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8

이택환 목사 | Facebook 일본 검색 - 하나님의 뜻

(3) 이택환 | Facebook:


이택환
7 M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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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는 유다가 바벨론 포로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함으로 당시 유대 민족주의자들에게 매국노로 낙인 찍혔다. 그는 자신의 괴로움을 예레미야 20:7-9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지난 3.1절에 일장기를 아파트에 걸고,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이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 오히려 큰 도움이 되었다며 일제 두둔 설교를 한 이정호 목사라는 자가 있다.

그는 스스로를 예레미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일찍이 유다가 바벨론 포로가 될 운명임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입에 넣어두도록 받았다(렘 1:9). 그러나 이정호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야 할 것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러고도 저런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저런 자는 예레미야가 아니다. '예레이미친놈'이다. 예레이, 미친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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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3 March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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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인 2006년 초에 쓴 글이다. N선교회 간사 시절 캠퍼스 새학기 강의 교재 글 중 하나다. 학술적 글이 아닌 강의형 설교- 설교형 강의라, 각주도 없고 그냥 참고문헌으로 처리했다) 

부활과 하나님 나라 / 이택환

1. 1세기 기독교 빅뱅사건의 원인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AD 30년 경, 로마제국의 변방 유대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처형된 지 불과 30여년 만에, 기독교는 로마의 심장부를 위협할 정도의 큰 세력으로 자라났다. 기독교에 무슨 무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의 신앙,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충성이,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숭배)을 근간으로 하는 로마 제국의 근본체계를 흔들어 놓을 만큼, 큰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네로 황제의 기독교 대박해가 시작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A.D. 64년 7월18일, 로마 시내에 엄청난 화재가 발생했다. 큰 불길이 6일 밤낮을 타올라서 로마시의 열 네 구역 중, 열 구역이 폐허가 되었다. 당시 네로황제는 화재 현장에서 수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화재 소식을 듣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와 진화를 지휘했다. 그는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궁전을 개방했고, 공공건물을 내어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네로가 방화를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당시 네로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실정을 거듭한 관계로,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까지 네로 황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환상 속에 시를 짓고, 악기를 연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영화로도 유명한 센케비치의 소설 <쿼바디스>에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네로는 미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매우 영악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위기의 순간에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로마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가했고, 그의 계획은 성공했다. 당시의 상황을 로마의 유명한 역사학자 타키투스(55?-120?)는 자신의 <연대기, Annales>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방화와 관련된 소문을 무마시키기 위해, 네로는 희생양들을 만들어냈다. 그는 극악무도한 자들이라는 평판이 나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을 온갖 극형으로 처벌했다(십자가형, 짐승에게 물려 죽게 하는 형, 불에 태워 죽이는 형...). 그들의 창시자 예수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 황제 때에,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처형을 당했다. 그러나 일시적인 침체에도 불구하고, 이 터무니없는 미신은 유대 땅만이 아니라 로마에서까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타키투스의 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로마 시민들이 어쩌면 로마의 대화재보다, 급속도로 증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더욱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타키투스는 그 이유를 로마의 황제가 아닌, 오직 자신들의 지도자인 그리스도에 충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반사회적인 성향에서 찾았다. 그는 이러한 가치관을 지닌 기독교가 확산되면 장차 로마가 붕괴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그리스도인들을 증오해마지 않았다.
  이와 같은 1세기 기독교의 급속한 확산은 우주의 대폭발(빅뱅) 현상에 비견될 만큼 대단한 사건이었다. 기독교가 그만큼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지 아니하고서는, 그토록 짧은 기간에 그토록 빨리, 로마제국 전체에 기독교가 확산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기독교를 그렇게 막강한 폭발력을 지닌 종교로 만들었을까? 기독교의 대 폭발사건에 방아쇠를 당긴 원초적 사건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사실 1세기 유대 땅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도 메시야를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을 따랐다. 그러나 메시야로 알려진 사람들은 모두 로마인에 의해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고, 그들의 죽음과 함께 메시야 운동도 사라졌다. 때로는 그들의 후계자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메시야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 역시 로마에 의해 철저히 진압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또한 그렇게 처형된 수많은 메시야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그를 따랐던 무리들 역시 언제나 그랬듯이, 지도자의 처형과 동시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게다가 그 운동권 내부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필적할만한 그 어떤 후계자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운동은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게 되었다. 그가 처형된 지 불과 며칠이 안 되어 흩어진 자들이 다시 모여 교회를 세웠고, 몇 주가 안 되어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실제로 메시야(그리스도)였다고 증거하였으며, 불과 1-2년 안에 열정적으로 세계 선교에 뛰어들어, 이방 세계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주님임을 선포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의 전도를 받은 그리스 로마 세계의 수많은 이방인들이 앞을 다투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학자들은 한 결 같이 그 해답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찾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고서는 그 무엇으로도 그 놀라운 역사적 수수께끼를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실패했던 수많은 메시야 운동과는 근본적으로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하는 전무후무한 역사적 사건을 기초로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것이야말로 1세기 기독교 빅뱅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인 것이다.

2. 부활이 없다고?
1)합리주의적 관점에서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별히 계몽주의 이후 현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에서 볼 때,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 일처럼 여겨질 수 있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합리적인 설명들이 시도되어 왔다.
①기절설
  예수의 부활은 그가 죽지 않고 기절해 있다가 깨어나 무덤 밖으로 나온 것에 불과하다는 설. 그러나 옆구리를 창에 찔리고 손과 발에 못이 박혔던 사람이 어떻게 온 몸을 감싸고 있는 세마포를 스스로 풀고, 무덤 입구의 무거운 돌을 굴리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또 밖으로 나왔다 할지라도 어떻게 무덤을 지키던 군병들에게 들키지 않고 교묘히 탈출할 수 있었을까?
②여인들이 다른 빈 무덤을 찾아갔다는 설
  여인들은 모두 바보인가? 그렇다면 나중에 여인들을 따라간 베드로와 요한은 더욱 바보가 아닐 수 없다. 또한 빈 무덤 사건 이후,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모두가 환상인가?
③재매장설
  무덤의 주인인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제자들 몰래 다른 무덤에 재매장 했다는 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은 어떻게 자신이 재매장 한 줄도 모르고 예수가 부활했다는 거짓말을 퍼트린 예수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교회의 일원이 되었을까?
마 27:57 - 58) 57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④제자들이 훔쳐갔다는 설
  라이마루스에 의하면 예수의 제자들은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에서 메시야 왕국을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의 처형은 그들의 희망을 앗아갔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에 대한 기대를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시체를 훔쳐낸 후, 예수가 부활 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그들은 교회를 세우고 예수가 인류의 죄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받은 구원자라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마 28:13 - 15) 13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14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그러나 세례 요한이 처형된 후 엄청난 소요가 있었음을 볼 때, 빌라도는 예수의 죽음이 몰고 올 소요나 반란을 사전에 충분히 예견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예수의 시신을 자신들이 신뢰할 수 있는 아리마대 요셉에게 내어 주어 무덤에 안장하고, 철저한 감시를 통해 외부의 접근을 막은 것으로 보인다(마 27:63-66)
마 27:63 - 66) 63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65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66저희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과연 예수의 시체를 훔쳐갈 수 있었을까? 만약 이 가정대로라면 이는 역사적으로 가장 놀라운 집단사기극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공모한 사기극은 오래가지 못한다. 언젠가는 공모자 중 일부가 배신하거나 전모가 폭로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사기극을 유지하기 위해 무수한 예수의 추종자들이 목숨을 걸었다고 상상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또한 이런 사기극에 처음부터 가담하지 않은 사도바울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철저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할 길이 없다.

⑤마음속의 부활
 부활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은유적이고 상징적 의미로 이해하려는 경우. 예수님의 부활을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부활로 믿기보다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이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다는 단지 ‘마음속의 부활’ 정도로 생각하는 것.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순간 새로운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발생하게 된다면, 그것은 결코 합리적인 관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하여 두 가지 확실한 사실은 ①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것, 그리고 ②수많은 사람들이 부활한 예수와의 만났다는 것이다. 물론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 자체나, 부활 예수의 현현사건들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확증일 수는 없다. 전자는 도굴을 의심케 하고 후자는 환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빈 무덤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 사건을 동시에 고려하면, 그것은 부활 신앙의 출현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 부활을 의심했던 도마는 분명히 빈 무덤에 관해 알았을 것이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비로소 올바른 부활신앙을 소유하게 되었다(요 20:28). 동시에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은 도마가 만난 그리스도가 환상의 그리스도가 아닌 실제의 그리스도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부활의 증거는 제자들의 변화에 있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수천 명을 회심케 하는 능력의 종이 되어, 유대의 공회에 맞서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짐을 기뻐하는 자가 되었다(행 2:14-41, 4:1-22, 5:41). 주의 형제 야고보는 원래 예수를 믿지 않는 자였으나(요 7:5),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후(고전 15:7)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사울은 초대교회를 박해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나,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 이방인의 전도자 바울로 거듭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외에 무엇으로 이들의 놀라운 변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

2)보수주의적 관점에서
  죽은 자의 부활은 기본적으로 현실의 질서를 파괴하는 전복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기독교가 박해를 받은 것도 로마제국의 질서에 반하는 부활신앙의 반사회적인 요소 때문이었다. 기독교가 현실에 대해 순응적이고, 몸이 아닌 단지 영혼만의 부활을 추구하는 종교였다면 로마당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기존의 질서가 위협받는 것을 원치 않는 보수주의자들에게 부활 사상은 처음부터 온건한 사상이 아니었다. 1세기 유대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은 유대의 귀족 지배계층인 사두개인들이었는데, 그들 역시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도 보수적으로 해석하여 성경 가운데에서도 오직 모세오경만이 진정한 성경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모세오경에 언급되지 않은 부활을 거부했으며, 부활 사상은 특별히 모세오경의 ‘수혼법’(신 25:5-6)에 위배된다고 보았다. 이런 사두개인들이,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만약 형제들이 계속 죽게 되어, 차례로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된 여자가 있다면 그녀는 부활 후, 과연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라고 질문했다.
마 22:23 - 33) 23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24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26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너희가 성경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오해하였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가? 부활 때에는 천사와 같이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기 때문이다.
2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생육하고 번성하는 사명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에서 주어진 사명이지, 하나님 나라에서까지 연장되는 사명이 아니다. 따라서 부활 때에는 더 이상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한 결혼제도가 없다. 천국에서는 각자에게 주어진 영생을 누릴 뿐이다. 그렇다면 모세오경은 과연 부활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부활을 말하는 것은 정말로 모세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인가? 예수님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모세오경에 자주 나오는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자기 선언의 말씀(출 3:15)은 하나님께서 이미 죽고 사라진 ‘과거’의 족장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족장들의 ‘현재’의 하나님이심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31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이는 하나님 안에서는 이미 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말한다.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미 죽은 자들이 어떻게 아직 살아있다는 말인가? 모든 피조물들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직선적인 흐름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과거-현재-미래라고 하는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는 이미 죽은 자들의 죽음조차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결국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자들이 살아 있음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오, 부활의 하나님이시다. 
3. 부활에 대한 오해들
  한편 부활이 있다고는 믿지만, 부활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1)부활은 소생이 아니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세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①갓 죽은 야이로의 딸을 즉시 살리신 사건(마 9:18-26: 막 5:21-43: 눅 8:40-56), ②이미 죽어서 장사 지내러 가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눅 7:11-17), ③죽은 지 나흘이 지나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그것이다(요 11:1-44). 이 중에서 특히 나사로의 경우는 종종 ‘나사로의 부활 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사건들은 ‘부활’이 아닌 ‘소생’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런 소생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다루어 져야 한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사용된 용어는 특별히 '아나스타시스' 라는 명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단어는 영원한 부활(resurrection)을 의미하는 말이며, 다른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경우에는 소생(rising)을 뜻하는 ‘에게이로’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소생한 자들은 일시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결국은 다시 죽었다.
2)부활은 승천이 아니다
  유대교에서는 구약의 존귀한 인물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성경에는 에녹(창 5:22-24, 히 11:5)과 엘리야(왕하 2:1-12)의 승천이 기록되어 있지만, 위경이나 기타 유대교의 문서에는 여러 인물들이 승천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몸이 죽지 않은 상태로 승천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완전히 죽어서 장사 지낸 바 된 몸이 다시 부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영지주의(Gnosticism)의 부활사상
  1-2세기 대표적인 기독교 이단인 영지주의의 이분법적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의 육체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매개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 아들은 결코 천한 육체로 오시지 않았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나타난 가현적 존재로 믿었다(가현설, Docetism). 그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하지도 않았으며, 가현적인 육신을 입은 까닭에 고통을 당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지주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①대리처형설
  십자가에서 처형된 자는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설. 그러나 예수의 쌍둥이 동생이 있었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고, 무엇보다 로마 당국이 예수 대신 동생을 처형할 만큼 어리석었을까? 예수는 정말 자기 대신 동생을 죽게 하고 스스로는 부활한 사람으로 행세한 사기꾼이었을까? 제자들은 그런 사실을 알고 따랐을까 모르고 따랐을까? 예수의 쌍둥이 동생 외에, 구레네 시몬(막 15:21), 바라바(마 27:21) 등이 대리처형 되었다는 설이 있다.
②영적부활설
  영지주의 문서인 <베드로복음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인간의 육체적 가면을 벗어버리고 다시금 영적 존재로 들리어 올라간 것으로 묘사한다. <도마복음서>, <베드로의 묵시록> 등에서도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지 않고 피를 흘리지도 않은 가현적인 예수를 언급하고 있다. <마리아의 복음서>는 예수의 부활을 영적 환상으로 해석한다. <레기노스의 편지>에는 부활이 해탈과 같은 깨달음의 순간이라고 본다.
③영혼불멸로서의 부활
  플라톤 사상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에는 인간의 영혼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영혼불멸사상이 있다. 따라서 이들이 말하는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이 아닌, 단지 불멸하게 된 예수의 영혼의 불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이 해방되는 것으로서의 부활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분명히 몸의 부활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을 “미혹케 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로 단죄한다(요이 1:7).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역시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의 몸이 상처와 흔적을 지닌 채 다시 살아나셨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라고 친히 증거하셨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전과는 다른 ‘신령한 몸’을 입으셨다. 그래서 벽을 통과하기도 하고, 시공을 초월하여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신다. 이에 대해 바울은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4절)라고 설명한다. 

