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 대중 혐오, 법치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피에르 소베트르,오 게강 (지은이),
정기헌 (옮긴이),장석준 (해제)원더박스2024-02-29
원제 : Le choix de la guerre civile: Une autre histoire du neoliberalisme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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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400쪽
143*210mm
525g
ISBN : 979119295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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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선택
"신자유주의의 지배 전략"
제목인 내전, 대중 혐오, 법치(법을 이용한 지배)는 책이 분석한 신자유주의의 대중 지배 전략들이다. 신자유주의라니, 새삼스럽다. 저무는 시대의 헤게모니를 톺아볼 차례가 된 것인가? 그러나 이 책은 지난 시대의 회고가 아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와 사회학자로 이루어진 네 명의 저자들은 현재 세계에서 벌어지는 파행적 흐름의 원인을 여전히 굳건한 신자유주의에서 찾는다.
책은 하이에크, 미제스, 슈미트 등 대표적인 자유주의 이론가들의 사상을 꼼꼼히 살핀다. 이들의 이론은 단순한 경제, 정치사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대중의 현실과 정신을 지배하는 기획이다. 그것은 “연합한 과두 지배자들이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으로 정의되는 '내전'을 통해, 우매한 다수의 대중에게 그 어떤 결정권도 절대 넘길 수 없다는 '대중 혐오'를 통해, 적을 처단하기 위한 '법을 이용한 지배'를 통해 현실화된다.
책에서 분석한 신자유주의의 이론과 전략들은 직설적이고 선명하다. 이 뚜렷함은 현재 한국 사회에 대한 강렬한 이해로 다가온다. 현실 정치의 무책임한 난도질,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유해한 순진함이 아니라 명확한 의도일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이 두려움을 몰고 온다. 우리는 지금 무엇에 지배 당하고 있는가.
- 사회과학 MD 김경영 (2024.03.05)
책소개
신자유주의는 대체, 왜, 어째서 끝나지 않는가? 근본적으로 반평등, 반민중, 반혁명적인 체제,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진화를 파헤치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수많은 지식인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종언을 고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뒤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를 덮쳤고, 또다시 신자유주의 체제 종식에 관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과연 신자유주의는 끝났는가? ‘포스트 신자유주의’라는 말마저 식상한 것이 되어버린 지금, 여기에 단호히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다. 『내전, 대중 혐오, 법치』를 쓴 네 명의 저자들이다.
신자유주의를 푸코의 통치성 관점에서 분석하여 “모든 종류의 평등 요구를 무력화하려는 기획”으로 바라본 저자들은, 이 폭력적인 체제의 특성을 ‘내전’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한다. 신자유주의는 그 출발부터 ‘자유’의 이름으로 ‘평등’에 맞서는 내전을 전략으로 택했다는 것이다. 이는 지배 세력이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다. 그들은 시장 질서와 경쟁에 반대하는 모든 ‘적’을 분쇄하기 위하여 법을 이용한 지배, 즉 법치를 내세우며, 경찰과 군대를 동원한 직접적인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대중 혐오, 즉 반민주주의 정서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책은 하이에크와 대처에서부터 집권 좌파의 몰락, 신보수주의와 극우 포퓰리즘의 부상까지, 신자유주의의 계보를 따라 그것의 지배 전략을 파헤친다. 지난 80여 년 동안 보수는 물론 진보 세력까지 이 체제의 교리를 충실히 따랐다. 신자유주의의 작동 방식을 낱낱이 드러낸 이 책은 낡은 것을 떠나보내고 대안을 모색하는 이들, 진정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지침이 되어 줄 것이다.
목차
서문 ◦ 5
서론 신자유주의 내전의 전략들 ◦ 9
1장 칠레, 최초의 신자유주의 반혁명 ◦ 29
2장 신자유주의의 대중 혐오 ◦ 57
3장 강한 국가 예찬 ◦ 77
4장 정치 헌법과 시장의 입헌주의 ◦ 103
5장 신자유주의와 그 적들 ◦ 125
6장 사회 진화의 신자유주의적 전략 ◦ 151
7장 글로벌리즘과 내셔널리즘의 가짜 대안 ◦ 181
8장 가치 전쟁과 ‘인민’의 분열 ◦ 203
9장 노동 일선에서 ◦ 225
10장 반민중적 통치 ◦ 243
11장 신자유주의 전쟁 기계로서의 법 ◦ 263
12장 신자유주의와 권위주의 ◦ 283
결론 내전에서 혁명으로 ◦ 313
해제 낡은 것은 갔는데, 왜 새것은 오지 않는가? ◦ 336
미주 ◦ 352
찾아보기 ◦ 390
접기
책속에서
P. 17~18 신자유주의 내전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이 전쟁은 과두 정치 세력이 앞장서 벌이는 ‘총력전’이다. 이 전쟁은 사회적 권리 축소를 노린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며, 외국인에게서 모든
종류의 시민권을 박탈하고자 하고 망명권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민족적이며, 모든 저항과 비판을 억압하고 범죄화하기 위해 법적 수단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고 법적이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강성 보수주의가 도덕 질서 수호를 내세우며 개인의 권리를 공격할 때, 이 전쟁은 문화적이고 도덕적이다. 둘째, 이 전쟁에서 각각의 전략은 서로를 지지하고 상호 영감을 주기도 하지
만, 각 국가나 지역의 특수한 전략들이 범세계적인 단일 전략으로 수렴하지는 않는다. 셋째, 이 전쟁은 패권주의 강국이 주도하는 제국주의적 ‘글로벌 질서’와 블록화한 국가들 사이의 직접적인
대립이 아니다. 두 정치체제 간, 두 경제 시스템 간의 대립도 아니다. 이 전쟁은 연합한 과두지배자들이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지는 미리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분열, 그중에서도 가장 해묵은 분열을 수단으로 삼아 매번 획득되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종류의 이원론적 도식은 힘을 잃는다.
_ 「서론 신자유주의 내전의 전략들」 중 접기
P. 23 신자유주의가 가하는 폭력은 무엇보다 민주주의와 사회에 대항해 시장 질서를 보호하는 폭력의 성격을 띤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시장 질서는 경제정책을 선택하는 문제를 넘어 시민-소비자 개인의 책임과 자유에 기초한 문명 전체가 달린 문제다. ‘자유 사회’는 이런 기초 위에 구축되었기 때문에 국가는 모든 특권을 가지고 독보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심지어 상황에 따라서는 가장 폭력적이고 반인권적인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가 된다.
_ 「서론 신자유주의 내전의 전략들」 중 접기
P. 61~63 신자유주의의 모든 조류는 ‘인민주권의 신화’ 위에 수립된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자유주의의 정치적 기초를 세운 선구자들(루이 루지에, 월터 리프먼,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빌헬름 뢰프케)은 ‘민주주의에 대한 광신’, 즉 여론의 지배 혹은 대중의 어리석음이야말로 자유주의를 위협하는 진정한 위험이며, 인민주권 도그마의 유해한 효과를 제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들은 엘리트주의적이고, 개인의 선택과 사적 소유라는 최상위 원칙을 존중하는 제한된 형태의 민주주의만을 인정한다. 이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민주주의’다. (...)
인민, 보통선거, 다수결 원칙, 정치적 다원주의, 분배 정의, 공공 교육, 빈곤층을 싸잡아서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거부하기도 힘들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결코 민주주의를 온전히 지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근본적으로 대중을 혐오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무제한적’ 혹은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를 구별하며, 전자를 수단으로 후자를 무력화하는 이론적 작업을 수행한다.
_ 「2장 신자유주의의 대중 혐오」 중 접기
P. 79~80 권위주의의 형태 혹은 동원되는 폭력의 강도 등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신자유주의자들 사이에 근본적인 이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강한 국가’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견해 차이는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 카를 슈미트의 표현에 따르면 ‘강도’의 차이다. 강한 국가의 한계는 인위적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시장에 대한 적의 위협에 따라 비례적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특정한 신자유주의만을 가리켜 ‘권위주의적 자유주의’라고 표현하는 건 적절치 않다. 시장경제를 규제하기 위한 모든 민주주의적 의지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이미 내재적으로 권위주의적이다. 국가의 힘을 사용하는 형태가 다를 뿐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반복해서 말했다. 독재와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단지 자유경제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강한 국가는 파시스트 국가와 구별된다. 반대자들에 가해지는 노골적인 폭력은 그 자체로 근본적인 원칙이 아니라 맥락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미제스가 설명하듯이 상황에 따라 신자유주의 국가는 시장의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파시스트 폭력에 의존하는 것도 가능하다.
_ 「3장 강한 국가 예찬」 중 접기
P. 127 신자유주의의 다양한 분파는 자유경제에 대한 위협에 맞서 싸우기 위해 정치 영역에 개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단순히 자신의 앙숙인 사회주의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신자유주의의 다양한 분파들은 이데올로기와 문화 영역에서 사회주의와 맞서 싸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법과 조치, 제도의 확립을 통해 향후 어떤 사회주의적 정책들도 도입할 수 없게끔 방벽을 세우고자 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중심 목표는 처음부터 사회주의를 패퇴시키는 것이며, 더 나아가 노동조합을 약화하고, 국가의 사회복지를 후퇴시키는 것이다.
_ 「5장 신자유주의와 그 적들」 중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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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대중 혐오, 법치』는 우리 시대가 과연 어디를 향하는지, 아니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이들이 반드시 읽고 토론해야 할 책이다. 몇 가지 논쟁거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이룬 성취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신자유주의의 탄생』에서,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려면 반드시 생활세계, 국민국가, 지구질서라는 세 가지 수준을 포괄하는 정치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저자들의 이전 저작) 『새로운 세계합리성』은 이 가운데에서 생활세계의 정치가 추구해야 할 바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자치)와 협동(돌봄)에 바탕을 둔 대안적 세계합리성의 구축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내전, 대중 혐오, 법치』는 국민국가 수준에서 대안적 정치의 과제가 민주주의와 평등에 바탕을 둔 광범한 연대를 실현시켜 내전의 정치를 제압하는 것임을 밝힌다. 이것만으로도 탈신자유주의 전략의 상당 부분이 해명된 셈이다. 아마도 지구 질서 차원에서는 경제력-군사력 경쟁이 아니라 문명 붕괴에 맞선 연대가 필요하다는 논의를 덧붙인다면, 탈신자유주의 전략의 전체 그림이 얼추 꼴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 책 마지막 장을 덮으며 우리가 새겨야 할 진실은 이것이다―신자유주의 시대는 결코 저절로 저물지 않는다는 것. 그에 필적할 또 다른 문명적 기획이 구축되지 않는다면, ‘장기 신자유주의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내전, 대중 혐오, 법치』는 더 늦지 않게 이 기획에 착수하라는 촉구이며, 이 기획이 추구해야 할 방향을 안내하는 듬직한 조언이다.
- 장석준 (사회학자, 출판&연구공동체 산현재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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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피에르 다르도 (Pierre Dardot)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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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낭테르대학(제10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헤겔과 마르크스를 전공했다. 같은 대학 소피아폴Sophiapol 연구소에 소속되어 마르크스와 커먼즈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2004년에 크리스티앙 라발과 ‘퀘스천 마르크스Question Marx’를 설립하였고, 이후 그와 함께 『새로운 세계합리성』(국내 출간), 『끝나지 않는 악몽Cecauchemar qui n’en finit pas』 등 신자유주의를 분석한 다수의 책을 펴냈다. 2018년 가을, 동료 석학들과 ‘신자유주의와 대안 연구그룹GENA’을 결성해 연구에 힘쓰... 더보기
최근작 : <내전, 대중 혐오, 법치>,<새로운 세계합리성> … 총 3종 (모두보기)
크리스티앙 라발 (Christian Laval)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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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낭테르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이자 같은 대학 소피아폴 연구소 소속으로, 자유주의와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를 전공했다. 1990년대부터 신자유주의가 교육에 끼친 영향을 광범위하게 연구했고, 피에르 다르도와 ‘퀘스천 마르크스’를 설립해 『새로운 세계합리성』을 비롯해 신자유주의를 주제로 한 여러 저작을 공저했다. ‘신자유주의와 대안 연구그룹’을 함께 결성해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최근작 : <내전, 대중 혐오, 법치>,<새로운 세계합리성> … 총 3종 (모두보기)
피에르 소베트르 (Pierre Sauvere)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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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정치대학교(IEP)에서 정치학, 사회학,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셸 푸코로부터 영감을 받아 20~21세기 통치성을 분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파리 낭테르대학 소피아폴 연구소 일원이자 ‘신자유주의와 대안 연구그룹’ 설립 멤버로, 커먼즈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최근작 : <내전, 대중 혐오, 법치> … 총 2종 (모두보기)
오 게강 (Haud Gueuen)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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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립공예학교(CNAM)의 철학 교수로, 신자유주의적 주체화와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를 주제로 연구하고 있다. 파리 낭테르대학 소피아폴 연구소 일원으로 ‘신자유주의와 대안 연구그룹’을 함께 설립했다.
최근작 : <내전, 대중 혐오, 법치>
정기헌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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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8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번역한 책으로는《프란츠의 레퀴엠》,《남겨진 사람들》,《고독의 심리학》,《트레이더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양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퀴르 강의 푸가》,《철학자에게 사랑을 묻다》,《프랑스는 몰락하는가》,《해피스톤은 왜 토암바 섬에 갔을까?》,《괜찮아 마음먹기에 달렸어》,《리듬분석》, 《논 피니토: 미완의 철학》, 《낭비 사회를 넘어서》, 《마르크스의 유령》, 《엘불리의 철학자》 등이 있다.
장석준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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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연구공동체 산현재 기획위원. 전 정의정책연구소 소장. 저서『세계 진보정당운동사』, 『사회주의』, 『신자유주의의 탄생』등. 역서『길드 사회주의』, 『G. D. H. 콜의 산업민주주의』, 『좌파의 길』등.
최근작 : <문화과학 120호 - 2024.겨울>,<서울리뷰오브북스 13호>,<2023 초등 4학년 필독 세트 - 전5권> … 총 57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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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여자는 우주를 혼자 여행하지 않는다>,<공갈 젖꼭지>,<어떤 대통령이 좋은 대통령인가>등 총 110종
대표분야 : 사회학 일반 2위 (브랜드 지수 6,594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낡은 것은 갔는데, 왜 새것은 오지 않는가?
질문이 틀렸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아직 저물지 않았다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시대,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문구를 빌려 현대를 진단한 이 명제는 많은 지식인의 공감을 샀다. 주지하다시피 ‘낡은 것’은 신자유주의로, 1970년대부터 전 세계를 지배해 온 이 체제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에 여러 식자들은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대체 왜 새것은 오지 않는가?
기실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라는 말은 ‘신자유주의’라는 말만큼이나 상투적인 것이 되었다. 2008년 9월 19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서브프라임 모기지에서 비롯한 금융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전례 없는 조치’를 시행하겠다고 공언한다. 무한 공적자금 투입, 전방위 시장 개입을 통해 월스트리트의 붕괴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 조처를 두고 수많은 지식인은 ‘신자유주의 종주국’이라 할 법한 미국이 ‘작은 정부 큰 시장’을 포기했다며 신자유주의에 종언을 고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신자유주의는 또 한 번의 큰 위기를 맞는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글로벌 경제에 제동을 건 것이다. 셧다운과 국경 폐쇄가 이루어졌고, 거의 모든 나라의 정부가 위기를 모면하고자 천문학적인 공적 자금을 투입했다. 또다시 신자유주의 종말론이 고개를 들었고, 너도나도 ‘포스트 신자유주의’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과연 신자유주의는 끝났는가? 그렇다면 왜 새것은 오지 않는가? 새것이 오지 않는 이유가 낡은 것이 아직 저물지 않았기 때문이라면? 『내전, 대중 혐오, 법치』는 파리 낭테르대학에 거점을 둔 네 명의 석학이 함께 쓴 책으로, 저자들은 여전히 세계가 신자유주의의 지배 아래 있다고 주장하며 그 지배 방식에 주목한다. 푸코의 통치성 관점에서 이 체제가 취하는 전략적 특성에 초점을 맞출 것을 제안하는 저자들은 신자유주의를 단순한 경제·정치 사상으로 여기는 관점에서 벗어나 “모든 종류의 평등 요구를 무력화하려는 기획”으로 바라본다. 이 명제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아직 저물지 않았다.
내전, 대중 혐오, 법치, 세 키워드로 꿰뚫는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진화
저자 가운데 피에르 다르도와 크리스티앙 라발은 『새로운 세계합리성』(오르트망 옮김, 그린비)에서 신자유주의가 걸어온 궤적과 그 주창자들의 이론을 분석한 바 있다. 『내전, 대중 혐오, 법치』에서도 다른 두 명의 저자들과 함께 이 방법론을 채택해 신자유주의가 태동한 1938년 월터 리프먼 학술대회부터 오늘날까지, 사상사적 계보를 따라 이 체제에 내재한 특성을 밝혀낸다.
