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스즈메의 문단속>, 당신의 '과거'는 안녕하십니까
양선영(omysun3)
23.04.13
*본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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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잦은 지진과 해일로 고통을 받았었고, 지리적 여건상 여전히 그러한 자연 재해의 위협 속에 놓여 있는 나라이다.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의 도입부를 보며 든 생각은 이러한 일본의 여건이었다. 단순한 모양이지만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힘을 가진 '미미즈'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미래이자 '불안'이었다. 그 불안은 반복되며 축적된 과거의 경험이 만든,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공포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언제든 현실화될 수 있는 살아있는 것이었다.
이 영화가 단순히 상상적인 공포일 뿐이라는 진단을 내릴 수 없는, 언제든 구현될 가능성이 높은 이 공포를 어떻게 그려낼지 무척 궁금해졌다. 머리를 질끈 묶는 저 소녀가 그들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까.
스즈메는 뒷문을 통해 새어나오는 이 불안과 공포를 다스려 '철컥'하고 가둔다. 죽음이 두려우나 그것을 인지하며, 그저 지금을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과 함께 말이다. 그렇게 스즈메는 웃으며 지나온 길을 되짚어 일상으로 돌아간다. 스즈메의 용기도, 모두의 도움도,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받아들임과 감사의 결말은 감동적이다.
그러나, 왜 이리 뒷맛이 개운치 않을 걸까.
영화 <너의 이름은>을 보고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나는데, 이 감성에 빠져들기만 해서는 안될 것만 같다.
왜 그런지, 사실 잘 알고 있다. 우리의 과거는 여전히 안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영화 모두 소재는 재난이지만, '과거'라는 키워드 역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한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평안을 깨트린다. 문단속은 제 집을 우선해야 겠지만, 다른 집 문을 살펴야 할 때도 있다. 우리의 과거는, 언제쯤 철컥하고 제대로 단속하게 될까.
두 영화 모두 소재는 재난이지만, '과거'라는 키워드 역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한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평안을 깨트린다. 문단속은 제 집을 우선해야 겠지만, 다른 집 문을 살펴야 할 때도 있다. 우리의 과거는, 언제쯤 철컥하고 제대로 단속하게 될까.
일단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자.
▲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포스터 ⓒ (주)쇼박스
▲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포스터 ⓒ (주)쇼박스
요석, 상처를 가둔 마음의 경계
스즈메는 지진으로 엄마를 잃은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엄마 못지 않은 사랑을 주는 이모의 손에 키워지며 밝게 자라지만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스즈메는 여전히 엄마를 찾는 꿈을 꾸며 일어난다. 그녀에게 이모의 과한 도시락은 도시락을 놓고 갈 정도로 부담스럽다. 이런 스즈메 앞에 폐허와 문을 찾는 소타가 나타난다. 그와 함께 지진을 일으키는 미미즈를 막으며 스즈메는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게 된다.
트라우마라 불릴 수 있을 만큼 깊은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그 기억을 떠올리기를 두려워 하게 된다. 어린 시절 스즈메는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엄마를 찾아 헤맸다. 청소년이 되었지만 스즈메는 여전히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스즈메는 그 기억을 봉인하는 것으로 상처로부터 도망친다. 검게 칠해진 어린 시절의 그림 일기장은 아픈 기억을 상기하고 싶지 않은 스즈메의 마음을 말해준다.
스즈메 앞에 나타난 '요석 다이진'은 그녀가 이제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하고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요석은 아직 큰 상처를 감당할 수 없던 어린 스즈메가 설정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마음의 경계였다. 그러나, 언제까지 과거의 상처를 모른 척하고 살 수는 없다. 고통과 완벽한 분리는 불가능하다. 외면했던 고통은 끊임없이 지금을 위협한다. 닫아도 닫아도 자꾸만 열리는 뒷문처럼 말이다.
스즈메에 의해 봉인되었던 지난 시간을 되찾을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스즈메 자신이다. 제 마음의 공포를 단속하기 위해 요석을 꼽은 사람은 스즈메이며, 그것을 뽑을 사람도 다시 꽂을 사람도 스즈메뿐이다. 폐허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때문에 스즈메의 안내자인 요석은 스즈메의 일부이기도 하다.
