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낯선 삼일운동 - 많은 인민을 이길 수 없다
정병욱 (지은이)역사비평사2022-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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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는 엘리트가 남긴 사료 중심으로 연구, 서술되는 역사를 비판한다. 삼일운동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난 2019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국가기록원이 공동 주최했던 삼일운동 100주년 특별 전시회뿐 아니라 전국에서 열린 삼일운동 100주년 특별전이 모두 ‘엘리트 중심의 전시’였음을 분석해냈다.
삼일운동 관련 피고인 중 근대 학교교육을 받은 자는 19%에 불과한데도 전시에서는 76%를 차지하고 있다며, 엘리트 편향은 결국 민중의 주변화나 실종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박물관 관계자는 유명하지 않거나 엘리트가 아니면 자료가 없어 전시를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저자는 그런 생각에 의문을 품으며, 단지 의지와 방법, 그리고 시간의 문제라고 일침을 놓는다.
이 책은 민중의 삶으로 들어가 그들의 눈으로 삼일운동을 바라보게 한다. 저자는 뭉뚱그려진 민중의 모습이 아닌 삼일운동 참여자로서 개인의 생애에도 주목한다. 여러 차례에 걸친 현장 답사와 꼼꼼한 사료 분석을 통해 삼일운동이 일어난 마을과 사건을 재구성하고 그 속에서 삶과 일상을 놓치지 않는다. 이 책은 그동안 눈멀고 귀먹은 우리가 낯설지만 더듬더듬 삼일운동의 주역을 찾아가는 길을 안내해준다.
목차
0 최흥백, 두만강을 건너다
1 단천 천도교인 최덕복의 어떤 결심
2 평양 시민, 경찰서에 돌질하다
3 수안의 황천왕동이 홍석정, 한낮에 비로소 쉬다
4 심영식, 겉눈만 못 보지 속눈마저 못 보는 줄 아냐
5 삼일운동 참여자 수감 사진의 비밀
6 태형, 고통의 크기
7 3월 22일 서울 남대문역 부근 만세시위, 누가 주역인가?
8 3월 말 서울의 만세시위, ‘군중’
9 수원군 장안면·우정면 만세시위, “많은 인민을 이길 수 없다”
10 제주 신좌면 만세시위, 그 후
보론 1: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와 사료 비판
보론 2: 1919년 3월 황해도 수안 만세시위의 재구성
보론 3: 삼일운동과 학력주의의 제도화
책속에서
첫문장
1869년 9월 9일 최흥백은 자식 둘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들어갔다.
P. 30 어쩌면 그에게 ‘독립’은 자신과 동료를 죽이거나 죽이려 했던 사람들과 함께 나라를 만든다는 결심이었을지 모른다. ‘만세’는 그것이 일본의 지배하에서 노예처럼 사는 삶보다 낫다는 외침이 아니었을까.
P. 44 “국토는 식민지, 민족은 노예”
P. 70 경찰, “장님이 무슨 독립운동을 한다고 육갑이냐.” 심영식, “겉눈만 못 보지 속눈마저 못 보는 줄 아느냐.”
P. 88 삼일운동은 여러 세대의 같은 소망이 담긴 운동이었다.
P. 104 삼일운동은 ‘태형’으로 상징되는 1910년대 ‘무단통치’를 끝냈다. 삼일운동이 조선총독부의 지배에 끼친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경찰·헌병의 범죄즉결사건 수와 그 처분 인원수의 추이다<그림 21>. 경찰과 헌병 수는 거의 변함이 없는데, 범죄즉결사건 및 그 인원수는 1919년과 1920년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축소되었다. 경찰 수가 대폭 늘어난 뒤 1920년대 중반에 가서야 삼일운동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삼일운동이라는 ‘망치’에 얻어맞아 1910년대 ‘무단통치’기에 구축된 경찰·헌병의 통치력, 일상적 민중 통제 장치가 찌그러진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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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정병욱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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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사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공부하고 ‘일제하 조선식산은행의 산업금융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11년 2월부터 2016년 2월까지 계간지 『역사비평』의 편집주간을 지냈으며, 저서 『식민지 불온열전』으로 2014년 제14회 지훈국학상을 수상했다. 최근 관심 주제는 민중의 일상과 공공역사다.
