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1

12 후지이 다케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 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 본 해방 8년사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 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 본 해방 8년사 l 역비한국학연구총서 34   

후지이 다케시 (지은이) | 역사비평사 | 2012-12-28




정가 35,000원

양장본 | 504쪽 | 152*223mm (A5신) | 907g | ISBN : 9788976961358


 9.6

Sales Point :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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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비한국학연구총서' 34권. 이승만 정권 초기, 해방 8년의 정치공간을 해부한다. 저자 후지이 다케시는 기존의 암묵적 상식과 다른 역사적 실제의 수수께끼를 '냉전 질서 관철의 시간차'를 통해 실증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기존 연구들이 이승만 개인에 대한 분석으로 이승만 정권의 권력블록에 대한 분석을 대체하면서 대체로 초기 대한민국의 사상적, 정치적 지형에 대한 분석을 간과해왔다면, 후지이 다케시는 철저한 실증을 통해 '이승만-이범석 체제'(초기 이승만 정권)와 '이승만-이기붕 체제'(후기 이승만 정권)의 차이를 밝혀내고 있다.

기존 연구에서 간과된 역사적 틈새에서 형성된, 반공적이면서도 미국적이지는 않았던 초기 대한민국의 사상적 지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세력이 이 책의 주제가 되는 족청계(族靑系)이다.

저자는 회고록 등에 의존해온 기존 연구의 한계를 벗어나 모든 사건의 정확한 시기를 특정하고 지방에서 일어난 일들까지 세밀하게 조명하기 위해 당대의 신문자료를 최대한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시계열적으로 역사적 흐름을 재구성해냈다. 또 미군정, 미 대사관 등에서 작성한 보고서나 미 국무부의 외교관련 문서들, 주요 인물들의 저작과 기고 성명서들까지 단순히 텍스트로 접근하지 않고 그것이 서술된 구체적 역사의 맥락 속에서 변화양상을 추적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던 해방8년의 정치지형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족청의 중앙단부뿐 아니라 지방조직까지, 원내.원외자유당 구성원의 출신과 계파, 정치적 경향까지 추적하여 밝힘으로써 당대 정치세력의 갈등구조와 헤게모니 양상을 실증해낸 것은 커다란 성과라고 할 만하다.





서론

제1부 족청계의 기원들―1930년대 동아시아와 민족주의
제1장 ‘반제민족주의’와 파시즘―이범석과 장제스
1. 중국에서의 독립운동과 나치즘 / 2. 장제스와의 만남과 광복군
제2장 철학과 민족주의―안호상과 전체주의
제3장 ‘전향’과 ‘가족’―양우정의 사회주의운동과 그 굴절
1. 시인 양우정과 공산주의자 양창준 / 2. 전향과 ‘가족’의 재발견

제2부 족청계의 모태: 해방 정국과 조선민족청년단
제1장 이범석의 귀국과 조선민족청년단 창단
제2장 족청의 조직과 인적 구성
1. 족청 중앙 조직 / 2. 족청 지방 조직
제3장 족청의 훈련과 이념
1. 족청 중앙훈련소의 훈련 과정 / 2. 족청의 이념과 이범석의 민족주의 / 3. 반외세 이념과 파시즘

제3부 족청계의 태동: 분단국가, 전향, 일민주의
제1장 족청의 단정 참여와 갈등
제2장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족청 출신들
1. 족청의 국회 진출 / 2. 족청의 정부 진출
제3장 족청의 해산
제4장 일민주의와 족청계의 태동
1. 일민주의와 반공 체제 구축 / 2. 일민주의보급회와 족청계의 태동

제4부 족청계의 활동: 자유당 창당과 당국 체제의 형성
제1장 한국전쟁 발발과 족청계의 재기
제2장 자유당 창당과 족청계의 참여
1. 신당 구상의 부상 / 2. 원내외 갈등
제3장 원외자유당의 조직과 이념

