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3

[손민석] 4.3에 대한 반성은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인지를 판별하는 시금석이다 by 혁명읽는사람 - 얼룩소

[털어놓고 말해보자면] 4.3에 대한 반성은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인지를 판별하는 시금석이다 by 혁명읽는사람 - 얼룩소

[털어놓고 말해보자면] 4.3에 대한 반성은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인지를 판별하는 시금석이다

 한국에 살다보면 헷갈릴 때가 많다. 이 나라가 정말 "근대"라는 시기에 속하는가? 글로 배운 서양지성사와 몸으로 느끼는 경험 간의 괴리가 너무나도 크다보니 과연 이 사회를 근대사회라 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스스로 자유주의자를 참칭하며 민주당 운동권 세력을 양반 사대부에 비유하는 일군의 논객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내가 배운 자유주의나 근대와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의아스러울 때가 많다. 한국 같은 후진국에 태어난 '원죄'로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이가 사회주의적 이상보다 자유주의적 원칙을 오히려 앞세워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때문에 자주 괴로워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들을 포함한 한국 보수우파들의 대부분은 법치(法治)와 준법(遵法)조차 구별을 못해서 '노사법치주의'와 같은 해괴한 용어를 법을 공부했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적용해 수사를 하였던 검사 출신 대통령조차도 별 문제의식 없이 사용한다. 법치주의란 서구지성사의 맥락에서 전제군주의 자의적인 통치에 대항하여 인치(人治)와 대비되는 의미에서 정립되었다. 서구지성사는 법에 의한 통치조차도 자의성을 지니고 있다는 판단에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와 '법의 지배(rule of law)‘를 구별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서도 나오는 내용이다. 개인의 자유의 보장과 인민의 자기통치라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이상을 구현해내기 위한 수많은 시행착오가 반영되어 있는 개념들이다.
윤석열이 이 개념들을 아예 모르는 바도 아니다. 그의 법치론에 감명을 깊게 받아 그를 지지하게 된 윤소영과 같은 좌파 지식인도 있으니 말이다. 이 나라의 좌파 진영의 대부라 자부하는 윤소영 같은 이조차도 이러한 구별을 윤석열한테 처음 들었다며 "그래서 윤석열 총장에게 법치라는 개념을 배우면서 이 사람이 보통 검사가 아니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는 게 현실이다. 민주당 정부를 근대를 모른다고 질타하는 "좌파" 지식인이 근대의 a, b, c도 모르는 이 아이러니한 모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수십년동안 발리바르, 알튀세르 등의 프랑스 철학과 프랑스 좌파 경제학을 배우고 익히며 남한 지성계에 퍼뜨린 좌파 지성인이 근대의 가장 기초적인 법치 개념조차도 이해 못하고 있다가 나이 60이 넘어 배웠다고 말하는 이 모습에서 남한 지성계의 수준을 느낀다면 과언일까? 안타까워 눈물이 날 지경이다.이러한 언어와 개념의 혼란은 제주 4.3 항쟁을 다룰 때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국가이성을 대표하는 정부의 수반이 여러 번이나 사과하기까지 했는데도 아직도 이 나라의 보수우파를 대표한다는 정부 여당은 말로만 4.3 사건을 두고 자유민주주의 운운할 뿐 무엇이 중요하고 왜 이 사건이 자유민주주의와 관련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별다른 인식이 없어 보인다. 4.3 사건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반성해야 할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잠시 건국절 논란으로 가보자.

1. 건국과 해방 어느 것이 중요한가?

