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향의 사상사적 연구 | 논형 일본학 8
후지타 쇼조 (지은이),최종길 (옮긴이)논형2007-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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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쪽
전후 일본의 역사 문제
[품절] 일본사상으로 본 일본의 본질 - 학兵學.주자학朱子學.난학蘭學.국학國學
한일관계의 흐름 2008-2009
일본사상사
최후의 무사 신센구미
책소개
일본의 근현대사를 총괄하는 전향 문제를 크게 전전적 전향과 전후적 전향으로 나누어 분석한 책. 지은이 후지타 쇼조는 종래의 전향 구분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표면적 전향에서 실질적 전향으로의 이행과 정식의 위장전향과의 양극 경향의 역동성을 살리는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목차
저작집 서문
이와나미출판사 초판 서문
1장 쇼와 8년의 전향 상황(1933)
1. 문제의 발생
2. 이론인의 형성_전향론 전사
3. 전향 사상사 개설_하나
4. 전향 사상사 개설_둘
보론. 어느 마르크스주의 학자_가와카미 하지메
2장 쇼와 15년의 전향 상황(1940)
1. 들어가며
2. 집단 전향
3. 집단과 개인
4. 맺음말
3장 쇼와 20, 27년의 전향 상황(1945, 1952)
1. 전후의 전향 개념
2. 쇼와 20년의 전향 상황
3. 쇼와 27년의 전향 상황
<공동연구 전향> 중.하권 총평에 대한 보주
편자 해제
역자 후기
용어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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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후지타 쇼조 (藤田 省三) (지은이)
사상사가, 비평가.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1966년 호세이 대학 법학부 교수가 되었다. 1971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9년간 재야의 지식인으로 출판사의 고전·시민 세미나 조직에 참여하며 활동하다가 이후 같은 대학에 복직했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천황제론을 계승한 첫 논문 ?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1956)는 천황제 파시즘 분석을 중심으로 한 전후사상사의 획기적인 비평으로 평가받는다. 1967년 5월 영국의 계약직을 얻어 일본을 떠나기 직전까지 '정통과 이단' 연구회의 멤버로서 스승 마루야마, 선배 이시다 다케시와 함께 발제·토론을 했으며, 쓰루미 슌스케 등과 더불어 '공동연구 전향'의 구성원이기도 했다. 이후 '사상사보다는 정신사'라는 모토 아래 작업했으며, 과작이지만 마루야마학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현대 일본 최후의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2003년 직장암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1966), <유신의 정신>(1967),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1975), <정신사적 고찰>(1982), <전체주의의 시대경험>(1995), <전후정신의 경험>(1?2, 1996)을 썼고, 생전과 사후에 각각 <후지타 쇼조 저작집>(전10권, 1997~1998), <후지타 쇼조 대화집성>(전3권, 2006)이 간행되었다. 접기
최근작 : <이단은 어떻게 정통에 맞서왔는가>,<전체주의의 시대경험>,<정신사적 고찰> … 총 14종 (모두보기)
최종길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영남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서 일본근대사를 공부하였다. 이후 짧은 직장생활을 거쳐 1997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츠쿠바(筑波)대학에서 일본근현대사를 전공하였다. 2005년 3월 츠쿠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 동의대, 고려대, 동아대, 원광대에서 연구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진실 ·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작 : <이단은 어떻게 정통에 맞서왔는가>,<전체주의의 시대경험>,<정신사적 고찰> … 총 14종 (모두보기)
최종길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영남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서 일본근대사를 공부하였다. 이후 짧은 직장생활을 거쳐 1997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츠쿠바(筑波)대학에서 일본근현대사를 전공하였다. 2005년 3월 츠쿠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 동의대, 고려대, 동아대, 원광대에서 연구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진실 ·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작으로 『근대일본의 중정국가 구상』(경인문화사, 2009), 『한국과 일본, 역사화해는 가능한가』(공저,연암서가, 2017), 『냉전의 전개와 일본공산당의 혁명노선 변경』(일본근대학연구, 제68집. 2020,5.), 번역서로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논형, 2007), 『천황제의 침략책임과 전후책임』(경북대학교 출판부, 2017)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전후 일본의 사상운동과 식민지 지배책임>,<전후 지식인의 이데올로기와 역사인식>,<한국과 일본, 역사 화해는 가능한가> … 총 1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변증법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은 내적 모순에 의해 변화(그 변화가 반드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어떨지는 별도의 문제로 하자)한다고 한다.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무엇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조차 감지하기 힘들 만큼 너무도 빨리 변화하고 있다. 특히 공동체의 삶의 방식과 관련된 가치관의 변화는 공동체에 속한 개인과 사회의 삶의 방식을 새롭게 규정한다는 측면에서 더욱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따라서 사회적 역사적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자발적 의지 혹은 타의적 강제에 의한 개인의 변화와 그 결과로서 발생하는 사회적 변화를 살펴보는 작업은 학문의 사회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역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학문의 이러한 기능을 강하게 요구한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답하고 있는 것이 후지타 쇼조의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다.
사람이 지금까지의 가치관 혹은 삶의 방식을 버리고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그는 자신을 포함한 주위의 모두에게 새로운 삶의 태도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만약 본인 스스로 자신에게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하지 못한다면 그의 삶은 좌표축을 잃어버린 순간순간의 상황과 욕망에 기초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이 모여 한 세대가 되고 한 세대가 모여 한 시대가 된다고 한다면, 한 세대 한 시대를 살아간 인간들은 자신이 살아간 시대의 변화에 대해 왜 바뀌었으며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변명거리를 가져야 한다.
