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노브가 무엇이오” 영어에 푹 빠졌던 조선, 일제의 교육이 망쳐놨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기사입력2020.06.30. 오전 6:00
[경향신문]
원본보기지석영이 1908년 다산 정약용의 아동 학습교재인 <아학편>에 한자를 중심으로 한글, 영어, 중국어, 일본어 발음을 표기해놓은 새로운 교재를 만들었다. ‘love’는 ‘을러브’, ‘orange’는 ‘오란쥐’, ‘ruler’는 ‘으룰러’로 표기했다. |지석영의 <아학편>
“‘모던뽀이’는 ‘시크’해야 하고 ‘모던껄’은 ‘잇트’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1931년식 첨단인의 마땅히 가져야 할 현대성이다. ‘스마트’한 것을 자랑하는 ‘모던’이…신감각파적 ‘에로’ ‘그로’를 이해치 못해서야 될뻔한 일이냐”.
잡지 <동광> 1931년 6월1일자에 실린 이 글은 1920~30년대 불어닥친 영어열풍의 단면을 보여준다. 일상대화나 잡지·신문 등에 글을 쓸 때 영어를 섞어 쓰지 않으면 행세하지 못했다. 그런 판국이니 당시 신문에서는 거의 날마다 등장하는 영어신조어를 소개하는 ‘신어해설’란을 만들기도 했다.(동아일보 1931년 3월9일)
원본보기지석영의 <아학편>에는 많은 정보가 담겨있다. ①에는 한자와 발음에 대한 정보를 실었는데, 해서체와 전서체가 함께 제시됐다. 이전의 한자음과 당시의 한자음이 다른 ‘天’의 경우 한글로 발음을 써주었는데, 부(父)의 한자음은 변화가 없어 따로 쓰지 않았다. ②에는 음과 훈, 중국의 발음과 성조가 표기됐다 . ③에는 일본어에서 훈독할 때와 음독할 때의 발음을 가나(일본어)와 한글로 각각 적었고, ④에는 한자와 같은 의미의 영어단어와 이 단어의 발음을 한글로 적었다. |한성우의 논문에서
■‘시크, 잇트, 에로, 그로’를 모르면 꼰대
이중 ‘시크(chic)’라는 단어는 국립국어원이 불과 16년 전인 2004년 펴낸 <신어(新語)> 자료집에 ‘멋있고 세련되다’는 뜻의 신어(新語)라 소개했다. 하지만 틀렸다. <동광>의 용례를 보듯 이미 89년 전에 등장한 신조어다. 동아일보 1931년 4월13일 ‘신어해설’은 “‘쉬-크’는 멋쟁이 하이칼라를 의미한다”고 풀면서 이렇게 의미부여한다.
“쉬-크는 외형 만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이해하는 빈틈없는 근대인을 가리킨다. 내면이 빈약한 모던보이, 모던걸에 반해 쉬크보이, 쉬크걸은 훌륭한 신사숙녀이다.”
원본보기동아일보 1931년 4월13일자 ‘신어해설’. 날마나 쏟아지는 영어 신조어를 풀이해주는 난이다. 시쳇말로 섹시한 남녀를 의미하는 ‘이(잇)트’와 멋쟁이 하이칼라를 가리키는 ‘쉬크’ 등 신조어의 뜻을 일러주고 있다.
동아일보는 신조어 ‘잇트(It)’를 두고는 “원래는 여성의 성적 매력을 가리키는 말”이라 풀이했다. ‘It’(그것)은 1927년 미국에서 개봉된 영화의 제목이다. 영화에 나오는 여주인공 클라라 바우(1905~1960)가 유행시킨 표현이 바로 ‘잇트 걸’(It girl)이다. 대형백화점 판매원인 주인공이 발산하는 ‘잇트’가 사장의 마음을 끌어 성공한다는 신데렐라 이야기다. 영화가 말하는 ‘It’(그것)는 시쳇말로 섹시한 여성(혹은 남성)을 의미했다. 1920~30년대 ‘잇트걸’, ‘잇트맨’은 당대의 ‘모던걸’, ‘모던보이’의 표상이었다.
동아일보 1931년 4월12일자. ‘에로’와 ‘그로’의 뜻을 묻는 독자 질문에 기자가 “참으로 옛날 양반”이라고 꼬집고 있다. 요즘말로 ‘꼰대이십니다’라고 비아냥대는 듯 하다.
