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방문기] 루이제 린저의 북한방문기
- 북한 경제 관련 글들에 이어 1980년대 초 북한을 다녀온 루이제 린저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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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및 당부의 말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는 독일의 대표적 전후 작가로 1911년 태어나 2002년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작품 상당수가 남한 독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특히 "생의 한 가운데"는 그녀의 인지도를 매우 높여놓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녀는 2차대전 중 반나치 투쟁을 벌이기도 했던 기독교도이자 사회주의자이고 또한 열렬한 생태주의자였습니다. 1984년에는 녹색당의 대통령 후보를 맡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린저는 19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초에 걸쳐 남북한을 모두 방문한 몇 안되는 유명인사였습니다. 유신독재시절인 1975년 처음 남한을 방문하였는데 흥미롭게도 이때 명예광주시민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북한은 1980년, 81년, 82년 3차례 다녀왔으며 북한 방문 이후 방문기를 글로 남겼습니다. 북한을 처음 방문한 시점은 남한에서 광주항쟁이 진행 중이던 시점이다 보니 자신이 명예시민이 된 이 도시에서 벌어진 참상과 관련하여 방문기에서 분노(사실 왜 개입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느냐고 김일성에게 직접 물어봅니다. 이에 대한 김일성의 대답은 본문에 있습니다.)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녀는 북한 당국이 각별하게 신경을 쓴 외국인으로 호텔도 아닌 초대소에 혼자 머물며 대부분 사전에 계획된 제한적 장소(하지만 지방학교 등 일부 지역은 린저의 요구에 의해서 즉흥적 방문이 이루어집니다.)만 다녀오고 통역을 통해서만 다른 북한 사람들과 교류를 하였으나 비슷한 시점에 남북한을 모두 다녀왔고, 여러 통제에도 불구하고 3년에 걸쳐 평양과 지방을 다녀왔던 것을 감안하면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그녀의 글은 비판적 시각으로 북한을 바라보려던 서구 지식인이 북한 주민들의 솔직한(?) 논리와 현실(?)을 목도하면서 자신의 나이브한 편견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깨닫게 되는 자기성찰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린저의 관점에 공감하면 차츰 북한 당국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효과가 나타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이를 보고 린저가 북한 당국의 주장을 세련된 프로파간다로 만들었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린저의 글을 둘러싼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린저의 방북기는 이전글에서 소개한 조앤 로빈슨 교수의 1960년대 초 북한 경제상황에 이어서 아직은 북한이 추구하던 사회적 이상의 잔상이 사회 곳곳에 남아있던 시절 북한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최근 화제가 된 재미교포의 북한 방문기가 주로 신변잡기적 이야기인 것과 달리 린저는 북한 사회의 정치성 자체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점도 여러모로 가치가 있습니다. 재미교포 방북기와 비교하면 정말 소위 "레알 종북(?)"에 가까운 린저의 글이지만 당시 북한 당국의 사고체계를 이해할 수 있는 정보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지금 쿠바의 길에 열광하는 많은 사람들이 서구 자본주의의 어느 점에 넌덜머리를 내고 있는지 그 원류를 이해하는 면도 있습니다.
아래에서 소개하는 린저의 북한 방문기는 1988년 국내 출판된 "루이제린저의 북한이야기"를 요약 발췌하여 작성했습니다.
이미 국내에 번역까지 되어있는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좀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구하기 용이한 책은 아니다보니 일련의 북한사회 연구 시리즈에 차원에서 핵심적 내용을 소개해 봅니다.
그래서 여러 고민(?) 속에 조심스럽지만 린저의 방북기를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30년 전 이상사회를 꿈꿨던 독일 작가의 눈에 비친 아시아의 어떤 두 나라 이야기 정도로 쿨(?)하게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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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 대한 평가
1975년 린저는 남한 대학에서의 특강을 위해 방한하였습니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과 김지하씨 어머니 등 남한의 재야 인사들 여럿을 알게 되었습니다. 위에 언급한대로 광주시는 그때 루이제 린저에게 명예시민권을 수여하였다고 합니다.
린저의 남한사회에 대한 평가는 매우 가혹합니다.
남한의 첫인상: 남한 공항에서는 대기하던 기자들이 "한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한국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는지요?..." 등을 계속 린저에게 물어봤으며, 남한 당국은 린저의 여권, 트렁크, 지갑을 압수하고 6시간 후 호텔에서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북한 도착시 북한 안내자는 여정에 대해서만 물어본 게 전부라고 적고 있습니다.