역자는 자신의 삶 속에서 체험한 ‘전향’ 경험에 의한 인생여정의 변화를 후지타의 말을 빌려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역자의 이러한 논의는 문제해결을 위한 과정과 방식보다는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이자 주체적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상대방을 설득하고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일관된 내적 논리)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풍요 속에서 빈곤해지고, 대중 속에서 소외되고,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적 주체이면서 끊임없이 객체(소비대상)로 전락하고 있는 현대인에게 이 책은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사상사적 방법론을 제시해준다.
책 소개
이 책은 일본의 근현대사를 총괄하는 전향 문제를 크게 전전적 전향과 전후적 전향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후지타가 참가한 사상의 과학연구회의 좌장이었던 쓰루미 슌스케는 전향을 ‘권력에 의해 강제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사상의 변화’라고 정의하고 (1) 만주사변 이후의 국가권력에 의한 강제력 발동에 의해 1933년을 정점으로 해서 일어난 급진주의자의 집단전향, (2) 1937년의 중일전쟁 개시 후 1940년의 신체제운동에서 정점을 이루는 시기에 주로 자유주의자에게 가해진 강제력에 의한 전향, (3) 1945년 8월 15일을 정점으로 패전에 의한 권력의 이동에 따른 새로운 방향을 갖는 강제력의 발동에 의해 주로 반동주의자에게 일어난 전향, (4) 전후 역코스의 개시에 의해 1952년 피의 노동절 탄압 직후에 정점에 달한 급진주의자의 전향으로 구분한다. 그에 의하면 이 (1)과 (4)가 자각적인 예각(銳角)의 전향에 대응하고, (2)와 (3)이 무자각적인 둔각(鈍角)의 전향에 대응한다고 본다.
이러한 구분기준에 기초하여 후지타는 이 책의 2장에서 분석하고 있듯이 (2)의 전향은 집단전향을 기초로 하는 것이고 1장에서 분석한 (1) 시기의 마르크스주의 . 반국체주의 . 혁명운동‘에서의’ 전향만으로는 있을 수는 없고, 총력전이 가져다준 목표‘으로의’ 전향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익찬이론과 저항이론의 몇 개의 형태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보주에서 후지타가 자기비판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전향을 적과의 투쟁에서 비타협인가, 타협 . 굴복인가에서만 보려고 한다면, 전향 . 비전향 . 위장전향 . 표면적 전향 . 실질적 비전향 등의 제 범주의 다의적 양상에 비집고 들어가 그 중에서도 특히 표면적 전향에서 실질적 전향으로의 이행과 정식의 위장전향과의 양극 경향의 역동성에 입각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3장에서 다루고 있는 전후 상황에 대해서 후지타는 패전시의 제도전향 그중에서도 8월 15일의 항복 조칙에 ‘항복’이라고 하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 것에 상징되는 조금씩 처리하는 천황제 그 자체의 전향 및 점령군 군사 권력에 의한 제도인에 대한 강압전향의 양상을 논한다. 다른 한편 전후에 ‘국민의 전향’ 속에서 전전의 전향과는 이질적인 새로운 의미를 띤 전향이 성립하려 했다고 한다. 즉, 권력에의 순응과정과 결합한 사상이동(고전적 전향)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순응과정에서 점차로 멀어져 가는 사상이동, 즉 권력에 대한 사상의 독립으로의 발걸음이 발생하고 이것이야말로 다이쇼 말 . 쇼와 초기에 의식적인 방향전환으로서 자주적으로 나타난 것과 어떤 점에 있어서 공통하는 것이 되었다고 한다. 후지타는 이것을 국가기구와 국민공동체가 붕괴된 자연 상태에서 ‘국민’을 대신해서 독립적 연대를 형성하는 ‘사회’의 관념이 성립되려고 하고, 전후적 자연 상태 속에서 사회계약의 형성으로 향하는 첫발을 내디딘 것이라고 평가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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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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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의 사상사적 연구 / 후지타 쇼조
1장 쇼와 8년의 전향 상황(1933)
"전향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하나의 단어로써가 아니라 그 사상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등장한 것은 다이쇼大正 시대 말기, 프롤레타리아운동의 '방향 전환'이 논의되는 과정에서였다." "'후쿠모토주의'에서 전향은 완전히 주체적인 개념으로서 고안되었다. 상황 속에 파고들어 상황 자체를 목적의식적으로 바꿔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상황 속에 내재해 있는 '전화轉化의 법칙'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객관 세계의 법칙' 외에 상황과 변혁 주체와의 관계를 가능한 한 〈법칙적〉으로 정확히 파악하여, 그것에 의해 주체적인 원칙을 만들고 그 원칙에 의해 상황에 대처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른바 운동의 주체를 법칙화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운동의 법칙은 '객관세계'의 법칙과 대응해서 변증법의 정식에 적합해야만 한다. 무법칙의 운동에서 법칙적 운동을 향해 법칙적으로 전화하려는 능동적인 행동이 '전향'인 것이다. 따라서 후쿠모토는 전향을 자주 '자기지양止揚'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13-4)
"후쿠모토주의에서 비롯한 전향에 대한 사고방식은 국가권력 또는 일본의 지배체제에 의해 역이용되었다. 국가권력은 일본의 체제에 알맞은正堂 국민철학을 잊어버리고 실현 불가능한 〈완전히 가상이라고 불러야만 할······ 외국의 사상에 현혹된〉 자가 자기비판을 하고 다시금 체제에 의해 인정받은 국민사상의 소유자로 복귀하는 것을 '전향'이라고 부르면서, 현대 일본 사상사에 특수한 기초 범주의 하나로서 전향이 생겨난 것이다." "1933년(쇼와 8년)의 사노·나베야마의 전향이 이러한 전향 개념을 성립시킨 계기가 되었지만, 그때 양자의 성명문은 '일본 프롤레타리아 자각분자自覺分子의 의견'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전향이라는 것이 원래 어떠한 경우에도 주체적인 정신태도의 존재를 하나의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러한 정신태도를 현대 일본에 우선 발생시키고, 그것에 의해 현대 일본의 사상사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것은 분명히 생산성·비생산성의 전부를 포함한 공산주의였던 것이다."(15-7)