저자들이 제기하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전략이자 특성은 ‘내전’으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군사적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벌이는 내전을 “연합한 과두지배자들이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라고 정의한 저자들은 칠레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부터 시작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기수였던 대처와 레이건 집권기(다시 말해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강조한 사회민주주의 좌파가 실각하고 패퇴한 시기)를 거쳐 세계 곳곳에서 극우 세력이 부상한 지금 이 순간까지, 역사적 사건들을 면밀히 살피며 신자유주의가 벌이는 ‘내전’을 분석해 나간다. 내전에는 필연적으로 ‘내부의 적’이 상정되어야 하는데, 역사적으로 ‘공산주의’ 혹은 ‘집산주의’가 적으로 지목되었고, 오늘날에는 인종주의 또는 보수주의와 결합해 새로운 적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게 복지 정책, 노동조합 등 ‘평등’을 추구하는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의 적으로 상정되었으며 오직 시장 질서와 경쟁만이 옳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 체제의 고유한 주요 속성 하나가 드러난다. 내부의 적을 분쇄하기 위해 ‘법을 이용한 지배’, 즉 법치를 내세운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의 법에 대한 선호는 반대파를 향한 폭력으로도 드러난다. 오늘날 지배 세력은―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반대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경찰력과 사법 당국을 이용한다. 2018년 프랑스 정부의 ‘노란 조끼 운동’에 대한 탄압을 예로 들 수 있다. 오늘날 국가는 ‘안전’을 이유로 반대 세력을 억압할 법을 제정하고, 집행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들은 신자유주의의 대중 혐오, 즉 반민주주의적 면모에 주목한다. 미제스는 “대중은 사유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인류를 지도하는 일은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라고 이야기했고, 하이에크는 민주주의를 ‘사적 권리에 대한 침해’로 간주했다. 이들을 비롯한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은 정도나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인민주권’을 부정하며 인민의 권력을 제한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인민(대중)은 만족을 얻을수록 평등의 이름으로 더 많은 요구를 내세우기 때문에, 그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때로는 독재를 이용해서라도) 이를 막아야 한다는 게 신자유주의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결국, 신자유주의가 벌이는 내전은 ‘자유’를 앞세워 모든 ‘평등’ 요구에 대항해 벌이는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다시 신자유주의의 계보를 톺는 것에 관하여
어느 세력이든 자기편만 극단적으로 챙기는 모습, 반대 세력에 대한 철저한 무시 혹은 탄압,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로 미끄러져 버린 법치주의, 갈라치기, 갈등, 분열, 혐오…. 눈 밝은 독자라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이자, 저자들이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핵심으로 제시하는 세 키워드가 오늘날 우리 사회와 묘하게 포개어지는 지점을 포착해냈을 것이다.
다만 『내전, 대중 혐오, 법치』로 표면적인 정치 상황을 읽어내는 데 그친다면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들은 신자유주의의 계보와 역사적 사건을 샅샅이 분석하여 이 사상이 경제·정치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문화에까지 걸친 전 지구적 질서가 된 과정을 추적한다.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법과 노동을 재조직해 새로운 노동 규범을 강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해방 혹은 자기실현이라는 매력적인 말로 포장하여 수용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데까지 나아”가는지, “여성의 권리를 문제 삼고, 동성 결혼을 반대하도록 대중을 선동”하는 ‘도덕적 십자군’의 형태를 취하는지,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기업가 정신 즉 ‘자기 경영자’ 모델을 내면화하도록 하는지, “어떻게 대립의 경계를 이동시켜 인구의 일부가 권위주의를 지지하게 만드는지” 낱낱이 드러낸다.
이 분석을 따른다면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경향이나 소수자를 향한 소위 ‘역차별’ 논란, 약자 혐오, ‘갓생’으로 표상되는 과도한 자기계발 담론, 극명하게 양분되는 정치 등은 모두 신자유주의의 변형 혹은 발현이다.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가 한국 사회에 전면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사건은 IMF 외환위기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다시 그 계보를 근본에서부터 통찰한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체현한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는 귀중한 렌즈가 될 수 있다.
모든 대안을 봉쇄한 것으로 보이는 이 폭력적인 체제에 맞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전 지구적 질서가 될 수 있었을까? 우파는 물론 좌파 역시 신자유주의 통치 전략을 적극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좌파 버전으로 선택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문화적, 도덕적 대의를 추구하기 위해서 사회 평등을 쟁취하기 위한 역사적 투쟁을 외면해왔”으며, “신자유주의가 집권하고, 사회를 변형시키는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자리 잡는 데 성공한 것은 우파의 반동적 버전과 좌파의 현대주의적 버전으로 이중화된 덕분에 가능했다”라는 저자들의 지적은 뼈아프다. 이러한 두 분파의 가치 전쟁 속에서 대중은 분열하고, 모든 대안은 가로막힌다. 신자유주의의 내전 전략은 ‘분할하여 통치하라(Divide and Rule)’라는 격언을 충실히 수행하는 셈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이항 대립에 단호히 저항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의 내전 전략을 분쇄해야 한다. 저자들은 “오직 인민의 혁명만이, 시민들에 의해 전개되고 통제되는 혁명만이 신자유주의적 내전 전략에 대항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하며 신자유주의가 짓밟고자 하는 것, 즉 평등과 민주주의만이 그 지배에서 벗어날 해법임을 분명히 제시한다.
사회학자 장석준은 해제에서 “신자유주의 시대는 결코 저절로 저물지 않는다”라며, “그에 필적할 또 다른 문명적 기획이 구축되지 않는다면, ‘장기 신자유주의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논설한다. 신자유주의의 폭력적인 통치성을 기원에서부터 꿰뚫는 이 책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끝장내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훌륭한 지도가 되어 줄 것이다. 접기
민주 국가의 위기에 대하여
평점
분포

9.2
이 책은 푸코가 가지 않은 길을 재구성하였다. 엘리트의 대중혐오에서 대중의 자기혐오로 발전한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변모 과정을 잘 보여준다. Commons에 대한 저자들의 논의도 궁금하다.

에로이카 2024-08-06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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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대중 혐오, 법치

이 책의 공저자 중 한 명인 피에르 다르도는 크리스티앙 라발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공통된 주제를 연구하는 철학자이자 지식인입니다. 그는 1988년 파리 낭테르 대학에서 자크 비데의 지도 하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특히 다르도는 마르크스 연구에 대한 평생의 헌신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다음 크리스티앙 라발은 파리 낭테르 대학의 철학 및 사회학 연구자로 공리주의의 역사과 고전 사회학에서의 역사 및 교육 시스템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라발은 다르도와 함께,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전략과 그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지속하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피에르 소베트르는 파리 정치 대학에서 정치학, 사회학, 철학 박사를 취득하고 현재 파리 낭테르 대학의 소이파폴 연구소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 게강은 프랑스 국립 예술 공예원의 철학 교수이자, 신자유주의적 주체화 방식과 피에르 부르디외 및 정의 사회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학자로 그녀 역시, 현재 파리 낭테르 대학의 소피아폴 연구소의 일원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집필에 참여한 이 책은, 원제 "Le Choix De La Guerre Civile"로 지난 2021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는 이 논저를 "신자유주의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이자, 그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라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미 신자유주의화가 완료된 미국과 영국을 비롯, 유럽 일부 국가들과 더불어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비판은 물론 신자유주의 자체를 토론의 대상으로 입에 담는 것조차, 경우에 따라 상대로부터 상당히 자극적인 언설까지, 감내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를 8장 이후에 드러나는 '신자유주의적 교조화'에 단편적으로 연결시킬 필요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반동적 우파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시장 자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행 부분에서 여실히 결탁했던 점을 인지하고 받아들인다면 이런 교조화의 개연성이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47년의 몽펠르랭 소사이어티의 출범과 그 이전의 '이데올로기 투사인 하이에크'에 의해 비로소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이 글의 8장 이후의 논증과 개인적으로는 그동안의 독서를 통해 알게 되었던 핵심이기도 한, 과거 전통적 자유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자 가치임을 명백히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자유주의의 계승자이면서 권위주의와 사회주의에 맞서 싸웠고, 이를 좀 더 과장하여 소위 "문명의 수호자"로 스스로를 각색하기도 합니다. 8장에서 공저자들에 의해 분석되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자유란, "자연법, 인민주권, 인권, 의회정치, 인민의 자결권"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기 하이에크와 같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단순히 사회주의 영역의 확장에 맞서, 서구 문명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희생적 투사로서 사회를 개변시키기 위한 숭고한 목적이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대부분의 신자유주의자들은 '개인 선택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고 그것을 위한 헌법의 개조, 더 나아가 1970년대 칠레와 같은 국가에서는 민주주의 정부를 붕괴시키는 불법적인 군사 쿠데타까지 지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미제스와 하이에크 뿐만 아니라 기존의 엘리트 지배 세력 역시, 대중이 주역이 된 민주주의에 대해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많은 시민들은 신자유주의가 "그럴 리가 없다"고 항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이 글의 2장에서, 대중 민주주의에 대한 엘리트 세력의 공포, 그 이전의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귀스타브 르 봉의 가히 적대적인 논저들은 파시즘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자들에게도 큰 사상적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세금 경감과 사회적 비용 절감이라는 미명하에, 정부의 사회적 복지 철폐가 현재에 이르러서는 많은 시민들이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사회 부조가 붕괴된 시점에 '민간 보험'을 통해 스스로 자구책을 찾는 것을 '신자유주의의 유일한 성과'라고 비꼬는 저자들의 언급은 그만큼 민주주의의 축소로 읽힙니다. 하이에크는 이미 '사회적 정의'따위는 필요없다고 강조한 바가 있는데요. 일전에 낸시 프레이저에 의해 증명된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가 추동했던 비정상적인 능력주의도 마땅히 초래될 수밖에 없던 '경제적 불평등'을 개인적 차원에서 겸허히 받아들이고, 심지어 직업 선택의 이익으로 작용하는 유용한 사회적 정보들이 보다 돈이 많은 계층에게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목놓아 외쳤던 '유토피아'에 대한 언설이 얼마나 하등 쓸모가 없었는지 이 글의 여러 논증들에서도 분명히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미 대니 로드릭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따른 민주주의의 축소를 예견한 바가 있습니다. 로버트 커트너 역시 이에 동조하는 의견을 거듭 개진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예 노골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기만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 자유 지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가 시장을 통제하는 것에 아예 기를 쓰고 반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3장에서부터 이어지는 진술이기도 한, "신자유주의가 시장에 대한 민주주의의 통제를 격멸하기 위해, 심지어 권위주의적인 폭력"까지 서슴치 않았던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특히 칠레의 사례는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당시 CIA의 불법적인 작전은 물론 제임스 뷰캐넌으로 이어지는 엘리트 지식인들의 개입, 피노체트에 의한 신자유주의화의 완료 이후, 이에 대한 언급을 기피했던 하이에크의 일화는 대체로 이들 거의 모두가 반민주주의에 가깝다는 결론에 저는 이르렀는데요. 여기에 "교육 받은 노동자들의 출현"을 반기지 않았던 이들의 입장을 고려해 본다면, 결국 신자유주의자들이 바라는 정치 형태는 시민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소수 권력자들의 임명에 국한된 제한적인 민주주의이거나, 극단적으로 소수의 엘리트 지배 세력이 정치를 이끄는 철저하게 융합된 과두제를 추종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후반부에서 더 보충되기에 이릅니다.
여러분 모두 민주주의 정치에서 헌법의 기능과 그 의미가 얼마나 막중한지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는 헌법의 정당성을 통해, 각 사회에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은근히 바라는 바대로, 극단적인 권위주의 통치를 재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고 시장에 대한 민주주의의 통제는 견실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헌법을 통해 작용하는 만큼 헌법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고치는 것이 그들의 중대한 목표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크나큰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인물이 바로 카를 슈미트입니다. 마크 릴라에 의하면 슈미트는 죽을 때까지, 나치에 부역한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은 거의 반동적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바이마르 시대의 자유주의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있었고, 소위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권력과 같이, 헌법을 초월한 계엄이라는 비상식적인 '예외 상태'를 인정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자를 추종하고 자신의 사상적 단초를 거듭 발견했던 이가 바로 하이에크였습니다.
이처럼 헌법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이 추종하는 '경제적 헌법론'은 시장을 위해, 헌법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고 받아들인 것인데요. 하이에크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이 강력하게 추종한 개념이 바로 카를 슈미트의 '결단주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결단주의와 일반적인 헌법은 매우 상충되는 측면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자들은 외형적으로는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인정하지만 그들의 속내는 '명백히 개조된 민주주의'입니다. 시장이 알아서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다는 관념 체계를 여기에서 다시금 비판적으로 분석해 볼 수도 있지만 이러한 문제는 이미 과거 여러 사례를 통해 허구로 밝혀진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이는 여전히 확실하고 견고한 이들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8장 이후 드러나는 신자유주의의 비열하고 노골적인 사회적 작업들의 근간이 바로 이러한 주장들에 우선적으로 결부되어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하이에크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사법(私法)의 개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저자들은 이에 대한 분석으로 "사법(상법과 형법을 포함한)의 규칙들이 헌법의 위치로 격상되는 것"을 골자로 한 소위 '시장의 입헌주의'라는 용어로 보충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뒤이어 이어지는 하이에크식으로 해석해 본다면 여기에 민주주의를 대입해, "민주주의의 남용을 방지하는 헌법을 고안"하는 일종의 사법의 형성 혹은 확대를 추인하는 동시에 이 자체는 신자유주의에 있어 중요하고도 새로운 헌법적 맥락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전통적으로 도덕적 가치나 도덕주의에 회의를 갖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신보수주의자들과 손을 맞잡은 것은 단순히 원칙과 이에 대한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하더라도 기술적으로는 목적을 위해 무엇이든 이용하는 이들의 저열한 습성을 여실히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헌법이 무력화되었던 파시즘을 다수의 신자유주의자들이 경멸했으면서도 외부 정치에 대한 쿠데타는 물론, 권위주의적 방식의 폭력적 방법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들 신자유주의자들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여기의 공저자들은 파시즘과 신자유주의를 명백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정치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정당적 절차와 토론 없이 막후에서 시민의 동의는 배제하고 '예외 상태'로 해결할 수 있다는 그런 관념 자체가 얼마나 헌법을 포함한 민주주의 자체에 해악이 되는지에 대해 다시금 이 자리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더욱이 파시즘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인식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권위주의 방식의 국가 권력 동원을 용인하고, 심지어 하이에크는 과거 파시즘과 나치즘의 부상이 사회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바로 그 경향에서 비롯된 결과였다고 역설한 측면은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넘어 국가 권력을 대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이중성을 드러낸다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다시금 강조하지만 민주주의가 시민 다수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정치 체제인 만큼, 반대로 신자유주의가 '공익'과 '공리주의' 내지는 '시민의 권리'에 웃는 외양을 한 채, 속으로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시민들 모두는 이를 유념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본격적으로 논증이 이뤄지는 글 중간에, "신자유주의가 진행되었거나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복지를 공격하면서도 이 사회적 부조를 완벽하게 제거할 수는 없다"는 논평 내지는 분석은 실로 저에게 처참한 감상을 느끼게 했는데요. 이는 그야말로 현재의 민주주의가 제한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동시에, 신자유주의 자체를 효과적으로 제어하는 것만이 정치의 건전성을 답보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제가 최근에 일독한 앤드루 갬블의 여러 제안들과 일맥상통한 부분이기도 했는데요. 더욱이 역사학자인 딘 베이커가 과거 신자유주의적 흐름 속에, 미국의 리버럴 정치인들이 신자유주의에 투신한 사례를 강도 높게 비판했듯이, 진보 좌파의 기형적인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전반적인 이들의 궤멸은 신자유주의의 오판을 최종적으로 막아내지 못한 근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비판은 이 책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는데요. 진보주의 세력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선명성을 유지하고 이를 통해 권력 바깥의 시민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야 했지만 현실은 68혁명 이후, 급격하게 붕괴되어 왔습니다. 과거 68혁명 자체에 지독한 거부감을 갖고 있던 극단적 보수 세력과 신자유주의의 결탁은 심하게 말하면 진보 세력의 목숨 줄을 끊어 놓은 결과로 이어졌고, 심지어 독일을 비롯한 사회 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불신과 만연된 억측의 상황을 초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일관된 사실과 증거가 명백함에도 소수의 부유층과 엘리트 지배 세력에 봉사한 신자유주의를 여전히 현대적 금융 자본주의를 선도한 무슨 경제적 사조 쯤으로 이해하고 있는 시민들이 적지 않은 상황은 흡사 아이러니하다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서 분명한 것은 현재의 신자유주의자들이 허버트 스펜서를 비롯한 사회진화론과 은연중 인종주의를 신봉하고, 서구 유럽에 의한 전세계 문명의 선도와 과거 귀스타브 르 봉의 유산이기도 했던 대중 민주주의의 혐오에 기반한, 거의 체제 반동적인 성격의 세력이라 여겨집니다. 더욱이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을 통해, 민주주의의 운명이 해가 갈수록 불확실하다는 부분, 그리고 2008년 이후 신자유주의가 전혀 수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 시민이 포함된 일반적인 미래는 다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앞으로 몇 세대 동안은 진정 암울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새로운 자유주의가 구축한 세계가 얼마나 바람직하지 않은지 이제부터라도 시민 모두가 고찰해 봐야 되지 않을까, 글 말미에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책에서 언급된 몽펠르랭 소사이어티의 멤버들이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대해 보인 호의와 관심은 이들이 기반이 된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민주주의를 증오하는지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저 개인적으로는 이 논저를 통해, 카를 슈미트의 '정치적 낭만주의'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결국 슈미트는 전통적 자유주의를 혐오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겉으로 드러내지 않게 경멸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은 민주주의가 자유 시장에 가하는 ‘경제의 정치화‘ 위협이다.
헌편, 신자유주의적 폭력은 국가의 외부자로 지목된 공동체에 대항해 정동을 동원할지언정 그들에게 파시스트적 폭력을 가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중 모든 신자유주의자가 첫째로 꼽는 것은 개인-소비자의 주권 보장을 전제로 한 경쟁이다.
군사 정권의 권력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스만은 카를 슈미트가 고안한 ‘제헌 권력(pouvoir constituant)‘ 개념을 동원했다.
