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과 망각
제1부어느 친일파 후손의 기억
제2부친일 후손, 그 성공의 비밀
제3부부역의 대가, 부의 대물림
제4부시인, 목사, 정치인...친일 후손의 고백
제5부에필로그
방송 보기
토론
제2부 친일 후손, 그 성공의 비밀
1. 1957년, 미국 메사추세츠 주 웰슬리(Wellesley) 대학
서울대 사학과를 3학기까지 마치고 이곳 웰슬리 대학으로 유학을 온 지 이제 1년이 지났다. 방학 중이라 남의 집에 들어가 ‘아이 돌보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방학 동안 번 돈으로 학기 중의 책값과 생활비를 충당한다. 이곳 미국은 나의 조국 한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세상이다. 한국은 폐허에서 겨우 벗어난 반면, 이곳 미국은 그림 같은 집들이 있는 나라다.
한국의 국민 소득이 50에서 60달러인데, 내가 다니는 대학의 학비와 기숙사비는 한 해 2천 달러가 넘는다. 나도 전액 장학금을 받지 않았다면 유학을 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힘들기는 해도, 지금의 이 시기는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고 지금까지 태어난 뒤에 제일 운이 따랐던 게 웰슬리 대학의 장학금을 받은 일인 것 같다. 지난주에는 할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베이비시터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 ‘네가 남의 집살이를 한다니 무슨 일이냐’며 속상해하셨다.
할아버지는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큰 도움을 주신 분이다. 할아버지는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유학자이시지만 교육에는 남녀 차별을 두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내게 한글을 가르쳐주시기도 했다. 집에는 책이 많았다. 덕분에 나는 어릴 때부터 많은 독서량을 쌓을 수 있었다.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방정환 선생 동화라든가 요즘 아이들이 읽는 피터팬과 백설공주, 소공녀 같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어린이 책이 성에 안 차면 집에 있는 어른들 잡지를 읽었다. 아버지 서재에 있던 역사소설과 역사책도 읽었다. 그게 아마 내가 역사를 전공으로 선택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인호 kbs 이사장 유학 시절(오른쪽 가운데 여성)과 현재 사진
이 비범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KBS 이사장 이인호다. 한 언론에 나온 인터뷰를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이인호 이사장이 유학을 떠난 시기는 1956년, 전쟁이 끝난 지 불과 3년밖에 되지 않아 한국은 폐허와 다름없었다. 이 이사장은 당시 일반인들은 꿈도 꿀 수 없었던 교육 기회를 누렸다. 국민소득의 40배나 되는 학비 등을 장학금과 아르바이트 수입으로 충당했다고는 하지만 집안의 뒷받침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요즘 말로는 속칭 ‘금수저’다.
이인호 이사장은 오늘날 자신이 있기까지 큰 도움을 준 사람으로 그녀의 할아버지를 꼽았다. 이 이사장의 할아버지는 이명세,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가 확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에 들어가 있다.
이 이사장은 KBS 이사장 선임 당시 역사관과 조부의 친일 행적 문제가 제기되자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런 식으로 친일을 단죄하면 일제시대 중산층은 다 친일파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한겨레 2014년 9월9일, 이인호 “내 조부가 친일이면 일제시대 중산층은 다 친일파”에서)
이명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유교의 황국 식민지화를 위해 만든 조선유도연합회의 상임이사를 지냈고, 조선 유림연합회의 대표도 지냈다. 조선 유림연합회의 강령은, 천명황도 존정국시(闡明皇道尊定國是), 즉 천황의 도를 천명하고 국시를 존중해 세울 것, 후원황군 앙양국위(後援皇軍昻揚國威), 즉 천황의 군대를 후원하고 국위를 떨칠 것 등이었다.
이인호의 친할아버지 이명세
다음은 국가기구인 반민규명위가 이명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하면서 그 근거를 담은 결정문이다.
결정문
이명세는 1939년 11월 1일에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유림 조직을 통제, 지배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에서 상임참사, 1941년에 상임이사로 활동하였으며, 1944년에는 조선총독부 직속기구인 경학원의 사성으로 활동하였다. 이명세는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이사의 자격으로 지방을 돌아다니며 일제의 침략전쟁에 부응하는 시국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조선유도연합회에서 간행하는 기관지인 『유도(儒道)』 제1호에 ‘동아공영권(東亞共榮圈)과 유교(儒敎)의 역할(役割)’이라는 논설과 일본이 싱가포르를 함락한 것에 대한 기쁨을 노래한 한시(新嘉坡陷落日志喜)를 게재하였다. 두 편의 글의 요지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유교를 통한 황국신민의 본분을 다하자는 것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대동아공영을 만들자는 것이다. 기관지 『유도』외에 조선유도연합회에서 발간한 『봉전남총독각하(奉錢南總督閣下)』, 『봉전대야총재각하(奉餞大野總裁閣下)』에서 이명세는 미나미 총독과 오노 정무총감을 칭송하는 한시를 게재하였다. 또한 『유도』 제 5호에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연합함대사령장관의 죽음을 추모하는 한시를 게재하였다. 역시 조선유도연합회에서 간행한 『축징병제실시(祝徵兵制實施)』에 이명세도 일제의 징병제 실시를 찬양하는 한시를 게재하였다.
이와 같이 이명세는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참사, 상임이사, 경학원 사성으로서 활동을 하며, 일제의 침략전쟁과 징병제 실시를 찬양하고 일제의 고위 관료를 칭송하는 한시를 작성하는 등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하였다. 이러한 이명세의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7호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 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출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4권
이명세는 결정문 내용처럼 조선 유도연합회 기관지인 『유도(儒道)』 등에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를 찬양하는 글과 한시를 잇따라 실었다. 창간호(1942)에선 '동아공영권, 유교의 역할'이란 기고문을 통해 일제 침략군을 옹호하기 위해 엉뚱하게 맹자 『양혜왕편』을 인용한다.
우리 황군은 인의를 위하여 싸우기 때문에 무적이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고 말한 선현의 격언이 현재 사실을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이명세는 조선총독의 치적을 찬양하고, 일제 침략군 사령관의 전사를 애도하는 한시를 수시로 발표했는데 조선에서의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는 시는 그가 일제에 어떻게 부역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축징병제 실시
해마다 북벌(北伐)하고 또 남정(南征)하다가
이제야 반도에 새로이 징병제 실시하네.
내외가 일체가 되어 은혜를 고루 입으니
앞뒤로 서로 호응하며 한 목소리로 의를 외치네.
집안에선 아들 난 것 중요하다는 걸 더욱 깨닫고
나라 위해 적과 싸워 죽는 것은 가볍게 생각하리
우리들은 유감 없으나 바라는 것 있으니
하루빨리 전란 끝내고 승평의 시대로 돌아오는 것이라네.1943년 1월, 조선유도연합회
출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4권
이명세는 이같은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해방 뒤에 승승장구한다. 1946년 성균관대학교의 상임이사, 54년부터 62년 사이에는 두 차례에 걸쳐 5년 동안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을 지냈다. 또 같은 기간 성균관장을 지내기도 했다. 아마 유학 중인 손녀, 이인호 KBS 이사장에게 편지를 보냈던 시기도 이 때였을 것이다.