<동광>에 등장하는 ‘에로’ ‘그로’는 무슨 신조어일까. 이 역시 동아일보 1931년 3월9일과 16일 ‘신어해설’란에 소개됐다. ‘에로’는 “현대 유행어 중 이 말처럼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단어는 없을 것”이라면서 ‘에로틱’의 약어라 했다. 또 ‘그로’는 ‘그로테스크’(grotesque·괴기)’의 줄임말이라 설명했다. “생활에 권태를 느낀 (1930년대) 현대인들이 괴기스러운 것을 자주 찾는 경향이 있어서 생긴 신조어”라고 소개됐다. 4월12일 다시 독자가 ‘에로와 그로의 뜻이 뭐냐’고 묻자 담당 기자는 “정말 옛날 양반이시다”고 일침을 놓은 뒤 ‘에로는 정사(情事), 그로는 괴기’라 대답했다. 그 시대 ‘에로’ ‘그로’를 모르면 시쳇말로 ‘꼰대’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원본보기1920년 5월12일 동아일보. 보성고보 3학년 학생들이 ‘원래’ 발음이 불량한 일본인 교사가 가르치는 영어수업으로는 졸업한 후 써먹을 수 없다며 수업거부투쟁에 나섰다는 내용이다.
■구리무, 다꾸씨로 발음하는 “일본인 교사 물러가라!”
그런데 <별건곤> 1930년 5월1일에 실린 주요한(1900~1979)의 글은 일본식 영어의 난무를 꼬집는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럿셀’을 ‘라세루’라 한다…그 외에 ‘구리-무’(크림), ‘다꾸씨’(택시), ‘밧데리’(배터리), ‘화스토’(퍼스트), ‘보인또’(포인트) ‘시구나루’(시그널), ‘마구네슈무’(마그네슘)….”
그보다 11년 앞선 1920년 5월12일자 동아일보는 아주 흥미로운 기사를 쓴다.
“보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학생 45명이 지난 7일부터 등교하지 않는다. 일본인은 원래 영어발음이 불량한데 영어교사인 전중용승(田中龍勝)이 가르치는 발음대로 영어를 배워서는 도저히 세상에 나가 활용할 수 없으니…조선 사람으로 영어교사를 바꿔달라는 것….”
원본보기1882년 5월22일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12조. 비록 조약은 맺었지만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사항은 5년 뒤 양국관민이 각각의 언어에 익숙해졌을 때 재교섭한다’는 내용을 적시했다. 한마디로 영어가 통할 때 재교섭하자는 것이다.|서울대 규장각 소장
발음이 엉망인 일본어 교사가 가르치는 영어를 배워서는 써먹을 곳이 없으니 한국인 교사로 교체해달라는 요구다. 학교측은 “‘전중용승’이 명색이 제국대 영문과 출신”이라면서 “조선인이나 일본인이나 영미인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고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일본인은 ‘원래’ 발음이 좋지않다”는 학생들의 주장이 재미있다.
이런 영어교육의 비극은 한일합병으로 시작했다.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1852~1919)는 1911년 8월 1차 조선교육령을 제정하면서 필수과목이던 영어를 선택과목으로 격하시켰다. 가르치는 언어도 일본어로 정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대학설립을 허용하고 영어와 독일어 등 외국어교육을 중등학교에서도 실시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영어는 여전히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수험용이었다. 게다가 ‘비리징구’(빌딩), ‘네꾸다이’(넥타이) 운운 하는 일본인 교사가 수험용 문법과 독해 위주로 가르치니 어찌 됐겠는가.
원본보기조선과 미국정부는 1882년 5월22일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의 주선으로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조선 측 전권대신 신헌과 미국 측 전권공사 로버트 슈펠트가 사인했는데, 통역은 청나라인인 마건충이 맡았다. |경향신문 자료
선교사이자 교육가인 호러스 언더우드(1890~1951)는 <한국의 현대교육(Modern Education in Korea)>(1925년)에서 일제 강점기 영어교육의 폐단을 고발한다.
“서울에서 가장 훌륭한 영어 문법교사는 영어를 자유자재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대학입시에 통과하기 위한 퍼즐과 트릭을 마스터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100년 이상 이어진 주입식 문법 영어의 뿌리는 이처럼 일제강점기에 강요된 일본식 영어 학습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1883년 조미수교 1주년을 맞아 미국을 방문한 박정양 등 보빙사 일행이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에게 큰 절을 올리고 있다. 이 진귀한 모습을 신비롭게 여긴 미국 뉴욕의 언론이 삽화로 그렸다. 아서 대통령의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뜸’ 영어로 가르친 원어민의 몰입식교육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잘했단 말인가. 그랬다. ‘잘했다’는 평을 받을 수 있겠다.