"공감sympathy이란 주체의 능동적인 움직임인데, 타인을 사랑하려는 의지로 타인의 감정을 감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이 설은 유럽에서 고안되었기에 유럽 시민의 '공감의 존재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의 '공감'구조는 실로 그것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다야마 가타이가 간파한 것처럼 일본 사회에서 공감은 명확히 규칙화되지 않은 의식이지, 주체의 의지에 의해 매개된 감정의 움직임이 아니다. 희로애락을 함께 해야 할 때와 장소에서도 세상의 관습에 의해 공감은 사전에 정해진다. 게다가 규율로서의 관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운치 않은 무규율의 관습에 의한다." "천황제 파시즘이 잇달아 작은 전쟁을 일으키고 대외적 위기를 양성하면서, 공동체 국가관을 강화시켜 나가는 과정은 국가를 지배메커니즘이라 파악하는 국가기구적 사고방식을 점차 분해·흡수해 가는 과정이고, 동시에 감성의 개별성을 말살하여 일본적 공감을 확대 재생산하는 과정이었다. 전향은 여기서 발생한다."(32-3)
"더구나 도쿄대학 출신자 모두에게 오늘날까지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엘리트주의는 그들로 하여금 한순간도 국민적 지도자(반드시 국가적이지는 않다)의 지위에서 멀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게 하였으며, 따라서 자신이 운동에서 지도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보다 단 한발 앞선 위치에서 보조를 맞추게 된 것이다. 그들이 항상 국민적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한 결코 일본적 공감에 대해 반항할 수 없다. 게다가 항상 국민적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한 눈앞의 잇속이 보이는 상황에서 물러나 있어야 했다. 이른바 일본의 큰 상황 속에 몰입하면서 작은 상황에서 초월에 그것을 조작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많은 경우 자신의 공감매몰성은 의식되지 않고 자신의 상황조작성만이 과도하게 의식된다. 따라서 근본적인 자기비판은 어떤 방향에서도 불가능하고 전향의 자각 역시 미약하다." "이러한 전향 노선의 결과 일본인의 진보관과 자유관이 크게 왜곡되어 근본적인 부분에서 전투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33-4)
"사노·나베야마는 일본 사회의 사상 구조의 전향을 전제로 하고 그것을 전위당의 입장에서 용인하고자 했다. 〈황실을 민족적 통일의 중심으로 느끼는 사회적 감정이 노동자 대중의 마음속에 있다. 우리는 이 실감實感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출한 그들은 여전히 〈과거와 동일하게 조금도 변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긍지를 가지고 죽음에 임하〉려 한 것이라고 스스로 선언했다. 아카마쓰와 아소는 일본 국내에서 자기 자신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자각을 상황에 따라서 바꾸고, 야스다 등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물리쳤으며, 고바야시형 중간 리더sub-leader는 자기 자신의 사상적 입장에 대한 자각을 전환시켜 일본적 공감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사노·나베야마는 그들의 전향 자체가 전위당前衛黨이 취해야만 하는 올바른 노선이라고 생각한 점에서 그들의 전향은 단순한 개인의 사상 전향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공산당이 공산당으로서 전향하려고 하는 노선이 제출된 것이다."(47)
"그러나 그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사상적 도정道程 속에서 정당하게 검토되어야 할 문제는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사노·나베야마의 전향 과정에서 우리가 지적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 하나는 인터내셔널한 운동 속에서 발생하는 대국주의의 역기능에 관한 것이다." "국제적 연대운동이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는 동안에는 각국 운동단체 간의 국제적 평등이 제법 잘 지켜지지만, 한 나라가 지배력을 장악하고 그 나라가 강대국이 되어 다른 종류의 지배체제에 대항하는 경우에는 그 새로운 권력은 세계 운동의 보루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한편 그로 인해 운동단체들 사이에서 많은 특권을 획득한다. 그 결과 각국 운동단체는 새로운 권력의 국가이성에 바탕하는 국제정치상의 다양한 술책조차 종종 술책으로서가 아니라 운동이념으로써 지지해야만 하는 상황에 봉착한다. 나베야마 등은 옥중에서 이 점을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이다."(48-50)
"이러한 관찰은 날카롭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서 사노·나베야마 성명서의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결코 단순한 길이 아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공산당이 운동에서 자주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코민테른에서 이탈해 〈일본의 조건에 입각한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노선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일본의 민족적 특수조건이란 〈어느 나라에도 없는 국체〉관이 강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대중들 속에서는 그렇다. 따라서 '군주타도론'에 열광하는 것은 소부르주아적인 자유주의 혹은 아나키즘의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 나베야마는 천황제 사회주의야 말로 대중 노선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그들은 서로 분열된 이중의 대중관을 가질 수가 없었다. 따라서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로 존재하는 한' 눈앞에 있는 대중의 '건전한 정치적 관심으로' 되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여기서 성명서의 〈우리는 대중이 본능적으로 보여준 민족의식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는 테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전쟁을 승인하는 것이 되었다."(50-2)
