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석 1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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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근대화론이라 하면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접근하는 이들이 많다. 단순한 식민지 미화론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일본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어떤 성격의 제국주의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에서 제출된 입론이다. 그래서 사실 식민지근대화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사에 대한 이해보다도 그 이면에 있는 일본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호리 가즈오 등의 강좌파 출신 경제사학자들의 연구는 일본제국주의의 특질에 대한 강좌파, 노농파의 논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굉장히 단순하게 말하자면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과 그 완성형으로서의 제국주의를 통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시도 중 가장 이론적으로 영향력 있는 입론은 나와 도이츠의 ‘삼환절론三環節論’이 가장 포괄적이고 유명하다. 1937년에 나왔음에도 여전히 삼환절론이 그리는 일본제국주의 역사상은 아직 제대로 극복되지 못했다. 그에 따르면 1930년대 일본의 무역구조는 1. 미국에 대한 생사수출과 면화•기계수입을 한 고리로, 2. 인도와 동남아를 비롯한 대영제국권에 대한 면제품 수출과 중공업 원료수입을 다른 한 고리로, 그리고 3. 만주•중국에 대한 중공업제품 수출과 식료•원료 수입이라는 마지막 고리가 서로 얽혀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삼환절론이다. 이 고리 속에서는 일본제국이 대륙침략을 위한 중공업화와 군수공업의 생산력 확충을 시도하면 할수록 선진제국을 포함한 세계시장에 대한 의존, 원료수입의 증가로 총체적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다. 나와 도이츠의 입론이 발표된 1937년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일본제국은 세계시장으로부터의 자립을 위해 영미와의 대결을 택해 결국 패망하였다. 삼환절론은 이것으로 그 정합성이 증명되었다고 판명되어 정설에 가까운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세계시장 내에서의 일본의 위치에 대한 통찰과 그를 통해 도출해낸 일본 무역의 한계로부터 제국주의적 팽창과 그것의 파탄을 나타내는 나와 도이츠의 입론은 계속 발전하여 하라 아키라, 고바야시 히데오 등에게로 이어져 금융과 무역을 엮어 보다 포괄적으로 자원의 부존 상황에 따라 일본제국의 파탄을 보여주는 입론으로 보다 세련되고 보다 엄밀해진다.
이것에 대해 가장 열심히 비판을 하며 새로운 역사상을 그려내려 노력하는 학자가 호리 가즈오라 할 수 있다. 나 또한 그의 입론으로부터 배운 바가 많은데, 그의 입론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삼환절론과 그것을 계승한 연구들은 일본제국주의의 붕괴의 필연성을 도출하는 것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제국주의 붕괴 이후에 일본 자본주의가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그리고 전전과 달리 무역구조 내에서의 한계를 돌파하고 중공업화를 달성하며 선진자본주의가 되었는지를 연속성 차원에서 설명해내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또한 위에서 말한 일본제국주의론은 그 제국주의적 팽창이 식민지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반대로 식민지 사회의 존재는 일본 자본주의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전혀 드러내고 있지 못하다. 이래서는 식민지인들의 주체성을 무시하게 되고 일본제국주의의 억압과 일방향성만 강조하게 된다.
이런 입장에서 호리 가즈오는 경공업 위주의 일본자본주의가 제국주의적 팽창을 거치면서 1945년 이후 어떻게 중공업 위주의 경제구조를 영위하게 되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1930년대 이후의 제국주의적 팽창 국면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 시기 일본의 무역은 다른 선진국들과 다르게 크게 팽창하는 추세를 보인다. 대공황과 블록경제화로 세계시장이 해체되는 와중에 일본제국은 식민지를 포함한 제국 경제권과의 무역을 크게 증대시키는데 이는 프랑스나 영국 등도 마찬가지였다. 차이점은 그 내용에 있다.
