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1

알라딘: 손님 황석영 (지은이) 2001

알라딘: 손님

손님 
황석영 (지은이)창비2001-06-01원제 : 영문판 The guest

262쪽152*223mm (A5신)422gISBN : 9788936433413

[품절] The Guest (Paperback)

책소개

<손님>은 2000년 10월부터 2001년 3월까지 한국일보에 연재된 소설을 단행본 출간을 위해 새로이 손본 것이다. 이 책은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하여 씌어졌다. 지은이가 베를린에 체류하던 시절 베를린 장벽 붕괴를 목격하면서 부터 구상한 소설이다.

지은이는 1950년 황해도 신천 대학살사건을 배경으로 이땅에 들어와 엄청난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고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 이데올로기(기독교와 맑스주의)와 그 소용돌이에 휩쓸렸던 인간군상들의 원한과 해원(解怨)을 그려냈다.

제목이 뜻하는 손님이란 천연두를 뜻하는 민속적 별명이기도 하고, 주체가 되지 못하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뜻하기도 한다. 17세기 서양에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건너온 천연두는 병자호란 뒤부터는 풍토병이 되다시피 했다. 이후 마을 어귀에 세워진 장승이나 돌무더기 들은 이런 '손님 귀신'을 막고자 하는 의미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즉,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손님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손님 귀신'으로서, 막아내고자 하는 타자로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소설 속에서 지은이가 규정한 손님은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에 타의에 의해 지니게 되었다고 판단되는 기독교와 맑스주의 이다.


목차
1. 부정풀이
2. 신을 받음
3. 저승사자
4. 대내림
5. 맑은 혼
6. 베 가르기
7. 생명돋움
8. 시왕
9. 길 가르기
10. 옷 태우기
11. 넋반
12. 뒤풀이


황석영 (지은이)

1943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고교 재학중 단편소설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고, 단편소설 「탑」이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작품으로 『객지』 『가객』 『삼포 가는 길』 『한씨연대기』 『무기의 그늘』 『장길산』 『오래된 정원』 『손님』 『모랫말 아이들』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자전 『수인』 등이 있다.
1989년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총체적으로 다룬 『무기의 그늘』로 만해문학상을, 2000년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변혁을 꿈꾸며 투쟁했던 이들의 삶을 다룬 『오래된 정원』으로 단재상과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2001년 ‘황해도 신천 대학살사건’을 모티프로 한 『손님』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 등 세계 각지에서 『오래된 정원』 『객지』 『손님』 『무기의 그늘』 『한씨연대기』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낯익은 세상』 등 여러 작품이 번역 출간되었다. 『손님』 『심청, 연꽃의 길』 『오래된 정원』이 프랑스 페미나상 후보에 올랐으며, 『오래된 정원』이 프랑스와 스웨덴에서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다. 『해질 무렵』으로 프랑스 에밀 기메 아시아 문학상을 수상했다. 접기
수상 : 2018년 에밀 기메 아시아 문학상, 2004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올해의 예술상, 2001년 대산문학상, 2000년 이산문학상, 1989년 만해문학상,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최근작 : <새롭게 만나는 우리 명작 한빛문고 18종 세트 - 전18권>,<한씨연대기>,<객지> … 총 194종 (모두보기)

인터뷰 : 우리 신화와 21세기 현실의 멋진 만남 - 2007.07.18
SNS : //twitter.com/Hsokyong
Editor Blog지난 10년, 우리를 행복하게 한 한국문학의 별들 l 2010-09-06
젊은 문학평론가와 문학 전문 기자, 서점 MD 등의 설문조사로 선정한 2000년대 최고의 한국문학 목록이 발표되었습니다.최고의 장편과 최고의 단편, 최고의 시와 최고의 작가 등,지금 여기, 바로 우리가 읽어왔던 10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겨레 21측의 양해를 구하고 해당 리스트를 싣습니다. 당신의 리스트는 어떻습니까? 당신의 세 손가락 안에 포함된 작가...

[문학] 무릎을 치게 만드는 황석영의 문학 여정 l 2008-10-28
작가 황석영은 1943년 만주 장춘(長春)에서 태어나 고교시절인 1962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통하여 작가로 등단하였고,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탑'과 희곡 '환영(幻影)의 돛'이 각각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합니다. 베트남전쟁 참전 이후 본격적인 창작 활동에 들어간 작가는 '객지',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 등 리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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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의 상징은 붉은 동백꽃이다. 제주도 동백꽃을 치면 4월에는 꼭 놓치지 말아야할 풍경, 여행지라는 말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4.3의 상징이 붉은 동백꽃이 된 이유를 알면 그 꽃이 그저 아름답지만은 않다. 오히려 가슴이 저릴 정도로 아프다.



  동백꽃은 질때 벗꽃처럼 흩날리지 않는다. 툭툭 소리를 내는듯이 통으로 떨어진다. 붉은 동백꽃이 통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어느 재일 문학가는 4.3이 생각이 나서 차마 볼 수 없다고 한다. 그 꽃을 바라보면서 4.3 당시 피해자들의 목이 떨어지던 모습이 생각이 나서 그런단다. 끔찍하다 못해 섬뜩한 말이다. 어째서 그렇게 처참한 일들이 제주도에서 일어난 것일까?



  여러가지 말들이 있다. 남로당의 지원을 받아서 빨갱이들이 일으킨 일이라고 아직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육지 것들이 들어가서 판을 쳤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서북청년단들의 만행은 유명하다. 장모와 사위에게 사람들 앞에서 성관계를 가지라고 협박하고 죽이는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런데 서북청년단들이 당시 영락교회 청년들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나도 기독교인이지만 이 대목에서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데, 아직도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다고 하늘을 가릴 수 없겠지만 말이다.



  4.3을 비롯하여 한국 근현대사는 많은 부침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부침의 대부분은 우리 민족에 의해서 주동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세력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다. 일제에 의해서, 미국에 의해서, 소련에 의해서, 자본주의에 의해서, 공산주의에 의해서... 외부에 들어온 세력들에 의해서 날나라가 토막이 나고, 그들은 어느새 우리를 지배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만들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이북에 있던 한 곳에서 일어났던 일들. 기독교와 공산주의, 지주와 소작인 등 평화롭게 어울리던 마을이 토막이 났다. 친구가 친구의 가족을 학살하고, 이에 대한 복수로 다시 그들을 학살하고. 등장인물의 마음에 깊이 남겨진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치유되지 않는다. 마음 깊은 속에 자리하여 서로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외면하고. 그러다가 죽음을 통해서 화해의 실마리가 보인다. 지금까지 서로를 위해서 가지고 있었던 상처 받음과 상처 줌이 한 자리에 모여서 대화를 나누면서 풀려간다.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려서 누가 잘못했느냐를 따지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그들고 피해자이고, 나도 피해자이다라는 공감대가 형성이 되면서 갈라져 있던 인연의 물줄기가 다시 하나로 합쳐져서 저승의 강으로 흘러간다. 어린 시절 함께 어울렸던 시절을 추억하면서 조금씩 거리를 좁혀간다. 그렇게도 떠나고 싶었던 그 땅, 외부 세력이 들어와서 지배했던 그 땅, 손님이 주인 행세를 했던 그 땅에 조그마한 유골이나마 묻히는 일은 우리의 마음에 작은 위안을 건네준다.



  전체적으로는 손에서 놓기 힘들 정도로 잘 쓰인 소설이고, 우리에게 던지는 감동도 만만치 않다. 다만 요섭에게 갑자기 등장했던 샤먼은 흐름을 끊어버리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유골을 담아갈 뼈를 건네주는 역할을 하는 인물의 등장은 굳이 그러한 설정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갑자기 등장한 신비한 인물은 소설의 장르를 판타지로 착각하게 만드는 쓸데없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후로 이 인물이 어떤 역할을 할지 관심을 가져봤지만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하는 것을 보면서 이건 뭐지라는 생각을 했다. 이 부분을 감안하고 읽으면 이 책은 소설이 가지는 묵직한 힘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하겠다.

saint236 2019-04-13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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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손님’을 읽고

                                                       

세계지도의 아주 작은 여백을 메우고 있는 한반도는 아직도 냉전이라는 분단의 선분을 긋고 있다. 그 분단의 아픈 역사의 한 부분이었던 과거사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소설 ‘손님’의 스토리는 잔학한 미군과 기독청년들의 횡포사를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소설 가운데서도 드러나지만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 단지 남한과 북한, 두 이념 간의 대립. 갈등구도에서 남. 북한이 자의적으로 해결되었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제3자가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남. 북한의 상처는 더 확대된다. 사람과 사람의 갈등도 제3자가 괜스레, 불필요하게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구도 자체도 어색해지고 양대 구도가 삼각구도로 되어짐으로 말미암아 분위기는 더 험악해질 수밖에 없다.

황석영의 ‘손님’은 이러한 우리나라의 정치적, 역사적 현장 위에다 기독교를 양념(?)화하여 자신의 논리를 소설화하고 있다. 역사적 불청객으로 둔갑한 기독교인들의 만행에 대해 어떻게 변명을 할 수 없겠으나 기독교의 부정적인 면만 극대화한 것에 대해 서운함이 없지 않다.

솔직히, 우리 민족의 분단을 조장한 것이 서양 즉 미국이긴 하지만 그 미국과 기독교를 equal(=)부호로 동일시한다는 것은 말도 아니 될 뿐더러 분단의 아픈 현실 가운데 기독교가 악영향을 미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수의 기독교라는 명찰을 단 기독인들의 책임이고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버리고 우리 기독교의 역사적 책임에서 회피하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처사가 아닐 것이다.

