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Rev. Sekita Hiroo – The Christian Forum for Reconciliation in Northeast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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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ory of Rev. Sekita Hiroo
ON FEBRUARY 6, 2020 BY THE CHRISTIAN FORUM
2018년 6월 2일_세키타 히로오 목사님과의 인터뷰
<복음과 상황> 2014년 7월호 “철거 위기 교회에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284호 편들고 싶은 사람] 가와사키도테교회 손유구 목사 이야기에서…이범진 기자
도테교회와의 만남
그런 손 목사가 28세 때 신학교(농촌전도신학교)에 들어가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면 신학교에서 만난 세키타 히로오 교수가 그를 이곳 도테교회로 데려오면서부터다. 세키타 교수는 도테교회를 세운 목사이기도 하다.
– 도테교회의 첫인상은 어땠나?
23년 전, 1991년에 이 동네에 처음 왔다. 스물여덟 살 때였다. 당시 이 동네에는 많은 코리안이 살고 있었고, 공장도 많았다. 당시 이웃끼리 “엄마” “아버지”라는 말이 길거리에서도 자유롭게 오갔다. 다른 일본 지역에서는 보기 어려운 친근한 모습이었다. 나도 재일동포가 많은 오사카에서 살았지만, 한국말을 밖에서 서슴없이 사용하는 경우는 없었다. 도테마을엔 필리핀이나 베트남 사람도 있었고, 북쪽과 남쪽의 사람이 서로 어울렸다. 서로 배척하거나 특별히 더 배려하는 것 없이 친하게 지냈다. 동네 밖 일본인들과는 때때로 다툼이 있었지만 우리끼리는 싸우지 않았다. 민족과 관계없이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 잘 지냈다. 내가 그동안 일본인처럼 살려고 던져버렸던 것이 이곳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 도테교회의 시작이 궁금하다.
이 지역에 대한 설명부터 해야 할 것 같다. 과거에 가와사키 지역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정치도시인 도쿄, 무역도시인 요코하마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만 언급될 뿐이었다. 그러다가 전쟁하는 동안에 큰 군수업체 공장을 이곳에 많이 유치해 중공업 도시가 되었다. 한국전쟁 때도 이 지역에서 만든 포탄이 무기로 쓰였다. 그 전쟁 때 부유한 동네가 되었다. 중공업에 종사하고자 외국인들이 가와사키에 많이 들어왔고, 그때 코리안들도 많이 와서 살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전쟁에 대해서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다. 고국의 희생으로 이룬 부유함으로 인생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도 이 도테지역은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되는 지역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둘 강가에 정착하면서 하나의 슬럼가를 이룬 지역이다. 정상적인 과정으로는 시가지에 살 수 없었던 이들이 여기 도테에 마을을 이룬 것이다. (1959년 이세완 태풍 이후 3~4년 사이 100가구가 형성되었다. 행정을 피해 토요일과 일요일에 집을 지었다.) 이때 세키타 목사가 도테마을을 알게 되었고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이다.
– 세키타 히로오 목사는 어떤 분이셨나? 왜 이곳에 교회를 세우신 건가?
그는 일본그리스도교단 소속 목사님이었다. 교단이 1967년에 일본인이 전쟁에 가담한 죄를 회개하는 ‘전쟁 책임 고백’을 했고, 여기에 감명을 받아 자기 인생을 전쟁 가해자의 입장에서 속죄하고 보상하는 데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2차 대전 때 세키타 목사는 ‘군국소년’이었다.) 그는 교회를 지을 때 전쟁에 대한 책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지금 우리 교단은 우경화되어서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쪽은 늘 약하지만, 세키타 목사님은 “잘못했다”라는 말로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실천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쟁 중 조선에서 일본으로 들어온 사람들과 일본인들이 다 같이 함께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사상이 지금의 도테교회의 모태가 되었다.
사실 지금의 교회는 당시 도테마을의 김만수 할아버지에게 산 것이다. 도테마을 안으로 들어오기 전, 세키타 목사는 도테마을 밖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교회를 도테마을 안으로 옮기려고 하자, 교인들이 들고일어났다. 왜 불법지역의 불법건물을 사서 교회를 옮기느냐는 불만이었다. 세키타 목사는 단호했다.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교회가 안전지대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변두리로 가야 합니다. 나 혼자 안전지대에 살면서 어떻게 변두리에 있는 사람을 만납니까? 내가 변두리로 가야 합니다.”