'여기'에 공존하는 시간
이런 스즈메 앞에 나타난 소타는 자신을 '토지시'라고 소개한다. 미미즈를 가두고 열린 뒷문을 봉인하는 소타는 과거의 아픔을 갈무리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존재이다. 그 문제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며 그 영향은 그대로 미래로 이어진다. 과거의 상처에 사로잡힌 현재는 무한한 미래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때문에 과거로부터의 해방은 미래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스즈메와 동반하는 소타는 스즈메의 미래이다. 스즈메는 미래, 소타의 도움을 받아 과거에 붙잡힌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구한다. 다이진에 의해 소타가 의자로 변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과거를 상징하는 의자와 미래를 상징하는 소타가 하나가 된다. 말을 하는 그 의자를 들고 스즈메는 여행을 한다.
▲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한 장면 ⓒ (주)쇼박스
우리는 지난 시간을 과거라 부르고 도래할 시간을 미래라 부르며 구분한다. 그렇다면 과거와 미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과거는 사라진 것이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스즈메는 늘 지난 시간과 함께 있었다. 스즈메가 꾸는 꿈은 그녀의 현재에 늘 과거가 함께 한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미래는 지금의 결과이다. 확정할 수 없다 하여도, 지금의 모든 생각과 행위의 총합이며 끊임없이 지금으로 변환한다. 폐허를 찾아 열린 문을 닫는 소타와의 만남은 새로운 자신을 원하는 스즈메 내면의 욕구가 만들어갈 미래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과거와 미래와 늘 함께한다. 시간은 '여기'에 공존한다.
과거로부터의 도피, 미래의 죽음
과거를 아프게 기억하는 스즈메의 마음은 성치 않은 의자 다리로 표현되며, '아름답다'는 소타에 대한 스즈메의 감탄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표현된다. 현재에 공존하는 과거는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만, 현재가 두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교통시키느냐에 따라 그 영향은 달리진다. 나무 의자에 점점 적응해가는 소타의 모습은 미래가 가진 역동성을 대변한다.
그러나 미래의 역동성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들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상처를 피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보는 것이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워지지도 않는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미래로 변모할 현재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직시하지 못하고 회피한 과거는 반복 앞에 무력하다. 고통스러운 과거가 반복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스즈메는 도쿄의 미미즈를 가라앉히기 위해 소타를 요석으로 사용한다.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는 다이진의 속삭임은 스즈메에게 축적된 경험이다. 그 경험은 아직 엄마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스즈메에게 거대한 공포를 야기한다.
잠재된 트라우마가 현실화된 상황에서 스즈메가 할 수 있는 건 그것을 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피는 결코 항구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회피는 지금의 안전을 보장하는 듯하지만 미래를 약속하지 못한다. 원하지 않는 상처를 가진 지금을 계속 반복시킬 뿐이다. 스즈메는 지난 과거의 감당할 수 없는 충격으로부터 지금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미래를 담보로 제공한 것이다.
시간을 '돌려드립니다'
순간에 공존하는 시간들은 긴밀하게 연관되며 영향을 미친다. 특히 트라우마처럼 상처가 깊은, 치유되지 못한 과거가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간과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피나는 노력으로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평생동안 자신을 철저하게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억눌린 인간의 감정은 언제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뛸 수 있다.
이 감정과 시간들은 없었던 것처럼 무시될 것이 아니라 전체 기억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어야 한다. 특정하게 일부분만 취해져 기억될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전체적으로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베셀 반 데어 콜크는 <몸은 기억한다-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에서 트라우마 환자는 지난 시간의 특정 사건을 생생한 지금의 현실처럼 인식하기 때문에 괴로우며, 그 기억들을 전체로 통합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가 겪는 문제가 '해리'라면, 치료의 목표는 '결합'이다. 즉 따로 떨어진 트라우마 기억의 조각을 계속 이어지는 삶의 이야기로 통합시킴으로써 뇌가 "그건 예전 일이고 이건 지금 일어난 일"임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베셀 반 데어 콜크 <몸은 기억한다-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 320쪽 일부
소타와 스즈메가 문을 닫는 방식은 아픈 과거를 다룰 수 있는 이러한 방법을 제시한다. 소타는 폐허가 품은 기억들을 불러온다. 폐허에는 불행한 기억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픔으로 기억된 시간들에는 행복했던 특별한 기억이나 평범한 일상들이 포함된다. 어떤 한 순간만 특정해서 과거를 고통으로 기억하는 것은 다른 시간들을 도둑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지금을 특정한 한 순간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소타는 과거를 소환한 후, '돌려드립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시간의 구멍들을 온전하게 메꿔주는 것이다. 전체로 통합된 기억들은 상처를 품었지만 거대한 하나의 시간이 된다. 그 시간들은 트라우마로 작동하지 않는다.