   






소설 속의 기독인의 죄스런 처사가 비록 단편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민족이 가진 상처는 기독교에 분명한 책임이 있다. 한국교회에 친일파 전통이 배여 있다는 뼈아픈 역사현실 위에다 개인적으로 황석영의 소설을 통해서 나로서는-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 중의 한 사람으로서- 6. 25전쟁 이후의 후유증에 대해 기독교는 또 한 번 통감의 의무를 감당해야 할 것임을 생각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교회는 시대를 아우르고 시대를 포용하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교회 즉 기독교는 이러한 역사적인 책임성을 걸머쥐고 민족이 가진 동존상잔의 비극, 그것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 모색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더 우리가 민족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의 종교가 기독교라는 것에 있다-물론 나는 종교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Martin Llyod Jones가 쓰는 표현인 ‘기독교는 관계이다’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민족을 향한 선지자적인 눈물을 훔치고, 흘렸던 믿음의 선조들처럼 기독인들은 이런 눈물로 주 앞에서 긍휼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작금의 세태 가운데 남북관계에 대해 기독인들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자주 언급되고 있는 ‘흡수통일’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 봐도 ‘통일비용’에 대한 남한 국민들의 고통분담금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 현실이기에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남북한의 합일(Unity)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섣부른 긍정이나 부정의 판단 이전에 한국 기독교는 남북한의 분단 현실에 대해서 계속적이고도 진지한 관심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03년도에 적었던 글을 <누가 북한을 움직이는가>에 대한 리뷰를 적다가 <손님>리뷰를 올린다.

카알벨루치 2018-07-29 공감 (1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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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북한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태영호의 책을 읽는 중에, 남북한 판문점 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일어났다. 그러던중에 이 책이 나왔다.

책을 읽으면서 속도를 내기 위해 볼펜을 내려놓고 중요한 대목은 접어서 다시 줄을 긋고 메모할 요량으로 완독했다.

근데, 다시 접은 부분을 들추어내려니 시간도 시간이고, 힘들겠다 싶다.



내가 받은 인상 몇 가지만 이야기하고 싶다.

1 북한의 지도자는 김정은이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으로 3대세습은 획기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이제 북한의 대표자는 김일성도, 김정일이 아닌 김정은이란 사실이다. 이 말은 이전에 두 지도자를 바라보던 프레임으로 김정은을 보아선 아니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김정은은 김정일이 북한내에서 지도자훈련을 받은 경우와 달리, 그는 유학파이다. 유학파 엘리트 출신이다. 그런 차별점이 바로 자신이 지도자로 오른 뒤, 권력의 제2인자 황장엽 숙청부터 시작해서 아버지의 측근들을 대다수 숙청 아니면 권력의 자리에서 추방시켰다. 이를 보면서 김정은을 '미치광이'라거나 '망나니'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이것은 김정은의 기획된 노림수이고 전략이다.

이를 통해 김정은은 권력을 양도받는 기간이 너무나 짧은 약점(김정일의 이른 죽음으로)을 권력중심자들의 '세대교체'라는 카드로 극복하려 한다.



김정은은 '북한 최초의 시스템형 지도자' 스타일을 지향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김정은이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 김일성의 권력장악스타일을 모방하는 점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외모 또한 김일성을 많이 닮았다는 것으로 어필한다는 점이다. 그게 뭐라고? 아니다. 북한은 김일성이 세운 나라이기도 하기에, 김일성의 카리스마는 절대적이다. 일부 의견에서는 김정은이 성형수술을 했다고 의혹도 있다고 본다. 김정은이가 할아버지 김일성을 벤치마킹했다. 김정은은 머리를 쓸 줄 아는 지략가이다.



2 김정은이 내건 두 가지 목표이다.

첫번째는 핵무력 건설이라는 병진노선이고, 두번째는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경제대국으로써의 꿈이다. 그런데, 핵을 보유함으로써 강대국들과의 관계에서 '코너에 몰린 생쥐'꼴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북한의 협상의 테이블로 나왔다. 하지만, 과연 북한이 비핵화가 가능할까? 참고로 리비아라는 반면교사가 있기 때문에 북한은 핵을 포기하는 것이 어렵다는 전문가의 지적도 있다. 하지만, 북한이 경제를 잡으려면 병진노선을 접어야 한다.



3 불쌍하기 짝이 없는 달러히로어즈들

북한의 경제력을 버티고 있는 것은 해외에 나가 지독한 노동에 시달리며 외화를 자국으로 강제적으로 송출당하는 북한의 노동자들 때문이다. 이들은 북한의 '달러 히로어즈'들이다. 이들은 제대로 된 임금도 잘 못 받지만, 받아도 거의 정부에게 빼앗기다 싶이 한다. 그래도, 북한내부에서 일할때보다 낫다고 거기에 목을 맬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북한의 해외 송출 노동자 현황을 보면, 러시아 2만명, 유럽 400-500명, 중동 7,800명, 중국 19,000명 이상, 아프리카 1,000명, 말레이시아 400명 등이다. 2015년에는 9만여명이었는데, 2016년에는 12만 명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북한은 변화하고 있고, 국제관계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떤 변화를 또 가져올지 기대된다.

김정은은 특별히 경제대국의 꿈을 가지고 '교육'에 신경을 쓰면서 영어, 외국어 교육을 강조한다.

베일에 싸인 북한의 모습을 들추어 본 이 책의 결론은 '북한은 나름의 시스템과 로드맵을 갖춘 국가였다'(p.264)이다.

이정서의 <85학번 영수를 아시나요?>란 소설에 보면 고성식이란 인물이 나온다. 그는 김일성대학 출신엘리트였다가 귀순한다. 그리고 신문사와의 원고 계약을 한다. 하지만, 한국사람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글을 도저히 쓸 수 없겠다고 주인공에게 이야기한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 역으로 말하면 돈 앞에서는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무서운 것 같아요. 북한은 못 살지만, 서로가 못사는 만큼 서로에게 관심이 많죠. 여기처럼 각박하지는 않다는 겁네다. 모든 가치 기준을 돈으로 재려 하는 사람들 속에 있다보니 적응이 잘 안되네요."(p.99)



북한과 남한의 프레임과 패러다임의 차이점을 소설의 한 대목에서도 느껴진다.



문득 읽은지 한참된 황석영의 <손님>이란 소설이 생각난다. 그 내용은 미제국주의와 동일시되는 기독교, 기독교와 동일시되는 미제국주의가 한반도에 끼친 해악을 고발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손님...

하지만, 이제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이 한 민족, 한 혈육이 아니라 '또 다른 손님'의 입장이 될 수도 있는 문화적인 거리감이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치나 외교나 국제정세에 너무나 미약한 내가 이 책의 리뷰를 쓴다는 것이 너무나 쑥스럽다. 하지만, 휘발되지 않기 위해 기록을 남긴다.







<누가 북한을 움직이는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은 소설이 바로 김진명의 <미중전쟁>이다. 김진명의 소설의 마지막은 '비약'이 심하지만, 나름대로 국제관계도의 해부는 제대로 한 듯하다. 소설에 보면 중국을 노리고서 미국은 북한을 도발하려고 한다. 그런데, '북한에 전쟁을 하려면 반드시 한국 대통령 문재인에게 승인을 얻어야 한다'. 이런 대목이 있는데, 미국은 이를 무시하려고 한다....





'2017년 8월 15일, 문재인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는 어떤 전쟁도 안 된다는 입장을 강하게 표명했다. 김정은은 이런 문재인 대통령에게 강한 신뢰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p.148).'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란 소설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호주시민권을 얻기 위해 호주로 온 예나에게 아주 쿨한 미국인 친구, 엘리가 있다. 엘리는 모든 것이 시원시원하다. 예나가 알바를 하다가 의류점 상사에게 꾸중을 들으면, 오히려 옆에서 예나를 변호해준다. 그런 모습에 예나는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익스트림 스포츠를 굉장히 즐기는 예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엘리의 목적은 예나의 빌딩 옥상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호주법에선 불법이었다. 엘리는 거주자가 아니기에. 엘리는 자신의 순간순간의 소확생, 하지만 너무나 스펙타클한 꿈을 낙하산을 펴 들고 뛰어내린다. 근데, 그 타이밍이 안 좋았다. 그때 호주에 테러신고가 들어와서 낙하산을 탄 엘리가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엘리는 착지할 때 다리를 다쳤고 벌금을 물었다. 하지만, 불법으로 집에 엘리를 들인 예나는? 예나는 엘리의 야생적인 욕구를 채워주고자 하는 선한 의도에서 엘리를 집에 들였지만 결과는 최악이었다.

예나는 전재산을 날릴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그것에 엘리도 어느정도 책임이 있음을 알로 엘리에게 찾아간다.



"하지만 너 때문에 난 집에서 쫓겨나게 됐다고! 4년동안 모은 돈을 전부 다 날리게 됐어! 넌 미안하지도 않니?"

"아니, 호주법에 따르면 네 손해는 네 책임이야. 너희 집을 관리 감독할 의무는 내가 아니라 네 한테 있었던 거라고. 적어도 내 생각엔 그래. 네 생각이 나와 다르다면, 우리 중 누가 옳은지 법정에서 다퉈볼 수 있겠지."(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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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손님에는 이북 사투리가 대부분이다.
어릴적 친할머니,할아버지의 말투가 그대로 녹아져 있어서 간혹 책의 대화를 발음해보며 읽었다.

다자의 관점에서의 이야기가 너무 자주 바뀌어서 집중하고 봐야하는 소설이었다.

