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3

뉴욕의 낯뜨거운 한·한 갈등 - 시사저널

뉴욕의 낯뜨거운 한·한 갈등 - 시사저널


뉴욕의 낯뜨거운 한·한 갈등

설갑수 (뉴욕〈내셔널 언더라이터〉기자) ()
승인 2001.06.28 00:00

한인 청과상이 노조 허용하자 동포 업주들이 따돌려

뉴욕 맨해튼의 이스트 빌리지에서 대형 델리 발렌티노를 운영하고 있는 재미 동포 마이클 윤씨(42)에게 지난 1년은 그의 22년 이민 생활 가운데 가장 파란만장했다. 윤씨의 점포 발렌티노는 지난해 여름 이후 서너 차례나 불매운동의 표적이 되었다. 노동조합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전국섬유직물노조(UNITE!) 169지구(Local 169)가 점포 앞에서 피켓 시위를 시작한 것이다. 노조원들이 피켓 시위를 벌이자 뉴욕 시민들은 즉각 반응했다. 단번에 하루 매상이 90% 이상 줄었고, 마지못해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도 윤씨를 바라보는 눈빛이 곱지 않았다.

윤씨는 항상 자기를 '철저한 장사꾼'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시위 사태에 대한 손익 계산을 해보았다. 전체 거주 인구의 40%가 노조원인 뉴욕에서, 그것도 분위기가 가장 자유스러운 빌리지 지역에서 장사하면서 노조와 맞서는 것은 어리석다고 판단했다. 고민 끝에 윤씨는 자기가 운영하는 발렌티노 종업원 30여명에게 노조 결성을 인정하기로 결심했다. 몇 차례 단체 협약 끝에 법정 최저 임금 이상의 급료와 초과 수당·의료 보험·유급 휴가 등을 지급하기로 약속하는 노사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윤씨의 점포가 잠잠해진 것은 아니다. 두 번째 말썽은 엉뚱한 곳에서 생겼다. 재미 동포 청과상 주인들이 윤씨의 점포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인이 소유한 델리와 청과상만을 집중 공략하는 노조의 전략에 윤씨가 말려들어 협조했다는 것이 그들이 내건 이유였다. 그들은 몇 차례 시위 끝에 한인 사회의 여론을 모아 5월에는 뉴욕 한인회 (회장 김석주) 산하에 한인상권보호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동안 윤씨는 소송을 내서 그의 점포 앞에서 그 위원회와 관계된 한인차별반대협회가 시위를 벌이지 못하도록 하는 법원 명령을 받아냈다.

현재 맨해튼에는 청과상과 델리가 2천여개 있다. 이 중 80%가 뉴욕으로 이민온 한국 교포 소유이다. 대부분 1980년대 초에 미국으로 건너온 이들은 점포 관리자를 한국인으로 두고, 나머지 인력은 주로 중남미계 이민 노동자를 고용해 운영하고 있다. 한때 한인들 사이에 청과와 델리는 '남는 장사'로 통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들어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매출이 줄자 앞다투어 대형화 경쟁을 벌였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이 과정에서 과당 경쟁과 비용 상승으로 많은 상인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 이러한 경영 사정 악화가 노동자들에게 낮은 임금과 긴 노동 시간으로 반영되었다. 바로 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 섬유직물노조였다. 2년 전부터 뉴욕 청과산업 노조화를 추진한 섬유직물노조는 현재 7개 상점에 노조를 조직했는데, 그 가운데 6개가 한인 소유이다.

이같은 노조의 파상 공세에 맞서는 한인 업주들의 대응은 그야말로 주먹구구식이다. 일부 업주들의 태도는 과거 한국의 권위주의 시대에 기업주들이 보여준 안하무인 격의 행위를 연상케 하기까지 한다. 일부 한인 청과상 업주들은 지난해 말부터 올 3월까지, 마피아와 연계된 혐의로 연방 정부의 수사를 받고 있는 ILA라는 어용 노조를 동원해 섬유직물노조가 주도하는 청과상노조결성 캠페인을 무력화하려고 했다. 미국 노동법의 1사업장 1노조 원칙을 이용해 청과상 종업원들에게 ILA에 가입하라고 종용했다. 이렇게 되자 섬유직물노조는 ILA를 전국 산별 노조인 AFL-CIO의 분쟁위원회에 제소했다. AFL-CIO는 ILA가 뉴욕 청과상들을 조직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 한인 청과상들을 중심으로 한인차별반대협회가 결성되었고, 이들이 주도해 한인상권보호특별위원회가 탄생한 것이다.

종업원에게 적절한 임금과 복지 혜택을 보장하고 있는 마이클 윤씨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5월 말부터 6월까지 한인상권보호특별위원회는 섬유직물노조 169 지구 사무실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노조가 한인 청과상만을 노린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시위대는 마이클 윤씨의 발렌티노로 몰려갔다. 노조를 인정했다고 분풀이 시위를 벌인 것이다. 동포가 소유한 점포 앞에서 시위를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한인상권보호특별위원회 대외 담당 위원이자 전 뉴욕한인회장 이세종씨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개인적으로 발렌티노 마켓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노조를 인정한 업소 앞에서 시위할 수 있고, 그렇게 하면 업주가 노조에 항의할 것 아닌가." 노조와 노조를 인정한 업주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로 나타나는 듯하다. 마이클 윤씨는 지난 6월7일자 뉴욕의 한인 일간지에 호소문을 실어 한인상권보호특별위원회의 행동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또 고교 교사인 그의 아내는 재미 동포 2세들로 구성된 시민운동단체 '노둣돌'이 마련한 노조 관련 포럼에 나가 노조를 인정한 뒤 종업원의 생산성이 많이 향상되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그동안 우리가 종업원의 일상사에 너무 무관심했다. 노조가 종업원의 생활 상태를 우리 부부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부끄러움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뉴욕 시민 손가락질…인종 갈등 불씨 될 수도

물론 섬유직물노조가 완벽하고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 노조 역시 과거 여러 차례 추문에 휩싸인 적이 있으며, 1960년까지 동양인의 가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청과상을 노조로 조직할 때 전문 시위대를 고용하기도 했는데, 시위대 일부는 노조측이 최저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며 뉴욕 한인 언론들을 모아놓고 기자 회견을 열기도 했다.

이같은 여러 잡음에도 불구하고 섬유직물노 조가 청과상 고용인들에게 줄 혜택은 명백한 듯하다. 유급 휴가·의료 보험 등 기본적인 혜택들은 영주권 없이 불법으로 일하는 대부분의 중남미 노동자들에게는 노조 없이는 불가능한 조건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중남미 노동자들보다는 작지만 청과상에서 일하는 많은 한인 노동자들에게도 노조가 줄 수 있는 이익은 분명하다.

문제는 한인 업주들이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노조를 배척함으로써 '합리성을 결여한 한국인'이라는 손가락질이 뉴욕에서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자칫 뉴욕 시에서 인종 갈등의 불씨로 비화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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