일제강점기 이전의 영어교육 원칙은 ‘영어로 쓰고 말하는’(敎以英文英語) 교육, 즉 영어몰입식 교육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일제강점기에 이른바 문법 번역식 교육법으로 바뀌었으니 어찌 되었겠는가.
조선이 영어에 눈을 돌린 것은 서구열강 중 최초로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1882년 무렵이었다. 당시 영어를 할 줄 아는 조선인은 없었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유진 초이 같은 인물도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청나라인 마건충(馬建忠·1845~1899)에게 조미수호통상조약의 통역을 맡겼다. 조선의 전권대관인 신헌(1810~1884)은 좀 심하게 말하자면 도장만 찍었을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맺은 조약의 제12조가 눈길을 끈다.‘이번 조약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5년 후 양국 관민이 각각 언어에 익숙하게 되었을 때…재교섭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지금은 서로간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5년 뒤에 다시 추가사항을 다루자는 것이었다.
이런 판국이었으니 고종이 영어교육기관을 설립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당연했다. 1883년(고종 20년) 청나라의 영어 교육기관인 동문관을 본뜬 동문학이 설립됐다. 이때 초빙된 교수가 영국인인 T E 핼리팩스와, 중국인 오중현·당소의다. 동문학은 ‘영어로 쓰고 말하는’(敎以英文英語), 즉 일종의 영어몰입식교육을 채택했다.
원본보기1886년 설립된 왕립 육영공원의 초기 수업장면. 고종의 지대한 관심속에 설립된 육영공원은 호머 헐버트, 델젤 벙커, 조지 길모어 등 미국인 교사 3명이 영어 뿐 아니라 과학, 수학까지 모두 영어로 수업하는 몰입식 교육을 채택했다.
■10개월 만에 3000단어 습득한 학생들
이후 청나라의 내정간섭에 강한 불만을 갖게 된 고종과 반청세력은 청의 영향을 받은 동문학을 대체할 새로운 영어학교의 설립을 추진했다. 그것이 바로 1886년(고종 23년) 9월 설립된 왕립육영공원이다. 육영공원은 1883년(고종 20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사절단(보빙사) 일행이 현대식 영어교육기관의 설치를 건의함에 따라 설립됐다. 육영공원 학생들은 좌원과 우원으로 나눴다. 좌원은 현직 관리 중 유능한 10명, 우원은 15~20세에 이르는 총명한 선비(관직없는) 중 20명을 각각 선발했다(<고종실록> 1886년 8월1일). 육영공원의 핵심은 영어를 가르칠 원어민 교사 3명을 조선주재 미국공사(루시우스 푸트·1826~1913)를 통해 직접 초빙했다는 것이다.
원본보기왕립영어학교인 육영공원이 세워진 자리. 현재 덕수궁 돌담길 인근인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진은 이탈리아 외교관인 카를로 로제티의 <꼬레아 에 꼬레아니>(1905)에 수록된 것이다.
그 3명이 호머 헐버트(1863~1949)와 델젤 벙커(1853~1932), 조지 길모어(1858~?) 등이다. 셋 다 미국의 유명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교에 재학 중인 청년들이었다. 미국인 교사들에게는 1인당 3명의 통역자(동문학 출신)가 배정됐다. 첫 수업을 받은 30명 중 영어단어를 아는 학생이 한 명도 없어서 알파벳부터 가르쳤다.
그러나 곧 통역이 불필요해졌다. 원어민 교사들이 영어로 100% 수업을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의 영어습득능력이 놀라웠다. 교사들은 이 대목에서 감탄사를 연발한다.
