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20

문필기 증언 -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소 디지털 아카이브 2016

아카이브814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소 디지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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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위와 내용
본 자료는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가 여성가족부의 “2016년 일본군’위안부’피해 관련 사료 조사 및 D/B화 사업”의 연구용역 의뢰를 받아 작성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술자료 재정리 자료집>의 문필기 편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한국정신대연구회>가 1993년도에 발간한『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 위안부들』(한울)에 수록된 증언 구술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하였다. 

면담 및 정리를 담당한 것은 당시 한국정신대연구회의 연구원이었던 안연선이다. 

문필기는 보수적인 아버지의 반대로 학교에 가지 못하던 중, '돈도 벌 수 있고 학교도 보내주겠다'는 말에 속아 만주에 있는 위안소로 연행되었다. 본 보고서에서는 이 증언의 원본을 볼 수 있으며, 그 외에 문필기의 생애를 정리한 연보와 이동 경로, 해제가 함께 실려있다.

- 연보
- 이동 경로
- 해제
-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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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가족부 “2016년 일본군'위안부'피해 관련
사료 조사 및 D/B화 사업” 보고서
II.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술자료 재정리
자료집
2016.12
2016.12
■ 사업수행기관 :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 총 괄 책 임 자 : 정태헌(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 사 업 수 행 자 : 박한용(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강정숙(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박정애(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
한혜인(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객원연구원)
노기카오리(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한국사연구소 연구원 : 김상규, 윤효정, 김헌주, 임동현, 이명학
강필구, 황영원, 박우현, 노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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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필기
연보
1925년 6월 18일 경남 진양군 지수면 출생
1934년 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5일 만에 아버지의 반대로 중도 포기함
1943년 가을, 50대의 일본인 앞잡이의 속임수에 연행됨. 트럭으로 부산으로 간
후 일본인 순사 다나카에게 넘겨져 기차를 타고 만주에 도착함. 30여명의
'위안부'가 있는 군위안소에 배치되어 간호부일과 ‘위안부’생활을 강요당함
1945년 해방 후 고향으로 귀환
1961년경 철도의 선로꾼을 만나 동거
1992년 6월 동네 문방구에 군‘위안부’ 신고에 관한 내용이 있는 것을 보고 신고
1993년 8월 31일 일본군‘위안부’ 피해 등록
2000년 9월 20일 국제인권변호인단이 수여한 인권상1) 수상
2000년 12월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에서 남측(대한민국) 피해
자로서 증언함
2003년 10월 9일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으로 들어감
2007년 5월 미국하원에 결의안의 빠른 통과를 위한 영상편지를 발송
2008년 3월 5일 경기 양평 용문 효병원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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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경로
경남 진양군 출생 → 부산 → 만주(창춘) 군위안소에서 군‘위안부’ 생활 → 귀향

