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11

[사람 속으로]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을 말하다 - 중앙일보

[사람 속으로]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을 말하다 - 중앙일보

[사람 속으로]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을 말하다
[중앙일보] 입력 2013.08.31 01:10 수정 2013.08.31 01:21 | 종합 14면 지면보기PDF인쇄기사 보관함(스크랩)글자 작게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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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 미 시카고대 석좌교수. 한편으로는 6·25전쟁을 소재로 한국학의 연구 수준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질적인 이념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은 2013년 현재 6·25전쟁은 형식을 달리하며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이념분쟁은 대개 ‘역사 전쟁’의 모습으로 전개된다. 한국사 교과서의 현대사 서술을 둘러싼 좌·우파 분쟁이 몇 해째 벌어지고 있다. 6·25전쟁의 원인 규명은 6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갈등의 핵이다. 그런 분쟁의 한가운데 있는 인물이 브루스 커밍스(70)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다. 1943년생인 그가 30대 후반이던 81년 펴낸 『한국전쟁의 기원』이 진원지다. 최근엔 진보 성향 매체에 주로 소개되고 있지만 80년대 그의 영향력은 광범위했다. 6·25전쟁 관련 토론회에서 그는 30년 넘게 주요 연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해 친북적으로 쓰려는 의도 전혀 없었다
남한이 전쟁 유도? 내가 그런 주장했다는 건 중상모략

 ‘정전60주년 한반도평화대회 국제포럼’ 참석차 28일 방한한 그를 아산정책연구원(원장 함재봉) 비공개 라운드테이블에서 만나 전격 인터뷰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한국학의 연구 수준을 높였다는 소리를 듣는다. 다른 한편으론 고질적 이념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국 지식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1950년 6월 25일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는 신화는 그로부터 출발한다. 남한에서만 2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며 ‘제3차 세계대전’이라고까지 불리는 전쟁의 발발 원인을 모호하게 만들어 놓았다. 80년대 반미 구호를 내건 급진 이념운동에 학술적 근거를 제공한 이도 그였다.



 냉전이 끝나고 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며 6·25전쟁 연구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면서 ‘커밍스 신화’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소련의 스탈린과 북한 김일성의 긴밀한 협의 아래 전쟁이 일어났음이 확인된 것이다. 하지만 냉전시대에 형성된 그의 신화의 힘은 탈냉전 시대에도 깨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이날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전쟁의 기원』은 소련 비밀문서가 나오기 이전의 저술임을 인정하면서 북한의 남침 사실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남한에선 한국전쟁에 대해 ‘진짜 역사’를 연구할 수 있지만 북한에선 그게 불가능하다”며 “북한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억압적인 국가”라는 말도 했다. “누군가 내 책이 친북한 성향이라고 주장한다면 내 유일한 대답은 나는 친북한적으로 쓰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고 나는 단지 참혹한 전쟁에 대한 진실을 전달하려 했을 뿐”이란 말도 주목할 만하다.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이다. 하지만 ‘6월 25일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본래 입장까지 바꾸지는 않았다.



  - 2000년대 이후 커밍스 교수는 주로 진보 성향 매체에 소개되고 있는데, 그 배경이 뭘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예컨대 경향신문이 나보고 기고문을 써달라고 하고 도쿄의 아사히신문도 써달라고 한다. 이런 신문에 글을 쓰는 이유는 기고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할 이유가 없다. 다만 요청을 받아서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 한다. 미국은 8년간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경험했다. 나는 때로 워싱턴의 브루킹스연구소나 카네기연구소 등에 가서 특강을 하는데 부시 정부 시절에는 아무도 나를 초대하지 않았다. 부시를 비판하려는 의도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단순화하자면 누군가 기고를 요청하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젊을 때는 요청을 받기 전에도 신문에 기고문을 보냈다가 거절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 중앙일보에서 요청을 한다면.



 “기꺼이 하겠다(I will be happy to).”



