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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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1대 광복회장 김원웅 金元雄 | Kim Wonung | |
출생 | |
사망 | |
본관 | |
재임기간 | 제21대 광복회장 |
링크 | |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정치인.
박정희 및 전두환 정권 시절 여당인 공화당, 민정당 당직자를 맡으며 정치에 입문, 3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2019년 6월 1일부터 광복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당적 변경 이력에도 불구하고 내로남불적인 언행, 그리고 숱한 극단주의적인 종북주의적 발언 등으로 인해 비난을 받고 있다.
민주공화당 당료 공채로 1971년 사회 생활을 시작했으며, 정계입문은 민주정의당에서 했다. 90년대 이후에는 지역구에서의 유불리에 따라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을 왔다갔다하여 철새 정치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90년대 이후 소속 정당에 관계없이 꾸준히 종북주의적 견지를 유지하며 기득권과 보수주의를 향한 비난 발언을 이어갔으나, 정작 본인이 과거 군부정권에서 일했던 기득권 세력이었던 것에 대해서는 생계 때문에 한 것이라며 내로남불식 면죄부성 발언을 하고 있다.[10]
사상적으로 꽤나 극단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특히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인 2010년대 이후에 언론에 등장하며 '정의로운 종북'을 거론했다. "일제 식민지와 독재를 비판하는 것이 종북이고, 분단 극복과 민족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 종북이라면 나는 서슴치 않고 종북을 택하겠다. 왜냐하면 이런 종북은 정의로운 종북이기 때문이다." 발언. 서울의소리 기사. 또한 6.25 전쟁이 민족해방전쟁임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과거 속기록 내용, 역대 국군 참모총장과 건국인사들은 모두 친일파라는 취지의 2020년 광복절 기념사, 역대 보수정권은 전부 친일정권이며 보수세력은 조선총독부의 법통을 이은 친일세력이라는 2021년 광복절 기념사의 발언으로 구설수를 이어가고 있다. 또 광복회장 재직 중 비자금 조성 등 각종 비위 사실이 보도되며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으나 광복회장에서 사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논란 끝에 광복회장 해임안을 표결하는 총회가 열리기에 이르자 2월 16일자로 전격 사퇴했다. #
박정희 및 전두환 정권 시절 여당인 공화당, 민정당 당직자를 맡으며 정치에 입문, 3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2019년 6월 1일부터 광복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당적 변경 이력에도 불구하고 내로남불적인 언행, 그리고 숱한 극단주의적인 종북주의적 발언 등으로 인해 비난을 받고 있다.
민주공화당 당료 공채로 1971년 사회 생활을 시작했으며, 정계입문은 민주정의당에서 했다. 90년대 이후에는 지역구에서의 유불리에 따라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을 왔다갔다하여 철새 정치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90년대 이후 소속 정당에 관계없이 꾸준히 종북주의적 견지를 유지하며 기득권과 보수주의를 향한 비난 발언을 이어갔으나, 정작 본인이 과거 군부정권에서 일했던 기득권 세력이었던 것에 대해서는 생계 때문에 한 것이라며 내로남불식 면죄부성 발언을 하고 있다.[10]
사상적으로 꽤나 극단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특히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인 2010년대 이후에 언론에 등장하며 '정의로운 종북'을 거론했다. "일제 식민지와 독재를 비판하는 것이 종북이고, 분단 극복과 민족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 종북이라면 나는 서슴치 않고 종북을 택하겠다. 왜냐하면 이런 종북은 정의로운 종북이기 때문이다." 발언. 서울의소리 기사. 또한 6.25 전쟁이 민족해방전쟁임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과거 속기록 내용, 역대 국군 참모총장과 건국인사들은 모두 친일파라는 취지의 2020년 광복절 기념사, 역대 보수정권은 전부 친일정권이며 보수세력은 조선총독부의 법통을 이은 친일세력이라는 2021년 광복절 기념사의 발언으로 구설수를 이어가고 있다. 또 광복회장 재직 중 비자금 조성 등 각종 비위 사실이 보도되며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으나 광복회장에서 사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논란 끝에 광복회장 해임안을 표결하는 총회가 열리기에 이르자 2월 16일자로 전격 사퇴했다. #
2022년 10월 30일, 암 투병 끝에 사망하였다. 향년 78세.
2. 일생[편집]
김원웅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의열단의 연락원(이 부분은 기록이 부족하여, 아직도 사실여부에 대한 분쟁이 있다) 이었던 김근수와 1940년 에모토 시마지(江本島次)로 일제방침에 따라, 일본이름으로 창씨개명한 전월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원웅은 자신의 모친이 독립운동가 전월순이며, 전월순은 전월선의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보훈처의 재조사 결과 전월순은 전월선의 언니로 서로 다른 사람임이 드러났다. 최초 문제 제기를 한 광복회 회원들은 전월선 뿐만 아니라 부친 김근수의 독립운동 활동 행적이 전무하다고 주장하고 있어, 이 부분에 대해서도 보훈처가 조사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1 및 해당 항목2 참조.
