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1

다르면서도 함께 있기 위한 기술이 민주주의 : 책과 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다르면서도 함께 있기 위한 기술이 민주주의 : 책과 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다르면서도 함께 있기 위한 기술이 민주주의
등록 :2019-01-19 10:14수정 :2019-01-19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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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 인터뷰

역사문제연구소 첫 외국인 연구실장
지낸 일본인 한국 현대사 연구자
가해국 출신이면서 소수자의 위치
20년 한국생활 정리하며 ‘유고집’ 내

재일조선인 운동하며 한국과 연결
세월호 시위, 위안부 수요시위 참여
옥바라지골목 철거 항의 연대 활동


후지이 다케시가 지난 8일 오사카 쓰루하시역 2층의 헌책방에서 책을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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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이 다케시. 일본에서 태어나 재일조선인과 연대하며 한국을 공부한 일본인. 가해 국가 일본의 지식인으로서 피해 국가 한국의 현대사를 전공하고 한국에서 연구하며 활동한 역사학자. 2013년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연구단체의 연구 총괄 책임을 맡은 첫 외국인. 외국인이면서 어느 한국인보다 깊고 날카로운 한국어로 한국 사회를 독해했던 문장가. ‘한국의 후지이’는 한국 안에 살면서도 ‘한국 밖’에서 한국을 읽어낸 이방인이자 소수자였다. ‘우리’ 안에서 배제가 작동하는 방식을 그는 예민하게 감각했다. 한국 사회에 지적 자극을 던지던 그가 지난해 3월 한국 생활 20년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최근 그의 글을 묶은 책 <무명의 말들>이 그가 없는 채로 한국에서 나왔다.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책이 “유고집”이며 “글쓴이 후지이 다케시는 죽었다”고 선언했다. 그가 한국을 떠나며 남긴 ‘유고집’은 그의 20년이 건져낸 ‘한국 사회 해부’이자 내부자의 눈엔 보이지 않는 ‘한국의 그림자’에 대한 기록이다. 죽은 후지이의 글을 들고 살아 있는 후지이를 만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쓰루하시 시장(일본 오사카) 김치가게에서 후지이 다케시(47)가 물었다.
“갓김치는 없어요?”
그의 눈앞에서 배추김치, 깍두기, 오이소박이 등이 빨간 얼굴로 손님을 맞았다. 재일한인인 가게 주인과 일본인 후지이가 한국어로 말과 웃음을 주고받았다.
일본과 한국이 뒤섞인 땅이 오사카에 있었다. 오사카 이쿠노(옛 이름 ‘이카이노’)는 1948년 4·3학살을 피해 밀항한 제주인들의 집단 은거지(1959년 8만5천여명의 재일제주인 중 5만5천여명이 오사카에 거주)였다. 1920년대 조선인 노동자들이 건설한 히라노(옛 이름은 백제를 뜻하는 ‘구다라’) 운하를 오른쪽에 두고 왼쪽으로 제이아르(JR)선 모모다니역과 쓰루하시역 사이에서 이쿠노는 코리아타운을 품었다.
‘쓰루하시 국제시장’은 종전 뒤 암시장으로 출발했다. “가게는 일본인, 중국인, 그리고 조선인들이 운영하고 있었지만 조선인들의 가게가 절반을 차지”(김석범 <화산도>)했다. 뒷골목에서 김치를 팔던 조선인들이 조금씩 길가로 나와 시장으로 스며들었다. 조센이치바(조선시장)의 일본어 간판들 가운데서 ‘왕짜장’이 한국어로 우렁찼고, ‘마네키네코’(앞발을 흔드는 일본 고양이 장식물) 틈에서 돌하르방과 장승이 아담했다. 언어와 국가가 경계를 흐리는 시장 골목에 서서 후지이가 김치 조각을 집어 맛봤다. 일본인지 한국인지, 오사카인지 제주인지, 그 무엇도 아닌지 모를 풍경이 식민과 피식민, 이주와 정주를 거쳐 그의 주위로 펼쳐졌다. 매운 김치 맛을 뒤로하고 그가 한국을 떠난 지 10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죽음 선언한 ‘유고집’
후지이 다케시. 1972년 일본 미에현에서 태어나 교토대 사학과를 졸업(졸업논문 주제 ‘경성제국대학’)했다. 대학 때 재일조선인 인권운동을 하며 한국과 연결됐다. 오사카대 일본학과에서 석사학위(‘대한민국 초기 반공체제 형성 과정 연구’)를 받았고, 성균관대 사학과에서 박사학위(2010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 ‘족청·족청계의 이념과 활동’을 보완해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2012)를 냈다. ‘족청’은 조선민족청년단의 줄임말로 해방공간에서 ‘민족주의, 반공산주의, 반자본주의’를 표방했던 단체다. <번역과 주체>(사카이 나오키 저)와 <다미가요 제창>(정영혜 저)을 한국말로 옮겼다. 성균관대 사학과 비케이(BK)연구교수로 강의했다. 2013년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됐을 땐 국내 주요 역사연구단체에서 연구 총괄 책임을 맡은 첫 외국인 학자였다.