이 이사장은 유학 뒤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 1972년 귀국한다. 그 뒤 고려대 교수, 서울대 교수를 지내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년 핀란드 대사,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 러시아 대사로 부임한다. 그 뒤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을 거쳐 마침내 2014년 공영방송 KBS의 이사장이 된다.
이명세와 그의 손녀 이인호 이사장의 인생 행로는 친일파와 그 후손들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 2015년 7월, 서울대학교
지난 ◯◯일, 뉴스타파 취재진은 서울대를 찾았다. 친일파 후손으로 확인된 몇몇 교수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미 수차례 이메일을 보냈지만 아무런 답변이 없어 직접 만나 인터뷰를 요청할 계획이었다. 무척 덥고 습한 날이었다. 취재 내내 땀이 줄줄 흘렀다. 결국 인터뷰는 하나도 성사되지 않았다. 촬영을 마친 취재진은 파김치가 됐다.
캠퍼스 곳곳을 활보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은 무더운 날씨에도 활기가 넘쳐 보였다. 현재 서울대 학부 신입생 정원은 3천 명 정도, 우리나라 전체 수험생은 60만 명이 넘으니 이곳의 학생들은 성적으로 따지면 그야말로 최상위권이다. 단순하게 계산해서 우리나라 수험생들의 서울대 진학 확률은 0.5%가 되지 않는 셈이다.
그런데 만약 특정한 사회 집단의 서울대 입학 비율이 20%가 넘는다면? 엄청나게 학습 능력이 뛰어나거나, 아니면 매우 높은 수준의 교육적 지원을 받은 집단일 것이다. 뉴스타파가 학력과 직업 등을 확인한 친일파 후손 1,177명 가운데 268명이 서울대 출신으로 나타났다. 비율로 따지면 22.8%다. 연세대학교 68명, 고려대학교 51명을 합치면 이른바 SKY 대학 출신이 3분의 1에 달한다.
물론 이 1,177명은 각종 검색 작업을 통해 확인이 가능한, 이미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SKY 출신이 ⅓ 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높은 수치다. 단순한 개인적 재능 이상의 배경이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서울대의 경우는 역대 총장 가운데 3명이 친일파 후손으로 나타났다. 서울대의 전현직 교수 36명도 친일파 후손으로 조사됐다. 단일 대학교 중에서는 가장 많은 수다.
친일 후손들의 화려한 학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해방 이후 수십 년 동안, 아니 현대도 한국 사회에서 성공의 확실한 보증 수표는 명문대 졸업 경력과 선진국 유학의 조합이다. 그래서 친일 후손들의 유학 경험 비율을 조사해 봤다. 결과는 1,177명 가운데 319명, 비율로는 27%였다.
우리 사회에서 유학을 경험한 사람들의 비율은 어떻게 될까? 통계청에도 해당 자료는 없다. 다만 연도별 유학생 출국자들의 숫자를 통해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1970년대 이전에는 한 해 유학생이 천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많게 잡아서 천 명이라고 치면, 50년대와 60년대를 통틀어 20년 동안 유학을 경험한 인구는 2만 명 정도 되는 셈이다. 70년도 당시의 인구가 3천 2백만 명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70년대 이전까지 유학을 경험한 사람은 전체 인구 대비 0.06%에 불과하다. (1971년부터 2000년까지 유학생 출국 숫자는 모두 125만 명이다. 2000년 당시 인구가 4천 7백만 명이므로 2000년 시점에서 그 이전 30년 사이 유학을 경험한 사람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2.6%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뉴스타파가 찾아낸 친일 후손들의 유학 경험 비율을 출생연대별로 보면, 1900년대생부터 1940년대 생의 유학 경험 비율이 30%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유학 경험이 매우 희귀했던 70년대 이전을 비교 대상으로 상정할 경우 친일 후손들의 유학 경험 비율은 일반인들보다 무려 500배 높은 것이다.
친일파 후손들의 유학 국가를 보면 전체의 64%가 미국이었다. 두 번째로 많은 국가는 17%를 차지한 일본이었고 독일, 프랑스, 영국이 뒤를 이었다. 일본 유학의 경우 80% 이상이 해방 전 세대였다.
3. 2015년 8월 초, 뉴스타파 사무실
이제 마무리할 시점이다. 찾을 수 있는 데까지는 모두 찾았다. 2015년 광복절을 며칠 앞두고 뉴스타파 해방70년 특별기획 취재진은 신원이 확인되는 친일 후손 1,177명의 명단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직업 분석을 시작했다.
“이거 재미있네요. 의사가 왜 이렇게 많이 나오지?”
확인해보니 1,177명 가운데 의사가 147명이다. 정치인이나 법조인, 공직자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던 취재팀의 예상과는 다른 결과였다. 의사가 이렇게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뉴스타파가 만난 여러 전문가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친일 후손들의 경우 선조의 친일이라는 흠결이 있기 때문에 정치가나 공직자처럼 선대의 이력이 노출되기 쉬운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엘리트를 지향하기보다는 비정치적인 직업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정치적인 변화에 영향받지 않으면서도 일정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의사라는 직업이야말로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어느 나라든 의사라는 직업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자리 중 하나는 아마 왕이나 대통령의 주치의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주치의는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의사로 인식되기 때문에 대통령 주치의 교체 시기가 되면 서울대 의대나 연세대 의대 같은 대표적 학교들이 물밑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의사로서의 최고 명예직인 대통령 주치의는 역대 16명뿐이었는데, 이 가운데 2명이 대통령 소속 반민규명위가 확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이고, 또 다른 2명은 민족문제연구소 등 민간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들어간 친일파의 후손으로 확인됐다.
1급 이상1급 이하교감교사교장교직원대학이사장대학총장재단이사장재외준장 이상준장 이하기타보험은행증권회계공기업 임원비상장기업 대표비상장기업 임원비상장기업 주주상장기업 대표상장기업 임원상장기업 주주재외건축가독립운동가미국 공무원북한요리연구가체육인대학강사대학강사공학기타기타예술미상미술법학음악인문사회자연과학재외문학교수음악법조인검사법무관변호사재외판사북한북한사회단체인사회단체인언론인기타방송신문재외통신공공민간재외기타디자이너문학미술방송사진연극영화음악의료인개인병원대학교수약사재외종합병원한의사자영업재외국회의원기타대통령기독교카톨릭출판인출판인학생학생공기업미상비상장기업상장기업재외
help색깔 별로 직업을 분류했습니다.help직업에 속한 후손이 많을 수록 상자는 커집니다.help상자를 누르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뉴스타파가 찾아 낸 친일파 후손의 직업 중 가장 많은 것은 기업인이었다. 376명으로 전체의 32%였다. 이 기업인 가운데 1/3 이상은 상장기업의 대표나 주주, 임원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기업 330만 여 개 가운데 상장기업은 2천 개가 채 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경우는 친일파 김신석의 외증손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포함한 삼성 가문이다. 또 친일파 김연수가 설립한 가족기업 삼양사의 경우 전현직 대표나 임원 가운데 김연수의 후손이 12명이나 있었다. D그룹의 총수, S 건설의 회장 역시 친일파의 후손으로 드러났다. 친일 후손 중 상무 이상의 임원만 따져도 80명이 넘었다. 삼성, LG, 현대, SK 계열사에 적어도 한 명씩은 모두 있었다.