원본보기1888년 워싱턴에 부임한 주미 초대공사관원 일행. 앞줄 왼쪽부터 이상재, 이완용, 박정양, 이하영, 이채연. 뒷줄 왼쪽부터 김노미, 이헌용, 강진희, 이종하, 허용업 등 수행원과 하인들도 함께 찍었다. 이중 이완용은 육영공원 첫번째 학생이었고, 찹살떡 장수였던 이하영은 의료선교사인 호러스 앨런을 만나 영어를 배운 덕분에 제2대 주미조선공사와 외무대신으로 벼락출세했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소장
“학생들은 매우 빠르게 배웠다. 특히 한자를 배움으로써 그들의 비상한 기억력은 더욱 계발되어 있었다. 우린 곧장 자연과학과 수학을 가르쳤고, 그들은 이렇게 영어를 습득했다.”(길모어의 <서울에서 본 코리아> 1892년)
역시 최초의 원어민 영어교사였던 헐버트도 “조선 학생들의 영어 구사 능력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럴 만했다. 교사는 한국어를, 학생들은 영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수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단 10개월 만에 학생들이 무려 3000단어를 외웠다는 것이다.
육영공원 출신인 장봉환은 주미조선공사관 서기관으로 영어 장기를 발휘한 다음 대한제국 군악대와 협률사(최초의 극장) 창설을 주도했으며,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의병봉기를 도모했다. 장봉환은 1907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했다. |개인소장
3000단어 이야기는 1887년(고종 24년) 5월2일자 <고종실록>에 등장한다. 고종은 “(학교가 설립된지 불과 8개월만에) 학생들이 이미 습득한 어구가 3000여자에 가깝다고 한다”고 자랑스럽게 밝혔다. 한껏 고무된 고종은 “방학 때도 공부에 소홀함이 없게 5일 간격으로 시험을 치르라”고 명했다. 비단 영어 뿐이 아니라 원어민 교사들은 수학, 자연과학, 만국지리 등도 가르쳤다. 물론 영어로…. <코레아 또는 조선:고요한 아침의 나라>(1895년)를 쓴 영국인 아놀드 새비지 란도(1865~1924) 역시 조선인의 영어 능력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19살 조선 청년이 f랑 p의 발음도 구분 못하더니, 두달이 지난 지금은 하루에 단어를 200개씩 외우고, 영어 해석과 회화도 완벽하다. 굉장히 너무 놀랍다.”
육영공원이 설립된 1886년을 전후로 미국선교사들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잇달아 세운다. 선교사들의 목적은 물론 기독교 전파였지만 조선인들의 마음을 파고 들기 위해 교육과 의료봉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예컨대 이화학당은 모든 교과목을 말 그대로 ‘대뜸’ 영어로만 가르쳤다. 그 시대 이화학당을 다닌 김룻세의 회고가 인상적이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통역도 쓰지 않고 선교사들이 대뜸 영어로 가르쳐주었다.”(<이화 80년사>·1966년)
조선 정부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배재학당의 경우 1887년(고종 24년) 조선 정부가 ‘배재학당’이라는 현판을 하사하면서 영어교습을 위해 정부가 보내는 학생만큼 재정지원을 약속했다.
원본보기독립신문 1898년 8월26일자. “월전(7월4일) 광고했던 영어 가르치는 사람이 9월1일 오후 8시부터 9시까지 가르칠터이니…. 교사의 월급은 다 선급이요…다만 며칠만 배웠더라도 월급은 한달 셈으로 할 터이니 그리들 아시오”라는 내용이다. 영국인 원어민강사의 개인교습 광고이다.
■과거제·신분제 폐지로 출세의 지름길 된 영어
왕립 육영공원은 설립 9년 만인 1895년(고종 22년) 문을 닫는다. 현직 관리 및 그 자녀가 소속된 ‘좌원’과 급제하지 않은 선비로 구성된 ‘우원’ 사이의 갈등, 그리고 보수적 관리의 방해 등이 끝내 걸림돌로 작용했다. 하지만 태동기부터 시작된 동문학과 육영공원의 영어몰입식 교수방식은 이어지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영어교육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1894~1896년 사이 조선에서는 혁명적인 조치가 내려진다. 과거제·신분제 폐지 등으로 요약되는 갑오개혁이다. 이에 따라 모든 백성에게 균등하게 적용되는 근대식 교육기관이 설치됐다. 영어를 비롯해 일어·불어·독어·아어(러시아어)·한어(중국어) 등의 외국어학교가 설립됐다.