 8월 15일은 일본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날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날이기도 하다. 임시정부 정통설을 신봉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건국절을 주장하는 보수우파의 입장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것과 별개로 건국절 자체를 중시하려고 하는 의미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공감이 가는 바가 있다. 임시정부를 강조하게 된다면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 중에 사회주의 계열이 소외될 여지가 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한국사 학계에서는 독립운동사의 큰 줄기를 좌우합작운동에서 찾는다. 예컨대 국사학계의 강만길 교수는 2권의 책으로 국사학계의 연구 경향을 주도한 뛰어난 연구자인데 하나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상공업 분야에서 실증한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창작과비평사, 2018)이고 다른 하나는 독립운동사의 전개를 좌우합작에서 찾은 <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화평사, 1991)이다. 이 책에서 강만길은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면서 독립운동사의 전개의 큰 줄기가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민족국가건설로 향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이 이후 임시정부에 합류하면서 임시정부는 그야말로 좌우합작의 독립운동의 큰 줄기를 움직였던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화북조선독립동맹 등의 여러 사회주의 계파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나중에 북조선으로 유입되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해서 한국 독립운동사는 끝내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되지 못하였다. 강만길도 이러한 사실을 알기에 큰 줄기를 좌우합작으로 세우고 그것이 해방 전후사의 전개 속에서 어떻게 김구, 김규식 등의 통일운동으로 이어졌으며 더 나아가서 현재의 민주당으로까지 이어지는 장구한 흐름을 형성했는지를 계보사적으로 재구성하였다. 즉 강만길의 분단사학은 자본주의맹아론에 기초한 조선후기 사회의 변화 과정에서부터 출발하여 식민지기 농민과 농업문제를 두고 벌어진 좌우합작이 임시정부를 매개로 해방 이후에 통일운동으로, 그리고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계보화하여 현재의 민주당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강만길이 보수우파 세력을 두고 분단세력, 친일친미독재잔존세력 운운하는 것은 학자로서의 정도를 넘어서는 과격한 정치적 발언이라 할 수 있고, 그뒤에는 분단사학이라는 그 특유의 역사관이 놓여 있다. 민족주의를 매개로 한 좌우간의 이념적 대립의 청산을 지향하며 남북 통일까지 지향하는 그의 역사관이 지닌 어떤 이데올로기성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런 까닭에 건국절 논란은 보수우파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주의깊게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임시정부를 비롯한 집단에게 한국 독립운동사의 정통성을 부여하게 되면 친일파로 전향한 민족주의 우파 세력을 배제할 수 있을지 몰라도 동시에 중국공산당과 함께 조선혁명, 일본혁명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혁명을 지향하였던 좌파 공산주의 세력 또한 배제될 여지가 크다. 이들 모두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 건국절 논란을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국가정체성'이라는 대단히 애매모호한 개념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하려고 하는 보수우파들 또한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건국절이 의미 있는 가장 큰 이유는 1948년 8월 15일을 통해 비로소 조선인이 자신의 독자적인 민족국가를 건설하는데 성공하여 "근대적 시민"으로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지만, 엄밀하게 말해 임시정부는 근대국가로서의 조건을 온전히 갖추지는 못한 상황이었을 뿐만 아니라 주권자로서의 인민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명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일본제국은 지방자치의 수준에서는 조선인의 정치 참여와 선거를 허용하였지만 조선총독부는 대의제라기보다는 전제군주제에 가까운 정치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조선인에게 있어 1948년 8월 15일은 근대적 시민으로서 자유로운 의사표명에 따른 '5.10 선거'를 통해 자신을 대표할 정부를 수립할 기회를 얻었고 그것을 실제로 구현한 날이라는 점에서 뜻깊은 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조선인이 근대적 시민으로 재구성 될 수 있는 계기는 일본제국주의로부터, 식민지적 상태로부터 "해방"되었기에 가능했다. 다시 말해서 '건국'은 "해방"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만 해방으로서의 1945년 8월 15일이 건국으로서의 1948년 8월 15일에 앞설 수 있다. 조선인에게는 1945년 8월 15일에 비로소 근대적 개인으로서 선거를 통해 자유롭게 의사표시를 하여 스스로를 대표할 국가를 구성하는 가능성이 열렸다. 여기서 거듭해서 "자유로운 의사표시"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두기를 바란다. 비록 실제로는 일본제국의 행정력이 한동안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으며, 미군정의 점령이라는 상황이 지속되기는 했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조선인은 일본 천황의 '신민'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게 의사표시를 하며 자신의 대표를 선출하고 국가를 건설할 근대인으로서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정말 그러한 자유를 누렸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건 사실 나와 같은 좌파 마르크스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근대 자유민주주의 질서의 '이중성' 등을 폭로하면서 할 얘기이다. 적어도 해방 이후의 3년사는 조선인민들이 다양한 정치적 집단과 그들의 의견을 접하며 어떠한 국가를 세울 것인지를 고민할 수 있던 중요한 시기이지, 단순한 "혼란"과 "폭력"의 시기가 아니다. 관점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5.10 선거를 통해 구성된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말의 의미도 이 맥락에서 음미되어야 한다. 강규형 등의 보수우파들은 리영희가 일찍이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해석의 차이 운운하면서 여전히 대한민국만이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말을 하지만 북조선이 유엔에 가입한 상황에서 한국만이 정통성을 지닌 국가라 주장하는 건 사리에 맞지 않는다. 정확하게 유엔의 감시하에 자유선거로 수립된 대한민국이 합법적인 정부이며, 북조선에는 선거감시단이 입국하지 못해 그러한 선거를 치르지 않았으니 한반도에서는 대한민국만이 그러한 방식으로 정부를 구성한 유일의 합법 정부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게 합리적이다.

