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그 예술
야나기 무네요시 (지은이),이길진 (옮긴이)신구문화사2006-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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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부 조선과 그 예술
머리말
조선인을 생각한다
조선의 벗에게 보내는 글
그의 조선행
조선의 미술
석불사의 조각에 대하여
사라지려는 조선건축을 위하여
조선 도자기의 특질
조선의 도자기에 대하여
조선의 목공품
낙랑출토 한대화에 대하여
지금의 조선
전라기행
사과
제2부 조선예술의 이해
조선미술 연구가에게 바란다
조선에 가다
낙랑채협 약해
고려자기와 조선자기
조선의 찻잔
조선시대의 민화
불가사의한 조선의 민화
조선 도자기의 아름다움과 그 성질
조선자기의 7대 불가사의
조선의 석공
조선의 금공
조선의 민화
조선에 온 감상
조선민족과 예술
부록
해설: 조선 예술에 대한 야나기의 시각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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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야나기 무네요시 (柳宗悅) (지은이)
1889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01년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싹텄다. 1907년 학습원(學習院)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의 가르침을 받았다. 1910년 ≪시라카바(白樺)≫ 창간, 동인이 되었다. 도쿄제국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1914년 최초의 저서 ≪윌리엄 블레이크≫를 간행했다.
1916년 불국사와 석굴암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1919년 동양대학 종교학과 교수로 부임했고, 1921년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을 계획했다. 1924년 모쿠지키 불상(木?佛) 연구를 발원했다. 1925년 ... 더보기
최근작 : <나무아미타불>,<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 마음 사람>,<수집이야기> … 총 16종 (모두보기)
이길진 (옮긴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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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일본 문학 작품 및 일본 문화에 관련된 서적들을 유려한 우리말로 옮겼다. 주요 역서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오에 겐자부로의 『사육』, 키쿠치 히데유키의 『요마록』,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이 있다.
최근작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과 리더십> … 총 79종 (모두보기)
나라와 나라 사이의 해법인 서로간의 호의라는 기본 개념과 그것의 방편으로 등장하는 조선의 예술의 파악이 부수적으로 우러나오는 개인 에세이와 미학의 명저. 도서관에 마침 있기에 읽다가 이틀 후에 아예 사버렸다
현준님이시다 2021-01-28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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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에 차있긴 하지만...
柳宗悅, 일본사람이다. 야나기 무네요시.
한국 미술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면,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
한국의 미를 '비애의 미'라고 비하했다고 식민 사관에 사로잡혔다고 욕듣던 인물.
과연 이 책을 읽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한국인들은 안 읽으면서 욕한다고 홍세화 선생이 말했다. 한겨레 안 보는 사람들이 한겨레 욕한다고. 이 책도 읽지 않고 욕하는 이들도 많으리라.)
식민 본국 일본인으로서 조선을 몇 번 방문해 보고, 조선의 민예품에 반해서 민예박물관을 만들려고 전국을 뛰어다닌 사람.
내 생각으론 그가 미술사학자도 아니고, '조선과 그 예술'을 내던 때가 1922년 34세의 젊은 청년이었기 때문에, 조선을 몇 번 방문한 경험만으로 한국의 미에는 이런 특성이 있다고 내세운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기 쉬운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 보면, 야나기 무네요시는 우선 1920년대 일본 지식인들에게 유행한 '사해 동포주의'와 '실용적 학문'에 관심을 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시라카바(白樺)의 동인의 특징이다.
그의 글에 드러난 논지는 '일본인들이 심하다. 몰지각하다.'는 정도의 느슨한 시각이 들어있지만,
그의 성급한 일반화가 식민 사관에 사로잡힌 편견이 아님은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구체성을 획득하는 장면을 많이 접할 수 있다.
조선을 알기 위해서는 장날을 보는 것이 지름길임을 알고, 조선의 민예품을 보면서 감탄, 또 감탄하는 식민 사관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반야심경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면서 '거리낌이 없어 공포가 없다.'는 말로 조선 민화의 구애받지 않고 자연스러운 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상당한 관심과 애정이 담겨있다고 보인다.
그의 애정은 민예와 그 작자를 통하여 단일한 전통을 가진 민족으로서의 조선을 <발견>해 내게 된다.
그래서 그는 한국인들에게도 일본의 횡포를 전하려 한다.