주요 논저로 『한국근대금융연구: 조선식산은행과 식민지 경제』(역사비평사, 2004), 『일기를 통해 본 전통과 근대, 식민지와 국가』(공저. 소명, 2013), ... 더보기
최근작 : <한국 근대사 연구의 쟁점>,<유언비어 (1)>,<낯선 삼일운동> … 총 1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우리는 보통 삼일운동에 대해서 지도부와 엘리트가 있고 그들의 지도에 따라 민중이 만세시위에 나섰다고 생각한다. 지도부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민족대표 33인’이다. 만약 33인의 독립선언만 있고 방방곡곡에서 그에 호응한 만세시위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의 큰 조직 사건에 그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후 33인이 지도자로서 받게 되는 존경 또는 실망도 지금보다 크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의 ‘자임’을 추인하여 명실상부한 ‘대표’로 만든 것은 나라 안팎의 만세시위였다. 그런데 우리는 만세시위 참여자를 잘 모른다. 참여 민중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공감하고 연대했던 민중이 주인공인 삼일운동의 역사다.
한국인이라면 다 아는 삼일운동
왜 ‘낯선 삼일운동’일까?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삼일운동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나온다. 한국인이라면 다 알고, 모르는 게 오히려 이상한데 ‘낯선 삼일운동’이라니? 대체 무엇이 낯설다는 거지?
저자는 엘리트가 남긴 사료 중심으로 연구, 서술되는 역사를 비판한다. 삼일운동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난 2019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국가기록원이 공동 주최했던 삼일운동 100주년 특별 전시회뿐 아니라 전국에서 열린 삼일운동 100주년 특별전이 모두 ‘엘리트 중심의 전시’였음을 분석해냈다. 삼일운동 관련 피고인 중 근대 학교교육을 받은 자는 19%에 불과한데도 전시에서는 76%를 차지하고 있다며, 엘리트 편향은 결국 민중의 주변화나 실종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박물관 관계자는 유명하지 않거나 엘리트가 아니면 자료가 없어 전시를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저자는 그런 생각에 의문을 품으며, 단지 의지와 방법, 그리고 시간의 문제라고 일침을 놓는다. 너무 빛나는 엘리트 위주의 사료만 보다가 눈이 멀고 귀가 먹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 책은 민중의 삶으로 들어가 그들의 눈으로 삼일운동을 바라보게 한다. 저자는 뭉뚱그려진 민중의 모습이 아닌 삼일운동 참여자로서 개인의 생애에도 주목한다. 여러 차례에 걸친 현장 답사와 꼼꼼한 사료 분석을 통해 삼일운동이 일어난 마을과 사건을 재구성하고 그 속에서 삶과 일상을 놓치지 않는다. 이 책은 그동안 눈멀고 귀먹은 우리가 낯설지만 더듬더듬 삼일운동의 주역을 찾아가는 길을 안내해준다.
밤새 걷고 또 걸어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홍석정
그의 최후와 살아남은 사람들의 삼일운동
1919년 당시 쉰네 살의 홍석정. 황해도 수안군의 전 천도교교구장인 그는 3월 2일 새벽 3시 독립선언서를 이웃한 곡산군에 전달하고 돌아와서 3월 3일 새벽 6시 수안면 만세시위에 앞장섰다. 수안군에서 곡산군까지는 90리, 35.3km다. 하루 꼬박 90리를 왕복하는 게 가능할까? 그것도 잘 닦여진 평탄한 길도 아니고 산길이다. 게다가 쉰네 살의 젊지 않은 나이다.