이는 이후 북조선 정부가 붕괴하였을 때 한국, 중국 등의 주변국들이 자동적으로 북조선 지역을 점령하게 되는 게 아니라 북조선 인민들의 자유로운 선거에 따라 구성된 정부가 남한과의 통일을 지향할지 여부 등을 자유로운 의사표시에 맡겨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태균의 <한국전쟁>(책과함께, 2005)에 나와있듯이 한국전쟁 중에 북조선 지역을 점염한 이승만 정부가 통치권을 행사하려 하자 미국이 거부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표시에 입각한 사회계약의 형성과, 그 사회계약에 입각한 국가의 구성은 서구지성사에서 수백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추진되어 온 관념이다.

2. 4.3은 국가건설 과정에서 있었던 폭력을 증명한다

 이제야 우리는 비로소 본론이라 할 수 있는 4.3 사건에 대해 논할 수 있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4.3 사건은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 과정이 결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표시"에 입각하여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미군정과 경찰, 서북청년회 등의 폭력행사를 통해 인민의 자유로운 의사표시를 억압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주지역은 유일하게 1948년 5.10 선거를 치르지 못했던 상황이기도 하다. 이 말은 제주도에서의 선거와 그에 따른 합당한 정부 구성이 이뤄지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표시에 의해 정부수립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을 대한민국 정부는 1년 넘게 강제로 점령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속한 인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하였다. 남로당의 '반란' 운운하는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논리인지는 이 지점에서 명확해진다. "반란"이라는 표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남로당에 의한 선거방해, 총파업 시도 등의 이전인 미군정 시기부터 대한민국 정부에 이르기까지 국가는 자의적으로 권력을 남용했으며 인민들을 경찰력 등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억압하였다. 국가 이전에 인민이 있고 개인이 있다. 적어도 자유주의적인 논리를 펼칠 것이라면 개인의 자유를 국가가 어떻게 폭압적으로 말살하였는지, 주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에 대해서 국가가 그것을 강제로 편입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폭력을 행사했으며, 그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았고,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러한 피해에 대한 정당한 배상을 받지 못했는지를 논해야 한다.

일찍이 미국의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는 오직 미국만이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도덕성을 지닌 국가라 말한 적이 있다. 그때 그가 그렇게 말했던 이유는 미국을 제외한 구(舊)세계의 모든 민족국가들은 그것의 탄생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피를 흘리게 만들었지만, 미국의 13개의 주는 유일하게 자유로운 개인들의, 그리고 그러한 개인들의 의사를 반영한 주(州)들의 자유로운 의사표시에 입각하여 연방정부를 구성하였기 때문에 미국이라는 국가는 다른 모든 국가들과 달리 자유와 사회계약을 통해서만 정부를 구성한 유일한 국가라는 의미에서였다. 물론 우리는 미국이 국가건설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인디언들을 학살하였는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레오 스트라우스의 주장을 미국 편향적이라 비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적은 곱씹어볼 구석이 많다. 한국이라는 근대국가 또한 제주도를 비롯하여 수많은 학살을 행하며 시체 위에 세운 국가라는 점에서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다.