"그들은 실체적인 대중주의자였기에 소부르주아 배제주의자가 되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흐름 속에 보이는 하나의 특징은 '소부르주아 급진주의'라든가 '대중주의' 등을 작은 틈도 없이 딱 맞는 형태로 사회적 계층으로서의 소시민과 대중에 결합시켜버리는 경향이다. 사상은 개인의 신념과 판단 그리고 행동 태도가 뒤섞여진 것이기에, 그처럼 뚜렷하게 사회적 계층과 유착될 리는 없다. 사상 형성 상황으로서의 계급 관계가 커다란 영향력을 지님으로써 특정 계급에 공통되는 사상 경향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중첩되지 않고 어긋나는 부분도 상당히 많다는 점을 그들은 생각하지 못했다." "이처럼 '사상파악의 부동성浮動性을 이해하지 않으면 나쁜 의미에서의 이론 마키아벨리즘이 발생한다. 여러 가지 사상적 입장을 자의적으로 고정하여 하고 싶은 대로 절대가치를 부여하고 추방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노·나베야마는 '이론주의'에서 '대중본능 존중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이 이론 조작을 적용한다."(53-4)
"근대 일본에서 상황에 대해 일관적인 원리를 가진 사상 체계는 마르크스주의가 유일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운동단체의 패배는 동시에 원리 일반의 패배를 의미하기 쉽고, 여기서 발생하는 허무주의도 하나의 원리적 상실감을 모든 원리의 상실감으로 즉시 치환하는 것이었기에, 첫사랑에 실패했다고 연애 자체를 부인하는 것 같은 안이함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상황의 추이에 대한 저항성을 갖지 않고 질질 끌려 그만두는 성질을 갖는다." "따라서 주의에서 해방된 곳에서 발생하는 '자유주의'는 다양한 주의를 자유로이 조종하는 것에 의해 정치권력의 팽창 경향을 저지하면서 역으로 사회 내의 자유를 확대해가려는 유동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이념을 찾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계속해서 존재하는 천황제 이념을─이것은 동시에 비이념이기도 한 대용물이지만, 그만큼 한층 더─부정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것을 천황제적 허무·자유주의라고 부른다."(55-6)
2장 쇼와 15년의 전향 상황(1940)
"1933년 6월의 전향에서 사노 등은 공산주의자 개인으로서 대외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당을 대표하는 지도자 다시 말해 초인격적인 집단의 전체 인격성을 체현하는 자로서 당에 전향을 요구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의 전향과 당의 전향을 동일시하는 지도의 병리현상을 드러냈다. 이 병리는 개인적인 집단, 특히 공동체적 모임과 카리스마·교조에 이끌리는 집단에서는 병리로서가 아니라 극히 일반적인 보통의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조직을 비인격적인impersonal 것으로 파악하는 고전·근대적古典近代的인 사고의 바탕에는 지도는 특정한 지도자에게 속하는 기능이 아닌 우연히 특정한 지도자가 품고 있던 지도 방침·지도 강령·지도 정신이 완수되는 활동이다. 따라서 그것은 특정 인간에게 전체적으로 얽혀있지 않다는 점에서 객관적, 또는 추상적인 것이기도 하므로 위의 병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병리로서 자각된다."(96-7)
"절차의 실제적, 또는 사상적 의미를 자각하는 것이 다름 아닌 근대 조직 속에서 살아가는 에토스ethos다. 앞서 말한 조직의 근대적 유형도 구성원의 그러한 에토스를 전제조건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노 등은 그들 자신이 형성 확립하고자 노력했던 조직의 에토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그들 개인의 전향 자체는 그들의 자유지만, 전향의 방법과 전향 형태는 지금까지 그들이 서 있었던 공식적 입장에서 제약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 무자각적이었던 자들은 사노·나베야마만이 아니다. 그들의 전향을 '배신'이라 하여 격렬하게 비난했던 비전향 공산주의자들 또한 무자각했다고 본다. 만약 그들이 공산당의 '미덕'이 지도자 교체에서 객관적 원리를 고수하는 데 있다는 점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사노 등의 전향 자체를 공격하기보다는 오히려, 때로는 그 공격과 동시에 사노 등의 절차에 대한 오류를 보다 격렬하게 공격했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98-100)
"이리하여 공산당은 자신들의 자랑스러워해야 할 지도자 교체의 원리성에 대한 자각이 전全당을 통틀어서 없었던 것이 된다." "'규약'의 체계적 해석에 대한 논쟁이 어쩌면 한 번도 없었을 것이라 추정될 정도로 적다는 것은 그러한 절차 정신의 결여를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절차정신, 바꿔 말하면 규칙의 구체화 감각이 전향을 둘러싼 대립 속에서 서로 결여되어 있다고 하는 연관이 사노 등의 전향을 계기로 집단 전향의 형태를 취하게 한 하나의 중요한 이유였다. 물론 이 경우 사실상 집단 전향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사노·나베야마 자신의 전향 방식이 그 형태를 취하였고 그들이 그것을 원했을 뿐, 사실상 그들의 영향 하에서 괴멸적 타격을 받으면서도 공산당 집단이 비전향을 관철하게 된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이 전향의 경우가 그 이후 익찬 시대로의 진행시기에 사실상 광범하게 전개된 집단 전향의 사상사적 맹아로 보이는 것이다."(102-3)
"일본 전역에 걸쳐 사회의 각 영역을 망라한 집단 전향의 분출은 전향이 '시대적 요구'가 되었을 때, 일본 내에 있는 모든 요소가 방향 전환을 강요받았을 때, 따라서 전향이 '표어'가 되었을 때 일어났다. 그 '때'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고도국방과 총력전의 요구가 사회 만물의 활동 형태를 결정지어야 했을 때, 모든 입장은 목표를 부여받고 그 목표를 향해 전진轉進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렇게 해서 전향은 이전처럼 단순히 마르크스주의·반국체주의·혁명운동'에서의' 전향일 수만은 없게 되어, 총력전이 부여하는 목표'로의' 전향이 되었다." "'적극적'인 '보국報國' 행동이 요구되는 한 '무위'도 '제멋대로'도 '망상'도 허용되지 않는다. 방관주의, 자유주의, 관념적 태도에서 특정한 행동 그 자체로의 전향이 촉구됐던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여기서는 만인이 그들의 일상에서 항상 전향의 과제 앞에 서 있는 것이 된다."(106-7)
