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09

H2O 부르스 커밍스 교수 한국현대사 에서 인상 깊은 대목 [2]

H2O의 블로그

H2O 부르스 커밍스 교수 한국현대사 에서 인상 깊은 대목1






37 : 3.15 부정선거와 미국,유엔


"1960년 2월, 이승만 정권은 대통령선거가 몇 주 후인 3월 중순에 치러질 것이라고 발표했다. 선거일이 다가오자, 미군정기 동안 군정경찰을 이끌었고 미국인들과 사이가 좋았던 야당 후보 조병옥이 암으로 워싱턴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사망했다.
이로 인해 선거가 연기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선거운도의 뇌물수수나 이승만 반대자들에 대한 테러도 없어지지 않았는데, 이런 부정행위들이 모두 미국인과 유엔 참관인들의 코앞에서 벌어졌다.


선거 당일인 3월 15일에는 부정투표, 집단투표, 야당강세지역에서의 투표함 실종 등의 극심한 선거부정과 권력남용이 일어났다.(역시 미국인과 유엔 참관일들 앞에서..)
이 모든 수법은 이승만과 보행성 운동 실조증으로 쇠약해진 이승만의 러닝메이트 이기붕의 표를 터무니없이 크게 부풀렸다. 이승만은 투표자수의 거의 90%를 얻었다고 주장했다.


선거 전에 이미 시작된 학생들의 항의가 차츰 확대되어 전국으로 번졌다. 남동부 지역 마산의 경찰은 시위대와 충돌하여 몇몇 학생들을 살해했다.
한국군은 미군사령관인 카터 매그루더 장군에게 군대를 출동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고 매그루더는 이를 승인하여 한국 해병대가 질서회복(?)을 위해 마산에 상륙했다.


미 국무부는 기자들에게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원칙에 '역행하는 어떤 행동들도 개탄한다'고 밝히는 유별난 조치를 취했다. 이승만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 북진통일을 다시 한번 촉구했다.
사태는 한동안 가라앉았으나 4월 12일 교복차림을 한 상태로 고등학생 김주열의 물에 부푼 시체가 마산 부두에서 인양되었다. 그는 선거일 이후 실종되었는데, 그의 눈구멍에서 최루탄 파편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1940년대에 좌익 강세지역이었던 마산의 시민들이 봉기했고 참가자가 4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경찰서와 관공서를 공격했고, 경찰은 군중에게 발포하여 몇명인지 모를 사상자를 내었다.
다시 주한미군사령관은 질서회복을 위한 군대출동의 요청을 받았고 이를 승인했다. 그러나 반란은 전국적으로 퍼졌고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얼마 되지 않아 사태는 완전히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그후 오랫동안 4.19로 기념되어온 4월 19일 적어도 10만 명의 학생과 청년으로 이루어진 엄청난 군중이 경무대에 결집하여 이승만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경무대의 경비병들은 군중을 향해 직격탄을 퍼부어 서울 시내를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적어도 115명의 젊은이가 죽었고 거의 1천 명이 부상당했다.
마침내 정규군 부대가 시내로 진입하여 질서를 잡았는데, 시위학생들은 많은 군인들이 항쟁에 동조하고 있다고 현명하게(?) 믿었기 때문에 군인들에게 협조했다.


그날 저녁 미국대사 매카나기는 이승만을 방문하러 갔는데, 이승만은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거의 알지 못했지만 그대로 완강히 버텼다. 이틀 후 매카나기를 다시 이승만을 만났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4월 25일 수백명의 대학교수가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는 평화시위를 벌였고 그날 저녁에는 5만 명의 시위대가 부통령인 이기붕의 집을 박살냈다.
다음 날 또 5만 명의 사람들이 서울의 거리에 몰려나오자 매카나기 대사와 매그루더 장군은 이승만을 찾아가서 그에게 사임을 종용했다. 두 사람이 경무대를 떠나는 순간 모여 있던 군중은 그들에게 큰 박수갈채를 보냈다.
3월 29일 사람들이 도열한 거리를 따라 천천히 행진하면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는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다."(p.494~496)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우리가 몰랐던 사실 중 하나. 4월 혁명을 불러일으킨 3.15 부정선거에 대해 선거자문과 관리에 참여한 미국과 미국의 거수기구인 유엔은 부정선거와 폭력, 테러를 목격했으면서도 그 선거과정과 결과를 그대로 인정한 것입니다.
물론 미국과 유엔은 이미 1948년 5.10 단독선거부터 그 이후 남한의 모든 부정선거 과정을 감시, 감독하면서 항상 결과를 인정하고 불법 부정한 이승만 정권을 승인했습니다.
그래서 커밍스 교수는 3.15 선거 후 국무부의 반응을 이상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승만 정권의 반응도 이해가 됩니다. 언제부터 미국이 남한의 부정선거에 관심이 있었다고???


○ 또한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주한미군사령관께서는 1979년 12.12 군사쿠테타와 1980년 광주시민에 대한 학살을 위한 한국군의 동원을 승인한 것처럼, 1960년에도 시위대에 대한 진압과 해산을 위한 군대의 이동을 승인해주었습니다. 1960년에는 해병대를 먼저 움직였네요.



○ 2012년 4.11 총선과 12.19 대선에서의 부정선거에 대해 지금도 미국과 유엔은 아무런 관심을 표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의나 민주주의, 인권, 공정선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미국의 군사적,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이권에 도움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관심사일 뿐입니다.
물론 주한미군과 CIA, 대사관과 NSA, 문화원과 상공회의소 등이 은밀하고 집요하게 관심을 가지고 체크하고 조정하고 있을 겁니다. 아직 자신들이 나설 필요가 없는 상황이죠.







39 : 최루탄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사 연구에서 인상 깊은 대목 - 39 : 최루탄 ]


○ 1960년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을 사망케 한 최루탄, 1965년 한일협정 반대 시위 현장에 더 지독한 가스가 등장하고 1987년 6월 9일 이한열 학생을 또다시 죽인 최루탄...
민주정부 이후 최루탄은 최소한으로 사용되지만,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최루탄은 최루액으로 변장하여 물대포와 최루액 분사기로 여전히 불법적, 비인도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비인간적 시위진압 무기가 언제 어떻게 등장했을까요?


"이 긴 1960년대의 (중앙정보부의 악행) 목록에서 빠져 있는 유일한 것은 중앙정보부가 문선명의 의뭉스런 종파인 통일교를 후원한 일인데, 통일교는 곧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조직을 만들어냈다.


여러 해 동안 문선명의 오른팔이자 통역자였떤 박보희는 1960녀대 초반 워싱턴에서 활동하던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 중앙정보부는 1960년대 초에 일본에서 새나라 자동차르 들여오는 일에도 관여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제느 고인이 된 창립자 박노정과 그의 미망인 박경윤 주위로 엄청나게 복잡한 음모망이 자라났다.
박경윤은 1994년에 통일교와 북한 사이를 이어준 핵심인물이었고, 중국에서 북한기업의 거래 중개자 노릇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직접 박보희를 평양에 데리고 가서 김일성의 장례식에 참배시키기도 했다.[주간조선 1994. 8. 18]


1960년대에 중앙정보부가 비교적 자제(?)를 했다면, 1970년대에는 이 기구의 자제력 부족은 정권 수뇌부에게 좀더 많은 문제들을 야기할 뿐인 듯했다.


이 변화된 시대를 알리는 징후는 서울시 곳곳에서 걸핏하면 맵고 타는 듯한 가스, 즉 최루가스가 떠돌아다니는 현상이었다. 몇몇 기자들은 한국을 '최루가스의 나라'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1965년 봄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반대시위 동안 반대자들은 미국이 박정희 정권에게 '유독성 화학무기'를 공급한다고 비난했는데, 사실 미국은 원조계획 하에 한국군에게 상당 기간 동안 '최루가스와 같은 표준적인 폭동진압 자원들'을 공급해 왔으며, 그후에도 수년간 계속 공급했음이 밝혀졌다.
미국의 폭동진압 자원 공급은 물론 비밀계획이었느ㅏ 한국의 한 야당지도자가 이를 알아내어 추궁하는 바람에 주한미군사령관 해밀턴 하우즈는 1965년 4월 23일 그 존재를 공개적으로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물론 비밀계획이었으나 한국의 한 야당 지도자가 이를 알아내어 추궁하는 바람에 주한미군사령관 해밀터 하우즈 장군은 1965년 4월 23일 그 존재를 공개적으로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한국은 그 제조기술까지 넘겨받았다.


1969~1971년 시기의 반전데모 동안 미국경찰의 최루탄 세례를 받아본 적이 있기 때문에 나는 한국의 최루가스가 눈과 코에 견딜 수 없는 통증을 주는, 훨씬 더 강력한 '페퍼가스' 종류였음을 독자들한테 확언할 수 있다."(p.512~513)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김주열 열사와 이한열 열사를 죽음으로 내몬 이승만 독재, 전두환 군사정권의 살인무기, 최루탄을 미국이 시위진압 기술과 함께 제공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 미국은 참으로... 남한에 너무 많은 살인기술과 살인도구를 전수해주었고, 살인마를 키워주었습니다.


○ 박정희와 통일교, 중앙정보부의 커넥션에도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네요. 박근혜와 통일교는 대를 이어 어떤 검은 거래가 있을지...?







40 : 70년대 중앙정보부


"한국의 새로운 정보부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전에는 기밀에 묶여 있던 국무부의 한 연구에 따르면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반전복 활동이야말로 자유세계 곳곳에서 미국정부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으며', 그럼으로써 '1290-d 프로그램'으로 알려진 계획 아래 미국 당국은 대한민국의 보안기구들에게 '장비와 적당량의 훈련 프로그램'을 지원했으며, 한국의 숱한 정보단체들 사이에 좀더 나은 협조관계가 구축되도록 애썼다.
이 연구에 따르면 이 계획이야말로 '요술사의 견습수업'이었고, 그 결과 거대한 한국 중앙정보부가 탄생한 것이다.


김종필의 책임 아래 중앙정보부는 '예산편성이 되지 않은 자금들'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한동안 일반적인 '부패'는 줄어드는 경향이 있었다. 왜냐하면 정치활동이든 박정희와 김종필이 지원하고 싶은 다른 어떤 것이든 이를 위한 자금 조달 과정이 중앙고위직의 차원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지금 입증될 수는 없지만, 많은 관찰자들 역시 거대한 돈이 야당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감안하면 야당이 선거 바로 직전에 걸핏하면 양분되는 현상이 설명될 수 있다.


중앙정보부가 요원들을 야당 내부에 끊임없이 침투시킨 것은 분명했는데, 이들은 정보부의 앞잡이로 활동하거나 당 지도부 경선이나 대통령 선거에 추가의 후보자들이 출마하도록 선동했다.
이를 '부패'라고 부르는 것은 어쩌면 오도하는 것인지 모른다. 전후 한국역사의 상당 기간 동안 정치가 이런 식으로 운영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군사정부는 부자들에게 돈을 토해내게 하는 데에서는 이승만보다 훨씬 체계적이었고, 점차 액수는 천정부지로 마구 뛰었다.
1961년 8월 군사정권은 28명의 기업인들이 3,700만 달러를 제공해야 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공장이 몰수될 수도 있다고 간단하게 알렸다.
1962년 김종필과 중앙정보부는 '고도로 수상쩍은 상업거래와 서울 증권거래소의 노골적인 부정조작으로' 운영자금을 모았다. 주식조작 거래만으로도 4천 만 달러를 고스란히 손에 넣었는데, 그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대기업들이 관례적으로 약간의 돈을 내어놓는 것은 당연시되었으며, 걸프오일사 같은 외국기업들도 선거 직전에는 거액을 냈다. 1970년대 중반 상원청문회에 따르면 1967년 걸프사에서 100만 달러, 1971녀에는 300만 달러를, 거기에다 칼텍스 페르롤리엄사에서도 400만 달러를 내었다.
미국인들은 이 돈을 'J 요인'으로 불렀는데, 이는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정치적 대가, 즉 '뇌물' Juice Money를 뜻했다.
이런 활동의 상당 부분이 2차대전 전후 초창기의 이탈리아나 일본의 경우처럼 한국 중앙정보부와 협력하는 CIA 요원들에 의해 중개되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중략)


유신시대에 이르러 중앙정보부는 막강한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러 완전히 불한당의 기관이 되었다. 중앙정보부는 내부의 권력투쟁에도 불구하고 그 의도와 목적에 있어서는 원활하게 기능하는 기구였다.
의사소통이 상하로는 지휘계통을 따라, 좌우로는 국립경찰, 국군보안사, 지역 지방 행정부, 그리고 그밖의 수많은 기관들과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정보부 요원은 도처에 깔려 있었는데, 야당적인 성향을 약간이라도 지닌 정치단체뿐 아니라 신문사,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 회사의 노조, 대학의 교실, 심지어는 미국 대학의 교실에까지 깔려있었다.


내가 전에 가르쳤던 학생 하나는 한국의 한 명문대학으로 돌아가 강의를 했고 곧 학장이 되었다. 그는 한번은 내게 자신의 대학시절 대부분에 걸쳐 있었던 학생시위 기간에 무려 7개 기관, 즉 지역 경찰서, 지역 행정기관, 군정보국, 중앙정보부 내부 부서 혹은 그것과 연결된 몇몇 부서들에 주별 보고서를 썼다고 말했다.


지금은 서울의 한 명문대학 교수가 된 또 한 친구는 외국대학에서 미군정기의 한국정치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1970년대 중반에 서울로 돌아오자 그는 중앙정보부의 남산본부로 끌려갔는데, 심문자들은 그를 전기고문기계에 연결해 놓고 그의 논문의 몇몇 대목을 발췌하여 읽으면서 왜 이런 말을 썼는지, 왜 저런 말을 썼는지 물으면서 질문 사이사이마다 전기를 넣어 참기 힘든 고통을 가했다고 한다. 게다가 고문자들은 예술가인 그의 아내한테 전화를 걸어 남편의 비명소리가 들리도록 수화기를 끊지 않은 상태로 두기도 했다는 것이다.
약 5년 후에 이 사람은 방문연구원으로 미국에 왔는데, 한번은 내게 식료품 가게로, 그 다음에는 주류판매 가게로 태워달라고 청했다.(도청과 미행에 대한 피해의식을 말하는 듯...ㅠ) 아직도 위스키를 들이키지 않고서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사지에 심인성 신경질환 증세를 보여, 예술활동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그녀는 회복하여 1980년대에는 다시 자신의 일에 복귀했다.
이 가족은 강력한 인맥을 통해 구제를 받았지만, 다른 가족들은 이만큼 운이 좋지 않았다.


[뉴욕타임즈]의 기자 하나가 1973년에 한국중앙정보부에 관해 이런 기사를 썼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도처에서 모든 일과 사람을 감시한다. ... 한번은 한 외국인이 휴일날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떠돌아다니다가 먼 시골의 분식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중앙정보부가 서울에서 거기까지 전화를 연결시켜 준 적도 있다'
한국의 시민들은 중앙정보부의 감시에 대응하는 최상의 방법은 '어떤 일에 관해서건 아무한테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 것', 심지어 가족한테까지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다.(중략)


1973년 7월 김대중이 워싱턴대학의 한 강의실에서 기껏해야 15명 밖에 안되는 청중을 상대로 강연을 했다. 한달 후 그는 도쿄에서 한국중앙정보부 요원들한테 납치되어 살해될 뻔 했다.
7년 후 그가 '반역죄'로 기소되었을 때, 워싱턴대학에서 행한 박정희 정부에 대한 비판도 기소문에 포함되었는데, 15명의 청중 가운데 하나가 중앙정보부에 넘긴 녹음테이프를 근거로 한 것이다."(p.521~526)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중앙정보부의 탄생, 악행, 뇌물... 박정희 군사정권의 탄생과 유지를 위한 국가적 범죄 곳곳에 제국주의 미국의 음모와 모략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21세기에는 그들의 음모가 한반도 남단에서 사라졌을까요? 미국 정보당국이 청와대를 도청하고 곳곳에 CIA의 간첩을 심어놓은 것이 스노우든의 폭로로 이미 드러났습니다.


○ 박근혜와 유신후예들이 차지하고 있는 모든 자산이 스스로의 노동으로 정당하게 벌어들인 것인가요? 박정희와 중앙정보부가 주가조작을 하고, 새나라자동차를 불법으로 추진하고, 환율을 조작하고, 기업들에게 돈과 회사를 빼앗고, 외국기업을 받아들이면서 엄청난 뇌물을 받아서 모두 탕진했을까요? 아니면 고스란히 차명으로, 실명으로, 명의세탁으로 여전히 보유하고 있을까요? 스위스의 박정희 불법비자금은 국가에 회수되었나요?
2010년대가 끝나기 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특별법 뿐 아니라 군사독재반국가행위자특별법도 제정하여 범죄로 축적한 자산과 소득을 모두 회수해야 합니다.


○ 21세기 들어 야당 인사들, 특히 민주당은 CIA와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마수와 공작에서 벗어나 있나요? 2012년 총선에서 야권단일후보 6석을 날려버린 한화갑, 한광옥의 정통민주당은 어디에서 수십 억의 정치자금을 동원했을까요? 김한길 지도부는 왜 그렇게 새누리당이 곤경에 빠질 때마다 도움을 주나요?
왜 박근혜는 CIA 간첩 김종훈을 공기업에 심으려 할까요? 새누리당은 왜 몰상식한 군작전권 반환 연기를 추진하고 F-15 전투기 등 미국무기를 구입하려 할까요? 그것이 박정희의 뇌물수수 행태와 관련이 없을까요?
제 질문이 과연 음모론일 뿐일까요?


○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총리실, 국정원과 기무사, 사이버사령부, 경찰청은 왜 불법적인 민간인, 야당인사 사찰과 도청을 멈추지 않을까요? 그들이 인터넷에서 댓글만 달았을까요? 채동욱 전 총장 찍어내기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난 것 아닌가요? 왜 그것에 대해 민주당과 정의당은 꿀 먹은 벙어리인가요?


○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의 민간인 불법 체포와 납치, 고문과 사찰에 대해 국가는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배상하고 재발방지를 추진한 적이 있나요? 그분들이 왜 국가로부터 그런 고통을 당하고 숨어 지내야 하나요?
CIA,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의 불법 프락치와 장학생에 대한 실상이 제대로 조사된 적이 있나요? 국회는, 민주당은 왜 그런 과거의 악행에 대해 진상조사를 추진하지 않나요? 지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나요?


○ 국가권력기구의 과거 범죄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사죄와 배상은 시효 없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물론 재발방지를 위한 민주적 민간통제 제도도 수립해야 하고요.
그렇지 않고서 일본에게 식민지 악행에 대한 사죄를 오구하고 피해보상으리 요구한다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 아닌가요?







41 : 김선명과 민주주의


"수없이 많은 개인들의 수십 년에 걸친 희생을 통하여 남한은 이제 민주주의 우방들을 역겹게 하지 않는 정치를 갖게 되었고, '현 추세가 유지된다면' 마침내 모든 한국인이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민주주의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치를 것인지가 문제이다. 아마 김선명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 것이 교훈적일 듯하다.
1995년 8월에야 감옥 밖으로 나온 김선명은 철창에 너무나 오랫동안 갇혀 있는 탓에 먼저 풀려난 감옥동료인 김석형이 그에게 전화 사용법과 TV 켜는 법을 가르쳐주어야만 했다. 사람들은 김선명에게 그의 93세 노모는 그가 이미 20년 전에 죽은 것으로 믿고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1950년 10월 한반도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맹렬한 투쟁 속에서 미국 정보장교는 북한을 지지하는 남한사람 김선명을 체포하여 그를 대한민국 당국에 인도했다. 당국은 그를 간첩으로 기소했는데, 그는 그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김선명은 북한 정부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충성심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간수들은 자술서를 받아내려고 그를 처형하겠다고 위협하고 고문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게 더욱 심한 압박을 가하려고 그의 아버지와 누이까지 처형했다.
그래도 그가 믿음을 버리지 않으려 하자 그들은 그를 아주 작은 독방에 44년 동안이나 가두어놓은 것이다.


누구에게 말을 하는 것도 친척을 만나는 것도 혹은 일체의 글읽기도 금지당한 채 노상 두들겨 맞으면서 '감방의 기아식사'로 용케 살아남은 김선명은 '전향'하지 않으려 했고 북한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포기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감금되어 있었던 것이다.
'간수들이 내게 진한 고깃국 같은 음식을 보여주곤 했지요. 그러고 막상 저녁식사 때는 그냥 멀건 국물만 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고 싶으면 사상을 바꾸는 게 좋을 거다'라고 말하곤 했지요.
그는 29세에 감옥에 들어와 73세에 나왔는데, 끝까지 전향하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는 아마도 세계 최장기 복역의 정치범을 감옥에 가두고 있다는 당혹감 때문에 그를 풀어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20년을 복역한 24명의 북한 동조자들이 아직도 감옥에 더 남아 있었다.


독자는 이것이 양차대전 사이에 반항자들의 사상을 통제하고 그들을 전향시키려는 일본식 수법들의 불행한 잔재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이런 오욕스런 기원을 넘어서서 남한 스스로가 취한 자발적인 행동인지를 물어야 할 것이며,
이런 짓을 계속하는 정권한테 우리가 과연 '민주주의'라는 말로써 위엄을 부여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p.568~570)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법으로서 전향제는 1998년 폐지되었고, 김선명 씨와 김석형 씨등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 중 송환을 희망하는 63명은 2000년 9월 북한으로 송환되었습니다. 2000년 6.15선언으로 결실을 맺은 김대중 정부의 민주주의와 남북화해 그리고 평화통일의 정신이 이룩한 성과였죠.


○ 남한이 커밍스 교수가 첫 문장에 전제했던 '현 추세가 유지된다면', 지금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주눅들지 않는 민주주의를 자랑했겠지만, 남한은 2008년 이후 민주주의는 커녕 천천히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중입니다.
바로 이명박근혜 정권의 등장이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온 것이고 그에 발맞추어 빈부격차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탄압, 배제가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 김선명 할아버지 등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한으로 돌아갔지만, 역대 정권의 잔인함과 폭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한반도에서 분단체제가 사라지지 않기에 한 탐욕에 가득한 친일파들과 재벌들은 냉전수구세력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제는 '종북'이라는 이름으로 '언론'과 '공권력'이라는 수단으로 제2, 제3의 현대판 김선명, 현대판 비전향 장기수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아니 친일파, 재벌대기업, 부정부패, 독재와 전쟁위기를 반대하는 이들을 '현대판 김선명'으로 만들어 억누르려 하고 있습니다.


○ 국가보안법 구속자와 폐지 여부가 남한 민주주의의 중요한 지표 중 하나인 셈입니다.


○ 김대중 정부 때 전향제를 폐지하고 비전향 장기수를 석방하여 북으로 송환한 것은 남한에서 더 이상 사상이나 양심, 이념이나 정치적 지향을 이유로 국민을 옥죄거나 처벌하거나 배제시키지 않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바로 "김일성 개새끼 해봐!" "북한 욕해봐!"라는 식의 아주 몰상식하고 비인간적인 사상강요와 통제를 가하지 않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지만 2012년부터 한국사회에 다시 재발해 버렸죠.


○ 따라서 저는 말끝마다 걸핏하면 '종북'과 '주사파'를 입에 달고 사는 진중권과 같은 지식인을 지식소매상으로, 좌파주의(자)를 사이비 진보로 규정하곤 한답니다. 물론 두 유형 모두 결코 민주주의자가 아니겠지요.







42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


○ "모두가 칭찬하는 것은 의심해 보고, 모두가 비난하는 것은 자세히 살펴본 후 판단하라"(공자)
커밍스 교수가 제8장 '태양왕의 나라 : 북한'을 시작하면서 가장 앞에 내건 문장입니다. 남한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북한에 대한 정보는 편견과 악담만 존재하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킨 것 같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정체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그 지도자가 비밀스럽고 바깥의 눈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 나라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들조차도 알 수 없다.
이런 연유로 젠체하는 학자들은 이 나라에 그만큼 완강하고 틀에 박힌 인상들, 가령 조지 오웰의 '1984년'을 재생하려는 스탈린적 시도, 국제 통제에서 벗어난 반항의 국가, 손발리 잘린 사회주의 국가, 유교/공산주의의 전제군주국, 조운 로빈슨의 눈에 비친 경제적 기적(1965년 북한을 방문한 후 내린 평가), 체 게바라가 꿈꾼 쿠바의 궁극적 미래상 등을 투사할 수 있다.우리가 무지의 암흑 속에 남아 있는 한 이 모든 인상들이 북한에 적합해 보인다. 그러나 북한을 좀더 자세히 보고 친숙해지면 이런 단순한 기대들은 무너진다.


내가 1987년 영국의 영화제작자들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을 때, 이들은 북한이 전에 자신들이 비슷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했던 1980년대의 테헤란과 같을 것으로 기대했다.
미 국무부가 북한을 이란과 마찬가지로 테러국가로 규정했기 때문에, 이들은 북한에는 '혁명전위대'를 잔뜩 실은 차들이 차창에 자동화기들을 매달고 거리를 질주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혹은 수많은 사람들이 칙칙한 청색 노동자복을 입은 채 자전거를 타고 일터로 가는 중국과 유사하지만 중국보다는 뒤떨어진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그곳에서 생활용품을 구하기란 자신들이 금방 고생을 하고 돌아온 모스크바에서보다 훨씬 힘들 것이라고 걱정했다.


이들은 나무가 늘어서 있고 굉장히 깨끗하게 청소된 평양의 대로를 질서정연하게 건너가는 통근자들과 이를 세심하게 통제하는 단정한 제복차림의 여성 교통안내원의 모습을 미처 생각할 수 없었다.
이들은 또한 현대식 고층건물에서 살면서 일본의 '샐러리맨들'처럼 아침이면 지하철이나 전동버스를 타려고 바삐 움직이는 주민들을 예상하지 못했다.
이들은 호텔과 식당에서 맛있는 한식과 양식을 푸짐하게 대접하는 공손한 종업원들에게 돌연 매혹되고 말았다.


내가 북한을 세 번 방문한 1980년대에 평양은 싱가포르의 엄격함과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아따의 목가적 고요함을 동시에 지닌, 아시아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잘 운영되는 도시 중의 하나였다.
효율성 위주의 옛날 소련식의 아파트와 관공서 건물들이, 한국의 전통적 곡선형태의 지붕에다 대리석을 아낌없이 쓴 웅장한 새로운 기념물들과 뒤섞여 있었다.
1990년대의 평양에는 전체 인구의 약 10%인 200만의 인구가 살았다. 소비재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분명히 제한되어 있었지만 일용품은 구할 수 있었고, 외국여행자의 눈에는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그러나 평양에 거주하는 외교관들은 이러한 줄서기가 많다고 증언했다...?)
버드나무가 늘어선 둑을 따라 두 갈래로 강이 흐르는 평양의 곳곳에는 잘 가꾸어진 공원이 있었다.


소규모 도시들은 평양만큼 안락하지는 않았다. 많은 소도시들에는 소련의 프롤레타리아적 건축양식을 흉내낸 단조롭고 보기 흉한 건물들이 있고, 천편일률적인 아파트는 울퉁불퉁하고 깊이 패인 길가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이 건물들 대부분은, 눈에 띄는 건물이란 모조리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한국전쟁 이후에 지어졌다. 그리고 깃발이 항상 눈에 띄는데, 이 깃발들은 가게의 앞이나 아파트의 발코니에 자의식적으로 내걸려 있거나 혹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정치적 게시판들에서 나부끼고 있었다.


북한의 촌락은 검소하고 단순하고 깨끗하여 수도에서는 볼 수 없는 과거 한국의 시골 분위기를 풍겼다. 도시들은 광범위한 철도망으로 연결되어 있는 반면, 농촌의 마을들은 단단하게 다져진 비포장 도로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시골사람들은 쓸 수 있는 모든 땅, 심지어 길 언저리까지도 자가소비를 위해 혹은 소규모의 사설시장에 내다팔기 위해 채소를 가꾸었다. 전기선은 모든 농가에 연결되어 있지만, 텔레비전 안테나는 도시에서보다 훨씬 보기 힘들었다.
남한과 마찬가지로, 초가지붕은 기와로 바뀌어 현대화를 알리고 있었고, 논도 화학비료의 폭넓은 사용으로 인해 더이상 인분냄새를 풍기지 않았다.
자립(자력갱생)을 외치는 간판들이 농촌의 곳곳에 있었는데, 이는 분명히 중공업과 전쟁준비 그리고 도시성을 강조하는 국가정책의 우선 순위를 반영하는 문구였다.


도시, 읍, 촌락 어디에나 김일성이 있었다. 그는 게시판이나 지하철 혹은 아파트의 벽에서 내려다보면서 여기서는 산업에 관한 교시를, 저기서는 농업에 대한 교시(예를 들어 '쌀이 공산주의이다')를 내리거나 혹은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된장을 먹지 않는 조선사람은 조선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고 쉽게 단언했다.
북한은 난초종인 김일성화가 전국에서 핀다고 발표했다. 김일성화는 인도네시아의 식물학자가 배양한 난초로서, 1965년 수카르노가 자카르타에서 김일성에게 헌화하였다.(북한의 역사서에는 김일성이 모든 겸양을 다해 자신의 이름이 붙여진 꽃을 사양하려 했으나 북한의 인민들이 지도자에 대한 존경심에서 이를 요구했다고 한다.) 북한식으로 생각하면 쉽게 예견되듯이, 국영화원에서 길러낸 베고니아종이 김정일화도 역시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하게 무장한 국가인 이곳에서 경찰이나 군인의 모습은 여행자의 눈에 쉽게 띄지 않았다. 그러나 일원짜리 지폐가 진상을 드러내는데, 그 전면에는 밝은 전통의상을 입은 여성이 손에 권총을 쥔 채 앞으로 뛰어오르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북한은 '요새국가'였다. 인구 20명당 1명이 군대에 있고, 국민 모두가 군복무의 의무를 지고, 100만의 군대와 수백만의 민병대가 있고, 엄청난 규모의 군사기지와 무기고가 땅속 깊숙이 지어져 있고, 땅속 지하철에는 거대한 방폭벽이 설치되어 있고, 군사분계선을 따라 시시각각 불침번이 돌고, 보안상의 이유로 이 나라의 독재자는 매일밤 잠자리를 바꾸어야 하고, 2,200만 인구 모두에게 성분 등급이 매겨져 있는 그런 국가였다."(p.571~574)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제가 직접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저는 민주정부 10년 동안의 민간교류 때에도 북한에 가본 적이 없답니다. 금강산 역시...ㅠ), 커밍스 교수의 설명을 평가할 수 없지만 사실관계에 대한 그의 진실성에 기초하여 그의 설명을 대부분 설명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헌법 규정과는 달리 북한에 대한 모든 정보를 남한 정부가 일방적으로 차단한 채, 정치적 목적으로만 선별하여 북한 정보를 언론과 국회에 제공하기 때문에 저는 정부기관이나 언론의 발표를 잘 믿지 못합니다. 저는 사실관계를 비교 검증할 수단과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커밍스 교수의 말에 의하면, 남한의 정부기관, 언론이나 학자들 뿐 아니라 서구에서도 북한에 대한 정보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 남한이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체제 속에 편입되어 무역과 해외개방 경제 구조에 의존하면서 일부 장점과 큰 단점을 노정하고 있다면, 북한은 동서 냉전 체제 해체 이후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실패하여 미국 주도의 군사,경제,문화 봉쇄 속에서 자력갱생을 택할 수밖에 없는 한계와 선택으로 장단점이 존재할 것입니다. 그렇게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조건과 선택 속에서 60년 동안 서로 다른 방식과 체제를 지향하며 살아온 것일 뿐입니다.



○ 이번 단락에서 커밍스 교수의 설명은 한마디로 "북한은 자기식대로 사람 사는 사회"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48년 8월 해방과 동시에 남북이 서로 다른 주체와 경로와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기(3년 내전도 치르고) 때문에 정부체제와 사회체제, 문화 등이 서로 다르게 된 셈입니다.

남한이 남한 자체의 장점과 단점, 성과와 한계, 해결과제가 있듯이 북한 역시 그 자체의 장단점과 성과/한계 그리고 해결과제가 있는 것이고, 북-한미 대결구조와 분단체제가 남북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큰 장애가 되고 있음은 분명할 것입니다.


○ 그런 면에서 김대중 정부의 6.15 선언과 노무현 정부의 10.4 선언이 한민족과 남북한에게 커다란 긍정적 의미와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두 선언을 합의한 북한의 김정일 정부에게도 한민족과 남북 민중의 입장에서는 동일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두 가지 선언이 친일파 후예들과 사대주의자들, 반북 이데올로기와 종북을 무기로 권력과 금전적 이익과 기득권을 유지하는 국내외 세력들에게는 위협이었겠죠. 북한 내부에도 북-미 대결구조와 분단체제를 유지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마찬가지일 것이고요...







43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


"이미 살펴본 대로, 북한체제는 1940년대 후반에 러시아의 붉은 군대가 점령한 가운데 탄생했고, 따라서 행정이나 산업의 구조는 당시의 모든 사회주의 국가가 그랬듯이 소련이 모델을 따랐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48녀 9월에 선포되었지만, 그 기반은 대부분 1945년 일본의 식민통치가 끝난 지 1년 이내에 놓여졌고, 그 당시에 대두된 주제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오늘날 북한체제의 특징으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 북한은 여전히 일본과 싸우고 있는 탈식민지 국가이다.


