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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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역사학자.
1978년 11월 26일 경상남도 거제시에서 출생했다. 『반전의 시대』 앞쪽 책 날개와 『유라시아 견문』 1, 2 앞쪽 책 날개에 따르면, 그의 할머니는 1.4 후퇴 때 흥남에서 만삭의 몸을 이끌고 미군 배에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거제도에 정착하여 그의 아버지를 낳았다고 한다. 『단번도약 북한 마스터플랜』 헌정사에 "눈보라 휘날리는 흥남부두에서, 자갈밭 서걱거리는 거제도까지. "최초의 탈북자"이기도 하셨던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라고 적혀 있는데, 그의 조부모는 실향민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98년 연세대에 입학했다. 학부에서 사회학,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지도교수는 중국근현대사 전공의 백영서 교수이다. 2009년 「'두 개의 중국'과 화교정책의 분기 : 반둥회의(1955) 전후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2015년 「중화세계의 재편과 동아시아 냉전 : 1945-1991」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프레시안 기획위원 및 기자로 3년 여정의 '유라시아 견문'을 진행하였다. 이병한이 프레시안에서 작성한 기사 목록 2018년 귀국 후 잠시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 연구교수로 재직하였으나, 재계약에 실패한 모양인지 원광대 동북아인문사회연구소 사이트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현재는 사단법인 다른백년#의 대표를 맡고 있다.
1998년 연세대에 입학했다. 학부에서 사회학,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지도교수는 중국근현대사 전공의 백영서 교수이다. 2009년 「'두 개의 중국'과 화교정책의 분기 : 반둥회의(1955) 전후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2015년 「중화세계의 재편과 동아시아 냉전 : 1945-1991」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프레시안 기획위원 및 기자로 3년 여정의 '유라시아 견문'을 진행하였다. 이병한이 프레시안에서 작성한 기사 목록 2018년 귀국 후 잠시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 연구교수로 재직하였으나, 재계약에 실패한 모양인지 원광대 동북아인문사회연구소 사이트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현재는 사단법인 다른백년#의 대표를 맡고 있다.
- 『반전의 시대 : 세계사의 전환과 중화세계의 귀환> 2016.5. 서해문집 [6]
- 『유라시아 견문 1』 2016.9. 서해문집
- 『유라시아 견문 2』 2018.3. 서해문집
- 『유라시아 견문 3』 2019.1. 서해문집 [7]
- 『붉은 아시아 : 1945-1991 동아시아 냉전의 재인식』 2019.8. 서해문집 [8]
- 『개벽파선언 : 다른 백년 다시 개벽』 2019. 9. 모시는사람들 (공저) [9]
- 『단번도약 북한 마스터플랜』 2021.6. 라이스메이커 [10]
- 『어스테크, 지구가 허락할 때까지』 2021.9. 가디언 [11]
- 『테크노 차이나 : 대반전과 대격변의 서막』 2022. 8. 라이스메이커 [12]
- 『이병한의 아메리카 탐문』 2025. 6. 서해문집 [13]
그는 도널드 트럼프를 비난하면서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주의를 적극 지지한다.# 친러적인 글을 종종 쓰며# 미국을 적폐로 여긴 나머지 여성혐오로 악명높은 탈레반을 지지하는 추태를 보여주고 있다. # 현대 유라시아주의 사상을 지탱하는 알렉산드르 두긴의 사상을 홍보하고 옹호했다. #, #, # 그리고 오늘날 통합된 유라시아를 만드는 것은 보수적으로 변한 서구권의 대립주의적 시각보다 실용적이고 발전적이라 일컫는다.
푸틴에 대해서도 우호적이다. 『유라시아 견문 3』 434쪽에는 "푸틴식 주권민주가 옐친의 자유민주보다 더 공정하고 더욱 공평하며 더더욱 합당한 질서를 창출해내었다."라고 적었다. 푸틴이 "과(過)가 없지 않다. 그러나 공(功)이 훨씬 더 크다. 상황에 즉하여 평하자면 공이 7이요, 과가 3이다."라고 하면서 푸틴의 과오는 하나도 적지 않았다. 물론 러시아가 푸틴의 치세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말살되고, 완전한 독재국가가 되었다는 점과 부정부패가 심각해졌다는 점은 무시한다.