제5부 족청계의 몰락: 부산정치파동과 냉전 체제의 국내적 완성
제1장 개헌을 둘러싼 갈등의 격화와 족청계의 부상
제2장 부산정치파동과 족청계의 활동
1. 부산정치파동의 발생 / 2. 미 대사관의 대응 / 3. 미 본국의 고심과 이범석의 부각
제3장 이범석의 부통령 낙선과 족청계의 역공세
1. 이범석의 부통령 선거 출마를 둘러싼 갈등 / 2. 족청계를 둘러싼 갈등의 표면화
제4장 휴전 체제 성립과 족청계의 몰락

결론

부록 1. 조선민족청년단 이사 / 2. 조선민족청년단 전국위원 / 3. 대한민족청년단 제5차 임시확대전국위원회 선언
4. 신당발기취지서(초안) / 5. 자유당선언 / 6. 자유당 당헌 / 참고문헌 / 찾아보기




1960년대에 제3세계 국가들에서 나타난 이데올로기적인 경향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nationalist socialism)˝라고 표현되기도 했는데, 30년대부터 형성된 흐름이 냉전이 시작된 뒤에도 제3세계에서 지속된 것이다. 흔히 제3세계주의(third worldis...
정신 훈련 중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이 승강기식인데, 입소한 날부터 졸업하는 날까지 매일 아침저녁 국기와 단기의 승강기식을 거행했으며 음악에 맞추어 애국가, 단가를 합창했다.
...
(이범석은) 국기 승강식이 무질서하고 산만한 것은 ˝국기에 대한 숭경심, 따라서 국가 관념과 민족의식이 박약하다는 것, 즉 민족적 결속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들어내는 것˝이라며 국기에 대한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37)
nana35
양우정은 스스로의 전향 경험을 떠올리면서 공산주의를 비판하는데, 1930년대에 전향을 선언했을 때와 다른 것은, 가족의 연장선상에 있는 민족을 국가와 일치시킬 수 있는 상징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과거에 전향했을 때 찾지 못한 `지도자`가 드디어 주어진 것이다. 양우정의 전향은 `지도자` 이승만을 매개로 완성되었으며, 1930년대에 천황제를 매개로 고바야시 모리토가 전향자운동을 추진했듯이, 양우정 역시 이승만을 앞세우면서 전향 공작에 앞장서게 된다. 237)
nana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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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후지이 다케시 (藤井たけ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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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작 : <무명의 말들>,<한국지성과의 통일대담>,<그날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 총 9종 (모두보기)
 소개 : 2000년에 한국에 와서 계속 살고 있다. 일본 교토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오사카(大阪)대 일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성균관대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성균관대 사학과 B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성균관대, 이화여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겨레』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역사비평사, 201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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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얘기지만 이 책은 시대의 산물이다. 만약 ‘뉴라이트’를 자처하는 이들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바탕으로 건국되었다는 식의 주장을 펴지 않았더라면, 내 관심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뉴라이트’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은 1948년 제정 당시의 대한민국헌법만 읽어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제정 당시의 대한민국헌법을 실제로 읽어보지는 않으리라는 예상이 그들의 뻔한 거짓말을 가능하게 했다면, 이는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지닌 역사성을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고 권유하는 그들에게는 영원한 ‘현재’만이 중요하겠지만 다른 사회, 다른 세계를 꿈꾸기 위해서는 ‘역사’가 필요하다.
-책머리에 중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국시는 반反자본주의였다!
이승만 정권 초기,해방 8년의 정치공간을 해부한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물음은 한국 현대사를 생각할 때 피해 갈 수 없는 근본적인 질문일 것이다. 본격적인 한국 현대사 연구가 시작된 19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까지, 대한민국을 냉전의 결과 탄생한 친미반공국가로 보고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이 주류적인 견해였다. 그에 반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신자유주의의 전면화, 뉴라이트의 등장과 함께 오히려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선택했기 때문에, 즉 친미반공국가였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주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두 입장은 얼핏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양자 모두 대한민국의 탄생을 ‘친미반공’ ‘친자본주의’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하지만 실제로 사료를 통해 나타나는 대한민국의 초기 모습은, 냉전에 의해 절대적으로 규정되었다기보다는 다분히 유동적인 것이었다. 미국인 법률가의 눈에 “국가사회주의(state socialism)로의 강한 경향”을 띤 것으로 인식된 경제 조항을 포함한 제헌헌법이 가능했던 것은, 헌법의 사상적 바탕이 자유민주주의라기보다는 민족주의였기 때문이다. 이는 이승만 정권 초기의 성격과도 관련된다. 국내에 확고한 기반이 없던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해방3년기에 단독정부 수립을 함께 추진했던 한국민주당과 결별했기 때문에 좌우세력 모두에 초연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초기 이승만 정권에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즉 민족주의가 반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경향은 ‘국시’로서 일민주의가 등장하면서 절정에 달했는데, 일민주의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반공산주의와 함께 반자본주의를 내세우며 제국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는 이념이었다.