우리 사회의 공적 영역을 움직이는 파워 엘리트, 즉 정치인과 법조인, 공직자, 언론인은 각각 31명, 30명, 55명, 46명이었다. 뉴스타파는 여러 전문가들과 협의해 결정한 기준에 따라 이들 가운데 공인으로 볼 수 있는 인사들을 공개한다. 전체 명단은 뉴스타파 해방70년 특별기획 친일과 망각: 친일파 후손 공개 대상자 명단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먼저 전현직 국회의원이다.
이름윤보선 친일파 선조윤치소 직업정치인 직책4대 대통령 관계윤치소의 장남
이름김남 친일파 선조김성수 직업정치인 직책국회의원 관계김성수의 7남
이름김상흠 친일파 선조김성수 직업정치인 직책국회의원 관계김성수의 4남
이름김성진 친일파 선조김서규 직업공직자 직책국회의원 관계김병원의 손자
이름김우평 친일파 선조김한승 직업정치인 직책국회의원 관계김한승의 차남
이름김원전 친일파 선조박지근 직업정치인 직책국회의원 관계박지근의 사위
이름김형오 친일파 선조지희열 직업정치인 직책국회의원 관계지희열의 손녀 사위
이름문태준 친일파 선조문명기 직업공직자 직책국회의원 관계문명기의 손자
이름박정훈 친일파 선조김한승 직업정치인 직책국회의원 관계지희열의 손녀 사위
이름박종율 친일파 선조박봉주 직업정치인 직책국회의원 관계박봉주의 증손자
이름박현서 친일파 선조박이양 직업정치인 직책국회의원 관계박이양의 손자
이름양정규 친일파 선조장헌식 직업정치인 직책국회의원 관계장헌식의 외손녀 사위
이름윤여훈 친일파 선조서병주 직업정치인 직책국회의원 관계서병주의 손녀 며느리
이름윤영선 친일파 선조윤정현 직업정치인 직책국회의원 관계윤정현의 장남
이름이종찬 친일파 선조이하영 직업공직자 직책국회의원 관계이하영의 손자, 이규원의 장남
이름이진 친일파 선조이병무 직업정치인 직책국회의원 관계이병무의 증손자
이름정구영 친일파 선조정석용 직업정치인 직책국회의원 관계정석용의 아들
이름정진동 친일파 선조고원훈 직업정치인 직책국회의원 관계고원훈의 사위
이름지갑종 친일파 선조고영희 직업정치인 직책국회의원 관계고영희의 증손 사위, 고희경의 손녀 사위
이름진성호 친일파 선조진희규 직업정치인 직책국회의원 관계진희규의 손자
이름홍영표 친일파 선조홍종철 직업정치인 직책국회의원 관계홍종철의 손자
박근혜 대통령이 빠져 있는 이유는,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분석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어 있지만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1,006명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은 차관급 이상 고위 공직자와 정부부처, 검찰법원, 군 등 정치인 이외 나머지 명단 명단이다.
이름강종원 친일파 선조손재하 직업공직자 직책외교부 본부대사 관계손재하의 손녀 사위
이름구용서 친일파 선조구연수 직업공직자 직책상공부 장관 관계송병준의 외손자
이름김병국 친일파 선조김성수 직업공직자 직책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관계김성수 손자
이름김상협 친일파 선조김연수 직업공직자 직책국무총리 관계김연수의 아들
이름김상희 친일파 선조서병조 직업공직자 직책법무부 차관 관계서병조의 외손자
이름김성진 친일파 선조김서규 직업공직자 직책보사부 장관 관계김병원의 손자
이름김인수 친일파 선조김정태 직업공직자 직책국민권익위 사무처장 관계김정태의 증손녀 사위, 김상형의 손녀 사위
이름문태준 친일파 선조문명기 직업공직자 직책보사부 장관 관계문명기의 손자
이름민복기 친일파 선조민병석 직업공직자 직책대법관 관계민병석의 아들
이름민태형 친일파 선조민종묵 직업공직자 직책통계청장 관계민종묵의 고손, 민철훈의 증손자
이름안병화 친일파 선조안종철 직업공직자 직책상공부 장관 관계안종철의 손자
이름유보선 친일파 선조유빈겸 직업공직자 직책국방부 차관 관계유빈겸의 증손자
이름윤영선 친일파 선조윤웅렬 직업공직자 직책농림부 장관 관계윤웅렬의 손자, 윤치호의 아들
이름이건무 친일파 선조조성근 직업공직자 직책문화재청장 관계조성근의 외증손자
이름이병도 친일파 선조조성근 직업공직자 직책문교부 장관 관계조성근의 사위
이름이순용 친일파 선조이재곤 직업공직자 직책내무부 장관 관계이재곤의 아들(5남)
이름이종찬 친일파 선조이하영 직업공직자 직책국방부 장관 관계이하영의 손자, 이규원의 장남
이름이현재 친일파 선조김서규 직업공직자 직책국무총리 관계김서규의 손녀 사위
이름장석윤 친일파 선조윤웅렬 직업공직자 직책내무부 장관 관계윤웅렬의 손녀 사위
이름장성환 친일파 선조장헌식 직업공직자 직책교통부 장관 관계장헌식의 3남
이름최문경 친일파 선조최연국 직업공직자 직책외무부 차관 관계최연국의 3남
이름현병철 친일파 선조현기봉 직업공직자 직책국가인권위원장 관계현기봉의 고손자
이름홍석현 친일파 선조김신석 직업공직자 직책미국 대사 관계김신석의 외손자
이름홍진기 친일파 선조김신석 직업공직자 직책법무부 장관 관계김신석의 사위
이름고명승 친일파 선조윤정현 직업군인 직책육군 대장 관계윤정현의 손녀 사위
이름채병덕 친일파 선조백홍석 직업군인 직책국방부참모총장 관계백홍석의 사위
이름이승훈 친일파 선조이달용 직업대학교수 직책산자부 전기위원회 위원장 관계이재완의 증손 사위, 이달용의 손녀 사위
이름김유후 친일파 선조김한규 직업법조인 직책부산지검 검사장 관계김한규의 손녀 사위
이름오세욱 친일파 선조현기봉 직업법조인 직책광주지법 법원장 관계현기봉의 외증손자, 현준호의 외손자
이름홍석조 친일파 선조김신석 직업법조인 직책광주고검 검사장 관계김신석의 외손자
이름이인호 친일파 선조이명세 직업언론인 직책KBS 이사장 관계이명세의 손녀
이름김노경 친일파 선조이재완 직업의료인 직책대통령 주치의 관계이재완의 외증손자, 이달용의 외손자
이름민헌기 친일파 선조민영휘 직업의료인 직책대통령 주치의 관계민영휘의 증손자
우리 사회의 파워 엘리트 직군에 진출한 친일파 후손들은 전체 친일 후손의 14% 정도였다. 취재진의 예상을 밑도는 수치였다. 이는 “친일파 후손들이 여전히 우리 정관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속설과도 다른 분석 결과다. 특히 이들 파워 엘리트의 비율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점점 낮아졌다. 과거 이승만 정부나 박정희 정부 시절만 해도 총리나 장관, 고위 법조인 중 상당수가 친일파 후손이었지만 90년대 이후부터는 그 수가 줄어들었다. 이는 선대의 이력이 노출될 우려가 있는 정관계로 굳이 진출할 필요는 없었고, 자본 권력이 사실상 정치 권력을 지배하게 되면서 기업 경영이나 금융 분야 선호도가 높아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친일파 후손 중 언론인들은 이른바 ‘조중동’과 KBS에 소속된 비율이 높았다. 조선일보 9명, 중앙과 동아는 8명, KBS는 6명으로, 이들을 합치면 언론인의 2/3를 차지한다. 언론인 가운데는 지상파 방송의 앵커 출신 언론인도 있었고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유명 언론인도 있었다.