해제
이 문필기 증언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한국정신대연구회의 『강제로 끌려간 조
선인 군위안부들』(한울, 1993)에 실린 것으로 한국정신대연구회 연구원이었던 안연선이
면담 정리하였다. 위 책은 1991년 8월 14일 김학순이 국내 생존자로서는 처음 공개 증
언한 이후 다수의 피해자들이 이어 등장하는 한편 일본정부가 가해사실을 충분히 인정하
지 않는 상황에서 피해사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일본의 가해사실을 확실하게 밝혀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와 관련하여 간행되었다. 한국정신대연구회(1990년 7월 조직, 현재
한국정신대연구소)가 중심이 되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1990년 11월 조직)에서 지
원하는 가운데 1992년부터 집중적인 작업 결과 1993년 발행되었다. 한일간의 격렬한 공
방 속에서 피해자 상황을 객관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첫 증언집이었다.
1) 미 하원 의사당에서 인권운동가, 전범 전문가, 의회 관계자 등 2백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이날 시상식
은 <워싱턴지역 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회장 이동우), 조지타운대학, 국제인권변호인단, 미주 한국일보가 수치심을 무릅쓰고 일본의 만행을 폭로한 '위안부'들의 용기를 기리기 위해 공동으로 마련했다. 수상자는 이용수, 김은례, 김상희, 문필기, 황금주, 김분선 등 한국인 6명과 필리핀인 2명, 대만인 1명 등 '위안부' 생존자 9명이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
01&aid=0000027439(검색일 2016.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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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의 증언 청취는 물론 문헌자료가 제대로 발굴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당시 접할
수 있는 자료들을 가능한 한 모아 참고하였다. 피해자 면담은 수차례에 걸쳐 정확성과
객관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기울였고 수록된 증언 하나하나는 증언집 발간작업에 참여한
이들의 검토 등 집단적인 작업의 결과물로서 탄생하였다. 격렬한 한일간의 논쟁 속에 나
온 것이지만 피해자의 시각으로 본다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당대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구술녹취 방법론이 크게 발전한 시기가 아니어서 피해자의 말투는 사라졌지
만 대신 가독성을 얻었다. 이 증언집은 일본, 중국, 영국, 독일 등지에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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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필기는 상업과 자작농을 겸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문필기의 어머니가 학교를 보내주
었으나, 매우 보수적인 아버지의 반대로 가지 못하게 되었다. 집안일을 하면서도 학교를
가고 싶은 마음이 큰 차에 열여덟 살 되던 1943년 가을에 일본 앞잡이인 마을 사람이
돈도 벌고 학교도 보내준다는 말에 의해 동원되었다. 여성들의 교육에 대한 욕구 등이
사기나 유괴의 매개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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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동의나 본인의 수락서, 하는 일에 대한 정보도 전혀 받은 바 없이 동원되었다문
필기는 고향에서 트럭으로 부산까지 이송될 때 동네 다나카 순사가 함께 갔으며 부산에
서 만주로 기차로 갈 때는 군인이 인솔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공권력에 의해 동원되었다
고 판단된다.

인신매매를 기초로 하는 군‘위안부’ 동원은 국제법 및 국내법 위반에 기초하여 이루어
졌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불법적인 것이었다. 그래도 일본에서는 일본정부가 정한 규정
이 있어 계약서 등이 요구되었으나 조선에서는 여러 가지 절차를 거의 생략한 채 진행된
경우가 많았다. 이 점은 일본과 다른 식민지적 특성을 보인다고 하겠다.

문필기는 만주에 있는 군위안소에 도착 후 성병검사를 하고 조선인 남자가 관리인인
군전용 위안소에 배치되었다. 군'위안부'로 동원된 소녀나 여성들을 성병 검사하여 배치
하는 것은 일반적인데 그것은 당시 일본군이 군'위안부'제도를 만든 의도가 일본군의 성
욕해결과 성병예방에 매우 큰 비중을 둔 까닭이다.

문필기는 군의에 의해 일정기간 간호일을 하였으나 곧 군'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하였
다. 이를 통해 여성들은 동원된 이후 군에 의해 역할이 규정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군'
위안부' 생활 중 군인들은 ‘돈표’(군표로 판단됨)를 내었고, 삿쿠 착용 등이 의무로 되어
있었던 점, 군‘위안부’로 하여금 소독수를 이용하게 하는 등의 성병예방조치가 있었던 점
은 전형적이다.

위안소에서의 생활에서 군인이 나와 조회, 황국신민의 서사 외우기, 방공연습 등을 요
구하였던 것은 다른 피해자들에게서도 자주 확인되는 사실이다. 문필기가 있었던 군위안
소의 조선인 업자는 받은 군인 수를 막대그래프로 표시하여 경쟁심을 일으키거나 폭력으
로 받는 군인 수를 늘이려고 강요를 하였다. 이를 보면 문필기가 있었던 군위안소 업자
의 군'위안부'에 대한 강압이 상당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군위안소 업자
의 행위가 군과 분리된 업자의 독자적인 것이라고 하기보다 이러한 것도 아울러 일본군
‘위안부’제로 작동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패전 후 소련군의 급습 속에서 문필기는 다른 피해자와 달리 군위안소 관리인의
도움을 받아 함께 북으로 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문필기는 증언집을 만들던 1992년, 93년엔 자신이 있었던 만주지역의 지명을 구체적
으로 밝히지 못하였다. 만주 등 외국으로 간 이들이 자신이 간 곳의 지명을 대지 못한
것은 군'위안부'가 처한 폐쇄성, 트라우마, 오랜 시간의 경과, 다른 언어 등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확인되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나눔의 집의 ‘문필기
할머니 프로필’에서는 배치지가 창춘(長春, 장춘)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 창춘으로 동
원된 피해자는 김OO, 북측의 황선옥 등이 있다.

