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09

H2O 부르스 커밍스 교수 한국현대사 에서 인상 깊은 대목 [1]

H2O의 블로그







부르스 커밍스 교수 한국현대사 에서 인상 깊은 대목 >






1 : '중국화'






○ 부르스 커밍스 교수는 <한국현대사 Korea's Place in the Sun> 제1장 '미덕' 서문에서 한국인 및 한국사에 대한 서구인들의 잘못된 편견을 지적하고 바로잡으려고 합니다.


커밍스 교수의 글과 페에스북의 글을 베교하다보면 한국인임에도 서구인의 시각과 관점에서 한국사를 생각하고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사대주의나 일제의 식민사관 또는 왜곡된 국사 교육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 아래는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25쪽 ~ 27쪽의 주요 문장입니다.






"중국화된 조선(고조선) 및 한사군의 중요성은 그들이 일본에 장기적인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한 데 있다. 오래잖아 한반도는 중국의 문화가 일본 열도로 흘러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주요한 도관(導管)이 되었다."






이는 1993년에 어떤 평판 좋은 책(Cotterell, From Chinese Predominance to the Rise of the Pacific Rim))에 씌어진 말이다.


이 말은 서구인의 상상 속에서 일본이 한국보다 더 빠르게 상승한 이후, 즉 1868년 이후 어느 시기에도 씌어질 수 있지만 그 이전에는 그럴 수 없다.






이 인용문은 어디가 잘못되었는가?






첫째, 1392~1910년의 기간에 중국화에 근접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은 결코 '중국화'된 적이 없었다. 더욱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소국가들이 반도에서 경합을 벌이고 있을 당시(삼국시대) 한국은 분명 중국화되어 있지 않았다.






둘째, 원격조정으로 일본에게 중국의 영향을 전하는 데서 "장기적인" 효과를 냈다는 것말고 한국에 다른 중요성은 없는가? 그 영향은 한국인들의 손을 거쳐가는 도중에 바뀌지 않았는가? 중국은 한국에 아무런 "문화적 영향력"을 끼치지 않고 오직 일본에만 영향을 주었는가? 만약 한국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면 그것은 어째서인가? 만약 한국에 영향을 주었다면 왜 한국이 아닌 일본을 강조하는가?






계속 질문을 해댈 수도 있지만, 서구제국주의 열강이 동아시아를 침략한 이래 내가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이 순간까지도 비(非)한국인들이 한국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한국인을 역사의 행위자로서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그리스와 로마 문화는 수천 년 동안 유럽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렇다면 영국, 프랑스, 스페인, 독일, 폴란드가 그리스화 또는 로마화되었다고 해야 할까? 영국이 그리스의 영광의 단순한 반영인가? 프랑스가 그리스 문화가 영국으로 건너가는 단순한 도관인가? 물론 아니다.






한국인은 유교신자거나 불교신가거나 과거제도를 가지고 있었으니 틀림없이 중국화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은 바로 지난 세기의 역사, 즉 한국이 제국주의의 희생물이 되어 과거에 대한 자기 자신의 해석을 정립할 수 없었던 지난 세기의 역사였다.


세계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한국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강하다. 르네상스의 사상가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듯이 한국인도 공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 공자의 묘가 서해 바로 건너편 산동반도에 있다는 사실은 그러한 개조를 훨씬 더 쉽게 해주었따.


그러니까 실제 사연은 한국은 고유하며 외국이 영향을 아낌없이 '한국화'해왔다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닌 것이다.






2 : 미덕






○ 아래 문장을 읽어보면, 제가 헤아릴 수 없지만 가슴 속 깊이 공감이 되면서 저려오는 무언가를 느낍니다. 한국사회가 일제 식민지 문화와 미국제 상업문화에 너무 많이 물들었지만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 잠재해 있을 거라는 느낌도요..






○ 커밍스 교수는 상당수 한국인들보다 한국과 한국인, 한민족의 문화, 한민족사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더불어 애정이 많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저 역시 아래 문장을 읽고 무척이나 부끄럽더군요.






"한국도 마찬가지다. 유교, 불교, 토착관념이 혼합된 세계관이 천년에 걸쳐 한국인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의해왔지만 우리 시대에 와서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말았을 따름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사람들의 사고 속에는 이 세계의 파편이 잔존하며, 그것은 어째서 많은 한국사람들이 그들 식으로 행동하며 어떻게 근대적 삶에 자신들을 적응시켜왔는지를 설명해준다.






옛 한국은 자족적인 우주, 완전히 구현된 독보적인 인간의 역사였다. 그것은 미덕에 의해 정의되는 세계였다. 비록 지금 세계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그 미덕이 후퇴하는 중이라 하더라도 그 미덕은 여전히 한국인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 마음은 한국인들이 알든 모르든 수천년 역사와 깊이 뿌리박은 도덕성을 '선불로 지불하는' 그런 마음이다. 오늘날 우리는 '유교'라는 포괄적인 용어로 그러한 미덕의 의미를 암시한다.


유교는 흔히 전통, 지나간 황금기에 대한 존경, 제의 수행에 대한 세심한 주의, 물질적인 것, 상업 및 자연개조에 대한 경멸, 윗사람에 대한 복종, 상대적으로 엄격한 사회적 서열제의 선호 등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철학이라고 한다.


유교에는 이런 경향도 있지만 또다른 경향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가문에 대한 유익한 헌신이 있는데, 이는 다른 가문과 물질적 부를 다투는 경쟁으로 변형될 수 있다. 다른 예로 도덕적 간언에 대한 강조도 있다. 이것은 학생과 학자로 하여금 권력자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윤리적 자세를 갖도록 한다.






우리 시대에 한국에 대한 논평의 많은 부분은 유교 유산에 대해 근거없이 주장되는 정적이고, 권위적이고, 반민주적인 성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측면에 대한 일면적 강조는 남한의 대단한 상업적 활기와 물질주의, 새로운 엘리트들의 현저한 소비열이나 한국 노동자와 학생들이 보여주는 민주화를 위한 결연한 투쟁을 설명하지 못한다.


동시에, 북한 공산주의가 과거와 완전히 절연하였다고 가정하는 것 또한 북한에서 지속되는 유교 유산, 즉 가족에 기초한 정치, 지도자 아들의 통치권 승계, 국가 창시자인 김일성에 대한 특별한 경의 등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 유교라는 시냇물 옆에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격언과 믿음의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으니,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 규방에 갇혀 바깥출입이 금지되어 있던 여성들, 논에서 일하는 등 굽은 농부, 지게에 수백근의 짐을 지고 서울 거리를 헤치고 다닌 노인, 막걸리의 멍한 기운을 빌려 달을 보며 울부짖는 젊은 부부, 눈에 보이지 않는 천민 등등의 마음 속에 살고 있는 고유한 생각이 계통이 바로 그것이다.


그 생각은 귀와 귀 사이(머리를 가리킴)가 아니라 명치뼈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한국사람들은 중국사람이나 헤브라이 사람처럼 생각이 처소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사람들이 '내 생각에'라고 말할 때 그것은 자기 가슴을 가리킨다. 마음은 심정(心情) 또는 심(心)이며, 사고와 감정을 하나로 합치는 본능적 지식으로, 이는 서구문명의 플라톤의 사상에서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한 바 있다.






한국인들의 이 심정이란, 만물의 본성 속에, 밤에 돌아다니는 귀신과 도깨비 속에, 주문을 외는 샤먼 속에, 무당의 몸부림치는 주문을 들으며 마음과 몸을 하나로 합하는 이단적인 여성들 속에 깃든 혼에 감응한다.


이것은 내장과 몸에 연결된 인간의 마음이 자연환경과 접촉하는 것이며, 이로부터 미신-직관-계시-통찰력-광기-지혜 그리고 무엇보다 자유가 도출된다. 이것이 노래와 시와 춤과 꿈과 정서 속에 스며들어 있는 가장 순수한 한국의 전통이다. 이것은 감각을 잘라내거나 정념의 불을 묻어버리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한다.


이것은 서구 합리주의자인 내가 가장 알 수 없는 한국이다. 나는 귀신이나 악귀를 볼 수 없고, 구슬프게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선한 기운과 악귀를 느낄 수 없는데도, 내 외부에서는 발을 구르고 목청껏 비명을 지르고 손을 흔드는 체험이 계속된다.


"한국인들은 풍경을 열광적으로 좋아한다. 풍경과 관련된 각 도의 유산이 소상히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있다."






어쨎든 나는 이것이 가장 순수한, 완전히 인간적인 한국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토착적 근원으로부터 외국인 여행자가 한국에서 감지하는 현세적이고 거리낌없으며 활기있고 역동적인 에너지가, 동양의 다른 이웃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너무나 매력적이고 강렬한 에너지가 흘러나온다고 생각한다.


기운을 북돋우는 이 모든 이름없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소줏잔을 든다."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27쪽 ~ 29쪽의 주요 내용입니다.






3 : 전통






○ 커밍스가 정리해 놓은 한민족의 기원이나 한반도 내 구석기(50만년 전) 유물의 발굴, 삼한과 삼국의 발흥 등은 기록이나 시점에서 국내 역사서와 크게 다른 것은 없습니다.


다만, 백제가 삼한과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했다는 것과 왕권을 부자승계라하고 불교를 국교화했다는 것을 한민족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오랜 전통의 창시"한 점으로 주목한 부분은 인상 깊게 남습니다.






이처럼 커밍스 교수는 과거에 등장하는 한반도 내의 여러 사건과 제도, 문물에 대해 수천 년간의 한민족 역사와 문화에서 차지하는 또는 이어지는 특징으로 지적한다는 점에서 과거-현재-미래를 연결하여 바라보는 관점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약 4세기 동안 낙랑은 중한(中韓) 외교와 예술, 산업 및 상업의 거점이었다. 그 영향력은 광범위하게 뻗어나가 중국으로부터는 이민을 끌어들였고 한강 이남의 서너 국가로부터는 조공을 받아냈다.






기원 후 첫 300년간 한국의 남쪽에서는 수많은 소위 성읍국가들이 진한, 마한, 변한이라고 알려진 세 개의 연맹체로 묶이게 되었다. 비옥한 충적 계곡과 평원에서는 관개를 위한 저수지가 세워질 정도로 쌀농사가 발달하였다.






진한은 반도의 중앙부에 자리잡았고 마한은 남서부, 변한은 남동부에 위치했다. 곧 한국사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백제가 처음으로 마한지역에서 출현했는데, 246년 낙라이 백제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던 것으로 보아 그 해에 백제가 존재한 것은 틀림없지만, 백제의 출현시기를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백제가 중국의 영향과 토착 영향을 혼합한 중앙집권적이고 귀족적인 국가였다는 것, 그리고 힘을 뻗치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00년 안에 백제는 마한을 무너뜨리고 서울 주변, 즉 한국의 핵심지역을 장악했다.






왕권의 부자승계라는 한국의 일반적 관습이 백제의 근초고왕에서 시작되었으며, 그의 손자는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임으로써(384년) 또 하나의 오랜 전통을 창시했다고 한다."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36쪽의 주요 내용입니다.







4 : 또 하나의 전통, 외세






○ 커밍스 교수의 삼국 간 경쟁, 외세에 대한 격퇴, 외세 의존에 대해 한민족사 관점에서 통찰력 있는 해석을 제공합니다. 그는 남북 어느 한쪽의 역사 해석을 편들지 않습니다.






"확실히 고구려는 자국의 왕을 옹립하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은 하늘의 아들이자 위대한 궁수, 승마의 명수, 일곱 살의 나이에 다 자란 남자처럼 강인한 사내였을 뿐 아니라 물위를 걸을 수 있었다.(전설에 따르면?)


주몽은 자신의 성인 고(高)를 따라 나라에 고구려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고'라는 이름은 높음을 뜻하니, 이는 그가 태양에 의해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역시 태양왕인 북한의 김일성도 자신을 가리켜 최고지도자를 뜻하는 옛 고구려말 수령(首領)으로 칭함으로써 이 고대국가에서 고려왕조를 거쳐 현재에 이르는 직계혈통에 특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남한의 역사편찬에 따르면 한민족의 계보에서 처음으로 주류를 형성한 것은 바로 세번째 국가(신라)가 거둔 영광이다. 1961년부터 1996년까지, 독재자든 선거를 통해 선출된 지도자든 남한을 통치한 대통령들은 모두 이 지역 출신이며 대부분의 대한민국 역사가들은 신라의 역사적 계보를 특권화한다.


한국의 다른 지역인들과 남북한 역사가들의 차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전라도 사람들 못지않게 분단한국의 희생물이 된 것은 바로 남서쪽 백제의 유산이다.(중략)






종합해보건대 지금도 세 왕국은 계속해서 한국의 역사와 정치문화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국사람들이 흔히 자기가 두둔하거나 경멸하는 지역적 특성이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p.39~40)






"대한해협을 마주보고 있는 반도 중앙부의 남쪽 끝은 신라나 백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대신 지금의 일본지역에 있던 국가들과 긴밀한 유대를 유지한 가아연맹을 형성했다.


결국 서기 399년 큐우슈우의 왜(倭) 세력이 가야를 대신하여 신라를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고구려의 힘을 빌려 이를 물리치자 가야는 이웃나라들에 흡수되고 말았다. 이후 20년간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에 주둔했다.






신라에서 중앙집권화된 정부가 출현한 것은 수도가 행정과 매매의 중심이 되어가던 5세기 후반이다.(중략)






신라는 551년 백제의 성왕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공격했다.이 공격으로 한강 상류를 정복한 신라는 이제 백제세력을 공격해 백제를 한강 하류지역 바깥으로 몰아냈다.


망신창이가 된 백제왕국이 남서쪽에서 상처를 다스리고 있는 동안 신라는 중국세력, 즉 수나라 및 그를 계승한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공격을 매번 방어했다. 대표적인 전쟁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다.






한국인들은 그후 이 승리를 외세의 침략에 맞선 저항이 귀감으로 보아왔다. 그러한 주장에는 취할 점이 많았다. 만약 고구려가 중국인들을 격퇴하지 못했다면 반도의 모든 국가들은 중국의 장기적인 지배 아래 떨어졌을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중국에 흡수통일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공격(660년)을 마지막까지 버텨내지 못하고 곧 그들의 침공에 무너졌다. 당나라의 압력은 고구려 또한 약화시켰으니, 8년간 이어진 전투 끝에 고구려는 외부의 공격과 기근이 동반된 내부의 분쟁으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신라는 668년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한민족의 통일을 달성했다.(절반의 통일을..) 721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며 건국했고, 신라와 발해는 분단국의 남,북과 아주 비슷하게 서로 적대적으로 대립했다.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는 치기 위해 중국의 힘을 사용함으로써 한국 내부의 싸움에 외세를 끌어들이는 또 하나의 전통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당나라 세력에 의존한 신라는 그 값을 치러야 했다. 신라는 당시 신라의 지배권을 대동강 이남으로 제한하며 잠식해들어오는 당의 세력에 저항해야만 했던 것이다.


신라는 자체 군사력과 안승이라는 고구려 장군의 도움을 받아 676년까지 한반도에서 당나라의 군사를 밀어냈다."(p.40~47)






○ 첫째, 커밍스 교수는 북한이 고구려 지역에 위치하면서 고구려의 건국과 문화를 계승함을 주장하고 남한(남한의 지배계급)이 은밀하면서도 공격적으로 신라를 계승함을 드러내고 신라의 문화와 역사를 강조하면서 한반도에서 다른 지역, 특히 백제 지역(호남,충청)이 이들 남북한 지배계층에게 소외되고 있다는 해석이 독특하면서도 시사점을 줍니다.


물론 이런 해석은 각 지역간의 대립이나 분열보다 앞으로 비슷한 문제의식이 발생하거나 확산되지 않도록 변화와 개혁과 연대를 추진하는 관점에서 참고하여야 할 것입니다.






○ 둘째, 커밍스 교수가 잘 집어냈듯이 신라는 실제 가야연맹과의 전쟁에서는 고구려에게,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는 백제와 중국인들에게, 백제와의 전쟁에서는 중국인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외세를 끌어들이는 또 하나의 전통을 만들었다"는 그의 지적을 피할 도리는 없어 보입니다.


신라 지역 중심(?)의 양반계층이 주도했던 조선왕조 역시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특히 조선 말기에는 청나라, 일본, 러시아, 미국 등 모든 외세에게 손을 내밀면서 한층 더 외세의존적으로 전락했습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1945년 이후에도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 고구려와 고구려를 계승함을 내세웠던 후손들(발해와 북한)은 커밍스 교수의 지적대로 사대주의보다 자주독립적인 전통과 문화가 강하다는 것이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금 특이한 발상이긴 한데, 일제 시대에 한반도 내에 주류를 형성한 독립운동(실력배양?) 세력과 상해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외교중심) 세력, 그리고 만주 일대의 독립운동(무장투쟁)세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적한대로,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공격을 격퇴한 것이 한반도의 중국흡수를 막았다는 지적이 어느정도는 타당한 것 같습니다.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00쪽의 주요 내용입니다.








5 : 고려의 포용






○ 커밍스 교수는 이 책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린 (통일)신라의 역사가 204년(668년~892년)에 불과했던 이유를 외세의 힘을 빌린 것과 발해와 통합하지 못한 것, 그리고 '포용'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 같습니다. 명시적으로 서술하지는 않았지만...






○ 신라와 달리 고려(왕건)는 한반도를 자력으로 재통일한 데다가 건국 이후 광범위한 포용정책을 구사했기 때문에 474년(918년~1392년)을 이어갔습니다.






"고려 왕건은 후백제와의 결정적인 싸움에서 승리한 다음, 통일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도량있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을 고구려의 적통을 이은 왕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망해가는 발해국에서 도망쳐온 고구려계 생존자들을 포용했다.






또한 왕건은 신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신라의 귀족들에게 전례없는 관용을 베풀었다.


그는 후삼국의 유민들을 통합하는 제도를 수립했고 그로써 한반도의 진정한 통일을 성취하였다.


고려왕조는 500년에 약간 못 미치는 기간을 통치했는데, 전성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명국 반열에 올랐다."(p.53~54)






○ 사대주의, 즉 외세 의존적인 조직이나 국가는 처음부터 정통성이 결여되고 국가운영도 정상적이기 어렵다는 것을 역사의 교훈임을 말해줍니다.


마찬가지로 집권 초기에 기존의 적대세력 또는 경쟁세력을 포용하는 것이 국가나 조직을 운영하는 데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요.






○ '자주독립'과 '포용'이라는 측면에서 조선, 대한제국(정상적인 국가였다고 인정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은 아주 나쁜 면을 가지고 출발했고 국가운영 역시 정상적이지 못했습니다.


이승만부터 박근혜에 이르기까지 65년 동안 남한에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외교적으로 자주적인 정권은 한번도 없었다는 것과 정치적 반대세력을 포용하지 않았던 것이 그 기간 동안 민중이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일 것입니다.


역대 정권 중에서 '자주독립'과 '포용'이라는 측면에서 그나마 점수를 줄 수 있는 정권은 국민의정부 정도일 것입니다.(참여정부는 공동정권의 당사자인 호남인사들과 정치세력마저 배척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나중에 커밍스 교수가 다시 다루겠지만, 조선은 개국 초기에 나름대로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외교와 포용정책을 펼쳤지만, 후반기에 이르러 사대주의와 독점,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불용, 개혁실패로 망하기에 이르렀고, 사대주의와 불포용은 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제국주의의 예속 하에 현재에까지 이른 셈입니다.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6 : 농업관료제






○ 커밍스 교수는 조선을 봉건제가 아니라 농업관료제로 분석합니다.


그는 중앙권력(왕권)과 토지에 기반한 부(지주권력) 사이의 긴장 때문에 조선의 지도자들은 한 세력을 다른 세력과 맞세게 함으로써 500년 동안 시대를 초월해 안정을 성취할 수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건국 이래 1세기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선은 학식있는 학자-관리라는 핵심집단의 깊은 영향 아래 성리학 교리에 푹 젖은 모범적인 농업관료제로 번성했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이 전통적 체제와 그 유산을 가리켜 '봉건적'으로 묘사하지만, 조선왕조를 봉건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려와 같이 조선도 봉건사회의 고전적 특징을 결여하고 있었다.


대신 조선은 고전적 농업관료사회였다.






1653년 조선을 경험한 서구인은 '한국은 절대권력을 가진 왕에게 종속되어 있었고, 왕은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하지 않고서도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 처분 할 수 있다. 특정한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는 없다... 그러나 모든 인사들의 수입은 그들이 쾌락을 즐기는 중에도 소유하고 있는 토지와 그들이 거느린 엄청난 수의 노이에게서 나온다...'






조선의 체제는 관료적이었으니, 공복을 선발하는 정교한 절차와 그 자체로서 고도로 조직된 행정업무, 중앙과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국가운영의 관행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은 봉건제와는 달리, 강력한 중앙행정부와 다수의 관리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민정기능과 군사기능를 융합한 지방영주를 통해서가 아니라 문관 관료제를 토앻 통치했다.


이 체제는 농업적 지반에 의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현대의 관료제와 달랐다.






한국의 체제가 그와 가장 유사한 중국의 전형적 체험으로부터 결별하게 된 하나의 계기 또한 한국 농업적,관료제적 상호작용의 성격 때문이었다.


정부금고에 채워넣을 세입을 구하는 관료들과 소작인 및 수확물을 지배하고 싶어하는 지주들 사이의 갈등은 조선왕조 내내 변함없이 긴장의 근원이 되었는데, 자원을 둘러싼 이러한 갈등에서는 지주들이 종종 승리하기도 했다.






이론적으로 토지는 국가의 소유였지만 한국에서는 사적인 토지권력이 중국에서보다 더 강하고 집요한 힘을 가졌다. 한국에는 틀림없이 중앙행정부가 있었지만 겉으로 강력해 보이는 이 중앙은 귀족권력이라는 현실을 감추고 있는 외관에 불과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사실상, 사회적 엘리트층이 관료적 구조를 지배하면서, 상대적으로 취약하게 그 구조를 운영했고 임금의 권위를 견제하는 데 그것을 이용했다.'


지방 차원에서 엘리트들은 아전이라는 관리, 즉 군 단위 이하 차원에서 주요가문을 도와 일하는 일반 서기들을 붙잡아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농업관료제는 표면적으로는 강력했지만 실제로 그 중앙은 허약했다. 겉보기에는 국가가 사회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토지에 기반을 둔 귀족가문들이 국가를 궁지에 몰아넣고 자신들의 지방권력을 여러 세기에 걸쳐 영속화할 수 있었다.


이 유형은 1940년대에 이북이 혁명과 이남의 토지개혁에 의해 토지에 기반한 지배가 제거 내지 희석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시기 이후로는 남에서나 북에서나 강력한 중앙권력 및 상명하달식의 전국적 행정 쪽으로 힘의 균형이 이동했다.






하지마 바로 이 중앙권력과 토지에 기반한 부 사이의 긴장 때문에 조선의 지도자들은 한 세력을 다른 세력과 맞세게 함으로써 시대를 초월해 안정을 성취할 수 있었으니, 이 상호관계의 한 극단은 다른 극단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 체제는 유연하고도 융통성 있게 한국을 다스렸다. 그렇지 않았따면 어떻게 이것이 500년 동안이나 지속될 수 있었겠는가?"(p.100~102)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7 : 개방






○ 한국근현대사에 있어서 외국, 외국세계와의 '개방'에 대한 커밍스 교수의 독특한 관점과 통찰력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현대의 북-미 갈등은 '개방'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도...


사실 19세기 조선에 밀어닥친 '개방'은 100년이 지난 1980년대부터 또다시 남한에 불어닥칩니다. 21세기 들어서는 FTA(자유무역협정)이라는 현란한 이름으로..







○ 다분히 식민사관으로 구성되었던 지난날 초,중,고의 국사 교과서로 배웠던 40~60대들은 조선이 19세기에 '개방'을 거부한 것에 대해 거의 무의식적으로 '폐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서양식 사고 또는 제국주의식 사고를 버리고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 19세기 후반 일제에게 강화도조약 체결을 강요당한 이래, 조선은 '명시적, 실질적 예속'을, 그 이후 남한은 미국과 '허구적 평등'과 '실질적 예속'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19세기에 나라를 '개방'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때때로 개방은 발견을 의미한다. 페리가 일본을 발견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일본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 그러니까,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누군가에 의해 곧 '발견'되리라는 것을 몰랐다.


때때로 개방은 자유무역과 상업을 의미한다. 때때로 개방은 이념적 입장을 함축한다. 때때로 개방은 예속을 의미한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한국(조선)의 경우 개방은 서양과 일본에게 이 모든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조선)인들에게는 개방이 무엇을 의미했을까?






한국(조선)인들은 자기 나라가 자신들의 원하는 만큼 열려 있다고 생각했지만, 서양의 관점에서는 그다지 열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북한의 많은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한다.


반면, 미국 행정부는 같은 120년 세월 동안 한반도의 한 나라,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개방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다. '개방'에 대한 시간을 뛰어넘는 끈질긴 요구와 계속되는 한국의 완강한 저항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근대에 들어와 '개방'은 일본과 미국의 모든 지도자들이 한국을 생각할 때면 으레 떠올리는 암묵적인 또는 노골적인 목표였다. 그러나 그 '개방'은 옛 한국에게, 옛 한국이 속한 중국이라는 우주에게, 국가간 관계에 대한 사고방식에게, 나아가 하나의 사고방식 전체에게 종말이 시작됨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우리는 개방의 숨은 의도가 진보의 이름으로 옛 한국의 우주를 파괴하는 것이었음을 추론해낼 수 있다.