푸틴을 찬양하는 반대급부로 우크라이나는 무조건 폄하한다. 2014년 우크라이나의 "민주화"는 "나치의 후예"가 민주적으로 당선된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몰아낸 "민간 쿠데타"라고 정의했다. [14] 그리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등장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하며, #, 젤렌스키가 무능하다고 비하하였다. #
2017년 프랑스 대선 당시에는 마크롱의 관대한 이민정책을 비난하며 마린 르펜을 교묘하게 옹호한 바 있다.#[15]
프랑스 무슬림들에 대한 조직적 차별이 신좌파와 68혁명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내가 샤를리다" 운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2차 대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국가를 소련과 중국으로 칭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두 나라의 사상자가 가장 많고, 추축국인 일본과 독일의 확장 저지를 성공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16] 그리고 나머지 국가들은 모두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심취한 것으로 싸잡아 폄하한다.
이병한의 러시아 관련 입장, 계몽주의/자유주의에 대한 혐오, 반이민적, 민족주의적 성격은 유럽 우파 포퓰리스트 또는 QAnon을 위시한 대안우파들이 지니는 시각과 유사하다.
푸틴에 대해서도 우호적이다. 『유라시아 견문 3』 434쪽에는 "푸틴식 주권민주가 옐친의 자유민주보다 더 공정하고 더욱 공평하며 더더욱 합당한 질서를 창출해내었다."라고 적었다. 푸틴이 "과(過)가 없지 않다. 그러나 공(功)이 훨씬 더 크다. 상황에 즉하여 평하자면 공이 7이요, 과가 3이다."라고 하면서 푸틴의 과오는 하나도 적지 않았다. 물론 러시아가 푸틴의 치세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말살되고, 완전한 독재국가가 되었다는 점과 부정부패가 심각해졌다는 점은 무시한다.
푸틴을 찬양하는 반대급부로 우크라이나는 무조건 폄하한다. 2014년 우크라이나의 "민주화"는 "나치의 후예"가 민주적으로 당선된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몰아낸 "민간 쿠데타"라고 정의했다. [14] 그리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등장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하며, #, 젤렌스키가 무능하다고 비하하였다. #
2017년 프랑스 대선 당시에는 마크롱의 관대한 이민정책을 비난하며 마린 르펜을 교묘하게 옹호한 바 있다.#[15]
프랑스 무슬림들에 대한 조직적 차별이 신좌파와 68혁명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내가 샤를리다" 운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2차 대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국가를 소련과 중국으로 칭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두 나라의 사상자가 가장 많고, 추축국인 일본과 독일의 확장 저지를 성공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16] 그리고 나머지 국가들은 모두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심취한 것으로 싸잡아 폄하한다.
이병한의 러시아 관련 입장, 계몽주의/자유주의에 대한 혐오, 반이민적, 민족주의적 성격은 유럽 우파 포퓰리스트 또는 QAnon을 위시한 대안우파들이 지니는 시각과 유사하다.
이병한은 김정은에 대해 "차라리 그를 쉰이 되고 예순이 되고 일흔이 되어 '계몽군주'가 되도록 견인하는 편이 남한에게도 이로울 것이다. 불가능을 꿈꾸되, 리얼리스트가 되어야 한다."라고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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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5일부터 2021년 4월 28일까지 프레시안에서 『단번도약, 북조선』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연재하고는 『단번도약 북한 마스터플랜』이라는 제목을 달아 단행본으로 출간해버렸다. 이병한은 이 글에서 김정은을 크게 미화하면서 온갖 무리수를 두었다. 「북한의 새 과제는 '압축성장' 뛰어넘는 도약」이란 글에선 김정은과 김여정을 두고 "다행히도 현재 북조선의 리더는 10대 시절 외국에서 공부한 유학파 남매이다. 공교롭게도 유럽 중에서도 가장 세계화된 스위스에서 살았다."라고 썼다.