자본주의에 병들고 공산주의에 독(毒)된 세계와 인류가 세계와 인류를 구원할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고 새 세계를 건설할려고 하는 의욕이 날로 높아져가는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을 고한 이후에 있어서 동방의 하늘에는 여태 구름 속에 파묻혀 있던 한낱의 거대한 샛별이 구름을 헤치고 요요히 빛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이승만 대통령!
(중략) 자유의 미명하에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모든 사회 제도와 경제 조직을 우리는 전복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것은, 일민주의가 지표하는 ‘하나인 민족으로써 무엇에고 또 어느 때이고 둘이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은 착취하는 지주와 착취당하는 소작인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으며 착취하는 자본가와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제도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중략) 자본주의 제도는 국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나 이승만 대통령의 일민주의와는 상용할 수 없는 제도인 것이다.”
―'이대통령 건국정치이념' 중에서

국제적 냉전이 국내에 관철되기까지, 역사적 틈새를 들여다본다
‘반공적이면서 미국적이지는 않았던’ 초기 대한민국과 족청계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반공산주의와 함께 반자본주의를 내세우며 제국주의를 강하게 비판한다? 얼핏 보아도 냉전구조의 진영논리와 완전히 상반되는 이런 사상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 책의 저자 후지이 다케시는 기존의 암묵적 상식과 다른 역사적 실제의 수수께끼를 ‘냉전 질서 관철의 시간차’를 통해 실증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기존 연구들이 이승만 개인에 대한 분석으로 이승만 정권의 권력블록에 대한 분석을 대체하면서 대체로 초기 대한민국의 사상적, 정치적 지형에 대한 분석을 간과해왔다면, 후지이 다케시는 철저한 실증을 통해 ‘이승만??이범석 체제’(초기 이승만 정권)와 ‘이승만??이기붕 체제’(후기 이승만 정권)의 차이를 밝혀내고 있다.
이와 같이 기존 연구에서 간과된 역사적 틈새에서 형성된, 반공적이면서도 미국적이지는 않았던 초기 대한민국의 사상적 지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세력이 이 책의 주제가 되는 족청계(族靑系)이다.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이들은 한국 정부 초대 내각에서 요직을 차지했으며 이승만 정권 초기의 ‘지도이념’이었던 일민주의를 실질적으로 만들어냈다. 또 이승만의 권력 기반이 된 자유당의 창당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강행한 부산정치파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족청계의 사상은 반공적이면서도 냉전적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적이었으며, 정치적 행동 역시 법치주의적인 대의제 민주주의보다는 포퓰리즘적인 대중민주주의에 가까운 것이었다. 족청계는 1953년 말경에 권력 중추부에서 제거당하는데, 그에 이어 자유당이 의회정당으로 거듭나고 헌법에서 ‘국가사회주의적’ 조항이 약화된 사실로 상징되듯이, 그들의 몰락은 역사적 전환기였던 ‘해방8년’의 종언, 즉 냉전이 남한 체제 내부에까지 관철되면서 대중이 직접 정치적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소멸한 것과 궤를 같이했다. 그런 점에서도 족청계의 실태를 규명하는 작업은 초기 이승만 정권의 성격을 밝히는 데 필수적이며, 이 작업은 대한민국의 역사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파시즘,중화민●국을 거쳐 대한민국에 상륙하다
―자유당과 족청계의 이념과 조직모델은 장제스로부터