달걀껍질의 유기적 통일성이 깨어지는 데서 볼 수 있듯이, 한국은 마치 한번 넘어지면 일어서지 못하는 땅딸보같이 오믈렛이 되어버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개방'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개방이라는 개념에 모든 진보적이고 훌륭한 것을 삼투시키기 때문이다. 개방은 불가피하며, 피할 수 없고, 합리적이며, 선진적이며, 시대의 요청이고, 근대적이라는 것은 사실 여기에서 요점이 아니다.


요점은, 이런 요구의 정상성 내지는 대단한 합리성 때문에 한국인들이 그만큼 더 고집불통으로 보이고 따라서 그만큼 더 흥미로운 족속이 된다는 것이다.






한국(조선)인들은 '근대'라는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그것이 바로 세계 속에 들도 없는 독특한 한국의 방식을 파괴하고, 현대 한국인들에게 1876년 이전이라면 절대로 그들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았을 질문, 즉 한국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는 바이러스라는 사실을...


이 바이러스가 하필이면 신흥 일본의 형태로 처음 도래했다는 것이 한국의 선택을 더욱더 어렵게 했다.






중국과 한국의 조공체계는 대수롭지 않은 서열의 체제, 평등은 아닐지라도 진정한 독립의 체제였다. 하지만 한국이 마주친 서양의 체제는 이와 반대로 허구적 평등과 실질적 예속의 체제였다."(p.132~134)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8 : 근대






○ 한반도에서 한민족의 근대 또는 근대화란 무엇일까? 교학사 교과서와 박정희 공과에 대한 국내 논란에서도 나타나듯이 한국에서 '근대화'에 대한 개념 정립이 쉽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근대' 또는 '근대화'에 대한 개념 규정은 '제국주의', '서구화', '식민지' 또는 '친일파'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커밍스 교수의 '한국에서의 근대화'와 조선 말기 유학자들에 대한 분석 및 평가는 시사점을 줍니다.






○ 그런데, 혹시 현재 한국의 국기가 1882년 미국과 수교할 때 리홍장이 만들었다는 커밍스 교수의 주장이 얼마나 근거가 있는지 아시는 분 있으신가요?



태극기 기원에 대한 인터넷 정보는 1882년 8월 9일 특명전권대사이자 수신사인 박영효가 고종의 지시로 옥색 바탕에 파란 원을 집어넣어 만들었다는 설과 1882년 3월 조미 통상조약 전에, 조인식에 사용할 국기를 지정해달라는 미국 공사 로버트 슈펠트의 요청을 받은 김홍집이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를 제작을 명령하여 만든게 최초 사용례이고 박영효가 그것을 참조하여 사용했다는 설이 대부분입니다.






"어느 책에서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발견한다. '강화도 조약은 한국이 최초로 맺은 근대적 조약이다'. 분명 맞는 말이지만, 이 문맥에서 '근대적'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공정한? 평등한? 국제법에 일치하는? 주권국가들끼리 체결한?


법정의 변호사라면 이 모든 항목에 대해 긍정적인 평결을 받아낼 것이다. 그 조약은 서양제국체제의 '관습법'에 충실한 것이었으니까.


주권상의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또한 중국식 세계질서 내에서 추정되어온 서열에 반발해서 체결된 이 조약의 진정한 효과는 수세기에 걸쳐 유지되었던 일본과 한국간의 본질적 평등을 지워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변형의 결과는 머지않아 나타났고, 오늘날까지도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p.145)






"고종은 자신의 '근대화를 위한 시도'에 반발했던 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을 참수에 처하고 나머지 사람들을 귀양보냈다. 자신의 이념 때문에 참수를 당한 사람은 강원도 유학자 홍재학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멈추어 이 사람을 정당하게 대접해야 할 것이다. 그는 최익현이나 박규수, 그리고 다른 많은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일본과 서양은 같은 콩깍지 속의 콩들이며 그들은 모두 한국에 고통과 멸망을 주려하니 성문을 높이 올리고 오군을 가동시키는 것이 좋으리라 주장했다.


홍 씨와 같은 사람을 우리는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비논리적, 비합리적, 반계몽주의적, 전통주의적, 시대착오적, 근시안적, 오만한, 아둔한, 완고한, 퇴행적, 후진적 등등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상 대부분 현대 학자들이 이들을 지칭해온 낱말들인데 공교롭게도 이 말에는, 완력으로 옛 한국을 개방시키라는 운명의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한 한 사나이, 즉 미국의 슈펠트 제독의 견해가 메아리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유학자들을 애국자라고 부르고 싶다. 아니면 양심적인 학자이며, 원칙과 덕성, 강인함, 열성을 가진 사람들이고 부르고 싶다. 그들은 옛 한국의 운명에 대해 학자답게 통곡을 쏟아냈고, 몇해 지나지 않아 곧 찾아든 타격을 정확히 예견했다.


우리는 3천년 동안 지속된 학식과 삶과 지혜에 몸담고 살아온 사람들이 바로 자기 눈앞에서 자신의 세계가 무너져가는 것을 지켜볼 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1910년 한국 자체가 소멸하는 바로 그 시점까지 홍재학 같은 사람들을, 즉 사라져가는 한 우주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온전히 읽어낼 때면 언제나 눈물이 뿌옇게 앞을 가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람들을 정당한 이름으로 기려야 한다. '은자'라는 말도 유용할 터이지만 이 사람들은 훨씬 더 그 이상이었다. '보수주의자'라는 말로는 그들의 연조깊은 지혜를 잡아내는 문턱에도 못 간다.


미덕과 용기를 가진 대가로 자신의 머리를 넘겨준, 학 무리 한가운데서 학자 홍 씨를 기려 우리는 이를 '홍재학의 유산'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한국(조선) 외교술의 원동력은 여전히 중국이었지, 고종과 그의 고문관들이 아니었다. 리홍장은 황쭌센의 세력균형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1882년 미국과의 조약에서 i자에 점을 찍고 t자에 가로선 치는 걸 빼고는 모든 일을 다했다. 어쩌면 그것도 했을 것이다.


리홍장과 슈펠트는 중국에서 비밀리에 협상을 추진했는데 심지어 한국의 새 국기를 고르는 지경까지 갔으며(지금까지 남한의 국기로 사용된다.), 그러고는 한국인들에게 완료된 문서를 제시했다. 한국의 외교가인 김윤식은 슈펠트와의 조약협상에 간여하지 못했다.






리홍장은 닷새 후에 또 한명의 해군장교가 와서 영국과의 조약에 서명하도록, 그리고 그 뒤를 바싹 따라 6월까지 독일 사절이 오도록 확실히 해두었다.


이 세 조약은 내용이 똑같았으니, 이들 조약의 성사는 리홍장이 한국의 외교정책을 접수하는 데 성공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의 진짜 바라던 바는 중국의 동쪽 측면을 보호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한국(조선)은 이제 일본이 시작해서 중국이 끝을 낸 불평등조약이라는 체계에 완전히 꿰어버렸다."(149~152)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9 : 조선의 미덕






○ 고려 왕조와 조선 왕조 800년간 한민족에게 닥친 큰 전쟁은 단 세 번(몽고, 왜, 청나라)이었는데, 지난 100년간 한민족은 식민지 40년에 전쟁 40년 분단 60년이었다는 커밍스 교수의 비교는 많은 시사점을 던집니다. 외세와 근대와 개방과 서구문명이 한민족과 민중에게 어떠한 것이었는지...






○ 하지만 남한이 "국민국가로서 자신의 절대적 자주성과 독립을 주장한다"는 커밍스 교수의 평가는 1948년 이후의 남한(권력층, 기득권층)에게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고, "북한은 세계에서 좀더 고립된 국가로 남았다"라는 평가 역시 한국전쟁에서 시작하여 냉전체제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는 미국의 대북 봉쇄 및 압박전략을 고려하지 않은 일면적인 평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1876년 개국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제국주의의 충격 아래에서 조선 왕조는 비틀거렸고 몇십 년 후에는 마침내 붕괴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종말 이전의, 조선의 범상치않은 500년간의 수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본질적으로 전통적 체계는 융통성이 있었으며, 국내의 갈등과 변화를 예측하거나 수용하는 데 필요한 최저한의 조정과 점진적인 대응을 취하는 면에서는 심지어 유연하기까지 했다.


구래의 농업관료제가 서로 경합하는 각기 다른 이해관계간의 상호작용을 관리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를 격해 각각 다른 다른 이해관계 당사자들의 균형을 잡아주는 데 이바지해온 견제와 균형의 체제를 가짐으로써 가능했다.


임금과 관료는 서로를 감시했고, 왕족은 이 둘을 다 지켜보았으며, 학자들은 유교 교리의 도덕적 입장에서 비판을 할 수 있었고, 암행어사 감찰관은 반란이 출현할지 살펴 정확한 보고를 올리기 전에 전국을 돌아다녔으며, 토지귀족들은 가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아들들을 관료로 들여보냈고, 지방유지들은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군 행정관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선 왕조는 현대 한국인들이 복원하고 싶어하거나 그 치하에서 살고 싶어하는 체제는 아니지만, 당대에는 융통성 있고 영속적인 세련된 정치체제로서, 500년 동안이나 통일된 통치를 한국에게 마련해줄 수 있었다.






이 문명화된 질서는 19세기 후반 서양과 충돌하면서, 기술적으로 발달한 제국주의 열강이 강력한 군대를 동원해 펼친 전면적인 외교적 맹공을 한국이 버텨내지 못하게 되면서, 해체되고 매장되었다.


그러나 이 경험은 현재를 위해 중요한 유산을 남겨주었다. 약소국으로서 한국인들은 기민한 외교 정책을 서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했고, 그들에게는 중국이라는 좋은 사례가 있었다. 한국인들은 '낮은 것이 높은 것을 결정한다'는 세련된 외교술을 개발해, '개꼬리를 붙잡아 개를 흔드는' 식으로 외세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 했다.


그런 까닭에 남북한 다 외국 관측통들에게 강대국 지원에 꽤 의존한다는 인상을 주지만, 양자 모두 국민국가로서 자신의 절대적 자주성과 독립을 주장할 뿐 아니라 강력히 역설하고, 모두 그들의 강대국 고객들을 조종하는 데 통달해 있는 것이다.(?)


북한은 1980년대 중반까지도 강대국들로 하여금 자신의 전투를 치르게 하는 면에서, 또 두 공산주의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양쪽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고 어느 한쪽이 북한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교묘한 책략을 쓰는 면에서, 노련한 솜씨를 발휘했다. 전통시대와 아주 흡사하게 북한의 마음은 중국에게 가 있었지만 말이다.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는 중국에 대한 편애가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이는 막판 한국 전통 외교술의 주요한 특징은 아니다. 한국 외교술의 특징은 막판에는 배타주의까지도 불사하는 고립주의인 것이다. 1590년대 일본의 침략 이래 3세기 동안 한국은 자신을 일본으로부터 고립시켰고, 자국 해안에 표류한 서양인들을 심하게 대했으며, 중국과도 거리를 유지했다.


따라서 '은자의 왕국'이라는 서양 이름은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한국인들은 언제나 은자를 존경해왔는데, 그 이름은 외세에 대해 고집스럽게 자주를 기키려는 단호한 경향과 전근대기 한국의 특징을 이루는 독립에 대한 깊은 욕망을 표현한다.


외국인들에게는 자기민족중심적이고 불쾌할지 몰라도, 많은 한국인들에게는 외국것에 오염되지 않은 자족적이고 자주적인 한국이 여전히 이상으로 남아 있다. 북한은 세계에서 좀더 고립된 국가로 남음으로써 은자의 왕국이라는 선택을 실행해왔다.(?)


1960년부터 세계시장을 향해 개방정책을 추구하고 다각적이고 다채로운 외교술을 모색함으로써 한국적 맥락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은 바로 남한이다. 그러나 외국의 영향을 몰아내고 자립을 이루자는 요청은 한국에서는 언제나 발언의 기회를 얻고, 사실 이것이 가장 영속적인 외교정책의 특색 중 하나인 것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한국이 자업으로 얻은 은자의 왕국이라는 별명에도 불구하고 외교술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과거를 돌아보며 우리들은 한국은 고집스럽게 다 쓰러져 가는 중국적 질서에 완고하게 헌신했고 그래서 근대적 국제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전쟁이 한 민족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건이라고 한다면, 근대적 체제가 과연 고래의 유서깊은 동아시아체제보다 한국에게 더 좋은 것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런 생각을 해보라. 옛 체제가 사멸한 이래 한국은 지난 100년 중 40년 동안이나 자기 영토 안에서 전쟁을 체험했으며, 다른 지역(베트남)에서 20년 더 전쟁을 겪었다. 한국은 지난 100년 중 40년 동안 식민지 상태에 있었고, 그보다 오랜 기간 분단되어 있다. 반면에 옛 한국에서 수백년 사이에 일어난 전쟁은 손으로 꼽을 수 있다. 고려와 조선 800년간 본질적으로 중요한 전쟁은 세 번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 종합적 판단들을 온갖 애매한 말로 어물쩍 넘길 수도 있지만, 이런 판단들은 우리로 하여금 옛 체제의 악덕뿐 아니라 그 미덕에 민감하게 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p.195~197)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10 : 기록






○ 거의 대부분의 역사 동안 기록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사료가 남았던 조선왕조 시대가 지난 후, 오히려 20세기에 들어선 한반도에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과 그 이유에 대한 커밍스 교수의 지적은 제 가슴을 콕콕 찌릅니다.






○ 남한의 역사가 오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단과 예속과 독재와 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단죄하지 못하고 얽매이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행정부와 정치권이 현재의 사실을 철저하게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유권자들에게 공개하지 않으며, 임기말에 폐기했던 과오가 반복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순간에도 청와대와 외교통상부와 국정원과 국방부와 국회 어디선가 파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서로 아주 다른 이유들 때문에 일본과 한국의 역사가들은 1910년 이후 시기에 대해 일차자료, 기록보관소의 문서, 회견 같은 역사연구의 기본사료를 이용하여 역사를 쓰지 않으려 한다. 한국의 주요한 역사책을 아무것이나 살펴보면, 거의 모든 책이 20세기를 결과론으로 다루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한가지 이유는 많은 문서들이 여전히 기밀로 취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후 남북한에서는 거든 모든 문서가 기밀이지만, 일본 역시 1945년에 군국주의와 결별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전전 문서의 공개를 놀라우리만치 꺼린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이유들이 있는데, 문서의 비공개는 그 자체가 더 심각한 문제들의 징후일 뿐이다. 한국의 역사가들에게는 식민지시기는 아주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떤 기록에서도 입증될 수 없는 저항의 신화로 흠뻑 젖어 있다.






북한은 김일성의 성인전에만 존재하는 사건들로 온갖 화려한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포함시켰고, 남한에서 1935년에서 1945년 사이라는 한 특정한 시기는 비어 있는 찬장과 같다.


일본에 이용당하고 착취당한 수백만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건의 기록을 입수할 수 없으며, 일본에 협력한 수천명의 한국인들은 그런 역사를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아주 지워버렸다. 심지어 군지 같은 지방의 계보록에 있는 공무원 명단에서도 이 시기는 빠져 있다.


1945년 이래 분단한국의 역사는 민족분단 때문에 더욱 편향되거나 폐기되어 있다. 북한에서는 이승만에 대해서, 남한에서는 김일성에 대해서 좋은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다가는 바로 감옥에 가게 되었다.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라는 질문에는 비무장지대 어느 쪽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 한가지 정답밖에 없다.






단일한 자유국가인 일본에서 역사가들 다수가 그들의 제국주의 역사를 정직하게 평가하기를 꺼리는 것은 제국주의 충동이 아직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계속 암시한다. 중국에서의 일본의 행적에 관해서는 아마 어느 정도 진지한 반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일본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반성도 없다.






한국은 일본의 빠르게 치솟는 빛에 눈이 멀게 된 오이디푸스였다. 수세기 동안 항상 중국 위로, 자금성의 황금 기와와 뻬이징의 황금색 황토 위로 저무는 온화한 태양을 응시해온 한국(조선)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스스로 대책을 세울 만큼 강인하고 단호해진 상승국을 마주보았다.


이에 대한 한국(조선)인들의 혐오는 아마 '억지로 태양을 바라보려다 눈앞이 캄캄해져 고개를 돌릴 때, 마치 이를 치유하듯 눈앞에 흑점이 나타난다'고 한 니체의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후 또 한 세기가 지났지만 한국인들은 결코 이 경험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는 구한국을 칼로 찔러 비틀었으며, 그 상처는 그후 줄곧 한국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좀먹었다.


이것이 바로 근대사가 거의 씌어지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그렇기에 침묵을 향한 이런 강박적 충동에서 벗어나 그럼에도 훌륭한 역사를 쓴 소수의 한국인과 일본인은 매우 고귀한 분들이다."(p.198~200)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선의를 가지고 역사와 후손에 남긴 기록을 가지고 오히려 참여정부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부관참시하는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댓글정권의 후안무치는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하게 만듭니다.


이명박 정권이 정권 말기에 대통령 중요 자료를 전부 파기한 것은 정말이지 '도둑이 제발 저린' 몰상식과 몰역사관을 지닌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11 : 한일 합병의 후원자






○ 제가 몰랐던 사실 중 하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과 러시아의 포츠머스 조약을 중재하여 일본의 한반도 영향력을 인정하게 해준 공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노벨 평화사을 수상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 노벨 평화상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 지금으로부터 110년 미국과 영국과 러시아와 중국이 일제의 무력으로 강요한 한국 식민지화에 대해 동의하고 지지하고 후원했던 역사는 2013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2013년 미국, 영국, 러시아, 중국, 일본 모두가 한국에 대해 취하는 입장은 오로지 자국의 '국익'일 뿐이며, 자유니 민주니 자본주의니 동맹이니 하는 수사는 모두 허울뿐인 개소리라는 것을 지난 역사를 통해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 커밍스 교수가 한국인을 너무 높게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에서 8월 29일이 '국치일'인지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거든요. 정부에서도 정치권에서도 아무런 행사도 없고. 아마 일본군, 만주군, 중추원 등 친일파들과 그 후손들이 여전히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러시아와 일본은 모든 열강들 중 1890년대의 한국 정세에 가장 직접적인 힘을 행사했다. 일본은 중국과 싸우고 나서 획기적인 개혁을 후원했으며, 러시아는 고종에게 공사관을 피난처로 제공하고 일시적으로 한국정치에 개입했다.


도쿄와 모스크바는 서너 차례의 협상을 통해 한국에서의 이권을 분할하여 차지하려 했는데, 그들의 주된 생각은 한반도를 몇개의 영향권역으로 나누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협상은 결렬되고 적대관계는 전쟁으로 발전하여, 1904년 일본은 뤼순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열강들' 중 하나를 굴복시킨 최초의 비백인 국가가 됨으로써 전아시아를 흥분시키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1905년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린 회담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중재로 조인된 평화조약에 따라 한국에서의 일본의 절대우위권을 인정했으며, 루스벨트는 그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루스벨트와 일본 사이에 교환된 외교각서인 카스라-태프트 협약은 필리핀과 한국의 교환을 승인했다. 즉 일본은 미국이 미국 식민지에서 갖는 권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며, 미국은 일본의 새로운 보호국에 도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호러스 앨런은 루스벨트로 하여금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려고 애썻지만 대통령은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앞장에서 예를 든 조지 캐넌의 인종주의적 견해에 훨씬 더 귀를 기울였다.






외교사가들이 말하듯이,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에 승리하고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1905년 이후 '자유재량'을 누렸다.(영일동맹이 1902년 이미 체결)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과 만주로 나아가고 그럼으로써 필리핀이나 많은 영국 식민지들에서 멀어지는 한, 일본은 런던과 워싱턴의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일본은 자유재량을 가졌음은 물론 도움의 손길까지 얻었다. 냉혹한 외교관으로부터 진지한 학자와 기독교 선교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서구인들이 일본이 한국에서 맡은 '근대화의 역할'을 지지했다는 것은 슬픈 일이긴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리처드 러트는 병합에 '항의하는 목소리를 높인 선교사들은 거의 없었다.'고 썼다.






100년 가까이 미국 학생들이 읽은 교과서의 저자인 역사학자 타일러 테너트는 한국은 항로를 잘못 든 배로 일본이 해안으로 예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즉 그는 한국은 스스로 지킬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예일대학 교수인 조지 틀럼블 래드는 이등박문과 가까이 지냈으며, 독자들에게 이등박문의 자비로운 문명화의 역할을 재빨리 납득시켰다.


당시 미국 내 혁신주의자들도 별반 나을 것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더 나빴다. 비어트리스 웹과 남편 씨드니 웹은 아마 외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에 관해서는 탁월한 식견이 없었던 모양인지, 1904년에 일본을 '인간의 자제심과 계몽의 떠오르는 별'이라고 썼다. 그들은 중국과 한국인들이 '몹시 불쾌한 종족'이라고 말했다.






왜 20세기의 첫 10년간 각양각색의 영국인들이 하나같이 일본을 칭찬했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영국은 쇠퇴하고 독일과 일본은 전진하는데, 독일은 위협적인 존재였으나, 일본은 1902년 이후 영국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국제적인 지원을 받아 주사위는 한국의 재빠른 식민지화쪽으로 던져졌다. 일본은 1905년에 '보호정치'를 실시하여 한국의 외교를 통제하고, 일본 경찰을 거리에 배치하며, 전신제도를 시행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등박문은 1905년 11월에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고종의 궁으로 들어가 외무대신의 인장을 강제로 빼앗아 보호조약 문서에 날인함으로써 무력으로 보호정치를 시작했다.


그것은 한국인들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또다른 제의처럼 보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를 거부했다. 민영환, 이준, 박승환과 구한국군대, 이재명, 안중근 등이 바로 대표적으로 거부한 이들이었다.






1910년 8월 29일 순종은 왕위를 포기했고,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후 8월 29일은 한국인들에게 가장 암울한 날이 되었으며, 이완용은 한국 역사상 가장 사악한 이름이 되었다.


그것으로 일본은 고구려와 신라가 중국의 압력에 저항하면서부터 힘들게 싸워 얻은 한국의 독립을 말살했다."(p.201~207)






○ 즉, 1945년 8월 일제의 항복문서를 받고 한반도에 들어온 제국주의 미국은 1904년 카스라-태프트 협약에서 양보했던 식민지로서 한국을 접수하러 온 점령군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민족과 민중을 해방시키러 들어온 게 아니라...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12 : 저항과 변절, 그리고 균열






○ 한국 내 역사왜곡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는 일본과 친일파들에 의해 끈질기게 이루어지는 일제 식민통치와 일제를 답습한 군사독재에 대한 미화와 그것과는 반대로 항일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민중운동, 통일운동(가)들에 대한 왜곡 폄하이고,


다른 한가지는 조선시대 이후로 계속된 민중들의 저항, 동학 및 갑오농민항쟁, 일제에 대한 항일의병투쟁 등 민중들의 반외세 반봉건 투쟁에 대한 왜곡 폄하와 항일 투쟁에서 좌파 및 중도파들에 대한 왜곡 폄하입니다.






○ 여러가지 한국근현대사 서적을 읽으면 농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반외세 반봉건 투쟁은 19세기 중반부터 한국전쟁까지 약 100년간 지칠줄 모르고 거세게 진행되었습니다. 민중들의 반외세 반봉건 투쟁이 결실을 이루지 못한 것은 외세의 개입과 내정에 외세를 끌여들여 권력을 차지하려는 사대주의적 엘리트 계급, 여기에 임시정부 등 반외세 반봉건 목표보다 자신들의 정치권력에 더 혈안이 된 항일 지도자군에게 큰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 그러한 근대 100년의 경험은 해방 후 5년에도 비슷하게 전개되었으며, 한국전쟁 후 지금까지도 야당과 진보세력 등 엘리트 계층에서 동일하게 보입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일제와 미제, 냉전수구세력의 '분할하여 지배하라'는 전략은 일관되게 작용했습니다.






"한일 합방에 대한 한국(조선)인들의 강력한 저항은 식민통치 초기 내내 계속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일본을 괴롭힌 의병이라는 비정규군들과 게릴라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해산된 병사들과 애국적인 선비들로, 시골로 들어가서 농민 지지자들을 모았다. 많은 경우 농민 의용군들은 자발적으로 봉기했으며, 의심할 여지 없이 동학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민긍호의 지휘 아래 한 수비대 병사 전체가 원주에서 봉기했으며 한때 그의 휘하에는 수천 명의 병사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100명이 채 안되는 무리였다.


1907년 거의 1만여 명의 병력이 서울 반경 12.8km 안까지 침투했으며, 의병작전의 범위도 한국에서 인구가 가장 조밀한 지역인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로 확산되었다.


일본인들이 추정한 무장 게릴라들의 수는 1908년에 69,832명이며, 그들과 일본군 사이에는 거의 1,500회의 충돌이 있었다. 그 수는 1909년에 25,000명 가량으로, 1910년에는 2,000명 미만으로 떨어졌다.


이때쯤에는 많은 반란자들이 만주로 달아나버린 것이다.