어느 민족이 다른 민족을 동화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20세기의 오늘을 사는 사람에게는 의문에 속하는 문제의 하나입니다. 병탄이란 위압적인 수단은 말할 나위도 없고 평화적 정책으로 동화가 가능하리라는 것도 세계의 역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또 오늘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면 긍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일본과 같이 내부적 모순을 가지고 불완전한 극한 상태에 있는 자가 남을 개화시키겠다고 한다면 이를 누가 믿을 것입니까? 우리가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한국은 위대한 아름다움을 낳은 나라이고 위대한 아름다움을 가진 민중이 살고 있는 나라라는 사실...
일본의 동포여,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써 망하는 법, 군국주의를 어서 파기하라. 인륜을 짓밟는다면 세계는 일본의 적이 되고, 멸망하는 것은 조선이 아니라 바로 일본...
이런 말들을 읽으면 마치 강직한 독립 투사의 변호같지 않은가?
세계 예술에 있어서 훌륭한 위치를 차지하는 조선의 명예를 보존하는 것이 일본의 인도라고는 하지만, 그는 인간으로서의 일본인에게 큰 희망을 품고 있다. 이런 부분은 정치의 맹목에 대한 착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조선의 공예가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나 놀라운 미적 직관의 소유자로서 독특한 조선만의 고유미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는 안목이나,
조용하고 쓸쓸한 마음을 흐르듯 길고 길게 내리는 곡선이 연연하고 끝없이 호소하는 듯한 아름다움을 나타낸다는 부분은 상당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혹자는 그가 조선의 반도적 특성에서 나온 비애미로서의 아름다움을 조선을 폄하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지만, 꽃병이 없고 어린이의 장난감이 없고 음악이 슬프다는 그의 논지를 보면 재치가 돋보이는 것이라고도 할 만하다.
석굴암에 대한 연구, 광화문을 파괴하는 데 따른 아픔, 생활 속의 교졸함과 담담함이 담긴 조선의 도자기 등은 뛰어난 기록이다.
정치는 예술에 대해서까지 무례해서는 안 된다. 예술을 침해하는 따위의 힘을 삼가라. 나는 죄짓는 자 모두를 대신하여 사과하고 싶다는 태도는 그의 진지한 태도를 보여준다.
알지 못하고 욕하는 것, 그것이 편견이다.
읽지 않고 비판하는 것, 그것이 무지다.
과거, 오만과 편견에 휩싸인 일본에 당한 우리가, 지금 오만과 편견에 휩싸여 올바른 <생활의 발견>에 실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요즘 EEZ를 둘러싼 긴장감 도는 뉴스를 보면서 스스로를 되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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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4-21 공감(16) 댓글(0)
읽었습니다 21 야나기 무네요시 (국립현대미술관)
숲노래 책읽기 2021.10.28.
읽었습니다 21
우리나라는 아직도 ‘조선왕조실록’ 자리에서 헤맵니다. 옛자취(역사)를 다룰 적에 기껏 ‘조선’이나 ‘고려’를 다루는 듯하지만, 막상 조선·고려 임금붙이랑 벼슬아치 테두리에서 못 벗어나요. 어른끼리 읽는 책이건, 어린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책이건 똑같습니다. 이웃나라 야나기 무네요시 님은 ‘임금붙이·벼슬아치’ 자리가 아닌 ‘흙을 일구며 살림을 지은 수수한 사람들’ 자리에서 빛을 보고 이야기를 여미었습니다. 힘·돈·이름으로 ‘누르는 놈’들 이야기가 아닌, 힘·돈·이름에 ‘눌린 님’들 이야기를 다루었지요. 조선이며 일본이며 모든 나라 ‘밑자리 사람들 여느 살림살이’에서 아름길을 보았고, 이 아름길에 눈물하고 울음이 새롭게 노래가 되어 기쁨하고 웃음으로 피어난다고 풀어냈어요. 《야나기 무네요시》는 놀랍게 편 보임마당(전시회)이고 책입니다. 힘(기득권)을 움켜쥔 쪽에 있는 모든 글바치는 이이를 꺼리거나 깎아내립니다. 그렇잖아요? 힘꾼은 흙꾼이 아니니.