초기 이승만 정권과 대한민국의 국시를 이루었던 ‘일민주의’와 이를 주도한 족청계에는 ‘파시즘’에 대한 긍정적 평가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유사성도 존재하고 있었다. 서중석은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에서 “일민주의 주창자들의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반미에는 파시즘적 측면”이 있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실상 2차대전 이후 독립한 주변부 국가들에서 저항민족주의가 파시즘과 결합한 것은 대한민국만의 특수한 사정이 아니었다. 그 단초는 우선 1930년대 중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만주사변 발발로 인해 고조된 위기의식이 파시즘으로 수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30년대부터 장제스는 파시즘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 특징은 ‘반제민족주의’로서 레닌주의와 파시즘의 통치방식을 혼합시킨 것이었다. 항일전쟁이 끝나자 바로 이어서 발발한 국공내전을 통해 장제스가 구축한 파시즘 체제는 곧바로 몰락했다. 하지만 주변부에서 파시즘이 활용되는 방식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중국의 사례는 매우 중요하다.
또한 장제스의 파시즘 체제는 족청계의 영수라 할 수 있는 이범석을 통해 일민주의와 자유당 이념 및 조직구성, 훈련체계에까지 핵심적 영향을 끼쳤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범석은 1930년대 말에 장제스가 개설한 중앙훈련단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민족주의, 군사화, 지도자 숭배’로 요약할 수 있는 장제스식 파시즘 사상을 체화했다. 이는 ‘국가지상 민족지상’이라는 구호로 집약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이범석의 사상적 바탕을 구성했다. 이 책 148쪽의 사진에서 보이듯이, 수원 족청 중앙훈련소 정면에 세워진 구호탑에는 ‘민족지상 국가지상’이라는 족청의 대표적 구호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철저한 실●증으로 해방8년사의 베일을 벗긴다
학계최초, 실증을 통해 재구성한 초기 이승만정권과 자유당의 정치지형
저자 후지이 다케시는 회고록 등에 의존해온 기존 연구의 한계를 벗어나 모든 사건의 정확한 시기를 특정하고 지방에서 일어난 일들까지 세밀하게 조명하기 위해 당대의 신문자료를 최대한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시계열적으로 역사적 흐름을 재구성해냈다. 또 미군정, 미 대사관 등에서 작성한 보고서나 미 국무부의 외교관련 문서들, 주요 인물들의 저작과 기고 성명서들까지 단순히 텍스트로 접근하지 않고 그것이 서술된 구체적 역사의 맥락 속에서 변화양상을 추적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던 해방8년의 정치지형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족청의 중앙단부뿐 아니라 지방조직까지, 원내·원외자유당 구성원의 출신과 계파, 정치적 경향까지 추적하여 밝힘으로써 당대 정치세력의 갈등구조와 헤게모니 양상을 실증해낸 것은 커다란 성과라고 할 만하다. 파편화된 수많은 사료들을 엄밀한 상호대조와 확인을 통해 재구성해낸 저자의 노력은 이후 해당 시기 역사연구의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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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달프 2013-07-17 
뉴라이트의 혹세무민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예방주사... 안경환의 `황용주:그와 박정희 시대`도 함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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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 후지이 다케시 
 nana35 2015-10-05

파시즘은 '국민적 민족공동체'라는 개념 안으로 노동계급의 정념을 집약하여 그들을 행동하는 정치적 주체로 재탄생시키며, 타자에 대한 배제와 무력 행사를 기반으로 삼는다. 민족자결주의에 고취된 제3세계는 파시즘을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수단이자 민족의 역량을 강조하고 일체화를 달성하는 기술로 수용하였으며, 민족정신의 함양을 어떠한 이념이나 체제보다 우선시했다.