4)부활신앙은 현실유지적인 근본주의 보수사상이 아니다
  앞에서 기본적으로 사두개인들과 같이 보수적인 사람들은 부활을 믿기 어렵다는 것을 언급했다. 성경과 교회 역사가 증거하는 부활신앙은 고난에 대한 궁극적인 항거이며, 모든 면에서 급진적인 신앙이었다. 부활은 단순한 소생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부활신앙을 철저히 믿는 사람들은 진보주의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보수 근본주의적인 신앙인들인 경우가 많다. 이는 그들의 부활신앙이 현실과는 무관한 “죽어서 가는 천국에서의 부활신앙”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암시한다.
  만약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가 고상한 능력을 지닌 채 단지 천국에 갔다고 믿었고, 그들의 목적이 장래 거기서 예수와 만나며, 실제로 현재에 있어서 그러한 축복을 어느 정도 미리 맛보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었다면, 그들은 로마제국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였고, 새 창조가 시작되었으며,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들이 되었다면, 그래서 예수가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땅에서도 주라고 주장했다면, 그들의 주장은 궁극적으로 가이사의 주장과 갈등을 빚게 되었을 것이다. 바울서신과 요한계시록은 곳곳에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부활은 전복적이며 급진적인 신앙 이상이었다. 부활신앙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기 백성들의 해방을 약속하셨고, 그리스도가 로마 황제의 박해로부터 구원을 약속하셨음을 증거한다. 그런 점에서 부활신앙은 결코 현실에 안주하는 보수주의에 머물 수 없다.

4. 부활의 의미 
1)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함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한 인간이 우연히 어쩌다가 다시 살아난 엽기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하신 사건이다. 나사렛 예수는 부활을 통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로 확인되었다(롬 1:4). 
롬 1:4)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2)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증함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 처형에서 완성된 그의 메시야로서의 성취를 받아들이고 확인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의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음을 선포한다.
골 2:12 - 15) 12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만일 메시야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무익한 것이며,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죄 안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죄 문제가 실제로 해결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바로 부활이다.
고전 15:17 - 18) 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3)새로운 창조의 시작
  그러나 부활의 가장 심층적인 의미는 새로운 창조와 관계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개인의 미래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역사와 종말론에 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아침에 무덤에서 일어나 변형될 때, 그 사건은 엄청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부활절은 하나님의 새로운 주간의 첫째 날이었으며, 길고 긴 저녁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창 1장), 새 날의 찬란한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 순간이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었다. 그러므로 부활은 개인들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위한 미래에 대한 희망의 표징이다.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분명하게 보았던 것처럼, 모든 피조물들이 그 출애굽을 시작하고, 그 부패와 쇠퇴, 소멸의 노예를 벗어나게 될 것에 대한 표징이다. 신약성경에는 죽음 자체가 폐기될 대상, 살아계신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눈물을 씻어줄 새로운 세상이 올 것에 대한 약속들이 많이 있다(롬 8:2, 고전 15장, 딤후 1:10, 계 7:17, 21:4). 
4)현재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게 하는 힘
  부활에 대한 개인적 희망은 모든 피조물이 새롭게 갱신되는 하나님 나라의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보다 큰 희망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몸의 부활을 제거한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잘못된 부활 사상은 우리 몸의 현실과 무관하게, 육체의 죽음 이후, 몸으로부터 해방된 영혼의 부활을 의미하는 신앙으로 발전했는데, 이것은 우리들 자신의 몸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선함을 부인하는 것이다. 몸의 부활에 대한 희망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현재의 삶이 매우 중요한 순간임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현재 행하고 있는 일들, 즉 정의와 자비를 행하고,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진리를 기뻐하며, 사랑의 행동과 친절과 용서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 모두 중요하며 영원히 중요하다. 이들은 하나님의 미래를 건설하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거룩하게 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인간 스스로의 선함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 위에서의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며, 공동체와 개인들 속에 임재하는 부활하신 예수의 영에 의해서 그 힘을 얻는다.
골 3:1 - 11) 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11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참고문헌
톰 라이트, 몸의 부활의 변혁적 현실, 예수의 의미, 마커스 보그 / 톰 라이트 공저, 한국기독교연구소
톰 라이트,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크리스천다이제스트
톰 라이트,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크리스천다이제스트
허호익, 예수 그리스도 바로보기, 한들
이형기, 세계기독교회사 (1), 한국장로교출판사
존스토트, 기독교의 기본진리, 생명의 말씀사
김신일, 신약의 부활신앙, 인터넷 자료
End of resul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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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3 August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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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 눅 12:13-21

우리의 삶은 종종 ‘두려움’과 ‘염려’ 사이에 둘러싸인 샌드위치와 같습니다. 요즘 북한 김정은이 연일 미사일을 쏘아대고, 일본 아베가 경제보복을 감행하는 이 상황도 딱 그렇지요. 두려운 미래, 염려스런 현실! 그런데 마침 오늘 누가복음 12장 본문도 이와 유사합니다. 일단 본문 이전 단락인 눅 12:1-12을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두려워하다’입니다. 헬라어로 ‘포베오’, 영어 ‘포비아’의 어원이지요. 7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그런가하면, 오늘 본문 다음에 나오는 단락이 눅 12:22-34인데, 여기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염려하다’입니다. 22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또 25-2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이처럼 오늘 본문은 앞에는 ‘두려움’이, 그리고 뒤에는 ‘염려’가 마치 샌드위치처럼 둘러싸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개의 이야기로 되어 있는데 모두 두려움과 염려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두려움과 염려의 핵심에 탐심이 있다고 보셨습니다. 
15절 a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먼저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그날 수많은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아버지의 유산상속 문제를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선생님, 제 형에게 명하시어 아버지의 유산을 저와 나누도록 해 주십시오!” 율법에 의하면 간단합니다. 형과 동생이 2:1로 나누면 됩니다. 하지만 이 간단한 문제를 그들이 해결하지 못한 것을 보면, 필히 복잡한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자신의 몫을 이미 형에게 빼앗겼거나, 빼앗길 처지에 놓여있는 것 같습니다. 그로서는 심히 두렵고 염려스런 상황이지요.

21세기 한국에도 비슷한, 아니 더 심각한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몇 년 전 의정부에서 30대 남성이 집에 불을 지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벌어서 부모를 봉양한 것은 동생 자신인데, 그의 부모가 정작 부모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형에게, 단지 형이라는 이유로 부모의 전 재산인 아파트를 물려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이 온 가족이 모인 날,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처럼 형제간에 종종 큰 비극과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유산 상속문제, 예수님은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을까요? 14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예수님은 상속 문제로 형제간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을 거절하셨습니다. 당시 랍비들이 그렇게 했듯이, 예수님 또한 율법을 따라 가장 공정한 판결을 충분히 내리실 수 있으셨습니다. 이 사안의 핵심이 정의의 문제라면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사안을 정의보다 탐심의 문제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판결대신 모든 탐심을 물리칠 것을 그들에게 명하셨습니다(15절), 형제에게 탐심이 가득하면, 어떤 정의로운 판결이 내려진다 하더라도 그들이 승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탐심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15절에서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부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잘 알듯이 탐심은 우상숭배예요(골 3:5). 그리고 모든 현실 속의 우상숭배는 곧 부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믿는 맘몬숭배입니다. 그런데 그 맘몬이 우리를 통제하는 방법이 바로 두려움과 염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그 두려움과 염려의 샌드위치에 갇혀서, 맘몬의 좋은 먹이 감이 되곤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탐심이라는 맘몬숭배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촉구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반대의 길을 택합니다. 탐심이 어디에서 오는가? 부의 결핍에서 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저 소유가 넉넉지 못한 데서 나오는 부작용이 탐심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관점에서 앞의 의정부 화재사건을 보면, 만약 동생의 소유가 넉넉했더라면, 형이 부모님으로부터 아파트 한 채가 아니라, 두세 채를 받아도 절대로 집에 불 지를 리가 없다는 논리가 나올 법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물론 소유가 넉넉한 사람들은 직접 불을 지른다거나 주먹다짐 같은 것은 잘 하지 않겠지요. 대신 변호사를 불러 소송을 제기합니다. 유명한 예가 2012년,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차명 상속재산을 두고, 장남(이맹희)과 삼남(이건희) 사이에 벌인 소송 사건입니다. 1심, 2심 모두 삼남이 이겼는데(장남이 3심에서도 질 것 같아 포기) 당시 원고 측 1심 청구금액이 무려 4조 849억 원이나 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소유가 넉넉한 재벌에게도 탐심이 있다는 것, 아니 오히려 그들의 탐심이 더 크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준 것이지요.