「글로벌 스위스」 기사에서는 "정은이와 여정이"처럼 친근한 애칭을 쓰기도 하고, 북한이 "그토록 주체를 고수하는 것만큼이나 스위스 또한 여태껏 EU에 가입하지 않고 통화주권을 고수하며 고유한 영세중립을 사수할 만큼 외통수인 점 역시도 적잖이 닮았다."라며 스위스의 영세 중립과 북한의 고립을 대등하게 비교하고 있다. 북한이 단번에 도약을 이룰 수 있을 거란 근거 없는 기대를 덜기도 함다. "개성시에다가 글로벌 대학(...)을 세우고 남북한과 한반도 주변 4대강에서 온 교수진과 학생들로 구성해서 20세기 한반도에서 얽히고설킨 비극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21세기 평화체제의 실마리로 삼는게 좋다", "북한은 어느 국가보다 전시체제를 오래 경험한 탓에 영구평화를 더더욱 미래의 사명이자 국시로 삼아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라는 비현실적인 주장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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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5일부터 2021년 4월 28일까지 프레시안에서 『단번도약, 북조선』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연재하고는 『단번도약 북한 마스터플랜』이라는 제목을 달아 단행본으로 출간해버렸다. 이병한은 이 글에서 김정은을 크게 미화하면서 온갖 무리수를 두었다. 「북한의 새 과제는 '압축성장' 뛰어넘는 도약」이란 글에선 김정은과 김여정을 두고 "다행히도 현재 북조선의 리더는 10대 시절 외국에서 공부한 유학파 남매이다. 공교롭게도 유럽 중에서도 가장 세계화된 스위스에서 살았다."라고 썼다.
「글로벌 스위스」 기사에서는 "정은이와 여정이"처럼 친근한 애칭을 쓰기도 하고, 북한이 "그토록 주체를 고수하는 것만큼이나 스위스 또한 여태껏 EU에 가입하지 않고 통화주권을 고수하며 고유한 영세중립을 사수할 만큼 외통수인 점 역시도 적잖이 닮았다."라며 스위스의 영세 중립과 북한의 고립을 대등하게 비교하고 있다. 북한이 단번에 도약을 이룰 수 있을 거란 근거 없는 기대를 덜기도 함다. "개성시에다가 글로벌 대학(...)을 세우고 남북한과 한반도 주변 4대강에서 온 교수진과 학생들로 구성해서 20세기 한반도에서 얽히고설킨 비극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21세기 평화체제의 실마리로 삼는게 좋다", "북한은 어느 국가보다 전시체제를 오래 경험한 탓에 영구평화를 더더욱 미래의 사명이자 국시로 삼아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라는 비현실적인 주장도 했다.
중국의 한국 문화 예속화 시도의 일환인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문화공정 논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동계올림픽을 전후한 한복/한푸 논쟁이 상징적이다. 선진국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소국 콤플렉스를 떨쳐내지 못한다. 작은 나라의 견지에서 큰 나라를 오인하고 오판하는 침소봉대의 혐의가 짙다. 14억 인구대국 중국의 속사정을 통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워낙 오래된 나라이고 원체 거대한 땅을 거느린 나라이다. 자연스레 다종다양한 소수민족을 품고 있는 제국이다. 그 제국을 구성하는 소수민족에 대한 세심한 배려에 너와 남을 가르고 네 것과 내 것을 다투는 소심한 자격지심이 불거진 것이다. 물론 중국에는 좋은 점만큼이나 나쁜 점도 지천에 깔려있다. 우스꽝스럽고 혐오스러운 지점도 적지 않다. 왜 아니겠는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넓으며 얼마나 복잡다단한 사회인데, 세상만사 온갖 일의 축소판이 벌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면모라 해도 그것이 중국의 일단과 일면에 불과할 뿐임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소국과 대국 사이의 구조적 인식의 비대칭성을 늘 자각하고, 관찰자 스스로가 성찰적 안목을 연마해 가야 하는 것이다.2049 : 테크노-차이나가 온다. 3. 2052 #
한복을 중국 고유의 복식이라고 우기는 것에 대하여 반발하는 것은 소국의 컴플렉스라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의 한푸 운동은 소수민속정책의 일환으로서가 아니라 한족의 고유 복식을 되살리자는 운동인데 이병한은 그 중요한 지점을 간과하고 있다.
중국 중심주의적, 패권주의적 사상을 옹호한다. 더 나아가서는 옛 아시아에서 불리던 대국과 소국이란 질서가 아닌 서로 대등한 국가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중국이며 일대일로 정책을 예로 들며, 미국처럼 실존하지 않는 냉전을 들먹이는 것을 어리석다고 한다. 중국이 자신의 패권을 위해 주변국을 무시하는 태도는 외면한다. 은근하게 유교를 근사하고 예의바른 따라야 할 것으로 자주 언급하는 점도 눈에 띈다.
중국의 민주화에 관해서는, 중국이 분열된 상태라는 것은 역사상 그런 형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혼란과 전쟁만 야기할 것이라고 별다른 논리없이 말을 줄였다. 이러한 중국 중심주의는 중국인들도 다른 나라 사람에게 쉽게 말하지 않는 내용이다.
