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석
Yesterday at 13:32 · Shared with Public
나는 박정희가 한국의 일본화를 꿈꿨던 정치인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가 추진한 일본화 과정의 진행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일본화되지 않았다. 권위주의적 독재자였던 그조차도 한국 사회가 지니고 있는 특질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이미 박정희 정부 말기부터 사회 여러 집단들 간의 갈등을 정치적으로 통합하려 하기보다는 법제화를 통해 국가가 강제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예컨대 박정희 정부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방식을 원래 일본식 협력체계와 유사한 형태로 구상했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불신관계를 해소하지 못해 수급관계를 법으로 강제하는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대기업들은 중소기업과의 계열화를 구축하는 것보다 중소기업을 아예 인수해버리는 걸 선호하였다.
이런 상황은 지금까지 이어져서 얼마 전에 중소벤처기업부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상생법)' 개정안을 2019년에 발의해 공정거래위원회와 함께 하도급 거래에 대한 중복된 규제기관으로 그 역할을 확대하려 시도하였다. 기본적으로 국가의 규제권을 강화하는 방안을 통해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의 상생을 도모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 하다못해 동네 애들 싸움도 강제로 화해시키는 게 어려운데 이해관계가 걸린 사회적 갈등을 국가의 개입과 규제를 통해 해소하려 하니 될 리가 있나. 경제기획원 등의 국가기구를 통해 계급들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국가기구 간의 통일성을 확보하려던 박정희의 실패는 이미 당대에 진행되고 있었다. 재벌들은 하이에크 같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를 데려와 자신들의 권리와 이해관계를 주장하였으며 노동자들은 급진화된 학생집단과 연결되어 보다 강력한 반反체제, 반反자본집단으로 발전해나갔다. 이러한 흐름이 민주화로 이어지며 박정희식 한국형 근대국가가 파탄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대안적 모델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했다. 금융 등의 자본시장은 영미식으로 나아가고, 여전히 발전하고 있는 제조업은 국가에 대한 의존 속에서 기능하고 있으며, 노동시장은 정규직 - 비정규직으로 고착화되어 원활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오직 토지시장과 국가만이 정상적이든 아니든 기능하고 있다. 근대국가는 전제주의적으로 재편되며 사회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시켜나고 있고 그러한 국가의 지배자들은 토지시장을 통해 자신의 자산증식을 꾀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고 대안적 근대국가를 만들어 이끌면서 사회주의로의 길, 사회적 공화정으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 아직 민주적 공화정조차 도래하지 않은 것인지 의문스러운 세태에 이런저런 고민들이 넘실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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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Yesterday at 13:03 · Shared with Public
사회적 대화의 과잉 정치화
http://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88&fbclid=IwAR1-re-m6IL2pK4UKkeIsKy6KUiHPko04S_ScJX5XnbSkVwwUNpjCfrF2fc
대체적으로 동의가 된다. 한국은 일본식 경제모델을 지향한 박정희가 만든 한국형 근대국가가 사회 전반에 개입하고 관리하는 특질 위에서, 재벌 등의 사용자 - 자본은 영미식 모델을 지향하고 노동자 집단은 유럽형 사민주의식 제도를 지향하며 서로 충돌하고 있다. 일본식 노사관계인 기업별 노조를 유지하면서도 자본가들은 일본만큼의 노동자 포섭을 할 생각이 없고, 사회적 타협이나 대화를 만들어갈 생각조차 없다. 자본가들은 노동을 배제하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고 어떻게든 노동자 세력을 원자화해 영미형 협상방식을 통해 노동을 완전히 통제할지만 고민한다. 반대로 노동자들 또한 이러한 사측의 입장을 잘 알고 있기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협력할 생각이 없고 몇 번의 잘못된 경험으로 인해 특히나 국가와 자본에 대한 불신이 강하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노조 또한 사회 전반의 노동시장을 관리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노동자 집단이 사회경영의 한 주체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할 생각도, 그걸 인정해줄 자본도 없는 상황에서 이 대립을 조정하고 통합할 한국형 근대국가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점차로 해체되면서 합의를 강제할 힘을 잃어 노사정위원회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형 근대국가의 해체 이후에 나타난 전제주의적 정부 형태는 행정부로의 힘의 집중을 강화하면서 사회를 보다 강하게 원자화시키고 있다. 좌파 정당이 이런 상황에서 각 계급들간의 이해를 어떻게 종합할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강제할 것인지, 어떤 식의 국가 통합을 이뤄낼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데 참 쉽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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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대화의 과잉 정치화 - 대학지성 In&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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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대화의 과잉 정치화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승인 2020.07.06 11:54 댓글 0페이스북