이제 예수님은 두 번째 이야기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16-21). 한 부자가 있는데, 그의 밭에는 소출이 풍성합니다. 그 결과 곳간에 곡식이 얼마나 많은지, 쌓아둘 곳이 없습니다. 이렇게 소유가 넉넉하면, 굳이 탐심 따위를 부릴 필요가 없을 법한데, 그렇지 않아요. 탐심이 소유의 결핍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소유에 비례해서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유산이 있으니까 형제가 상속 다툼을 하는 것이지, 아무 것도 없으면 그런 다툼도 없습니다. 탐심이 많으면 두려움도 많고 염려도 많은 법이지요. 이 부자는 쌓아 둔 곡식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날마다 두려워하고, 쌓아 둘 곳 없는 곡식을 어떻게 안전하게 쌓아 둘 것인가, 매일 염려합니다.
이 비유에 주로 나오는 단어가 ‘풍성’, ‘부요’, ‘더 크게’, ‘많이’, ‘쌓아두다’ 등입니다. 모두 소유의 넉넉함과 관련된 단어들이지요.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속에는 동시에 두려움과 염려 역시 풍성하고, 부요하고, 더 크고, 더 많이, 쌓여있습니다. 이 부자는 자신의 두려움과 염려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곳간을 헐고. 새 곳간을 더 크게 지어서, 자신의 모든 곡식과 물건(아가도스. 좋은 것)들을 가득 쌓아 둘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계획을 성취해 내지요. 이제 그에게는 그의 즐거운 독백처럼, 그저 편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만 남은 것으로 보였습니다(18-19절).
90년대 베스트셀러였던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는 3-40대에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이 돈을 벌게 만든 후, 50대부터는 놀고먹고 세계일주하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제시했습니다. 사실 퇴직연금, 국민연금도 같은 개념입니다. 젊어서 열심히 돈을 벌어 연금을 내고, 늙어서는 일 하지 않아도 그 연금으로 편히 먹고 살자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오늘 이 부자를 특별히 악하다고 정죄할 게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영어로 fool, 바보입니다. 그의 생명이 자신이 소유한 많은 부에 달려있다고 그가 믿었기 때문입니다. 즉, 돈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논리지요.
한때는 그가 맞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조금만 넘쳐도 쌓아 둘 곳이 없는 기존의 작은 곳간을 헐고, 이제 아무리 쌓고 쌓아도 그 끝이 없는 더 크고 더 완벽한 곳간을 지었을 때, 그의 신학이 옳다는 것을 입증한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도로 찾는다”(아파이테오)는 것은, 주인이 맡긴 것을 다시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부자는 독백 중에 I와 my라는 말을 계속해서 사용합니다. “내가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그 때는 모든 것이 다 그의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그의 생명조차 실은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찾아가신 하나님의 것이었지요. 따라서 살아서 그가 소유한 모든 것들도 다 그의 것이 아니라, 참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받아 잠시 동안 사용했던 점유물들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우리의 불행이 소유의 넉넉지 않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슬금슬금 탐심을 합리화합니다. 그래서 우애마저 팔아먹고 형제간에도 유산 싸움을 하고 소송을 벌이지요. 교회의 분쟁도 대부분 같은 이유 때문에 일어나고, 그 절정에 명성교회 세습이 있습니다. 두려움과 염려는 탐심이 제공하는 데일리 서비스지요. 오늘 말씀은 우리가 이런 탐심 시스템에서 속히 벗어나기를 촉구합니다. 부지중에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도로 찾으시기 전에 말입니다.
(2019. 8/4, 성령강림주일 후 여덟 번째 주일, 그소망교회 교회력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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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2:13-21)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택환
12 June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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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종하겠습니다." - 언더우드
6/12 오전 7시, 서교동교회에서 전시중인 캘리그라피스트 임동규 선생의 <언더우드 선교사 캘리그라피 어록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서울서노회 목사님 몇 분이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함께 했습니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정선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어록을 임동규 선생이 수십 점의 캘리그라프 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한동안 새문안교회 전시회를 마치고 지금은 서교동교회에서 전시중입니다. 
다음주에는 영등포교회를 거쳐 양평동교회로 이어지는데, 이들 교회의 공통점은 모두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택환
2 December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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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말이면 교회가 일본 가고시마 선교사님 가정에 선교사님이 필요로하는 간단한 선물을 보내드린다.
예년에는 티셔츠, 자녀들 문구, 책, 기초 화장품, 약품, 한국과자 등을 보내드렸다. 올해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서울 및 한국여행지 등도 소개해 드리고 다양한 한국차, 과자, 떡볶이 등을 대접하고 싶다고 하신다. 
우리교회가 보내드린 것으로는 단지 맛뵈기 밖에 되지 않겠지만, 기쁘게 받으실 줄 알고 오늘 즐겁게 보내드렸다. 부피를 줄이기 위해 일부 차/과자류는 포장을 해체해 내용물만 보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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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18 March at 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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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매국적인 미국 퍼주기라며 중도는 물론 지지층조차 돌아서서 욕하게 만든 한미 FTA를 과감하게 체결했다. 난 당시 노무현을 지지했다(내 판단이 옳았다). 결과적으로는 한미 FTA 체결은 국익에 큰 도움을 주었고 지금도 노무현 최대의 치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문재인의 북한 퍼주기는 사실 보수우파 외에는 큰 반발이 없었고 오히려 중도 다수도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나도 당시 문재인 대북정책을 지지했다(돌아보니 별로 잘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문재인 임기 중반 이후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남북평화는커녕 북한의 온갖 미사일뿐이었다.

윤석열의 일본 퍼주기 현재 극보수 외에 중도 대부분까지 비난 일색인데, 향후 어떻게 될 것인가? 그가 최대 치적거리가 될 거라 믿고 배팅했는지 모르지만 자칫 탄핵의 빌미가 될 수도 있겠다. 지금 난 윤석열을 지지할 수 없다. 처음부터 지뢰밭인데 달리 무엇을 하고 말 게 없다.
참, 이명박을 빠뜨렸는데, 그때 난 정말로 이명박이 수입한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여기저기서 광우병 환자들이 발생할 것으로 믿었다. MBC에서 전문가들이 하는 이야기와 영상을 보면 대부분 그렇게 믿지 않겠나? 난 광화문까지 나가진 않았지만, 열심히 광화문에 나갔던 사람들도 나중에 미국산 소고기를 맛있게 잘만 먹더라. 난 한동안 목에 걸리더만. 

2000년대 초반쯤 스크린 쿼터제 폐지 반대운동도 생각난다. 대방동 여성센타에서 토론회가 열렸는데 최민식, 박중훈 이런 사람들이 나와서 스크린 쿼터가 폐지되면 한국 영화는 막강한 자본의 미국 헐리웃 영화에 잠식되어서 곧 망한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이후 지금까지 한국영화는 오스카상, 그래미상을 휩쓸며 사상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그나마 우리가 좀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미래를 지나치게 낙관하는 자들의 반대편에서 미래를 우려하며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택환
8 November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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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주일) 그소망교회 이전 안내
그소망교회가 카페바인 홍대점(서대문구 신촌로25)으로 이전합니다. 카페바인은 월간 <복음과 상황>의 지면 운동을 오프라인으로 연결하기 위해 2010년에 시작한 카페로 주일에는 예배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2016년 11월 20일부터는 그소망교회가 주일예배 장소로 사용합니다.
그소망교회(예장통합)는 출석인원 15-20명의 작은 개척교회입니다. 예배는 주일에 있고 별도의 주중 모임은 없습니다. 예배 시간 및 담당 교역자는 아래와 같습니다. … See more

이택환
29 February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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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뿐이겠는가? 한국인의 입국을 거부하는 대부분의 나라가 다 그러할 것이다. 검사를 하지 않는/못하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누가 알겠는가?
[노컷브이] 한국 7만건 검사할 동안 6천건…일본의 ‘코로나 검사난민’ 논란
NOCUTNEWS.CO.KR
[노컷브이] 한국 7만건 검사할 동안 6천건…일본의 ‘코로나 검사난민’ 논란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한 무소속 의원은 26일 한국에 비해 코로나19 검사 건수가 터무니없이 낮은 일본의 현실을 들어 검사를 받고 싶어도 검사를 못 받는 ‘검사난민’ 문제를 제기했다. 전역에서 의심환자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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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30 July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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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비록 박근혜일지라도 임기 중 남북평화를 다진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기를 바랬다. 일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눈물을 씻어주는 위대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랬다.
요즘 황아무개, 나뭐시기를 비롯한 그 당 관계자들을 보면, 문재인의 파멸을 위해서라면, 북한이 우리에게 미사일을 쏴대도 좋고, 심지어 일본이 독도를 가져가도 좋다는 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라가 잘되기보다, 차라리 경제가 파탄 나서라도 오직 문재인이 망하기만 바라는 자들 같다. 내 생각이 큰 착각이기를 바란다.


이택환
5 March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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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그런데 마귀가 뭘까? 원래 유대인이 사용하던 ‘사탄’(대적자, 고소자)이라는 히브리어를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옮길 때 ‘디아볼로’로 옮겼다. 헬라어 디아볼로가 영어의 ‘데블’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동양문화권에서는 데블을 ‘마귀’라고 한다. 그러므로 마귀와 사탄은 같은 개념이다. 귀신은 조금 다르다. 구약에 정확히 귀신을 뜻하는 히브리어가 없다. 신명기 32:17에 귀신으로 번역된 ‘라쉬딤’이라는 단어는 이방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영어 성경은 이를 ‘데몬스’라고 했고 데몬은 헬라어로 다이몬이다. 귀신은 사탄/마귀의 졸개쯤 된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대략 추정하는 것이지 무슨 사탄학과 같은 정식 학문이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사탄과 마귀는 같은 개념인데, 귀신들의 두목이라는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그런데 사탄이 정말로 존재할까? 혹시 사탄을 본 사람이 있을까? 세상은 넓고 사람들은 다양하기 때문에 어디선가 사탄을 만났다는 사람들이 꼭 있다. 그런데 그들도 그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사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물리적인 세상에 포착되지 않는다. 그러니 누가 사탄과 인터뷰를 했다 해도 객관적인 녹화, 녹음자료가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사탄이 없다는 증거는 아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다. 그런데 광야에서 사탄이 실제로 예수님 앞에 자신의 흉악한 모습을 드러냈을까?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라고 육성으로 말했을까?, 그가 정말로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려가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여주고, 또 순간이동으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예수님을 세웠을까? 누가복음을 기초로 만든 기독교 선교 영화 하나가 유튜브에 있는데 거기에는 사탄이 뱀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 뱀이 말도 하고, 예수님을 데리고 순간이동도 한다.

  한편, 이문열의 소설 <사람의 아들>에는 사탄이 구두수선공 아하스페르츠라는 인물로 등장한다. 아하스페르츠는 인간의 배고픔과 고통을 외면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를 찾아가, 그의 능력으로 굶주리는 인간들에게 빵을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니라!”고 하시면서 그의 요구를 거절한다. 그러자 아하스페르츠가 예수님을 격렬하게 비난하는데, 이런 식으로 성경을 재해석해서 새롭게 설명한 것이 오히려 사탄을 ‘말하는 뱀’이나 ‘머리에 뿔 달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존재’로 묘사하는 것보다 더 그럴듯해 보인다.

  그런가 하면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이라는 책을 쓴 월터 윙크는 세상의 온갖 사회경제적, 정치적 위기의 배후에는 우리가 대면해야 하는 근본적인 영적 실체, 즉 사탄의 세력이 있다고 보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과거 우리나라 IMF 사태도 사탄의 힘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수많은 기업이 파산하고, 실직자가 양산되고, 그로 인한 가정파탄, 이혼, 자살, 노숙자의 급증과 그 이후에도 막대한 후유증이 경제 양극화, 고용불안, 청년실업 등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되기까지 국가와 기업은 빚내서 잔치를 벌이도록 내부가 썩는 줄도 몰랐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오히려 OECD에 가입한 우리나라가 단군 이래 최고로 잘사는 나라가 됐다며 샴페인을 터뜨렸다.
  고후 4:4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라는 말씀이 있다. 바울은 여기서 사탄을 ‘이 세상의 신’이라고 표현하면서 사탄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한다고 말한다. 마음은 생각의 결과를 말하고, 혼미하게 하다는 ‘시야를 흐리게 하다’. ‘눈을 멀게 하다’라는 뜻이다. 즉 사탄이 사람의 분별력을 상실케 하여 그릇된 결정을 내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라가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우리가 지금 최고로 번창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배후에 사탄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도 사탄이 푸틴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대혼돈의 대선 정국에서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은 어떨까? 몇 년 전 한 정치인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대선 때는 멀쩡한 사람도 정신이 약간 간다.” 안타까운 것은 하필이면 일부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이번에 정신이 약간이 아니라 지나치게 많이 갔다는 것이다. 누군가 그들의 마음을 급 혼미하게 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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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3 September 2021
  · 
진짜 힘 있는 글이 이런 글이다(아래 김형석 교수님의 둘째 따님인 김 할머님의 글). 
김 할머님의 글은 정철승 변호사의 다음 글(일부)에 대한 답변이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김형석 교수는 이승만 정권때부터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60여년 동안 정권의 반민주, 반인권을 비판한 적이 없었는데 100세를 넘긴 근래부터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들을 작심하고 하고 있다고 한다. 이 무슨 1945년 8월 16일부터 독립운동하는 짓인지 모르겠는데, 이래서 오래 사는 것이 위험하다는 옛말이 생겨난 것일 게다. 어째서 지난 100년 동안 멀쩡한 정신으로 안하던 짓을 탁해진 후에 시작하는 것인지.. 노화현상이라면 딱한 일이다. 최근에는 하다하다 일본 우익 언론매체와 인터뷰를 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대일외교에 대해 비판이 아닌 비난을 쏟아냈다고 한다. 이제는 저 어르신 좀 누가 말려야 하지 않을까? 자녀들이나 손자들 신경 좀 쓰시길..."

Jaetae Lee
2 September 2021
  · 
김형석교수님 큰 사위이신 최병일William Choi교수님은 30년 전 미국서 연수할 때 NIH 심장혈관센터의 세미나서 처음 뵈었다.  워싱턴DC근처에서 개원하며 조지타운대학의 attending교수로 계셨었다. 수원의 아주대학병원 개원할 때 순환기내과 과장으로 부임하시어 정년퇴임 후 다시 가족이 계신 미국으로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다. 당시 선생님 부인이신 김형석교수님 큰 따님도 뵌 적 있다. 참 단아하신 분으로 기억한다.
한국에 계신 70대 중반은 되셨을 둘째 따님이 쓰레기같은 발언을 일삼는 한 인간에게 격조높은 글을 쓰셨다. 
한줄로는 '얘야 인간이 되어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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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석 교수님의 둘째 따님이 정철승 변호사에게 ♡

정변호사님께 올립니다. 
저는 100세 넘은 아버님 김형석 교수님의 둘째딸로 
나이 70이 넘은 볼품 없는 대한민국의 한 할머니입니다. 
나이많고 무식한 한 여인이 올리는 글 죄송합니다. 
저의 아버님은 
이북에서 할머님과 두명의 삼촌과 고모 한 분을 모시고 사선을 넘어 남하하여 흙집을 지어 20명 가까이 되는 식구들을 거느리고 끼니를 어렵게 사셨습니다. 
저도 이화여중과 이화여고 6년을 신촌에서 산을 넘어 북아현동을 지나 서대문까지 언니 동생과 걸어서 다녔습니다. 
그 당시는 여러 교통여건도 안 좋았지만 돈도 아끼기 위해서였지요. 
저의 아버님은 
김일성도 만났을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살 수 없는 자유가 없는 나라가 북한이라는 생각은 뼛속 깊이 박혀 있으신 분입니다. 
남한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으실까요! 
남하해서 힘들게 산 삼팔선 따라지들의 삶을요!
아버님의 인터뷰 내용이 좀 심하실 수 있습니다만 너그러운 이해를 바라는 딸의 심정도 헤아려 주십시요. 
여러 여러 정권이 지나오면서 저는 보아 왔습니다. 
아버님이 저녁 퇴근 하실때 형사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아버님을 연행해 가시는 것 한두번 겪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잡혀가시고는 삼일만에 집에 오신 적도 있었습니다. 
정권에 불리한 강연을 하신 탓이지요. 

