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3

0204 이제는 말할 수 있다 57회 - 신천 사건


200204 이제는 말할 수 있다 57회 - 망각의 전쟁, 황해도 신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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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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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21
74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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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4월 21일 (일) / 제 57 회

<망각의 전쟁 - 황해도 신천 사건>  

살면서 그런 안개는 처음 봤어. 
느닷없이 발 밑도 잘 안 보일 정도로 잿빛 안개가 끼었어.
그런데 해가 뜨고 안개가 서서히 걷혀서 보니 시체가 얼마나 많은지...
- 신천 출신자 인터뷰 
중.

■ 남과 북의 엇갈린 증언! 미군 학살인가, 반공 의거인가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
분명히 그 곳에서는 수많은 민간인들의 학살이 있었다. 
하지만 전란 속에서 벌어진 그 희생에 대해서 남과 북은 서로 상반되는 견해를 보이
며 아직 정확한 사실 관계조차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전장의 바깥에서 이루어진 민
간인들의 대규모 희생. 한반도에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극단적으로 치달았던 시
기, 신천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남북 생존자들의 증언과 신천에 들
어간 미군의 인터뷰, 남북한 전사 기록과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문서들을 
통해 황해도 신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본다.

■ 저는 신천군 화약 창고에서 살아 나온 000입니다. 

“서울을 탈환한 미군들이 38선을 넘어와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신
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5,383명의 무고한 양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지난 해 11월 조선중앙방송에서는 황해도 신천군에서 6.25 전쟁 중 살해된 것으로 
보이는 59구의 유해가 새로 발굴됐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1950년 10월 유엔군의 북
진과 함께 신천 지역에 주둔했던 미군이 저지른 학살의 증거라는데... 과연 한국전
쟁 중 신천에서 미군은 또 한번 노근리에서와 같이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총구를 겨
눴는가? 학살 사진들과 희생자들의 유품을 전시한 북한의 <신천 박물관>, 유해 발
굴 당시 북한의 중계 방송 장면, 당시 학살 현장에서 생존했다는 북한 주민들의 현
지 증언을 직접 들어본다. 

■ 월남한 신천 출신 봉기 가담자가 전하는 신천의 비극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노동당과 인민군에 대항한 우익 지하조직과 신천군민의 저
항이며 반공투쟁 사건이다.”

 신천 출신 월남자들은 북한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
전이 성공하고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하자 전세가 불리해진 공산
군들은 지주, 성직자를 포함한 우익 반동분자들을 처형했다. 이에 공산당에 반대하
는 우익 청년들은 10월 13일을 기해 반공 봉기를 일으킨다. 토지 개혁으로 인해 이
미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이 심화되어 있었던 신천에서 좌․우익의 충돌은 예견되어 있
었다. 그로부터 남북한 양쪽의 어떠한 공권력도 들어서지 않았던 두 달간, 신천의 모
든 치안은 봉기를 일으킨 반공 청년들의 손에 맡겨졌다. 곧 이은 빨갱이 색출 작업. 
밤낮으로 좌우익의 주도권이 바뀌는 혼란의 시기. 기준도 없는 이념적 잣대에 가족
도, 친구도, 이웃도 지켜줄 수 없었던 상황. 당시 봉기에 직접 참여하고 치안대 활동
을 했던 신천 출신자들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 최초 공개!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신천 사건 관련 문서들

 수많은 희생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남북한간에 교집합을 찾을 수 없었
던 황해도 신천 사건. 제작진은 한국전의 또 다른 축인 미군 부분에 대한 확인에 들
어갔다. 육군전사를 비롯한 각종 한국전 자료에 따르면 당시 유엔군 북진시 신천 지
역에 들어간 부대는 24사단 19연대. 북한이 주장하는 학살의 주범 미군 해리슨을 찾
는 작업과 함께 뉴욕에 있는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서 24사단 19연대의 전쟁 일지를 
확인했다. 월남자들이 주장한 10월 13일의 반공봉기는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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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 Kim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망각의 전쟁, 황해도 신천 사건'> (2002.04.21)