한반도의 민족주의 일부에서도 파시즘을 자주적 민족주의의 방편으로 적극 받아들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결성한 이범석과 거기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안호상이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국가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대변되는 '경제적 제국주의'와 '영토적 제국주의'를 지양하고 민족 고유의 정신 아래에서 민족의 역량을 결집한 공동체였다.

이들은 민족을 피로 맺어진 자연적 산물이자 역사적 고난을 공유한 공동체로 규정하면서, 좌우를 모두 포섭하고자 노력했고, '지행합일' 사상을 강조하여 실천의 근간이 되는 육체를 통제하고 생활 전반에 대한 군사적 규율 강화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제3의 길로 포장된 파시즘이 냉전을 주도하는 현실 권력의 견제와 감시 아래에서 피어나리라는 것은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이들이 "민족의 통일과, 국민 균등의 복리, 세계 평화에 기여"라는 원대한 구상으로 제시한 '일민주의'는 민족의 허약한 역량과 냉전 체제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결여한, 머리만 웃자란 갓난아기의 꿈이었다. 해방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순진한 자기 중심주의를 삼킨 것은 미군정의 위력을 적극 수용하고 이용하면서 자신의 야망을 실현해가던 거대한 산, '이승만'이었다.









1960년대에 제3세계 국가들에서 나타난 이데올로기적인 경향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nationalist socialism)˝라고 표현되기도 했는데, 30년대부터 형성된 흐름이 냉전이 시작된 뒤에도 제3세계에서 지속된 것이다. 흔히 제3세계주의(third worldism)라 불리는 흐름은 대체로 좌익적 경향이 강한 것이었지만, 민족의 일체성이나 지도자를 강조하는 측면에서는 파시즘과도 공통적인 지점들이 존재했다. 29)



정신 훈련 중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이 승강기식인데, 입소한 날부터 졸업하는 날까지 매일 아침저녁 국기와 단기의 승강기식을 거행했으며 음악에 맞추어 애국가, 단가를 합창했다.
...
(이범석은) 국기 승강식이 무질서하고 산만한 것은 ˝국기에 대한 숭경심, 따라서 국가 관념과 민족의식이 박약하다는 것, 즉 민족적 결속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들어내는 것˝이라며 국기에 대한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37)



양우정은 스스로의 전향 경험을 떠올리면서 공산주의를 비판하는데, 1930년대에 전향을 선언했을 때와 다른 것은, 가족의 연장선상에 있는 민족을 국가와 일치시킬 수 있는 상징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과거에 전향했을 때 찾지 못한 `지도자`가 드디어 주어진 것이다. 양우정의 전향은 `지도자` 이승만을 매개로 완성되었으며, 1930년대에 천황제를 매개로 고바야시 모리토가 전향자운동을 추진했듯이, 양우정 역시 이승만을 앞세우면서 전향 공작에 앞장서게 된다. 237)



양우정은 일민주의의 핵심인 동질성을 자본주의 비판, 즉 자본주의의 산물로서의 계급 분열에 대한 비판과 그 변혁에서 찾으려고 한 데 반해, 안호상은 그 동질성을 변혁을 통해서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핏줄`이라는 이미 주어진 것에서 찾는 것이다. 일민주의가 내포할 수 있었던 변혁적 요소는 안호상에 의해 거의 제거되고 말았다. 265)