항방 때는 많은 척사파 유생들이 자살했는데, 그런 행동은 성전에 참여한 이슬람 투사들의 자기희생만큼이나 한국에서 강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그후로도 저항은 계속되었다.


일본인들은 1912년에 5만 명, 1918년에는 14만 명이나 되는 한국인들을 체포했다.


1912년의 조선인음모재판으로 알려진 이런 사건들 중 하나는 총독을 암살하려 한 혐의로 105명을 기소했으며 '피고인들에 대해 뻔뻔하게 날조된 형사고발과 그들에게 가한 악랄한 고문' 때문에 유명해졌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지금까지 너무 일방적이다. 역적 이완용 한 사람에 수많은 애국자들이 대치하는 구도는 아니었다. 일본의 진보는 1905년 이전에 많은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그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거나 변절시켰다.


1919년 이전보다 이후에 더 심했지만, 식민지 관리들은 항상 분할지배 전략을 이용했던 것이다. 대다수가 인정하고 싶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한국인들이 식민독재에 부역했으며, 해방 후에도 너무나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의 관행을 자신의 행동모델로 삼았기 때문에 양자가 완전히 적대적이고 갈라선 관계였다고 할 수 없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 경험은 혹독하고 쓰라렸으며, 2차대전 전후 한국의 형태를 속속들이 결정지었다. 이 식민지 경험은 개발과 저개발, 농업의 성장과 소작제의 심화, 산업화와 엄청난 이주, 정치적 동원과 해산을 초래했다.


그것은 중앙정부의 새로운 역할, 일련의 새로운 한국 정치지도자들,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무장저항과 조국배반의 부역을 낳았다.


무엇보다, 그것은 그후 한국인의 영혼을 좀먹는 깊은 균열과 갈등을 남겼다."(p.207~210)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13 : 분열






○ 커밍스 교수를 통해서도 상해 임시정부 내부의 파벌과 분열이 어떤 이유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파벌주의와 분열이 만연했다는 진단 밖에는... <아리랑>을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 그리고 김구, 김규식의 원인을 알 수 없던 좌익 항일운동 세력에 대한 극도의 증오감과 관련하여 두 사람이 중국의 쑨원과 장제스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과 미국과 접촉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실마리를 제공하기는 하는데, 결정적인 이유인지 여부는 아직 판단이 안섭니다.







○ 식민지 시기와 해방 후에는 민족주의자간 분열과 반목이 엄청났는데, 21세기에는 국내에 민족주의자라 칭할 수 있는 이들이 별로 없어 오히려 자유주의자들 내부의 분열과 반외세 반독재 전선에서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간의 분열 또는 자유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분열이 상당한 것 같습니다. 반외세 전선은 매우 작게 형성되었다고 볼 수도 있고...






○ 아무튼 알면 알수록 상해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풀려져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임시정부는 1920~30년대 초반 윤봉길, 이봉창 의사 등 몇 건의 저격을 제외하고는 실질적으로 항일운동에 기여한 것이 거의 없었고 광복군 역시 일본군과 전투해보지도 못한 채 짧게 훈련만 하다가 해산되었죠. 그에 비하면 만주 일대에서 수십 년간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거나 국내에서 지하활동을 하면서 노동,농민운동을 전개한 사회주의자들이 오히려 더 해방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식민지시기는 일본의 식민주의에 저항하거나 그것에 편승해 생겨난 전혀 새로운 한국 정치지도자들을 낳았다.


민족주의 집단과 공산주의 집단의 출현은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후 한국의 좌우익 분열은 실제로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양반귀족의 변화 역시 이때 시작되었다.


1930년대에는 새로운 무장 저항집단들, 관료들, 그리고 군사지도자들이 출현했다. 남북한은 다같이 식민지 통치기간 동안 생겨난 정치 엘리트 및 정치적 갈등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19년은 대중운동이 한국을 포함한 많은 식민지,반식민지 국가들을 휩쓸었다. 수개월간 계속된 전국적인 군중항거를 촉발시켰다. 일본 경찰과 헌병은 이 저항을 진압할 수 없어서 육군은 물론 해군까지 동원해야 했다.


다시 한번 한국인들은 일본의 또다른 식민지인 대만과 현격한 대조를 보여주었다. 한국의 3.1항쟁과 중국의 5.4운동이 일어난 후에도, 관찰력이 예리한 한 미국 여행가는 대만에서는 일본옷을 입은 사람들이 꽤 많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게다를 신고 기모노를 걸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적었고 한 관리는 '대만에서는 장려해서 될 수 있는 일이 한국에서는 강압해야만 이루어진다'고 진술했다.






3.1항쟁 이후 일본은 식민통치를 소위 문화통치로 변경했고 이 새로운 정책을 계기로 식민주의에 대한 점진주의적 저항이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에 한국인들은 언론과 결사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완화된 것을 이용해 다양한 민족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단체들을 일부는 공개적으로 일부는 비밀리에 조직했다.


1927년 온건한 민족주의자들과 소수의 좌익이 제휴한 신간회가 결성되면서 정치적 발전의 희망이 생겨났다. 1929년에 이르러 신간회는 138개의 지회와 거의 37,000명의 회원을 두었고, 한국어 연구와 더 많은 표현의 자유 등을 지원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신간회는 지속되거나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중략)


기독교가 일본에 반대했다는 것은 사실이자 동시에 전설이다. 1919년의 독립운동과 같은 폭력의 시기에 교회는 성역이었으며, 많은 서양 선교사들은 약자와 평등주의 충동을 고무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다른 친미 정치가들이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이자 식민주의 저항자라는 해방 이후의 이미지는 잘못된 것이다.


이승만과 김규식 같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 때문이라기보다 영어를 통해 정치적 입지를 얻기 위해 배재학당 같은 기독교계 학교에 갔다. 영어를 덜 강조하자 배재학당 입학은 감소했다. 1905년에는 입학한 지 하루이틀 만에 학생 절반이 영어를 찾아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기독교 사상과 자유주의 사상이 세기 전환기의 한국 개혁가들의 특징이었다면, 사회주의 사상은 1920년대에 젊은 한국인들 사이에 퍼졌으며, 역시 그 운동의 주된 주체로서 천민들이 나섰다.


중국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젊은이들은 유고와 그들의 역사에 등을 돌리고 과학, 민주주의, 사회주의를 포용하기 위해 맹렬히 달려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남북한 양쪽에서 훨씬 더 큰 힘을 얻은, 과거에 대한 급전적인 부정이 씨앗을 바로 여기서 배태되었다. 옛 한국은 박정희와 같은 자본주의 개혁가들(?)이나 김일성과 같은 급진적인 민족주의자 모두에게 쓸모없는 과거처럼 보였다. 그들은 결코 과거에서 도망칠 수 없었음에도, 미래를 향해 달려나갔다.






물론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언제나 한국 민족주의자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민족주의자들은 또한 한국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외국으로 망명한 사람들로 한층 더 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은 급진주의자들과 '점진주의자들'로 갈라졌으며, 후자는 문화 교육 활동을 통해서 한국인들이 독립을 준비하는 길을 주장했다.


망명자들은 한국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적인 문장투쟁을 선호하는 사람들과 외교적인 방식을 주창하는 사람들로 더욱 분열되었다. 우리는 식민지시기의 위대한 회고록 중 하나인 김산의 <아리랑>에서 이런 분열을 생생하게 본다.


김산은 워싱턴 거리를 돌아다니며 국무부 외교관들을 붙잡고 긴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승만 같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미국계'에 대해, '이들은 전부 신사들이었다. 그들 대다수는 영어를 훌륭하게 구사했다. 실제로 그들은 설득력 있는 영어를 구사함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고 말했다. 김산은 중국혁명에 투신하면서 그곳에서 한국을 식민주의로부터 궁극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는 충분한 무력을 증강하기를 바랬다.


다른 많은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북벌, 1927년 상하이 소요, 그에 뒤이어 일어난 광동 꼬뮨으로알려진 꽝뚱봉기에 참가했다. 1930년대에 그는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장정'을 시작해 연안의 기지까지 갔다.






그러나 가장 큰 분열이 제1차 세계대전 후 한국을 세계사의 주류에 끌어들였으니 그것은 자유주의적 이상주의와 사회주의, 윌슨과 레닌 사이의 분열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의 이상과 연계되는 장점이 있었던 반면 미국이 한국이 독립을 지원하는 데 관심이 없다는 불리한 점이 있었다. 더구나 한국 내에서 그들의 사회적 기반은 아주 빈약했다.


사회주의자들에게는 '볼셰비키'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표적으로 삼아 감옥에 집어넣는 일본 경찰이 치안활동이 불리한 점인 반면, 장점으로는 잠재적으로 막대한 대중적 기반과 한국을 대신해 희생하려는 정신이 있었고, 그리하여 1920년대 말에 즈음해서 그들은 한국의 저항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한국 공산주의에 대한 탁월한 학자(?)인 서대숙은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일제의 억압에 이미 오래 전에 굴복한 나이 많은 한국인들에게 공산주의는 새로운 희망이자 마법의 손길이었다. ... 한국인 전체에게 공산주의자들의 희생은 민족주의자들이 이따금 행한 폭탄투척보다 훨씬 더 강한 호소력이 있었다. 고문을 당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초췌한 모습, 모든 한국� 이따금 행한 폭탄투척보다 훨씬 더 강한 호소력이 있었다. 고문을 당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초췌한 모습, 모든 한국인들의 공동의 적을 향한 그들의 단호하고 엄격한 태도는 사람들에게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라고 기록했다.






중국과 소련에 있는 한국 투사들은 일찍이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저항단체들을 결성했다. 조선공산당은 1925년 한국에서 결성되었다. 박헌영이 그 조직자들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해방 이후 남한에서 한국 공산주의의 지도자가 되었다.


상하이의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포함한 다양한 민족주의 단체들 역시 이 시기에 출현했으며, 임시정부 요원들 중에는 이승만과 또 다른 유명한 민족주의자인 김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국 국민당은 임시정부의 독립을 계속 꺾었으니, 쑨원의 삼민주의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고, 일본의 항의를 내세워 국민군에서의 한국군 훈련을 거부하는가 하면, 전쟁이 시작되자 소규모의 임시정부군을 마지못해 지원하다가 1941년에는 이 군대에 대한 임시정부의 지휘권을 박탈했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2년이 채 못 가 대혼란에 빠졌으나, 1944년 장제스는 결국 임시정부를 전후 한국의 사실상의 정부라고 온건하게나마 승인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일본이 항복한 후에 국민당이 중국을 통일할 수 없게 되자 임시정부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일본 경찰의 빈틈없는 억압과 내부의 파벌주의로 인해 급진적인 단체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많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 투옥되어 1945년에야 석방되었다.


하지만 일본이 1931년 만주를 침략해서 합병했을 때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을 포용하는 강력한 유격대 저항군이 출현했다. 1930년대 초에는 족히 2만 명 이상의 게릴라들이 일본과 싸우고 있었다. 잔학하지만 효과적인 유격대 토벌작전 이후 그 숫자는 1930년대 중반에 수천 명으로 줄었다.


만주에서의 한국인의 저항은 매우 강했다. 최근의 한 중국 소식통은 인구비례로 볼 때 한국인 저항자들의 비중이 한족을 포함한 다른 어떤 민족의 경우보다도 훨씬 높았다는 것을 발견했다."(p.219~226)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14 : 만주 항일유격대






○ 커밍스 교수의 한국사와 한국현대사 부분을 읽다보면, 커밍스 교수가 한반도 전체 차원에서 한민족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분단된 현재의 남북의 상황을 이해하고 화해시키고 재결합시키기 위한 나름의 애정과 관점이 돋보입니다.







○ 북한과 북한사회, 북한 현대사, 북한 주민들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 바로 만주와 간도 등지에서 활약한 김일성과 항일 유격대의 무장투쟁이며, 유격대 주체들이 해방 후 북한에 복귀한 후 정부를 수립하고 지도부를 형성한 과정일 것입니다.






"김일성이 출현한 것은 바로 이런 환경(1930년대 중반 수천 명으로 줄어든 만주 유격대 상황)에서였다. 그는 1930년대 중반에 중요한 유격대 지도자였다.


일본인들은 김일성을 가장 효과적이고 위험한 유격대원들 중의 하나로 생각했다. 일본인들은 그를 추적하기 위해 유격대 토벌 특수부대를 편성했으며, 분리지배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인들을 그 부대에 집어넣었다.






오늘날 남북한에는 이 유격대 저항에 관한 우스운 신화들이 존재한다. 북한은 김일성이 단독으로 일본을 쳐부수었다고 주장하며, 남한은 김일성이 숭배받는 애국자의 이름을 도용한 사기꾼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험은 전후 한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항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주된 근거이다. 북한 사람들은 그들의 군대, 지도부 및 이데올로기의 기원이 이 건국의 순간까지 거슬러올라간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북한의 최고 수뇌부에는 만주에서 일본인들과 싸운 핵심지도자들이 아직 끼여 있다. 물론 나머지 지도자들은 지금 대부분 죽었지만 말이다.






김일성과 그의 동지들에 대한 신화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 엄밀한 문서조사를 통해 진위가 가려질 것이다.


예를 들자면, 만주에서 김일성을 추적한 바 있으며 그들의 경험과 판단을 바탕으로 한국전쟁에서 한국 유격대와 싸우는 법을 미국인들에게 제공한 일본 관동군 대령 두 사람이 1951년에 수행한 희귀한 연구가 있다.


그들은 김일성을 1930년대 말 한국 유격대 지도자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김일성은 특히 만주의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를 한국의 영웅으로 칭찬하고 그에게 비밀리에 정신적, 물질적 후원을 한 한국인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김일성과 다른 한국 유격대원들은 양징위 같은 중국 지도자들과 손을 잡긴 했지만 어느 누구로부터도 실질적인 지휘를 받지 않았다. 그들은 끄레물린의 조종을 받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휘조직이 소련군이나 중국 공산군과 관계를 갖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게릴라 토벌부대를 피하기 위해 소련국경을 넘나들었지만 소련인들은 무기나 물질적 원조를 거의 제공하지 않았다.






유격대는 상주기지를 설치하지 않고 50명이나 100명의 소부대로 싸웠는데, 집단이 크면 클수록 공격받거나 잡힐 공산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일로 평가되었다. 그 대신 그들은 '항상 풍부한 계획과 전술로 적을 기습공격한다'


'그들은 토벌부대의 공격을 받으면 밀림에 나 있는 나무꾼들이 길을 따라 원숭이들처럼 움직여야 했다'


대규모 유격대 작전이 시작된 1939년까지 지방경찰은 '완전히 유격대들의 수중에 있었다'


1938~1939년에는 심지어 일본군조차도 중대한 손실을 입었다. '관동군 휘하의 부대들이... 매목한 비적(유격대)에게 전멸되는 경우가 적잖이 있었다' 1939년 봄에는 전체 수송대와 보병중대가 궤멸되기도 했다.






유격대는 수시로 그 지역의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수십 만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간도는 '한국 비적들에게는 매우 안전한 곳이었다.'


일본 관리들은 이 지역의 한국인들을 가리켜 '사악하고, 반란적이고, 반일적'이라고 묘사했다. 이 '반란적이고, 교활하고, 게으르고' 정말 '불만에 가득 찬 사람들' 중에 '좋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 소수의 사람들이 일본인을 도왔다.


한국인의 불쾌한 습관 중에는 '겉으로 매우 친절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일본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 있는' 것이 포함되었다. 그들은 유격대들에 대한 어떤 정보도 일본인에게 주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한국인들의 보편적 사악함을 나타내는 또다른 표지라고 추정된다."(p.227~229)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15 : 식민지의 폐해






○ 식민지 기간 동안 일제가 저지른 악행은 수도 없이 많지만, 특히 강제징용과 강제노력동원이 가장 처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커밍스 교수의 말대로 일제에 의해 한민족은 수십 년 동안 이산가족과 강제 이주로 인하여 엄청난 민족적, 사회적, 가족적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이런 일본의 죄악을 자신들의 냉전군사전략이라는 목적으로 한일협정을 강제한 미국과 불법으로 집권한 정권 연장을 위해 몇 억 달러의 원조와 차관으로 민족의 한을 팔아먹은 박정희 일당은 영원히 역사와 민족의 죄인으로 낙인 찍힐 것입니다.






○ 커밍스 교수는 미국, 일본을 떠나 국내 기득권층, 친일파 후예, 지배계층이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를 파헤치는 것을 지속적으로 기피하는 이유 중 하나를 폭로합니다. 그것은 수백 만 명의 징병, 징용, 위안부들이 결국 각 읍, 면, 동의 친일 경찰과 친일 관료, 친일 지식인들에 의해 강제로 동원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 아래에 기록된,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정치적 강제동원, 청년단체, 반공연맹, 관변단체, 사상개조 등을 그대로 답습한 인간들이 바로 이승만과 김구 같은 우익이었고, 김성수와 김창룡, 채병덕과 장택상 같은 친일파였습니다.


박정희 일파는 만주군/일본군이었으니 당연하게 적극 이용하였고 전두환 역시 친일파 후예이니 그대로 답습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굴욕적이고 분기탱천할 일이었습니다.






"일제 치하의 마지막 10년간 한국이 겪은 엄청난 인구이동과 이향을 그렇게 단기간에 겪은 다른 농업사회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예로부터 지방의 인구분포는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인구이동은 그만큼 더 파괴적이었다.


1944년에는 전체 한국인들 중 11.6%가 한국 밖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 비율은 어떤 다른 극동국가의 인구도 필적할 수 없고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거의 유례가 없는 비율이었다. 모든 한국인들의 약 20%는 외국이나 자기가 태어난 도와는 다른 도에서 살았다.


이들 대부분이 15~50세 사이의 연령집단인 것을 감안할 때 이는 성인인구의 40%가 고향에서 뿌리뽑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1945년 일본이 퇴각한 즈음까지도 타이완 섬이나 심지어 자기 고향을 떠난 타이완인은 소수(3만명)였다. 이들 대다수는 강제동원딘 것도 아니었다.






이 새로운 노동력은 경기침체와 급속하게 증가한 토지집중으로 인해 심한 타격을 받은 농촌잉여인구 출신이었다. 인구의 이동이 가장 큰 곳도, 일본으로 갔던 절대다수의 한국인들도 남부 출신이었다.






이것은 전반적으로 강요되거나 동원된 이동이었다. 초기 몇년 동안에는 농민들이 더 나은 직업을 얻거나 임금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에 이끌렸을 것이지만, 1937년에 이르러서는 북중국에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한국인의 모든 생활국면을 전쟁노력에 맞게 조직하는 데 힘씀에 따라 노동력 동원은 위로부터 강요되었다.


1942년이 되면 노동은 오직 징집디거나 징용되었을 뿐이다.


한국인들은 일본 본토인들처럼 국가총동원법에 복속되어, 여러가지 형태의 징발과 노동 선발대나 '애국'단체 따위에 강제로 참여하게 되었다.






일본의 광범위한 전쟁 노력은 또한 제국 전역에서 노동력의 부족을 초래했다. 한국에서 이는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한국인이 관료직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상당수의 한국 기간요원들이 식민지 중앙정부, 지방행정기관, 경찰 및 사법기구, 경제계획기구, 은행 같은 곳에서 행정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이 일이 식민지배의 마지막 10년 동안에 일어남으로써 불화를 일으키는 유산을 낳았다. 왜냐하면 이때는 또한 일본의 통치가 가장 가혹했던 시기로 한국인들이 가장 고통스럽게 기억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조직되어 도, 군, 읍, 노동현장에 지부를 두었다. 다음 해에는 특별자원단이 군복무를 할 젊은이들을 모으는 한편, 조선반공연맹이 모든 도에 지부를, 경찰서에 지방 사무실을, 그리고 마을, 공장 및 기타 작업장에이 유관단체를 조직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일본에 저항하는 정도에 비례해 노동현장과 학교에서 반공 정신의 토론에 참여하는 것은 의무가 되었다. 불령선인들은 좌익이든 지식인이든 민족주의자이든간에 자신의 정치적 죄를 글로 고백하고 사상을 개조한 사람들의 단체에 참여할 준비가 될 때까지 전체적의적 심문방식을 통해 머릿속의 불순한 사상을 색출당했다.


이런 관행은 1945년 이후 남한과 북한에 깊은 해독을 끼쳤다.






진주만 공격 이후 대동아공영권을 위한 총동원이 가속되었다. 1942년의 지출 가운데 동원예산은 1937년의 그것보다 네 배가 되었으며, 1943년에는 그 지출이 다시 두 배로 늘어났다.


식민지 당국은 또한 모든 자원에서 총 250만 명의 회원을 거느리는 약 3,245개의 청년조직을 결성했다. 바로 여기서 태어난 조직형태가 해방 후 시기에 정치적 청년단체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되는 결과를 낳았다.






1941년에는 약 140만 명의 한국인들이 일본에 있었으며, 그들 중 77만 명은 노동자였다. 22만 명은 건설업, 20만8천 명은 제조업, 9만4천 명은 광업, 나머지는 농업에 가혹한 조건 속에서 종사했다. 그러나 그후 적어도 50만 명이 더 일본으로 파견되었으며, 그 결과 전쟁이 끝날 무렵 한국인들은 일본 산업노동력의 1/3을 차지했다.






식민지 당국은 소위 위안부들을 포함한 동원 노동자들의 할당량을 정했다. 1930년대에 이르면 분리통치술과 노동력 부족으로 말미암아 종족과 지위의 일치현상은 극적으로 쇠퇴하고 결원을 채우기 위해 한국인들은 관료제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일본의 통치는 종종 한국 관리의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그들에게 떨어진 불행을 더이상 이민족 탓으로만 돌릴 수 없었다.






소설 형식으로 씌어진 식민지 시기에 관한 많은 회고록은 경찰에 종사하거나 일본의 명령에 따라 동족을 내모는 한국인들을 묘사한다. 중국과 한국인 게릴라들을 진압하는 데 이용된 기동대들은 보통 일본 조직폭력배와 하층 한국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특히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동원대상을 선발하는 과정은 가혹했으며 분열을 야기했다. 비록 각 도는 인구에 따라 할당량을 배당받았지만 그렇게 선발된 다음의 행로는 지방관리와 경찰에 좌우되는 우연에 맡겨졌다. 일본인들은 주로 감독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에 이 과정은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것처럼 보이곤 했다.






여기서 우리는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참상, 즉 왜 일본이 그것을 은폐했고 왜 그토록 오랫동안 남한 정부가 이를 방치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이 성적 노예에 대한 조사를 개시하게 되면 많은 한국여성들이 한국 남성들에 의해 동원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일본은 한국인끼리 싸우게 만듦으로써 한국의 민족정신을 파괴했고 그 결과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p.248~262)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16 : 국체(國體)






○ 일제가 일본인들과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강요한 '국체'는 자연스럽게 이승만이나 박정희, 전두환 그리고 박근혜까지 민중들에게 강요한 허울 뿐인 '반공주의' '국가의 정체성' '국가주의' '애국'을 떠오르게 합니다.



일제가 말살한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다시금 연구, 발굴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예산도 투입하지 않고 식민사관의 흔적도 남겨둔 채 서둘러 미국의 문화와 서양의 역사를 들여와 짬뽕시킨 미국과 친일파들의 행위는 일제의 답습이자 그림자라 할 수 있습니다.






○ 커밍스 교수의 한국현대사와 강준만 교수의 1940년대사를 비교해 보면 두드러진 차이 중 하나가, 커밍스 교수는 해방 전후 한국인(조선인)들을 존중하면서 그들의 장단점과 특성을 사회역사적, 구조적으로 밝혀내려 애쓰고 있는 반면, 강준만 교수는 한국인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감정적으로 좌우 분열을 일삼고, 쉽게 흥분하고 정치인들에게 휘둘린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 그리고 책을 읽을수록 제가 일제의 만행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발견하게 됩니다...ㅠ






"1944년 말에 일제는 후지산 근처에 황실과 그밖의 정부 고위관리들을 위한 거대한 미궁 같은 지하벙커를 짓기 위해 약 7천 명의 한국인들을 동원했다. 그것은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에 완성되었다.


안전대책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가운데 터널과 동굴에서 서둘러 황급히 폭파작업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무수한 한국인들이 죽었다. 적어도 1천여 명의 한국인들이 이 건설기간 동안 사망했으며, 계속 나도는 소문에 따르면 천황의 밀실을 건설한 노동자들은 적을 그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이유로 나중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여기서도 여성은 위안소에 투입되어 경찰이 빌린 수리된 양잠실에 수용되었다.






이 마지막 고난의 시기(해방 전 10년)에 일본의 선전은 권위주의 정치에 성리학의 사고방식을 접목시킨 것이었다. 무엇보다 지배적인 유행어는 꼬꾸따이(國體)로, 국가의 본바탕이나 정수 같은 것을 의미했다. 두 글자로 된 이 합성어는 '꼬꾸(國)'와 철학적 토대 혹은 정수를 의미하는 따이(體)'를 결합한 것으로, 달리 말하면 일본을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만드는 어떤 것이었다.






천황과 통치자들은 '모든 국사와 완벽한 질서의 꼬꾸따이의 진정한 중요성을 중심으로 삼아' 통치해야 했다. 국민은 '꼬꾸따이를 모든 생각, 사상, 행동의 우너리로 삼고 국민생활에서 그 원리를 분명히 보여주어야' 했다.