김근수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독립기념관이 그동안 발간한 수많은 광복군 관련 자료집과 논문에도 김근수와 전월순 관련 기록이 전무하며, 심지어 자신이 활동했다는 광복군 1지대 등 그 어떤 곳에도 두 사람의 성명이나 사진 등 활동기록이 없으며, 광복군 연구에 있어 국내 최고의 권위자로 꼽히는 역사학자 단국대 한시준 명예교수의 ‘한국광복군’이라는 유명한 연구 책자에도 김근수, 전월순에 대한 자료는 전무하다고 한다. 그리고 김근수와 전월순이 김구의 주선으로 결혼했다는 것 역시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분석이 나오고 있어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8.15 광복 후 한반도가 안정되자 그의 가족들은 중국을 떠나 귀국하여 대전광역시로 이주하였다. 이후 대전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행적과 졸업까지 과정은 본인과 지인, 남아있는 자료, 본인의 프로필 등에 따르면 몇 가지 상충되는 내용이 있으나 언론 등을 통해 정리되는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김원웅은 연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재학했으나, 구속되었다.(2012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일협정반대운동 구술사료수집사업). 6.3 항쟁 당시 같이 투옥된 인물로 이명박이 있다. 이명박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본인을 제외하면 함께 투옥된 동료들이 전부 나중에 정계에 진출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했는데, 김원웅 역시 그런 길을 걷게 되었다.
이때 투옥으로 연세대에서 제적되었다고 하는데, 김원웅 본인의 발언에 따르면 자퇴서를 쓰는 대신 선고 유예로 해결되었다고 한다. 이후 약 2년간 다시 입시를 공부하여 1968년경 다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1972년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학사편입하여 1974년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전과를 했다는 설도 있으나 서울대학교총동창회 발간 서울대인명록에는 72년 국문과 졸업과 74년 정치학과 졸업 사실이 확인된다. 그리고 당시 국어국문학과와 정치학과는 같은 문리과대학 소속이었다.
군대는 면제되었는데,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선고유예되면서 실형은 살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다른 사유로 면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유신 헌법이 발표된 1972년에 김원웅은 민주공화당 사무처 직원 공채에 응시, 합격하여 공화당 공채 7기 당료로서 근무를 시작했다. 김원웅은 훗날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 시절인 2001년 시사저널 인터뷰에서 김원웅은 자신이 한일협정에 반대하긴 했어도 박정희를 타도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히려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유진산이나 윤보선보다는 박정희가 비전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서 공화당을 선택했다고 술회했다. 물론 21세기 들어서는 거의 극단적일 정도로 견해가 뒤바뀐 케이스. 1974년에 민주공화당 새세대문제연구회 조직부 차장이 되었으며, 1975년에는 민주공화당 해외국 간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1977년 공화당의 지원을 받아 대만 중국 국립정치대학원으로 유학을 갔다. 다만 논문은 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김 의원의 동료 의원 말에 따르면 김원웅 본인이 대만에 다녀온 후 장징궈 총통과 양자(養子)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자주 했다고 한다. 이후 공화당이 무너지기 직전인 1979년 말 귀국하여 1980년에는 민주공화당 청년국 국장이 되었다. 김원웅은 유신 정권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공화당에서 일하기 시작하여 유신 정권이 무너지고 공화당이 해산할 때까지 당에 남아 당직자로 근무했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한 후 1980년 민주정의당 창당준비위원이 되어 민주정의당 창당에 참여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신군부는 기존 공화당 당직자들을 대거 데려와 민정당을 창당했다. 이때 나이가 36세이다. 1981년 1월 민주정의당이 창당된 후 사무국을 거쳐, 1982년부터 민주정의당 정책국 부국장을 역임했으며, 1985년부터 민주정의당 조직국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6년에는 민주정의당 헌법특별위원회 행정국장과 청년국장을 겸임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58번으로 출마하지만 낙선하였다.월간조선 2020년 10월호민정당, 62명의 전국구 후보자 명단 확정 발표[김성우]民正(민정) 全國區(전국구)공천 62명 발표 같은해 민주정의당 국책연구소 상근연구위원과 민주정의당 대전 동구 을 지구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이 전격 성사된 후 김원웅은 그간 20년 가까이 커리어를 쌓아왔던 당을 돌연 탈당하여 꼬마민주당에 입당했다. 이때가 47세 때이니 18년을 공화당, 민정당 핵심 당직자로 봉직한 것이다. 