▲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한 장면 ⓒ (주)쇼박스
관계가 만들어낸 용기
삶은 지난 시간의 사건을 되풀이한다. 과거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반복된 사건 앞에서 겁을 내며 굳건하게 마주할 힘을 내지 못하게 된다. 과거의 고통이 재현되며 지금에 반복될 때, 미래 역시 그 반복의 연장선 속에 놓이게 된다. 과거의 고통은 당시의 전부도 아니며 삶의 전부도 아니다. 그저 일부분일 뿐이다. '나'와 '나'의 시간은 행복과 고통, 특별한 경험과 평범한 일상이 모두 공존하는 전체이다.
소타를 요석으로 희생시킨 후 스즈메는 제 과거와 마주하기로 결심한다. 미래를 구하기 위해 과거를 되짚는 것이다. 고향이자 과거로 돌아간 스즈메는 엄마의 죽음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어린 스즈메를 보듬어준다. 그렇게 자신의 아픈 과거를 행복도 공존했던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준다. 혼자 남은 어린 스즈메에게 괜찮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전해주면서 말이다.
스즈메가 그리 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의 사랑 때문이기도 하다. 엄마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과거가 고통스럽지만 엄마가 준 사랑 덕분에 과거와 맞설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은 과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스즈메는 마치 엄마처럼 스즈메를 돕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엄마는 없지만, 그 역할을 하는 다른 사람들이 존재한다.
스즈메가 소타를 돕듯 세상의 상처는 그러한 사랑의 힘으로 치유된다. 자신의 미미즈는 제 힘으로 맞서야 하지만, 맞설 용기만 낸다면 도울 사람들이 나타난다. 혼자라는 잘못된 확신에만 빠지지 않으면 된다. 굳이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어도 '솟아날 구멍'은 만들어진다. 끝이라는 공포가 이런 가능성마저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어린 스즈메가 엄마를 찾는 사이 스즈메의 이모는 스즈메를 찾고 있었다.
요석의 바른 역할, 관계를 위한 적절한 경계
청소년이 된 스즈메는 이모와 차마 말하지 못하고 묻었던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나눈다. 이모는 스즈메를 돌보는 것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제 삶의 일부를 희생시켜야 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모 역시 제 상처를 감춘 스즈메처럼 이런 부정적인 정서를 눌러 놓고 있었다. 요석 '사다이진'은 그렇게 억눌렸던 이모의 경계이다.
사랑하지만 억울하기도 했을 이모와 고마웠지만 그만큼 미안함도 컸을 스즈메의 마음은 갈등 앞에 솔직하게 드러난다.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마음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마음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부정적인 정서 역시 적절하게 살피지 않는다면 터지거나 곪기 마련이다. 감추어진 다른 면을 표현하고 알아주는 것은 쉽지 않지만 서로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를 생각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본심 일부를 감추거나 살피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을 시간이 지나도 알아주지 않는다면 서운해진다. 사랑하면서도 미운 감정은 대부분 여기에서 출발한다. 본전까지는 아니더라도 감사를 되돌려받지 못한 사랑은 상처를 입는다. 충분한 신뢰가 쌓인 관계라면 드러난 본심이 관계를 해치지 않는다. 관계에는 균형이 필요하다. 때로 확인을 통해서'나'와 상대 사이에 기울어진 관계는 균형을 찾게 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균형이 '나' 자신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건강한 관계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배려이다. 자신과 상대를 동시에 배려하지 않는 관계라면 서로에게 건강한 영향을 미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과한 사랑은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스즈메와 이모의 소란은 서로에 대한 의식을 조금 줄이고 자신에 대해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한 장면 ⓒ (주)쇼박스
우리가 품은 요석은 이렇게 자신을 방어하기도 한다. 어떤 관계든 적당한 경계는 필요하다. 그 경계가 타인을 배척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것으로 적절하게 사용될 때 편안하게 수용된다. 과도한 힘을 사용하던 스즈메의 요석은 결국 스즈메를 위해 희생함으로써 스즈메로 돌아간다. 스즈메는 성장과 함께 자신의 요석을 제어할 힘을 얻은 것이다.