반대를 무릅쓰고 불법점거지역 도테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기존 교인 50퍼센트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교회를 떠났다. 1977년의 일이다. 세키타 목사는 교회활동은 물론 도테활동센터를 세워 도테마을 사람들의 수해를 지원하거나 취직 차별 문제를 해결하는 등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손유구 목사는 도테교회의 세 번째 목사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를 맡기까지는 적잖은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해야 했다. ‘일본인’으로 살아온 그에게 신학교에서 만난 재일동포들과 도테교회 사람들은 그를 ‘조선’과 다시 이어준, 변두리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이다.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 For Full Text Article
http://www.goscon.co.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28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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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위기 교회에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 ||||||||||||||||||||||||||||||||||||||||||
[284호 편들고 싶은 사람] '코리안'의 조각 모아가는 가와사키도테교회 손유구 목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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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는 한 컷의 그림에서 비롯되었다. <한겨레〉 5월 27일자에 실린 만화가 고경일 상명대 교수의 그림이었다. ‘불법시설물에 핀 꽃, 가와사키도테교회’라는 제목의 한 컷짜리 그림엔 이런 설명이 덧붙어 있다. “오랫동안 가난한 재일동포들의 구심점이 되었던 나눔과 실천의 교회. 불법시설물이라는 주민들의 비난과 법대로 철거하겠다는 당국의 위협, 우익들의 협박이 끊이질 않지만 오늘도 자리를 지키며 묻는다. 조선을 강제로 합병하고 불법으로 끌고 와 노동을 시킨 건 합법이었냐고?” 모든 강제철거가 그렇듯, 가와사키도테교회(이하 ‘도테교회’)의 철거도 보금자리를 잃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도테교회는 반세기 넘는 재일동포들의 삶과 아픔을 담고 있는 곳이다. (지금은 조각나 있으나) 분명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 서사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곳이다. 2년 전 만났던 재일동포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는 “디아스포라들에게서 예측을 뛰어넘는 빛을 본다”고 했다. 고통으로 가득한 생애를 보낸 이들에게서만 나오는 지혜와 강인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빛이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도테교회를 찾아간 목적은 겉으로는 편들기였으나, 실은 침몰해가는 한국교회와 사회를 구할 ‘빛’(지혜)을 찾기 위함이었다. 인터뷰는 6월 4일 일본 카나가와현(神奈川県) 가와사키시(川崎市)에 위치한 도테교회에서 진행했다.
집 안의 언어 vs. 집 밖의 언어
“숟가락 좀 줘.”
“뭐? 숟가락? 그게 뭔데?” “숟가락 몰라?” 재일동포 2세 손유구 목사는 어린 시절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당연했던 것들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왜 옆의 친구는 ‘숟가락’이라는 단어를 모르는가? 왜 나는 친구들이 모르는 ‘숟가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가? ▶ “집에서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다 혼용해서 사용했습니다. 어떤 말이 한국어인지, 일본어인지 모르고 쓰는 거죠. 어린 나에겐 그냥 같은 말이었을 뿐입니다. 어릴 적 밥상에는 우메보시(매실장아찌)와 김치가 함께 올라와 있었어요. 그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죠. 그러나 학교생활을 하면서 옆에 있는 친구와 내가 다르다는 걸 알았고, 일찍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거죠.” 어린 손유구는 집 안에서 사용하는 말과 집 밖에서 사용하는 말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전통문화를 묻는 선생님의 질문에 진땀을 빼기도 여러 번이었다. 일본의 모찌, 일본의 된장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온 그였기 때문이다. 이제 막 소학교(초등학교)를 다니는 어린아이에겐 버거운 고민이었다. ▶ “그때부터죠. 