 - 한국사회에서 6·25전쟁을 둘러싼 이념 갈등이 있고 그것은 ‘역사 전쟁’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사 교과서의 6·25 서술을 놓고 좌·우파 갈등이 벌어진다. 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인데 오히려 북한에 대해 따뜻한 시선으로, 한국에 대해선 차가운 시선으로 서술하는 경향이 문제가 되고 있다. 역사 전쟁에 커밍스 교수도 책임이 있다고 보는데, 이런 글쓰기의 출발이 커밍스 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아닌가.



 “내가 『한국전쟁의 기원』을 쓸 때 북한 사람들은 물론 자유롭게 역사의 진실에 대해 쓸 수 없었고 북한은 지금도 그렇다. 당시엔 남한에서도 마찬가지로 내가 쓴 것처럼 인민위원회나 노동당 등에 대한 내용을 전혀 쓸 수 없었다. 만일 쓴다면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역사연구와 한국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여는, 가능한 한 많은 역사적 진실을 밝혀내서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진실이 어떤 경우에는 북한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남한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다. 그런 점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이 일본에서 지난해 번역 출간됐는데 조총련에선 자기네 매체에 그 책의 사진을 실었다. 나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한국은 분단 국가고 만일 한쪽에서 내 책이 도움이 되고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온정적이라고 한다면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 책이 친북한 성향이라고 주장한다면 내 유일한 대답은 나는 친북한적으로 쓰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고 나는 단지 참혹한 전쟁에 대한 진실을 전달하려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남한은 이제 북한에 비해 훨씬 강력한(much stronger) 나라가 됐다. 그렇다면 북한에 대해 온정적 시선도 감당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북한은 고립됐고 두려워하고 생존에 급급한 실정이다. 분명한 사실은 남한에선 한국전쟁에 대해 ‘진짜 역사’를 연구할 수 있지만 북한에선 그게 불가능하다.”



 - 81년 나온 『한국전쟁의 기원』은 충격적이었다. 50년 6월 25일에 ‘누가 먼저 사격했는가’를 찾지 말라고 썼다. 6·25 당일 북한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전면전을 일으켰는데 마치 단순한 사격전인 것처럼 묘사한 것은 대규모 전쟁 발발의 의미를 지나치게 작게 표현한 것 아닌가.




“분명한 사실은 남한에선 한국전쟁에 대해 ‘진짜 역사’를 연구할 수 있지만 북한에선 그게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
 “당시 북한은 소련에서 구입한 탱크가 있었다. 소련은 북한에 탱크 구입을 승인했다. 미국은 남한에 탱크 판매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유는 미 국무부가 이승만 정부와 국군 장성들에게 탱크가 있다면 북한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탱크와 비행기를 팔지 않는다는 방침에 대해선 비밀문서에서 확인이 됐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이슈다. 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탱크 공격에 남한은 방어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남한의 방어력 상실에 대해 책임이 있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의 생각은 남한의 국군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격용 무기로 무장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한이 도발하지 않았는데도 북한이 공격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는 논리적인 함축이 담겨 있다. 그런 경우 미국이 남한을 방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탱크에 대해 얘기했지만 나는 지뢰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미국은 남한이 북한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공격용 탱크를 주지 않고 방어용 지뢰를 제공했다. 그러나 국군은 지뢰를 설치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뭘까. 공격용 진출로 확보를 위해서다. 이 모든 것들은 매우 복잡한 문제다. 나는 이런 사실들을 밝혀냈다. 그것은 소련 측 문서가 나오기 전까지 상황이다. 연구를 마치고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을 출간한 것은 90년이다. 그때는 소련이 붕괴하기 전이었고 소련 측 문서를 이용할 수 없었다. 이것이 당신의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당신이 말한 부분에 대해 나는 내 생각을 전혀 바꾼 적이 없다(I haven’t changed my mind at all). 전쟁의 시작은 전쟁의 기원에 비해 여전히 덜 중요하다(The start of the war is still less important than the origins of the war). 48년 5월부터 50년 6월까지 옹진반도나 개성의 상황을 살펴본다면 거기에 6·25 전쟁의 기원이 있었다.”