문필기가 남북코리아의 증인으로 나섰던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3)은
활동가와 여성학, 사회학, 역사학, 법학 관련연구자등이 중심이 되었던 과거운동과 달리
법정 준비 과정에 심리학, 의학 등의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가하여 피해를 보는 시
야도 확대 심화되었다. 남북의 교류도 이루어졌다. 남북 교류의 직접적 결과는 아니지만
남측에서는 법정 준비 중 피해자들의 증언만이 아니라 몸의 상처에도 관심이 집중되면서
피해자들의 심신에 대한 전반적인 진단을 하였다. 북측은 일찍부터 피해자의 강력한 증
언과 몸의 상처 등으로 피해를 알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측에서는 상당히 늦게 관
심을 가지게 된 셈이었다. 2000년 법정에 증언자로 선 문필기도 일본군이 칼로 찌른 상
처, 몸에 가해진 폭력 등에 대해서도 북측 피해자들과 함께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조용하고 수줍은 모습으로 오랫동안 수요시위를 지켰던 문필기는 군위안소 경험의 악
몽으로 오랫동안 트라우마를 겪었다.4) 1993, 94년 나눔의 집 할머니들을 중심으로 다루
었던 영화 「낮은 목소리」(변영주 감독) 제작 당시에는 나눔의 집에 아직 거주하지 않
았으나, 영화 속에서 문필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문필기는 정부에 신고한 이후 수요시
위나 증언활동을 했고 여러 피해자들과 함께 2000년 9월 국제인권변호인단 등이 수여한
인권상을 수상하였다. 2003년 10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2007년
5월 미국하원에 결의안의 조속한 통과를 위한 영상편지를 발송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2008년 사망하였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강정숙)
2) 나눔의 집 홈페이지 http://www.nanum.org/ (검색일 2016.11.10.) 창춘은 일제시기 신징(新京)으로 불렸다.
3)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은 1998년 4월 한국에서 열린 제5차 아시아연대회의의 결정에 서 시작되었다. 당시 무력갈등 아래의 성폭력문제와 맞물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국제운동의 핵심주제로 부상하였지만 일본군'위안부'와 관련하여서는 당시 만들어진 국제형사재판소에서도 처벌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국제민간인권법정을 만들어 이 범죄를 대해 다뤄보자는 것이 이 법정을 만든 취지였다. 그리하여 2000년 12월 피해국과 일본 등지 피해자와 피해자 지원자, 세계적인 법률가 등이 일본 도쿄에서 모여 민간인권 법정을 열었다. 최종판결은 2001년 12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있었다.
4) 이에 대해서는 앞의 나눔의 집 문필기의 프로필에도 언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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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맏딸로 태어나
나는 1925년에 경남 진양군 지수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구멍가게를 했다.
가게에서는 고구마, 생선, 감, 과자 등을 팔았다. 가게일은 어머니가 주로 하고 아버지는
장에서 물건을 사들이거나 팔러 다니곤 했다. 그리고 우리 소유의 논밭도 있었다.
형제자매는 2남 9녀였다. 딸 아홉 중 셋은 어렸을 때 죽었다. 어머니가 아들을 못 낳는
다고 작은 어머니 몸에서 아들을 낳아 여섯 살 때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그 후 어머니가
마흔한 살에 아들을 낳았다.
어렸을 때 내 이름은 미요코(美代子)였다. 나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내가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쌀 한 말을 팔아 보통학교에 넣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시나는 공
부하면 여우가 된다”고 입학한 지 5일 만에 학교를 찾아와 교실에서 나를 끌어내고 책을
모두 태워 버렸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 일로 나는 아버지에게 맞기도 많이
맞았고 결국은 집에서 쫓겨나 큰집에 가 있었다. 다시는 공부를 안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서
야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부모 안 보는 데서 공부해 똑똑한 사람이 되어 세상을
바로 살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촌사람 만나 결혼하면 내 장래가 매양 그 꼴 일거라
고 생각하고 마음을 크게 가지려 하였다. 나는 정말 공부를 하고 싶었다. 내가 아들이었다
면 공부를 원껏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 위로 언니들이 어려서 죽었으므로 내가 맏이 노릇을 했다. 나는 아홉 살 때부터 집에
서 살림하고 밭일도 하고 목화도 따고 물레질과 길쌈도 했다. 그리고 구멍가게 일도 거들
었다. 구멍가게에서 삶은 고구마도 팔았는데 그 고구마 삶는 것도 내 몫이었다. 농사일은
사람을 사서 하였으므로 끼니때가 되면 밥을 해서 내다주었다. 집안일은 매우 힘들었다. 큰
딸 감으로 태어난 것이 죄라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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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공부가 하고 싶어서

