌익 운동과 주민 교육을 계속 이 어가면서 투옥과 고문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이 두 사람은 우연히도 하우목동 김씨 일가의 괸당이었다. 고성화의
생일은 섬 외부에서 온 추종자들이 매년 우도에서 기린다(사진
14~15). 그의 저서는 지식만이 선이고 무지는 악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그의 세계관을 설명한다(Ko
2005). 제주 공산주의 조직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청년과 여성의 이데올로기 교육을 위 해 마을마다 야학을 세워 잠녀의 문맹을
없애고 그들의 계급의식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그가 본 문제는 제주 가족들이 생존을 위해 녀들에게 의존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바다가 국가 의 재산이라고
주장했고, 정부의 어업 협회가 그들의 어획물을 팔았기 때문에 이 여성들은 힘 든 노동에 대한 보상을
거의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녀들의 항일운동은 1932년초
우도 맞
34)
은편 해안 마을 세화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우도는 이 운동의 리더들이 녀들이었고 그 들 대다수가 우도 출신이었기 때문에 항일운동이 시작된 곳으로 볼 수 있다(사진 16). 한 하 우목동 마을 주민(필자의 집주인 어머니의 언니인 86세 양 모씨)의 말에 따르면, 우도의 하우 목동과 전흘동 두 마을 사람들이 특히
교육을 잘 받았고 정치 의식이 높았다고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일본의 녀 착취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양 모씨의 시어머니는 우도
마을 출신으로 친구들과 함께 1932년 시작된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위에서
언급한 고(故) 신재홍은 양 모씨 언니의 남편이었다.
녀의 항일운동은 한
마디로 정의 내릴 수 있다: 일제 착취 정책에 저항하고 일본 정부에 맞 서 일어난 전문 여성 노동자들. 이 운동은 한국인들이 긴 칼을 허리에 찬 일본 경찰을 두려워 하던 1932년
사회 환경에서 이례적이었다. 녀들은 시위를 벌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 경찰서 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런 종류의 사건으로는 제주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최초의 사건였 다. 이런
시위에 참가한 녀의 수는 1만7130명으로 알려졌다. 그것은 약
280회 집회를 포함 한 대규모 장기 항일 투쟁의 일부였다.
1932년 1월 7일, 하도리 마을에서 300명의 녀들이 세화 시장을 향해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
다. 그들의 손에는 호미와
고기잡이 그물이 들려 있었고, 어깨에는 점심 가방을 매고 있었다. 세화
옆 마을의 녀들이 합류한 후, 이들은 일본 도사(島司, mayor) 집무실로
행진하며 자신 들의 요구를 수용하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요 요구사항으로는 녀
어획물은 일본인에게만 판매할 수 있다는 규제 철폐, 녀 조합비 폐지,
제주 목사(governor)의 조합장
직위 해제, 반값만 주는 일본 상인들에게 어획물 판매를 거부할 수 있는 능력 등이 있었다. 당시 도사(島司, mayor)는 겁이 나서 그들의 요구 를 처리하겠다고 약속했고
녀들은 해산했다. 그러나 녀 조합이 “미리 정한 가격” 정책을 이어가자
녀들이 격분했다(Park 2007). 일주일 후, 또
다른 300명의 녀들이 호미와 낫과 5일분 식량을 싣은 10척의 범선을 타고 우도를 떠났다. 우도와 우도항 맞은편 성산항 사이 수 로는 바람이 불지 않을 때에도 매우 거칠다. 1월에 바다는 겨울 폭풍으로 더욱 거칠다. 각 배 마다 30명씩 빽빽이 탄 녀들은 시위에 도착하기도 전에 목숨을 각오하고
있었다(Ko 2015). 그 날 시위에는 녀 1000명이 목사 집무실 앞에 모였다. 일본 경찰은 군중들을 겁주기
위해 경고 사격을 했고 한 경찰이 녀의 목에 검(劍)을 들이댔다. 녀들이 외쳤다:
"만약 우리의 요구 때문에 그 칼로 우리를 대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죽음으로 너희를
대할 것이다."(사진 17-18). 목사(governor)는 경찰에게 주모자인 하도리와 우도의
야학 청년 교사들을 체포하라 고 명령했다. 1500여명의 녀들이
도로를 막으려 했으나 40여명의 교사와 녀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녀들의 저항운동이 일제의
연구에 빌미가 되었다고도 한다: 일제는 1930년대[32]) 제주 녀
들과 그 마을들을 연구하기 위해 학자들을 파견했다(Oh 1998). 특히 일제강점기 동안 녀들 이 제주 사회에 대한 끼친 공헌은 충분히 인정 못 받고 있다.
9. 녀 세계와 가치 체계
"불 피우는 곳"인
불턱은 녀들의 민주주의 세계와 그들의 가치 체계를 상징한다. 불턱은
바 다 근처에 있는 돌담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하늘을 향해 열려 있다(사진 19). 녀들은 바닷가 로 올라오자마자 불 주위에서 젖은 몸을 말린다. 불턱은 녀들이 모이는 곳으로, 이 곳에서 녀 공동체가 유지되고 젊은 세대에게 지식과 기술을 전수한다. 불턱은 전통적인 제주 녀 공동체의 상징한다. 공간으로서의 의미와는 별개로, 불턱은 현재 녀회의 기원적인 장소를 제공했다. 불턱은 토론과 회의, 녀 공동체의 관리와 유지를 위한 공간이다. 남자들은 그곳에 허용되지
않았다. 불턱은 정보를 공유하고, 쉬고, 이슈를 논의하고, 언제 잠수할지,
언제 작업 을 중단할지, 그들이 잡은 어획물의 시장 가격이 얼마여야 하는지, 마을의 큰 행사를 준비하 기 위하여 언제 물질을 쉴지 결정하는 자리였다. 불턱은
엄격하게 지켜지는 녀 서열에서 상 징적인 역할을 한다. 녀
공동체는 그 집단성을 유지하기 위해 조직에 대한 규정을 정했다. 물질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지지만, 무엇을
잡느냐는 것은 개인의 기술과 실력에 달려 있다. 녀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물질 실력에 따른 세 가지 지위가 만들어졌는데, '높은 단계
'(상군), '중간 단계(중군)', '낮은 단계'(하군)로 되어 있다. 그것은 녀의
실력과 경험 연수에 달려 있다. "높은 단계" 녀의
생산성은 "낮은 단계" 녀( 가끔 아기 녀라 불리는)의 3~4배 이상일 수 있다.36)15 상군(높은 신분) 중에 가장 경험이 많고 평판이 좋은 연장자는 가장 중
요한 리더이며 존경을 받는다. 이런 서열은 녀들의 직업이
강도 높은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 을 의미한다. 물질(diving)은 녀들이 목숨을 걸고 하는 수중 생존
활동이다. 훈련을 통해 녀들은 사고를 최소화하고, 공동체가 협력하여 녀들이 물속에서 서로 보호할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한다. 만약 불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제주 녀들은
공동체가 아닌 개인 으로 일하면서 그 지식과 기술을 대대로 전수했을 것이다. 오늘날 불턱은 옷을 갈아입기
위한 건물로 부엌과 쉴 수 있는 방이 있지만, 공동체를 다스리는 규칙은 변하지 않았다(사진 20).
녀들은 바다를 집단적으로 소유하며,
바다에서 채취한 것은 공유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 은 바다의 용 여신인 요왕할망 여신을
한 조상으로 하는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녀들은 조상 에게 씨앗을 돌려주는 무속 의식을 치르고 농부가
흙을 뒤집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바다를 청 소한다. 바다의 천연자원을 보호하는 집단생활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시장경제이론에서 근본 적으로 벗어난다. 그들의 신화적인 조상-후예
관계는 단지 상상의 관계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 사이에 관계의 모델이다(Kim 1999a). 녀들의
세계는 평등주의 원칙, 상호도움, 능력 인정, 근면성과 실용성을 바탕으로 한 재정적 자율성, 결단력과 경쟁력을
지니는 “자연과 인간의 공 생”(Cho 2016) 중에 하나다. 한 인류학자가 그린 맞은편 그림은 녀들과 바다의 여신과 마 을
무속 신당 간에 신화 속 조상과 얽힌 관계를 나타낸 도표이다(사진.
21)..
안(Ahn)에 따르면, (땅과 바다의) 신들 사이의 관계는 혈통(descent)?과 혼인의 관계로 나타 난다. 혈통(descent)의 관계는 땅이나 바다의 경계 내에 제한된다. 땅과 바다의 영토가 소통 하는 것은 혼인을 통해서이다. 땅의 신들은
바다 신들의 파트너로서 마을 신당 안에 모셔진 다.
바다의 신들은 또한 녀들의 신화적인 조상이 된다. 다시 말하면, 몇 가지 개념이 녀
들과 바다와 땅의 신들 사이의 관계를 구성하고 있다. 결혼과 이주라는 개념은 바다에서 땅으 로 이동하는
데 사용되며, 혈통(descent)?과
잠수 작업이라는 개념은 땅에서 바다로 이동하는 데 사용된다. 특히,
녀들은 몸을 이용하기 때문에, 그들이 바다의 상황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들은 해류와 바람의 방향을 면밀히 살필 때까지 바다에 들어가지 않
36)
는다. 그들은 수년간의
물질 경험을 통해 수중 지형과 바람의 세기와 방향(그림 22)은
물론 수중 생태학과 바다의 계절 변화, 그리고 그들의 몸을 바닷물 속 현재의 조건에 적응시키고 숨을
참는 방법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다(An 2008, p. 273). 숙련된 녀일수록 더 오래 일할 수 있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이러한
기술 외에도, 물질을 잘 하는 녀를 만드는 자질 은 큰
폐활량, 추위를 견디는 능력, 그리고 이타적인 되는 정신력이다.
천연자원 고갈 문제는 녀들이
직면한 문제다. 산소탱크를 사용하면 녀들이 물속에서 더
오래 머물고 더 많이 채취할 수 있지만, 녀들은 해양 생물의 고갈을 피하기 위해 산소 탱크 를 사용하지
않는다. 땅에 씨앗을 심고 농작물을 수확하는 농부들처럼, 녀들은
농부들이 하 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전복과 소라 같은 해양 생물의 씨앗을 심고 해저에서 수확물을 거둬 들인다(사진23~25). 녀들은 천연자원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이렇게 한다. 바다
속에 씨앗을 뿌리는 이런 행위는 매년 바다의 용신에게 풍작을 기원하는 녀들의 무속 의식에서 묘사된다(4장
참조). 개인의 행운이 공동체의 행운을 능가해서는 안 된다.
10. 공동재산으로서의 어장(바다)
녀회는 개인들이 운영하는
공동의 목적을 위한 조합으로 묘사할 수 있다. 마을은 소위 말하 는
"바다 밭"을 공동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그 공동체 소유이며, 그것에 대한 공동 권리와 그 것을 관리할 의무가 있다(예를 들어, 그것을 청소하고 씨앗을 심는 것)(사진 26). 녀가 작업 중 익사하면 녀들은 작업을 멈춘다. 만약 시신이 즉시 발견되지 않으면 녀들은 함께 시신 을 수색하여 장례식을 치른다. 만약 시신이 발견되지
않으면 죽은 사람의 영혼을 죽은 자의 땅으로
보내는 무속 의식을 치르고 바다의 액운을 씻는 의식을 치른다.
부(富)의 초석(礎石)은 녀 개개인의 기술과 작업 능력이 아니라 보존해야 하는 천연자원이 다. 녀들의
세계관에서는 개인의 수입과 공동 수입 사이에 공평해야 한다. 녀회는 작업하 는 날을 결정하고, 함께 바다로 들어갔다가 나온다. 바다는 모든 녀들에게 천연자원이며, 바 다로부터 얻은 부는 공평해야 하는데, 이것은 진행 중인 천연자원과 바다로부터 얻은 수입 사 이에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오늘의 수입이 천연자원을 고갈시켜서는 안 된다. 이런 개념은 한
마을어촌계의 모토인 "공동생활, 공동이익, 공동운영"에서 볼 수 있다 (An 2009). 제주 녀들의 탐욕에 대한 금기와 천연자원 보존을
위한 무속 의식은 그들이 공동선을 보존하고자 하는 바람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탐욕의 위험”과 “부의 평등”(An 2008,
pp. 277– 278)의 두 축을 가진 이 철학은 제주 사회의 도덕적 중추이다. 불문법은
다양한 능력을 지닌 녀들 사이의 관계를 규제한다: 바다
속에서 작업할 때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들과 규칙을 어 길 경우 생존 수단의 상실을 가져오는 물질할 권리를 잃을 가능성이다. 이것이 녀들이 개인 수입을 올릴 수 있는 바다 속 해산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서로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다. 또한 그들은 녀로서
현재 낮은 지위가 언젠가 높은 지위가 되고, 높은 지위의 녀는
나이 가 들면 낮은 지위가 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사진 27).
이것이 구성원들 간에 잦은 갈등 에도 불구하고 녀회가 지속될 수 있는 이유다. 녀회의 보존은 연속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녀 개개인의 생존과
안녕을 지원하는 선택이다(An 2008, p. 279).