친일파 후손들의 직업 분석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우리 사회의 최상위 계층에서 활약하는 ‘잘 나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의 비율이 높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취재과정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이 떠올라 씁쓸한 생각을 감출 수가 없었다.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1부에서도 소개한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선생의 장남인 김정륙씨는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냈다.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을 역임한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느라 오랫동안 집을 떠나면 남은 가족들은 생계유지가 곤란했다. 가장 먼저 쓰러진 것은 어머니였다. 불과 39살이었던 어머니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숨졌다. 당시 세 남매의 나이는 9살과 7살, 3살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는 밥을 굶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어머니를 잃고 6개월 뒤, 세 살배기 막내 여동생이 영양실조로 숨졌다. 말이 영양실조지 굶어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 뒤 김상덕 선생은 남아있던 두 남매를 고아원에 맡겼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서울로 돌아온 아버지는 국회의원이 되어 반민특위 위원장을 맡았다. 살림살이도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좌절됐고 곧이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김상덕 선생은 납북되고 만다. 남은 가족들에게는 ‘빨갱이’라는 멍에가 씌워졌다. 아버지 친구들의 도움으로 대학에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학비가 없어 중퇴했고, 빨갱이라는 멍에 때문에 번듯한 직장에 취업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평생 막노동과 신문배달을 하며 가족을 먹여 살렸다.
4. 2000년 7월 2일 낮 12시, 서울 신라호텔
32살의 신랑은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마친 뒤 스탠퍼드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는 전도유망한 청년이다. 27살의 신부 역시 미국 파슨스 디자인 스쿨을 졸업한 뒤 일본 게이오대에서 어학 연수를 받은 유학파. 분명 평범하지는 않은 한 쌍의 첫 출발, 신랑 신부의 일거수일투족에 연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의 둘째 아들 김재열과 삼성 이건희 회장의 둘째딸 이서현이다.
김재열, 이서현의 결혼식 장면, 위 오른쪽부터 이서현, 김재열, 아래 오른족 이건희
국내 최대 재벌인 삼성 그룹과 대표적인 족벌 언론 동아일보의 사돈 맺기, 동시에 이 혼사는 두 친일 가문의 결합이기도 했다. 김재열은 대통령 소속 반민규명위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김성수의 손자다.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의 창업주인 김성수는 일제 시대 총독부 기관지 매일 신보 등에 일제의 징병제를 찬양하고, 학병 지원을 권고하는 글을 여러 차례 기고했다.
오른쪽(위에서부터) 차례로 김성수, 김신석, 홍진기
이서현은 친일파 김신석의 외증손자다. 외할아버지인 홍진기는 국가가 결정한 1,006명의 명단에는 들어있지 않지만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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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 광복70주년 취재팀은 이렇게 친일 집안끼리 얽힌혼맥을 20건이나 발견했다. 혼맥을 통해 서로 연결되는 가문은 모두 35개다. 대표적인 게 친일파 방응모의 증손자인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이다. 방상훈 사장은 또다른 친일파인 윤치호의 증손녀와 결혼했다.
일제 강점기 최대의 거부이자 세도가였던 민영휘 집안은 다른 친일파 가문과 3건의 혼맥을 맺었다. 우선 일제 강점기 남작이었던 김춘희 가문의 딸과 손자를 결혼시켰고, 중추원 참의를 6번 지낸 장헌식의 아들과 손녀를 결혼시켰다. 또 그의 증손자는 일본군 육군 중장으로 복무한 조성근의 손녀와 결혼하기도 했다. 민영휘의 후손들은 선대에서 물려받은 사학재단을 계속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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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집안 끼리의 혼인은 아니지만, 친일 가문이 ‘잘나가는’ 유력 가문과 혼맥을 통해 연결되는 경우도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친일파 현준호의 가문이다.
현준호는 아들인 현영원을 당시 재계의 실력자였던 김용주의 딸 김문희와 결혼시킨다. 김문희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누나다. 그리고 현영원과 김문희 사이에서 난 딸 현정은은 현대가의 5남인 정몽헌과 결혼한다. 친일 집안과 재벌가의 혼맥이 구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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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015년 7월 16일 오전, 서울 신촌의 한 커피점
어렵게 약속을 잡았다. 취재진이 친일파 후손 수백 명에게 보낸 이메일 가운데 답변이 돌아온 것은 몇 통 되지 않았다.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은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취재진이 보낸 최초의 이메일을 본 뒤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오랜 시간에 걸친 통화 끝에 그는 고민해보고 다시 전화를 걸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뒤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 오전 10시, 신촌 로터리에 있는 ◯◯ 커피점에서 만나죠.”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10시 5분이었다. 허겁지겁 문을 열고 들어가 한 바퀴 둘러보니 와이셔츠 차림의 점잖아 보이는 노인 한 명이 눈에 띄었다.
“혹시 이◯◯ 선생님 되시나요?”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아 상대를 살펴보니 백발에 안경을 끼고 있는 모습이 척 봐도 대학교수나 선생님 같은 분위기다. 실제로 그는 대학교수를 지내고, 한 국책연구원의 원장까지 역임한 지식인이다. 그는 가장 먼저 프로그램의 제작 방향을 물었다.
“우선 친일파 후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 인구 사회학적인 특징을 소개할 거고요, 재산 문제도 다룰 예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친일파 후손들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고 그 얘기들을 소개하기도 할 겁니다.”