몽펠르랭 협회 회원들이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보인 호의는, 평등과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너무도 잘 드러내는 예시다.
그런데 이를 ‘법 앞의 평등‘으로 재해석하는 걸 자발적으로 소득과 재산의 분배를 바로잡으려는 모든 시도를 저지하는 데 목적이 있다.
신자유주의를 이해하려면, 산업혁명이 낳은 엄청난 불평등과 그로 인한 여러 형태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보험을 비롯한 재분배 메커니즘이 도입되던 시기를 살펴야 한다.
이들의 도덕적 이상에 따르면, 존경을 받아야 할 이들은 자본을 축적함으로써 가족과 사업의 미래를 살피는 신중한 사람, 좋은 가장과 공급자이다.
대처는 일찍이 가부장적 가족에서부터 국가에 이르는, 전통과 관련된 모든 보수주의적 주제들을 시장의 회귀와 정치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역사적으로 독특한 위치를 점했다.
서구의 우월함에 대한 믿음과 위협에 처한 정체성에 대한 편집증적 방어를 결합한 이 새로운 ‘자유‘정신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우파와 반동적 우파가 공공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 행위를 정당화하는 자양분이 되어주고 있다.
좌파의 변신은 신자유주의의 지배를 제한하거나 분쇄할 수 있는 모든 정치적 대안을 향한 길을 장기적으로 봉쇄해버렸다.
신자유주의 국가는 사회복지를 축소함으로써, 국민을 불안정한 상태로 몰아넣는 동시에 국민을 계속해서 보호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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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24-03-12 공감(1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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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는 내전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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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그러니까 재작년 봄쯤 다르도와 라발의 『새로운 세계합리성』을 읽고, 신자유주의 분석에서 푸코의 쓰임은 어떤 것일까에 대해 여러 생각을 했더랬다. 그때 리뷰를 제대로 안 써놓아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1)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 대한 훌륭한 주석서다. 다르도와 라발은 푸코가 “통치”라는 관점에서 살펴봤던 질서자유주의, 하이에크, 베커 등의 선구적 신자유주의 이론들을 잘 소개한다. 그러나 거기에서 좀더 나간다. 푸코가 참조한 이론뿐만 아니라, 그 이론이 실현된 역사적 사례들 – 피노체트의 칠레부터 유럽연합의 탄생까지 -과의 연관성을 부각시킨다. 만약 푸코가 말년에 자기통치의 문제에 천착하지 않고 신자유주의 연구를 계속했다면 그 출발점이 어땠을 지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푸코의 신자유주의 연구를 동시대적으로 갱신한다면,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의 대두로 손상된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거나, 그래봤자 그것은 형식적 민주주의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대신, 좌파는 신자유주의 합리성/통치성에 대한 대안적 합리성/통치성과 그것을 인도하며 그것에 의해 인도되는 주체의 대항품행 개발이 절실하다는 이 책의 결론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2) 이 결론에도 불구하고, 정작 다르도와 라발만의 독창성이라는 점에서는 아쉬운 감이 있었다.
3) 저자들은 『새로운 세계합리성』의 한국어판 서문(2022)에서 출판 당시(프랑스에서 2009년 출판)에는 자신들이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다루지 못했음을 고백하면서, 푸코의 1972~73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처벌사회』의 ‘내전’ 개념이 이 관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2016년 자신들이 펴낸 『끝나지 않는 악몽: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의 핵심주장을 매우 간략히 소개한 바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끝나지 않는 악몽』의 내용을 무척 궁금해 하면서, 이를 비롯한 이들의 후속 저작들이 한국어로 번역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존재 자체도 아예 몰랐던 이 책 『내전, 대중혐오, 법치: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를 만나게 되었다. 2021년에 프랑스어로 출판되었고, 아직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은 책이다. (그런데 『새로운 세계합리성』의 “한국어판 서문”을 다시 보니, 각주에 이미 이 책이 언급되어 있다.)

장마와 폭염 속에서 책을 다 읽었다. 읽은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진빠지는 일들로 책상에 앉을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잠깐 짬이 나 몇 자 적는다.
1. 전략으로서의 신자유주의 이론: 내전과 대중혐오
다르도, 게강, 라발, 소베르트, 이 네 명의 저자는 신자유주의 이론을 순수 이론이 아니라, 어떤 전략을 내포한 이론으로 본다. 푸코의 “주체와 권력”에 따르면, ‘전략’이란 “적에게서 전투의 수단을 박탈함으로써 싸움을 포기하게끔 만드는 모든 방법”이다(27, 354). 곧 미제스 이후의 신자유주의 이론들은 “사회의 적”을 격퇴하기 위한 전략적 담론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사회 안에서 적과 대면하는 “내전”이라는 맥락에서 구사되는데, 이 “내전”은 푸코의 1972~73년 강의록 『처벌사회』의 주요 테마였다. 그러나 ‘내전’ 개념은 군주권력에서 규율권력으로의 이행에 초점을 맞춘 『감시와 처벌』(1975)에서는 주변화되었고, 내가 알기로 푸코는 이를 주요 개념으로 사용한 저작을 남기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좀더 적고, 다시 이 책 이야기로 돌아오자.
저자들이 말하는 ‘신자유주의 내전’은 과두지배 연합이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다(17-18). 그러나 이는 ‘1% 대 99%’의 싸움 같은 계급투쟁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과두지배 집단, 소위 ‘진보적 신자유주의’ 집단, 권위주의적 국민주의에 포획된 인민들, 그리고 평등과 민주주의를 고수하는 집단 등이 복잡한 긴장을 구성하며 내전에 참여한다.
누가 신자유주의의 적인가? 신자유주의자들은 ‘총체적 국가’를 공포의 대상으로 느낀다. 이 총체적 국가란 민주주의가 경제를 침범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다(22-23). 이 민주주의와 사회라는 적에 맞서, 신자유주의는 시장질서를 보호하기 위해 행사하는 폭력을 정당화한다. 신자유주의는 내부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 고전파 정치경제학을 각색한 맨체스터학파의 자유방임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두 개의 전선에서 싸움을 수행한다(134). 그리고 이 담론은 현실적으로 공산주의, 나치즘, 집산주의, 사회국가, 복지국가, 사회주의, 노동조합 등을, 곧 “계획경제와 집산주의를 닮은 모든 것”을 “사회의 적”으로 규정한다(126).
이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강한 국가와 자연적 구조(뢰프케, 161), 또는 자의적 강제와 자발적 진화(하이에크, 168)가 동시에 필요하다고 본다. 보이는 주먹과 보이지 않는 손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소리다. 적과 싸우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강한 힘이 필요하겠지만, 자연적 구조나 자발적 진화는 왜 강조되는가? 그것은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보는 사회주의자들의 구성주의적 오만에 대항하기 위해서다. 시장의 규칙은 자연적인 것이고, 이에 순응하지 않고 개입해서 교정하려는 시도는 무지 또는 악의 소산으로 규정된다. “시장은 옳다. 토 달지 말고, 개기지 마라. 주글래?” 이런 소리다. “대중은 만족을 얻을수록 평등의 이름으로 더 많은 요구를 내세우게 되고 국가는 약해진다”(발터 오이켄, 69). 평등의 요구는 시대의 ‘병리적 증상’일뿐이다(알렉산더 뤼스토프, 27~28). 민주주의 이론과 제도들은 대중의 짐재력을 긍정하지만, 신자유주의자에게 대중이란 혐오와 순치의 대상일 뿐이다. 신자유주의 전략에는 바로 민중을 개돼지로 보는 마음가짐이 깔려 있는 것이다. 시장에 대한 순종 여부로 순치/동원과 혐오/격멸의 대상을 구별하고, 양자간의 내전을 조직함으로써 민중의 단결이라는 위험을 예방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내전 전략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벌이는 전쟁은 경쟁을 위한 전쟁인 동시에 평등에 대항한 전쟁”이다(28).
2. 신자유주의 이론들과 슈미트의 묘한 관계: 법치
사실 난 칼 슈미트를 잘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점 하나가 신자유주의 선구자들이 슈미트를 참조했다는 사실이다. 슈미트는 다당제에 비판적였다. 왜냐하면 이 “특수이익들의 다원주의”는 ‘총체적 국가’를 향해 갈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69). 1932년 7월,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인간 삶 모든 영역에 침투하는” ‘총체적 국가’로서 ‘약한 국가’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같은 해 11월, 그는 이 약한 국가를 ‘양적 총체적 국가’로 재규정하면서, 이 현실의 국가와 대비되는 앞으로 도래할 이상적 국가로서 “질적 총체적 국가”를 제시한다. 이는 양적 총체적 국가로 나아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권위주의 국가이다. 그리고 이 ‘매우 강한 국가’만이 ‘당파 국가’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고, 나치즘과 공산주의라는 이중의 위험에서 독일을 구할 것이라고 구상한다. “슈미트는 전능한 민주주의 국가의 약점을 명확하게 파악했다”(하이에크, 83). 슈미트의 민주주의 혐오는 오이켄, 하이에크, 뢰프케 같은 신자유주의 선구자들(83, 90, 114)뿐만 아니라, 칠레 군사독재의 후예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다(42). 또 이 강한 국가는 “경제 밖으로의 자진 철수를 개시할 수 있다”(295). ‘경제와 깨끗하게 절연한’ 강한 총체적 국가, 이것이 신자유주의 이론이 슈미트에게 빚진 요소이고,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자유주의와 극명하게 갈라지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의 선구적 이론가 명단에 슈미트를 추가할 수 있을까? 저자들은 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이는 무엇보다 슈미트에 대한 하이에크의 이중적 판단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총체적 국가로의 변환을 비판한 슈미트는 긍정하지만, “모든 규칙과 규범은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으며 그에 걸맞은 유기적 공동체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주장이 “인민 공동체가 유일한 법적 주체를 구성한다는 나치의 교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비판한다(302).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인민공동체가 아니라, “인민이 자유로운 개인주의적 시민사회”이고, 진화의 결과인 규칙과 규범, 곧 시장질서는 그 자체로 자연적이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들의 관점에 따르면, 슈미트는 “’엄밀한 의미의 신자유주의’에 대해 근본적으로 외부자”다(304).
시장질서를 보호하는 법이 私法이다. 하이에크는 “私法의 일반 규범 대 公法의 특수 규칙”의 대립(303)을 상정하면서, 후자를 전자에 종속된 것으로 이해한다. 곧 “민주주의 정부의 행위와 국가의 公法을 헌법에 의해 보장되는 私法이라는 일반 규칙에 종속시키기를 꿈꾼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이에크가 말하는 “법치”이다. 그리고 이 법치주의는 유럽의 여러 조약들을 통해 실현된다(191). 따라서 “법치는 좋은 거 아냐? 법을 남용한다고 법을 부정할 순 없어!”라는 순진한 말은 법이 정치를 대체한 오늘날 미국, 브라질, 한국의 현실뿐만 아니라, 하이에크의 법치 개념 앞에서 설 자리를 잃고 만다. 법의 전략적 사용, 곧 ‘법률전(lawfare)’은 신자유주의 정치에서 일반적이다(270~273). 강한 국가는 법치와 결합함으로써, 인민주권의 실현을 봉쇄하면서도 자신에게 자연의 법칙의 수호자라는 그럴 듯한 사명을 부여한다.
3. 오늘날 극우파의 성격
2008~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0년대 초까지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예고하는 분석들이 한참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당시 출판되었던 『새로운 세계합리성』(pp. 682~683)에서 다르도와 라발은 통치성의 위기를 맞은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는 1938년 월터 리프먼 학술대회에서 우파 학자들의 집합적 아이디어로 등장하기 시작해서, 1973년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 1980년대초 대처와 레이건, 1990년대 제3의 길, 그리고 클린턴 정부가 주도한 세계무역기구 설립 등을 거치면서 현실화되어, 새로운 합리성으로 세계경제질서, 국가정책, 개인 품행 모두를 인도하는 원리로 자리잡게 된다. 그렇다면 2024년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새로움은 무엇인가?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이후 더욱 주목받게 된 신자유주의의 권위주의화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당시 각국 정상들은 스트롱맨들로 채워졌다. 그 전부터 권좌에 있던 푸틴은 차치하고, 에르도르안, 두테르테, 보우소나루, 오르반 등이 집권하면서 노골적 반이민 정서,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을 친시장주의와 결합시키며, 세계화 흐름은 되돌리려 하면서도 복지국가 해체는 지속하려는 정책들을 펼쳤다. 그리고 이에 대한 자국민 일부의 지지도 열성적이었다. 처음 트럼프를 보면서는 “공인이 어떻게 자신의 욕망을 저렇게도 투명하게 다 드러내나” 싶었다. 그러나 그를 대통령으로 뽑고 그에 대한 지지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 기반으로 삼는 이들도 많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저학력 하층계급이다. 하층계급이 어떻게 극우파를 지지하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 저자들은 토마 피케티나 디디에 에리봉의 관점과 합류하는 분석을 제시한다.
좌파는 글로벌리즘에 동조하고, 세계화한 ‘엘리트’로 편입하며 인민 계급의 분노를 키웠다”(195).
미국에서 세계화를 정책으로 추진한 것은 공화당이 아니라, 클린턴의 민주당였고, 여기에 토니 블레어,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이 장단을 맞추었다. 세계화는 도시 엘리트의 삶을 풍족하게 해주었을지는 몰라도 노동계급과 농민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 그런데 이들의 박탈감을 집권 좌파들은 외면했다. 그 당시 미국 민주당이나 영국 노동당을 과연 좌파라고 볼 수 있는가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하고 서유럽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이 해체되었음을 생각해보면 유럽에서 이들의 우경화는 당연한 수순였다. 유력한 사회주의 진보정당이 없던 미국에서는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그냥 넘어가겠다.
하층계급의 상대적 박탈감을 달래줬던 것은 좌파가 아니라 “국민주의적 신우파”였다(198). 자유지상주의자 머레이 로스바드의 반세계화 주장은 트럼프의 고립주의 정책의 전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주권이 상실될 것이라면서, 미국인들의 손에서 결정권을 빼앗아가는 ‘국제주의적 초국가 기관’이 설립될 것이라며, NAFTA 철폐, 모든 종류의 초국적 기구(UN, ILO, UNESCO 등) 탈퇴, 개발원조 중단, 이민 제한이 필요하며, 이 모든 것이 진정한 자유시장 구현에 필요하다고 주장한다(199). 그는 자유를 사회적 상호의존관계 및 개인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감내하지 않아도 될 권리로 보면서 ‘탈사회주의화’를 슬로건으로 채택한다.
로스바드의 이 반세계화 국민주의 수사는 오늘날 정확히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새롭게 민주당 후보로 지명된 카멀라 해리스는 과격한 급진파이고, 그녀가 당선되자마자 미국 경제는 망하고, 제3차 세계대전이 발생할 것이라는 호들갑이 정말이라고 믿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가난하고 무식하고 촌스럽다고 무시할 수는 없다. 이들이 무식한 게 문제가 아니라, 하층계급의 마음을 못 사는 진보적 좌파가 무능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저자들은 우파의 이 성공을 “신자유주의가 독(유대관계 해체, 사회적 불평등, 경제적 불안정)과 해독제를 동시에 만들어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해독제란 “규범을 준수하고 국가의 권위를 존중하는 착한 시민인 ‘우리’”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어내고, 주권 국가를 다시 이상화하며, 개인적 자유를 급진적으로 추구하게 하는 것이다(221~222). 값싼 제품을 수출함으로써 ‘우리’ 기업과 ‘우리’ 일자리를 없애는 중국이건, ‘우리’나라 국경을 불법월경하는 멕시코이건,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이 적들과 싸워야 한다.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도 문제다. 그들은 외부의 적였다가 내부의 적이 된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일 수도, 서구 기독교 문명을 위협하는 낙태, 동성결혼 찬성론자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후퇴를 걱정하는 시민들 모두에게 사회주의 급진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으며 철지난 매커시즘의 수사가 다시 동원되기도 한다.
이 극우정치의 대두를 뭐라고 규정해야 할까? 그 전에 그것은 무엇이 아닌 지부터 먼저 보자. 첫째, 이를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이라고 볼 수는 없다. 파시즘과 신자유주의는 일종의 ‘사회진화론’을 공유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사회 진화론은 파시즘처럼 “군사 전쟁이나 영토 복속을 추구하지도 않고 열등한 종의 제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291). 또 “모든 개인을 하나로 녹여내어 ‘인민공동체’로 집결시킬 필요”도 없다. 그리고 트럼프의 예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파시즘이 조직의 근간로 삼고자 했던 “체계화된 대중 조직”은 오히려 혐오의 대상이다.
트럼프는 개인을 찬양하고 공동체와 이성, 전체의 이익보다 개인을 우위에 두며, 개인의 자유, 자발성, 선택, ‘잠재력’을 발휘하여 최고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는 모든 것을, … ‘탈규제화된’ 사적 자유를 거의 자유지상주의에 가까운 방식으로 옹호한다”(292).
둘째, 같은 논리로 ‘우파 포퓰리즘’이라는 말도 적절치 않다. ‘포퓰리즘’은 ‘하나의 인민을 구축하는 것’인 반면, 오늘날 극우정치는 이들을 분할한다. 곧 “인민계급 일부가 노동자 운동의 모든 성과와 복지국가, 노동법, 노동조합에 등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저자들은 1930년대 이래 강한 국가 정당화 논리의 등장부터 최근까지 신자유주의 전략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이 전략의 두 특징을 지적한다(318~319). 첫째, 현재의 신자유주의는 다소 진보적인 ‘글로벌리즘 신자유주의’와 반동적인 ‘내셔널리즘 신자유주의’로 양분된다. 둘째, “이러한 두 신자유주의 분파의 가치 전쟁 속에서 인민은 자기 자신에 대항하게 된다”(319).