《야나기 무네요시》(국립현대미술관 엮고 펴냄, 2013.5.25.)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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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1-10-2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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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스 노부쿠니, <일본근대사상비판> 읽기
▷ 고야스 노부쿠니(子安宣邦), 『 일본근대사상비판 』(김석근 옮김), 역사비평사, 2007. 지난 해 고야스 노부쿠니의 『귀신론(鬼神論)』(이승연 옮김, 역사비평사, 2006)을 아주 흥미롭게 읽고나서 일본의 두터운 학문적 지층과 그 왕성한 사상적 '소화력'에 다시금 새삼스레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고야스의 다른 책으로는 이미 국내에 『동아·대동아·동아시아』(이승연 옮김, 역사비평사, 2005)와 『야스쿠니의 일본, 일본의 야스쿠니』(김석근 옮김, 산해, 2005)가 번역돼 나온 바 있었지만, 이 두 책이... + 더보기
람혼 2007-07-06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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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 새로읽기
나는 한국사람이기에 한국사람을 바라본다. 내가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이라면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을 바라보았을 테지. 한국사람 가운데 ‘일본에서 한국을 더 깊이 아끼거나 돌보려고 하는 몸짓이나 마음’을 보여줄 적에 괜히 시샘을 하거나 까탈을 부리려는 사람을 곧잘 본다. 왜 그럴까? 참 웃기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시샘이나 까탈을 가만히 보면, 다른 나라나 겨레에서 한국 문화와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면서 “한국은 참 좋아!”나 “한국은 아주 훌륭해!” 하고만 말하면 시샘이나 까탈을 부리지 않는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걸어온 길을 찬찬히 살피면서 모든 문화와 역사와 사회를 깊고 넓게 건드리거나 헤아리는 이야기를 말하면 어김없이 시샘이나 까탈을 부린다. 이러면서 으레 말 한 마디를 붙잡고 늘어지려 한다.
야나기 무네요시라고 하는 일본사람이 있고, 이녁은 ‘조선(한국이 아닌 조선)’이라는 나라를 처음 찾아올 수 있던 때에 몹시 놀라면서 안타까운 마음이었다고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권력은 쓸쓸하지만, 정치권력이 어떠하든 조선이라는 나라를 이루어 살림을 가꾸는 여느 수수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삶이 몹시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웠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도 쓰고, ‘조선사람 스스로 아끼지 않아서 그대로 버려지는 조선 문화재(민속문화재)’를 온돈을 들여서 그러모았으며, 이렇게 그러모은 조선 문화재(민속문화재)를 아낌없이 조선 사회에 돌려주었다. 조선 사회에는 전형필이라는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이런 사람 몇몇이 있어도 거의 모든 사람은 조선 문화재(민속문화재)를 들여다보지 않았고 깎아내리거나 아예 쳐다보지 않았다. 이를 처음으로 짚으면서 밝힌 사람이 야나기 무네요시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본에서도 전쟁을 끔찍하게 싫어할 뿐 아니라, ‘반전론’을 대놓고 글로 밝히기도 한 사람이다. 이러면서 ‘유행에 따르기를 거스르’고, ‘겉치레로 겉모습을 꾸미기를 하지 않’으며, ‘삶을 사랑으로 가꿀 때에 비로소 참답게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이녁 다짐(좌우명)으로 삼으면서, 이를 ‘문화를 읽는 눈길’로 드러낸 사람이다.