그런데 500년 동안 조선의 근간을 이뤄온 과거제 폐지는 백성들에게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던 것 같다. 미국인 교육가 앨라수 와그너(1887~1957)는 갑오개혁 후의 충격적인 조선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공무원 임용교시인 과거를 폐지하자 충격이 너무 커서 이땅의 젊은이들은 한동안 교육수단으로서 한자에 흥미를 잃은 것 같았다.”(<미국인 교육가 엘라수 와그너가 본 한국의 어제와 오늘>·살림출판사·2009)
유일한 신분상승과 입신출세의 관문이 사라진만큼 다른 등용문이 필요했다. 바로 외국어, 그 중에서도 영어가 ‘과거’를 대체했다. 특히 신문물이 밀물처럼 들어오고 그에 따라 새로운 직업이 생기자 그 직업에 종사하려면 자격이 필요했다. 배재학당 설립자인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1858~1902)는 이미 1886년 무렵 “조선인들에게 ‘왜 영어를 배우려고 하느냐’고 물으면 ‘관직(출세)에 나서려고 배운다’고 대답했다”고 밝혔다.(<아펜젤러-한국에 온 첫 선교사>, 연세대 출판부, 1985년)
원본보기배재학당의 개교직후인 1885~86년 사이 학생들의 모습. 고종은 학교에 ‘배재학당’의 현판을 내려주며 특이 영어교육을 지원해주었다.|경향신문 자료
■영어로 출세한 사람들
하기야 영어를 바탕으로 입신하고 출세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1881년(고종 18년) 일본에서 개인교습으로 영어를 배운 윤치호(1865~1945)와 1886년(고종 23년) 육영공원에 첫해에 입학해서 이듬해 7월 초대 주미공사관 참찬관으로 발탁된 이완용(1858~1926)이 있다. 또 찹쌀떡 장수 출신인 이하영(1858~1929)은 1884년(고종 21년) 우연히 만난 의료선교사인 호러스 알렌(1858~1932)를 만난 덕분에 고종의 통역이 됐고, 결국 제2대 주미조선공사를 거쳐 외무대신으로 벼락출세했다. 반민족친일행위자의 오명을 쓴 이들 뿐이 아니다.
최초의 영어학교인 동문학이 배출한 으뜸인물이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남궁억(1863~1939)이다. 한성주보 1886년 2월 22일자는 “시험을 치러 뛰어난 학생들을 관리로 임용하는데, 그 중 우등생인 남궁억·신낙균…등이 관리로 임용됐다”고 보도했다. 육영학교 출신 장봉환(1869~1929)은 주미조선공사관 서기관을 역임한 뒤 최초의 극장인 협률사 창설을 주도하는 등 근대적 제도마련에 앞장섰다. 또 어릴 적 고아가 되어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의 고아학교에 입학한 김규식(1881~1950)은 영어와 라틴어·불어·독일어·중국어·일어는 인도어까지 구사하는 언어천재였다. 최초의 미국시민권자 서재필(1864~1951), 최초의 영어연설자 이승만(1875~1965) 등 유학파도 있다.
원본보기이화학당의 초창기 모습. 원어민 선교사들이 가르친 이화학당 학생들의 영어실력은 정평이 나 있었다. 조선일보 1925년 1월28일자는 ‘영어와 음악에 이름난 이화여학교’라면서 “그 학교 학생들은 다른 학교에 비교하여 영어와 음악에 큰 장기를 가졌다고 한다. 대학 예과 쯤 되는 학생들은 영어로 회화가 능통하다”고 소개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과거제·신분제 사회에서는 어림도 없었던 여성들의 사회진출에도 영어가 디딤돌이 됐다. 김점동(박에스더·1877~1910)은 이화학당에서 배운 영어 덕분에 미국 유학을 떠나 볼티모어 여의대를 졸업한 한국 최초의 여의사다. 덕성여대를 설립한 차미리사(김미리사·1878~1955), 서양음악을 보급한 김애식(1890~1950), 최초의 여박사 김활란(1899~1970), 개신교 여성운동가인 홍에스더(1892~1975), 한국 최초의 자비유학 여성이자 최초의 학사인 하란사(김란사·1875~1919) 등은 이화학당 등에서 영어를 배운 신여성으로 선망의 대상이 됐다.
■독립신문에 실린 최초의 영어 과외 광고
이랬으니 19세기말~20세기초 조선(대한제국)에서는 영어열풍이 불었다.
“영국 선비 하나가 특별히 밤이면 몇시간씩 가르치려 하니 이 기회를 타서 조용히 영어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독립신문사로 와서 물으면 자세한 말을 알지어다.”(1898년 7월4일)
“월전(7월4일) 광고했던 영어 가르치는 사람이 9월1일 오후 8시부터 9시까지 가르칠터이니…. 교사의 월급은 다 선급이요…다만 며칠만 배웠더라도 월급은 한달 셈으로 할 터이니 그리들 아시오.”(1898년 8월26일)
무슨 기사인가. 영국인 원어민 강사가 독립신문에 영어 과외 광고를 냈다는 것이다. 사상 첫 영어과외광고라 할 수 있다. 이런 영어열풍을 반영하듯 다양한 영어교재가 출간된다.