두 번째 지적이 더 흥미로운데, 이 부분에서 저자들은 푸코의 “자기경영하는 주체” 개념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자기 자신을 가치화하는 경제”에서는 “개인이 무엇을 했는지보다 그가 약속할 수 있는 미래의 능력치가 더 중요하다”(237). 실패는 개인의 책임이고, 사회에는 책임이 없다. 성공을 위해서 믿을 것은 자신밖에 없다. 이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개인이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과 불가분한 것으로 드러난다.”(239) 한 사회 내의 내전이 개인 안의 내전으로 더 깊게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개인은 그 전쟁에서 전사의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자신의 적 노릇까지 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 경영자는 자신을 적으로 삼도록 강제된다”(239).
사태가 여기에 이르면, 이제 저자들이 그리는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변모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것이 태동하던 1930년대에 신자유주의는 민중을 개돼지로 보는 대중혐오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2020년대 오늘날 이 신자유주의 합리성은 공정한 경쟁과 능력주의를 미덕으로 삼으며 빈곤청년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간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부모의 가난과 자신의 능력부족을 탓하며, 자신과 가족을 혐오하게 만든다. 사회는 내전 중이고, 이 전쟁은 가족 안에서도, 개인의 마음 속에서도 진행된다. 결국 신자유주의의 역사란 엘리트의 대중혐오에서 대중의 자기혐오에 이르는 승리의 역사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너무 악의적인 일반화일까?
4.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신자유주의 내전에 맞서, 민주주의와 사회적 평등을 옹호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먼저, 신자유주의 통치성이 내면화시키는 경제와 정치는 바꿀 수 없는 운명의 영역에 놓여 있는 것이라는 주술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를 슈미트의 말을 빌려 ‘기초 결정’ 혹은 ‘제헌적 결정’이라고 부른다. 이 말을 대처는 아주 쉽게 “대안은 없다”라는 말로 바꿨다. 대안이 없다면 정치도 없다. 그러나 정치는 있고, 정치가 있다는 것은 가능성의 영역이 있다는 말이다. 정치적 협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공통의 사안’이며, 저자들은 이를 ‘커먼스(commons)의 영역’이라고 부른다.
저자들은 레닌 이후의 2단계 전략, 곧 혁명을 통해 먼저 국가를 바꾸고, 그 다음에 세계를 바꾼다는 고전적 전략을 폐기한다.
국가는 결코 피지배자의 ‘무기’가 될 수 없다. 급진적으로 비국가적인 정치, 즉 커먼스의 정치만이 시장의 영향력과 국가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오직 인민의 혁명만이, 시민들에 의해 전개되고 통제되는 혁명만이 신자유주의적 내전 전략에 대항할 수 있다”(326).
저자들은 파리 코뮌이 내전에 대항한 혁명였음을 주지시키면서, 제도화된 실천이 아닌 ‘탈제도화된 힘’의 구성을 주장한다. 이들은 과거 좌파의 노동자 중심성, 보편정당, 해방 주체의 형성 등이 이제는 낡은 것이 되었다고 진단하면서도, 우파 포퓰리즘을 미러링하는 것에 불과한 좌파 포퓰리즘(무페)이나 페미니즘이나 인종정의 운동 일부에서 보이는 “정체성 물신주의”도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주장은 단순하다.
오직 하나의 전략이 있을 뿐이다. 모든 분야에서 평등을 우선으로 하는 모든 요구를 결집하는 것이다”(333).
아… 그런데 여기서 좀 맥이 빠진다. 기대가 너무 컸을까? 방향은 대략 공감할 수 있지만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작은 모델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신자유주의 내전에 대한 혁명 전략으로서 커먼스의 실천적 사례들에 대한 저자들의 생각이 좀더 익어가기를 응원해본다.
5. 푸코가 가지 않은 길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다. 사실 제일 쓰고 싶은 말은 이거다. 나는 저자들이 푸코가 가지 않은 길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 통치성 개념에 기반한 최근의 연구들은 주로 『생명관리정치의 탄생』(1978~79) 9~12강의 주제인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의 호모 에코노미쿠스 논의를 『감시와 처벌』(1975)의 규율권력이나 “옴네스 에트 싱굴라팀”(1979)의 사목권력 논의에서 다룬 행위의 인도(conduct of conduct)로서의 품행에 대한 규율과 연결시켜 다뤄왔다. 그런데 이들 논의에서 국가와 사회의 형상은 주변화되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이 통상적 흐름과 달리, 저자들은 별 주목을 받지 못했던 『처벌사회』(1973)의 “내전” 개념과 “니체, 계보학, 역사”(1971)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1978~79) 7강에 등장하는 “법치” 또는 “법의 지배” 개념을 통해 국가와 사회의 형상을 재조명했다.
푸코는 1979년 이후 자기와 타자에 대한 통치의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반면, 저자들은 바로 그 문제를 푸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오늘날의 시점으로 끌고 온다. 이제까지의 푸코 연구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점이 이 저작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오랜만에 읽은 푸코 관련 저작인데, 만족스러웠다. 이 저자들의 다른 저작들도 한국어로 속히 번역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덧.
2008~9년 글로벌 위기에도 신자유주의가 죽지 않았듯, 2021년 미 국회의사당 점거 진압에도 MAGA 정치를 앞세운 트럼프 열풍은 계속되고 있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극우 세력들이 약진하고 있으며, 보수당의 우경화가 가속화된다. 그 와중에 2024년 올해 영국에서는 오랜만에 노동당이, 프랑스에서는 신인민전선(NFP)이 우익의 집권을 막았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영국에서는 무슬림 축출을 주장하는 극우파의 과격폭력 시위가 진행 중이고, 올림픽을 핑계로 마크롱이 총리 지명을 미룬 프랑스도 향후 어떤 양상이 전개될 지 미지수다. 올 11월 미국 대선도 그렇다. 한국은? 현 정권이 자유민주주의의 적으로 공산전체주의 운운할 때보다 총선 이후 수그러든 것도 같지만, 대통령 거부권은 계속 행사되고, 극우인사들이 계속 기용되는 것을 보면 걱정이 앞선다. 그리고 국회에서 사라진 정의당의 빈 자리가 크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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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24-08-06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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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눈물로 쓴 신 자유주의의 회고回顧 > feat. 2024 두 번째 별만점 신간
FATMAN의 공식 북 리뷰 시리즈 101-24-18 내전, 대중혐오, 법치, 피에르 다르도 Pierre Dardot 외 저, 2024 ★★★★★
아..학문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완전히 파헤친 역작! 올해 읽은 책 중에 두번째로 완벽하네요! 강력 추천합니다.
(자세한 리뷰는 프로필 링크나 아래의 링크 참조 바람.
https://m.blog.naver.com/fatman78/223388438278)
2. 저자의 의도
이번 신간, “내전, 대중 혐오, 법치.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는 프랑스 신 좌파의 산실, 파리 낭테르대학 소속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 연구 그룹(GENA)” 멤버들이 펴낸 일종의 연구 총서격인 저서이다. 대표 저자인 피에르 다르도 Pierre Dardot 와 크리스티앙 라발 Christian Laval 은 이미 지난 2009년도에 “새로운 세계합리성”이라는 저서로 신 좌파 진영의 지지를 이끌어 낸 바 있는 최전선의 학자들이다. (우리 나라에는 2022년에 소개된 바 있다.)
신 자유주의가 우리를 향해 자신들의 사상을 정립하고, 우리의 삶을 재정의하려 그들만의 학회를 열었듯이, 이 대륙 출신들의 신 좌파들도 대열을 정비하고 비로소 “적”을 규정하는 작업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양극화”의 주범으로 신자유주의를 공고히 지목하고, 현재 우리의 일상이 무너진 근본에는 그것이 어떻게 작동했는가를 낱낱이 파악하여 기록한 그 책으로 진보 진영의 담론에서 일시에 주목을 이끌어낸다. - 역시 싸움에는 피아식별이 중요한 법! -
이번 신간에서 다르도는 지난 명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현재의 상태를 “내전”으로 규정하며 이미 철이 지난 신자유주의의 망령이 왜 아직도 우리 삶에서 떠나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어진 담론으로 연결하고 있다. 또한 세계 각국에서 나타나는 정치 혐오증 내지는 편협한 포퓰리즘 - 극우의 성향을 띈 - 의 만연에 수구 기득권 세력들의 이른바 신자유주의로 포장한 맹공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그들의 민낯을 우리에게 고발한다. - 그들(기득권)은 사실 신자유주의의 주장에는 관심도 없다. 그저 대중들을 기만하기 위한 도구일 뿐. -
게다가 입법부(의회) 장악으로 그들의 목적을 위해, 민주주의의 가장 근간인 “법치”를 역으로 활용하여 어떻게 우리의 삶을 그들의 의도대로 바꾸는지를 그동안의 많은 정치적 사건들과 경제적 사안들로써 독자들에게 고하고 있다. 거기다 전 세계적으로 관찰되는 권위주의 정권의 경우도 포괄하여 이들 모두 대중들의 믿음에 반해 권력을 획득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세력들 - 주로 경제적 이득을 바라는 자들 - 과 결탁하여 지금의 정치적 대혼란을 불러오는지 마져도 큰 흐름에서 다루고 있다.
* 세 줄 요약평.
1. 신자유주의는 시작부터 “부도덕”했고, 법마저 유린했다.
2. 그들의 만행은 우리를 무제한적인 경쟁으로 몰아넣은 것뿐 아니라, 그들의 목적을 위해 정치적으로 우릴 타락시켰다.
3. 따라서 지금은 신자유주의와의 “내전”상태이며 우리는 이에 적과 맞서 근본적으로 싸울 준비가 되야한다.
#신자유주의 #원더박스 #장석준의적록서재 #내전대중혐오법치
#정치 #사회비판
#책리뷰 #책추천 #도서리뷰 #도서추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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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 2024-03-19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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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 대한 주권자들의 행동 지침서
지난 10여 년간 영화판을 좌우했던 마블 시리즈 중 <시빌 워>의 한 장면은 너무나도 인상적으로 남아있습니다. 공항 활주로를 횡단하며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 맨을 필두로하는 두 개의 편으로 갈린 히어로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서로의 동료였던 상대편에게 효과적(!)으로 사용하며 그야말로 전쟁을 벌이는 장면입니다. 이들의 내전 (Civil War)의 이유는 ‘초인 등록법’, 다시 말해 히어로들의 개별 행동과 통제되지 않은 활동으로 크고 작은 피해가 시민 사회에 초래되니 이제라도 정부 공권력의 통제권 아래 이 히어로들을 두겠다는 것인데, 캡틴 아메리카는 반대했고 아이언 맨은 찬성의 입장이었습니다.
“법의 우위를 인정함으로써 폭력을 중단하는 것이 정치라면, 내전은 투키디데스가 말한 대로 ‘열광과 복수를 하나로 뒤섞는 분노와 폭력의 무원칙한 분출이다. 상기와 같은 반명제들은 그것의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신자유주의에 접근하는 길을 막는다.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정치가 극악한 폭력의 사용을 완벽하게 수용할 수 있으며, 내전이 법을 수단으로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p.10-11. 서문 중>
<시빌 워>의 히어로들이 편먹고 싸웠듯, 우리의 역사에서도 복잡다단한 근대사회를 지나며, 우리의 국가 사회 내에는 저마다의 가치와 이익으로 찬반이 갈리거나, 특정 무리들의 가치에 반하는 정부의 정책 등에 반대하는 불복종 행위가 촉발, 확대되면서 국가 외부의 적과 충돌인 전쟁의 상대 개념인 내전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이것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국가의 정치기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지배 유지를 위해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벌이는 현장으로 변모하게 유도하는 경우도 있다고 책은 말합니다.
번역판의 제목 <내전, 대중 혐오, 법치>와 달리 책의 원제 <LE CHOIX DE LA GUERRE CIVILE - Une acutre histoire du neoliberalisme>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THE CHOICE OF CIVIL WAR - Another History of Neoliberalism> 즉, <내전의 선택 - 신자유주의의 다른 역사>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내전이라는 전략을 선택하여 역사적으로 어떻게 나아왔는가를 보여주는 책의 이야기 줄기를 이해하는데 나름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듯 합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신자유주의자에게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대중으로 이해되는 인민의 권력을 제한할 것인가? 루지에의 답은 명확하다. 새로운 ’귀족‘에게 권력을 양도해야 하며, 대중으로부터 분리된 정치적 권력기관을 세울 수 있는 ’통치의 기술‘을 정립해야 한다.”
<p. 73-74. 2장_신자유주의 대중 혐오. 중>
그렇게 자라난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그 세력을 공고히 해나갈지에 대한 고민의 역사와 전략들을 차근차근 역사와 정치철학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 빌드 업해서 보여줍니다. 그중 큰 변곡점이 되는 ‘대중 혐오’에서 그들의 두려움과 이에 대한 극복의 방법들의 실례들을 들어 제시해줍니다. 능력주의, 극우파의 출현과 보수주의의 부상, 법치, 인종주의 등의 반평등 기조, 대중의 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의 치밀하고 강한 내전 전략들에 어떻게 세상이 좌지우지 되어왔는지를 돌아보며 그 낙관적이지만은 않은 미래를 전망합니다. 그리고 대항해서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할 액션플랜을 제시하며 책은 마무리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민주주의적 정치 활동을 막는 모든 장애물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 장애물은 많다.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문화적 불평등, 과두제에 지배받는 정당 간의 파괴적인 경쟁, 정치 활동의 활력을 빼앗으면서 민주주의의 의미를 탐색한다고 주장하는 의회주의와 선거지상주의... (후략)”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대한민국 제22대 총선. 이 핵분열과 핵융합의 과정 같은 시간 속에서 여지없이 대중을 편 가르고 기득권 정치와 거대 양당정치, 엘리트 정치와 법치라는 이름의 폭압적 행태들을 또다시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책 <내전, 대중 혐오, 법치>는, 앞으로도 한동안 우리 공동체를 내전의 양상으로 몰고 갈 그 신자유주의자들의 들켜버린 마음을 담은 비책이자, 그런 법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억압적 대중 혐오의 내전 전략을 대하는 우리 주권자들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담은 지침서가 될 수 있다 싶습니다.
#내전대중혐오법치 #신자유주의는어떻게지배하는가 #원더박스
#도서제공 #서포터즈 #서평단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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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ction05 2024-03-10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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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대중 혐오, 법치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
‘내전’이라 하면 왠지 이런 그림을 떠올릴 것 같지만, 여기서 말하는 내전은 좀 더 포괄적이다. ‘서로 다른 사회적 이해 당사자들 간의 경쟁, 특히 계급 투쟁’이라고, 저자들은 내전을 이렇게 정의한다. ‘시장’이라는 하나의 정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신자유주의는 ‘내전’이라는 전략을 사용한다. 그것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유혈 사태로 번지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내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사회 내부의 두 세력 간의 충돌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자유’의 이름으로 ‘평등’과 맞서는, 신자유주의의 주요 전략에 따른 결과이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그리고 최근의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지만, 저자들은 여러 장을 할애하며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의 지배 전략을 ‘내전’과 ‘대중 혐오’, ‘법치’라는 키워드로 이야기하며, 이를 타개할 새로운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1973년, 칠레의 장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쿠데타를 일으켜 살바도르 아옌데의 좌파 정부를 전복시키고 최초의 신자유주의 정부를 수립한다. 피노체트는 ‘법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권력’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권력 찬탈을 정당화했고, 노조의 권리를 엄격히 제한하고 전면적인 민영화를 추진하는 등 파격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했으며, 이윽고 1980년 개헌을 통해 국민주권마저 빼앗고 만다. 흔히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개념으로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독재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밑바탕에 깔고 있기에 가능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여론의 지배, 혹은 우매한 대중을 위험 요소로 여겨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떻게 대중의 권력을 제한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 해답으로 ‘강한 국가’의 필요성이 등장한다. 여기서 강한 국가는 대중의 요구를 차단할 수 있는 초월적 국가를 의미한다. 따라서 독재나 국가 폭력과 같은 수단도 때로는 정당화될 수 있으며, 시장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사법(私法, droit)을 헌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인식대로 자유시장경제를 신봉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부의 적(敵)을 규정하여 사회 내부의 계층 간 전쟁을 종용한다. 가령 2019년 프랑스에서는 ‘노란 조끼 운동’이라는 임금 인상과 간접세 인하 등 평등에 대한 요구를 무자비한 탄압으로 응했고, 언론과 정치권은은 이들에 대한 비방과 낙인 찍기를 통해 대중에게 공포심을 조장했다. 이는 비단 프랑스뿐만이 아닌 전 세계에서 관찰되고 있는 현상이다.
현대의 신자유주의는 일부 엘리트 계층이 적과 싸우는 데서 나아가 대중의 일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갈등의 장으로 뻗어나갔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쉽게 관찰되고 있다. 가령 세대 갈등이라던가 성별 간의 혐오, 좌우 진영의 대립, 능력주의의 맹신 등이 있다. 이러한 갈등의 주체들이 서로의 이해 관계를 수용하고 조정함으로써 내전은 평화롭게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러한 갈등을 조장하는 주체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에 익숙지 않다면 매우매우 어려운 책이다.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했다고는 생각지도 않고, 아마도 잘못 이해하고 서술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조금은 와 닿았다.
“낡은 것은 갔는데 왜 새것은 오지 않는가?”
의미심장한 말이다. 신자유주의는 종식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인류를 일정한 방향으로 조종해 왔고, 그 과정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과연 이 시대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들이 이 두꺼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대한 대항, 좀 더 그럴싸하게 말하자면 ‘혁명’이다.