[사인사색]
코로나 19로 인한 고용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난 4월 18일 민주노총이 제안한 ‘코로나 19 대응’을 위한 원포인트 사회적 대화는 5월 20일 ‘코로나 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대표자회의’를 시발로 본격화되었음에도 7월 1일 민주노총이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끝내 합의안에 동의를 얻지 못하면서 노사정 사회적 대타협은 다시 ‘헛소동’으로 끝나게 되었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대의원대회를 열어 합의안에 대해 재차 동의를 구하겠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사실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의사와 여건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이미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반복된 사회적 대화의 실패경험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1998년, 2004년, 2015년 3차례의 ‘사회적 합의’가 있었고,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민주노총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 딱 한 번 사회적 대화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민주노총은 당시 김대중 정부의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을 맺었다가 정리해고제 요건 완화와 파견법 시행 등에 합의했다는 점을 문제 삼은 내부 반발로 탈퇴한 후 사회적 대화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버렸다. 이후 두 차례의 사회적 대화는 한국노총만 참여하는 노사정 합의로 진행되었고, 민주노총은 그때마다 대정부 투쟁으로 대처하는 관행마저 생겨났다. 가장 큰 이유는 지난 20여 년 동안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 아래 정치권이 과도하게 시장의 이익을 옹호하고, 노동의 유연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무리한 입법화를 추진해 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말의 진실도 있다. 실제로 노사정이 주도하는 사회적 대화의 성과는 언제나 입법화로 평가하는 경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입법화는 당사자 간의 합의를 못믿기 때문에 법으로 일종의 행위수칙(code of conduct)을 만드는 것인데, 그것이 과도하여 노동계에서 보면 항상 불리한 조건을 합의문에 못 박아 관행을 제도화하는 ‘악마의 맷돌’처럼 인지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제위기 상황에서 경영계의 요구와 이를 담보하려는 정치권의 과도한 입법화가 이를 추동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노동계도 반대급부적인 요구사항의 입법화를 요구하여 사실상 사회적 대화는 사회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이 아니라 법률적 쟁점이 중심이 되고, 경제문제에서 출발하여 결국은 노동법 학자들의 이해조정과 국회의 입법화로 끝나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법만능주의적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왜 그럴까?
기본적으로 사회적 대화를 위한 이해당사자 간의 신뢰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신뢰부족은 다 알다시피 나쁜 경험에서 학습된 것이고, 법제화라는 강고한 장치를 동원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기에, 우리의 사회적 대화는 현실적으로 신사협정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에 도달했다. 서구의 노사정 대화 합의문을 보면 대체로 간결하고 명료하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합의를 하면 이를 지키려는 후속 행동 조치가 당연히 뒤따라야만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예외 없는 것은 불가능한지라 일정한 수준의 자율적 결정 범위는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사회적 대화와 협약 당사자의 책임 준수는 기본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노사정 사회적 대화가 강조될 때마다 결국 불신을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입법을 앞세우다 보니 사회적 대화자체가 일종의 과잉 정치화 현상을 부르고, 합의문이 장황하다. 이해당사자 간의 대화를 위한 노력보다는 내부자들에게 보여주는 정치적 목소리에 더 민감하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노동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이를 중재할 정부마저 탄력근로제와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 등의 의제를 앞세워 대화 자체를 냉각시켜버렸다. 물론 중산층 지지층에 대한 메시지 전달이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된다. 그러나 노동계가 그토록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슈의 과도한 법제화를 내세워 굳이 사회적 대화를 파행으로 끌고 갈 필요가 있었나 싶다. 그것이 중요한 이슈가 아니라서도 아니다. 사회적 대화에서 굳이 민감한 쟁점을 피하자는 이유도 아니다. 사회적 대화가 작동하려면 보다 보편적이고, 노사정이 공감할 의제를 두고 논의를 해야 실효적일 텐데, 처음부터 화력을 집중해야할 의제를 들고 나와 꺼져가는 전투성에 불을 질렀다. 역시 이해당사자의 역할과 역량부족만큼 정치권의 조급성과 의제의 과도한 정치화가 문제이다.