그는 한국 현대사를 전공한 일본인으로서 한국에 정착해 한국말로 연구하고, 글을 쓰고, 활동했다. 그 드문 정체성을 바탕으로 그는 한국 역사와 사회를 분석하고, 도전하며, 행동했다. 한국과 일본이 통과해온 시간 속에서 ‘한국의 후지이’는 가해국 출신이면서 이방인과 소수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는 한국 안에 살면서도 한국 밖에서 한국을 읽어낸 역사학자였다. 그가 2014년 6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한겨레>에 연재한 칼럼들은 어느 한국인의 언어보다 깊고 날카로운 문장들로 독자들을 흔들었다. 그 44편의 글을 묶은 <무명의 말들>(포도밭)이 최근 출간(2018년 12월21일)됐다.
한국 사회에 지적 자극을 던지던 그의 글이 2018년 들어 갑자기 사라졌다. 지난해 3월 그는 1998년 시작한 한국 생활 20년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와 가까운 일부 지인들 외엔 귀국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무명의 말들>은 그가 없는 채로 한국에서 나왔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은 유고집”이라고 썼다. 그가 한국을 떠나며 남긴 ‘유고집’은 그의 지난 20년이 건져낸 ‘한국 사회 해부’이자 내부자의 눈엔 보이지 않는 ‘한국의 그림자’에 대한 기록이다.
“글쓴이 후지이 다케시는 죽었다.”(서문)
자신의 책에서 스스로의 죽음을 선언한 그를 만나러 지난 8일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한차례 인터뷰를 거절(<한겨레> 2019년 1월1일치 ‘칼럼집 ‘무명의 말들’ 낸 역사학자 후지이’)한 적이 있었다. ‘토요판’의 추가 요청에 고심하 던 그는 한국을 떠난 이유(“사적인 인간관계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언론에 말씀드릴 순 없다”)를 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죽은 후지이의 글을 들고 살아 있는 후지이를 대면하는 일은 낯설었다. 그는 저녁 무렵 쓰루하시역에 도착했다. 횡단보도 앞에 선 그의 얼굴 위로 겨울 어둠이 내렸다.
―왜 유고집인가.
“더는 글을 안 쓰기로 했으니까.”
그는 책에서 자기고백처럼 ‘절필’을 말했다. “저의 부끄러운 삶을 직시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제가 글을 써서 발표할 만한 인간이 못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기로 했고, 이미 쓴 글들도 묻어버리기로 했습니다.”(서문)
―죽음까지 선언할 필요가 있었나.
“나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었다. 한국을 떠나는 것 자체가 큰 결단이었지만 자꾸 미련이 남았다. 미련을 끊어버리기 위한 것이었고, 내가 쓴 글들을 내 손에서 떠나보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내가 쓴 글들이지만 이젠 내 것이 아니다.”
―한국에 글을 남기고 죽은 후지이와 일본에서 살아가는 후지이는 어떻게 다른가.
“한국에서 나는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나의 글과 활동이 주목받은 측면이 분명 있다. 남들이 내게 귀 기울이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오만과 착각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그런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다.”
한 선배 역사학자는 말했다. “후지이는 아까운 연구자다. 그는 ‘국민’의 틀을 넘어선 눈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봤다. 한국에서는 드문 시각이었고 그래서 더 소중했다.”