김원웅이 갑자기 탈당한 이유는 당시 김원웅이 대전 동구 을 지구당 위원장이었는데, 3당 합당으로 자신의 지역구를 내주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당시 대전 동구 을 지역구에서 전현직 국회의원을 번갈아 역임해오던 민주계(김영삼계) 송천영과 공화계(김종필계) 윤성한이 3당 합당으로 동시에 민자당 소속이 되면서 김원웅은 대전 동구 을 지역구에서 졸지에 3인자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합당 후 송천영과 윤성한 중 누가 공천을 따내게 될 것인가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뿐, 김원웅이 동구 을에서 공천을 따낼 가능성은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기 보다 어려워 보였다. 이후 꼬마민주당은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하여 민주당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는 개편, 신설된 대전 대덕구 선거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자유당 이인구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의원 뱃지를 단 김원웅은 국민학교 명칭이 일제강점기의 잔재라며 초등학교로 바꾸는 작업을 추진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이에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대다수의 당원들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였으나, 김원웅은 여기에 합류하지 않았다.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고 잔류한 이기택, 노무현 등은 통합민주당을 창당했으며, 김원웅도 여기에 잔류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원웅은 통합민주당 후보로 대전광역시 대덕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이인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6년 4월 총선 패배 이후 통합민주당은 주류(이기택계)와 비주류 간에 계파 갈등이 극심해졌고, 결국 1996년 11월 비주류파인 김원기, 김정길, 노무현 등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조직했고, 김원웅도 통추에 합류했다. 통추는 통합민주당 당내 정당으로 불리면서 당 지도부와 사사건건 대립을 이어갔다. 당 지도부와 통추의 대립으로 민주당은 존립이 위태로운 상태가 되었다. 1997년 낙선한 박계동, 노무현 등 통추 멤버들과 함께 서울 역삼동에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고깃집을 공동 창업하였다. 하로동선은 여름의 화로와 겨울의 부채라는 뜻으로, 철이나 격에 맞지 않아 쓸데없는 물건이라는 뜻. 그러나 다음 때를 미리 대비한다는 의미로 좋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하며 당사자들은 그런 의미로 지은 듯하다. #. 김원웅이 하로동선의 대표를 맡아 경영하였다. 김원웅은 훗날 인터뷰에서 1990년 꼬마민주당 창당 시절부터 이기택이 당권을 장악했고 자신과 노무현 등은 비주류여서 이기택에 저항했고 결국 자신은 한나라당으로 입당하게 되었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해명을 한 바 있다. #
하지만 이 인터뷰 내용과 달리 김원웅은 원래 꼬마민주당 초기부터 당내 이기택 계파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이기택의 핵심 측근으로 활동했었다. # 1995년 11월 민주당과 개혁신당과 합당 협상 때도 김원웅은 민주당 측 대표가 되어 이기택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의 대리자 역할을 했었다. 당시 민주당과 개혁신당간의 가장 큰 쟁점은 이기택이 새로운 통합민주당의 대표가 될 것이냐 여부였다. 김원웅은 이렇게 오랫동안 주류 이기택의 측근 역할을 해왔지만 1996년 총선 이후 이기택의 리더쉽이 당내에서 크게 도전을 받게 되자 낙선한 김원웅은 이기택 반대 세력(통추)에 붙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7년 11월 IMF 사태 등으로 집권 신한국당이 통합민주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으로 재창당하자 김원웅은 노무현을 비롯한 통추 핵심 멤버들과 결별하고 한나라당에 합류했다. 김원웅을 제외하고 노무현, 김정길, 김원기 등 통추의 핵심 멤버들은 대부분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했다. 훗날 김원웅은 3김 정치 청산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한나라당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상은 신한국당 내에서 그간 김원웅과 껄끄러웠던 민주계가 몰락하고[11], 공화계(김종필계)는 신한국당으로 당명이 변경되기 전 민주자유당 시절 이미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여 딴 살림 차리고 나가면서 대전 대덕 현직 의원 이인구도 함께 자민련 소속으로 당적을 옮기게 되어 신한국당-한나라당의 대전 대덕 지역구가 비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김원웅은 원래 자신의 친정이었던 한나라당에 대전 대덕구 지역구를 요구, 이를 보장받자 신속히 통추를 버리고 한나라당에 합류했다는 관측이 많다. 실제로 그는 한나라당 입당과 동시에 대전 대덕구 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얼마 후 하로동선을 폐업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전 대덕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의원에 당선된 김원웅은 이후 반미, 친북 발언을 이어가며 당 지도부를 지속적으로 비난하여 당내외에 충격을 주었다. 한나라당 김원웅의원 반미발언 파문. 김원웅은 미국과의 군사협력을 '친미사대주의'로 규정하고, 주한미군이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였으며, 한나라당 지도부가 남북문제를 너무 대결구도로 몰아간다고 주장하면서 이회창 총재와 최병렬 의원 등 당 지도부를 수구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2001년는 TV 토론회에 출연하여 미국이 911테러의 보복을 하기로 결정한 것을 강력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김원웅 의원의 이같은 돌출 행동을 이어가자 2001년 6월 국회 본회의 도중 같은 당 김용갑 의원과 설전을 벌이기까지 했다. 2001년 6월 남북 관계를 놓고 당이 너무 대결구도로 몰아간다는 김원웅의 발언에 김용갑이 "당에 왜 찬물을 끼얹느냐? 그러려면 나가!"라고 일갈하자 이에 발끈한 김원웅이 "내가 왜 나가! 낡은 사람들이 나가야지!"라고 맞받아쳤다.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던 시절인 2002년 7월에는 미선이 효순이 사건에 대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사과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
