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4

인터뷰 - 김낙중 선생님과의 만남

인터뷰 - 김낙중 선생님과의 만남

김낙중 선생님과의 만남
peace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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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중 평화운명 교향곡 77장'

평화네트워크 간사 조원영/2008년 2월 4일 

※ 이 글은 2007년 11월에 열렸던 '평화활동가워크숍'에 참가한 후 작성한 내용이며,
    평화활동가워크숍 자료집에 실릴 예정입니다.

                                               
“내가 태어나서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자그만치 77년이 걸리는데,
그 77년이 다 평화하고 관계가 있어.

아무래도 그게 내 운명인 것 같아.”





주어진 2시간을 훌쩍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김낙중선생님의 이야기는 한국전쟁을 전후한 2~3년 동안의 이야기를 넘지 못했다. 그의 인생 77년 중 고작 2~3년에 걸쳐 일어난 경험들이 이 정도라면, ‘평화운명 교향곡 77장’을 다 듣기 위해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하단 말인가.


‘2007년 평화활동가워크숍’에서 만난 우리나라 평화운동의 시초 김낙중선생님.
지금부터 그의 기막힌 운명교향곡 한번 감상해 보자.
(김낙중선생님을 글 중간 중간에 부득이 하게 ‘낙중’으로 표현함을 용서해주시길!)





제1장 ‘평화 운명의 문을 두드리다’.




“하나님인지, 부처님인지, 산신령인지 모르지만,
좌우간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치사하고 비굴하지 않게, 단 하루를 살더라도 떳떳하게 살고 싶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폐병을 앓아 인생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철학서적에 빠져 살았다는 낙중.


20살 때 한국전쟁이 발발해 의용군에 가기 싫어 산속에서 숨어 지내다 우연히 미군이 주둔 하는 곳에서 일하게 된다. 국군에 가면 당시 인민군이 되어버린 초등학교 동창들과 총부리를 겨눠야 하고, 인민군도 내키지 않아 접시 닦는 허드렛일을 하며 미군부대 안에서만 생활하다 부산으로 가게 된다.



학교에 등록하면 징집면제를 받을 수 있음을 듣고 한 장교의 도움을 받아 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왜 형제들끼리 서로 죽이는 삶을 국가에게 강요받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의식에서 그가 선택한 곳은 서울대 사회학과.


낮에는 학교를, 저녁에는 부산수도육군병원에서 시체나 부상자를 세는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심한 열병을 얻게 되었고, 매일 오후 2시만 되면 죽을 것 같이 열이 오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니깐 삶이, 죽음이 뭔지. 살기 위해 인민군 안 나가려고 산에 피하고,
또 징집보류 대학생 되려고 애쓰고.........지금까지 저 목숨 하나 살려고 기를 썼는데,
결국 이렇게 병들어 죽을 라고 요리 피하며 살아온, 치사한 삶이 바로 내 삶 인거야.”



열병을 앓으며 그는 자신의 모습에 회의를 느꼈고, 단 하루를 살더라도 떳떳하게 살아보겠다는 자기맹세적 기도를 하게 된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그 이후로 열병이 나았고, 그 후  ‘평화운동 운명’ 앞에 놓이게 된다.


한국전쟁 휴전이 임박해 지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내세워 학도군 들을 모아 데모에 동원했는데, 또다시 총들고 나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 ‘북진통일’에 동의할 수 없어 그는 혼자서 고민을 하게 된다.



“1952~53년 상황에서 전쟁을 멈추고 평화롭게 무엇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교회설교도 들을 수 없었고, 스님의 법문도 찾아 볼 수가 없어. 그 때 평화통일을 말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그 당시 이승만의 무력북진통일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묵묵히 그것에 동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으면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면 눈물이 날 텐데, 눈물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거야. 눈물이 없으니까 아무도 전쟁 멈추자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북진통일’ 구호를 외치는 거지.”




그는 이러한 현실을 참지 못해 머리를 빡빡 깎고, 목욕재계한 후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하얀 옷을 입고,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등불을 들고 다녔던 것처럼 부산 광복거리에서 평화적 시위를 하게 된다.


마치 베토벤이 운명교향곡에서 ‘빠바바밤’ 하고 장엄하게 운명의 문을 두드린 것처럼, 그도 그렇게 평화운동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다. 눈물이 말라 버린 광기의 시대에 참 눈물을 가진 사람을 찾기 위해 '탐루(探淚)'라고 쓴 등불을 켜고 다녔던 그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미친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제2장  ‘평화 운명의 거친 파도’





“여기 있는 사람들, 그 때 같았으면 모두 청량리 백병원 입원감이지”





평화통일 호소문을 들고 다니던 김낙중은 심지어 정신병원에 갇히기까지 한다.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가지고 정식으로 경무대에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일주일 만에 국가보안법으로 구속이 되었고 그를 처벌할 법제가 없어 과대망상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석방 되었다.


김일성이 적화통일의 야욕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평화적 통일이 가능하겠느냐는 한 치안부 간부 말을 듣고 결국 1955년 김낙중은 북한에 자신의 통일안을 전달하기 위해 임진강 물살에 몸을 맡겼다.