 - 소련 비밀문서를 통해 6·25전쟁의 원인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소련 측 문서는 전쟁이 어떻게 발발했는지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물론 내 책에는 소련 측 문서가 포함되지 않았다. 내 책과 소련 측 문서는 약간 차이는 있지만 서로 상충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전쟁이 6월 25일 시작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6월 25일 시작됐다고 하면 모든 다른 이슈가 사라져버리고 만다. 사람들은 단지 ‘악(evil)의 북한’이 침공했고 우리는 이런 비극을 당할 이유가 없으며 미국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정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전쟁의 시작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역사학적 질문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질문이다.”



 -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이른바 ‘남침유도설’이 한국의 지식사회에 끼친 영향이 큰데, 남침유도설의 진원지가 커밍스 교수 아닌가.



 “나로선 솔직히 웃기는 얘기다. 『한국전쟁의 기원』 1권은 81년에 출간됐는데 47년까지의 역사만 다루고 있다. 그 책에선 6·25전쟁의 시작에 대해선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커밍스가 남한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전두환 정권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이 중상모략을 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다. 그리고 2권이 90년에 출간될 때는 타이밍이 별로 좋지 않았다. 1년 뒤에 소련 측 문서가 나왔다. 거기엔 스탈린과 김일성이 남침을 공모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시 나는 다른 책을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비난받는다는 것에 대해선 우습다고 생각한다. 1권과 2권은 모두 33장으로 돼 있는데 그중 하나가 전쟁의 시작에 대한 것이다. 거기에는 불충분한 정보(imperfect information)를 토대로 모자이크한 3가지 전쟁 발발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다. 그 장의 전체적인 요점은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는지 더 이상 묻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신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규명하려고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누가 전쟁을 시작했느냐’는 질문 자체를 해체하려고 했다. 그것은 좀 전에 언급한 대로 이데올로기적 질문이기 때문이다.”



 - 소련과 북한의 긴밀한 협의 아래 전쟁이 발발했다고 정리해도 되겠나.



 “50년 1~2월이 되자 스탈린이 마음을 바꿨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공격 계획에 동의했다. 그러면 전쟁이 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소련 측 문서에서 이런 얘기들이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그래. 커밍스가 틀렸다. 트루먼과 애치슨이 맞았다. 스탈린이 시작 버튼을 눌러서 전쟁이 시작됐다’고 했다. 그 후 시간이 흘렀다. 소련 측 문서가 추가로 나왔다. 이제 더욱 전체적인 그림을 얻을 수 있게 됐다. 많지는 않지만 중국 측 문서도 일부 나왔다. 시간이 갈수록 전쟁에 대해 더욱더 전체적인 그림을 얻을 수 있게 됐다.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역사는 변한다(History changes). 역사는 결코 같은 곳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It never stays as same). 새로운 문서가 추가로 공개되면 역사적 관점이 달라진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해선 전쟁 전에 미국 정보기관이 수집한 북한 측 첩보 관련 문서가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 미국은 6·25 전쟁 전에 남한에서 최소한 14곳의 감청 기지(listening station)를 운영했다. 미국은 해안선을 따라 정찰기를 띄워 북한을 정찰하면서 정보를 수집했다. 이런 항공정찰이나 첩보 관련 문서들이 아직까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전쟁 직전 수만 명의 북한 군대가 38선을 향해 이동 중이었다면 미국이 그것을 보지 못했을까?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기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까. 북한과 관련한 대형 문서저장고 한 곳이 여전히 완전히 차단돼 있다. 언젠가 북한이 민주화되거나 붕괴되거나 한다면 이곳의 문서도 공개될 것이다. 이런 모든 관점이 종합되면 한국전쟁 당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더욱 전체적인 역사적 그림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 『한국전쟁의 기원』 1권에서 당신은 “정치적 위기에는 아무도 중립을 지킬 수 없으며 순수한 객관은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남한과 북한에서 각기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지던 시기의 혼란과 6·25전쟁보다 더 격렬한 정치적 위기는 없을 것이다. 그 시기에 대해 쓰는 역사가의 자세, 서술의 방식에서 중립이나 객관이 가능한가.