  • 인천상륙작전(9월15일).. 서울점령 사흘만에 국군은 38선을 넘었다. 미군, 유엔군도 합류.. 2주만에 평양함락이 눈앞이었다. 북한의 반공세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당시 주민(22세) "우익사상 가진 사람들이 지하운동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북에도 한독당이 다 있었어요. 김구선생 노선에 있어가지고 권총도 다 갖다주고, 운동하고, 다 월남하고 스파이가 오고가고 했어요."
  • 당시 주민(32세) "공격을 10월13일 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연합군이 입성하는 걸 기다릴 수 없었다. 시간이 급했다."
  • 당시 주민(3?세) "구월산에 봉화를 피운다고 했다고. 봉화를 피우면 신천, 재령, 저 나무리벌, 북율, 남율, 소호 할 것 없이 한꺼번에... 밤낮으로 이걸 보고 있어라. 내가 총을 보내면서 그랬다고.."
  • 인천상륙작전의 소식을 들은 북의 우익세력들... 그들은 북에서 토지를 몰수당했거나, 북정부의 비인간적인 대우, 못배운 하층 빈민들이 6개월교육만 받고 돌아와 노동당 간부로 권력을 행사하는 데 불만이 많았다. 이들 불만세력 중엔 김구 계열의 독립당 지하당 출신들도 있었다. 이들은 미군이 오기전에 미리 반공봉기를일으킴으로써 주도권을 갖고자 했다. 목표물은 신천군의 행정을 주도해온 인민군 노동위원회 청사.. 그날은 1950년 10월13일.. 13일의 금요일이었다...
  • 당시 주민(17세) "13일 저녁 6시, "국군 만세" 시내에서 그러고 불이 나고 야단났어. 봉기야! 난 정보가 있으니까 왔구나 하고 시내로 뛰어나갔다고.. 친구들이 총을 한 사람이 대여섯 정씩 메고 올라가더라고"
  • 당시 주민(24세) "대한민국 만세... 뭐 난리 났어. 올게 왔구나.. 삽시간에 흥분해서 동네가 야단이었어. 우리 형 뻘 되는 사람들이 벌써 공산당 잡으러 다니더라구.."
  • 넓은 평야와 농토, 철광... 만석꾼, 지주들이 많고 농토가 많고 먹는 걱정 안 하는 잘사는 동네... 신천... 그러나 해방후 대대적인 토지개혁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공산치하의 개혁은 지주와 성직자에게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땅이었다. 38선을 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 "소작해서 겨우 연명이나 하던 사람들은 얼마나 고마웠겠나? 부자들은 타지역으로 다 쫓아버리고... 고향에서 제일 못살고 학교도 안 다니는 애들 데려가서 간부교육 6개월 시킴... 사람으로 치지도 않던 애들이 간부라고 힘주고 다니니까 반발한 거다... 사회주의 정책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위협이었다.. 미움받는 이들은 미움받는 이들, 공산당 미워하는 이들끼지 의사가 통했다. 황해도 일대를 다 뒤집어엎으려고 마음먹었었다..."
  • 신천군 노동당 인민위원회를 접수하고 봉기에 성공한 우익!! 대대적인 좌익색출에 돌입하였으나 분노의 대상은 좌익만이 아니었다. 
  • "공산당원을 일일이 체크할 시간적여유가 없었다. 무조건 300명, 400명 방공호 안에 다 집어넣었다. 그런데 언제 인민군들 왔을 때 그 사람들 다 나올지 모르잖나. 나중에는 부대에 휘발유 넣고서 300명, 400명 다 몰살시켰어... 쏴 죽이고... 남쪽에서 올라온 피난민들은 다 옷 벗겨서 집어넣고 다 죽였어..."
  • 봉기군을 무자비한 광기로 몰아넣은 것은 복수심이었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안 죽였으면 우리도 안 죽였어.. 그 사람들이 입에 담지 못할 짓을 하니까 봉기 후에 악감을 품고 우리가 죽인 거야.. 나도 정치보위부에 잡혀갔어. 나까지 6명 잡혀갔는데 나 하나 살고 다 죽었어. 휘발유 뿌리고 태워죽였어."
  • 10월18일, 미군 24연대 19연대 3대대(원래 1,2대대 외에 패잔병을 모아만든 제3의 대대)가 평양진군 중 신천지역에 투입된다. 이들 미군은 신천에서 상당기간 주둔하면서 그 지역의 인구, 식량, 상황 등의 보고서를 상부에 계속해서 보냈다. 북한에 있던 우익세력이 미군 밑에서 일했다는 뜻이다. 미군 입장에서는 남한사람과 북한사람이 전.혀. 구분되지 않았고 모두가 잠재적 위험요소였다. 원래 남한에서 북한을 38선 이북으로 쫓아내는 임무를 부여받고 3~4일이면 전쟁 끝난다고 듣고 온 미군이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후 북한까지 흡수통일로 목표가 수정되어 전면전이 벌어졌고, 북으로 진군하는 미군에게 민간인은 잠재적 '적'이었다. 
  • 봉기와 혼란이 지배한 공간에서는 총든자가 곧 법이었고, 죽는자에게 변호권 따위는 부여되지 않았다. 학살을 당해도 그걸로 끝!! 
