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2

이정희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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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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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이정희
李正姬 | Lee Jung-hee
1740477924405
출생
현직
국민입법센터 대표
국가보안법폐지교육센터 대표
SNS
X Corp 아이콘(블랙)[2] | 페이스북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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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논란4. 소속 정당5. 선거 이력6. 기타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변호사이자 전 정치인. 위헌정당으로 해산된 통합진보당 출신이다.

1990년대부터 인권변호사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주로 주한미군 관련 범죄, 노동 관련 사건 피해자들의 변호를 맡으며 유명해졌다.

2007년 변호사 사무실을 접고 정계 진출을 선언하였으며,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뒤 권영길 후보를 지원하며 정계 활동을 시작했다. 그 다음 해인 2008년 4월 제18대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민주노동당 대표를 역임하다가 2011년 12월 국민참여당의 유시민진보신당 탈당파인 심상정노회찬조승수와 합세하여 통합진보정당인 통합진보당을 창당하고 4월 총선에서 13석을 얻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건이 터지며 위기를 맞았고, 공동대표였던 유시민과 심상정이 10월 노회찬, 조준호와 함께 진보정의당을 창당해 나가면서 단독 대표직에 오르게 된다.
네. 대단히 궁금하신 거 같아서 이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박근혜 후보 떨어뜨리기 위한 겁니다. 저는 박근혜 후보를 반드시 떨어뜨릴 겁니다. 그리고, 진보적 정권교체를 해낼 겁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토론회에서 박근혜 후보 면전에서 한 발언[3] #[4]
이후 해산 직전까지 통합진보당을 대표를 역임했으며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통합진보당 대선 후보로 출마했으나 박근혜에 대한 지나친 네거티브 전략과 낮은 인지도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대선 3일 전 후보직을 사퇴하고 문재인 지지를 선언하였다.

대선 이후에는 당 대표직 활동에만 전념하다 2013년 8월 이석기 전 의원에 대한 내란음모 혐의 등으로 당 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았고, 2013년 12월 황교안 전 법무부장관의 주재로 해산심판 청구가 시작되자 1년여간 헌법재판소에 출석하며 변호를 했다. #

그러나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을 위헌 정당으로 판결해 해산시키며 소송에서 졌고, 이후에는 계속 야인 생활을 해오고 있다. 정계로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 듯하다. # 민중연합당을 한때 지원했으나 민중당을 합당한 이후에는 별다른 소식이 없다.

민중당이 21대 총선에서 도움을 요청했다. 본인도 고민 중이라고. 종로 출마도 권유받았으나 고사했다. # 그리고 21대 총선에서 민중당을 지지 선언했다.

2. 생애[편집]

서문여자중학교와 서문여자고등학교를 거쳐 1987년도 대학입학 학력고사에서 인문계 여자 전국 수석을 차지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5] 신입생 시절 겪은 6월 항쟁과 1992년 발생한 주한미군 윤금이씨 살해사건을 접한 후 인권변호사와 사회운동가로 활동할 결심을 한다. 또한 여성운동 분야에서도 활동하였다.

1996년 사법시험에 합격, 사법연수원 28기를 수료한 후 법무법인 덕수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변호사가 된 이후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 등을 지냈다.

이후 2007년 3월 2일민주노동당에 입당,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이듬해인 2008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3번으로 제1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식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그리고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과 원내부대표 등을 지내며 경력을 쌓았다. 2010년 민주노동당의 마지막 대표를 거쳐 2011년 유시민과 통합진보당의 창당에 힘을 실어 공동대표가 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 민주당 김희철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발생한 모바일 투표 부정으로 인해 출마하지 않고 이상규[6]에게 양보하였다. 또한 이후 이어진 비례대표 경선 부정사건에 대한 당 대표로서의 대처가 적절치 못했다는 논란에 휘말리며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았다.