사실 노사정의 문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적 대화의 내용을 차용한 일련의 사회적 협의 과정을 보면 극단적인 목소리에 비해 합의의 결과는 너무 미비한 것들이 부지기수다. 정치적 부대비용이 과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대부분 정치적 성과를 겨냥한 것들이다. 모든 사회적 행위가 정치적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부정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어떤 분야에서든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면 우선은 이해당사자의 노력과 역할에 주도권을 넘길 필요가 있다. 정치의 과잉화는 결국 행위의 과잉화를 불러 불신을 낳고 과도한 요구로 대화 자체를 무산시키기 때문이다. 주체의 행위능력이 부족할 때 언제나 공론장에서 담론의 과잉 정치화를 요구한다. 마치 두려움이 많은 개가 더 크게 짖듯이 말이다. 그러한 점에서 어떠한 영역에서든 사회적 대화에 대한 보다 엄밀한 준비와 노력이 요구된다.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독일 마부르크 대학교 사회학 박사. 현재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비판사회학회에서 발간하는 <경제와 사회> 편집위원장, 한국이론사회학회 부회장,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기획평가위원을 맡고 있다. 주 연구분야는 정치경제학, 노사관계, 정치사회학, 현대 사회이론이다. 주요 저서로 <전환시대의 논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중위기>, <경제의 디지털화와 노동의 미래>, 공저로 <현대사회와 베버 패러다임>, <문화, 환경, 탈물질주의 사회정책>, <청년실업과 노동시장, 그리고 국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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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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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한국이 '박정희식 자유'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의 자유관이 한국에 유효하게 작동할 수 있다면 '박정희식 자유'를 넘어서는, 한국적 근대를 지양하고 그 너머를 그려내는 차원에서 그럴 것이다. 박정희와의 대결은 아직 끝이 난 게 아니다. 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좀더 치밀하게 극복하고 싶다.
손민석
10 July 2019 · Shared with Public
박정희의 정신은 “자조(自助), 자립(自立), 자주(自主)”로 표현될 수 있다. 스스로 돕는 자를 정부가 도와주어야 자립경제를 영위할 수 있고, 그런 자립경제를 영위하는 국가만이 국방을 할 수 있고, 그런 국방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자주적인 국가와 민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수출을 행하는 기업에게 국가가 금융지대를 보조하는 것이었으며, 그렇게 경제개발이 어느정도 수준에 이르자 자주국방을 시도하였다. 그는 왜 이런 정책을 펼쳤을까.
그의 정신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한민족의 부흥이었다. 그는 조선왕조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한민족을 몰락의 구텅이에 빠뜨린 양반사족, 문인들을 혐오했다. 무관인 자신이 한민족의 중흥이라는 거대한 목표 아래 물질적 근대화 - 자주국방이라는 두 축을 세워놓고, 세부적으로 물질적 근대화에 1) 자립경제 건설, 2) 공업입국, 3) 국토개발, 4) 복지사회 구현, 5) 기술혁신, 6) 새마을운동을, 자주국방에는 1) 군현대화, 2) 멸공평화통일 달성을 추진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양반사족들의 습속에 젖어 있는 한국민들을 새로운 형태의 인간으로 ‘개조’할 필요성이 있었고 그 목표가 바로 “자조”하는 인간이었다. 교육을 통해 근대성을 체현한 인간, 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할 수 있는 인간, 농촌적 습속에서 벗어나 도시적 습속을 갖춘 인간 등으로 새롭게 주조되어야 했다. 그것이 관에 의한 통제책이었다고는 하지만 새마을운동은 인간주조를 향한 박정희의 의지가 바로 구현된 정책이었다.
박정희의 사고는 나름대로 체계성을 갖추고 있으며 메시지가 간결했다. 그리고 이 목표들은 그가 볼 때 너무나도 근원적인 욕구에서 나왔으며, 그것들은 당연히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목표를 추구하는 것에 대해 어떠한 이론(異論)이 나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위대한 국가와 민족이 되는 것, 양반적 습속으로부터 벗어나 근대적 인간을 창출하는 것 등은 조선 역사 5천년의 퇴폐가 모인 조선왕조라는 역사의 구덩이에서 한민족을 탈출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었다.
여기에 민주주의가 어떻고 철학이 어떻고 하는 문인 무리들을 그는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가난으로 인해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의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 개인의 것에서 벗어나 민족의 역사로 승화되어 나타났다. 이 나라, 이 민족은 어째서 다른 민족과 국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는가, 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는가,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등의 문제는 그에게 있어 민족으로 확장된 비대하고 상처받은 자아를 구원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것이 기본적인 동인이고, 다른 동인으로는 문화적인 것도 있는 것 같다.