22대 총선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 우리는 뉴스를 통해 다양한 편 가르기를 목도하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반발로 의료 서비스에 차질이 생긴 지금도,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은 표를 모으기 위해 서로를 헐뜯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작게는 우리가 가진 소중한 권리 행사로, 크게는 지배층의 엉큼한 속내를 깨닫고 휘둘리지 않는 것으로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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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승 2024-03-19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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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400쪽
143*210mm
525g
ISBN : 979119295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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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선택
"신자유주의의 지배 전략"
제목인 내전, 대중 혐오, 법치(법을 이용한 지배)는 책이 분석한 신자유주의의 대중 지배 전략들이다. 신자유주의라니, 새삼스럽다. 저무는 시대의 헤게모니를 톺아볼 차례가 된 것인가? 그러나 이 책은 지난 시대의 회고가 아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와 사회학자로 이루어진 네 명의 저자들은 현재 세계에서 벌어지는 파행적 흐름의 원인을 여전히 굳건한 신자유주의에서 찾는다.
책은 하이에크, 미제스, 슈미트 등 대표적인 자유주의 이론가들의 사상을 꼼꼼히 살핀다. 이들의 이론은 단순한 경제, 정치사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대중의 현실과 정신을 지배하는 기획이다. 그것은 “연합한 과두 지배자들이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으로 정의되는 '내전'을 통해, 우매한 다수의 대중에게 그 어떤 결정권도 절대 넘길 수 없다는 '대중 혐오'를 통해, 적을 처단하기 위한 '법을 이용한 지배'를 통해 현실화된다.
책에서 분석한 신자유주의의 이론과 전략들은 직설적이고 선명하다. 이 뚜렷함은 현재 한국 사회에 대한 강렬한 이해로 다가온다. 현실 정치의 무책임한 난도질,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유해한 순진함이 아니라 명확한 의도일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이 두려움을 몰고 온다. 우리는 지금 무엇에 지배 당하고 있는가.
- 사회과학 MD 김경영 (2024.03.05)
책소개
신자유주의는 대체, 왜, 어째서 끝나지 않는가? 근본적으로 반평등, 반민중, 반혁명적인 체제,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진화를 파헤치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수많은 지식인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종언을 고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뒤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를 덮쳤고, 또다시 신자유주의 체제 종식에 관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과연 신자유주의는 끝났는가? ‘포스트 신자유주의’라는 말마저 식상한 것이 되어버린 지금, 여기에 단호히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다. 『내전, 대중 혐오, 법치』를 쓴 네 명의 저자들이다.
신자유주의를 푸코의 통치성 관점에서 분석하여 “모든 종류의 평등 요구를 무력화하려는 기획”으로 바라본 저자들은, 이 폭력적인 체제의 특성을 ‘내전’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한다. 신자유주의는 그 출발부터 ‘자유’의 이름으로 ‘평등’에 맞서는 내전을 전략으로 택했다는 것이다. 이는 지배 세력이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다. 그들은 시장 질서와 경쟁에 반대하는 모든 ‘적’을 분쇄하기 위하여 법을 이용한 지배, 즉 법치를 내세우며, 경찰과 군대를 동원한 직접적인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대중 혐오, 즉 반민주주의 정서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책은 하이에크와 대처에서부터 집권 좌파의 몰락, 신보수주의와 극우 포퓰리즘의 부상까지, 신자유주의의 계보를 따라 그것의 지배 전략을 파헤친다. 지난 80여 년 동안 보수는 물론 진보 세력까지 이 체제의 교리를 충실히 따랐다. 신자유주의의 작동 방식을 낱낱이 드러낸 이 책은 낡은 것을 떠나보내고 대안을 모색하는 이들, 진정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지침이 되어 줄 것이다.
목차
서문 ◦ 5
서론 신자유주의 내전의 전략들 ◦ 9
1장 칠레, 최초의 신자유주의 반혁명 ◦ 29
2장 신자유주의의 대중 혐오 ◦ 57
3장 강한 국가 예찬 ◦ 77
4장 정치 헌법과 시장의 입헌주의 ◦ 103
5장 신자유주의와 그 적들 ◦ 125
6장 사회 진화의 신자유주의적 전략 ◦ 151
7장 글로벌리즘과 내셔널리즘의 가짜 대안 ◦ 181
8장 가치 전쟁과 ‘인민’의 분열 ◦ 203
9장 노동 일선에서 ◦ 225
10장 반민중적 통치 ◦ 243
11장 신자유주의 전쟁 기계로서의 법 ◦ 263
12장 신자유주의와 권위주의 ◦ 283
결론 내전에서 혁명으로 ◦ 313
해제 낡은 것은 갔는데, 왜 새것은 오지 않는가? ◦ 336
미주 ◦ 352
찾아보기 ◦ 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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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7~18 신자유주의 내전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이 전쟁은 과두 정치 세력이 앞장서 벌이는 ‘총력전’이다. 이 전쟁은 사회적 권리 축소를 노린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며, 외국인에게서 모든
종류의 시민권을 박탈하고자 하고 망명권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민족적이며, 모든 저항과 비판을 억압하고 범죄화하기 위해 법적 수단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고 법적이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강성 보수주의가 도덕 질서 수호를 내세우며 개인의 권리를 공격할 때, 이 전쟁은 문화적이고 도덕적이다. 둘째, 이 전쟁에서 각각의 전략은 서로를 지지하고 상호 영감을 주기도 하지
만, 각 국가나 지역의 특수한 전략들이 범세계적인 단일 전략으로 수렴하지는 않는다. 셋째, 이 전쟁은 패권주의 강국이 주도하는 제국주의적 ‘글로벌 질서’와 블록화한 국가들 사이의 직접적인
대립이 아니다. 두 정치체제 간, 두 경제 시스템 간의 대립도 아니다. 이 전쟁은 연합한 과두지배자들이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지는 미리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분열, 그중에서도 가장 해묵은 분열을 수단으로 삼아 매번 획득되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종류의 이원론적 도식은 힘을 잃는다.
_ 「서론 신자유주의 내전의 전략들」 중 접기
P. 23 신자유주의가 가하는 폭력은 무엇보다 민주주의와 사회에 대항해 시장 질서를 보호하는 폭력의 성격을 띤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시장 질서는 경제정책을 선택하는 문제를 넘어 시민-소비자 개인의 책임과 자유에 기초한 문명 전체가 달린 문제다. ‘자유 사회’는 이런 기초 위에 구축되었기 때문에 국가는 모든 특권을 가지고 독보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심지어 상황에 따라서는 가장 폭력적이고 반인권적인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가 된다.
_ 「서론 신자유주의 내전의 전략들」 중 접기
P. 61~63 신자유주의의 모든 조류는 ‘인민주권의 신화’ 위에 수립된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자유주의의 정치적 기초를 세운 선구자들(루이 루지에, 월터 리프먼,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빌헬름 뢰프케)은 ‘민주주의에 대한 광신’, 즉 여론의 지배 혹은 대중의 어리석음이야말로 자유주의를 위협하는 진정한 위험이며, 인민주권 도그마의 유해한 효과를 제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들은 엘리트주의적이고, 개인의 선택과 사적 소유라는 최상위 원칙을 존중하는 제한된 형태의 민주주의만을 인정한다. 이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민주주의’다. (...)
인민, 보통선거, 다수결 원칙, 정치적 다원주의, 분배 정의, 공공 교육, 빈곤층을 싸잡아서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거부하기도 힘들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결코 민주주의를 온전히 지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근본적으로 대중을 혐오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무제한적’ 혹은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를 구별하며, 전자를 수단으로 후자를 무력화하는 이론적 작업을 수행한다.
_ 「2장 신자유주의의 대중 혐오」 중 접기
P. 79~80 권위주의의 형태 혹은 동원되는 폭력의 강도 등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신자유주의자들 사이에 근본적인 이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강한 국가’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견해 차이는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 카를 슈미트의 표현에 따르면 ‘강도’의 차이다. 강한 국가의 한계는 인위적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시장에 대한 적의 위협에 따라 비례적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특정한 신자유주의만을 가리켜 ‘권위주의적 자유주의’라고 표현하는 건 적절치 않다. 시장경제를 규제하기 위한 모든 민주주의적 의지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이미 내재적으로 권위주의적이다. 국가의 힘을 사용하는 형태가 다를 뿐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반복해서 말했다. 독재와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단지 자유경제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강한 국가는 파시스트 국가와 구별된다. 반대자들에 가해지는 노골적인 폭력은 그 자체로 근본적인 원칙이 아니라 맥락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미제스가 설명하듯이 상황에 따라 신자유주의 국가는 시장의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파시스트 폭력에 의존하는 것도 가능하다.
_ 「3장 강한 국가 예찬」 중 접기
P. 127 신자유주의의 다양한 분파는 자유경제에 대한 위협에 맞서 싸우기 위해 정치 영역에 개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단순히 자신의 앙숙인 사회주의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신자유주의의 다양한 분파들은 이데올로기와 문화 영역에서 사회주의와 맞서 싸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법과 조치, 제도의 확립을 통해 향후 어떤 사회주의적 정책들도 도입할 수 없게끔 방벽을 세우고자 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중심 목표는 처음부터 사회주의를 패퇴시키는 것이며, 더 나아가 노동조합을 약화하고, 국가의 사회복지를 후퇴시키는 것이다.
_ 「5장 신자유주의와 그 적들」 중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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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대중 혐오, 법치』는 우리 시대가 과연 어디를 향하는지, 아니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이들이 반드시 읽고 토론해야 할 책이다. 몇 가지 논쟁거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이룬 성취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신자유주의의 탄생』에서,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려면 반드시 생활세계, 국민국가, 지구질서라는 세 가지 수준을 포괄하는 정치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저자들의 이전 저작) 『새로운 세계합리성』은 이 가운데에서 생활세계의 정치가 추구해야 할 바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자치)와 협동(돌봄)에 바탕을 둔 대안적 세계합리성의 구축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내전, 대중 혐오, 법치』는 국민국가 수준에서 대안적 정치의 과제가 민주주의와 평등에 바탕을 둔 광범한 연대를 실현시켜 내전의 정치를 제압하는 것임을 밝힌다. 이것만으로도 탈신자유주의 전략의 상당 부분이 해명된 셈이다. 아마도 지구 질서 차원에서는 경제력-군사력 경쟁이 아니라 문명 붕괴에 맞선 연대가 필요하다는 논의를 덧붙인다면, 탈신자유주의 전략의 전체 그림이 얼추 꼴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 책 마지막 장을 덮으며 우리가 새겨야 할 진실은 이것이다―신자유주의 시대는 결코 저절로 저물지 않는다는 것. 그에 필적할 또 다른 문명적 기획이 구축되지 않는다면, ‘장기 신자유주의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내전, 대중 혐오, 법치』는 더 늦지 않게 이 기획에 착수하라는 촉구이며, 이 기획이 추구해야 할 방향을 안내하는 듬직한 조언이다.
- 장석준 (사회학자, 출판&연구공동체 산현재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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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피에르 다르도 (Pierre Dardot)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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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낭테르대학(제10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헤겔과 마르크스를 전공했다. 같은 대학 소피아폴Sophiapol 연구소에 소속되어 마르크스와 커먼즈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2004년에 크리스티앙 라발과 ‘퀘스천 마르크스Question Marx’를 설립하였고, 이후 그와 함께 『새로운 세계합리성』(국내 출간), 『끝나지 않는 악몽Cecauchemar qui n’en finit pas』 등 신자유주의를 분석한 다수의 책을 펴냈다. 2018년 가을, 동료 석학들과 ‘신자유주의와 대안 연구그룹GENA’을 결성해 연구에 힘쓰...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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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 라발 (Christian Laval)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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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낭테르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이자 같은 대학 소피아폴 연구소 소속으로, 자유주의와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를 전공했다. 1990년대부터 신자유주의가 교육에 끼친 영향을 광범위하게 연구했고, 피에르 다르도와 ‘퀘스천 마르크스’를 설립해 『새로운 세계합리성』을 비롯해 신자유주의를 주제로 한 여러 저작을 공저했다. ‘신자유주의와 대안 연구그룹’을 함께 결성해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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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소베트르 (Pierre Sauvere)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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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정치대학교(IEP)에서 정치학, 사회학,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셸 푸코로부터 영감을 받아 20~21세기 통치성을 분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파리 낭테르대학 소피아폴 연구소 일원이자 ‘신자유주의와 대안 연구그룹’ 설립 멤버로, 커먼즈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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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게강 (Haud Gueuen)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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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립공예학교(CNAM)의 철학 교수로, 신자유주의적 주체화와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를 주제로 연구하고 있다. 파리 낭테르대학 소피아폴 연구소 일원으로 ‘신자유주의와 대안 연구그룹’을 함께 설립했다.
최근작 : <내전, 대중 혐오, 법치>
정기헌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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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8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번역한 책으로는《프란츠의 레퀴엠》,《남겨진 사람들》,《고독의 심리학》,《트레이더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양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퀴르 강의 푸가》,《철학자에게 사랑을 묻다》,《프랑스는 몰락하는가》,《해피스톤은 왜 토암바 섬에 갔을까?》,《괜찮아 마음먹기에 달렸어》,《리듬분석》, 《논 피니토: 미완의 철학》, 《낭비 사회를 넘어서》, 《마르크스의 유령》, 《엘불리의 철학자》 등이 있다.
장석준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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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연구공동체 산현재 기획위원. 전 정의정책연구소 소장. 저서『세계 진보정당운동사』, 『사회주의』, 『신자유주의의 탄생』등. 역서『길드 사회주의』, 『G. D. H. 콜의 산업민주주의』, 『좌파의 길』등.
최근작 : <문화과학 120호 - 2024.겨울>,<서울리뷰오브북스 13호>,<2023 초등 4학년 필독 세트 - 전5권> … 총 57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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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여자는 우주를 혼자 여행하지 않는다>,<공갈 젖꼭지>,<어떤 대통령이 좋은 대통령인가>등 총 110종
대표분야 : 사회학 일반 2위 (브랜드 지수 6,594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낡은 것은 갔는데, 왜 새것은 오지 않는가?
질문이 틀렸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아직 저물지 않았다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시대,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문구를 빌려 현대를 진단한 이 명제는 많은 지식인의 공감을 샀다. 주지하다시피 ‘낡은 것’은 신자유주의로, 1970년대부터 전 세계를 지배해 온 이 체제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에 여러 식자들은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대체 왜 새것은 오지 않는가?
기실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라는 말은 ‘신자유주의’라는 말만큼이나 상투적인 것이 되었다. 2008년 9월 19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서브프라임 모기지에서 비롯한 금융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전례 없는 조치’를 시행하겠다고 공언한다. 무한 공적자금 투입, 전방위 시장 개입을 통해 월스트리트의 붕괴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 조처를 두고 수많은 지식인은 ‘신자유주의 종주국’이라 할 법한 미국이 ‘작은 정부 큰 시장’을 포기했다며 신자유주의에 종언을 고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신자유주의는 또 한 번의 큰 위기를 맞는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글로벌 경제에 제동을 건 것이다. 셧다운과 국경 폐쇄가 이루어졌고, 거의 모든 나라의 정부가 위기를 모면하고자 천문학적인 공적 자금을 투입했다. 또다시 신자유주의 종말론이 고개를 들었고, 너도나도 ‘포스트 신자유주의’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과연 신자유주의는 끝났는가? 그렇다면 왜 새것은 오지 않는가? 새것이 오지 않는 이유가 낡은 것이 아직 저물지 않았기 때문이라면? 『내전, 대중 혐오, 법치』는 파리 낭테르대학에 거점을 둔 네 명의 석학이 함께 쓴 책으로, 저자들은 여전히 세계가 신자유주의의 지배 아래 있다고 주장하며 그 지배 방식에 주목한다. 푸코의 통치성 관점에서 이 체제가 취하는 전략적 특성에 초점을 맞출 것을 제안하는 저자들은 신자유주의를 단순한 경제·정치 사상으로 여기는 관점에서 벗어나 “모든 종류의 평등 요구를 무력화하려는 기획”으로 바라본다. 이 명제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아직 저물지 않았다.
내전, 대중 혐오, 법치, 세 키워드로 꿰뚫는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진화
저자 가운데 피에르 다르도와 크리스티앙 라발은 『새로운 세계합리성』(오르트망 옮김, 그린비)에서 신자유주의가 걸어온 궤적과 그 주창자들의 이론을 분석한 바 있다. 『내전, 대중 혐오, 법치』에서도 다른 두 명의 저자들과 함께 이 방법론을 채택해 신자유주의가 태동한 1938년 월터 리프먼 학술대회부터 오늘날까지, 사상사적 계보를 따라 이 체제에 내재한 특성을 밝혀낸다.