11월 24일 오후 김원웅은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이 당시 조선일보 만평을 보면 이회창 당시 대통령 후보를 비롯한 한나라당 주요 인사들이 "앓던 이가 빠졌다!"면서 김원웅 의원 탈당식을 성대하게 열어주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유시민이 창당한 개혁국민정당에 입당을 선언했다. 개혁국민정당은 노무현이 유시민에게 난파선(새천년민주당)에서 피신할 배를 만들어달라는 유청을 한 후 유시민의 주도로 창당되었다. 국회의원이 한명도 없었던 개혁당은 김원웅의 입당으로 소속 현직 국회의원 1인을 보유하게 되었다. 11월 25일 개혁당 당사에서 김원웅은 입당기자회견을 가졌고, 입당과 동시에 개혁당 당대표 및 원내대표가 되어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를 지원하였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당선자 신분인 시절에 김원웅은 비공개 특사로 북한에 파견되어 민족평화축전 개최를 합의하고 돌아왔다. 이후에도 노무현 임기 중에 특사로 북한에 파견되었다. 2003년 열린우리당이 창당하자 유시민 등 대다수의 당원들과 함께 개혁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대전 대덕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6년까지 국회 윤리특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의지를 밝혔으나 실제로 출마하지는 못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3위로 낙선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4개 정당의 범야권 단일후보로 대전시장에 출마했으나 염홍철, 박성효에 밀려 3위로 광탈했다. 선거 참패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나 재야에서 계속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2015년 NL계 통일운동가 등과 함께 '민주통일정치포럼'을 창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3월 13일 '민주통일연합 창당추진위'를 발족시켜 상임대표로 활동 중이다. 2019년 3월 국가보훈처 산하 단체인 광복회 회장 선거에 출마하여 친북반미적 행적에도 불구하고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꺾고 광복회장에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김원웅 신임 광복회장이 이념 전쟁을 주도하자 광복회 내부에서 반발이 나오고 있다. 결국 2019년, 김원웅 현직 광복회 회장은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을 찬양하고 자유한국당을 폄훼하는 등 정치적 중립을 어긴 이유로 내부 상벌위원회에 제소되었다.
국회에서 애국가 제창을 거부하여 애국가 논란을 일으킨 이석기처럼, 2020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통해 민족 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정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한 나라뿐이라고 성토하여 애국가 논란이 화두로 떠올랐다. 이어 8월 24일에는 열린민주당 최강욱 의원의 섭외로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장을 찾아 "미래통합당은 토착 왜구와 한 몸" "원희룡 제주지사는 패역의 무리" 등의 막말을 내뱉는 회견을 진행했다.
2021년에도 구설수를 만드는 것을 이어나갔고 광복회를 김원웅이 사적으로 운영한다는 것에 분노한 어느 한 광복회 회원에게 공격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최재형상을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에게 수여하는 등 정치적 스탠스를 취해왔다. 결국 2022년 1월 말에 김원웅 개인적인 비리 의혹과 김원웅 가족이 운영하는 회사를 광복회를 통해 일감을 몰아주는 등 비리 의혹이 거론되면서 국가보훈처의 감사를 받게 되었고 김원웅 개인은 악의적인 날조기사라며 날을 세우며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 감사 결과 비리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고 가족회사 비리 건도 상당수 사실로 밝혀지면서 광복회의 이름에 먹칠하는 꼴이 되었다. 임시회의가 개최되어 많은 회원들이 해임 의제를 올렸으나 김원웅은 해임조건 미달 언급과 사퇴는 안 할 것이라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결국 2월 16일 기습적인 임시총회를 승인하는 행보를 보이다가 스스로 사퇴하며 광복회장 직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사퇴 기자회견에서도 조선일보와 TV조선의 공작에 당했다는 것과 부하를 잘못 기용했다며 시종일관 남탓을 하며 4과문을 낭독하고 떠났다. 사퇴 직후 강용석 등은 김원웅이 실종되었다는 제보를 들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사퇴 후 김원웅의 행적은 불명이다.