 “대답하기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책에서 말한 것은 위기 상황에선 이쪽도 보고 저쪽도 보는 객관적인 입장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술의 데칼코마니처럼 남한과 북한을 정확히 절반씩 나눠서 남한은 어떻고 북한은 어떻고라고 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냉전으로 인한 왜곡이 심했다. 미국에서도 50년대 초반에 매카시즘이 유행했고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한국에서도 70년대, 80년대는 비슷한 상황이었다. 더 어려운 문제가 있다. 북한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북한은 강제수용소에 수많은 사람들을 가둬놓고 있는가. 그렇다. 김정은을 앞에 나오도록 해서 인민들이 찬성과 반대를 놓고 투표를 하는가. 아니다. 북한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억압적인 국가다. 하지만 북한에 대해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북한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 북한이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지만 미국도 마틴 루서 킹이 활동하던 60년대까지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다. 당시엔 심각한 폭력을 써서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종을 탄압했다. 60년대 미국 앨라배마였다면 (지금 인터뷰를 하는) 이 방에 있는 사람들 중 나를 제외하고 유색인종용 음수대에서 물을 마셔야 했을 것이다. 피터 노빅(Peter Novick)은 『That Noble Dream: The ‘Objectivity Question’ and the American Historical Profession』이란 책을 썼다. 객관성에 대해 지금까지 내가 읽어본 최고의 저술이다. 인간은 객관적이고 싶어 하는 ‘고상한 꿈(noble dream)’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것이 내 대답이다.”



 - 북한의 친일파 청산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최근 연구를 보면 북한 김일성 정권의 초대 내각에 친일파가 많이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나도 그 부분에 대해 글을 썼다. 당시에도 알려져 있었다. 북한은 40년대 후반에 일제에 협력한 기술자(technician)들을 활용했다. 그들을 기술자라고 봐야지 친일파라고 할 순 없다. 북한은 특히 경찰 출신 친일파들을 청산했다. 일제 지배 기간에 가장 미움을 받은 사람들이다. 북한은 그 가족들에 대해서도 친일 경찰 가족이란 낙인을 찍었다. 따라서 친일 경찰의 자손들도 차별을 받았다. 김정일이 90년대 후반에 결국 폐지하기 전까지 차별이 지속됐다. 나는 그것(친일 경찰 가족에 대한 차별)에 동의할 순 없지만 이해할 순 있다. 어쨌든 북한은 방법론에서 잘못되기는 했지만 그것을 실행했다. 북한 정권을 친일 정권이라고 표현할 순 없다. 북한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스탈린이 반일 정권을 원하고 친일파 청산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 남한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 미 군정 통치에는 실책과 어리석음이 대단히 많았다. 군대와 경찰을 보면 전부는 아니라 해도 일제의 군대·경찰 출신이 대부분 등용됐다. 예전에 레너드 버치(Leonard Bertsch, 미 군정청 정치고문)에게 친일파를 어떻게 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우리는 원래 자리로 복귀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대단히 미국적인 사고방식이다. 크림은 맨 위로 올라오게 마련이란 식이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제 치하에서나 미군정에서나 위로 올라온다는 얘기다. 남한은 반일적인 수사(rhetoric)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문제를 미해결인 채로 끌고 가게 됐다. 그리고 사실 친일파라는 낙인은 지나치게 광범위하다. 만일 일제 시대 법원에서 판사로 일했지만 한국인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친일 부역자라고 말할 수 없다. 남한에선 누구를 친일파로 볼 것이냐에 대한 논의가 지나치게 광범위하다.”