제 과거의 문을 제대로 갈무리한 스즈메는 여행 중 받은 호의에 감사를 돌려주며 되돌아간다. 소타는 스즈메를 찾아갈 것을 약속한다. 두 사람은 살아남았다. 삶이 허락하지 않은 '뒷세계'의 문은 아무리 피해도, 아무리 원해도 때가 되어야만 열린다. 그 '때'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이것이 지난 시간의 불행을 다가올 불안으로 인식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다. 우린 그저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현재를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열심히 살 수 있을 뿐이다. 트라우마는 온전한 시간 앞에 무력하다.
에필로그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면서 든 아쉬움은 일본의 재난 애니메이션이 그들의 아픔에만 집중한다는 것이었다. 영화 <너의 이름은>도 그랬다. 위로와 치유를 전하는 영화의 주제는 감동을 주지만, 그 주제를 한일 관계에 대입해보면 '공염불' 같기만 했다. 왜 이들의 감상은 조금더 확장될 수 없었을까.
과거의 상처를 만든 가해자가 명백하다면,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명백한 사죄가 필요하다. 최근 지속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학교 폭력 문제의 중심에는 피해자의 상처를 외면하고 사죄하지 않는 가해자의 태도가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글로리>의 주인공 문동은의 복수가 지지를 받은 이유 역시 가해자 박연진 무리가 전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과거는 위로하면서 상처를 준 과거는 외면하는 모습, 영화가 전해주는 또다른 이야기였다. 자신들의 상처는 저토록 감상적으로 어루만지면서 왜 일본은 우리가 받은 상처를 외면하는 걸까.
우리나라와 일본의 과거는 영화 외적 요소이고 이러한 접근 방식은 포인트를 제대로 짚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자신들이 만든 우리나라의 상처를 외면하는 나라가 만든 자신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영화를 보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역사를 떠나 영화의 내용에 감동을 받았지만, 역사를 떠나 마냥 감상에만 빠져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제 아픔만 보는 덜 큰 아이, 그것이 일본의 모습이었다. 일본은 자신들이 만든 영화의 주제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만 한다. 과거를 회피하지 말고 직시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국과 피해자들에게 진심어린 사죄를 해야 한다. 그것을 제대로 하지 않아 영화처럼 끊임없이 뒷문이 열리고 미미즈가 나오는 것이다. 일본은 그들의 과거를 제대로 청산해 갈무리해야 할 것이다.
영화의 감상에 잠시 빠지더라도 현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만들고 외면하는 과거의 상처를 나름의 힘으로 보듬으며 일본에게 주지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직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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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ik's post
Yuik Kim
1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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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불의 묘지와 달리 토호쿠대지진은 한국인은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런데도 일본인의 피해자성이 드러난다는 사실 때문에 한국인(평론가)들이 불편함을 느낀다. 과거 전쟁범죄를 사죄하고 피해자를 돌보지 않는 일본인이 (전쟁과 관계없는데도)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치유하는 서사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뜻일까? 토호쿠 대지진이 조선인을 학살한 관동대지진을 연상시켜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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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스타
22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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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리 뒷맛이 개운치 않을 걸까. 영화 <너의 이름은>을 보고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위로-치유의 일본 '재난 영화', 왜 난 늘 거북할까
STAR.OHMYNEWS.COM
위로-치유의 일본 '재난 영화', 왜 난 늘 거북할까
[영화 리뷰] <스즈메의 문단속>, 당신의 '과거'는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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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박은하
공감합니다ㅜㅜ 2차대전 시대 일본 국민 개개인은 국가의 전쟁에 동원된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걸 생각해야 과거사 연대가 되는 것인데 당대 건인 도호쿠 지진조차 못 받아들이면....;;; 일본은 국가로부터 입은 상흔이 너무 큰 나머지 국가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형식을 택하는 게 안타까운 지점은 있지만 한국은 국가와 국민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우려가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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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메 속 미미즈가 대체 뭘까!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고 궁금증을 가진 그대에게
by작은대Mar 09. 2023
요즘 한창 핫한 영화, 이전 글에서도 다루었던 <스즈메의 문단속>에는 일본의 토속과 전통이 자주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생소했던 것은 '요석'과 '미미즈'에 대한 설정이다. 그리고 고양이 모양으로 변해버린 요석..이 녀석...무척 귀엽다.
미미즈는 원래 메기였다!!