젊은 나이도 아니지만, 서울 중앙교구에서 보낸 중요 문서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기에 전 수안교구장 홍석정이 맡게 된 것이다. 그는 곡산에 가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 독립이 되니 그렇게 하라’며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몇 집을 들르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에게도 시위에 나오라고 권유했다. 판결문에 나오는 수안면의 1~3차 만세시위 참가자 58인 중 22인이 홍석정의 연락을 받고 시위에 나섰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바삐 움직이며 사람들을 만났을지 충분히 짐작된다.
3일 새벽 6시 홍석정을 포함한 1차 시위대는 헌병대를 찾아가 항의하고 헌병분대를 인도하라는 구호를 외친 뒤 돌아왔다. 그 전날 헌병대의 수안교구실 압수 수색과 수안교구실 간부 연행에 따른 항의 성격이 짙다. 이후 교구실은 교구실대로, 헌병대는 헌병대대로 각기 대책을 마련한다. 수안교구실은 군내 각지에서 몰려들 교인들의 만세시위를 준비해야 할 터이고, 헌병대는 또다시 있을 시위에 대비하기 위해 헌병·경찰 외에도 일본인 상인과 사냥꾼 중에 총기 소지자를 불러 모았다.
그런데 11시 30분쯤 헌병대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수안면의 옛 서부면 거주자들과 대천면 사람들이 수안면 석교리 교구실로 오다가 헌병분대 앞을 지나가면서 만세를 외쳤는데(2차 시위), 헌병대는 해산에 불응한 1차 시위대가 다시 시위에 나섰다고 판단하여 총격을 가한 것이다.
교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교구실 간부와 교인들이 다시 나섰다. 3차 시위의 시작이다. 이 시위에서는 구경하던 열두 살 소녀가 총에 맞아 사망하는 등, 일제 검경의 4월 말 집계 보고에 따르면 13명이 사망하는 잔혹한 진압이 이루어졌다. 180리(약 71km) 길을 밤새 걷고 또 걸어 곡산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사람들에게 시위를 독려했던 홍석정도 이 3차 시위에서 총을 맞는다. 밤새 걷느라 눈 한 번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다리 한 번 펴지 못한 채 만세시위에 참여했을 홍석정은 그제서야 쉼을 얻고 눈을 감는다.
3차 시위에서 살아남은 한병익은 곡산으로 가 수안의 피해 사실을 알리고 곡산의 만세 시위에까지 참여한다. 그는 이 일로 내란죄로 기소되어 경성의 법정에까지 서게 된다.
본문 「3. 수안의 황천왕동이 홍석정, 한낮에 비로소 쉬다」는 「보론 2: 1919년 3월 황해도 수안 만세시위의 재구성」과 같이 읽으면 좋다. 「보론」에서는 조선총독부 판검사가 수안군 시위에 ‘내란죄’를 적용하기 위해 쓴 ‘습격’, ‘폭동’이라는 단어를 역사학자들이 사료 비판 없이 긍정적 의미의 관점으로 바꿔 ‘공세적 시위’라고 서술하는 데 반대한다. 저자는 ‘습격’이나 ‘공세적 시위’가 아니라 해서 수안군 시위가 격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며, 그 의미도 깎이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저자가 주목하는 바는 나라가 사라진 상황에서 종교공동체·지역공동체에 속한 그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요구하는 ‘구속자 석방’의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데 있다. 즉, 그 역시 식민권력에 대한 도전이며 부정이라는 것이다.
삼일운동 수감자 머그샷의 비밀
그들은 단체로 사진을 찍혔다!
역사영화는 작가의 상상이 들어가 있다고는 하지만 사료에 근거한 팩트 체크가 기본적으로 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신문 기사는 공신력이 있다고 생각해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일 때가 많다. 그러나 무턱대고 사실로 믿어버리면 안 된다. 영화, 신문, 인터넷 자료의 정보가 모두 사실은 아니다.
우선, 제일 많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 하나. 유관순의 수인번호. 1965년 3월 26일자 『동아일보』는 치안국에서 유관순 수감사진을 발견했다며 그의 수인번호를 ‘371’이라고 했다.