"따라서 전향이 시대의 '표어'가 되고 '국민적 보편윤리'화 되는 것이다. 독일의 총력전 국가에서의 '유대인'은 우리 고도국방국가高度國防國家에서는 '전향 전의 사람'이고, 그러한 까닭에 전향이라는 말은 일본 파시즘 국가체제를 기동시키고 재 기동시키는 주제어의 하나였다. 부단한 '반성'과 '실천'에 대한 분발이 그것을 지렛대로 삼아 발생하는 것이라 여겨졌던 것이다. 전향 행동은 부단하고 무한한 과정이 되어야 한다. '~에서의 전향'에서 '~로의 전향'으로 전향 개념 그 자체를 전향시킨 전향사에서의 전기는 1937년 12월 '인민전선파', '노농파' 400여 명의 검거와 일본 무산당 및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의 결사금지였다. 이들 '합법 좌익'은 공산주의로부터의 질적인 거리에 의해 존재허가증이 부여될 때까지는 한계선상이기는 했지만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역점은 비합법 좌익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국책國策에의 실질적인 접근거리에 놓이는 것이다."(107-8)
"국민 전체의 전향을 요구하는 시기에 맞춰 지배체제가 기대한 것은 이전의 사회주의 집단, 노동조합, 자유주의 정당 등이 그대로 산업보국운동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집단의 해체를 거쳐 개인이 '완전 전향'한 뒤에 다시금 산업보국운동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집단 전향의 그늘에서 (이전부터 내려오는 정신을 간직한) 개인은 비전향인 채로 있을 수 있다. 물론 집단의 한 구성원으로서 집단 전향에 찬성한 이상 완전한 비전향일 수는 없지만, 일본 집단에서는 구성원의 적극적 토론 속에서 전환방침이 생겨나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간부가 정한 방향을 말없이 인정하는 것은 적극적인 전향의 의미를 거의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일종의 위장 전향임에는 틀림없지만, 전향성명을 발표하는 것으로 스스로 자신을 위장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가장 쉬운 위장 전향인 것이다. 가만 있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위장할 수 있다. 부작위不作爲 위장 전향이 성립하는 셈이다."(130)
"위장 전향은 보통사람은 성공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부작위 위장 전향이 성립한다고 한다면,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다시 말해 주변 사회의 변화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실행할 것이다. 어떤 조건만 정비하면 일본 전체가 위장 전향을 할지도 모른다. 위장 전향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1937년 탄압의 결과로 산보운동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저절로 성공 가능한 위장 전향이 대량으로 출현한 것은 놀랄만한 악순환이 아닌가." "그리하여 갑작스럽게 전향성명을 내놓은 자들의 애매한 전향 정책을 수용함으로써 사회주의자의 완전 전향을 추진할 절호의 기회를 놓친 협조회·산보연맹 자신이 위험한 변환을 내포하는 황혼 정책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지탄받는다. 위장 전향에 대한 공포는 집단 전향을 통해서 점차 확대되어 간다. 그래서 파쇼집단 자신이 공격받게 되는 것이다. 익찬회는 공산주의의 소굴이라는 유명한 비난도 이 계열의 결말로 생겨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131-2)
"익찬 체제는 엉성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집단 전향의 합류체였던 탓에 그 이데올로기 상황은 굉장히 유동적이었다. 예를 들면 '일진월보日進月步를 의미하는' 단어로서의 '혁신'은 '정당정치 타파'의 '혁신' 및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혁신'과 서로 유동하는 애매한 상징이 되었다. 이처럼 유동적인 상황에 대한 개인의 대처방법은 무한에 가까운 다수로 존재한다. 공공연한 반천황주의자·반국가주의자, 공공연한 공산주의자로서 완전한 비전향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거의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죽음으로써 사는 삶의 방식을 취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지만, 그러한 전략적 상징을 제외한 행동양식의 전술적 차원에 대해서는 대단히 넓은 궁리와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유동적 상황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원래 다각적인 것이다." "따라서 익찬 시대는 아마도 근대 일본사 중에서 가장 많은 사상 형태가 은밀한 유형으로 내포되어 있는 시대의 하나가 아닐까."(140-1)
3장 쇼와 20, 27년의 전향 상황(1945, 1952)
"전후 전향에 대한 연구는 특수한 어려움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전후 전향이 일정한 상신서로 국가권력에 대해 서약한다는 전전의 전형적인 '옥중 전향'처럼, 누가 봐도 확실한 객관적 규격성을 가지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전후 '민주주의'는 전향까지도 '자유'롭게 하였는데 여기서의 '자유로운 전향'은 종종 전향자 자신에게조차 그 궤적을 확정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전향 자체의 객관적 규준을 잃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벌린은 자유의 개념을 '나'에 대한 무간섭을 욕망하는 소극적 자유 개념과 '내'가 '나' 자신의 지배자임을 욕망하는 적극적 자유 개념 두 가지로 나눈다." "일본 현대사에서 전제專制는 오로지 군국주의·천황제 파시즘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전제와 '강압'은 전부 군국주의나 천황제와의 관계 속에서 받아들여진다." "여기서 자유라고 하면 사적이고 소비적인 자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소극적 자유 개념이 그 본래의 상대성에 대한 자각을 상실하고 실체화 되어버린 것이다."(165-7)