조선 백자이든 조선 막사발이든, 이러한 질그릇을 야나기 무네요시가 눈여겨본 까닭도 ‘유행에 따르지 않’으면서 ‘겉치레를 하지 않’는데다가 ‘조선 서민(백성)이 여느 삶자리에서 수수하게 쓰는’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석굴암을 놓고 야나기 무네요시가 한 말을 아주 뒤트는 사람들이 많기도 한데, 여러모로 안쓰러운 ‘내 이웃인 한국사람’이다. 참말 석굴암을 뭘로 생각하기에 그런 안쓰러운 말을 일삼을까? 석굴암이건 팔만대장경을 모신 건물이건 아주 마땅히 ‘과학’이다. 그러나, 석굴암과 팔만대장경 모신 건물은 ‘자연(숲)을 거스르지 않은 과학’일 뿐 아니라, ‘자연(숲)을 그대로 살린 과학’이다. 한국사람은 스스로 바보인가? 아니, 오늘날 한국사람은 ‘한국 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는 일본사람을 그저 깎아내리거나 못마땅하게 여겨야 ‘한국사람이 일본사람보다 높아져서 우쭐할 수 있다’고 멍청한 생각을 하는가? 석굴암에는 ‘아무런 전기 시설’을 하지 않고도 물방울이 생기지 않고 저절로 바람이 드나들면서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그런데, 이를 어설피 건드리는 바람에 다 망가뜨렸다. 팔만대장경 모신 건물에 무슨 에어컨이나 환풍기나 백열전구나 이런저런 것이 있는가? 이런 것들 하나조차 없어도 나무글판이 썩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대로 건사할 수 있도록 지은 바탕은 ‘자연(숲)을 제대로 읽어서 자연(숲)을 그대로 살리는 손길’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한국미(아름다운 한국)’란 바로 ‘자연미(숲내음)’라고 할 수 있고, 이 말이 맞으며,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를 제대로 읽어서 말했다. 조선 민화가 ‘자연미’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자연미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아니더라도, 〈에밀레 박물관〉을 손수 연 조자용 님이 밝히기도 했다. 야나기 무네요시를 깎아내리거나 비아냥거리고 싶다면, 조자용 님도 똑같이 깎아내리거나 비아냥거릴 노릇이다. 두 사람이 한국 문화와 역사와 사회를 보는 눈은 ‘한동아리’라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한(恨)’이나 ‘정(情)’이란 무엇인가? 한겨레는 정치권력 때문에 여느 사람들(백성, 옛날에는 백성이 모두 시골사람이었다)이 몹시 괴로웠다. 정치권력자와 지주와 양반이 여느 사람(백성, 시골사람)을 얼마나 모질게 짓누르거나 짓밟았는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토지수탈을 한 까닭은 ‘조선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소작료가 비싼 나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작쟁의는 일제강점기에만 불거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아닌 조선 사회에서도 끝없이 일어난 일이 소작쟁의이다. 한겨레 시골사람은 임금·권력자·지식인·양반한테 끝없이 짓눌리는 아픔(한)을 삭여서 눈물을 흘리다가도 웃음으로 녹여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정)으로 드러내는 수많은 노래(민요)와 이야기(민담, 설화, 옛이야기)와 춤(농악, 굿)과 두레와 품앗이와 울력과 놀이(마을잔치, 전통놀이) 들로 새롭게 나타냈다. ‘아픔을 달래어 이를 사랑으로 끌어올린 마음’이 바로 조선 사회를 이룬 이 나라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사람들, ‘백성’이 보여준 삶이고, 이러한 삶이 조선 막사발이나 소반 같은 데에서 애틋하게 나타났다.
야나기 무네요시를 한국사람이 깎아내리든 비아냥거리든 그리 대수롭지 않다. 그러나, 우리한테 ‘마음’과 ‘생각’이 있다면, 우리 문화와 역사와 사회가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란다. 다른 나라에서, 또 이 나라 전문가나 학자라는 이들이, 이러쿵저러쿵 읊는 말에 기대지 말고, 우리 스스로 우리 문화와 역사와 사회를 ‘정치집권자 입맛에 맞추어 뒤바꾸거나 뒤튼 이야기’도 쳐다보지 않으면서, 가만히 우리 삶을 돌아보기를 바란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일구었는지 되새기기를 바란다. 이렇게 하고 나서 야나기 무네요시를 읽어 보라. 그리고, 조자용과 예용해와 진성기와 한창기를 읽어 보라. 이러면서 송건호와 이오덕과 인병선을 읽어 보라. 이들이 쓴 책을 한 권도 빼놓지 말고 모두 읽어 보라.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손수 삶을 지은 사람들이 이룬 이야기’를 아끼는 마음을 읽어 보라. ‘시골에서 숲을 지으면서 아이들한테 사랑을 물려준 사람들이 빚은 이야기’하고 어깨동무하는 마음을 읽어 보라. 4348.2.23.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람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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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2-23 공감 (4) 댓글 (0)
야나기 무네요시 다시읽기
여러 해 만에 야나기 무네요시 님 책을 다시 읽는다. 이번에는 《조선을 생각한다》(학고재,1996)를 다시 읽기로 한다. 야나기 무네요시 님 넋을 가장 잘 간추렸다고 하는 책이지만, 정작 이 책은 출판사에서 더 찍지 않는다. 더 안 팔리니까 더 찍기 어려울 테지.