 - 90년대 이후엔 토지개혁에 대한 연구도 새롭게 나와서 남한의 토지개혁이 굉장히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6·25 전쟁 당시 밑으로부터의 민중 봉기를 억제하는 힘이었고 박정희 대통령 이후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됐다는 얘기다.



 “토지개혁이 전쟁 후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 것은 확실하다. 일본, 남한, 대만에서 토지개혁은 50~60년대 농업 생산성 향상에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질문의 앞부분에 대해선 반대 입장이다. 전쟁 이전에 토지개혁이 이뤄져서 남한 농부들이 북한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전쟁 이전 남한에선 진정한 의미의 토지개혁이 없었다. 하지만 전쟁 후에는 남한과 월남을 비교한다면 남한에선 토지개혁이 이뤄져서 농민들이 더 이상 좌익에 동조하지 않고 수확에만 관심을 가졌다. 월남에선 토지개혁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이것이 75년 월남 패망의 원인이 됐다.”



 - 『한국전쟁의 기원』이 출간되던 81년 북한을 방문했다. 당시 북한과 오늘의 북한을 어떻게 보나.



 “81년 8월에 북한에 갔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보니 내가 쓴 책이 집 앞에 놓여 있었다. 우편으로 도착한 것이었다. 나는 북한에 가기 전에는 책의 완성본을 보지 못했다. 내가 북한에 있는 동안 출판사에서 일을 진행했다. 당시 북한의 경제는 상대적으로 좋았다. 북한을 2주간 방문하기 전에 중국을 1주간 방문했었다. 당시 중국은 북한에 비해 훨씬 가난한 나라였다. CIA 보고서에 따르면 70년대 후반까지 남한과 북한의 국민소득은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 내가 보기에 적어도 농촌 지역에선 그것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80년대 중반 이후 남한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 후엔 남한과 북한은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북한 경제는 80년대 후반부터 정체된 상태였고 90년대 들어 위기를 맞았다. 90년대엔 소련이 무너졌고 중국의 도움도 줄었고 대홍수가 발생했고 김일성이 죽었다. 이 모든 것이 북한 경제위기의 원인이 됐다. 하지만 80년대 후반에 북한 경제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했던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나는 한국 전문가를 자처하지만 어떻게 남한이 그렇게 잘했는지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삼성이 소니를 추월해서 애플의 강력한 경쟁자가 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놀랍다.”




 - 박근혜정부 들어 북한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인다. 개성공단 재가동,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대화에서 조금씩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 박근혜 대통령은 전임 이명박 대통령에 비해 상당히 잘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 북한은 박근혜 대통령이 전임 이명박 대통령보다는 나을 것이란 기대가 있는 것 같다. 물론 김대중이나 노무현 대통령 시절과는 다르겠지만. 올봄 북한의 도발적인 언사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일종의 테스트였다고 본다. 최근 남북대화는 좋은 신호다.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오바마 정부가 북한에 대해 전혀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전략적 인내인데 좋은 전략이 아니다. 북한이 핵 보유국이 되고 미사일을 발사한다고 해도 행동을 취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한다. 남북관계에 따뜻한 분위기가 생기면 오바마 정부도 북한에 대해 뭔가 행동을 취할 것으로 기대한다.”