정부 통제하의 언론들이 50년 전 일본이 저지른 만행이나 일본의 군국주의가 곧 부활할 위험에 대해 경고하지 않는 날이 없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은 여전히 너무나 강렬하여 마치 전쟁이 방금 끝난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가령, "항일 유격대식으로 살자"는 수많은 간판들이 시민들을 계도하고, 젊은이들은 빨치산 투쟁을 되밟는 행군을 한다. 김일성의 빨치산 동지들이 정권의 핵심 지휘부를 자치했고, 이제 그들이 죽어감에 따라 그들의 조상들이 대성산 꼭대기의 근사한 공동묘지에 세워져 수많은 세월동안 평양을 굽어보며 남아 있을 것이며, 각자이 업적이 비석과 실물 크기의 흉상으로 기려질 것이다.


조선노동당의 독특한 상징/로고는 망치와 낫을 붓과 가로질러놓은 것인데, 이는 배운 자들과 전문가들을 끌어안는 정책을 상징한다.
모택동의 중국과는 대조적으로 김일성은 이들을 거의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들을 권력의 자리에 널리 등용하여 공산주의식의 '학자-관료' 게급을 공인하였다.
북한에는 서기 소상인 관리 교수 등을 일컫는 사무원이라는 모호한 범주의 사라들이 있다. 이 범주는 두 가지 목적으로 사용된다. 이것이 북한체제의 입장에서는 남쪽으로 탈출했을지도 모를 식자나 전문가들을 붙잡아두는 데 쓸모가 있었고,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한테는 이것이 자신의 '불순한' 계급배경을 감출 수 있는 하나의 범주를 제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은 공산혁명 직후 주민들을 좋고 나쁜 계급으로 양분화했지만 곧 모든 계급을 포괄하는 대중정치를 추구한 것이다.
북한 사람들은 그들의 사회를 계급에 기반하거나 계급으로 분할된 사회라기보다는 하나의 대중으로, 함께 뭉쳐진 '인민'으로 여겼다. 농민 노동자 사무언, 이 세 계급의 결합으로 인해 북한은 구시대의 지주계급을 제외한 대부분의 계급을 포괄하였고, 지주계급은 어차피 북쪽에서보다 남쪽에서 훨씬 강하게 존재했다.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관건은 일제시대의 과중한 투자의 유산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공업화된 북한의 특징, 다수 자본가와 지주의 남으로의 탈출,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 특히 숙력된 전문인력의 부족 등이다.


북한은 또한 탈식민지 제3세계의 전형적인 정책들을 고유의 정치문화와 소련식 사회주의에 접목시켜, 급속한 산업화를 위한 경제계획과 자연을 인간의 의지에 종속시키는 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레닌의 민족해방 강령과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의 자립전략을 결합시켰다. 그 결과 북한에서 사회주의는 '절반'의 사회주의가 되었고, 누군가 재치 있게 표현하였듯이 이제는 한 가족의 사회주의가 되었다.
북한에서 자립경제는 '은자의 나라'라는 전통과 어울릴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수십년간 세계경제에 열어놓았던 문을 이제는 봉쇄할 필요성을 충족시켜 주었다."(p.574~576)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미국처럼 커밍스 교수와 같은 비사회주의, 반정부 학자들이 막힘 없이 어디든지 가서 직접 살펴보고 자신의 의견과 이론을 펼칠 수 있어야 학문이 건강해지고 언론이 뒤틀리지 않고 소통과 상생이 가능해집니다.
요즘 한국사회 분위기 또는 반북이데올로기로는 아마 국내 학자가 이런 내용을 책으로 발간해서는 어느 대학이나 연구소에 자리잡을 수 없을 것이며, 심지어 어버인현합과 같은 극우정치깡패 시다바리들이 교수실로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 검찰에 고발당할 것입니다. 정치검찰은 얼씨구나 수사에 착수할 것이고...


○ 남한의 현 체제가 1945년 이 땅을 점령한 미국식 체제모델을 도입했듯이 북한은 당시 북한 땅에 진주한 소련식 모델을 도입했던 것입니다.
다만 모델 도입 과정에서 얼마나 강제력이 동원되었는지, 희생이 동반되었는지, 인민들의 자발적 동의가 얼마나 반영되었는지, 일제 잔재를 청산했는지, 현실에 맞게 주체적 창조적으로 적용되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다르겠지만...


○ 이번 단락에서 커밍스 교수가 바라보는 북한체제의 특징은 일본 제국주의 부활에 대한 반감, 지식인 계층에 대한 포용, 자립경제 노선입니다.
특히 자립경제 노선을 커밍스 교수가 한국고대사부터 살펴보면서 한반도의 특징으로 제시한 '은자의 나라'라는 전통과 연결시킨 대목은 시사점을 줍니다. 남북한 체제를 단순히 60년 안에 독립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한민족 사이에 오랫동안 이어져온 여러가지 문화와 전통이 현대에 맞게 재구성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주장이 독특하면서도 공감이 됩니다.


○ 커밍스 교수처럼 남한이 북한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면서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이해할 때만이 남북간에 대화와 소통이 가능하고 화해와 합의가 가능하며, 상호존중과 비방중지, 남북협력과 교류, 군사적 긴장완화, 평화통일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당시 남북정상회담을 주도했던 인사들 정도가 그러한 세계관과 민족관, 통일관을 지닌 듯 합니다. 지금 한국사회의 정치인, 리더급 인사들 중 99.5%는 그럴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아 안타깝습니다.(새누리당에는 극우또라이들과 기회주의자들만 가득하죠..)







44 : 북한의 조합주의


"칼 맑스는 미래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정치적 모델을 갖고 있지 않았고 다만 매우 애매한 처방만을 - 주로 <고타 강령 비판>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몇몇 발언들에서- 제시할 따름이다.
맑시즘을 정치이론으로 변환시키고, 또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스탈린식의 극단적인 국가주의로 발전된 가능성을 열어놓은 자원주의적 이론으로 변형시킨 사람은 레닌이었다. 스탈린의 국가주의에서는 정치가 상위에 서서 경제와 사회 전체를 작동시키는 동인이 되었다.
그러나 맑스-레닌주의는 정치적 모델의 부재로 인해 토착적 정치가 대두할 가능성을 열었고, 이 가능성은 바로 정치모델의 결핍으로 인해 요구되는 것이기도 했다.
여하든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러시아, 중국, 그리고 두드러지게는 북한의 공산주의에서 목격한다.


지금은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린 듯하지만, 혁명의 시기에 맑스-레닌주의는 과거를 말끔히 지워버리고 모든 변화를 가능케 하는 부적처럼 보였다. 그러나 맑스-레닌주의는 그 옹호자나 비판자들이 모두 인정하고 싶은 것보다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이 훨씬 없었다는 거싱 최근의 역사에서 드러났다.
우리는 과거의 습관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고, 특히 이런 습관들이 쌓여 일반적 관행 - 즉, 문화 - 이 되어버리면 혁명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완강한 것임이 입증된다.
따라서 20세기의 혁명들은 오랫동안 존재해 왔던 기존의 뿌리에 접목되었으며, 이 뿌리를 변화시키려고 각각의 민족과 사회가 혁명을 자신의 삶 속에서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혁명 자체가 변형되기도 했다.


이는 다른 어디에서보다도 한국에서 더 그러했는데, 그 까닭은 사회주의라는 서구의 사상이 이곳에서는 무척 생소했기 때문이다. 1945년까지의 한국에는 프롤레타리아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자본주의가 겨우 시작하는 단계였으며, 자본주의식의 국제주의가 너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은 맑스-레닌주의에서 필요한 것은 취하고 나머지 많은 것들을 버리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맑스-레닌주의의 틀 속에서 독특한 정치체제가 발전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이 체제는 세계 곳곳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조합주의에 비견될 수 있는 것으로, 일종의 사회주의적 조합주의이다.
북한체제의 배타성과 비밀스러움으로 인해 우리는 이 체제가 실제로 얼마나 억압적이고 얼마나 많은 정치범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체제는 분명히 엄청난 억압력과 많은 정치적 희생자들을 지닌, 엄격히 통제되는 전체주의적 정치체제이다.


조합주의란 무엇인가? 이것은 파악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그러나 조합주의는 오랜 계보를 지니고 있다. 조합주의는 자유주의 정치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합주의는 자유주의에 앞서 나타났으며, 자유주의를 증오했던 19세기와 20세기의 낭만주의들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자유주의의 초월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자들의 꿈에 불을 지폈다.
자유주의는 특징적으로 정치를 다른 인간행동 영역으로부터 분리하여 이를 인간들 존재의 한 부분으로 혹은 하나의 하위 연구 영역으로 삼는 반면, 조합주의에서는 예전에는 정치가 지식체계를 구축하는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에는 정치와 사회가 상호 연결되어 있다.


조합주의가 무엇을 부정하는가에 따라 정의하더라도 조합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전통적 조합주의는 위계, 유기적 연계, 가족이라는 세 개의 커다란 주제와 이에 상응하는 정치적 부권, 정치통일체, 거대한 연결망이라는 세 가지 이미지를 갖고 있다.
전통주의자들이나 이후의 무솔리니와 같은 파시스트들에게 있어서 정치통일체는 문자 그대로 신체를 뜻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였다. 정치통일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전체를 위해 기능한다.
정치통일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전체를 위해 기능한다. 우두머리는 국민의 아버지였고, 통치자와 피통치자는 '완전한 사랑'으로 묶여 있었고, 지도자의 아버지 같은 지혜와 자비는 '의지할 수 있고 결코 의심될 수 없었다.'
전통적 조합주의의 이상은 카톨릭이 우세한 지역에서 가장 굳건하게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보수적 조합주의는 이러한 옛날의 모습을 되살리려 했고, 19세기에 나타난 낭만적 반자본주의와 반자유주의의 대표적 이데올로기였다. 조합주의는 사회적 위계, 고정된 사회적 지위, 공통의 가치관, 폐쇄된 공동체를 이상화했다.
20세기에 나타난 우익 독재에 대해 보수적 조합주의는 이데올로기와 일련의 슬로건들을 제공했지만 실천의 지침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프랑코 통치하이 스페인의 약한 권위주의나 포르투칼의 살라사르 독재,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동유럽의 몇몇 정권이 이 이념에 매달렸지만, 어느 것도 노동과 지위에 따라 분절된 집단, 계급 들의 진정한 조합적 위계를 형성하지는 못했고, 그런 시도를 결코 실제로 하지도 못했다.


조합주의의 병적인 발현태는 1930년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난 파시즘이다. 파시즘으로 인해 조합주의는 아직까지도 악명을 지니고 있다. 파시스트들은 보수적 조합주의의 미사여구들을 원래의목적과는 다르게 사용했다.
그 대표적인 용어로는, 진정한 조합주의에서는 보존하려는 이차적 결합을 파괴시키려는 전체주의, 공격적 군사주의 그리고 조합주의 정권에서는 구사할 수 없었던 대중동원의 정치이다.
조합주의 정치체제가 좀더 성실한 혹은 실로 '아버지 같은' 지도자에 의해 이끌린데 반해, 파시스트 체제는 지도자의 카리스마에 의존했다. 나치즘은 유기적인 뿌리를 가진 개인들이 아니라 '합리성이 가장 떨어지는' 계층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좌파 성향의 조합주의도 물론 있었다. 로베르트 미헬스 빌프레도 파레토, 그리고 루마니아의 미하일 마노일레스쿠와 같은 정치이론가들은 처음에는 세련되고 흥미로운 조합주의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다 나중에는 1930년대의 파시즘에 터무니 없는 공감을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일종의 신사회주의적 조합주의를 발전시켰는데, 이것은 흥미롭게도 북한의 체제와 유사점들이 있다. 이들이 맑스주의로부터 근본적으로 이탈한 지점은 계급을 민족으로 대체시켜, 민족들 사이에도 유리한 쪽과 불리한 쪽(부르조아지와 프롤레타이라)이 있는 일종의 세계체제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마노일레스쿠가 보기에, 국내의 '조화로운 정치-경제체제라는 유기적이고 생산주의적이고 수직적으로 구조화된 은유'는 위계적인 세계질서 속에서도 추론될 수 있다. 국제적 분업체계는 부국과 빈국을 여기저기 배치했던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주변부라 부르는 '프롤레타리아' 국가들은 국내에서 권력을 축적하기 위해 수직적 구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세계 경제체제에서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기 위해 바깥으로는 수평적인 구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다른 신사회주의자들은 민족과 민족주의가 계급분석에 대해 제기한 문제, 즉 계급은 19세기의 문제이고 '민족개념이야말로 20세기의 정치조직이 핵심개념'을 실천적 맑시즘에서 계속 회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신사회주의자들은 1930년대 스탈린주의와 연관된 자립적 발전모형과 함께ans-serif;font-size:14px">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신사회주의자들은 1930년대 스탈린주의와 연관된 자립적 발전모형과 함께 보호주의를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신사회주의가 최근 들어 가장 깊이있게 표현된 것은 웅거의 저작들인데, 그는 사회적 조건의 평등, 민주주의, 그리고 새로운 유기체 조직의 개념을 통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극복을 구현하는 조합주의 운동을 제안했다.
웅거의 제안은 다시 한번 가족을 자유주의 정치로부터의 피난처로 혹은 자유주의를 극복하는 은유법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웅거는 가족에 '우리의 경험에 있어서 삶의 공동체라는 이상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며... 현대의 가족은... 사랑을 통해 상당 정도 개인을 인식하는 연합체 속으로 인간을 영원히 귀속시킨다'고 썼다.
따라서 우리는 완전히 한바퀴 돌아 처음으로 되돌아 왔다. 자유주의에 대한 조합주의적 혐오의 논리로 인해 진보주의자들은 가족을 정치의 모델로 재발견하게 되는데, 전통주의자들은 이 모델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었다.


아시아 사상가들은 실제로든 은유로서든 가족을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거의 없다. 단지 모택동 시대의 중국에서 대약진운동을 추진하면서 가족구조를 공격하였으나, 이 기념비적 시도조차 곧 중단되고 말았다.
가족은 아시아적 조합주의의 중심체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1,2차 세계대전 사이에 일본이 시도했다 실패한 '가족국가'이다. 이 때의 일본에는 정치적 부권, 정치통합체, 거대한 연쇄라는 조합주의의 세 가지 이미지가 뚜렷이 표명되었다. 천황은 모든 국민의 아버지였고, 국민들은 혈연관계로 연결되었고, '일본인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피는 태고적부터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식 파시즘이라 부른 것의 특성을 찾다가 '국가구조의 근본원칙으로 찬양되는 가족제도'에서 해답을 찾았다. 일본 파시즘의 기본원칙은 국가를 '가족의 연장으로, 좀더 구체적으로는 황실을 줄기로, 국민을 가지로 하는 가족들의 국가로 보는 것이었다. 이것은 국가유기체론처럼 단순한 유추가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간주된다/'


김일성의 이데올로기는 조합주의의 역사를 큰 목소리로 되뇌었다. 마노일레스쿠와 마찬가지로 김일성은 역사적 갈등의 '단위'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대신 민족을 상정하고, 예전의 식민지와 종속국가들, 그리고 주변부 사회주의 국가들은 공동의 대의를 걸고 수평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러한 고유한 이론에 도달하기 위해 유럽이나 일본의 이론들을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김일성 시대 훨씬 이전에 이미 조선의 신유학은 인간의 신체를 적절한 생리학적 조화를 필요로 하는 유기체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유기체는 여전히 통합된 세계의 구성을 이루는 한 부분에 불과했다. "신체는 상호관련되고 상호의존적인 연결망들로 구성된 우주적인 모형 속에서 기능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연결망에 불과하다.""(p.576~583)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커밍스 교수는 북한을 이래하고 설명하기 위해 조합주의를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제 공부가 쩗아 자유주의의 대척점이 조합주의인지 잘 모르겠지만, 사회복지에 대한 여러 유형 중 조합주의적 방식도 있다고 하니 그리 쉽게 설명하거나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 그러나 커밍스 교수의 장점은 서구의 세계관만으로 아시아를 단순히 해석하려 덤비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적 가치와 문화, 역사를 토대로 하여 서구적 가치관이 적용된 것을 분석하려 애쓰니까요. 북한 뿐 아니라 중국, 베트남, 대만, 남한, 일본의 역사와 문화가 서구적으로 쉽게 해석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런 면이 제가 커밍스 교수를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죠..^^


○ 5천년 넘게 형성된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를 고려한다면 커밍스 교수의 접근방식이 적절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서구식 이념과 사회구성체론을 한반도 등 아시아에 기계적으로 적용시키는 것보다..







45 : 북한의 사상 1


"이러한 유기체적 정치사상은 끊임없이 선전되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구현되어 있다. 언뜻 보면 주체는 쉽게 이해된다. 주체는 정치, 경제, 국방, 이데올로기의 자립과 독립을 의미한다.
이 사상은 1955년 북한이 모스크바로부터 멀어지면서 처음 나타난 후, 김일성이 모스크바와 북경의 양 세력으로부터 독립된 입장을 추구한 1960년대 중반부터 완전한 형태로 제시되었다. 1955년 이전에 남한과 북한에서 주체라는 용어가 사용된 예는 찾을 수 있지만, 그 용어가 눈에 띄게 된 것은 그 이후의 두드러진 사용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 김일성의 수사는 유사한 말들로 가득했다. '자립'과 '독립'으로 변역되는 다양한 용어들, 가령 '자주성' '민족독립' '자립경제'가 1940년대의 김일성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하였다. 이 용어들은 외세에 대한 부역과 의존을 뜻하는 '사대주의'라는 용어의 반대말인데, 사대주의란 한국적인 것에 자연히 경도 되었던 민족에게는 재앙과도 같았던 것이다.
요컨대 이 이념들은 식민화된 모든 민족들이 20세기 중반에 추구한 것,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존엄성을 공통분모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주체(主體)의 뜻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주체의 체(體)라는 글자는 19세기 말 중국의 리홍장이 주도한 체용의 자강운동에도 쓰였고, 1930년대 일본에서 널리 쓰인 '국체(國體)'라는 개념에 쓰이기도 했다.
'주체' 또는 '주체성(主體性)'이라는 용어는 일본이나 한국사람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한다. 이들은 주체를 통해 주관적인 유아적 마음상태, 즉 올바른 행동보다 먼저 있어야 하고 또 이를 결정짓는 올바른 생각을 배태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지만 또한 근대적인 동시에 한국적인 것을 규정하는 수단으로서 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 용어는 실제로 번역하기가 불가능하다. 그 본뜻에 다가가면 갈수록 그 의미는 점점 파악하기 힘들어진다. 외국인이 보기에 이 용어의 의미는 한국인을 한국인답게 하는 모든 요소들의 웅덩이 속으로 점차 사라지며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궁극적으로 도달하기 불가능하다.
주체는 북한의 민족적 유아론을 구성하는 애매한 핵심이다.


김일성은 항상 북한의 자립에 대한 주된 해석자였다. 1982년 7월 그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가장 잘 해설하였다. 조선이 '제국주의의 노리개'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선언하면서 그는, "나는 관료들에게, 개인이 사대주의에 빠지면 바보가 되고, 나라가 사대주의에 빠지면 멸망하게 되고, 당이 사대주의에 빠지면 혁명을 망치게 됨을 이르고자 한다"라고 훈시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그렇게 유려하게 표현된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의 종속 상태를 오랫동안 경험했던 북한사람들에게 그러한 훈계가 왜 그토록 필요한지는 자명하다.


일종의 민족적 유아론이 북한의 자료들에서 항상 표현되고 있는데, 가령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가정 - 많은 외국인들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지만, 1402년 한국인이 그린 세계지도인 '강리도(疆理圖)'를 보라[첨부사진 참조] - 이 그렇다.
한국을 중심으로 주체의 빛이 바깥으로 확산되어 가는데, 특히 그 빛은 북한 사람들의 생각에는 주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여겨지는 제3세계 국가들에게로 나아간다. 북한정권은 수십년 동안 세계 곳곳의 주체사상연구회를 후원해왔고, 이 모임의 지도자들이 평양을 방문하면 이들을 국가원수급으로 대접했다.
세계는 북한을 향하고 있고,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모든 눈길이 모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가장 기괴한 모습이겠지만 동시에 가장 실감나는 모습이기도 하다. 이것은 중국의 중국중심주의(중화주의?)에 비유될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이것이 소규모로 표현된 것이다.


여기서 잠시 철학적 사고를 해보자.
우리의 목적이 단순히 북한사람들의 행위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고, 따지고 보면 그들도 지구에서 살고 있는 2,200만의 인류인만큼 왜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나의 이러한 의도를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북한의 핵위기 때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만약 미국의 어떤 하원의원이 "북한사람들은 우리와 다르게 생각한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를 명석하게 이해해야 한다.""(p.576~583)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북한 사람들과 북한의 사회체제 그리고 북한의 이념에 대해 북한커밍스 교수가 접근하는 방식은 3년간이나 북한과 전쟁을 치뤘고 그 후 60년간 군사적 적대국가로 대결 중인 미국의 지식인이 왜 북한을 이해하려 하는지 보여줍니다.
분단 트라우마와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채 북한이라면 색안경부터 쓰고, 폄훼와 조롱과 비난부터 앞세우며 이해하려 하지 않는 국내 지식인이 성찰하고 본받아야 할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 커밍스 교수는 주체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첫 출발을 한민족의 역사와 일제 식민통치에서부터 시작하며, 따라서 사대주의의 반대인 자주와 독립의 이념을 해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46 : 북한의 사상 2


"김정일은 언젠가 '사회주의에 대한 훼방은 허용될 수 없다'는 주제로 말한 적이 있다.(1993년 3월) 사회주의의 역사와 몇몇 국가에서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유(그의 견해에 따르면, 그 근본적 이유는 젊은이들에게 사회주의의 가르침을 교육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를 고찰한 후, 그는 '의식이 인간의 행동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고. .... 사회발전의 추진력이 되는 기본요인은 항상 이데올로기적 의식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본대로, 한국사람들은 '마음'이 곧 '가슴'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일상적인 신체언어에서는 생각하는 기제가 가슴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덧붙여 인간의 행동원칙도 외적 환경에 따라 일정하게 그 양식이 결정되는(합리적인 자기이익을 쫓아 행동의 동기부여가 일어나는), 즉 선험적인 인간에 관한 논리인 '만약, 그렇다면. ...'식의 전제가 통하지 않는다.
대신에 인간 행동의 기본원리는 인간의 마음 상태에 따른 인간 존재의 내면상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내적 상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좋은 질문이다. 성리학자들이 항상 논쟁했던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이들의 논쟁에 끼여들기보다는 14세기 조선왕조 개혁의 설계사였던 정도전의 글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기로 하자.
[심기리편 心氣理篇]이라는 글에서 정도전은 이렇게 말한다.
'이(理)는 마음(心)에 부여된 덕(德)이고 기(氣)가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다.
아! 하늘과 땅보다도 우선하여 존재하는 심오한 원리. 자아를 통해 기가 존재하고, 마음도 역시 주어진다.
마음(心)은 이(理)와 기(氣)를 합하여 신체의 주인이 되고, 이(理)는 마음(心)을 통해 받아들여지며 덕(德)이 된다.
마음만 있고 자아가 없다면, 세속적 욕심만을 추구하게된다. 기만 있고 자아가 없다면, 살과 피의 신체만이 있을 것이다. 마치 꿈틀거리는 벌레와 같고, 금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글은 인간이 야수와 다름은 인간에게 정의가 있기 때문임을 일러준다. 만약 인간에게 정의가 없다면, 인간의 의식은 감정과 욕구와 세속적 이득을 얻기 위한 이기심에 지나지 않고, 인간의 행동은 꿈틀거리는 벌레와 다를 바 없다. 이(理)는 진실로 우리의 마음속에 구현되어 있는 것이다.


마음의 '내적조건'이란 다름 아니라 (유기체적으로 두뇌, 심장, 신체가 통합된) 마음에 구체화된 덕이며, 마음의 덕으로 인해 인간은 동물과 구분된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곧 '물질적 힘인 기가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상당히 복잡한 현상이다. 인간의 마음이 세계라는 외적 환경을 출현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객관적 합리적 행위자가 아니라) 주관적 존재라는 모스트모더니즘의 명제를 받아들이고, 따라서 우리 자신의 실재를 스스로 구성하여 이를 가령 '역사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정도전은 인간이 자신의 우주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때의 인간이란 모든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결정하고, 이끌어가고, 가르치고, 그럼으로써 창조하는 능력을 갖추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덕을 오랜 수양을 통해 쌓은 그러한 인간들만을 의미한다.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하고 왕은 철학자이어야 한다'는 플라톤의 교훈을 이보다 더 잘 정당화한 학자들은 분명히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홍재학식의 정당화이다. 홍재학은 이념을 지키기 위해 참수당한 19세기의 유학자이다.
플라톤적 질문을 한다면, 이러한 논리로부터 어떤 종류의 정치가 파생되는가? 덕을 쌓은 마음이 신체의 주인이 된다는 공식이 성립되고, 여기서 신체가 곧 정치통합체라면. 덕을 쌓은 왕은 그것의 주인이 되는 셈이다.


이런 철학이 북한판 조합주의의 핵심이며, 이를 통해 김일성과 김정일의 위치, 그리고 다수 관찰자들이 언급한 바 있는 그들을 둘러싼 '개인숭배'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내 입장은 북한이 스탈린의 소련보다는 성리학적 왕국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터무니없이 과장되고 메스꺼울 정도로 반복되는 영웅숭배로 북한의 정치적 수사는 끝이 없는 듯하다.
자유주의 정치체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이러한 현상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부터 거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김일성은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됨으로써 최고지도자가 되었고, 죽을 때까지 최고 권력에 머물렀다. 그는 권력을 장악한 지 몇달 만에 성인처럼 숭고한 척하는 통치형태를 오늘날만큼이나 뚜렷하게 구사했다.
1946년에 북한에 침투했던 요원들은 김일성의 사진과 포스터가 전신주같은 것들을 장식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김일성에 대한 찬사가 씌어 있었다.(중략)


김일성은 때때로 하늘이 내린 세상의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밑바닥으로 내려가 끊임없는 '현장지도'를 통해 자신의 통치술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그는 종종 비밀과 신비스러움이라는 해자에 둘러싸여 보호되는 세상 밖의 황제이지만, 또한 살을 맞대고 있는 황제이기도 했다.
북한의 수천 곳에서 김일성이나 김정일 혹은 두 사람 모두의 방문일자를 적어놓은 현판이 대문 위에 걸려 있다. 천재적 지도자의 축성 없이는 초석을 놓을 수도, 터널을 뚫을 수도, 건물을 마무리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김일성 주위에 뭉친다'라는 표현에서와 같이 '주위'라는 용어가 사용되는데, 이는 글자 그대로 '동그랗게 둘러쌈'을 뜻한다. 이는 이웃들이 '중앙의 심장부'를 의미하는 '중심'을 둘러싸고 사는 형상을 뜻한다. 이러한 동심원 구조는 대단히 한국적인 것이고, 1946년 이후 북한을 특징짓는 요소이기도 하다.
'당 중앙'이라는 용어는 김일성과 그의 유격대 출신 최측근을 가리키는 완곡어이며, 이느 1970년대 권력이양이 이루어진 후 김정일을 일컫는 수사가 되었다. 간략히 말해서, 북한의 체제는 당, 군대, 국가관료기구들 사이의 위계적 구조일 뿐만 아니라 점점 확대되는 동심원의 위계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1946년 김일성의 첫번째 전기작가의 인터뷰에서 유격대원은 항일유격대의 전통을 당과 대중조직한테도 좋은 원칙이라고 추천했다. 이 원칙이 북한 전체의 조직화 원리라고 부언해도 좋을 듯하다. 도쿄대학의 북한전문가인 와다 하루끼 교수는 북한을 '유격대 국가'로 부른다.
김일성은 항일무장투쟁을 만주지역으로 확장시켰고 평양에 돌아와 권력을 장악했는데, 이성계도 1392년에 그랬다.
김일성과 측근들은 다방면에 능력을 지닌 만물박사들이었다. 그들은 정부를 운영하고, 군대를 지휘하며, 농부들에게 씨앗을 뿌리는 방법을 가르치고, 동시에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데리고 놀 줄도 알았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의 양반관료 역시 그랬던 것이다.
유격대를 하나로 묶는 강력한 접합력으로 인해 이 집단은 한국의 전형적인 정치분파들보다도 강력할 수 있었다. 다른 집단들이 '후원인-의뢰인'의 약한 관계에 기반하여 권력투쟁이나 개인적 경쟁에서 쉽게 흩어지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김일성의 유격대 집단은 다른 경쟁적 집단에 대해 쉽게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중략)


김일성에 대한 존경과 함께 그가 물위를 걷는다는 비유가 시작되었을 때 그는 겨우 34세였지만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세종대왕도 31세에 권좌에 올랐고, 김일성이 통치한 기간은 반세기에서 일년이 모자라 영조가 재위한 기간에 버금간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노인으로 존경받는 시점인 환갑(1972)을 지나고 나서 김일성은 특히 존경의 대상이 되었는데, 최소한 외국인의 기준에서 보면 이는 무한대의 존경이었다.
오랫동안 '어버이 수령'으로 불렸던 김일성은 60회 생일 이후 단순하게 '우리의 어버이'가 되었고, '조국의 위대한 아들' '인민의 위대한 태양' '지고의 자비로움과 커다란 보살핌을 지닌 어버이 수령'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한국의 정치적 전통에서 기인하는 호칭들이다.
김일성이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이후 북한의 모든 책과 글들은 서두에 김일성의 저작을 인용해야만 했고 모든 성공은 '경애하고 존경하는 지도자 동지'의 덕택으로 돌려져야만 했다.


이 모든 것들이 혐오스러울 정도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이상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최소한 북한의 신문들에서 나타나는 수사법들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북한 이데올로기의 논리와 실천, 김일성 부자에 대한 숭배, 그리고 유아론적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공산주의라는 병 속에 담긴 성리학 또는 모택동의 옷을 입은 주희이다.


이러한 조합주의 체제와 영웅숭배는 현대의 자유주의 사상이나 혹은 현대의 맑시즘 사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자아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체제는 우리와 다르며, 그리고 일단 이 체제의 논리를 이해하고 나면, 이 체제를 단순히 1991년 이후 사라져버린 '모스크바의 또 하나의 괴뢰정부'나 '배반의 국가' 혹은 서구식 자유를 갈망하는 국민들을 억압하는 전체주의의 악몽처럼 생각하는 경우보다는 훨씬 예측 가능해진다."(p.587~598)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북한의 주체사상을 이해해보기 위해 한민족의 전통문화 그리고 주희, 정도전, 이황의 성리학에서 플라톤의 '철인정치' 이론까지 연결시키는 커밍스 교수의 노력이 돋보입니다. 저도 권력의 감시와 통제가 제거되고 남북화해와 교류가 정착되어 다방면으로 공부해볼 기회가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 커밍스 교수는 "북한체제는 우리와 다르다"고 전제하면서 북한체제의 객관적 실체와 다름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유주의나 맑시즘이 감정적으로 거부해 버리고마는 개인숭배 문화와 주체사상을 한국고대사를 시작으로 하여 성리학과 조선왕조의 전통문화, 식민지 경험과 항일무장투쟁 주체들에 연결시키면서 이해함으로 예측 가능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학자로서 '분석/해석'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셈입니다.


○ 커밍스 교수가 이 정도라도 북한체제를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역시 현대 서구 자유주의의 관점으로 또는 맑시즘의 관점으로 북한을 이해할 수밖에 없겠지만) 편견을 버리려고 노력하면서 한반도에서 이어져온 사상과 문화, 체제와 전통이라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그리고 일제 식민통치와 분단/내전이라는 자체의 경험을 통해 북한체제가 성립되고 발전해온 과정을 연구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7 : 북한의 경제


"북한의 자립은 단순히 수사학적 표현만이 아니다. 북한은 탈식민지시대의 발전도상국 가운데 의도적으로 자본주의의 세계체제로부터 물러나 독립적이고 자기완결적인 경제를 진지하게 시도한 가장 좋은 보기를 제공해주고, 그 결과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자립적인 산업경제를 세웠다.
경제가 허비되거나 악화되면서 뚜렷한 목적 없이 '물러나버린' 사회주의권의 알바니아나 '자유세계'의 미얀마와는 달리 북한은 결코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고 항상 앞으로 달려갔다.


북한의 경우는 발전을 수반한 물러남이었고, 발전을 위한 물러남이었다.
자립은 소련권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 의지력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비록 남한이 미국이나 일본으로부터 받은 것에는 비교될 수 없지만, 북한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많은 경제 원조와 기술전수를 받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북한은 사회주의의 공동시장 체제에 해당되는 코메콘(COMECON)에 가입한 적이 없다.


북한은 장기계획(7~10년)을 가진 사회주의 통제경제를 취하고 중공업에 편중되어 있다. 북한에서 시장을 통한 분배는 매우 제한된 영역, 주로 농민들의 소규모 개인경작지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파는 농촌부분에서만 허용되낟. 소규모 자영업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남한과 마찬가지로 북한도 완전하고 종합적인 산업기반을 구축했고, 따라서 북한은 스탈린의 모델을 따르는 전형적인 사회주의 체제로 보여지며 분명히 중공업을 제일 우선시한다.