11. 녀들의 규정
물질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공동으로 작업하는 것과 규정이 필요하다. 녀회는 수입을 올리는 직업군이지만 또한 윤리적 가치도 가지고 있다. 녀회
규정 중 일부는 녀의 나이나 지위, 그리고 그들의 녀회에 기여한 것과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불턱에서 연기가 나지 않 는 곳은 가장 좋은 자리로 연장자 녀를
위한 자리이다. 또 다른 예로는 물질 작업을 할 때 나이든 녀들에게는
안전한 해안을 할당한다. 이런 지역들을 "어르신들을
위한 해안"라고 부 른다. 녀들의 수입 중 일부는
자녀 교육, 학교 건립, 월급 없이 지역사회 일을 맡아보는
마 을 이장에게 기부하는 것과 같이 지역사회 사용을 목적으로 저축된다. 물질 규정 중 일부는 일정 기간동안
물질을 자제하고 동료 녀가 익사하면 무속 의식을 거행하는 것을 포함한다. 바다 속 합법적 활동은(제주 녀
규정에 따라), 본인의 집이 있는 마을에 살고 있는 여성에게 만 허용된다. 녀가 결혼하여 마을을 떠나면 그 마을에서 물질할 권리를 잃는다. 새로운 녀가 마을로 이사 오면, 회비를 내야 하는데 이것은 실력 수준에
따라 다양하다. 예를 들어 바다 잡초 제거에 참여하지 않거나, 금채
기간에 잠수를 하거나, 바다에 떠내려온 시신을 처 리하는 것 등 규정을 어길 경우 회원 자격이 박탈되거나
벌칙으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야 한 다. 조수의 패턴에 따라 입어 시간을 다시 정한다.
잠수복을 입을 수 있기 전에, 녀들은 무명으로 만든 “물옷(물소중이)"를
입었다. 이 옷을 입 고 녀들은 겨울에는 최대 30분, 봄부터 초가을까지
40~60분 정도만 잠수할 수 있었다. 그 들은 조류에 따라 격주로 15일에서 20일 동안 잠수했다. 물속에서의
시간은 30초에서 60초,
최대 2분까지 다양했다. 녀들은 2분마다 수면으로 올라와 숨을 고르고 물속으로 돌아와야 했다. 노련한
상급 녀는 20미터 깊이까지 잠수할 수 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잠수복과 ”물 갈퀴“(오리발)이 일본에서 수입되었다.
19세기 초 고무테가 있는 유리 고글이 소개되었다. 그 이전에는 처음에는 작은 고글, 그 다음엔 금속테로 된 큰 고글이 사용되었다. 안을 긁어내고 말린
큰 호박으로 된 테왁이 부표로 사용되었다(사진 31). 나중에
이것들은 스티로폼 부표로 대체되었다. 녀들은 어획량을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 산소 탱크와 같은 현대적인
장비를 사 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무
잠수복과 물갈퀴로 녀들은 물 속에 더 오 래 머무를 수 있다(사진 32-34). 2016년에 그들은 역사상 90분과 비교하여 4시간에서 7시간 사이를 잠수하고 있었다. 이 개선된 장비와 더 많은 시간 동안 잠수할 수 있는 기량은 녀들
어획량을 늘리고 돈을 더 버는 데 도움을 주었다(사진 35-36).37)16
그러나 영양 부족, 과로, 소화 장애로 인한
고혈압, 신경통, 눈의 문제 등 많은 건강상의 문제도 있었다. 소화장애는 조
수에 따라 잠수하기 하기 때문에 규칙적인 시간에 식사를 할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된다(사진
37-38).
12. 녀들의 남자들
제주는 여성의 섬이라고 불린다. 통계적으로 여성이 더 많다. 제주 섬은 여성 기운(음)이
남성 기운(양)보다 강하기 때문에, 제주에서 남자들이 그다지 잘 되지 못한다고들 한다. 이 때문에 우도
바다 근처에는 젊은 남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많은 돌탑이 세워졌다(사진 39~40). 외부 로부터의 나쁜 기운이 남자들의 목숨을 앗아간다고들 한다.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일을 훨씬 적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일찍 죽는 경향이 있다. 필자는 우도에서 남편이 40대에 죽고 또다시
37)
아들이 40대에 죽은 녀들을
많이 만났다. 우도 주민들은 남자들이 일찍 죽는 것은 과음, 만
성적인 도박이나 다른 불운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겨울에 우도에서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많은 남자들은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해서 건강을 해치는 경향이 있다. 남자들은
종 종 빚까지 진다. 많은 녀들의 성공담은 대개 다음과
같다.
(1) 남편의
빚을 모두 갚았다.
(2) 아이들
교육비를 대서 학교 공부를 시켰다.
(3) 아이들은
이러이러한 회사나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4) 아들에게
집을 사주었다.
(5) 노후를
위해 작은 집을 사두었고 누구에게도 의지할 필요가 없다.38)18
녀와 그녀들의 남자와의
관계는 다소 모호하다. 여자가 남자에게 일을 시키면 안 된다는 규 범이 있다: "존경받는" 여자는 남편의 도움 없이 성공적으로
가정을 꾸려 나간다. 남자의 게으 름은 악이 아니다. 귀한
남자는 일을 하지 않는다. "제주 남성의 약 70%가
제대로 된 직업을 갖고 있지 않다."(Cho 1979년). 이것은 1970년대 후반 우도의 상황이었고 2016년에도 많이 같아 보인다. 이것은 남자가 돕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사진 41-42). 그러한 규범 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섬에서
남자들의 부족과 짧은 생이 남성 우월의 신유교주의와 결합되어 이런 규범을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40대
중반 한 남자는 이 런 해석에 동의했다. 그는 "남자에
대한 존중은 아마도 그들이 '씨앗 제공자'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도에서 노인들을 위해 발
마사지를 해주는 한 젊은 정부 사회 복지사 의 말에 따르면, 남성의 발은 여성의 발보다 더 부드럽고, 해녀들의 발은 동물 가죽처럼 딱딱 하다고 한다.
13. "숨을 내쉬며": 제주 사회의 도덕적 충추인 녀들의 용기와 지혜
녀 노래에서 녀들의 고난과 그들이 받아들인 책임감 그리고 그들의 남자와의 애매한 관계 를 듣고 느낄 수 있다. ******** 자료 확인하여 번역 하기 연인의 노래(남성/여성의
관계를 드러냄): 퐁당, 퐁당 (잠수에서 나는 소리)
잠수하자 황금 조개껍데기와 은 전복 다 잡자. 내 애인을 대접하기 위해...
녀들의 힘든 일에 대한 남편들의 무관심한 태도를 한탄하는 노래:
불행히도 그런 것 같아 물속의 유령처럼 다이빙과 다이빙 아웃 여기 강한
급상승이 있습니다.
38)
그냥 무시하고 계속 잠수하자.
집에 있는 남편들 술과 담배 우리의 노고를 알지 못한다.
남편과 아기를 그리워하며: 우는
아기를 남겨두고 사랑하는 남편을 두고 떠나다 다이빙하러 왔어요 돈이 더 나은 삶을 만들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버는 것 어린이를 부양하다 돈 때문이 아니라면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지? 사랑하는 남편에게서 떨어져 우는 아기에게서 떨어져요.
이
장에서 제주 사회에서 녀들이 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벌거벗은 몸'으 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제주에서
생존을 위해 노력했고, 섬의 혹독한 자연 환경과 조선 중앙조정의 수탈과 일제의 식민지 행정에 맞섰다.
"호오~이" "호오~이" "호오~이"
(숨비소리, 단숨에 숨을 내쉬는 소리)는 녀들이 짧은 시간에 최대한 숨을 들이쉬기 위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내는 숨소리이다. 숨비소리는 이 섬에서 살 아남는 소리, 생존의 소리이다. 녀들의 용기와 지혜, 자연과의 균형과 공생을 잘 지키는 훈 련이
이들이 제주 사회의 도덕적 중추가 되고 자리 잡게 하는 자질들이다. 그러나 녀의 수 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고, 고령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우려가 있다.39)19 1970년대에 는 많은 녀들과 시골 여성들이 관광과 감귤 산업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고, 젊은
사람들은 잠수하고 있지 않았다. 2016년 유네스코가 녀문화를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이 녀 의 문화유산인 그들의 용기와 힘을 다시 제주로 가져올 수 없다. 제주
사회에서 지속되도록 되살리고 장려해야할
것은 바로 녀들의 도덕적 가치들이다.
주석
1. 아기를 출산한 해녀들은 '배에서 태어난 아기', '도로에서 태어난 아기', '강에서 태어난 아기' 와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2. 이 조선기술은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주변 왕국은 제주(당시 탐라)를 두려워했다. 삼국유사에 의하 면,
신라 왕비 황룡사 9층 탑을 세웠다. 이 탑의
각 층은 신라 사람들이 주의해야 할 아홉 경쟁 왕국을 나타내는 것이다. 네 번째 층이 탐라를 나타내는데, 신라에게 탐라는 강력한 해양 왕국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3. 1813년, 1862년, 1893년 농민봉기,
1901년 이재수 반란 등 조선시대에 제주에서 반란이 빈번했다. 반란의 두 가지 주요 원인은
섬의 고립과 중앙정부에 의한 방치였다. 이 모든 봉기는 전통적인 농민 반
39)
란 패턴을 띠고 있다(Merrill
1980)..
4. 1600년 여성 군인과 남성 군인의
비율은 800:500으로 알려져 있다(Song 1998,
p.430).
5. 2016년에는 약 20만 명의 관광객이 우도를 방문했다. 관광객의 증가에 따라 여객선의
수는 1980년대 부터 서서히 증가해 왔다. 1988년 57톤(75마력)이던 배의
크기는 1995년 120톤으로 늘었다. 승객 수는 9만 명(1992년)에서 1996년 24만 5천 명으로 증가했다.
6. 예를 들어 8척 중 2척은 우도 주민 102명이
구입해 주식조합으로 관리하고 있다. 1인당 1천만원에서 3천만원원(약
6,000~18,000 유로)의 주식을 사들여 당초 수익은 연소득의 25% 수준이었다. 현재 성수기 에는 수익은 연소득의 46%라고 한다.
7. 폰푸리는 신과 여신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뜻한다. 탄생에서부터 신이될 때까지 삶의 신화가 신당에 자리하고 있다.
판푸리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첫 번째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책임지는 현상이나 열두 개의 신에 대한 이야기;
두 번째는 마을 무속 신당 신의 삶 이야기, 세 번째는 한 집안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Hyun
1996, p.
278)
8. 제주 신화에서 농업여신은
섬 바깥 출신이다.
9. 젠더 연구의 관점에서 제주
해녀에 대한 첫 번째 논쟁 중 하나로 꼽히는 Gwon(1996)씨의 관점을 비 판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Gwon에 따르면, "일하는 여성"이라는 제주 해녀의 이미지는 그들을 착취하 기 위해 조장된 것이지만,
실제로는 제주 여성들은 일하는 삶에 지쳐 있다. 또 다른 저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해녀들이 일을 대하는 태도가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일하는
삶이 좋든 싫든 차치하고, 그들이 제주의 인적·물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주역임을 부인할 수 없다"(Han 2005, p. 104).
10. 1895~1910년 제주 해녀의 총이주자
수는 2,000명, 1913년 초에는 2,500명, 1923년 4,310
명, 1930년 3,860 명(송금액: 908,999원),
1913년 3,950 명(송금액: 687,350 원); 1932년
5,078명(송금액: 1,100,000원); 1936년 3,360명(송금액: 770,000원), 1945년 이후 7000명(Jin 2004년 p.
266).
11. 제주 해안에 표류한 최초의
서양인은 165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직원 헨드릭
하멜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13년 동안 억류되었다 (1653–1666).. Hamel은 1994년에 Hamel's Journal로 번역된 책을 출판했다.
12. 해녀들이 채취한 귀한 해산물들은
잡은 귀껍질, 해삼, 미역,
한천(Gelidium amansii) 및 다시마였 다.
13. 등기 학교를 짓기 위해서는
땅과 돈이 필요했다. 이 마을 해녀 한 분이 개인적으로 이 학교에 자금 을 지원했다.
14. 1965년 이즈미. 이즈미는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제주도에서 현장조사를 했다. 그것은 제주에 관한 초기 연구중 하나이다.
500여 쪽에 이르는 그의 책은 제주의 풍속과 사회 조직, 정신생활을 상세히 기술 하고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중단으로 인해 1965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제주 우당도서관에서 일본 어에서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15. 2016년 여러 수준의 생산성을
돈으로 환산하면, 높은 등급 해녀 일당 10만원(77유로); 중간 등급 해 녀 6만원(46유로), 아기 해녀 2만원(15유로)이다. 2015년
우도의 높은 등급 해녀 연봉은 2000만원(Kang 2016년) 수준이었다.
16. 일본 해녀들에 비해 제주
해녀들은 생산성과 효율성이 훨씬 뛰어나다.
17. [내 아내는 해녀다](2005)의 저자인 강영수씨에 따르면, 해녀들의 직업병은 매우 심각하다. 정부는 해녀들의 의료 상담 비용을 일반의와 함께 지불하지만 전문의는 지불하지 않는다. 해녀들은 평생동안 (60~70년)
물속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심한 두통과 수압으로 인한 귀와 코 질환에 시달린다.