진양군의 우리 마을에는 일본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50대 정도의 아저씨가 살았다. 어
느 날 그 아저씨가 나에게 말하기를 공부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 주겠
다고 했다. 나는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공부시켜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승락을 했다.
그러나 부모에게 그 사실을 말하면 호되게 매를 맞을 것 같아 숨겼다. 그때가 내가 열여덟
살 되던 해인 1943년 가을이었다. 그때 나는 집안일도 고되고, 아버지가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하게 하였으므로 집을 떠나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싶었다.
며칠 후 저녁 무렵에 그 아저씨가 찾아와 잠깐 다녀올 데가 있으니 나오라고 해서 부모
몰래 나갔다. 그랬더니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 짐 싣는 트럭을 세워 놓고
있었다. 거기에는 우리 동네 파출소에 근무하는 일본인 순사 다나카도 와 있었다. 그 두 사
람은 나를 트럭에 태워 부산으로 데려갔다. 집에서 입고 있던 검은 치마와 저고리를 그대
로 입은 채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그들을 따라가게 되었다.
나를 데려간 곳은 부산의 어떤 미용실이었다. 미용실에서 내 긴 머리를 자르려 해서 못
자르게 반항했으나 결국은 잘렸다. 그 후 우리 동네 아저씨는 나를 일본인 순사 다나카에
게 넘겨주고 가면서 공부시켜 줄 테니 말 잘 들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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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갔는데 자주색 원피스를 가져와 갈아입으라고 했다. 내가
입고 간 치마저고리는 더러워서 안된다며 깨끗하고 예쁜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그곳에
는 나 말고도 조선인 여자 네 명이 더 있었다. 그들 중에는 학생복을 입은 이도 있었다.
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후 같이 있던 조선인 여자 네 명과 함께 부산역을 출발하였다. 우
리가 탄 기차는 민간인이 타는 칸도 있고 군인이 타는 칸도 있었는데 우리는 군인 칸에 탔
다. 일본 군인이 우리를 인솔해갔는데 그들은 우리들을 따로따로 앉혀 서로 이야기도 못하
게 하였다. 서울, 평양, 신의주를 거쳐 만주로 들어갔다. 가는 동안 두 차례에 걸쳐 대여섯
명의 우리 같은 조선인 처녀들을 또 태웠다.

반항하며, 맞으며, 당하며

기차에 같이 타고 갔던 우리들은 모두 만주에 있는 군위안소에 배치되었다. 위안소가 있
었던 지명과 부대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곳의 겨울은 매우 길고 아주 추웠다. 여름은
짧았고 우리나라의 가을 날씨 같았다. 부대에 도착했을 때에도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할 것
인지조차도 몰랐다.