  • 총이 없는 힘없는 민간인들의 입장에서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강한 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지 못하였고 그것이 비극이었다. 남한정부는 점령지역의 치안을 반공단체에게 맡겨 우익세력을 넓히고자 했다. 내무부장관 조병옥은 반공단체와 월남 우익인사들에게 여비를 지급, 38선 이북으로 파견했다. 남한의 좌익인사를 제거하는 데 악질적이고 반인륜적이었던 서북청년단을 38이북의 치안을 맡기는 것이 남한정부의 정책이었다. 
  • 광복회, 서북청년단이 북한 주민들을 학살했다.. "빨갱이는 죽여야지.. 왜? 그넘들을 살려두면 우리를 열명씩 죽이니까. 그놈 하나 살려고 우리 열명, 스무명 죽어야 되니까 그넘들은 다 죽여야 된단 말이야!! 빨갱이들은 죽여야지!!"
  • 한마을에서 동거동락하던 이웃간에 살육전이 벌어졌다. 가르는 기준은 좌냐? 우냐? 피도 눈물도 없는 공격은 더욱 살벌한 보복을 불렀다. 
  • "빨갱이를 돕는 것도 빨갱이와 같이 취급해서 죽인다고 방을 써서 다 붙였어.. 내 친구가 빨갱인데 좀 살려주시오 하면 나까지 죽어.. 그런 세월이니까.. 자기 형을 대낮에 쏴죽였다니까.. 자기 형을.." 
  •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도 있지. 사상이 그래서 그냥 도매금으로 넘어간 사람도 많아요. 사실.. 하지만 별 수 없어. 치안대에서 공문이 나와.. 다 처치하라고.. 다 처치할 수밖에.."
  • 복수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에게 친구도, 혈육도 소용이 없었다. 보복의 당사자는 물론 가족까지 희생양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의미가 없었다. 평소에는 뭐 먹을 거 있으면 나눠먹던 사람들이 너 공산당이야? 하면서 밤에 끌어다가 논이나 개울에 얼음 깨고서 가족 단위로 막 그냥 죽이고 집어넣었지.  "친척 중 5촌이 빨갱이로 몰려서 죽게 되었어. 애들 셋하고.. 가족들 다 죽였어.."
  • 통치권자인 미군은 자신의 관할지역에서 일어난 학살을 알고 있었다. 정식재판도 없이 수많은 민간인들이 치안대의 손에 처형되고 있다는 것이 문서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학살을 제지할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미군이 학살을 자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점령군으로서 책임을 방기했다는 비난은 면할 수 없다.  (24연대 19연대 전쟁일지 "잔인하게 살해된 사람들의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 "그 때 그렇게 많이 방공호에 학살된 사람들 다 메우고도 모자라서 석당교 밑 석당이라는 강둑, 만조 때 올라왔다 간조 때 내려가는 강둑에 채워놓고 휘발유 뿌려서 태우고, 총으로 쏴 죽이고, 수류탄 던져서 죽이고 한 것이 송장들이 올라오고 내려가고 죽은 시체들이 천지에 벌려져 있었어.." 
  • 구월산과 신천을 잇는 석당교에서 대량학살.. 인간이 짐승으로 변한 그 때, 적색도 백색도 아닌 무색의 양민들까지.. 이 다리 위에서 사라졌다. 
  • 50년 12월 땅의 주인이 다시 바뀌었다.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미군에 맞서 중공군이 가세했다. 전세는 역전되었다. 피난인가, 남을 것인가, 민간인들은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 "우리(국군, 미군) 쪽으로 됐을 때, 못 도망간 사람들(좌익) 죽었어요. 도망한 사람들은 살고.. 그 사람들이 다시 와서 우리를 보복했어요.. 보복이 두번 있었던 거야.. 공산당이 1차 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하고, 또 공산당이 와서 또 하고.. 우리들이 수복했으면 또 하지.. 우리가.."
  • 신천리 원암리 탄약창고.. 중공군에 의해 후퇴하게 되니 또다시 살육을 한 치안군... 그대로 통일이 되었으면 그나마 살았을 사람들이 후퇴한다고 살처분되었다. 여자들이 주로 많이 죽었다. 퇴각을 앞둔 치안군과 우익세력은 남아있는 좌익을 처리했다고 했으나 희생자는 대부분 여성과 어린아이들이었다. 12월6일 달밤이었다... 8일까지 학살이 되고 시체더미에서 살아남은 당시 5세 아이가 살아서 그날을 증언한다.. 미군이 불을 질러 수없이 많은 아이들의 새까맣게 탄 시체를 넘어다녔던 그가 당시의 잔혹한 상황을 설명한다... 
  • 피난을 떠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되었다. 살기 위해서는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기총사격은 피난민의 머리위에 쏟아졌다. "내가 그 때 피난올 적에 40리의 시체를 밟고 넘어왔어. 40리.. 호주 비행기가 우리를 공산당인 줄 알고 사격한 거야.. 40리길에 송장이 널렸어.. " 