기자의 설명을 들은 뒤 차분한 어조로 얘기를 시작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흥분하기 시작했다. 훌륭한 분들이라고 믿고 지냈던 자신의 증조부와 조부가 친일파로 선정되고, 조상들이 묻혀있는 선산까지 환수당한 뒤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와 친일재산환수위원회를 원색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포장만 다르게 해서 누구 말대로 하면 과거사 가지고 먹고 사는 애들이지. 그냥 자기네들 일자리 아닙니까. 조직도 몇 개씩 만들고 예산도 엄청 가져다 쓰고. 무슨 근거로 100년 전의 자료도 없이 역적 집안으로 만들고 재산을 환수해요. 무슨 근거로.. 수백 억 쓰면서 장관급 만들어 놓고 고작 삼 년 동안 조사해서 너네 집은 죽일 놈 집안이야, 이거는 참..내가 글도 못 쓰는데 진정서를 수없이 냈어요. ”
그러나 그의 진정은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소송도 해봤지만 결국 패소했다.
“내가 후손된 도리로서, 내가 이렇게 무능력하고 무력하고. 이래도 되는 건지, 잠이 안 와요. 솔직하게”
그의 불만은 주로 반민규명위가 분명한 근거도 없이 자신의 선조를 친일파로 몰았다는 것이다. 과연 그 말은 사실일까?
이재완
그의 증조부 이재완은 조선 왕실의 인척으로, 일제 강점기 후작 작위를 받았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철도 부설권을 넘길 때 일본공사관과 각서를 교환했다. 그 공로로 대한철도회사 사장에 임명됐다. 일제의 국권강탈 후 그는 일본 육군 중장의 예우를 받았다.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는 그의 비망록에서, 이재완을 이렇게 평했다. “실로 일본에 대한 공로가 크다”
그의 조부 이달용은 아버지의 작위를 습작했다. 일제가 만든 친일 유학 단체인 조선 유도연합회에서 참의로 활약했고, 일제의 전쟁 준비를 위한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재완 결정문
이재완은 1910년 10월 7일 일본정부로부터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와 대한제국 황실의 종친이었던 점이 고려되어 ⟨조선귀족령⟩에 의거하여 후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1922년 8월 11일 사망할 때까지 작위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한일합병 직후 일본정부로부터 후작의 작위를 받은 이재완의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호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에 해당된다. 이재완은 일본정부로부터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로 1911년 1월 13일, 은사공채 33만 6천원을 받았으며, 1912년 8월 1일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자로서 한일관계에 특히 공적이 현저한 자’로 인정되어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또한 이재완은 같은 해 12월 7일 정4위, 1918년 12월 20일에는 종3위에 각각 서위되었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특별법⟩ 제2조 제19호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여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 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의 조항에 해당한다.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이재완의 행위를 ⟨특별법⟩ 제2조 제7호, 제19호에서 규정하고 있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 결정문 중 이재완 부분 발췌
이달용 결정문
이달용은 1922년 8월 11일 부친인 후작 이재완이 사망함에 따라 ⟨조선귀족령⟩에 의거하여 1922년 10월 20일 작위를 계승하였다. 이달용이 작위를 계승함으로써 이재완이 수작할 당시 받았던 은사공채에 대한 권리를 동시에 승계받았으며, 조선귀족에 대한 예우 역시 계승하였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귀족이자 후작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이달용은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말 소장 귀족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전쟁협력단체인 ‘동요회’ 활동에 참여하여 국방헌금을 헌납하였다. 또한 그는 1922년 10월 작위를 계승한 이후 일본정부로부터 종4위, 정4위, 종3위의 서위를 받았다.
따라서 후작의 작위를 계승하고, 동요회를 통해 국방헌급을 헌납하였으며, 일본정부로부터 귀족으로서 서위를 받은 이달용의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호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에 해당한다.(중략)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이달용의 행위를 ⟨특별법⟩ 제2조 제7호, 제13호에서 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 결정문 중 이달용 부분 발췌
그의 친척 가운데는 이민을 간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진정서를 낸다거나 소송을 진행하는 작업을 혼자서 감당하느라 무척 힘이 들었다고 한다. 그의 친척들이 이민을 간 이유는 무엇일까?
뉴스타파 취재진은 친일파 후손 가운데 국적을 포기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엄청난 인내와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대한민국 관보에 나온 수십만 명의 국적 포기자를 일일이 엑셀에 입력한 뒤, 확보된 친일파 후손들의 명단과 맞춰보는 일이다. 동명이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생년월일까지 확인해야 한다. 한 해 국적 포기자가 2만 명 가량인데, 그 2만 명을 다 입력해서 비교해 봐도 국적을 포기한 친일 후손이 단 두 명만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밝혀낸 국적포기자의 숫자는 346명이나 된다.
국적을 포기한 친일파 후손들의 국적 포기 시점을 분석해보니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수십 명 수준에 불과했던 국적 포기자가 2000년대에 급증한 것이다.
1962197019751980198519901995200020052010201501020건수
친일 후손들이 줄지어 한국을 떠났던 2000년대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02 국회, 친일파 708인 명단 발표
2003 친일반빈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 통과
2004 친일인명사전 발간 시민 모금, 00일만에 10억 원 모금
2005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발족
2006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발족
2000년대 벽두부터 시민단체와 국회가 친일청산의 기치를 들기 시작했고, 이어 노무현 정부가 본격적으로 국가 차원의 과거 청산 작업을 진행됐다. 친일 후손들은 이 같은 친일청산 작업에 대한 불만 때문에 한국을 떠난 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추정해볼 수 있는 단서는 있다.
우리나라의 전체 국적 포기자 그래프다. 이 그래프를 보면 확실히 2000년대 들어 국적 포기자가 늘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90년 대 후반 외환위기의 영향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친일 후손들의 국적포기자 증가폭은 전체 국적포기에 비해 훨씬 가파르다.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2010년대의 추세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 기간이 종료되는 등 친일 청산 작업이 일단락되자 그 이후 친일 후손들의 국적포기는 눈에 띄게 줄어든다. 그러나 전체 국적포기 추세는 크게 줄어들지 않고 있다.
6. 2015년 8월 6일 새벽, 서울 반포동 ◯◯ 아파트
뉴스타파 취재진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새벽같이 반포동 ◯◯ 아파트로 왔다. 이인호 KBS 이사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어제는 아침 7시 반쯤 왔지만 이 이사장을 만날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이사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경원선 철도복원 기공식에 참석하느라 새벽 일찍 나갔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은 아예 새벽 6시부터 기다리기로 했다. 연일 계속되는 야근에 새벽 출근까지.. 자꾸 눈이 감겼지만 그래도 이 이사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아파트 현관문을 노려봤다.
8시 10분쯤 드디어 이인호 이사장이 나왔다. 이인호 이사장을 기다리고 있는 제네시스 차량에서 아파트 현관까지의 거리는 불과 5미터 정도, 이 이사장이 차에 타기 전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사장님 안녕하세요” 예의바르게 인사를 던지자 이 이사장도 환하게 웃어줬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자 이 이사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친일파 후손들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조부의 친일 논란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건 이 자리에서 할 얘기가 아니에요. 우리 할아버지 뿐만 아니라 그런 분들이 여러 분 계신데..제가 국제 회의에 참석해야 해서 지금 빨리 가야해요.”