소련이 1990년대까지는 원조와 충고를 해주었지만, 일제시대에 경험을 축적한 북한의 기술인력들이 경제발전을 주도하게 되었다.
국무부의 정보보고서에서 '북한 산업의 제왕'으로 불려진 정일용은 일본인 휘하의 기술자였다. 또다른 중요한 인물인 정준택도 마찬가지였다. 제1차 2개년계획(1947`1949)은 경성제국대학의 경제학 교수였떤 김관진의 지도하에 세워졌다. 다른 핵심 인물인 이인욱은 북쪽의 공장건설에서 25년의 경험을 쌓았다.
1950년 북한의 산업, 기술연맹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일부에 해당하는 93명의 명단에서 35명이 모두 예전의 일본 산업체에서 5년 이상 경험을 쌓았다. 일본으로 도망가지 않았던 일본 기술자들도 모두 경제 전반에 걸쳐 활용되었다. 1947년에 그들 가운데 일부는 1945년 이전과 비교하여 북한의 산업생산이 완전히 궤도에 올랐다고 고국에 편지를 썼다.


역설적이게도, 북한은 해방이후 사회혁명을 신속히 이룸으로써 식민지시대의 한국과 일본의 전문기술자들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반면, 남한에서는 일제의 사법, 경찰 기관 출신의 한국인 전문가들을 고용하는 경향이 있어 체제의 정당성을 잃어버리고 끝없는 비판을 초래했다.


1947년 중반에 북한의 한 신문기자는 북한정권이 식량배급을 여섯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힘든 노동을 하는 육체노동자가 가장 많이 받고, 친일 반역자가 가장 적게 받는다고 미국인에게 말했다. 임금은 기술자, 경영자, 숙련노동자, 일반노동자의 네 범주로 나누어져, 최하 950원에서 최고 3,500원으로 다양했다. 전국 곳곳의 고용센터에서 산업기술자와 노동자들을 충원했다.
여성 노동자들도 '동일한 작업에 대한 동일임금과 특별대우'로 인해 급속히 늘어났다. 약 1,200개의 조합이 노동자와 농민에게 재화를 분배했고, 이 조합들이 국영공장 생산품의 전량과 민간기업 생산품의 90%를 구입했는데, 나머지 10%는 자유시장에서 판매되었다.
평균임금은 '노동자들이 겨우 살 수 있을 정도'로 낮았다. 산업경제를 다시 작동시키기 위한 이러한 비상한 노력으로 인해 북한은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 중 한국전쟁과 그 회복기(1950~1956)를 제외하고는 남한보다도 훨씬 빨리 성장했고, 아마도 전후의 어떤 산업화 국가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급속히 성장했다.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국은 북한 경제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는 회귀한 자료인 1947년도 경제계획 극비문서를 입수했다. 전체 예산의 1/5 정도가 산업건설에 쓰였고, 1/5 정도가 국방비였다.(그럼 나머지는?)
일급기술자 1,262명 가운데 105명이 일본인이었고, 245명의 중급기술자가 일본인이었다. 러시아인의 이름은 명단에 없었지만, 러시아측의 자료에는 많은 러시아 고문관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많은 경우 1945년 이전 소련에 살았던 한국인 교포들이었다.
전체 어린이의 72%가 초등학생이었는데, 이는 1944년에 42%의 어린이가 초등학생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전국의 4만여 성인학교에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기본적인 한글강좌를 열었다.
미국이 획득한 북한내부의 비밀 경제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선철 생산량은 1947년의 6,000톤에서 1949년에는 166,000톤으로 늘어났고, 철봉 생산량은 61,000톤에서 145,000톤으로, 일반 철강재의 생산량도 46,000톤에서 97,000톤으로 증가했따. 철봉과 철강재의 생산량은 일본이 전쟁을 위해 한국산업을 발전시킨 1944년 당시 일본의 생산량을 능가하는 것이다.
1949년의 산업생산은 36.6% 증가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미군의 집중폭격이 시작되기 전인 1950년 초반 3분기의 생산량이 이미 1949년의 총생산량에 도달했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제2차 2개년 경제계획의 첫해 목표가 1950년 초반에 초과달성되어 그 해 나머지 기간의 목표가 상향 조정되었다.


1949년 9월 당시 3개월 동안 북한의 진남포에 억류되었던 일부 미국인들은 북한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남한보다 몸치장에서 뒤떨어진다고 증언했다.
펜이나 시계, 구두는 귀했으며, 어패류는 많았지만 육류는 귀했다. 밤에는 기차들이 활발히 다녔고, 석탄과 함께 전력이 풍부했다. 석유의 공급이 부족했기 때문에 석탄이 자동차와 트럭의 동력으로 사용될 정도였다. 항구의 제철소는 석탄저장소와 마찬가지로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갔다.
거리는 깨끗하고 잘 관리되었으나 한적했으며, 다른 항구도시와는 달리 거리를 배회하는 노동자는 거의 없었다. 이 설명은 믿을 만하며, 35년 뒤 내가 직접 본 원산항의 모습과 일치한다.


1949년 말의 한 연설에서 김일성은 북한의 높은 경제성장율에도 불구하고 경제부문의 많은 문제들을 언급했다.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어려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그는 1949년 9월까지 일부 산업에서는 전년에 비해 생산량을 50%에서 60% 정도 증대시켰지만 일부 분야에서는 겨우 20% 정도의 증산을 이루었고, '최악의 상황'은 석탄과 야금과 같은 핵심 산업들이 소폭의 증산밖에 하지 못하여 계획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많은 노동자들이 불과 몇년 전만 해도 농민들이었고, 그들은 농촌에서 옮겨와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직업이라도 가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최저수준의 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한 '일본 제국주의 원수놈들에게 많은 사람들은 노동을 강요당했다.' 일본인들은 노동자들이 노동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굶겼던 반면, 굶주림의 위협이 사라진 지금은 노동자들이 너무 많은 잉여물을 소비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농경조건이 양호하다는 이유로 그냥 귀향한데다, 농촌 지역으로부터의 노동력 공급은 이제 얼마 되지 않았다. 노동력이 공장에 묶여 있지 않았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여기저기 옮겨다녔다.
김일성은 황해제철소의 예를 들면서, 이곳은 1948년 8월에 700명의 노동자를 새로 공급받았으나 300명 이상에게 숙소를 제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나머지는 이틀 사이에 떠나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노동력은 저절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김일성은 그 특유의 방식으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느 더 나은 작업, 즉 '새로운 지도력'과 개인의 '노동개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노동자들의 임금체계를 올바르게 조직화해야 하고' 적절한 차벼적 보상체계를 무시한 채 모든 임금을 평준화시키는 '평균임금 체계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생산의 효율성을 자극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다 많이 생산한 노동자들이 임금도 역시 많이 받는 것은 원칙이다.'
김일성이 중국으로부터 모택동의 수법을 배우고 소련으로부터 유물론의 방법을 배웠으되 무엇이 한국의 상황에서 가장 잘 작동하는지를 예의주시하는 실용적인 관점을 항상 지녔음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예는 거의 없다.
북한 사람들은 '능력에 따른 분배에서 노동에 따른 분배로'라는 사회주의의 원리를 받아들였고, 급진적 모택동주의자가 후기에 보였던 것과는 달리 이들은 이 원리에 결코 도전하지 않았다. 이 원리가 초기에는 '우리 체계는 일반적 평등의 체계가 아니다'라는 주장으로 표현되었다.
즉, 북한은 정치적 평등과 노동과 휴식의 평등은 있지만 '인민은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노동의 질과 양에 의해 보상받는다'는 거이다. 그러나 이들도 역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직업, 도덕이나 이념의 차별적 보상체계, 대중개조운동이 생산을 자극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모택동의 원리를 받아들였다."(p.607~612)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이 정도의 설명으로 1945~50년 북한경제의 자립이나 성장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경제라는 것이 단순히 총량적인 외부 숫자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실업율(고용률)과 빈부격차(계층적 지역적), 임금과 쌀값, 무역, 주거보급율과 주거의 수준 등 경제적 수준과 평등의 정도를 함께 분석해야 가능할 것입니다.


○ 1945년 분단 이후 지금까지 남북은 자본주의, 사회주의라는 경제적 이념적 체제도 서로 달라졌지만, 체제의 출발에서 근본적인 차이 중 한 가지는 바로 일제잔재의 청산 여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은 일본인 기술자 등 외국인 또는 외국에 살던 조선인도 경제재건에 참여시킨 반면, 남한(미군정)은 일본인 기술자 등이 모두 돌아가게 만들었고 대신 친일언론인, 친일경찰, 일본군 및 만주군, 친일자본가와 지주를 중용한 것이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적어도 북한에서는 21세기에 와서 '친일청산'이나 '친일파 후예'라는 단어가 국내 문제로 다루어지지는 않을테니까요...


○ 1945~1950년 북한의 자립경제 구축과 경제성장의 모습은 같은 기간 동안 남한에서 벌어진 참혹한 기아와 저임금, 산업경제와 지주-소작 구조의 방치, 물가폭등과 식량난 등과 대비됩니다. 남한은 북한보다 몇 배의 토지와 경작지가 있지만 몇 배의 굶주림으로 고통받았는데, 그 이유는 쌀 생산량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한 쌀이 어디로 가는지, 얼마에 파는지, 공정하게 거래/분배되는지의 문제였을 것입니다.


○ 그러나 북한이 50년 가까이 자립경제를 자랑하고 있지만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1990년 초 이후 미국과 서방의 군사/경제봉쇄, 구사회주의권과의 우호적인 무역의 해제, 해외원료 부족 자연재해로 급속한 경제후퇴를 겪고 식량난으로 고통받은 것은 일국 자립경제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48 : 북한의 경제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시작된 3개년 계획과 뒤이은 5개년 계획(1957~1961)은 공히 소비재 생산에 최하위의 우선권을 둔 채 전쟁에 의해 황폐화된 주력산업의 재건과 발전을 강조했다. 그러나 주력산업에 대한 편향성이 소련권에서 온 전례 없는 대규모의 원조와 결합되어 경제에 박차를 가한 결과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북한 경제는 세계 최고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외부의 관찰자들에 의하면, 북한의 산업은 한국전쟁 이후 십년 동안 연평균 25%로 성장했고, 1965~1978년 사이에는 약 14%의 성장을 이루었다. 공식기록에 따르면, 3개년 계획기간에는 연평균 산업성장률이 41.7%였고, 연이은 5개년 계획기간에는 36.6%였다.
제1차 7개년 계획(1961~67)에서는 연평균 18%의 성장을 예상했으나, 중-소분쟁에서 북한이 중국의 편을 드는 바람에 1960년대 초반 소련의 원조가 중단되면서 이 계획은 3년간 지연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20년 동안 북한의 경제성장은 남한의 경제성장을 훨씬 능가하였고, 남한이 도대체 경제성장을 시작할 수나 있을지 걱정하던 미국 관리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1970년대 초반에 이르자 북한은 자체의 기술이나 전쟁 전의 일본 기술이나 소련의 신기술에 기반한 광범위한 산업발전이 분명히 소진되었고, 따라서 일괄 도급식의 설비를 구입하기 위해 서방과 일본으로 돌아섰다.
1971년의 프랑스산 석유화학단지, 1973년의 시멘트공장, 그리고 1977년 일본에 요청한 종합제철 시설의 구매(일본은 거절)가 이에 포함된다. 심지어 팬티스타킹 공장까지도 통째로 수입되었는데, 이는 소비재에 전보다 많은 관심을 쏟았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러한 구매로 인해 북한은 외채상환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그 규모는 지난 20년 동안 20억 달러에서 30억 달러 사이로 추정된다.


이후의 7개년 혹은 10개년 계획에서는 예정된 경제성장률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1978년에 발행된 미 중앙정보국의 보고서는 1976년 북한의 일인당 국민총샌산(GNP)을 남한과 동일한 수준으로 발표했고, 다른 연구에서는 1986년에 이르기까지 두 나라의 일인당 국민총샌산을 같은 수준으로 추정했다.
아마도 북한의 일인당 국민총생산이 최소한 1983년까지는 남한과 비슷하게 유지되었던 것 같은데, 그 이유의 일부는 1980년에 남한의 일인당 국민총생산에서 6%의 손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반 북한의 인구는 남한의 절반에 불과했지만, 북한의 전력, 석탄, 화학비료, 기계공구, 철강의 총생산량은 남한의 총생산량에 비견되거나 높았다. 그러나 북한의 노동생산성은 훨씬 낮았고 에너지는 일상적으로 허비되었다는 점에서 이 숫자들이 생산품의 우수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경제성장에 대해 비판적인 어떤 학자는 1978~84년 사이 북한의 연간 평균 산업성장률을 12.2%로 산정하고, 이것은 북한이 원래 계획했던 목표에 훨씬 못 미친다고 주장한다.


남한의 경제는 1980년대 중반이 되면서 되살아나, 그 이후 북한보다 상당히 앞서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남한경제의 후원자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앞선 것은 아니다. 서울의 중산계급은 북한의 일부 극소수 엘리트를 제외한 나머지보다 훨씬 잘산다. 그러나 남한의 일반 민중의 생활수준이 북한의 평균수준보다 낫기는 하지만 월등히 잘사는 것은 아니다.
1979년에 김일성은 일인당 소득을 1,900달러로 발표했고, 1980년대 후반에 북한은 2,500달러를 넘어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숫자가 정확한지 혹은 어떻게 산출되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그 숫자도 그 이후 극적으로 떨어졌다. 최근에 발행된 미 중앙정보국의 보고서는 북한의 일인당 소득을 1,000달러 가량으로 추정했다.
지난 20년 동안 북한은 그들이 원했던 분야에서 남한보다 뒤쳐진 것이 분명하다. 즉, 산업발전에서 남한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경쟁을 벌이거나 남한을 누르지 못한 것이다. 운송의 적체와 연료문제는 북한경제를 괴롭혔고, 무엇보다도 북한경제는 최근의 기술혁명을 놓치고 말았다.


북한은 2차 산업혁명 상품들 - 철강, 화학제품, 수력발전, 내연기관, 기관차, 오토바이, 기계제작 등 -에서는 성적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은 전자, 컴퓨터, 반도체, 원격통신과 같은 3차 산업혁명의 통신기술들에서는 상당히 뒤떨어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지가 절단된(basket-case) 각본들에서는 결코 언급되지 않는 성공과 이탈이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나 다른 국제연합 기구의 관리들은 북한의 기본 공공의료 서비스를 칭찬한다. 북한의 어린이들은 질병 예방접종에 있어 미국의 어린이들보다도 훨씬 나은 상태에 있다.
1990년 초의 국제연합 자료는 이 작고 가난한 나라의 평균수명이 70.7세에 이르러(남한은 70.4세) 미국에 그렇게 뒤떨어지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북한인구의 74% 가량이 도시에 살고 있어 남한의 78%와 비교될 수 있는데, 이는 남북한 모두가 세계기준으로 볼 때에도 상당히 도시화되고 산업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국제연합의 농업경제학자들은 북한이 1980년 이후에는 기적의 볍씨를 썼고, 대부분의 농지에서 (당시 남한에서는 여전히 널리 사용되던) 인분비료를 화학비료로 대체했던 것으로 판단했다. 상품과 서비스의 조달은 흔히 이웃이나 동네 단위로 분산되었고, 몇몇 지역은 식량과 소비재의 자급자족을 이뤘다고 한다.
북한에 거주하는 외교관들은 상점에서 구할 수 있는 물품이 별로 없다고 말하지만, 가게나 식당에 긴 줄을 서 있는 모습은 외국인의 눈에 띄지 않는다.
대중들의 사기는 구소련보다 분명히 낫고, 공장과 도시는 효율성과 고된 노동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1981년 원산의 호텔에서 며칠 체류했는데, 길 건너 큰 건물에서 쉬지 않고 건설하는 소리에 잠을 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상호의존과 자유무역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북한이 완강하게 추구했던 상대적 자립은 규모의 경제를 희생시키고 좀더 발전된 자본주의 경제로부터 북한을 단절시킴으로써 산업성장을 방해했다.
여기서 미국은 1950년부터 1995년에 걸쳐 대북 경제봉쇄 조치를 취했다가 1995년에 가서야 전략 및 첨단기술 품목을 제외한 모든 분야의 제재를 부분적으로 해제했음을 기억해야 한다.(그러나 제네바합의서가 본격적인 북미 평화협정으로 진전되지 못하면서 미국의 대북 경제봉쇄는 1990년대 중반 부시 정권 때부터 다시 재개되었죠.. 현재도 경제봉쇄는 계속 중...)
그러나 자립경제에서 이론의 여지 없이 성공을 거둔 것은 북한의 에너지 정책인데, 북한은 석유에 대한 의존도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국가 중 하나이다. 북한은 석유를 수력발전과 석탄으로 대체하고, 유화제품은 주로 군사적 용도로 사용했다. 남한의 자료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에 북한이 소비한 총 에너지의 약 10%가수입을 충당되었지만, 일인당 에너지 사용량은 남북한이 거의 같았다.


1978년의 한 대담에서 김일성은 일본 사회당 대표단에게, 1960년대 후반 북한의 일부 과학자들이 정유용 석유화학 산업에 착수하길 원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김일성은 '우리나라는 석유를 생산하지 못하고' 세계의 석유시장 체계는 미국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수입에 의존할 위치에 있지 않고.. 수입하게 되면 우리의 목에 결박을 허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답했다.
현재 광범위한 철도 체계의 많은 부분이 도시의 버스나 지하철과 마찬가지로 전기화되었고, 자동차는 최소한으로 사용된다. 비록 남한의 소비자들이 사용하는 에너지의 총량은 북한에 비해 훨씬 많고 북한의 에너지는 대부분 산업용이기는 하지만, 1990년대 초반에 북한의 일인당 에너지 사용량은 여전히 남한의 수준에 접근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사회주의 블록의 붕괴로 인해 북한은 주 시장을 상실하였고, 1990년대 초반 몇년 동안 국민총생산량이 감소하게 되었다. 남한의 자료에서는 그 감소율이 2~5%로 추정하였고, 미국정부의 분석가들은 1993년 말이 되면서 북한경제의 최악의 상황은 끝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993년 12월의 제21차 노동당 당대회에서 북한이 '우리 경제건설의 큰 손실'과 '가장 복잡하고 첨예한 내외의 상황'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하기까지 했으니, 이는 지도부에게는 전반적 위기였다. 책임의 대부분은 답답한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 탓이 아니라 북한의 많은 무역 상대국들과 조약들을 '박살내버린 사회주의 국가들과 사회주의 시장권의 붕괴' 탓으로 돌려졌다.


이 위기로 인해 북한은 자립경제의 앞날에 관해 심각하게 재고하게 되었다고, 그 결과 외국으로부터의 투자, 자본주의 회사와의 관계, 새로운 자유무역 지구에 관한 새로운 법을 다수 제정하게 되었다. 은행, 노동, 투자에 관하 많은 새 법들이 포고되었다. 외국 기업가들은 이 새 법들이 외국의 투자유치, 이윤 송금, 소유권 규정에 있어서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자유로운 것으로 평가했다.
김일성의 친적인 김정우는 북한의 북동쪽 구석에 있는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역의 책임자가 되어 1990년대 초 중반에 열심히 외국투자들을 유치했다. 홍콩, 일본, 프랑스, 남한의 몇몇 회사들이 북한에 제조공장의 개설을 약속했고, 미국 백텔사의 전직 경영자가 이끄는 기업연합체가 나진-선봉지역에서 운송, 통신 기반시설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주도하고 있다. 쉘 석유회사도 역시 1995년에 이 지역에 투자했다.


최근 수십 년 동안의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이 보여준 것이 있다면, 자본주의 경제의 급속한 성장이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권력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김정우가 기자들에 북한은, 그가 보기에 '기업활동의 많은 자유'와 '질서, 규율, 준법'을 결합시키는 '싱가포르를 모델로 삼고자 한다'고 발표한 것은 충분히 예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남한의 많은 기업들이 깊은 관심을 두는 싸면서도 지적이고 잘 훈련된 북한의 노동력은 남한이 세계시장에서 비교우위를 다시 확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고, 그런 가운데 남북한 모두를 서서히 통일을 향해 밀고 갈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중국이나 베트남의 획기적인 대외지향의 개혁에 이르려면 아직은 갈길이 멀다.


은자의 왕국인 북한의 자립정책은 이 나라가 20세기에 계속 맞았던 위기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 정책은 식민지화, 경제공황, 전쟁의 재앙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들어섰지만 지금에 와서는 부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김일성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과 소련이 무너진 1991년에 정치국의 동료들을 쳐다보면서 북한이 소련의 블록에 통합되었거나 모스크바가 동구권에서 육성한 세계분업체계에 참여했더라면 어떻게 될 뻔했느냐고 묻는 모습은 상상해볼 수 있다."(p.613~618)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커밍스 교수는 일반적인 국내외 경제학자들이 북한경제를 언급할 때 고려하지 않는, 즉 한국전쟁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는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봉쇄와 군사적 위협에 대해 거론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유엔의 경제봉쇄로 인한 대규모 민간인의 사망은 이라크(10년간 100만명 사망)와 우크라이나, 구유고연방 등에서 이미 나타난 바 있습니다. 북한의 자립경제 정책은 미리 예상했던 그렇지 않든, 자발적 선택과 외부적 강제가 얼마나 반영되었든, 경제봉쇄로 인한 민간인 사망을 예방한 측면은 있을 것입니다.


○ 남북한 경제를 단순히 몇 개의 수치를 동원하여 비교하는 것 만큼 우스꽝스러운 모양도 없습니다. 남북은 상대방이나 제3자에게 비교하여 자랑하기 위해 경제수치를 다듬을 게 아니라 각자의 사회체제에 맞는 실질적인 경제적 안정과 평등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국가는 가장 일인당 소득이 적은 국가 중 하나인 방글라데시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1세기에 중요한 것은 외형적인 경제규모나 평균 소득이 아니라 최소한의 삶의 질과 사회적 소득편차(빈부격차)입니다. 미국이나 한국처럼 빈부격차가 큰 나라는 오히려 다수 민중들의 열패감과 불신, 절망을 퍼트리고 자살율과 정신질환율을 높이게 됩니다.


○ 커밍스 교수가 자유무역과 자본주의 경제의 신봉자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경제방식과 남한식의 수출위주의 재벌중심의 종속적 무역협정 체제 아래서 노동자 농민 서민의 피땀을 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북한에 도입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현재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수출액, 자유무역율, 일인당 생산액, 소비액 등 외형적 형식적 경제수치나가 민중들의 삶과 행복을 보여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남북이 자신들만의 체제와 방식이 우월하다고 주장만 할 게 아니라 머리를 맞대고 한반도의 조건과 역량에 맞는, 서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민중들의 삶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방식과 협력방안을 모색했으면 합니다.
일본이나 중국 뿐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 역시 한반도는, 남북은 자국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100~150년 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환경의 본질과 그 세력들의 본심은 하나도 변한 건 없습니다.







49 : 1994년 이후의 북한


"1994년 김일성 사후 북한은 끔직한 위기를 연달아 겪었다.
1995~1996년 2년에 걸쳐 전대미문의 홍수가 찾아왔고 에너지체계는 거의 붕괴되었으며, 1997년 극심한 여름 가뭄에다 그로 인한 기근까지 덮쳐, 거의 200만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한다.(커밍스 교수도 기자들의 추정을 따른 듯...)


김정일은 집권당의 통솔권을 물려받기 전에 후계자로서 3년간의 전통적인 애도기간을 꾹 참고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국가원수(주석)가 되지는 않기로 했는데, 아마도 외국 원수를 만나는 것이 불편해서 그런 것처럼 보였다.
김정일은 '천명'을 받아 매우 위태로운 정권의 미래와 여전히 굶주리고 있는 백성을 떠맡게 되었다.


아마도 1995년 이후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1997년 9월 월드비전 부회장인 앤드루 냇씨어스가 기자들에게 북한이 기근으로 50~100만 명이 죽었다고 말했는데, 그 이후 신문기자들은 그냥 200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1994년 10월 핵 기초합의안에 제시된 경수로 건설공사를 착공하기 위해 북동 해안을 방문한 국제대표단은 기근과 영양실조의 증거를 별로 보지 못했다. 북한은 시골이나 도시에서 주택을 소유한 가정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작은 땅을 가지고 있는데, 이 땅은 한 치의 틈도 남기지 않고 경작되고 있다.
LA타임즈의 한 기자는 작은 밭을 가진 몇몇 가정을 방문하고서 그런 사람들은 정부의 식량배급을 받을 필요 없이 먹을 것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았다.


북한의 기근은 대자연에도 책임이 있지만, 소비에트 블록이 붕괴되는 바람에 북한의 수출시장이 곤경에 처한 이유도 컸다.
과거에 북한 수출품들은 석유, 코크스용 석탄 및 다른 필수 수입품과 유리한 비율로 교환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석유 수입의 급격한 감소는 국가의 교통망과 농장에 엄청나게 많은 비료를 공급하던 거대한 화학산업을 망가뜨렸다.
현재(1997년)까지 여러 해 동안 북한의 산업은 자기 능력의 50%도 채 가동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북한이 식량과 석유 그리고 그밖의 필수품을 수입하는 데 필요한 외화를 벌기 위해서는 세계시장에 수출할 방도를 찾아야만 한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통합된 개혁도 현정권이 성취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북한의 행정체계에는 관료적 계보와 위계서얼이 마치 독립왕국처럼 존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서로 의사소통이 잘 안 되기 때문이다.


북한은 1989년 이후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이 택한 방식과 같이 모종의 탈공산주의를 향해 어영부영 나아가지도 않고 있으며, 그렇다고 중국과 베트남처럼 진지하게 개혁을 추진하지도 않는다. 지도부는 경제개방의 결과를 심히 겁내어, 그 대신 나진-선봉 수출지구처럼 해안의 소규모 특구를 열어두는 쪽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최근에 닥친 모든 곤경에도 불구하고 이 곤경 중 어느 것도 최고지도부의 안정성을 위협했다는 징후는 거의 없다. 이 체제가 무너져가는 것은 오히려 지방 차원에서이다.


예를 들어 최근에 차를 타고 평양에서 북동부 함흥까지 들러본 어떤 사람은 내게 함흥의 강둑을 따라 매일 거대한 물물교환시장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고 말해주었다. 현금, 특히 달러가 광범위하게 사용되면서 높은 값을 받고 있었다.
지방 곳곳에서 정부의 식량배급이 몇달째 끊겼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외국인 구호전문가들은 북한에 전달된 식량이 특권화된 군대에 전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문제는 오히려 지방에서 생산된 식량 재고가 평양의 엘리트와 방대한 군대로 가는 것이다. 외국인 관찰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문제를 제외한다면 북한 정부는 현재 남아 있는 식량 재고를 균등하게 분배하는데, 이는 젊은이와 노년층, 허약한 사람들이 고통을 감수할 첫번째 대상으로 분류되는 선별정책과 결합되어 있다.
정부는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에 도움을 주고, 도움을 거부해야 할 곳에는 도움을 거부하면서 정부권력의 핵심적인 기둥인 군부를 계속 충분히 먹이고 있는 것이다.



1997년 김정일은 농부들에게 수확의 30%까지를 가질 수 있게 하는 법안을 승인했다. 만약 이 법안이 실행된다면 진정으로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겠으나, 북한의 농업생산은 비효율성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
최근 곡물수확은 400만톤 이상으로 올라간 적이 거의 없기에 이 나라는 주민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여전히 외국원조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은 대량의 원조곡물을 여러차례 북한에 제공했다. 미국정부를 포함한 서구 쪽에서는 1995년 잏 북한에 원조로 5억 달러 이상을 제공했고, 세계은행 관리들은 북한측이 "자본주의적 경제운영에 대해 배우고" 싶어한다고 하면서 몇몇 유럽국가들로 하여금 북한의 전문가 양성을 가능케 하는 지원을 주선했다.


하지만 세계 곳곳의 유사한 인도주의적 위기와 달리, 북한의 경우 앞서 거론한 지방 차원에서의 붕괴를 제외하면, 이 위기가 국가권력을 와해시키고 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김일성 사후 북한 지도부에는 중대한 변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몇몇 탈북자 사건이 있었고 이들 중 다수가 남한 언론과 세계의 미디어에 의해 관대선전되었지만, 오로지 1997년 2월의 황장엽 씨 경우만이 진짜로 의시심장한 사건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북한정권이 황 씨의 이탈에 당혹스러워하고 어리둥절했던 것은 사실이라 해도 황씨는 결코 중심권력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핵심지도부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01년 9월 김정일은 3주 동안 무장된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왔는데, 이는 아마 북한에서의 그의 권력장악이 이제 확고하고 안전해졌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북한이 마치 소말리아나 이디오피아처럼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훨씬 더 발전된 현대적 경제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역사적으로 강력한 산업경제를 가졌었고 비교적 도시화된 상태로 남아 있으며, 앞서 보았듯이 최근까지도 국제기구들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평균예상수명률, 아동복지, 예방접종율, 일반적인 공중보건 상태 등이 비슷한 처지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당히 높았다.
인도주의적 재해에 의해 타격을 입은 다른 국가들과 달리 북한은 허약한 정부로 망신창이가 된 주변부적인 국가가 아니다. 북한은 현저히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와 높은 국가적 역량, 그리고 아주 작은 지역사회에까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잘 교육받고 훈련된 노동력이 있기 때문에 북한은 세계시장에서 노동비용의 비교우위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수년간 남한의 주요 회사들은 그들의 기술을 북한의 노동력과 결합시키기를 희망해왔다. 남포에 세워진 대우 섬유공장처럼 몇몇 회사는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북한주민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정말 변명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중앙 당국자들이 진정으로 기근 상태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거기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른 사회기구들을 손상시키면서 군대에게만 필요한 것을 주기로 결심한 듯하다.
이는 공산주의 정권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며 인민에게는 비극이다."(p.624~629)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커밍스 교수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는 점 중 하나는 북한에 대한 정보 중 자신이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 쉽게 일반적인 언론보도를 인용하고 신뢰한다는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사례가 북한의 기근 기간에 사망한 사람들의 통계에 대한 인용이다.

유엔인구활동기금과 한국 정부의 자료에 따르면, 북한에서의 '초과 사망(평균적인 연간 사망자 초과인원)'은 1994~2005년까지 12년간 48만명, 출생 손실은 13만명으로 추정했다.(아래 관련 기사 참조)
- 유엔인구활동기금 “북한 총인구 2천405만명(1993년 대비 300만 명 증가)”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338752.html)
- 1993~2055 북한 인구추계 (통계청) http://kostat.go.kr/portal/korea/kor_nw/2/1/index.board?bmode=read&aSeq=244061


○ 커밍스 교수는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와 세계적인 자본주의적 무역체제, 그리고 미국과 유엔의 불합리한 북한에 대한 군사경제적 봉쇄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것은 북한의 대외무역이 가로막혀 있는 것이 마치 미국이나 서구 국가들이 아무런 조건없이 쌍수를 들고 북한과 무역을 하려고 하는데, 유독 북한 지도부가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려 한다는 식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이란, 러시아, 베트남처럼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 아무런 변화에 대한 요구없이 과연 미국과 유엔, 서구국가들은 북한과의 공정한 경제교류와 무역을 하려고 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북한 지도부가 동유럽이나 1980년대 남미처럼 미국과 유엔, IMF와 IBRD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자유주의식 자본주의 방식을 도입했다면 북한 인민들은 동유럽이나 남미, 멕시코 인민들의 비참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 남한은 이미 1945년부터 미국의 군사경제시스템과 국제무역체계에 편입되어 있었으면서도 1997년 외환위기 때 미국 재무부와 IMF와 IBRD에 의해 국가경제 체제가 망신창이가 되었다. 남한의 경제는 1997년 이후 2014년까지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상황이다. 그것은 빈부격차와 비정규직의 증가, 자살율 ,출산율, 정신병자 발생율, 소득감소율, 경제자립도 하락, 금융/환율 종속도 증가 등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그냥 국내외 대기업과 금융자본가들에게 빨대가 꽂혀있다는 느낌이 든다.







50 : 북한에 대한 결론


"북한체제의 강점과 안정성은 전통적인 양식의 정당화와 현대적 관료제 구조 사이의 결합에 기반하고 있는데, 이 둘 사이의 이행과 결합은, 베버적 방식으로 말하자면, 김일성의 독특한 카리스마로 인해 만들어진다.
구체제이든 오늘날 북한체제이든, 이 체제의 아킬레스건은 '위대한 지도자들' 즉 철인 군주는 없고 일정한 주체성을 가진 인간들만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선이고, 누가 그것을 구현할 것인가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덕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언쟁이 일어나고, 분파가 생기고, 폭력이 행사되는 가운데서는 인간의 덕을 따르지 않는 새로운 현실이, 즉 민비 같은 사람이 뼛속 깊이 알고 있었던 마키아밸리적 권력 정치 영역이 모든 사람을 길들이는 것이다.
이것을 인생이라 부를 수 있다면 2,200만의 인간이 김일성 일가의 체제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음도 기억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세계는 1948년 이래 어느 때 못지 않게 평양에 대해 적대적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은둔의 체제는 그 시조의 죽음을 맞았고, 그의 죽음이 체제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라는 지난 25년간의 예측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에게 배턴을 넘겨주면서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박성철과 이종옥과 같은 당 원로가 젊은 지도자 김정일의 길을 열어주었고, 최고권력의 핵심은 여전히 뭉쳐 있고 강력함을 보여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북한 사람들은 또 다른 '태양의 왕국'을 받아들이고, 이 현대의 은자의 왕국에 아주 다른 세계가 다가옴에 따라 외부영역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북한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는 누구에게나 추측거리이다.
그러나 내 견해로는 과거에 외부 관찰자들은 모든 가능한 방식으로 북한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에 잘못 판단한 것 같다.
반면에 이 체제가 한국의 전통과 반(反)식민주의적 민족주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고, 따라서 냉전체제 이후의 세계에서도 지탱할 힘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지금까지는 옳았다."(p.630~631)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커밍스 교수의 결론은 초판인 1997년 뿐 아니라 책의 개정판을 출간한 2003년까지 동일한 것으로 보입니다. 남한 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개방된 처지에서, 상대적으로 공정하고 객관적인 연구자세를 견지하면서, 상당히 많은 정보를 통해 북한을 연구한 커밍스 교수이지만, 그도 "냉전체제 이후의 세계에서도 지탱할 힘이 있을 것"이라는 점 이외에는 무엇 하나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다는 걸 느낍니다.