  • 전쟁의 아수라장에서 누구도 안전하지 못했다. 운이 나쁘면 언제 어떻게 죽을 목숨일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더이상 편가르기는 무의미했다. 인민군의 치하에 들어간 신천에서 다시 반대편의 보복이 이어졌다. 학살이 잦아든 것은 1951년 1월5일.. 정식 재판 없는 처형은 금지한다는 김일성의 포고령이 내려진 후였다. 미군의 범죄를 고발한다며 국제단체에 진상조사단 파견을 요청한 북한 김일성!! 1951년과 1952년 3월 유럽과 남미에서 온 국제 민주 법률가협회 조사단이 방북한다. 이들 조사단은 북한이 주장한 3만5천 희생자 수가 사실이라 밝혔다. 그러나 UN은 이 보고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북한은 미국이 학살의 책임자라고 공식규정했다. 
  • -황해도 당시 주민(당시17세) :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끝난 거야. 우리가 아까 그.. 방공호에서 죽였다는 게 미군들이 들어오면 걔네들 살아남아 포로가 될 거야. 미군들이 오기 전에 다 죽여버리자 해서 다 죽여버린 거야.. 하하하하~~~"
  • -찰스 슈 24사단 19연대 3대대원 : "북한이 남한을 손에 넣고 싶어했다. 미국이 아니었다면 남한은 북한에 함락되었을 거다. 남한은 우리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우리는 미국정부에서 그렇게 하라니까 한 거다."
  • 좌익과 우익, 점령군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나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했다. 중립은 허용되지 않았다. 
  • -황해도 당시 주민(당시16세) : "그 당시에 그걸 말리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어. 그런 상황에서 말린다는 게 얼마나 위험하다는 걸 느꼈던 거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함부로 그런 데 끼어드는 사람은 없었어. 그 당시 눈에 불을 켜고 분노에 치를 떨고 다니는 사람들 앞에서는 특히 어떤 얘기도 통할 수 없었어."
  • 당시 월남한 신천 주민들에게는 고향이 없다. 남과 북의 이산가족이 상봉하고 만나는 세상이 왔어도 그들에겐 남의 일이나 마찬가지다. 이웃과 혈육끼리 죽고 죽인 상처를 씻기 전에는 고향은 죽어서도 돌아가기 어렵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 생사확인은 포기한 지 오래다. 
  • "신천사람들의 의식에는 다 반동분자라는 거지.. 미국놈의 앞잡이로 다 죽였다는 거지.."
  • 신천출신 실향민들은 증언을 꺼려했다. 죽음보다 깊은 두려움이 도사렸기 때문이다. 정부도 북한의 취재를 불허했다. 신천의 취재는 아직 이르다는 판단이었다. 
  • 전쟁이 있었다. 죽고 죽이는 학살이 있었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얼마나 많은 수의 양민을 죽였는지 헤아릴 수 없는 파괴와 살육이 있었다. 그리고 포성이 멎은 지 50년...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 황해도 북한 주민(당시 11세) : "미군은 인간백정 살인마이고 두발가진 승냥이라는 걸 만천하에 고발합니다."
  • 황해도 남한 주민 : "고향방문신청? 어리석은 얘기요. 그건 빨갱이들 모르는 사람이나 그런 얘기하지. 빨갱이 알고 맞서 싸운 사람이 그런 얘기 하면 되겠어?"
  • 학살은 이미 끝났다. 그러나 상처는 죽음보다 오래 남는다.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는 용서란 없다. 망각이 가미된 역사로는 상처를 씻을 수 없다. 불완전한 기억의 복원만이 진정한 화해의 시작이 될 것이다. 1950년 황해도 신천의 학살은 분단 이면에 숨은 살아있는 기억으로 다시 씌여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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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혜
2 years ago
참으로  아픈 역사입니다 언제면  용서하고 보듬어 서로가 같이 손 맞잡는 웅어리진 한을 풀어 드려야는데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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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우
이창우
8 months ago
안타까운 황해도 신천 사건