광복회장으로써의 평가는 광복회 내부에서도 금지어 수준으로 극도로 나쁘다. 광복회장이 된 후 광복회 주요 인사에 친김원웅을 꽂아 넣은 건 둘째치고 정치적 중립을 관례로 삼는 광복회에서 노골적인 친북반미 행동을 해왔고 이를 지적하는 이들과 중립파마저 친일로 몰아세우기까지 했다. 당연히 광복회원에게 물리적 공격시도가 있을 정도로 막 나갔고 김원웅과 그 일가 비리가 터지며 단체의 명예가 실추되는 바람에 단체 지위 승격도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2022년 10월 30일, 향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족 측에 의하면 암 투병 중이었고 장례는 고인의 뜻에 따라 빈소 없이 가족장으로 치르며 조문과 조화는 사양한다고 밝혔다. # 근데 사망 하루 전날이 이태원 압사 사고가 일어난 날이어서 사망 소식은 묻혀버렸다.
김근수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독립기념관이 그동안 발간한 수많은 광복군 관련 자료집과 논문에도 김근수와 전월순 관련 기록이 전무하며, 심지어 자신이 활동했다는 광복군 1지대 등 그 어떤 곳에도 두 사람의 성명이나 사진 등 활동기록이 없으며, 광복군 연구에 있어 국내 최고의 권위자로 꼽히는 역사학자 단국대 한시준 명예교수의 ‘한국광복군’이라는 유명한 연구 책자에도 김근수, 전월순에 대한 자료는 전무하다고 한다. 그리고 김근수와 전월순이 김구의 주선으로 결혼했다는 것 역시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분석이 나오고 있어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8.15 광복 후 한반도가 안정되자 그의 가족들은 중국을 떠나 귀국하여 대전광역시로 이주하였다. 이후 대전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행적과 졸업까지 과정은 본인과 지인, 남아있는 자료, 본인의 프로필 등에 따르면 몇 가지 상충되는 내용이 있으나 언론 등을 통해 정리되는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김원웅은 연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재학했으나, 구속되었다.(2012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일협정반대운동 구술사료수집사업). 6.3 항쟁 당시 같이 투옥된 인물로 이명박이 있다. 이명박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본인을 제외하면 함께 투옥된 동료들이 전부 나중에 정계에 진출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했는데, 김원웅 역시 그런 길을 걷게 되었다.
이때 투옥으로 연세대에서 제적되었다고 하는데, 김원웅 본인의 발언에 따르면 자퇴서를 쓰는 대신 선고 유예로 해결되었다고 한다. 이후 약 2년간 다시 입시를 공부하여 1968년경 다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1972년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학사편입하여 1974년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전과를 했다는 설도 있으나 서울대학교총동창회 발간 서울대인명록에는 72년 국문과 졸업과 74년 정치학과 졸업 사실이 확인된다. 그리고 당시 국어국문학과와 정치학과는 같은 문리과대학 소속이었다.
군대는 면제되었는데,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선고유예되면서 실형은 살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다른 사유로 면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유신 헌법이 발표된 1972년에 김원웅은 민주공화당 사무처 직원 공채에 응시, 합격하여 공화당 공채 7기 당료로서 근무를 시작했다. 김원웅은 훗날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 시절인 2001년 시사저널 인터뷰에서 김원웅은 자신이 한일협정에 반대하긴 했어도 박정희를 타도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히려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유진산이나 윤보선보다는 박정희가 비전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서 공화당을 선택했다고 술회했다. 물론 21세기 들어서는 거의 극단적일 정도로 견해가 뒤바뀐 케이스. 1974년에 민주공화당 새세대문제연구회 조직부 차장이 되었으며, 1975년에는 민주공화당 해외국 간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1977년 공화당의 지원을 받아 대만 중국 국립정치대학원으로 유학을 갔다. 다만 논문은 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김 의원의 동료 의원 말에 따르면 김원웅 본인이 대만에 다녀온 후 장징궈 총통과 양자(養子)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자주 했다고 한다. 이후 공화당이 무너지기 직전인 1979년 말 귀국하여 1980년에는 민주공화당 청년국 국장이 되었다. 김원웅은 유신 정권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공화당에서 일하기 시작하여 유신 정권이 무너지고 공화당이 해산할 때까지 당에 남아 당직자로 근무했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한 후 1980년 민주정의당 창당준비위원이 되어 민주정의당 창당에 참여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신군부는 기존 공화당 당직자들을 대거 데려와 민정당을 창당했다. 이때 나이가 36세이다. 1981년 1월 민주정의당이 창당된 후 사무국을 거쳐, 1982년부터 민주정의당 정책국 부국장을 역임했으며, 1985년부터 민주정의당 조직국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6년에는 민주정의당 헌법특별위원회 행정국장과 청년국장을 겸임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58번으로 출마하지만 낙선하였다.월간조선 2020년 10월호민정당, 62명의 전국구 후보자 명단 확정 발표[김성우]民正(민정) 全國區(전국구)공천 62명 발표 같은해 민주정의당 국책연구소 상근연구위원과 민주정의당 대전 동구 을 지구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이 전격 성사된 후 김원웅은 그간 20년 가까이 커리어를 쌓아왔던 당을 돌연 탈당하여 꼬마민주당에 입당했다. 