그는 일터가 있는 히가시오사카시(오사카부)에서 퇴근하고 오는 길이었다.
서른살 이후 그는 생활 기반을 한국에 쌓았다. 지인 대부분도 한국에 있었다. 한국에서 귀국 직후 그는 한달간 편의점에서 밤샘 일을 했다. 요양원에도 구직 신청을 했으나 ‘너무 고학력’인 이력 탓에 거듭 떨어졌다. 일본은 지역마다 최저시급이 달랐다. 오사카와 맞닿은 나라현에 집을 둔 후지이가 근처 편의점(시간당 800엔대)에서 일했을 땐 야간수당을 보태야 시급 1천엔을 맞출 수 있었다. 오사카의 최저시급은 936엔이었다. 조금이라도 나은 시급을 받기 위해 오사카 쪽에서 일을 찾았다. 지난 11월부터 서류 스캔 작업을 하는 회사에서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 일(서류정리와 스캔)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하던 시절 통역을 해 생활비에 보탰다. “그때에 비해 몸값이 10분의 1이 됐다”며 웃었다.
지난 8일 저녁 일본 오사카 쓰루하시역 횡단보도 앞에 선 후지이 다케시의 얼굴 위로 겨울 어둠이 내렸다.
지난 8일 저녁 일본 오사카 쓰루하시역 횡단보도 앞에 선 후지이 다케시의 얼굴 위로 겨울 어둠이 내렸다.
‘가담자’의 부끄러움
검은 물결이 책 위에서 출렁였다. 질긴 파도 위에서 표지 제목과 하얀 글자들이 둥둥 떠다녔다. 가라앉은 세월호의 통증을 책은 선명하게 수면 위로 밀어올리고 있었다.
2014년 5월17일 후지이 다케시는 서울 종로구 안국동로터리에서 경찰에 연행됐다. 세월호 참사 한달을 맞아 희생자 추모와 진상규명 요구 시위가 있던 날이었다. 그날 200명 넘는 사람이 경찰차에 태워졌고 그들 중에 후지이도 있었다. 경찰의 해산명령 뒤 귀가하려고 인도로 올라섰다가 경찰에 포위됐다. 검찰은 일반교통방해죄를 물어 그에게 벌금 300만원을 구형했다.
그 사건 2주 뒤(2014년 6월1일) 책의 첫 글(‘멈춘 세월, 흐르는 시간’)이 발표됐다. 그는 세월호 참사 뒤부터 “우울하게 보내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고 썼다. “나를 자꾸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심하게 흘러가는 ‘일상의 시간’이며, 무엇보다도 거기에 나도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는 박근혜 정권이 세월호의 죽음과 무관함을 드러내려 정치와 행정을 총동원하던 시기였다. 후지이는 거꾸로 “가담자”로서의 부끄러움을 이야기했다. 감당할 수 없는 죽음이 발생했는데도 계획대로 강의하고 바쁜 일상을 탈 없이 보낸다며 “붕괴감”과 “암담한 심정”에 빠졌다.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안다는 것이 갈림길에 설 때마다 그의 선택을 이끄는 윤리인지도 몰랐다.
―가담자로서의 자의식이 왜 중요한가.
“가해자 의식이 한국 사회에는 별로 없다. 피해자로 머무는 것이 편하기는 하다.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피해자의 자리를 얻었을 땐 더욱 그렇다. 가해자의 자의식을 갖게 되면 공인된 발언권을 가질 수 없다. 자신을 정당화해줄 아무런 논리도 없는 위치에서 말해야 하므로 소수자와 비슷한 위치에 서게 된다. 인간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가해자의 성격을 띤다. 이슬을 먹고 살지 않는 한 어떤 생명을 빼앗아야 생존할 수 있다. 자신이 가해자임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어떤 윤리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를 계속 고민해야 한다.”
그는 ‘명복을 빌지 마라’는 글에서도 말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계속 싸울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피해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가해자임을 깨닫고 자신을 가해자로 만든 위치에서 벗어나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2015년 4월12일)
―피해·가해의 기존 구도를 깨는 생각이다. 가해자가 되는 용기는 언제 필요한가.