4장 무속과 18,000 신들
1. 제주 문화의 무속신앙[33])1
무속 의례는 제주 사람들의 두려움을 덜어주었고 그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었다. 무속 의례(굿) 에서
신(神) 또는 여신(神)은 산 여신, 바다 여신, 부엌
여신, 고향 마을의 여신 등 마을 생활 의 일상적인 환경과 관련된 존재이다. 무당의 푸다시(악한 귀신 쫒아내기)로
사람들은 악한 귀 신의 영혼을 볼 수 있었고, 무당의 말을 듣자마자 악한 귀신은 쫓겨났다. 그제서야 가난과 질 병에 짓눌린 이 사람들의 마음은 안도감을 느꼈고, 주름진
얼굴에 활력과 생기가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들은 입가에 미소가 번지면서, 무당에게 "수고했다. 고맙다!"라고 축하의 말을 하곤 했다. 제주에는 제주 사람들의 걱정과
불안만큼 많은 18,000의 신과 여신이 있다 ( Jin 2008,
p. 21)(사진 1-2).
위의 인용문은 제주 무속신앙에 일생을 바친 유명한 제주 민속학자의 애정 어린 눈빛을 통해 ,1960년대 제주 사람들의 생활에서 신과 여신의 위치와 무당의 역할을 요약하고 있다. 이 세 상의 불행이 충분하지 않은 듯 제주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혼을 풀어주는 무속 의례(귀양풀
이)를 통해 저 세상으로
죽은 자를 적절하게 보내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들의 영혼이 죽은 자의 땅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그들의 길을 잘 닦아주어야 한다 (사진 3-6). 인간에게는
세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하나는 육체와 함께 있는 것이고, 다른
하 나는 죽은 자를 다스리는 왕에게 가는 것이고, 세 번째는 죽은 후에 혼령의 임시 위패 주위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죽은 자를 풀어주는 무속 의례“는
신유교 장례식에서 일어날 정도로 제주에서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의례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으면
죽은 자의 혼이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들어간다고 믿어진다. '무당의 칼'(신칼)[34])로
살아 있는 몸에서 귀신을 쫓아내서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또 다른 무속 의례(곱가름, 말 그대로 ”귀신을 잘라내는 것“)이다. 가야 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죽은 자의 혼이 산 자들의 "이
세상"과 죽은 자들 의 "저 세상" 사이를 배회한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그 저승길이 닦여질
때만이 죽은 영혼이 " 저 세상"으로 가서
평안을 누리고, "이 세상"에 남겨진 사람은
귀신의 방해를 받지 않고 계속 살 수 있다 (Jin 2008, pp. 38–39).
제주는 "신과
여신의 고향"으로 불리며 무속신앙이 성행하고 있다. 제주
학자들은 토양이 대체 로 압축된 화산재와 생명이 몸부림치는 혹독한 자연환경이 그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표토
아 래 화산암으로 인해 경작 가능한 땅은 더 작은 땅으로 나뉘어져 있어 소규모의 메마른 밭농사 만이 가능하다. 그것은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서 많은 양의 천연 비료(인간과 동물의 배설물 재활용)를 필요로 한다. 토양의 부족때문에 사람들은 바다로 눈을 돌려 가족을
먹일 식량과 물물교환할 품목인 해산물을 채취할 수 밖에 없다. 무속 신앙은 이러한 혹독한 자연환경에
대 처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무속 의례는 여성들에 의해 행해진다. 제주에서 무당을 심방이라고 부른다. 심은 "고정하는” 또는
"견디는"을 의미하고 방은 결혼한 여성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존칭어이다. 그것은 모계 사회에서 사용된 고대 용어이다(Jin 2005, p. 75). 무속
신화에는 신보다 더 많은 여신이 존재 하며 신화의 내용은 "여성 중심"이다. 제주에서 350개의
신당[35]) 중 80%가
집 여신을 위한 것 이다(Hyun 1986). 수 많은 여신들과 그들의 중요한 역할은 제주 자연환경과도
연결되는 게 바람직하다. 제주를 “여다(女多)의 섬”이라고 지칭할
때 사람들은 단순히 숫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중요한 여성의 위치를 가리키는 것이다. 밭을
일구고 바다 깊이 뛰어 들어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은 여성들의 일이다. 여성들이 가족을 부양하고 경제적
자율성을 높이는 데 적극 참여하면서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고, 이는 제주 신화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
다.
이 외에도, 무속 의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들이며, 1960년대 진성기(Jin
2008)가 수집한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 대부분은 녀들이다. 실제로 이것은 2016년 사례에서 도 마찬가지였다. 마을 무속 의례는 그 마을 녀들이 담당한다. 그것은 여성들이 마을에서 공동 의례를 조직할 때 공동체 생활을 책임지는 매우 뛰어난 사례이다. 이러한 의례를 통해, 녀들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마을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신들을 드러낸다. 녀들이 녀 무속 의례에 출석하여 참여하면 마을 사람들은 녀들을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하고 녀회를 마을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강력한 힘으로 인정하고 있다. 일련의 무속 의례 수행은, 물질하면서 고통과 기쁨, 삶과 죽음의 경험을 함께 해온 녀회 구성원들의 결속을 확인시켜준다. 또한 무속 의례는 물질하다가 죽은 이들의 영혼을 초대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고 춤을 춘다. 이런 무속 의례를 "한솥밥을 같이 먹는 것"이라고 일컫는다. 2. 마을 무속 신당 (본향당) : 마을공동체의 중심
제주에는 1965년에 약 300개
마을 사당, 500개의 "무속 신화" (본풀이는 마을 신당의 수호신 과 여신의 기원 이야기를 의미한다)와 499개의 "자연 마을"[36])4
(또는 행정적인 목적을 위한 200개 마을) 그리고 18,000의 신과 여신이 있었다. "자연 마을"이라고 불리는 마을들은 마을 신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공동체에서 대가족으로 산다. 녀들과 어부들은 바다 근처 마을 신당에 가서 무속 제사를
지낸다(Jin 2005, p. 94). 제주 샤머니즘은 생존과 일상생활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당의 20%는 언덕에, 7%는
숲에, 38%는 농 사짓는 밭에, 18%는 바다 근처에 있다. 집단의식과/또는 무의식을 반영하는 신화를 접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지만, 제주의 경우에서와 같이 남자와 여자의 일상생활의 실질적인 측면 을 반영하는 신당 위치와 신당
신들과 여신들의 기능과 속성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
다. 자연환경의 조건에 대한 주의 깊은 관리와 사회규범의 수정 또한
주목할 가치가 있다.
(Kim 2002, p.
156).
신들과 여신들이 사는 마을 신당은 모두 마을 안에 있다. 신당 대부분은 빈 터에 있으며 신과 여신은 나무나 바위로 표현된다(사진 7-8). 신당은 대개 고목, 팽나무, 덤불 또는 나무 밑 동 굴 아래에 있다. 신당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면 시멘트로 된 제단 위에 음식을 놓는다. 마 을 신당은 무속 제사를 지내곤 했던 곳이었지만, 요즘은 제사가 간소화되어 '앉는 의식'이라 부른다. "앉는 의식"은
마을 여성들이 제단에 올릴 쌀, 떡, 과일, 청주, 생선 등 음식을 가져와 서 무당의 본풀이 노래에 맞춰 제단
앞에서 절을 하고 무당이 가족의 운세를 읽는 것을 듣는 의식을 말한다. 만약 운이 좋지 않으면 액운을
막기 위한 후속 의례를 지낸다.
마을 설립 당시 세워진 무속 신당은 마을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당 신이나 여신은 마을 주민의 조상이나 여자
조상으로 여겨진다. 모든 마을 사람은 신당에 동등하게 출입할 수 있다
(사진 9). 신화에서처럼, 마을 전체의 신은
한 가족의 개별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숭배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일반적인 신들과 여신들보다
오히려 비권위적이고 평등주 의적인 신들과 여신들이 바다나 상상의 땅으로부터 도착하는 것이 본토보다 제주에서 훨씬 더 흔하다. 신화는 보통 마을의 설립, 마을의 분리와 확장, 또는 어업과 농사 조직과 같은 공동체 생활에 대한 것이다. 무속
신화는 신이나 여신의 삶에 대한 단순한 이야기로 여겨지지만, 무 속인의 주문은 그 신이나 여신의 분노를
해소하여 악령을 몰아내고 사람들의 몸과 영혼을 진 정시키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 신과 여신의 신성한
말과 행동은 무속 신화를 통해 전해진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다른 종교의 성서와 같은
법전이다. 이러한 신화들은 19 세기 농민 반란, 중앙정부 관리들에 의한 탄압, 그리고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마을 생활의
세 부내용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제주 역사를 위한 자료이기도 하다. 그
러나 이 모든 것은 신과 여신에 대한 이야기의 형태로 전해진다( Jin
2005, pp. 58–59). 일부 학자들은 무속 신화가 제주 문화의 메타언어라고 주장한다(Yoon
1995, p. 11). 이 저자에 따 르면, 부계 세력과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신화의 여성
영웅들은 본토 지배에 대한 저항을 대변 하면서 지속적인 대립 상태에 놓여 있다. 3. 제주 마을 의례의 이중구조
제주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공동체로서 두 가지 전통 의례를 행한다. 하나는 밤에 행해지는 남 자들의 신유교식 제사(포제)이고, 다른 하나는 낮에 행해지는 여자들의 의례인 마을 신당 제사
이다. 제주에서 이러한 남녀 의례 구분은 본토로부터의 신유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19세기에 시작되었다. 19세기 초에는 신유교식 의례를 치른 마을은 10여 곳에 불과했다. 포제는 남성 권위의 신유교적 표현이다. 그 이전에는 마을 신당 제사에는 남녀가 모두 참석했다. 지금도 일부
마을에서는 남녀 모두 마을 신당 제사를 지낸다(Jin 2005년,
p. 111). 이 두 유형의 마을 집단 의례의 차이는 마을 무속 신당 제사의 역사적 의식과 포제에서의 그러한 역사적 의식의 부재를
잘 보여준다고 한다. 마을 신당 제사는 제주 주민들이 본토와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의례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마을의 공동 소유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 종 교이다(Kim 1999a).
마을 신당(본향당)은 가족
기록이 보관되어 있으며 마을 구성원들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 곳 이다. 그것은 마을 주민과 외부인을
구별한다. 신당 신과 여신들은 마을 사람들의 조상이라고 여겨지고 그들은 혈연관계라고 생각한다(Hyun 1986, p. 191). 그래서 신당 제사를 지내는 마 을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신당 제사를 지내지
않는 외부인들과 구별된다. 신당의 신들과 여신 들은 보통 "무속
신화"에 이야기되듯이 많은 불행을 겪은 신들이다(본풀이). 신당의 신과 여신 들의 삶이 극적일 뿐만 아니라 무당이 거행하는 신당 의례도 극적이며 동시에 영감을 준다. 신과 여신의 역사가 비극적이었기 때문에 설화와 의례는 비극적이다: 그들은
높은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추방되어 마을에 와서 마침내 신당의 신과 여신이 될 때까지 방랑하는 삶을 살아 야 했다.
이 의례는 신당의 위치가 마을 사람들에 해를 입히는 악신들과 전투를 벌이는 전쟁 터로 여겨지기 때문에 갈등을 수반한다. 이 의례의 전투적인 성격은 제사 장면과 일부 무속인 의 옷차림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무당은 제사를 지내는 바깥 땅에 깃발 1,000개와 3,000명의
무장 전투 대원을 상징하는 긴 대나무 장대 하나와 작은 장대 여러 개를 세운다.
무당은 때때 로 군복을 입고 신의 칼을 들고 나타난다(Kim 1999a; Hyun 2002, p.
159)(사진 10~11). 본 토가 대개 제주 사람들에게 악의 근원이기 때문에 악신들은
일반적으로 본토 출신이다(Moon 1989, p. 31). 역사적으로 제주 사람들의 불행은 본토에 종속되어
변방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았다. 아울러, 무당과 신당의 신과 여신들은 제주 주민들이 그들을 종속시키는 악신을 극복하거나 극복하려는 시도를 상징한다. 이 제사에 참석하는 마을 주민들은 무당과 함께 울음을 터트린다(사진 12). 그들의 한탄은 그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그들 조상의 비극적인 역사,
그리고 이 비극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현재 상황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식은 공동체 전체에 대한 공동 의례를 통하여 극화(劇化)되며 그것은 공동체 의 식을 강화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마을 신당 설화는
"그들이 자신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이다
(Geertz 1973, p.
448, Kim 재인용1998, p. 288). 마을의 신당 설화(본풀이)와 신당에서 거행 되는 무속 의례는 신유교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제의
권위를 부정한다. 그것들은 중앙정부의 권 위에 도전한다. 마을
무속 의례는 역사의식의 표현이며 제주와 본토 관계의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이다(Kim 1999a,p. 286). 마을의
무속 의례는 남성 혹은 여성 무당이 주도하며, 오늘날에 는 대개 녀인
마을 여성들이 주로 참석한다. 이러한 무속 의례는 혈연이나 영토의 유대로 맺어진 마을 주민 모두에게
열려 있다.