영국과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는 자국의 중공업화와 식민지 간의 어떠한 연결고리를 만들지 않는다. 반면에 일본제국주의는 식민지 사회를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로 재편하고 일본 경제의 분업체계로 깊숙이 포섭함으로써 시장규모를 키우고 더 나아가 일본자본주의의 고도화를 달성하는데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식민지 사회 또한 그러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세계공황 이후 세계무역이 크게 수축되는 와중에도 식민지로 보내는 수출이 3배 이상 증가했으며, 그 상당수는 기계공업 부문의 생산제 제품으로 일본 자본주의의 고도화와 중공업화를 위한 강력한 발판이 되었다. 즉 일본자본주의는 식민지 보유를 통해 고도화되었기에 전후에 쉽게 선진자본주의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식민지 조선이든 대만이든 만주든 간에 일본의 식민지는 동화주의 정책 하에서 일본자본주의에 깊이 포섭되었고 인프라가 건설되어 자본주의적 생산력을 확충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다. 그런 기반을 전제로 식민지 공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대규모의 생산재 수요를 창출했고 그것이 일본 자본주의의 고도화를 끌고 가는 동력을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조선과 대만 등의 식민지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정착되었다. 식민지에 대한 의존도가 얼마나 컸는지 이쯤에서 수치를 밝힐 필요가 있어 보인다. 1937년 이후 급증하기 시작한 식민지에 대한 의존도는 1940년에 본국 전체 수입의 42%, 수출의 67%라는 경이적인 수치이다. 영국이 20%대, 프랑스가 30%대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의존도를 갖고 있었다.
식민지 조선과 대만은 바로 이런 식민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며 생산력의 고도화가 일어나고 있는 일본제국주의 경제권에 포섭되어 자본주의 사회로 급속하게 재편되고 있었다. 식민지 공업화는 바로 이런 와중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조선인들은 그러한 엄청난 흐름 속에서 단순히 구경꾼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그러한 움직임에 동참하든 휩쓸려 가든 어찌됐든 그 영향에서 벗어나 있을 수는 없었고 나름대로 그것에 적응하여 행동했던 것이다.
당연히 이런 관점에서는 식민지 사회의 자본주의적 재편과 그에 따른 변화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제국주의를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의 확대과정 속에서 조선인은 나름대로 근대인으로 새롭게 주조되고 있었다. 물론 식민지성을 완전히 도외시 할 수는 없고, 그러한 여러 영향과 조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한국의 근대를 형성했던 것이다. 김기원이 지적하듯이 이때 일어난 수많은 변화는 해방 이후 1945~1953년 사이에 소멸된 게 아니라 조선인의 생산력으로 새롭게 재편되며 한국적 자본주의를 형성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재벌체제는 일본인이 남긴 귀속기업체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본인의 생산력을 조선인의 생산력으로 전화시키는 것이 1945년 이후 한국인에게 주어진 과제였던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라 지칭되는 이론적 입장은 이 부분을 보다 명확하게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근대사회에 적응하고 그 능력을 흡수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제시된 것이 이영훈과 미야지마 히로시의 ‘소농사회론’이다. 비록 아시아 사회는 근대적 소유권을 창출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아시아 사회를 이끈 신유학은 근대적 개인, 근대적 소유권에 가까운 형태의 인간군을 형성하였고 그렇기에 자본주의를 “창출”하는 조건을 형성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 발전을 “따라잡는” 조건을 창출할 수는 있었다. 소농사회에서 축적된 개인의 경영능력, 경제를 하고자 하는 의지, 발전된 소유권 등은 일본제국주의가 제공한 조건에 적극적으로 부응할 수 있는 인적 자본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 변화를 살펴보는 것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찬양과 미화가 될 수 없다는 건 당연하다.
일본제국주의가 남긴 유산은 한반도의 두 국가인 북조선과 한국에 동등하게 주어진 것도 아니었고, 그 활용도 동일하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귀속재산이 미군정과 한국정부를 통해 사유재산으로 불하되어 시장경제를 형성하는데 사용되었던 한국과 달리 북조선은 그것을 국유화하고 일본제국주의가 만든 통제경제를 지속하여 한국전쟁으로 나아가는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다. 다시 말해서 일본제국주의가 남긴 유산은 북쪽에서는 전시국가로서의 현실사회주의의 기반으로 작용한 데 반해 남쪽에서는 시장경제를 형성하고 일본과의 연계성을 형성하는데 이용되었다. 이 과정을 이해하고 분석하면서 그 영향을 추적하는 작업이 제국주의에 대한 미화로 독해된다면 상당히 아쉬운 일이다.