이때가 47세 때이니 18년을 공화당, 민정당 핵심 당직자로 봉직한 것이다. 김원웅이 갑자기 탈당한 이유는 당시 김원웅이 대전 동구 을 지구당 위원장이었는데, 3당 합당으로 자신의 지역구를 내주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당시 대전 동구 을 지역구에서 전현직 국회의원을 번갈아 역임해오던 민주계(김영삼계) 송천영과 공화계(김종필계) 윤성한이 3당 합당으로 동시에 민자당 소속이 되면서 김원웅은 대전 동구 을 지역구에서 졸지에 3인자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합당 후 송천영과 윤성한 중 누가 공천을 따내게 될 것인가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뿐, 김원웅이 동구 을에서 공천을 따낼 가능성은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기 보다 어려워 보였다. 이후 꼬마민주당은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하여 민주당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는 개편, 신설된 대전 대덕구 선거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자유당 이인구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의원 뱃지를 단 김원웅은 국민학교 명칭이 일제강점기의 잔재라며 초등학교로 바꾸는 작업을 추진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이에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대다수의 당원들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였으나, 김원웅은 여기에 합류하지 않았다.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고 잔류한 이기택, 노무현 등은 통합민주당을 창당했으며, 김원웅도 여기에 잔류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원웅은 통합민주당 후보로 대전광역시 대덕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이인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6년 4월 총선 패배 이후 통합민주당은 주류(이기택계)와 비주류 간에 계파 갈등이 극심해졌고, 결국 1996년 11월 비주류파인 김원기, 김정길, 노무현 등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조직했고, 김원웅도 통추에 합류했다. 통추는 통합민주당 당내 정당으로 불리면서 당 지도부와 사사건건 대립을 이어갔다. 당 지도부와 통추의 대립으로 민주당은 존립이 위태로운 상태가 되었다. 1997년 낙선한 박계동, 노무현 등 통추 멤버들과 함께 서울 역삼동에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고깃집을 공동 창업하였다. 하로동선은 여름의 화로와 겨울의 부채라는 뜻으로, 철이나 격에 맞지 않아 쓸데없는 물건이라는 뜻. 그러나 다음 때를 미리 대비한다는 의미로 좋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하며 당사자들은 그런 의미로 지은 듯하다. #. 김원웅이 하로동선의 대표를 맡아 경영하였다. 김원웅은 훗날 인터뷰에서 1990년 꼬마민주당 창당 시절부터 이기택이 당권을 장악했고 자신과 노무현 등은 비주류여서 이기택에 저항했고 결국 자신은 한나라당으로 입당하게 되었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해명을 한 바 있다. #
하지만 이 인터뷰 내용과 달리 김원웅은 원래 꼬마민주당 초기부터 당내 이기택 계파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이기택의 핵심 측근으로 활동했었다. # 1995년 11월 민주당과 개혁신당과 합당 협상 때도 김원웅은 민주당 측 대표가 되어 이기택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의 대리자 역할을 했었다. 당시 민주당과 개혁신당간의 가장 큰 쟁점은 이기택이 새로운 통합민주당의 대표가 될 것이냐 여부였다. 김원웅은 이렇게 오랫동안 주류 이기택의 측근 역할을 해왔지만 1996년 총선 이후 이기택의 리더쉽이 당내에서 크게 도전을 받게 되자 낙선한 김원웅은 이기택 반대 세력(통추)에 붙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7년 11월 IMF 사태 등으로 집권 신한국당이 통합민주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으로 재창당하자 김원웅은 노무현을 비롯한 통추 핵심 멤버들과 결별하고 한나라당에 합류했다. 김원웅을 제외하고 노무현, 김정길, 김원기 등 통추의 핵심 멤버들은 대부분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했다. 훗날 김원웅은 3김 정치 청산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한나라당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상은 신한국당 내에서 그간 김원웅과 껄끄러웠던 민주계가 몰락하고[11], 공화계(김종필계)는 신한국당으로 당명이 변경되기 전 민주자유당 시절 이미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여 딴 살림 차리고 나가면서 대전 대덕 현직 의원 이인구도 함께 자민련 소속으로 당적을 옮기게 되어 신한국당-한나라당의 대전 대덕 지역구가 비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김원웅은 원래 자신의 친정이었던 한나라당에 대전 대덕구 지역구를 요구, 이를 보장받자 신속히 통추를 버리고 한나라당에 합류했다는 관측이 많다. 실제로 그는 한나라당 입당과 동시에 대전 대덕구 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얼마 후 하로동선을 폐업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전 대덕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의원에 당선된 김원웅은 이후 반미, 친북 발언을 이어가며 당 지도부를 지속적으로 비난하여 당내외에 충격을 주었다. 한나라당 김원웅의원 반미발언 파문. 