위안소에는 30명가량의 위안부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조선인 위안부들이었다. 주로 이
북여자들이 많았고 그 외에도 부산 사람이 있었다. 위안부들은 대개 18~19세 가량되었다.
위안부들 중에는 학교 다니다가 끌려온 사람도 있었다. 내 이름이 미요코였기 때문에 위안
소에서는 나를 ‘미창’이라고 불렸다. 나는 기요코와 가장 친했다. 얼굴이 갸름하고 잘 생긴
기요코는 평양 기생이었는데 좋은 곳에 소개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서 위안부가 되었다고
했다. 위안소에 있는 조선인 남자가 여자를 데려오라는 일본 군인의 부탁을 받고 고향에
가서 기요코를 속여서 위안소로 데리고 왔다고 한다. 위안소에는 위안부들 외에 이북이 고
향인 조선인 남자 두 명과 청소, 심부름 등을 하는 중국사람 한 명이 있었다. 한 조선인 남
자의 부인은 이북에 사는데 가끔씩 위안소에 다니러 와서 밥과 김치 등을 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위안소에서 가까운 부대소속 군인들이 교대로 파견 나와 보초를 섰다.

위안소에서 우리를 감독하고 돈표를 모아서 계산하는 일을 하는 조선인 남자 두 명이 있
었다. 그들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옷 색깔은 노랑에 풀색이 섞인 색이었고 가슴에는 배지
를 달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우리들을 괴롭히지는 않았으나, 키가 작은 또 다른 군
속은 우리를 회초리로 때리고 지독하게 굴었다. 특히 위안부들이 일본인 군인들과 싸우거나
군인을 상대하지 않으려 하면 심하게 때렸다.

위안소는 일본식 집이었는데 위안소 주변에는 부대가 있었다. 위안소 건물은 ᄂ자 형태
이고 2층집이었는데 1층과 2층을 모두 위안소로 사용했다. 위안소의 간판은 있었으나 글을
몰랐기 때문에 뭐라고 씌어 있었는지 모른다. 위안소 건물 주위를 둘러싼 담도 있었다. 1층
에는 우리를 감독하던 조선인 남자 두 명의 숙소와 식당이 있었다. 2층에는 위안부들의 방
이 있었는데 다다미 한 장 반 정도의 크기였다. 난방은 밖에서 한쪽 벽으로 석탄을 때서
벽이 따뜻해지게 하는 페치카 방식이었다. 위안부 한 사람이 한 개의 방을 사용했다. 방안
에는 이불과 옷걸이, 화장품 등이 있었다.

처음에 위안소에 도착하자 성병이 있는지 처녀인지 등을 검사했다. 그 후 군의는 나에게
몇 달 동안 간호부 일을 시켰다. 그래서 부상병의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로 감는 일을 배워
서 했다. 그리고 병원의 빨래도 했다. 낮에는 병원 일을 하고 밤에는 군의가 나에게 자러
왔다. 나는 그 군의에게 처음으로 정조를 빼앗겼다. 여자에게 정조가 중요하다고 듣고 자랐
고 내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으므로 내 몸을 버렸다는 생각에 많이 울었다. 간호부 일을 하
는 동안은 군의 외에 다른 군인들은 상대하지 않았으나, 몇 달 후에는 간호부 일을 그만두
게 하고 위안부 짓을 시켰다. 그러나 위안부 짓을 하면서도 부상자들이 많을 때는 가끔씩
병원에 가서 간호부 일을 해야 했다.
위안부들은 모두 똑같은 원피스를 입었다. 옷은 부족하지 않게 여러 벌을 주었다. 여름을
제외하고는 방안의 한쪽 벽을 따뜻하게 난방해 주므로 내복을 입은 적은 없었다. 빨래는
우리들이 각자 했다. 머리는 단발머리를 했었다.
식사로는 조밥과 단무지, 양배추 김치를 주로 먹었다. 아침에는 된장국이 나왔다. 일본의
국경일에는 고기반찬이 나올 때도 있었다. 아침과 저녁으로 하루 두 끼의 식사만 주었다.

밥은 우리가 교대로 했다.

위안소에 있을 때 월경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가 병에 걸린 줄 알고 깜짝 놀랐으나, 기
요코 언니가 가제로 생리대를 만들어 주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 군인들이
많은 토요일, 일요일에는 월경 중에도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때는 참 괴로웠다.
평일 날 아침에 일어나면 함께 모여 조회를 하고 가끔 군인들이 나와서 방공연습을 시키
기도 했다. 조회는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했는데 위안소 마당에 모여 일본에 충성하자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고 일본 군가도 불렀다. 그러나 일요일에는 장교들이 자고 가므로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대중없었다.