한치 앞도 모르는 사람들의 싸움이라 더욱 가슴아프게 읽었다.  구매
wonnjun 2016-08-16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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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보다도 작가의 시선이 더 흥미로웠다. 손님과 씻김굿으로 풀어낸 그 의도가 더 눈에 밟혔다.  구매
음양오행 2012-10-12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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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사건은 “손님”(급작스레 맞이한 모더니티)의 문제이며 인간 고유의 비극이다. 인간의 어두운 본성과 이데올로기가 만나면 수천 수만의 목숨이 참혹하게 사그라진다. 과거를 되돌아보며 화해하고, 현재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손님]에 있다. 평화를 기원한다.  구매
orangelamp 2018-09-05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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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 일인층 관점.... 다소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세밀한 감정표현이 좋았다  구매
나일강 2013-08-26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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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읽은 시기, 현재는 매우 시의적절 또는 매우 부적절하다. 내 스스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왜 이다지도 보수적인 것일까, 아니 보수적이나 못해 무모하기까지 한 것일까. 어떻게 단지, 낙태를 반대한다고 해서 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한다고 해서 동성애자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미국의 부시 같은 깡패를 찬양할 수가 있는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공공연하게 가장 잔혹하게 살인을 자행하고 있는 나라를 어떻게 기독교도들이라는 자들이 찬양할 수가 있는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착하기만 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듯, 단지 낙태, 동성애 반대 등의 정책이 그 모든 죄악에 대한 면죄부를 줄 수도 없지 않은가...

소설이 주는 서정성, 낭만, 현실안주 또는 현실회피 등이 어느 때에는 신물이 날 때가 있다. 하지만, 소설이 갖는 막강한 힘도 모르지 않는다. 그 힘을 확인한 소설이 바로 이 황석영의 손님이다.

미국 부르클린에 사는 류요섭 목사는 고향이 북한의 황해도다. 고향방문단 사업으로 교향인 찬샘골에 다녀오려는 그는 미국에 건너온 형 류요한 장로에게 이 사실을 말해주고 회개를 권고한다. 회개는 없다, 난 할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하는 형은 떠나기 사흘전에 갑자기 죽고, 형이 이전에 보았다는 헛것(귀신)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형의 헛것과 함께.
그리고 시작된 황해도에서 일어난 처절한 살육. 그저 죽고 죽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그 잔혹한 현장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류요한 목사의 여행길과 함께 재현된다. 헛것들은 끊임없이 나타나고 결국 형이 북에 버리고 왔던 조카와 형수가 제사를 지내주고, 거기서 받은 속옷을 불태워 그 현장에 뭍어주는 것으로 끝이난다.

그러나, 과연 끝난 것인가. 그렇게 해서 그들의 영혼은 한을 풀었는가. 왜 우리는 이런 비극을 겪어야 했고, 지금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기독교인들은 모조리 미국측에 붙었고, 대부분 밥술깨나 먹는 사람들이며, 당에 가입한 사람들은 가난한 소작농이거나 남의집 머슴들이다.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고, ┰봐聆퓔?몰랐을 때 그들은 그럼에도 한 이웃 사람으로 서로를 일으켜주며 함께 살았다. 그러나, 이 손님들로 인해 서로가 죽일 듯이 미워하게 되었던 현실.
그리고 아직도 우리는 미국이라는 손님이 가장 무서운 나라.

신기하게도(!) 기독교인이면서 당원인 류목사의 외삼촌만이 이 살육의 현장에서 온전히 살아남아 지금까지 기도하며 당원으로 잘 살고 있다. 그것이 작가가 말해주는 해답인 것인가. 왜 우리는 이것 아니면 저것일 수밖에 없는가. 그리하여 서로 반동이라고, 악마의 자식들이라고 싸우고 있는가.
그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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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 2005-03-18 공감(1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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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림병으로서의 기독교 새창으로 보기 구매
흔히 상대방에게 질질 끌려가며 복종해야만 하는 처지에 빠진 경우를 일컬어 ‘코를 꿰었다’고 말한다. 가령 대미종속적인 한국의 군사, 외교를 말할 때 ‘부시 정부에 코를 꿰인 한국정부’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농가에서 키우는 소의 경우 송아지 때 코를 뚫는 것이 관례이다. 그래야만 농부가 소를 임의로 부려 쟁기나 수레를 끌도록 할 수 있다. 나는 ‘코를 꿰었다’는 표현도 ‘소의 경우’에서 비롯된 비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황석영 작가의 <손님>을 읽으면서 이것이 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졌던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것도 불과 반세기 전 한국전쟁 시기 북한에서 동족 간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은 오랜만에 읽었다. 오래 전 대하소설 <장길산>을 흥미진진하게 읽고나서 이번이 두 번째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제 보니 <장길산>과 <손님> 두 작품이 공교롭게도 모두 황해도를 무대로 하고 있다. <장길산>이야 다시 말할 필요 없고, <손님>의 경우 황해도 ‘재령’과 ‘신천’이 주요 무대로 나온다.



알고 보니 황석영 작가가 출생지는 만주이지만 아버지의 고향이 황해도라고 한다. 그리고 작가의 호적에 나와 있는 원적 또한 황해도 신천군이라고 되어 있다. 실제로 작가가 89년에 이 지역을 방문했고, 이 소설을 쓰기 위한 취재도 이 기간에 했던 것 같다. 다 알다시피 그 후 황석영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상당기간 감옥 생활을 하다가 풀려났다.



<손님>은 재미 동포인 '류요섭 목사'라는 인물의 황해도 고향방문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 공산당과 기독교도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보여준다.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은 수세에 몰리게 된다. 그동안 공산당 치하에서 토지를 몰수당하는 등 피해의식을 갖고 있던 기독교도들은 무기를 들고 봉기한다.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잔인하게 폭행하는 장면에서 앞에서 말한 코를 꿰는 장면이 나온다. 토지조사사업에 가담했던 한 공산주의자를 철사로 코를 꿰어서 끌고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공산주의자 색출과 처형에 앞장 선 기독교청년단의 행동대장이 바로 류요섭 목사의 친형인 류요한 장로였다. (그는 류요섭 목사의 고향방문 사흘 전에 미국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처형당한 공산주의자들은 요한, 요섭 형제가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지내던 이웃들이었다.



<한 많은 미아리고개>라는 유행가에 등장하는 ‘철사줄로 두손 꽁꽁 묶인채로’ 끌려가는 모습도 나온다. 포승줄을 구하기 힘든 시절이라 전봇대에 있는 전화선을 끊어 둘둘 말아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반대파를 끌고 갈 때 써먹었던 것이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 수복 후 미군이 북으로 밀고 올라오자 기독교 청년들은 ‘십자군’이 올라온다며 용기백배 한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죽일 때는 빠뜨리지 않고 기도를 올린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가 나오는지...) 공산당을 무찌르는 십자군을 자처하게 된 것이다.



불과 반세기 전에 이런 끔찍한 일이 한반도에서 벌어졌다는 것이 충격으로 와 닿았다. 물론 역사책에서 읽긴 했다. 하지만 역사책이란 것이 대개 역사적 사실을 추상화, 개념화 시켜 정리해 놓은 것이라서 인간의 삶의 '결'을 충분히 살려내는 데는 부족함이 많다. 문학은 그 빈틈을 메워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산주의야 본시 폭력혁명을 지지하는 이데올로기니까 그렇다 치자. 하지만 종교의 이름으로 (그것도 기도를 올리면서) 거침없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기독교 청년들의 행위는 잔인하기 그지없다. 요즘 하는 말로 실로 ‘엽기적’이다. 앞에서 철사줄로 코 꿰는 얘기를 했지만, 그들이 사람을 죽인 방법은 글로 다시 옮기기도 끔찍할 정도이다. 그 잔인성은 몇 해 전 이라크에서 살해당한 김선일 씨의 경우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김선일 씨는 이역만리 낯선 이라크 땅에서 외국인에게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동족끼리, 그것도 서로 다정하게 음식을 나누어 먹던 이웃 간에 종교의 이름으로 가해진 잔인한 폭력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토지를 몰수한 공산당 측에서 원인 제공을 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청년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작가가 이 소설의 제목을 <손님>이라고 정한 배경도 의미심장하다. 여기에서 ‘손님’이란 천연두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천연두를 '서병'(西病), 즉 서양에서 온 질병으로 여겼다고 한다. 작가는 공산주의와 기독교를 모두 서양에서 전래된 ‘돌림병’으로 간주하고 있다. 두 전염병이 20세기 중반 황해도에서 일으킨 한바탕 '미친 바람'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것이 작가의 의도이다.



황석영 작가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를 ‘돌림병’으로 파악한 그의 관점은 오늘날 한국의 비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시각을 상당 부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상상을 뛰어넘는 충격, 그와 더불어 씁쓸한 뒷맛을 남겨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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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 2006-05-21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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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4.3이 지났다 새창으로 보기 구매
  4.3의 상징은 붉은 동백꽃이다. 제주도 동백꽃을 치면 4월에는 꼭 놓치지 말아야할 풍경, 여행지라는 말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4.3의 상징이 붉은 동백꽃이 된 이유를 알면 그 꽃이 그저 아름답지만은 않다. 오히려 가슴이 저릴 정도로 아프다.



  동백꽃은 질때 벗꽃처럼 흩날리지 않는다. 툭툭 소리를 내는듯이 통으로 떨어진다. 붉은 동백꽃이 통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어느 재일 문학가는 4.3이 생각이 나서 차마 볼 수 없다고 한다. 그 꽃을 바라보면서 4.3 당시 피해자들의 목이 떨어지던 모습이 생각이 나서 그런단다. 끔찍하다 못해 섬뜩한 말이다. 어째서 그렇게 처참한 일들이 제주도에서 일어난 것일까?