글=배영대·주정완 기자


[출처: 중앙일보] [사람 속으로]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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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24 April 2019  · Shared with Public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을 말하다
https://news.joins.com/article/12483293
 커밍스의 관점이 많이 드러났지만 인터뷰를 잘못 만나 실패한 기사 같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현대사 연구에서 자신의 표현처럼 “선구자”로서 굉장한 업적을 남긴 학자이다. 모두가 그를 비난하거나 옹호하지만 동시에 그의 연구를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정말 적은, 그렇기에 그의 책은 ‘고전’이라 불리기에 손색없다. 커밍스라고 하면 대부분 북침설 혹은 남침유도설을 주장했고 1991년 이후에 반박되었다고들 얘기한다. 이 중앙일보의 기사도 그런 걸 자꾸 이끌어내면서 커밍스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사실 인터뷰이로서 최악의 무례한 인간인데.. 한국이니까.. 뭐 어쩌겠나 한국인데.. 한국인이잖나.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의 사회구성체에 관한 심도 깊은 이론적, 실증적 탐구에 기반해 한국전쟁의 기원을 추적하는 책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전쟁 그 자체만 다루는 게 아니라 조선왕조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식민지기와 해방전후사, 건국과 분단, 분단 이후의 정치운용과 미국의 세계 경영 전략 등을 종합하면서 한국사의 역사적 맥락 속에 한국전쟁을 위치시켜놓고 있다.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이 계속해서 소환된다면, 그것은 한국의 사회구성체의 역사와 그 맥락 속에서의 한국전쟁의 위치, 그리고 그것과 관련을 깊게 맺고 있는 미국 현대사의 전개과정을 종합하는 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한국전쟁 연구는 대부분 한국전쟁의 발발과정이나 전개과정 그 자체를 다루기보다는 한국전쟁의 영향을 주로 다룬다.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 이후 추세가 그렇다.
 커밍스의 논리는 크게 세 부분으로 축약할 수 있다. 조선왕조에 대한 시각이 하나이고, 식민지기에 대한 시각이 또 다른 하나이며, 해방과 건국에 대한 시각이 마지막 하나이다. 사실 커밍스를 진보 진영에서 호평하고 보수 진영에서 극평하는 건 그의 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라 생각하는 편인데, 그 이유는 사실 커밍스의 이 세 가지 시각에서 앞의 둘은 진보 진영이 썩 좋아할만한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첫 번째로 조선왕조에 대한 커밍스의 시각은 기본적으로 조선왕조가 ‘봉건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커밍스는 조선왕조를 “농업관료국가”로 인식한다. 아마 친우인 제임스 팔레의 입장을 많이 받아들여서 그랬을 것 같은데, 아무튼 커밍스는 이론적으로는 페리 앤더슨의 입장을 지지하며 일본만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봉건제 사회였다고 본다. 굳이 이론적으로 표현하자면 커밍스는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자에 가깝다. 봉건제 사회와 농업관료국가의 차이가 내적인 발전 동력의 차이를 낳았고 그것이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있어서의 한국의 실패와 식민지로의 전락,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일본의 제국주의 국가로의 성장 및 자본주의화의 성공을 가른 주요한 요인이었다. 메이지국가는 기본적으로 “강성국가”였던데 반해 조선왕조는 연성국가로 서구제국주의와 일본제국주의의 압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커밍스는 조선왕조가 제국주의에 의해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당대의 자본주의 맹아론을 신봉하던 한국 사학자들의 입장처럼 영국 자본주의와 비슷한 유형의 자본주의화 길을 걷기보다는 기생적 관료제에 저항하는 농민혁명의 길을 걸었을 거라 생각한다.
 누가봐도 사실 진보적 지식인이나 대중이 좋아할 말은 아니다. 지금도 아마 그럴 것이다. 농민혁명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조선왕조가 봉건제를 경험하지 않았기에 강한 국가를 창출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식민화되었다는 커밍스의 논리는 사실 식민사관론자들의 ‘봉건제 부재론’과 통하는 면이 있고 그래서 사실 읽은 몇몇 진보적 학자들은 식민사관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도 경제적 토대의 문제를 상부구조로 환원해서 이해한다며 이런저런 비판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고.