2012년 9월 25일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을 하고 대선 행보를 이어갔으나, 12월 16일 3차 TV토론을 수시간 앞둔 시점에 후보에서 사퇴했다. 여담으로, 저러다가 대선 후보 야당 통합을 해서 당시 야당 대선 후보 문재인을 밀어 줄 거란 걸 대부분 알고 있었다. 대선 후보 후보 토론회 당시 박근혜 후보는 대선 지원금 27억 관련 공격을 하였고, 선관위에선 이미 후보자 준비를 하여 투표용지와 홍보 책자까지 배포하여 이만저만 국민혈세 낭비라며 여론이 안 좋았다.

2014년 12월 19일 통합진보당 해산 때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면서 본업인 변호사로 돌아갔으며, 세월호 관련 집회에서 인양 촉구 등을 주장했다. 트위터를 보면 2015년 이후의 발언이 없다. 하지만 2016년 2월경 국회의원으로서 입법을 소망하던 정책을 담은 저서 「진보를 복기하다」 를 펴내어 근황을 근소하게나마 알리고 있다. 2016년 9월 25일, 백남기 농민의 빈소에 등장하면서 다시 한번 근황을 알렸다.

2017년 촛불집회 이후부터 「이정희, 다시 시작하는 대화」를 출간했고 개인 페이스북에 노동 현안이나 사회 문제에 대한 글을 가끔씩 작성하고 있다. 또한 통진당 해산의 부당성을 호소하고자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였다. 당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실체와 탄핵문제가 워낙에 큰 이슈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돋보이긴 힘들었다.

2018년 노회찬 의원의 사망 당시 빈소에 찾아 눈물을 보였다.

2020년 4.15 총선에서 민중당(현 진보당) 지지를 호소하였다. 다만, 2025년 기준으로 현재까지 정당 가입은 하지 않은 상황이다.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이정희/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민주노동당 흰색 로고타입
2007 - 2011
입당
정계 입문
통합진보당 흰색 로고타입
2011 - 2014
합당[7]
2014 - 현재
위헌정당 해산
정계 은퇴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8
민주노동당 흰색 로고타입
973,445 (5.68%)
당선 (3번)
초선
2012
통합진보당 흰색 로고타입
후보 사퇴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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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후보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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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6. 기타[편집]