  여러가지 말들이 있다. 남로당의 지원을 받아서 빨갱이들이 일으킨 일이라고 아직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육지 것들이 들어가서 판을 쳤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서북청년단들의 만행은 유명하다. 장모와 사위에게 사람들 앞에서 성관계를 가지라고 협박하고 죽이는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런데 서북청년단들이 당시 영락교회 청년들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나도 기독교인이지만 이 대목에서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데, 아직도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다고 하늘을 가릴 수 없겠지만 말이다.



  4.3을 비롯하여 한국 근현대사는 많은 부침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부침의 대부분은 우리 민족에 의해서 주동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세력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다. 일제에 의해서, 미국에 의해서, 소련에 의해서, 자본주의에 의해서, 공산주의에 의해서... 외부에 들어온 세력들에 의해서 날나라가 토막이 나고, 그들은 어느새 우리를 지배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만들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이북에 있던 한 곳에서 일어났던 일들. 기독교와 공산주의, 지주와 소작인 등 평화롭게 어울리던 마을이 토막이 났다. 친구가 친구의 가족을 학살하고, 이에 대한 복수로 다시 그들을 학살하고. 등장인물의 마음에 깊이 남겨진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치유되지 않는다. 마음 깊은 속에 자리하여 서로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외면하고. 그러다가 죽음을 통해서 화해의 실마리가 보인다. 지금까지 서로를 위해서 가지고 있었던 상처 받음과 상처 줌이 한 자리에 모여서 대화를 나누면서 풀려간다.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려서 누가 잘못했느냐를 따지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그들고 피해자이고, 나도 피해자이다라는 공감대가 형성이 되면서 갈라져 있던 인연의 물줄기가 다시 하나로 합쳐져서 저승의 강으로 흘러간다. 어린 시절 함께 어울렸던 시절을 추억하면서 조금씩 거리를 좁혀간다. 그렇게도 떠나고 싶었던 그 땅, 외부 세력이 들어와서 지배했던 그 땅, 손님이 주인 행세를 했던 그 땅에 조그마한 유골이나마 묻히는 일은 우리의 마음에 작은 위안을 건네준다.



  전체적으로는 손에서 놓기 힘들 정도로 잘 쓰인 소설이고, 우리에게 던지는 감동도 만만치 않다. 다만 요섭에게 갑자기 등장했던 샤먼은 흐름을 끊어버리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유골을 담아갈 뼈를 건네주는 역할을 하는 인물의 등장은 굳이 그러한 설정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갑자기 등장한 신비한 인물은 소설의 장르를 판타지로 착각하게 만드는 쓸데없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후로 이 인물이 어떤 역할을 할지 관심을 가져봤지만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하는 것을 보면서 이건 뭐지라는 생각을 했다. 이 부분을 감안하고 읽으면 이 책은 소설이 가지는 묵직한 힘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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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9-04-13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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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된 손님 새창으로 보기 구매
인터넷 서점에서 '손님'이란 책 이름을 쳤더니 무려 122개나 되는 책이름이 나타난다. 도깨비 손님, 우리 집에 온 손님, 겨울 손님 등등. 이렇게 책이름에 손님이란 이름이 많이 붙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손님'이라는 말은 반가운 의미로 많이 쓰이는 것 같다. 어렸을 적에도 우리 집이나 동네에 손님이 온다고 하면 설레었던 기억이 난다. 반갑게 맞이하기 위해서 청소하고 정리하면서 부산을 떨었지 싶다. 손님은 잠시 머물다 가기 때문에 짧은 동안의 시간에 좋은 기억을 주기 위해서 긴장하고 그랬던 것이지.

황석영의 소설 제목인 손님이 상징하는 바는 '주인이 되어버린 손님'이다. 돌림병처럼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무서운 손님이다. 여기서는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손님이다. 겨우 100여년전에 한반도로 들어왔지만 이제는 남녘과 북녘에서 주인이 되어버린 손님이다. 기독교나 공산주의 모두 민족과 민중의 수난기에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들어왔지만, 결국에는 사람을 억누르고 파멸시키는 사상이 되어버린 역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은이는 황해도 신천 학살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 가는 과정에서 그것이 우리 민족 내부의 싸움에서 생긴 사건임을 알아내었다고 한다. 노근리 사건처럼 미제국주의에 의한 학살이 아니라 기독교와 공산주의 간의 살륙임을 알아낸 것이다.

황석영은 황해도 신천학살의 이야기를 지노귀굿, 혹은 오구굿이라는 굿의 12마당 형식을 빌어서 들려주고 있다. 기독교도인 요한과 요섭 형제는 한국전쟁 뒤 남쪽으로 내려온 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세대다. 요섭은 목사다. 미국에서 북한으로 가는 고국방문을 통해서 그들의 고향을 찾아간다. 그 고향방문에 요한은 혼령으로 함께 따라간다. 황석영은 헛것이라는 표현을 쓴다. 신천학살 때 숨진 그 마을 사람들의 혼령은 지상을 떠돌다가 요섭을 따라서 북으로 간다. 그곳에서 해방전후와 전쟁전후로 벌어졌던 마을의 일들의 실상이 밝혀진다. 이것은 소설적인 장치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인 사실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것을 밝히는 이야기는 작가가 모두 이야기하는 방식도, 주인공이 진술하는 방식도 아닌,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다. 소설이 아니라 연극 같은 느낌도 준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서 불편했는데 자꾸 읽다다 보니까 편안해졌다. 나는 한번 읽고 나서 다시 한번 앞에서부터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이해안 되던 부분을 읽어보았다. 그랬더니 이야기의 전모가 이해되었다. 결국 책을 두번 읽은 셈이다. 나는 같은 책은 두번 잘 안 읽는데 하다가보니 그렇게 되었다.