“그나이가 되도록 조용하다가 늙어서…”운운하시 것은 잘못 아신 것입니다. 
저는 정변호사님께 부탁 드립니다. 
정변호사님 말씀 맞습니다. 
“늙은이가 뭘 안다고 그만 밥이나 먹다가 죽지…” 맞습니다. 
얼마나 많은 변화와 세대차를 잘 따라가지 못하는 우리들은 늙은 세대입니다. 뒷방에 있어야지요. 
그러나 부탁 드립니다. 
저는 공부도 짧고 무식한 늙은이지만 아버지에대한 사랑과 아픔으로 감히 부탁을 올립니다. 
저의 아버님의 글이나 강연 인터뷰에 대하여 어떤 비판이나 시비는  당연합니다. 
그러나 
딸로서 부탁드립니다. 
인신공격은 말아주세요. 
가슴 아픕니다. 

문재인 다통령께서 대통령 취임식에서 모든 국민이 통합해 한데 어울려 잘사는 나라 전에 없던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아시지요?!

‘나와 생각이 다르면 다 나쁜놈이다’‘  하지 마시고 생각이 다른 상대방의 마음도 좀 헤아려주시면 어떨까요?
정변호사님. 
앞으로 저도 무식한 한 늙은이로서 좀 더 자숙하고 조심 하겠습니다만 정변호사님도 부모님이 계시고 자식이 있으실터이니 서로서로 가슴아픈 상처는 남기지 맙시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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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16 March 2020
  · 
2월 초만 해도 우한폐렴이 오래 갈 수 없는 이유를 묻는 농담이 있었다. 정답은 “중국산이기 때문에”였다. 그 때만 해도 우한폐렴은 여러 모로 우리나라보다 못한 중국사람들이나 걸리는 질병이지 우리와는 무관한 질병이라는 근거 없는 생각들이 있었다. 
신천지 부산 야고보 지파장이라는 자는 2020. 2/9 설교에서 “중국 우한 사람들은 폐렴으로 700명이나 죽었지만, 같은 우한폐렴 발원지에 있는 신천지 지교회 성도들은 한 사람도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자랑했다. 그는 “신앙 가운데 믿음으로 제대로 서 있으면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2월 17일 31번 확진자 이후 아이러니하게 국내 코로나-19의 근원지가 다름 아닌 신천지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면 코로나-19는 국경도 없고 인종과 종교, 계층과 직업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럼에도 국내 일부 목사들은 한술 더 떠서 우한에 괴질이 발생한 것은 교회를 핍박한 중국, 그중에서도 가장 핍박을 심하게 했던 도시 우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카톡이 내게도 여러 통 들어왔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코로나-19가 국내를 강타하자. 이번에는 오랫동안 교회를 괴롭혀 온 신천지 이단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환호했다. 그리고 신천지를 비웃으며 더욱 열심히 예배했다. 신천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이미 그 때 전국 교회 곳곳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일반 한국인들도 그 언저리에 일본 크루즈 선에서 수백 명의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하자, 일본정부가 신속히 대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비웃으며 여유를 부렸다. 그러나 이 역시 대구-경북에서 발생한 대규모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로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내 코가 석 자가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어떤 정치인들은 이 일을 ‘대구 코로나 사태', ‘대구 봉쇄’, ‘대구 손절’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들에게 서울-경기는 대구와 다르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인구가 가장 많은 서울-경기 지역이 가장 위험한 곳이 됐다.

유럽이나 미국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한국 일본 등의 코로나 사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을 것이다. 너희와 우리는 다르다 생각하고 동양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폭력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점점, 아니 어쩌면 이미 상황이 역전되었다. 중국은 벌써 서방을 향해 자신의 선 경험을 나눠주려고 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도 뒤지지 않으려는 모습이다. 부디 너무 앞서 나가려다 역풍 맞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말하려는 바는 두 가지다. 

첫째, 투명해야 한다. 중국의 피해가 컸던 것도 그 나라의 불투명한 정치문화 때문이다. 우리는 신천지 이단을 통해 중국의 정치문화 이상의 불투명함과 거짓과 속임수가 저지른 악을 경험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코로나 정국에 대처하는 한국 정부와 의료진들의 대처가 너무나도 투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 아베 당국의 태도는 여전히 믿기 어렵다.

둘째, 지금까지는 나라와 나라가 서로 길을 막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 멀리하고 서로 의심하며 혐오했지만, 이처럼 세상이 동일한 질병을 경험하고 비싼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결국은 세상이 하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멀리 있는 이웃의 고통이라고 해서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 무시하고, 오히려 담을 높이 쌓아 올리는 것은 더 이상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이웃이 어려움을 당할 때, 내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지 않으면 그 어려움이 곧 나의 어려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지혜가 필요하다. 

코로나-19 이후로는 단지 신천지만이 아니다. 한국교회도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명성, 광주양림, 부산온천, 수원생명샘, 동안, 부천생명수, 성남은혜의강...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일반교회도 신천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광훈의 사랑제일교회는 신천지보다 못한 집단일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교회 역시 투명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그리고 특별히 이웃을 심판하려 들기만 하고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교회는 문 닫을 생각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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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19 March 2020
  · 
Purdue University에서 경제학 박사과정 중에 있는 김선함 님의 각 나라별(한, 일, 영, 이, 프) 코로나-19 추이 분석입니다(다양한 통계 그래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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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문가의 노트> 2편.
자축, 자조, 조롱, 경마성 논조가 없는 국제비교를 보고 싶었는데 잘 없어서 직접 찾아보고 적은 글. 현재 확진자, 검사자, 사망자 통계를 일 단위로 확인할 수 있는 5개국 (한국, 일본,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상황을 비교해 보았다.
"영국은 5개국 중 유일하게 수검률보다 관찰된발생률이 빠르게 상승한 국가다. 검사 역량이 감염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 영국이 검사를 꾸준히 해왔다는 점과 잠복기를 감안하면 생각보다 상황이 엄중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일 감염률이 같다면 일본의 검사도달률이 한국보다 10배 이상 낮아진다. 양국 검사도달률이 같으려면 일본 감염률이 한국의 10분의 1 수준이어야 한다. (..) 이 숫자가 현실적인가?"
자세한 데이터와 내용은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혹 공유하실 땐 본문 포함 옵션을 쓰거나 위에 쓴 내용을 긁어서 넣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코로나-19: 시작의 끝
NOTION.SO
코로나-19: 시작의 끝
<비전문가의 노트> 2편. 자축, 자조, 조롱, 경마성 논조가 없는 국제비교를 보고 싶었는데 잘 없어서 직접 찾아보고 적은 글. 현재 확진자, 검사자, 사망자 통계를 일 단위로 확인할 수 있는 5개국 (한국, 일본, 영국, 이탈리아, 프.....


이택환
15 December 2021
  · 
일본에 코로나 확진자가 줄어든 이유 중 하나가 우리나라와 달리 청소년 대부분이 백신을 맞은 데 있다는 모 의대 교수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에 있는 친지에게 확인해 보니 일본 중고등학생 대부분이 백신을 맞았다고 한다. 이래저래 갈길이 멀다. 일단 나부터 부스터 샷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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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3 January 2015
  ·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초월성보다는 내재성의 목소리가 크다. 어떤 이들은 설교나 간증, 또는 성경공부 시간에 자신이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말한다. 그들의 하나님은 친절하게 갈 길을 인도해 주시고, 어려운 판단이 필요할 때마다 직접 판단을 내려주시고, 앞날이 궁금할 때면 꿈과 환상을 통해 말씀해 주신다.
교회에서 이들의 목소리가 큰 데 비해, 많은 사람들이 주로 경험하는 아무런 응답도 없는 하나님, 부르짖어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 하나님이 매일 경험하는 하나님이면서도,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는 익숙지 않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전 5:2) 
우리는 내재하시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초월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익숙할 필요가 있다.  간증 시간에 항상 하나님의 응답받은 것만이 아니라, 응답받지 못한 일에 대해서도 간증 되어야 한다. 응답받으면 믿음이 좋고 응답받지 못하면 믿음이 나쁜 게 아니다. 응답과 무관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느냐 아니냐가 믿음의 판단근거가 되어야 한다.


Kyunghoon Kwak  · Follow
28 June 2021
  · 
<다음 글은 2005년 이택환 목사님이 작성한 글 '때려잡을 것인가? 따라잡을 것인가?'를 수정없이 인용한 내용입니다>

1.
몇 년 전 친북-반북, 친미-반미 등의 문제가 교계는 물론 누가회 홈페이지에서도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문제가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혼란스러운 까닭은 양자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서로 정반대의 주장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열정 있는 누가회 초년 간사로서, 아모스 등 구약의 선지자의 시각에서 이런 문제들을 판단해 본다면, 북한에 대해서 마땅히 진보적 입장에 서는 것이 옳다는 내용의 주장을 편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제 생각에 공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학생이었던 경훈 형제로부터 헤비급 펀치가 날아왔습니다. 그 특유의 장황한 서론과, 현학적인 본론을 거쳐서 나온 경훈 형제의 결론은 결국, 허위의식에 빠진 자들이 진보와 이상으로 치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비판하는 보수주의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고, 위선적이며 더욱 심하게 부패한 자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간사님도 간사님답게 조용히 기도나 하시고, 괜히 하나님의 정의가 어떻고 하는 허튼 소리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논지였습니다. 즉시 “좋은 글에 감사한다”는 리플은 달았지만 사실 저는 충격을 받아 한동안 멍하게 지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2.
중세의 영성가 끌레르보의 버나드에 의하면 사람들은 영성의 단계에 따라 다음과 같은 네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
①자신을 위해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
②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
③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
④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

그런데 가끔 ②번 부류의 사람 중에 자신이 마치 ③번인 것처럼 행세하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①번과 다를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③번이라고 속이는 그들은, 위선자라는 점에서 차라리 ①번 부류보다도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철저하게 자신을 위해 일합니다. 가령, 왜 교회를 크게 짓느냐고 물으면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큰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은 자신의 욕심을 제대로 채우기 위해 그렇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자신조차 스스로에게 속아서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확신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그의 카리스마적인 확신에 끌려 하나님의 일꾼이 아닌, 카리스마의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남들이 인정해 주고 자신도 스스로를 ③번 부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래서 늘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 외치는 사람들, 가령 교계의 지도자나 목회자, 간사와 선교사(아니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해당되지 않을까요?)... 하여튼,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보여지기 쉬운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은 항상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과연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가?, 내가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 것인가? 나의 확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저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곧 영성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저 역시 경훈형제의 글로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좀처럼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던 제게 강제적으로나마 위의 질문들을 스스로 던지고, 성찰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줄곧 경훈 형제와 그의 글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바로는, 경훈 형제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는 ②번, 또는 그런 소지가 있는 사람들(사실 우리 모두가 아닌가 싶습니다)에게 화두를 던지는 은사가 있다고 보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그의 일관성을 크게 신뢰합니다. 경훈형제의 은사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단지 글재주 만으로가 아니며, 누구라도 선뜻 나서서 할 수 없는 일을 욕먹을 각오로 한다는 데 있습니다. 한두 번 정도는 이를 단순한 만용이나 소영웅주의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자신이 그런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우리가 충분히 알아줄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비록 그의 글이 상처를 주는 칼침과 같이 예리할지라도, 우리가 그의 글을 공동체 내의 또 다른 귀한 소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누가회에 그런 글을 쓸 사람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많이 있어도 큰 문제이지만) 우리의 영성의 외연이 보다 넓어지고, 더 깊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공미사, 밝누모, 생명윤리... 아직은 몇 마디 말에 쉽게 상처 받을 만큼 약한 모임일 수 있습니다. 아직은 더 많은 격려와 위로와 칭찬이 필요한 모임일 수 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간사(목회자)들 만큼 상처에 약하고, 간사(목회자)들 만큼 칭찬에 목말라하는 부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칭찬은 없고 상처만 있을지라도, 그래서 김이 빠질지라도,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하루 이틀 하다가 그만 둘 것은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3.
사실 버나드가 기대했던 바람직한 영성은 우리 모두가 굳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보다는 각자 자신의 일을 하는 영성에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④단계,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일을 하는 영성 최고의 단계는 별게 아니라, 우리가 각자가 자신의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단계를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일’은 어떤 화려한 구호나 요란한 외침 속에 전투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고 일상적인 ‘사람의 일’을 통해 은은한 기쁨으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경훈형제의 글은 ④단계는커녕, ③단계에도 이르지 못해 가끔 비명을 요란하게 지르는 우리에게, 여전히 기피와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여유롭게 사고할 수 있다면, 우리가 오히려 곽경훈 식 사고를 따라 해 보는 것도 적지 않은 유익과 즐거움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의 사고는 가령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노예제도를 없애기 위해 윌버포스가 얼마나 많이 기도하고, 한평생 동안 그가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가를 힘주어 말한다. 그러나 정작 노예제도를 없애기 위해 그가 한 일이라고는 자신의 이름을 낸 것 외엔 아무 것도 없다. 실제로 인류역사에서 노예제도를 없앤 사람은 윌버포스가 아니라, 증기기관을 발명함으로 더 이상 노예제도를 불필요하게 만든 제임스 와트였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곽경훈을 따라잡을 것인가? 우리 모두 윌버포스가 아니라 제임스 와트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냐고 묻는다면, 그를 오해 한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는 물론 윌버포스가 되어야겠지만, 굳이 자신이 아니더라도, 아니 오히려 자신보다 제임스 와트를 통해 더욱 크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윌버포스가 되어야한다는 것,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곽경훈 따라잡기입니다.
..........