 아무튼 여기서 핵심은 커밍스는 한국이 “농민혁명”의 길을 걸었을 것이라 상정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커밍스의 입장을 반박하기 위해 유영익은 동학농민봉기를 연구하였다. 그가 동학을 연구한 이유는 동학농민혁명이라 명명되는 사건의 주체들을 연구함으로써 사실은 한국의 농민들이 그렇게 혁명적이지 않으며, 되려 대원군을 따를 정도로 보수적이고 무지했다는 점을 드러내어 커밍스가 혁명역량을 과도하게 평가하고 있다는 비판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커밍스의 농민혁명 논리는 상당히 조건이 많은 까다로운 논리이다. 전통적 농민이 혁명운동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1. 근대화의 세례를 받든 어떻게 하든 농민의 전통적이고 협소한 세계관을 넘어야 하고, 2. 지주제 등에 의해 신분상승의 가능성이 없어야 하며, 3. 계급투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과가 지주와 제로섬 관계에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어야 하고 등등의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농민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기에 사실 그렇게 단순한 논리는 아니다. 제프리의 <농민혁명>에 이에 대해 자세한 논리구조가 나온다. 유영익의 논리는 사실 이 부분을 많이 무시하고 있다.
 두 번째로 식민지기 한국사회의 성격에 대해 커밍스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굉장히 철저하고 빠른 공업화가 이뤄졌으며 이는 식민지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그것이 외래적인 것이었으나 굉장히 광범위한 차원에서,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을 위해 급속하게 전개되었기에 한국의 전통사회는 식민지기동안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식민지적 상황은 엄청난 공업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봉건지주제를 온존시켰다. 일본 제국주의의 필요 때문이었다. 북쪽에서는 공업화가, 남쪽에서는 지주제가 크게 발달하면서 미증유의 농민 착취가 일어났다. 전통적인 사회적 관계는 해체되었으며, 지주제와 일본제국주의의 착취 및 사회동원은 극심하게 이뤄지고 있었으며, 공업화는 크게 진전되었다. 그 공업화의 결과로 한국에는 극히 발전된 노동계급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 노동계급과 함께 할 농민계급의 혁명성 또한 착취의 증대에 따라 강화되고 있었고 이 두 계급을 이끌 공산주의 조직 또한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었다. 즉 혁명이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이 혁명을 막고 있던 건 일본제국주의의 ‘과대성장 국가’와 그것이 펼치는 강력한 억압정책이었다. 민족주의자들과 우익은 이 억압을 견디지 못하거나 자발적으로 친일파가 되어 협력했기에 정통성과 명분을 잃었다. 그들의 계급적 기반 또한 노동자, 농민 계급의 혁명적 지향점과는 도무지 맞지 않았다. 친일행위로 인해 정통성을 잃은 우익집단과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뛰어나고 일본제국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단련된 공산주의 혁명가 조직원들이 모여 있는 공산주의 집단 중 누가 더 옳은가는 명확한 것이었다. 커밍스는 한국 혁명의 주체가 농민이었으며,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은 혁명적 상황을 봉쇄하고 있던 과대성장 국가의 후퇴로 이들 농민에 의한 지주제 철폐와 한국의 주체적인 국가건설 시도가 거의 자연적인 과정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외세가 아니었더라면 한국혁명은 성공했을 것이고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가 한반도를 장악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식민지기에 공업화가 크게 진전되었다고 하면서도 지주제의 성장을 동시에 말한다는 점에서 커밍스의 주장은 이론적으로 다소 애매한 지점이 있다. 식민지기가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라는 것인지, 아니면 봉건적인 사회구성체 즉 식민지반봉건 사회구성체라는 것인지 그의 논지는 다소 애매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로 인식하는 게 더 큰 것 같다. 공업화의 진전이 비록 외래적인 것이라고 보고, 민족 부르주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이 농민을 혁명적으로 변모시킬 정도의 근대화를 제공해주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보기에 한국사회는 식민지기를 거치며 급속한 공업화,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농민이 농민 특유의 좁은 세계관을 깨고 혁명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시각에서 그는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혁명의 물결 속에 있었다고 본다. 혁명의 여건은 충분했고 중국과 베트남에서의 농민혁명이자 민족주의 혁명이었던 공산주의 혁명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농민에 의한 혁명이 민족주의와 결합함으로써 공산주의 정권의 수립으로 이어질 것이라 보았다. “외세”가 없다면 말이다. 