해방과 전쟁 전후의 이야기를 보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그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불구덩이를 지나왔을까 하는 안쓰러움이다. 내가 만약에 그 시대에 젊은이로 삶았다고 하더라도 어떤 선택을 강요당할 수 밖에 없지 않았겠나. 기독교든 공산주의든, 극단적 반공주의든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중간파란 존재하기 힘든 시대였으니까. 회색은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색깔로 취급되어서 어디에서든 환영받지 못했으니까.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다보면 사람은 어느 순간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다. 그것의 노예가 된다. 손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비극이 벌어진다. 이 소설에서 다루는 장소와 시대에서는 그것이 극단으로 치달아서 수만명의 인민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을 벌였다. 공산주의가 옳지도 않고 반공하는 기독교도 옳지 않다. 재판도 없고 판결도 없는 학살이 서로간에 벌어진다. 내 논밭을 뺏어간 공산당의 세력이기 때문에 죽이고, 내 편을 학살한 반대편이기 때문에 죽인다. 나중에는 서로 같은 편끼리도 죽이는 일이 벌어진다. 어린애고 여자고 어른이고 가리지 않는다.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던 여자도 반대편이면 총을 무기로 능욕하고 지겨우면 죽여버린다. 과연 이런 세상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이런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유고내전에서, 아프리카의 내전들에서 이런 일들이 예사로 일어난다. 그야말로 문명속의 야만이다. 총든 자들이 저지를 수 있는 야만은 얼마나 무서운지. 막강한 힘이 주는 유혹. 돈가진 자들도 마찬가지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힘없는 이들에게 저지르는 횡포도 본질은 같다. 어른이 어리고 약한 아이들에게 휘두르는 권력도 마찬가지.  여하튼 성찰되지 않은 힘은 남을 해치고 결국에는 자기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법이다. 세설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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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달팽이 2007-05-20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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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비극 새창으로 보기 구매
근세 우리민족에 도입된 외래 사상  기독교와 공산주의  외래 사상으로 인하여 벌어진 우리 민족의 비극  분단 반세기의 처절한 영혼이 여기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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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를 위한 씻김굿' mx**48 | 2004-05-29 | 추천: 1 | 5점 만점에 4점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짓누른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마마를 손님으로 불렀다. 집에 마마에 걸린 사람이 생기면 무당을 불러 융숭하게 제사 상을 차려 대접해주고 손님(질병)이 조용히 물러가기를 빌었다. 어찌 보면 소극적이기도 한 이러한 과정은 우리 민족의 민족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은 이러한 '굿'을 통해 과거에 저질렀던 '부정'을 씻어버리고 새로운 일상을 맞이하고자 했던 것이다. 황석영의 『손님』은 우리 민족의 이러한 전통 위에 서 있다. 황석영은 근대이후 한국에 유입된 기독교와 맑스주의, 미국과 소련을 손님으로 보고 있다. 한국에서 있었던 분쟁과 전쟁(질병)을 이들 손님이 원인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손님으로 인해 생긴 민족간의 갈등과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 '씻김 굿'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황석영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소설을 한 편의 '굿'으로 구성하고 있다. 전통 극의 12마당 형식을 차용해 소설의 순서를 12개의 굿 순서로 나눴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살자와 피해자, 과거와 현재가 서로 화해를 하게 된다. 황석영은 굿의 형식을 빌려 우리 사회의 화해를 말하고 있다. 사실 한국에서 과거의 비극은 결코 화해 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만 인식되어 왔다. 5공화국이 끝나고 지금까지 학살자와 피해자가 진심 어린 화해를 한 순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대부분 학살자 혹은 권력자의 일방적인 '사과'를 피해자들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을 뿐 진정한 의미를 '사과'는 받아 본적도 해본 적도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과와 용서'의 전통이 전무한 한국 사회에서 황석영의 『손님』은 중요한 화두를 제시해 주고 있다. 이제부터 『손님』의 줄거리를 따라가며 황석영이 제시한 '화해'의 방법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미국에서 목사로 지내는 요섭은 분단 후 40년만에 이루어진 고향 방문에 기대와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형 요한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요섭은 형이 마지막까지 품고 죽은 고향에서의 사건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북한 방문 후 특별히 고향과 친척을 방문할 생각이 없었던 요섭은 안내원의 강요와 일말의 기대감으로 고향에 남아 있던 친척을 방문하게 되고 요섭의 가족이 고향을 떠나게 된 사건을 기억해 낸다. 요섭의 기억은 단편적으로 떠오르고 당시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이 귀신처럼 나타나 사건을 설명해준다. 이러한 방식은 굿이 진행되는 과정, 즉 굿의 진행에서 각 원혼들이 나타나 자신의 원한을 말하는 방식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황석영은 당시 신천 학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을 모두 들려준다. 요섭은 신천에서 중간 지주의 아들로 자랐다. 신천은 조선말에 이미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지주를 중심으로 개종한, 기독교의 전통이 오래된 곳이었다. 요섭의 집안 역시 기독교 집안이었다. 그러나 신천의 기독교 세력은 지주를 중심으로 한 소위 부르조아의 종교였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소작인과 하인들 중 다수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소설의 주요 대립 인물인 요한과 순남이 형은 이러한 신천의 상황을 대변해 주는 인물들이다. 요한은 모태신앙을 받은 기독교인이자 지주 계급의 아들로서 유산계급을 대표한 반면 순남이 아저씨는 소작인의 아들이고 일제시대 광산에서 맑스주의를 접해 해방과 함께 신천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한 무산계급의 이해를 대변해주는 인물이다. 해방이후 북쪽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기독교와 지주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당시 김일성 정권에 비협조적이었던 신천의 기독교 세력은 선거를 방해해서 탄압을 받게 되고 지주로서의 권리 역시 박탈당한다. 요섭의 집안 역시 탄압의 대상이 된다. 요섭의 집에서 머슴을 지내던 이찌로 아저씨는 해방 이후 사회주의 교육을 받게되고 지주 탄압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소작인들은 농지 개혁으로 세력을 키우게 되었고 지주(기독교) 세력과 대립하게 된다. 한국 전쟁이 터지게 되고 미군의 개입으로 북한이 퇴각하게 되자 신천은 잠시 무정부 상태를 맞이하게 된다. 그 와중에 산 속에 숨어있던 기독교 청년들이 무장 봉기해 신천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기독교 세력은 무자비한 학살을 실시한다. 당시 사회주의 동맹에 참여했던 마을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광폭한 나날을 보낸다. 이들의 학살은 점점 대담해지고 급기야는 의견차이와 불안으로 서로 대립하게된다.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자 한국군과 미군은 다시 퇴각하게 된다. 이때 학살을 자행한 기독교 세력은 미군과 함께 신천을 빠져나왔고 요섭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신천에서 일어난 학살을 요섭에게 말해주던 혼령은 모두 함께 모여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형 요한의 혼령과 순남이 아저씨, 이찌로 아저씨의 혼령이 함께 사라지며 서로 화해했음을 암시해준다. 요섭은 요한의 뼛조각을 고향땅에 묻으며 신천에서 있었던 비극을 용서하고 화해를 빈다. 황석영은 『손님』에서 다양한 서술자를 사용한다. 전체적으로 요섭이 소설의 진행을 이끌어가지만 부분적으로 요섭의 형 요한과 순남이 아저씨 등 당시 학살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던 사람들의 시점에서 사건을 서술한다. 특히 학살자의 시각과 피해자의 시각을 함께 서술해 다양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 한국전쟁은 다양한 가치관이 투영된 사건이다. 그래서 단순히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조아의 대결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친일파와 민족주의자, 친소주의자와 친미주의자, 근대주의자와 전통주의자들의 대립이 뒤섞인 전쟁이었다. 황석영은 한국전쟁의 다양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소설의 서술을 다양하게 구성해 놓았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당시 학살을 인정하고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황석영은 『손님』에서 과거 학살에 참여했던 여러 인물의 혼령을 등장시켜 서로의 입장을 이야기하게 만들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만든다. 황석영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화해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요섭이 신천 학살 기념관에서 신천 학살이 미군에 의해 저질러졌다란 설명을 듣고 의아해 하며 안내원에게 물어본다. 그러자 안내원은 지나간 일은 다 묻어버리자란 말을 한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신천 학살을 미군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그리고 신천 사건을 미제에 저항하기 위한 선전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황석영은 이러한 과정이 결코 과거와 화해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진실을 왜곡시켜 잊어버리는 것은 진정한 화해가 아니라 또 다른 비극의 불씨를 남겨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석영은 아무리 악몽같은 과거라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해 가는 과정을 통해 화해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황석영의 『손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다. 해방이후 많은 민중들의 저항과 지배 권력의 탄압이 있었던 한국 사회에서 황석영이 『손님』에서 제시해준 화해의 방법은 우리가 앞으로 실현해야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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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없는 이데올로기가 남긴 과제 ba**naoe | 2003-08-01 | 추천: 1 | 5점 만점에 2점
황석영이 베를린에 체류하던 시절,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목격하면서 구상하기 시작하였다는 「손님」은 1950년 전후의 공간 속에서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졌던 미군의 양민학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기독교와 맑스주의에 대한 저자의 소설적 통찰로 뻗어갔다고 생각한다. 「손님」이라는 제목에 대해 작가는 서문에서 그 의도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천연두를 서병으로 파악하고 이를 막아내고자 했던 중세의 조선 민중들이 '마마' 또는 '손님'이라 부르면서 '손님굿'이라는 무속의 한 형식을 만들어낸 것에 착안해서 나는 이들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손님'으로 규정했다." 전쟁 당시 미국으로 떠난 류요섭 목사와 그의 형 류요한 장로의 사무친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우리가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채 받아들인 두 가지 사상,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 타의에 의하여 지니게 된 근대성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소설을 읽으며 새로웠던 점은 물론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삼아 소설을 전개한 그 형식도 물론이지만, 시각과 시점을 자유롭게 전환시키는 묘사방식이 더욱 놀라웠다. 황석영은 시각과 시점을 하나로 고정시키지 않고 서로 교차시켜 작품을 끌어가는 화자가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등장인물이 함께 이야기의 숨겨진 진실을 다면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찾아보니 이런 형식이 러시아의 문학이론가 바흐친이 말했던 '대화적' 소설에 가깝다고 한다. 내가 작가의 이러한 소설 전개방법이 멋졌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플롯전개에 있어 매끄러웠다거나 잘 소화해냈다는 소박한 이유가 아니다. 「손님」에 있어서 이러한 방식이 매우 '적절'했다고 생각하고, 이 부분을 작가가 소설 기획에서부터 주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작가가 결국 말하고자했던 식민지와 분단을 거치며 우리가 받아들이게된 기독사상이나 맑스주의 그리고 근대성 등이 아직까지도 논의가 채 끝나지 않은, 더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라는 것을 전하기에 대화적 형식은 매우 그럴듯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며 실체도 없는 그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새삼 느껴보았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악몽과 지옥을 경험해보며 겉보기에 멀쩡하고 평안하기만 한 오늘의 현실이 그 옛날의 지옥을 딛고 서 있는 사상누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위를 돌아보게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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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역사적 화해의 손길을 낼 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sy**pus | 2001-08-06 | 추천: 1 | 5점 만점에 3점
난독(難讀)을 하는 편인데, 유독 고전들과 문학작품들은 읽어보지 못했다.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전이야 그 깊이를 헤아릴 깜냥이 못되어서 그런 것이지만, 문학작품은 글쎄 메마른 감성 때문에 쉽게 읽지 못하는 걸까? 그나마 요즘은 사람이 되어 가는 지 소설은 들척이게 되는데, 여전히 시를 읽는다는 것은 고역이다. 그래서 여태껏 황석영을 읽지 못했다. "삼포 가는 길"은 엉겁결에 "무기의 그늘"은 건성으로 본 정도일까? '황구라'로 소문난 입심이라는데 이야기꾼으로서 그의 재능을 난 위 두 권의 책에서 못 찾았다. 하지만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 이 책은 잡은 그 순간부터 단 한번의 쉼 없이 끝까지 다 읽어 버렸다. 한국전쟁. 불행인지 다행인지 적어도 아직까지 이 전쟁에 대한 간접기억이 없다. 우리 가족사에서 전쟁이 남긴 상처를 아직까지 듣지 못했다. 수많은 월남집안의 식구도, 쉬쉬하고 산 월북집안의 식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인척 중 전쟁통에 죽었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좋은 쪽으로 본다면 난 전쟁의 기억이 가져오는 해석의 짐에서 한발 물러설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전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전쟁 자체의 매력보다는 연구자였던 박명림 선생 때문이었다. 탁월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박박사'라는 어정쩡한 호칭에 머무르다 지금은 하버드에 가 있는 선생님. 그의 수업은 1학년 대학생에게 경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데는 0점인 수업이었지만, 수많은 이론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내며 입심 좋게 설명하면서, 술자리에서 진지한 고민을 들어주던 기억을 난 지울 수 없다. 그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을 시작으로, 이 전쟁이 우리에게 어떤 상흔을 남긴 것인지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역사는 사실의 기억임과 동시에 기억의 방식이다. 그것은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와 사실을 사실로서 기억하느냐의 두 가지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기억의 나약함은 그것의 순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왜곡과 변질이 쉽게 된다는 점이다. 즉 역사는 왜곡과 변질 가능하다는 면에서 허약하다. 집단의 기억을 조작하는 것은 약간의 시간을 걸리지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소설의 소재가 되는 "신천의 학살"을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 미군의 만행으로 규정하고 선전한다. 그리고 많은 수의, 당시의 생존자를 제외하고, 사람들이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살아남은 자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이니 그것을 어떻게든 봉해버리고 싶었을테고,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상대가 미제가 되어버린 것이고. 동족끼리 그럴 수는 없었다는 자기 최면으로 거짓이 역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진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요섭은 죽어서야 고향땅 황해도 신천에 돌아온다. 그의 유골 일부를 수습해온 목사 동생 요한은 망설임 끝에 고향을 다시 찾는다. 형이 살아서는 결코 고향에 돌아올 수 없었던, 이유는 그에게 옛날 동리 사람들의 귀신이 나타나면서 조금씩 밝혀진다.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의 이야기의 대화를 통해 진실은 조금씩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카인의 후예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잔악한 짓을 했는지 말이다.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가해자와 피해자(구분이 가는지는 모호하지만) 그리고 관찰자가 서로의 시선을 교차하면서 해방이후 그리고 전쟁 중에 기독교인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고, 서로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화해의 길로 접어든다. 이러한 형식은 최근 읽은 『추락하는 여인』이라는 sf소설에서 이미 얼추 비슷하게나마 보았기 때문에 '새로운 리얼리즘의 형식'이라는 말은 새롭게 들리지 않았다. 이러한 형식을 택한 작가의 고뇌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결국 이 전쟁이 "서로"의 이야기임을 인식해야한다는 것이 아니겠나 싶다. 관제역사는 한국전쟁의 책임을 '김일성'에게 돌린다. 그가 개전의 결정을 내린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공간물(公刊物)의 역사는 저간에 깔린 '통일민족국가수립'의 욕망은 분석하지 않는다. 살육과 파괴의 결과만 물을 뿐이다. 우리에게 해방의 과제가 '통일민족국가수립'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전쟁까지 치루고, 해방으로부터 50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 와서 "통일"의 당위성은 많이 약하다는 생각이지만.) 그 하나의 방법이 전쟁이었을 뿐이다. "한국전쟁=남침"의 교과서 내용은 여러 가지 갈래길에서 전쟁을 택하게 된 이유를 사상시켜버린다. 전쟁의 당사자로서 북한의 고민을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달의 한편만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개입된 지난 세월의 역사는 한편만 보도록 강요해왔다. 이는 비단 거시적 차원의 문제뿐만 아니다. 전쟁의 국면마다 우리는 한 쪽에서만 모든 것을 재단해왔다. 보도연맹원학살, 빨치산 토벌중의 민간인 학살, 부역자 처벌 문제 등. 우리의 기억에는 "빨갱이들에 의한 애국우익지사"의 학살만 남아있지, 우익들의 "북한인 또는 좌익인사 학살"은 없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빨갱이"일 뿐인가? 전쟁으로부터 5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제는 전쟁을 '적아'의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입장에서 '너와 나'의 관계에서 볼 수 있을 때가 아닐까?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 가족사에 전쟁의 분노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을 쉽게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분노가 사회전체의 차원에서 계속될 필요는 없다. 미래지향적이고 평화지향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다. 이 소설에서처럼 서로 모여서 이야기한다고 쉽게 풀리지는 않을게다. 어떤 푸닥거리를 해야 서로의 죄가 씻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그 노력은 결국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할거다. 사회주의나 기독교가 바다건너 들어온 손님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는 손님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주체적 수용의 문제다. 한국의 토착적 기독교나 공산주의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 손님의 이름으로 한 행악은 고스란히 우리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불편한 과거와 화해하는 길은 '너와 나, 우리'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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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대립 hs**9 | 2016-11-10 | 추천: 0 | 5점 만점에 3점
황석영의 소설이나 조정래의 소설의 주요 테마는 한민족의 슬픔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작품들도 많지만, 작가들의 초기 작품들은 민족의 애환을 그리고 있는 것이 많다.