마오쩌둥이 초기에 모든 중국의 성을 분리 독립시키는 아이디어에 대해 그것은 그른 것이며, 그와 반대되었던 당시 사상 중 하나인 '유교 문명권의 베트남-중국-조선-류큐의 병합 그리고 비유교 문명권인 티벳-몽골의 독립'이라는 이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서구는 계속해서 분열을 거듭하고 전쟁과 갈등으로 에너지를 소모해나가는 비효율이라 칭하고, 그에 비해 중국은 분열없이 하나로 움직이는 고효율 국가로서 현대에 적합한 국가라고 긍정적으로 서술한다.
중국을 일본과 비교할 때에는, 중국은 일본과 달리 '탈아입구'하지 않고 그 정체성을 지켰다며 칭송한다. 청나라와 위안스카이까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볼 때, 지금의 몽골까지 영토로 갖고 있던(청나라 때 몽골인들을 차별하는 것 마저 청나라의 자주성을 지키는 것으로 평가한다) 청나라로 회귀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외몽골과 대만의 미수복'이라는 표현도 저자는 아주 당연하게 그렇게 말한다. 문제는 이병한이 추구하는 '중국'의 문화, '서방의 계몽주의적 문화에 대항하는 아시아의 영적 전통'이라는 담론은 철저히 신해혁명 이후로 '중화민족'의 개념이 창조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당장 청나라 황실은 한족에게 나라를 줄 바에야 영국에게 가져다 바치겠다는 태도였고, 그런 태도에 분노한 한족들에 의해 신해혁명의 불씨가 당겨졌던 것이었다. 이병한의 근대의 폐단을 극복하고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과 그 연구의 가치가 만몽사관에 의해 오염되어버렸다는 지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김용옥 또한 공유하고 있는 문제이다.
이슬람과 이슬람주의라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옹호하기만 한다. 호메이니와 그의 신정체제를 옹호하는 문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슬람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는 이슬람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적통을 이은 종교라 주장하나, 이슬람은 원죄를 부정하고, 예수를 선지자로 받아들이나 삼위일체를 부정하며 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슬람의 기본 교리는 "알라께서 인류에게 올바른 말씀을 내려주셨고 선지자와 사도를 그 말씀을 인류에게 전해줬는데, 그 말씀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왜곡되었다. 그래서 마지막 사도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직접 내려주셔서 그 말씀이 변하지 않도록 하셨다."인데, 이슬람 입장에서 알라의 말씀을 왜곡시킨 주체가 바로 유대교와 기독교다. 이병한이 이슬람을 옹호하면서도 정작 이슬람 교리에 대한 이해는 일천하다는 예시이다.
이병한의 이슬람에 대한 막연한 인식은 『유라시아 견문 2』 508-538쪽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병한은 5명의 울라마와 인터뷰를 진행하였는데, "호칭은 '울라마'로 통일했다. 국적 또한 생략한다. 그 편이 민족과 인종, 국가에 연연하지 않고 이슬람의 진리를 탐구했던 울라마 본연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라며 다섯 명과 진행한 인터뷰를 하나로 뭉뚱그려버렸다. 각 울라마의 종파와 주장이 다를 수 있는 가능성은 철저히 무시한 것은 물론, 인터뷰의 신빙성을 크게 떨어트린 행위다.
아랍어를 보편어이자 세계어라고 표현하였으며 스페인이 이슬람을 쫓아낸 것을 비극이자 말살이라고 주장했고 서양사의 기틀을 이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방글라데시가 가난한 이유는 보편 문명인 이슬람보다 민족 문화를 앞세웠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한 가지 함정이 있는데, 반서방을 위해서 무슬림 보스니아인, 알바니아인을 학살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옹호하고 있다. 반서방을 위해서라면 일관성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슬람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는 이슬람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적통을 이은 종교라 주장하나, 이슬람은 원죄를 부정하고, 예수를 선지자로 받아들이나 삼위일체를 부정하며 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슬람의 기본 교리는 "알라께서 인류에게 올바른 말씀을 내려주셨고 선지자와 사도를 그 말씀을 인류에게 전해줬는데, 그 말씀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왜곡되었다. 그래서 마지막 사도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직접 내려주셔서 그 말씀이 변하지 않도록 하셨다."인데, 이슬람 입장에서 알라의 말씀을 왜곡시킨 주체가 바로 유대교와 기독교다. 이병한이 이슬람을 옹호하면서도 정작 이슬람 교리에 대한 이해는 일천하다는 예시이다.