나는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조금의 호감도 없다는 점을 미리 밝혀두고 논의를 이어가자면 노무현과 문재인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세력이 과거사 바로세우기 등의 작업을 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과거 국가건설의 과정과 권위주의 정부 하에서 이뤄졌던 수많은 국가폭력의 자의적인 행사에 대한 국가기관의 반성 없이 국가폭력의 행사의 '도덕성'을 바로 세울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일부 민주당 지지세력이나 정치인들이 이것을 기회삼아 보수우파 세력의 도덕성을 무너뜨리고 정치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려 한다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폭력의 자의적인 행사가 가져온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반성이 없이는 레오 스트라우스가 지적하였던대로 국가폭력 행사에 있어 도덕성을 담보하기 어려워진다. 국정원, 군 등의 국가폭력기구가 스스로 나서서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고 고백하여 인민들께 다시는 이러한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할 때 비로소 한국이라는 국가가 지닌 도덕성이 인민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덕성의 확립은 개인에게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했을 때 그것을 보호해줄 수 있는 국가의 법적 제도의 확립과 함께 이뤄지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수적인 선결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작업들이 선결되어야지만 비로소 나와 같은 좌파 마르크스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이 '국가의 기만', '부르주아적 술책' 운운하며 근대비판을 수행할 수 있는데, 한국이라는 국가의 문명적 수준은 과거사를 바로세우고 자의적인 폭력 행사를 반성하기에 이르렀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이러한 국가를 운영하는 보수우파들은 그러한 문명적 수준에 미달하여 엇박자를 내니 이래서는 도저히 '좌파적 비판'을 행할 수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4.3 추념식에 불참했을 뿐만 아니라 추념사로 보낸 글에서 "무고한 4.3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 유가족들의 아픔을 국민과 함께 어루만지는 일은 자유와 인권을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당연한 의무"라고 말하면서도 "저는 제주를 자연, 문화, 그리고 역사와 함께 하는 격조 있는 문화 관광 지역, 청정의 자연과 첨단의 기술이 공존하는 대한민국의 보석 같은 곳으로 탈바꿈시키겠다고 약속드렸다"며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인들이 견문을 넓힐 수 있는 품격 있는 문화 관광 지역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적어놓았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를 아는 이가 할 수 있는 발언인가?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했어야 하는 발언은 과거의 국가건설 과정에서 있었던 인권침해 및 개인의 자유에 대한 억압을 반성하며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과거사에 대한 일관된 반성에 기초하여 국가 폭력의 행사에 있어 개인의 권리가 침해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내용이어야 한다. 그런 자리에서 관광지 운운하는 것은 황당하다 못해 참담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런 자를 대한민국 대통령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를 과연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대표하는 정치지도자라 할 수 있겠는가. 발언이 과격한 것에 사과의 말씀을 올린다. 하지만 정말 솔직한 심정이다. 이자가 과연 자유가 무엇인지, 자유주의가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아는 사람인가?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제주 4.3사건을 보고 있는 것인가?정치인의 발언은 헤겔이 <법철학>에서 말하였듯이 한 민족공동체의 '정신'을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이다. 우리의 공동체의 지적 수준과 문명적 수준이 담겨 있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발언이 인민들에게 전달될 때 일종의 '시그널'을 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특정한 정치인이 공개적으로 행하는 발언은 그 지지자들을 포함한 사회구성원들에게 있어 그러한 발언을 해도 된다는, 혹은 그 발언에 담겨 있는 실천적 행위를 구현해도 된다는 '시그널'을 준다. 정치인의 혐오발언을 강하게 규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인들이 나서서 광주항쟁이나 4.3 사건을 두고 남로당 혹은 김일성의 지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식으로 폄하하기 시작하면 사회구성원들은 그렇게 말해도 괜찮다는 시그널을 받게 된다. 정치인의 언어에 품격과 지성이 담겨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제주 4.3 사건에 대한 정치인들의 발언의 수위가 날이 갈수록 높아져가는 현 시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정치인의 무지한 발언에 선동되어 포퓰리즘적인 대중동원이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현 시점에서 우리는 어떠한 언어로 제주 4.3 사건을 받아들일 것인지 논해야 한다. 제주 4.3 사건은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판별하는 시금석이다. 



혁명읽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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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현장] 4.3 유족 가리키며 "공산주의"... 뻔뻔한 서북청년단 4.3 75주년 추념식 현장인 제주 4.3평화공원 앞 어린이교통공원 네거리. 3일 오전 7시 20분경 4.3 학살 당사자인 서북청년단원들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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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전 7시 30분경 4.3 75주년 추념식이 열릴 예정인 제주 4.3 평화공원 앞에 서북청년단이 탄 승합차가 나타나자 4.3 유족들이 저지에 나섰다. 이에 경찰이 승합차를 둘러싸고 막고 있다.
▲ 서북청년단 등장 3일 오전 7시 30분경 4.3 75주년 추념식이 열릴 예정인 제주 4.3 평화공원 앞에 서북청년단이 탄 승합차가 나타나자 4.3 유족들이 저지에 나섰다. 이에 경찰이 승합차를 둘러싸고 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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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강 : 3일 오전 9시 11분]

"여기가 어딘지 알고 너희가 오느냐, 이 살인마들아!"