포제는 신유교식 의례이다. 한 명 이상의 주례를 두고 있으며, 매년 마을 사람들이 남자 제주 (祭主) 9명과 남자 보조 5명을 뽑는데,
그 의례 절차가 지나치게 형식적이다. 여자는 참석할 수 없다. 우도에는 아직도 두 마을에 두 곳의 포제 장소가 있다(사진 13). 우도 사람들은 포제 의례 자격을 갖추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이 많기 때문에 포제 의례 제주(祭主)가 되는 것을 꺼린다고 말한다(예를
들어, 제주(祭主)는
두 아내를 두어선 안된다). 포제 의례는 다른 마을에 서는 여전히 행해지고 있지만 우도에서는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포제는 부계 조상들에게 풍 작과 건강한 가축, 마을
주민들의 번영과 질병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요청하는 의례이다. 그 것은 1년에 두 번, 1월과 6월에
열린다. 이 의례는 마을 공동 기금에서 자금을 조달한다. 일
부 저자에 따르면, 포제는 이 섬사람들이 가진 제주 역사에 대한 지식을 지울 목적으로 중앙 정부의 지시로
목사(牧使)들이 제주 사람들에게 강제로 이행하도록 한 의례라고
한다. 1702년 제주 목사가 500여 개의 사찰과 신당을
불태운 것은 이 가설을 뒷받침한다(Kim 1999a, p.
293).
두 유형의 의례의 목적은 마을 주민들의 공동 안녕이다. 마을 신당 의례은 1년에 4번 열리곤 했는데,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1월에는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2월에 바람의
여신에게 해산물 풍요와 바다에서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7월에 가축 말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10월에 풍 년을 기원하기 위해 행해졌다. 우도 하우목동에서는 오직
세 차례 무속 의례가 행해지는데, 1 월에 한 번, 2월에
한 번, 마지막으로 7월 한 번으로 세 번 모두 녀회가 주관한다.
4. 녀와 무당과 신과 여신과의 관계
필자는 이미 무속 세계는 여성의 세계라고 언급했다. 제주에서 무속신앙의 중요한 부분은 이 러한 심해 녀들과 그들의
믿음과 의례들, 그리고 심지어 제주에 대한 녀들의 공식
기관들 이면에 있는 생각 사이에 밀접한 관계 때문이다. 녀들은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죽 을
가능성을 의식한다. 그래서 녀들은 신당과 무당이 섬기는
신과 여신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그들 사이에 유대감은 강하다: 녀들은
무당을 믿고 무당들은 녀들에게 의존한다. 그 들은 무당이
제사장인 공유된 의례 행사에 함께 하지만, 무당들은 신화적인 구전 문학을 암송 하고 챈트를 창작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무당들과 녀들은 형이상학적 모델을 창조하는데
협 력하는데, 녀들은 다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방식으로, 일터에서
직면하는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일종의 영적인 지원에 의지한다. 아래에서 보여지듯이, 의례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 다에서 사고가 없기를 비는 기도인데, 이
기도는 그 의례 내내 반복된다. 몇 가지 기도를 예 를 들면, 녀들의
이름을 읽거나 바다에서 사고가 나지 않도록 적힌 이름을 제단에 올려 신 에게 받치기(사진 14); 녀들의 마음에 힘을 주는 정화 행위(푸다시)를 통해 "액운을 막기"
(“새들을 쫓아는 것", 새드림); 용
여신에게 녀들을 그 용궁 문으로 가는 길로 이끌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기; 녀들의 진심을 보이기 위하여 여신에게 드리는 종이로 싼 음식을 바다로 던지기;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용 여신에게 살려달라고 부탁하거나 죽음의 세계에 있는 좋은 곳으로 인도해 달라고 무속
노래를 부른다(Kang 2005, pp. 49–52).
녀들이 기도하는 대부분의
신들은 그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여신들이다. 따라서 녀들
은 그들의 조상의 영역인 바다에 잠수하고, 그곳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를 가진 다. 이러한 믿음은 김녕의 무속 신화와 녀들의 마을 신당과 바다 여신들과의
관계에서 뚜렷 하게 나타난다. 김녕 무속 설화에서, 대부분의
신당 신들은 여성이고 바다와 관련이 있으며44) 5, 그들은 또한 친족 간 결속으로
연결되어 있다. 신들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음식을 받고 그 들의 신성한 역할을 수행한다. 마을 신당 여신은 혈연관계가 아닌 영토 관계를 통해 마을 사 람들의 조상이 된다. 마을 사람들은 여신들에게 음식을 바치고 그 대가로 여신들은 마을 사람 들을 돌본다. 이런 섬기고 보호를 받는 관계는 그들이 같은 마을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신과 여신과의 관계는 혈통과 혼인을 통해 이루어진다. 육지와 바다의
신 과 여신은 혼인과 관련이 있다(3장 그림 21 참조).
육지의 여신은 바다의 중재를 통해 마을에 거주한다. 용 여신이라고 불리는
바다의 여신은 육 지에 살지만 바다에서 일하는 녀들의 조상이다. 이
신화에서 조상과 후손(descent)의 관계 는 녀들의
직업에 기초한다. 바다 (용)여신의 후손인 녀들은 바다와 그 바다의 은혜에 대 한 정당한 권리를
가진다. 김녕 해신굿(바다 여신을 위한 무식 의례)이라 불리는 녀들의 무 속 의례는 해마다 여성 라인을 통한 조상-후손 관계를 인정하고 기념한다. 이 의례의 목적은 조상에게 그들의
생명과 공동체를 지켜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이것은 김녕에서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가장 크고 포괄적인
무속 의례이며 마을 고위 인사들이 참석한다. 조상과 녀의 모계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녀들이 남자를 통한 혈연관계는 언급하지 않고, 여성 친족을 나 타내는
말(예를 들어 xx의 어머니, xx의 자매, xx의 딸, xx시누이)로 서로를 배타적으로 지칭 하는 방식에서 볼 수 있다. 부계 서열
체계를 통해 녀들의 세계를 분석하는 것은 잘못된 일
44)
일 것이다(An 2008, p. 103). 2016년 필자가 김녕에서
한 녀에게 이름을 물었을 때, 필자 는 그녀의 이름을 먼저
듣고 그 다음 성(남편 이름)을 들을 줄 알았다. 그녀는 "제 이름은 xx
(딸 이름)의 엄마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제주 모계-친족 제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이
다. 처음에 조선 왕조
왕실의 지배와 그 다음 일본 제국 지배에 맞서 제주사회를 지켜낸 것은 녀와 그들의 모계 친족 제도이다.
녀들이 제아무리 많이 신과 여신에게 의존한다고 해도 그들의 관계는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 다. 녀들과 신들과 여신들은 중재자가 필요하고,
그 중재자는 무당이다. 신들과 여신들의 언 어를 말하고 그들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무당이다. 제주에는 약 300명의 무 당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들이 무당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그들 가족 안에서 혹은 스승으로부터 지식을 습득했다; (2) 그들은 재정적인 문제를 가 지고 있었다; 또는 (3) 그들은 만성 질환에서 치유되었다 (Jin 2003, pp.
238–248). 무당들 사 이에는 세 가지 신분이 있다. 그들의 신분은 신이나 여신에게
바칠 수 있는 신 굿으로 알려진 무속 의식의 횟수에 따라 결정된다. 세 번의 신 굿을 한 무당을 상신충(높은 신분); 두 번의 신 굿을 한 무당을 중신충(중간 신분) 그리고 한 번의 신 굿만 한 무당을 하신충(낮은 신분)이 라고 한다. 신
굿은 무당 집에서 벌어지는 큰 의식으로, 신이나 여신에게
무당의 고난의 역사 에 대한 노래를 바치고 무당이 신과 여신과 접신(?)했을 때 노래를 바치는 것이다. 신 굿은 " 죽은 자들의 세계의 왕"과 "이 세계의 왕" 그리고 "무당들의 세계"를 위한 새로운 질서를 위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의식이다.
신분이 높은 무당은 초공본풀이(무당의
최초 여성 조상 이야기)를 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 양 반집
딸의 고난의 삶과 직접 무당이 되기 위한 의식을 받는 이야기를 전하는 어려운 두 번째 부분으로, 무당은 그 이야기를 제례로 전환한다(Mun 1999, p.
108). 높은 신분의 무당이 되 기 위한 몇 가지 다른 자격은 가족으로부터 물려받거나 ”조상“이라고
불리는 스승으로부터 멩 두(아래 언급된 무당의 도구)를 물려받는
것이다. 명두의 조상 계보의 실체는 신의 길이 드러 나는 제례 때 발견된다. 무당이 되는 또 다른 중요한 자질은 덕이 높은 품성과 기적을 행하는 것이다(Mun
1999, p. 108). 신분이 높은 무당은 마을 신당을 ”어깨에“ 메고 다닌다고 하는 데, 이것은 무당이 적어도 한 곳의 마을 신당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순실은 필 자가 만난 높은 신분의 무당이다. 그녀는 김녕에 사는 59세의 여성으로 마을 신당을 책임지고 있다(사진 15). 그녀는 본풀이를 부를 때 여신의 목소리를 지녔다는 찬사를
받는다. 서순실 관 련 책을 낸 제주 신화학자 허남천(2015, p.
4)은 서순실의 재능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 녀의 말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고 이야기가
잘 짜여져 있다. 이야기가 복잡하지 않지만, 장 면의 묘사는
상세하고 생생하다... 관객들은 흥분한다. 서순실은 야생
돼지를 먹고 입술에 피 가 묻은 젊은 여자에 대한 신화 이야기를 했다... 청중을 웃기기 위해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는 현대 여성들에 대한 농담이었다. 아이들의 건강과 안녕을 책임지는 여신의 이야기를 전하면
서, 서순실은 아이들의 나들이 안전과 수업의 성공을 기원한다. 서순실은 1988년부터 스승이 사망할 때까지 유명한 높은 신분 무당인 스승 이중춘과 함께 공부했다. 말년에 무당이 된 그 녀의 어머니는 무당이 되고자 하는 그녀의 결정에 영향을 끼쳤다. 이중춘의 가르침은 그녀에 게 깊은 인상은 남겼기 때문에 그녀는 그의 의례를 받아들였고 이전에 배운 모든 것을
거부하 였다(Hur 2015, p. 46).
1994년 서순실은 자신을
위해 새 집을 짓고 그녀의 무속 조상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세 번째 신 굿을 바쳤고, 2006년에는 그녀의 스승은 그녀에게
네 번째 신굿을 했다.
무당의 기본 무구들을 멩두라고 하는데, "검", 요령,
그리고 산판-엽전모양 2개(천문)와 작은 놋쇠 술잔 2개(상잔)를 담아두는 놋쇠 접시(산대)-로 구성되어 있다(사진 16-18). 무당들은 이 도구들을 그녀 또는 그의 "조상"이라고 부르며 집안의 제단 위에 조심스럽게 보관한다. 이
도 구들은 신이나 여신을 소환하거나 신의 의도를 읽을 때 사용된다(Kim 2010, pp. 61–63). 무
당의 악기에는 북, 장고; 바랑(서양 심벌처럼 생긴 두 놋쇠판) 그리고 약 6cm 길이인 놋쇠 접 시 모양의 설쉐(aseolsseol?)가 있다(사진 19–20). 무당들에게 중요한 또 다른 도구는 큰 대 와 기메지전이 있다-큰
대는 푸른 잎이 달린 기다란 대나무 막대기이고, 기메지전은 하얀 종 이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잘라놓은
것으로 "신과 여신에게 바치는 돈"으로
여겨지는데, 신과 여신을 상징하는 장식물이거나 무당이 춤을 출 때 사용하는 다양한 모양의 (신의 몸을 상징하 는) 몸이기도 하다. 어떤 기메(신의 몸)는
높은 대나무 장대에 붙어있고 어떤 기메는 제단 주 위에 놓여 있다. 이 장대에는 긴 무명천이 달려 있고
제상(祭床)에 붙이기 위하여 집안으로 들 여온다. 신들과 여신들은 큰 장대를 타고 내려와 흰 무명천을 통해 제상(祭床)에 도착한다고 믿어진다(Hyun 2002, pp. 20-23). 마지막으로, 무당의 의상은 모자(여성 무당인 경우 빨간 머리띠), 형형색색의 긴 치마, 그리고 허리띠로 구성되어 있다. 남자 무당의 옷에는 6가지 종 류가 있으며 의례의 종류(예: 크기)와 의례의 여러
단계(또는 장면)에 따라 입는 옷이 달라진 다(Hyun 2002, pp. 26–27). 긴 치마의 형형색색의 색채는 청중들을 어지럽게 하고 헛것을 보게 한다고
한다.
5. 바다 여신을 위한 의례(해신굿)
각기 다른 무속 의례들은 공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Hyun 2002, p. 100).
1단계. 모든 신들과 여신들을 초대하여 앉히고 그들에게 제례를 지내는 이유를 알려준다(초감
제).
2단계. 원래 마을 신당의 여신을 초대한다(본향듦).
3단계. 바다와 바람의 여신이 오는 길을 치워서 맞아들인다(요왕맞이).
4단계 기도를 통해 마을의
불운을 막는다(푸다시).
5단계. 해산물 수확을 위한 씨를 뿌려 다음 농사 수확을 예언한다(씨드림).
6단계. 배를 띄워 바람의 여신을 떠나보낸다(배방선) 7단계. 초대한 모든 신들과 여신들을 떠나보낸다(도진).