작중에서 '미미즈'란 일본 열도의 지표에서 꿈틀대는, 재앙을 일으키는 악의 근원을 일컫는다. 거대한 검붉은 색의 지렁이처럼 생겼는데, 실제로 미미즈는 일본 말로 지렁이를 의미한다고 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미미즈는 빈번하게 지진을 일으키는데, 이는 지진이 잦은 일본의 상황을 드러내면서 작품에 더욱 현실성을 더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규모 3.0이상의 지진이 연간 1200여회 정도 발생한다고 한다. (통계 출처: 보험연구원)
그렇기에 일본 민간에서는 지진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해일에 대한 두려움을 배경으로 한 신앙과 풍속이 많이 전해진다. 그 풍속 가운데 이번 영화에 등장한 것이 '나마즈에'라고 불리는 그림 속의 메기이다.
1855년경 그림, '메기와 카나메이시'
'나마즈에'라고 불리는 그림 속에 등장하는 초대형 메기는 땅 속 깊이 사는데, 이 메기가 요동치면 지상세계에서는 지진이 발생한다고 한다. 평소에 지진이 나지 않는 이유는 '카시마 대명신'이라는 신이 '초대형 메기'를 잘 통제하기 때문이다. '카시마 대명신'은 '카나메이시'라는 돌로 메기의 머리를 눌러 제압하는데, 이 카나메이시가 바로 '요석(要石)'이다.
미미즈, 아니 거대한 메기 이야기
미미즈, 아니 거대한 메기 이야기의 기원은 1855년 에도(현재의 도쿄)에서 강진이 발생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리히터 규모 6.9로 추정되는 이 '안세이 에도지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화재가 대규모로 발생했고 무너진 집은 셀 수가 없었다고 한다. 여진은 지속되었고,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거대한 메기가 등장하는 목판화들이 대량 제작되어 퍼져나갔다. 그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누가 사고 팔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 그림들을 통해, 재앙으로 인해 얻은 불안감을 표현하고 위안을 얻으려 했다고 한다.
1855년경 그림
'나마즈에'를 그린 그림은 다양하다. 지진을 일으킨 메기를 공격하는 그림이나 부자의 집만을 파괴하는 메기의 그림은 지진 피해자들의 고통과 빈부격차를 드러내고, 메기에게 감사를 표하는 그림은 지진으로 인해 많은 일거리가 생긴 건축업자들을 뜻한다. 이것을 생각해볼 때, 메기는 부의 재분배 현상을 가져다주는 존재로도 볼 수 있다. 자연재해인 지진을 메기에 빗대고, 부의 재분배 현상에 빗대어 대중들은 '삶의 의미'와 '물질적인 것'을 재고해본 것이다.
메기그림, 압수?
'나마즈에', 그러니까 메기를 그린 그림들 중 일부는 과거, 다시 말해 지진이 있기 전의 평화로웠던 시기를 표현하였는데, 이는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재해를 오히려 부를 재분배시켜주는 것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다른 말로, 부와 소득에 있어 평등한 사회가 건설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끔 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당시 막부는 체제에 대한 위협 가능성을 감지하고, 판목을 압수하는 동시에 그림의 판매와 유통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출처: 서울대학교 문학석사학위논문, 2012, 박병도)
메기를 공격하는 사람들
초대형 메기 티엠아이
실존하는 초대형 메기는 2미터가 조금 넘는 정도로, 나보다 조오오오금 클 뿐이다. 주로 유럽 쪽에 서식하는 벨즈 메기는 2미터 이상으로 자라는데 종종 인간을 공격한다고 한다. 난폭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번식 시기에 둥지 근처에서 수영하는 인간들을 경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식을 위하는 행동이라고 하니 마냥 비난할 수도 없다. 현재까지 확인된 메기 중 가장 큰 개체는 이탈리아에서 잡힌 2.8미터 짜리라고 한다.
고양이 귀여워
메기는 영어로 catfish라고 하는데, 이는 메기의 수염이 고양이의 수염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어권에서는 이 catfish라는 말에 다른 의미가 있는데, 'SNS나 데이트 어플리케이션에서 가짜 사진을 프로필으로 걸어두고 다양한 사기를 치는 사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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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즈’가 꿈틀대는 재난의 시대에 우리가 할 일
등록 2023-03-11
[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스즈메의 문단속
2000년, 신카이 마코토는 1년에 걸쳐 1인 수작업으로 틈틈이 제작한 5분짜리 애니메이션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를 발표한다.