"이러한 상황에서의 전향 궤적은 그때마다의 의견을 어떤 형태로든 발표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사적 자유의 세계 속에 녹아들어가 불분명한 것이 된다. 그때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전후 전향은 여전히─제2의─현재진행형이다." "이리하여 전후 전향은 전전과 비교할 경우 상대적으로 '자유스런 전향'이라는 이유로─제3의 조건이지만─권력에 대한 '굴복'이기보다는 오히려 '막다른 상황의 타개'이기도 하고, '환멸'이나 '좌절', 혹은 '성장'이기도 하다." "아울러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전향'은 전향이라는 개념 그 자체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용' 위에서 이루어지고, 반대로 '자유로운 사용'을 촉진한다─이것이 제4의 조건이 되지만─. 그러므로 이전의 명확한 일의성一義性을 지닌 전향 개념을 염두에 둔 사람(하야시 겐타로 같은)은 전후의 전향을 따옴표가 붙은 '전향'으로 부른다. 거기에는 자신의 사상 이동은 전향이 아니라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168-9)
"전후에 전개된 전전 전향의 반성reflection은 크게 두 가지 경향을 보인다. 그 중 하나는 이전의 전향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다시 한 번 전향 이전의 입장으로 돌아가 사상의 단련을 꾀하고 이로써 새로운 시대를 비전향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1933년에 '옥중 전향'을 하면서 이미 그 직후부터 재기의 노력을 거듭하고 이후 전중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비전향의 반군국주의자를 고수한 모리야 후미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공산당원이면서 본의 아니게 적에게 굴복하여 자신의 인간성에 먹칠을 했습니다. 나는 이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자기를 재 단련하는 것에 자신의 노력을 한정하고 집중하려 했습니다.〉" "이것을 '자기' 개인의 내면적 훈련 규율이라 하여 만약 윤리를 엄밀한 의미에서의 내적 자율성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윤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모리야에게 계급주의자인 것과 윤리적 개인주의자인 것이 어떻게 해서 양립하고 있는 것일까."(172-4)
"계급의식은 마르크스의 이론적 규칙定則에 따라서 훈련하면 자신 속에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하여 자신 속에 만든 계급의식은 단순히 직업이나 국가의 차이를 초월하게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뿐이라면, 계급의식이 아닌 계급 자체가 완수할 것이다. 계급의식은 계급 자체를 넘어서는 힘을 가진다. 물론 이론적으로 사색하는 경우의 의식만을 프롤레타리아적이라 하고 행동과 생활 의식을 생태적 계급에 속하게 하는 식의 기만을 마르크스주의는 허용하지 않는다. 계급의식이 육체 전체를 관통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생태 그대로의 계급을 넘어서기에 이르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윤리학이 여기서 생겨나고 마르크스주의자의 자기 훈련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리하여 이론적 학습에 의한 새로운 계급의식의 획득과 획득한 의식의 육체화라는 이 관련이 마르크스주의의 한 측면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모리야 등은 마르크스주의 속에서 '개성의 발전-인간적 성장'의 길을 찾아냈을 것이다."(176)
"과잉된 자기단련 과정의 바닥에는 아마도 전향 경험의 반성이 당 중앙부의 비전향자에 대한 인간적 속죄 의식과 연결되어 있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또한 국가권력이라는 외적 상황의 힘에 굴복하여 '탈당'한 것을 두고 통렬히 반성하게 하면 할수록 결코 다시는 '탈당'하지 않겠다는 의욕이 생겨서 거기서 제명되거나 탈당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가능성이 포함된 길을 피해가는 행동방침이 생겨나는 것이리라. '전전형 탈당' 중에서 반공화反共化하지 않는 유형의 하나는 이러한 특징을 갖는다. 즉, '탈당' 경험이 역으로 당에 대한 동일화(심리적 결합)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 태도는 심리학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것 때문에 전후 일본 공산당이 '성숙한' 당원에게서 '간쟁'을 받을 기회를 잃고 있는 것고 간과할 수 없다. 그러한 상태가 일상화常態化되면 '간쟁'의 기회를 내부에 지니지 않는 것이 '단결'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179)
"지금 논한 제1의 입장에서의 '전향' 개념은 대단히 명석한 일의성을 가진다. 그것은 〈본의 아니게 적에게 굴복한〉 것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그 극복도 역시 영구의 일의적 과제가 된다." "그러나 모든 전향 경험자와 전향론자가 '전향' 개념의 이렇듯 명석한 일의적 의미를 계속 유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혹한 고전적 '전향 시대'가 막을 내림으로써 쥐어진 논의의 자유는 전향 경험의 다각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그뿐 아니라 사실로써도 이전의 전향에서 탄압에 대한 '굴복'과 함께 '자유로운' 전향까지도 동시에 병행한 전향 경험자도 있었다. 이러한 경험의 다의성은 당연히 전향론에서의 다각적인 해석 태도를 가져와, 동시에 '전향' 개념에 다의적(애매한) 의미를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 입장에서 비로소 제1의 입장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전향 상황의 어떤 의미가 파헤쳐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경우에 속하는 전후 최초의 전형적인 예로 가메이 가쓰이치로의 전향론 「죄의식」이 있다."(181-2)
"가메이의 전향 의식 속에는 '굴복=배신'과 결합되어 '회심回心'과 '복귀' 등이 복잡한 교향곡이 되어 울려 퍼지고 있다." "원래 자신은 '공산주의자'여서는 안 될 사람이었으나, 상황의 힘은 자신에게 '본연'의 천성을 자각시키지 않았고, 따라서 공산주의자다운 '정치적 자세pose'를 취하는 가운데 자신의 미적 반역 정신의 실현을 위한 길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가메이가 '감옥과 죽음 앞에서' 굴복했을 때 단순히 공산주의자로서 굴복한 것만은 아니다. 공산주의자로서 행동하고 있던 자신의 발밑에서 이미 자기 본래의 사상이 굴복당하고 있음을 동시에 발견한 것이다. 현재의 굴복이 과거의 굴복을 자각시켰다. 오늘 굴복당한 것이 어제까지는 굴복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굴복시킨 것은 '절대 확실한' 물리적 권력이고 그로 인해 굴복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어제까지 자신의 '정신'을 바쳤떤 이데올로기가 억압에 지나지 않았던 것임을 이해한 것이다. 여기서 이른바 '배신' 사관이 성립한다."(183)