히로이또 천황은 태양과 교통하는 일본의 아버지이며, 모든 일본인은 '무스비노미찌(結道)'를 통해 거대한 국가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한국문화는 말살되었고, 한국인들은 일본의 이 야릇한 허튼소리를 되뇌도록 강요당했다. 그들은 사상 처음으로 일본어로 말하고 일본식 이름을 쓰도록 강요당했다. 심지어, 신도(神道)'는 민족주의와 본질주의 사상에 물든 순전히 일본의 종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지배자들은 한국인들에게도 신사를 참배하도록 강요했다.


1940년대 한국에는 벗나무와 석등이 죽 늘어선 곧은 길을 따라 들어가는 신사가 많이 있었다. 조선신궁으로 불리는 가장 큰 신사는 서울 남산에 세워져 있었다.


전부 58개의 신궁이 있었으며, 322개의 소규모 신사들이 전국에 퍼져 있었고, 게다가 310개의 기도소가 있었다.






이런 식민지 활동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1945년에도 여전히 근본적으로 농업사회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한국인 일본인 및 한국인 지주들이 소작농과 19세기의 지주-소작농 관계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소작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사회였다.


한국인 지주 가운데 기업심이 있는 농부는 거의 없었고, 다섯 사람 중 거의 넷은 소작농으로, 그들이 경작하는 땅의 전부 혹은 일부를 임차하고 있었다.






한국의 많은 지주들은 소작료를 거두는 마름들을 통해 땅을 운영하는 부재지주들이었다. 다수의 지주들이 또한 일본인들이었는데, 그들은 한국 소작인들과 거의 접촉하지 않았다. 소위 대지주들은 50정보(약 123에이커)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1942년에 대지주의 범주에 들어가는 한국인은 2,173명, 일본인은 1,319명이 있었다. 일본인 184명과 한국인 116명은 500에이커 이상을 소유했다.






이 시기에 대다수 한국인들은 소수의 사람들이 번영하는 바로 그때 심한 고통을 겪었다. 이 소수는 부일협력(친일)이라는 오명을 얻었으며 결코 그것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의 한국은 1940년대 초 비시 정부 하의 프랑스와 아주 유사했다. 쓰라린 경험과 기억이 사람들을 계속 분열시켰는데, 심지어는 한가족 내에서도 그랬다. 그것은 정면으로 마주보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며, 그래서 그것은 결국 지금 묻힌 역사나 매한가지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국가의 정체성에 계속 작용하고 있다.






식민체제가 1945년에 갑자기 끝났을 때 수백만의 한국인들은 이 이역만리의 동원부대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더이상 예전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고국에 안전하게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불만을 지녔으며, 모두 시골마을을 넘어선 더 큰 세계를 보았다.


따라서 전후 한국사회에 예전과 달라진, 불만을 품은 군중을 풀어놓아 그들로 하여금 해방 직후의 시기와 미국 및 소련의 계획을 심각한 혼란에 빠뜨리게 한 것은 다름아닌 압력솥과 같은 식민체제의 이 막바지 10년이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히로시마와 나카사끼에서 적어도 1만 명의 한국인의 목숨을 빼앗고 끝났다. 그들은 대부분 전시산업에 강제로 끌려나온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일본 지도자들이 그들의 제국 여기저기로 끌고 다닌 인간가축에게 가한 이 무서운 모욕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었다.


전후에 사람들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피폭 생존자들은 인종적인 이유 때문에 일본 정부에 의해 기록에서 지워지고 그들의 존재를 부끄러워한 한국 정부로부터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한국인들이었다.


많은 한국인 원폭 생존자들은 전라도의 삼들로 흩어졌다."(p.255~258)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17 : 민족분단의 책임




"한반도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민족분단과 남북대립이 형성된 시련의 시기는 1943~53년 사이였다. 한반도의 현대정치는 이 10년 간의 사건들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두 개의 한국(korea), 파멸적인 전쟁, 그리고 동북아시아에서의 국제정치 재편은 여기서 형성되었다.

미국은 이런 사건들에서 주된 역할을, 여러 면에서 열강들 가운뎃도 지배적인 역할을 했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나 그 시기의 많은 역사책에는 한국(korea)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1950년에 일어난 전쟁 때까지 별다른 관림을 끌지 못했다.




많은 미국인들은 자국이 1945~48년 사이에 한국을 점령래서 완전한 군사정부를 운영한 것을 알고 놀란다. '뉴욕타임즈'의 전직 편집인이자 고정 기고자였던 로젠설은 1986년에 '한국정부'는 1945년에 한반도 전역애서 제대로 기능하고 있었지만 미국이 어리석게도 러시아를 북쪽에 들어오도록 허용하는 바람에 손상을 입었다고 썼다.

이는 진상을 완전히 거꾸로 본 것이다. 일본 패망 후 몇주 내에 표면상의 한국정부가 실제로 존재하긴 했다. 본부를 서울에 둔 이 정부는 8월 중순에 건국준비위원회로 시작되어, 9월에는 지방에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인민위원회'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의 명칭 역시 9월 6일에는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바뀌었는데, 한국(korea)에 들어오던 미국인들은 예상대로 이 정부를 기피했다.




8월 8일 한국(korea)에서 일본과 싸우기 시작한 소련이야말로 미국인들이 남쪽에 들어오도록 '허용'하고(일부 소련군인들이 38도선 이남으로 내려왔지만 8월 15일 이후에는 물러갔다.), 인민위원회 조직을 지원했다.

미국은 1945년 9월에 한국민주당을 결성한 망명 민족주의자 집단과 국내 일부 보수 정치인들을 정치적으로 선호했다. 1948년에 남과 북에 두 개의 공화국이 수립되기 훨씬 전에, 한국인들은 양쪽 편으로 갈렸고 워싱턴과 모스크바가 그런 양자택일을 강화함으로써 한국은 해방 후 몇 개월 만에 사실상 분단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분단에는 어떤 역사적인 정당성도 없었다. 만약 어떤 동아시아 나라를 분단했어야 한다면 그것은 (침략자인 독일처럼) 일본이었다. 그 대신 한국과 중국과 베트남이 모두 2차 대전의 여파로 분단되었다.

한국은 분단할 내부적인 구실도 없었다. 가령 38도선으로 두 동강이 난 고려의 수도 개성에 사는 사람들은 38도선을 전혀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선이 한국인들에게 유일하게 중요한 선, 필요한 모든 수단을 다해 제거해야 할 경계가 되었다.

우리가 냉전에서 연상하는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분단들이야말로 한국분단의 이유였다. 그런 분단들은 전지구적 냉전이 개시되기 이전에 일찍 한국에 찾아왔다. 다른 모든 곳에서 냉전이 끝난 오늘날에도 계속 남아있다.




아마 이 반세기에 걸친 갈등 때문에 냉전적 서사는 해방기(한국인들은 1945년 8월 15일을 일본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해방'이라고 부른다.)에 관한 미국 역사책들에 너무나 깊이 새겨져 있다.

이런 역사책의 설명은 일본의 항복에서 시작하여, 1945년 12월 소련과 맺은 한국에 관한 협정 및 뒤이은 1946년과 1947년의 1,2차 미소 공동위원회로 재빨리 옮겨간다. 그러고는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을 위한 선거를 후원하는 데 유엔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상술하고, 1950년의 전쟁으로 맺는다.




역사문헌은 이 5년 동안에 일어난 대부분의 문제들을 소련의 방해와 한국의 정치적 미숙 탓으로 돌리고 있다,

사실 한국인들은 이 시기에 역사의 주역으로서 미국과 소련의 힘을 그들의 목적에 맞게 빚어내고 바로 앞서 언급한 '외적인 요인들'이 자국의 목적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으면 대체로 그런 것들을 모두 무시했다.

그러나 민족분단은 한국인들이 한 짓이 아니었다. 38도선에 대한 주된 책임을 져야 할 쪽은 미국이다."(p.261~263)




○ 국내 국사 교과서나 지식인, 언론인, 정치인들의 역사인식이 커밍스 교수의 분단인식만도 못한 것이 현실이라니 정말 씁쓸하고 안타깝습니다. "민족분단의 주된 책임은 미국이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역사학자들, 교사 교수들, 언론사들, 정치인들이야말로 사대주의자일 뿐이며, 따라서 그들이 일본의 침략 망언에 대해 외치는 목소리는 공허할 뿐입니다.




○ 역사적 사실을 존재하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인 미국과 친일파 출신들이 규정한대로 인식하는 태도와 인식을 바로잡지 않는 한 굴욕적인 한국현대사는 온전히 되돌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 고작 상하이와 미국에서 수많은 정파가 내부 대립과 분열을 일삼으며 외교적 수단으로 사대주의적 독립을 모색한 아주 극히 일부인 인사들이 세운 임시정부를 정통성이라고 철썩 같이 붙잡고 있고, 실제 항일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한 만주의 독립군들과 한반도에서 광범위하게 수립한 정부인 인민공화국을 부정하는 태도 역시 무지하거나 비겁한 것입니다.




○ 결국 우리는 '단어에 대한 싸움'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릅니다. 국민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민중과 인민을 되살려야 합니다. People은 국민이 아니라 인민이며 민중입니다.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18 : 38도선






○ 커밍스 교수는 1945년 9월 미군의 한반도 남단 점령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 미국의 대한반도 외교를 1945년부터 2000년까지 통찰하고 있습니다. 맨 마지막 단락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한국인들이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과 한국의 해방을 알리는 히로히또 천황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듣기 며칠 전에, 미국 국무부 전쟁부 해군 3부 조정위원회(SWNCC)의 존 머클로이는 딘 러스크와 찰즈 본스틸이라는 두 젊은 대령에게 옆방에 가서 한국을 분할할 지점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그때는 이미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의 붉은군대가 태평양전쟁에 참전했으며,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이 전선의 전 지역에 걸쳐 일본의 항복을 끌어내기 위해 몰려오고 있던 8월 10일과 11일 사이의 자정 무렵이었다.


주어진 30분 안에 러스크와 본스틸은 지도를 보고 38도선을 선택했다. 그것은 38도선이 '수도를 미국의 영역 안에 둘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38도선은 '소련이 반대할 경우... 미국이 현실적으로 타협할 수 있는 지점보다 훨씬 더 북쪽'이었으멩도 불구하고 소련이 반대하지 않아 러스크는 '다소 놀랐다'.[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45, vol 6, p 1039]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일반명령 제1호를 발표했는데, 거기에는 38도선에 대한 결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를 공표한 셈이다. 러시아는 이 영역분할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이는 한편 일본 홋카이도의 북쪽 지역에 대한 러시아 쪽 점령을 요구했다. 맥아더는 이를 거절했다.






미국 관리들은 이런 결정을 내리는 데 한국인들과 전혀 의논하지 않았으며,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계획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는 영국이나 중국의 의견도 묻지 않았다. 오히려 그 결정은 일방적으로 서둘러 내린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미국의 사전 계획에서 나온 것이었다. 미국은 전쟁 동안 한국에 대한 강대국간의 협의에서 주도권을 장악했으며, 전후 한국에 대한 다수국가의 신탁통치를 1943년 3월 영국에, 같은 해 말에는 소련에 각각 제안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적국 보유의 식민지 처리에 고심했으며 식민지의 독립 요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과 같은 식민지로 하여금 자치와 독립을 준비토록 하는 점진적인 신탁통치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한국이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소련이 전후 한국의 운명에 개입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소련을 다국적 통치에 참여시킴으로써 일방적인 해결책들을 사전에 차단하는 한편 한국에서의 미국의 이익을 보장하는 조항을 마련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독립은 단지 적절한 시기에, 또는 '적절한 절차를 밟아' 이루어지리라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이 구절은 루즈벨트가 윈스턴 처칠과 장개석과 만난 1943년의 카이로 선언에서 사용되었으며, 하라 케이 일본 수상이 1919년 3.1 운동 후의 일본의 '문화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적이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루즈벨트의 신탁통치 구상이 그들의 제국을 위협하기 때문에 이에 저항했다. 한국인들 또한 일본보다 더 큰 강대국들이 '보호감독'을 실시할 가능성에 모욕을 느끼고 저항했다.


스탈린은 이 정책에 확실한 공약을 하지 않았지만 전후 세계에서 제국의 장래를 두고 루즈벨트와 처칠이 벌이는 논쟁을 지켜보며 즐기는 듯했다. 스탈인은 전쟁중에 루즈벨트와 한국에 관해 토론할 때 주로 침묵을 지켰으며, 루즈벨트와 그가 애착을 지닌 신탁통치 구상에 비위를 맞추거나 한국인들은 독립을 원할 것이라고 말하는 정도였다. 스탈린은 틀림없이 신탁통치 구상을 순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루즈벨트는 국무부의 의견을 좀처럼 듣지 않았지만, 국무부의 정책입안자들은 1942년 진주만 공습 후 불과 몇달 만에 이미 소련의 한국개입이 태평양에서 미국의 이익과 안전에 미칠 결과를 우려하기 시작했으며, 신탁통치를 통해 미국이 한국문제에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의심했다.


그들은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워온 한국 유격대원들을 소련이 데리고 들어오지 않을까 두려워했으며, 유격대원의 숫자를 3만 명까지 엄청나게 과장했다.


여러 정책 입안자들은 신탁통치가 효과가 없을 것을 염려하여 전후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의 압도적인 발언권을 보장해줄 전면적인 군사적 점령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단기간의 점령일 수도 있고 아니면 '상당한 기간'의 점령일 수도 있지만, 요점은 '미국의 막강한 힘'이 '그 효율성이 약화되는 지경에' 처할 정도로 다른 강대국이 한국에서 뚜렷한 역할을 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발상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었다. 이전의 어느 행정부도 미국의 한국문제 개입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의회와 미국인들은 참여 구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 정책입안자 가운데 몇몇은 친일파였으니, 전에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특권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전혀 없었고 이제는 평화롭고 순종하는 전후 일본을 재건하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소련의 한국점령이 이런 목표를 방해하고 따라서 태평양의 안전을 훼손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내 견해로는, 노련한 수완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있었더라면 38도선 결정 역시 내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1945년 4월에 죽었다.


루즈벨트의 일관된 생각은 한국의 공동관리에 러시아인을 참여시키는 것이었고, 그들의 접경국인 한국에서 그들과 그들의 이익을 포용하며, 그럼으로써 러시아인들의 야심을 봉쇄하는 한편 반대급부를 주려는 것이었다.


분할은 외교를 포기하고 단지 땅에 선을 긋는 훨씬 더 조잡한 방식이었다.






사실 무분별하게 선을 그은 그 순간부터 1994년 10월 미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에 핵합의(탈냉전의 전제에 근거한 합의)가 이루어지기까지 어떠한 국제외교도 한국의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가 없었다."(p.263~266)






○ 38도선은 미군 국방부의 군바리들이 대령 두 놈에게 지시해 30분 만에 지도에 그어버린 선입니다. 그렇게 한반도의 분단은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 3천 만 한민족의 운명은 양키 군바리 몇 놈이 강제한 셈이죠. 물론 그 뒤에는 제국주의 미국의 태평양 지배라는 배후가 있고...






○ 커밍스 교수에 따르면, 한국에서 통용되고 있는 '미-소간의 공격적 한반도 분할 점령'이라는 역사분석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련과 스탈린은 당시에 38도선 분할이나 제국주의 국가로서 식민지 점령이라는 관점에서 한반도를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을 커밍스 교수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 커밍스 교수에 따르면, 미국 내에 친일파들이 일제의 패망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지속적으로 한반도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일본을 통해 미국의 이익을 확보하려 한 정황이 나타납니다. 그런 모습은 21세기인 현재에도 연결되고 있죠. 한-미-일 군사동맹은 동북아를 일본군을 중심으로 미 제국군대의 방어군대로 재편하려는 의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1945년 한국 점령 이후 미국과 미군은 단 한 번도 일제에 식민지 강제통치로 고통받아온 한국인들에 대한 고려나 이해는 없다는 것을 똑똑히 각인해야 합니다. 오히려 장려해왔죠.(일제 강점기간에도 그랬지만...)






○ 제2차대전에서 일제의 패망 후 미군이 한반도 남단을 점령한 것은 2차대전이 제국주의간 식민지 쟁탈전이었고 미국이 승전국으로서 패전국 일제의 식민지 중 하나를 단순히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은 것이지만, 루즈벨트의 사망 등 몇 가지 우연이 겹쳐 작용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20세기 후반기까지 한민족과 한국 민중들은 지독히도 운이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19 : 식민지 유제






"1943~1947년의 시기는 미국의 고위급 외교의 국제주의 단계를 대변했는 데, 이는 아직까지 분단되지 않은 한국을 소련을 포함한 다른 강대국들의 협력을 받아 일시적으로 다수국가의 관리 아래 두려는 신탁통치 정책과 미국의 욕구에 반영되어 있었다.


이 정책은 우선 한국을 점령하고, 그런 다음 러시아 영국 중국과의 신탁통치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이었다.






미국은 1945년 12월 외무장관 회담에서 신탁통치안의 수정안에 대한 소련 측의 동의를 얻었다. 이 중요한 합의는 영국과 중국의 부적절한 영향력을 배제하는 한편 미소 양대 강국이 한국의 재통일 방식에 관해 궁극적으로 타협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루즈벨트는 미국의 필리핀 식민통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신탁통치가 길게는 40년 내지 50년간 지속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지만, 1945년 12월의 합의서에는 강대국들간의 한국문제 간여기간을 최대 5년으로 단축했으며 한국의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렇게 일찌감치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합의 역시 너무 때늦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두 점령국의 사실상의 정책들은 소련을 김일성 및 인민위원회와 동일시했는가 하면, 미국은 이승만을 지원하면서 식민지 유제의 철저한 청산이라는 한국인들의 광범위한 요구와 인민위원회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제주의 정책이 훼손된 것은 소련에 의해서라기보다 냉전적 '봉쇄정책'의 초기 형태를 한국 현지에서 개시하려는 미국의 결정때문이었다.






존 머클로이처럼 워싱턴에서 파견괸 고위 사절뿐 아니라 미국의 군사령부는 남한에서 미국의 욕구에 저항하는 것을 급진적이고 친소련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미군은 '인민공화국(인공)'을 한국 전역을 지배하려는 소련의 종합기본계획의 일환으로 보았다.


지주들을 몰아내고 식민지 경찰에 가담한 한국인들을 공격하는 급진적인 행동은 대개 식민지 시대로부터의 해묵은 원한을 청산하는 문제이거나 자신의 일을 자신이 처리하겠다는 한국인들의 요구의 문제였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곧바로 소련과 미국의 경쟁관계 속에 휘말리게 되었으니, 냉전이 1945년 후반의 몇 개월 사이에 한국에 도래한 것이다.






서울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을 조직한 핵심인물은 여운형인데,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여운형의 정치관은 기독교 정신과 윌슨 식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혼합된 것이었다. 그는 항상 좌/우익과 기꺼이 협력했지만 공산당에는 결코 가입하지 않았으며, 유물사관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인민주의자에 가까웠는데, 한국 농부들의 소박한 관용과 대가를 바라지 않는 노동을 '소위 인텔리들, 500년 동안이나 우리 민족의 정신을 마비시켜온 표의문자(한자)를 아는 지식층'과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평민들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다.






여운형은 한국 정계의 좌우합작과 남북분단 제거를 끊임없이 주장했으며, 그런 노력 때문에 1945년 8월에 폭행당했고, 1946년 10월(그가 김일성과 회담하고 돌아왔을 때)에는 거의 린치를 당할 뻔했고, 1947년 3월에는 수류탄 투척으로 그의 집이 일부 파손되었으며, 1947년 7월에는 마침내 살해되었다.


여운형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를 파멸시킨 분단된 한국의 상황과 이분법적 좌우 대결 정치계에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미 점령군이 일단 현상유지를 지지하고 식민지 유제의 철저한 개혁을 저지하기로 결정하자 곧 남한대중으로부터 엄청난 반대에 부딪쳤다.


미군 점령 후 일년인 1945~46년의 대부분은 지방에서 출현한 많은 인민위원회를 억누르는 데 사용되었다. 이 진압으로 인해 1946년 가을 4개 도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이 폭동이 진압된 후, 급진적인 활동가들은 1948년과 1949년에 의미심장한 유격전을 전개했다. 그들은 또한 1948년 10월 여수항에서 또 한차례의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런 혼란의 많은 부분은 토지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탓이었으니, 보수적인 지주들이 자신들의 관료제 권력을 이용해 토지를 소작농에게 재분배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물론 북한은 이 불만을 이용하려 했지만, 명백한 내부 증거를 보면 거의 모든 반대자들과 유격대들은 남쪽의 정책에 화가 난 남쪽 사람들이었다.






사실 좌익의 주력은 역사적으로 반항적인 남서쪽의 전라도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가장 뼈저리게 경험했던 남동쪽의 경상도 같은 38도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들에 있었다."(p.267~270)






○ 커밍스 교수는 해방후 분단과 친일파의 부활은 미국의 정책 실패, 특히 소련과 국내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오판과 냉전정책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 대한반도 정책의 외형적인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죠.


찰머스 존슨 교수의 저서를 읽어보면, 실제 그런 미국의 정책과 오판의 이면에는 더 이상 전쟁 수요가 없는 지구촌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미국 내 군국주의 세력과 독점이익을 상실한 제국주의 자본의 의도적인 공작이 개입되었을 가능성도 클 것입니다.






○ 요즘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친일 논쟁이 거세게 불고 있는데, 다른 한 편에서는 해방 후 한국사에서 사대주의, 숭미주의, 종미주의 역사관이 반공과 반북 이데올로기라는 미명 하에 커다란 문제로 잠복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다행하게도 노근리 학살과 조봉암, 제주 4.3항쟁 등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10월 인민항쟁이나 여순항쟁에 대한 재평가가 시도되고 있는 데, 마찬가지로 몽양 여운형 선생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인민공화국, 전평과 전농, 부녀동맹과 학병동맹 등에 대한 재평가도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 현대 한국사회에서는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책임을 이승만에게 과도하게 지우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 친일파 청산을 무력으로 가로막은 주체는 미군정이었고 한국인으로는 이승만뿐 아니라 김구, 김규식 등 우익 민족주의자들도 적지 않은 책임을 분담시켜야 할 것입니다.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20 : 꼭두각시






"맥아더 휘하 25군단의 정보책임자인 세실 니스트와 미점령군 하지 중장의 국무부 정치고문인 베닝호프가 1945년 9월 15일 워싱턴에 보낸 보고서에서 남한 내 인민들이 '즉각적인 독립과 일제 청산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단히 실망했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밝힌다. 또한 그들은 '일본인들 밑에서 높은 지위에 오른 한국인들은 친일분자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들의 주인들만큼이나 증오의 대상이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정과 워싱턴은 한반도의 즉각적인 독립과 일제 청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서울의 정치적 상황에서 가장 고무적인 단 하나의 요소는 '나이가 많고 교육을 잘 받은 한국인들 가운데 수백 명의 보수주의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그들 중 대다수가 일본에 봉사했던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런 낙인은 결국에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고 보고했다.






이런 보수주의자들에는 김성수와 그의 동생 김연수, 송진우, 조병옥, 윤보선, 장택상과 나중에 알려진 그밖의 한국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9월 16일 미국의 강력한 후원을 받아 창당된 한국민주당은 한국판 '자유민주당', 즉 나중에 일본에서 출현한 자민당과 같은 지배적인 보수정당이 되었다. 한민당은 그때부터 지금에 이르는 야당의 구조를 결정지었는데, 이 당의 충실한 당원들 중의 한 사람인 김영삼이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둘 다 정치적 뿌리를 이 정당에 두고 있다. 장택상은 김영삼을 이끌어주었다.






그러나 점령군이 이렇게 일찌감치 성유를 부어 미화작업을 해두지 않았다면 이들 보수적인 인물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문제는 당시 한국사회에는 미국인들이 이해하는 것과 같은 자유주의 정당이나 민주주의 정당이 들어설 토대가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인구는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가난한 농민들과 대부분의 부를 차지하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 즉 지주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지주들이 한민당의 진짜 토대였다.






식민지 시기 동안 한국사회의 엘리트는 나머지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동안 거의 대다수가 식민지 지배하에서 비대해졌다고 널리 인식되었다.


역사적 문헌에서 더없이 분명한 점은 미국이 개입한 것은 니스트가 거론한 '가장 큰 단일집단'이 아니라 한국에서 가장 작은 집단을 위해서였으며, 미국은 게다가 이 집단의 특권이 그 후에까지 지속되게끔 도와주었다.






미국은 장점이라고는 반공주의밖에 없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토착 좌익들을 반대하는, 불운한 두 극단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도 한국사회에 들어설 토대가 전혀 없는 자유주의적인 결과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친일파)의 주된 문제는 그들이 민족주의자로 내세울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몇몇 망명한 항일 민족주의자들을 불러들이기를 바라는 한편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망명한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들은 하지에게 미국에 있는 이승만과 여전히 장개석과 함께 전시 수도인 충칭에 머물고 있는 중국의 김구가 귀국하여 남한 보수주의자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이승만의 경우는 워싱턴에 있는 전시 정보기관 사람들과 친분관계가 있었고 그들이 이미 그를 서울에 데려오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프레스턴 굿펠로우였는데, 그는 윌리엄 도노반 밑에서 CIA 전신인 전략사무국의 부국장을 지냈으며 군정보 계통의 배경을 갖고 있었다. 그는 도노반과 마찬가지로 비밀공작에 대한 관심과 전문기술로 말미암아 이름이 알려졌다.