‘그녀’는 비 오는 날 길에서 고양이를 줍는다. 그가 주인공 ‘그녀의 고양이’ 쵸비다. 쵸비는 “진짜 어른”인 그녀를 지극히 사랑한다. 어느 날, 기나긴 통화 끝에 그녀는 깊은 슬픔에 빠진다. 쵸비는 그녀를 구해주고 싶지만 작고 하얀 고양이에게 수화기 너머는 이해할 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장소다. 이 사랑스러운 소품은 내내 쵸비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목소리는 신카이 본인이 직접 연기했다.
이후 <별의 목소리>,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언어의 정원> 등 그의 작품을 따라오면서, 나는 종종 주인공 소년의 모습에서 몸을 웅크린 쵸비의 그림자를 만나곤 했다. 신카이의 작품에는 늘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쓸쓸한 동경과 부드러운 열망이 서려 있었다. 그것이 사랑하는 여자건, 이룰 수 없는 성장이건, 도달할 수 없는 메시지건, 신카이의 소년들은 여전히 ‘작은 방’에 갇혀 혼자 웅얼거렸다. ‘수화기 너머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라고.
구조의 열망 품고 ‘작은 방’에서 나와
이건 한편으로 1990년대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을 지배해온 ‘세카이계’(世界系) 세계관의 특징이기도 하다. 급진적 사회변혁 운동이 실패하고 그에 이어 자본주의의 승리를 선언했던 찬란한 버블 경제마저 붕괴된 이후, 더는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비관과 불안이 대중문화로 스며들었다. 가이낙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징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세카이계’는 온라인에서 만들어져 문화비평 언어로 자리 잡은 개념인 만큼 그 정의도 규정도 모호하지만, 대체로 내면의 불안에 집중하는 소년과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소녀가 원인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나 재난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로 범주화할 수 있었고, 이 세계관 없이 세기말 이후 일본 대중문화를 말하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성장의 조건을 박탈당한 채로 성년기로 억지로 떠밀려가는 소년들의 이야기는 매혹적인 만큼이나 퇴행적이었다. 그들의 ‘세계라는 경계’ 안에는 온통 ‘나’ 혹은 ‘너와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양이-소년-감독이 혼돈의 원인을 포착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 문제와 대결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가 작품 안에서 3·11 동일본 대지진과 대면하기로 마음먹은 이후였다. ‘수화기 너머’를 고민하기에는 눈앞에 떨어진 재난이 너무 큰 상실과 고통을 안겼다.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그리고 <스즈메의 문단속>까지, 신카이는 운석 충돌, 홍수, 지진이라는 재난의 스펙터클을 반복함으로써 현실과는 다른 결말을 상상하려고 노력했다.
감독은 이 작품들을 묶어 “재난 3부작”이라고 말했지만, 그보다는 ‘구원 3부작’이라는 이름이 더 적절해 보인다. 재난은 우주 전쟁이나 불안한 미래, 이지메 같은 형태로 언제나 그의 작품과 함께했다. 순응이 아닌 구조(救助)의 열망을 끝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야말로 3·11 이후 신카이의 세계에 등장한 새로운 이야기다. 그렇게 움직여온 감독은 <스즈메의 문단속>에 이르러 작은 방에서 나와 ‘세계라는 경계’를 확장시키고, 재난의 복잡한 조건을 구체화시켰다.
자연재해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부터 비롯되어 우리가 충분히 대비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닥쳐온다. 그리고 현대화된 세계에서 이 재해는 많은 경우 문명과 만나 인재가 되면서 더 커지고 더 강력해진다. 무엇보다 3·11 동일본 대지진이 그랬다. 시작은 지진과 해일이었지만, 더 큰 재난은 원전이 폭발하면서부터였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현대 사회 재난의 속성을 신화적인 상상력 안에서 풀어낸다.
이 작품에서 지진은 불가해한 이유와 욕망으로 움직이는 존재 ‘미미즈’가 일으키는 일이다. 미미즈는 때때로 흥분해서 날뛰고 그를 다스리는 이들에 의해 저지되었다가 또 부흥하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미미즈가 봉인되어 있던 ‘저 세계’로부터 ‘이 세계’로 뛰쳐나와 기어코 땅을 흔들어 만물을 해치는 것은 인간들이 모여 살다 버리고 떠난 폐허에 남겨진 낡은 문들을 통해서다.