○ 커밍스 교수에 비하면, 남한 내에서 북한에 대해 이러저러한 연구를 했다거나 평가를 하는 지식인들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반공반북 이데올로기가 무서우면 연구를 포기하거나 유럽 등 외국대학에서 연구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포기하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이들이 공안기관이나 언론, 정권의 검증되지 않는 1차 자료로 북한을 연구한다고, 무언가를 발표한다고 덤비는 용기는 가상하나 어용학자 내지 어용지식인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냥 '생계형 지식소매상'인 셈이죠.


○ 남한 내 학자와 지식인 중에서도 커밍스 교수 정도의 기초자료와 발품을 팔면서 북한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물론 국가보안법과 냉전수구세력의 위협이 학문적 연구를 심각하게 방해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돌이켜보면 진실을 드러내고 진리를 추구하는 일은 늘 그래왔죠...







51 : 미국의 한인들


"우리가 배운 바로는, 한국(Korea = 남북한)은 20세기의 다른 어떤 국민들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역사를 지닌 약 7천만의 인구로 구성된 종족적으로 동질적인 국가이다.
스스로 자각하는 민족의 순수성, 즉 국민의 종족적 동질성으로 인해 한국인들은 유구한 역사, 문화, 영속성을 갖고 있는데, 한국인들은 이에 깊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동시에 이 견고한 종족적 정체성은 비한국인들에게 손쉽고 피상적이며 심각한 오해를 자아내는 동질성의 인상을 준다.
유전자와 인종에 관한 앞의 논의가 이 점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나의 반도에서 비교적 순수성과 영속성을 유지해왔다는 한국인들의 믿음은 그들이 멀리 떨어진 인종과 지역의 사람들과 그토록 많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어긋나듯이, 한국인의 얼굴 속에는 인간의 조건 그 자체만큼이나 광범위하게 다양한 인간성이 숨겨져 있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지각 사이의 긴장을 일상생활에서 예민하게 느낀다.
스페인계 미국인 교사는 자기 교실에 앉아 있는 존 킴(John Kim)이라는 이름의 학생이 일본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학생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흑인이나 유태계 미국 학생은 그가 중국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가 한국인이라는 대답 역시 딱 들어맞는 정답은 아니다. 왜냐하면 존 킴은 스스로를 미국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쨎든 아시아계가 아닌 대다수 미국인들이 한국을 일본이나 중국과 구별하기는 어렵다. 한국의 차별성에 관한 약간의 지식이 있다면, 상황이 나아지는 동시에 악화되기도 한다.


요즘 미국 최고 대학들의 수업에서 놀랄 정도로 세상 물정에 밝고 총명한 한국계 미국인 학생들을 발견하는 것은 교수의 흔한 경험이다. 한국계 미국인 젊은이들은 종종 신입생의 10%를 차지하며 캘리포니아에서는 그 비율이 더 높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그들을 '모범적인 소수민족'으로 전형화한다는 점에서 문제이다. '모범적 소수민족'은 한편으로 탁월함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수의 백인 주류가 미국의 소수민족들을 '좋은 소수민족'과 '나쁜 소수민족'으로 분할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범적인 소수민족'도 내부에서 다시 갈라지는데, 몇가지 차이를 든다면 계급, 부, 세대, 언어, 종족, 정치, 종교, 거주지, 도시와 교외, 이민시기가 그 기준이 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단지 미국인일 뿐이다.


한국계 미국인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삶이 그렇게 쉬운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며, 다른 소수민족을 위한 모범이 되기보다는 그들 스스로가 다른 바람직한 모델을 찾고자 한다.
[뉴욕 Newyork]지는 한인들을 '뉴욕 시에서 가장 생산적인 공동체'라고 부른 한 경제학자의 말을 인용했지만, 1994년에 700개의 한인 소유 상점들이 개업하는 한편, 다른 900개 상점들은 문을 닫았다. 이 기사의 필자는 소규모 사업을 통한 상층이동에 대한 관심이나 자식 교육에 대한 열성의 측면에서 한인을 유태인에 비유하면서, '뉴욕시의 최고 이민들'이라 불렀다.
한인들은 유태인들과 같이 한 세대에서는 채소상점이나 옷가게를 운영하고 다음 세대에서는 바이올린 연주자나 하버드 졸업자를 배출한다. 일부 한국계 미국인들은 자신들과 유태인들의 성공과 주변화를 상징하기 위해 스스로를 'Kews'라 부르기까지 한다.


"모든 이들이 한국인을 알지만, 아무도 한국인을 알지 못한다" 다수인종인 미국 백인의 시각에서 진술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 표현은 미국사회 속에 존재하지만 그 일원은 아닌 한국계 미국인들의 일상적 경험을 잘 요약하고 있다.


다른 이민자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한국계 미국인 대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나의 어떤 부분이 한국적이고, 어떤 부분이 아닌가? 나 또한 이 질문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는데, 내 아들들이 이 질문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질문은, 한국인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이 왜 한국말을 못하는지(따라서 한국문화에 자신들을 통합시키지 못하는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에 의해 가장 끈질기게 제기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단연코 더이상 한국인이 아니라고 단정하는데, 이러한 시각은 여행이나 학업을 위해 서울에 가는 많은 한국계 미국인 학생들에게 정서적인 어려움을 준다.


미국에 사는 많은 한국인들은 영어를 배우지 않고 작은 '코리아타운'에 틀어박혀 산다. 그들도 또한 미국사회에의 동화, 특히 자기 자식들의 동화된 모습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미국으로 이주한 시기에 따라 한인사회 내부의 균열이 일어나며, 한인들을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다수 미국인들이 한인들 개개인을 보는 시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언젠가 나는 한인 이발소에 앉아 내 아이가 이발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한국인 어머니도 내 옆에 앉아 자기 아이의 이발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아이가 내 아들에게 본토 영어로 말하는 동안, 그녀는 이발사와 본토 한국어로 이야기했다. 이발이 끝난 후, 어머니는 아이의 이마에 묻은 머리카락을 털어주고 코트를 어깨에 걸쳐주고는 데리고 나가면서 한국식 발음의 영어로 말했다.
"유 아르 마이 스위트 초코래트 파이"(You are my sweet pie '예쁜 내 새끼'라는 뜻)


하지만 나의 어떤 부분이 미국적이고, 어떤 부분이 한국적인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이제는 건국 이래 미국의 전 역사 가운데 약 40%를 겪어온 한국계 미국인들의 경험을 주시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한인들은 금세기 들자마자 하와이로 불리는 미국 식민지에 도착하여 미국 영토레 들어오기 시작했다. 백인 대농장주들은 한국인들이 일본 노동자들만큼 부지런하면서도 싼값에 구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하여 곧 수천 명의 한인들이 작업반에 고용되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1903년에 이르면 약 50명의 한인들이 학생, 외교관, 상인, 노동자 신분으로 미국에 있었다. 하지만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에 수많은 한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했는데, 그 수는 모두 약 7천 명에 달랬고 주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미국인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사탕수수농장 노동으로 '자신들의 상황을 향상시키고 유용한 지식을 얻을 것'으로 확신하여 이 이민을 촉진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농장주들은 '백인들이 도저히 사탕수수농장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을 환영했던 것이다.
호러스 앨런은 하와이 지사인 썬포드 돌에게 한국인들은 "인내심 있고, 근면하며, 오랜 복종의 습관으로 인해 다루기 쉬운 유순한 인종"이라는 점에서 중국인보다 우수하다고 말했다.


이는 하와이 열대에서 펼쳐진 전원생활이 결코 아니었다. 한인들은 한달에 15달러의 임금과 숙소를 제공받기 위해 일주일에 6일, 하루에 10시간씩 타는 불볕 아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한 명의 십장이 250명의 노동자를 감독했고, 성비는 남자 200명에 여자 50명이었다. 초기 이민자인 이홍기 씨는 95세였던 1971년 당시의 면담에서 농장 일을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아침 4시에 기상해서 아침을 만들어 먹고, 5시에는 들판으로 나가야만 했다. ... 우리 조의 조장은 독일사람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대단히 엄격했다. ... 그는 우리를 소나 말처럼 다루었따. 누군가 그의 명령을 어기면, 그는 뺨을 때리거나 가혹하게 채찍질하여 처벌했다."
노동자들은 결코 이름으로 불려지지 않았고 대신 번호를 부여받았다. 노동자들은 한방에 4명씩 나우어져 딱딱한 나무침대에서 잤다.


그 후로, 특이 여자들이 이들과 합류했을 때, 한인들은 본토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1904년부터 1907년 사이에 미국 서해안 지역 아래위로 흩어졌고, 대개는 농업에 종사하면서, 특히 당시 로스앤젤레스에서 리버사이드까지 퍼져 있었던 오렌지나 레몬 과숭원에서 과일 따는 일을 했다.
로스앤젤레스에는 1930년대에도 여전히 650명 남짓의 한인밖에 살고 있지 않았고, 1970년이 되어서도 8,900명 가량밖에 안되어 약 115,000명의 전체 한국계 미국인들 중 13%에 불과했다. 하지만 로스앤젤레스는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에서 가장 큰 한인 공동체의 본산이다.


한국인 이민들은 수확기에 과일을 따고, 농장을 임대하여 채소를 재배하였고, 자기 소유의 농지를 사서 가족농 사업을 하길 원했다. 캘리포니아 백인들은 한인과 그밖의 아시아인들에게 가혹한 인종차별 제도를 실시했다.
1913년 인종배제법은 중국, 일본, 한국인 이민의 소유권을 금지하였다. 1921년의 '이민할당법'은 1910년 기준으로 외국계의 경우 해당 국적 출생자의 3%에 해당하는 이민만을 매년 허용했는데, 이는 한국계의 경우 극소수의 새로운 이민만이 허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법에 이어 곧 아시아인들만 특정 대상으로 하는 1924년 이민법이 제정되었다. 그 후로는 아주 작은 숫자의 한국인들만이 미국에 왔고, 이들은 주로 학생들이었다.


한국의 미국인 서교사들은 한국인 학생들이 종종 중서부 종교재단의 대학에 유학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오하이오의 우스터대학에 다녔고 다른 많은 한국인들이 인근의 오하이오 웨즐리언 대학에 유학했다. 장덕수와 조병옥처럼 일부 부유한 한인들은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했다. 조병옥은 펜실베니아의 킹스턴에서 고등학교도 다닌 바 있다.
오하이오 주립대학 출신들은 일종의 한국판 마피아 조직을 꾸리기도 했는데, 이 대학에 임병직(이승만 초기 외무장관)을 비롯한 이승만의 여러 측근들이 다녔다. 김규식은 로아노크대학을 다녔는데, 그는 버지니아에서 당했던 인종차별의 아픈 기억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1924년에 이르러 미국에는 아마도 3,000명의 한국계 미국인들이 거주했었고, 그 대다수는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살았다.
그들은 집이나 농장을 임대하기 어려웠고, 음식점, 호텔, 이발소의 이용을 거부당했다. 때때로 친절한 백인이 한인들은 부지런하고 깨끗한 생활을 한다고 두둔하기도 했다.
일부 한인들은 경작할 땅을 임대하거나 구입할 수 있었고, 그들 중 소수는 번성해졌다. 그러나 75% 이상의 대다수 한인들은 분명히 노동계급에 속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국계 미국인들은 2차대전 전부터 '리틀 도쿄'라는 일본인 촌에 사는 많은 일본계 미국인들과 다르게 보이려고 많은 시간을 들였다.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식민통치자들은 그들의 여권에 일본인 이름을 찍어주었고, 미국인 중에는 두 민족을 구별할 만큼 한국의 식민지 이전의 독립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일례로, 스탠포드 대학은 세누 하찌로라는 이름의 학생을 첫번째 일본인 졸업생으로 기록해 놓았지만, 세누(선우)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 이름이다."(p.632~639)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한국사를 다루면서 해외(미국)에 팔려가고 이민간 한민족의 역사를 시시콜콜하게 다루었던 역사책은 제가 아직 접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또다시 커밍스 교수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 우리는 남북한 문화와 사람들이 다르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커밍스 교수처럼 외국인들은 남북한과 남북한 사람들이 통틀어 Korean(한국인)으로서의 공통점을 디른점보다 더 많이 발견하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즉, 한국인의 인식과 문화가 "우물 안 개구리"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죠. 물론 이런 점은 일반인들의 책임이라기 보다 관료들과 지식인, 언론 등 기득권층의 책임일 것입니다.


○ 제3세계와 식민지인으로서 제국주의에 당하는 서러움이 배가된 선조들의 이야기입니다.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집단농장에 노예 수준의 노동으로 팔려간 조선인들의 고난은 무능, 무책임하고 부패한 조선과 대한제국의 실상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21세기라고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지...


○ 이 단락에서도 나타나듯이 민족주의 같은 감정과 문화가 한 편으로는 긍정적이지만, 삐뚤어지게 작용하면 배타주의와 문화적 폭력으로 역기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52 : 미국의 한인들 2


"미국이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때에도 한국인들은 여전히 기존의 인종할당제 때문에 미국으로 이주할 수 없었고,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고 1924년 이전에 미국에 온 3천 명 남짓의 한국인들은 여전히 미국으로 귀화할 수 없었다.
메어리 백의 회상으로는 한국전쟁 동안 "공중화장실, 수영장 등지에 붙어 있던 '백인전용'이라는 표지판 대다수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철거되었다. 하지만 이발소, 극장, 교회의 차별표지가 없어졌건만 동양인들은 여전히 문전박대 당하고 했다."


15개 주가 한인과 백인의 결혼을 금지하였고, 11개 주는 한인의 토지 구입 및 소유를 허용하지 않았고, 뉴욕시는 한인에게 27개의 직업을 금지하였다.
게다가 시민권이 없었던 탓에 여러 한인들은 큰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1940년대 후반 로스앤젤레스에는 [한국독립신문 Korean Independent]이 있었는데, 이 신문의 논조는 미국에서 이승만을 오랫동안 겪은 경험에 근거한 이승만에 대한 반감, 안창호에 대한 지지, 그리고 좌파 자유주의 혹은 뉴딜 정책의 관점에서 미국의 한국점령정책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한국독립신문]은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이 개입을 과감하게 반대했으며, 그 결과 FBI와 지역경찰의 '반공 수사대'로부터 끊임없는 감시를 받았다. 이 신문에 관여한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아마 이곳저곳의 공산주의자와 연계를 갖는 좌익들이었지만, 이 신문 자체의 정치노선은 미온적이었다.
다이아몬드 킴(한국명 김강)이라는 이 그룹의 한 인사는 1950년 FBI에 의해 주방되어, 결국 북한으로 갔다. 반면에 다른 몇몇은 그만큼 운이 좋지 못했으니, FBI가 이들을 이승만 정권의 처분에 맡겼는데, 이들은 투옥되었고 그 중 일부는 아마도 처형당했을 것이다.(이러한 주장은 신분을 밝히지 않는 이 그룹의 인사들과의 대담에 근거하고 있다. 내가 지난번 이 한국계 미국인들에 관한 서류의 열람을 FBI에 요구했을 때에도 그 자료는 여전히 기밀문서로 분류되어 있었다.)


미국의 시대착오적인 인종배제 법안들은 민권운동의 절정기였던 1965년에서야 종식되었다. 미국 귀화 및 이민의 통계자료에 따르면(이 자료는 실제 수치를 상당히 줄여 보고한 것일 공산이 크다), 1950년 미국에 온 한국인 이민은 단 10명 밖에 없었고, 10년 뒤에는 1,507명, 1970년에는 거의 1만 명, 1975년에는 32,158명으로 늘어났다.
1970년 인구조사에서는, 8,881명의 한국인이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다른 자료에서는 이 숫자가 실제 총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모사는 것으로 보았다. 또 1975년에 이르러 미국에서 태어난 13,000명의 한국인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들 중 1만 명은 한국인의 이민을 엄청나게 증가시켰던 1965년의 법개정 이전에 출생한 듯하다.
그후 30년간 미국의 한인공동체를 그토록 확장시킨 것은 (1965년 이후의) 새로운 이민행렬이지만, 새 법은 이민올 수 있는 한국인을 특정한 사람들로 철저하게 제한하기도 했다. 이 법은 고도의 숙련딘 기술직 종사자나, 미국 경제에 투자할 만한 돈을 가진 이들에게 우선권을 주었다. 이 정책은 힘들고 엄청난 노력을 요하는 한국 교육에서 낙오된 부유층 집안의 아들, 딸에게 도피처를 제공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최근 들어 역이민을 통해 추세가 역전되기 전까지는 한국으로부터 '두뇌 유출'을 초래했다.
'한국계 미국인 공주'들의 존재는 이제 미국 대학 어디에서도 피할 수 없는 현상이 되었다.


한국인들은 다른 이유로 이민을 택하기도 했는데, 박정희 전두화의 억압적 정권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한국인 이민의 정점은 매년 35,000명이 이주했던 1985~1987년이었는데, 이 시기는 군부독재의 막바지에 해당했다.
사회학자들은 전두환 정권의 폭압을 이민의 주된 이유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나중에야 발견했다. 한국인들은 미국과 한국 사이에 엄청난 부의 불균형이 있음을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의 영내매점(PX)이나, 주한미군방송(AFKN)에서 항상 방영된 미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 그리고 오리 전부터 미군병사들이 한국 여자친구를 유혹할 때 사용했던 '씨어즈 로벅'의 카탈로그를 통해 확인했고, 이로 말미암아 많은 한국인들은 미국의 길거리는 황금으로 포장되었다고 생각했다.
여성들은 유교적 가부장제를 벗어나기 위해서, 혹은 기독교 신자로서 성적 평등의 진가를 인식하게 되어 한국을 떠났다. 한국인 가운데 기독교인은 21%인 반면 최근 이민자들 가운데 54%가 기독교인이었다.
소규모 사업가들은 갈수록 재벌그룹이 장악해 가는 경제에서 밀려나서 왔다. 전라도 사람들은 한국내의 차별과 기회의 상실로 인해 대규모로 이주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주해와 있던 가족과 합류하려는 친지들이었다. 단지 좀더 편한 삶을 바라거나 자녀교육에 더 좋은 기회를 원해서 온 사람들도 있었으니, "1986년까지만 해도 남한사람들은 끔찍한 노동조건 하에서 세상에서 가장 장시간 노동을 했던" 것이다.


1970년대 중반에는 전체 한국계 미국인들의 약 85%가 노동계급에 속했고, 단지 5%만이 전문직이었다. 그러나 한국계 이민의 70% 이상이 고국에서는 전문직이었다. 1970년대 남부 캘리포니아에는 약 600명의 의사 출신 이민들이 개업허가를 받지 못해 보건관리 종사자나 병원직원으로 일했다. 최근 조사에서도 이 비율이 그렇게 많이 낮아지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전체 인구의 8%만이 전문직인데 비해, 한국인 이민 가운데 33%가 고국에서는 전문직이었고, 80%가 자신을 고국에서는 중간 혹은 중하 계급이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100만 명이 넘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미국 전역에 살고 있지만 특히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 집단적으로 모여있다. 지금은 더 많은 한인들이 전문직업인이 되어 교외에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주하는 대다수의 전문직업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기술과 배경에 걸맞는 자리에서 일하고 있지 않으며, 한인공동체의 다수는 여전히 노동계급에 속한다.


이는 한국인을 '모범적 소수민족'으로 언급하는 구절을 접할 때, 이 표현을 상당히 에누리해서 받아들여야 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가족을 데리고 뉴욕으로 이주하여 10년 동안 야채가게를 운영하는 사람 - 이는 매우 흔한 현상이다. - 이 자신의 지위에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자신의 지위향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겠지만, 그와 그의 아내는 자식들이 한국에서 아버지의 지위, 즉 대학학위와 전문직을 확실히 되찾을 수 있도록 뼈빠지게 일할 것이다.
아마도 그 가족은 운이 좋아 자식을 최고의 대학에 입학시킬 수 있을 것이고, 그런 다음에는 그 자식에게 과학을 전공하도록 권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많은 분야에서는 한국계 미국인이 최고의 지위에 오르는 것을 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특히 최고위층에서는 압도적으로 소수의 백인남성들로 채워진 미국기업들의 경우가 그러하다.


한국인에 대한 미국인들의 판에 박인 인상은 '모범적인 소수민족'이라는 허구보다는 훨씬 듣기 좋지 않다.
한국전쟁 동안 언론들은 두텁게 누빈 무명옷을 두른 채 폭설 속에서 전쟁을 피해 도망치는 끝없이 이어지는 피난민 행렬의 절망적이고 딱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 이미지가 너무도 강렬하여 내가 1967년에 어머니께 한국에 가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맙소사! 그곳은 지금 전쟁중이잖니"라고 대답했다. 훗날 나는 어머니가 옳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전에 복무했던 한 약사는 나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 "한국은 우리보다 900년이나 뒤쳐져 있어"라고 말하면서 내가 직면하게 될 상황을 경고했다.


오늘날에야 믿기 어렵지만, 1970년대만 해도 타코마 주의 한 신문은 한국인을 "동양의 깜둥이"라고 언급한 그 신문의 칼럼에 대해 왜 그 지역의 한국계 미국인들이 분개하는지 설명해달라고 나에게 요청했다.
한국계 미국인 단체들은 건물 바깥에 모여 모두들 주먹을 치켜들며 항의했다. 이 표현은 한국전에 참전한 백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꽤나 일상적인 욕설이었음이 드러났다.
타코마에는 한국에서 결혼하여 지금은 군의 기지나 그 주변에 살고 있는 한국인 부인과 미군 병사들로 인해 많은 문제가 생겼다. 안마 시술소, 술집, 창녀촌이 흔했던 만큼이나 한인 여자들이 이혼하거나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혼혈아들은 타코마의 학교에서 말썽을 피웠다. 이 비방에 대한 논란이 가라앉기까지는 여러 주일이 걸렸다.


1960년대에 한국에 살았던 미국인들은 모든 한국인은 도둑이라고 생각했다. 밥 호프는 "약삭빠른 아이들이 비행기의 착륙장치를 홈쳐가는 바람에" 기지 순회공연에 늦었다고 말하여, 미군병사들이 배꼽잡고 웃도록 만들곤 했다.
시카고의 인기있는 토박이 작가 넬슨 올그런은 1960년대의 부산의 황량한 거리를 산책한 적이 있었다. [항해일지의 기록]에서 그는 "그녀는 흙바닥으로 된 작은 김치 집에 살았는데, 그 집에서는 김치 쥐가 김치 달빛 아래서 들라거렸다. 그녀가 어둠 속에서 옷을 벗자, 김치냄새를 가로지르는 향내가 났다...."라고 썼다.
같은 시기에 씌어진 이언 플레밍의 [금 손가락]에서 한국인들은 "인명을 전혀 존중하지 않으며" 바로 그 때문에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고용한 것이며, 그럼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고 표현했다.
C. D. B 브라이언은 1965년에 남한이 수출주도의 경제도약기에 접어들자 "이 나라는 내가 본 것 가운데 가장 더러운 빌어먹을 나라다!"라고 썼다. 그나마 한국을 참고 견디게 해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여자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런 문학적 판단이 갖는 여러 문제 중의 하나는 한국인들이 문학에 아주 관심이 많고, 실제로 이 문학작품들을 읽는다는 점이다. 영어를 배워 대다수 미국인들보다 서구 문학작품에 더 해박한 한국인들을 종종 보았다.
어느날 한 젊은이가 서울의 거리에서 나를 세우더니,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 나오는 지하실의 고무호스가 갖는 의미와 상징에 관해 물었다. 내가 한대 살았던 아파트 아래층에 남편과 자식이 있는 한 여성은 토머스 하디의 작품들에 차례로 심취하였다. 폴브라이트 사무실에 근무하는 그녀는 범상치 않은 품위와 매력을 지닌 여자였다."(p.643~648)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처음 알게 된 사실 : 미국 내 한인 인종차별 문화와 제도, 1940년대 미국 내 한인들에 대한 미국정부의 매카시즘적 탄압, 1980년야 중반 정치적 목적의 이민자 규모 등...


○ 미국사회의 인종차별이 흑인들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언론이나 지식인들도 흑인차별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애 한국인들이 보통 미국 내 인종차별은 "흑인차별"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커밍스 교수의 이야기처럼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도 흑인과 비슷한 강도로 차별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일제의 식민지라는 인식과 미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환상이 겹치면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이중, 삼중으로 가해졌죠.


○ 미국 행정부와 정보기관의 자료가 상당부분 정보공개법에 의해 일반에게 공개된 것에 비하여 7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1945년 이후 남한에 대한 미군정, FBI 등의 정보는 여전히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공개하기 어려운 한미 관계의 중요한 진실, 적대행위나 불법부정행위가 존재한다는 이야기죠.
미국의 과거 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행위는 아직도 밝혀야할 진상이 많은 셈입니다.


○ 지난 수십 년 동안 방송과 언론, 영화와 미국드라마 등을 통해 유포되어 온 미국에 대한 환상, 미국 선교사들의 악행, 미국의 행위에 대한 거짓정보, 미국의 불법부정행위에 대한 은폐 등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행정부와 미국인들은 어느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국익과 사익이 가장 첫번째의 판단 기준일 뿐입니다. 그리고 상대의 힘과 태도에 따라 자신들의 행위가 바뀌는 모습은 70년 전에도 지금에도 마찬가지일 뿐입니다.







53 : 미국의 한인들 3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에 대한 또다른 상투적 인상은 코리아게이트 스캔들과 더불어 생겨났는데, 그 인상은 사악한 동양인이 미국의 고매한 의원들을 돈으로 타락시키고, 미국의 젊은이들을 문선명 목사의 '사람의 폭격'과 같은 이상한 교리로 물들인다는 것이다.
미국 법무부는 1970년대의 추문이었던 코리아게이트의 바닥까지 파헤치는 데에는 훨씬 소극적이었지만 최소한 미네소타 주 출신의 민주당 하원의원인 도널드 프레이저가 이끄는 미국 의회조사단에 의해서 남김없이 파헤쳐졌다.


코리아게이트는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의 일부를 철수시키려는 닉슨 대통령의 결정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결정은 아시아의 전쟁들, 특히 베트남 전쟁을 아시아인의 손으로 치르게 한다는 닉슨 독트린의 일환이었다. 닉슨은 베트남전을 체계적으로 확대하여 하노이 정부에게 잔뜩 겁을 준 다음에 서서히 전쟁을 종결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박정희와 그 측근들은 닉슨의 정책에 질겁하였고, 그 정책에 필사적으로 맞서려 했다. 예를 들면, 1970년 초반 정일권 국무총리는 윌리엄 포터 미국대사에게 만일 닉슨이 미군을 철수시키려 한다면, 자신은 활주로에 드러누워 비행기가 못뜨게 하겠다고 말했다. 포터는 '친구, 그렇게 하시게. 비행히가 구동하기 전에 내가 사진 한 장 찍어두지'라고 응수했다.


그러나 1970년 8월 박정희와 장장 6시간의 이상야릇한 회담을 하면서 호된 곤욕을 치른 사람은 바로 애그뉴 부통령이었는데, 그는 회담 동안 점심도 커피도, 심지어는 화장실 가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3일 후 1개 사단 전체 - 약 1만 명의 미군병사와 다수의 지원인력 - 가 한국에서 철수했다. 그 직후인 1970년 8월 26일 회담에서 박정희는 닉슨의 백악관에서 잃을 것을 민주당이 지배하는 의회에서 만회하기를 희망하면서 영향력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곧 한국 중앙정보부의 통제를 받으며 워싱턴의 한국대사관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기관원들, 통일교, 그리고 다른 전위조직들이 미국에 남한정부의 영향력을 구축하기 위해 영향력 있는 미국인사들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주된 표적은 하원의원들이었는데, 심지어 주미대사 김동조까지 100달러 지폐가 가득 찬 봉투를 미국의회에 뿌리면서 활동을 개시했다.
당면 목적은 닉슨의 철군정책을 뒤집거나 아니면 더이상의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지 않도록 보장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표적도 많이 있었으니, 그 가운데는 박정권의 인권유린을 비판하는 인사들이 몸담고 있는 몇몇 대학도 여기에 포하되었다.


이 스캔들의 핵심적인 인물은 박동선이었는데, 그는 적어도 1971년 이후부터는 한국 중앙정보부의 지시 아래 활동한 미곡상이자 로비스트였고 미식가였다.
1950년대의 타코마 고등학교에서 중요인물이었고, 하얀 스포츠 코트에 분홍색 카네이션을 달고 있는 졸업앨범에 찍힌 박동선의 모습은 진짜 미국인처럼 보였다.
박보희는 코리아게이트의 또하나의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한국 중앙정보부의 정식 요원이나 마찬가지였고 후에 문선명 목사의 오른팔이자 통역자가 되었다.
이 스캔들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조사가 종결되었다. 1977년 새로운 민주당 정부가 워싱턴에 입성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너무나 많은 민주당 의원들이, 소문에 의하면 민주당 원내총무인 오닐 의원까지 스캔들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의 조사는 끝나게된 것이다.


금세기 초반 미국의 한국인들은 사탕수수 추수에 유용한, 책임감이 강하고 열심히 일하는 '동양인들'이었고, 금세기 중반에는 '약삭빠른 아이들'이었다면, 세기말에 이르러 그들은 연방정부나 복지국가의 도움 없이도 호레이쇼 앨저의 성공을 자력으로 달성한 자수성가의 모델이 되었다.
이런 판에 박힌 인상들 가운데 어느것도 한국인들에게 유쾌한 것이 못되는 까닭은 이 인상들이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의 잡동사니 범주 속으로 몰아넣기 때문인데, 그래도 마지막 것이 이전 것들보다는 확실히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한국인의 성공을 목격한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여전히 '동양의 검둥이'로 취급당하는 곳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일본이 바로 그곳인데, 일본은 다수가 3대 혹은 4대째인 재일한국인에게 사실상 가혹한 인종차별 정책을 강요하고 있다.
한국말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요코하마에서 나리따 공항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노동계급 거주지역에 고층의 아파트빌딩이 보이고 그 옥상에 큼지막한 붉은색 한글이 붙어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1994년 7월까지 적혀 있는 말은 "위대한 어버이 김일성 수령 만세"이다. 일본인들의 편견과 기회 박탈은 수십 만의 재일교포들을 오래 전에 좌경화로 내몰았고, 북한은 여전히 일본 내에 또 하나의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가령, 수십 개의 초등학교와 몇몇의 고등학교, 그리고 동경의 조선대학에서는 평양의 교과과정과 완전히 똑같은 교육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이 책에서 재일한국인들을 검토하지는 않겠지만, 일본은 판에 박인 인종적 편견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많은 일본인들은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을 상투적인 편견을 갖고 바라보는데, 이는 마치 백인들이 한 세기 전에 중국인들을 보던 방식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한국인을 인종적 관점에서 보아서는 안되는 또다른 이유이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이 미국에서 모범적 소수민족이면서, 혹은 일본에서 핍박받는 소수민족이면서, 혹은 한국에서 엄청나게 다양한 사람들이면서 동시에 여전히 한국인이라고 부리는 어떤 본질적인 것의 일부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론 인종주의는 완전히 한바퀴 돌아서 피해자인 한국인에게도 주입될 수 있는데, 이때는 수치심으로 무릎을 꿇고 싶을 지경이다. 오늘날 한국계 미국인들은 흑인들을 인종선호도 위계 조사의 맨 밑바닥에 놓는 한편 한인들 자신은 미국의 인종간 순위다툼에서 '백인 바로 다음'에 위치한다는 환상을 품고 있다.


최근의 모범적인 소수민족의 이미지는 한국계 미국인들의 인종차별주의와 결합되면서 흑인들과 불화의 원인이 되었다. 뉴욕, 시카고, 필라델피아, 그리고 그밖의 많은 지역에서도 한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갈들이 발생했다.
그러나, 로드니 킹을 거의 죽을 정도로 구타한 로스앤젤레스 경찰관들에게 법정이 무죄판결을 내린 직후 발생한 1992년 4~5월의 로스앤젤레스 폭동에서 가난한 한인들이 가난한 흑인가 히스패닉, 그리고 백인들에 맞서 무장한 사건만큼 낙담스러운 일은 없다.


두순자 씨 사건은 1992년 반란의 중요한 서곡이었다. 초보적 영어를 구사하는 이민 상인인 두순자는 1991년 3월 감시카메라가 돌아가는 가운데 흑인과 오렌지주스 병을 놓고 싸우다 그녀를 쏴 죽였다.
텔레비전 매체들이 그 테이프를 계속 방영함으로써 흑인들의 속은 불타오르고 한인들은 수치심에 빠지게 되었지만, 그러는 동안 백인들은 마치 아무 관련 없는 양 지켜보고만 있었다.
곧 법원은 두순자가 아무 잘못도 없다고 무죄를 선고하였다. '한-흑 갈등'은 극도로 냉소적인 헐리우드 작가들에게는 안성맞춤이었으니, 그들은 '폴링다운(Falling Down)'이라는 영화에서 무례하고 거친 한국인의 상투적 상을 보여주었다.