차에 올라타려는 이인호 이사장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질 시간이 있었다.
“그동안 친일청산에 반대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하셨는데, 혹시 조부의 친일행적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닙니까?”
“천만에요. (반대한 적 없어요???) 나는 역사학자로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얘기한 것 뿐이에요”
“천만에요. 나는 역사학자로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얘기한 것 뿐이에요”
그 답변을 끝으로 이인호 이사장은 승용차 문을 닫은 뒤 아파트를 떠났다.
이인호 kbs 이사장은 그동안 여러 차례 친일청산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혀왔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발언에) 감동을 받았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를 비판하면 제정신 아닌 사람
...
문 후보자가 낙마해야 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 할 때”
- 2014년 6월 19일, TV 조선 시사토크쇼 ‘판’
(박헌영이 이승만의 합작 제안을 물리치면서) 내세운 명분이 친일파 청산부터 해야지 손을 잡을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 그건 결국 소련에서 내려온 지령 때문이었어요. 공산주의 입장에서 보면 소위 민족주의 부르주아 세력을 약화시켜야 되는데 친일파 청산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내세우기 좋은 명분이었기 때문에...
- 2014년 9월 23일, 전경련 강연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수반까지 하면서 독립운동가로 대단히 훌륭하지만 1948년 대한민국 독립에는 반대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공로자로 거론한 것은 옳지 않다.
...
상해 임시정부는 임시정부로도 평가받지 못했다
- 2014년 10월 22일 kbs 국정감사
일제 강점기 친일파였던 선대가 이룬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본에 힘입어 누구보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온 이인호 KBS 이사장. 그의 인생은 뉴스타파가 추적해 확인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 1,177명의 모습을 대표해서 보여준다. 물론 이인호 이사장에게 할아버지의 친일 행적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친일파의 후손으로서 선대의 행위를 겸허하게 인정하기는커녕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를 폄훼하고, 친일청산의 정당성을 매도하는 것은 공영방송의 이사장으로서 대단히 부적절한 언행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공인으로서 우리나라 헌법 정신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들의 이 같은 행태는 과거 청산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갈등을 더욱 키울 수밖에 없다. 해방 70년을 맞은 지금, 진정한 친일 청산과 과거 극복은 친일파 후손들이 선조의 잘못을 인정하고, 과거를 올바르게 기억하는 일에서 시작돼야 한다.
“할아버지하고 아버지가 전쟁에 협력을 했거나 반인륜적인 행위를 했거나, 이것에 대해서 저는 후손들이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상은 밝혀줘야 되는 게 이분들이 사회 중추에 계시잖아요. 이분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사실은 한국의 미래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하거든요. 이분들을 비난할 문제가 아니고, 이분들의 윗세대 분들이 어떻게 했느냐에 대해서도 이분들이 알아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다음 장 ‘부역의 대가, 부의 대물림’ 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 1,177명의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취재, 글 김강민김용진박중석송원근심인보이보람최윤원
디자인 최미정
사진 김남범최형석
출판 임종헌
자료조사 김민정김태민박단비박주은임세지서가람정상석제희원
자료제공 민족문제연구소
3부 부역의 대가, 부의 대물림 예고편, 2부 뿌리 깊은 친일, 그리고 3부 부의 대물림
댓글 34건
Sejin Pak
아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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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시티즌
10달 전
취재하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네요. 뉴스타파 늘 고맙습니다. 친일청산이 안 된 게 대한민국 천추의 한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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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승용
6년 전
조선총독부가 한반도에 잇다는 이유로 조선양민이 독립군손에 이천만명이 죽는다,니들은 과연 정의로운 사람들인가,
뉴스타파 묻고싶다,양아치들,조선왕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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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승용
6년 전
독립군은 조선양민 이천만명학살한 살인범이야,,똑바라로 역사을 알고 취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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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승용
6년 전
야 조선총독부는 우리집에서 만들었는데 뭐 대동아 공영군이 문제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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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승용
6년 전
북미대륙이 조선땅이고 조선나라가 이차대전을 패해서 한반도가 분단당하고,독립군은 조선양민 이천만명학살한 살인마후손들인데.
엉터리 조작을 보도하면서 뉴스타파라는 소리가 나오냐,,조선왕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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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비온뒤
7년 전
잘 읽었습니다. 오래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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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Jjjjeanne
7년 전
차차기 대선주자는 친일파 숙청사업을 해줘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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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ooorangoo
7년 전
어떻게 해야 부끄러운 핏줄을 긁어낼 수 있을까?
1. 국가기록원에 가서 친일행위자 정보를 확인하면서 그 후손에 대한 단서를 잡는다.
2. 정부기관이나 소송기록에서 그 후손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고,
3. 등기부등본을 이용해서 주소정보를 캐치한다.
4. 현장확인을 통해서 부끄러운 핏줄의 현재진행형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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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ㅇㅇ
7년 전
수고 아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정말 나쁜 놈들이네요, 친일파놈들, 그들 조국이 일본이라면 애국자겠지만, 그들 국적이 한국이기에 매국노인 것입니다. 한국인이라면 한국을 위해야 하고, 미국인이라면 미국을 위해야 합니다. 현세대 지금을 살고 있는 한국 지도층과 그들의 자식들의 국적은 어디일까요? 그들이 미국 국적자가 대다수라면, 한국은 미국 식민지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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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봄봄
8년 전
늘 감사합니다...
2부 기사 중에 오류(오타?)가 있는 듯 하여 말씀드립니다. (기사오류인데....이름을 잘못 기록한 걸로 보아 '오타'인 듯...)
중간 부분에 나온 기사입니다.
"현준호는 아들인 현영원을 당시 재계의 실력자였던 김용주의 딸 김문희와 결혼시킨다. 김문희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누나다. 그리고 현영원과 김용주 사이에서 난 딸 현정은은 현대가의 5남인 정몽헌과 결혼한다. 친일 집안과 재벌가의 혼맥이 구축된 것이다."
'현영원과 김문희 사이에서 난 딸 현정은은...'이라고 고치셔야 할 듯 합니다.
(음...이걸 이대로 놔두면...사위와 장인이 결혼해서 딸을 낳는...엄청난 결과가 나온다는...(
이렇게 애써 힘들여 취재하신 내용이니만큼 조금의 오류도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늘...힘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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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선민
8년 전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이번 기획물이 올한해만의 특정기념물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친일후손의 조사와 같은 비중으로 애국지사들의 후손에 대한 조사를 통해 이를 당대와 후손에 알리고
매국을 통한 재산 환수와 같이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도와줄수 있는 역활과 창구로서도 힘써 주시길
염치없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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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김자희
8년 전
고생하셨습니다. 후원시작합니다~!! 뉴스타파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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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
풍기동
8년 전
뉴스타파 고생많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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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
풍기동
8년 전
뉴스 타파 고생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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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최용준
8년 전
고생하셨습니다. 선조의 친일 행적에 후손으로써 그것을 사죄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 마음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쉽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최선을 다해준 뉴스타파 제작진에게도 경의를 표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일재 친일에 대해서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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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수호천사
8년 전
친일파 명단에 전직 대통령 박정희가 빠지다니...