“1959년 일본 규슈 북부의 탄광지대에서 창간된 <무명통신>이란 간행물이 있었다. ‘우리는 여자에게 덮어씌워진 이름을 반납하겠다’는 창간사의 첫 구절에 잡지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가부장제를 우선 비판하는 것이지만 가부장제에서 형성된 피해자의 자유, 즉 ‘여성들은 아무도 해치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도덕적 안락함이 스스로의 가능성을 축소해버린다는 우려였다. 권력에 대항하는 가해자가 되자고 창간사가 강조한 이유다. 이 말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면 책임질 필요도 없다.”
1992년 대학생 후지이는 일본 자위대의 캄보디아 파병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존재를 두고 위헌을 다투던 자위대가 1991년 걸프전을 거치면서 파병을 논쟁하는 단계로 나아가 있었다. 대학생들이 ‘파병을 통한 국제공헌’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국제연대’를 해야 한다며 반대했으나 파병은 단행됐다. 파병을 막지 못한 학생들은 ‘다른 운동’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후지이의 한 친구는 일용직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운동에 뛰어들었고, 다른 친구는 필리핀 국제연대에 나섰다. 후지이에겐 바로 곁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들이 보였다. ‘위안부’ 이슈가 일본에서 처음 제기됐을 때부터 그는 힘을 보탰다. 우토로마을(교토부 우지시.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거주해온 마을) 강제철거 저지 싸움에도 함께했다. 그는 오사카대 석사학위 논문을 한국에 머물며 썼고, 박사학위를 하면서는 한국에 살았다.
재일조선인은 한·일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말하기와 쓰기, 일상생활과 연구활동이 한국과 일본의 국경 안에 갇히지 않는 후지이는 재일조선인들을 구별하고 떼어내는 ‘한국인’을 따옴표를 쳐서 표기했다.
“일본에서 차별받는 재일조선인들의 이야기는 한국에서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면서 소비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재일조선인들의 이야기는 그 ‘한국인’이라는 범주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의식이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유희를 떠올리며’)
한·일 양국 사이에서 그는 ‘외국인’의 의미와도 싸웠다. 2005년 그가 한국말로 옮긴 <번역과 주체>에서 그는 “이 책은 외국인(미국에 사는 사카이 나오키)이 외국어(영어)로 쓰고 외국인(후지이 다케시)이 외국어(한국어)로 옮긴, 외국인을 위한 불순한 책”이라고 했다. “끊임없이 균질적이기를 요구하는 세계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후지이 다케시가 지난 8일 저녁 오사카 쓰루하시의 한 김치가게에서 재일한인 주인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후지이 다케시가 지난 8일 저녁 오사카 쓰루하시의 한 김치가게에서 재일한인 주인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이 가해자임을 더 의식해야
무엇 하기도 전에 ‘균형’ 운운 안돼
혐오는 사회적 서열 전제한 비겁함”
“임정이 한국 독립운동 과잉 대표
다양한 흐름 발굴 노력 옅어져
3·1운동 ‘숭고한 애국’ 박제 말아야
신채호의 변화는 내게 희망을 줘”
오사카 편의점 등에서 최저시급 일
새벽 5시 일어나 두시간 걸어 출근
“나는 지금 불을 끈 채 나를 보며
내 너머 세계 보이길 기다리고 있어”
관습적 사고에 도전
“여기서 이러지 말고 위안부 문제나 해결하세요.”
2016년 3월15일 서울시 종로구청 주택과장의 말에 후지이가 반발했다. 종로구 무악동 ‘옥바라지골목’(서대문형무소와 후신인 서울구치소 수감자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가족들이 머물던 골목) 철거에 맞서 주민들과 함께 항의 방문한 그에게 “내정간섭”이란 폭언이 돌아왔다.
“서울시민이 이야기하는 게 내정간섭이라고요?”
“당신네 나라 가서 해요.”
“외국인은 서울시민 아니에요? (종로구청에) 주민세도 내고 있어요.”
“일본인이면 위안부 문제나 먼저 해결하라니까.”
―차별을 전제로 깐 ‘외국인’이란 단어와 부딪히며 어땠나.