지난 2007년에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지식산업사,2007)이라는 책이 나온 적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사람을 찬찬히 읽으려 하지 않고 ‘죽은 자료’를 들추어 내는 한편 ‘집안 발자국’을 살피기까지 하는 책이라고 한다. 나로서는 이런 책은 굳이 읽고프지 않다. 내가 옳게 살아가며 옳게 바라본다면,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쓴 책을 읽으면서 얼마든지 이이 삶과 넋과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 바른지 그른지 착한지 궂은지 고운지 미운지를 깨닫는다. 나 스스로 옳게 살아가지 않거나 옳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따끔하거나 찬찬하다 싶은 비평이든 논설이든 비판을 읽는달지라도 제대로 삭이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가 읽을 글이란 ‘어느 한 사람이 온마음을 쏟아 내놓은 첫마음’ 담은 글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한 사람이 쓴 모든 글을 두루 읽을 수 있는 가운데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 같은 책을 함께 읽을 수 있다면 더 널리 헤아리거나 돌아볼 수 있기도 하겠지. 그러나, 정작 《조선을 생각한다》라든지 《공예문화》라든지 《다도와 일본의 미》 같은 책을 찾아볼 수 없다면 우리로서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살피며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아쉽다면 《조선을 생각한다》는 더 찾아 읽을 수 없으나 《다도와 일본의 미》(1996)는 아직 찾아 읽을 수 있다. 《미의 법문》(2005)이나 《수집 이야기》(2008)도 찾아 읽을 수 있다. 《조선과 그 예술》(2006)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나온 책도 하나 있다. 2006년에 신구문화사에서 다시 찍은 《조선과 그 예술》이 앞으로 언제까지 새책방 책시렁에 자리잡을 수 있을까 모르겠는데, 우리 삶과 문화와 발자취를 곰곰이 되새기고자 마음쓰는 이라면 헌책방마실을 꾸준히 하면서 야나기 무네요시 님 예전 책이든 다른 좋은 책이든 넉넉히 찾아서 읽으리라 본다. 내가 읽을 책은 ‘산 야나기’이지 ‘죽은 야나기’가 아니니까.
《조선을 생각한다》는 2000년에 읽었으니 열 해 만에 다시 펼친다. 열 해 뒤에 책을 다시 펼치니 가슴으로 새롭게 와닿는 대목이 있다. 아니, 열 해에 걸쳐 내 삶은 굵든 짧든 구비구비 헤치며 흘렀으니, 이만큼 새롭게 볼 눈길을 길렀다 할 만하리라. 이를테면, “조선에 대해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사상이 조금도 현명하지 않고 깊이도 없고 또한 따뜻함도 없다는 것을 알고(14쪽)” 같은 대목을 새롭게 읽는다. 나로서는 이 글월에서 “따뜻함도 없다”라는 대목이 눈에 걸린다. 잇달아, “이웃과의 사귐은 오직 사랑이 맺어 주는 것이다. 군정이나 압박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15쪽)”를 읽으며 가만히 되짚는다. 참말 사랑 아니고 무엇을 하겠는가. 참말 따뜻함 없이 무슨 일을 하거나 무슨 글을 쓰겠는가. 따뜻한 사랑을 담아 쓰는 글이 아니라면 나부터 이런 글을 되읽기 싫다. 내가 쓴 내 글을 나부터 기쁘게 되읽을 만해야 내 글을 사람들 앞에 내놓는다. 아니, 나는 내가 쓴 글을 나 스스로 한 해 뒤이든 열 해 뒤이든 되읽으며 내 삶을 일구고 싶지, 누구한테 내보이거나 선보일 생각으로 글조각만 붙잡을 마음이 없다. 내가 쓰고픈 글은 따뜻한 사랑을 담는 글이요, 내가 읽고픈 책은 따뜻한 사랑을 담은 책이다.
“고분을 파헤쳐 옛 예술품을 모은 사람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통해 조선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 같다(15쪽)” 같은 대목을 차분히 곱씹는다. 이는 지식인을 이르는 대목이다. 지식인들은 수많은 책을 읽어 지식을 쌓지만, 이 지식을 어떻게 펼쳐야 하는 줄을 헤아리지 않기 일쑤이다. 수많은 논문이 있고 또다른 책이 쏟아지지만, 정작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삶에는 눈길을 안 두기 일쑤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을 사진으로 담는다는 다큐멘터리 사진쟁이는 가난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들하고 어떻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나. 몸으로 부대끼며 함께 살아가는 지식인은 얼마나 될까. 환경운동을 말하면서 내 몸 깊이, 아니 내 삶으로 환경사랑 자연사랑을 잇는 일꾼은 얼마나 있다 할 만한가. 지식과 구호와 논문과 논설로 4대강사업하고 다부지게 맞선다 하는 분들은, 당신 삶을 얼마나 ‘4대강사업을 몰아낼 만한 눈높이’로 가꾼다 할는지 궁금하다. 목소리만 내어서는 아무 일을 하지 못한다. 목소리는 내지 않더라도 몸으로 살아내고 마음으로 삭일 수 있어야 한다. 농사짓는 사람들 마음이 되어야 하고, 아이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 마음이 되어야 하며, 아이를 품에 안고 살가이 보듬는 어버이 마음이 되어야 한다.