아 이럴수가 성공한 구테타는 용서가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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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감사합니다
8년 전
왜 사과하기 힘들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추측해 보자면... [1] 경제적 이해관계때문에? 사람들이 이거 핑계로 영원히 돈달라고 할까봐? 국가환수하려는 땅을 담보로 돈 빌리고 엄청 사업을 많이 벌여놔서 그거 반납되면 사업 다 망하나?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그렇게 구차하지 않은데... [2] 일본 사람들은 가미가제 특공대 나서고 정신대 착취하고 731부대 마루타 실험한 것이 당시 분위기상 어쩔수 없는 일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런 분위기 되면 또 할거라고 하던데.... 그 선상에서 생각하면, 친일했던 일본식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은 사과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만 남들 따라 사과할건가? 누군가 오야붕이 나서서 사과해 주기를 기다리는 꼬붕들의 자세인가? 어쩌지? 오야붕인 아베총리가 저러는데, 무슨 사과를 감히 나서서 하겠나. 철저히 일본스러워야 지배자그룹에 속한다는 인식인가? [3] 자기 스스로 나서서 사과한다고 하면 친척한테 왕따 당할까봐? 사회적 이해관계? 하긴 친인척 명의로 서로간에 재산 은닉해 뒀으면 다들 난리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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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리나
8년 전
이번 친일관련 특별편을 보고 뉴스타파 후원을 결심했습니다. 한국의 아무도 언급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심도있게 다루는 걸 보고 신뢰가 생겼어요. 이런 부분을 알기쉽게 파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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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
착한아이
8년 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과거의 청산이 너무나 늦었지만 이런식으로 라도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가 정말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 나라의 곪아있는 치부를 드러내어 치료해주시는 역할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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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Youngjo Hur
8년 전
우린 분란의 한가운데 서길 주저해서는 아니됩니다.. 뉴스타파 와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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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TEdd Kim
8년 전
일본제국주의 한반도 침략과 병탄 및 식민지배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반민족 행위자가 처벌받지 않고 이승만의 보호와 국가의 고위직의 등용으로 오히려 영화와 기득권 세력으로 사회전반의 공고한 세력화가 되어버린 현재에 친일청산이란 명분이 있지만 실익은 없는 친일파에게 면제부를 주는 꼴이 되고 말수도 있다. 한국사회에 처벌받지 않은 친일청산의 부채는 역사의 이름으로 영원히 갈등과 싸움의 명제가 되어야 한다. 나라를 팔아먹고 침략자이자 약탈자인 일제에게 충성한 반민족행위자와 후손이 사회의 기득권이 되어버린 마당에 무엇이 올바른 정의이고 바른 행동의 기준이 되는지 역설을 할수 있단 말인가. 국권회복을 위하여 충성한 후손은 몰락이 되고 친일파의 후손은 사회의 기득권이 되어버린 현재에 바른가치 의 기준이 무엇이란 말인가. 친일청산이 아니라 영원한 역사의 진실과 사실을 파헤치고 친일의 피해와 정신적 독소가 얼마나 사회전반을 병들게 하였으며, 현재의 진행형으로 사회에 미치는 가치전도와 정치적 의사결정에 미치는 나쁜 영향을 밝혀내야 한다. 정의와 진실편이 아니라 부정의한 강자편에 줄을 써야 신상에 이롭다는 관행을 깨어야 한다. 공익이란 이름으로 더러운 권력의 정략을 정당화시키는데 동원되고 이용당하는 조작되는 여론이 아니라, 여론결집이 정의와 진실을 끝까지 실현하고 잘못되고 은폐된 더러운 권력의 남용과 거래를 양지로 들어내고 아직까지 밝혀내지 못한 역사적 사건들의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는데 끝나지 않는 조사와 진실 추구가 모든것들이 밝혀질때 까지 멈추어서는 않된다. 이 일은 결론을 위한 끝이 아니라 지금부터 가일층 추진이 되어야 한다. 일제뿐만 아니라 독재자의 권력남용도 일제의 친일과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있는 이상 성역없는 진실 파헤치기는 영원히 지속이 되어야 한다. 강자편에 서고 강자의 눈치를 보는 현재의 추태는 이제는 오직 진실를 향하여 나아가는데 그 누구도 감히 길을 막지 못하는 여론의 일방적 지원이 당연시 되는 가치회복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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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최준영 TEdd Kim
8년 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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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DR뱃사공
8년 전
고맙습니다.
사실 뉴스타파에서 친일문제를 이렇게 진지하게 다루고 있을줄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에야 뉴스타파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인력으로 이렇게까지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나라의 기득권으로써 친일파가 국민의 삶에 실제로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이렇게 명확하게 보여준, 그리고 앞으로도 보여줄 매체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겨우 후원금 몇푼에 이토록 중대한 사회적 책무를 대신 떠넘긴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힘내십시오.
저도 힘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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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히스토리
8년 전
고생하십니다. 하지만 전 굉장히 아쉽네요. 고위급 친일반민족 인사들 뿐만 아니라 하위급 친일반민족 인사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공개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하위급 친일반민족 인사들의 후손들중에서도 막대한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을것이 뻔한데 말입니다.
정말로 공개할거라면 모두 공개해야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똥싸다가 중간에 끊은 것처럼 찝찝한 기분입니다.
고위급 인사들만 공개하는데 이정도인데 하위급 인사들까지 다 합치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친일파 후손들이 이 나라를 좀먹고 있을까요?
현실적으로 하위급 인사들까지 다 공개해버리면 더 큰 저항에 부딪힐게 뻔하니 두려웠겠죠?
정말로 친일반민족매국노행위 인사들을 처벌하려면 모두 공개해야 하지만 그건 뉴스타파가 하기엔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넘어가야한다는게 정말 화나네요.
언제쯤이면 우리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가르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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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DR뱃사공 히스토리
8년 전
저도 그 부분은 아쉽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모든 인물의 후손들을 전부다 찾아냈다면 훨씬 의미있는 일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그 모두가 공개된다고 해도, 과연 처벌이나 가능할런지요. 정치, 경제, 언론의 거두가 모두 친일파의 후손입니다.