2


0hoon kim
0hoon kim
1 year ago (edited)
저 시대는 사상과 이념이 광적인 인간을 만들어낸 시대. 
대부분 비지식인(대중)의 인권은 물론, 최소한의 권리 조차 보장받을 수 없었다.

3


이영호
이영호
7 months ago
거의 이라크나 시리아수준이었구만 워낙에 북괴 인질들이 많았으니

2


Unknown boy Raj
Unknown boy Raj
4 months ago
아닠ㅋㅋㅋㅋ 마카롱티비가 먼데



편한대로
편한대로
1 year ago (edited)
같은 민족끼리 싸워라 싸워 그러다 싸울 사람이 모두 다 죽어 없어져야 끝나겠지

2


Flodent Mz
Flodent Mz
4 months ago
왘ㅋㅋㅋ 마카롱티비 보고왔어 지리긴지리더라 여캠들 뭐야?



Amir Ali
Amir Ali
4 months ago
밤에 심심해서 마카롱티비 깔았는데 ㅗㅜㅑ 지리긴하더라 댓글보고 고마웠음



이동연
이동연
3 years ago (edited)
46:27 에 나오는 할아버지 말 틀린거 없네.

6


권용민
권용민
4 months ago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가 그리고 전쟁중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만행에는 왜 입다물고 있을까?

1


Lodi Cake
Lodi Cake
4 months ago
님들도 마카롱티비 봤음 ㅋㅋㅋ ?나도 봤음 레알 지리더라



Mayuri Rao
Mayuri Rao
4 months ago
대부분 트월킹 영상들이 마카롱티비 BJ들이 춤추더만



흙흙
흙흙
2 years ago
빨갱이라고 하면 펄떡 뛰는것이 어찌보면 당연하네  빨갱이는 죽음을 의미했고~
뇌속에 강하게 지워지지않는 포멧불가

6


Krushna Lonari
Krushna Lonari
4 months ago
돈 하나도 안들어가는데 ㅋㅋㅋ여캠들 갑자기 왜벗어 ?