미미즈가 일단 문을 통과해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 지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란 그 문을 닫아 열쇠로 잠그는 것뿐이다.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소타(마쓰무라 호쿠토)와 스즈메(하라 나노카)다. 미미즈가 열어젖힌 ‘저 세계의 뒷문’을 닫은 뒤 과거에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기도를 하면 반짝이는 열쇠 구멍이 만들어진다. 그 구멍에 열쇠를 꽂아 잠그면 ‘문단속’이 끝나는 것이다.
버려진 문을 통과하는 미미즈는 인간적인 것과 인간 외적인 것, 문명과 문명 외적인 것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공존하는 이 세계에서 등장하는 재난을 보여준다. 그리고 신카이는 그렇게 열린 재난의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말한다.
‘우리’를 다시 상상하는 일
쵸비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드디어 성장해서 책임을 다하는 어른 소타가 되었을까? 아니면 생의 덧없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진정으로 타인을 위할 수 있는 스즈메가 되었을까. 나는 다양한 소년의 형상으로 변주되었던 쵸비가 이 작품에 이르러 다시 고양이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고양이 ‘다이진’에게서 쵸비를 보았기 때문이다.
다이진은 미미즈를 봉인하는 요석(要石·かなめいし)이다. 스즈메 덕분에 꽁꽁 얼어붙은 돌 상태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은 다이진은 요석의 임무를 버리고 스즈메의 ‘아이’가 되고 싶었다. 작품에서 벌어지는 모든 모험이 그런 다이진의 욕망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소타만을 바라보는 스즈메의 진심을 알게 된 뒤 그는 자신의 욕심을 접는다. 징징거리기를 멈추고 내 앞에 타인을 놓는 다이진의 마지막 선택은 가슴 아프고, 또 놀랍다.
최근 <귀멸의 칼날>, <주술회전>, <모브사이코100> 등 소년만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이미 충분히 망가진 세계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사회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대의라는 명분으로 개인을 희생시키는 전체주의적 선동과 ‘우리’를 다시 상상함으로써 연립하려는 노력은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 한 장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이 3·11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하고 있는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미미즈’가 꿈틀대는 재난의 시대에 우리가 할 일
등록 2023-03-11
[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스즈메의 문단속
2000년, 신카이 마코토는 1년에 걸쳐 1인 수작업으로 틈틈이 제작한 5분짜리 애니메이션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를 발표한다.
‘그녀’는 비 오는 날 길에서 고양이를 줍는다. 그가 주인공 ‘그녀의 고양이’ 쵸비다. 쵸비는 “진짜 어른”인 그녀를 지극히 사랑한다. 어느 날, 기나긴 통화 끝에 그녀는 깊은 슬픔에 빠진다. 쵸비는 그녀를 구해주고 싶지만 작고 하얀 고양이에게 수화기 너머는 이해할 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장소다. 이 사랑스러운 소품은 내내 쵸비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목소리는 신카이 본인이 직접 연기했다.
이후 <별의 목소리>,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언어의 정원> 등 그의 작품을 따라오면서, 나는 종종 주인공 소년의 모습에서 몸을 웅크린 쵸비의 그림자를 만나곤 했다. 신카이의 작품에는 늘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쓸쓸한 동경과 부드러운 열망이 서려 있었다. 그것이 사랑하는 여자건, 이룰 수 없는 성장이건, 도달할 수 없는 메시지건, 신카이의 소년들은 여전히 ‘작은 방’에 갇혀 혼자 웅얼거렸다. ‘수화기 너머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라고.
구조의 열망 품고 ‘작은 방’에서 나와
이건 한편으로 1990년대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을 지배해온 ‘세카이계’(世界系) 세계관의 특징이기도 하다. 급진적 사회변혁 운동이 실패하고 그에 이어 자본주의의 승리를 선언했던 찬란한 버블 경제마저 붕괴된 이후, 더는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비관과 불안이 대중문화로 스며들었다. 가이낙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징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세카이계’는 온라인에서 만들어져 문화비평 언어로 자리 잡은 개념인 만큼 그 정의도 규정도 모호하지만, 대체로 내면의 불안에 집중하는 소년과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소녀가 원인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나 재난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로 범주화할 수 있었고, 이 세계관 없이 세기말 이후 일본 대중문화를 말하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성장의 조건을 박탈당한 채로 성년기로 억지로 떠밀려가는 소년들의 이야기는 매혹적인 만큼이나 퇴행적이었다. 그들의 ‘세계라는 경계’ 안에는 온통 ‘나’ 혹은 ‘너와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양이-소년-감독이 혼돈의 원인을 포착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 문제와 대결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가 작품 안에서 3·11 동일본 대지진과 대면하기로 마음먹은 이후였다. ‘수화기 너머’를 고민하기에는 눈앞에 떨어진 재난이 너무 큰 상실과 고통을 안겼다.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그리고 <스즈메의 문단속>까지, 신카이는 운석 충돌, 홍수, 지진이라는 재난의 스펙터클을 반복함으로써 현실과는 다른 결말을 상상하려고 노력했다.