굿펠로우는 이승만이 다른 한국 지도자들보다 더 '미국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매카서의 도움을 받아 그를 10월에 한국에 돌려보내도록 조치했다. 그러고는 굿펠로우 자신이 직접 한국에 도착해서 남한 단독의 반공주의 정부를 수립하려고 애썼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16일 매카서의 전용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왔으며, 나흘 후 하지 중장은 그를 한국 대중에게 소개했다.






공교롭게도 1945년 10월 미소 양국의 군사령부가 두 망명자들의 귀환을 위한 환영식을 후원했다. 이승만은 하지가 곁에 앉아있는 가운데 강력한 반공연설을 할 수 있었으며, 김일성은 1945년 10월 14일 소련 관리들이 뒤에 서 있는 가운데 항일영웅으로 소개되었다.


소련측에서도 '굿펠로우' 같은 사람이 김일성을 평양으로 돌려보냈는가? 분명 그렇지 않았다.


5개 국어로 된 최초의 조사를 보면 만주의 유격대들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김일성, 김책, 최현, 김일, 최용건 같은 최고 지도자들 사이에서 김일성을 최고의 인물로 부각시키기로 합의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에는 김일성의 폭넓은 명성과 강한 성격이 포함되었다. 몇몇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들도 있었으니, 가령 김책과 최현은 중국공산당 서열에서 김일성보다 앞서 있었다.


김일성과 그의 유격대에 속하는 약 60명의 대원들은 중국과의 접경인 신의주를 통해 한국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다리가 폭파되었던 탓에 러시아의 함대 '푸가초프'호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해 12월 9일에 원산에 상륙했다.소련 수송선이 이들을 한국에 데려다주었지만 그들은 소련당국과는 무관하게 돌아왔다.[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와다 하루키]


어쨎든 김일성과 그의 유격대가 9월 19일 한국으로 들어왔을 때, 그들은 그를 실제로 지지했으며 그에게 일생동안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쳤다. 그들은 다른 만주 유격대들과 함께 북한 권력서열의 핵심이었다.






수개월 내에 김일성과 이승만은 양쪽 지역에서 가장 유력한 정치적 인물이 되었다. 이승만은 거의 40년간이나 미국에서 살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오스트리아인 아내를 둔 70대 노인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해서 유명해진 애국자였지만 또한 터무니 없는 고집과 강력한 반공신념을 지닌 고집불통이었다.


김일성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일본이 1932년 만주국이라는 괴로국가를 세운 직후 한중 국경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시작했으며, 1945년에 이르러서는 그의 동지들 대다수의 생명을 앗아간 거친 유격전에서 운좋게도 살아남았다.


김일성은 귀국했을 때 33세였으며, 아버지 세대의 실패에 대한 경멸로 가득한 젊은 세대의 혁명적 민족주의자들을 대표했다. 그리고 그는 외국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한국을 만들어내려는 결심이 확고했지만 동시에 소련군과 기회주의적으로 동맹을 맺기도 했다.






두 지도자가 각각 초강대국의 지지를 받았지만 양자가 모두 꼭두각시이기는 커녕 호락호락한 인물도 아니었다."(p.272~275)






○ 커밍스 교수는 해방 후 친일파가 살아 남고 남한 내에서 기득권 세력이 된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국정치에서 야당의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지난 시기 민주당 내 적지 않은 의원들이 친일파나 그 후예들, 매판재벌 등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작년 12월까지 '다까끼 마사오'라는 박정희의 일본명을 국내 방송에서 단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던 이유를...






○ 커밍스 교수의 조사, 연구 결과를 보면 그동안 남한 내에 편파적으로 알려져 있던 미국과 이승만, 소련과 김일성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21 : 반공주의와 친일파 부활






"지난 50년, 아니면 심지어 1950년의 시점에서 이전의 5년을 돌이켜볼 때, 우리는 식민지 지배와 즉각적인 '해방'이라는 압력솥이 야기한 한국의 많은 사회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했을 정화의 불을 상상할 수 있다.


그 정화의 격변은 아주 끔직하긴 했겠지만 1950~53년 사이에 일어난 수백 만의 인명손실, 1960년 4월 혁명이나 1980년의 광주항쟁에서의 수천 명의 인명손실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가 한국을 떠났더라면 좌익정권이 재빨리 권력을 접수했을 것이며, 그 정권은 혁명적인 민족주의 정부가 되었을 것이고, 중국이 그랬고, 베트남이 오늘날 그러는 것처럼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온건해져 국제사회에 다시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상상을 해보아야 하는 것은 미국인들이란 사회혁명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그것의 취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은 하지와 많은 미국인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기' 위해 한국을 점령한 꼴밖에 안되리라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미국은 한국을 한국인들에게 넘겨주려 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반공주의적 남한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적극적인 행동'을 진척시켰다. 그리하여 남한은 미국이 나중에 그리스나 인도차이나 이란 과테말라 쿠바 니카라구아 등, 세계 곳곳에서 추가한 정책들의 선례가 되었다.


이들 국가에서 미국은 반공을 표방하는 집단이면 무엇이든 옹호하게 되었는데, 그 대안은 더 나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50년이 지나서도 한국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남한 단독의 공공 조직들을 수립하는 일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에야 선포되었지만 이남의 정치조직은 점령한 지 첫 몇 달 안에 조직되어 1960년대까지 실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1945년 11월 및 12월에 하지와 그 고문들은 네 단계를 취하기로 했다. 첫째, 38도선을 지킬 군대를 창설한다. 둘째, 남한을 진정시키기 위한 주된 정치적 무기로서 한국국립경찰을 창설한다. 셋째, 우익 정당들과의 협력을 강화한다. 넷째, 이런 정책들을 좋아하지 않는 한국인들을 억압한다.


일본의 무장해제를 위해 한국을 점령한 군대가 이제 남한에 봉쇄 방파제를 집중적으로 쌓고 있었다.






'국방'사령부가 1945년 11월 중순에 이미 설치되었고, 그후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12월에 장교 후보생들을 위한 군사영어학교를 설립했고, 그런 다음에는 한국 육군사관학교르 설립해서 1946년 가을까지 두 차례 졸업생을 배출했다.


2회 졸업반에는 미래의 대한민국 대통령인 박정희와 종국에 그의 암살자가 된 김재규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일본군의 장교로 복무한 적이 있었다. 노태우 정부 초기에 국무총리를 역임한 강영훈 역시 처음에는 일본군에서, 다음에는 미국의 후원을 받는 군대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하지는 워싱턴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그것을 '경비대'라고 불렀지만 이는 한국군의 모태조직이 되었다.






물론 '상부에서' 반대한 이유는 미국의 공식적인 정책이나 외국 점령지 통치에 관한 국제법 어디에도 미국이 한국 군대를 창설할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군사영어학교의 제1기반에 일본군 장교 출신 20명, 만주에 있었던 일본 관동군 장교 출신 20명, 중국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출신 장교 20명을 선발했다.


그러나 광복군 출신 중에는 전쟁 동안 적의 편에 섰던 한국인들과 함께 일하려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남한 군대는 조국이 가장 큰 시련에 처했을 때 잘못된 편을 선택한 것으로 생각되었을 수 있는 그런 한국인들이 모인 곳이 되었다.






한국 점령을 위한 국무,전쟁,해군 3부 조정위원회의 '최초의 기본 지령'은 지탄받는 식민지 경찰 내의 협력자들을 색출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것을 요청했다. 하지를 지휘하는 도쿄의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최초의 보고서에서 경찰이 '철저하게 일본화되었으며 폭정의 도구로서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무렵(10월 초) 한민당의 지도자들은, 특히 세실 니스트 등의 미국인들이 엄선한 조병옥, 장택상은 이미 한국 국립경찰을 운영하고 있었다.


점령정부는 1945년 10월 15일에 이 병력을 옛 일본경찰학교에서 재훈련하기 시작했다. 이때쯤에는 일본 경찰에서 근무한 한국인들의 약 85%가 국립경찰에 채용되어 있었는데, 그 수치는 일년 후에도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국립경찰의 미국인 책임자 윌리엄 매글린 대령은 1946년 11월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는 식민지 경찰관리 출신들의 내역을 제출했다.(사진 참조)






미국인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국립경찰에 저항해왔으며, 일본에서는 매카서가 비무장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점령 목표에 장애가 된다고 해서 일본의 국립경찰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하지와 그의 고문들이 주된 정치적 반대 세력이며 1945년 9월 서울에서 수립된 조선인민공화국과 그것과 연계된 많은 시골의 위원회들, 노조들과 농민단체들에 대항해 독자적인 국립경찰을 창설했다.


하지는 1945년 12월 12일 조선인민공화국에 '전쟁을 선포'했으며, 나중에 '단호하게 말해서 우리의 한 가지 임무는 합동참모본부와 국무부로부터 어떤 지령도 받지 않고 또 어떤 지원도 없이 이 공산주의 정부를 분쇄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p.281~284)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한국인들에게도, 국내 지식인과 역사학자 정치학자들에게도 커밍스 교수 정도의 장기적인 역사적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의 말대로 해방 후 미군정이 일본군 무장해제만 하고 철수했으면 친일 군인과 친일 경찰 그리고 친일관료와 친일 언론/지식인/사법관료 등 1만 명 정도의 친일파를 집중적으로 처단한 후 한국인들 스스로 '혁명적 민족주의 정부'를 수립했을 것입니다. 비록 초기에는 좌파적인 세력이 주도했겠지만, 아무리 그래보았자 한국전쟁과 그 이후 끔찍했던 수준의 역사과정을 걸어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역사에서 '가정'은 허무하기는 하지만, 한국현대사 평가 지점으로는 분석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 남한의 반공주의, 냉전수구주의의 기원은 분단체제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것을 남한에 이식하고 정착한 주체는 미군정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본군, 만주군 출신의 친일파 군인, 경찰, 관리, 지주들을 보호하고 육성하고 그들에게 식민지 권력을 안겨다 준 주체 역시 미군정이었습니다.


"친일세력 동향과 국내 정치세력의 인식과 대응"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249






○ 우리는 21세기에 남한이 여전히 수구와 독재와 사대주의와 기회주의가 만연한 가장 큰 이유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주된 책임자를 이승만이나 박정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미군정과 미국의 책임을 공개화, 공론화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친일파청산과 그 후예들의 사대주의 행각을 근절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22 : 여순 봉기






"1948년 10월 여수,순천 봉기의 원인은 한국군 제6연대와 제14연대 병사들이 10월 19일 제주도 유격대에 대한 토벌임무의 출동을 거부한 것이었다. 10월 20일 새벽에 이르러 약 2천 명에 달하는 반란군들이 여수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그후 일부 군인들이 열차를 타고 인접 도시인 순천에 가서 이른 우후에는 경찰 증원부대를 제압하고 순천을 장악했다. 곧 반란군은 인근 도시들로 퍼져나갔다.






연대의 반란 후 불과 몇 시간 만에 수많은 시민들이 여수 일대에서 시가행진을 하며 붉은 깃발을 흔들고 구호를 외쳤다. 10월 20일의 대중집회에서 읍 인민위원회가 재건되었으며, 체포된 많은 경찰과 몇몇 정부관리들, 지주들, '우익들' 등을 재판하고 처형하기 위해 '인민재판'이 진행됐다.


연설자들은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 대신 1945년의 용어를 사용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요구했다. 또한 여수 인근의 수많은 소규모 지역과 섬에서도 인민위원회가 복구되었다.






반란 지도자들은 추종자들에게 38도선은 폐지되었으며 북한과의 통일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과 그의 미국인 후원자들은 즉시 북한이 반란을 조장했다고 비난했지만, 사실상 이 반란은 제주 항쟁 진압에 대한 거부임과 동시에 지난 3년 동안 그 지역 인민들과 좌익들이 자신들의 목표가 계속 좌절된 데서 비롯된 폭발이었다.


한 반란군측 신문은 미국의 점령에 대항해 '3년간의 투쟁'을 언급했고, 모든 미국인들이 즉각 한국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다.


그 신문은 모든 행정기구를 여수인민위원회가 접수해야 한다고 발표했으며, 지주들로부터 무상몰수를 통한 토지의 재분배, 일본에 복무한 경찰 및 그밖의 관리들의 숙청, 그리고 남한의 단독정부에 대한 반대를 주장했다.






점령 기간이 끝났으므로 미국은 표면상으로 한국의 내정을 간섭할 권한이 없었지만 반란의 진압은 (제주항쟁에 대한 진압과 마찬가지로) 미국인들이 조직하고 지시했으며 젊은 한국군 대령들(일본군,만주군 출신의)이 수행했다.


그러나 비밀의정서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미국의 수중에 있었으며, 미국인 고문들이 한국군의 모든 부대에 상주하고 있었다.






미국의 C-47 수송기들은 한국군 부대, 무기, 그외의 물자 등을 날랐다. 미국 정보기관들이 한국군 및 한국 국립경찰 내의 정보기관과 긴밀하게 협력했다.


한편 반란이 일어나는 동안 38도선은 최근 수개월 사이 가장 오랫동안 조용했는데, 이는 북한이 이 싸움을 확대시킬 의사가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반란군의 혁명적 테러로 말미암아 수백명의 경찰, 관리, 지주가 죽었다. 아마 많게는 500명의 국립경찰이, 때로는 잔인하게 살해되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G-2 소식통들은 경찰에 대한 공격이 '많은 지역주민들을 만족시켰다'고 보고했다. 순천중학교 학생들은 경찰을 습격하는 데 열렬히 참여했다.


반란이 실패한 후 정부군은 예상대로 끔찍한 보복을 했다. 미국 소식통들은 '정부군은 봉기에 협력했다는... 의심이 조금이라도 드는 사람은 사살하고 다녔다'고 보고했다. 진압을 조직하는 데 관계한 핵심인물인 제임스 하우스만은 순천의 경찰이 '본격적으로 복수하러 나섰고, 수감포로와 민간인들을 처형하고 있다. ... 여러 명의 친정부 민간인들까지 이미 살해되었으며, 시민들은 우리가 적만큼이나 나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미국 점령시기의 정치범에 관한 미국의 내부자료에 따르면, 1945년 8월 남한에 17,000명이 투옥되어 있었던 것에 비해 1947년 12월에는 21,458명이 투옥되어 있었다.


2년 후에는 공산주의자 혐의로 기소된 3만 명의 사람이 이승만의 감옥에 있었으며, 공산주의 혐의자들에 대한 소송이 전체 소송 건수의 80%를 차지했다.


감옥이 초만원 상태라서 도저히 수감될 수 없는 죄수들은 '보도 수용서'에 수감되었다.


미국 대사관은 7만 명의 사람들이 이런 수용소들에 있다고 추정했다. 1949년 11월의 '회개' 운동에 뒤이어 12월에는 '근절 주간'이 있었는데, 그때 하루에 1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한 미국 국무부 관리는 수년 후에 쓴 글에서 이승만이 1949년에 창립한 '국민보도연맹'을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공세'에 크게 이용한 '교묘한 장치'라고 기술했다. 사실 그것은 정치범들을 수용할 강제수용소를 설치하고, 조금이라도 반정부 또는 좌익활동을 의심받는 사람들에게 '전향'과 '재교육' 활동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관찰자들은 대한민국이 지난 반세기 동안 좌익과 공산주의자를 계속해서 가혹하게 다룬 것을 비판할 때, 이런 반공체제가 형성된 이래 미국이 그것을 암암리에 지원하고 거기에 연루되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p.311~314)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5.10 단독선거의 공정성과 정통성도 의심되지만) 정부를 수립하자 마자 미군에게 작전통제권을 헌납한 이승만과 1대 국회, 정부가 무슨 자격으로 독립정권이라고 큰소리 치는지 참으로 한심합니다...ㅉㅉㅉ






○ 미국과 주한미군이 없이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를 운영할 수 없다면, 국방과 정치외교, 경제통상, 사회문화를 유지할 수 없다면 그것이 제대로 된 국가일까요? 2013년 상황은 과연 1945~1953년과 다를까요??







○ 일제 시대에 가장 많은 독립투사와 민중운동가를 감옥에 투옥시켰을 때보다 미군정과 이승만 치하에서 더 많이 투옥시켰다면, 그것이 과연 제대로 된 정치와 통치였을까요? 정말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 21세기에도 여전히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로 유지되는 국가는 정당성과 합리성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를 한반도에 들여와 남북을 갈라놓고 민주주의와 민중의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박탈시킨 배후가 누구인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23 : 소련과 북한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북한에 대해 약간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북한이 전형적인 소련의 위성국가, 동유럽 국가들과 같은 '인민민주주의'라고 추측했다.


붉은 군대는 북한 지역을 점령하여, 계획경제를 시행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실현을 감독하고, 김일성을 손수 골라서 자신의 꼭두각시로 앉혔으니, 달리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유엔군이 북한을 점령했을 때 탈취한 귀중한 문서들에 바탕을 둔 최근의 연구는 다른 해석들을 뒷받침하는데, 그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북한은 1940년대 말에 자생적인 정치체제를 발전시켰으며, 그 기본골격은 실질적으로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1949년이나 1950년에 나타나는 근본토대들이 1990년대에도 여전히 유지된다는 것이다.


둘째, 북한과 가장 유사한 나라는 동독과 같이 소련의 완전한 헤게모니 아래 놓인 국가들이 아니라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였다.


셋째, 소련의 영향력은 중국의 영향력과 경쟁했으며, 이 양자는 한국의 고유한 정치 형태 및 관행과 갈등을 일으켰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예나 지금이나 전후 맑스-레닌주의 체제들 가운데서 상례에서 벗어난 경우로서, 지도자 역할의 우월성이라든지 자립 이데올로기라든지 '은자의 왕국'식 대외정책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토착적 정치관행의 심오한 재구현을 보여준다.






또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만약 소련이 한국을 장악하지 않았다면 일단의 '소련파 한국인' 집단이 장악할 것이라고도 추측했다. 그러나 노획한 북한 문서들에 근거하더라도 1945년 당시 소비에트 당의 당원들이었던 약 43명의 한국인 집단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까지 '부차적인 역할'만을 수행했을 뿐이며, 김일성의 주된 경쟁상대는 토착공산주의자들과 중국계 집단들이었다.






최근 한-소 관계의 탁월한 권위자는 세심한 연구를 통해 스탈인이 모스크바에서 형성한 대규모 국제공산주의자 그룹 안에 확실히 '신뢰받는 소비에트 사람'이랄 수 있는 한국 공산주의자나 민족주의자는 단 하나도 없음을 밝견했다.


심지어 스탈린은 1937년 소련 내 한국인들이 친일 선동분자들의 도피처가 될 수 있다는 인종차별적 동기 때문에 약 20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을 소련 극동지방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도록 명령했다. '동시에 코민테른에서 활동하던 모든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이 일본 군국주의의 잠재적인 첩자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소련은 또한 김일성을 위시한 한국의 유격대들이 1940년대에 만주-소련 국경을 넘나들 때 그들을 오랫동안 감시했으며, 심지어 조사하고 심문했을지도 모른다. 일제치하의 만주에 관한 잔존하는 소련측 연구문헌에서 김일성은 보통 언급되지 않는데, 이는 소련의 꼭두각시로 내정된 인물에 대한 대접치고는 무척 야박한 것임이 분명하다.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한국은 러시아 안보의 관심사였다. 흔히 러시아는 한국을 태평양으로 통하는, 특히 부동항으로 진출하는 관문으로 본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소련의 정책이란 북한을 소비에트화하여 꼭두각시 국가로 세우고 나서 1950년에 한국을 무력으로 통일하도록 김일성에게 지령을 내리는 간단한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문제는 소련이 한국에 간여하고도, 심지어 한반도의 북쪽을 완전히 점령하고도 부동항을 얻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소련 고문관의 수는 군대 내에서조차 별로 많지 않았다. 영국 소식통은 북한 중앙정부에 배치된 소련 고문관이 1946년에 200명이었던 것이 1947년 4월까지 30명으로 줄었는데, 그나마 그들의 대다수는 아마 내무국 소속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한국전쟁 직전 소련 군사고문관의 숫자는 대략 120명에 불과했다. 이 정도의 숫자는 전면 가동된 동유럽 위성국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 이들 국가에는 수천 명의 소비에트 참모진과 고문관이 있었으며, 소련 관리들이 때로는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기도 했다.






1940년대의 북한은 단순한 소련의 위성국가가 결코 아니었으니, 1945~1946년에 광범위하게 결성된 '인민위원회'에 기반한 연립정권으로부터 1947~1948년에는 비교적 소련의 지배를 받는 정권을 거쳐, 그후 1949년에는 중국과 중요한 연계를 갖는 정권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전개 덕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두 공산주의 대국 사이에서 적절한 책략을 쓸 수 있었다.


김일성은 먼저 자신의 지도력을 확립한 후, 식민지시기에 한국에 남아 있었던 공산주의자들을 고립,패배시키고, 그런 다음 잠시 소련과 연계된 한인들과 연합했다가, 마침내 1948년 2월 자기와 함께 만주 및 중국 본토에서 싸운 한국인과 국내에 남아있던 한국인을 융합하여 강력한 군대를 창설하여 그의 지도력 아래 두는 등 정치적 책략에 따라 움직였던 것이다.






소련은 미국과 달리 북한에 중앙행정 기구를 수립하지도 군대도 창설하지도 않았다. 돌이켜보면, 소련의 정책은 남한에 단독 정부 및 군대를 세우려는 계획을 밀어붙인 미국의 정책보다 임시적이고 소극적인 것이었다. 당시 극동에서 소련의 힘은 융통성이 있었기에, 1946년 초 소련군은 만주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미국의 주도권에 대한 대응이던 아니면 대다수 한국인들이 1945년 말에 협의된 신탁통치안을 경멸했기 때문이든, 1946년 초에는 북한에도 단독 기관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p.316~319)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커밍스 교수는 외국인 학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남북관계나 북한의 실체에 대해 객관적일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그는 미국인 학자임에도 사실관계와 여러 자료에 근거하여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에게 왜곡되어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자세하게 제공합니다. 물론 자신의 분석관점과 해석방향을 유지하고 있지만...






○ 무조건적인 반북의식과 이데올로기를 설파하고 확신하는 이들에게 역사적 사실이나 객관적 실체가 중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차피 그들의 목적은 진실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이들에게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나는 경향은 크게 우려됩니다. 사실을 따져보지 않으려는 모습이 냉전수구세력에 대한 비겁함이나 게으름에 따른 무능함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 개인 또는 집단의 탐욕스런 이익을 위해 과거의 역사의 실체를 비틀고 왜곡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친일파 독재자 매판재벌뿐 아니라 역사를 연구한다는 사이비 지식인들까지 나서서...


친일파와 독재자에 대해 역사를 왜곡하려는 이들은 북한과 북한 지도부에 대한 왜곡을 패키지로 활용합니다. 분단체제와 북한에 대한 증오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보안법적 인식과 태도는 평화통일뿐 아니라 남한 내 정치적 경제적 민주주의에 큰 장애물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4 : 내전






"특별한 반론과 항변이 많긴 하지만, 한국전쟁(Korean War)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전쟁이 그때 시작되지 않았다면, 김일성 역시 좀더 이른 시점에서라면 몰라도 그때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내전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온다'는 진리를 서서히 깨닫게 된다.


내전은 다양한 원인으로 일어나며, 모든 이에게 책임이 돌아간다.






먼저, 한국을 아무 생각 없이(?) 갈라놓고 식민지 정부기구를 재건한 미국과 그 기구에 봉직한 한국인들에게 책임이 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직 살아 있을 한국인들이 얼마나 많을까?


한국이 고대부터 지녀온 통합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인들이 그런 체제를 원하든 않든 간에 '사회주의를 건설하기로' 결정한 소련 역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직 살아 있을 한국인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리고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을 모면케 해주었을 수도 있는 한국인의 행동들을 알아보려고 한국 내부를 들여다보면 책임을 져야 할 인물들이 정말 많다.






1945년 8월 한국이 분단되기 전에는 한국전쟁이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분단으로 인해 전쟁은 그 이후부터 줄곧, 그리고 여전히 불안정한 현재에 이르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북한의 침략에 대한 최초의 암시는 1950년에 온 것이 아니라 하지 장군이 워싱턴에다 공격이 임박해 있을지도 모른다고 알렸던 1946년 봄에 왔다. 남북한의 유력한 인물들이 통일전쟁을 심각히 고려했다는 최초의 증거도 태평양전쟁이 끝난 지 겨우 6개월 밖에 안된 바로 해방 초기에 나타났다.


그러나 미국도 소련도 자국의 군대가 전쟁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는 한, 증오의 대상이 된 38도선을 제거하는 군사행동을 지지하려 들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에서 '열띤' 내전이 시발점을 소련군은 이미 철수했고 미군이 철수중이던 1949년 초 이후로 잡을 수 있다.


게다가 1949년은 중국공산당이 승리한 해였다.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남북한 양측에 그리고 한반도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한국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마침내 제국주의적 예속을 뿌리칠 만큼 강해진 중국이 인접 국가에 크나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p.332~333)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인간의 역사가 기록된 이래, 같은 민족 또는 같은 국가 내에서 일어난 전쟁인 '내전'은 끝없이 진행되어 왔습니다. 한국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프랑스, 미국, 독일, 러시아, 스페인, 그리스, 그리고 중국에서도 내전이 있었고, 그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제3세계에서도 내전이 진행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내전이 진행중입니다. 즉 인류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니다.