¡ Hasta La Vista Baby!
¡ Hasta La Vista Baby!
2 months ago
귀두에 뇌가 달린 놈들



Jay Ecaldre
Jay Ecaldre
4 months ago
와.... 댓글보고 마카롱티비 갔는데 처음알았다... 신세계다 여캠들 개이쁜데 개섹시하다



Azri14kbar
Azri14kbar
4 months ago
요즘 인싸들은 마카롱티비 본다고 하더라 ㄷㄷ...



흐노니
흐노니
2 years ago
최근 탈북자들이 저거 전부 조작(북한군 소행)이라고 밝혔다...이 좌파 빨갱이들아..



황기선
황기선
2 years ago
진실한진상은
황석영영의소설
"손님"레서그대로 나와있다. 나는 신천 출신으로 그때 그현장을 잘 알고있는사람이다.
신천 전쟁박물관에 몇번가보고 그들이선전하는것을듣고 조사한시람이다.
그들이이야가하는 해리손은 존재하지않고 전쟁중에 신천에 미군이 지나가지도 않은곳이다.
나는 금년84세의 미국시민으로 북한에여러번갔고.
저서로"볼꼴 못볼꼴 다시보고싶지않은꼴"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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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알송달송
강알송달송
2 years ago
빨갱이  죽인거여요??

1


이동연
이동연
4 years ago
하필 13일의 금요일 이였다...... ㅎㄷㄷ ㅎㅈ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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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
무엇인가
3 years ago
식민지 35년이 민족사의 큰 아픔을 준 듯하다. 그러나 좌익과 우익은 공존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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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봐르남
보봐르남
3 weeks ago (edited)
북한빨갱이들의 자작극이다.
저걸 기념관까지 만들어 사기를 치는 것이다.
북한빨갱이들이 저지른 패악질을 미군에게 떠넘겼다는 증인들은 널렸다.
남한에서도 저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전남 영광군에서 벌어진 국군과 유엔군에게 쫒겨 후퇴하는 북괴군에게 2만명 이상이 학살되었고, 전라도에서만 4만여 명이 학살되었다고 보고되었다. 이후 빨치산들에게는 또 얼마나 학살되었는가? 국군의 군복을 입은 빨갱이들에게도 엄청난 희생을 당했다.



free market system
free market system
3 years ago
완전 언론의 조작 왜곡이 어떻게 선동하는지 표본이다  잘보관하라

1


moon full
moon full
1 year ago
지금도 정돈되지못해 한마당에서 몆개파로 갈라져 개싸움 하는 판에 그때야 미국에 매달려 사는개들이 얼마나 많았겠냐~? 다 미국이 뒤 조종자다. 들어보나 마나한 살육, 민간에게 총을주고 한 놈들이 제일 나쁜 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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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초가
Kim초가
4 months ago
남의 재산과 생명을 빼앗은 김일성이 나쁜늠이죠.



이동연
이동연
4 years ago (edited)
그리고 20년 뒤 1970년 후반 김성주 는 황해도 해주 에서 양민학살을 자행한다. 황해도 지못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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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 full
moon full
1 year ago (edited)
정확한 근거없이 유엔에 들이 됄순 없는일 , 증언자들이 있는 산 증거, 선의를 자청하는 미국이 저지른 만행을 더러내기란 힘든일,력사를 속이고 지금까지온 미국에 대해서 좋은평가가 절때 없어야 한다.일제와미제는 한덩어리로 엉켜돌아가는 침략자, 외세에 의존은 망각이다.항상 앞잡이들이 동족상전에 앞장서는것이 력사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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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연
이동연
4 years ago (edited)
근데 토지의 경작권 만 주고 소유권을 주지 않았다. 그뜻은 아직도 국민들은 남의 밭에서 농사를 하고 그 수확물 의 다수를 남에게 바치는데 여기서 말하는 남 은 자로 국가 즉 북괴 이다... 그러다 1959년 그것도 안되서 결국 합동 농장을 만들어 농민들의 땅을 몰수한다. 결국 이것은 후일 고난의 행군 을 부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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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마신황제
남성마신황제
3 years ago
인공 시절에 빨갱이가 죽인 100만명 학살 사건은 왜 보도를 안 하시나? 빨갱이가 더 죽였어.