“승리하는 것은 그들의 아름다움이지 우리의 칼이 아니다(17쪽)”나 “칼의 힘은 결코 현명한 힘을 낳지 않는다(18쪽)” 같은 대목은 잘 읽어야 한다. 뭐랄까, 제대로 읽어야지. 야나기 무네요시 님은 일본 군벌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일만 놓고 슬퍼 하거나 아파 하지 않는다. 불쌍한 사람은 식민지 조선사람뿐 아니라 총칼을 앞세운 일본 군인과 권력자이기까지 하다. 아니, 식민지 조선사람보다 총칼을 앞세운 일본 군인과 권력자가 훨씬 불쌍하다. 얼마나 덧없고 부질없으며 값없는 삶을 보내는 군인과 권력자인가. “사람들은 일본의 사상을 심으려고 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살리려고는 하지 않았다(20쪽)”고 하듯, 일본 권력자와 한국 권력자는 일제강점기에 더 큰 잇속을 챙기려 했을 뿐이다. 이리하여 참으로 크나큰 잇속을 챙긴 두 나라 권력자이다. 일본 권력자만 잇속을 챙기지 않는다. 한국에도 똑같은 권력자가 있다. 그런데, 이런 권력자가 있든 저런 권력자가 있든 밑바닥에서 짓눌리는 사람들은 내 삶을 버리지 않는다. 지식인들은 갖은 일본말과 중국말과 미국말을 주워섬기는데, 이 나라에서 이 나라 말과 글을 지키거나 건사한 사람이란 누구인가. 바로 여느 사람, 수수한 사람, 가난한 사람, 지식 없는 사람 들이다. 이 나라 지식인들은 아직까지도 ‘일본 제국주의 물이 짙게 밴 일본 한자말과 일본 말투’를 아무렇지 않게 쓴다. 게다가, 당신들 지식인 스스로 이런 얼토당토않은 말에 젖어들어 있는 줄 못 깨닫기까지 한다. 일제강점기를 꾸짖으면서 정작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자들 말투와 낱말로 이야기를 한다면, 이 얼마나 슬프고 딱한 노릇인가.
지식에 앞서 삶이고, 지식이 아닌 사랑이어야 한다고 느낀다. 다른 사람들이 이러거나 저러거나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야나기 무네요시 님 책을 꾸준히 읽고 되읽어 왔다. 내가 읽는 야나기 무네요시 님은 중국사람 노신 님하고 한동아리이다. 연변땅 김학철 님하고도 한동아리이다. 남녘땅 리영희 님이라든지 일본땅 오다 마코토 님하고도 한짝이라고 느낀다. 남녘에서는 일찍이 1976년에 송건호 님이 야나기 무네요시 님 책을 《한민족과 그 예술》(탐구당)이라는 이름으로 옮긴 적이 있다. 이때 옮긴이 말에 송건호 님은 “일본에는 아직도 옛날의 식민주의적 잔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우리를 업신여기거나 재진출을 꾀하는 층이 있음에 비추어, 그들에게 저자세로 영합하는 친일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 한편 일본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두 나라의 참된 우호를 위해서는 실로 우리 민족을 이해하고 협조를 아끼지 않는 양심적 인사들이 많다는 점에서, 일본을 무조건 증오하고 배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일본의 대한 태도에 있어 무엇을 경계하고 무엇을 환영하고 고맙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분명히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적었다. 일본에서 살아가며 옳은 삶 옳은 넋 옳은 말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있는 한편, 한국에서 살아가며 슬픈 삶 그릇된 넋 못난 말로 미움을 쏟아붓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식민지 조선 무렵 일본사람’ 야나기 무네요시가 아니라 ‘참삶을 사랑하고 아낀’ 야나기 무네요시를 읽어야 한다.