중요한 것은 내전을 재발하지 않는 것과 내전 이후 같은 민족과 국가 내에서 내전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고 화해하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반도의 경우 한국전쟁 이후 내전의 상처를 헤집고 들쑤시며 증오를 부추기는 위정자들과 기득권자들에게는 막중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 '내전'이라는 특징과 성격으로 한국전쟁을 역사적으로 인식하려 하지 않고, '남침이냐 북침이냐'는 식으로 한편으로는 편협하고 이데올로기적인 태도로 다른 한편으로는 진영논리와 공격논리로 한국전쟁의 의미를 민중들에게 강요하려는 친일파, 군사독재 후예들의 폭력에도 치가 떨리지만, 마찬가지로 그들의 폭력에 굴복하여 침묵하거나 비겁하게 동조하는 소위 지식인이나 정치인, 언론인, 운동가들의 모습도 암담합니다.



2013년에 이어 2014년에도 한국사회에 마녀사냥과 종북몰이, 전쟁협박을 일삼는 것이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분단과 전쟁에 대한 사회적 역사적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 그런 면에서 한국전쟁에서 남측이나 북측에게 일방적인 책임을 물으려 하기 보다 '내전'이라는 특수전으로 규정하고, 미국과 소련에게 가장 큰 책임을 묻는 커밍스 교수의 지적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미국이 '한반도를 아무 생각 없이 분단시켰다'는 커밍스 교수의 분석은 제국주의로서의 미국의 본질과 특성, 행태를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아 유감입니다. 커밍스 교수 스스로도 책 속에서 지적했듯이 미국은 해방 이전에도 여러차례 한반도를 분할시키려는 계획을 수립했고, 2차 세계대전의 전리품으로 일제의 식민지를 점령한 것이니까요.










25 : 중국과 북한






"1950년 10월 중국의용군이 한국전쟁에 투입되기 전에도 중국은 북한에 중욯나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것은 주로 중국 내전에서 싸운 수만 명의 조선인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이들의 중국 내전 참전 덕분에 북한은 나중에 중국에게 호혜적인 지원을 요청할 수 있었다.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의 승리를 가져다 줄 엄청난 전략상의 혜택을 감지하고서 1947년 초에 수만 명의 조선인을 급파하여 모택동과 함께 싸우게 하고 기존의 조선인 부대를 사단 규모로 늘리기 시작했다.


그 군대가 바로 '의용군'으로서, 1950년 가을에 이 호의에 보답한 중국 '의용군'의 선례가 되었다. 이런 지원은 마침 중국 공산당이 특히 만주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이루어졌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약 3만 명의 조선인이 김책의 지휘 아래 1947년 4월에 만주로 이동했으며, 그 무렵 만주에 있는 중국공산당 병력의 15~20%는 한국인이었다.


그 시점에서부터 1950년 겨울까지 미국 정보기관은 이 병사들을 '중국공산군계 한국인'이라고 불렀다.


(중략)


중국 내 한국인 군대의 시초는 1930년대 만주와 연안에서 싸운 다양한 부대였다. 1940년대 후반까지 살아남은 두 부대는 조선의용군과 리홍광지대였다.


몇몇 소식통들은 조선의용군이 1946년 4월에 그 이름을 버리고 1930년대에 사용된 명칭들과 유사한 동북민주연군 소속 한국인부대로 통합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선의용군이라는 이름은 그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조선의용군은 분명히 1941년에 창설되었지만 1945년 8월까지는 병력이 겨우 3,4백 명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일본군에서 징병이 해제된 한국인 군인들이 들어오고 중국에서 내전이 점차 심화됨에 따라 그 병력이 급속히 늘어났다.


G-2 문서는 중국국민당이 전후 보복의 와중에 만주지역의 한국인을 일본인과 한동아리로 취급하는 등 한국인을 학대한 것이 많은 한국인 시병을 공산당으로 끌어들인 '내전의 가장 값비싼 과오의 하나'라고 논평했다.






G-2 문서는 1928년 모택동(毛澤東)과 주덕(朱德)이 갓 만들어낸 홍군에 참여했으며 대장정에도 참가한 한국인 유격대 지도자인 무정(武亭 김무정)이 한국인 6명, 중국인 6명, 소련인 2명이 참여하는 연합군사평의회의 한국인 의장임을 확인했다. 그 군사평의회는 한중 국경을 넘나드는 군대와 물자의 모든 이동을 관할했다.


미국 대사관부 육군군무관들은 이때쯤에는 7만 명을 밑돌지 않은 한국인이 만주에서 싸우고 있다고 평가했다.






중국공산군 한국인 지도자 회의의 멤버였던 최용건은 조선인민군 초대사령관이 되어 1948년 2월 8일에 열린 창군총회에서 조선인민군 창설을 주재했다.






조선인민군의 간부진을 지배한 것은 소련과 한국인들이 아니라 중국내전의 베테랑들이었다. 서울의 미군 G-2 문서는 조선인민군의 장교 가운데 80% 이상이 중국에서 복무한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무정은 가장 탁월한 중국계 전사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무상이자 김일성의 막역한 친구인 박일우는 일생 중 많은 기간을 중국에서 보냈다. 그는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 부교장이었으며 나중에 무정이 조선의용군을 재조직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1948년 4월 조선인민군 제3사단의 최고지도자들인 방호산(方虎山), 왕자인(王子仁), 홍림(洪林), 노철용(盧哲用) 등은 모두 중국 내전의 베테랑들이었다.


방호산은 나중에 한국전쟁의 초기 국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1920년대에 황포군관학교를 다녔으며 적어도 1933년부터는 줄곧 중국공산당원이었다. 그는 만주와 북중국에서 리홍광 지대를 비롯한 여러 부대에서 광범위하게 투쟁했으며, 대다수가 한국인들로 구성된 인민해방군 제166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제166사는 나중에 조선의용군 제6사단의 근간이 되었다. 미국 쪽 문헌은 방호산을 조선인민군 병사들 사이에서 대단히 존경받는 지적이고 조직적인 군인으로 묘사했다.






김웅(金雄) 역시 황포군관학교에서 수학한 중국공산군 지휘관이었다. 군사학자인 로이 애플먼은 그를 '정력적이고 엄한' '뛰어난 군인'이자 한국전쟁 당시 가장 유능한 조선인민군 지휘관이라고 불렀다.


최덕조는 진남포에 사령부를 둔 조선인민군 서부관구를 통솔했다. 그는 모택동의 팔로군 장교였으며, 그의 참모장 곽동서는 조선의용군 출신의 베테랑이었다.






그밖에 중국공산군에서 싸운 경험이 있는 북한군 지도자로는 이호, 한경, 오학용, 지병학, 최아립, 김광협, 이익성, 최광(崔光)이 있었다.


최광은 1990년대 중반에 조선인민군 사령관이었고, 이들 장교 대다수는 최광과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이 개시되었을 때 30대였다.


이 명단에는 김일성은 물론 김책, 최용건, 김일처럼 1930년대에 중국인들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던 만주유격대원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인물들까지 합치면 하나같이 조중연합전이 베테랑들이던 1950년 당시의 조선인민군 고위 지휘관 전원을 거의 다 거명한 셈이다.






중국에서 싸운 한국인 부대들이 1948년부터 1950년 가을에 걸쳐 본국으로 흘러들었다. 전체 숫자는 7찬 5천 ~ 10만 명 사이였다.


1940년대 후반의 정보평가서, 그 시기의 일차자료, 전쟁포로로부터 얻은 회고정보 등을 보면 몇 차례의 인맥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1948년 2월 리홍광 지대의 1만 명의 부대가 조선인민군을 창설하기 위해 귀환했다. 1949년 7월에서 10월 사이에 3,4만 명이 돌아왔고, 1950년 2월과 3월에 4ㅡ5만 명이 각각 귀국했다.


인민해방군 제164사와 제166사의 한국인들은 1949년 7월 국경을 넘어 조선인민군 제5사단과 제6사단의 근간을 형성했다.


1949년 10월 귀환병들에 대한 많은 보고가 정보망을 통해 들어왔다. 제16군 제155사는 1950년 2월에 한반도에 돌아와 조선인민군 제7사단이 되었다.


중국 출신의 비정규 부대들이 돌아와 1950년 3월에 새로운 제10사단을 구성했다.






한편 훨씬 더 많은 한국인 병사들이 1950년 5월에 하이난 섬(한편 훨씬 더 많은 한국인 병사들이 1950년 5월에 하이난 섬(海南岛) 탈환을 위한 '최후의 전투'까지 싸웠으며 6월에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한반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중략)


나중에 독자는 북한이 왜 1949년 여름 남한의 도발에 침략으로 응수하지 않았는지 질문할지 모른다. 만약 그때 침략했다면 그것을 도발에 의하지 않은 침략으로 해석하기는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 그 대답은 간단하다. 나중에 6월 침공의 주된 타격력리 된 병사들, 즉 정예군이 아직도 중국에서 전투중이었던 것이다."(p.334~340)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이번 대목은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미국이나 남한 사람들의 생각처럼 단순하거나 '주고받기'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945년 중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는 과정과 1948년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을 대만으로 내쫒고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특히 공산당 내 조선인들과 북한 인민군 소속의 군인들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을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당시 중국 의용군이 북한을 결정적으로 지원한 것도 서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허울로 가득찬 한미동맹이나 한미관계와 북중관계의 질이 다른 역사적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지만..)






○ 한반도가 일제에 강점되었을 때인 1910~1945년 사이에 중국 역시 일제와 다른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고통받고 있었을 때입니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이나 에드거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에 자세히 나타나 있듯이..


그리고 당시에 조선인들은 항일투쟁이나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중국인들과 힘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했고, 중국인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중국인들 중 공산당 계열과 군벌이나 국민당 계열이 항일투쟁을 하는 조선인을 어떻게 대했는지가 많이 다를 뿐입니다.






○ 특히 <아리랑>의 김산이나 죽산 조봉암 선생 등의 경우처럼 상당수 조선인 항일투사들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항일투쟁을 했던 기록이 다수임이 확인됩니다.






○ 미군정이 친일파 일본군 출신을 중심으로 창설한 남한 군대와 중국과 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수행했던 독립투사들이 창설한 북한 군대. 특히 장교들의 구성과 경력이 180도 정반대입니다.


국방부 장관이나 장성들이 북한군과 1:1로 싸우면 이길 없다고 실언한 이유가 군대의 정통성과 정당성, 자신감과 국민에 대한 충성심의 무의식적인 발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겉으로는 큰소리 치지만...ㅋ)


- 역대 육군 참모총장 현황 <친일민족반역자들의 프로필>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Aj58&articleno=4533454&categoryId=213060®dt=20090425075723










26 : 남한에서의 유격전






"남한에서의 조직적인 유겨전의 시작은 1천 명 이사의 여수 봉기군이 전라남도의 지리산으로 도주하여 이미 산중에 있던 유격대 및 산사람들과 합류한 후인 1948년 11월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이런 이동이 한반도에서 무장투쟁의 시발점이 되었고, 1945~47년 도시의 정치적 소요 및 시골농민의 항거를 비정규군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1949년 초 CIA는 남한 유격대의 총인원이 제주도의 수천 명을 제외하고도 3,500~6,000명 사이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일부는 주로 일제나 미제 소총으로 무장했으나 다수는 단지 몽둥이와 죽창을 갖고 다녔다. 식량과 기타 보급품들은 마을로부터의 징발이나 기부 또는 저장된 쌀의 도둑질로 충당했다.


미국 군사고문단의 고문관들은 이들의 전반적인 전략은 북한이 장악한 38도선 북쪽의 해주 남조선노동당 본부를 통해서 전달된다고 생각했다.






미국인들은 전라도와 경상도가 '인민공화국 및 인민위원회가 가장 강력했다'고 말했다. 일본이 농민들을 가장 심하게 착취한 곳이 바로 이 풍족한 미곡 생산지역이었다. 미군정 초기 몇년 동안에 공산당이 지도하는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재빨리 그리고 확실히 잘 조직될 수 있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중략)


미국 대사관의 조사관들은 1949년 초에 경상북도의 경찰과 지역주민 사시에 상당한 악감정이 존재함을 발견했다. 대구는 엄격하게 통제되었으며 매일 밤 통행금지가 실시되었다.


'소규모 공격과 매복이 이어지다 가끔식 대규모 공격이 감행되는 현상이 거의 모든 지역의 특징이었다. 경찰지서는 지붕까지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으며, 길에서 100m 이내의 나무는 모두 잘렸고, 지역의 관리와 경찰은 밤이면 안절부절못하며 이집 저집 옮겨다녀야 했다.'


(중략)


당시 유격전을 거의 유일하게 추적한 '뉴욕타임즈' 월터 설리반 기자는 유격대와 국립경찰의 충돌과 잔인성에 대해 취재했으며, 경찰에 대한 유격대의 '지구력'에 대해 '이곳의 많은 미국인들은 당혹해한다'고 썼다.(중략)


그러나 설리반은 연이어 남한에는 '빈부격차가 대단히 심하여' 빈농이나 중농은 '극한의 생존'을 영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0가구의 농민가족과 인터뷰를 했는데, 자기가 경작하는 토지 전부를 소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대다수가 소작농이었다. 지주는 소작 생산물의 30%를 차지했지만 그밖의 징수금(정부의 세금과 여러가지 기부금)이 연간 수확량의 48~70%에 달했다.






1949년 봄 이승만은 일본군 출신의 정일권 대령을 급파하여 3천 명의 토벌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그들은 3~5월 대공세로 유격대를 토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고 생각했지만, 유격대 병력은 1949년 여름 내내 점점 더 커졌다.(중략)






소련이나 북한이 남한의 유격대를 원조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었다.


1950년 4월 미국은 북한이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북부해안의 유격대에게 무기와 물자를 원조했지만 '전라도와 경상도의 유격대는 거의 100% 그 지역에서 충원되어왔음'을 발견했다.


38도선 부근을 제외하면 남한에서 소련제 무기의 사용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대다수 유격대가 일제와 미제 무기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또다른 보고에 따르면 유격대들이 '분명히 도덕적인 원조 외에는 북한으로부터 받는 것이 거의 없음'이 드러났다.






남한의 유격전에 간여한 주된 외부세력은 사실 미국이었다.


미국인들은 보통 1949년 7월의 미군 전투부대 철수와 1년 후에 발발한 전쟁 사이의 의미심장한 공백을 인식하고는 왜 미국이 갑자기 대한민국을 방어하러 돌아갔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실제로 미군은 결코 떠나지 않았다. 미국 고문관들은 남한의 교전지역 전역에 퍼져 있었으며 한국인 파트너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더 노력하라고 다그쳤다.


이일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여순봉기 진압을 조직한 핵심인물 가운데 하나인 제임스 하우스만으로, 그는 그후 30년 동안 미국과 한국의 군부 및 정보부대간의 중재자로 활약했다.


그는 아칸소 촌뜨기 같은 언행 뒤에 기술을 감추고 있는 교활한 공작원으로서 한국의 에드워드 랜스데일(필리핀 남베트남 쿠바 등지에서 비밀공작과 심리전을 주도한 CIA 요원)이라 하겠지만, 후자와는 달리 시민적 행동에는 관심이 없었다.






1949년 9월 말 주한미군사고문단 단장인 로버츠 장군은 유격대들을 '가능한 한 빨리 소탕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했으며, 한국군과 협력할 보병장교를 더 많이 급파해줄 것을 워싱턴에 요청했다.


그는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군의 모든 사단이 병력의 일부 또는 전부를 38도선에서 후방으로 돌리고 있으며, '관할 지역 내의 유격대 일당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중략)


그는 1949년 11월 ~ 1950년 3월 사이에 유격대원 6천 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했으며, 남한정부는 1950년 1월 총 1만2천 명의 조선인민군 및 유격대와 교전하여 813명을 죽이고 51명만 손실당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시각에서 볼 때 이승만 정권이 거둔 하나의 절대적인 성공이 있다면, 그것은 1950년 봄에 이르러 남한 유격대(빨치산)을 명백히 패배시킨 것이다.


1950년 5월과 6월에 유격대 사건은 현저하게 줄어들어 6월 초에는 '최저 신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월터 설리반은 자신의 관찰에 입각하여 유격대를 완전히 무찔렀다는 낙관적인 보고들은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추운 날씨가 유격대 활동 감소의 주된 원인이었고, 따라서 정부쪽의 1949~50년의 동계공세는 실패했다는 것이다."(p.340~345)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박세길 씨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와 커밍스 교수의 이 책의 내용을 참고했을 때, 조정래 씨의 장편소설 <태백산맥>의 기본 이야기 구조 중 하나는 사실관계에 기반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소설 내용과는 달리 지리산 유격대와 남로당 해주 본부나 북한과는 관계가 없었으니까요..






○ 남한 유격대의 대다수 구성원들은 미군정의 탄압과 친일파 부활, 극도의 빈곤과 빈부격차라는 사회경제적 상황을 토대로 하여 1946년 10월 인민항쟁에서 시작 1947년 3.1 투쟁, 1948년 2.7 항쟁, 4.3 항쟁,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 10월 여순봉기까지 이르는 분단 저지와 자주통일 항쟁 과정에서 노동자, 농민 등 민중들이 유격대원으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군정이나 이승만 정권의 주장과는 달리 북한은 고사하고 남로당의 지도와 공작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 1948년 이내에 소련군이 북한 정부 수립 후 철수하면서 극소수의 군사고문단을 남겨놓고 북한 지도부가 인민군을 통솔하였음에 비해, 미군은 남한 정부 수립 후 1년이 넘게 철수를 미룬데다가 소련군의 수십 배에 달하는 군사고문단을 남겨놓았고, 커밍스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실제 남한 군대의 작전권까지 장악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남한의 유격전에 간여한 주된 외부세력은 사실 미국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미군은 결코 떠나지 않았다."










27 : 1949년 38도선 전투




"1950년 6월에 발발한 전쟁은 1949년의 유격전과 9개월에 걸친 38도선 부근 전투에 뒤이은 것이다. 38도선상의 교전은 5월 초부터 12월 말까지 계속되면서 수백명의 목숨을 빼앗고 수천명의 병력을 끌여들였다.

전쟁이 1949년에 발생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한반도 갈등의 내전적 기원을 파악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즉 당시 남한은 전쟁을 원했지만 북한은 원하지 않았고, 미국과 소련 또한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1년 후 사정은 바뀌었다. 이 시기에 이승만은 군대를 급속히 확장했다. 1949년 6월 두 개의 새로운 사단이 편성되었고, 병력은 7월 말에 8만 1천명, 8월 말에는 10만 명에 달했다. 이 때쯤이면 남한 병력이, 전투대형을 갖추었다고 인정되는 북한군 병력보다 훨씬 컸다.

따라서 북한이 뒤이어 병력을 증강하고 중국계 병사들을 귀환케 한 것은 균형을 이루려는 시도로 볼 수 있었다.




이승만은 또한 중국 국민당과 함께 투쟁한 애국적 인물들을 제쳐두고 일본군에 복무했다가 북한에서 도망쳐온 장교들을 군에 끌어들였따. 그렇게 한 주된 이유는 이승만이 자기한테 전적으로 신세를 졌고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였으며 쿠테타를 일으킬 염려가 없다고 생각되는 군인들을 자기 주위에 포진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형제간인 백선엽과 백인엽은 군부내의 서북파를 이끌었는데, 이 파에는 양국진, 김석범 및 이전 서북청년단 회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정일권 역시 일본군 장교를 지냈던 사람으로 남한군 내의 동북파를 이끌었다. 1950년에 정일권은 32세, 백선엽은 30세였다.(김일성은 38세)




1949년 여름 이전에도 남한이 38도선을 침범하여 소규모 기습을 감행하는 일이 잦았고 북한이 이에 기꺼이 보복공격을 하긴 했지만, 38도선상의 중요한 전투는 1949년 5월 4일 개성에서 남한측의 개전으로 시작되었다.

전투는 나흘 정도 계속되었는데, 미국과 남한의 집계에 따르면 개성에서 사망한 민간인 사망자가 100명을 상회할 뿐 아니라 공식 집계된 군 사상자 수도 북한군 400명, 남한군 22명이었다. 남한은 6개 보병중대와 몇 개 대대를 투입했는데, 그중 2개 중대는 북한으로 도망갔다.

수개월 후 북한은 도망병들의 증언을 근거로 김석원이 이끄는 수천의 병력이 5월 4일 아침에 38도선을 넘어 송악산 부근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김석원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제1사단의 사령관이었다. 그는 또한 북한 출신이었으며, 앞서 살펴보았듯이, 1930년대 후반 일본의 명령에 따라 만주 벌판에서 김일성을 추격한 인물이었다.




1949년 6월의 마지막 일요일 새벽에 옹진반도에서 맹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흘 후 남한은 약 150명의 호림 유격대를 38도선 넘어 깊이 침투시켰다. 그들은 며칠 동안 웅진반도 위쪽과 철원 동쪽 일대를 돌아다니며 문제를 야기했지만 7월 5일쯤에는 소탕되었다.




1949년 최악의 전투는 8월 초순 북한군이 38도선 이북의 한 작은 산을 점령하고 있던 한국군을 공격하면서 발생했다. 전투는 이승만과 장제스의 중대한 정상회담이 열리던 바로 그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8월 4일 이른 아침 북한은 대포와 박격포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으며 오전 5시 30분에는 4~6천 명 가량의 북한측 38선 경비병들이 돌격해왔는데, 이는 로버츠의 말에 따르면, '남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북한의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한은 남한 백골부대의 몇몇 요원들이 8월 4일 은파산 북쪽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어찌되었든 그 산은 북한 영토 내에 있었으며, 북한이 그것을 탈환하려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쵸 대사에 따르면, 남측이 '완전히 패주'했으니 한국군 제18연대 소속 2개 중대가 전멸하여 수백명이 전사했으며, 북한이 그 산을 점령하게 되었다.

그 직후 신성모 국방장관은 즉각 철원 방향 북쪽 공격을 감행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지만, 미 고문단장 로버츠 장관의 충고에 따라 공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범석 국무총리와 이승만은 신성모를 질책했으며, 이승만은 북진하지 않은 참모총장을 채병덕에서 김석원으로 바꾸려 했다.(중략)




이제 몇몇 새로운 소련측 자료의 도움을 받아 38도선 양쪽을 살펴보면, 1949년 8월 전투는 이승만과 김일성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을 알 수 있다. 옹진반도에서의 전투의 승패가 38도선 전체의 전투에 영향을 주고 경우에 따라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중략)

또한 소련의 문서들은 1949년 말에 이르러서는 양측이 남북한 내전의 논리를 어렵사리 터득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즉 양측 모두 상대방의 도발 없이 전면전을 감행하거나 혹은 심지어 옹진이나 철원을 공격하기만 해도 자신들의 보증인격인 강대국들이 도와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중략)




요는 북한이 이 싸움에 책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양측 모두 잘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한미군사고문단 단장인 로버츠의 여러 진술에 따르면, 북한보다 남한이 전투를 먼저 시작한 경우가 더 많았다.

8월에 일어난 수많은 충돌은 '우리 의견으로는 매번 남한의 소부대가 38도선 북쪽을 돌출적으로 침범한 탓에 일어났다. ... 로버츠는 '남한 사람들은 북한을 침공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남한 사람들에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모든 고문들이 철수할 것이며 경제원조도 끊길 것이라고 말한다'고 말했다.(중략)




1949년의 국경 전투가 잠잠해진 후 이승만과 김일성 양자는 모두 상대편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위해 후견 강대국들의 지지를 구했다."(p.346~354)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커밍스 교수가 한국전쟁의 성격을 왜 '내전'이라고 규정하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한국전쟁은 짧게는 한반도를 강제로 반단기키고 친일파를 부뢀시킨 해방 후 5년의 결과이며, 길게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이었던 1910년 일제의 강점에 저항한 항일 & 반제국주의 투쟁이라는 40면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 미군정과 이승만이 남한군을 창설하면서 주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장교로 구성한 점이 남한 군대의 정통성과 성격을 규정한 셈이고, 특히 북한지역 출신의 친일파를 군 수뇌부로 구성한 점이 몇 년 간 잔혹하게 한국전쟁이 전개된 배경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28 : 전쟁전야






"남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1950년에 이르러 새로운 단계에 도달했다. 미국의 영향력은 '거대한 10층짜리 반도호텔에서 뻗어나와 행정의 전 분야에 침투하고 있으며, 막대한 돈의 투입으로 강화되고 있다.'(영국의 비비언 홀트 장관)


미국은 돈, 전기, 전문기술, 심리적 원조를 제공하면서 정부, 군대, 경제, 철도, 공항, 광산, 공장을 계속 가동시켜주었다. 미제 가솔린이 이 나라의 모든 자동차에 연료를 공급했다.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은 미국유학 장려금부터 여러 강력한 선교 교단들, 대부분 미국 영화를 상영하는 20개의 이동영화관과 극장들, 미국의 소리 방송, 야구의 주요 리그전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강력했다.