내 안에 있는 나를 숨기게 된 것은요. 내가 일본 사회에서 ‘외국인’처럼 여겨지지 않기 위해서였어요. 일본에서는 한국인을 불쌍하게 여겼고, 재일동포들 역시 마찬가지였죠. 집 밖에 나와서는 어머니를 부를 때에도 ‘오카아상~’(엄마)하고 불렀어요. 어머니가 뒤돌아보지 않더라고요. 집안에서는 ‘엄마’라고 불렀으니까, ‘오카아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던 거죠. 가까이 다가가 왜 뒤돌아보지 않았느냐고 울면서 작은 주먹으로 어머니를 때렸습니다.” 그는 그때 왜 눈물까지 흘렸는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의 청소년 시절은 재일동포로서의 정체성을 꼭꼭 숨기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20세 때, 살아서는 그것을 영원히 감출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죽음으로 감추기로 결심한다. ▶ “일본 여자를 사랑하면 결국 ‘코리안’임을 밝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실제로 그런 날이 왔죠. 코리안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자와 사랑할 수 없게 된 현실은 저에게 큰 절망을 안겼습니다. ‘출생’은 내가 노력해서 고쳐지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 절망감이 더 컸죠.” 죽음을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친형을 찾아갔다. 100퍼센트 신뢰할 수 있는 친구가 아니면 ‘재일동포’라는 정체는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때다. 가족끼리도 재일동포로서의 고충을 서로 이야기할 때가 아니었다. 이때 처음으로 형에게 재일동포로 사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코리안이라서 사랑을 할 수 없다고, 이제 죽으러 갈 거라고. 유언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초밥을 만들고 있던 형은, 전혀 놀라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너 바보냐? 그렇게 따지면 나는 수십 번이나 죽었어야 해.” 그때 비로소 그것이 자기만의 괴로움이 아님을, 많은 재일동포들이 겪는 어려움이자 아픔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청년이 되어 사회에 진출해서도 일본인처럼 살았다. 손 목사는 대부분의 재일동포 2세들이 이런 삶을 살아간다고 했다. 이는 재일동포 1세들과는 구별되는 모습이다. ▶ “재일동포 1세와 2세는 아주 다릅니다. 1세는 1945년 전후 일본으로 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남은 사람들이죠. 2세는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1세와 2세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감이 있을 수밖에요. 저도 아버지와 그런 차이들을 크게 느끼며 자랐습니다. 1세의 마음은 복잡하죠.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갈 수 없는 상황이죠. 그러면서도 자기의 자녀들이 코리안이라는 이유로 일본에서 차별받을 것에 대하여 괴로워해요. 1세 중에 마약이나 술로 현실도피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재일동포 1세가 2세인 자녀에게 아무리 “너는 조선인이다” 말을 해도, 2세들은 그런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조선은 멀리에 있고,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 산다.” 오히려 더 깊은 단절을 초래할 뿐이다. 그래서 1세와 2세 사이에는 마찰이 많다. 손 목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일본인처럼 살아야 할 이유가 될 뿐이었다. 도테교회와의 만남
그런 손 목사가 28세 때 신학교(농촌전도신학교)에 들어가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면 신학교에서 만난 세키타 히로오 교수가 그를 이곳 도테교회로 데려오면서부터다. 세키타 교수는 도테교회를 세운 목사이기도 하다.
- 도테교회의 첫인상은 어땠나?
23년 전, 1991년에 이 동네에 처음 왔다. 스물여덟 살 때였다. 당시 이 동네에는 많은 코리안이 살고 있었고, 공장도 많았다. 당시 이웃끼리 “엄마” “아버지”라는 말이 길거리에서도 자유롭게 오갔다. 다른 일본 지역에서는 보기 어려운 친근한 모습이었다. 나도 재일동포가 많은 오사카에서 살았지만, 한국말을 밖에서 서슴없이 사용하는 경우는 없었다. 도테마을엔 필리핀이나 베트남 사람도 있었고, 북쪽과 남쪽의 사람이 서로 어울렸다. 서로 배척하거나 특별히 더 배려하는 것 없이 친하게 지냈다. 동네 밖 일본인들과는 때때로 다툼이 있었지만 우리끼리는 싸우지 않았다. 민족과 관계없이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 잘 지냈다. 내가 그동안 일본인처럼 살려고 던져버렸던 것이 이곳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 도테교회의 시작이 궁금하다.