“정말 화가 났던 것은 그들이 ‘위안부’ 이슈를 써먹는 방식이었다. 그날이 화요일이었으니까 이튿날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시위가 예정돼 있었다. 시위 당일 주택과장을 혼자 다시 찾아가 ‘위안부 문제 해결하러 수요시위에 가자’고 했더니 ‘못 간다’고 하더라. 그는 ‘위안부’란 단어를 일본인인 나의 입을 막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후지이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소재로 쓴 글에서 그날 일을 떠올렸다. 날마다 구청을 방문해 시장 재개발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할머니가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그의 민원을 귀찮아하던 구청 공무원들은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란 사실을 안 뒤 적극적으로 미국 의회 증언을 돕는다.
“(주인공 할머니가) 재개발 문제를 제기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던 이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귀를 기울이는 것일까. … (주택과장이 내게 해결하라고 소리친) ‘위안부 문제’는 재개발 문제를 말하는 입을 막기 위한 권위적 도구였다. 당시 옥바라지골목의 역사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던 종로구가 최근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공공조형물로 지정해 소녀상 지킴이로 나섰다. 과연 그들은 달라진 것일까.”(2017년 10월15일 ‘후 캔 스피크’)
영화에서도 할머니의 의회 증언은 성공적으로 끝나지만 할머니의 현재 삶을 파괴하는 재개발의 결론은 말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국민’으로 호출되는 나라에서 어떤 말이 선택되고 어떤 말이 버려지는지를 그의 글은 보여준다. ‘우리’ 안에서 배제가 작동하는 방식을 ‘외국인 후지이’는 예민하게 감각했다.
―촛불집회에서 느낀 ‘비국민’으로서 소외감을 적은 글(2016년 12월4일 ‘누가 싸우고 있는가’)이 있었다. “시위 주체가 ‘국민’으로 호명될 때가 최근에 와서 부쩍 늘었다”고 썼다.
“한국에 살고 있을 때는 그 사회의 구성원일 뿐 딱히 나를 일본인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특별히 큰 상처를 받지도 않았다. 반면 일본어로 번역된 칼럼들에 달린 일본인들의 반응은 달랐다. 내가 재일조선인이면서 일본인인 척 글을 쓴다거나, 만일 일본인이라면 반일좌익이라고 하더라(웃음).”
그의 글들은 한국인들이 어려서부터 교육받으며 당연하게 여겨온 생각을 찌르고 때린다. 미국 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의 문장(“합당하지 않은 사소한 법들을 매일 어기도록 하세요”)을 인용하며 후지이는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길에서 신호등을 지키도록 체화돼 있는 ‘시민의식’이 무엇인지 묻는다. “어떤 법이 정의롭고 합리적인 것인지 자신의 머리로 직접 판단하는 훈련을 통해 날렵하고 민첩한 정신자세를 유지”(‘신호등 안 지키기’)하도록 권한다.
세월호에서 울려 퍼진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도 그는 뒤집어 생각한다.
“시급이 아닌 분급을 받고 일하기도 하는 이 사회에서 … 권력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가만히 있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 우리 모두가 우울증에 빠져 있으면 이 체제는 굴러가지 못한다. 그러니 권력의 초미의 관심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는 영역과 가만히 있어야 되는 영역을 나누며 조절하는 일이 된다.”(‘멈춘 세월, 흐르는 시간’)
지난해 3월 후지이 다케시가 서울 제기동 역사문제연구소에서 ‘가해국 국민으로 살기―베트남 전쟁, 국가, 그리고 나’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지난해 3월 후지이 다케시가 서울 제기동 역사문제연구소에서 ‘가해국 국민으로 살기―베트남 전쟁, 국가, 그리고 나’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차이를 다루는 방법
통합, 화합, 단합, 안정…. 차이와 다름보다 동질성을 강조하며 한국의 체제 유지와 통치 수단으로 활용돼온 단어들을 후지이는 불편해했다.
―더 많은 편향이 생겨나야 사회가 생동한다(‘균형 잡힌 역사교육이란’)고 했는데.