'20년 전'을 떠올렸을 때, 청소년이 아니라 성인의 모습인 나를 만나는 것은 아직도 생경한 경험이다. 40대 초반을 지나 중반으로 접어드는 나이에도 여전히 자신을 '반항기 가득한 독설가', '집단의 주류에 사사건건 맞서는 똘아이', '진흙탕에서 뒹구는 것을 좋아하는 미치광이 싸움꾼'으로 생각해서 중년에 접어든 모습이 매우 낯설다. 그래서 격투기 같은 거친 운동에 몰입하며 '나는 퇴물이 아니며 아직까지는 육체적으로도 괜찮은 싸움꾼이다'란 확신에 집착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과거의 나를 만나는 것, 특히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모습을 만나는 것은 재미있다. 2000년대 초반, 의과대학생 시절의 나는 'CMF'라는 기독교 의사/의대생 단체에 소속했고 꽤 열심히 활동했다. 거기에서 보낸 시간은 나의 20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소중한 경험이며 그 단체에 바친 시간과 열정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당시 CMF 자체는 조금 이상했다. '복음주의'로 미화하나 사실은 '근본주의'에 다름없는 기독교와 'NL식 진보주의'란 언뜻 공통점이 없을 듯 하나 '서로 미워하는 쌍둥이' 같은 사상이 묘하게 결합한 분위기였고 '자발성'과 '다양성'을 다른 기독교 단체와 구별하는 특징으로 자랑하면서도 정작 선배의사와 간사의 가르침에는 도전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런데  그 무렵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거칠었다. '전략적 인내' 혹은 '전술적 후퇴' 같은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상대가 나를 조금이라도 공격하면 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굳이 나를 공격하지 않아도 상대가 거슬리면 독설을 퍼부으며 도발했다. 덧붙여 싸움에서는 항상 '거물'을 노렸다. 비슷한 위치에 있는 학생과 싸우면 그저 '문제아'로 낙일찍힐 뿐, 아무런 영향력도 얻을 수 없다. 이왕 싸우기로 결심했고 악명을 날리겠노라 다짐했다면 단체를 이끄는 목사-간사라고 부른다-나 단체에서 영향력이 큰 선배의사를 노리는 것이 적절했다. 
2000년 의약분업 사태와 함께 생각보다 빨리 매우 적절한 기회가 찾아왔다. CMF는 파업을 반대했고 'CMF의 수장'에 해당하는 선배의사가 KBS와 인터뷰에서 'CMF 소속 전공의는 모두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그 뉴스를 보는 순간,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란 것을 직감했다. 그날 밤, 나는 CMF 홈페이지의 게시판에 훗날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는 그 선배의사를 직격하는 글을 올렸다. 교회와 의사사회 모두 매우 보수적이며 서열이 엄격한 집단임을 감안하면 본과 2학년-일반대학에서는 4학년-학생이 단체의 수장에 해당하는 선배의사에게 공개적으로 독설을 퍼붓고 비판한 것은 경악할 사건에 해당했다. 
그래서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해당 단체에서 유례없는 악명을 날리기 시작했다. CMF의 주류, 이른바 '열심당원'에 해당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와 NL식 진보주의자에 품고 있던 반감을 틈만 나면 글로 뿜어냈다. 요즘 생각하면 단순한 키보드워리어가 아니라 매우 악질적인 '프로보커터'이며 '관종 중의 관종'이 틀림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매우 즐거웠다. 공격대상에 오른 사람은 대단히 곤혹스러웠겠으나 나는 엄청나게 쌓여가는 악명에 행복했다. 많은 사람이 악명을 지니는 것을 두려워하나 악명도 유명세라 적당한 수준이 아니라 엄청난 수준으로 쌓으면 거기에서 무시하지 못할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곰곰히 생각하면 CMF에서 얻은 그런 경험이 훗날 레지던트 시절 '응급의학과 곽경훈입니다'에 나오는 좌충우돌의 투쟁을 가능하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거대한 조직에 맞서고 '언더독'의 입장에서 거물과 싸워 영향력을 넓히는 방법을 'CMF에서 보낸 시간'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20년의 시간이 흐른 요즘의 나는 그때처럼 싸우지 않는다. 가끔 그때처럼 미치광이 싸움판을 벌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나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통제에 성공한다. 또 NL식 진보주의를 비판하면서 때때로 '대안우파' 같은 극우적인 생각에 휩쓸렸던 그때와 달리 요즘의 나는 '리버럴'이란 단어에 꼭 맞는 입장을 고수한다. 20대 초반의 곽경훈이 40대 초반의 곽경훈을 만나면 '책을 많이 팔려고 빨갱이와 불가지론자로 변절한 찌질한 관종'이라 조롱할 것이 틀림없다. 
(물론 그러면 40대 초반의 곽경훈은 웃으면서 20대 초반의 곽경훈에게 인간의 신체에 적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물리법칙을 알려줄 것이다) 
그러나 20대 초반의 곽경훈과 40대 초반의 곽경훈이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의 선동에 좌우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여 판단하고 모든 종류의 가식과 위선에 맞서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대 초반의 곽경훈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한 사람을 위해서 그때 적은 글을 하나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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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실한 자의 침대>