“이 사진은 유관순 양이 3·1만세운동 때 왜경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찍은 것으로 푸른 수인복을 입은 유 양 가슴에는 ‘371’의 수인번호가 뚜렷하다.”
―『동아일보』 1965. 3. 26.
2019년 개봉한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도 유관순의 수인번호는 371이다. 그러나 371은 수인번호가 아닌 ‘사진 원판 보존번호’이다. 즉,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부착할 사진을 인화하는 데 쓰인 원판의 번호라는 것이다.
저자는 수안면 만세시위로 잡힌 이들의 수감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놀라운 발견을 한다. 인물카드에는 개개의 인물 사진이 보통의 사진처럼 사각형이 아닌 양옆이 비스듬히 잘려 나가거나 한쪽이 사선으로 잘려 나가 있다. 이들 사진을 잘린 면을 중심으로 맞춰 보았더니 5~6인씩 찍은 단체사진이었다(81쪽, <그림 15>와 <그림 15-1> 참조). 사진의 오른편에는(보는 사람의 시각으로는 왼쪽) 많은 사람들이 수인번호로 착각한 보존번호가 일련번호로 적혀 있다. 보존번호가 이웃한다는 것은 곧 같은 사건으로 잡힌 이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개별 카드에 부착된 사진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실이다. 20세기 초부터 사람의 초상이 찍힌 사진이 민중 통제에 이용되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비싼 비용 때문에 한 사람씩 찍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단체사진 속 각각의 인물 사진 가장자리를 많이 오려버린 탓에 수안면 만세시위자 수감자 사진처럼 잘 연결되지 않지만, 이승훈, 한용운, 최남선도 함께 찍혔을 가능성이 높다(87쪽, <그림 18> 참조). 1864년생 이승훈, 1879년생 한용운, 1890년생 최남선이 벽돌 건물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잘라진 사진 속에서 상상해볼 수 있다. 저자는 50대, 40대, 30대가 나란히 같이 서 있는 사진을 보면서 여러 세대의 같은 소망이 담긴 삼일운동을 생각한다.
【편집자 노트】
저자는 2013년에 『식민지 불온열전』을 펴냈다. 식민지 권력이 일상 영역에 침투하고 통제를 강화하며 삶을 옥죄던 때 불온한 언동을 했다는 죄로 검거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이라는 거대 역사 대신, 당대의 작은 개인들의 삶에 주목하고 그들의 일상과 저항을 복원했다. 저자 스스로 ‘불온한 글쓰기’라 이름한, 역사적 사실을 존중하면서 행위자에 어울리는 이야기식 글쓰기, 분석과 검증, 그리고 상세한 주를 단 논문식 글쓰기를 병행했다. 『낯선 삼일운동』도 저자의 그 같은 글쓰기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서사가 한층 풍부해졌다. 『낯선 삼일운동』의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가슴 찡한 감동과 뭉클함이 밀려온다.
2016~2017년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시위가 벌어질 때 친구 하나가 다섯 달 가까이 매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추운 날씨에 독감까지 걸려 기침을 해대면서도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나갔다. 왜 그렇게 가냐고 물었더니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그래야 바뀔 것 같아서...” 촛불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그리는 사회상이 다 똑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국정농단 사태를 두고만 볼 수 없고 사회가, 정치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길 원하는 바람은 같았을 것이다. 1919년 삼일운동에 참여한 보통사람들의 마음도 그렇지 않았을까? 나라가 사라진 상황, 헌병경찰통치하 이미 폐지된 태형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시행되고, 자유와 권리는 탄압되는 상황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저자라면 1919년 민중의 삼일운동을 썼듯이, 먼 훗날 시민이 주인공인 촛불시위를 역사적 서사 구조를 가지고 감동적으로 서술할 수 있을 듯하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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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
읽고 싶어요 (6)
민중이 주인공인 삼일운동의 역사
올해는 삼일운동 103주년이다.