이화학당에서 영어를 배워 미국 볼티모어 여의대를 졸업하고 최초의 여의사가 된 김점동(박에스더).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때 종두법을 도입한 의사이자 국어학자인 지석영(1855~1935)이 나섰다. 지석영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아동의 한자학습을 위하여 엮은 문자교육용 교재인 <아학편>을 영어교재로 다듬었다(1908년). 지석영은 서문에서 “지금 바닷길이 열려 서구와 아세아가 교역하는 시대”라면서 “저들(서구)의 우수하고 뛰어난 점을 취하여 열강과 겨루려면 어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love’는 ‘을노ㅇ브’, ‘ruler’는 ‘으를러’
지석영의 <아학편>은 한자를 공통문자로 중심에 놓고 동아시아 3국의 자국어를 병기한 뒤 이 바탕 위에서 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즉 한자의 음과 훈은 물론 각 한자에 대응하는 중국어·일본어·영어의 발음까지 한글로 표기해놓았다. 한 글자의 한자를 배우면 4개 국어를 배울 수 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한자 한 글자마다 붙인 영어와 우리말 발음을 되도록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려 애썼다는 것이 흥미롭다. 예컨대 ‘F’는 ‘에프’가 아닌 ‘에ㅍ후’로, ‘V’는 ‘브이’ 대신 ‘ㅇ뷔’로 표기했다.
또 ‘R’이나 ‘L’자가 어두에 나오면 ‘으’나 ‘을’을 선행시켜 표기한 것이 눈에 띈다. 예컨대 ‘임금 군(君)’에 대응하는 영어단어 ‘Ruler’는 ‘으룰러’, ‘Rice’는 ‘으라이쓰’로 표기된다. 혀를 말아야 하는 영어의 ‘알’(R) 발음을 ‘으ㄹ’로 표기한 것이다. ‘L’은 ‘엘’로 표기되지만 어두에 나오면 ‘을’이 된다. 그래서 ‘사랑 애(愛)’, 즉 ‘Love’는 ‘을노ㅇ브’로, ‘Learn’은 ‘을러언’이다. 그렇다면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주인공 유진 초이(이병헌 분)가 고애신(김태리분)에게 했던 “합시다 러브”의 대사가 원래는 “합시다 을노ㅇ브”였단 말인가. 우스갯소리다.
그렇다면 ‘오렌지’는 어떻게 표기될까. 몇 년 전 ‘오렌지’를 ‘아륀지’라 발음해야 한다고 해서 인구에 회자된 바 있지만 지석영의 <아학편>은 ‘오란쥐’로 표기됐다. ‘귤(橘)’과 ‘유자 유(柚)’와 ‘감자 감(柑)’, ‘탱자 기(枳)’는 모두 ‘오란쥐’이다. <아학편>에는 “작게 표기한 한글 발음은 ‘해당 음가를 있는 듯 없는 듯(有若無)’ 소리를 내라”는 주석도 달려 있다.
임시정부 부주석 등을 지낸 우사 김규식은 언어천재로 통한다. 어릴 적 고아가 되어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의 고아학교에 입학한 후 영어는 물론 라틴어·불어·독일어·중국어·일어는 인도어까지 8개국어를 구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석영이 <아학편>을 영어교재로 편찬한 것은 1908년, 즉 한일병합 2년 전이었다. 지금까지의 자료를 토대로 살펴보면 동문학 설치(1883년) 이후 한일병합(1910년)까지 원어민 교사의 영어 몰입식 교육(직접교수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국왕(고종)의 후원을 받은…. 대한제국에 와있던 일본외교관 시노부 준페이(信夫淳平·1871~1962)의 언급이 흥미롭다.
“주한 영국대사가 본국정부에 ‘한국인은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어학자다. 서울에 외국인이 들어온지 불과 14년도 안됐지만 영어의 능숙함은…중국인이나 일본인은 가히 따르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는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한반도>·1901년)
이렇게 ‘동양의 어학자’라는 찬사를 받았던 한국인의 영어실력은 한일병합으로 끝장나고 말았던 것이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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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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