평일에는 군인들이 싸움터에 나가느라 낮에는 거의 오지 않고 저녁부터 왔다. 가끔 외출
나온 군인들이 낮에 왔다. 그래서 평일은 열 명 내외의 군인이 다녀갔다. 토요일과 일요일
은 아침 여덟 시부터 군인들이 왔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점심밥도 주므로 하루 세 끼를 먹
을 수 있었다. 밥 먹는 시간 외에는 계속 군인을 받아야 했다. 저녁 일곱 시 이후에는 장교
들이 왔다. 장교들은 초저녁부터 와서 긴 밤을 자고 다음날 새벽이나 아침에 갔다. 군인들
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조선인이 들어오면 붙잡고 실컷 울기라도 하겠는데 3년 동안 조선
인 군인은 한 번도 못 보았다. 다른 위안부들 중에는 조선인을 보았다는 이도 있었다.

군인들은 위안소에 왔다갈 때 손바닥 반 만한 크기의 누런 색 돈표를 내고 갔다. 장교는
사병보다 더 많은 액수의 돈표를 냈다. 어떤 군인은 돈표를 안 내려는 이도 있었다. 규정시
간을 넘긴 사람에게는 돈표를 더 내놓으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불쌍해서 그냥 내보
내기도 했다. 돈표를 받으면 우리가 갖지 않고 우리를 관리하던 조선인 남자에게 갖다 주
었다. 그러면 그 갯수를 세어서 위안부 각자가 하루 몇 명의 군인을 받았나를 막대그래프
로 크게 그려 벽에 붙여놓았다. 나는 다른 위안부들보다 군인을 적게 받는 편이어서 자주
혼났다. 군인이 적은 평일은 열 명 내외를 상대했고, 토‧일요일은 40~50명을 상대해야 했
다. 우리는 돈표를 갖다 주기만 했지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저금을 한 적도 없고 돈을
내놓으라고 항의한 적도 없다. 군인들이 와서 따로 돈을 주고 간 적도 없었다.
평일 낮에는 주로 내 옷을 빨거나 삿쿠를 씻었다. 군인들이 쓰고 간 삿쿠를 안팎으로 깨
끗이 씻어서 소독하고 약을 발랐다가 다시 사용했다. 토‧일요일에 군인들이 쓰고 간 삿쿠를
받아서 모았다가 씻어서 다시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삿쿠를 씻을 줄 몰라 한 달가량을 다
른 여자들 하는 것을 보며 배웠다. 대개 위안부 1인당 삿쿠 40~50개씩을 보관하고 있다가
군인들이 들어오면 끼워 주었다. 보통 세 번 사용하면 버리고 새 삿쿠로 바꾸어 주었다.
군인들 중에는 ‘사면발이’5)라는 ‘이’가 있는 사람이 많아 대부분의 위안부들이 이에 옮았

1) 사면발이(phthirus pubis)는 음모(陰毛)에 기생하는 이로, 물리면 음부에 양진증(痒疹症)을 일
으킨다.

다. 기요코 언니와 나는 서로 음부에 붙어 있는 이를 핀으로 떼어 내 주었다.

군인들은 문 밖에 줄을 서 있다가 차례로 들어왔는데 서로 먼저 들어오려고 자기들끼리
싸우곤 했다. 그들은 각반을 벗고 기다렸다. 앞 사람이 위안소 안에 오래 있으면 빨리 나오
라고 문을 두드리고 법석을 떨었다. 군인들은 위안소에 한번 들어오면 사병은 삼십 분, 장
교는 한 시간 있을 수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오 분 내외면 끝내고 나갔다.
군인들은 위안소에 들어와서 반드시 삿쿠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군인들 대부분은
성병이 무서워 삿쿠를 사용했다. 군인들 중에는 자기가 직접 삿쿠를 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삿쿠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군인도 있었다. 나는 성병이 무서워 세상없어도
삿쿠를 해야 한다고 끝까지 버텼다. 삿쿠를 사용하지 않으면 상사에게 이른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고 성병이 옮으면 서로 좋지 않으니 삿쿠를 끼라고 타이르기도 했다. 부모형제를
떠나서 끌려온 것도 억울한데 병까지 옮으면 어떻게 하냐고 반항했다. 군인 한 사람을 상
대하고 나면 1층에 있는 목욕탕에 내려가서 소독약을 넣은 물로 밑을 씻고 와서 다시 군인
을 받았다. 소독약이 목욕탕에 있었다.