저자들이 제기하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전략이자 특성은 ‘내전’으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군사적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벌이는 내전을 “연합한 과두지배자들이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라고 정의한 저자들은 칠레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부터 시작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기수였던 대처와 레이건 집권기(다시 말해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강조한 사회민주주의 좌파가 실각하고 패퇴한 시기)를 거쳐 세계 곳곳에서 극우 세력이 부상한 지금 이 순간까지, 역사적 사건들을 면밀히 살피며 신자유주의가 벌이는 ‘내전’을 분석해 나간다. 내전에는 필연적으로 ‘내부의 적’이 상정되어야 하는데, 역사적으로 ‘공산주의’ 혹은 ‘집산주의’가 적으로 지목되었고, 오늘날에는 인종주의 또는 보수주의와 결합해 새로운 적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게 복지 정책, 노동조합 등 ‘평등’을 추구하는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의 적으로 상정되었으며 오직 시장 질서와 경쟁만이 옳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 체제의 고유한 주요 속성 하나가 드러난다. 내부의 적을 분쇄하기 위해 ‘법을 이용한 지배’, 즉 법치를 내세운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의 법에 대한 선호는 반대파를 향한 폭력으로도 드러난다. 오늘날 지배 세력은―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반대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경찰력과 사법 당국을 이용한다. 2018년 프랑스 정부의 ‘노란 조끼 운동’에 대한 탄압을 예로 들 수 있다. 오늘날 국가는 ‘안전’을 이유로 반대 세력을 억압할 법을 제정하고, 집행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들은 신자유주의의 대중 혐오, 즉 반민주주의적 면모에 주목한다. 미제스는 “대중은 사유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인류를 지도하는 일은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라고 이야기했고, 하이에크는 민주주의를 ‘사적 권리에 대한 침해’로 간주했다. 이들을 비롯한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은 정도나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인민주권’을 부정하며 인민의 권력을 제한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인민(대중)은 만족을 얻을수록 평등의 이름으로 더 많은 요구를 내세우기 때문에, 그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때로는 독재를 이용해서라도) 이를 막아야 한다는 게 신자유주의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결국, 신자유주의가 벌이는 내전은 ‘자유’를 앞세워 모든 ‘평등’ 요구에 대항해 벌이는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다시 신자유주의의 계보를 톺는 것에 관하여
어느 세력이든 자기편만 극단적으로 챙기는 모습, 반대 세력에 대한 철저한 무시 혹은 탄압,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로 미끄러져 버린 법치주의, 갈라치기, 갈등, 분열, 혐오…. 눈 밝은 독자라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이자, 저자들이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핵심으로 제시하는 세 키워드가 오늘날 우리 사회와 묘하게 포개어지는 지점을 포착해냈을 것이다.
다만 『내전, 대중 혐오, 법치』로 표면적인 정치 상황을 읽어내는 데 그친다면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들은 신자유주의의 계보와 역사적 사건을 샅샅이 분석하여 이 사상이 경제·정치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문화에까지 걸친 전 지구적 질서가 된 과정을 추적한다.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법과 노동을 재조직해 새로운 노동 규범을 강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해방 혹은 자기실현이라는 매력적인 말로 포장하여 수용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데까지 나아”가는지, “여성의 권리를 문제 삼고, 동성 결혼을 반대하도록 대중을 선동”하는 ‘도덕적 십자군’의 형태를 취하는지,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기업가 정신 즉 ‘자기 경영자’ 모델을 내면화하도록 하는지, “어떻게 대립의 경계를 이동시켜 인구의 일부가 권위주의를 지지하게 만드는지” 낱낱이 드러낸다.
이 분석을 따른다면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경향이나 소수자를 향한 소위 ‘역차별’ 논란, 약자 혐오, ‘갓생’으로 표상되는 과도한 자기계발 담론, 극명하게 양분되는 정치 등은 모두 신자유주의의 변형 혹은 발현이다.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가 한국 사회에 전면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사건은 IMF 외환위기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다시 그 계보를 근본에서부터 통찰한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체현한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는 귀중한 렌즈가 될 수 있다.
모든 대안을 봉쇄한 것으로 보이는 이 폭력적인 체제에 맞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전 지구적 질서가 될 수 있었을까? 우파는 물론 좌파 역시 신자유주의 통치 전략을 적극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좌파 버전으로 선택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문화적, 도덕적 대의를 추구하기 위해서 사회 평등을 쟁취하기 위한 역사적 투쟁을 외면해왔”으며, “신자유주의가 집권하고, 사회를 변형시키는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자리 잡는 데 성공한 것은 우파의 반동적 버전과 좌파의 현대주의적 버전으로 이중화된 덕분에 가능했다”라는 저자들의 지적은 뼈아프다. 이러한 두 분파의 가치 전쟁 속에서 대중은 분열하고, 모든 대안은 가로막힌다. 신자유주의의 내전 전략은 ‘분할하여 통치하라(Divide and Rule)’라는 격언을 충실히 수행하는 셈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이항 대립에 단호히 저항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의 내전 전략을 분쇄해야 한다. 저자들은 “오직 인민의 혁명만이, 시민들에 의해 전개되고 통제되는 혁명만이 신자유주의적 내전 전략에 대항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하며 신자유주의가 짓밟고자 하는 것, 즉 평등과 민주주의만이 그 지배에서 벗어날 해법임을 분명히 제시한다.
사회학자 장석준은 해제에서 “신자유주의 시대는 결코 저절로 저물지 않는다”라며, “그에 필적할 또 다른 문명적 기획이 구축되지 않는다면, ‘장기 신자유주의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논설한다. 신자유주의의 폭력적인 통치성을 기원에서부터 꿰뚫는 이 책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끝장내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훌륭한 지도가 되어 줄 것이다. 접기
민주 국가의 위기에 대하여
평점
분포
9.2
이 책은 푸코가 가지 않은 길을 재구성하였다. 엘리트의 대중혐오에서 대중의 자기혐오로 발전한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변모 과정을 잘 보여준다. Commons에 대한 저자들의 논의도 궁금하다.
에로이카 2024-08-06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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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대중 혐오, 법치
이 책의 공저자 중 한 명인 피에르 다르도는 크리스티앙 라발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공통된 주제를 연구하는 철학자이자 지식인입니다. 그는 1988년 파리 낭테르 대학에서 자크 비데의 지도 하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특히 다르도는 마르크스 연구에 대한 평생의 헌신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다음 크리스티앙 라발은 파리 낭테르 대학의 철학 및 사회학 연구자로 공리주의의 역사과 고전 사회학에서의 역사 및 교육 시스템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라발은 다르도와 함께,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전략과 그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지속하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피에르 소베트르는 파리 정치 대학에서 정치학, 사회학, 철학 박사를 취득하고 현재 파리 낭테르 대학의 소이파폴 연구소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 게강은 프랑스 국립 예술 공예원의 철학 교수이자, 신자유주의적 주체화 방식과 피에르 부르디외 및 정의 사회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학자로 그녀 역시, 현재 파리 낭테르 대학의 소피아폴 연구소의 일원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집필에 참여한 이 책은, 원제 "Le Choix De La Guerre Civile"로 지난 2021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는 이 논저를 "신자유주의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이자, 그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라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미 신자유주의화가 완료된 미국과 영국을 비롯, 유럽 일부 국가들과 더불어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비판은 물론 신자유주의 자체를 토론의 대상으로 입에 담는 것조차, 경우에 따라 상대로부터 상당히 자극적인 언설까지, 감내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를 8장 이후에 드러나는 '신자유주의적 교조화'에 단편적으로 연결시킬 필요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반동적 우파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시장 자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행 부분에서 여실히 결탁했던 점을 인지하고 받아들인다면 이런 교조화의 개연성이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47년의 몽펠르랭 소사이어티의 출범과 그 이전의 '이데올로기 투사인 하이에크'에 의해 비로소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이 글의 8장 이후의 논증과 개인적으로는 그동안의 독서를 통해 알게 되었던 핵심이기도 한, 과거 전통적 자유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자 가치임을 명백히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자유주의의 계승자이면서 권위주의와 사회주의에 맞서 싸웠고, 이를 좀 더 과장하여 소위 "문명의 수호자"로 스스로를 각색하기도 합니다. 8장에서 공저자들에 의해 분석되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자유란, "자연법, 인민주권, 인권, 의회정치, 인민의 자결권"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기 하이에크와 같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단순히 사회주의 영역의 확장에 맞서, 서구 문명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희생적 투사로서 사회를 개변시키기 위한 숭고한 목적이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대부분의 신자유주의자들은 '개인 선택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고 그것을 위한 헌법의 개조, 더 나아가 1970년대 칠레와 같은 국가에서는 민주주의 정부를 붕괴시키는 불법적인 군사 쿠데타까지 지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미제스와 하이에크 뿐만 아니라 기존의 엘리트 지배 세력 역시, 대중이 주역이 된 민주주의에 대해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많은 시민들은 신자유주의가 "그럴 리가 없다"고 항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이 글의 2장에서, 대중 민주주의에 대한 엘리트 세력의 공포, 그 이전의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귀스타브 르 봉의 가히 적대적인 논저들은 파시즘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자들에게도 큰 사상적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세금 경감과 사회적 비용 절감이라는 미명하에, 정부의 사회적 복지 철폐가 현재에 이르러서는 많은 시민들이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사회 부조가 붕괴된 시점에 '민간 보험'을 통해 스스로 자구책을 찾는 것을 '신자유주의의 유일한 성과'라고 비꼬는 저자들의 언급은 그만큼 민주주의의 축소로 읽힙니다. 하이에크는 이미 '사회적 정의'따위는 필요없다고 강조한 바가 있는데요. 일전에 낸시 프레이저에 의해 증명된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가 추동했던 비정상적인 능력주의도 마땅히 초래될 수밖에 없던 '경제적 불평등'을 개인적 차원에서 겸허히 받아들이고, 심지어 직업 선택의 이익으로 작용하는 유용한 사회적 정보들이 보다 돈이 많은 계층에게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목놓아 외쳤던 '유토피아'에 대한 언설이 얼마나 하등 쓸모가 없었는지 이 글의 여러 논증들에서도 분명히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미 대니 로드릭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따른 민주주의의 축소를 예견한 바가 있습니다. 로버트 커트너 역시 이에 동조하는 의견을 거듭 개진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예 노골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기만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 자유 지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가 시장을 통제하는 것에 아예 기를 쓰고 반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3장에서부터 이어지는 진술이기도 한, "신자유주의가 시장에 대한 민주주의의 통제를 격멸하기 위해, 심지어 권위주의적인 폭력"까지 서슴치 않았던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특히 칠레의 사례는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당시 CIA의 불법적인 작전은 물론 제임스 뷰캐넌으로 이어지는 엘리트 지식인들의 개입, 피노체트에 의한 신자유주의화의 완료 이후, 이에 대한 언급을 기피했던 하이에크의 일화는 대체로 이들 거의 모두가 반민주주의에 가깝다는 결론에 저는 이르렀는데요. 여기에 "교육 받은 노동자들의 출현"을 반기지 않았던 이들의 입장을 고려해 본다면, 결국 신자유주의자들이 바라는 정치 형태는 시민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소수 권력자들의 임명에 국한된 제한적인 민주주의이거나, 극단적으로 소수의 엘리트 지배 세력이 정치를 이끄는 철저하게 융합된 과두제를 추종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후반부에서 더 보충되기에 이릅니다.
여러분 모두 민주주의 정치에서 헌법의 기능과 그 의미가 얼마나 막중한지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는 헌법의 정당성을 통해, 각 사회에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은근히 바라는 바대로, 극단적인 권위주의 통치를 재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고 시장에 대한 민주주의의 통제는 견실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헌법을 통해 작용하는 만큼 헌법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고치는 것이 그들의 중대한 목표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크나큰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인물이 바로 카를 슈미트입니다. 마크 릴라에 의하면 슈미트는 죽을 때까지, 나치에 부역한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은 거의 반동적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바이마르 시대의 자유주의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있었고, 소위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권력과 같이, 헌법을 초월한 계엄이라는 비상식적인 '예외 상태'를 인정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자를 추종하고 자신의 사상적 단초를 거듭 발견했던 이가 바로 하이에크였습니다.
이처럼 헌법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이 추종하는 '경제적 헌법론'은 시장을 위해, 헌법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고 받아들인 것인데요. 하이에크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이 강력하게 추종한 개념이 바로 카를 슈미트의 '결단주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결단주의와 일반적인 헌법은 매우 상충되는 측면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자들은 외형적으로는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인정하지만 그들의 속내는 '명백히 개조된 민주주의'입니다. 시장이 알아서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다는 관념 체계를 여기에서 다시금 비판적으로 분석해 볼 수도 있지만 이러한 문제는 이미 과거 여러 사례를 통해 허구로 밝혀진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이는 여전히 확실하고 견고한 이들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8장 이후 드러나는 신자유주의의 비열하고 노골적인 사회적 작업들의 근간이 바로 이러한 주장들에 우선적으로 결부되어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하이에크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사법(私法)의 개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저자들은 이에 대한 분석으로 "사법(상법과 형법을 포함한)의 규칙들이 헌법의 위치로 격상되는 것"을 골자로 한 소위 '시장의 입헌주의'라는 용어로 보충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뒤이어 이어지는 하이에크식으로 해석해 본다면 여기에 민주주의를 대입해, "민주주의의 남용을 방지하는 헌법을 고안"하는 일종의 사법의 형성 혹은 확대를 추인하는 동시에 이 자체는 신자유주의에 있어 중요하고도 새로운 헌법적 맥락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전통적으로 도덕적 가치나 도덕주의에 회의를 갖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신보수주의자들과 손을 맞잡은 것은 단순히 원칙과 이에 대한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하더라도 기술적으로는 목적을 위해 무엇이든 이용하는 이들의 저열한 습성을 여실히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헌법이 무력화되었던 파시즘을 다수의 신자유주의자들이 경멸했으면서도 외부 정치에 대한 쿠데타는 물론, 권위주의적 방식의 폭력적 방법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들 신자유주의자들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여기의 공저자들은 파시즘과 신자유주의를 명백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정치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정당적 절차와 토론 없이 막후에서 시민의 동의는 배제하고 '예외 상태'로 해결할 수 있다는 그런 관념 자체가 얼마나 헌법을 포함한 민주주의 자체에 해악이 되는지에 대해 다시금 이 자리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더욱이 파시즘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인식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권위주의 방식의 국가 권력 동원을 용인하고, 심지어 하이에크는 과거 파시즘과 나치즘의 부상이 사회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바로 그 경향에서 비롯된 결과였다고 역설한 측면은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넘어 국가 권력을 대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이중성을 드러낸다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다시금 강조하지만 민주주의가 시민 다수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정치 체제인 만큼, 반대로 신자유주의가 '공익'과 '공리주의' 내지는 '시민의 권리'에 웃는 외양을 한 채, 속으로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시민들 모두는 이를 유념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본격적으로 논증이 이뤄지는 글 중간에, "신자유주의가 진행되었거나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복지를 공격하면서도 이 사회적 부조를 완벽하게 제거할 수는 없다"는 논평 내지는 분석은 실로 저에게 처참한 감상을 느끼게 했는데요. 이는 그야말로 현재의 민주주의가 제한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동시에, 신자유주의 자체를 효과적으로 제어하는 것만이 정치의 건전성을 답보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제가 최근에 일독한 앤드루 갬블의 여러 제안들과 일맥상통한 부분이기도 했는데요. 더욱이 역사학자인 딘 베이커가 과거 신자유주의적 흐름 속에, 미국의 리버럴 정치인들이 신자유주의에 투신한 사례를 강도 높게 비판했듯이, 진보 좌파의 기형적인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전반적인 이들의 궤멸은 신자유주의의 오판을 최종적으로 막아내지 못한 근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비판은 이 책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는데요. 진보주의 세력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선명성을 유지하고 이를 통해 권력 바깥의 시민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야 했지만 현실은 68혁명 이후, 급격하게 붕괴되어 왔습니다. 과거 68혁명 자체에 지독한 거부감을 갖고 있던 극단적 보수 세력과 신자유주의의 결탁은 심하게 말하면 진보 세력의 목숨 줄을 끊어 놓은 결과로 이어졌고, 심지어 독일을 비롯한 사회 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불신과 만연된 억측의 상황을 초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일관된 사실과 증거가 명백함에도 소수의 부유층과 엘리트 지배 세력에 봉사한 신자유주의를 여전히 현대적 금융 자본주의를 선도한 무슨 경제적 사조 쯤으로 이해하고 있는 시민들이 적지 않은 상황은 흡사 아이러니하다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서 분명한 것은 현재의 신자유주의자들이 허버트 스펜서를 비롯한 사회진화론과 은연중 인종주의를 신봉하고, 서구 유럽에 의한 전세계 문명의 선도와 과거 귀스타브 르 봉의 유산이기도 했던 대중 민주주의의 혐오에 기반한, 거의 체제 반동적인 성격의 세력이라 여겨집니다. 더욱이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을 통해, 민주주의의 운명이 해가 갈수록 불확실하다는 부분, 그리고 2008년 이후 신자유주의가 전혀 수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 시민이 포함된 일반적인 미래는 다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앞으로 몇 세대 동안은 진정 암울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새로운 자유주의가 구축한 세계가 얼마나 바람직하지 않은지 이제부터라도 시민 모두가 고찰해 봐야 되지 않을까, 글 말미에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책에서 언급된 몽펠르랭 소사이어티의 멤버들이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대해 보인 호의와 관심은 이들이 기반이 된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민주주의를 증오하는지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저 개인적으로는 이 논저를 통해, 카를 슈미트의 '정치적 낭만주의'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결국 슈미트는 전통적 자유주의를 혐오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겉으로 드러내지 않게 경멸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은 민주주의가 자유 시장에 가하는 ‘경제의 정치화‘ 위협이다.
헌편, 신자유주의적 폭력은 국가의 외부자로 지목된 공동체에 대항해 정동을 동원할지언정 그들에게 파시스트적 폭력을 가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중 모든 신자유주의자가 첫째로 꼽는 것은 개인-소비자의 주권 보장을 전제로 한 경쟁이다.
군사 정권의 권력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스만은 카를 슈미트가 고안한 ‘제헌 권력(pouvoir constituant)‘ 개념을 동원했다.
몽펠르랭 협회 회원들이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보인 호의는, 평등과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너무도 잘 드러내는 예시다.