뒤이은 1992년 봄의 폭동들은 미국에서 점점 그 숫자가 증가하던 한국계 미국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의 경험이었다.
폭동은 대략 58명의 사망자와 2,400명의 부상자, 거의 12,000명에 달하는 체포자와 7억 1,700만 달러의 재산피해를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날마나 텔레비전 방송은 파괴된 한국인 상점, 젊은 폭도에 맞서 무장한 젊은 한국인들, 엄청난 규모의 재산 손실(한국계의 피해규모는 3억5천만 ~ 4억 달러였는데 전체 피해액의 절반 이상이었음), 그리고 흑인 대 한국인, 악한 대 근면한 사업가, 멸시받는 소수민족 대 모범적인 소수민족 사이의 대립에 관해 끝없이 더들어댔다.


한 세대 전의 와츠 폭동 이후 유태인들로부터 흑인들이 인수한 상점들을 한국인들이 다시 사들였다는 사실, 혹은 이 한국인 상인들은 미국의 한국 사업가들 가운데서 가장 가난한 부류이기 십상이며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언론계의 권위자는 있다고 해도 극히 드물었다.(중략)


미국인의 한국에 대한 조악하고 불공평한 인상은 매우 우호적이고 수수한 인상과 뒤섞여 있음은 물론이다.
한국계 미국인들은 20년 전 정경화가 세계 수준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인정받은 이후 미국 음악계에 빛나는 기여를 하였다. 한국미술의 순회전시는 이제 일상화되었고, 비평가들에게 으레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한국의 문학과 영화는 일본이나 중국의 그것과 비교해도 여전히 미국문화의 주류와는 동떨어져 있다. 한국 문학작품의 번역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내가 아는 한 한국 극영화가 상업적으로 개봉된 적은 없다.
그러나 백남준의 아방가르드 작품은 수년간 소호의 주요 산물이 되었고, 한국계 미국인들은 자기 고유의 신문이나 잡지를 갖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이들 한국 에술인의 활약상을 훨씬 많이 듣게 될 것이 분명하다.


1994년 미국의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ABC 방송의 새 코미디물인 [올 어메리칸 걸(All American Girl)]을 접하게 되었다. 마가렛 조로 더 잘 알려진 조모란은 HBO에서 처음 데뷔했다. 그녀는 자신이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온 샌프란시스코의 한 유명한 서적상의 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1.5세대'이다.


마가렛 조는 매우 익살맞은 여자이지만, 아마도 미국의 한인 공동체에 친숙한 사람만이 그녀의 유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재키 메이슨이 아직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이디시 보더빌의 전통과 그 전통을 계승하는 코미디언들 혹은 흑인 공동체의 딕 글고리와 리처드 프라이머처럼, 능란하고 센스 있는 마가렛 조의 걸쭉한 풍자는 시대의 징표이다.
그녀는 급속히 떠오르는 한국계 미국인 전문가 계층의 존재를 예비하는 은신마와 같은데, 이 계층이 설령 아직 미국사회의 중심무대에 알려지지 않았다 해도 머잖아 그럴 날이 올 것이다.


마가렛 조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처한 딜레마의 길잡이이다. 딸이 사귈 만한 멋진 한국남자를 필사적으로 찾는 어머니(딸을 하버드대학이나 예일대학에 보내려고 딸의 어린 시절에 해야할 모든 일을 다 한 그런 어머니), 최악의 상황을 두려워하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딸엑 홀딱 빠져 딸을 보호하려는 아버지, 미국사회는 정신병원이라 확신하며 짐을 꾸려 즉시 서울러 돌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할머니, 그리고 나이든 사람들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젊은 세대는 직감으로 즉가 이해하게 되는 미국이라는 나라, 이 모든 것들 사이에 사로잡혀 한국계 미국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사는 것이 그들에 더 쉽다는 말은 아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이, 용기를 내어 고국에서 여름을 보내기로 할 경우, 그들은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하거나, 제대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사람일 수가 없다는 소리를 듣거나 한국이 미국보다 훨씬 나은 곳이라는 것 등의 말을 듣게 될 것이다.


"나의 어떤 면이 한국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이겠지만, 내 대답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폴 메탈 재킷'에 나오는 하사관 조커가 제시한 것, 즉 모든 베트남인(혹은 한국인)의 내면에는 바깥으로 나오려는 미국인이 있다는 것과 유사하다.
미국 대중문화의 유혹은 실로 너무나 강력한 용해제여서 오래된 한국의 진리들이 버틸 수 있는 가능성은 많지 않다."(p.649~660)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저는 영화 [폴링다운]을 보면서 미국 영화제작자와 감독들의 인종차별 의식에 놀랐습니다. 영화 속 백인 중산층이나 노동자, 실업자들의 유색인종, 특히 한인에 대한 멸시와 폄하는 너무 심했거든요.
그런데 커밍스 교수의 글을 읽어보니 한인들이 인종차별을 당하면서 다른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모습을 통해 한인들이 처한 딜레마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백인 중산층,노동자의 인종차별이나 한인들의 인종차별, 유색인종들의 한인에 대한 적대감 등 모든 인종차별적 행태들은 미국 정부/정치권와 백인 기득권층/자본가층이 만들어낸 것이고 그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돼죠...


○ 커밍스 교수는 미국 내 한국계 미국인(재미교포)의 역사와 처지를 짧지만 강렬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대다수 재미교포의 삶과 문화가 한반도의 한민족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아니 오히려 도 힘든 삶을 겪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 다만, 거의 모든 재미교포들은 한반도에서라면 겪기 어려운 '인종차별'을 당했고 지금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와는 다른 처지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 미국에서 백인들 사이에서도 인권이나 정의, 민주주의가 진척되기 못하는 가운데, 유색인종의 경우에는 더 심하겠죠.
해방 후 미군정 기간과 한국전 때 미국인, 미군들이 보여준 인종차별적 태도는 여전한 것 같습니다.


○ 사학자,사회학자들이 한국사 또는 한국현대사를 연구할 때 남북한 뿐 아니라 재중동포, 재미동포, 재일교포 등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계 교포들과 어떤 이유로든 국내에서 탈출한 장기 해외거주민에 대해서도 다루어주기를 바랍니다.







54 : 한반도 현대사 요약


○ 1945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한반도 현대사의 핵심을 요약한 커밍스 교수의 글...


"1945년에서 1953년에 이르는 이 시기 역사의 장기적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이 지역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미국을 통해 서로 소통하는 경향을 보였고, 일본-남한-타이완-필리핀은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을 통해 수직적 체계가 굳어졌는데, 이 체제는 네 나라의 외무장관들 위에 군림하는 미국 국무부의 지휘를 받았다.
이들 나라 모두는 미국의 군사구조 깊숙이 침투당했고(남한 군대의 작전통제권 장악, 미7함대의 타이완 해협 순시, 미국에 대한 네 나라 모두의 국방의존, 네 나라 영토에 설치된 미군기지들), 독자적인 외교정책이나 방위의 주도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반(半)주권국이 되었다.
남한과 북한, 혹은 남한과 중국의 수평적 접촉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일본과의 수평적 관계도 역시 매우 약화되었다.


이 지역 자본주의 국가들은 주로 미군을 통해 공산주의 국가들과 '소통'했는데, 이를 상징하는 것으로는 판문점에서의 군사회담, 베트남에서의 확전,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상습적으로 주고받는 위협들, 타이완 해협의 금문도와 마조도를 둘러싼 사태들과 같은 소규모 위기들,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북한과의 소동들(1968년 푸에블로 호 사건, 1969년 EC-121사태, 1976년의 '미루나무 절단사건'), 동북아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소련에 대한 전면적인 봉쇄가 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일본과 중국 혹은 일본과 북한 사이에 경미한 수준의 무역이 재개된 것처럼 군사장막을 뚫는 가벼운 조치들이 있었다. 그러나 압도적인 경향은 군사적 형태의 소통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미국의 일방적 제재였다.
1960년대 중반까지 이 지역의 정치경제 역시 주로 미국과 동맹국들 사이의 쌍무적 관계였고, 작은 나라들은 미국의 원조(이는 1950년대 후반 한국 수입의 5/6을 차지했다)로 유지되었다.


1960년대는 동북아 체제가 변화하기 시작하고 한국이 인접국들과 다시 접촉하는 획기적인 시기이다. 그후 지금까지 이 지역 국가들의 유대를 재봉합하는 원동력은 경제적 교역일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 점에서는 케네디 행정부가 다방면에 걸친 군사구조를 거두고 새로운 경제적 관계를 작동시키는 쪽으로 여러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몇 가지 의미에서 이 시도는 동경과 '아시아라는 섬' 그리고 중동을 연결하는 '거대한 초승달' 연계망을 구축하려 했던 1940년대 후반의 에치슨의 구상을 실현한 것이다. 다른 의미에서 이 시도는 나중에 닉슨 행정부가 실행한 변화, 특히 닉슨 독트린과 중국에 대한 그의 개방정책을 미리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이미 보았듯이, 국가안보 보좌관인 로스토우에 의해 고안된 케네디 전략의 핵심주제는 이 지역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남한과 타이완이 모두 수출주도의 발전이라는 기치 하에 산업화를 시작했는데, 이는 대내적으로는 신중상주의를, 대외적으로는 외국시장으로의 수출을 결합한 일본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닉슨은 1971년 중국과의 관계를 개방했는데, 원래 의도는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개입을 끝내고 공산주의를 공산주의로 봉쇄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미 국교정상화와 등소평이 단행한 획기적인 개혁이 이후에 중국과 동아시아 및 세계경제의 상호작용은 경제적 측면이 압도적이 경향이 되었다.
요컨대,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경제의 힘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단단히 굳어진 안보의 장벽을 우회하거나 뛰어넘은 것이다. 정치적 분단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한국도 이 길을 따랐다.
현재는 경제적 교역이 남북한 사이의 그리고 북한과 세계 사이의 수평적 접촉에서 주된, 그리고 점점 심화되는 형태가 되었다.


냉전이 유럽에서는 1989년에서야 끝났다면, 동아시아의 정치에서는 1970년대 초반과 중반의 획기적인 변화가 종전의 냉전논리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중-소 갈등이 생기면서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공동 후원을 상실했고, 오히려 1969년에는 우수리강을 따라 형성된 국경선 바로 건너편의 공산주의 강대국들간의 소규모 분쟁을 경험했다.
1971~1972년 닉슨이 중국에 문호를 개방했을 때, 남북한 모두가 자신들의 거대강국 후원세력들이 친밀해지는 상황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975년에 인도차이나 전쟁이 종결되면서, 아시아 전체에서 냉전종식의 장애물은 더욱 적어진 것 같았다.


1970년대의 새로운 전략적 논리는 한국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처음에 북한은 외견상으로는 하나의 통일체로 보이던 중-소 블록을 연결하는 접촉점이었다. 평양의 입장에서는 1949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이 체제가 확실하게 최선의 외교적 방책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 중-소 분쟁이 일어남으로써, 북한은 모스크바와 북경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고, 북한은 예상대로 중국을 선택했다. 그러나 문화혁명 동안 북한과 중구그이 관계는 잠시 소원해졌다.
하지만 1971년 닉슨이 불러일으킨 변화들은 서울과 평양을 동시에 고무시켰다. 1972년부터 1983년까지 북한은 중-미 데땅뜨의 수혜자가 되려고 노력하면서 외교정책에서 대미관계의 돌파구를 찾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닉슨 행정부는 긴장을 고조시키지 않은 채 주한미군의 1/3을 철수시켰고, 대신에 북한은 1970년대에 대남 침투시도를 실질적으로 중단하고 국방예산을 상당히 감축함으로써 이에 호응했다.
또한 앞서 보았듯이, 남북한은 비밀회담을 성사시켜 1972년 평화통일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시도는 일년 내에 사실상 실패로 끝났지만, 계몽적이고 관대한 외교를 통해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과 통일문제의 지속적인 중요성을 상기시켜주는 사례로 남았다.


후에 미국과 중국의 외교는 이전처럼 극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지만 다시 변화하였다. 카터 행정부가 주한 미 지상군의 점진적이지만 완전한 철수계획을 발표하고 세계정치에서 '중국카드'를 주도면밀하게 사용하기 시작하자 장기간에 걸친 북한의 미국 구애작전이 시작되었다.
1977년 김일성은 카터 대통령을 '정의로운 사람'으로 언급했고, 북한 언론은 '미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등 미국에 대한 비방을 잠시 중단했다. 김일성은 자신이 미국의 문을 두드리고 있고, 외교 및 무역관계를 희망하며, 한국이 통일된 후에는 남한에서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간섭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했다.
북한은 또한 소련의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지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소련을 비방하기 위해 중국이 사용한 '패권주의'의 북한식 표현이다. 동시에 평양은 발전도상국의 지도자와 교환방문을 활발하게 후원하고 비동맹운동의 주요세력이 됨으로써 제3세계와의 관계를 크게 심화시켰다.
대체로 카터 시대의 북한은 불필요하게 소련의 반감을 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중구그이 외교노선에 근접해 있었다. 1978년에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했을 때 북한은 이를 공개적으로 강력히 비난했던 반면, 중국이 보복으로 베트남을 침략했을 때는 사렵 깊게 침묵을 지켰다.
그후, 시아누크 공은 평양을 수시로 방문하여 김일성과 친밀한 우애관계를 다졌는데, 이 관계를 일궈내는 데는 김일성이 시나우크에게 제공한 주택과 보조금이 도움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1979~80년 남한에 소요하 발생하고 세계적 차원의 '새로운 냉전'이 등장함으로써, 1980년대 대부분 시기에 한국의 상황은 얼어붙었다. 보좌관들이 마침내 카터에게 미군 철수계획이 잘못된 생각임을 설득시킨 후 카터 행정부는 1979년 이 계획을 포기했다.
레이건은 대통령 당선 후 최초의 외교적 행동으로 독재자 전두환을 1981년 워싱턴으로 초청했는데, 이는 남한의 안정을 지원하려는 의도였다. 미국은 남한에서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수준의 군사력과 군사장비를 증강하는데 전념했다.
1980년대 초반에 약 4천 명의 미군요원이 이미 남한에 있는 4만 명에 추가되었고, 최신예 F-16 전투기가 남한에 판매되었고, 20만 명 이상의 미군과 한국군이 참여하는 방대한 군사훈련 팀스리리트가 매년 초에 실시되었다.
1983년 국방장관 와인버거는 한국이 '미합중국의 핵심적인 이해관계국'임을 선언하고, 동시에 5개년 국방계획안을 내놓았다. 이 안에는 '수평적 확전'이라 불리는 개념이 언급되었는데, 이는 소련이 페르시아 만에서 공격을 감행하면 미국은 스스로 선택한 어떤 지점을 공격함으로써 이에 대응한다는 의미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한국이 바로 그런 지점이라는 것이었다. 이 시나리오는 실로 북한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레이건 정권 내내 북한은 목이 쉬도록 미국의 정책을 성토했다.


그러나 1983년에 중-미 관계는 상당히 온화해졌고, 중국은 한국의 긴장을 완화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고 처음으로 공언했다. 이 발표에 뒤이어, 1984년 1월에 북한은 미국 남한 북한 사이의 3자 회담을 처음으로 요청하는 중대한 제의를 했다.
북한은 이전에 이들 두 국가와 도잇에 한자리에서 대화할 용의를 표명한 적이 결코 없었다. 카터 행정부는 1979년에 이와 유사한 3자 회담을 제안한 적이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와중에 1983년 10월 미얀마 양곤에서 일어난 폭탄테러가 남한의 여러 각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한국에 대한 중국의 외교정책을 무산시켰다.(양곤의 폭탄테러는 약간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이때 김일성은 중국에서 등소평을 만나 대미 외교관계의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부 관측자들은 김일성이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북한 정권의 누군가가 이 테러를 주도한 것으로 생각했다. 뒤이은 인사교체는 이 추론이 맞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얀마의 법정은 북한 사람들이 이 폭탄테러의 배후에 있다고 판정했고, 이 테러사건은 레이건의 군사증강과 결합되어 워싱턴과 평야의 관계를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상태로 만들었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평양은 소련으로 기울어졌다. 양국 사이의 관계는 현저히 호전되어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두 번이나 방문했는데, 이는 4반 세기 만에 처음이었다.
소련은 북한 공군의 기종을 미그 23 제트기로 개량시켰는데, 그럼에도 이 기종은 1960년대 초반의 기술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함께 이 해빙 분위기에 제동이 걸렸으니, 소련은 북한에 대한 원조를 체계적으로 줄이거나 북한에게 이를 좀더 현명하게 사용하도록 요청한 것이다.
소련의 출판물에는 북한에 대한 비판이 많이 실렸고, 그 주된 논리는 '오지도 않는 관광객을 위해 105층짜리 호텔을 건축하는 데 돈을 쓰는 사람들에게 왜 돈을 주어야 하는가?"였다.


1980년대의 북한은 짐바브웨나 이란과 같은 우방국에 자동소총, 대포, 경전차 등의 무기를 판매하면서 국제 무기거래의 중요한 이해관계자가 되었다. 북한은 자국의 무기를 이란의 석유와 교환했는데, 장기간 계속된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측 무기 수입의 40%까지 차지하였다.
미국 정보에 따르면, 북한은 또한 중동에 자체 개발한 스커드미사일을 판매하고 중국산 실크웜미사일을 중계 인도했는데, 일부 분석가들은 평양이 소련의 스커드미사일을 북제하고 심지어 이를 개선한 적도 있기 때문에 이 실크웜미사일은 중국제를 복제한 북한산 미사일일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한다.
1980년대 대부분의 기간에 중국은 김일성에게 외교적 경로를 택하라고 권고했고, 워싱턴과 평양 사이의 회담들을 후원하려 했다. 중국은 서울에도 손을 뻗쳤고, 1980년대 말에는 화물선이 서해를 가로질러 직접 오가면서 북한보다 남한과의 교역이 더 커졌다.


1970년대까지 북한이 대외교역은 거의 전적으로 사회주의 블록에만 한정되었는데, 지난 20년 동안 수출입을 일본, 서유럽, 그리고 제3세계의 여러 국가들로 다변화시켰다. 1970년대 중반에는 북한 교역의 40%가 비공산 국가와 이루어졌고, 공산권블록 내의 교역에서도 소련은 겨우 절반만 차지할 뿐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외화의 부족과 다른 곤경으로 인해 북한은 다시 소련과의 교역에 상당히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석유와 다른 물품대금을 경화로 지급하라는 러시아의 요구는 1990년대 초반 북한 경제를 급속히 악화시켰다.
비록 북한이 남한과 같은 수출 주도적인 경제의 나라는 아니었지만 수년 동안 북한정권의 우선 폭표는 수출이었다. 수출의 초점은 산업성장을 더욱 확대하는 데 필요한 선진기술을 도입하고 석유수입 대금을 결제하기 위해 외환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현재까지도 북한의 수출정책이 성공적이지는 않다.


노태우 정권 때 남한은 독일의 '동방정책' 모델을 본따, 평양과의 회담과 교역을 추진하는 '북방정책'을 발전시켰다.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정주영은 1989년 1월에 북한을 돌아보고 금강산 관광을 진흥시키기 위한 합작사업을 발표했다.
남북한 양측은 1990년 8월에 해방 47주년 기념 교환행사를 위해 비무장지대를 개방할 것을 제안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대단히 실망스럽게도 두 정부 사이의 신랄한 언쟁으로 어떠한 교환행사도 일어나지 못했다. 1990년 가을에 처음으로 총리급 회담이 열렸다.


두 개의 국기 아래서 유엔에 동시가입 하는 것을 복한이 오랫동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1991년 두 한국은 함께 유엔에 가입했다.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은 1991년 12월 서울에서 남북한의 총리가 '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했을 때 최대의 성공을 거두는 듯 했다.
이 합의서의 25개 조항 중에는 상대방의 정치체제 인정, 상호간의 비방 및 대결의 종식, 한국전쟁의 정전상태를 좀더 안정된 평화상태로 전환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 불가침의 보장, 경제협력 및 많은 분야에서의 교류,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흩어진 약 1천만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자유로운 왕래 등이 있다.
1991년 말에 이르러 양측은 또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협약에 서명했다. 심지어 40년 전에 북한을 탈출했던 열렬한 반공주의자인 문선명 목사도 1991년 12월에 친척을 방문하고 김일성과 회담하기 휘해 북한을 찾았다.


그러나 1991년 12월의 합의서에 서명한 직후부터 북한은 계속해서 노태우를 '꼭두각시' '배신자' '군사 파시트즈 집단'의 우두머리라고 비난했다. 한편, 남한 정부는 고무줄 같은 국가보안법 하에 체포된 급진적 학생운동의 지도자에게 '이적행위'의 죄목으로 장기형의 선고를 요구했다.
이 사건들이야말로, '획기적인' 12월 합의서보다 앞으로의 경향을 보여주는 더 좋은 징표임이 밝혀졌다. 12월의 합의서는 1972년 7월의 합의와 마찬가지로 결코 실행되지 못했던 것이다.


1980년대 중반에 새롭게 나타난 데땅뜨와 1980년대 말엽의 냉전 종식은 남북한의 계속되는 대결을 해소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주었다. 남한은 이 기회들을 북한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남한은 '우호적인' 공산국가와의 외교 및 통상관계를 찬성한다는 주장 아래 중국, 소련, 그리고 여러 동구권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 시도는 1988년에 결실을 맺었다. 그해의 서울 올림픽에 쿠바만이 북한의 뜻을 존중하여 '보이콧'했을 뿐 대다수 공산주의 국가들이 참여한 것이다.
소련은 1990년 9월 남한과 외교관계를 여는 데 앞장섰다. 당시 남한에서는 이를 엄청나게 과장하고 떠들어댔지만 그 이후 남한과 러시아의 관계는 그다지 진전되지 않았고, 러시아가 남한에게 주로 대규모 원조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두 나라 사이의 교류는 대체로 경제적인 면에 국한되었따.


긴장완화와 평화유지에 관한 미국과 소련의 협력은 두 강대국의 공동 노력이 한반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기대를 높였으나, 상대방에게 손을 내미는 데에 미국은 소련만큼 적극적이지 않았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여행제한을 완화하고 특정 유형의 인도적 교역을 허용했지만 그 이상의 조치는 거의 취하지 않았다.
1991년에 소련이 사라진 후, 미국이 한반도 상황을 결정하는 주된 외부세력이 될 것으로 모두들 믿었다. 반면에 동구공산권의 붕괴로 말미암아,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그리고 그밖의 나라들이 서울과 외교관계를 맺음에 따라 북한의 외교는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1992년 현재 남한은 북경과 모스크바에 대사관을 두고 있으나, 미국은 1970년대와 80년대에 줄곧 주장해온 것과는 달리 상호인정의 공식을 실행하지 않음으로써 이에 호응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런 발뺌의 주된 이유는 워싱턴이 평양의 핵개발 의도를 우려했기 때문이다."(p.668~676)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한반도 절반의 땅에서 '우물안 개구리'처럼 쪽하늘만 바라볼 게 아니라 국제정세와 동북아시아의 세력판도 및 흐름을 읽어야 함을 다시 느낍니다. 미국이 1948년 8월 한반도를 강제 점령한 것은 단순히 남한 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미군의 군사정치적 패권을 장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것을 커밍스 교수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 안타깝게도 커밍스 교수는 김대중 정권이 집권할 때까지 한국(남한)의 군사, 정치, 경제, 외교를 주도한 것은 미국과 미군이었음을 증언합니다.
반식민지 또는 신식민지라는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러한 구조는 21세기인 지금에도 여전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한미FTA와 한미일 군사동맹 추진 등으로 오히려 더욱 강화, 심화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 위 요약글에서 1945년 이후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남한의 굴절된 현대사와 북한의 굴절된 현대사에서 공통된 구조와 매개는 모두 외세, 특히 미국(미국 내 군국주의자, 극우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굴절을 극복하는 것은 결국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군사외교를 추구하는 것이고, 남북이 함께 협력하고 연대할 때만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55 : 영변 핵발전소 논란 1


"1990년 초반, 북한의 핵개발 계획과 그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한국에서 더이상의 외교적 진전에 장애물이 되었다.
이 문제에는 많은 논란거리가 있지만, 우리의 관심사에서 볼 때 이 사안의 가장 중요한 점은 한반도가 줄곧 얼마나 일촉즉발의 상태에 있는가, 또한 거리의 행인에서부터 국가적인 유명 논객들에 이르기까지 대다수 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아직도 얼마나 무지한가를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1994년 6월에 또 하나의 한국전쟁이 거의 일어날 뻔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났더라면, 양측의 서로에 대한 무지는 1950년의 한국전 때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워싱턴과 평양은 이해도 되지 않고 달성할 수도 없는 목표를 위해 다시 쌍방에 대한 맹목적인 대살육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며, 또다시 세계의 평화가 위태로워졌을 것이다.


영변은 평양 북쪽으로 60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비교적 잘 알려진 도시이다. 이 도시는 외진 지형적 위치 때문에 적어도 15세기 초까지는 요새로 쓰였고, 나중에 양반들에게는 경치가 빼어난 관광지 겸 유흥지가 되었다.
옛날에는 영변에서 비단이 생산되었는데, 북한은 여기에 커다란 합성섬유산업을 건설하여 이 산업의 생산물이 이 지역 전체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래서 미국의 일부 정보 관측자들은 위성 관측에 의해 핵 재처리시설로 여겨진 것들이 그냥 방직공장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미국의 텔레비전 뉴스 시청자들은 영변 핵시설의 상투적인 자료화면을 많이 봤겠지만 지붕 위 어디에나 붙어있는 '자력갱생'이라는 슬로건의 뜻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을 것이다. 자력갱생이라는 슬로건은 문자 그대로 '자신의 노력을 통한 갱생'을 의미하는데, 이는 '자립'을 뜻하는 모택동식 용어이다.
이것이 바로 북한이 처음부터 영변을 합리화하는 근거, 즉 국내의 석탄과 수입된 석유에 의존하는 에너지 체계를 원자력으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평양은 일본과 남한이 수십 년 동안 해왔던 일을 추구한 것이다.
북한은 자국 내에 상당량 매장되어 있는 우라늄을 활용할 원자로를 건설했다. 문제는 그 원자로들이 우라늄에서 플루토늄을 생산해내며, 플루토늄은 약간의 정제만 거치면 핵무기의 고급원료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1962년에 4메가와트 용량으로 추정되는 연구용 소형 원자로를 소련으로부터 얻었으며, 1977년 이를 유엔산하 감시기구인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시 아래 두었다. 그후 북한은 캘더 홀이라고 알려진 1950년대의 영국식 가스-흑연용 원자로 모델을 본 따 30메가와트 용량의 시설을 건설했다. 이 건설은 십중팔구 1979년경에 시작되었을 것이며, 1987년 영변에서 가동되었다.
평양측에서 방문시찰을 요청한 구제원자력기구를 비롯하여 어느 누구도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나, 다만 북한이 그 해의 마감기한을 놓쳤으니 국제원자력기구에 사찰을 재신청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이어서 1989년에 미국의 첩보위성들은 북한이 75~100일간 원자로를 폐쇄하였고 그 동안 연료봉이 철거되고 새 연료가 투입된 것을 탐지했다.
첩보위성은 50~200 메가와트 용량의 또 다른 원자로가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를 포착했는데, 이 원자로는 1990년대 초반에 가동될 것으로 추측했다.
정부의 전문가들은 그 원자로 부근에 핵 재처리시설로 보이는 건물(하지만 다른 몇몇 전문가들은 그 건물이 방직공장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을 포착했다고 주장했다.


여전히 북한의 핵문제에 아무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드디어 걸프전이 발발하여 냉전 이후의 세계에 국제적 악당들, 즉 탈선 혹은 불한당 국가라는 새로운 범주가 생겨났다.
미국의 관점에서 볼 때, 북한은(이라크만큼은 아니더라도) 서방이 규정한 어떤 국제적 통제체제의 영역에서도 벗어나 있는 탈선 국가였지만 소련의 붕괴로 북한은 더욱 방치되어 불한당 국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눈앞에 북한이 다시 갑작스럽게 부각된 것은, 미국이 스스로를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간주하고, 지나간 양극시대 때보다 훨씬 다루기 힘들어진 제3세계를 감시할 필요가 있을을 발견한 상황에서 북한이 다른 제3세계 문제국가들의 시험사례로 새롭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소련은 자시의 블록을 미국보다 더 열심히 통제함으로써 이라크, 이란, 북한 및 다른 많은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을 통제해왔다고 할 수 있다. 오로지 중국만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는데, 소련은 후르시초프가 1959~1960년에 중국과의 핵무기 공유협약을 깨고 소련의 핵전문가들을 자국으로 불러들이기도 하면서 중국의 핵개발을 막으려고 애썼다.


1990년대 초반에 나는 카네기 기금으로 설립된 핵무기 확산방지 및 북한이 핵개발 계획에 관한 연구그룹에 다른 학자들, 의회보좌관들, 전현직 정부관리들과 함께 참석했다. 비록 이 연구그룹의 회의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회의에서의 토론을 통해 나는 언론보도의 정확성(부정확성이 더 빈번했지만)을 평가할 수 있었다.
정부 관측자들은 당시 영변 시설에 대한 북한의 의도에 관해 의견이 심하게 갈려 있었는데,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몇몇은 북한이 결코 핵폭탄을 제조한 적이 없고 아마 제조를 원치도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반면, 다른 몇몇 특히 CIA 내에서는 북한이 십중팔구 1,2개의 핵폭탄을 보유하고 이으며 더 많이 제조하기 위한 연료를 원하고 있다는 추정평가를 1990년대 초반에 일관되게 유지했다.
소수의 사람들은 북한이 핵무기를 제조할 만한 기술과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또다른 소수의 사람들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할 의도가 전혀 없으며 북한의 핵개발 계획은 정말로 원자력 생산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영변을 촬영한 동일한 위성사진, 적외선 탐지, 영변지역에 대한 첩보기 정찰 등의 자료들을 함께 보았고 서로 다르게 해석했으며, 북한의 과학기술력에 대한 광범위한 평가에 근거해서 판단했다.


북한은 줄곧 자신들은 핵무기를 생산할 의도도 역량도 없다고 말해왔다. 1980년대 초반 이래 북한은 한반도를 비핵지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수시로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은 명백히 이중전략을 구사했다.
1990년 9월 소련이 남한을 인정했을 때, 평양의 중앙방송은 불길하게, 이 인정이 1961년 평양과 모스크바의 방위조약을 위반한 것이므로 지금까지 동맹국들이 제공하는 것에 의존한 무기들을 이제는 스스로 개발해야 될지도 모른다고 논평했다.
나는 북한이 소련이나 중국의 핵우산 그늘 밑에서 편안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러한 공공연한 협박이 북한의 핵개발 계획에 대한 우려를 완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워싱턴의 내부인사들은 1972년 남한과의 비밀회담에서 김일성이 남북한은 협력하여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불쑥 내뱉은 적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이 회담 기록은 1989년 남한의 한 잡지에서 누출되었다. 누출자는 전직 중앙정보부장인 이후락으로 추정된다)


북한은 십중팔구 1991년에 이스라엘처럼 강대 제국들에 둘러싸인 소국으로서 전쟁억제책을 개발하기로 결정한 듯하다. 즉 외부세계에는 핵무기 보유 가능성이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행동하되 보유했다고 공표하지는 않음으로써, 남한이나 일본 같은 적대국들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결심의 빌미를 줄이자는 것이다.
요컨대, 마지막 카드로 무장한 것처럼 보이게 하되, 모두들 북한이 핵무기를 진짜로 보유했는지 그리고 언제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인지는 계속 추측하게 만들자는 것이다.(어느 전문가는 이스라엘의 전쟁억제 전략에 대해 남한측도 똑같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영변의 핵시설이 첩보위성들에 '포착될' 수 있는 지상에 건설된 유일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만약 세계가 자국의 핵개발 계획을 찾아내는 데 관심이 없었더라면 북한은 아마 그 시설을 깊은 지하에 설치했을 것이다. 북한은 다른 많은 시설물들을 지하에 설치했으며, 이스라엘 역시 플루토늄을 재처리하고 핵폭탄을 제조하는 시설인 다이모나 단지를 지하 80피트에 설치했다.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소련이나 외세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 해외 석유자본과 석유 유통독점 국가에게 자국의 운명이 좌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어느 국가에서나 공통적인 관심사이자 이해관계일 것이고, 그것을 이룩해 내는 국가의 지도부는 민중들에게 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커밍스 교수는 북한의 영변 핵발전소의 출발이 이처럼 정상적인 에너지 자립계획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 자위 자립 자주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표명했던 북한의 당연한 정책으로 평가합니다.


○ 커밍스 교수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전념하기 시작한 이유가 소련과 중국과의 군사적 동맹, 군사적 보호관계가 약화되었기 때문이고 미국이 제3세계, 특히 미국을 최강국가로 받아들이고 미국의 간섭에 따르지 않는 국가들을 공격하고 위협했기 때문임을 증언합니다.
또한 그는 북한이 영변 핵재처리시설을 지하에 깊숙하게 숨기지 않고 지상에 드러낸 이유가 해외국가 특히 미국이 관심을 가지도록 하여 수십 년 넘게 지속되었던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봉쇄와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대적인 협상 전략이었다고 평가합니다.