이병한의 이슬람에 대한 막연한 인식은 『유라시아 견문 2』 508-538쪽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병한은 5명의 울라마와 인터뷰를 진행하였는데, "호칭은 '울라마'로 통일했다. 국적 또한 생략한다. 그 편이 민족과 인종, 국가에 연연하지 않고 이슬람의 진리를 탐구했던 울라마 본연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라며 다섯 명과 진행한 인터뷰를 하나로 뭉뚱그려버렸다. 각 울라마의 종파와 주장이 다를 수 있는 가능성은 철저히 무시한 것은 물론, 인터뷰의 신빙성을 크게 떨어트린 행위다.
아랍어를 보편어이자 세계어라고 표현하였으며 스페인이 이슬람을 쫓아낸 것을 비극이자 말살이라고 주장했고 서양사의 기틀을 이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방글라데시가 가난한 이유는 보편 문명인 이슬람보다 민족 문화를 앞세웠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한 가지 함정이 있는데, 반서방을 위해서 무슬림 보스니아인, 알바니아인을 학살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옹호하고 있다. 반서방을 위해서라면 일관성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다.
『유라시아 견문 3』 623-626쪽에서 소현세자에 관해 기술하였고, 이에 해당하는 프레시안 연재 기사는 2018년에 작성된 「"잔사람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었다"」#인데, 이 부분은 2012년 안재원 서울대학교 HK연구교수가 발표한 논문 「아담 샬, 순치제, 소현 세자: 아담을 바라보는 두 시선 사이에 있는 차이에 대해서」를 표절한 것이다.
『1581년에서부터 1669년까지 키나에서 그리스도교의 옳은 신앙을 포교하기 위해서 활동한 예수회 신부들에 대한 보고: 그 시작과 전개를 중심으로』(이하는『중국포교사』로 약칭하겠다)다. 책은 1672년에 오늘날 독일의 아우구스투스 한크비츠(Augustus Hanckwitz) 라티스보나이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저자는 아담 샬(Adam v. Schall,2) 1592-1666)과 인토르체타(Intorcetta, 1626-1696)다. 참고로, 인토르체타는 시칠리아 출신으로 동양고전, 예컨대 『중용(中庸)』을 라역(羅譯)해서 서구에 소개한 예수회 신부다. 책은 청나라의 고위 관료 복장을 한 아담 샬의 초상화로 시작하고,……
지도는 『중국인 철학자 공자』에 수록된 것으로, 작성자는 아담의 후계자였던 마르티네스였다.
……그런데, 아담 샬이 만난 사람 가운데에는 우리의 눈을 끄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코레아 렉스(Corea Rex)”다. 이는, 위의 목차에서 아담 샬이 “코레아 왕”을 만났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이 “코레아 왕”에 대해 궁금해 할 독자가 있을 것이다. 이를 먼저 밝히면, 잘 알고 있듯이, 이 왕은 소현 세자(昭顯世子, 1612-1645)다. 흥미롭게도, 『중국포교사』는 라틴어로 옮겨진 소현 세자의 편지를 수록하고 있다. ……
……그런데, 아담 샬 신부와 본격적인 혹은 깊은 교류를 나눈 사람은 소현세자(1612-1645)다. 소현 세자가 아담 샬을 만난 시기는 1644년 9월이었다. 약 두 달 여 간에 걸쳐 소현 세자는 아담 샬 신부를 찾아서 서양 학문과 종교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북경 남당(南堂)의 신부였던 황비묵이 『정교봉포(正敎奉褒)』에 남긴 말이다. ……
……소현 세자가 조선으로 귀국하면서 북경의 아담 샬에게 소현 세자는 “코레아 환관” 한 명을 북경에 남겨두었다는 사실이 기억날 것이다. 세자는 당시 아담 샬 신부로부터 서양 학문과 서양 종교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돌아오라고 명한다. 이 내시는 이미 그 때 당시에 천주교의 세례를 받았다. 물론, 조일 전쟁 중에 일본으로 전쟁 포로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천주교 신자가 된 조선인들이 많다. 이들을 제외한다면, 따라서 조선인 가운데에서 중국에서 세례를 받은 최초의 이가 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조선인은 아주 오랫동안 북경에 남아서 아담 샬 신부를 보필하고, 그로부터 서양 학문과 서양 종교를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아담 샬 신부에게 죽음이 임박하자, 신부가 자신의 생애와 활동을 정리하기 위해 내시를 불러 기억을 되살려내었다는 데에서 확인된다. “코레아 환관”의 기억력이 매우 비상했기 때문이라 한다. ……