감독은 이 작품들을 묶어 “재난 3부작”이라고 말했지만, 그보다는 ‘구원 3부작’이라는 이름이 더 적절해 보인다. 재난은 우주 전쟁이나 불안한 미래, 이지메 같은 형태로 언제나 그의 작품과 함께했다. 순응이 아닌 구조(救助)의 열망을 끝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야말로 3·11 이후 신카이의 세계에 등장한 새로운 이야기다. 그렇게 움직여온 감독은 <스즈메의 문단속>에 이르러 작은 방에서 나와 ‘세계라는 경계’를 확장시키고, 재난의 복잡한 조건을 구체화시켰다.
자연재해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부터 비롯되어 우리가 충분히 대비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닥쳐온다. 그리고 현대화된 세계에서 이 재해는 많은 경우 문명과 만나 인재가 되면서 더 커지고 더 강력해진다. 무엇보다 3·11 동일본 대지진이 그랬다. 시작은 지진과 해일이었지만, 더 큰 재난은 원전이 폭발하면서부터였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현대 사회 재난의 속성을 신화적인 상상력 안에서 풀어낸다.
이 작품에서 지진은 불가해한 이유와 욕망으로 움직이는 존재 ‘미미즈’가 일으키는 일이다. 미미즈는 때때로 흥분해서 날뛰고 그를 다스리는 이들에 의해 저지되었다가 또 부흥하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미미즈가 봉인되어 있던 ‘저 세계’로부터 ‘이 세계’로 뛰쳐나와 기어코 땅을 흔들어 만물을 해치는 것은 인간들이 모여 살다 버리고 떠난 폐허에 남겨진 낡은 문들을 통해서다.
미미즈가 일단 문을 통과해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 지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란 그 문을 닫아 열쇠로 잠그는 것뿐이다.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소타(마쓰무라 호쿠토)와 스즈메(하라 나노카)다. 미미즈가 열어젖힌 ‘저 세계의 뒷문’을 닫은 뒤 과거에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기도를 하면 반짝이는 열쇠 구멍이 만들어진다. 그 구멍에 열쇠를 꽂아 잠그면 ‘문단속’이 끝나는 것이다.
버려진 문을 통과하는 미미즈는 인간적인 것과 인간 외적인 것, 문명과 문명 외적인 것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공존하는 이 세계에서 등장하는 재난을 보여준다. 그리고 신카이는 그렇게 열린 재난의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말한다.
‘우리’를 다시 상상하는 일
쵸비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드디어 성장해서 책임을 다하는 어른 소타가 되었을까? 아니면 생의 덧없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진정으로 타인을 위할 수 있는 스즈메가 되었을까. 나는 다양한 소년의 형상으로 변주되었던 쵸비가 이 작품에 이르러 다시 고양이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고양이 ‘다이진’에게서 쵸비를 보았기 때문이다.
다이진은 미미즈를 봉인하는 요석(要石·かなめいし)이다. 스즈메 덕분에 꽁꽁 얼어붙은 돌 상태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은 다이진은 요석의 임무를 버리고 스즈메의 ‘아이’가 되고 싶었다. 작품에서 벌어지는 모든 모험이 그런 다이진의 욕망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소타만을 바라보는 스즈메의 진심을 알게 된 뒤 그는 자신의 욕심을 접는다. 징징거리기를 멈추고 내 앞에 타인을 놓는 다이진의 마지막 선택은 가슴 아프고, 또 놀랍다.
최근 <귀멸의 칼날>, <주술회전>, <모브사이코100> 등 소년만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이미 충분히 망가진 세계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사회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대의라는 명분으로 개인을 희생시키는 전체주의적 선동과 ‘우리’를 다시 상상함으로써 연립하려는 노력은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 한 장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이 3·11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하고 있는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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