"당연히 현세 초월적 '종교'의 세계가 이곳에 열린다. 모든 현세를 초월한 종교의 관점에 설 때 현세적인 모든 것은 완전히 동질적으로 보인다." "초월 종교의 세계에서 현세를 볼 때에는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평등한 죄성罪性을 띤다. 그러한 관련은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에서 종교의 일면에 지나지 않지만, 그 일면에 관심을 가질 때 현세 속의 '죄인'은 더할 나위 없는 구원을 얻는다. 자신의 죄는 인간 일반의 원죄와 연결된다. 그것이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구원의 토대로써의 시련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괴로워하는 개인에게 타인과의 공통성을 부여해 안정된 지속성을 갖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이러한 측면만 주목할 때에는 원래 현세 사회 속에서 자기에게만 속할 것 같은 성질의 죄까지도 원죄로 해소해버리는 개인으로서의 책임회피를 낳는다. 그렇게 된다면 원죄 관념을 갖는다는 것만으로 이미 구원되고 만다. 현세 속에서 살아가면서 구원되는 셈이다."(184-5)
"우리는 '전향 시대'의 다각적 반성이 가능하게 됨에 따라 주어진 전향 개념이 다의적으로 사용되는 상황에 서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전향 사실을 애매모호하게 하고 개인의 사상적 무책임을 낳는 경향을 가짐과 동시에 공산주의자의 국가권력에 대한 굴복·배신이라는 부동의 일의적 의미를 통과하는 경우보다 넓은 시야로 전향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후자의 이점을 살려서 봤을 때, 우선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2차 세계대전 후의 천황제 국가 및 그 '국민' 자체의 '전향'과, 국가 이데올로기를 직접 담당했던 '제도인'의 '전향'이다. 물리적·사회적 권력으로 전향을 강제한 당사자가 권력을 잃었을 때, 하나의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어떻게 행동했는가. 또한 새로운 승리자의 권력에 의해 강제되었을 때 지배되는 무권력자로서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것을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현대 일본에서의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사상적 실력을 비로소 평등한 조건하에서 비교할 수 있다."(208)
"8·15조서는 일본 제국의 최고 지배자가 항복의 결단을 내렸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제일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8·15의 '항복' 조서에 가장 긴요한 '항복'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사상 문제를 포함한다." "결단은 이해나 인식의 차원과는 다르다. 거기에는 다면성이 있을 수 없다.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굳이 스스로의 행동을 한정시키려는 것, 그것이 결단이다. 따라서 결단 자체는 명석한 것이다. 결단한 행동의 내용이 합리적으로 정당하므로 증명할 수 있다든가,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명석한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는 비합리적일 수 있고, 사실 '결단주의'는 종종 자기 행동의 '정당함'을 검증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비합리주의로서 출현했다." "전형적인 결단과 그 정신이란 그러한 것이다. 그렇다면 완곡한 심정 토로로 결단을 알리려고 한 8·15조서는 반대로 가장 결단답지 않은 결단이 될 것이다."(209-10)
"게다가 이 조서에서 빠진 것은 결단의 정신만이 아니다. '전시국면이 반드시 호전되는 것은 아니며' 등의 어법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에게 불리한 현실을 즉물적卽物的, sachlich으로 직시하여 그것을 지체하지 않고 표현하고자 하려는 정신이 없다. 막스 베버가 말한 것처럼 이 정신이야말로 인식에 객관성을 보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조서 속에는 현대 일본의 지배자에게 엿보이는 정신적 리얼리즘의 결여가 집중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리얼리즘에는 한편으로 아무런 목적 없이 현세적 이익의 기회만을 추구하는 무이념주의 유형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고한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의욕을 보유하면서 그에 반하는 자신의 현실을 가차 없이 직시하는 내적 긴장으로 충만한 역동적인 유형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리얼리즘의 정신은 후자 속에서만 방법적 자각에 다다른다. 이런 생각으로 이 조서 내용을 살펴보면 과연 거기에는 초주관적 의욕이 전혀 없다."(210-1)
"힘에서의 패배가 곧바로 이념의 자발적 포기를 야기하는 일본적 전향의 전형은 좌익이 아닌 오히려 천황제의 최상층군에서야말로 고유한 것이었다." "'종전의 공로자'들이 그 노고와 공적을 제아무리 자랑하더라도 거기서 사상적 의미는 무엇 하나 생산되지 못했다. 그것은 오로지 사상과 외계外界의 동일화 구조 때문이었다." "좌익 마르크스주의자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힘에서 패한 결과로 '본의 아니게' 전향한 것이기 때문에 그 전향 과정에는 '독립의 이념'과 '힘에 의해 좌우되는 생명' 사이의 선택을 둘러싼 내적 긴장이 충만해 있었고, 전향 후에도 이 양자의 관련을 계속해서 사색한 경우가 많다. 천황제 상층부는 그러한 내적 긴장을 가지지 않은 까닭에 밋밋하게 선한 사람의 얼굴을 유지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그리고 끊임없이 전향한다. 따라서 전향을 스스로 문제시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문제시하지 않은 것뿐이다. 그러한 '일관성一系性'이기 때문에 '경사스러울' 뿐이다."(212-3)