……아담 샬 신부가 죽은 해는 1669년이다. 그렇다면, 이 코레아 환관은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조선으로 귀국하지 않고 아담 샬 신부를 보좌했음이 분명하다 하겠다. 아마도 아담 샬 신부가 몹시 아끼었던 제자을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삶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를 불렀다는 사실은 신부가 이 “코레아 환관”을 늘 대동하고 다녔다는 것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서학 수용과 관련해서 이 환관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했을 텐데, 우선 이 환관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사람이 어떤 조선의 관료들과 어떤 지식인들과 교류를 했는지를 추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소현 세자가 심양(瀋陽)으로 데리고 간 약 300명에 달하는 사람들에 해서도 보다 체계적 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실은 이후 전개될 북학파와 실학파의 등장에 직접적인 매개 역할을 담당한 이들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 안재원, 「아담 샬, 순치제, 소현 세자: 아담을 바라보는 두 시선 사이에 있는 차이에 대해서」
1644년 대청제국이 선다. 왕성한 잡식성 소화력을 자랑했다. 천주교와 서학에도 관용을 베풀었다. 천하문명에 천주문명을 포섭한다. 중화문명의 적통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서학에 유연했다. <1581년부터 1669년까지 중국에서 천주교를 포교하기 위해 활동한 예수회 신부들에 대한 보고>가 당시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1672년 독일의 라티스보나이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저자는 아담 샬(Adam v. Schall, 1592~1666)과 인토르체타(Intorcetta, 1626-1696)이다. 인토르체타는 시칠리아 출신, <중용>을 라틴어로 번역한 예수회 신부이다. 책은 청나라 복장을 하고 있는 아담의 초상화로 시작한다.
아담 샬의 후계자로 마르티네스가 저명하다. <중국인 철학자 공자>를 출간한 바로 그 인물이다.
……그 아담 샬이 만난 사람 가운데 'Corea Rex'도 있었다. Rex는 왕이라는 뜻이다. 고려의 왕일리 없다. 조선의 왕도 아닐 것이다. 소현을 만난 것이다. 소현이 아담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중국포교사>라는 책에서도 라틴어로 수록하고 있다. 진위 여부는 불투명하다. 번역의 정확도를 따지기도 힘들다. 소현이 한문으로 썼을 친필 서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사이가 무척 좋았음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남당의 신부였던 황비묵도 『정교봉포』(正敎奉褒)에서 두 사람을 증언하고 있다. 소현 또한 아담을 통하여 서학에 입문했다. 세례까지 받았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중국 밖 딴 세상의 종교와 학문에 깊은 호기심을 느꼈다. 1644년 조선으로 환국하면서 유럽의 문물을 두루 챙겨 왔던 것으로 전해진다.더 중요한 사실은 북경에 심복을 남겨두었다는 점이다. 총기 넘치는 환관 한 명을 아담의 제자로 맡기고 떠났다. 아담에게서도 총애를 받았다. 죽음이 임박하여 자신의 생애를 정리할 때 그 조선인 환관을 불러서 기억을 되살려냈다고 한다. 아담이 사망한 해는 1669년이다. 소현이 귀국한 해는 1644년이다. 그 조선인 환관이 25년 이상을 북경에 더 머물렀다는 뜻이다. 1645년 소현이 황망하게 세상을 뜨면서 조선과 끈이 떨어진 사람이었다. 나는 이 인물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서방의 학문을 널리 배우고 청나라 사정에도 정통했을 것이다.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을까? 또 어떤 기록을 남겨 두지는 않았을까? 심양과 북경으로 파견되었던 환관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조선인 최초의 세례자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18세기 '북학의 맹아'일 것도 같다. 혹 연행을 갔던 북학파들과 접선하지는 않았을까?─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3』, 「심양, 소현의 꿈」
안재원의 논문에 오류가 있는데, 그것은 아담 샬이 1669년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아담 샬은 1666년에 사망했다. 이병한은 안재원의 오류를 검증도 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원문 기사 「"잔사람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었다"」에서는 안재원의 논문과 동일하게 지명 레겐스부르크의 라틴어 명칭 라티스보나이를 출판사명인 것처럼 기술한 오류도 답습했다.