반공주의 논리의 변화 역시 족청계의 부활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족청계의 반공주의는 민족주의를 통해 내부적 계급모순을 `(적색) 제국주의`에 대한 적대로 치환시키는 파시즘적 논리에 의한 것이었는데, 족청계 제거 직후부터 반공주의 논리로서 오히려 `제3세력`과 결부될 수 있는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진영 논리를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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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민주화운동의 카테고리를 넘어서 
 리동 2015-06-17


1.한겨레에 쓰는 칼럼으로 매번 읽는 이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후지이 타케시씨가 쓴 <파시즘과 제 3세계주의 사이에서-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 본 해방 8년사>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이승만 정권에 대해 '친미 친 자본주의적 정권'이라고 인식하는 것과 다르게, 이승만 정권의 초반부가 보여줬던 정책과 발언들이 '반제/반자본주의'성격을 띄고 있었기에 '반공적이면서 미국적이지는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 근저에 이승만과 함께 권력블록을 형성했던 이범석과 안호상이 주축이 된 '조선민족청년단-족청계'가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족청계가 띄었던 정치적 색채에 식민지 경험으로부터 비롯한 민족주의 뿐 아니라 당대의 독일 파시즘과 장제스의 군국주의까지 큰 영향을 끼쳤기에 족청계가 지향하는 바가 민족/반제/반자본주의적 경향을 보였다는 점을 분석해나간다.




2. 책을 중반부 정도까지 읽었을 뿐인데 독립운동과 한국의 건국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이 든다. 문득 떠오르는 글은 이전에 계원예대 서동진 교수가 썼던 다음과 같은 글이다 (http://www.homopop.org/log/index.php?ct1=7&ct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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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불행한 일이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철석같이 공유하는 이데올로기는 탈이데올로기적 회의이다. 최인훈의 광장에서 조정래의 태백산맥까지 한국의 모든 이데올로기 비판 문학(나는 그것을 진보적인 문학이라거나 민중문학이라거나 심지어 지식인문학이라거나 하는 평가에 전연 동의할 구실을 찾지 못한다. 외려 그에 걸맞는 이름을 찾자면 이데올로기적인 문학이지 않을까)은 언제나 이데올로기적 선택을 강요받은 어느 개인의 무력한 자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남인가 북인가라는 두 가지의 선택지 밖에 주어지지 않았던 개인에게 제3의 길이라는 진정한 환상, 이데올로기 외부의 공간을 향한 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탈이데올로기적인 몸짓의 이데올로기는 비단 문학의 공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른바 노무현 정권 이후 본격화된 과거사 청산과 민주화운동 기념사업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나는 이러한 사태가, 어느 진보적 사회학자의 말처럼, 기본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제도를 갖추고 형식적인 민주주의의 틀을 완성하는 “정상화”의 과정이었다고 보는데, 전연 수긍하기 어렵다. 그것은 거칠게 말해 민주주의와 압제라는 틀로 그간의 한국사회운동을 소급적으로 그것도 아주 빈약하게 재단하기 때문이다. 그의 논리에 따르자면 노동자들이 정치조직을 결성하고 새로운 경제체제를 꿈꾸고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서적을 공공연하게 읽고자 했던 염원은 모두 그저 민주화일 뿐이다. 그것이 자신의 통치 기반을 정당화하려는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주장이라면 모를까 진보적인 사회학자가 할 소리는 아닐 것이다.