「손님」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대립을 표방하지만, 결국 가진자와 못가진자와의 대립이 서로 다른 이념을 통해 표출되고 있는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슬픈 것은 서로 다른 것을 추구하다 죽음으로까지 몰고가는 잔혹성이었다. 옳고 그름이 아닌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로 죽여야만 했던 과거사가 애통할뿐이다.

해방 후 우리 스스로가 일어서지 못하고 타국에 의해 갈리어지고 서로 증오하게 되는 과정이 애처롭기만 했다. 서로 발가벗고 커왔던 동네 친구들이었는데, 왜 편을 나뉘어 싸워야만 했는지...

이제는 이런 아픈 과거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한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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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황석영 km**e | 2016-08-18 | 추천: 0 | 5점 만점에 4점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은 순식간에 바뀌기도 한다.

특히 전쟁이나 혁명기에 그렇듯이...

6.25를 전후한 이념의 시기에는 더욱 그랬고 계급투쟁은 결국 서로를 죽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가까운 이웃마저도...

황해도 지역에서 살던 그들이 그랬다. 소작떼기거나 하인이었던 자들 어중이 떠중이에 머슴 건달 따위들이 북조선을 소련이 점령하고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특히 전쟁이 나면서 완장차고 돌아설친다. 특히 토지를 무상몰수 무상분배하는 과정에 더욱 광분하기도 한다. 기독교신자 또는 지주집안들은 다 도망갔지만 그래도 남으로 피난 가지 못하고 숨어 지내던 이들은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다시 봉기하고 빨갱이들을 처죽인다. 청년단들이 들고 일어나 여러지역을 수복하는데... 목표는 같았지만 실천양식이 달랐던 두 친구 사이가 그랬다. 미군이 오기 전 마을을 점령한 청년단은 빨갱이 여교사를 성 노리갯 감으로 삼는데... 이를 본 기독교 청년은 그 친구를 발로 차고 그 여선생을 즉결처분함으로써 모욕을 모면시킨다. 인간이 할 짓이 아니기도 했겠지만...전쟁은 광기를 부리니까......

이일로 둘은 서로의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들까지도 죽이게 된다......  

 

"동무들 봉건이 뭐이오? 왕이 저를 지켜줄 한줌도 안되는 신하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고 또 그 아래 벼슬아치들과 양반을 시켜서 백성들에게 소작하도록 하는 제도요... 동무들은 이제 동네 촌장이나 어르신 상전들에게 내 땅을 내놓으라고 해야 하오. 그들은 인민의 적임을 잊지마오. 인정을 거스르지 못하면 평생 그들의 노예가 될 뿐이오....칼로 베지 않으면 해방은 영영 오지 않소"

그들은 그것을 실천했고, 그것이 살륙의 원인이 되었고 전쟁이 되었고 오늘날의 분단국가가 되었다......

 

제목은 왜 손님일까?

옛날에 천연두를 마마라고 또는 손님이라고도 해서 손님굿을 해야 마마를 이긴다고도 생각했던 시절이 있다. 이 천연두는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기고 했다. 소설의 배경에 나타나는 기독교와 공산 막시즘은 다 서양에서 온 것이다. 무서운 것이다. 그로 인해 민족은 무서운 일을 겪게된다는 의미로 제목이 손님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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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맺힌 역사, 오십년만의 해원 ga**la10 | 2012-10-29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피맺힌 역사,오십년만의 해원-
『손님』을 읽고