또 안재원의 논문에서는 “『『1581년에서부터 1669년까지 키나에서 그리스도교의 옳은 신앙을 포교하기 위해서 활동한 예수회 신부들에 한 보고: 그 시작과 전개를 중심으로』(이하는 『중국포교사』로 약칭하겠다)”라고 하여 『중국포교사』’라는 표현이 약칭임을 명시하였으나, 이병한의 글에서는 그러한 약칭 표지 없이 “소현이 보냈다는 편지를 『중국포교사』에도 라틴어로 수록하고 있다.”라고 기술하여, 『중국포교사』’라는 명칭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도 있다.
그리고 안재원은 논문에서 필립 쿠플레(Philippe Couplet)가 라틴어로 번역한 『중국인 철학자 공자』(Confucius Sinarum Philosophus)에 수록된 지도의 작성자를 '아담 샬의 후계자였던 마르티네스'라고 설명했는데, 사실 그 지도는 필립 쿠플레 본인이 작성자이다. 그리고 아담 샬의 후배인 마르티노 마르티(Martino Martini)라면 몰라도, "아담 샬의 후계자"라고 표현할 수 있는 '마르티네스'라는 이름의 청나라 예수회 선교사는 확인되지 않는다.
남당의 신부 황비묵의 『정교봉포』 인용 역시 표절의 근거가 될 수 있는데, 사료비판의 측면에서 『정교봉포』는 아담 샬과 소현세자가 만났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모자라기 때문이다. 황비묵은 아담 샬이 죽은 지 한참 후대인 1830년부터 1909년까지 살았고, 『정교봉포』는 청나라 광서제 때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비묵의 진술은 아담 샬이 소현세자와 만났다는 주장의 증거가 될 수 있다기 보다, 오히려 남당에서 전승된 설을 그대로 채록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정교봉포』를 아담 샬과 소현세자의 교류의 증거로 삼으려면 보다 엄밀한 사료비판이 필요하지만, 안재원의 논문은 그런 사료비판을 거치지 않고 황비묵의 정확한 생몰년과 『정교봉포』의 간행시기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마치 『정교봉포』가 아담 샬-소현세자 교류설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읽힐 혼란의 여지를 주었다. 그리고 이병한은 이러한 서술을 전혀 검증하지 않고서 그대로 가져다 썼다.
게다가 이병한은 안재원을 자기가 좋아하는 학자라고 밝혔다.#
글을 쓸 때 기초적인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근거 없는 억지 주장 역시 많다.
『유라시아 견문 2』 553쪽에서 "'바칼로레아'라는 말부터 박사 학위를 뜻하는 '닥터'까지 죄다 아랍어에서 기원한 말이다. 흔히 라틴어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라틴어가 대개 아랍어를 번역했던 것이다."라고 기술했는데, '바칼로레아'와 '닥터' 둘 다 라틴어를 어원으로 두고 있다. 그리고 '바칼로레아'와 '닥터'가 어떤 아랍어 단어에서 번역되었는지 근거조차 제시하지 않았다. 554쪽에서는 돈키호테가 아랍 역사가가 원작자인데 세르반테스가 이를 자기의 창작물이라고 발표하였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돈키호테에서 나오는 무어인 역사가 '시데 아메테 베네헬리'는 순전히 세르반테스가 창작해낸 설정이다.


『유라시아 견문 2』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40-53쪽의 원본이 되는 기사인 독립 영웅의 꿈 '백인 여성의 목을 일본도로…'에서 타카스기 신사쿠의 사진 밑에 기모노를 입고 일본도를 든 미얀마의 네윈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이는 조금만 교차검증 해보아도 피할 수 있는 오류이다.
『유라시아 견문 2』 376쪽에서 이병한은 세이트 로크만(Seyyid Lokman. 이병한은 '세이드 로쿠만'이라고 오기)이 『톱카프 궁전도』라는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고 서술하였고, 378쪽에 그 그림을 수록하였다. 문제는 해당 그림은 A Palace Complex with Harem Gardens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무굴 제국(...)의 세밀화라는 것이며, 세이트 로크만이 그렸다는 『톱카프 궁전도』는 유명하기는 커녕 실체조차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라시아 견문 3』 418쪽에서는 "(러시아어로) '길'은 '울리짜'улица요 '돈'은 '뎅기'деньги다. 전자는 국가를 의미하는 몽골어 '울루스'에서 왔고, 후자는 발음에서 따온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둘 다 틀렸다. 러시아어로 улица는 '거리'(街)고 고대 슬라브어에서 유래했고, деньги도 투르크어에서 유래했다. [17].