그런데 이를 ‘법 앞의 평등‘으로 재해석하는 걸 자발적으로 소득과 재산의 분배를 바로잡으려는 모든 시도를 저지하는 데 목적이 있다.
신자유주의를 이해하려면, 산업혁명이 낳은 엄청난 불평등과 그로 인한 여러 형태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보험을 비롯한 재분배 메커니즘이 도입되던 시기를 살펴야 한다.
이들의 도덕적 이상에 따르면, 존경을 받아야 할 이들은 자본을 축적함으로써 가족과 사업의 미래를 살피는 신중한 사람, 좋은 가장과 공급자이다.
대처는 일찍이 가부장적 가족에서부터 국가에 이르는, 전통과 관련된 모든 보수주의적 주제들을 시장의 회귀와 정치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역사적으로 독특한 위치를 점했다.
서구의 우월함에 대한 믿음과 위협에 처한 정체성에 대한 편집증적 방어를 결합한 이 새로운 ‘자유‘정신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우파와 반동적 우파가 공공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 행위를 정당화하는 자양분이 되어주고 있다.
좌파의 변신은 신자유주의의 지배를 제한하거나 분쇄할 수 있는 모든 정치적 대안을 향한 길을 장기적으로 봉쇄해버렸다.
신자유주의 국가는 사회복지를 축소함으로써, 국민을 불안정한 상태로 몰아넣는 동시에 국민을 계속해서 보호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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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24-03-12 공감(1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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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는 내전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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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그러니까 재작년 봄쯤 다르도와 라발의 『새로운 세계합리성』을 읽고, 신자유주의 분석에서 푸코의 쓰임은 어떤 것일까에 대해 여러 생각을 했더랬다. 그때 리뷰를 제대로 안 써놓아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1)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 대한 훌륭한 주석서다. 다르도와 라발은 푸코가 “통치”라는 관점에서 살펴봤던 질서자유주의, 하이에크, 베커 등의 선구적 신자유주의 이론들을 잘 소개한다. 그러나 거기에서 좀더 나간다. 푸코가 참조한 이론뿐만 아니라, 그 이론이 실현된 역사적 사례들 – 피노체트의 칠레부터 유럽연합의 탄생까지 -과의 연관성을 부각시킨다. 만약 푸코가 말년에 자기통치의 문제에 천착하지 않고 신자유주의 연구를 계속했다면 그 출발점이 어땠을 지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푸코의 신자유주의 연구를 동시대적으로 갱신한다면,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의 대두로 손상된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거나, 그래봤자 그것은 형식적 민주주의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대신, 좌파는 신자유주의 합리성/통치성에 대한 대안적 합리성/통치성과 그것을 인도하며 그것에 의해 인도되는 주체의 대항품행 개발이 절실하다는 이 책의 결론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2) 이 결론에도 불구하고, 정작 다르도와 라발만의 독창성이라는 점에서는 아쉬운 감이 있었다.
3) 저자들은 『새로운 세계합리성』의 한국어판 서문(2022)에서 출판 당시(프랑스에서 2009년 출판)에는 자신들이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다루지 못했음을 고백하면서, 푸코의 1972~73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처벌사회』의 ‘내전’ 개념이 이 관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2016년 자신들이 펴낸 『끝나지 않는 악몽: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의 핵심주장을 매우 간략히 소개한 바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끝나지 않는 악몽』의 내용을 무척 궁금해 하면서, 이를 비롯한 이들의 후속 저작들이 한국어로 번역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존재 자체도 아예 몰랐던 이 책 『내전, 대중혐오, 법치: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를 만나게 되었다. 2021년에 프랑스어로 출판되었고, 아직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은 책이다. (그런데 『새로운 세계합리성』의 “한국어판 서문”을 다시 보니, 각주에 이미 이 책이 언급되어 있다.)

장마와 폭염 속에서 책을 다 읽었다. 읽은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진빠지는 일들로 책상에 앉을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잠깐 짬이 나 몇 자 적는다.
1. 전략으로서의 신자유주의 이론: 내전과 대중혐오
다르도, 게강, 라발, 소베르트, 이 네 명의 저자는 신자유주의 이론을 순수 이론이 아니라, 어떤 전략을 내포한 이론으로 본다. 푸코의 “주체와 권력”에 따르면, ‘전략’이란 “적에게서 전투의 수단을 박탈함으로써 싸움을 포기하게끔 만드는 모든 방법”이다(27, 354). 곧 미제스 이후의 신자유주의 이론들은 “사회의 적”을 격퇴하기 위한 전략적 담론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사회 안에서 적과 대면하는 “내전”이라는 맥락에서 구사되는데, 이 “내전”은 푸코의 1972~73년 강의록 『처벌사회』의 주요 테마였다. 그러나 ‘내전’ 개념은 군주권력에서 규율권력으로의 이행에 초점을 맞춘 『감시와 처벌』(1975)에서는 주변화되었고, 내가 알기로 푸코는 이를 주요 개념으로 사용한 저작을 남기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좀더 적고, 다시 이 책 이야기로 돌아오자.
저자들이 말하는 ‘신자유주의 내전’은 과두지배 연합이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다(17-18). 그러나 이는 ‘1% 대 99%’의 싸움 같은 계급투쟁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과두지배 집단, 소위 ‘진보적 신자유주의’ 집단, 권위주의적 국민주의에 포획된 인민들, 그리고 평등과 민주주의를 고수하는 집단 등이 복잡한 긴장을 구성하며 내전에 참여한다.
누가 신자유주의의 적인가? 신자유주의자들은 ‘총체적 국가’를 공포의 대상으로 느낀다. 이 총체적 국가란 민주주의가 경제를 침범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다(22-23). 이 민주주의와 사회라는 적에 맞서, 신자유주의는 시장질서를 보호하기 위해 행사하는 폭력을 정당화한다. 신자유주의는 내부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 고전파 정치경제학을 각색한 맨체스터학파의 자유방임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두 개의 전선에서 싸움을 수행한다(134). 그리고 이 담론은 현실적으로 공산주의, 나치즘, 집산주의, 사회국가, 복지국가, 사회주의, 노동조합 등을, 곧 “계획경제와 집산주의를 닮은 모든 것”을 “사회의 적”으로 규정한다(126).
이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강한 국가와 자연적 구조(뢰프케, 161), 또는 자의적 강제와 자발적 진화(하이에크, 168)가 동시에 필요하다고 본다. 보이는 주먹과 보이지 않는 손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소리다. 적과 싸우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강한 힘이 필요하겠지만, 자연적 구조나 자발적 진화는 왜 강조되는가? 그것은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보는 사회주의자들의 구성주의적 오만에 대항하기 위해서다. 시장의 규칙은 자연적인 것이고, 이에 순응하지 않고 개입해서 교정하려는 시도는 무지 또는 악의 소산으로 규정된다. “시장은 옳다. 토 달지 말고, 개기지 마라. 주글래?” 이런 소리다. “대중은 만족을 얻을수록 평등의 이름으로 더 많은 요구를 내세우게 되고 국가는 약해진다”(발터 오이켄, 69). 평등의 요구는 시대의 ‘병리적 증상’일뿐이다(알렉산더 뤼스토프, 27~28). 민주주의 이론과 제도들은 대중의 짐재력을 긍정하지만, 신자유주의자에게 대중이란 혐오와 순치의 대상일 뿐이다. 신자유주의 전략에는 바로 민중을 개돼지로 보는 마음가짐이 깔려 있는 것이다. 시장에 대한 순종 여부로 순치/동원과 혐오/격멸의 대상을 구별하고, 양자간의 내전을 조직함으로써 민중의 단결이라는 위험을 예방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내전 전략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벌이는 전쟁은 경쟁을 위한 전쟁인 동시에 평등에 대항한 전쟁”이다(28).
2. 신자유주의 이론들과 슈미트의 묘한 관계: 법치
사실 난 칼 슈미트를 잘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점 하나가 신자유주의 선구자들이 슈미트를 참조했다는 사실이다. 슈미트는 다당제에 비판적였다. 왜냐하면 이 “특수이익들의 다원주의”는 ‘총체적 국가’를 향해 갈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69). 1932년 7월,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인간 삶 모든 영역에 침투하는” ‘총체적 국가’로서 ‘약한 국가’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같은 해 11월, 그는 이 약한 국가를 ‘양적 총체적 국가’로 재규정하면서, 이 현실의 국가와 대비되는 앞으로 도래할 이상적 국가로서 “질적 총체적 국가”를 제시한다. 이는 양적 총체적 국가로 나아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권위주의 국가이다. 그리고 이 ‘매우 강한 국가’만이 ‘당파 국가’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고, 나치즘과 공산주의라는 이중의 위험에서 독일을 구할 것이라고 구상한다. “슈미트는 전능한 민주주의 국가의 약점을 명확하게 파악했다”(하이에크, 83). 슈미트의 민주주의 혐오는 오이켄, 하이에크, 뢰프케 같은 신자유주의 선구자들(83, 90, 114)뿐만 아니라, 칠레 군사독재의 후예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다(42). 또 이 강한 국가는 “경제 밖으로의 자진 철수를 개시할 수 있다”(295). ‘경제와 깨끗하게 절연한’ 강한 총체적 국가, 이것이 신자유주의 이론이 슈미트에게 빚진 요소이고,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자유주의와 극명하게 갈라지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의 선구적 이론가 명단에 슈미트를 추가할 수 있을까? 저자들은 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이는 무엇보다 슈미트에 대한 하이에크의 이중적 판단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총체적 국가로의 변환을 비판한 슈미트는 긍정하지만, “모든 규칙과 규범은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으며 그에 걸맞은 유기적 공동체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주장이 “인민 공동체가 유일한 법적 주체를 구성한다는 나치의 교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비판한다(302).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인민공동체가 아니라, “인민이 자유로운 개인주의적 시민사회”이고, 진화의 결과인 규칙과 규범, 곧 시장질서는 그 자체로 자연적이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들의 관점에 따르면, 슈미트는 “’엄밀한 의미의 신자유주의’에 대해 근본적으로 외부자”다(304).
시장질서를 보호하는 법이 私法이다. 하이에크는 “私法의 일반 규범 대 公法의 특수 규칙”의 대립(303)을 상정하면서, 후자를 전자에 종속된 것으로 이해한다. 곧 “민주주의 정부의 행위와 국가의 公法을 헌법에 의해 보장되는 私法이라는 일반 규칙에 종속시키기를 꿈꾼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이에크가 말하는 “법치”이다. 그리고 이 법치주의는 유럽의 여러 조약들을 통해 실현된다(191). 따라서 “법치는 좋은 거 아냐? 법을 남용한다고 법을 부정할 순 없어!”라는 순진한 말은 법이 정치를 대체한 오늘날 미국, 브라질, 한국의 현실뿐만 아니라, 하이에크의 법치 개념 앞에서 설 자리를 잃고 만다. 법의 전략적 사용, 곧 ‘법률전(lawfare)’은 신자유주의 정치에서 일반적이다(270~273). 강한 국가는 법치와 결합함으로써, 인민주권의 실현을 봉쇄하면서도 자신에게 자연의 법칙의 수호자라는 그럴 듯한 사명을 부여한다.
3. 오늘날 극우파의 성격
2008~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0년대 초까지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예고하는 분석들이 한참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당시 출판되었던 『새로운 세계합리성』(pp. 682~683)에서 다르도와 라발은 통치성의 위기를 맞은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는 1938년 월터 리프먼 학술대회에서 우파 학자들의 집합적 아이디어로 등장하기 시작해서, 1973년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 1980년대초 대처와 레이건, 1990년대 제3의 길, 그리고 클린턴 정부가 주도한 세계무역기구 설립 등을 거치면서 현실화되어, 새로운 합리성으로 세계경제질서, 국가정책, 개인 품행 모두를 인도하는 원리로 자리잡게 된다. 그렇다면 2024년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새로움은 무엇인가?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이후 더욱 주목받게 된 신자유주의의 권위주의화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당시 각국 정상들은 스트롱맨들로 채워졌다. 그 전부터 권좌에 있던 푸틴은 차치하고, 에르도르안, 두테르테, 보우소나루, 오르반 등이 집권하면서 노골적 반이민 정서,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을 친시장주의와 결합시키며, 세계화 흐름은 되돌리려 하면서도 복지국가 해체는 지속하려는 정책들을 펼쳤다. 그리고 이에 대한 자국민 일부의 지지도 열성적이었다. 처음 트럼프를 보면서는 “공인이 어떻게 자신의 욕망을 저렇게도 투명하게 다 드러내나” 싶었다. 그러나 그를 대통령으로 뽑고 그에 대한 지지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 기반으로 삼는 이들도 많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저학력 하층계급이다. 하층계급이 어떻게 극우파를 지지하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 저자들은 토마 피케티나 디디에 에리봉의 관점과 합류하는 분석을 제시한다.
좌파는 글로벌리즘에 동조하고, 세계화한 ‘엘리트’로 편입하며 인민 계급의 분노를 키웠다”(195).
미국에서 세계화를 정책으로 추진한 것은 공화당이 아니라, 클린턴의 민주당였고, 여기에 토니 블레어,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이 장단을 맞추었다. 세계화는 도시 엘리트의 삶을 풍족하게 해주었을지는 몰라도 노동계급과 농민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 그런데 이들의 박탈감을 집권 좌파들은 외면했다. 그 당시 미국 민주당이나 영국 노동당을 과연 좌파라고 볼 수 있는가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하고 서유럽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이 해체되었음을 생각해보면 유럽에서 이들의 우경화는 당연한 수순였다. 유력한 사회주의 진보정당이 없던 미국에서는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그냥 넘어가겠다.
하층계급의 상대적 박탈감을 달래줬던 것은 좌파가 아니라 “국민주의적 신우파”였다(198). 자유지상주의자 머레이 로스바드의 반세계화 주장은 트럼프의 고립주의 정책의 전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주권이 상실될 것이라면서, 미국인들의 손에서 결정권을 빼앗아가는 ‘국제주의적 초국가 기관’이 설립될 것이라며, NAFTA 철폐, 모든 종류의 초국적 기구(UN, ILO, UNESCO 등) 탈퇴, 개발원조 중단, 이민 제한이 필요하며, 이 모든 것이 진정한 자유시장 구현에 필요하다고 주장한다(199). 그는 자유를 사회적 상호의존관계 및 개인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감내하지 않아도 될 권리로 보면서 ‘탈사회주의화’를 슬로건으로 채택한다.
로스바드의 이 반세계화 국민주의 수사는 오늘날 정확히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새롭게 민주당 후보로 지명된 카멀라 해리스는 과격한 급진파이고, 그녀가 당선되자마자 미국 경제는 망하고, 제3차 세계대전이 발생할 것이라는 호들갑이 정말이라고 믿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가난하고 무식하고 촌스럽다고 무시할 수는 없다. 이들이 무식한 게 문제가 아니라, 하층계급의 마음을 못 사는 진보적 좌파가 무능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저자들은 우파의 이 성공을 “신자유주의가 독(유대관계 해체, 사회적 불평등, 경제적 불안정)과 해독제를 동시에 만들어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해독제란 “규범을 준수하고 국가의 권위를 존중하는 착한 시민인 ‘우리’”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어내고, 주권 국가를 다시 이상화하며, 개인적 자유를 급진적으로 추구하게 하는 것이다(221~222). 값싼 제품을 수출함으로써 ‘우리’ 기업과 ‘우리’ 일자리를 없애는 중국이건, ‘우리’나라 국경을 불법월경하는 멕시코이건,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이 적들과 싸워야 한다.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도 문제다. 그들은 외부의 적였다가 내부의 적이 된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일 수도, 서구 기독교 문명을 위협하는 낙태, 동성결혼 찬성론자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후퇴를 걱정하는 시민들 모두에게 사회주의 급진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으며 철지난 매커시즘의 수사가 다시 동원되기도 한다.
이 극우정치의 대두를 뭐라고 규정해야 할까? 그 전에 그것은 무엇이 아닌 지부터 먼저 보자. 첫째, 이를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이라고 볼 수는 없다. 파시즘과 신자유주의는 일종의 ‘사회진화론’을 공유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사회 진화론은 파시즘처럼 “군사 전쟁이나 영토 복속을 추구하지도 않고 열등한 종의 제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291). 또 “모든 개인을 하나로 녹여내어 ‘인민공동체’로 집결시킬 필요”도 없다. 그리고 트럼프의 예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파시즘이 조직의 근간로 삼고자 했던 “체계화된 대중 조직”은 오히려 혐오의 대상이다.
트럼프는 개인을 찬양하고 공동체와 이성, 전체의 이익보다 개인을 우위에 두며, 개인의 자유, 자발성, 선택, ‘잠재력’을 발휘하여 최고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는 모든 것을, … ‘탈규제화된’ 사적 자유를 거의 자유지상주의에 가까운 방식으로 옹호한다”(292).
둘째, 같은 논리로 ‘우파 포퓰리즘’이라는 말도 적절치 않다. ‘포퓰리즘’은 ‘하나의 인민을 구축하는 것’인 반면, 오늘날 극우정치는 이들을 분할한다. 곧 “인민계급 일부가 노동자 운동의 모든 성과와 복지국가, 노동법, 노동조합에 등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저자들은 1930년대 이래 강한 국가 정당화 논리의 등장부터 최근까지 신자유주의 전략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이 전략의 두 특징을 지적한다(318~319). 첫째, 현재의 신자유주의는 다소 진보적인 ‘글로벌리즘 신자유주의’와 반동적인 ‘내셔널리즘 신자유주의’로 양분된다. 둘째, “이러한 두 신자유주의 분파의 가치 전쟁 속에서 인민은 자기 자신에 대항하게 된다”(319).