기념하여 눈에 띈 도서인 이 책을 부랴부랴 읽었다.
기존 연구나 매체 활용에서는 삼일운동에 참여한 인물들 중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한 엘리트들에 주목된 면이 있다.
참여 인구로 따지면 67% 정도로 민중의 비율이 높음에도 엘리트에 주목을 한 건 상대적으로 이들은 이름이 알려져 있기에 남아 있는 자료가 많고 그들에 대한 평가도 양에 있어서 많아서일 것이다.
민중들의 자료는 지역사에서 간혹 다루어지지만 이마저도 모두가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사료로 이용되는 인터뷰나 구술도 100% 확신성을 갖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언제나 오류 가능성을 생각하고 접근해야 함을 인지해야 한다.
그래도 최근 들어 삼일운동에서 민중을 주목한 연구가 늘어나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사건의 맥락이자 줄거리인 큰 그림을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만 매몰되면 사람을 놓치게 될 수 있다.
책의 내용은 챕터별로 다른 이야기라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각 챕터별 중심 인물들이 생소할 수 있고(몇몇 인물 제외) 주변 관계 인물은 더더욱 생소할 수 있다.
물론 저자가 최대한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은 했지만 그럼에도 낮설어서 인물의 관계를 정리하고 상황을 그려가면서 보지 않으면 사건이 잘 안 들어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책의 분량은 적었는데 읽으면서 정리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그리고 책에 삼일운동 DB의 출처들이 나오지만 더 상세한 내용을 원한다면 직접 DB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보고 사건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는 것을 추천한다.
본문 내용 중 인상적이었던 것 몇 가지를 꼽아본다.
2019년 개봉작 영화 항거에는 여성 만세 시위자들이 등장한다.
유관순의 수인번호는 371로 등장하는데 이는 수인번호가 아니라 사진(문서)보존원판번호라고 말한다.
당시 삼일운동으로 검거된 많은 이들의 사진이 일제감시대상카드에 올라와 있는데 이를 비교해보고 검토한 결과이다.
조선감옥령시행규칙 18조(1912.3 제34호)에 따르면 입감자에게 번호를 부여하는데 번호표를 상의 옷깃이나 가슴에 부착한다고 되어 있다.
수인번호는 수인복에 부착된 번호, 보존번호는 사진 원판 뒷면에 쓰인 번호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임명애, 어윤희, 유관순 사진의 보존번호가 연속하는데 어윤희 수감사진이 4월 1일에 찍었다고 되어 있으나 해당 날짜에 유관순은 병천리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했으므로 같이 찍은 사진이 아니다. 따라서 후대에 보존번호를 부여하면서 여성참여자 일부의 보존번호를 모은 것으로 보인다.
황해도 수안군 사건의 중심인물인 홍석정이 있다.
1919년 3월 3일 낮 12시 한병익은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만세시위에 참여한 뒤 오후 4시경 출발하여 밤새 걸어 다음날 오전 5시쯤 곡산군 곡산면에 도착하여 오전 10시 시위에 참여했다.
두 곳의 직선거리는 약 27km인데 산길로는 90리쯤 된다.
한병익이 그 정도 걸렸는데 54세인 홍석정(전 천도교 수안교구장)은 3월 2일 새벽 수안면을 출발하여 곡산면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돌아와서 3월 3일 오전 6시 수안면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당시 해주 지방법원 검사는 그 시간에 90리 되는 길을 왕복한다는 게 말이 안된다며 다른 사람일거라 의심했다.
홍석정은 하루 꼬박 180리 넘게 산길을 걸으면서 독립선언서를 전달했고, 길가는 이들에게 만세시위 참가를 역설했다.
당시 판결문에는 홍석정의 연락을 받고 시위에 참여했다는 인물이 많이 보인다.