  • 2009년 말싸움에서 나온 말이 합필갤에서 필수요소로 쓰였다. 자세한 전문은 어딜 만져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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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 예산안 통과 직후 눈물을 흘리는 당시 민주노동당 소속 이정희에게 손수건을 건네는 홍정욱. 신사적인 모습의 이 사진으로 여심을 사로잡았다 카더라. 이정희는 홍정욱이 손수건을 건네며 위로의 말을 전했을 때 큰 감동을 받았고, 다음날 감사 인사를 적은 카드와 함께 손수건을 돌려줬다고 한다. 여담으로, 홍정욱은 당시 한나라당 소속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한미FTA 법안의 물리력에 의한 일방 처리에 반대하며 표결에 참가하지 않았다.[9]
  • 2016년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특검에 특별검사로 추대해야 한다는 여론이 아주 잠시나마 있었다. 이와 동시에 대선 토론 당시의 발언이 재조명되는 중. 그러나 특검 후보 자격 중에 '법조계 경력 15년 이상'이라는 조건과 '정당에 당적을 가지고 있거나 가졌던 자는 임명할 수 없다'는 조건이 있는데, 이정희는 1996년 사법시험을 패스한 후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을 비롯한 여러 당적을 가졌기 때문에 특검 후보가 될 수 없다. 그나마 저 특검 여론도 진지한 여론이 아닌 우스갯소리였다.
  • 2012년 토론에서 한 직설적인 발언들을 두고 다양한 여론이 있었는데 '이정희의 말을 믿었어야 한다!'는 쪽과 '아무리 그래도 이정희는 아니다!'라는 양측으로 갈린 편이었다. 홍준표가 유승민에게 "이정희 역할 하는 것 아니냐?"라고 언급하며 싸우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우스갯소리로 "그때 이정희 말을 들었어야 된다."라는 말도 돌았다.
  • 2014년 12월 통합진보당 해산과 관련해서도 이정희에 대해 여러 말들이 나왔다. 사실만 확인하자면 첫째, 통합진보당의 내란음모죄는 1심에서는 유죄, 항소와 상고심에서는 무죄를 받았다. #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인용은 2심의 무죄판결이 있고 나서 결정이 났다. 게다가 헌재의 인용이 있고 나서도 대법원에서 내란음모죄만큼은 무죄를 선고하였다. 사법기관 둘의 결정이 상충하는 것은 사실이다. 둘째, 내란 선동으로 유죄를 받은 사람은 통합진보당에 소속되었던 이석기이지, 정당인 통합진보당 자체나 이정희가 유죄를 받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정희가 당대표로서의 책임은 있을 수 있으나, 이정희 본인이 내란선동을 한 것은 아니다.[10]
  • 민변 시절의 이정희는 딱히 NLPDR 성향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2007년 민주노동당에 가입한 이후에는 NLPDR 세력의 후원을 받고 정치인으로서 성장했다. 만약 그가 NL이 아니라 PD나 친민주당 진영의 후원으로 그쪽으로 갔거나 하태경이나 김문수처럼 보수로 전향했다면, 여성 정치인의 한 획을 그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NL의 기수가 되어 종북 이미지가 각인되고 NL계열을 제외한 진보, 중도, 보수층 모두에게 여전히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점은 여러모로 안타까운 점이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정의당 여성 정치인들 다 합쳐도 이정희만큼 확실하게 각인된 인물이 박근혜한명숙심상정추미애나경원 정도를 제외하면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 의외로 피아노 연주 실력과 노래 실력이 뛰어나다.[11] 단순하게 흥겹게 부르는 노무현이나 홍준표와는 달리, 발성이나 성량이 상당히 안정적이다.
  • 강의석 감독의 영화인 '애국청년 변희재'의 예고편에서 변희재가 이 노래를 1천 번 넘게 들었다는 얘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중당 지지를 호소하였는데, 정치권에서의 모습과는 다르게 전투적인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차분한 분위기로 자아성찰과 더불어 코로나 시기에 노동자들의 어려움에 공감하며 다독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인데, 이제는 나이가 60이 가까워졌는지 기존의 밋밋한 블랙 커트가 아니라 백발로 되었고, 일명 더듬이 블리치(bleach) 헤어스타일을 연출한 모습이다. 머리가 바뀌고 나서는 강경화와 외모가 굉장히 닮아졌다. 오덕들 사이에서는 캬루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20230406 160005

7. 둘러보기[편집]