"여기에는 (여전히 무기력했던) 전후 일본의 자유를 둘러싼 삼중의 역설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외국의 군사권력에 의한 '혁명적 독재'라는 역설이다. '진정한' 인민의 의지가 경험적 인민을 넘어서 지배의 지위를 점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적극적 자유 개념'이 일본 전후 사회에서 실현되었을 때, 그 담당자는 인민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외국의 국가 권력, 특히 그 속에 있는 물리적 강제력을 대표하는 군사 권력이었다. 두 번째 역설은 일본 정치지도자의 추수追隨적 주체성이라는 자주성의 특수 구조다. 즉, 정복자의 의향을 '선취'한다는 점에서 '자주적'인, 그러한 역설적 '자립'인 것이다. 제3의 역설은 국민의 소비적 향수享受의 자유(사적 자유) 경향이다. 이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향수하는 사물로서의 자유를 스스로 생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후 정치제도의 생산·재생산 조건에 대한 무관심을 낳는다. 따라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유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 자유주의가 될 가능성을 지닌다."(220-1)
"그리하여 자주적인 민주화운동이라면 어떤 자와도 '주의'를 초월하여 손을 잡으려고 했던 당초의 방침은 우선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권력의 공백에 의한 주체적 인간으로서는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 서 있었으면서도 자주적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지 못했다는 사정─이것에 대한 책임은 자유로운 인간을 무능력하게 만든 천황제 국가에 있음은 물론이지만─거기에 점령군이 국가권력의 군대인 채로 일본 민주화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어버렸다는 사정, 나아가 그에 더하여 일본 사회의 지도층이 가지는 권력에 대한 자주성이란 반대의 권력에 대한 자주적 추종, 그것들이 국제정세에 대한 저항력을 없애고 결국은 GHQ 자체까지도 단순한 반공, 반동으로 빠지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점에서 전후 일본인의 동향은 둘로 나뉘게 되는데 반동화한 권력에 저항하여 그야말로 자주적인 민주화운동을 새롭게 이어나가는 것과, 권력의 경향과 함께 다시 크게 전향하는 쪽으로 양분된다."(229)
"국가와 사회는 별개라는 사고방식이 전통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국가'는 '국민'과도 항상 궤를 같이 한다. 국가기구의 붕괴는 국민 공동체의 붕괴이기도 했다. 이 패배한 국가에는 국민이 없다. 존재하는 것은 산하와 자연인뿐이다. 말하자면 자연적 자연과 자연적 인간만이 생활무대로 나왔다는 말이다." "그러나 천황의 신성성은 중세 이래 교토의 폐쇄 사회 속에서 소중하게 온존되어 온 것이다. 여기에는 '비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신앙이 붕괴해버리는 것과 같은 신앙으로서의 약점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 신앙을 타도하려는 강력한 반감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일본의 '국민사회' 일반은 천황 비판의 자유화 아래 적극적인 천황 신앙에서 이탈하여 소극적으로 천황제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옮겨갔다." "이런 태도는 명료한 전향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또한 비전향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저 지배자의 대응형식과 서로 닮은 부분적 전향이면서 동시에 부분적 비전향이다."(243-4)
"그 애처로운 비자주적 상황에서 피어오른 노력이 아직 충분하게 결실을 맺기도 전에 점령군은 '혁명적 독재'에서 '반혁명적 독재'로 180도 전향했다. 전후 혁명운동이 실은 협력운동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러한 자신의 약점을 자각하고 우선 자주화를 목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자만에 빠져 뭐가 뭔지도 모른 채 그저 인민공화국이 가까워 졌노라 굳게 믿고 전진하는 사이에 점령 권력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때 비로소 전후 민주화운동은 권력에 대항하여 자신의 발로 서서 자신의 손만으로 운동을 끌어가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물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운동일 터이다. 그때, 다시 말해 자주적 운동이 필요하게 되자마자 운동전선은 즉시 분해와 내부 항쟁을 개시한 것이다. 그 집중적 표현이 일본 공산당의 50년 문제다. 집중적 표현이란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운동 전체 속에 같은 성격이 분산된 형태로 두드러지지 않은 채 애매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다."(263-4)
"이 커다란 혼란 속에서 사상의 주체화를 목표로 해서 노력하고, 점령군의 제국주의 권력과 일본의 국가권력에 대해 당내 '가산관료제'의 제약을 넘어선 인민적 사고를 어쨌든 획득한 자의 예로는 이노우에 미쓰하루가 있다." "〈신앙만을 위한 인간이 인간이 되지 마라. 신앙을 가진 노동자여야 하고, 신을 믿는 농부, 또는 상인, 또는 직공, 또는 뱃사람이어야 한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신앙을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마라. 세상을 위험하게 하고 불건전한 오늘날의 전도사라는 직업과 같은 것은 있어서는 안 되고, 신앙밖에 모르는 사람은 일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단편적인 사람이다. 나는 성서와 신앙 외에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 자를 크게 꺼린다〉. 그리스도교를 믿고 더욱이 전도하는 것을 생애의 업으로 삼았던 우치무라 간조는 이러한 말을 했다.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만을 위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노우에는 이를 알고 있었다."(26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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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22-07-18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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