프로쿠르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꽤 유명한 악당이다. 낯선 나그네를 친절해 꾀여낸 다음 자신의 침대에 뉘여 길면 칼로 잘라 버리고 짧으면 사지를 잡아당겨 처치하는 수법으로 악명을 떨쳤지만 결국 테세우스에 의해 똑같은 방법으로 처형당했다.
그리스 신화의 다른 얘기와 마찬가지로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도 얘기 자체보단 그 상징과 의미 덕분에 오랜 세월 흐른 지금도 여전히 생명을 유지한다. 이제 누구도 프로쿠르스테스와 테세우스가 실존인물이라 믿지 않고 올림피아 신들을 믿지 않지만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는 자신의 기준으로만 모든 걸 판단하고 그에 어긋나면 무엇이든 미워하고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부류를 빗대는 표현으로 여전히 사용된다.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는 어디나 존재한다. '설마'하던 곳도 예외없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든 목격자 수만큼 진실이 존재한다. 하나의 사건에 목격자가 열 명있다면 사실 하나와 열 가지 진실이 존재한다. 현명하고 공정하단 사람조차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가 부르는 달콤한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본능인지 모른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처지부터 고려하고 자기 입장에서 바라보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 처지를 고려하고 다른 입장에서 바라보는 건 그 다음이다.
물론 그것만을 가르켜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라 비난하진 않는다.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가 되는 건 오직 그것만 옳다고 믿는 순간부터다.
물론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은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 확신과 자부심엔 항상 다른 사람 생각과 판단에 대한 존중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는 옳다'는 건전한 생각이나 '나만 옳다'는 명백한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다.
살펴보면 기독교인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쉽게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에 빠져든다. 다신론이나 범신론과 달리 '절대자'와 '절대진리'가 존재하는 기독교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복음'의 절대성만 강조한 체 '다양성'을 무시하고 또 '순종'만 강조한 체 '자유'를 무시한다. 한 걸음 나아가 자신의 생각만 옳다며 주변 사람에게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를 들이대고 거기 맞지 않으면 '미숙한 자', '어긋난 신앙을 지닌 자', '기도와 가르침이 필요한 자', '공동체가 돌봐줘야할 자'로 규정한다. 그들은 '신실한 자의 침대'에 빠져 스스로 하나님 행세 하는 셈이다.
그런 사람과 함께 하는 건 언제나 피곤하다. 틈만 나면 그들은 자신의 '신실한 자의 침대'를 들이댄다. 그 침대에 키가 맞으면 다행이지만 길거나 짧은 사람은 때론 골치아프고 성가시며 때론 섬뜩하고 고통스런 일을 겪게 된다.
그래서 많은 경우 키 큰 사람은 고개 살짝 숙이거나 무릎 굽히고 키 작은 사람은 까치발해서라도 침대에 맞추려 노력한다. 그래도 안 되면 키 큰 사람은 맞을때까지 고개 숙이고 무릎굽히고 까치발해도 침대보다 짧은 키 작은 사람은 '아직 덜 자라서 그래요. 좀더 성숙해지면 침대에 맞을꺼에요.'라고 하면 되니까 방법이 없진 않다. 다행히 그런 속임수와 변명을 허락하지 않던 프로쿠르스테스와 달리 '신실한 자의 침대'를 들이댄 기독교인은 너그럽게 속임수와 변명을 허락한다. 그게 그들이 보이는 유일한 관용이다.
그렇지만 속임수와 변명 따위 사용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눈 앞에 들이댄 침대를 밀쳐내고 똑똑히 얘기한다. '왜 당신 침대를 강요하느냐, 그건 당신 침대다, 내가 그 침대에 맞을 이유 따위 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내 침대에 맞느냐.'
그럼 그 신실한 자들은 일단 침대를 치워두고 걱정과 슬픔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얘기한다. 어서 바른 길로 돌아오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말라고. 사랑과 인내로 기다리겠지만 그런 얘기와 태도가 다른 사람까지 위험하게 하는 건 결코 용서할수없다고. 항상 당신을 위해 기도할테니 어서 정신차리라고.
물론 다행히 그 사람이 평범한 사람이거나 그리 높은 지위나 권위를 가지지 않는다면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저 '편협하고 고집 센 녀석이군'하고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래도 계속 괴롭히면 같이 싸워도 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람이 높은 지위나 특별한 권위를 지닌다면 일은 점점 골치아파 진다. 그의 침대에 몸 맞추거나 변명 늘어놓지 않으면 분명 지위와 권위를 이용해 몰아댈 게 틀림없다. 당연히 그는 '나쁜 뜻'에서 한 게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으로 잘못된 영혼을 교정하고 구제하기 위해, 또 행여 그 잘못된 영혼으로 인해 공동체가 깨어지고 상처입을까 두려워 어쩔 수 없이 하는 행동이다. '선한 행동이며 하나님의 뜻'이라 확신하기에 어떤 행동이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과 '지체에 대한 사랑'을 앞세워 양심의 가책 따위 벗어버린 인간보다 더 위험한 건 없다.
물론 그의 침대에 몸 맞추거나 변명 늘어놓으면 간단히 끝나겠지만... 세상엔 그런 위선을 경멸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고 '내가 왜 똑같은 사람에게 고개 숙이고 복종하느냐'며 버티는 자부심 강하고 고집센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어쨌거나 누군가 '신실한 자의 침대'를 내게 들이대며 왜 침대에 맞지 않느냐고 묻기 시작하면, 또 그 사람이 교회나 선교단체 같은 공동체에서 꽤 무시할 수 없는 권위와 지위를 지닌 사람이면 그때부터 악몽이 시작되는 셈이다. 몇 번 겪어봐서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그런 악몽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질 수도 없고 덤덤해질 수도 없다.
그런 부류는 결국 내가 몸 굽혀 침대에 애써 맞추거나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요. 제 신앙이 좀더 자라면 맞을겁니다'란 변명을 늘어놓을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은 모든게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며 항상 날 위해 기도한다고 얘기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기독교인'에 날 맞추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다. '아이에겐 칭찬도 필요하지만 훈계도 필요하다' 혹은 '사랑의 매'란 얘기로 터무니없게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결국 끝까지 자신의 침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덕이 되지 않는다' 혹은 '공동체를 깨뜨릴 수 있다', 아니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에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공동체에서 격리시켜 버린다. 물론 그렇다고 내쫓진 않는다. 내쫓으면 자신이 '좋은 기독교인'이란 믿음과 평판이 금가기에 공동체엔 남겨두지만 남아 있어도 내쫓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로 몰아 세운다.
그런 일 겪을 때마다 정말 묻고 싶다.
'내가 당신에게 내 침대를 강요한다면 기분 좋겠나? 누가 당신에게 내 침대를 대신 선택할 권한까지 주었나? 그리고 누가 하나님의 뜻을 얘기하고 하나님이 모든 걸 지켜보신다며 은근히 협박할 권리까지 주었나?'
어쨌든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나 '신실한 자의 침대'나 골치아프고 꽤 고통스럽다. 프로쿠르스테스는 테세우스가 물리쳤지만... '신실한 자'는 도대체 누가 물리칠까? — with 이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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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23 October 2016
  ·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올해 국내에서 일어난 최대의 사건 가운데 하나는 지난 9월 12일에 발생한 경주 지진이 아닐까 합니다. 국내에서 지진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큰 규모인 진도 5.8을 기록했고, 여진이 최근까지 400여 차례나 이어졌지요. 경주 뿐 아니라 인근 울산, 부산 등의 건물이 흔들렸고, 특별히 부산 마린시티 등, 고층빌딩 밀집지역은 가히 공포 분위기였습니다. 심지어 서울에서도 지진이 감지되었습니다. 그동안 한반도는 지진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믿음이 이번에 사라졌습니다. 이런 뜻밖의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혹시 하나님의 경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목회자 중에 그런 내용으로 설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저도 이번 지진이 하나님의 경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우연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져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하지요(마 10:2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는 물론,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연이 아닙니다. 이번 경주 지진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하나님의 경고도 한두 가지가 아닌데, 가령 한반도가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므로, 이젠 지진매뉴얼이 필요하다는 하나님의 경고. 핵발전소를 늘이는 것은 위험하다, 기존의 핵발전소도 차츰 줄여야 한다는 하나님의 경고. 인간이 자연에 대해 겸손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경고. 등입니다. 그러고 보면 무슨 특별한 경고라기보다, 누구나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상적으로 우리에게 상식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당신의 뜻을 계시하십니다(일반계시!). 경주 지진과 마찬가지로 최근 태풍 차바가 부산 마린시티를 삼킨 것 또한, 조망권을 위해 방파제를 낮게 설치하면 위험하다는 하나님의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4대강에 녹조가 가득한 것도, 자연훼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로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리스도인 중에는 종종 자연재해에 대해, 하나님의 일반적인 경고 외에, 어떤 특별한 경고가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경주 지진이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느니, 불교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면, 세계 최초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네덜란드 국회의사당에 지진이 일어나는 게 맞지 않을까요? 한국의 경우, 경주보다 용산 이태원에 지진이 났어야 합니다. 또 불교권에 대한 심판이라면 세계 유명 불교사찰에 동시 다발 지진이 일어나거나, 서울 조계사나 봉은사 지붕이 무너질 정도의 지진이 났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연관성도 없이,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꼭 교회 관련자들이 나서서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특정한 죄를 지은 사람들, 그리고 이교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런 재앙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해석이 계속 이어지는 까닭은 사실 성경에 비슷한 예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늘 요엘서 말씀입니다. 요엘서에 나오는 자연재해는 전무후무한 메뚜기 재앙입니다. 오죽하면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제물을 가져 올 농부들의 밭에 모든 소산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메뚜기 떼가 지나간 자리에는 무엇 하나 남은 게 없습니다. 요엘은 이런 메뚜기 대재앙이 하나님의 경고라고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경고라는 것이지요(욜 2:12-13). 요엘은 이런 메뚜기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경책을 달게 받고, 하나님께 돌아오면(즉, 회개하면), 하나님이 널리 용서하신다고 선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큰 복까지 주신다는 것입니다(욜 2:18-19). 그러나 만약 이스라엘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들은 저 무시무시한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욜 2:1-2, 11).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우리시대에 발생한 수많은 자연재해를 요엘의 성경해석 틀에 대입하면 어떻게 될까요? 경주 지진 역시, 하나님의 경고로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새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교회가 죄악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경고입니다. 여기에 동성애자나 불교도는 일차적 대상이 아닙니다. 혹시 교회 안에 있는 동성애 옹호자나 다원주의자들이 해당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이들의 숫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대부분 “성적 지향이나 종교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한다.”는 지극히 복음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동성애 옹호자, 다원주의자로 오해하는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정말로 동성애를 널리 조장하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있다 해도 그들은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경주 지진을 요엘 식으로 제대로 해석하자면, 누구보다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떠나, 세상 권세와 야합하고, 자본에 굴복하고, 성직을 매매하고, 교단장 선거에서 금품을 살포하고, 여성을 비하하고, 성추행을 일삼고, 부교역자들에 대한 부당대우, 노동력 착취, 목회 세습, 부동산 투기, 학위 장사, 헌금갈취, 헌금유용,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 않은 죄, 기복신앙에 빠진 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죄악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재해를 하나님의 경고라고 주장했던 사람 중에는, 요엘이 메뚜기 재앙을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해석했던 것처럼,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죄와 관련해서 해석한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보다는 교회 밖에 있는 동성애자 불교, 이슬람교, 각종 이교도들과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로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2004년 성탄절 연휴에 발생한 인도네시아 아체 쓰나미(이슬람 심판),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의 허리케인 카트리나(동성애 심판), 2008년 중국 쓰촨성 지진(우상숭배 경고), 2010년 아이티 지진(말세의 징조), 2011년 일본 도후쿠 쓰나미(우상숭배 심판), 2015년 익산 지진(이슬람 할랄식품단지 조성 경고) 등이 그러합니다. 이런 해석이 마치 지극히 성경적인 해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경을 거꾸로 적용한 것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나면 “하나님, 제가 죄인입니다” 고백해야 하는데, “하나님, 저기 죄인이 있습니다.” 라는 식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의 바리새인이 따로 없습니다. 세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며 “하나님,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외친 반면,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이 세리와 같은 죄인이 아님을 감사하나이다.” 외쳤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경주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를 과거 요엘 식으로, 즉 교회 밖이 아닌 교회 내부, 비기독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해석하는 것 또한, 100% 올바른 해석은 아닙니다. 즉 메뚜기 재앙을 통해 요엘이 예언했던 이스라엘의 “회개-축복, 비회개-멸망”이라는 도식적 예언이, 요엘 이후 모든 자연재해를 통해 계속적으로 성취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기보다, 성경 자체의 해석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마침 사도행전 2장에 이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해석이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는 선지자 요엘이 선포했던 이 예언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 사건을 통해 성취하셨다고 보았습니다. 즉, 요엘의 예언이 경주 지진과 같이 계속되는 수많은 자연재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지만, 여기에는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일찍이 요엘은 메뚜기 재앙이라는 전무후무한 환란 이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모든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 결과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하고, 노인들이 꿈을 꾸고, 젊은이들이 이상을 볼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세계 모든 주의 종들에게 임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구원을 얻습니다(그가 누구든지!). 이러한 요엘의 비전을 베드로는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강림사건과 관련하여 설명했습니다. 바로 그날 예루살렘교회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성도들이 모인 온 집안에 가득했습니다. 그때 마치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들이 보였고,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습니다. 그들이 모두 성령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이방의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마침 그날이 오순절이어서, 세계 각국의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들이 각 나라 방언으로 말하자 그들이 크게 놀라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어떻게 배우지도 않은 각국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가!” 그 때 베드로가 일어나 담대히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각 나라 방언을 말하는 것은, 술에 취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찍이 선지자 요엘이 선포한바 말세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 성취다.” 이어서 베드로가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행 2:17-21,
“17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날 베드로의 설명에 의하면 이제 말세, 즉 하나님의 때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녀불문하고 세상 만민이 하나님의 영을 받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그가 누구든지 구원 얻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이 눈앞에서 목도하는 예루살렘교회 모든 성도가 성령을 받아, 각국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증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대전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즉 그 전에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어야 합니다. 요엘의 비전의 핵심도 하나님의 영이 만민에게 임한 사건 그 자체보다, 그 전에 극심한 환란을 겪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만민에게 부어져서 그들이 장래 일을 말하고, 꿈을 꾸고, 이상을 보는 것은 그 후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왔는가, 그들이 돌아왔다면 언제, 어떻게 돌아왔는가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됩니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은 메뚜기 재앙, 아니 그보다 더 심한 온갖 재앙들을 다 겪었습니다. 요엘서의 메뚜기 재앙은 종종 바벨론 포로, 또는 그리스의 지배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혹독한 재난을 두루두루 겪었음에도 끝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로마시대에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로마에 의해 주후 70년, 이스라엘은 완전히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객관적 역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 아무 증거도 없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왔다! 확신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말세에 일어난 하나님의 요엘 예언 성취 사건으로 설명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과연 언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왔다고 보았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이스라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그가 보았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참된 메시아가 되실 때에 가능합니다. 역사 속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대표자이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친히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이스라엘의 모든 고난이 십자가에 반영)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이스라엘은 그들의 대표자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날 베드로가 수많은 예루살렘 군중들에게 선포했던 메시지의 결론이 이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심으로, 하나님이 예수로 하여금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이 사실을 믿으라!”
  그렇다면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갔을까요? 그렇습니다. 단 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면! 그리고 그 때, 즉 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에, 심지어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세상 모든 만민에게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부어주셨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에게 구원을 허락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성경은, 이제 ‘옛 이스라엘과’는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맺어진 새로운 언약 백성, 즉 ‘새 이스라엘’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요엘서는 마치 오늘날 우리에게 수많은 자연재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럴 경우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요엘서는 자연재해를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요엘서에서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복음의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께 나아가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며, 꿈과 이상을 주시며,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그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주님, 우리에게 성령 부어 주시고, 절망 가득한 우리 일상 가운데, 꿈과 이상을 허락하시고, 우리가 소리 높여 주의 이름을 부르오니, 죽을 것 같은 이 답답한 세상에서 우리를 속히 구원해 주시옵소서!
(2016. 10/23, 성령강림주일 후 스물세 번째 주일, 그소망교회 이택환 목사 교회력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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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 2:28-32) 
28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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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15 August 2014
  ·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pfbid02NTaVywziwPh15JRo3LcdaX2qX1wQQhYCDWQkBYouM6VcaUXW9tLNZf3NEuCtzWdjl&id=100002026145251&__cft__[0]=AZWB6NKpjQO-RJWD9umNxb7Hb5OI2CDHamHeAgTRME-HHO3Jw-TWM0G8YQgu7iNEIwbCf4HbKXmOPPZy_0Vw4XsqAmyB-0NFaAVGc8JAuugmXQ&__tn__=%2CO%2CP-R

광복절감사주일과 신앙적 민족사관

이번 주일은 성령강림주일 후 열 번째 주일이며, 동시에 우리 교단 “광복절감사주일”이다. 광복절이 되면 으레 대통령이 광복절 특사를 단행하거나 중요한 정책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번 광복절은 대통령의 메시지보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하는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에 더 많은 관심이 모아진 것 같다. 하지만 다툼과 갈등으로 난 상처를 치유하고 용서하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 평화와 화해다. 

우리가 과연 과거 36년간 우리 민족을 수탈했던 일본 제국주의를 용서할 수 있을까?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형제들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두려워하는 형제들에게 지나간 과거사가 다 ‘하나님의 뜻’이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말한다(창 45:5-8). 소위 ‘신앙적 민족사관’을 말하는 사람들도 과거 일제 식민통치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사 문제에서 벗어나야 하며, 일제 강점기가 우리 역사에 미친 긍정적인 부분을 나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과거사를 ‘하나님의 뜻’으로 풀어낸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이야기는 견원지간과도 같은 한일 관계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승화시켜, 서로 윈-윈 하는 새로운 빛을 비춰주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성경을 단편적으로 읽은 오독의 결과다. 창 45장에서 요셉이 지나간 과거사를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해 내기까지, 42-44장 내내 요셉의 형들은 지난 과거사를 고통 속에서 끊임없이 직면하고 반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그 과정 속에서 실로 애간장 끊어지는 참회가 요구되었다.
우리가 일본의 한국 식민 통치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려면, 단순히 결과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이야기만으로는 안 된다. 요셉은 단지 자신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고 하여 형들을 용서한 게 아니다. 일본 스스로도 과거에 저지른 죄에 대한 뼈아픈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땅의 친일 부역자들도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통한의 참회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본도 한국의 친일부역자들도 요셉의 형들이 과거 자신의 죄에 대해 흘렸던 것과 같은 회한의 눈물을 보인 적이 없다. 이런 마당에 우리가 ‘신앙적 민족사관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오류와 죄악들을 ‘하나님의 뜻’으로 미화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용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용서가 없는 곳에는 화해도 무의미하다. 
진정한 평화와 화해를 위해 요셉의 지혜가 여러 모로 필요한 때다.