간단히 말해보자. 통혁당은, 인혁당은, 남민전은 그저 민주화운동 세력이었을까. 몇 해 전 쓸쓸히 자신의 차디찬 골방에서 목숨을 잃은 어느 마지막 여자 빨치산 할머니는 그냥 민주화 운동 세력의 일원이었을까. 민주화라는 것은 그 투쟁과 운동에 가담하고 있던 자들의 신념과 희망을 백지상태로 돌려놓은 채, 그들을 순전히 “국가폭력”의 희생자로 환원해도 좋은 것일까. 오랜 동안 영어의 몸에 있다 출소한 어느 사회주의 투사를 “권위주의적 정치”의 피해자로 박제화 시켜 놓고, 붓글씨나 쓰고 동양사상이나 풀이하는 “좋은 어른”으로 재갈을 물려놓고, 그것을 모시는 것이라고 시치미를 떼도 좋은 것일까. 제 정신이라면 아마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 서동진 <혁명가인가 피해자인가 - 우리 시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한 가지 초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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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운동'이라는 라벨로 다채로웠던 사회혁명운동들을 묶는 것은 일종의 모독이다! 다소 맥락이 다르지만 이 이야기는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운동은 건국운동이기도 했다.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단순히 일제 식민지를 벗어나는 것을 넘어서, 식민지 이후 어떤 이념의 국가를 건설하느냐도 포함되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이념이 중요하고, 이념은 차이를 만들어낸다. 김일성도 김구도, 이범석도 여운형도 박헌영도 독립운동이라는 카테고리에서는 동일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공부를 해보면 알 수 있듯 그 방법론은 해방 이후까지를 생각해본다면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결코 쓸데없는 갈등이 아니었다. 김구가 세우려는 나라와 여운형이 세우려는 나라, 박헌영이 세우려는 나라는 결코 같지 않았다. 이처럼 그 모든 다양한 시도들을 독립운동만으로 묶는 것은 수많은 가능성을 압살하는 일이 아닐까.




3.그런데 좀 더 삐뚤어진 생각을 가지고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개혁진영의 지지자들이 흔히 말하듯 '친일파'가 정권을 잡지 않고 '독립운동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면 어땠을까? 친일파 청산 실패가 한국 현대사 비극이라 믿는 이들은 마치 한국의 모든 문제가 친일파로부터 비롯된 듯이 말한다. 그러나 사실 이미 국민국가 건설이 진행되는 시점에서 더이상 일제에 대한 저항 여부가 더 나은 국가를 세울수 있느냐에 대한 유일한 판단기준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세력'인가이다. 이는 단순히 '독립운동가' 출신의 이승만이 어떤 말로를 겪었는지만 생각해봐도 자명해지는 일이다. 이런 생각은 이 책에 펼쳐진 족청계 주요 인물들의 사상적 계보를 보고 있자면 더욱 힘을 얻는다. 족청계의 단장 이범석은 지금 친일파 출신들을 공격하는 논리로 보자면 더할나위없는 순혈 독립운동가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감명깊게 읽고, 독일의 일사불란함에 감명받았던, 반공 군대를 세우고자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이승만에게 충성을 바쳐 그의 부패에 일조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와 족청계가 권력을 잃지 않고 이승만 정권과 명운을 같이 했다면, 지금의 한국과는 좀 다른 나라가 됐었을까. 혹은 이범석의 족청계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장준하가 권력을 잡았다면, 아니, 한때는 백색테러의 선봉장이었던 김구가 권력을 잡았다면, 그 세계가 과연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박정희/전두환의 세계와 얼마나 다른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독립운동가 출신의 김일성의 세계가 박정희의 세계만큼이나 끔찍한 것이었듯이 말이다.




4.물론 이 이야기는 박정희와 친일파를 싫어하고 김구를 찬양하는 이들에게는 끔찍하고 터무니없는 비약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박정희가 됐건 누가 됐건 어차피 똑같았을 거라던가, 친일파 청산 실패는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는 냉소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도 개인적으로 여운형이 만든 독립국가라면 어땠을까 하는 쓸데없는 가정을 해보곤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독립운동이라는 한 라벨만으로 모든것을 좋게 평가하기에는 실제 양상은 너무나 달랐고, 복잡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결국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고 좀 더 세계시민에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 중 하나라면, 이런 복잡함들을 고려해야만 우리가 좀 더 좋은 선택을 할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은 꼭 독립운동에 관한 것 만은 아니다.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화 운동 세력을 탄압하는 독재정권의 후예들, 정의로운 야권 세력과 대립하는 독재자의 딸, 친일파 출신과 독립운동가 출신...이러한 대립 구도로 정치와 사회를 판단하고, 정의로운 자신들에게 표를 달라는 말들은 너무나 잦다. 나는 실제로 그 대립항이 유효했던 시기에 그들이 행했던 일들을 존경하고 존중하며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이 세계에서 그런 간단 명료한 카테고리의 효능이란 '내가 곧 정의다'라는 쾌감 외에는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실제 세계를 나아지게 하는 데는 방해가 될 뿐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역사와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는 점을 실감하게 하는 책이다.