조갑제는 박정희가 유교적 선비관과 사무라이 정신을 동시에 품고 있는 사람이라 했는데 나는 후자가 결국 전자에 종속된다고 본다. 여기서 핵심은 유교적 세계관은 인간의 내면에서 나오는 무상감, 허무함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이다. 유교적 세계관은 인간의 내세에 대한 욕구, 인생에서 느껴지는 무상함 등을 채워줄 수 있는 정신적 양식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이 세계관은 그러한 허망함을 현실에서의 업적추구로 해소하라 유도한다.
김대중 대통령만 해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기에 자신의 인생에서 나오는 수많은 비애, 허망함 등을 신앙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겠지만 박정희는 그러한 방법을 갖고 있지 못했고 그러한 것이 그를 더 업적에로, 권력에로 몰아넣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 비대해진 자아는 본인을 국가, 민족과 동일시하며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다. 그의 권력과 업적에 대한 그 강렬한 욕망은 이런 지점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유교 문화권이 그토록 강렬하게 중앙으로의 귀속 욕구를 지니고 있는 것 또한 비슷한 원리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의 사고체계는 나름대로 정합성 있었고 간결했다.
나는 그의 사고와 사상을 농민적 세계관의 일면으로 파악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농민적 세계관은 그것이 보다 정치하게 표현된 유교적 세계관과 마찬가지로 기묘하게도 건실한 측면과 퇴폐적인 측면이 쌍을 이루며 통합되어 있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세계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농번기와 일을 할 수가 없는 농한기의 차이가 그러한 성향을 낳은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식민지기 민속지에는 농한기의 농민들이 얼마나 퇴폐적인지에 대한 자세한 보고들이 많다. 그것을 조선민족성으로 파악하는 잘못만 제외한다면 농민세계의 퇴폐성에 대한 보고로는 훌륭한 기술이 많다.
박정희는 이 농민적 세계관에서 상대적으로 건실한 측면을 자신의 아버지, 형 등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대성을 체현한 일본제국의 통치 속에서 체현한 것 같다. 실제로 그도 부정부패도 많고 그랬지만 다른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건실한 측면이 많았다. 그리고 그 건실한 측면을 통해 한국사회 전반을 자신의 인격과 같은 형태로 개조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
그의 사상을 농민적 세계관이 낳은 한 유형으로 파악하면서 비교사적으로 다른 농업사회의 지도자들과 비교해보고 싶다. 개인의 정신세계의 내밀한 지점까지 정치경제사적 맥락에서 조망해보고 싶은 욕망이 크다. 아직 이론틀이 만들어지지 않아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꼭 마무리해보고 싶다.
앞의 것과 다른 맥락에서도 박정희에 대해 관심이 있는데, 사실 나는 그의 자조, 자립, 자주라는 표어가 사회주의하고도 많이 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진보좌파는 복지국가에 대한 긍정을 굉장히 쉽게 하지만, 알다시피 마르크스는 복지국가를 긍정한 적이 없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유지고 뭐고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국가에 의존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했기 때문이다. 국가는 개인의 완전한 자립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멸해야 하는 것이지, 개인이 거기에 의존하며 존속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나는 마르크스가 하이에크보다도 더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박정희는 개인의 자립이 국가와 민족의 자립, 위대함으로 연결되는데 반해 마르크스의 것은 그것들의 지양으로 이어진다는 것이겠다. 이 차이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겠으나 어찌됐든 박정희가 개인의 자립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것을 정책에 반영시키려 했던 점은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경영하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참고할만한 지점이 많다.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을 국가를 통해 사회화시키려는 유럽식의 복지모델과 개인화시키지만 어찌됐든 개인의 자립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는 한국형 혹은 영미식 모델 중 어찌됐든 우리는 후자에 속해 있기에 여기서의 사회주의의 전망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박정희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박정희라는 개인을 어떻게 하면 보다 정치하게,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이 아직도 많다. 공부를 시작한 이래로 계속해서 고민해왔지만 아직도 답을 내지 못했다. 그의 강렬한 국가주의와 반국가주의의 기묘한 통합은 개인의 자주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 그 개인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것이 박정희 개인의 경험뿐만 아니라 농민적 세계관에서 파생되었다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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