아래는 2016년 4월 14일(음력 3월 8일)에 필자가 제주
동부지역 김녕에서 참서간 무속 의례 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다. 필자는 이 의례를 기술하는데 있어 2003년 제주 출신 한국학자가 동일한 김녕 의례를 설명해 놓은 것(Kang
2005)과 2015년 우도 주민인 사진작가 겸 언론인 이 우도 녀 무속 의례를 설명한 것(Ko 2015)에서 도움을 받았다. 무속 의례의 순서는 다양 하지만 그 기본 구조는 같다.
김녕과 우도의 의례
김녕에서 제례 준비는 며칠 전부터 시작되었다. 녀들이 바다 여신에게 자신의 생명을 보호 해달라고 기도드리는 진심이 담기고 마음 깊이 느껴지는 의식이다. 제상(祭床)에 올릴 신선한
해산물을 얻기 위해 특별한 물질이 조직된다(사진 21-22). 그리스도교와
불교 같은 다른 종교 를 믿는 녀들은 이 물질에 참여할 수 있지만,
그들이 채취한 해산물은 제상(祭床)에 올리지
않는다. 제사를 지내기 전 4일 동안, 녀들은 돼지고기를 먹어선 안 되며, 성관계를 해서도 안 되고, 죽은 동물과 같이 ”불결한 것“을
봐서도 안되는 규율이 있다. 그들은 제사를 지낼 음식을 함께 준비하고 세 명의 어른 해녀들이 제사 물건들을
제상(祭床)에 올린다. 새벽 6시 30분경, 신들과
여신들에게 제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는 음악이 연주된다(사진
23). 그때 녀 개개인이 비공식적으로 바다의 여신에게 기도드릴 수 있다.
1단계: 신과 여신을 모셔서 앉힌다(초감제) 이것은 전체 제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단계로, 기를 모으고 불운을 막기 위해 연장자 신분의 몇몇 대표 녀들만
참석한다(사진 24). 한
녀가 말하길, "누구도 초감제에서 불운을 가져서 는 안된다. 초감제가 잘 되어야만 만사가 괜찮아진다. 초감제는 신들과 영혼들
모두가 초대받 는 의례이다. 만약 초감제가 잘 안 되면 무당은 고통스러워하고 몸이 안 좋아진다.” 제주의 모든 무속 의례는 이 오프닝으로 시작된다: 무당이 기도문을
읊조릴 때 노래로 말하기 시작한 다(사진 25).
1)
천지(天地)와
자연과 문명의 창조에 대한 신화적 이야기
2)
의례가 행해지는 장소와 시간과 이유(이 지점에서, 의례를 거행하는 이유가 심각하기 때문 에 무당은 운다.)(사진 26)
3)
녀와 그 가족의 이름과 나이를 종이에 적는다.
4)
그 자리에 참석하도록 요청한 신과 여신의 이름들
5)
그리고 무당이 극적인 춤을 추고 문을 여는 몸짓으로 신들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릴
수 있도록 한다.
6)
액운과 나쁜 기운을 쫓아내기 위해 막걸리를 입에 물고 뱉는다(새드림, 말 그대로 “새를
쫓 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7)
신들을 제상 앞 제례 공간 안에 신들의 자리로 안내하고 식사를 하도록 초대한다.
2단계: 원래 마을의 여신과 18,000 신들과 여신들을 모시고(본향뜸)하여 제상에 올린 음식을 바친다. 이 지점에서, 무당은 청동 동전을 던지고 하얀 종이(신들과 여신들에게 바치는 돈)를 태워서 마을의 미래를 점친다(사진 27).
3단계: 길 닦기와 농업
여신의 기원 이야기를 읊조리면서 용 여신을 맞이하기(요왕맞이<-역자 추가)
이것은 오후의 가장 중요한 제례로,
풍어와 바다에서 녀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그
것은 두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i) 초감제(용 여신에게
제례에 참여하도록 요청함)와 (ii) 요왕 질침(여신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치워 닦는 것). 초감제 단계에서는
위 1단계에서 설명한 10가지 동작을 똑같이 반복한다. 그 다음에 요왕질침(여신을 위한 길을 치워서 닦는 것)이 있 다. 용 여신이 들어가는 길 양쪽에 초록 잎이 달린 대나무
가지 8개를 세우고 돌로 받쳐놓는 다(사진 28~29). 그리고 무당은 기도문을 읊조리면서 용 여신 영역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녀들은 문이 열릴 때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사진 30). 이 "요왕맞이"의
단계는 덜 강렬하 고, 정식적인 제례가 시작되기 전에 녀들이
이미 새벽에 홀로 용 여신 맞이를 했기 때문에 제례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돌아다닐 수 있다. 그리고 무당은
농경 여신(자청비) 이야기 전후로 용 여신 단편 이야기를
통합하여 무속 이야기인 세경본풀이(농경 여신의 기원)를 읊조린다. 녀들은 바다에 농경 여신이 있다고 믿는다. 바다 밑에서(“바다밭”)에서 자라는 해산물은 육지 농업과 유사한 "바다 농업"의 산물로 여겨진다. 그리고나서 신에게 바친 제상 위의 음식을 흰 쌀 종이에 싸서 바다에 던진다(지드림
의식)(사진31–32). 이것은 녀들이 소원을 빌 때 행하 는 일종의 기도이다. 그것은 용 여신과
죽은 영혼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사진 33). 두
종류의 제물이 있다: 녀 대표가 종이에 싼 약간의 음식을 바다에 던지는 도조(집단 제물)와 개인이 종이에 싸서 바다에 던지는 개인지(개인 제물)이 있다. 이
제례가 행해질 때, 무당은 녀들을 동행하며 축원을 읊조린다. 이 축원은 녀들의 세계인 바다에 대한 참석자 들의 정성이 담겨있다. 그 때 무당이 노래를 부르고 녀들이 무당을 따라간다(서우젯소리)(사 진 34). 이것은
여신과 인간이 함께 놀고 노래하고 춤추며 녀들 사이에 있었던 불협화음이 조화를 이루는 때이다. 무당이 이 노래들을 작곡하고 그 주문들은 강력해서 병을 고칠 수 있 다고 믿어진다. 춤을 이끄는 무당이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심리적인 치료법이 다.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 아드레날린 수치가 높아지고 스트레스가 씻겨 사라진다."
4단계: 씨 뿌리기 무당 조수 두 명이
의례가 치루어지는 장소 근처 해안을 따라 걸으면서 해안 따라 좁씨를 던 진다. 좁씨는 해양 생물의 씨앗을
상징한다고 한다. 씨앗을 "심은" 후, 무당은 채취물이 많이 발견될 바다 속 행운의 장소에
대해 말한다.
5단계: 마을과
녀 개개인의 액운 막기
마을의 액운을 막기 위해 수탉이 희생된다. 우도나 다른 마을에서는 수탉의 피가 사람들을 액 운으로부터 보호해 준다고 믿고 있다(사진 35). 이 때 소미라고 불리는 무당 조수가 먼지를 떨어내듯이 녀들의 머리와 얼굴과 어깨 주변을 먼지털이 모양의 하얀 종이 조각으로 녀들
의 머리와 얼굴과 어깨를 닦는다. 이 동작(푸다시)은 그 해 액운을 물리치고 안전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단체와
개인 녀들을 위한 의식들이 있다. 이에 앞서 무당은 바다에서의
안전 을 기원하는 무속 설화를 읊조리며 북을 두드린다. 이 때 무당은
녀들이 가족의 이름을 적 어서 가져온 귀중한 천과 종이 조각인 종이돈 모양의 물건으로 녀
개개인의 액운을 막고 쌀 을 읽음으로써 그들의 운세를 점친다(사진
36).
6단계: 바람의 여신을 떠나보내기
무당은 귀신(선왕상) 복장을 하고 한 사람 앞에 앉아서 음식을 올린다고 읊조리면서 녀들과
어선의 풍요와 안전을 구한다. 이 때 제상 위의 음식은 무당이 만든 작은 배에 담기고, 그걸 바닷가로 가져가서 바다로 떠밀어낸다(사진 37-38). 동전 몇 개가 여행 경비로 배 안에 놓여 진다.
7단계: 신과 여신을 떠나보내기(도지) 위의 단계가 끝나면,
무당은 모든 신들과 여신들을 떠나보내기 위한 기도문을 읊조린다. 팥이 나 콩을 바닥에 던져
제사 공간을 정화하고 무리 전체가 무당과 함께 바닷가로 가서 용신을 태운 배를 떠나보낸다.
6. 녀의 무속 의례의 역할
위의 분석에서 보았듯이, 녀들의
의례나 다른 무속 의례들의 끊임없는 주제는 (1) 불행, 특
히 바다에서의 죽음을 막는 것, (2) 녀들의 가족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 (3) 풍부한 해산물 수확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 의례는 여성들이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가며"(죽음) 좁은 제약 속에서 어려운 삶을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두려움을 극 복하기 위해 그들의 보호와 관대함을
위해 초자연적인 것에 의존하고 그들의 수입으로 가족과 마을 공동체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남자들의 포제 의례와는 상당히 다 르다. 녀들의 의례는 마치 거인 여신이 500명의 아들들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 한 것처럼, 여성들은
그들의 가족과 마을을 지탱하기 위해 그들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을 보여준다(Kang 2005,
p. 54).
녀들의 강인한 감정들이
의례의 매 단계마다 담겨있고 녀들이 얼마나 자신들을 믿고 있는 지 잘 알 수 있다. 녀들이 말하듯이, 물질하는 행위는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목숨을
걸고 "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오가는
것이다. 녀들의 두려움은 너무 커서 자신들을 보호해줄 그들 의 조상들을 부르지 않고서는 바다에 들어갈
수 없다. 한 녀가 말하기를, "무속 제례가 끝난 후에는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 두렵지 않다. 이상하게도
음력 3월 7일까지는 바다가 맑았지만 8일 제사를 지내고 9일 바다에 들어갔을 때는 바다 속 조류가 거셌다. 밀물이 바뀌는 계절이 었다. 잠수굿 다음 날에는 물살이 세서 우리는
대개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볼 수가 있다. 평소에 우리는 무서울텐데 제사를 지낸 후에는 해산물을
채취할 수 있다. 제사를 지내고 나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제사를 통해 마을 신당의 조상과 용 여신의 가호를 받는다(Kang 2005, p. 54).
제례를 지내지 않는 결과는 과거에서 보았던 것처럼, 많은 녀들이 목숨을 잃는다. 일제강점
기(1910~1945년), 한국전쟁
전 4.3사건(1948~1950년), 196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한 새마을운동으로 시작된 근대화·산업화
시기에 무속 의식을 "미신"이라 부르며
억압한 것은 무 속신앙을 지하로 몰아넣었다. 이 기간 동안 제례를 지내지 못하고 여신들의 도움이 부족하여
많은 녀들이 죽었다. 무속인 김명순은 2007년 뉴욕타임스 코리아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 자연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나무와 바위의 정령들은 갈 곳이 없어졌기 때문에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인간들에게
나타나 괴롭힌다. 나라가 엉망인 것은 당연하다'(Choe 2007,
p.
A3).
녀 해신굿의 세 가지 구성 요소 사이에는 복잡한 관계가 존재한다. 녀들이 사라지면 녀 들의 의례도 없어질 것이다. 녀들의 고령화와 환경오염으로 젊은 녀들이 뒤를 잇지 못하 여 녀들의 채취물이 줄어든다면, 무속 의례가 없어지고 마을은 마을 통합을
지탱하는 중요 한 집단 의례를 잃게 될 것이다. 무당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무당이 마을을 위해 제례를 지낼 수 없게 될 것이고 무속 설화는 점점
사라질 것이다. 2016년 4월 필자가 참석한 김녕 녀 의례의 총예산은 1천만 원(약 6,700유로)이었다. 이
중 4분의 1은 무당에게 드는 비용이었다. 이 모든 것은 녀들의 분담금에서 나왔다. 이 액수는 녀들의 삶에 대한 투자 라고 볼 수 있다. 그 돈은 녀들의 소득과 노동에서 나온다. 만약 그것이 마을 공동 기금에 서 나온 것이라면, 녀들은 마을에서
똑같은 존경을 받지 못할 것이다. 김녕 녀들은 스스 로
생명보험을 지불하고 용 여신의 후손으로서 중심적인 위치를 유지하며 마을의 여자감독
(matron)을
위한 집단 의례를 관리한다.
주석
1.
1960년대부터 제주에서 무속 신앙 연구가 활발했다. 제주 무속 신앙과 제주 신화에 대한 주요 학자들 로는 2008년 Jin, 1986년 Hyun, 1998년 Mun 등이 있다.
2.
'신의 검'이라고
불리는 무당의 칼은 놋쇠로 만든 칼에 길게 잘린 하얀 종이들이 붙어 있다. 이것은 푸닥거리(푸다시)할 때 사용한다.
3.
신당의 수를 추정할 때 저자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현용준에 따르면 350 곳, 진성기에 따르면 300 곳, 문무병에 따르면 250
곳이다.
4.
자연마을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학술 연구를 접해 본 적이 없다. 필자가 2016년 우도 현장조사에서 이해한 "자연마을"은 주민들이 주로 그 마을 경계 안에서 결혼하고 해녀들이 자체 규율 아래 그 마을 경 계 안에서 해산물을
잡을 수 있는, 자치적인 "왕국" 또는 자체 규정 내의 영토이다.
5.김녕에는 다섯 개의 무속
신당이 있다.