커밍스는 이 지점에서부터 미군정과 미국 정책 당국자들이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을 얼마나 심각하게 오해했는지 장황할 정도로 길게 서술한다.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역량의 부족이라는 심각한 난점이 있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미군정은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을 소련의 지령을 받는 공산주의자라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자신의 민족을 위해 얼마나 가열차게 투쟁했는지 등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 되려 우익에게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받은 강력한 국가기구를 정비해 넘겨주어 좌익 민족주의자들을 제거하게끔 도왔다고 비판한다. 이런 관점은 사실 커밍스가 베트남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이기도 하다. 그는 미국이 아시아 국가들, 중국이나 베트남이나 한국, 그리고 북조선 등의 국가들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들의 논리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비판해왔기 때문이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국제주의와 민족주의로 갈려 있었는데 한국에서의 냉전의 전개과정에서 커밍스는 미국이 민족주의 쪽으로 기울었고 대한정책은 점차로 남한 단정수립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본다. 미군정의 정책은 일관되지 못했으며 미국과 남한의 우익이 먼저 신탁통치 협정을 깨고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했으며 남북간의 도로 차단, 물자교류 금지 등을 실시했다고 비판한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의 해방운동, 근대국가 설립 욕구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친미국가”를 세우겠다는 목표로 인해 한국의 진정한 해방과 독립을 억압하게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한국의 혁명은 식민지기와 마찬가지로 과대성장한 국가로 인해 억압되고 봉쇄되었으며 계급투쟁은 미군정과 한국정부의 억압적 정책에 의해 다시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한국의 국가건설 과정은 미국에 의한 이식과 친일파 및 우익의 적극적인 협력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커밍스는 기본적으로 한국의 국가형성 과정이 내재적 조건에 기반해 있다기보다는 미국 중심의 나라 만들기 과정, 특히나 친미적 나라만들기 과정에 맞춰서 진행되었다고 본다. 외재적 요인의 경향이 컸으며 한국사회의 내적 발전에 의해 조선왕조부터 이어져오던 농민혁명의 흐름이 계속해서 억압되고 있었다고 본다. 내적인 흐름이 외부 세력의 개입에 의해 차단되고 왜곡되는 과정 속에서 나라만들기를 행했기 때문에 그토록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뭐지? 내가 요약해서 별로 같아 보이나.
 아무튼 커밍스의 주요한 논지의 핵심에는 결국 “농민”이 있다. 그는 한국과 같은 아시아 사회를 농민이 중심이 된 사회라 보고 있으며, 그 농민을 중심으로 역사가 전개되어 왔다고 판단한다. 농민 중심의 토지개혁이 이뤄진 민주적이고 주체적인 국가건설 욕구가 일본과 미국의 개입에 의해 좌절되고 그 과정 속에서 농민은 자본주의에 포섭되어 강제적으로 근대화되거나 국가적 동원에 끌려가면서 노동자로 재편되거나 착취당했다. 그 농민의 한과 울부짖음 속에 근대 사회를 살아갔던 한국인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어있는 것이다. 한국사회를 농민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꽤나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사회성격이 무엇인가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 많은 부분을 개척한 그의 연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시나 좀더 엄밀하게 사회구성체를 이론적으로 구성하고 그에 따라 한국 사회의 성격을 드러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그의 관점을 단순히 친북적이니 아니니 하기보다는 좀더 넓은 맥락에서 농민 중심의 한국사회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어떻게 근대국가를 건설했는지, 그 근대국가의 성격이 무엇이었는지 등에 대한 물음, 그리고 그 근대국가의 건설과 공업화의 진전이 오늘날의 한국 사회의 성격을 농민문화로부터 얼마나 멀어지게 했는지 등등을 따져묻는 것으로 바꾼다면 브루스 커밍스의 연구는 여전히 의미 있는 연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내용을 요약해보았는데 혹시나 읽을 사람이 있으면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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