○ 커밍스 교수의 설명과 분석을 읽어보면, 북한은 어느 국가 못지 않은 정상국가일 뿐이었고 오히려 미국이야말로 비정상국가이자 깡패국가 억지국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남한에서 공식적, 공개적으로는 커녕(국가보안법으로 괴롭힐테니...) 비공식적 비공개적으로도 커밍스 교수 정도의 북한에 대한 정보와 분석, 평가와 태도를 보이지 않는 학자나 지식인, 정치인들의 수준은 아주 양과 질에서 아주 낮다고 진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56 : 영변 핵발전소 논란 2


"영변단지에 대한 약간의 우려가 이따금씩 표출된 것이 1980년대 후반이라면, 진짜로 경종이 울리기 시작한 것은 걸프전이 막 끝난 1991년이었다.
스탠리 스펙터와 재클린 스미스는 1991년 3월 '북한 : 새로운 핵 악몽'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고, 이에 고무되어 레슬리 겔브는 <뉴욕타임즈>의 사설에서 북한을 '또 하나의 탈선국가'로서, '사악한 독재자에 의해 통치되고' 스커드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백만 명이무장한' 나라이며, '몇년 내에' 핵무기를 보유할 공산이 큰 나라라고 논평했다.
한마디로, 또 하나의 이라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북한이 한국전에서 패배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53년의 협정은 단지 전쟁 이전의 상태로 복원된 고착상태를 승인한 것이다. 미국과 북한은 평화협정을 맺은 것이 아니라 열전을 잠시 멈춘 휴전 상태이므로 기술적으로는 그후 줄곧 전쟁상태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수식어구들은 미국이 40년간 곧 비무장지대에서 대치해온 북한이라는 적대국을 즉각 새로운 유형의 위협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놀라운데, 이때 사용된 모든 형용사들이 새롭기는 하지만 냉전시대 식으로 상대방을 악으로 명명하는 것은 여전했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서구중심주의자, 반공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불한당 등의 이미지를 한꺼번에 떠올리게 하는, 로르샤흐 테스트의 잉크얼룩이 되었다.
그러자 곧 언론매체가 북한을 언급할 때는 거의 어김없이 이런 수식어들을 사용했다. 게다가 텔렙;전이건 인쇄물이건 대다수 주요 언론들은 북한에 관해 수십년 동안 관습적인 수사어구(이것들은 서울의 정보기관이 해외로 유포시킨 것들이기 십상이다)로 사용되었거나 혹은 허구임이 분명한 정보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예를 들면 이런 발언이 그렇다. "대단한 병력증강의 조짐들이 있다. ... 북한이 가진 모든 역량을 투입한다면 4시간 내에 서울에 도달할 수 있다" 1960년 제임즈 웨이드는 이 발언을 미 육군에 근무하던 미국인 엔지니어로부터 들었다. 오랜 한국통이자 미국의 정보요원이던 리처드 스틸웰 장군은 비무장지대에 바싹 붙어 있는 북한 인민군들이 몇 시간 혹은 며칠 내에 서울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주문처럼 되풀이 외느라고 인생의 상당한 시간을 썼다.
1968년 미 해군 푸에블로 호 나포로 인한 위기 때에도 북한 육군의 70%가 비무장지대 부근에 집중되어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상시적으로 읽을 수 있었다. 북한이 비무장지대의 미루나무를 절단하려다 벌어진 1976년 8월의 광란극 동안에도 유사한 주장들이 많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미국 기자들 대다수는 이러한 케케묵은 관용어구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았을 뿐더러 남한 육군의 몇 퍼센트가 마찬가지로 "바싹 붙어 있는" 지를 물을 만큼의 탐구심도 없었다.
이 질문에 대한 공식적인 답변을 찾기란 극히 어렵지만, 1994년 6월호 <타임>지는 서울과 비무장지대 사이에 90%의 대한민국 육군이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지도를 실었다.


걸프전이 끝난 후 몇 해 동안 워싱턴과 평양간의 '위기'는 예측 가능할 정도로 규칙적으로 발생했다. 예컨대, 매년 11월이면 1건의 위기가 발생했는데, 이 달에는 대개 미 국방부와 남한의 국방당국간에 고위급회담이 열리기 때문이다.
1991년 11월 미 국방장관 리처드 체니의 방한 직전에 서울과 워싱턴은 함께 북한에 압력을 넣었는데, 익명의 국방부 관리는 기자들에게 북한이 "걸프전의 '사막의 폭풍' 작전을 보지 못했다면, 재방송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이번이다"라고 말했으며, 한국 국방부의 백서는 북한의 원자폭탄 프로젝트를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중단시켜야 한다"고 썼다.
당시 <시카고 트리뷴>은 사설에서 두 차례에 걸쳐 영변에 대한 선제공격을 주장했고, 대부분의 텔레비전 및 신문 기자들은 북한이 이미 하나의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면 몇달 내에 보유하게 될 것이라는 CIA의 평가를 받아들였다.
체니 국방장관은 곧 서울을 방문했고, 미국은 예정되었던 주한미군의 철수를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수락할 때까지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991년 11월의 소동 때 나온 다른 보도들에 따르면, 미국정부의 몇몇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폭탄을 생상하려렴 5년 내지 10년 정도는 더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진짜 걱정거리는 북한이 재처리한 플루토늄을 중동국가에게 판매할 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곧 북한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었다.
1992년 1월에 조지 부시는 미대통령들의 방한시 의무적 과정인 비무장지대의 현장방문을 실시했는데, 이때 그를 동행한 익명의 정부관리는 기자들에게 미국측이 북한의 핵역량에 대해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는 "엄중히 경계되고 있는 북한의 군사기지들을 마음대로 사찰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정말 놀라운 발언이다. 왜냐하면 지난 40년간 미국인이 북한에 들어간 적이 아주 드물었으며, 그것도 아주 세심한 보호관찰하에서만 방문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미국 정부관리들은 북한의 군사기지들을 돌아다니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를 요구하는 논리는 이렇다.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계획에 대한 핵심정보는 거의 가지지 못했는데, 이 때문에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걸프전 이후 이라크에 대한 사찰 결과 전문가들은 인공위성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은폐될 수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1992년 11얼 미국 언론은 대통령 선거 관련 뉴스로 온통 휩싸였지만 1년 후, 즉 미 국방장관 레스 애스핀의 방한과 때를 맞춘 1993년 11월 초에는 또 한차례의 무시무시한 뉴스가 쏟아져 나와 미국 언론을 뒤덮었다.
11월 7일자 <시카고 트리뷴>의 머릿기사는 "북한의 남침을 두려워하는 미국"이었다. 이 전송기사는 애스핀 장관을 수행하여 방한하고 들어온 관리들의 말을 인용하여, 북한은 병력을 휴전선 부근에 집중시켰으며, 십중팔구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는 듯하고, '죽어가는' 김일성이나 혹은 '좀더 과격하고 심지어 어쩌면 정신병적이까지 한' 김정일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그러나 그 기사는 말미에 작은 글씨로, 미 국무부의 소식통들은 북한병력의 특이한 이동이나 휴전선에의 집결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정반대의 내용도 보도했다.


<뉴욕타임즈>는 "북한이 플루토늄을 생산하거나 재처리하고 있다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는 애스핀의 말을 전했다. 김정일의 정신이 온전한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소식통들이 입을 다물었지만, 과거 25년간 김정일의 정치관여 행태에 대해서는 남한 정보기관이 그를 위험할 정도로 불안정하고 필시 제정신이 아닐 것이라는 논지를 유포했던 터였다.


서로 흉내내기를 일삼는 미국 방송을 발췌하기는 좀더 어렵지만, 같은 주말에 CBS 저녁뉴스에서부터 폭스 방송, 심지어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NPR) 방송에 이르기까지, 미쳐버린 북한이 원자폭탄을 준비하면서 국제사찰단의 접근을 금지하고 있으며 군대의 70%를 남한과의 경계선에 집결시키고 있다고 근거 없는 비난을 쏟아내고 있었다.
11월 7일 일요일 클린턴 대통령은 '언론과의 만남'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남한에 대하 어떤 공격도 곧 미국에 대한 공격이다"고 말했고, 11월 18일의 CBS 저녁뉴스는 북한의 핵무기가 오늘날 세계평화에 가장 큰 위협임에 틀림없다는 내용의 무서운 이야기를 또다시 내보냈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3년간 나는 이런 식의 텔레비전 방송을 가능한 많이 접하려고 노력했는데, 그동안 나는 평양이 계속 주장해온 것, 즉 "과거 오랫동안 미국이 북한에게 핵위협을 끊임없이 해왔다"는 사실을 보도한 방송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텔레비전이나 인쇄매체의 북한에 관한 이야기들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서로 베끼기 일색인데, 이는 우익과 좌익, 저질과 고급을 가리지 않고 미국 언론계 전반에 걸쳐 발견되는 현상이었다.
검증되지 않은 사실과 가정들이 모든 기사 속에서 똑같은 형태로 계속 반복되었다.
미국 언론은 북한이 1992년 5월부터 1993년 2월까지 6회에 걸쳐 영변단지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의 공식 사찰을 이미 허용한 이후에도 "북한이 사찰을 거부해왔다"고 기사를 써댔다.


북한은 아마 식민지에서 벗어난 다른 어느 국가보다도 주권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지만, 그럼에도 미국의 압력 하에서 전례 없이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에 자국의 문을 열어주는 적극성을 보여주었는데, 이 기구는 미국 정보기관이 북한 영토의 인공위성 정찰을 통해 획득한 정보를 관례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1993년 11월 <뉴욕 타임즈> 쌩어 기자는 CIA가 "북한이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추측 발표를 "증거가 있다"는 진술로 둔갑시켜 버렸다.


모든 기사와 사설은 의문의 여지 없이 다음과 같이 추정했다.
북한은 악몽과 같은 정권이며, 핵무기를 제조할 의도와 역량을 갖고 있고, 십중팔구 핵무기 개발에 충분한 플루토늄을 이미 가지고 있을 것이며, 적법한 기구의 사찰을 막아왔으며, 이는 미국 외교정책에 심각한 위기이며, 미국의 관리들은 이 문제에 관해 매우 신뢰할 만하기 때문에 기자들은 그들의 판단을 의심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 판단을 자기의 판단으로 삼아도 된다는 것이다.
북한이 위협적인 국가라는 것은 1946년 이래 전형적인 주장이었다. 1946년 2월 김일성이 권좌에 올랐는데, 그 다음 달에 벌써 남한 침공에 대한 첫번째 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경제력을 상실하면서 붕괴에 직면하여 비틀거리고있다는 것 또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래의 상투적인 평가이다.


북한이 좋은 곳이라거나, 북한은 조금도 수상쩍지 않다거나, 북한의 언론정책이 미구보다 낫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난 반세기 동안 북한의 정책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 훨씬 편리하고 대의명분에 도움이 될 때조차도 거짓말에 거짓말을, 과정에 과정을 더해왔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공산정권들로부터 으레 기대하게 된 행태이다. 반면에 걸프전 동안 미 국방부가 자기네들을 양떼 몰듯이 거칠게 다룬 것에 언론들이 수많이 항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처럼 시끄러운 민주주의 국가에서 생쥐처럼 얌전하고, 서로 베끼고, 궁극적으로는 무지한 언론을 위해 대체 무슨 변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언론의 이런 편의적 행태의 가장 큰 원인은 다름아닌 미국과 한국간의 불균형, 즉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는 전반적인 차이의 문제이다. 즉 지난 50년간 미국은 한국에게 모든 것이었지만 미국에게 한국은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거론할 만한 위기가 발생하지 않는 한, 한국에 대한 미국 언론의 관심은 무(無)에 가깝다.


남한을 지지하는 한국인들은 북한이 악마화되거나 희화되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익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렇게 흐믓해할 일은 아니다.
북한 핵문제의 이해에 있어서 미국의 주류 언론은 1992년의 로스앤젤레스 폭동 때의 한-흑 관계 설명에서만큼이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이 지점에서, 미국이 한국 내정에 일상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지 50년이나 흐른 지금에도 과연 몇 명의 미국인들이 한국인과 한국 역사를 약간이라도 존중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매우 참담한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닐까?
또한 미국인 일반이 우매하고 무지한 언론에 만족해 있을 여유는 없다. 평범한 미국인들이 어느 맑은 날 아침에 깨어나 자신의 아들들과 딸들이 어찌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는지, 전쟁의 진정한 원인이 과연 무엇인지도 모른 채 다시 한국에서 싸우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방부의 전쟁기구는 민주주의를 더럽히는 언론체제를 다시 가동할 것이고, 이번에는 전쟁이 전세계적인 대학살은 아니더라도 국지적인 대학살로 확대되지 않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p.681~690)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이번 단락은 커밍스 교수가 해방 이후 현재까지 미국의 언론이나 국방관료, 정치인들이 한반도 문제와 한국에 대해 어떤 정보와 시각과 관점과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 고발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정치권과 행정부, 언론들이 자국의 기득권과 탐욕을 위해 가식적이고 무책임한 정보와 정책을 생산하여 퍼트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 "미국의 주류 언론은 1992년의 로스앤젤레스 폭동 때의 한-흑 관계 설명에서만큼이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 이런 미국의 언론을 그대로 베끼는 국내 언론과 지식인들 역시 무능하고 부책임하기는 마찬가지죠. 한국에 대해 무지하고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적 의식을 갖고 있는 미국 언론인들이 만든 기사가 결국 한국과 한국인의 자괴감과 분열과 동족간 증오의 싹을 낳고 있는 것입니다.


○ "미국이 한국 내정에 일상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지 50년이나 흐른 지금에도 과연 몇 명의 미국인들이 한국인과 한국 역사를 약간이라도 존중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매우 참담한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닐까?" => 커밍스 교수의 이런 평범한 진단을 인정하지 않는, 못하는 국내 정치인과 지식인, 소위 진보적인 인사들은 역사와 민족 앞에 크게 반성하고 뉘위쳐야 합니다.
미국의 내정간섭과 군사주권 유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평화통일은 커녕 민주주의와 질적 경제성장 그리고 사회복지는 난망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진보정치와 사회운동이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57 : 1994년 전쟁위기


"한국전 이후 워싱턴과 평양간에 발생한 가장 위기적인 상황은 1993년 초에 시작되어 그후 18개월간 지속되었다.


미국 언론이 보기에는, 1993년 3월 12일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TP)에서 탈퇴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이 위기가 시작됐다. 이번에도 당시 외교위원회 의장이던 레슬리 겔브가 나서서 북한의 핵활동에 의해 "새로운 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말하자면 사담 후세인 같은 또 하나의 "나쁜 녀석"이 "건전한 국가들"의 용기를 곧 시험해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원 국방세출소위원회 의장인 펜실베니아 민주당 의원 존 머사에게는 북한이 "미국 안보의 가장 큰 위협"이 되었다. 그는 만약 북한이 핵시설 사찰을 허락하지 않으면, 미국은 "인공지능 무기"로써 북한을 쓰러뜨려야 마땅하다고 3월에 주장했다.
이때쯤이면 영향력이 있는 미국의 분석가들이 김일성이 사악하거나 미쳤거나 아니면 양쪽 다이기 때문에 그 정권은 뒤집어엎어야 마땅하고, 그곳의 핵시설들은 필요하다면 강제로라도 철거되어야 한다고 날마다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위기의 시발점은 새로 취임한 빌 클린턴 대통령이 부시 전대통령이 1년 전에 보류시켰다가 1993년도에 되살린 팀 스피리트 훈련을 예전처럼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한 1993년 1월 26일이다.
2월말에 새로운 미 '전략사령부'의 지휘관인 버틀러 장군은 예전의 소련을 겨냥하던 전략 핵무기(즉, 수소폭탄)을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북한을 향해 재조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와 동시에 신임 CIA 국장인 제임스 울시는 북한이 "미국의 가장 중대한 당면 관심사"라고 증언했다.
1993년 3얼 중순에는 수만 명의 미군이 한국에서 다시 전쟁연습을 벌이고 있었으며, 괌에서 B-1B 폭격기와 B-52 핵폭격기가 날아들었고, 크루즈미사일을 장착한 수 척의 해군함정 등이 집결하였다.


그러자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하기 시작했다. 핵확산금지조약의 기본원칙은 핵무기가 없는 나라들이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들로부터 위협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데, 소련의 붕괴 이후 한국 내에서 벌어지는 미국의 모의 전쟁은 오로지 북한을 표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겠다고 협박함으로써 강경책을 구사한 것이다. 현행의 핵확산금지조약은 1995년에 재협상하기로 되어 있었고, 일본이나 인도와 같은 주요 국가들이 이 조약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암묵적으로 북한은 핵보유에 근접한 다른 국가들도 탈퇴에 동조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팀스피리트 훈련이 끝나자 북한은 미국과 고위급회담에 동의했고, 이어서 1993년 6월에 핵확산금지조약의 탈퇴를 보류했다.
북한을 자극시키는 동인이 팀스피리트를 비롯한 미국의 핵 위협이었음은 북한 언론을 읽어보면 가장 명백하게 확인된다. 북한 언론은 1992년 가을의 대통령선거 이래로 전쟁연습을 재개하는 것에 대해 줄곧 경고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미 제국주의를 침을 튀겨가며 열심히 성토하는 가운데서도 그리고 이 모든 '위기'의 와중에서도 평양은 미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요구했다.
1993년 초 평양을 화나게 만든 다른 문제는 국제원자력기구가 핵폐기물 처리장으로 지목한 곳을 비롯하여 북한의 몇몇 미심쩍은 장소들에 대해 '특별사찰'을 요구한 것이었다. 국제원자력기구는 이전에 어느 나라에게도 그러한 사찰을 요구한 적이 없었으나, 이라크의 패전 뒤에 발견된 몇몇 핵시설들을 미리 탐색해내지 못했다는 국제적 압력에 밀려 그러한 요구를 한 것이다.


북한은 두 가지 근거를 들어 사찰 요구에 저항했다.
첫째, 국제원자력기구가 새로운 방문장소를 탐색하면서 미국의 정보를 활용했는데(실제로 그러했다.), 북한으로서는 미국이 교전국이므로 이는 국제원자력기구의 위임권한을 위반한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 국제원자력기구는 사찰결과를 미국에게 넘겨왔으므로 북한이 이를 계속 허용하면, 미국은 궁극적으로 북한의 모든 군사시설을 국제원자력기구에게 개방하기를 원할 것이라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이것이야말로 정확히 미국의 몇몇 고위관리들이 주장하던 바이다.


공개 정보에 근거하면, 1989년에 북한이 원자로에 연료를 교환하면서 추출해낸 플루토늄 샘플자료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국제원자력기구와 북한간에 복잡하고 해결불가능한 갈등이 빚어지면서 추가사찰에 대한 욕구가 증대되었다.
평양이 연료 가운데 소량의 샘플만 재처리했다고 주장한 반면 미국의 CIA는 북한이 11kg(즉, 1979년에 제거된 연료 전량)을 재처리했다고 주장했고, 국제원자력기구는 미국과 북한의 주장 중 어느 쪽을 지지하는지 결코 밝히지 않았다.
국제원자력기구는 단지 핵폐기물 처리장의 사찰을 원했을 뿐이다.


1993~94년 사이에 복잡하게 얽힌 불화의 매듭은 다음과 같다.
국제원자력기구는 북한의 핵폐기물 처리장소로 추정되는 곳에 대해 사찰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이곳이 군사시설이고 따라서 출입금지 구역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국제원자력기구가 북한의 철천지 원수인 미국의 요구를 따르면서 남한 내의 많은 미군지기에서 미국이 무슨 짓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똑같은 시간을 할애하여 사찰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국제원자력기구를 비난했다.
마치 누군가가 북한사람들의 편집증을 부추기고 그들의 특기로 알려진 그 맹목적인 반항을 좀더 조장하려는 듯, <뉴욕타임즈>는 적절히 선정된 어느 전문가의 논설을 게재했는데, 그는 워싱턴의 새로운 전략적 전쟁계획안에 "중국과 제3세계를 겨냥한 핵 원정군의 구성"과 같은 "변덕스럽고 오도된 개념"이 깔려 있음을 은근히 지적했다.


북한이 중거리(600마일) 미사일인 로동 1호를 부지런히 개발하여, 1993년 6월의 시험발사에서 동해을 목표로 제대로 쏘아 올리고 300마일 거리의 표적을 정확히 맞춘 것(게다가 이 발사의 목적에 대해 이번에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로동 1호는 허리부분에 엔진이 추가로 장착되어 중거리 화력으로 증강된 스커드미사일이다. 외국의 전문가들은 이 미사일이 표적을 명중시킨 것이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북한 기술력의 우수함을 보여준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의 진실이 무엇이든간에 북한은 소련이 붕괴되고 소비에트권으로부터의 지원이 끝난 이후 아주 능숙한 외교게임을 벌였다.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를 상대로 한 협상, 대결, 얼버무림을 통해 평양은 미국으로부터 하나씩 잇달아 양보(1991년 가을 남한에서 핵무기 철수, 팀스피리트 전쟁모의훈련 보류, 그리고 사상 최초의 북-미간 고위급 회담)를 얻어냈다.
평양의 진정한 목적이 핵무기 제조에 있다고 가정한다면, 북한은 핵무장에 대한 굳건한 정당화 논리를 갖고 있다. 따져보면, 북한은 단지 전쟁억제에만 관심이 있다고 하는 아주 고전적인 주장(양쪽이 일단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 멕시코식 맞대결이 성립되어 핵무기 사용 가능성이 없어지고,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한반도를 1991년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을 뿐이라는 것)을 쉽게 펼칠 수 있다.


미국 언론의 논평들은 거의 예외없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즉 북한은 수십년간 미국으로부터 주기적으로 핵위협을 받았으며, 폭넓은 핵억제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북한 자신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p.691~694)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미국 내에서나 해외에서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역사적 사실, 즉 1993~1994년 한반도의 위기가 핵전쟁 직전까지 도달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정치인이나 주류언론, 지식인은 없습니다. 일부 극소수 기득권층들이 정보를 독점하여 사리사욕에 이용하는 바람에 정보에서 제외된 대다수 남한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불벼락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과 북-미 관계 그리고 동북아 정세에 대해, 그리고 언론이 받아쓰는 대로가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객관적인 정보를 수집하고 널리 알려야 합니다.


○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서나 1999년 9.19 북-미 공동성명의 사례를 보면, 팀스피리트 훈련과 같은 한미 합동전쟁연습은 한반도에 긴장을 조성하는 핵심적인 갈등요인이고, 그럼에도 미국의 정책변화에 따라, 남한 정권의 정책과 요구에 따라 얼마든지 훈련을 취소하거나 대폭 축소할 수 있습니다.

현재 박근혜-새누리당 정권이나 국뻥부, 국가조작원, 조중동 찌라시가 선동하고 세뇌하는 "통상적 군사훈련"이 얼마나 위선이고 거짓인지 20년 전 역사적 사실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말 한 마디 뻥긋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한민국을 이끌고 갈 정치인의 자질은 커녕 '진보적인 지식인'이나 '양심적인 시민'으로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 "북한은 수십년간 미국으로부터 주기적으로 핵위협을 받았으며, 폭넓은 핵억제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1997년 or 2003년) 북한 자신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 이것이 커밍스 교수가 미국에서 1997년(재판을 발간한 2003년인지 불명확..)까지 확인한 북한 핵무기에 대한 객관적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와 네오콘, 극우보수집단, 언론 뿐 아니라 국내의 냉전수구세력과 조중동 찌라시, 새누리당 세력은 주권자들에게 북핵에 대한 거짓 여론을 조작하고 세뇌시켜 남북화해와 평화협정 체결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커밍스 교수의 폭로를 통해 '종북 선동'의 뿌리이자 주체이자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 북한 체제에 대한 시시비비나 호불호를 공평하게 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객관적인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객관적 검증없이 언론이나 정치인, 사이비 지식인들이 던져 주는 정보를 토대로 하는 주장이나 의견은 결국 그들이 가공한 '굴레'에 빠져 우물 안 개구리처럼 '개굴개굴'로 끝나버릴지도 모르니까요..



○ 한반도가 1953년 7월 정전협정 이후의 전시상태라는 점을 냉정한 현실로 인정하고 남북화해와 전쟁위기의 근거를 제거하기 위해 북-미(또는 남-북-중-미) 평화협정과 남북화해가 제도적으로 자리잡아야 하고, 정전협정을 근거로 하면서 평화통일이라는 헌법을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국가보안법을 조속히 사문화시킨 후 폐기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은 또한 군사작전권을 외국에 넘겨준 세계 유일의 주권 없는 군대에서 벗어나는 과정과 병행해야 하고, 국방예산을 줄이고 사회복지와 민생예산으로 돌려야 하며,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려면 시세에 맞는 토지이용료와 군사기지이용료, 훈련비용, 환경오염료 등을 받아야 합니다. 말도 안되는 방위비분담금은 페기해야죠...







58 : 미국의 대한반도 핵무기 정책 1


"한국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질적으로 새로운 무기의 도입을 금지하는 정전협정에도 불구하고 남한에 핵무기를 도입했다.
이 비상수단을 취한 주된 이유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내전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1953년 이승만은 어떠한 정전협정에도 반대했고, 협정이 이루어졌을 때조차도 협정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고, 종종 전쟁을 재개하겠다고 위협했다.
1953년 11월 닉슨 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여 "무력으로 한국을 통일시키려는 시도에 미국을 개입시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도박으로 전쟁을 다시 시작하지는 않겠다"는 서면보증을 이승만으로부터 받아내려 했다." 닉슨은 그런 보증을 받아내지 못했고, 그래서 그런 상태에서 미군 사령관은 소수의 미국 지도자들에게만 회람된 극비 '부속 문건'을 통해, "이승만의 공격명령 결정에 대한 즉각적인 경계망"을 확보하고 그런 명령이 내려지거나 대한민국 야전사령관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이것은 물론 미국 정보기관이 대통령 관저의 동태를 감시하여 새로운 전쟁 명령을 가로채겠다는 뜻을 내포한다.


이런 식으로 제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자신의 도발적인 행위를 지지하는 미국인들이 있으며, 그들은 만약 전쟁이 시작되고 공산주의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분명한 행동이 전개되면 핵무기 사용을 지지해줄 바로 요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미 합참의장인 아서 래드포드 제독이 있었는데, 그는 1956년 9월 국무부와 국방부의 연석회의에서 "핵탄두를 한국에 도입하겠다는 군사적 의도를 퉁명스럽게 드러낸" 적이 있었다.


1957년 1월 국가안보회의 기획위원회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국의 네 가지 대안적 군사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를 준비했다"
핵심적인 문제는 "한국에 도입될 핵능력 활용 무기의 종류들 그리고 핵탄두의 한국 내 보관의 문제"였다. 6개월간 이어진 토론 끝에 델레스 국무방관은 핵무기를 한국에 보내기로 합동참모본부와 동의했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 문제, 즉 정전협정과 이승만 문제가 있었다.


정전협정의 하부조항(13d항)은 양측이 새로운 유형의 무기를 한국 전역에 도입하는 행위를 금했다. 래드포드의 견해로는 13d항이 핵무기를 허용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그냥 일방적으로 그 조항을 중지시키기를 원했다.
대단히 법치주의자였던 델레스는 합동참모본부의 제안을 지지(헐~?)했으나 "우리의 동맹국들과 유엔 앞에서 그러한 행위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공산측의 정전협정 위반을 확인시켜주는 공개적인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문제는 공산측이 13d항을 심각하게 위반한 적이 없었던 만큼 그 "공개적인 증거"라는 것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었다.
공산측은 새로운 제트전투기를 도입했지만 미국도 똑같이 그랬고, 이것이 양측의 군사력을 혁신적으로 증강시킨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핵무기는 전혀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이 사안은 영국의 심기를 거슬렸지만, 미국은 영국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하여 1957년 6월에는 13d항의 의무를 벗어던져버렸다.


이제 이승만 문제가 남았다.
1955년 2월의 미확인 정보보고들은 "이승마이 한국의 군과 민간 지도자들에게 대북한 군사작전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회의를 언급했다." 10월에는 이승만이 정전협정 이후 분명히 북한 영토가 된 개성과 옹진반도의 재탈환 계획을 명령했다는 보고들이 나왔고, 1956년에는 더 많은 경고와 소동이 일어났다.
그러다가 1957년 8월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분명 이승만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NSC 5702/2를 승인했는 데, 이는 미국의 대한 정책에서 핵무기의 한국내 배치를 승인하는 주요한 수정이었으며, 어느 관리는 "작은 변화"라고 불렀지만, "북한에서 헝가리의 민중봉기가 일어나면 남한이 이에 대응하여 일방적으로 군사적 선제권을 잡는 것을 미국이 지원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조치이다. 이것은 북한의 한 장군이 그의 사단 전체를 이끌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으로 망명하려 했다는 당시 소문에 대한 반응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곧 이어 쿠바의 피그스 만 침공의 참패를 낳은 발상(약간만 촉발하면 전면적인 반공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발상)의 전조에 불과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정확히 이승만과 그의 측근들이 고대하던 바였다. 그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델레스는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델레스는 전쟁이 시작되기 1주일 전에 전선을 시잘하면서 38도선 너머의 김일성을 노려보았던 것으로 유명한 인물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는 마치 방코(소설 '맥베스'에서 맥베스에게 살해당한 등장인물)의 유령이 그의 피투성이 머리채를 쥐고 흔들어대고 있는 듯이, 그 갑작스러웠던 일요일의 심란한 속삭임 때문에 평생동안 괴롭힘을 당한 듯하다.
1954년의 국가안보회의에서 그는 북한이 전쟁을 다시 시작할까봐 걱정했는데, 그의 걱정에는 독특한 데가 있었다. 델레스는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 부대에 잠입한 후 자기네 진영을 공격하여 이런 적대행위가 한국군에 의해 선제된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전쟁을 시작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차례의 고위급 회의에서도 델레스는 미국은 한국에서 어떤 식으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될지 알 수 없을 것이며 이승만이 전쟁을 시작할 수도 있다고 소리 높여 걱정했다. 1953년 10월의 168차 국가안보회의에서 델레스는 이승만에 의한 전쟁 재개를 예방하는 데 "우리의 모든 노력"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1957년의 332차 회의에서도 그는 여전히 이승만이 "전쟁을 시작할"까봐 걱정했고, 2주 후에는 "만약 한국에서 전쟁이 시작된다면. ... 어느 쪽이 시작했는지를 판단하기가 심히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델레스가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자는 합동참모본부의 요청에 동의한 것은 바로 이러한 특별한 맥락에서였다. 애치슨이 한국전 이전에 사용했던 방식대로, 내전 억제책을 구축함으로써 그는 양측 모두를 제어하려고 한 것이다. 핵 파괴물로 한반도를 뒤덮게 되는 전쟁이라면 불같은 성격의 이승만과 김일성이라도 재고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승만은 특유의 고집을 부려 수소폭탄 사용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1954년의 의회 합동연설에서 수소폭탄의 사용을 요구함으로써 공화당 내의 지지자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델레스의 핵무기는 전적으로 미국의 통제 아래 놓일 것이며 북한이 도저히 저지할 수 없는 대규모 침공을 감행할 때에만 사용될 것이었다.


1958년 1월 미국은 핵포탄을 발사하는 280mm 대포와 아니스트 존이라는 핵탄두 미사일을 남한에 배치했고, 1년 후 미 공군은 "핵탄두를 장착한 마타도어 크루즈미사일 비행대대를 한국에 영구히 배치했다."
1,100km의 사정거리를 가진 마타도어 미사일은 북한은 물론 중국과 소련까지 표적으로 삼았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한국의 방위전략은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기만 하면 아주 초기에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틀에 박힌 계획으로 고정되었다.
1967년의 미 국방부 모의전쟁 각본에 쓰여 있듯이, "남한에 있는 한국군 12개 사단과 미군 2개 사단의 .... 방어계획은 거의 전적으로 개전 초기의 핵무기 사용에 맞추어져 있었다." 1968년 1월 북한은 미국의 처보선 푸에블로 호를 나포하여 승무원들을 체포하고 11개월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이에 대한 "미국 정책결정자들의 최초 반응은 평양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이었다. .. 한국의 공군 비행장에서 비상경계 상태로 있던 모든 미국 F-4 전투기에 핵무기들만이 탑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미국 지도자들이 명석한 판단을 내리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다."