(1) 본향당 - 마을의 안녕과 출생 등록을 담당하는 여신의 신당
(2) 노모릿당 - 탄생, 자녀와 질병 치료를 담당하는 여신의 신당
(3) 성세깃당 – 보통 바다 근처에 있는 어부, 해녀, 그리고 오늘날에는 사업가들을 위한 신당
(4) 구내귀당-집안의 평화와 번영을 책임지는 신의 신당
(5) 서문하루방당 - Yun이 부르기를, 가족 개개인의 신 신당으로 집안의 아들을 보증하는
책임이 있다
(An 2008년, p. 107).
6.
칼의 길이는 약 20cm로 놋쇠로 만들어졌고 손잡이 끝에 "치마"라고 불리는 흰 천이 달려있다. 무당은 악령을 쫓기 위해 환자의 몸을 찌르는 시늉을 한다. 이 칼에는
양반을 죽일 수 있는 신과 힘이 깃들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7.
놋쇠로 된 요령은 길이가 약 7cm이고, 5가지 색상으로 된 1m 길이의 천 조각이 손잡이 끝에 부착되 어
있다. 요령소리는 신과 여신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힘을 가지고 있다.
8.
금속 동전의 지름은 약 5~6cm이다. 컵의 지름은 약 4cm, 높이는 1cm이다. 마루에 내동댕이칠 때 어느 쪽으로 넘어지느냐에 따라 무당이 운세를 읽는다.
9.
서순실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해녀 개개인의 모든 어려움을
다 알고 있고 그것들을 떠올리면서 해 녀들이 이 장면에서 울도록 한다고 말했다.
5장 제주에 끼친 신유학의 영향
1. 제주 사람들의 신유학에 대한 집착
제주 학술 논쟁에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필자는 모든 학문 분야(예: 인류학, 역사, 문학, 신화) 에서 한 가지 점이 눈에 띄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제주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다: 제주 문화는 무엇이고 육지와 어떻게 다른가?"'두
개의 현실"과 "타협의 문화"는 제주 학자들이 제 주의 고유성과 '제주 특수성'을 논하고 제주 풍습과 육지 풍습 간에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만 든 용어다. 예를 들어, 제주 장례 의식은 "이상적인 문화"(제주 사람 일부는 신유교 육지
문화 를 이상화한다)와 "현실의 문화"(현실적이고 바꿀 수 없는 제주 환경에 "이상적인
문화"를 응 용) 사이에 "타협의 문화"로 묘사된다 (Yu 1984).
제주도의 결혼패턴과 재산상속 관습을 분석한 한 제주 법학자는, 제주 사회는 섬 생활에 적합 한 삶의 방식을 확립하고 육지 신유교 사상을 변형해오면서 "두 개의 현실"에 지배받고 있다 고 말했다(Han 2000, p. 91). 제주 사람들이 육지 풍습에 순응하는 동시에 육지 문화와 지배 에 저항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제주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명분이 필요할 정도로 신유교 규범을 따르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리고 왜 신유교 사상이 그렇게 중 요한가?
섬 사람으로서 제주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자연환경과 생산방식(낚시, 물질, 화전, 소 규모
농업)을 가졌고 그것을 지속해왔는데, 이것은 신유교 관점에서
보면 전부 이질적인 것이 다. 제주 사람들의 기준점은 그들이 처한 환경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 정체성에 대한 부분적인 대답은 제주 마을 신당 의례에 대한 제주 학자의 분석에서 찾을 수 있다. "역사에 대한 인식은 역사를 인식하는 사람들의 상대적 지위에 달려있다."
(Roseberry 1989,
p. 57). 제주의 역사는 독립된 단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육지의 역사 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국 본토의 변방인 제주의 역사는 지배집단의 역사이며, 따라 서
육지 문화의 역사가 아니다(Kim 1992년). 제주 풍습이
육지 풍습(신유교 규범)을 면밀히 따르지 않을 때 그것은
공식적인 풍습이 될 수 없고 제주 사람들은 그들이 순응하지 않는 이 유를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보았듯이, 제주 사람들이 육지 풍습을 따르 지 않는 이유는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라 매우
다른 환경적 결정에 있다. 다시 말하면, 신유교 는 "부러운 문화"이지만, 제주 현실은 제주 섬이 이를 충실히 지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식민지 지배자, 즉 육지
중앙정부는 제주 풍습이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제주에 대한 신유교적 국가 의례를 제주 풍습에 맞췄다. 이것은
제주현(縣)의 주요 국가 의례에 대한 19세 기 중앙정부의 전략을 분석한 논문에
나타나 있다. 제주에서 매년 거행되는 국가 의식 중 일 부는 신유교보다는 무속적이었다. 이러한 국가 의식에 무속적인 내용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제주 사람들에게
중요한 신과 여신과 의식을 신유교 질서(초 1996, 253쪽)에 포함시키는 방식 이었기 때문이다(Cho 1996, p. 253).
제주 사회를 이해하고자 하는 외부인으로서 필자가 흥미로운 점은 왜
제주 문화를 육지 문화 의 관점에서 설명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주
학자들 은 그들의 풍습을 기술한 뒤 왜 그리고 어떻게 그들의 풍습이 육지 풍습과 신유교 규범과 다 른지 설명하기에 급급하지만, 이것들이 제주 문화의 중심인 이유는 김창민(1992년)과 같은 드 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설명되지 않고 있다.[37])
그러나 중국에서 유래한 신유학이 한반도 문화 에 미친 영향의 정도와 수 세기 동안 어떻게 한국 사회구조와 관습을 형성했는지에 대한
연구 들은-예를 들어, 심백섭의 연구(2005)-존재한다. 중국의 유래는 한국의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신유학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따라서 제주 정체성도 설명한다. 심백섭은 "한국 유교" 문화를, 한국 문화와 유교 전통- 두 가지 별개의 요소로 구성된 용어로 이해하려고
한 다. 한국 문화와 유교 전통은 내용과 구조에서 밀접하게 상호연결되어 있으므로 그것들을 연 구하려면
두 가지에 대한 통일된 접근법을 채택해야 한다. 그는 한국 유교 연구는 이데올로기 에 초점을 맞추고
국가와 국민, 그리고 지역, 공동체 그리고 가족 전통과 같은
사회적 조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인간관계 문제를 핵심으로 하는 신유
교 사상은 사회와 정치뿐만 아니라 장례 의식이나 가족 관계와 같은 의례와 관련된 이데올로 기, 세계관, 도덕적 규범에 대한 강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이
어떻게 신유 교 사상을 받아들이고 일상생활에 통합해 왔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유교 사상의
이러한 측면이 어떻게 한국 문화를 형성해 왔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그들이
하는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Shim 2005, p. 54).
한국 사회 신유교 사상의 변형을 연구한 또 다른 학자 듀클러는, 새 왕조 초기에 유난히 두드 러졌던 사회 문제와 관련한 "흔치 않은 법전(an unusual volume of legislation)”을 관찰했 을 때 그녀의 원래 연구
계획을 변경해야만 했다고 쓰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박사학위 연구 에서 "사회 변화의 지렛대가 된 유교의 요소들이 무엇이었는가?"와
같은 질문을 조사했다. 당 시 법률에 대한 이 연구는 사회구조의 합리화와 부계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사회구조의 재편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책은 한국 사회가 항상 부계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서, 신유교 사상이 항상 한국 문화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역사의 어 느 시점에(고려 왕조 말기
무렵에) 한국에 들어왔고 새로운 왕조(조선)의 엘리트들은 그것을 사회를 변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했다(Deuchler
1992, p. 3).
신유교 사상은 조선 시대에 공물과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행정기관을
통해 제주에 도입되었 다. 제주는 또한 일본의 침략과 해적들로부터 한국을 보호하고 원치 않는 정치 행위자들과
학 자들을 추방하기 위해 조선의 군사 기지로 사용되었다. 유교 서당이 제주에 세워졌고 조선 식 민주의는
서당에서 교육을 받은 제주 "엘리트"들이
육지 관료제에 합류할 수 있는 채널을 열 어주었다. 신유교 사상은 제주 사회에 신분 구분을 가져왔다: 평지 지대의 신유학 엘리트들은 신유교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육지 사회구조를 그대로 모방하면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바다에 서 생계(잠수와 어업)를 이어가는 해안 마을 사람들을 깔보았다. 이것은 제주 사람들이 육지의
신유교 규범에서 벗어나려는 집착(preoccupation)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제주 사람들은 식민 지 지배자들처럼 되고 싶고 그들의 대열에 합류하고 싶어 하지만, 정확히 식민지 지배자들처 럼 될 수 없다는 '식민지화'의 영원한 모순에 묶여있다. 제주 학술 연구는 이러한 모순을 탐구
한다.
여기에서는 신유교 사상이 한반도에 뿌리를 내리고 마침내 제주도에
뿌리를 내린 한국의 역사 적 맥락을 간략하게 소개할 필요가 있다.
2.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변화의 도구로서의 신유학
신유학은 주로 중국 남송시대(1127-127)의 현상이었다. 12세기 초 여진족이 북중국을 점령하 면서 고려의 남중국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힘들어졌다. 13대 중반 몽골 제국(원나라)가
등장하 면서, 고려 지적인 역사의 완전히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다. 몽골의
지배받은 고려는 거대한 다국적 시스템의 일부가 되었고, 수많은 인적·무역
관계가 고려를 베이징과 연결시켰다
(Deuchler 1992, pp. 15–16). 고려에게 있어서 이
새로운 사상의 세계와의 첫 접촉은 몽골 황실과 고려 왕실 가족 사이에 존재했던 긴밀한 혼인 관계에 의해 촉진되었다: 몽골 제국의 신유학 엘리트들과 고려인 사이 관계 또한 점차적으로 발전하였다.
원나라에서 유입된 신유학 의 본질은 정부와 사회를 위한 강력한 신유학 토대를 구축하는 것과 같은 형이상학적 고찰보 다는 실제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Deuchler 1992, pp. 4–20). 유교적 신념은 인간의 본성 이 원래 선하든
악하든 외적인 것에서는 완벽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
초기 신유학자들은 이런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하면 고려 시대의
부
패한 불교 관습을 바꾸는 것을 시작할 수 있을까? 사람은 내적인 감정으로부터 혹은 외적인 의례의 세부사항으로부터 변화를 시작해야 할까?(Deuchler 1992, p. 24)
이러한 사회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의례와 의식절차"를 따르는 것이었다. 의례는 사람 들의 내면 깊이 내재하는
감정에 심오한 영향을 끼치는 외부 영역의 올바른 행위들이다. 본질 적으로 통치란 다루기 힘든 사람들의
본성이 국가의 통제를 받고 우주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 는 교육적이고 규제적인 과정이었다. 그것은 풍속(風俗)으로 표현되는 사회의 기본 관계를 활 성화하여 사람들을 개혁하는
문제였다. 풍속(風俗)은
국가의 기본적인 도덕에너지를 상징했다. 풍속을 ”선하고 풍요롭게“ 되도록 육성하는 것이 국가의 주요한 의무였다. 풍속의 본질은, 인 간 사회에 근본적이고 변할 수 없는 구조를 제공하는 세 가지 기본 인간관계 (a) 지배자와 피 지배자의 관계 (b) 아버지와 아들 (c) 부부 안에 담겨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교육 과정의 핵 심인
예(禮)-올바른 의례적인 행동-의 개념에 의해 유지되었다. 예(禮)의 발전은 4가지 의례로 촉진되었다-두건(망자와 가까운 가족들이 장례식에서 쓰는 모자), 혼인, 애도(상복) 그리고 조 상 숭배.
예를 들어, 조상 숭배의식은 어떻게 일이 올바르게 행해져야 하는지 보여줄 뿐만 아 니라, 참가자들 사이에 조화를 이루는 효과적인 방법을 실례를 들어 설명한다. 따라서
의례는 개인을 넘어서 친족의 집단성, 더 넓은 의미에서 사회 전체의 집단성을 다룬다(Deuchler
1992, pp.
108–111).
3. 부계 혈통을 강화하는 방법인 조상 숭배의식
본토(그리고 결국 제주)에서 친족 관계의 친밀한 주요 의식은 조상 숭배였다. 조상 숭배 그룹당내(堂內)는 보통 부계 친척들로 구성되며, 이들은 공통의 고조부로부터 그들의 혈통을 추적 하여 다섯 개의 애도 등급인 오복(五服)에 따라서 서로 상모를 썼다(Deachler
1992). 이 풍습 은 1970년대까지 제주에서 행해졌다.[38])2
조상 숭배의 경제적 기반은 공유된 토지였으며, 보통 그 토지는 가족 중 가장 직계 남자 후손 이 관리하였다. 제주에는
이런 조상 숭배의 경제적 기반이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 왕조 초기 에 땅은 많았지만 인력이 부족했다. 농업의 발달로 인구가 크게 증가하여서 16세기 중반 경에 절정에
이르렀지만, 임진왜란(1592-1598) 때 감소했다가 17세기 후반에 다시 증가하였다 (Deuchler 1992, pp.
9–10). 평등한 상속 관습과 노예 소유의 감소로 인한 경작지의 분할은 부계 혈통 그룹의 지위를 약화시켰다. 17세기 말까지 장남이 독점적인 상속자로 인정받은 것 은 의례의 중요성과 재산 공유로 인해 야기된 문제에 대한
대응 측면에서 점진적인 성장의 절 정이었다.