홍석정이 홍길동이 아니고서야 이는 말이 되지 않으므로 연락을 받은 이들은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인 연락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수안 만세시위 사건은 1919년 하반기 해주 지방법원에서 경성 고등법원으로 이관되었는데 이는 내란죄로 다루기 위해서였다.
만세시위 후 수안 천도교인은 분열로 쪼개지며 시련을 맞이한다.
수원군 장안면 우정면 만세시위. 현재는 화성시로 편입된 지역이다.
장안면 우정면 만세시위는 삼일운동을 대표하는 격렬한 시위로 그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지역이다. 폭력시위의 면에서 자주 언급되곤 한다.
우리는 보통 삼일운동 시위를 비폭력 운동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은 사례가 많은데 이 시위가 대표적이다.
장안면 우정면 만세시위 주동세력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지역유지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농촌의 하층민, 개간 노동자, 외지인 같은 농촌의 기층민중이었다.
전자는 조직을 통해 장안면 주민을 동원했고, 후자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과 동료를 모았다.
이렇게 위와 아래가 함께 만세시위를 하는 경우가 드문 것은 아니지만 장안면 우정면의 만세시위가 특별한 것은 기층민중이 주도권을 잡았고 이것이 시위의 방향을 결정했다는 것일 것이다.
시위 참가가 대세로 흘러갔지만 이 과정에서 동원을 해석해야 한다.
피의자 대부분이 협박에 못 이겨 나갔다는 진술을 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농촌에서 특히 많이 보였다고 하는데 이런 협박과 동원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저자는 주목했다.
강제는 사람들의 봉기에 대한 의욕을 돋우는 역할을 했다.
다만 이런 동원을 자주성이나 주체성 결여로 보는 것은 근대인의 편견이라고 말한다.
강제에 매개된 공동체적 규제, 관계성은 민중이 움직이는 힘에 의거한다고 볼 수 있다.
본문의 내용만큼 보론을 실어둔 것이 인상적이었다.
삼일운동의 사료에 대한 비판, 그리고 황해도 수안 만세시위 사건에 대한 재구성, 삼일운동과 학력주의의 제도화.
삼일운동의 사료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삼일운동 100주년 기념으로 만들어진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인 삼일운동 DB를 기억할 것이다.
2019년은 삼일운동 100주년으로 온라인 DB 구성 뿐 아니라 관련한 전시 등도 많았고 많은 저서들도 출간되었다.
DB 작업은 많은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나도 당시 사이트를 확인하고 감동했던 기억이 있다.
삼일운동의 공식적인 온라인 DB가 생겼으니 이후에는 손쉽게 DB를 검색하여 1차 자료를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삼일운동 100주년 때 출간된 도서 중 여러 저서에서 사료를 사용한 것 중에 출처가 없거나 무분별적으로 수용한 것이 있음을 비판하였다.
이런 경우는 자주 있다.
하지만 역사 연구자가 출처가 없는 사료를 그대로 가져다쓰는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연구자조차 검증을 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사료를 가져다 쓴다면 대부분의 역사책을 읽는 독자들이 검증을 거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오류 발생 가능성을 낳는다.
문제는 이런 독자가 늘면 늘수록 전방위적으로 확산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수안면 만세시위에 대한 기존 연구와 저자의 시각의 차이가 커서 기존 연구에 대한 내용을 검토하고 저자의 시각에서 재구성한 사건을 담은 논문을 실었다.
삼일운동과 학력주의의 제도화는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대책, 엘리트와 민중의 대응을 담은 글로 삼일운동 전후의 맥락을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될 내용이다.
이제는 삼일운동도 어느덧 100년도 훌쩍 지난 일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꾸준히 기록을 찾아내고 발굴하지 않으면 점점 더 잊혀질 수 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 기록조차 사라질 수 있기에 1차 자료를 꾸준히 발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해당 자료를 다양한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작업들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기에 반갑고 좋은 일이라 여겨진다.
물론 평가는 독자의 몫이다.
- 접기
거리의화가 2022-03-04 공감(19) 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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