들어가는 말
“너 이새끼 우리 땅 뺏구 천년만년 리당위원장 해먹을 줄 알았네?”(본문 17쪽, 213쪽)을 읽는 순간 또 땅문제구나 느꼈다. 해방전, 또 해방직후 지주들과 소작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조정래님의 태백산맥에서는 아예 당시 빨치산의 활동을 소작쟁의로 규정한다. 땅을 잃은 사람들이 평등하게 잘 사는 사회를 위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 결국 빨치산 활동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여지없이 그 땅문제를 다루고 있다. 허나, 이는 종교와 체제의 충돌로 번지며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서 이념과 신념에 잘못 경도된 이들은 서로 죽이고 미워한다. 그렇게 오십년이 지났다. 피비릿내 나던 역사 현장을 다시 찾은 이는 당시 어린 꼬마였던 류요섭 목사다. 그는 자신의 형 류요한 장로가 고향 찬샘골에서 저지른 참상을 따라다니며 참혹했던 역사를 되짚는다. 이미 죽었지만 아직도 이승을 떠돌던 귀신들이 그를 따라다니며 인간이기를 포기한 광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본말 
1.극단의 삶
찬샘골에 함께 어울어져 살던 사람들, 아니 한 지붕 아래 살던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결국 죽이는 비극이 발생한다. 한쪽은 기독교인이고 한쪽은 공산당이다. 기독교인들은 공산당원들을 마귀, 사탄이라며 죽이고, 공산당원들은 기독교인을 반동, 인민의 적으로 부른다. 처음 갈등은 땅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천지가 개벽할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거다. 그게 무엇이냐, 조상 대대로 물려받아온 땅을 빼앗는 거야. 토지개혁이 실시되었지”(본문 123-124쪽) 류요한의 말이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빼앗으려는 자들에 대해 류요한은 분노를 일으킨다. 그것도 “소싯적부터 사타구니에 거웃이 날 때까지 한 마을에서 뒹굴어온 놈들이 안색을 싹 바꾸고”(본문 124쪽) 땅을 내놓으라니 더 미칠 지경이다.
    땅을 빼앗기고 가족이 위해를 당하자 류요한은 공산당에 대해 강경하게 맞선다. 요한은 일제때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요한의 할아버지가 처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대대로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 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얼마나 열성적인 기독교인인지 알 수 있다.“그 길루 집에 돌아와 대할마니가 뫼시던 성줏단지를 부세버렜다. 난 피양서 성경학교를 나와 목사 안수럴 받았다. 너이 오마니두 나허구 성경학교 함께 나온 목사 집안 딸이여. 너인 친가 외가 모두 하나님에게서 택함받언 백성덜이다”(본문 58쪽) 아무도 기독교신앙을 가지지 않던 당시 예수를 믿었으니 대단한 신앙임에는 분명하지만, ‘대할마니가 뫼시던 성줏단지를 부세버’리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열성적이며, 다른 문화에 대해서 배타적인지를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할아버지의 신앙을 요한은 이어받았다.
    “저들이 맑스의 자본론을 들이댄다면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었다. 이네 우리는 주님의 십자군이요 저들은 사탄의 세력이 되구 말았지. 이건 우리 할아버짓적부터 조선이 개화하면서 시작되었던 거야.”(본문 123쪽) 요한의 고백이다. 요한의 신앙은 이렇게 흑백논리로 이분법적이었다. 이렇게 잘못된 신앙이 신념으로 또 현실로 이어지면서 그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만다. 물론 요한에게만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공산당원들도 기독교인을 반동,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고 매우 싫어했으니까. 인민의 편에 섰던 순남이 아저씨는 “기독교 지도자라는 사람치구 지주집안 아닌 사람이 있나 말이야”(본문 125쪽)하고 말하는데, 바로 이것이 기독교인 삶의 현실이었다. 그들은 지주의 입장에서 소작인들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았고, 소작인들이 어느날 갑자기 평등사회를 외치며 땅을 몰수해가자 사탄으로 몰아가며 죽이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미국 제국주의가 공산당, 빨갱이가 모두 사탄이기 때문에 죽여도 된다는 흑색선전을 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잘못된 신앙에 현실적인 아픔까지 더해진 류요한은 그야말로 광인이 된다. 자신과 한 집에서 지내던 이들을 자기 손으로 처단한다. 그런데, 피는 피를 부른다고 했을까? 나중에는 그의 친구 상호와 함께 서로 친구의 가족들을 죽이는 참극을 벌인다. 인간성의 끝을 보여준다. “이제 우리의 편먹기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사탄을 멸하는 주의 십자군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시험에 들기 시작했고 믿음도 타락했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짜증이 나면 에이 썅, 하고 짧게 씹어뱉고 나서 상대를 죽여버렸다”(본문 246쪽) 사탄과 마귀를 쫓던 총이 이제 서로를 향한 것이다.
   
2.비극에서 꽃핀 참된 인간성
류요한을 비롯한 기독교인이 저지른 비극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다. “처음 창고 문을 열어보니 문 앞에는 어린이들의 시체가 겹겹이 있었는데 모두 문으로 나오자고 애쓴 흔적이 분명합니다. 얼어죽고 굶어죽은 시체와 함께 불에 탄 시체도 많았습니다. 그 대부분 어린애들의 손톱은 전부 빠지고 피투성이가 된 채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이 죽기 직전까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애를 쓰다가 그만 쓰러진 흔적임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습니다.”(본문 105쪽)
    이렇게 말도 안되는 상황속에서 인간성이란 것에 고민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요한, 요섭의 삼촌 안성만이다. 그는 기독교인이면서 당원이다. 많은 사람이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에서도 인간성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양쪽으로부터 모두 인정을 받았다. 당시 사건에 대한 성만의 진술이다. “그때는 우리 양쪽이 모두 어렸다고 생각한다. 더 자라서 사람 사는 일은 좀 더 복잡하고 서로 이해할 일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되어야만 했다... 야소교나 사회주의를 신학문이라고 받아 배운 지 한 세대도 못 되어 서로가 열심당만 되어 있었지 예전부터 살아오던 사람살이의 일은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본문 176쪽) 기독교와 사회주의 모두가 그 본질을 잃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서로가 열심당만 되어 있었다’는 그의 진술이 참으로 명확하다. 이미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악감정만 남았을 뿐, 사람에 대한 예의를 잃어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또 요한의 아내, 요섭의 형수역시 역경속에서 올바른 인간상을 제시한다. 류요한이 저지를 과오를 고스란이 받아내며 살면서도, 이렇게 말한다.“사람이 원체가 인생에 고난언 타구나는게라. 성님이(류요한) 죽인 사람덜두 다아 영혼이 있대서. 그이덜 사탄이 아니대서. 류요한이두 사탄이 아니대서. 믿음이 삐뚜레젰디... 시동상. 땅에 평화 하늘엔 영광 머 기런 거나 생각하오. 세상이 죄루 가득 차두 사람이 없애가멘 살아야디”(본문 153쪽) 류요한의 삶이 그릇된 신앙에서 나왔음을 알고, 올바른 삶은 고난 속에서도 죄를 없애면서 서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오십년을 남편 때문에 죄인처럼 살아온 할머니의 고백치고는 너무도 성인군자같은 이 말에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3.해원
류요한의 동생 류요섭이 고향을 방문한 것은 고향을 그리워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참상을 바로보고 억울한 이들을 해원하기 위함이다. 요섭이 고향땅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 동안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들과 형의 혼이 모두 모여 서로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리고 함께 사라진다. “이제야 고향땅에 와서 원 풀고 한 풀고 동무들두 만나고 낯설고 어두운 데 떠돌지 않게 되었다. 간다. 잘들 있으라”(본문 250쪽) 이말을 남기고 류요한과 나머지 영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살아서 서로 죽이며 싸운 이들이 죽어서, 오십년만에 다시 만나 서로 마음을 푼 것이다.
    그렇게 죽으면 다 한데로 모이는 것을 서로가 조금만 더 양보하며 이해하며 살면 되는 것을 죽여야만 했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삶의 자리라 하겠다. 책에서는 한맺힌 모든 이들을 위한 뒤풀이를 마련했는데, 그 소리가 참 구수하다. “오늘 다 이 정성 들인 끝에/ 이 터전에 터주루 있던 귀신 집주루 있던 귀신/ 많이 먹구 이러니 말이 없구 저러니 탈이 없이/ 오늘은 고픈 배 불리구 마른 목 적셔 가구/ 진 거는 먹구 가구 마른 거는 싸가지구 질빵 걸어 메구 가구/ 여귀는 똬리 바쳐 이구 가구/ 동자귀는 오질 앞에 싸가지구/ 인정 받구 노자 받구 좋은 데루 천도를 허소사”(본문 259쪽)

나오는 말
다시 한 번 기독교의 굴절된 모습에 분노하면서 마음을 쓸어내린다. 홍익인간마냥 적을 규정하고 사탄으로 몰아붙이는 기독교의 배타성은 분명 개선되어야할 구시대의 유물이다. 허나, 이 책은 기독교를 비판하고 몰아세우는 것이 주목적은 아니다.
    아프고 쓰린 우리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전쟁과 이념의 대립 속에 인간성이 상실되고 있는 현장을 바로 볼 것이며, 그러한 대립이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할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갈 사람덜언 가구 이제 산 사람덜언 새루 살아야디. 저이 태 묻언 떨얼 깨끗허게 정화해야디 안카서?”(본문 251쪽) 하는 말처럼, 이제 우리 사회를 인간답게 하는 것은 후대인들의 몫이다. 어려운 시기를 비극적으로 살았던 이전세대의 과오를 바로잡고 새롭게 대가오는 역사의 물결을 올곧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몫인 것이다. 

이 리뷰는 추억의 백일장 : 가을 응모작 입니다. 백일장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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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조금만 더 go**zoo3 | 2010-03-17 | 추천: 0 | 5점 만점에 3점
자리를 옮겨서 땅바닥의 흙을 파냈다. 두어 줌 파내니까 축축하고 나뭇잎 섞인 흙이 나오다가 한뼘쯤을 더 파내니 그제야 부드럽고 바알간 속흙이 나왔다. 그는 잔돌멩이들을 골라내고 손바닥으로 자리를 다진 다음에 간수했던 모피 주머니를 꺼냈다. 가죽끈을 풀고 안에서 작은 도장처럼 생긴 형의 뼛조각을 꺼내어 구멍 속에 놓았다. 요섭은 그 위에 흙을 덮는다. 그리고 아기를 잠재울 때처럼 손바닥으로 땅 위를 토닥이며 두드려주었다. 형님 이제야 고향에 돌아온 거요, 하고 요섭은 소리를 내어 말하고 싶었다 -<<손님>>중에서-
 

분단의 현실을 휴머니즘과 리얼리즘으로 그린 소설이라고 하여 대단히 기대를 갖고 만났던 책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좀 실망했다..

 

물론 이 책에서 분단의 아픔 이산가족의 슬픔을 그린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나도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왜인가?

왜인지 나는 무언가가 아쉽다는 생각이

책장을 덮으면서도 내내 들었다.

 

분단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어떤가?

막연한 아픔 막연한 슬픔...

물론 작가는 이 틀을 좀 께고자 하였다

어쩔수 없는 시대의 의식과 외세 그리고 우리의 나약함을

통틀어서 그는 균형적 시각으로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나의 욕심인가?

계속 조금만 조금만 더 그가 나아가 주길 이야기 해주길 기다린것은...

 

난 이책을 읽고 분명 울었다.

그리고 분단의 아픔과

한인간의 기구한 인생과 우리사회의 문제점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만 했던 시대의 흐름에 따라

흘러갔던 인물들...