이택환
14 August 2017
  · 
4. 개척교회 교회학교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김선일 교수가 2014년에 발표한 조사에 의하면 최근 10년 사이에 회심한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선택하는 기준 1위는 “목사 설교”, 2위는 “교회 분위기”, 3위가 “어린이 사역”등 기타로 나타났다. 보다 다양한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한 정확한 조사는 아니지만, 경험적으로도 교회 선택에 있어서 교회학교 환경(“어린이 사역 등”)이 중요하며, 특히 3-40대 성도들에게는 자녀들을 위한 교회학교가 목사 설교 못지않은 교회 선택의 기준이라고 생각된다. 

(표1) http://www.danbitv.com/news/detail.php?id=475
  그런데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자료(표)를 보면, 최근 10년간 교회학교 학생 수가 급격히 줄고 있다. 2014년 예장통합 통계에 따르면, 교단에 속한 8천 3백여 개 교회 가운데 주일학교가 아예 없는 교회가 50%에 달한다. 아마 그 대부분이 개척교회일 것이다.
(표2)<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회학교 통계 변동 현황> http://christian.nocutnews.co.kr/news/4408125
  2008년 1월 그소망교회 출범 시, 유아/유치원생부터 초등학교 3학년까지 8명의 어린이가 있었다. 당시 두 명의 목사가 공동목회를 했기에 한 목사가 어린이부 예배 설교를 담당했다. 또한 2부 순서를 섬겨준 청년 교사가 있었다(이○○–박○○-이○○). 2010년 이후 박○○/한○○-박○○/조○○-민○○/이○○ 집사가 차례로 어린이부 교사를 맡았다. 2012년에는 어린이부를 졸업한 3명이 2년간 어른 예배에 참석하며, 중등부 교사와 별도의 모임을 가졌다(이○○-김○○ 집사 순서).
  당시 그소망교회 교회학교에는 자체 예배와 2부 순서를 전담할 교역자가 없었기에, 어린이 청소년 신앙교육에 일관성이 부족하고 목회적 돌봄이 미흡한 점이 있었다. 2부 순서는 청년, 집사 등 교우들의 헌신으로 진행되었지만, 기독교 교육 측면에서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교사들이 사역으로 지치기 쉬운 구조였다. 한편, 작은 교회에서 얼마 되지 않는 성도들이 함께 성경공부, 교제를 나눌 시간에 1/4가량이 교사로 빠짐으로, 교회의 하나 됨을 이루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2013년 이후 이런 구조가 바뀌었다. 그해 2월 조○○ 목사 사임으로 공동목회가 일원화되었고, 운영위원회에서 어린이부 교육 전도사 청빙을 결의했다. 당시 장신대 게시판에 아래와 같이 청빙공고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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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소망교회(마포구 망원동)에서 어린이부 교육전도사를 청빙합니다.
* 모집부서 : 교회학교(현재 어린이 4명이 출석중입니다).
             초등학생 2명(초3 여1명, 초1 남 1명), 유치부 2명(7세 남/녀 각각 1명)과                       교사 2명이 있습니다.
* 사역여건 : 주일 1부 예배(오후 1시) 예배 참석 후, 오후 2시 어린이 예배 설교 및 교사지도
* 모집인원 : 1명
* 지원자격 : 장로회신학대학교 학부나 신대원생(졸업생도 가능), 연령제한 없음
* 제출서류 : 이력서 1통
* 제출기한 : 2월 28일
* 사 례 비 : 금액제시(재학생의 경우 등록금 일부 지원)
* 사역시작 : 청빙 결정 후 바로 
* 기타사항 : 그소망교회는 자체 건물이 없는 작은 개척교회로, 주일에 MVP 선교회 예배실에서 예배합니다. 월세 대신 선교회(http://www.mvp.or.kr/)를 후원합니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사들과 함께 사역할 분이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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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 신학생, 신대원생 중에는 개척교회 어린이부에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린이 수가 적은 반면, 유치부부터 초등학교 3학년까지를 모두 담당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업무가 적지만, 작은 사례비도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2-3월은 교육전도사 청빙 시기도 아니어서 교육전도사 청빙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현직 모교회 부목사 아내로, 중1/초1 두 딸을 둔 신대원생(당시 만 42세)이 지원했다. 그렇게 청빙한 신○○ 전도사는 바로 우리교회가 찾던 사역자였다.
  신○○ 전도사는 신속히 어린이부를 체계화했다. 학생들이 적은데 굳이 2명의 교사가 불필요하다며, 모두 장년 모임으로 되돌려 보냈다. 어린이들도 전도사님과 함께하는 어린이 예배와 2부 순서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형성해 갔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교회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아이들도 2년 사이에 10명가량으로 늘었다. 자연히 성인 예배와 성경공부, 교제에도 탄력이 붙었다.
  신○○ 전도사는 그소망교회 어린이부 교육전도사를 역임하고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한 후, 현재 일본 가고시마현 그리스도 호프 채플에서 본교회 협력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다. 이후 본교회 어린이부 교육전도사로 청빙받은 임○○ 전도사(2015-16), 정○○ 전도사(2017- )는 모두 현직 모 교회 부목사의 아내로, 신대원을 졸업한 분들이다. 유치원생, 초등학생 자녀들이 있는 관계로, 교회에서 유치원생 초등학생을 교육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다. 사역자들의 수고로 그소망교회 어린이부는 든든히 터를 다져가고 있다.
  2014년에는 중등부에도 사역자를 세웠다. 2013년 12월에 본 교회에 등록한 이○○ 전도사(H선교회 전임간사)가 중등부 전담 교사를 맡았다. 덕분에 2014년 3월까지 1명이 남아 있던 중등부가 4월 들어 4명으로 늘었다. 임○○ 집사가 본교회 중등부를 믿고 세 명의 중학생을 인도했다. 중등부는 주일 12시에 청소년부 자체 예배를 하고, 2부 순서로 함께 식사를 했다. 고등학생이 처음 생긴 2015년에는 중등부를 청소년부로 명칭을 바꾸고 이○○ 전도사(이후 목사안수 받음)를 전담 사역자로 임명했다. 2017년 현재 그소망교회 청소년부에는 7명이 출석한다.
  점차 교회학교가 사라지는 한국교회 현실 속에 그소망교회와 같은 작은 개척교회에 어린이부와 청소년부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담임목사가 교회학교를 함께 돌보거나, 교회 성도들 가운데 몇 사람이 돌보는 게 아니다. 심지어 신학생,신대원생도 아닌 신대원을 졸업한 전도사, 목사가 교회학교를 담당한다. 이런 경우는 중대형교회에도 드문 일이다. 작은 교회로서는 인건비 부담이 있겠지만, 본 교회의 특성상 교회 건물과 관련한 비용 지출이 상대적으로 적으므로, 건물비용을 인건비에 활용할 수 있다. 
  아직 여건이 안 되어서 그렇지, 가능하면 교육 인건비는 더 늘릴 필요가 있다. 교회 재정에서 흔히 사례비를 인건비로 분류하지만, 그소망교회의 경우 어린이부, 청소년부 사역자 인건비는 단순한 인건비라기보다 교회교육에 대한 투자로 보는 게 옳다. 사람보다 더 좋은 투자는 없다. 비록 교회학교의 외적 환경이 좋지 못해도, 그소망교회 교회학교의 질적 환경은 사실상 최고 수준이다. 물론 교회학교의 외부 환경 개선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그 점에서 교우들과 어린이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다.
< 그소망교회 교회공부, 터 놓고 하는 교회 이야기,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 딤전 3:15 >
이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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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18 July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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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문가이신 배재대학교 일본학과 강철구 교수님의 균형잡힌 글입니다.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일본 수출규제 조치의 부당성과 우리의 자세
KOREA.KR
일본 수출규제 조치의 부당성과 우리의 자세
강철구 배재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한국이 일본을 모르듯 일본도 한국을 잘 모르는 것이 확실하다. 한국의 경제성장 저지를 위한 정밀타격 공법을 들고 나오면 백기투항 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도전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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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6 August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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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요즘처럼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정치인이나 목회자 같은 사람들에게 논리가 중요하다. 논리를 배울 수 있는 곽경훈 선생(작가/응급의학과 전문의)의 좋은 글이다. 역사공부와 함께.
Kyunghoon Kwak  · Follow
6 August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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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과 유화정책
1.
고등교육 받은 사람들, 특히 책 좀 읽었다는 부류는 주장을 펼치며 역사적 사건을 인용할 때가 많다. 자신의 주장을 알기 쉽게 설명할 뿐 아니라 반박하기 힘든 근거를 제시하면서 아울러 '똑똑한 척'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양한 글에서 '네빌 체임벌린의 유화정책'과 '드레퓌스 사건'을 인용했다. 
일단 두 사건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네빌 체임벌린은 1930년대 영국 수상으로 그가 감당했던 과제는 만만치 않았다. 노쇠한 제국의 통치자로 유럽 대륙의 파시스트 정권(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 그리고 스페인의 프랑코)에 대응해야 했을 뿐 아니라 그러면서도 1차 대전 같은 끔찍한 전쟁을 피해야 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겨우 20년 정도 지난 시점이라 전쟁의 참혹한 기억이 너무 생생했고 1차 대전에서 가까스로 승리했으나 그런 규모의 전쟁을 다시 감당하기에는 대영제국이 너무 노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빌 체임벌린은 '유화정책'을 선택했다. '아리안 민족의 생활권 확보'를 부르짖는 히틀러에게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양보하고 대신 평화와 함께 '더 이상의 침략은 시도하지 않겠다'고 약속받겠다는 것이 유화정책의 내용이다. 따지고 보면 오스트리아와 체코(체코의 상당 부분은 보헤미아 지방이다)는 중세 이래 독일 황제의 세력권이라 히틀러에 넘겨 주는 것이 완전히 명분 없는 결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체임벌린의 기대와 달리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와 체코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전격적으로 폴란드를 침공했고 노르웨이를 점령했으며 급기야 마지노선을 우회해서 파리를 함락시켰다. 체임벌린이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시기였다. 
드레퓌스는 체임벌린보다 1.5세대 혹은 2세대 이전 사람으로 프랑스 육균 대위였다. 프랑스군은 계몽시대 이래 '유럽 최강 육군'은 아니어도 '유럽 최대 육군'에는 해당해서 드레퓌스 역시 수많은 대위 가운데 한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드레퓌스는 독특하게도 유대인이었다.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이 '반유대주의'란 단어를 들으면 히틀러와 홀로코스트를 떠올리며 독일을 생각하나 중세부터 히틀러의 등장 전까지 반유대주의가 가장 극렬했던 곳은 프랑스였다. 그래서 프랑스 육군의 유대인 장교는 독일 제2제국(제1제국은 신성로마제국, 제2제국은 비스마르크의 활략으로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 중심의 국가, 제3제국은 히틀러의 나치 독일을 의미한다) 육군의 유대인 장교보다 유별난 존재였고 그만큼 취약했다. 결국 드레퓌스 대위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별다른 증거없이 독일의 첩자로 지목당했다. 수사는 부실했고 재판 과정은 황당했다. 드레퓌스에게 유죄가 선고된 후 다른 장교가 진범을 밝혀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진범을 밝힌 장교가 '기밀 누설'로 처벌받았다. 드레퓌스에게 그런 처분이 내려진 이유는 앞서 말했듯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적을 지녔을 뿐 아니라 육군 장교로 성실하게 복무하며 충성을 다했으나 무엇으로도 그가 유대인이라는 원죄를 지울 수 없었다. 다행히 지식인들이 그런 반유대주의와 광신적인 국수주의를 비난하며 드레퓌스를 옹호했고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는 오늘날에도 편협하고 광신적인 국수주의를 비판하는 '위대한 문장'으로 평가받는다. 그런 노력 덕분에 드레퓌스는 오랜 유배 생활 끝에 무죄로 선고받았고 명예를 회복했으며 프랑스 사회가 성숙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쯤 얘기하면 체임벌린의 유화정책과 드레퓌스 사건이 요즘 빈번히 인용되는 이유를 다들 알아차렸을 것이다.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은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기 위해서 그리고 드레퓌스 사건은 한국 정부의 반일외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인용할 때가 많다. 그런데 과연 그런 인용은 적절할까? 
그걸 알기 위해서는 다시 체임벌린과 유화정책과 드레퓌스 사건을 살펴봐야 한다. 우선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이 실패한 이유는 히틀러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무솔리니나 프랑코 같은 존재라 생각했다. 무솔리니와 프랑코는 각각 이틸리아 반도와 이베리아 반도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스스로 영웅놀이하며 신격화하는 것에 만족하는 존재였다. (물론 프랑코에 비해 조심성없고 자아도취가 심했던 무솔리니는 히틀러를 따라 2차 대전에 참전하는 실수를 저지르나 그래도 히틀러와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래서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도 오스트리아와 체코 정도만 양보하면 무솔리니와 프랑코처럼 적절히 통제하고 길들일 수 있을 거라 판단했고 나아가 진짜 무시무시한 적은 스탈린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체임벌린의 판단과 달리 히틀러는 무솔리니나 프랑코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오히려 히틀러는 스탈린과 '사이 나쁜 쌍둥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비슷했다. 둘은 각각 국가사회주의(나치당의 정식 명칭은 원래 국가사화주의 노동자당이었고 후에 국가사회주의당으로 바뀐다)와 공산주의로 달랐으나 군국주의를 앞세운 전체주의자였고 대량 살해를 선호하는 싸이코패스였으며 사실상 지구 정복을 꿈꾸는 야심가였다. 체임벌린은 그런 히틀러의 본질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재앙을 초리했다. 
다음으로 드레퓌스 사건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드레퓌스란 개인의 위치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육군 대위는 넓은 의미로 지배층에 해당했고 핵심 엘리트는 아니라도 기득권층에 가까웠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프랑스인'일 때다. 나폴레옹이라는 예외적 존재에도 불구하고 코르시카 출신 그리고 바스크 출신 같은 소수 민족은 육군 장교라도 차별이 있었는데 드레퓌스는 유대인이었다. 코르시카 출신과 바스크 출신도 차별받는 상황에서 유대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프랑스 국적이며 심지어 프랑스의 안녕을 위해 전쟁에 나서는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는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집단에 속한 약자였다. 에밀 졸라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경악한 부분은 군부와 카톨릭 교회를 비롯한 보수 기득권층이 '애국심'을 명분으로 드레퓌스 같은 무력한 약자를 대상으로 폭력을 자행하는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체임벌린의 유화정책과 드레퓌스 사건의 이런 이면을 고려했을때 요즘 이 두 사건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례로 인용하는 사람들은 합리적일까?