민주노동당 흰색 아이콘 민주노동당 흰색 로고타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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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심볼 통합진보당 흰색 로고타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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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기는 전라남도 장성군에서 지내다가 서울특별시 동작구와 서초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2] 2014년 12월 24일을 마지막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3] 그러나 이러한 토론 태도는 보수층의 결집으로 이어져 박근혜 전 대통령 당선에 일조하였다. http://www.realmeter.net/보수결집-원인-이정희-tv토론-31-0[4] 영상 46초에 나온다.[5] 나이를 생각하면 대학을 진학한 해는 1988년이 되어야 하나, 어렸을 때 학교를 일찍 보낸 모양이다. 시골 같은 경우에는 1990년대 후반에 진짜 만 5세에 초등학교 입학하는 경우도 많았다. 학생 수가 적어 정원을 채우기 위해 그랬다. 그 외 의견으로 60년대 시절엔 유아 사망률이 높아 출생신고를 1-2년 늦게 하던 게 보통이라 이정희도 알려진 생년월일이 주민등록상일 수 있고 실제는 68년생 그 이상일 수 있다는 말도 있다.[6] 본래 지역구가 은평구 을이었으나, 당내 경선에서 천호선에게 패배한 상태였다. 또한 이상규는 당내에서 이정희 직속 라인으로 분류되는 인사였는데, 직권으로 이상규에게 후보직을 양도한 것에 대해 절차상의 문제가 크다는 비판 역시 많이 있었다.[7] 국민참여당과 신설 합당.[8] 선거 당일 하루 전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지지하면서 후보직 사퇴.[9] 2021년에 출간된 <50 - 홍정욱 에세이>에 이 일이 나온다. 자신은 평소 민주노동당이나 이정희 의원의 과격한 언행을 안 좋아했지만, 예산안 통과를 막으려 애쓰다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막혀 울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정당을 떠나서 인간으로서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다만, 자신이 한나라당 소속 의원이라 이정희가 자신의 호의를 거절할 거라 예상했는데, 손수건을 받아들고 눈물을 닦아서 뜻밖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로 같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튀어보이려 애쓴다', '착한 척 한다' 등의 빈정대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10] 하지만 통합진보당은 헌법재판소의 적법한 절차로 해산이 인용된 것이므로, 재심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단순 박근혜 대통령의 실각만으로 잘못된 판결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11] 피아노는 학창시절 때 잠깐 배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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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Jung-hee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Lee Jung-hee
이정희
Personal details
BornDecember 22, 1969 (age 55)
Seoul, South Korea
Political partyUnified Progressive Party
SpouseShim Jae-hwan
OccupationPolitician, lawyer, activist
Korean name
Hangul
이정희
Hanja
李正姬
Revised RomanizationI Jeonghui
McCune–ReischauerI Chŏnghŭi

Lee Jung-hee (Korean이정희Hanja李正姬; born December 22, 1969) is a South Korean politician, lawyer and activist. She was a member of the 18th National Assembly of South Korea. She was one of the candidates for the 2012 presidential election.

B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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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rly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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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was born in Seoul in 1969. A graduate of Somun Women's High School and Seoul National University, she joined the student movement in 1992. During her early years, she was a human rights, workers' rights, and women's rights activist.

Political 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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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2007 she joined the Democratic Labor Party. She was elected as a member of the National Assembly in 2008.[1]

In 2008 she was Vice Leader of Democratic Labor Party and next year was elected as the Democratic Labor Party's leader. In 2011, the DLP joined with other parties to form the Unified Progressive Party (UPP).

Lee Jung-hee was the UPP candidate in the 2012 South Korean presidential election. Lee admitted her entry in the race was mainly to castigate Park Geun-hye, the Saenuri Party candidate, whom she called the "first lady of the dictatorial era".[2] Although she polled less than one percent, she was invited to join the presidential debate because her party had more than five seats in the National Assembly.[3] In the debate, she drew controversy by referring to Park's father, former president and dictator Park Chung Hee, by his Japanese name; and by referring to the government in Seoul as "the government of the South"— a phrase rarely used in South Korea but commonly used by North Korea. Her performance was thought to have damaged fellow left-wing candidate Moon Jae-in's chances.[3] On December 16, three days before the election, she withdrew from the contest, "in accordance with the people's hope for integrating (opposition) progressive, democratic and reform-minded forces to achieve a change of government" and warned that Park's victory would mean an "irrevocable regression of history".[4] Park ultimately won the election; analysts suggested that Lee's attacks motivated the conservative Saenuri voters to turn out for Park.[5]

On September 2, 2013, Lee declared that she would go on hunger strike to protest what she called the "witch hunt" against UPP member Lee Seok-ki, whom the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charged with planning armed rebellion against the South Korean government.[6]

On December 19, 2014, the Constitutional Court of Korea dissolved the UPP, finding the party "aimed at using violent means to overthrow our free democratic system"; it was the first time the constitutional court of Korea banned a political party since 1988. Lee Jung-hee denounced the decision, saying it "opened a dark age with an authoritarian decision" and turned South Korea into a "dictatorial country".[7][8]

On April 8, 2020, Lee appeared on the official youtube for the Minjung Party and expressed support for the Minjung party in the 2020 South Korean legislative elections.[9]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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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ove and Song and sick (2010)
  • Future advances
  • Learned woman

See al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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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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