군인들 중에는 여자를 오래 못 봐서 그런지 들어오자마자 사정해 버리는 이도 많았다.
나를 괴롭히거나 못되게 구는 군인에게는 죽을힘을 다해 반항했다. 그래서 군인과 싸우고
있으면 밖에 줄서서 기다리던 군인들은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나오라고 욕했다. 또 군인과
싸우면 많이 맞기도 했다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어떤 군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받아 주지 않는다고 술을 먹고 와서 칼을 뽑아 들고 행패를 부렸다. 또 어떤 군인은 술 먹
고 위안소에 들어와 칼을 다다미에 꽂아놓고 성행위를 하는 사람이 많아 방바닥에 칼자국
이 많이 있었다. 이것은 자기 하고픈 대로 실컷 하게 해달라는 위협이었다. 그러다 안 되면
칼을 가지고 덤벼드는데 이럴 때는 빨리 피하거나 혹은 누가 찾는다고 거짓말을 시켜 내보
내곤 했다.
그곳에 간 지 1년쯤 되었을 때 어떤 군인이 너무 괴롭히길래 나도 화가 나서 발로 찼더
니 그는 내 옷을 다 찢고 발가벗겨 때리고 칼을 들이댔다. 그리고는 밖에 나가서 시벌겋게
달구어진 인두 모양의 불쑤시개를 가지고 들어와 내 겨드랑이를 지졌다. 그 상처로 석 달
동안 고생했다.

특히 긴 밤 자는 장교들은 여러 번 접촉을 요구하며 아주 귀찮게 굴어 밤에 잠을 잘 수
가 없었다. 또 긴 밤 자는 장교 중에는 술이 잔뜩 취해 들어와서는 밤새도록 다 토하고 잘
되지도 않으면서 접촉을 하려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비위가 상해 참을 수가 없
었다.

군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왜 부모 말을 안 듣고 이 신세가 되었나 싶어 후회가
막심했다. 결국은 내 자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해만 지면 부모 생각
에 가슴이 저미었다. 차라리 부모가 시집가라 했을 때 말을 들을 걸, 공부가 뭐길래 공부시
켜 준다는 말에 속아 이곳에 와서 이 신세가 되었나 생각하며 절망하였다. 가족들이 미칠
듯이 그리워 매일 울고 남의 슬픈 소리를 조금만 들어도 울곤 했다. 나는 집 생각, 엄마 생
각으로 마음에 병이 나서 몸져눕기도 했었다.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나를 잘 봐주던 군
의는 특별히 나에게 영양제와 안정제를 주기도 했다.

그 군의와 함께 마차를 타고 극장에 가서 ‘쓰바키히메’라는 제목의 일본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허락을 받아 주어서 위안소 주변을 구경한 적이 한 번 있었다. 그 외
에는 외출해 본 적이 없다. 보초병들이 늘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도망갈
계획을 짤까 봐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도 못하게 했다. 그래서 위안부들끼리도 서로 잘 몰
랐다.

우리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성병검사를 받기 위해 소변 검사, 피 검사 등을
받았다. 위안소에 있을 때 나는 임질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606호 주사도 맞고 약도
발라 나았다. 성병이 걸렸을 때는 군인을 상대하지 않고 쉬었기 때문에 그래도 지내기가
좀 나았다. 그 외에 다른 병을 앓은 적은 없었다.