3


free market system
free market system
3 years ago
좌빨들이 북한편 드는거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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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연
이동연
4 years ago (edited)
완전 우익 세력을 악의 집단 으로 만드냐? 완전 좌편향 방송 이구만.... 다시 리메이크 해라.

6


황기선
황기선
2 years ago
신천사건을 알려면 황석영의 소설 "손님" 이라는 책을 보십시요.나는 신천사건의  증인의 한사람입니다 북한에가서 실제로 본사람입니다.  의학박사 황기선

1


남성마신황제
남성마신황제
3 years ago
모택동 7500만명 스탈린 5000만명 레닌 1000만명 김일성 300만명 인공시절 100만명 호치민 600만명 폴 포트 300만명. 학살 사건에 대해서 사죄하고 배상하라. 빨갱이 친일파 인민 재판하자. 문재수 아버지가 일제 대 농업과장 친일파 후손. 박원순 정신대 강제징용 담당하는 보국대 간부 유시민 김근태 심상정 황국 신민화에 앞장선 교사 출신. 이낙연 김이수 김부겸 김상조 김진표 김동연 안경환 서울대 우원식 우상호 우범선 민비시해 친일파 하고 같은 친척. 연대 서울대나 연대는 친일파 자손으로 보면 됨 노회찬 경기고 고려대 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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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T폭격기타이슨
FACT폭격기타이슨
3 years ago
전두환 장군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민주주의 국가로 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전두환 회고록 사서 읽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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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짜장
왕짜장
3 years ago
sis yuli 개소리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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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 Thao Nguyen
Mai Thao Nguyen
3 years ago
이런 인간들 때매 북한 안보 팔이가 참으로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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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롱이
재롱이
2 years ago
전씨 회고록 판매 못함 압류되었음



재롱이
재롱이
2 years ago
ㅋ ㅋ ㅋ
병원 가 보세요
정신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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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T폭격기타이슨
FACT폭격기타이슨
3 years ago
5.18이 어떻게 개날조 되었는지는 역사가 재평가 해줄것입니다. 교도소를  습격하고, 무기고를 습격하고, 경찰서를 습격하는 걸 민주화 운동이라고 쳐불르는 나라는 이나라 개한민국 밖에 없을것입니다.  이나라의 군과 경찰들을 맞서, 총과 무기로 무장하는 5.18은 지나가는 개가봐도 폭동입니다. 지금까지 광주사태로 쭉 불렸던것을, 김대중 노무현이 정권쳐잡고서 광주사태를 민주화 운동으로 이름을 쳐바꾼거지요. 이때부터 5.18이 마치 당연한 민주화 운동인것처럼 개날조 되서 개포장질되가는데 정말 황당함 그자체입니다. 국민들이 이나라의 군인들과 경찰들에 맞서, 총과 무기로 무장해서 서로 죽고 죽이는게 민주화 운동입니까? 그렇게 따지면 미국 LA 흑인폭동도 LA흑인 민주화 운동이라고 쳐불러야 겠군요. 그들역시 흑인들의 탄압에 맞서서, 흑인들이 분노하여 총과 무기로 무장하여, 미국의 군인들과 경찰에 맞서서 서로 죽이고 죽였으니까요. 5.18이 민주화 운동이면, LA 흑인폭동역시 민주화 운동으로 쳐불러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흑인폭동이라고 쳐불르지 민주화운동이라고 쳐불르지 않습니다. 5.18 역사 개날조는 훗날 역사가 평가해줄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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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짜장
왕짜장
3 years ago
sis yuli 개소리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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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원스
3 years ago
나도 보수성향이지만 광주민주화운동은 건드리지 마세요 뇌가 있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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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흙
흙흙
2 years ago
sis yuli 얼른 치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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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롱이
재롱이
2 years ago
빨리 병원 가보세요
상태가 많이 심각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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