김원웅은 미국과의 군사협력을 '친미사대주의'로 규정하고, 주한미군이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였으며, 한나라당 지도부가 남북문제를 너무 대결구도로 몰아간다고 주장하면서 이회창 총재와 최병렬 의원 등 당 지도부를 수구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2001년는 TV 토론회에 출연하여 미국이 911테러의 보복을 하기로 결정한 것을 강력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김원웅 의원의 이같은 돌출 행동을 이어가자 2001년 6월 국회 본회의 도중 같은 당 김용갑 의원과 설전을 벌이기까지 했다. 2001년 6월 남북 관계를 놓고 당이 너무 대결구도로 몰아간다는 김원웅의 발언에 김용갑이 "당에 왜 찬물을 끼얹느냐? 그러려면 나가!"라고 일갈하자 이에 발끈한 김원웅이 "내가 왜 나가! 낡은 사람들이 나가야지!"라고 맞받아쳤다.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던 시절인 2002년 7월에는 미선이 효순이 사건에 대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사과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
11월 24일 오후 김원웅은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이 당시 조선일보 만평을 보면 이회창 당시 대통령 후보를 비롯한 한나라당 주요 인사들이 "앓던 이가 빠졌다!"면서 김원웅 의원 탈당식을 성대하게 열어주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유시민이 창당한 개혁국민정당에 입당을 선언했다. 개혁국민정당은 노무현이 유시민에게 난파선(새천년민주당)에서 피신할 배를 만들어달라는 유청을 한 후 유시민의 주도로 창당되었다. 국회의원이 한명도 없었던 개혁당은 김원웅의 입당으로 소속 현직 국회의원 1인을 보유하게 되었다. 11월 25일 개혁당 당사에서 김원웅은 입당기자회견을 가졌고, 입당과 동시에 개혁당 당대표 및 원내대표가 되어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를 지원하였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당선자 신분인 시절에 김원웅은 비공개 특사로 북한에 파견되어 민족평화축전 개최를 합의하고 돌아왔다. 이후에도 노무현 임기 중에 특사로 북한에 파견되었다. 2003년 열린우리당이 창당하자 유시민 등 대다수의 당원들과 함께 개혁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대전 대덕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6년까지 국회 윤리특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의지를 밝혔으나 실제로 출마하지는 못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3위로 낙선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4개 정당의 범야권 단일후보로 대전시장에 출마했으나 염홍철, 박성효에 밀려 3위로 광탈했다. 선거 참패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나 재야에서 계속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2015년 NL계 통일운동가 등과 함께 '민주통일정치포럼'을 창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3월 13일 '민주통일연합 창당추진위'를 발족시켜 상임대표로 활동 중이다. 2019년 3월 국가보훈처 산하 단체인 광복회 회장 선거에 출마하여 친북반미적 행적에도 불구하고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꺾고 광복회장에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김원웅 신임 광복회장이 이념 전쟁을 주도하자 광복회 내부에서 반발이 나오고 있다. 결국 2019년, 김원웅 현직 광복회 회장은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을 찬양하고 자유한국당을 폄훼하는 등 정치적 중립을 어긴 이유로 내부 상벌위원회에 제소되었다.
국회에서 애국가 제창을 거부하여 애국가 논란을 일으킨 이석기처럼, 2020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통해 민족 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정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한 나라뿐이라고 성토하여 애국가 논란이 화두로 떠올랐다. 이어 8월 24일에는 열린민주당 최강욱 의원의 섭외로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장을 찾아 "미래통합당은 토착 왜구와 한 몸" "원희룡 제주지사는 패역의 무리" 등의 막말을 내뱉는 회견을 진행했다.
2021년에도 구설수를 만드는 것을 이어나갔고 광복회를 김원웅이 사적으로 운영한다는 것에 분노한 어느 한 광복회 회원에게 공격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최재형상을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에게 수여하는 등 정치적 스탠스를 취해왔다. 결국 2022년 1월 말에 김원웅 개인적인 비리 의혹과 김원웅 가족이 운영하는 회사를 광복회를 통해 일감을 몰아주는 등 비리 의혹이 거론되면서 국가보훈처의 감사를 받게 되었고 김원웅 개인은 악의적인 날조기사라며 날을 세우며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 감사 결과 비리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고 가족회사 비리 건도 상당수 사실로 밝혀지면서 광복회의 이름에 먹칠하는 꼴이 되었다. 임시회의가 개최되어 많은 회원들이 해임 의제를 올렸으나 김원웅은 해임조건 미달 언급과 사퇴는 안 할 것이라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결국 2월 16일 기습적인 임시총회를 승인하는 행보를 보이다가 스스로 사퇴하며 광복회장 직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사퇴 기자회견에서도 조선일보와 TV조선의 공작에 당했다는 것과 부하를 잘못 기용했다며 시종일관 남탓을 하며 4과문을 낭독하고 떠났다. 사퇴 직후 강용석 등은 김원웅이 실종되었다는 제보를 들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사퇴 후 김원웅의 행적은 불명이다.