5.위에 말한 부분과 별개로 아래 인용한 부분들은 제헌의회 당시 노동법에 관한 논쟁에 관한 이야기인데 뭔가 건국 상황에서의 역동성이 느껴져 매우 재밌어 옮겨봤다. 무엇보다, 지금 오고가는 논쟁보다도 더 진일보한 논쟁이 이미 해방공간에서 이뤄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지닌 역동적인 세계였는지, 그리고 한국전쟁이 얼마나 많은 논쟁의 싹을 잘라냈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국회에서 문시환은 적극적인 활동을 보였다. 특히 그가 중요시한 것은 노동 문제였다. 노동에 관한 조항인 헌법 제 17조를 심의하는 과정에서 문시환은 수정안을 제출했다. 그 내용은 제 1항을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근로자는 노자협조와 생산증가를 위하여 법률의 정하는 범위 내에서 기업의 운영에 참가할 권리가 있다"로, 제 3항을 "기업주는 기업 이익의 일부를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임금 이외의 적당한 명목으로 근로자에게 균점 시켜야 한다"로 수정하자는 것이었다. 즉 노자협조와 생산 증가가 그 목적이긴 했지만 노동자의 기업 경영 참가와 이익 균점을 주장한 것이다.

..문시환은 노동자의 기업 경영 참가의 필요성을 경제적 민주주의로 설명하기도 했지만, 주목할 것은 이 조항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본받은 것이 아니라면서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노동자의 경영 참가를 헌법으로 보장한 결과 산업 부흥과 공업력 향상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말한 점이다..즉 문시환은 파시즘 체제를 모델로 이러한 조항을 제안한 것이다. 이에 대해 윤재욱은 절대적인 지지를 밝혔으며, 윤석구도 다시 이익균점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이재형 역시 국가는 국민의 생존권과 노동권을 보장해야 한다며, 그에 필요한 생산 증강을 위해서는 노동자의 경영 참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노일환은 노동자의 경영 참가가 오히려 노자 협조라는 명목하에 생산 증가를 위해 노동력 상품화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반대했다...먼저 발언한 이윤영은 공산주의 헌법을 만드는 것도 우리 자유이지만 국제관계를 떠나서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며 냉전적인 관점에서 압력을 넣었다. 이유선은 8할 이상의 근로 대중의 생활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완전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다며 문시환 안을 지지했다."ㄷ




"족청 출신 의원들 가운데 약간 다른 방향성을 보인 사람이 강욱중이다. 강욱중은 헌법안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국회의 권한을 규정한 제 42조에 국회가 정부 불신임안을 결의할 수 있는 권한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법원장의 임명권이 대통령에게 있음을 규정한 제 77조에 대해 전체주의를 막기 위한 삼권분립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대법원장 및 대법관은 법률에 의해 선정된 다음에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으로 수정할 것을 주장했다."

"김수선은 헌법 논의 과정에서 민족자결권, 민족 통일, 민족의 균등 생활, 강력한 국방군을 헌법을 통해 획득해야 한다며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화폐의 특권계급을 제재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강력한 행정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김수선을 비롯한 청구회 소속 의원들은 대체로 민족주의적이었으며, 한민당으로 대표되는 지주/자본가 집단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때로는 소장파와 공동 보조를 취하기도 했지만, 그들 인식의 바탕에는 강한 국가의 필요성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입장은 여순 사건을 거쳐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국가보안법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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