조선 후기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은 고도로 구조화된 부계 후손
집단에 기반을 둔 친족 제도였다. 부계(父系)는 안동 마을의 김씨나 전주 이씨와 같이 공통 후손의 유래를 시조(실제
최초의 조상 또는 추정되는 최초의 조상)와 본관(조상의 거주지가
같은)에서 찾는 부계 친족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제주에서
같은 원리가 부계 성씨에 사용된다. 가문(lineage)은
한국 상 류층의 사회 조직을 상징했다. 조선의 엘리트 계층은 전체 인구의 10%를 넘지 않는 비교적 작은 계층이었지만, 그들은 후손(descent)과 세습에 의지하여 정치적 과정과 경제적
부, 유교 학문을 독점하였다(Deuchler 1992, pp.
6–12). 부계 혈통과 가계는 첫째 부인의 첫째 아들에 의해 형성된 주요 계통과 동일
어머니에 의해 첫째 아들 이후에 태어난 아들들에 의해 형성된 지계, 그리고 둘째 부인의 자손으로서 이차적인
신분이기 때문에 부계 혈통의 완전한 자손이 아닌 제2의 아들들을 명확히 구별하였다. 제주에는 부계 조상을 위한 "조상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아들을 얻기 위하여 "작은 부인들"이 있었지만, 그러한 관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장자상 속제를 통하여 혈통의 영속이 보장되었고, 엄격한 혈통 외혼이
지켜졌다. 제3장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제주 풍습과 대조되는
것을 주목하면, 제주사회에서 혈통외혼을 늘 따른 것은 아니 며 혈통 영속은 양자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아들들 사이에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하는 관습이 있어서 맏아들에게는 특별한 특권이 없었다. 새로운 혈통이나 계보를 형성하기 위한 주요 동 기는 고위 정부 관료의 명성인 조상의 위신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친족 구조들을 하나 로 묶은 것은 공통의 후손과 공통의 지리적
초점인 원래의 조상 거주지에 대한 기억이었다. 공통
후손의 중요한 증서는, 대략 1600년부터 다수 나타나기
시작하여 1930년대 초반까지도 가장 빈번하게 인쇄된 출판물인 족보였다. 제주에서 7권까지 있는 부계 족보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한동안 저명한 인물(다시 말해, 시험 합격자 또는 정부 관리)을 배출하지 못한 보다 큰 후손 그룹
내 분파는 결국 기록에서 제외되었다. 딸들은 결혼했을 때만 족보에 올랐고, 족보 에 올린다고 하더라도 남편의 이름 옆에 올려졌다. 제주 족보에서도
같은 패턴을 보인다.
4. 신유학 도래 이전의 고려
조선 후기의 이러한 고도로 구조화된 부계 친족 제도는 부계와 모계와 (제주에서처럼) 인척을 포함하는 500년 전의 고려 친족 제도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뤘다. 고려시대 친족 집단은 남성 관계성과 여성 관계성을 통하여 그 후손의 기원을 밝혔으며(Deuchler 1992, 페이지 38–39) 처가 거주가 흔했다. 거주 선택에 대한 뚜렷한 제약은 없었다. 고려 남자는 양가 친척으로
둘 러싸여 있었고 이런 혈연관계로부터 그의 혼인상대자와 삶의 협력자-심지어 그의 신부까지 종
종 나타났다(Deuchler 1992, pp. 77–80). 수 세기에
걸쳐 고려 사회는 점차 변화했고, 고려 사회 조직에 내재된 유연성과 전략은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부계적으로 계산된 규칙에 의 해 좁혀졌다. 위에서부터 추진된 이러한 발전은 주로 사회의 정점에 있는
정부의 공공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귀족들의 사생활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고, 평민들에게는 더더욱 영 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고려 말기에 신유학의 출현을 위한 토양을 마련했다. 고려–조선 변화의 가장 놀랍고 광범위한 특징은 혈통의 계산을 엄격히 좁혔다는 점 인데, 남성의 관계성뿐만 아니라 여성의 관계성을 통해 후손의 기원을 밝히던 고려의 포괄적 혈통 원칙은 엄격한 부계
계통으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모계 친척들에게 가장 큰 영향 을 미쳤고, 여성들은 결혼을 통해 남편 집단에 통합되면서 일반적으로 그 지위와 경제적 독립 을 상실하게 되었다. 주거규칙은 처가에 사는 것(여성이 결혼하여 친정 부모의 집에서 사는
게 가능한) 또는 양쪽 집에 번갈아 거주하는 것(거주지 선택이
선택적이었다-자녀가 태어난 후 여자는 남편의 집으로 이사했다)에서
부계측 거주(여성이 결혼하면 항상 남편의 집에서 살 도록 하는 것)로
바뀌었다. 후손들은 외혼을 하게 되었다(혈통 외 결혼). 신유학 스타일 입법 의 점진적인 시행은 고려 시대 여성의 전통적인 경제적 독립을 눈에 띄게 잠식했다. 1413년 법으로 제정된 부계 계승의 도입은 아내들의 서열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여성들이 남편의 가 족에게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부계
거주의 요구로 의해 강조되었고, 여성의 상속분 배당을 어렵게 만들었다. 5. 신유학의 제주 도래
제주 섬사람들은 생태조건과 (단순 농업과 어업, 잠수, 목축 등 하층 직업이 병행하는) 생산 방식이 다를 뿐만 아니라 반도의 조선 왕조 권력의 중심지와의 거리와 고립으로 인해 신유학 의 우주론적인
측면에서 비독립체였고, 다소 색다른 두 환경이 없었더라면 한동안 조선 신유
학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Nemeth 1987, pp.
109–110). 첫째, 제주의 이국적인 공물들은 조선 왕조의 엘리트들에게 수요가 많았으며, 그들은 다시 이것들 중 일부 를 중국의 통치자들에게 공물로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제주의 이국적인 자원에 대한 이러한 필요성은 일찍부터 제주 섬을 조선 왕조의 국가 행정으로 빠르게 통합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다시 국가가 표준화된 신유학 교육 과정을 통해 역사적으로 통제되지 않았던 섬 주민들
을 달래야만 했다. 둘째,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제주가
주된 유배지가 되었고, 조선 왕조
500년 역사의 많은 뛰어난 인물들이 제주로 유배되었다.[39])4
유배 온 신유학자들과 관리들은 섬사람들의 교육을 도울 의무가 있다고 느꼈다. 게다가, 그들 의 유배 조건은 너무 가혹해서 많은 사람들이 본토로 돌아갈 희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섬 에 그들 자신을 위한 집을 만들어야 했다. 제주를 그들 스스로
거주할 수 있도록 한 이런 행 위는 지역 문화 풍경을 신유학의 틀로 효과적으로 변화시켰으며, 또한 유배
온 학자와 예술가 들이 제주 현실에 의해 변모하게 되었다.
두 관점 모두에서, 이러한
변화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있다. 한 예로 조선 왕조의 신유학자이자 저명한 화가 겸 서예가인
김정희(1786-1856)가 있다. 좋은 가문 출신에 매우
재능있는 인물인데, 어려서부터 천재로 알려져서 김정희는 매우 거만하였다. 그의 거만함은 유명한 절을 찾아가서 사찰 입구에 걸려 있던 주지 스님의 서예를 비판하며 그것을 내리고 자 신이
직접 쓴 서예를 걸라고 한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24세
때 외교관인 아버지와 함께 중국(청나라)을 방문했다. 당시 북경은 예술과 학문이 번성한 곳이었다. 젊은 김정희는 중국
여행 전 10년 동안 북경의 유명한 몇몇 학자-정치인들(예를 들어, 옴방관)을 만나기 위해 스 스로 준비했다고 한다. 이 중국 학자들은 김정희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했는데, 그는 마침내 서른 살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 요직에 올랐다. 그러나 1840년 그의 가족을 총애했 던 왕이 죽자, 그는 55세 때 혼자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는 가시 울타리로 둘러싸인 작은 집 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지역
풍토병과 생소한 음식과 외로움에 시달렸다. 그는 여생의 대부 분을 제주에서 보냈으며, 혹독한 기후와 강한 바람으로 인해 제주에서의 삶의 어려움에 대한 시를 썼다.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가 세한도이다. 그것은 노송 3그루가 있는 빈집을 단순하게 그린 것으로, 날 것 그대로의 거친
느낌과 추운 겨울 날씨에도 소나무만이 시들지 않고 푸르름을 유지할 수 있다는 느낌을 전해준다. 이 그림에는 ”오랜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예 액자를 내려놓았던 내 오만한 손, 긴 유배 생활이 끝나면 내
손으로 내려놓았던 그 서예 액자를 다시 걸리라.“는 시가 곁들여 있다.
이 그림은 인간 조건 의 기본적인 딜레마, 즉 좋을 때나 궂을 때나 신의(信義)의 중요성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이 그림은 김정희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유명한 시인인 이상적을 위한 그림이라고 하며, 이상 적은 제주에 사는 동안 성숙해진 김정희의 태도를 따라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표현한 시를 쓴 바가
있다.
6. ”조상의 깊은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기(불휘)“
(2016년 현장 연구를 하기 전) 필자가
제주도에 있을 때, 제주 섬 문화에 대한 내 관심을 보 고 한 남자분이 책 한 권을 건네주었다. 그 책의 제목을 영어로 번역하면 "깊은 뿌리: 경주 김 씨 제주도 종친회지"이다. 그는 이 책이 그의 가족 이야기를 담고 있고, 내가 제주 문화에
관 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읽기를 원했다. 12권 시리즈로 되어 있는 이 책은 2011년 제주도에서 출판되었다. 그것은 거의 4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제주와 본 토에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인
그 가문의 많은 저명한 사람들이 쓴 김씨 가문의 조상들에 대한 글들을 담고 있다. 그 책은 600여 년 전 제주에 도착한 김씨 가문 최초 조상의 초상화 와 무덤(사진 1-2), 임진왜란 (1592–1598)(사진 3) 당시 귀한 공물인 말을 중앙에 바치고 그 대가로 높은 벼슬을 얻은 유명한 조상 김만길(金萬吉)의 초상화(사진 3), 김씨 종친회의 초대 회장(1953)의 초상화를 포함하여 많은
사진들이 들어 있다. 그 책에는 상업 광고가 들어 있 고, 기부한
종친들의 명단을 기부 금액별로 담고 있다. 이 책의 말미에 있는 부록에는 신라 왕조 김씨 가문의 왕실
역사가 들어 있다. 필자는, 한국에서 역사 시간에 신라왕국(삼국 중 하
나)의 건국 시조가 박씨라고
배운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필자가 받은 책에 실린 신라 왕실의 계보를
보면, 신라 최초의 왕 이름이 박씨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왕국은 거의 1,000년 동안(기원전 57년–기원후 917년) 지속되었다. 그러나 필자가 이 계보를 자세히 읽으면서 박씨 일족이
왕조 초기에 총 56명 왕 가운데 일곱 명의 왕만을 배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개의 독립된 기둥(하나는 김씨 왕가의 계보를 나타내고 다른 하나는
신 라 왕가의 계보를 나타냄)으로 보아, 그 족보는 김씨
왕가의 왕과 왕비가 서른여덟 명이었음 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 왕실 계보에는 각 왕의 부인과 그 부인의
아버지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족보는 사실상 김씨 일족의
"깊은 뿌리"를 보여준다. 제주
김씨는 약 600년 전 조 선 시대 때 경상남도에 위치한 신라왕국의 수도 경주에서 제주로 입도(入道)한 경주 김씨로 시작되었다.
1953년 제주 경주 김씨의 최초 종친회가 열렸다. 위에 언급된 경주 김씨 일가의 사례는 2장에서 논의한 우도의 또 다른 김씨 일가의 신유교 관습과 똑같았다. 부계
족보, 조 상 숭배의식과 조상 무덤은 한국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고 제주 사람들에게서도 행해진 신유교
관습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이러한 관습은 조선 초기 국가 건설자들이 의도한 대로 일정한 사회 질서를
유지한다. 이러한 관습은 한국 정체성의 상징이 되었지만, 현대
한국에서는 2005 년 한국 가족법이 개정되면서 이러한 관습은 무너지고 있다. 제주 사람들은 이러한 신유교 관 습을 따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다. 그러나
제주 사람들은 신유교 의례 외에도 그들만의 풍 습을 발전시켰다. 남자들이 주관하는 신유교 사상을 따른다는
미명 아래, 제주 사람들은 "제주 현실"이라고 일컫는 제주 환경과 양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의 일상생활의 체계를 세워야 했다. "제주 현실"의 짐은 주로 여성들, 특히 녀들의 어깨에 지워져 있다.
주석
1.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까지 교육을 받았지만, 나에게 개인적으로 영향을 준 한 가지 특별 한 점, 즉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여성의 사회적 종속적 위치를 지정하는 방식 외에는 사람들의 삶에 미 치는 성리학의
중요성을 파악하거나 생각해 본 적이 없다.
2. 조해정, 2016년 봄 개인 인터뷰
3. 도이클러는
고려 여성들이 누린 유리한 경제적 지위가 옥소랄 주거의 압도적 매력의 기초라고 생각한 다(1992년, 페이지 66).