이 지역에 대한 설명부터 해야 할 것 같다. 과거에 가와사키 지역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정치도시인 도쿄, 무역도시인 요코하마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만 언급될 뿐이었다. 그러다가 전쟁하는 동안에 큰 군수업체 공장을 이곳에 많이 유치해 중공업 도시가 되었다. 한국전쟁 때도 이 지역에서 만든 포탄이 무기로 쓰였다. 그 전쟁 때 부유한 동네가 되었다. 중공업에 종사하고자 외국인들이 가와사키에 많이 들어왔고, 그때 코리안들도 많이 와서 살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전쟁에 대해서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다. 고국의 희생으로 이룬 부유함으로 인생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도 이 도테지역은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되는 지역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둘 강가에 정착하면서 하나의 슬럼가를 이룬 지역이다. 정상적인 과정으로는 시가지에 살 수 없었던 이들이 여기 도테에 마을을 이룬 것이다. (1959년 이세완 태풍 이후 3~4년 사이 100가구가 형성되었다. 행정을 피해 토요일과 일요일에 집을 지었다.) 이때 세키타 목사가 도테마을을 알게 되었고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이다.
- 세키타 히로오 목사는 어떤 분이셨나? 왜 이곳에 교회를 세우신 건가?
그는 일본그리스도교단 소속 목사님이었다. 교단이 1967년에 일본인이 전쟁에 가담한 죄를 회개하는 ‘전쟁 책임 고백’을 했고, 여기에 감명을 받아 자기 인생을 전쟁 가해자의 입장에서 속죄하고 보상하는 데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2차 대전 때 세키타 목사는 ‘군국소년’이었다.) 그는 교회를 지을 때 전쟁에 대한 책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지금 우리 교단은 우경화되어서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쪽은 늘 약하지만, 세키타 목사님은 “잘못했다”라는 말로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실천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쟁 중 조선에서 일본으로 들어온 사람들과 일본인들이 다 같이 함께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사상이 지금의 도테교회의 모태가 되었다.
사실 지금의 교회는 당시 도테마을의 김만수 할아버지에게 산 것이다. 도테마을 안으로 들어오기 전, 세키타 목사는 도테마을 밖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교회를 도테마을 안으로 옮기려고 하자, 교인들이 들고일어났다. 왜 불법지역의 불법건물을 사서 교회를 옮기느냐는 불만이었다. 세키타 목사는 단호했다.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교회가 안전지대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변두리로 가야 합니다. 나 혼자 안전지대에 살면서 어떻게 변두리에 있는 사람을 만납니까? 내가 변두리로 가야 합니다.” 반대를 무릅쓰고 불법점거지역 도테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기존 교인 50퍼센트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교회를 떠났다. 1977년의 일이다. 세키타 목사는 교회활동은 물론 도테활동센터를 세워 도테마을 사람들의 수해를 지원하거나 취직 차별 문제를 해결하는 등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손유구 목사는 도테교회의 세 번째 목사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를 맡기까지는 적잖은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해야 했다. ‘일본인’으로 살아온 그에게 신학교에서 만난 재일동포들과 도테교회 사람들은 그를 ‘조선’과 다시 이어준, 변두리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이다.
▶ “내가 들어간 신학교는 사회적 소수자나 비주류들에 대해 마음을 많이 쓰는 곳이었습니다. 선배 중에는 재일동포도 많았어요. 민족에 대한 차별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선배들도 적지 않았어요. 나는 그 선배들을 보며 재일동포들도 이렇게 당당하게 살 수 있구나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에 비하면 코리아의 역사도, 말도 모르는 초라한 사람이었습니다. 일본 사회로부터 받아들여지기 위해 코리안으로서의 모든 걸 버리고, 일본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이죠. 그때 누군가가 나를 꾸짖듯 말했습니다. ‘너는 재일동포가 맞는가? 일본인 아닌가?’ 사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출생은 재 일동포였지만 이미 그 정체성은 다 버린 후였으니까요. 그래서 ‘재일동포가 누구인가’를 책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인위적인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죠. 재일동포이면서 일본인으로서 재일동포에 관해 공부하는 것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1993년, 그러니까 내가 서른 살 때 한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코리안’의 조각을 모으다
손 목사에게 한국에서의 유학은 큰 의미가 있었다. 코리안으로서의 새로운 조각을 모을 절호의 기회였다. 그때를 떠올리며 “재일동포라는 이유만으로 잘 대접받는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밝게 빛났다. 어린아이 때부터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한 그였다. 재일동포라는 이유로 사랑을 잃었고, 목숨까지 버릴 결심을 했던 그였다. 재일동포 선배가 많았던 신학교에서도 ‘너는 일본인이냐?’는 꾸지람을 들었다. 그런데 한국은 그런 그를 ‘재일동포’라는 이유만으로 환대하였다.