내가 글을 모르므로 평양에서 온 위안부 기요코가 우리 집에 보내는 편지를 대신 써줘서
딱 한번 집에 편지를 했다. 내가 있는 곳의 주소는 쓰지 않고 집주소만 써서 보냈다. 편지
는 위안소에서 일하는 중국인 보이에게 몰래 부탁하여 부쳤다. 나는 공부가 한이 되어 공
부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이런 곳에 왔기 때문에 동생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공부를 시키라
고 편지에 썼다. 내가 위안부로 있다는 이야기는 쓰지 않고 그저 잘 있다고만 했다.
고향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내가 위안소에 간 지 3년째 되는 스무 살에 종전이 되었다. 갑자기 군인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위안소에 오질 않아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련 군인들이 위안
소에 들어와 총을 들이댔다.
그들은 우리의 옷을 벗기려 했다. 일본 군인들이 도망가고 나니까 이제 소련 군인들이
우리를 겁탈하려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를 관리하던 이북 출신의 조선인 남자가 큰일 났으
니 쓰던 물건 모두 팽개치고 어서 도망가자고 했다. 그래서 그와 그의 부인, 기요코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 함께 얼굴에 시커멓게 칠을 하고 위안소 건물 뒤로 돌아 나와 도망쳤
다. 나머지 위안부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는 중국에서 뚜껑도 없는 화차를 타고 압록강까지 와 걸어서 흥남에 도착했다. 기요
코와 조선인 부부는 고향이 이북이므로 여기서 그들과 헤어졌다. 그 후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밤낮으로 걸어서 평양과 개성을 거쳐서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역에 도착하여
주먹밥과 고향 가는 기차표를 얻었다. 그 표를 받고는 이제 고향에 돌아가는구나 하고 안
도의 숨을 쉬었다. 고향집에 돌아가니 식구들은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왔다고 깜짝
놀래며 나더러 귀신이 아니냐고 했다.
방황의 세월
고향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이미 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나를 시집보내려고 성
화였으나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위안부였는데 누구와 결혼할 수 있겠나 하
는 생각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내가 위안부였다는 이야기를 하
지 못했다. 공부도 하고 공장에도 취직했었다고 말했다.
나는 마음이 괴로워 더 이상 집에 있을 수가 없어 고향에 돌아온 지 1년 만에 온다간다
말도 없이 집을 나왔다. 나와서는 진주에 있는 사촌 이모집에 갔다. 이모는 여관을 하고 있
었으므로 이모집에서 일을 거들어주며 지냈다. 그 후 이모집을 나와 목포, 광주, 전주 등의
술집에 있다가 남자들이 하도 귀찮게 굴어 그만두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내가
위안부였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볼까 봐 두려워 자꾸 옮겨 다녔다.
돈을 마련하여 신마산으로 나와 전세를 얻어 하숙집, 대폿집 등을 했다. 그때 주위 사람
들은 젊은 여자가 대폿집하지 말고 시집을 가라고 했다. 마산에서 대폿집을 하다가 서른여
섯 살에 철도의 선로꾼을 만나 서울로 와서 살림을 차렸다. 나와는 여덟 살 차이였는데 그
와 별로 정분도 없었다. 서울 와서 그는 철도의 선로꾼 일을 하고 나는 집안에서 살림을
했다. 그러다가 집안형편이 어려워 나도 따라다니며 노동일을 많이 했다. 그는 매일 술을
먹고 내 속을 썩였다. 그는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결혼을 해서 부인과 자식이 있는 사람
이었는데 나를 속인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몇 번을 헤어지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되었다.
혼인신고도 안하고 살았는데 결국 그는 병들어 빚만 남기고 죽었다.
현재는 동생의 손주를 데려다 자식처럼 키우고 있다. 내가 외로워서 네 살 때부터 데려
다 키웠다. 그리고 새마을 취로사업을 나가 벌어먹고 산다. 또 일거리가 있을 때는 밤에 이
웃집에 가서 한 시간에 1,000원씩 받고 부업을 한다. 지금 사는 방은 반지하 방으로 보증
금 150만원에 월 7만원씩 낸다.

하도 억울해서

동네 문방구에 가서 정신대에 관해 써 붙여 놓은 것을 보았고, 또 TV에서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었다. 그래서 나도 신고해서 억울함을 면할까 싶어 1992년 6월에 신
고했다. 처음에는 신고하는 것을 매우 망설였으나 지금까지 내 가슴속에만 넣고 있던 것을
다 털어놓고 나니 가슴이 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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