생각해 보면, “금전이나 정치로는 마음과 마음이 서로 맞닿을 수 없다(23쪽)” 같은 말을 1919년에 일본사람이 읊은 대목을 못마땅해 할는지 모르겠다. 아마, 무척 못마땅하다고 느낄 만하다. 그렇다면 이무렵 한국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읊었는가. 뒷날 시인 신동엽 님은 〈껍데기는 가라〉 같은 시를 읊기도 했는데,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든 쇠붙이는 가라”라는 대목이나 “이웃 간에 영원한 평화를 구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깨끗이 하고 동정으로 따뜻하게 하는 길밖에 없다(22∼23쪽)”라는 대목이나 서로 한 흐름이고 한 넋이다.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쓴 〈조선사람을 생각한다〉라는 글이 요미우리신문에 실렸다 해서 말썽거리가 많다는 사람이 많기도 한데, 1970∼80년대에 글 하나 써서 내놓으려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에 싣지, 어느 신문에 실었을까. 동아투위니 무어니 하고 이야기하는데, 조선일보이든 동아일보이든 이무렵에 어떤 글투로 어떤 이야기를 신문에 담았는가. 더군다나 요즈음 한겨레신문 기사를 돌아보건대, 나로서는 한겨레신문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2200년이나 2500년쯤에 살아갈 뒷사람들한테는 한겨레신문이 진보 목소리를 지켜 주는 매체라 여길는지 모르나, 2010년을 살아가는 내 눈썰미로는 한겨레신문은 진보 목소리를 앞세워 장사를 한다고 느낀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같은 매체는 보수라든지 안보라든지 경제 목소리를 내세워 장사를 한다고 여긴다. ‘진보 목소리’가 아니라 ‘진보’라 한다면, 한겨레신문에는 주식시세표나 방송편성표나 골프 기사나 재벌회사 광고 따위는 실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국민주 신문이라 한다면 광고 하나 없는 신문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야지, 더 많은 몹쓸 광고를 실으며 신문사 살림을 꾸리는 일이란 얼마나 두동진 모습인가. 〈조선사람을 생각한다〉라는 글이 어느 신문이나 매체에 실렸든 하나도 돌아볼 만한 값어치가 없는 대목이다. 이 글이 어떠한 글인가를 읽어야 한다. 이 글이 무슨 뜻과 넋을 실었는가 헤아려야 한다.
삶을 읽는 책이어야지 지식을 갈무리하는 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삶을 사랑하는 글이어야지, 지식을 우러르는 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올 3월에 읽은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유미리 산문,2000)를 엊그제 다시 끄집어 내어 읽다 보니, “진상을 폭로해 버릴까 싶기도 하지만, 진상 따윈 들을 귀가 없을 것이다(40쪽)” 같은 대목이 있다. 피식 웃음이 나면서 서글퍼 눈물이 난다. 왜 우리한테는 들을 귀가 없을까. 왜 우리한테는 읽는 눈이 없을까. 왜 우리한테는 아로새기는 가슴이 없을까. 왜 우리한테는 부둥켜안는 몸이 없을까. 유미리 님은 거듭 이야기한다. “여성은 어디서든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눈썹, 복사뼈, 엉덩이 사이에서도.” 하고.
그래, 야나기 무네요시 님, ‘유종열’ 님은 어머니 같은 눈길과 손길로 글을 썼고 사람을 사귀었다. 어떤 이들은 야나기 무네요시 님을 정치나 군사나 종교나 문화 따위에 써먹으려고 휘두르기도 했겠지. 어머니한테서 돈을 울궈낸다든지 시골집 논밭을 팔아 대학교를 다닌다든지 하는 딸아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머니는 제 뼈와 살과 피를 아이한테 내어주는데다가 젖까지 먹인다. 나중에 무럭무럭 자라도록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하며 옷을 입힌다. 잘 자라며 자장노래까지 부른다.
사람들이 어머니 넋을 읽거나 어머니 사랑을 깨닫거나 어머니 슬기를 알아챈다면, 야나기 무네요시 님을 새로우면서 옳게 삭일 수 있으리라 믿어 본다. 믿어 보련다. 믿고 싶다. 한 해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12월을 맞이하면서 아름다운 삶과 사람과 사랑을 헤아리고 싶었는데, 자꾸만 슬프며 아픈 삶과 사람과 사랑만 되뇌고 마는구나. (4343.1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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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0-12-01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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