광복회장으로써의 평가는 광복회 내부에서도 금지어 수준으로 극도로 나쁘다. 광복회장이 된 후 광복회 주요 인사에 친김원웅을 꽂아 넣은 건 둘째치고 정치적 중립을 관례로 삼는 광복회에서 노골적인 친북반미 행동을 해왔고 이를 지적하는 이들과 중립파마저 친일로 몰아세우기까지 했다. 당연히 광복회원에게 물리적 공격시도가 있을 정도로 막 나갔고 김원웅과 그 일가 비리가 터지며 단체의 명예가 실추되는 바람에 단체 지위 승격도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2022년 10월 30일, 향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족 측에 의하면 암 투병 중이었고 장례는 고인의 뜻에 따라 빈소 없이 가족장으로 치르며 조문과 조화는 사양한다고 밝혔다. # 근데 사망 하루 전날이 이태원 압사 사고가 일어난 날이어서 사망 소식은 묻혀버렸다.
3. 비판 및 논란[편집]
자세한 내용은 김원웅/비판 및 논란 문서
를
참고하십시오.4. 선거 이력[편집]
5. 소속 정당[편집]
소속 | 기간 | 비고 |
1972 - 1980 | 정계 입문 | |
1980 - 1981 | 정당 해산 | |
1981 - 1990 | 창당 | |
1990 | 합당[13] | |
1990 | 탈당 | |
1990 - 1991 | 입당 | |
1991 - 1995 | 합당[14] | |
1995 - 1997 | 합당[15] | |
1997 - 2002 | 합당[16] | |
2002 | 탈당 | |
2002 - 2003 | 입당 | |
2003 | 열린우리당 창당을 위한 탈당 | |
2003 - 2007 | 창당 | |
2007 - 2008 | 합당[17] | |
2008 | 합당[18] | |
2008 - 2010 | 당명 변경 | |
2010 - 2022 | 탈당 정계 은퇴 사망 |
이인제, 김한길, 강길부 못지않게 상당히 당적 변경이 많다. 군사정권 시절 여당인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이후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였다. 그러다 90년대 들어서는 민주자유당을 탈당한 뒤 민주당에 입당한 뒤 민주당계 정당과 보수정당을 오가다 2002년 한나라당을 탈당, 개혁국민정당을 거쳐 열린우리당에 합류한 이후부턴 철새 행보는 끊은 것으로 보이나, 군사정권에 부역한 이력 탓인지 민주당계 정당에서 크게 중용되진 못했다. 결국 제2의 피닉제가 될뻔했지만 18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과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낙선을 끝으로 사실상 정치 생명이 끊겼다. 허나 이후 광복회 회장에 취임하며 상기했듯 여러 구설수를 불러오는 발언을 통해 사망 직전까지 간접적으로 정치를 했다.
6. 둘러보기[편집]
[1] 충남 대덕군-연기군 선거구의 제13대 국회의원[2] 충남 대전 동구 을 선거구의 제13대 국회의원[3] 에모토 시마지(江本島次)로 창씨개명.[4] 68학번[5] 1972년 졸업[6] 당시에는 국어국문학과와 정치학과가 모두 문리과대학 문학부 소속이였다.[7] 학사 편입[8] 1974년 졸업[9] 여태 보였던 행실들을 봐서는 군대 갈 생각조차 안했을 것이다.[10] 이런 '생계' 운운하는 변명은 김원웅이 그토록 비난했던 친일반민족행위자들도 자주 써먹었던 수법이라는 점에서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만 보여준다.[11] 정확하게 말하자면 와해된 것에 가깝다.[12] 2002년 탈당
개혁국민정당 입당[13] 신민주공화당, 통일민주당과의 합당[14] 신민주연합당과의 합당[15] 개혁신당과의 합당[16] 신한국당과의 합당[17] 열린우리당의 흡수 합당[18] 민주당(2007년)과 신설 합당
개혁국민정당 입당[13] 신민주공화당, 통일민주당과의 합당[14] 신민주연합당과의 합당[15] 개혁신당과의 합당[16] 신한국당과의 합당[17] 열린우리당의 흡수 합당[18] 민주당(2007년)과 신설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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