미국의 원자탄 지뢰(Atomic Demoiltion Mines, ADM)는 남하에서 사용되도록 고안된 방어무기로서, 한 지뢰 기술자에 말에 따르면, "적의 진격지역을 오염시킴으로써 기갑공격을 중단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지뢰는 무게가 겨우 600파운드였지만 20k ton의 폭발력을 지녔고, "오염 효과가 2주일간 지속되므로 그 지역으로의 진격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었다. 이 지뢰는 지프차로 운반되며, 특수 팀원들의 등짐으로 옮겨져 설치된다.
한편, 1974년에 [워싱턴 포스트]가 지적했듯이, 미군 헬리콥터들이 상시적으로 비무장지대 부근으로 핵무기를 날랐다. 1994년 12월에 한 소형 정찰 헬기콥터가 그랬듯이, 그중 하나가 훈련 도중 길을 잃고 비무장지대를 넘어감으로써 평양에 원자탄을 안겨줄 가능성은 상존했다. 한편 핵무기의 전진배치는 핵무기를 "쓰느냐 잃느냐" 식의 사고방식을 낳았다.
핵무기를 적의 손으로 넘기지 않기 위해서는 북한의 소규모 공격조차도 핵무기를 써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나중에 전두환 정권 동안 주한미국대사직을 엮임한 리처드 '딕시' 워커는 1975년에 이렇게 진술했다.
"미국의 재래식 무기는 물론 전술 핵무기까지 한국에 있다는 것은 동경 측에 전략적 보장을 확인해주는 데 도움이 되며, 일본이 프랑스 식으로 방어를 위해 스스로 핵무장을 하려는 생각을 단념시켜준다. 이는 동경의 지도자들이 정파에 상관없이 잘 이해하고 있는 사실이며 북경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인들의 생명은 공산주의 적과 동경의 우방을 동시에 봉쇄하려는 미국의 이중봉쇄 정책의 볼모였던 것이다.
방어용이든 공격용이든 핵무기에 가장 매료된 사령관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계속된 팀스피리트 모의전쟁 훈련의 창안자인 스틸웰이었다.
팀스피리트 훈련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사훈련이었으니, 여기에는 약 7만 명의 미군들(한반도와 일본 등)을 포함하여, 종종 20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스틸웰의 전략에 의하면, 이 훈련은 "북한에 대한 보복공격의 예행연습이자," 적의 전선 후방의 공습을 강조하는 1980년대의 "육, 공 합동 전투 원칙의 선구"였다.
1976년 8월의 한 유명한 사건은 어느 날이라도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비무장지대 대치상황의 그 특이한 "올가미"적 성격을 잘 보여주었다. 미국의 주장으로는, 미군측의 북쪽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에 가지치기를 하기 위해" 몇몇 미군과 한국군인들이 판문점 부근의 비무장지대 금지구역에 들어갔다. 한무리의 북한군이 가지치기 팀과 맞닥뜨렸고, 연이은 싸움에서 한 북한군인이 미군의 도끼를 잡아채서 두 미군을 살해했다.
이것은 아주 불행한 사고였지만, 광적으로 중무장된 '비무장지대'의 초긴장 상태를 감안하면 충분히 예견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대결국면 동안 스틸웰은 1953년 이후 최초로 한-미 군대에 초비상 경보를 발령했고, 한국이라는 전쟁무대를 미군병력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한국 해역으로 이동했고, 핵무기를 장착한 B-52 편대가 괌을 이룩하여 한반도 상공을 날아 비무장지대를 향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방향을 선회했다."
한 분석가에 의하면, 스틸웰은 자신과 부하들 사이에 교신이 두절되어 협의가 불가능해질 경우, 포격과 로켓공격을 개시랄 권한을 부하들에게 위윔하게 하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국방부에 요청하여 승인을 얻어냄으로써 전술핵무기의 사용이 중앙의 명령이나 통제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이제 한미합동 기동부대는 그들을 보호하는 1개 소총중대 전원을 실은 20대의 헬리콥터와 다시 이를 호위하는 7대의 무장 헬리콥터와 함께 공동경비구역에 들어갔다. 그들은 결국 그 거슬리는 미루나무의 가지들을 잘라냈다.
한편,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또 하나의 워싱턴 소식통은 이 사태에서 '자제력'을 보인 쪽은 실제로는 스탈린이었다고 나에게 말했다. 스틸웰은 워싱턴의 헨리 키신저가 임기말에 힘을 잃은 제럴드 포드의 재선기회를 높이기 위해 전쟁을 시작할까봐 두려워했다는 것이다."(p.695~700)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1953년 7월 정전협정을 체결하자마자 위반하고 한반도에 전쟁위기, 핵전쟁의 공포를 심어놓은 범죄자들은 마로 미국 정부이고 극우보수 전쟁광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21세기 한반도의 핵위기와 전쟁위기의 출발점은 결국 1945년 9월 미군의 한반도 강제점령과 한국전쟁에서 잉태되었고, 미국의 정전협정 위반으로 점점 달구어진 면이 크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군사주권도 없으면서, 반공반북만을 선동하는 일본군/만주군 출신 매국노 군바리 장교들과 함께 국제정세도 모르고 국내 민중들의 삶과 평화도 아랑곳하지 않고 권력과 부를 위해 "멸공통일"을 외친 이승만 일당에게도 동일한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커밍스 교수는 미국이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한 정책에 대해 여러가지 배경과 이유를 설명하려 했지만, 아무리 읽어보아도 아무런 객관적, 정황적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핵무기를 배치하는 데 걸리는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만 나열한 셈입니다. 즉, 미국이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한 것은 유엔 헌장에도 위배되고, 정전협정에도 위배되고, 한-미 동맹(?) 정신에도 위배되고, 가장 크게는 남한의 주권자인 국민의 동의와 허락 없이 자신들의 군사적 목적에 따라 일방적으로 배치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미국의 미친 짓을 알지도 못하고 알고 나서 반대하지도 못하고 여전히 군사주권을 미국에 가져다 바치면서 자신들의 알량한 권력과 부를 지키려는 한 줌의 매국노들이 문제지만...


○ 커밍스 교수도 놀라게 한 미국 행정부와 군국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즉 "북한에서 헝가리의 민중봉기가 일어나면 남한이 이에 대응하여 일방적으로 군사적 선제권을 잡는 것을 미국이 지원"하겠다는 발상은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터무니 없는 유엔 회원국에 대한 도발이야말로 미국의 군사패권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 "미국이 북한과의 전쟁 초기에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발상에 남한의 지휘관들은 아주 익숙해져 있다고 그는 말했다."라는 전직 주한미군 사령관의 발표는 남한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에 전혀 관심이 없는 전쟁광 미국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살면서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 박정희부터 김영삼까지의 청와대-국방부 고위공직자들이 얼마나 반국가적, 반국민적 행위를 일삼아왔는지를 말해줍니다.

2014년 현재 박근혜와 김기춘의 청와대, 남재준의 국정원, 김관진의 국방부 고위 공직자들은 과연 과거 그들의 선배들과 다를까요? 아닐 겁니다. 이것이 남한 국민들의 불행이자 비극이고 업보라 할 수 있습니다..







59 : 미국의 대한반도 핵무기 정책 2


"1991년에 나는 퇴직 공위관리이자 주한미군 사령관을 역임한 사람이 1980년대에 개발된 미국의 전략을 비공개로 발표하는 것을 들었다. 그 전략은 이러했다.
1) 북한의 대규모 병력이 비무장지대 남쪽으로 공격해오면 미국은 새 한국전쟁의 아주 초기단계인 "H + 1"에, 즉 전쟁발발 후 1시간 이내에 전술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계획이었다. 그것은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도록 계획되어 있는 유럽지역 전략과 달랐다. 유럽에서는 상대방도 핵무기를 보유했기 때문에 아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면 감히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지만, 한국에서는 적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미국이 북한과의 전쟁 초기에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발상에 남한의 지휘관들은 아주 익숙해져 있다고 그는 말했다.
2) 1970년대 중반에 개발된 '육-공 전투' 전략은 적의 영토를 조기에 신속하고 깊숙이 공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인데, 특히 북한에 많이 있는 견고한 지하시설물들을 핵무기로 공격할 수도 있다. 즉, 이 전략은 북한의 침공을 단순히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반격(rollback)'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3) 만약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다면, 적은 죽이고 건물들은 살리기 위해서 중성자탄 혹은 강화된 방사선 무기를 당연히 사용할 수 있다.
4) 북한은 1970년대 후반에 '육-공 전투 원칙'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 병력을 증강하고 재배치했다. 이런 재배치의 결과 80%에 가까운 지상군이 비무장지대 부근에 주둔하게 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미국과 남한의 소식통들은 이 병력증강과 재배치가 북한의 침략의도를 드러내는 증거라고 으레 인용했다. 사실 이 조치는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던간에 가능한 많은 병사들이 남한쪽으로 침투하여 핵무기가 사용되기 전에 한국의 육군병력이나 민간인들과 섞임으로써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줄이려고 취해진 것이었다.


이 끔찍한 시나리오는 군사 야전교범에 등장할 정도로 1980년대의 표준적인 작전절차가 되었다.
연례적인 팀스피리트 군사훈련에서도 모의 육-공 전투 작전이 펼쳐졌다.이런 작전은 초기에는 북한의 공격을 봉쇄하고, 그런 다음에는 북으로 진격하고, 궁극적으로는 평양을 점령하고 정권을 쓰러뜨리는 것을 의미한다. 1993년 12월에 [뉴욕 타임즈]는 일면 기사에서 이런 작전계획을 상세히 기술하면서 이 작전이 최근에 막 개발되었다고 잘못 보도했다.
또한 이런 모의 전쟁훈련이 한국에서 열리게 된 까닭은 1980년대 초반의 유럽에서도 나토(NATO)권 국가들과 강력한 평화운동 때문에 그와 같은 훈련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이 소식통에 따르면, 페르시아 만의 걸프전은 핵무기의 역할을 재평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신뢰할 만한 명중률을 지닌 '인공지능' 폭탄이 등장함으로써, 모든 것을 파괴하고 통제불능의 결과를 낳는 핵탄두보다 효율적인 재래식무기들이 더 유용하다는 것이다. 미 육군은 가능한 빨리 전쟁터에서 핵무기를 없애고 싶어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미국의 정책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1991년 가을에 쓸모가 없어진 핵무기들을 한국으로부터 철수시키는 데 이르렀다는 것이다. 철거된 무기에는 203mm 대포용 핵폭탄 40발과 155mm 대포용 핵포탄 30발, 그리고 다량의 원자탄지뢰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공식대변인은 군산의 미 공군기지에 보관된 것으로 1985년에 보도된 F-4 및 F-16 폭격기용 핵폭탄 60여발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걸프전 당시 대규모 군병력을 지구의 절반을 돌아 배치시키는 데 성공한 것으로 인식되자, 미 지상군을 한국에서 철수하라는 압력(주로 예산을 삭감하려는 의원들의 압력)에 훨씬 쉽게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 장군은 생각했다. 그러나 물론 한국에는 오늘날까지 38,000명의 미군이 남아 있다.


한국전쟁 이래 북한은 군부대, 군수창고, 무기공장, 심지어 전투기 지하격납고에 이르는 거대한 시설물들을 지하나 산 위의 요새에 구축함으로써 이러한 핵 협박에 대응해왔다.
한국전쟁에서의 미군의 제공권 장악은 '인공지능' 무기의 등장과 함께 개발된 것으로 여겨지는 저지원칙, 즉 "표적은 인식되는 순간 이미 파괴된다'을 이미 잘 보여주었따. 북한은 오래 전부터 이미 이 원칙을 알고 있었고, 이 원칙에 근거하여 조치를 취했다.
1970년대 중반에 평양은 박정희 정권이핵 능력을 개발하려 함에 따라 더 많은 위협에 직면했는데, 이 시도는 미국의 엄청난 압력에 의해 겨우 중단 되었지만 만만찮은 잠재력을 남겨두었다. 남한은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을 제조할 수 있는 자생적 능력"을 개발하는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시켰다. 남한은 또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전쟁 중의 이란과 이라크와 같은 불량한 국가들에게 무기를 판매하는 '배반적'인 무기공급자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


이 서술의 상당 부분은 마치 남한이 아니라 북한에 관해 씌어진 것처럼 읽힐 테지만, 평양측의 행동을 거시적인 구도 속에서 조명한다. 즉 평양측 행동의 상당 부분은 미국의 압력과 남한의 선제 행위에 대한 대응이었던 것이다."(p.701~704)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평양측 행동의 상당 부분은 미국의 압력과 남한의 선제 행위에 대한 대응이었던 것이다." => 이것이 한-미 양국 정부가 아닌 제3자의 시각, 중립적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한반도 핵무기와 갈등 관련 진실의 한 조각입니다.

미국 극우언론이나 국내 극우언론에서 떠들어 대는 일방적인 정보에 의해 형성된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한반도 정세를 단순히 생각하면 평생 말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 "이런 모의 전쟁훈련이 한국에서 열리게 된 까닭은 1980년대 초반의 유럽에서도 나토(NATO)권 국가들과 강력한 평화운동 때문에 그와 같은 훈련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한국 내 시민사회단체와 지식인들, 진보정당과 환경운동가들이 반성해야 할 지점을 보여줍니다.


○ 팀스피리트 군사훈련은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주도하에 한반도에서 같은 동족인 북한 군인/사람들 뿐 아니라 남한 군인/국민들까지 즉각적인 죽음과 중장기적인 고통 속에서의 죽음, 몇대에 자식들의 죽음과 고통, 오랜 기간에 걸친 환경/시설 파괴를 가져오는 핵무기 공격과 핵전쟁 시나리오를 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청와대 일부 인사와 국방부 고위 장교 몇몇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며,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수십 년 동안 팀스피리트 훈련에 참여한 매년 60만 장병들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무슨 짓을 한겁니까?
현재 진행 중인 한-미 합동 키리졸브 훈련이나 독수리 훈련은 핵무기 사용 시나리오가 없을까요? 그렇다면 왜 핵항공모함과 핵폭격기들이 군사훈련에 참여할까요?







60 : 긴장완화를 향해


"클린턴 행정부는 1993년에 출범하면서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하겠다는 부시의 결정을 고수했었고, 곧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겠다는 평양의 위협으로 말미암은 위기에 직면했다. 다른 방법을 택하라는 상당한 충동질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행정부는 협상의 길을 택하여 역대 어느 정권도 이루지 못했던 여러 성과를 거두었다.
첫째, 애스핀 국방장관은 지난 몇 년간 워싱턴 내부인사들만 알고 있었던 사실, 즉 북한의 핵활동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놓고 정부 전문가들 사이에 심각한 의견 분열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시인했다.
둘째, 클린턴 행정부는 핵무기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정책사안들에 관해 북한과 직접 고위급 회담을 개시했다.
셋째, 이 행정부는 팀스피리트 훈련의 종식, 북한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 양국 수도에 연락사무소 설치하는 것을 포함하는 외교관계의 개선 등, 가능한 많은 양보를 북한에 제의했다.
넷째, 이 행정부는 여러 나라 정부와 유엔을 동원하여 북한이 만약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할 경우 초래될 세계 전체에 대한 위험을 북한엑 경고하도록 하는 동시에 북한에 좀더 덜 위협적인 종류의 원자력 에너지를 공급하도록 힘쓰겠다고 제의했다.


다시 말해서, 처음으로 미국은 한반도 위기의 해소를 위해, 이전의 모든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B-52, F-4 팬텀기, 항공모함, 비상 경계경보 등으로 폭풍을 몰아붙여 김일성을 굴복시키려는 대신에 능숙한 외교를 펼친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이렇듯 분별있고 능란한 노력에 대해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이 과정은 쉽지 않았고, 많은 상호 불신으로 인해 좀처럼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1993년 7월에 북한은 흑연형 원자로와 북한이 풍부하게 보유한 천연 우나륨에 기초한 그들의 핵개발 계획 전체를 미국이 제공하는 경수로로 대체하겠다고 제안했는데, 경수로를 쓰면 무기생산의 가능성은 훨씬 줄어들지만 평양측은 외부의 연료공급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의외의 제안으로 논의는 진전되었고, 1993년 11월 평양을 사태해결을 위한 일괄타결안(이 안은 1994년 10월에 최종 합의된 조항들과 유사하다)을 협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여러가지 복잡한 이유들로 인해 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1994년 5월에 북한은 1989년 이래 최초로 원자로를 폐쇄하고 8천여 개의 연료봉을 철거하여 냉각수조에 넣음으로써 클린턴 대통령에게 특단의 조치를 강요했다.
이 행위는 워싱턴의 엄포를 불러일으켰고 관리들엑 분명히 어떠한 운신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았따. 또한 이는 아니나 다를까 새로운 한국전쟁에 관한 언론의 무책임한 소동을 또 한차례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언론이 전혀 모르게 비상경계가 발동되었다. 그때 미국과 북한은 대다수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전쟁에 근접했다. 지미 카터 전대통령은 그 몇 년 전에 평양으로부터 초청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클린턴 정부의 관리들로부터 브리핑을 받고 나서 이번 위기의 심각성을 알고 깜짝 놀라 자기가 이 문제를 직접 떠맡기로 결심했다.


카터는 1994년 6월에 평양으로 날아갔고, 대동강 보트 선상의 그와 김일성의 토론을 현장중계한 CNN의 기막힌 솜씨(이 직접 중재가 진행중인 외교과정을 단축시켜준 셈이다.)에 힘입어 막다른 난국을 돌파했다.
그는 평양측에 경수로와 아울러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를 얻는 대신 영변 핵시설을 동결하라고 제안하여 텔레비전 카메라가 녹화하는 가운데 김일성의 분명한 동의를 얻어냈다.
클린턴 대통령은 백악관 기자실에 나타나, 만약 평양이 핵 프로그램을 동결시킨다면(즉, 연료봉들을 냉각수조에 그대로 남겨두고 진행중인 새 시설의 건설을 중단한다면) 고위급회담을 재개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실제로 7월 8일 제네바에서 고위급회담이 열렸다.
이렇게 하여 진정한 돌파구가 열렸고, 1994년 10월에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흔히 언론에서 보도되었듯이, 미국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평양측에 양보만 한 것은 아니다. 미국 언론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지만, 최근 몇년간 북한도 외교와 기타 분야에서 많은 양보를 해왔다.
1950년에 자신을 침략자라고 낙인찍은 결의안들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91년에 유엔 가입에 동의했다.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가 자신의 핵 시설들을 7회에 걸쳐 정기사찰 하도록 허용했는데, 이는 냉전의 전성기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미국의 많은 신문들은 이 사실을 무시했다.
북한은 전례 없는 합영사업법과 조세,수익에 관한 법규들을 통과시켰고, 많은 한국기업을 포함한 외국기업들과 다수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남한 신문들은 북한에서의 사업활동 전망에 관한 보도들로 가득 채웠지만 서울과 평양의 관계는 여전히 너무 나빠서 남북한 사이의 상당한 사업활동의 가능성은 막혀 있는 상태였다.
평양은 또한 수년 동안 일본과 관계정상화 회담을 해왔다. 북한은 일관되게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요청해왔으며, 1992년과 1994년 초에 평양에서 설교한 바 있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미국인 방문객들을 환영해왔다.


10월의 기초합의안에는 평양측이 흑연형 원자로를 동결시키고 핵확산금지조약 하에서 완전한 사찰을 받는 대가로 미국, 일본, 남한을 포함하는 국가들의 컨소시움이 북한의 에너지문제 해결을 돕기 위해 경수로를 제공하기로 되어 있다. 이 컨소시움은 또한 평양측이 약 40억 달러 가격의 새 원자로를 구입할 수 있도록 장기대출과 신용거래를 연장해주기로 합의했다.
그러는 동안 미국은 북한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우해 난방용 기름을 제공할 것이며 외교관계를 단계적으로 높여갈 것이다.
1995년 초에 북한은 남한에 의존할까봐 우려하여 남한형 경수로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했지만 5월의 고위급 협상에서 무엇보다도 원자로의 이름을 새롭게 고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기초합의안은 상호불신을 가정하여 작성되었고, 따라서 양측은 합의안을 완결할 때까지 매 단계마다 합의안의 이행을 확인해야만 한다. 원자로를 건설하고 가동하려면 수년이 걸리기 때문에 최소한 2008년이 되어야 비로소 합의안이 완결될 것이다.
만약 모든 일이 잘 진행된다면, 그때까지는 미국과 북한이 마침내 완전한 외교관계를 수립할 것이며 북한의 핵 에너지 프로그램은 핵확산금지체제를 완전히 따르게 될 것이다.
원자로가 완성되기 전에 북한은 '폐기물 장소'를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에 개방해야 할 것인데, 이 사찰로 우리는 북한이 원자폭탄 생산에 충분한 양의 플루토늄을 재처리했는지 여부를 마침내 알게 될 것이다.


카터의 유익한 개입 직후에 김일성이 사망했고, 세계는 그의 아들의 권력승계가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를 지켜봤다. 비록 김정일이 김일성의 모든 자리를 이어받지는 않았고 그의 아버지 칭호였떤 수령 대신 영도자로 여전히 불리긴 하지만 권력이행의 불안정을 나타내는 징후는 없다.
북한이 1993년 10월에 합의안에 서명했을 때, 그것이 김정일의 명확한 교시였다고들 한다. 오늘날 평양의 최고지도부는 젊은 김정일을 중심으로 뭉쳐진 원로들의 집단지도체제이다.
한편, 레닌과 호치민 등을 방부 처리했던 러시아의 고위급 비밀공작반의 전문가들이 김일성의 시체를 보존하기 위해 초청되었다. 김일성의 시신은 현재 평양의 만수대 묘역에 전시되어 있다.


일단 핵위기가 해결된 다음 북한 그리고 한반도 전체는 미국언론의 관심에서 벗어났다. 백화점이 무너지거나, 한국기업이 또하나의 미국회사를 인수하거나, '정신병적인 플레이보이' 김정일이 타계한 '미치광이 아버지'의 지위를 또 하나 물려받을 때만 주목을 받을 뿐이다. 북한의 사악한 의도에 대해 수년간 떠들어대다가 결국 자신들의 판단이 완전히 틀렸음이 판명되고 나서는 침묵으로 가라앉은 미국언론에 대해 미국의 일반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평양과 서울의 언론보도를 모두 읽어온 데다 20년 동안이나 북한을 접해온 나로서는 1990년대의 황색 저널리즘을 읽는 미국인들, 특히 대다수가 한국전쟁 이후에 태어난 그들의 입장을 헤아릴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이 있다. 즉 이런 언론의 잘못된 정보가 판치는 와중에도 미국과 북한간의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몇몇 사람들이 미국과 관계개선을 하는 대가로 핵개발 계획을 포기할 것이라는 평양의 발언이 진심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결국 그들의 입장이 옳은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이들 중에는 로키펠러 재단의 앤소니 남궁, 하와이대학의 서대숙, 컬럼비아대학의 스티븐 린턴, 이책을 쓴 나 자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카네기재단의 셀리그 해리슨이 있는데, 그는 워싱턴과 평양을 맺어주는 데 관여하여 또 하나의 끔찍한 전쟁을 피하도록 도와준 가장 소중한 시민이다.


1990년대 중반이 되자 한반도의 갈등으로 이익을 얻을 강대국은 하나도 없었고, 어떤 나라도 새로운 전쟁에 관여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대부분 남북한과의 외교관계를 원했으므로, 냉전의 갈등에 따른 편가르기가 더이상 한국을 분할하지 않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남한과의 우방관계는 유지하되 정직한 중재자의 역할을 하려고 애쓰면서 마침내 남북한 양측에게 좀더 공평한 정책을 펴는 쪽으로 나아갔다.
1989년 이전 수준으로 미군병력을 유지하겠다는 공약은 서울에 대한 워싱턴의 강력한 지지를 잘 보여주지만, 미국은 더이상 남한이 북한과의 접촉속도를 정하는 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p.704~708)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1994년 위기를 극복하고 북미 대화와 합의를 위해 도움을 준 브루스 커밍스 교수와 앤소니 남궁, 서대숙, 스티븐 린턴, 셀리그 해리슨 교수 등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 1993~94년의 한반도 전쟁위기는 결국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체제인정, 대화와 협상, 평화와 공평한 외교관계를 통해 극복된 셈입니다.
그 과정에서 북한과 미국의 지도부들이 직접 대화를 통해 냉정하고 현명하게 대처함으로써 한반도의 큰 위기를 넘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미국 언론 뿐 아니라 국내 찌라시 언론도 보도하지 않는 진실...
-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가 자신의 핵 시설들을 7회에 걸쳐 정기사찰 하도록 허용했는데, 이는 냉전의 전성기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미국의 많은 신문들은 이 사실을 무시했다."
- "북한의 사악한 의도에 대해 수년간 떠들어대다가 결국 자신들의 판단이 완전히 틀렸음이 판명되고 나서는 침묵으로 가라앉은 미국언론"


○ 국내외에서 북한에 대해 감정적 증오와를 가지고 적대적으로 대하기만 해서는 전쟁위기만 조성되고 정당성 없는 정권들의 부정비리와 일방통행, 그리고 종북 공안탄압을 가리는 수단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극우보수와 군국주의자들의 배만 부르게 해주는 것이고...







61 : 햇볕정책


"김대중이 가져온 가장 광범위한 변화는 북한과 관련된 것으로서, 남북한의 정상이 1945년의 국가분단 이후 처음으로 악수를 나눈 2000년 6월 평양회담에서 절정에 달했다.
1998년 2월 취임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과 "적극적으로 화해와 협력을 추진"하겠다고 맹세하고 워싱턴 및 도쿄와의 과계를 개선하려는 평양의 시도를 지지한다고 천명했는데, 이는 이런 화해를 약간이라도 암시하기만 해도 노발대발하던 그의 전임자들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곧 북한에 보낼 대규모 식량원조의 선적을 승인하고 남북한 기업들간의 사업거래에 대한 제한을 해제하고 1998년 6월 워싱턴 방문 중에는 미국에게 대북 경제제재를 끝내줄 것을 요청함으로써 자신의 맹세를 강조했다.
김대중은 전임자들의 사실상의 정책이었던 '흡수통일'을 명시적으로 거부했거니와, 사실상 통일을 2,30년 더 연기하고 장기간의 평화 공조닉간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남한의 정책을 정했다.


양측 정부는 이제 다단계 연방제통일 과정에 서류 상으로 헌신하기로 맹세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북한은 1960년에 처음으로 연방제 안을 내놓았는데, 김대중의 통일방안 역시 좀더 연장된 연방제 기간을 요구하고 있다.
이 연방제의 첫단계는 서로 다른 체제, 국가, 군대 및 외교정책을 유지하면서 '근린협력'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두번째 단계 동안 양측은 다양한 남북한 상호연계조직을 통해 서로간의 관계를 꾸려나가다가 꽤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한 민족, 한 국가, 한 정치체제 내에 두 개의 자율적인 지역정부를 갖는 연방체제로 형식적인 통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 단계에서 연방정부는 한국의 외교, 국방 및 주요 국내정책을 운영할 것이다. 김대중은 취임사에서 북한사람들의 자부심을 존중해야 할 실질적 필요와 북한지역을 상당기간 동안 자율적 지역정부 아래에서 따로 통치해야 할 필요성을 언급했다.
세번째 단계는 단일한 중앙정부를 가진 진정한 통일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민주적 절차를 통해 국민의 동의를 얻어 진행될 것이다.


북한이 김대중의 결심을 시험하느라 1년을 기다리는 동안, 잠수함 두 척과 침투간첩의 시신 여러 구가 남한 해안에 떠오르면서 강경파가 남북한 관계를 중단시키려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타났다. 그러나 1999년 중반에 접어들면서 평양이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남한측 입장의 중요한 변화로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워싱턴에 대한 북한이 태도 역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오랫동안 미국을 남한에서 몰아내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으나, 이제 적어도 몇몇 북한 지도자들은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여 변화된 국제 권력관계, 특히 강력한 일본과 강력한 중국에 대처하고 평양이 현재의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였다.
1998년 7월, 미군은 통일 이후에도 한국에 주둔할 것이라고 선언한 당시 미국 국방장관 윌리엄 코언은 북한측의 이런 견해를 거의 그대로 되풀이하는 듯이 보인다.


1998년 8월 말, 북한이 장거리 2단계 미사일을 일본 상공 위로 쏘았다고 주장하는 민신 교란성 언론 보도가 마구 쏟아져나오자 도쿄는, 마치 미사일이 도쿄의 가로수를 가까스로 피해 가기나 한 듯 사실상의 공황상태에 휩싸였다. 그러나 북한의 언론은 몇주 동안 거의 정권창설 50주년 기념식 준비만을 보도했다.
그렇지만 평양은 3단계 로켓을 통해 '김일성 찬가'의 발신음을 내는 인공위성을 궤도에 쏘아올렸다고 발표했다. 몇주 후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그것이 정말 50주년 기념식을 위한 불꽃놀이였는데, 다만 인공위성이 궤도에 도달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워싱턴에서 일제히 터져나오는 소란스런 반대와 북한의 위협에 대한 미국 언론매체의 야단법석(심지어 한 보도는 평양이 적들에게 천연두 바이러스를 퍼뜨릴 지 모른다고까지 했다.)에도 불구하고, 국무부의 중간관리들은 다양한 의제에 관한 장기간의 토론을 통해 북한과 하나하나 끈기있게 합의안을 협상해왔다.
그들은 또한 1998년 가을 한반도 정책에 관한 6개월간의 재검토에 착수했는데, 이는 미국의 정책방향을 현저히 바꾸어놓았고 1999년 6월 윌리엄 페리의 평양 파견에서 절정에 달했다.
페리 박사는 1999년 10월 마침내 자신의 보고서와 이 정책 재검토의 공개본을 내놓았는데, 그 골자는 앞으로 상당기간 동안 두 개의 한국의 공존에 입각한 대응정책과, 50년 동안 지속된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의 점진적인 해체, 양측간의 외교관계 심화, 북한에 대한 실질적인 원조계획 등이었다.
북한은 그들대로 1994년 합의안을 계속 준수하고 미사일 실험발사를 중지하며, 중동에 대한 미사일 판매를 비롯한 미사일 계획의 종식을 놓고 미국과 대화를 계속한다는 데에 동의했다.
이것이 6월에 열릴 평양 정상회담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김대중은 또한 만약 워싱턴이 평양에 대해 대결보다는 대응을 추구한다면 북한도 주한 미군의 계속적 주둔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정당하게 믿게 되었다. 미군은 남북한 접경, 즉 DMZ를 감시하면서 남한의 우월한 군사력이 북한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보장하며 일본과 중국을 계속 견제하는 데 여전히 유용할 것이다.
김정일은 정상회담에서 김대중에게 주한미군의 계속적인 주둔에 꼭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직접 말함으로써 이런 견해를 확인했다. 이런 의미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제안은 50년 만에 처음으로 기존의 동북아시아 안보구조 내에서 남북한의 화해를 성취하려는 진지한 시도였다.


이 정상회담과 미국 국무부의 한반도정책 재검토가 한국, 미국 그리고 세계의 이해관계가 크게 걸려 있는 북한 미사일 협상을 개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북한은 300마일 이상의 비행거리를 가진 모든 미사일의 제조와 배치, 국제판매를 기꺼이 보류할 의사가 있었다.
만약 클린턴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평양방문이라는 호의를 베풀 용의가 있었더라면, 김정일은 북한의 모든 미사일 비행거리를 최고 180마일로 제한할(그리하여 이웃 일본이 심각하게 느끼는 위협을 제거할)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에도 가입했을 것이라고 미국측 협상가들은 확신했다. 미국은 그 대가로 10억 달러의 식량원조를 북한정권에게 제공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북한을 MCTR에 가입시키는 데는 10억 달러와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비용이 들리라는 것이었다. 부시 행정부 대변인이 특히 북한을 겨냥한 것이라고 말한 국가미사일방위(NMD)에는 이미 600억 달러가 들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평양에 가고 싶어했으며 실제로 그 휘하의 한반도 협상가들은 2000년 11월 몇주 간을 평양에서 보내기 위해 짐을 꾸렸다. 그러나 클린턴의 국가안보 보좌관을 지낸 쌘디 버거가 나중에 말했듯이 대통령이 "중대한 헌법상의 위기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11월의 상황에서 미국을 떠난다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대법원이 개입하여 조지 부시를 2000년 대통령 선거의 당선자로 확정한 후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미국의 새 행정부는 한국에서 실질적인 진전이 있었는가 아닌가를 놓고 곧 내부갈들이 벌어졌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3월 외국지도자로서 처음으로 부시를 만나기 위해 백악관에 모습을 나타내기 하루 전, 국무장관 콜린 파월은 기자들에게 북한과 미사일 폐기 협상을 추진함에 있어서 클린턴 행정부가 해왔던 일을 자신이 그대로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곧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과 오벌 오피스(백악관) 회담에서 취한 강경노선에 발목이 잡혀 자신의 말을 최소해야만 했으니, 그날의 오벌 오피스 회담은 어느 모로 보나 외교적 재앙이었다.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직후 김대중은 북한 지도자의 서울 답방이 2001년 4월 내지 5월에 성사되어 이전 정상회담의 후속회담이 열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은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그의 보좌관들은 회담이 당혹스러웠다고 공개적으로 말했으며 사적으로는 부시를 욕했다.
서울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던 장관급 회담을 평양이 취소하면서 다가오는 남북정상회담과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돌연 심각한 침체상태에 빠졌다.


김대중의 방문이 있은 지 몇달 후, 미국 행정부가 어쨎든 북한과 대화를 나눌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을 때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입장을 뒤집은 듯이 보였다.
신문들은 부시 전 대통령 시절에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도널드 그레그의 정책문서가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가 북한문제에 대한 새 대통령의 태도를 바꾸어놓았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워싱턴과 평양 사이에는 아직 아무런 중요한 접촉도 일어나지 않았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는 북한에 대한 개방이 민주당과 공화당 양측으로부터 지지를 받는다는 것이 분명했으며, 공화당인 그레그는 열성적인 지지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김대중이 지난 몇년 동안 중도 및 우파 공화돵 의원들(예컨대 해리티지 재단의 몇몇 보수적 인사들)을 공들여 구애한 것이 그의 임기 말년에, 특히 북한과의 화해를 진전시키는 면에서, 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분명치 않다.
부시 행정부와 공화담의 호감은 오래된 지배집단, 즉 전두환, 노태우, 박정희 등의 장군들의 정당(즉 한나라당) 쪽에 기울고 있는데, 이 당은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권력으로의 복귀를 희망한다. 이런 전망과 공화당 우파 사이에서 감지되는 북한에 대한 경멸로 말미암아 북한과의 화해를 약간이라도 진전시키는 일조차 어렵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지속적이고 끈기있는 정책으로 한국전쟁 종전 이후의 어떤 남한 대통령이나 미국 대통령보다 대북정책을 바꾸는 데 많은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시 집권 이후의 한국에 대한 미국의 역행정책은 워싱턴이 여전히 한반도의 외교를 지배하는 정도를 보여주는 불행한 사례이기도 하다.