▶ “당시 한국은 일본인을 차별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일본인으로 알았을 때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재일동포 2세입니다’라고 말하면 태도가 180도 바뀌었어요. 일본에서와는 반대의 경험이었죠.”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재일동포는 재일동포일 뿐이었다. ‘순수한 한국인’으로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느낌, 그 벽을 느끼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국문화와 한글을 배우러 온 재일동포들 사이에서는 ‘순수한 한국인’이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순수 한국인은 담뱃불을 이렇게 끈다”라며 누군가 시범을 보이면 다음날부터 다들 그 방법으로 담뱃불을 끈다. 더 이상 구분되기 싫기 때문이다. ▶ “일본에서 차별받아 상처받았던 재일동포들은 처음에는 한국이 자신을 순수한 한국인으로 받아줄 거라 착각해요. 그래서 더 좌절하죠. 여기서도 나는 ‘반쪽짜리’구나. 나는 한국을 매우 좋아했지만, 거기서 나는 나답게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죠. 일본에서 나답게 살아야겠다, 다시 약 1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일본으로 돌아와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와의 화해다. 한국에서의 흔들리는 경험은 그에게 재일동포 1세인 아버지를 이해하게 해주었다. 아버지의 삶이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아버지를 통해 코리아의 다른 조각들을 모으고 싶었다. ▶ “나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화해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왔고, 어머니는 언제 만났는지 등등. 아버지의 개인사를 아는 것이 나에 대해 알아가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했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과 바빌론에서 태어난 자녀들 사이는 어쩔 수 없는 간극이 있잖아요. 그러나 그 차이를 좁혀야 나의 온전한 정체성을 찾을 수 있죠. 이곳 도테마을에도 많은 재일동포 1세들이 살았고 그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일본인이 되고자 버렸던 것들을 다시 찾고자 노력했어요.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인가 싶었죠.” 손 목사는 인터뷰 중 ‘재일동포’라는 말 대신 ‘코리안’이라는 단어를 자주사용했다. 그에게 ‘코리안’이라는 단어는 큰 의미가 있다. 순수 한국인과 반쪽 한국인을 구분하지 않는 통합된 개념으로의 ‘코리안’이다. ▶ “한 번은 오사카에 있는 조선학교 럭비팀이 국제시합에 참여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조선학교 선수들이 유니폼에 ‘코리아’라고 새긴 걸 보고, 한국에서 온 선수들이 ‘내가 오리지널 코리안이다’라고 말을 건넸어요. 농담 삼아 한 말이었더라도, 조선학교 학생들은 매우 슬퍼할 수밖에 없죠.”
손 목사는 이런 구분과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코리아’를 꿈꾼다. 파편화된 ‘코리안’의 기억을 모으는 작업이다. 그러고 보니 서경식 교수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언어, 문화, 혈통도 달라졌지만 흩어진 조선인들의 삶, 아픈 기억을 하나로 모아 ‘코리안’으로의 모든 기억을 살려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평화를 지향하면서도 고난받는 자들의 정신을 잇는 강한 민족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때쯤이었을까? 손 목사는 어머니가 오사카에서 야행버스를 타고 방문한 날에 대해 말했다. 정류장으로 마중을 나갔을 때, 50미터 밖 어머니의 모습을 본 순간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단다. 집 밖에서 ‘오카아상’이라고 엄마를 불러야만 했던 그때가 말이다.
▶ “그래서 나는 아주 큰 소리로 ‘엄마!’ 하고 소리쳤어요. 너무 크게 외친 나머지 어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전부 돌아보았죠.(웃음)” “엄마” 하고 소리친 순간, 어린 시절 산산이 조각났던 코리안으로서의 정체성이 다시 모여든 것이다.