『유라시아 견문 2』 553쪽에서 "'바칼로레아'라는 말부터 박사 학위를 뜻하는 '닥터'까지 죄다 아랍어에서 기원한 말이다. 흔히 라틴어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라틴어가 대개 아랍어를 번역했던 것이다."라고 기술했는데, '바칼로레아'와 '닥터' 둘 다 라틴어를 어원으로 두고 있다. 그리고 '바칼로레아'와 '닥터'가 어떤 아랍어 단어에서 번역되었는지 근거조차 제시하지 않았다. 554쪽에서는 돈키호테가 아랍 역사가가 원작자인데 세르반테스가 이를 자기의 창작물이라고 발표하였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돈키호테에서 나오는 무어인 역사가 '시데 아메테 베네헬리'는 순전히 세르반테스가 창작해낸 설정이다.

『유라시아 견문 2』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40-53쪽의 원본이 되는 기사인 독립 영웅의 꿈 '백인 여성의 목을 일본도로…'에서 타카스기 신사쿠의 사진 밑에 기모노를 입고 일본도를 든 미얀마의 네윈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이는 조금만 교차검증 해보아도 피할 수 있는 오류이다.
『유라시아 견문 2』 376쪽에서 이병한은 세이트 로크만(Seyyid Lokman. 이병한은 '세이드 로쿠만'이라고 오기)이 『톱카프 궁전도』라는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고 서술하였고, 378쪽에 그 그림을 수록하였다. 문제는 해당 그림은 A Palace Complex with Harem Gardens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무굴 제국(...)의 세밀화라는 것이며, 세이트 로크만이 그렸다는 『톱카프 궁전도』는 유명하기는 커녕 실체조차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라시아 견문 3』 418쪽에서는 "(러시아어로) '길'은 '울리짜'улица요 '돈'은 '뎅기'деньги다. 전자는 국가를 의미하는 몽골어 '울루스'에서 왔고, 후자는 발음에서 따온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둘 다 틀렸다. 러시아어로 улица는 '거리'(街)고 고대 슬라브어에서 유래했고, деньги도 투르크어에서 유래했다. [17].
[1] 개인 사이트는 만료되었다.[2] 1998년에 입학했다.[3]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전 회장인 최병모의 딸. 2016년 더불어민주당 청년 비례대표 선발 과정에서 경선 후보로 선정되었다가 아버지의 후광으로 비례대표 자리에 내정된 것 아니냐는 논란이 크게 일어나 결국 비례대표 후보에서 사퇴한 인물이다.[4] 출처: 『유라시아 견문 3』 서문. "반려 최유진 님께 드린다."[5] 출처: 『유라시아 견문 3』 앞날개.[6] 프레시안에서 연재한 기사 『동아시아를 묻다』를 출간한 책이다.[7] 여행을 하면서 프레시안에서 연재한 기사 『유라시아 견문』을 출간한 책이다.[8] 박사학위 논문 『중화세계의 재편과 동아시아 냉전 : 1945-1991』을 출간한 책이다.[9] 다른백년에서 연재한 『개벽파 선언』을 출간한 책이다.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조성환과 공저.[10] 프레시안에서 연재한 기사 『단번도약 북조선』을 출간한 책이다.[11] 프레시안에서 연재한 기사 『DEEP FUTURE』를 출간한 책이다.[12] 개인 사이트에서 연재한 글을 단행본화한 책이다[13] 다른백년에서 연재한 칼럼 『뉴아메리카 견문』을 단행본화한 책이다.[14] 『유라시아 견문 1』 pp. 75 ~77 독자적 의견은 아닌 게 호주 탐사 언론인 존 필저도 유로마이단 혁명을 미국이 나토와 독일의 도움을 받아 주도한 파시스트의 쿠데타라고 주장한다.[15] 물론 본인은 마린 르펜이 아니라 장뤼크 멜랑숑을 지지한다고 밝혔지만 어쨌든 해당 기사에선 마크롱을 깎아내리고 르펜에 대해선 마크롱보다 높게 평가했으며, 르펜을 전혀 비판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정작 멜랑숑은 마크롱보다 더 친이민적이다.[16] 그러나 일본과 독일의 확장을 저지시키고 패배시킨건 미국, 영국의 적극적인 전쟁 개입이 있어서 성립된 것이지 오히려 소련은 미국의 랜드리스가 없었다면 절대 독일을 이기지도 못했다.[17] 참고로 '돈'은 몽골어로 мөнг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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