그곳에서도 순탄치 않은 세월을 보내는데, 남한에서 보낸 간첩으로 몰려 1년여 동안 억류되어 고생하다 돌아온다. 그리고 그 월북의 대가로 미군 포로수용소를 거쳐 혹독한 고문 끝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남한에 돌아온 지 1년 만에 그는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었지만, 이 독특한 이력은 이후 평생을 따라다니며 그를 공안 사건의 표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내가 한국의 50년부터 90년까지 고문발달사를 쓰라면 쓰겠어.”



평화와 통일의 바다를 향해 자신의 운명을 맡겼고, 굽이치는 강물이 되어 평생 그 길을 갔으며, 정권의 위기 때마다 희생양이 되어 분단의 제단에 제물로 바쳐졌다.


1961년의 5.16 쿠데타 얼마 후인 1962년 '학원간첩단 사건'으로 1965년까지 복역, 1972년 10월 유신 이후 1973년 '학원 침투 간첩단'으로 1980년까지 복역, 그리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92년 '재야 진보 세력을 위장하여 장기간 암약해 온 간첩단'으로 1998년까지 복역. 그는 도합 18년의 세월을 ‘모진 평화의 운명’을 보내야 했다. 그가 네 번이나 간첩으로 몰려 고초를 겪은 것 그 자체가 분단 한국의 현대사인 것이다.





제3장 ‘그의 평화 운명에 닿아’






“아부지, 저 북한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요.”





대학에 들어가 나는 북한과 한반도 문제에 관심 갖게 되었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좀 더 많은 것을 공부하고 싶었다. 아버지께선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통일에 대한 의견을 물으셨다. 답변의 준비가 부족했던 나에게 아버지는 ‘김낙중’이라는 분을 아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네가 진정 북한에 대해 공부하고 민족문제에 고민하면서 통일을 위해 공부한다면, 김낙중 선생님에 대해 꼭 알아야 한단다.”



그때부터 이어진 김낙중 선생님의 일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진행되었다. 아버지가 안기부(현 국정원) 재직 당시 만난 김낙중 선생님이야말로 평화적 통일을 위해 몸 받쳐 희생한 역사적 인물이라는 것이다.



“국정원에 다닐 때,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김낙중선생님을 썼다가 진땀 뺀 사건도 있었지.”



70년대 ‘민우지 사건’(1973년 유신에 반대한다는 내용으로 고려대 학생들이 ‘민우’지를 뿌린 사건)이 발생했을 때, 아버지에게 김낙중선생님을 조사 및 취조 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러나 김낙중선생님이 직접 쓴 두꺼운 수기를 읽고 감명 받은 아버진, 다른 사람과 당직을 바꾸어 취조나 고문 대신 밤새도록 김낙중선생님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낙중선생님의 수기를 폐기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피하다 결국은 뺏겨서 태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비록 김낙중선생님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스러웠지만, 당시 함께 들어온 고려대 학생들이 형을 감면받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알려주며 도움을 주셨다고 한다.


퇴직하시고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국정원에서 보낸 30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였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평화활동가워크숍 준비단을 하면서, ‘거침없는 수다방’에 김낙중선생님과의 대화를 꼭 넣자고 주장했다. 아버지 말씀 속에 살아계셨던 김낙중 선생님을 직접 만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 나에게는 ‘감동’ 그 자체였던 것이다.


우선 김낙중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교차되면서, 우리 아버지 정확한 기억력에 새삼 놀랬다. 그리고 선생님 말씀이 끝난 후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하고, 그 자리에 함께 참여한 사람들과 ‘30년 전 취조를 담당했던 국정원 직원의 딸이 평화운동에 뛰어드는 시대’적 변화를 체감하기도 했다.





제4장 ‘나는 7살짜리 막내 평화운동가’





김낙중 선생님께서는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고 멋쩍게 웃으시며 마지막으로 ‘평화활동가들에게 당부’의 선물을 주셨다.


“첫째 생명에 대한 사랑이 중요합니다. 환경운동, 생태운동과 같은 운동은 기본적으로 동물, 식물, 생명에 대한 사랑과 애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관계를 다루는 다른 평화운동들도 마찬가지로 인간관리, 집단, 계층 소수 간 갈등, 여러 가지 부분을 다룰 때, 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사랑을 어떻게 그 안에서 실천하는가가 중요해요. 여기서 사랑을 어떻게 이루자는 범위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다 관통하는 것은 사랑이야. 그래서 사랑이 없는 사람은 평화를 운동하면 안 돼.”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이 평화운동에 더 잘 맞는다며, 특히 여성활동가들은 제한적인 자원을 더불어 함께 쓰자는 의미에서 허영과 사치를 줄여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그리고 중국의 모택동을 예를 들면서, 민족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가 함께 힘을 모으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다.


‘낙중 평화운명 교향곡’이 클라이막스에 다다를 무렵, 자세한 내용은 따님이 쓴 ‘탐루’라는 책을 참조하라는 ‘광고성 멘트까지 날려주는 센스’를 누가 따를 것인가.


젊은 사람들에게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7살 막내’가 평화활동가워크숍에 왔다며, 불편한 몸을 이끌고 거의 마지막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해주신 김낙중 선생님. 정말 그의 겸손함과 열정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평화운동의 시초이자 평화운동의 선구자이신, 김낙중 선생님의 ‘낙중 평화운명 교향곡’은 77장에서 끝나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연주중이다. 그리고 영원히 우리 가슴에 ‘평화의 울림’을 전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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