도테교회의 정신
가난한 사람들이 이룬 도테마을. 그리고 그 안의 도테교회. 말로 다할 수 없는 아픔을 지닌 사람들의 공동체였고, 그럼에도 민족이나 이념과 관계없이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 잘 지냈던 곳. 우리 민족의 정신을 되살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한 조각 퍼즐을 간직한 곳. 그러나 이제는 세 가정만 남았다. 10여 년 전, 정부는 도테지역에 큰 맨션을 짓고 홍수 피해를 막는 슈퍼제방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려면 도테마을 전체를 철거한 후 흙을 깔아 제방을 쌓아야 한다. 가와사키시는 2008년 12월까지 완전철거를 계획했다. 많은 사람들이 적잖은 보상금을 받고 떠났다.
- 다들 떠났는데 교회와 세 가정은 왜 남아있나?
사실 우리 교회도 보상금을 제시받았었다. 3천 엔(약 3억 원)을 제시하더라. 큰돈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 한 사람이라도 보상을 못 받으면 교회도 퇴거하지 않기로 (총회에서) 결정을 했다. 당시 그 돈을 받아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결국 여기에 남기로 결정했다. 보상받지 못한 세 가구와 노동자들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다. 보상이라는 건 보통 대지와 건물에 대해서만 받을 수 있지 않나. 세를 들어 살았거나, 이 지역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에겐 보상이 없다. 한편으론 그냥 여기서 계속 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하면 이들이 보상금을 받을 수 있을지 계속 정부와 시와 협상중이다.
- 왜 꼭 ‘여기’ 이 장소를 고집하나?
도테교회는 ‘도테 안에’ 있어야 ‘도테교회’라고 부를 수 있다. 오늘은 도테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다 함께 모여 점심식사를 하는 날이다. 만약 우리가 보상금을 받고 떠났다면, 이런 모임은 없어졌을 것이다. 교회가 바깥으로 나가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살았던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 올 이유가 없어진다. 도테 안에 있기 때문에 매주 20여 명의 교인들이 오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도테 안에 있을 때에 존재 이유가 있다. 우리가 떠나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보다 어디서 어떤 처지로 읽는가가 더 중요하듯, 도테교회도 도테 안에 있어야 한다. 교회는 변두리에 있어야 한다.
건물은 수명이 다 되었다. 수리비용도 많이 든다. 건물로는 자랑할 수 있는 교회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게 바로 교회라고 생각한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주변의 재일동포들이 겪는 어려움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멀리서 도와주겠다거나 관심 가져주는 사람은 있지만, 실제 우리가 필요한 도움은 도테지역 주변 이웃들의 관심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관심은 고맙지만 멀리 있는 우리에게 말고, 바로 주변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었으면 좋겠다. 내 아내가 한국 사람이다. 세월호 뉴스를 보면서 항상 운다. 가까이에 있는 한국교회가 그 무거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나서줬으면 좋겠다.
- 남은 분들의 보상이 해결되면 그때는 교회를 옮길 생각인가?
모든 보상 문제가 해결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내 본심은 보상이 해결되어도 계속 여기에 남아 교회를 이어가고 싶다. 교회가 큰돈을 보상받고 밖으로 나가는 것은 교회의 정신과도 어긋난다. 끝내 나가야 한다면 계속해서 우리 교회의 정신을 이어나가고 싶은 곳이어야 한다.
도테교회의 정신은 ‘변두리에서 고난받는 이들과 끝까지 함께한다’는 것이었다. 손 목사는 모든 가정이 보상을 받은 후에 교회는 “맨 마지막에 나가겠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문득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이 떠올랐다. 그들에게는 ‘끝까지 함께 있어 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도테교회의 정신은 그동안 우리가 잃어버렸던 ‘코리아’의 한 조각이다. 한국사회와 교회가 잃어버린 ‘민족정신’ 말이다. 세계역사는 민족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행위가 보편 인류사에 많은 해를 끼쳐왔다고 증언하나, 특별히 역사의 굽이굽이 많은 시련을 겪은 우리 민족은 좀 다른 듯하다. 저마다의 고통을 짊어지고 여기저기 흩어진 우리 민족이, 그 조각을 하나로 모으면 그것이 어두운 세계를 밝히는 빛이 되지 않을까? 도테교회와 손유구 목사가 그러하듯.
* 현지 인터뷰는 효창교회(서울시 청파동, 담임목사 김종원)의 지원을 통해 진행되었습니다. 취재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진행 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
통역 키노시타 타카오 박사(숭실대 기독교역사학 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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