다음 대선 지지율 1위 후보도 친일파의 후손입니다. 심지어 노무현때도 규모를 축소하여 발표하였던 친일파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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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히스토리 DR뱃사공
8년 전
네 정말 아쉽습니다
하지만 모두 공개하기도 어렵고 처벌하기도 어렵죠
이해합니다만 이걸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상황에 처한게 화나는거죠
아무래도 수많은 친일매국노 후손들이 대대로 기득권을 세습해왔기 때문에
친일청산이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통일과 같은 이루기 힘든 꿈이 되어버린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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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DR뱃사공 히스토리
8년 전
히스토리님의 그 분노가 친일파 문제 해결을 위한 작은 씨앗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인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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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이무식(Moozeek,Lee)
8년 전 edited
감사합니다.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과거사 청산 만큼 의미있는 것이 미래를 위한 역사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교육현실은 어떻습니까? 역사교과서를 보면 잘못된(쪽팔리는) 부분을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두루뭉술 넘어가는 부분들이 많은데 이는 스스로 우리역사를 왜곡시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불쌍한 우리 아이들이 어디서 무엇을 배워 알겠습니까? 잘 가르쳐야죠. 이것이 우리 기성세대의 의무입니다.
그럼 계속 수고해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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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burs oh
8년 전
어렵지만 반드시 청산하고 가야할 이유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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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서경수
8년 전 edited
민족의 정기를 다시 바로 세우는 기회로 잡아야합니다! 일각에서는 지금 와서 과거를 밝힌들 무슨소용이 있냐 라고 하시는데 역사는 늘 시기를 두고 반복과 과거의 학습된 결과물들이 재현되었습니다! 한 예로 제2차 동학농민혁명 때 일본의 노골적 조선침략에 대응하기위해서 일어난 농민들은 일본군에 당하고 조선 내의 기득권을 가진 양반과 지주들에게 당했지요 그리고 그후 시기가 지나서 일제 강점기에 조국 독립을 외치면 무장항쟁한 독립군들은 친일행위로 기득권을 유지한 반민족행위자들에 의해서 광복 후 처형 당하는 사례들도 있지 않습니까? 정의가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이겠습니까? 조국를 배신하고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라면 친일도 마다하지 않은 이들을 처벌하지않고 지나간다면 나중에 어떠한 일이 발생했을때 그 누가 앞장서서 대한민국를 지키면 내 주변을 지키겠습니까?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배워야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조상들의 지혜와 식견을 통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과거의 잘못한 부분을 답습하지 말라는것이지요
그러니 친일의 후손을 밝히고 그들이 그들의 조상을 대신해서 용서를 구하고 부당하게 경제적 영위를 누렸다면 응당 그에 맞는 결정도 이루어져야지만 민족의 정기를 바로 잡을수 있으면 그래야만 미래의 대한민국도 존재할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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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김포시민
8년 전
죽은 친일파의 후손을 까발리고, 그들이 조상의 친일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아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영화 암살에서는 염석진을 죽여 현실과는 동떨어진 대리만족을 느끼게 했지만, 영화 밖 친일파 후손들의 실상을 알게 된다면 아마 대부분은 역사의 비정함과 상대적 박탈감에 분노하기보다 나도 친일파처럼 살아야겠다는 영특한 자각(?)을 선택할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 이미 그런 놈년들이 판치는 세상을 실컷 봤으니까... '단순히 과거 청산이 아닌 과거 극복의 길을 모색하고, 치유와 화합으로 나갈 수 있는 단초를 찾아보려' 한 뉴스타파의 기획의도는 일제침략에 대한 일본정부의 사과를 받아내 화해하자는 만큼이나 얼척없고 낭만적이다. 나는 아직 그들과 화해할 마음이 없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화해라니... 차라리 득세한 친일 후손들의 자산형성 과정을 드러내 국고환수 수위와 폭을 넓히는 특별법이라도 개진한다면 박수를 보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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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DR뱃사공 김포시민
8년 전
죽은 친일파의 후손을 까발리고 그들이 조상의 친일행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친일로써 형성한 권세를 누리며, 국가 경영에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파워엘리트가 무려 14%가까이 됩니다. 이들이 조상의 과거 친일행적에 대해, 현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가 결국은 우리나라가 친일문제를 다루어가는 가이드라인이 됩니다... 말씀하신 화해에 대한 견해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과거 극복과 치유 화합은 말씀하신대로 떡줄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죠... 그것이 아니라면 피흘리며 가는 길 이외엔 없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를 허울좋은 화해라는 명분으로 풀어놓으니 그 과거의 망령들이 아직도 판을치는 세상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청산할것은 청산 해야합니다.근대로부터 현대까지 대중적 정의가 단 한번도 명확하게 실현되지 못한 이땅에 '화해'는 아직 이릅니다. 아직 이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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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joung tae kim
8년 전
다까끼 마사오, 즉, 박정희를 친일로 규명 하지 않는 이상, 현재 재벌들의 절반이상인 친일 세력들을 잡아낼수도,아니,잡아내기는 커녕, 규명할수도 없을것이다.
만약 다른 나라들이 다까끼 마사오 처럼 일본군 장교 해달라고 혈서까지 써서 바치고 일본군 장교로 활동했다면, 그건 친일정도가 아니라,바로 사형이였을것인데,,,
어쨋든 전범장교가 사형이 아닌, 오히려 대통령이 된 순간부터 이미 틀어져 버린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후세의 교육이고 뉴라이트 인데, 현재의 60대 이상이 지금의 10대 들이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으로,,,
위의 친일의 자제분는, 처음에는 아니라고 햇으나, 알만큼, 아니, 알만큼 이상 더 많이 알고 있을것이라 본다,
답장보낸것이 꼴랑 네이버 배낀것이라는 점에서 이다,
지금 있는 사회적 지위 및 나이를 보면 일제 시기 30 년 전 까지만 알고 있다는게 말이 않됀다,
죽은 날짜와 알고 있는 날짜의 공백이 30년이 넘는것 같은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윗손을 몰랐다는게 말이 않된다,
단 제 생각보다 오랜 기간동안 총독부에 재임하셨다면 실제 어떤 잘못을 하셨었는지 확인하기는 그만큼 어렵겠네요.라,,이게 말이 돼나, 서당개가 웃것다.
조폭에 30년 몸담았지만, 조폭질는 않햇다 라는 건데,,,
머 한마디로 " 니들이 그럼 우짤낀데,,, 우리집안는 지금은 다 뺏겼더라도 이미 해방이후 해먹을만큼 해먹었고, 꿍칠만큼 꿍쳐놨다. 그동안 교육도 잘 받았기 때문에 ,,,, 해방직후 사형 않당하고 지금껏 잘살아왔고 앞으로도 잘살꺼다 " 로 답장요약이다.
머 저사람이 먼 잘못이냐,
친일 우두머리 다까끼 마사오가 친일로 규명돼지 않는 이상, 저들은 절대 전범다운 처벌을 않받을것을 알기에 저런식으로 행동하는것 뿐이다. 얼마전까지만해도,독일전범 장교들은 도망다니고, 잡히면 사형당하는 다른 나라와 비견된다. 천명을 살리더라도 한명을 죽인건 용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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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뉴스타파화이팅 joung tae kim
8년 전
이런 귀중한 글을 스크롤 몇번으로 읽어서 죄송하네요 작게나마 후원하러갑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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