만약 이 입론을 논파하고 싶다면 일본제국주의를 그리는 역사상 자체를 다르게 그릴 필요가 있다. 일본제국주의의 붕괴의 필연성을 논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전전의 일본 자본주의의 한계를 돌파하며 전후의 선진자본주의로의 발전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한 제국주의에 대한 파악을 전제로 그 제국주의의 전개과정에서 식민지와 제국 간의 상호작용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식민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식민지 근대화론이 그린 역사상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다. 수십의 경제학자들이 모여서 수십년에 걸쳐 그려낸 이 역사상을 바꾸는 것은 쉽지가 않다. 당연하게도 집단 작업을 통해서 일본제국주의와 더 나아가 16세기 이후의 세계사의 전개 과정까지 새롭게 그려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 근간에 있는 자본주의 맹아론이 기반하고 있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마르크스 해석을 내놓은 일본의 강좌파 계열 마르크스주의 또한 논파해야 한다. 그 근간에서부터 논파하면서 이론과 그 이론이 그리고 있는 세계사의 전개 자체를 논파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역사상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누가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가. 아쉽게도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 이가 없다. 안병직이 한국 국사학자들을 비판하며 “자본론을 읽었느냐, 읽었다면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느냐”라고 했던 건 바로 이런 배경에서였다.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내세우는 자본주의 맹아론 – 식민지반봉건사회론 – 주변부자본주의(혹은 종속이론)에 대비되어 소농사회론 – 식민지근대화론 – 중진자본주의론이라는 틀을 제시한 안병직, 이영훈 등의 뉴라이트의 이론 체계는 그 내용의 스케일에서나 깊이에서나 나름 볼만한 부분이 많다.
진지한 이론탐구와 역사연구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상을 그려내어 자본주의에 대한 찬양 혹은 자유주의적 세계관으로의 전향으로 이어지는 방향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을 적극적으로 시정하고 인류사의 발전단계를 고양시킬 수 있는 연구자 집단과 정치집단이 나와야 한다. 한국 역사학계에 만연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인식과 문화사적 관점으로는 그러한 것을 도출해낼 수가 없다. 우리는 다시 마르크스로 돌아가야 한다. 마르크스에 내재해 있는 새로운 이론적 탐구의 가능성을 끄집어내어야 한다. 내가 지난 몇 년간 필사적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 연구에 매달린 건 이를 위해서였다. 능력이 부족하지만.. 한국사회와 인류사의 질적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하는 이라면 마르크스와 헤겔이 그린 근대세계의 역사상을 그 연구주제로 삼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천박하고 저열한 비난들은 그것의 극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다시 마르크스로, 다시 사회구성체론으로, 다시 이론의 시대가 와야 한다.
5 comments
Byun Hyunjin
이진경, 박노자 이런 사람들이 진보 성향 대중들에게는 떠받들여지니 뭐가 되겠어요. 이들은 근대성이라고 하면 덮어놓고 비난하는데 또 이들의 책이 잘 먹히니까요. 이진경의 <역사의 공간> 같은 경우도 역사사회학을 표방하는 것 같지만 결국 주장하는 건 근대 비판이더라구요. 박노자의 책들은 아예 근대=자본주의=악 이런 논리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주장이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에게는 달콤하게 먹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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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저도 그 분들의 입론에 동의하지 않는 지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대비판 자체가 의미없는 것은 아니지요. 근대성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고, 근대란 실상 그러한 자기부정을 동력으로 삼아 발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자기부정이 없는 근대성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헤겔이 대논리학으로 형식을 만든 근대성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분들에 입론의 세부적인 차원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한 일이지만, 그분들 개인을 비난하는 것은 그리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사회에는 그런 이들의 존재도 필요한 법 아니겠습니까. 그것까지 이해하는 게 근대사회의 복합성을 보다 깊게 이해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에 대한 비난은 생산적인 것을 낳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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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un Hyunjin
손민석 저도 웬만하면 개인 비난은 하기 싫지만, 그 분들이 박유하에 대한 인신 공격을 하는 걸 보고는 그냥 넘기기는 힘들더군요. 특히 이진경은 자기 페북에서, 박유하가 위안부 여성들을 아이돌로 취급했다고 까더군요. 학문하는 태도, 토론하는 태도부터가 걸러먹었기에 그런 걸 보고는 좀 과격하게 보는 시선이 생기긴 했습니다 ㅎㅎ
근대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긴 하겠지만, 포스트모던 어쩌고 방식보다는 말씀하신 것처럼 그걸 발전적으로 넘어서는 헤겔식이 옳을 것 같습니다.
에고, 무지한 사람의 댓글에 답변을 달아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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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Byun Hyunjin 이진경씨가 페이스북을 하시는군요. 걸러들을 부분은 걸러듣고 참고할 부분을 참고하면 되는 것이겠지요. 물론 사람인지라 감정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이해가 됩니다. 아무튼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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