“나는 무엇인가를 하기도 전부터 ‘균형’ 운운하는 것을 싫어한다. 각자 신념대로 주장하고 그것들이 맞부딪치는 가운데 결과적으로 생겨나는 게 균형이다.”
―편향은 ‘증오’ 또는 ‘혐오’와는 다를 것이다. 둘은 현재 한국 사회의 중요 화두기도 하다. 증오와 혐오를 구분하면서도 증오에선 어떤 가능성을 보는 듯하다.
“혐오는 비겁한 행위다. 사회적 서열을 전제로 한다. 이 사람은 공격해도 되겠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증오엔 그것을 넘어서는 힘이 있다. 세월호 유족들은 증오의 힘으로 진실규명을 위한 원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혐오하는 사람은 상대에 대한 관심이 없다. 누군가를 혐오하다 보면 혐오하는 사람들 사이에 동질성이 생긴다. 여성 차별을 하면서 나도 ‘남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아직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증오의 힘을 통제하고 어떤 범주 속에 고정시키는 것이 혐오의 기능”(증오와 혐오 사이)이라고 풀이했다.
―‘차이를 다루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까닭도 그 때문인가.
“보통 우리가 함께하기 위해서는 서로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단일민족을 중시하지만 실제 사실과도 다르다. 다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르면서도 함께 있기 위한 기술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차이를 다루는 기술을 가장 많이 고민하는 사람들이 페미니스트들이다. 그들은 차이를 주장하면서도 연대를 이야기한다. 그 기술들을 계속 발명해나가야 한다.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의 역사란 것도 그 기술에 관한 역사다.”
후지이는 신채호의 유작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 ‘후기 신채호’를 발견했다. 상제를 받들고 인민을 괴롭히는 용(미리)과 지배자에 맞서는 용(드래곤)이 대결한 결과 상제 쪽이 패한다. 신채호는 지배자가 아닌 인민을 위해 저항하는 용에게서 자신의 역할을 찾았다. 백성을 선도하려던 전형적 계몽지식인에서 민중의 힘을 이야기하는 신채호로의 변모는 3·1운동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후지이는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희망을 준다”고 했다.
그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 독립운동을 임정이 과잉 대표하는 현상”을 우려했다.
“뉴라이트가 임정까지 부정하려고 드니까 일종의 대항 논리로 친일파와 임정의 대결 구도가 강화됐다. 임정을 옹호한 것은 본래 ‘보수진영’이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해방 직후 좌우가 갈렸을 때 그 기준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안’(신탁통치 안)을 받아들이느냐 여부였다. ‘반탁 세력’(우익)이 내건 것이 임시정부의 정통성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을 때도 그 정부의 정통성을 담보한(다고 주장된) 것은 임시정부를 계승했다는 논리였다.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남한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남한의 보수진영이 항상 의식했던 것은 북한과의 체제 경쟁이었고 그때 그들이 내세운 것이 임정이었다. 북이 독립운동 중에서도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처럼 계급적인 집단행동을 부각한 데 반해, 남한에선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윤봉길 같은 개인의 목숨을 건 ‘영웅적 투쟁’에 초점을 맞췄다. 뉴라이트는 이런 흐름을 단절시켰다. 2005년께 뉴라이트를 자처하는 이들이 등장했을 때 그들이 무엇보다 두려워한 것은 반미였고, 반미로 이어질 수 있는 반일 민족주의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민족주의를 폐기해 글로벌리즘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했고, 그 흐름 속에서 친미주의자 이승만을 치켜세웠다.”
―걱정스러운 점은 무엇인가.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임정 위주의 ‘역사 단순화’를 비판하고 사회주의자들의 독립운동 등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의 다양한 흐름을 발굴하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역사문제연구소와 한국역사연구회, 구로역사연구소가 탄생했다. 지금은 임정만을 강조하다 보니 마치 그런 역사들이 없었던 것처럼 돼가고 있다. 김구가 지나치게 부각되는 측면도 있다. ‘남북통일을 위해 목숨 바친 민족주의자’라는 평가가 그렇다. 물론 1948~49년의 김구에겐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운동 시절 좌우합작에 반대하며 오랫동안 임정을 ‘순정 우익’으로 유지하려고 한 점, 해방 뒤 좌우합작으로 분단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서 임정 법통만을 고집해 분단을 촉진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2013년 10월 후지이 다케시 당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사무실 책과 서류 더미 사이에서 책을 읽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2013년 10월 후지이 다케시 당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사무실 책과 서류 더미 사이에서 책을 읽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3·1운동과 촛불의 만남
―현시점에서 100년 전 3·1운동 전후의 역사를 단순화해선 안 되는 이유는.