4.3 75주년 추념식이 열릴 예정인 제주 4.3평화공원 앞 어린이교통공원 네거리. 3일 오전 7시 20분경 서북청년단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자 유족들은 격앙된 목소리로 분노를 쏟아냈다.

추념식이 열리는 4.3 평화공원에서 집회를 예고했던 서북청년단은 이날 오전 승합차를 타고 나타났다. 몇몇 사람들은 '서북청년단'이라고 적힌 명찰을 달고 있었다. 서북청년단은 4.3 때 군경과 함께 제주도민들을 불법학살해 '인간백정'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악명을 떨쳤다. 이날 현장에 나타난 이들은 과거 서북청년단을 추종하며 같은 이름을 쓰는 극우단체에 가깝다.

한 서북청년단원은 "제주 4.3 추념식은 화해와 상생을 위한 자리라고 들었다. 서북청년단도 그런 것을 위해 온 것이다"라며 "대한민국에는 사상의 자유가 있다. 오늘 죽어도 반드시 서북청년단 깃발을 들겠다"고 취재진에게 밝혔다. 
 
3일 오전 7시 30분경 4.3 74주년 추념식이 열리는 제주 평화공원에 서북청년단원이 탄 승합차가 등장하자 유족들이 강하게 항의했다.
▲ 승합차 안의 서북청년단 3일 오전 7시 30분경 4.3 74주년 추념식이 열리는 제주 평화공원에 서북청년단원이 탄 승합차가 등장하자 유족들이 강하게 항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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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75주년 추념식을 앞두고 3일 오전 7시 30분경 제주 4.3 평화공원에 나타난 서북청년단. 가슴에 '서북청년단'이라고 쓰여진 표찰을 달고 있다.
▲ 선명한 "서북청년단" 표찰 4.3 75주년 추념식을 앞두고 3일 오전 7시 30분경 제주 4.3 평화공원에 나타난 서북청년단. 가슴에 '서북청년단'이라고 쓰여진 표찰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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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제주 4.3희생자유족청년회와 제주 4.3기념사업위원회 회원 20여 명도 이날 새벽부터 나와 이들의 집회를 저지하기 위해 준비했다. 유족들이 서북청년단이 탄 승합차에 접근하려하자 경찰은 승합차를 에워싸고 저지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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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희생자유족청년회원이라고 밝힌 한 회원은 "4.3을 폄훼하는 극우세력에 대항해 주장에는 주장으로, 폭력에는 폭력으로 답하겠다"고 말했다. 

서북청년단은 이날 20여 명이 참여하겠다며 집회를 신고했는데 제주 거주 16명, 육지에서 온 사람은 4명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75주년 제주 4.3 추념식을 앞두고 제주 전역에 "4.3은 김일성과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라는 현수막이 나붙어 유족들의 공분의 산 바 있다.

서북청년단의 등장으로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던 상황은 이날 오전 8시 50분께 이들이 타고 온 승합차가 현장을 떠나면서 일단락됐다.
 
3일 오전 7시 제주 4.3 75주년 추념식이 예정된 제주 4.3평화공원 어린이교통공원 앞 네거리에 제주 4.3희생자유족청년회와 제주 4.3기념사업위원회 회원20여 명이 도열해 있다.
▲ 서북청년단 막기 위해 새벽 출동한 4.3 유족들 3일 오전 7시 제주 4.3 75주년 추념식이 예정된 제주 4.3평화공원 어린이교통공원 앞 네거리에 제주 4.3희생자유족청년회와 제주 4.3기념사업위원회 회원20여 명이 도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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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제주 4.3 75주년 추념식이 예정된 제주 4.3평화공원 어린이교통공원 앞 네거리에 내걸린 현수막. 서북청년단이 이날 집회를 예고한 가운데 이에 반대하는 제주도민들이 내건 현수막이다. 서북청년단은 4.3 때 군경과 함께 제주 도민을 불법학살한 당사자다.
▲ 서북청년단은 즉각 떠나라 3일 제주 4.3 75주년 추념식이 예정된 제주 4.3평화공원 어린이교통공원 앞 네거리에 내걸린 현수막. 서북청년단이 이날 집회를 예고한 가운데 이에 반대하는 제주도민들이 내건 현수막이다. 서북청년단은 4.3 때 군경과 함께 제주 도민을 불법학살한 당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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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오라2동 교차로에 걸려있는 제주4.3 왜곡 현수막.
▲  제주시 오라2동 교차로에 걸려있는 제주4.3 왜곡 현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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