당시 남한은 미국으로부터 연간 국가예산 1억2천만 달러의 80%가 넘는 1억 달러 이상의 원조를 받고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무상원조의 형식이었다. ECA 원조와 주한미군사고문단 파견은 그런 종류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미국 공보원은 한국에 9개 지역 문화원에다 부속도서관, 이동 송수신장비, 그리고 다양한 출판물, 영화, 미국 특유의 언어문화를 한국인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갖추고 있어, 이 기관의 자체 증언으로도 '우리가 전세계에서 운영하고 있는 국가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광범위한 것의 하나'였다.


미국인 관리가 김포 국제공항을 운영하고 미국 시민의 출입국을 통제했다. 미국인 관공리의 활동 외에도, 미국 민간인이 사기업이 고문이나 책임자가 되는 일이 심상찮았다.(중략)






유엔의 무관심과 내전의 기운 사이에서 옹색해진 유엔한국위원회는 1949년 여름의 임무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손을 떼고 싶어했다. 그러나 유엔한국위원회는 철수하지 않았다. 의미심장한 것은, 나중에 전쟁의 발발을 보고한 군사감시관들을 임명, 배치하기로 한 결정은 북한측보다 남한측의 공격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1949년 9월 유엔한국위원회의 식견이 있는 중요 인사인 에곤 랜쇼펀-워사이머는 필립 제썹 국무차관에게 유엔한국위원회를 모든 당사자들간의 대화 재개에 노력하고 그럼으로써 한국의 무력통일을 막고 유엔고등판무관으로 대체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 그러므로 북한을 침공하고자 하는 이승만 자신의 유혹과 그렇게 하도록 그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불가항력이 될지도 모른다. 한국의 군수뇌부들은... 이승만에게 선수를 쳐서 38도선을 넘자고 게속 압력을 넣고 있다'고 씌여있다.






동시에 국무부의 월튼 버터워스는 랜쇼펀-워사이머에게 '상당히 많은 전투가 일어났으며, 남한에는 아마도 북한 출신들로 구성된 과격분자가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버터워스는 유엔한국위원회가 현지에 군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이들 군인들이 로버츠처럼 남한을 억제하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유엔에게 이 사실을 일부러 알려주었으리라고는 전혀 믿기 어렵다. 그러나 이 사실은 북한의 주목을 벗어나지 못했다. 북한은 유엔군사감시관들을 주둔시키려는 결정이 38도선 일대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9월에서 11월까지 서울에서 벌어진 두 달간의 사적인 토론회에서 비롯되었다고 정확하게 보고했다.






1950년 봄 영국측 소식통들은 주한미군사고문단 고문들이 '38도선 지역의 지휘관들 가운데 지나치게 공격적인 장교들을 제거하려고' 여전히 애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들이 제거될 때까지 기간 중에 '38도선상의 사건이... 내전을 촉발할 수도 있다'고 그 보고에 언급되었다.


영국은 미군장교들이 상황을 장악하는 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판단은 정확한 것으로, 이로써 1950년 6월 말에 로버츠 장군과 라이트 장군을 비롯한 주한미군사고문단 고위장교들이 서울에 없었다는 사실에 중대한 의미가 부여된다.(중략)






전쟁 발발 몇 주 전에 남한의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선거 결과 여운형계와 밀접한 몇몇을 포함하여 거의 모두가 북한과의 평화적 통일을 바라는 다수의 중도파 및 온건 좌파가 대거 국회에 진출함으로써 이승만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6월 초순 미국 관리들에게 선거 결과로 말미암은 정권의 위기를 알리면서 당시 트루먼의 고문인 존 포스터 델레스에게 도쿄의 맥아더를 만나러 가는 길에 한국을 방문해달라고 종용했다.


이승만은 6월 18일부터 시작된 델레스의 서울 방문 동안 미국의 직접적인 방위 보장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에 대한 공격을 주장했다. 델레스를 따라다닌 미국인 기자인 윌리엄 매슈즈는 이승만-델레스 회담 직후 '이승만은 한국의 통일을 호전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통일이 곧 이루어져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 이승만은 북진의 정당성을 내세우고 있다. 북진통일이 며칠 만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만약 우리가 도움을 준다면 그는 북진한 것이다'고 썼다. 그리고 매슈즈는 이승만이 비록 '전면전을 초래할'지라도 '북진할 것'이라고 말한 데 주목했다.






이 모든 것은 이승만의 도발적인 행동을 입증하는 또하나의 증거이지만, 이미 수차례에 걸친 그의 북진 위협과 다르지 않다. 이승만은 델레스와의 회담을 통해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성사시키기를 바랐지만 미국의 지원에 대한 형식적인 재보장만 얻었을 뿌닝었다.


평양에서는 델레스의 오랜 친일적 입장이 가장 심각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델레스의 방문이 이승만으로서는 큰 수확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38도선 너머 북한을 바라보는 델레스의 유명한 사진을 대서특필하면서 북한이 항상 주장하듯 델레스가 이승만과 공모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타이완의 중국국민당은 이승만과 기꺼이 공모할 용의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정보공개법에 따라 타이완에서 장제스에 대한 암살 시도에 대한 일화는 물론 프레스턴 굿펠로우가 전쟁 직전에 미군에 복귀한 기이한 사실을 비롯한 여러가지 일화들에 관한 문서를 구하느라고 10년 이상이나 애썼다. 미국 정부로부터 몇몇 문서가 유출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굿펠로우는 1950년 5월 2일 군정보기관의 현역근무에 소집되어 버지니아주 포트 유스티스에서 미지의 임무를 수행하는 '집행관'이 되었다. 그는 그때 59세였다.


우리는 장제스에 대한 쿠테타 계획, 1950년 6월 이전부터 북한과 중국의 영공을 침해한 미국측의 정보수집 비행, 미국이 북한 중국 소련에 관해 수집한 통신신호정보 등에 관한 결정적인 문서들을 아직도 구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왜 미국 국방부가 1950년 6월 19일부터 시작되는, 1주일 동안 SL-17로 알려진 전쟁계획을 승인하고 퍼뜨렸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이 계획은 조선인민군의 침공, 부산 방어선으로의 즉각적인 후퇴와 부산 방어선의 방어, 그런 다음에는 인천에서의 육해공군 합동 상륙작전을 가정했다.






이런 요란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1950년 6월 마지막 주에 해리 트루먼은 인디펜던스에 있는 고향에 돌아가 있었다. 애치슨은 자기의 썬디 스프링 농장에 있었으며, 딘 러스크는 뉴욕에 있었고, 케넌은 전화 한 통 없이 멀리 떨어진 여름 별장으로 사라졌고, 폴 니츠는 연어낚시를 갔으며, 합동참모부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고, 심지어 워런 오스틴 유엔대사마저 제자리를 지키지 않았다."(p.357~363)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커밍스 교수는 27회에 서술한 1949년 38도선상의 전투에 이어 1950년 상반기 상황을 저술하면서 한국전쟁의 내전적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커밍스 교수의 말대로, 정보공개법에 묶여 있는 미국의 자료와 폐기하고 파쇄해버려 사라진 남한측의 자료, 그리고 확보 자체가 불가능한 북한 자료의 사정을 고려할 때 1950년 상반기에 대한 정확한 실태파악은 한동안 쉽지 않을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밍스 교수가 지적한 여러가지 사실들 - 즉, 북침설이나 남침유도설을 뒷받침해주는 자료와 정보들 - 과 1949년에서 1950년까지의 전후 정황은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고 동시에 여러가지를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29 : 한국전쟁을 보는 시각






"산재해 있는 소련 자료를 보면 스탈린이 1950년 1월 마지못해 남침계획을 승인한 후 침략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데 소련이 간여한 정도는 이전의 필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것으로 나타나지만, 6월의 전투를 개시하는 데 북한(North Korea), 소련, 중국이 각각 수행한 역할을 확인하기에는 우리가 아는 것이 아직도 너무 적다.


우리가 소련측에서 나온 문서를 모두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모두가 마땅히 잊으려 애쓰고 있는 질문, 즉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 하는 문제를 정녕 확고한 근거 위에서 논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남한의 기록, 북한의 기록, 타이완과 중국의 기록, 미국측의 정보, 통신신호, 암호기록까지 모두 구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6월 25일 당일이나 그 이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든 두말할 나위 없이 분명한 것은 이 전쟁이 "한국인(Korean)들이 한국 땅을 침략한"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된 나라간의 국경을 침범한 공격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전의 투쟁이 시작된 지점도 아니었다.






이데올로기적인 폭발성으로 충만한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 하는 질문은 분명 잘못된 질문이다.


그것은 내전에 관한 질문이 아니며, 단지 동족상잔의 투쟁으로 직접 고통을 당한 세대들의 애간장을 쥐어짤 뿐이다.






미국인들은 남부가 쌤터 요새에서 먼저 발포했다는 사실에 더이상 관심을 갖지 않지만, 노예제도와 남부의 연방탈퇴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아무도 누가 베트남 전쟁을 시작했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남북의 한국인들은 미국인들이 마침내 그랬듯이 내전은 혼자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지혜를 깨닫고 화해할 것이다.


미국인들이 그렇게 하는 데 1세기 가량 걸렸다.


그러므로 50년이 지난 후에도 한국의 화해가 여전히 미결정 상태인 것은 놀라울 것이 없다."(p.36*~369)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한국전쟁을 내전이라는 관점으로 분석하면서 "누가"가 아니라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커밍스 교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미 60년 넘게 한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증오를 키워왔으니까요. 이제 더이상 상처를 후비는 짓은 하지 말아아죠..


미국이 남북전쟁의 증오와 갈등을 해소하는 데 100년 걸렸다고 한민족도 똑같이 100년이 소요될 이유는 없겠지요. 그 기간을 줄이면 줄일수록 분단을 토대로, 적대관계를 이유로 국가보안법과 종북몰이가 판을 치면서 이 땅에 인권과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세력이 힘을 잃을 것입니다.






○ 커밍스 교수의 관점과 주장이 전국민적으로 공감이 되려면, 깨어있는 운동가들과 시민들, 학자와 지식인들, 언론들, 그리고 정치가와 법조인들과 행정가들이 먼저 인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6.10 공동선언과 10.4 공동선언은 커밍스 교수와 같은 관점과 인식을 토대로 추진되었고 성과를 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직접 커밍스 교수와 같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 남북의 화해와 분단체제의 해소 그리고 인권과 민주주의가 진전되기 위해서, 페이스북에서라도 더이상 "누가"라는 인식의 연장선에서 벌어지는 북한에 대한 증오, 폄훼, 조롱이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30 : 한국전쟁의 결론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전쟁이 끝났을 때 북한은 3년간 폭격으로 황폐해져 현대적인 건물이 거의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북한은 사실상의 대량학살이 그들의 나라를 황폐하게 하고 1945년의 힘찬 기대를 악몽으로 바꾸어놓은 것을 목격했다.






기억할 점은 이 전쟁은 내전이었으며, 한 영국 외교관이 언젠가 말했듯이 "모든 나라는 자신의 '장미전쟁'을 치를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비극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순전히 한국인들(Korean)끼리의 내부충돌이라면 식민주의, 민족분단, 외국간섭 등으로 야기된 엄청난 긴장이 해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극은 이 전쟁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직 이전의 현상으로 복구되었을 뿐이며, 오직 휴전만이 평화를 유지했을 뿐이다.






오늘날까지 긴장과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p.417~418)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모든 나라는 자신의 '장미전쟁'을 치를 권리가 있다".. 유렵이든 아시아든 아메리카든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현재 기준으로 보면 '내전'이 적지 않게 벌어졌고, 외세가 개입하지 않는 한 자신들의 국가, 민족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내전을 치를 수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한반도의 경우도 오래전 삼국간의 분쟁이나 후삼국간의 분쟁, 또는 민란이나 반란 등 내부 구성권간의 전쟁이 있었고, 한국전쟁 역시 그 연장선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죠. 다만, 한국전쟁은 미국이 유엔군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개입하여 외세 개입을 만들고(이승만과 친일파가 적극 협조) 38도선을 넘어가고 만주를 위협하면서 중국까지 개입하게 함으로써 국제전으로 비화된 셈입니다.






○ 그런 면에서 커밍스는 이 책의 앞부분에서 이러한 외세개입의 뿌리를 삼국시대 때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이면서 시작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커밍스 교수의 논리를 확대 적용하면 일제시대 강점의 문제 역시 친일파와 친일지주 등이 일제라는 외세를 끌여들여 기존의 한반도 내 정치적 경쟁세력과 민중진영을 억누르고 권력을 누린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친일파들은 민족적 국가적 자주권과 독립이 보장되지 않는 식민지라 하더라도 자신들의 권력과 기득권이 확보될 수만 있다면, 다른 정치적 경쟁세력이나 중산층 이하 민중들이 굶어 죽든, 고통 받든 상관하지 않는 매국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1세기 한반도 남단에도 미국이라는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제국주의 군대에게 세금을 퍼붓더라도 자신의 영토에 들여놓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국내외 자본이나 기득권들이 중산층 이하 민중들을 어떻게 착취하고 수탈하고 죽이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세력이 여전히 존재하는 셈입니다.






○ 저는 커밍스 교수의 결론을, 민족간, 국가 내 구성원은 '내전'을 치를 권리가 있으며, 외세가 개입하지 않을 경우 외세가 개입했을 때보다 내전의 원인을 해결하고 치유하고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문제는 그대로인 이유일 것입니다.






○ 우리가 한국전쟁에서 진정으로 얻어야 할 교훈은 바로 그것입니다.










31 : 원조경제와 적산불하






"공식적인 출처를 보면 1945~1965년 사이에 미국 국고의 약 120억 달러가 한국에 갔다고 되어 있다. 앞서 1950년대에는 원조자금만도 대한민국 정부예산의 100%에 달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1960년 한국이 100달러의 일인당 국민소득을 올렸다는 소리를 우리는 늘 듣는다. 그렇다면 이 나라의 국민 2천만에다 그냥 영을 두개 더하면 국민소득으로 30억 달러라는 수치가 나온다.


공식적인 통계수치를 보면 그 20년간 120억 달러가 들어갔으니, 공식적인 이전만 쳐도 일년에 6억 달러가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분석가는 다른 통계수치를 사용하여 1945년에서 1976년 사이에 남한에 대한 미국의 1인당 연간 지원액이 600달러에 달한다는, 즉 30년 동안 한국의 남녀노소에게 매년 1인당 600달러가 들어갔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최고조에 달한 때는 1957년이었으니, 그때 한국의 국내 세입이 4억 5,600만 달러인데 경제원조로 미국으로부터 끌어들인 돈은 3억 8,300만 달러였다. 그렇지만 1957년에 군사원조로 4억 달러가 추가된 데다가, 주한미군 경비로 또 3억 달러가 더 추가되었다.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액수는 유럽 전체에 대한 군사원조 액수보다 상당히 높고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대한 군사원조 액수의 4배이다.


이것들은 단순한 계산이지만 액수의 크기는 놀라운 것이다. 이 수치들에는 셀 수 없는 것들, 즉 수십 만의 미국인들이 한국에서 이러저런 일로 쓰는 돈들이 빠져 있다.


또한 장외자금 시장과 암시장에서 교환되는 비공식적이지만 종종 어마어마한 자금들을 계산에 넣을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방대한 지하경제 전체를 고려할 때, 연간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라는 수치만 가지고서는 실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중략)






수입대체를 촉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환화의 환율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수령된 달러의 가치를 높이고 원조수입을 극대화하는 한편 수입한 자본과 중간재의 비용을 저가로 묶어둘 수 있다.


게다가 남한의 수출은 그때는 대개 텅스텐이나 쌀과 같은 1차 산업 생산물이라서 가격이 탄력적이지 않았다.


미국은 1953년과 1955년에 남한 환화의 평가절하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으나 1960년 이후에 가서야 공식적인 환산이 이루어졌다.






수입대체의 수혜자는 삼성의 이병철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승만은 이병철한테 제일제당과 제일모직과 같은 이전의 일본기업들을 두드러지게 유리한 구매가격으로 내어주었다. 삼성은 이런 호의를 기억해두었다가 선거철에 보답하는 것이었다.


이병철은 기억력이 흐리지 않은 사람이어서 나중에 이승만의 자유당에 6,400만 환을 주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주한미군의 존재 역시 군대식의 수입대체화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었다. 이승만 정권과 미 제8군의 젖줄을 차지하는 경쟁에서 역대의 승리자는 나중에 대한항공까지 거느리게 된 한진기업의 사장인 조중훈이었다.


1950년대 내내 그는 주한미군과 운송계약을 맺었는데, 그 금액은 1960년에 이르러서는 연간 228만 달러에 달했다.


그는 또한 미군으로부터 잉여의 버스도 얻어 서울과 인천 사이의 버스노선을 개설할 수 있었다."(p.430~433)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커밍스 교수가 지적하듯이 객관적인 사실은, 미국은 거의 박정희 쿠테타 정권 말기 때까지 군사원조 중심으로 한국경제를 좌우한 셈이고 원조의 집행까지 직접 감독하면서 이승만, 박정희 일당을 좌지우지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알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은, 박정희의 '한강의 기적'은 그러한 군사경제원조와 미국이 주도한 배트남 전쟁으로의 용병, 일제 식민지에 대한 헐값 면죄부 대가로서의 차관으로 미일 경제구조에 예속되는 대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쿠테타 독재정권의 부정부패와 남한 민중의 고혈이 자리잡고 있죠.






○ 미국이 유렵이나 아프리카, 남미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군사경제 원조를 쏟아부은 이유는 남한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미국 군국주의자들과 독점자본을 위한 것이었고, 소련과 중국을 고립시키고 압박하는 데 헐값으로 군대와 군사기지를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진실 또한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미국(미국 내 군수자본과 극우보수집단)은 반공반북 이데올로기와 분단체제를 유지하고 악용하여 그리고 군사력과 한국군 장악을 토대로 한민족과 남북 민중을 모두 희생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 박정희의 친일 행적과 국가반란 헌정유린, 학살 수탈과 더불어 국가경제 신화를 남한 전체에 하루빨리 걷어내야 합니다. 외자유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박세길 씨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에서 지적하듯이 외자유치의 의도와 구조와 과정과 결과에도 숨어있는 진실이 많지만 외자유치 자체가 대부분 정당성 없는 박정희 일당의 부패구조에 기인한 것도 많을 것입니다.


[네이버] 블로그 : "주진우.......스위스 큰 계좌 몇개가 싱가포르로 옮겨졌다"http://me2.do/xIPvZ89A






○ 이건희가 수백 수천억을 불법 뇌물로 바치고 뇌물로 고위관료를 장악하고 온갖 불법부당행위를 일삼는 것은 그의 핏줄인 이병철의 행태를 그대로 이어온 것입니다. 박근혜가 박정희를 답습하듯... 그들의 죄상을 낱낱이 공개하고 역사적 법적 처벌을 받도록 하는 것이 정의와 민주주의의 시작이고 경제민주화의 핵심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32 : 미국이 주도한 한일 국교정상화






"이미 살펴보았듯이, 1947년 이애로 미국 외교정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을 한국에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일본을 열렬하게 싫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맥아더의 감독 아래에 있는 일본과 경제적인 유대를 발전시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일상적인 반일적 수사들이 그의 정부에 봉직하는 수많은 일제 협력자들에 대한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는 데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1950년대의 일본 역시 한국인의 상처받은 감수성을 어루만져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1952년 남한과의 협상에서 일본측 대표단 단장 쿠보따 칸이찌로오는 남한측 대표들에게 1945년 이래 미국이 한 모든 일들이 국제법 위반이라고 말했다. 36년간의 일본의 한국 강제점령이 한국인들에게 유익했다고 덧붙였다. 논란이 커지자 쿠보따는 마지못해 사과했다.


이런 패턴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된다. 수많은 일본 지도자들은 자기네들이 식민지시대 동안 한국에 기적적인 일을 해주었다는 생각을 고수하는 반면 중국에게는 일본의 전시 행위에 대해 거듭 사죄를 표명했다.






케네디의 취임 이전 혹은 1961년 군사쿠테타 이전 한일관계에서 중요한 진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 미국 정부는 국교정상화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일본이 동북아시아 지역경제의 축이 되도록 압박하는 애치슨의 전략을 살려놓은 것이다.


박정희의 군사쿠테타 후 미국의 경제원조는 거의 50% 급증하여 1961년 1억 9,200만 달러에서 1962년 2억 4,500만 달러가 되었다.






식민지시대 출신의 몇몇 실업계 지도자들이 일본의 실업계와 다시 유대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1961년 10월 서울과 도쿄 사이에 일련의 공개,비공개적 방문객들이 오가는 가운데 김종필이 상의차 일본으로 갔다.


한달 후 박정희는 딘 러스크의 중재로 일본 총리 이께다로부터의 초청을 받아들였고 이께다와 기시 노부스케, 그밖의 일본 지도자들과 장시간의 사적인 회담을 가졌다. 그때 이께다는 러스크한테 '정상화는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장담했다.


1963년에 이르러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은 1억 6,200만 다러로 치솟아 한국 수입총액의 30%에, 그리고 이승만 때 최고치의 4배에 달했다.


박정희와 김종필을 위해 일정 몫의 정치자금을 분담하는 문제에서도 일본인들은 째째하게 굴지 않았다. 미국 CIA의 정보에 따르면 1961년에서 1965년까지 일본회사들이 한국 집권당 에산의 2/3를 제공했는데, 6개 기업들이 6,600만 달러라는 엄청난 액수를 기부했다.


그럼에도 정상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돌파구는 미국의 강한 압력을 받고 나서 1964년에야 뚫렸다. 토쿄 미대사관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께다와 박정희한테 보낸 존 케네디 친서를 포함하여 '수년에 걸친 우리측의 강력한 권고'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김종필은 재산청구권의 결정 액수를 매듭짓고자 다시 도쿄로 갔는데, 한국인들은 배상을 원하고, 일본인들은 '배상'이라고 불리지 않는 조건이라면 한 보따리의 원조와 차관을 내놓을 용의가 있었다.


1965년 4월 3일 한국과 일본의 대표들은 미해결로 남아있는 모든 쟁점들에 대한 합의안을 발의했고, 대한민국 국회는 1965년 8월 14일 협정을 비준했다.


이 협정은 한국경제에 경이로운 일을 해냈으나, 이 타결이 차후 일본에 대한 청구의 가능성을 없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한편, 위안부와 관련된 사항들과 같은 새로운 사실들이 폭로됨으로써 추가 청구의 문제가 거론되었다.






일제가 붕괴한 지 거의 20년 후에 일본 방문객들이 서서히 한국으로 다시 흘러들기 시작했다.


국교정상화로 남한은 일본으로부터 1965년 3억 달러의 무상 원조와 2억 달러의 차관을 받았으며, 일본의 민간기업들이 3억 달러를 더 투자했다. 이때는 한국의 수출총액이 2억 달러였던 시기였다.


결국 박정희는 1960년대 초에 미국으로부터 거절당한 강철공장을 건설하는 데 이 돈과 일본의 최신기술을 사용했는데, 그는 이 공장을 자신의 고향에서 별로 멀지 않는 포항에다 세웠다."(p.448~452)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커밍스 교수는 상당히 많은 자료와 정보를 통해 1965년에 체결된 한일 국교정상화나 한국경제의 일본 편입, 한미일 군사동맹이 미군의 한반도 점령과 냉전이 시작된 해방 이후부터 시작하여 지난 70여년 동안 미국 주도 아래 일관되게 추진되어 온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미국과 미군에게 있어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나 수많은 학살과 수탈과 같은 보편적 정의나 인권, 민족적 감정이나 현실, 배상과 사과, 한국의 자주독립, 평화통일 등은 관심 밖이며 오로지 미국과 미군의 이익을 기준으로 한국과 일본을 대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 군사쿠테타라는 국가반란으로 박정희가 집권한 것도 냉전 구도하에서 세계패권전략에 기초해 미국이 배후에서 움직인 것이고, 남한 민족과 민중들이 대부분 반대하여 박정희 스스로의 힘으로는 추진하지 못했을 한일회담이 가능했던 것도 미국과 주한미군, 미군이 통제하는 한국군, 미국의 군사경제원조를 토대로 하는 협박과 회유, 지지와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통상 한일굴욕회담에 대해 박정희와 김종필 등 친일파만을 비난하곤 하는데, 실제 한일회담과 일본에 대한 경제예속, 군사연결을 밀어붙인 것도 미국이었으며 2014년 현재 한일 군사교류와 협력, 연합훈련을 강요하는 것도 미국인 것입니다.






○ 물론 박정희나 박근혜 친일파 일당이 바보 멍청이는 아니기 때문에 미국과 미군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크게 두 가지 자신들의 이익을 챙깁니다.


첫째는 집권의 정당성과 정통성이 부재한 권력의 안전을 보장받습니다. 박정희는 국가반란 군사쿠테타로, 박근혜는 국가기관을 총동원한 선거쿠테타로 집권했습니다. 박정희 일당의 군사쿠테타 배후에 미국이 있었듯이 박근혜 일당의 선거쿠테타(이명박 포함) 배후에도 미국이 자리가고 있을 것이라는 게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둘째는 사적인 이익을 취하는 것입니다. 위 본문에도 나오고 주진우 기자 등 과거 기사에도 나오고 박세길 씨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에도 나오듯이 박정희는 군사경제 원조나 외국인 투자, 한일협정애 따른 차관 등의 진행에서 반드시 뇌물을 챙겼으며 그 중 상당수가 스위스 비밀계좌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증언입니다. 박근혜의 모든 자산은 박정희가 훔치고 강탈한 국가재산이나 개인재산이었습니다. 박근혜 역시 7인회와 과거 유신잔당들을 통해 재벌, 외국기업, 급융권 등을 통해 사적인 이익을 취하기 위해 발악할 것입니다.