“역사를 단순화하면 각자가 자신의 눈높이에서 받아들여 의미화하지를 못한다. 3·1운동을 ‘숭고한 애국정신’으로만 박제하면 현재의 삶들과 유리된다. 1919년의 3·1운동을 지금의 촛불 경험과 연결시킬 수도 있다. 폭압적 식민지배를 받던 사람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부를 때 몸의 경험과 촛불을 들고 ‘박근혜 퇴진’을 외쳤을 때의 몸의 느낌을 맞대볼 수 있을 것이다. 3·1운동에 나섰던 사람들도 ‘무조건 독립만 하면 된다’가 아니었다. 독립 뒤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이 있었다. 박근혜 퇴진으로만 ‘박근혜 이후’가 완성되지 않는 것과 같다.”
일본으로 귀국하며 출간 논의 중이던 출판사에 ‘출판 보류’를 통보했던 그는 지난해 11월 인터넷 블로그에 소개·공유되고 있는 자신의 글을 발견했다. 한 블로거는 후지이의 글들이 책으로 나온다면 “이 책을 들고 차가 다니지 않는 횡단보도를 마구 뛰어다녀야지”라고 썼다. 후지이는 횡단보도를 뛰는 그의 손에 자신의 책이 들린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며 출판사에 책 출간을 부탁했다. 편집 등 책이 나오기까지 실무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멀게는 4년에서 가까이는 1년 전까지를 다룬 글들인데 시차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글의 주된 관심사가 일상 속에서 작동하는 폭력이나 권력 관계여서 그러지 않을까 싶다. 한국이 민주화 30년을 이야기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정말 안 변한다. 36개월간 사실상 수감하고 용어까지 ‘종교적 병역거부’로 바꾼다는 대체복무 발상은 놀랍기 그지없다. 한국 사회 자체가 군사화돼 있어 근본적인 변화를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글은 계속 안 쓸 건가. 학계 일이나 연구 활동도?
“모르겠다.”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올 건가.
“알 수 없다.”
―‘무명인’으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뭔가.
“지금으로선 없다. 나는 지금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지금처럼 살아가도 괜찮다. 현재 하고 있는 일도 당분간 계속하려 한다. 삼시세끼 먹을 정도는 되고, 가끔씩 술도 마실 수 있고, 책도 읽을 수 있다. 그 정도면 만족한다.”
그는 “지금 불을 끈 상태”라고 했다. “내게 무명은 이름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빛이 없다는 의미기도 하다”고 했다.
“유리창의 이쪽이 밝고 저쪽이 어두우면 밝은 쪽은 나를 반사하는 거울이 된다. 유리창 너머의 다른 존재를 보기 위해서는 이쪽의 불을 끄면 된다. 처음엔 깜깜하겠지만 차츰 반대쪽의 모습이 나타난다. 어떤 운동을 하려면 불을 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쓸데없이 빛을 많이 받았다. 나는 지금 불을 끈 채로 나를 바라보고 나의 너머에 있는 다른 세계가 보이길 기다리고 있다.”
후지이 다케시는 성큼성큼 걸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쭉쭉 내딛는 그의 걸음은 옆에서 보조를 맞추기 힘들 만큼 빨랐다. 그의 걷기를 지인들은 ‘마사이족 걸음걸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난다. 도시락을 싸들고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일터까지 두시간 동안 걷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후지이가 흐린 가로등 빛을 받으며 쓰루하시역으로 뛰듯 걸어갔다.
오사카/글·사진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후지이 다케시가 ‘유고집’이라고 밝힌 <무명의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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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79018.html?fbclid=IwAR3Ez8FFZdaqkXuD5yqikEz0eBIiWq60drrpWHzb1rVeuQOcXxdwEcBfxiA#csidxc4b9467091b45d39bbf831465070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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