두 번째 지적이 더 흥미로운데, 이 부분에서 저자들은 푸코의 “자기경영하는 주체” 개념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자기 자신을 가치화하는 경제”에서는 “개인이 무엇을 했는지보다 그가 약속할 수 있는 미래의 능력치가 더 중요하다”(237). 실패는 개인의 책임이고, 사회에는 책임이 없다. 성공을 위해서 믿을 것은 자신밖에 없다. 이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개인이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과 불가분한 것으로 드러난다.”(239) 한 사회 내의 내전이 개인 안의 내전으로 더 깊게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개인은 그 전쟁에서 전사의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자신의 적 노릇까지 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 경영자는 자신을 적으로 삼도록 강제된다”(239).
사태가 여기에 이르면, 이제 저자들이 그리는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변모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것이 태동하던 1930년대에 신자유주의는 민중을 개돼지로 보는 대중혐오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2020년대 오늘날 이 신자유주의 합리성은 공정한 경쟁과 능력주의를 미덕으로 삼으며 빈곤청년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간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부모의 가난과 자신의 능력부족을 탓하며, 자신과 가족을 혐오하게 만든다. 사회는 내전 중이고, 이 전쟁은 가족 안에서도, 개인의 마음 속에서도 진행된다. 결국 신자유주의의 역사란 엘리트의 대중혐오에서 대중의 자기혐오에 이르는 승리의 역사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너무 악의적인 일반화일까?
4.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신자유주의 내전에 맞서, 민주주의와 사회적 평등을 옹호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먼저, 신자유주의 통치성이 내면화시키는 경제와 정치는 바꿀 수 없는 운명의 영역에 놓여 있는 것이라는 주술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를 슈미트의 말을 빌려 ‘기초 결정’ 혹은 ‘제헌적 결정’이라고 부른다. 이 말을 대처는 아주 쉽게 “대안은 없다”라는 말로 바꿨다. 대안이 없다면 정치도 없다. 그러나 정치는 있고, 정치가 있다는 것은 가능성의 영역이 있다는 말이다. 정치적 협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공통의 사안’이며, 저자들은 이를 ‘커먼스(commons)의 영역’이라고 부른다.
저자들은 레닌 이후의 2단계 전략, 곧 혁명을 통해 먼저 국가를 바꾸고, 그 다음에 세계를 바꾼다는 고전적 전략을 폐기한다.
국가는 결코 피지배자의 ‘무기’가 될 수 없다. 급진적으로 비국가적인 정치, 즉 커먼스의 정치만이 시장의 영향력과 국가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오직 인민의 혁명만이, 시민들에 의해 전개되고 통제되는 혁명만이 신자유주의적 내전 전략에 대항할 수 있다”(326).
저자들은 파리 코뮌이 내전에 대항한 혁명였음을 주지시키면서, 제도화된 실천이 아닌 ‘탈제도화된 힘’의 구성을 주장한다. 이들은 과거 좌파의 노동자 중심성, 보편정당, 해방 주체의 형성 등이 이제는 낡은 것이 되었다고 진단하면서도, 우파 포퓰리즘을 미러링하는 것에 불과한 좌파 포퓰리즘(무페)이나 페미니즘이나 인종정의 운동 일부에서 보이는 “정체성 물신주의”도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주장은 단순하다.
오직 하나의 전략이 있을 뿐이다. 모든 분야에서 평등을 우선으로 하는 모든 요구를 결집하는 것이다”(333).
아… 그런데 여기서 좀 맥이 빠진다. 기대가 너무 컸을까? 방향은 대략 공감할 수 있지만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작은 모델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신자유주의 내전에 대한 혁명 전략으로서 커먼스의 실천적 사례들에 대한 저자들의 생각이 좀더 익어가기를 응원해본다.
5. 푸코가 가지 않은 길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다. 사실 제일 쓰고 싶은 말은 이거다. 나는 저자들이 푸코가 가지 않은 길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 통치성 개념에 기반한 최근의 연구들은 주로 『생명관리정치의 탄생』(1978~79) 9~12강의 주제인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의 호모 에코노미쿠스 논의를 『감시와 처벌』(1975)의 규율권력이나 “옴네스 에트 싱굴라팀”(1979)의 사목권력 논의에서 다룬 행위의 인도(conduct of conduct)로서의 품행에 대한 규율과 연결시켜 다뤄왔다. 그런데 이들 논의에서 국가와 사회의 형상은 주변화되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이 통상적 흐름과 달리, 저자들은 별 주목을 받지 못했던 『처벌사회』(1973)의 “내전” 개념과 “니체, 계보학, 역사”(1971)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1978~79) 7강에 등장하는 “법치” 또는 “법의 지배” 개념을 통해 국가와 사회의 형상을 재조명했다.
푸코는 1979년 이후 자기와 타자에 대한 통치의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반면, 저자들은 바로 그 문제를 푸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오늘날의 시점으로 끌고 온다. 이제까지의 푸코 연구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점이 이 저작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오랜만에 읽은 푸코 관련 저작인데, 만족스러웠다. 이 저자들의 다른 저작들도 한국어로 속히 번역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덧.
2008~9년 글로벌 위기에도 신자유주의가 죽지 않았듯, 2021년 미 국회의사당 점거 진압에도 MAGA 정치를 앞세운 트럼프 열풍은 계속되고 있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극우 세력들이 약진하고 있으며, 보수당의 우경화가 가속화된다. 그 와중에 2024년 올해 영국에서는 오랜만에 노동당이, 프랑스에서는 신인민전선(NFP)이 우익의 집권을 막았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영국에서는 무슬림 축출을 주장하는 극우파의 과격폭력 시위가 진행 중이고, 올림픽을 핑계로 마크롱이 총리 지명을 미룬 프랑스도 향후 어떤 양상이 전개될 지 미지수다. 올 11월 미국 대선도 그렇다. 한국은? 현 정권이 자유민주주의의 적으로 공산전체주의 운운할 때보다 총선 이후 수그러든 것도 같지만, 대통령 거부권은 계속 행사되고, 극우인사들이 계속 기용되는 것을 보면 걱정이 앞선다. 그리고 국회에서 사라진 정의당의 빈 자리가 크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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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24-08-06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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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눈물로 쓴 신 자유주의의 회고回顧 > feat. 2024 두 번째 별만점 신간
FATMAN의 공식 북 리뷰 시리즈 101-24-18 내전, 대중혐오, 법치, 피에르 다르도 Pierre Dardot 외 저, 2024 ★★★★★
아..학문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완전히 파헤친 역작! 올해 읽은 책 중에 두번째로 완벽하네요! 강력 추천합니다.
(자세한 리뷰는 프로필 링크나 아래의 링크 참조 바람.
https://m.blog.naver.com/fatman78/223388438278)
2. 저자의 의도
이번 신간, “내전, 대중 혐오, 법치.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는 프랑스 신 좌파의 산실, 파리 낭테르대학 소속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 연구 그룹(GENA)” 멤버들이 펴낸 일종의 연구 총서격인 저서이다. 대표 저자인 피에르 다르도 Pierre Dardot 와 크리스티앙 라발 Christian Laval 은 이미 지난 2009년도에 “새로운 세계합리성”이라는 저서로 신 좌파 진영의 지지를 이끌어 낸 바 있는 최전선의 학자들이다. (우리 나라에는 2022년에 소개된 바 있다.)
신 자유주의가 우리를 향해 자신들의 사상을 정립하고, 우리의 삶을 재정의하려 그들만의 학회를 열었듯이, 이 대륙 출신들의 신 좌파들도 대열을 정비하고 비로소 “적”을 규정하는 작업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양극화”의 주범으로 신자유주의를 공고히 지목하고, 현재 우리의 일상이 무너진 근본에는 그것이 어떻게 작동했는가를 낱낱이 파악하여 기록한 그 책으로 진보 진영의 담론에서 일시에 주목을 이끌어낸다. - 역시 싸움에는 피아식별이 중요한 법! -
이번 신간에서 다르도는 지난 명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현재의 상태를 “내전”으로 규정하며 이미 철이 지난 신자유주의의 망령이 왜 아직도 우리 삶에서 떠나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어진 담론으로 연결하고 있다. 또한 세계 각국에서 나타나는 정치 혐오증 내지는 편협한 포퓰리즘 - 극우의 성향을 띈 - 의 만연에 수구 기득권 세력들의 이른바 신자유주의로 포장한 맹공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그들의 민낯을 우리에게 고발한다. - 그들(기득권)은 사실 신자유주의의 주장에는 관심도 없다. 그저 대중들을 기만하기 위한 도구일 뿐. -
게다가 입법부(의회) 장악으로 그들의 목적을 위해, 민주주의의 가장 근간인 “법치”를 역으로 활용하여 어떻게 우리의 삶을 그들의 의도대로 바꾸는지를 그동안의 많은 정치적 사건들과 경제적 사안들로써 독자들에게 고하고 있다. 거기다 전 세계적으로 관찰되는 권위주의 정권의 경우도 포괄하여 이들 모두 대중들의 믿음에 반해 권력을 획득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세력들 - 주로 경제적 이득을 바라는 자들 - 과 결탁하여 지금의 정치적 대혼란을 불러오는지 마져도 큰 흐름에서 다루고 있다.
* 세 줄 요약평.
1. 신자유주의는 시작부터 “부도덕”했고, 법마저 유린했다.
2. 그들의 만행은 우리를 무제한적인 경쟁으로 몰아넣은 것뿐 아니라, 그들의 목적을 위해 정치적으로 우릴 타락시켰다.
3. 따라서 지금은 신자유주의와의 “내전”상태이며 우리는 이에 적과 맞서 근본적으로 싸울 준비가 되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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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 2024-03-19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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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 대한 주권자들의 행동 지침서
지난 10여 년간 영화판을 좌우했던 마블 시리즈 중 <시빌 워>의 한 장면은 너무나도 인상적으로 남아있습니다. 공항 활주로를 횡단하며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 맨을 필두로하는 두 개의 편으로 갈린 히어로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서로의 동료였던 상대편에게 효과적(!)으로 사용하며 그야말로 전쟁을 벌이는 장면입니다. 이들의 내전 (Civil War)의 이유는 ‘초인 등록법’, 다시 말해 히어로들의 개별 행동과 통제되지 않은 활동으로 크고 작은 피해가 시민 사회에 초래되니 이제라도 정부 공권력의 통제권 아래 이 히어로들을 두겠다는 것인데, 캡틴 아메리카는 반대했고 아이언 맨은 찬성의 입장이었습니다.
“법의 우위를 인정함으로써 폭력을 중단하는 것이 정치라면, 내전은 투키디데스가 말한 대로 ‘열광과 복수를 하나로 뒤섞는 분노와 폭력의 무원칙한 분출이다. 상기와 같은 반명제들은 그것의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신자유주의에 접근하는 길을 막는다.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정치가 극악한 폭력의 사용을 완벽하게 수용할 수 있으며, 내전이 법을 수단으로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p.10-11. 서문 중>
<시빌 워>의 히어로들이 편먹고 싸웠듯, 우리의 역사에서도 복잡다단한 근대사회를 지나며, 우리의 국가 사회 내에는 저마다의 가치와 이익으로 찬반이 갈리거나, 특정 무리들의 가치에 반하는 정부의 정책 등에 반대하는 불복종 행위가 촉발, 확대되면서 국가 외부의 적과 충돌인 전쟁의 상대 개념인 내전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이것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국가의 정치기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지배 유지를 위해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벌이는 현장으로 변모하게 유도하는 경우도 있다고 책은 말합니다.
번역판의 제목 <내전, 대중 혐오, 법치>와 달리 책의 원제 <LE CHOIX DE LA GUERRE CIVILE - Une acutre histoire du neoliberalisme>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THE CHOICE OF CIVIL WAR - Another History of Neoliberalism> 즉, <내전의 선택 - 신자유주의의 다른 역사>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내전이라는 전략을 선택하여 역사적으로 어떻게 나아왔는가를 보여주는 책의 이야기 줄기를 이해하는데 나름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듯 합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신자유주의자에게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대중으로 이해되는 인민의 권력을 제한할 것인가? 루지에의 답은 명확하다. 새로운 ’귀족‘에게 권력을 양도해야 하며, 대중으로부터 분리된 정치적 권력기관을 세울 수 있는 ’통치의 기술‘을 정립해야 한다.”
<p. 73-74. 2장_신자유주의 대중 혐오. 중>
그렇게 자라난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그 세력을 공고히 해나갈지에 대한 고민의 역사와 전략들을 차근차근 역사와 정치철학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 빌드 업해서 보여줍니다. 그중 큰 변곡점이 되는 ‘대중 혐오’에서 그들의 두려움과 이에 대한 극복의 방법들의 실례들을 들어 제시해줍니다. 능력주의, 극우파의 출현과 보수주의의 부상, 법치, 인종주의 등의 반평등 기조, 대중의 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의 치밀하고 강한 내전 전략들에 어떻게 세상이 좌지우지 되어왔는지를 돌아보며 그 낙관적이지만은 않은 미래를 전망합니다. 그리고 대항해서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할 액션플랜을 제시하며 책은 마무리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민주주의적 정치 활동을 막는 모든 장애물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 장애물은 많다.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문화적 불평등, 과두제에 지배받는 정당 간의 파괴적인 경쟁, 정치 활동의 활력을 빼앗으면서 민주주의의 의미를 탐색한다고 주장하는 의회주의와 선거지상주의... (후략)”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대한민국 제22대 총선. 이 핵분열과 핵융합의 과정 같은 시간 속에서 여지없이 대중을 편 가르고 기득권 정치와 거대 양당정치, 엘리트 정치와 법치라는 이름의 폭압적 행태들을 또다시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책 <내전, 대중 혐오, 법치>는, 앞으로도 한동안 우리 공동체를 내전의 양상으로 몰고 갈 그 신자유주의자들의 들켜버린 마음을 담은 비책이자, 그런 법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억압적 대중 혐오의 내전 전략을 대하는 우리 주권자들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담은 지침서가 될 수 있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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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ction05 2024-03-10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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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대중 혐오, 법치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
‘내전’이라 하면 왠지 이런 그림을 떠올릴 것 같지만, 여기서 말하는 내전은 좀 더 포괄적이다. ‘서로 다른 사회적 이해 당사자들 간의 경쟁, 특히 계급 투쟁’이라고, 저자들은 내전을 이렇게 정의한다. ‘시장’이라는 하나의 정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신자유주의는 ‘내전’이라는 전략을 사용한다. 그것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유혈 사태로 번지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내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사회 내부의 두 세력 간의 충돌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자유’의 이름으로 ‘평등’과 맞서는, 신자유주의의 주요 전략에 따른 결과이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그리고 최근의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지만, 저자들은 여러 장을 할애하며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의 지배 전략을 ‘내전’과 ‘대중 혐오’, ‘법치’라는 키워드로 이야기하며, 이를 타개할 새로운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1973년, 칠레의 장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쿠데타를 일으켜 살바도르 아옌데의 좌파 정부를 전복시키고 최초의 신자유주의 정부를 수립한다. 피노체트는 ‘법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권력’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권력 찬탈을 정당화했고, 노조의 권리를 엄격히 제한하고 전면적인 민영화를 추진하는 등 파격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했으며, 이윽고 1980년 개헌을 통해 국민주권마저 빼앗고 만다. 흔히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개념으로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독재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밑바탕에 깔고 있기에 가능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여론의 지배, 혹은 우매한 대중을 위험 요소로 여겨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떻게 대중의 권력을 제한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 해답으로 ‘강한 국가’의 필요성이 등장한다. 여기서 강한 국가는 대중의 요구를 차단할 수 있는 초월적 국가를 의미한다. 따라서 독재나 국가 폭력과 같은 수단도 때로는 정당화될 수 있으며, 시장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사법(私法, droit)을 헌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인식대로 자유시장경제를 신봉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부의 적(敵)을 규정하여 사회 내부의 계층 간 전쟁을 종용한다. 가령 2019년 프랑스에서는 ‘노란 조끼 운동’이라는 임금 인상과 간접세 인하 등 평등에 대한 요구를 무자비한 탄압으로 응했고, 언론과 정치권은은 이들에 대한 비방과 낙인 찍기를 통해 대중에게 공포심을 조장했다. 이는 비단 프랑스뿐만이 아닌 전 세계에서 관찰되고 있는 현상이다.
현대의 신자유주의는 일부 엘리트 계층이 적과 싸우는 데서 나아가 대중의 일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갈등의 장으로 뻗어나갔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쉽게 관찰되고 있다. 가령 세대 갈등이라던가 성별 간의 혐오, 좌우 진영의 대립, 능력주의의 맹신 등이 있다. 이러한 갈등의 주체들이 서로의 이해 관계를 수용하고 조정함으로써 내전은 평화롭게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러한 갈등을 조장하는 주체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에 익숙지 않다면 매우매우 어려운 책이다.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했다고는 생각지도 않고, 아마도 잘못 이해하고 서술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조금은 와 닿았다.
“낡은 것은 갔는데 왜 새것은 오지 않는가?”
의미심장한 말이다. 신자유주의는 종식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인류를 일정한 방향으로 조종해 왔고, 그 과정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과연 이 시대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들이 이 두꺼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대한 대항, 좀 더 그럴싸하게 말하자면 ‘혁명’이다.
22대 총선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 우리는 뉴스를 통해 다양한 편 가르기를 목도하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반발로 의료 서비스에 차질이 생긴 지금도,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은 표를 모으기 위해 서로를 헐뜯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작게는 우리가 가진 소중한 권리 행사로, 크게는 지배층의 엉큼한 속내를 깨닫고 휘둘리지 않는 것으로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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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승 2024-03-19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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