○ 친일파 후예와 사대주의 집단들이 국민재산을 말아먹고 사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해 온갖 불법 부정부패 작당을 벌이는 와중에 국내의 대다수 노동자, 농민, 서민, 중소상인, 청년학생들은 죽어 나가고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정치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자기 정파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반박근혜 반새누리 반재벌 반외세로 뭉치지보다 다른 야당이나 정파, 단체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며 분열을 일삼는 이들을 보면 너무도 답답합니다.










33 : 대재벌






"재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산라인 및 산업체들에서 독점적, 과점적 통제력을 행사하는, 가족이 소유, 관리하는 회사들의 집단'이다. 그러나 이는 기술적인 정의일 뿐이다.


많은 재벌 창립자들은 지주가문 출신이며 그들의 재벌을 직계자손들 내에서 단단히 틀어쥐어 왔다.(중략)






초기의 한 연구는 300명의 기업가 가운데 37%가 '중간급 지주와 대지주' 가문 출신이라고 밝혔다. 사실, 강력한 한국의 가족적 유대야말로 주로 기업의 창업가족으로 구성된 재벌에게는 중요하다.(중략)






재벌의 맨 끝자리 사업 하나하나도 가족구성원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사업체의 약 70%를 아직도 창업가족이 장악하고 있다.(한국어판 2001년 기준)


지배권의 승계는 영도와 사도세자의관계, 즉 장자가 재능이 없다면 어느 아들이 가장 재능이 있을까 하는, 고차원의 규약과 심사숙고의 문제이다.


다행히 재벌한테는 이 문제가 그다지 가혹한 것은 아니다. 예전의 한국은 왕이 하나였지만, 복합기업에는 수많은 자회사들이 있는 것이다.


또한 재벌왕국은 예전의 한국보다 운영하기도 쉽다. 외세의 침략, 군대의 배치, 경찰의 훈련, 백성들로부터의 세금징수, 노동자 교육, 노동현장에서의 결사체 금지법안 제정 등으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국가가 이런 일들을 다 해주는 것이다.






1989년의 한 신문사의 여론조사 보고에 따르면 최상층 재계그룹들의 창립세대 지도자 60%가 자기네 회사 주식의 80%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곳의 귀족층과 마찬가지로 재벌그룹들 역시 능률적으로 그들끼리 결혼을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33대 대기업 가운데 31개가 재벌끼리 인척관계를 맺고 있으며, 부부간의 인연은 각 그룹 규모의 순위를 따르고 있다.(중략)






삼성의 창립자 이병철은 항상 자신을 '일본신사'로 여겼고 일본여성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했다. '삼성(별 셋)'은 미쯔비시의 '다이아몬드 셋'을 응용한 것인데, 미쯔비시 역시 메르세데스의 고고를 본뜻 것일 공산이 크다.


수많은 재벌 총수들과 달리 이병철은 식민지시대에 첫출발을 했다. 지주가문 출신인 그는 1930년애 마산에서 정미소로 시작하였고 그후 대구에서 쌀로 빚은 술을 수출했다.


그의 사업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급속하게 팽창했는데, 그때 그는 자기 공장 부지내의 막사같은 건물에 사는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켰다. 항상 노조에 적대적이었던 이병철은 종종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삼성에 노조를 허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삼성은 이승만 정권 동안 특매가로 일본인 공장들을 전략적으로 사들인 데 힘입어 가장 중요한 경공업회사가 되었다. 이 무렵 이병철은 한국 최고의 갑부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1970년대 중공업 추진정책 동안 삼성은 컴퓨터 가정용 전자, 조선을 포함한 다른 많은 분야로 다각화했다. 1994년 삼성은 정부로부터 거제도의 새 공장에서 자동차 제작을 시작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는데, 거제도는 우연(?)찮게도 김영삼 대통령의 출생지였다.(중략)






재벌기업들은 또한 자기 사람들을 정부에 들여놓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재벌 소유자의 장인들 가운데 3분의 1이 '정부 3대 부처의 고위관료'였다. 노태우가 자식 둘을 선경 재벌 최종현과 신동방 재벌 신명수 자식에 결혼시켰다. 노태우는 또 다른 인척 하나를 통상산업부 장관에 임명했고, 또 다른 인척인 박철언은 정무장관이 되었다.






국방과 강압정치에 책임을 지고 있는 한국 군부는 그 자체로 일종의 재벌이다.


노태우는 군부에도 역시 김복동이라는 인척을 두고 있었다. 김복동은 수백명의 퇴역장성들로 구성된 '솔방울회'를 이끌었다.


국가와 재계의 엘리트를 함께 묶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지연을 두고있는 대구지역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언제나 버티고 있었다. 노태우의 통치기간 동안 경북고등학교의 동창들은 국가안전기획부장, 육군의 최고위 장성, 경찰청장, 국세청장 등을 포함한 정부의 '가장 강력한 6개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에다 다른 동창들도 재무부, 국방부, 법무부, 내무부의 장관직과 몇몇 국립은행장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이는 노태우 정부에서 새로 등장한 현상은 아니었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부 역시 똑같은 지역의 인물들을 과도하게 등용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신혁확은 경상북도에서 태어나 마찬가지로 대구의 같은 고등학교를 거쳐 그후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했다. 1943년에 그는 일본의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다. 1959년에 그는 이승만 정권의 내각에서 가장 젊은 장관이었으며 나중에는 박정희 정권의 신봉자가 되어 1970년대 후반에는 부총리가 되었다.


신현확만이 이런 출세를 한 것은 아니었다. 1989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경상도 출신이 50대 재벌 소유자 가운데 23명, 24개 장관직 가운데 9명, 중앙은행 이사 가운데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수많은 인사들이 1961년~92년 기간 동안 자신의 출신지방이 출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기꺼이 인정했다.






1990년대 중반에 재벌축소와 경제다각화에 관한 무성한 논의를 거친 후에도 10개 기업은 여전히 총샌산의 약 60%를 점하며, 4대 재벌만 해도 40%를 차지한다. 몇몇 학자들은 한구그이 국가(정부)가 점점 더 많은 과업을 민간부문에 넘김으로써 시간이 감에 따라 점차 쪼그라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업들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1993년 후반에 특혜대부금리를 1% 떨어뜨림으로써 복합대기업들에게 또 한번의 파격적인 금리인하를 베풀었다. 복합대기업을 제어하는 숱한 제안들이 토의에 부쳐지거나 심지어 입법화되기도 했으나 실행된 적은 거의 없었다. 여기에는 재벌의 부동산투자, 대중매체회사의 통제권, 자회사간의 내부거래, 자회사간 대부상호보증 등에 대한 제한조치들이 포함된다.






1995년에 전두환, 노태우 그리고 대부분의 대재벌 총수들이 연루된 거대한 스캔들이 터져 두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가는 신세가 되었고, 적어도 12개 기업체의 사장들은 모두 전두환에게 9억 달러 이상, 그리고 노태우한테는 적어도 6억 5천만 달러의 정치성 선거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재판을 앞두고 있다.


또한 이밖에 수억 달러가 전두환과 노태우의 퇴임 후에 그들의 측근들이 관리하는 특별계좌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국가와 재계간의 강력한 조정, 엄청난 경제집중, 정책차관, 값싼 노동력 혜택이라는 한국형 모델은 한국형 개발이 수십년간 지속되도록 도와주었다.


일본, 독일, 미국의 3대 강국과 이탈리아, 스페인, 한국의 3개 중소국의 비교우위에 관한 독일, 스위스 합동의 최근 조사결과에 따르면, 한국 재벌대기업은 임금률에서 일본의 1/4배, 미국의 1/3.8배를, 세금부담에서도 미국의 1/1.8, 스페인의 1/1.4배를 차지했다.


달리 말해서, 한국의 국가는 여전히 대기업그룹들에게 자본주의의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최상의 조건을 제공했다는 것이다."(p.460~466)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커밍스 교수에 의해 다시 확인하는 바이지만, 한국 재벌기업의 몸집 불리기는 정직하지도 정당하지도 한법적이지도 공평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친일매국, 불법과 탈법, 사기와 편법, 뇌물과 협잡, 부정과 부패를 무기로 일제와 미군정, 쿠테타 세력과 독재자에게 검은돈을 바치고 그 대가로 국가자산을 강탈한 것이며, 노동자와 농민의 노동가치를 수탈하여 몸집을 불린 것입니다.


뿌리가 그러하니 이명박근혜 시대의 삼성, 현대 등 재벌들의 행태가 요지부동인 것입니다.






○ 저들은 동일한 범죄를 일제시대부터 미군정 - 이승만 정권 - 박정희 정권 - 전두환 노태우 정권 - 김영삼 정권 -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도 반복했으며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그 극단을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단 한 번도 범죄에 대해 철퇴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과거 불법부정행위에 대해 철저하게 재조사하여 범죄를 저지른 관료와 정치인과 언론인과 지식인들을 단죄해야 합니다.






○ 역사의식과 정의와 민주주의를 제대로 갖춘 정부와 정당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집권하게 되면 친일매국과 국가반란 쿠테타와 위헌 불법행위와 더불어 재벌의 불법부정행위에 대한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를 통해 단죄하고 심판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반란과 매국범죄와 국가자산 불법강탈과 민중수탈 범죄에는 이 땅에 정의를 세우고 후손들을 위해 공소시효를 배제해야 합니다.






○ 물론, 그에 대한 주권자 다수의 공감과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많은 분들의 참여에 의하여 조사, 분석이 이루어지고 논의가 진행되어야 하며 여론화시켜야 하고 노동자, 농민, 서민, 중소상인, 청년학생, 여성, 지식인들 다수가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제목만 민주나 정의가 아니라 실질적인 민주주의와 정의와 진보를 이루어낼 수 있는 정치세력을 키워야 하며 그들과 함께 집권하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34 : IMF 위기






"1997년 말경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가 한국을 강타하여 선진공업국 지위로 발돋움하던 한국의 행진을 멈추게 했을 뿐 아니라 개발 프로그램 전체에 의문을 제기했다.


1997년 초여름 태구 통화에 대한 예금인출 쇄도와 함께 시작된 경제위기는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에 차례차례 전염되었고, 11월에는 마침내 강도 10의 태풍처럼 한국을 강타했다.


12월 초경에는 근본적으로 파산상태에 이른 한국경제에 국제통화기금(IMF)은 570억 달러의 구제금융지원을 들고 개입했다.






그러나 IMF는 이런 개입에 앞서 에전의 경우와 달리 이 구제금융에 값비싼 대가가 따를 것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대가는 한국 정치경제의 철저한 구조조정이었다.


경제위기가 한 고비 지나갔을 즈음 한국 통화는 예전 가치의 절반으로 떨어졌고 세계 개발경제국 가운데서의 GNP 순위는 11위에서 17위로 떨어졌다.


이는 혼란으로 점철된 세기의 와중에서 거의 40년간 지속된 성장의 막바지에 밀어닥친 잔인한 일격이었으나 무엇보다도 잔인한 것은 저명한 미국 관리들이 한국의 경제 모델을 공격하고, IMF의 관리들과 긴밀히 협력하여 한국 정치경제의 근본적 요소의 개혁을 시도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냉전시대의 한국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비호를 받는 보호경제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보호주의와 대외적으로는 수출주도 성장이라는 이들 국가의 국가주도 신중상주의적 프로그램에 대해 미국은 보고도 못 본척하거나 심지어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두는 정책을 취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무엇보다 방대한 미국시장의 개방성에 의존했다. 여기에 바로 '아시아 개발국가'의 본질이 있었다. 이들 경제는 공산주의와의 전지구적 투쟁에서 대안적 개발 모델을 제공하는 데에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경제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냉전기간이었다면, 남한은 미국의 주요 동맹국이자 전방국가로서, 안보문제에 대한 즉각적이고 최우선적인 강조 덕분에 구제금융을 지원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1983년 레이건과 나까소네는 서울에 총 4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주선했다. 이 액수는 한국이 지불하지 않은 전체 채무의 10%에 달했다.


그러나 이제 양극화된 냉전이 끝나고 보니 이들 경제가 자유시장과 이른바 신자유주의에의 시대에 얼마나 '적합한가'의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였으니, 많은 한국사람들에게 이런 상황이 놀라움과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1997~1998년 아시아 위기의 깊은 의미는 일본/한국 유형의 '후발' 산업발전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미국의 시도에 있다.






이런 종류의 외국 간섭, 즉 원격조정에 의한 경제개입이라는 형태가 가능한 것은 전후 남한의 강력한 민족주의적 신중상주의가 반(半)주권이라는 연약한 토양 속에 증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한은 언제나 자국민들에게는 강력한 국가였지만 미국에 대해서는 약한 국가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역설적으로 미국의 개혁가들에게는 한국민 내에 자발적인 동조자가 있었다. 특히 이런 신중상주의적 정치경제 모델을 개혁하거나 무화시키려는 시도를 오랫동안 계속해온 강력한 노동조합이 있었다.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모델을 규정하는 정부, 금융, 재벌이라는 핵심 연계에 대해 적어도 20년 동안 줄곧 반대해온 경력이 있는 김대중을 한국인들이 대통령으로 선출한 시점에 이 심각한 위기가 닥쳤다는 점일 것이다.


이 야릇하고도 전혀 예측하기 어려운 사태 전환이 한국이 위기를 잘 넘기고 고도성장으로 복귀하는 관건이 되었다.






1997년 말의 IMF는 거의 미국의 작품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미국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과 차관 로런스 써머스는 연방준비이사회 의장 앨런 그린스펀과 함께 '클린터노믹스'를 이끌어가는 3인방이었다.


'클린터노믹스'란 미국의 지속적 경제성장 궤도로의 복귀뿐 아니라, 아시아 및 라틴 아메리카의 개발경제를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기구(APEC) 그룹 또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같은 미국 영향하의 다선적 조직에 묶고자 하는 적극적인 대외경제정책을 반영하는 용어이자 자유무역, 자유롭고 개발적인 시장, 경제교류의 '투명성', '법의 지배' 등의 미덕과 관련해 자주 반복되는 주문이기도 하다.


1997년 가을 동북아시아의 유동성 위기가 닥쳤을 때 이 세 관리의 영향력은, 우선 위협받는 은행들의 구제를 위한 '아시아 기금'을 조성하려는 일본의 시도를 빗나가게 하고, 그런 다음 IMF의 구제금융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의 '주문' 노선에 맞는 광범위한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시점에서 한국의 금융이 '투명성을 결여했다'고 말하는 것은 농담이 아니라면 일종의 완곡어법이었다. 최고위 관리들은 겁에 질려 사태의 절박성을 은폐하느라 급급했던 것이다.


11월 한국은행 총재는 단기 불이행 대출이 전부 200억 달러에 불과하다고 말했지만 민간 분석가들은 그 수치를 800억 달러까지 잡고 있었다. 총재는 외환보유고가 310억 달러라고 했지만 사실은 60억 달러밖에 남아 있지 않았으며, 그나마도 전부 가까운 시일 안에 지출되기로 정해져 있었다.


달리 말하면 국가 자체가 파산상태였다. 서울은 현금이 필요한 은행을 돕기 우해 자그마치 하루에 20억 달러씩 외환보유고를 소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일까지 IMF의 그제금융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대신 일본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11월 중순 재정경제원 장관 임창렬은 공개적으로 일본의 개입을 호소했다. '만약 한국경제가 잘못되면 일본경제도 잘못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워싱턴은 선거운동 기간 동안 구제금융 지원이 빨리 결정되기를 원했다. 그래야 모든 후보가 IMF의 구제금융에 전적으로 찬성하거나, 아니면 원한다면 거리를 두거하 하는 입장 표명을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루빈 재무장관이 추수감사절 휴가를 포기하고 앨런 그린스펀과 급히 회동한 다음 서울에 써머스(그후 '아시아를 미국의 이익에 맞게 재편한 점에서 현대판 더글러스 맥아더'라고 불림)를 포함한 두 명의 미국 고위관리를 서울에 파견한 때에 다가왔다.


써머스는 기자들에게 '금융지원은... 오로지 IMF의 개혁 프로그램과 관련해서만 제공될 것'이라고 말했다. 12월 1일과 2일 한국 재경원 장관과 IMF팀 사이에 밤을 꼬박 새우는 협상이 이루어진 결과 한국은 IMF로부터 대기차관 210억 달러, 세계은행으로부터 100억 달러, 아시아개발은행으로부터 40억 달러, 미국과 일본 및 기타 국가의 추가지원 220억 달러 등으로 구성된 총 57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는 데에 합의했다.






IMF는 530억 달러 지원프로그램에 대한 대가로 철저한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IMF 협상의 기밀문서는 한국의 개발 모델을 직접적으로 겨냥했다.


한국은 1998년 목표성장율을 6%에서 3%, 즉 반으로 줄여야 할 것이며, 한국기업에 대한 외국투자 상한선을 26%에서 50%로 높이고 외국기업에 의한 인수합병을 용이케 하며 국내시장, 특히 자본 및 자동차 시장을 개방하고 엄청난 규모의 해고를 허용하여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대 금융기관들은 이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회사들로부터 감사를 받아야 하고 엄청나게 다각화된 거대복합기업은 계열사간 상호 대출보증 및 다른 종류의 내부거래를 중단해야 한다.


루빈 자신이 합의를 10시간 가량 연기시키면서 새로운 '투명한' 회계기준을 갖추도록 압박을 가했다. 한국관리들은 그들대로 이 개혁 프로그램에 반(反)노조 조항을 포함시키자고 간청했다.






경제위기로부터 1년 전인 1996년 12월 김영삼과 집권당은 국회에서 새로운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새 노동법은 국가 통제하의 대규모 노조인 한국노총을 향후 5년간 공식적으로 인정된 유일한 노동조직으로 존속시키고 50만 회원의 독자적인 민주노총을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여 거기로 내몰았다.


이 법이 바로 한국기업들에게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는 합법적 권리와 파업자들을 비조합원으로 대체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던 것이다.


한국은 실업수당이나 안전망이 전무하기 때문에 새 노동법은 노동자의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했다.


1997년 1월 노동자 수십만 명이 몇주 동안 계속 서울의 거리를 뒤덮었고 며칠 동안 연달아 총파업에 가까운 시위를 벌이자 정부는 마침내 자세를 누그러뜨리고 새 노동법을 보류하기로 했다.


12월의 위기가 닥치자 IMF는 김영삼 정부가 하지 못한 일, 즉 수백만의 노동자를 해고하는 과업을 떠맡았다."(p.467~471)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이번 글을 통해 IMF 경제위기의 배후가 누구이고 의도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커밍스 교수의 말대로 한국의 주권이 군사외교뿐 아니라 경제분야에서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반주권' 상태는 IMF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잠시 주춤하다가 이명박근혜 정권 들어 더욱 심해진 상태입니다. 한미FTA는 IMF와 미국 독점자본의 한국경제 종속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협정인 셈입니다.






○ 이러한 구조와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반미는 종북'이라고 선동하는 무지몽매한 매국노들이 판치는 2014년은 확실히 역사의 반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반미투쟁은 시대착오'라고 주장하는 사이비 민주세력, 사이비 진보세력은 한미 관계의 현실을 부정하거나 망각한 '아Q식 정신승리'라 할만 합니다.






○ 한국의 주권이 불완전한 이유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탐욕에도 기인하지만, 미국/미군의 보호와 후원이 없이는 스스로의 정당성과 국정수행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국내의 매국협력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승만과 장면,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와 김영삼, 이명박과 박근혜는 그 전형적인 예이며, 실제로 제국주의 일본을 맹종햇던 친일파의 후예들이고 제국주의 미국을 맹종하는 매국노들인 것입니다.






○ 1997년 초 비록 50만 명의 조합원에 불과함에도 강력한 총파업투쟁으로 김영삼의 노동법을 막았던 민주노총이 2014년 더 많은 조합원과 조직규모에도 불구하고 투쟁력과 조직력을 상실한 채 표류하는 모습은 너무도 안타깝습니다..ㅠ










35 : 빠찡꼬업체와 기적






"남한의 (외형적인) 괄목할 만한 급성장을 평가할 때, 그리고 다른 산업국들 및 북한에 대한 남한의 상대적인 위치를 평가할 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한의 GNP는 일본 빠찡꼬 업체의 연간 총매출액보다 크지 않았다는 점을 명심하는 것이 유익하다.


이는 터무니없는 이야기 같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1993년 빠찡꼬사업의 총액은 1,750억 달러로 추정되었지만, 그것은 경기 후퇴의 수치였다. 그 이전에는 추정액이 2,500억 달러, 그러니까 1992년 경의 대한민국 GNP와 맞먹는 액수까지 치솟기도 했다.


수많은 주일한국인들은 빠찡꼬 오락실 주인인데, 대체로 이들의 충성심은 북한 쪽에 가 있다.






<타임>지는 일본의 빠찡꼬 업주로부터 매년 10억 달러 이상이 북한 쪽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나는 총액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한다.


다른 미국 간행물과 마찬가지로 <타임>지는 이를 최신뉴스로 다루었는데, 사실 이 관행은 그 이전은 아니라 해도 적어도 1955년부터는 죽 있어왔던 것이다.






이는 한강의 '기적'을 들먹이는 기자들이나 반세기에 걸친 남북간 경쟁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믿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남쪽의 한국인들은 손이 다 닳도록 일해서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산업국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러니 '결코 기적은 없었다'고 하는 것이 그나마 이 굉장한, 재능있는 주민들의 노고를 제대로 인정하는 것이다."(p.482~483)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커밍스 교수에게 감사와 애정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마지막 문장과 같은 그의 한국인, 특히 한국 민중에 대한 애정 때문입니다.






○ 일본 내에 존재하는 빠찡꼬업체의 현황과 북한과의 관계는 그동안 소문이나 기본적인 사항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구체적인 수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재일조선인(재일교포) 사회에서, 그것도 재력이 있는 재일조선인들이 남한보다 북한 체제 또는 지도부를 인정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재일조선인 또는 재일교포에 대한 남북 당국자들의 입장과 태도에 대해서 한번쯤 공부하고 싶었는데, 다시금 그것을 상기시켜 주네요..







36 : 미덕 2






"외국 정치학자들과의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남한은 세계에서 가장 불안정한 정치체제를 지녀왔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근래에 이 혼란의 시금석은 한국의 천안문 사태라고 할 1980년의 광주항쟁인데, 여기서 학생들과 청년들이 1989년 6월의 중국 인민공화국과 맞먹거나 아니면 더 큰 규모로 학살되었다.






광주는 전라남도의 도청 소재지였으므로, 1980년의 소요는 동학란, 1946년 가을추수 봉기, 한국전쟁에서의 빨치산 투쟁과 마찬가지로 근대시기에 옛 백제의 영토인 이 지역을 괴롭혀온 저개발과 정치적 탄압의 문제를 표출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노동자 권리를 위한 이 운동들은 전국적이었고, 이 운동들이 수십년에 걸쳐 성장함에 따라 '양키 고 홈'이라는 말은 이제 반체제세력의 상투어가 되었다.






남한의 발전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이런 어두운 면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드물고, 흔히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는 발전과 더불어 엄격한 안보가 요구된다는 관점에서나 혹은 유교전통이나 한국정치의 미숙성이라는 관점에서 역대 정권의 권위적인 정치를 정당화하는 경향이 너무 심했다.


미국 국무장관인 죠지 슐츠는 1986년 5월에 한국을 방문하여 민주주의를 향해 '급속히 이행한다'고 전두환을 칭찬했는가 하면, 필리핀 사람들과 비교하면 한국인들은 정치적으로 미숙하다는 식의 발언으로 한국인들을 모욕했다.(필리핀 사람들은 바로 그 전 해에 마르코스의 독재를 무찌르고 코라손 아키노의 지도 아래 황색혁명을 성취했었다.)






이제 우리는 이 민주주의 운동들을 검토하기로 한다.


이 운동들은 '미덕'의 범주에서 다시 묶은 것은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들이 반대한 사람들보다 반드시 더 덕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종종 그렇기는 하지만) 한국인들이 20세기에 이르러 탈피했다고 믿는 도덕적 질서가 그들의 마음에 여전히 작용하고 있음을, 학생들과 지식인층이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특별한 역할을 맡고 있음을, 근대 한국을 건설한 기층민의 위엄과 용기를, 생산직 노동자의 거대한 힘을 시사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느 사회에서나 민주주의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나 정치체제가 아니라 단 한 발의 전진을 위해서도 싸워 쟁취해야 하는 것'임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인의 투쟁이 너무나 길고 험난했기에 우리 시대에 대한민국만큼 민주주의를 누릴 만한 나라는 없을지도 모른다."(p.484~486)






: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1997) 중에서...






○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번역자들이 '미덕'으로 번역한, 커밍스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미덕'의 의미를 한국인인 저도 알듯 모를듯 합니다...^^


'미덕 1'은 한민족의 기원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민족과 민중들이 대대로 살아오면서 만들어 낸 또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문화, 도덕, 세계관을 의미했습니다.






○ "민주주의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나 정치체제가 아니라 단 한 발의 전진을 위해서도 싸워 쟁취해야 하는 것"임을 우리는 2014년에도 처절하게 몸으로 마음으로 깨닫고 있습니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