2.
미리 밝혀두는데 나는 전체주의를 혐오한다. 거창한 의미의 전체주의 뿐 아니라 개인을 억누르고 자기네가 생각하는 '모범적 인간'으로 교화하려 하고 다양성을 억제하는 모든 집단을 싫어한다. 그래서 '우리 주장에 찬성하지 않으면 친일파이며 매국노'라는 주장에는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또 일본산 자동차를 부수고 '일본인은 승선비용 85만원', '일본인과 개는 출입 금지', '일본을 여행하는 자는 매국노로 취급한다' 같은 현수막을 내거는 것은 '일요일 저녁이면 흑인을 불태워 죽이는 사악하고 멍청한 KKK단원' 수준의 한심하고 경멸스러운 행동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일본 여행을 즐기고 특히 후쿠오카와 가라쓰를 아주 좋아한다. 한국식 활어회보다는 일본식 사시미를 좋아하고 고급 스테이크와 고급 스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스시를 선택하는 입맛을 지녔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무분별한 선동에는 아주 비판적이다. 다행히 그리 유명한 사람이 아니어서 무슨 글을 적어도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겠지만 솔직히 짧게는 지난 몇 주, 길게는 최근 1-2년 동안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은 애써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어느 한쪽으로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판단했고 나아가 정의의 유무와 관계없이 대단히 소모적인 주제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텔레비젼, 신문, 인터넷에서 오가는 주장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소모적인 주제일수록 사람들의 관심도 크고 논쟁도 치열하고 전개되는 양상도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를 비판하는 쪽, 드레퓌스 사건을 빈번하게 인용하며 국수주의에 가까운 베타적인 민족주의와 전체주의를 비난하는 쪽의 논리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한국 정부가 비판받을 부분은 적지 않다. 냉철하게 현실 인식을 하고 있는지, 국가적 자존심에 호소하며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하기에 앞서 국민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지, 극우파에 가까운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일본인과 일본 문화 자체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는 실수는 없는지 비판받을 부분은 많다. 그러나 모두 소위 기술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를 비판하는 부류는 대부분 '문제의 원인이 한국 정부에 있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럴까?

그들의 주장은 나름 합리적이다. 유명한 사람의 글이 이나라도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은 대부분 논리적이다. 아무런 논리없이 막무가내식 주장만 반복하는 글은 드물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이 양비론에 빠지기도 하는데 한국 정부를 비판하는 주장 대부분은 나름의 합리적 논리에도 불구하고 결정적 결함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니라 그들은 체임벌린이 히틀러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아베가 이끄는 일본 정부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베를 비롯한 집권 자민당 정치인은 한국에 우호적이며 선의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국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아베를 모욕하고 일본을 비난하며 적대적으로 대해서 부득이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가 그들 주장의 일관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한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지닌 '아베 의원'이 있긴 했다. 그런데 그는 지금의 '아들 아베 신조'가 아니라 외무상을 지낸 '아버지 아베 신타로'다.

정확히 말해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와 아들인 아베 신조는 정치 성향이 대척점에 있다. 이런 아베 부자의 관계는 마오쩌둥에 버금가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시진핑과 달리 그의 아버지인 시중쉰이 비교적 온건한 개혁파였던 것과 비슷한데 엄밀히 말해 아베 신조는 '아베 신타로의 아들'이 아니라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에 가깝다. 아베 부자의 상반된 정치 성향처럼 장인 기시 노부스케와 사위 아베 신타로의 정치 성향도 '반목'에 가까웠다. 만주국 관료를 지냈고 2차 대전 전범으로 분류되었으며 '쇼와의 요괴'란 별명으로 유명한 기시 노부스케는 전형적인 우파 정치인으로 마지못해 '평화 헌법'을 수용했으나 일본을 '전쟁을 가능한 국가'로 되돌리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전범으로 분류되었으나 기소되지 않고 복권된 후 일본 수상이 된 그는 동서 냉전을 이용해서 일본을 재무장하고 평화 헌법을 개정하는 것에 전념한다. 반면에 동경대를 졸업한 엘리트 기자 출신인 아베 신타로는 자민당원이었으나 일본식 표현으로는 리버럴에 속했다. 2000년대 이후 자민당과 달리 1980-1990년대 자민당은 극우부터 중도까지 다양한 정치 세력이 모인 종합 정당에 가까웠고 그런 상황에서 아베 신타로는 당내 개혁파 리더였으며 실제 외무상으로 활동할 때에도 주변 국가와 관계 개선에 노력했다. 그러나 전범으로 분류되고도 수상에 오른 장인 기시 노부스케와 달리 아베 신타로는 '유력한 차기 주자'로 손꼽혔으나 수상 관저의 문턱에서 번번히 미끄러졌고 60대 후반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병사했다. 이런 흥미로운 가족 관계에서 아베 신조는 아버지 아베 신타로의 후계자가 아니라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의 후계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에는 야사 혹은 비사 수준의 여러가지 얘기가 존재하는데 기시 노부스케가 외손자인 아베 신조에게 '너네 아버지는 결국 실패자다'라고 말했다는 얘기도 있고 동경대 출신 엘리트인 아베 신타로가 공부를 못해서 동경대에 입학하지 못한 아베 신조를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고 아베 신조는 아베 신조대로 아버지에게 열등의식과 반감을 동시에 느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거나 아베 신조는 아베 신타로가 아니라 기시 노부스케의 후계자다. 그렇다면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일본 우파는 한국을 어떻게 생각할까?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일본 우파가 한국을 바라보는 관점을 말하기 앞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우파와 보수파가 똑같은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는 부분을 고려해야 한다. 1945년 2차 대전에서 패배하고 미군정을 거쳐 평화헌법을 채택한 이래 초기 몇 년과 민주당이 집권한 극히 짧은 시간을 제외하면 일본은 늘 자민당이 집권했다. 사회당과 공산당처럼 색깔이 뚜렸한 진보 정당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확보했으나 어디까지나 '무시할 수 없는 견제 세력'일 뿐 '집권할 수 있는 대안 세력'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은 자민당 정치가, 엘리트 관료, 거물 기업인이 지나치게 밀접하게 협력해서 유착이라 불러도 좋을 단계까지 이르렀고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이전까지는 자민당은 분명히 보수 정당이나 중도부터 극우까지 다양한 세력의 집합에 가까웠다. 그래서 같은 보수 정치인이지만 아베 신타로와 후에 민주당 소속으로 수상이 되는 하토야마 유키오 같은 개혁파는 기시 노부스케와 그 후계자 같은 우파와는 완전히 다른 부류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가 말하는 '우파'는 기시 노부스케처럼 1930-1940년대 일본 통치세력에서 시작된 극우파에 가깝다. 2차 대전 패배 후 어쩔수없이 미국의 지배를 인정했으나 어디까지나 힘의 차이로 인한 패배를 인정했을 뿐 과거를 반성하는 것은 아니었고 천황제를 유지하기 위해 평화 헌법을 받아들였으나 '정식 군대를 가지고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가 그들의 꿈이다. 당연히 한국을 보는 관점도 '과거를 청산하고 협력해서 앞으로 함께 나아갈 동등한 친구'가 아니라 '언제까지나 우리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대륙 진출의 교두보인 동시에 대륙으로부터의 침략을 막는 방파제'일 뿐이다. 물론 대륙 진출의 교두보와 대륙으로부터 침챡을 막는 방파제는 부실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일본 우파 입장에서도 한국은 안정되고 번영해야 하나 어디까지나 일본의 영향력 아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한국이 불안정하고 피폐한 국가가 되면 교두보로도 사용할 수 없고 방파제로의 의미도 잃어버리기에 일본은 한국의 번영에 관심을 기울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1960년대 외교 관계를 정상화한 이후 일본 우파조차도 한국에 우호적이었던 이유다. 

이래서 한국 정부를 비판하며 '지금이라도 냉정하게 현실을 판단해서 일본에 사과하라'는 말은 나름 합리적인 논리가 있으나 실제로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주장이다. 체임벌린이 히틀러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유화정책'을 주장했듯 아베 신조, 아소 다로 같은 일본 우파를 '선량하고 우호적인 의도를 가진 좋은 이웃'으로 잘못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어디까지나 '종속된 존재'로 번영하길 바라는 그들에게 사과하고 '앞으로 조심할테니 제발 수출 규제를 풀어달라'고 얘기하면 그들은 우리를 '굴복시킬 수 있는 존재'로 취급하고 앞으로도 틈이 날 때마다 비슷한 방법으로 협박하며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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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1 February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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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과 시절, 모교 교수님 가운데 가장 존경했던 최재석 교수님. 교수님은 학문에 대한 열정과 기쁨이 충만하셨다. 열정으로 눈이 빛났고, 기쁨으로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셨다. 평생 써도 다 못 할 재미 난 논문 거리가 너무 많아, 일찍 죽을 수도 없다는 농담을 종종하셨다. 올해 구순이 되셨는데도 여전하시다. 
재학시절, 개설되어 있던 교수님 전공과목은 다 들었다. 문화인류학, 가족사회학, 농촌사회학, 한국사회사, 모두 A/A+였다. 첫 시간부터 한 학기동안 다룰 여러 주제 가운데 하나씩 맡아서 발표할 지원자를 받았는데, 나는 늘 재빠르게 지원했고, 발표만 하면 교수님의 칭찬을 받았다(많은 동기 선후배들이 엄청 깨졌음^^).
졸업 후 나는 대학원에 가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교수님을 만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최재석 교수님은 가장 존경하는 사회학자로 내 마음 속에 늘 남아 있다. 

[광복 70년, 바꿔야 할 한국사]“백제가 고대 일본 사실상 통치… 국사교과서 바뀌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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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바꿔야 할 한국사]“백제가 고대 일본 사실상 통치… 국사교과서 바뀌어야”
1시간30분 정도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구순의 노학자는 다양한 얼굴을 보여줬다. 학문적 업적을 일궈가던 시절을 회상할 때는 아이처럼 즐거워했고, 주류 사학계를 비판할 때는 화가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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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11 Octobe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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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중도 우파(보수주의?) 사회학자로 알려진 송호근 교수에게도 <세습>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나보다. 목회자들 가운데에는 능력이 있다면 교회세습이 뭐가 나쁘냐는 사람도 적지 않다. 능력을 어떻게 검증했는지 모르지만, '그분'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다. 

[송호근 칼럼] 중세적 세습사회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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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중세적 세습사회의 귀환
송호근서울대 교수·사회학 벼가 익어가는 노란 가을 들녘은 쓸쓸하고 고즈넉하다. 땡볕 농부의 땀방울이 알곡으로 결집된 한 폭의 추상화는 그러나 눈물겨운 정치경제학을 숨기고 있다. 평균 3000여 평의 토지에 투하한 평균 50여 년의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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