 

그러나 조금더 조금더 생각해다오..

조금만 더 나아가 다오라는 생각이 드는건 왜인가?

 

대체 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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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광기가 번득이는 책 bl**jim | 2009-04-01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작가 황석영의 책에는 영혼이 등장한다.
지난해 읽은 <바리데기>에 이어, 최근 읽은 책 <손님>에도 이른바 귀신이 나온다.
차마 저승으로 가지 못한 영혼을 등장시켜 한(恨)을 강조하는 듯하다.
 

이 책의 주인공은 북한 출신 류요섭 목사이다.
형 요한과 함께 미국에서 산다. 
어느날 형이 죽고 그 영혼으로 요섭에게 나타난다.
한을 풀기 위해 요한은 50년 만에 북한을 '손님' 자격으로 방문한다.
마치 남의 고향을 방문한 것처럼 말이다.

형의 뼛조각을 들고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 이 책의 줄거리이다. 

 

그러나 그의 귀향은 포근하지 않다.
고향에서의 기억은 한국전쟁으로 얼룩져있기 때문이다.
극한 상황에서 튀어나오는 잔인한 광기가 이 책에 잘 묘사되어 있다.
특히 <바리데기>에서처럼 북한 사투리를 그대로 옮겨 놓아 사실감을 더했다.
북한 사투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 입맛에는 다소 껄끄러울 수 있겠다 싶을 정도이다.

 

조금 광의의 시각에서 보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남북 분단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다.
북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강요된 상황이 첫 번째 아픔이다.
어렵사리 고향땅을 밟았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감시받는 듯한 이물감이 그 두 번째이다.

무엇보다 잊히지 않는 한국전쟁 당시 인간의 추악함과 잔인함이 가장 큰 아픔이다.

 

이런 아픔은 책 <바리데기>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그러나 유사한 소재 때문에 책 <손님>의 '신선도'가 다소 떨어지는 것은 유감스럽다.
남북한 상황을 예리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저자가 내놓을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다음 작품에서는 신선감이 아릴 정도로 차갑게 느껴지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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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ta**eong12 | 2009-03-07 | 추천: 0 | 5점 만점에 4점
현재와는 좀 동떨어진 얘기 같지만,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이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다보니 전쟁이라는 것이 막연하게 생각되는것이 사실이다. 출판된 년도는 조금 오래 되었지만 이 책을 통해 이산가족의 아픔과 전쟁을 겪었던 분들의 심경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도 어딘가에선 만나지 못하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으리라!

 작가의 말 중에서....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에 우리가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하여 지니게 된 모더니티라고 할 수 있다. 전통시대의 계급적 유산이 남도에 비해 희박했던 북선지방은 이 두 가지 관념을 ’개화’로 열렬하게 받아들였던 셈이다. 이를테면 하나의 뿌리를 가진 두 개의 가지였다. 천연두를 서병으로 파악하고 이를 막아내고자 했던 중세의 조선 민중들이 ’마마’ 또는 ’손님’ 이라 부르면서 ’손님굿’ 이라는 무속의 한 형식을 만들어낸 것에 착안해서 나는 이들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손님’ 으로 규정했다.

- 이 책의 제목이 이렇게해서 ’손님’ 으로 정하게 되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만해도 제일 무서워했던 것이 ’마마’ 라고 들었다. 그만큼 이 ’손님’ 으로 인해 무서운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 작품은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하여 씌어 졌다. 여기서는 굿판에서처럼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등장하고 그들의 회상과 이야기도 제각각이다. 나는 과거로 떠나는 ’시간여행’ 이라는 하나의 씨줄과, 등장인물 각자의 서로 다른 삶의 입장과 체험을 통하여 하나의 사건을 모자이크처럼 총체화하는 ’구전담화’ 라는 날줄을 서로 엮어서 한폭의 베를 짜듯 구성하였다. 지노귀굿은 망자를 저승으로 천도하는 전국적인 형식의 ’넋굿’ 이다. 지방에 따라서 진오귀, 오구, 지노귀 등으로 불린다. 아직도 한반도에 남아 있는 전쟁의 상흔과 냉전의 유령들을 이 한판 굿으로 잠재우고 화해와 상생의 새세기를 시작하자는 것이 작자의 본뜻이기도 하다.

- 황석영 작가가 말하고 있듯이 이 책의 구성은 현실이 먼저 등장하고, 이어서 현실의 요섭 목사가 북한을 방문하면서 과거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과거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진행되면서 드디어 현실에서 이야기하던 것들의 의문이 풀리기 시작한다. 또한 죽은 망자들이 나와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렇게 과거에 관한 이야기와 망자들의 이야기 모두가 끝나면서 이 책도 마지막을 준비한다. 마지막에 서로 같은 편인줄만 알았던 친구들이 어느 순간부턴 적이 되고, 결국 이들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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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sa**tear | 2008-03-16 | 추천: 0 | 5점 만점에 4점
며칠 전부터 이 책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내내 올렸다 지웠다 하면서 책장만 넘기고 있다.
무슨 말을 하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답답한 주제이기도 하고, 이런 일에 무덤덤하지 못한 관점탓이기도 하겠다.

한 종교가 다른 종교문화권으로 진입할때 포교자와 군대가 짝을 지어 들어가는 일은 주지의 사실이다..
기독교 문화권이나 이슬람문화권이나 혹은 불교문화권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그 종교의 뜻과는 다른, 그 종교의 힘을 발판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이들의 시도이기도 하겠지만)
피를 보지 않고 외래종교가 다른 문화권에 안착되는 일은 드물었다. 눈에 보이는 물산의 이득이나 정치적인 파장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고 끈질기게 저항하는 것이 바로 종교적인 갈등이다.
우리역사에 등장해서 갈등을 만들고 마침내는 민중의 정서기반에 안착하게된 불교나 기독교도 마찬가지였다. 맨 처음의 그들은 "순교"를 통해서 처음 뿌리를 내린다.
따지고 보면 어떤 종교보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등장해서 순식간에 그 사회계급의 전복을 이루어낸 이념(맑스주의)도 역시 비슷한 선상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아니다 책만 이야기하자. 머리 아프다.

이 외래의 손님이 다만 종교적인 갈등뿐만이 아니고 또 다른 얼굴의 손님, 이념으로 맞부딪치면서 격렬하게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폭발했을때 거기서 고스란히 당해야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 책이다.

밖에서 들어온 손님인 기독교와 맑스주의가 해방 직후 북한 신천땅에서 격렬하게 부딪히고 갈등을 겪을때, 거기에 휩쓸려 끔찍한 희생물이 되고만 사람들.
바깥에서 들어온 그 두 손님은, 갈등없이 공존하던 토속신앙의 주인들을 몰아내고 각자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그것을 힘으로 갖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서로 저지른다.

"북괴공산당"의 이름이 우리에게 주입한 이미지. 섬뜩한 총칼과 무자비한 학살.
아..그런데 다만 우리는 "희생자" "순교자"일 뿐이었나.
어떤 당위의 재고나 갈등의 과정없이, 한무리로 다정히 살면서 평화롭던 한 마을이 무자비한 살육과 번갈아 거듭되는 복수로 끔찍한 역사의 증거물이 되어버리고 그 상처는 수십년이 흐른 후에도 귀신으로 중음을 떠돈다.

고향을 찢어버리고 잔인하게 이웃을 학살하여 두고두고 그 고향의 "학살박물관"의 주인이 되어버린 형.
그 동생이 불현듯 고향을 방문하기 직전에 형은 과거와 화해를 거부한 채 죽음을 맞는데, 죽은 후에 귀신이 되어서 동생과 고향길을 동행한다. 한조각 뼈로 동생의 옷춤에 담겨서.
형과 형이 동무했던 손님들의 흔적은 동생의 상상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참혹하게 남아서 생생한 증거로 뒷사람들에게 읽혀지고 학습되고 있었다.
형이 저지른 과오를 따라가면서 동생은 한풀이 굿을 여정을 통해서 벌이고, 시공을 넘나들며 함께하는 지나간 이들은 현재의 일상과 관념속에 공존하면서 자기들의 말을 담담히 풀어낸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자꾸 뒤를 돌아다보게된다.
서늘한 기운이 등 뒤에서 가만히 서 있다.
고개를 갸웃이 하고 나를 응시하는 그 뜬것은, 신천의 그때 그 사람들이고, 고향을 떠나 이국에 가서도 평화를 얻지 못한 불면의 죄인들이고. 잊고 외면해가는 우리의 귀신들이다.

이 작가의 책은 쉽게 말하기가 정말 힘겹다.
굳은 심지로 또박또박 걸어가면서 눈을 부릅뜬 작가.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선지자. 한을 품은 민중의 넋을 위로하고 구천으로 보내는 무당의 모습을 나는 이 사람에게서 본다.
(그러고보니 이 책은 황해도 진노귀굿의 열두마당 얼개로 씌여진 것이라 한다. 그러게 작가는 무당이어야 한다니까.)

책을 말한다 하고 정작 책 이야기는 하나도 못한 것 같다.
그냥... 읽어보라고, 그래보시라고 권할 밖에.
이 책에서 귀신들은 사람보다 무섭지 않다.
이념이나 종교보다 무서운 사람들이 우리 앞에는 다시 없으리라고 장담 못하는 이 땅이 나는 더 두렵다..

정말 두렵다...

그런데...
지금 우리 옆의 그 손님이 누구지?
주인인 우리를 밀어내고 들어와 우리의 생살을 찢고 있는, 저 손님은...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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