4. 기록에
따르면 조선왕조는 역사를 통틀어 200여 명의 신하를 제주로 유배시켰다. 망명자들의 사회적 지위는 퇴위된 군주와 다른 왕족, 신하, 정치인에서부터 학자와 성직자까지 매우 다양했다.
5. 2005년 2월 28일
대한민국 17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논란이 되고 있는 민법 개정안을 통과시켰
다.
개정 초안은 결국 가족법에서 가장 경합이 심한 두 가지 요소를 제거했다. 새로운 가족법에
따르면, 각 개인은 가족의 구성원이나 가장이 아닌 개인으로 국가에 등록한다. 결혼한 부부들은 아이의 성을 결 정할 수 있다. 엄마의 성이든 아버지의
성이든 말이다. 개정안은 지속적인 법적 형태의 성별 위계질서를 종식시켰다. (신기영 2006).
결론
변화와 지속성
"1970년대 이후 녀들의 경제활동은 여성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관광과 감귤 산업의 발전과
함께 줄어들었다."[40])1
제주 사회의 변화
제주 섬은 1970년대부터 녀
수가 줄어들면서 사회생활의 근간이었던 친족 제도와 공동체성 을 띤 마을 생활양식이 급격히 변하면서 빠른 변화를 겪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본토의 산업 발전에 따른 결과들이다.
제주가 본토 경제·정치 중심지의 변방에 있고 주요 천연 자연과 인적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관광산업 방안이 지역발전의 토대로 도입되었다.
1973년 중앙정부가 제주도 종합 관광 계획을 입안하였고 1975년
제주도 관광 개발 계획이 수립되었다(Shin 1987,p. 76). 그 이후로 제주도 관광
개발 계획이 제주 지역사회와 인구에 미치는 사회·문화적 영향과 실현 가능하고 바람직한 혁신 모형에 대한
많은 논쟁이 뒤따랐다(Kim 2003, p. 20). 40 년 전 제주 사람들은
경제 발전이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제주도(道)와
육지 사이에 공평 한 이익 분배에 몰두했다. 한편,
현재 주된 관심사는 오늘날 제주가 지니고 있는 가치들(녀 들의
생활양식과 같은 독특한 자연 자원과 문화 자원)를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과 미래를 설계 하기 위하여 그러한 가치들을 어떻게 최대한 활용할 것인가에
있다. 예를 들어, 2012년 '제주 유네스코 보호지역 세계 유산의 성공적 관리와 활용방안(공식 용어 확인할 것!!!)[41])" 컨퍼런스
에서, 한 참석자는 "제주 생물다양성 보전지역 지정은 제주의 자연유산이
가치 있는 자산임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제주 공동체 발전의 역사적 궤적과 제주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했다(Hyun 2012, p. 83). 2015년 학술회의에서는
제주 섬의 문 화관광과 제주 지역사회의 지식을 문화 자원으로 확립하고 공유하는 것을 주제로 다루었다.
제주 녀들의 삶에서 배운 교훈을 다룬 또 다른 학술회의에서, 한 참가자는 녀 공동체에서 발견한 "공생 모델"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Cho에 따르면, 녀의
생활양식은 자연 과 인간의 공생이라고 한다(Cho 2016, pp. 95~96). 그것은 현명한
발전이다. 녀의 물질은 효 도하는(dutiful) 딸들의 산업이다. 맥도널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여성의 자연 환경과의 생태학 적 관계는 일본 아마(海女)사이에서도 주목받고 있다.[42])4
맥도날드에 따르면, 아마(海女) 공동 체는 1970년대 중반에 바다 밑의 자원 고갈을 피하기 위해
스쿠버 다이빙을 거부하는 집단적 인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지속성: 새로운 해석: 에코 페미니즘
위에서 언급한 제주 사람들의 현재 논쟁과 주된 관심사 넘어, 여성 중심 사회로서 지역 정체 성을 재확인하는 제주에서의 중요한 사회운동을 짚어볼 가치가 있다. 이 운동의 장소는 제주 돌 공원이라고 불리는 300헥타르의 거대한 박물관 공원으로, 자연적으로 조각된 수천 개의 돌 조각품들이 있으며, 설문대 할망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여성 모형이 누워있는 모양으로 놓여져 있다(사진 1). 이 공원의 목적은 제주의 집단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지고 있던 이 거대한 여 신의 제주 ”창조 신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2007년부터 매년 5월 15일부터 2주 동안, 그 공원 은 9명의 여사제가 주재하는 거대한 여신 축제를 기념한다.컨셉 디자이너이자 공원 관장인 백운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공원의 주제가 (신화 속 이야기처럼)
제주도를 창조하고 500명의 아들과 제주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거대한
여 신 설문대 할망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제사를 주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Paek 2011,
pp. 52– 61). 남자들은
세상을 물질 만능으로 만들었고 그것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제 여성들이 남성 들이 만든 난장판을 치우는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여성들이 그 의식을 치 루기를 바란다“(Lee
2012, p. 61). 그 축제를 이끌곤 했던 인류학자인 Chun교수의
지적처럼, " 인생은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것은 사람들이 늘 가지고 있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설 문대 할망 이야기를 거듭거듭 기념하고
논의하는 이유가 "제주 사람들의 존재의 핵심을 재발 견하기 위해서이다"(Chun 2011, p. 12).
제주 사회에서 여성과 거대 여신의 역할에 대한 백운철 관장의 인식은 생태학과 페미니즘을 결합하여 1970년대에 형성된 에코-페미니즘(Lee 2012, p.61)과 다소 유사하다.
페미니스트들은 차별을 통해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가 자연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자본주의적인 생산 방식과 연결돼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여성에 대한 억압과 자연에 대한 억압을 그들이 반대 하는 쌍둥이 억압으로 정의했다(Park 2005, as quoted by Lee 2012, p. 60). 에코페미니즘의 개 념은
이 책에서 논의된 녀들의 역사와 가치 체계와 밀접하게 일치한다.
녀들은 일본의 야 심찬 "범아시아주의" 계획(Aydin 2008)의 일부인 일본 식민주의에 대항하여
싸웠고, 혹독한 자 연 착취-제주 녀들의
생계의 원천인 바다는 일제가 필요한 많은 (해초 감태로 만들어지는) 화약을 제공했다-에 맞서 싸웠다(서론
섹션 5 참조).
스쿠버 다이빙을 허용하고 고의적인 임금 통제를 통한 녀 노동력 착취를
가능하게 한 일제 의 천연자원 과도 사용 문제는 20세기 초 녀들이
직면해야 할 문제였다. 이제 21세기에, 녀들은 바다 오염과 같은 다른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시장 경제와 같이 생산량 문제만 놓고 본다면,
스쿠버 다이버 1명의 어획량은 녀
20명의 어획량과 맞먹는다(Yu 2016). 녀들은 자 신들의 전통적인 영역에서 스쿠버 다이빙 사용을 피하고 매년 씨앗을 심음으로써 천연자원을 보존하고 보호한다. 녀들의 집단 결정은 천연자원이 지속적으로 재생되도록
한다. 녀의 재 산의 기반은 개인의 물질 능력이나 그들이
채취한 해산물양이 아니라, 천연자원의 지속적인 회복이다. 소생이다. 녀들이
삶의 신조로 삼아 살아가는 무언의 좌우명은 공존, 공동 번영,
공동 이익이다(An 2005, p. 279). 개인 이익은 공공의
이익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1979년 Cho
가 지적했듯이, 녀들은
우리에게 인간과 자연의 공생 관계가 가능한 삶의 모델을 보여준다.
지구와 인류의 생존을 위한 이 공생 모델의 중요성과 지구적 장애에 대한 지역적 해결방안은 반다나 시바, 머천트와 같은 저명한 학자와 과학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지적되어 왔다. 세계 가 더 많은 기후 변화를 경험함에 따라,
작고 고립된 지역사회가 더 극단적인 조건과 신자유 주의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위협받고 있기 때문에,
재생을 위한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제주의 여성들과 같은 단체들이다.
제주의 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만을 바 다에서 겸손하게 가져가는 수 세기
동안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 어느 한 쪽 성(性)도 지배하지 않는 모델로 제주도에서 발견한 균형은 잊고 있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신호이자 등대 역할을 한다. 이 책은
과학기술의 가치와 우리 사회가 ”진보“하고
있는 방식을 성찰하여 재평가하자 는 호소이며, 여성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변화와 위협에 맞서 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조용 히 함께 일하는 여성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주석
1. 2002년, 페이지
323
2. 2012 IUCN 세계보존콩그레스 제주 워크숍 및 2012년 9월 8일 제37회 제주학술회의.
3. 제주해녀박물관[제주 해녀문화자료](2016년)에서 한글로 출판된 학술대회.
4. 맥도날드
2015. 제주 문화자원지역학회 논문 발표 '아마 선조들의 전통을 계승: 지역사회
기반 해양자 원 관리의 지렛대로서의 문화적 정체성'
5. 세계
속의 세계 카탈로그의 에세이 "아티스트 컬렉션"에서: 미국의
조각가인 리처드 로젠블럼 중국학 자 암석 컬렉션은 아시아 문화에서 돌과 암석의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프랑스 학자 롤프 스타인은 초기 중국인들이 가장 높은 산 어딘가에 바깥 세상을 정확히 나타내는 동굴이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만족의 젖을 뿜어내는 종유석이 있었다." (캠브리지 MA:
하버드 대학 박물관, 1997), 페이지 117. 이러한 생각은 남북, 동서
외에 가장 중요한 방향은 '안'이라는
중국인의 개념에 의해 강화되었다. 서양의 문화가 위아래로 바라보듯이 중국 문화가 사물의 내부에서 천국을 찾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내적 관심 때문이다. 중국 미술에서, 이러한
방향은 놀랍고 예측할 수 없는 장소에서의 이미지를 위한 "세계
속의 세계"를 검색하게 했다.
감사의 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출판에 기여했다. 무엇보다도, 바비에 뮐러 미술관 문화 재단의 재정적 인 지원이 없었다면, 나는 24년간 캐나다 연방정부에서 일하다가 은퇴했을 때 이 책을 쓸 생 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적적으로, 파리에 사는 동료 로젤린 시갈렌을 통해 재단과 연결이
이루어졌다. 로젤린은 서수마트라의 미낭카바우족에 대한 내 연구를 읽고,
모계 사회에서 여성 의 지위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캐나다로 나를 만나러 왔다. 그녀는
내가 모계 사회에 관한 책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프로젝트 자금을 찾아다녔다.
제주에서 만난 두 여성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주 현장 연구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성미 와 송희정, 두 사람은 내 연구팀이
되었고 내가 마을에 정착했을 때 마침내 가족이 되었다. 이 두 사람의 중재로 우도 하목동 마을 사람들과의
연결과 나의 현장 연구는 훨씬 수월해졌 다. 바쁜 일상에서 시간을 희생해 주신 두 분들께 감사드린다. 제주 잠녀(해녀)의 아름답고
훌 륭한 사진을 아낌없이 제공해주고 제주와 우도의 역사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해준 고성미 선생 에게 특별히 감사드린다. 제주 녀의 사진을 담은 책들은 많지만, 내가 직접 보고 내 책에서 묘사하고 싶었던 여성들의 정신과 빛나는 기운을 포착한 사진작가는 없다. 고성미 선생의 사 진들이 내가 그 이미지들을 말로 옮겨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울 뿐이
다. 신비라고 할 밖에!
원고가 작성되었을 때, 언어와 인류학 개념을 다듬는데 몇몇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남편 에릭 슈위머(유명한 인류학자)와 친구 힐러리 맥켄지, 트루먼 맥헨리가 편집과 교정을 해주었 다. 이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제주대학교에서 여름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제주 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문을 열어준 고창훈 교수와 관광객으로서 처음 제주를 방문했을 때 고 창훈 교수를 연결시켜 준 김미정
선생께도 감사드린다. 단계마다 여러 사람들이 내 삶에 들어 와 제주 연구를 위한 길을 닦주었지만, 내가 캐나다 연방정부에서 은퇴하고 한국 특히 제주에 가는 것은 내 인생 계획에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를 위해 이 모든 프로젝트를 설계한 것은 제주의 거대한 여신인 설문대 할망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이 거대한 여신이 나를 제주로 유인한 나의 어머니일 가능성이 있는가?
이것은 내가 제주에 대해 배우고 이 책을 쓰는 것이 즐거웠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나에게는 수수께끼이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바비에 뮐러 미술관 문화
재단의 모토를 이해하게 되었다: "
각각의 사 람은 형제애를 숨긴 채 가면을 쓰고 있는 우리의 대역이다.(Each person is our double, wearing a mask hiding
this fraternity?? 뜻이 맞나?) 인류에 대해서 알려면 우리 자신을
더 잘 아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인류 형제애의 가면을 벗기고 수천 년 동안 외딴 섬에서 펼쳐진
제주 사람들과 녀들의 인간 투쟁을 탐험할 기회를 주신 재단에 감사드린다. 제주 사람들과 녀들의 역사 와 투쟁은 우리 인류의 것이다! 이 책을 쓰려고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만난
이 프로젝트 연구가 즐거웠다.
[1] ) 주(註) Annette B. Weiner. 1976. Women of Value, Men
of Renown: New Perspectives in Trobriand Exchange, (St Lucia: University of
Queensland Press), p.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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