미국이 한반도의 평화에 대해, 그리고 한반도의 갈등이 시작된 이래 지난 50년 동안 이 갈들을 해결하지 못한 데 대해, 여러 모로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시발점이다.
미국이 세계 어디에서도 갈등 당사자들 가운에 이렇게 한쪽 편만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다른 한쪽과는 그토록 최소한의 접촉밖에 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또한 세계 어디에서도 미국이 한국에서 계속 그렇게 하듯이 다른 주권국가의 군대를 직접 지휘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클린턴 행정부가 남한을 계속 지지하는 한편 북한과의 대화나 무역을 확대하는 데 주도권을 잡아, 한반도의 긴장을 외교를 통해 완화시키려는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 1994년 10월의 기초 합의안은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의 주요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한 최초의 사례였다.
모든 당사자가 이 합의안을 성실히 이행한다면, 분단되었으되 평화로운 한반도가 도래할 것이다. 이는 또한 장차 통일한국을 향한 진전의 전망을 담보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것의 귀추는 궁극적으로는 남북의 한국인들 자신과 그들의 아량과 화해의 능력에 달려 있다."(p.709~713)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커밍스 교수가 한국 밖에서 '햇볕정책'과 1994년 북미 기본합의서의 이행과정을 평가하는 내용에 주목해야 합니다. 미국 내 무책임한 극우신문과 국내 냉전수구세력의 홍보지인 조중동 찌라시들이 햇볕정책과 6.15 선언을 아무리 헐뜯어 보았자 외국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평가는 이렇듯 극찬과 긍정 일색입니다.


○ 이번 단락을 자세히 읽어보면, 햇볕정책과 6.15 선언 그리고 1994년 북미 기본합의서가 의미하는 "평화적 외교적 위기 해결"을 망가뜨리고 전쟁위기와 갈등을 불러일으킨 가장 중요한 책임은 미국, 즉 부시 행정부입니다.
부시 행정부 내에는 냉전적 극우보수주의자들이 도사리고 있고, 그 배후에는 국방부 전쟁광 똥별들과 군수업자들이 버티고 있는 셈입니다.
이들을 이겨내는 유일한 힘은 한반도 내에 있고, 특히 남한 내에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리더쉽과 남북 화해평화세력의 집결입니다. '종북 공세'에 쪼그라드는 정치인은 유권자들의 삶과 민주주의의 진전, 평화와 남북화해 그리고 통일에 아무런 일익도 담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6.15 정삼회담에서 "김정일은 정상회담에서 김대중에게 주한미군의 계속적인 주둔에 꼭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직접 말"했다는 것입니다. 통합진보당의 "주한미군 (단계적) 철수" 강령이 '종북'의 이유이고 반국가단체의 입장을 지지한다는 박근혜-새누리 정권의 억지는 사실관계도 모르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마타도어인 셈입니다.



○ "미국이 한반도의 평화에 대해, 그리고 한반도의 갈등이 시작된 이래 지난 50년 동안 이 갈들을 해결하지 못한 데 대해, 여러 모로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시발점이다.
미국이 세계 어디에서도 갈등 당사자들 가운에 이렇게 한쪽 편만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다른 한쪽과는 그토록 최소한의 접촉밖에 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또한 세계 어디에서도 미국이 한국에서 계속 그렇게 하듯이 다른 주권국가의 군대를 직접 지휘하지는 않는다."

=> 미국은 베트남이나 중국과도 전쟁을 치른 바 있으나 결국 화해하고 외교관계를 복원했습니다. 미국이, 특히 냉전수구세력이 북한과는 유독 위기와 갈등을 유지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미국 내부에도 있지만, 역으로 남한 내의 친일파 후예들, 쿠테타 잔존세력들, 냉전과 반북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는 세력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62 : 남북의 통일정책


"역사학자란 상상할 수 있을 뿐인 미래를 예측하느라 애쓰지 않고 과거를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히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그 과거는 한국이 어떻게 다시 통일될 것인지에 관해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국의 분단은 천년에 한번 꼴로 일어났으며 지금도 분단해결의 중요한 징후들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전이 끝난 후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한국인 대다수에게 통일 곧 되리라는 생각을 북돋아주었다.
그러면 하나의 민족으로서 한국의 운명에 중차대한 이 핵심적인 문제에 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남북한 정부는 모두 자신만을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인 주권적 실체라고 규정함으로써 상대방을 이단의 지위로 내몰았다.
1940년대 이래로 남한은 북한을 대한민국에 반하는 불법적인 조직체(즉, 국가가 아니라 반국가조직)로 규정했으며, 북쪽의 도들을 위한 예비행정조직을 유지해왔고, 1945년 당시에 정했던 50 대 50의 지역적 반분이 아니라 인구비례 대표제에 입각한 통일방식을 법으로 제정했다. 이런 식이면 정치적 통일은 간단할 것이다. 국회의원의 1/3을 채우는 선거를 북한에서 시행하면 그만인 것이다.
서울측은 또한 어떤 방식의 통일이든 미국과 남한의 안보유대의 유지를 전제했는데, 이는 평양과 워싱턴 사이의 적대감이 지속되면 남북한의 관계가 깊어질 수 없음을 확인하는 대목이다. 전지구적인 양극 갈등이 지속되는 한, 남한으로서는 미국의 방위체제에 묶여 있는 것이 북한과의 진지한 협상을 통해 얻을 수도 있는 불확실한 성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수년간 남한의 공식 정책은 통일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미래까지는 두 한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독일식의 해빙을 시도하는 것이다.
수십 년에 걸친 낮은 수준의 소규모 방문(특히, 이산가족들의 방문)을 교환하고 교역을 비롯한 교류들을 점진적으로 증가시키자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측은 남북관계의 신중한 개선과 신뢰구축 조처들을 강조했따.
북방정책은 1980년대 말에 국제환경이 남한에 유리하게 변화된 이후에야 가능해졌으며, 통일에 대해 뭔가 중요한 시도가 있어야 한다는 젊은 세대의 점진적 요구에 대응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나타났다.


서방의 사회주의국가들이 사라지자 서울의 공식적인 입장은 독일식 모델에 입각하여 북한의 붕괴에 대비하여 북한이 붕괴한 이후 남한이 이를 흡수통합 한다는 것이었다.
1990년대에는 한반도 통일의 '독일식 모델'에 관한 글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호네커 정권이 무너진 이후의 독일통일을 살펴보려고 여러 연구팀이 독일로 날아갔고, 통일과정에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는지, 따라서 북한을 한반도 나머지 지역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 것인지에 관한 걱정스러운 이야기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한편 남한 정부는 대북사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시켜 남한의 주요 기업들이 방묵(때로는 거래)을 했다. 서울측은 민간인의 방문에 대해서는 단단히 고삐를 잡고 있는데, 정부의 허가 없이 북한을 방문하면 그 사람이 아무리 유명인사라고 해도 감옥에 보내겠다는 위협을 계속했다.
예를 들어, 고 문익환 목사는 1989년에 평양을 방문한 후 몇 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1995년에는 그의 미망인이 김일성 사망 1주기 기념행사 때 김일성 묘를 방문한 후 수감되었다.


남한의 이러한 핵심 정책들로 인해 통일문제는 대체로 평양측에 넘겨졌는데, 평양측은 한국인들 대다수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는 통일이라는 가치를 소리 높여 옹호하는 선전술을 충분히 활용해왔다.
1948년 봄에 '통일회담'을 개최하여 김규식과 같은 온건파와 김구와 같은 우익 민족주의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을 때부터 북한은 자신들이 미 제국주의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들인 남한 '분단주의자들'의 무고한 희생자라고 밝혀왔다.
1950년에 북한은 나라를 통일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궁극적인 방책을 취했고, 이 경험으로 말미암아 거의 모든 외부의 관찰자들은 평양이 끝없이 반복해서 되뇌는 '평화통일'의 공식을 불신하게 되었다.


전쟁과 내부의 재건이 완료된 1960년에 김일성은 한 민족, 한 국가, 한 국기 아래에 두 체제를 유지하는 연방제 공화국안을 제의했다.
그는 이 구상을 70년대 후반에 다시 되살렸고, 이것에 관해 죽을 때까지 되풀이 언급했다. 이것이 바로 '고려연방공화국'인데, 이런 명칭으로써 통일된 나라를 '한국'으로 부를지 '조선'으로 부를지의 문제를 해결한 셈이었다.(물론 북한은 진정으로 '한반도'를 통일시킨 최초의 국가를 고려라고 파악하면서, 스스로 신라가 아닌 고려의 후손이라고 항상 내세웠다.)
연방제 안은 실현될 수 없는 고리를 분명히 내장하고 있었다. 가령 한반도에 외국군대나 핵무기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서울측 통일공식의 핵심에 도전하는 대목인 것이다. 냉전시대에는 고려연방이 독립적이고 중립적이며 비동맹의 일원인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최근에는 북한이 연방제가 실현되기만 한다면 고려연방이 미국과 동맹을 맺는 방안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냉전시대 이후 통일한국의 외교는 실제로 "중국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일본과 연합하여, 미국과 동맹"을 맺으라는, 1880년의 환쭌셴의 권고를 다시 거론할 가능성이 높다.


수십 년간 북한은 통일문제에 관한 국내외의 회의들을 개최하면서 무수한 회의록과 수천 권까지는 안되더라도 수백 권의 서적을 양산해냈지만, 남한이 북한의 연방제 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은 결코 크지 않다.
그 대신, 평양은 이 제안이 통일 당사자로서 북한의 진실성을 강화시키고, 동시에 한국이 진정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전통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생각들(외래문물에 더럽혀지지 않고, 순결하고 고결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시 온전한 하나가 되는 것)을 활용하는 데 유익하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평양측의 외국동맹국들과 남한 내의 북한 지지자들조차 연방제에 관한 모든 논의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요란한 선전문구에 깜짝 놀라게 되는데, 모든 남반부 사람들의 자애로운 어버이 수령의 품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은 나름대로 한국이 어떻게 통일될 것인지에 관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최선의 것이 이미 1960년에 제안되기도 했다.
한때 동아시아 역사학 교수였던 몬태나 출신의 맨스필드 민주당 상원의원은 이승만 정권이 타도된 이후, 한국이 강대국들의 협약 아래 중립화되면서 한국 내 모든 외국군이 철수하고 남북한과 강대국 후원세력들 간에 맺어진 방위조약들을 철폐하는 안을 제시했다.
1955년 오스트리아의 성공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에 기반한 이 제안은 한국의 맥락에서는 1945년이 적기인 구상이었다. 이 안은 내전이 일어난 후 양극화 갈들이 정점에 달하는 시대에는 작동할 수 없었다.
앞서 보았듯이, 키신저는 한국의 딜레마를 타개하기 위해 남북한 및 관련 4강(미국, 소련, 중국, 일본)으로 구성된 6자회담을 제안한 적이 있다. '4+2' 시나리오로 알려진 이 제안을 북한측은 줄곧 비난해 왔는데, 그들의 주장으로는 이 안이 한국의 운명을 강대국들에게 내맡기고, 한국문제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은근슬쩍 되살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이유는 키신저 시대에 와서는 평양이 북경과 모스크바로부터 충분히 지원을 동시에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통일된 한국은 세계무대세어 강력한 경제적 경쟁자이자 동아시아에서는 하나의 정치세력이 될 것이다. 남북한의 통합경제가 재능있고 잘 교육된 국민들과 결합되면 머잖아 일본의 경쟁자로 부상할 것이 틀림없다.
이런 이유로 말미암아 중국이 남북한을 모두 승인하고 양측 사이에서 상대적인 균형을 취하려고 노력하는 데 반해 일본 지도자들(적어도 자민당을 통해 집권한 인물들)은 한국통일을 어둡게 보아왔고, 과거에는 거의 전적으로 서울편에 서서 통일을 적극적으로 방해한 것이다.
일본 시민 대다수는 십중팔구 프랑스가 분단독일을 바라봤던 방식(즉 "나는 독일이 너무 좋기 때문에 독일이 둘이나 있는 것이 행복하다" ?? 헐!!)으로 한국을 보고 있을 것이다. 반면에 미국은 워싱턴과 도쿄 또는 워싱턴과 북경 간의 경쟁이 미래에 증대됨에 따라 우호적인 통일한국을 자기편에 두는 것이 유익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따.
이 가능성이야말로, 북한이 빠른 식에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증거와 함께, 클린턴 행정부가 평양과의 장기간에 걸친 어려운 외교관계를 기꺼이 추구하는 바탕이 되었다."(p.714~718)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커밍스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북한은 시대가 변하고 국제관계가 변함에 따라 대미 정책, 대남 정책, 통일 정책도 변화시키고 있는 반면, 남한은 박정희 이후로 거의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변화시킬 지 여부를 고민하는 흔적도 없고 커밍스 교수 말대로 "젊은 세대의 점진적 요구에 대응하는 하나의 방식"처럼 주권자인 국민들이나 청년학생들이 남북화해와 통일의 요구를 높여가면 마지못해 대응하는 식으로 밖에 사고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미국과 미군을 신주단지 모시듯 붙잡고 늘어지는 것을 보면, 새누리당이나 친일파 후예들 뿐 아니라 민주당이나 안철수까지 '사대주의'의 볼모가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 커밍스 교수의 글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시사점 중의 하나는, 앞으로 남북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추구할 때 필요한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국가주권을 확보하고 행사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과 그렇다면 아무리 살펴보아도 처음부터 국가주권 의지가 보이지 남한 내 기득권자들, 냉전수구 정치세력, 찌라시 언론, 사대주의 정치인들을 제거하고 도태시켜야 한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 커밍스 교수가 한반도 근현대사를 분석함에 있어 놓치고 있는 관점 중의 하나가 바로 남한 내 민중들의 입장과 처지입니다. 남한 내 대다수 국민들의 입장에서 분단체제와 반북이데올로기, 대미 종속성과 국가주권 유린은 속칭 '빨갱이' '종북'이라는 선동적인 구호와 엮이면서 노동자 농민 빈민 서민 청년 학생 여성 장애인들의 헌법적 권리 요구와 저항권을 탄압하는 '이념 무기'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남한인들에게 핵심적으로 중요한 국가주권 회복,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 주거권, 노동권, 생존권, 집회 시위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기초적 자유가 침해당하는 데 있어 분단체제와 대미 종속체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점입니다.







63 : 붕괴와 흡수라는 망상


○ 다음 회차가 마지막입니다. 이제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한국사 연구"에 대한 소개가 거의 끝나가네요..^^



"외국 관찰자들이 1990년대의 한국에 가장 적절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독일식 통일 모델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잘못된 모델이다.


한국은 수백만의 동포를 죽인 끔찍한 내전을 겪었다는 것을 잊지 못한다는 점에서 독일과는 다르다.
그토록 피로 얼룩진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남한과 싸운 인민군 사령관으로서는 대한민국이 무슨 방법으로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누르는 사태를 허용할 것이라고는 믿기 어렵다.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1989년에 36만 명의 소련병력을 자국 영토 내에 두었던 반면, 북한에는 1948년 이후 한 명의 소련 병사도 두지 않았다.
동독은 고르바쵸프가 그의 선임자들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붕괴한 것이다. 즉 그는 호네커 정권을 구하려고 소련병력을 동원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병영 내에 묶어두었던 것이다. 고르바쵸프는 평양에 제공하다 결국은 중단한 비교적 소량의 원조 이외에는 영향력을 구사할 근거가 없었다.


남한은 자신의 위상을 서독에 비교하면서 우쭐해하기도 한다.
많은 동독인들은 서독에서 자신들의 사회주의 이상에 근접한 것들, 예를 들어 민주적인 정치, 사회안전망, 광범위한 노동조합(미국의 15%나 그 비슷한 숫자의 대한민국의 노조조직률에 비해 서독의 그것은 약 40%이다, 조기에 실시되는 유리한 퇴직연금, 건전한 공중질서와 강력한 시민사회 등을 볼 수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북한 주민들은 남한과 합쳐지면 이런 것들을 거의 아니 전혀 기대할 수 없으며, 오히려 남한 기업들이 정하는 조건 아래 세계의 산업국가 가운데 가장 긴 노동시간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서울측 지도자들은 북한붕괴에 대한 희망(또는 두려움)이 잦아들고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서 통일문제에 관한 일정한 지혜를 갖게 되었다.
이런 이해가 가능해진 부분적인 이유는 북한이 세계경제와의 상호작용에 대한 자신의 시각과 정책을 개혁하려고 그간 상당히 노력한 덕택인데, 이것은 남한으로서는 과거 20년 동안 동아시아의 지배적인 경향(경제적 교역이 정치적 장벽을 일소하는 경향)이 남북한 화해의 길에 놓인 장애물을 계속 제거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북한의 사회주의체제가 탈냉전세계의 심한 국제압력 때문에 붕괴할 수밖에 없더라도 이것이 반드시 북한의 정치체제가 해체되거나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십중팔구 공산당과 정부의 기관요원들은 자신들이 예전부터 민족주의자였다고 선언할 것이며(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다. 만약 그러한 상황이 전개되면 북한의 방대한 군부가 관건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권좌에서 물러나는 쪽이 군부일 가능성도 물론 있지만, 적어도 싸우지 않고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남한이나 북한의 정치 엘리트들이 통일이라는 좀더 큰 목적을 위해 어떤 중요한 이익을 기꺼이 희생할 것이라는 증거는 아직 거의 없다.
백낙청이 아주 설득력 있게 분석한 '분단체제'(New Left Review 19923년 1~2월 기고글)는 궁극적으로 그리고 사후에 이르기까지 제로섬의 정치투쟁에 기반한 것인데, 이 투쟁에서 분단의 양측은 권력의 포기란 곧 정치범으로서의 재판과 처단을, 그리고 상대방의 업적을 삭제하고 그 죄과는 부각하는 식의 철저한 역사 고쳐쓰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예상된다.
민족분단 이후 50년 이상이 경과하면서, 반세기 동안 여러 세대들에 의해 다져진 정치적 응집력이 생겨났다. 이곳이 한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곧 가족의 응징력을 뜻한다. 가계가 모든 것인 이 나라에서 자손에게 패배를 유산으로 물려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국민족의 일원으로서는 궁극적인 죽음을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북한의 엘리트들은 원래 만주지역의 유격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이 집단은 평양 인근 대성산 꼭대기의 공공묘역에 들어선 수백 개의 청동 흉상으로 시각화, 실체화되어 있다.
한때 유격대원들이었던 그들은 이제 모두 묻혔거나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자손과 친척 무엇보다 체제에 대한 그들의 완전한 통제력을 통해 정치체제에 깊이 뿌리내렸다. 이제 특권적인 세대는 김정일 세대로서, 이들은 지난 25년 동안 '경애하는 지도자'의 권력승계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온갖 특권을 상속받은 40, 50대의 방대한 관리, 엘리트 계층이다.
그 가운데는 초창기 유격대의 아들들과 딸들이 아주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15세기에 이성계의 협력자와 공신들이 즉석에서 조선왕조의 귀족계층을 형성한 것과 똑같이 북한의 권력 엘리트를 형성하고 있다.
1644년 이후의 명나라 지지파들이나 19세기 말의 홍재학과 같은 엘리트들과 마찬가지로, 평양의 권력 엘리트들은 과거의 원칙들과 정도(이 경우 이제는 세상 어디서도 믿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사회주의를 뜻하지만, 명나라 지지파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에 대한 충성으로 지난 20년간 조국에 불어닥친 거센 바람을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이런 판단은 그들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기 십상이고, 따라서 그들은 비슷한 운명을 맞게 될 공산이 크다.


남한에서 이와 유사한 계층으로는 첫째, 이제 새로운 형태의 물질적 풍요 속에 안착하여 문화, 교육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예전의 지주 엘리트들, 둘째, 1961년의 쿠테타 이래 줄곧 특혜를 받아온 군부세대들, 특히 한국의 영남지역 출신으로 투자란 투자는 모두 그쪽 지역에만 퍼부은 'TK'집단, 셋재 날로 성장하고 폭넓어지는 중산층(김정일 세대와 유사하지만 훨씬 폭이 넓은)을 들 수 있다.
중산층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동족상잔 전쟁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현재의 북한 정권이 한참 개선된다고 해도 그런 정치체제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이 수용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자신들과 유사한 계급이 북한 내에서 성장하여, 마침내 이들 계급이 구태의연한 프롤레타이라의 이름으로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는 북한정권의 속박을 부수려고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는 그날까지 기다리는 편이 이들 남한 중산층의 이익에 훨씬 더 부합하다.
십중팔구 가장 고집스러운 분단주의자들은 북한에서는 만주지역 유격대 출신의 핵심 가족들 그리고 남한에서는 TK 군국주의자들의 핵심 구성원들일 것이다. 이들 양측에게는 투쟁을 포기하는 것이 곧 상대측에 의한 전멸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된다.
김영삼이 1995년 가을에 TK집단의 최고 지도자들에게 가한 공격은 남한 중산층의 완전한 정치적 승리이자 아직도 불확실한 남한 민주주의 운동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김영삼은 1960년 이후 첫 민간인 대통령으로서, 이전의 군사독재자 전두환과 노태우를 반란교사 및 부패 혐의로 재판에 회부한 용기로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자리를 점하게 될 것이다.
전두환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노태우 역시 장기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감옥에서 오랫동안 복역한 후, 양자 모두 1998년 초 김대중의 관용으로 사면되었다. 그 당시까지의 세계의 다른 군사독재와 달리 남한은 과거지사를 과거지사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두 전직 대통령은 결국 기념비적인 뇌물수수와 국가에 대한 반역 혐의로 기소되어 감옥에 가고 말았다.
하지만 이 점을 제외하면 김영삼은, 집권 말기에 여실히 보여주었듯이, 모든 면에서 보수주의자이자 전후 남한체제의 산물이었다. 만천하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부정자금 스캔들(1980년대에 대기업 그룹들은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15억 달러 이상을 제공했다.)은 물론 지배집단 내부의 불화와 전두환과 노태우의 재판 등은 국가와 재벌 그룹들을 매우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했고, 정치에서의 군부의 역할에 명백히 종지부를 찍게 만들었다.
이것은 한국의 민주주의에는 좋은 계기였다.


그러나 이는 엘리트적인 계기인만큼, 한국의 민주주의가 수백만 민중의 희생을 자양분 삼아 밑에서 위로 올라운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진다.
비록 한국 민중이 완벽한 민주주의 체제를 세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주목할 만한 시민사회를 건설함으로써 아시아적 문화와 가치에 관한 흔한 상투형이 진실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김대중의 당선과 이후 그의 개혁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굳건히 만들었고 그럼으로써 지난 50년간 민주주의적 통치를 위해 싸워온 한국의 대중들의 정당성을 입증했다.
하지만 오늘도 북한 지도자들이 그들의 체제를 민주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은 거의 없으며, 그들의 그런 의도를 가질 때까지 우리는 북한의 대중이 미래에 어떤 역할을 할지 알 길이 거의 없다.


파멸적인 전쟁을 논외로 한다면, 이 모든 이유들 때문에 나는 다가오는 수년 동안 남북의 지역 주권체가(어쩌면 하나의 국호와 하나의 국기 아래) 상당기간 지속되고 나서야 통일한국이 탄생되리라 생각한다.
정치 엘리트들이 서울과 평양에서 권력에 매달리도록 내버려두고, 그러는 동안에 민간의 인적교류, 통상, 관광, 공통의 민족유산 공유 등을 정치분야보다 훨씬 앞서서 추진하도록 하자. 정치는 한국통일의 마지막 국면이 되어야 하고 또(내 생각에는) 그렇게 될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남한과 북한의 지도자들처럼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적에게 불과 유황을 퍼붓는 것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또한 그 예언자들은 파괴 뒤의 용서와 화해(살아야 할 때가 있고 죽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의 가치도 배웠다.
지금은 화해와 재결합을 할 때이니, 단절되고 부서진 한국의 역사가 다시 촘촘히 이어져 완전하게 될 수 있도록, 그리하여 20세기가 지나간 40세기의 역사 가운데 그저 하나의 세기(불행한 재난의 세기이지만 이제는 완전히 끝나버린 세기)라는 원래의 위치를 찾을 수 있도록 하자."(p.718~723)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북한의 체제붕괴에 이은 흡수통일"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망상인지 커밍스 교수가 잘 지적해 주었네요. 독일과는 판이하게 다른 한반도의 역사적 과정을 고려하지 않는 단순한 사고방식이 허무맹랑한 미래를 예측하게 만드는 주범입니다.
2014년 현재 절반 이상의 국민이 비정규직, 시간제, 실업자이고 자살율 등 최악의 국가를 자랑하는 수치가 넘쳐나는 남한이 북한보다 어떤 면에서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저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
수치상으로만 비교할 때 나타나는 거짓말과 허위들... 일인당 GDP가 최하위에 해당하는 방글라데시나 네팔의 국민행복지수가 세계최고 수준이라는 사실에 대해 느끼는 것이 없는 이들은 최악의 양극화와 빈곤화로 치닫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공범에 해당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 위 문장에서 북한에 대한 커밍스 교수의 분석과 판단은 제가 평가할 만한 자료와 정보가 없어서 그의 의견으로 존중할 수밖에 없지만, 남한에 대한 커밍스 교수의 분석과 판단은 거의 대부분 동의합니다.

다만, 2000년대 중반에 재판을 발행했던 이 책에서 10년간의 민주정부가 종료된 후 이명박 정권 때부터 나타난 영남패권주의와 정치군부의 재등장, 친일 친미 세력의 역사 부정과 민주주의의 후퇴, 최악의 양극화 등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 "지금은 화해와 재결합을 할 때"라는 향후 통일을 향한 발걸음에 대한 커밍스 교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존중합니다.
그럼에도 그 방향으로 추진하기 위한 "민간의 인적교류, 통상, 관광, 공통의 민족유산 공유 등"을 새누리당 패거리들, 조중동 종편 찌라시, 정치군부 등 남한의 극우세력, 그리고 결정적으로 남한을 군사정치외교적으로 강력하게 장학하면서 통제하는 미국/일본 등 해외 극우세력이 방해하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커밍스 교수가 지적하지 않는 것은 크게 유감입니다.







64 : 결론


○ 마지막 글입니다. 지금까지 오랜 기간 계속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사 연구에서 인상깊은 대목"을 읽어주신 얼벗 여러분께 감사하단 말씀 드립니다...^^


"20세기가 끝나가면서 한국인들은 어느 정도 차분하게 식민지, 정변, 전쟁, 정치적 분쟁, 이데올로기적 분열, 사회적 소요, 좌충우돌의 경제성장을 되돌아볼 수 있다.
역사의 간지 덕분에 한국인들은 끊임없는 위기의 이번 세기를, 퍼씨벌 로월이나 앵거스 해밀튼 같이 뛰어난 관찰력을 지닌 이들을 제외한 다른 어떤 19세기의 외국인들이 예언한 것보다는 훨씬 더 잘 끝낼 수 있었다. 그들은 내부의 쇠퇴와 외국의 강탈로 빼앗겼던 그들의 세계적 위상을 되찾았지만, 이전과는 다른 기반에서 서게 되었다.
한국은 더이상 유교적 덕과 통치술이 빼어난 도(道)의 나라가 아니라 급속한 산업성장, 전속력으로 치달은 근대화, 세계정상급 인재의 화신이 되었다.


우리는 홍재학과 같은 척사파들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무어라 말할지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발언을 하는 척사파들은 아직도 많이 있다. 즉, 한국인이 세계를 얻고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이득이 있는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며 서해 건너편에 이웃한 중화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하여 세상 모든 이들이 열심히 하고 있는 일, 즉 부유하게 되려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고 어느 누구보다도 이 일을 잘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계를 놀라게 한 남한의 기록적인 성장이 이 나라를 자신의 진정한 양지의 자리로 끌어가기에 족하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한국은 여전히 분단상태인데, 이는 한국이 통일된 경우에 비하면 세계에서 훨씬 적은 비중을 하지하며, 훨씬 약하고 쉽게 공격받을 수 있음을 뜻한다.
남북한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한국은 여전히 자신과 그리고 한국 근대사의 궁극적인 목표들과 씨름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50년을 넘어선 지금에도 거대한 병력이 언제라도 싸울 수 있는 태세로 대치하고 있다. 남한이 그 지도자들의 표현대로 "국경 없는 세계"의 방향으로 진화해왔다면, 북한은 여전히 척사파적 방식이라는 특이한 형태로 남아 있다.
예전의 한국이 중국의 유교를 빌려왔듯이 서구의 사회주의를 빌려온 북한은 이제 명나라가 망한 후에도 명나라에 충성했던 사람들이나 망국의 문턱에서 최익현이 취한 입장, "머리꼭대기의 상투 하나가 하늘 아래 모든 화살의 유일한 표적"인 상태가 되어버렸다.


한국은 잘 알려진 나라가 아니며, 세계는 이제 한국인들의 재능을 발견하고 있을 따름이다.
에스파이나의 철학자 오르떼가 이 가세뜨(Ortga y Gasset)는 "국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그 나라의 위대한 사람들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보통사람들의 위상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그리고 한반도의 남북 어디에 있든, 한국인들은 대단한 가족애와 교육의 미덕에 대한 놀라운 믿음을 지닌, 기백이 넘치고 근면한 도덕적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지도자로부터 좀더 나은 대접을 받아 마땅하고, 반세기 동안 한국인들의 삶에 깊숙이 관여해왔으면서도 아직도 한국인들을 모르는 미국이라는 나라로부터 여태껏 받아온 대접보다는 더 나은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갈등과 혼란의 세기도 만약 통일된 한국이 한국인들이 말하는 그런 자유를 가질 수 있다면, 여전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 자유는 하나의 국가로서의 자유, 그 국민이 자기가 원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자유이다.
미국인들은 그들의 자유가 전쟁과 혁명의 와중에서 탄생되어 파멸적인 내전을 통해 완성되었음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토크빌은 자유와 갈등의 관계를 이렇게 보았다. "자유는 일반적으로 격변 속에서 확립되고 내란에 의해 완성된다. 그리고 자유의 은총은 그 자유가 낡아버리기 전에는 충분히 깨닫지 못한다."
이제 "내란에 의해 완성된" 자유를 지닌, 통일되고 당당하고 근대적인 한국을 상상해볼 때이다."(p.723~725)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방대한 연구 결과에 비해, 커밍스 교수가 내리는 결론은 다분히 평범하면서도 현실적입니다.
마지막 단락에서 '내전'이 같은 민족 내지 국가의 시민들 사이에서 의미하는 바를 다시금 강조하는 부분이 인상적이기는 합니다.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 분단과 한국전쟁을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하는 냉전수구세력 뿐만 아니라 일정하게 국내외 역사와 사회학을 배웠다는 지식인들, 깨어있는 시민들까지도 한국전쟁이라는 내전을 통해 근현대사 속에서 남북관계의 성격과 미래 방향을 숙고하기보다 "동족상잔의 원수"라는 도식으로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커밍스 교수는 잘 알고 있는 듯 싶습니다.


○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한국사 연구 결과에서 얻을 점은 5천년 한반도의 역사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과 남-북과 미-중 등 동아시아 세력 관계 속에서 한반도를 바라보는 관점일 것입니다. 물론, 커밍스 교수가 미국 내부자료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는 상당한 분량의 사실 정보와 미국 행정부와 정치권, 미국 언론과 일반 미국인들이 한반도와 한국인을 어떻게 바라보는 태도도 포함될 것입니다.
커밍스 교수의 연구에 찰머스 존슨 교수의 '제국주의 미국'에 대한 연구 성과가 결합되었다면 성공적인 한국사 연구 결과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 제가 커밍스 교수의 결론에서 문제제기 하고 싶은 것들은 많은 데, 다른 부분은 모두 생략하고 하나만 지적한다면, 북한이 "서구의 사회주의를 빌려"왔다면 마찬가지로 남한은 "서구의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빌려"왔다는 것입니다. 커밍스 교수는 서구의 사회주의를 도식화시켜 "사회주의 = 나쁜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회주의를 자국의 실정에 맞게 변형시킨 북유럽의 사례를 보면 '도식화' 자체는 적절하지 않은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적 과정에서 또는 다른 나라의 사례에서 어떤 사상이나 문화, 제도나 형식을 빌려오는 것은 동물과 다른 인류의 가장 큰 특징이자 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외부에서 빌려온 '사상, 문화, 제도, 형식'을 자국의 실정에 맞게 소화하여 긍정적으로 적용시켰는지, 아니면 지배계층이나 기득권들의 권력유지와 이익의 극대화에만 악용했는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커밍스 교수가 남한보다 더 큰 빈부격차와 사회적 배제, 극심한 부의 편중과 군국주의/제국주의/금융자본이 신자유주의 방식으로 지배하는 나라인 미국 내부의 실정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와 판단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남한 지배계층의 미국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까요..^^



4베스트공감 >
카카오스토리트위터페이스북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