"1975년 남한여행이라는 모험을 감행했다. 남한에서는 초청자의 의도에 말려들었었다. 그래서 나는 경호원들을 따돌렸다. 혼자서 중앙정보부를 속이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거기서 나는 얌전하게 허용된 것, 아름다운 것만을 본 것이 아니라 금지된 것, 거리의 허구들-빈민촌, 지하운동학생들, 고문 받고 수감되어 있는 김지하의 어머니, 해직교수들, 영양실조로 부어있는 어린이들, 시골의 가난한 친구들, 기지촌의 창녀들, 호화호텔의 고급기생들-도 목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에 대해 글을 써서 슈피겔지에 실었다. 그러자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독자편지들이 들어왔다. 그 편지를 쓴 사람들은 모두 중앙정보부 사람들이었으며 나의 초청자는 그러한 독자편지를 통한 선전책동을 하도록 강요받았던 것이다."
"남한에서의 미국의 군사력은 외국에서 건설된 것들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이 되었다. 남한자체는 오늘날 60만의 정규군과 매년 증대하는 예비군, 남한 예산의 1/3을 점하는 50억달러의 국방예산을 보유하고 있다. 그외의 나머지는 미국이 부담한다. 남한은 세계에서 일인당 군사비 부담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그 귀결은 남한 사람들을 압박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특히 그 나라의 노동자들을 압박한다. 이들은 저임금노동을 강요받고, 물론 파업권도 없으며 제대로 된 노동조합도 없다! 저렴한 생산비와 높은 판매가격의 차액은 남한에서 조업중인 미국과 일본의 공장들이 가로해가는 이윤이 된다. 이윤 중 남한에 떨어지는 나머지는 거의가 군비로 사용된다. 1975~80년 사이에 50억 달러가 군사비로 지출되었으며, 남한내에는 90개의 군수공장이 있고, 그 생산규모는 최근 4년간 2배로 커졌다."
"그러나 의회라는 것은 파쇼국가인 남한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독재정권의 허수아비의회인 것입니다. 의회가 형식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남한에서의 의회는 독재자에게 동의하는 것 외에, 어떠한 권한도 없습니다."
그나마 린저가 남한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거의 유일한 것이 예술입니다. 비록 그녀의 이런 인식이 남한 당국이 반체제 인사로 규정한 윤이상 덕분이 크긴 하지만요.
"남한은 한국예술을 크게 발전시켜 왔다. 이는 그들이 예술을 직접적 저항의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는 한 적어도 예술의 자유는 허락해 주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대조적으로 북한의 집단예술에 대해서는 박한 점수를 주고 있습니다. 정치적 선전이 너무 많고 서양 음악을 조악한 수준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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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사회시스템
김일성 부모 생가 참배: 김일성 생존시에 북한을 방문하는 방문객은 김일성 부모의 생가 참배를 해야만 했습니다. 린저는 북한을 방문한 다음날 생가를 방문해야 했는데 참배객들이 굉장히 많다는 점에 놀랐으며 모두들 밝아 보였으며 긴장이 없이 만족스러워 보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린저는 이런 참배행위를 아시아식 유교전통의 일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여성의 위치: 서구 좌파 지식인들이 마오주의를 비롯한 동양 사회주의 국가에 매료된 것 중 하나가 여성의 역할 확대입니다. 물론 소비에트에서도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와 같은 작품처럼 사회주의적 여성상이 등장하였지만 중국 혁명과정과 그 처참한 실상이 알려지기 이전의 문화혁명시기 국내에도 소개된 "세상의 절반"과 같은 책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사회적으로 이를 지원하는 사회제도의 강제화는 서구 지식인들에게 매우 혁신적인 모습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린저도 북한 여성의 삶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보였는데 그녀의 표현을 보면 "사실상 북한의 거의 모든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남성들은 여자들이 직업을 가지는 것을 달가와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이 이들의 전통적 사고방식에는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며 적극적 사회 진출에도 불구하고 아직 유교적 전통이 의식 속에 뿌리깊게 남아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역할이 아직 유연하지 못해 탁아소 보모의 경우 남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북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제반 권리, 출산의 조절, 그리고 필요하다면 낙태시 무료시술을 받을 권리 등이 있다고 합니다.(로빈슨 교수가 65년 글에서 북한에서 낙태가 불가능하다고 한 것과 배치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60년대 중반 이후 낙태가 합법화 된 것 같습니다.) 대부분 북한가정의 자녀 수는 3명인데, 3명 이상이면 여성들은 너무 오래 집에 매이게 되어 여성들이 선호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자녀를 두고 싶다고 해서 제약을 받는 것은 아니며, 자녀 수가 많을수록 노동시간은 단축되지만(일일 한시간 정도) 보수는 동일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북한 여성들은 공동세탁소나 공동주방이 마을마다 존재하여 가사부담이 없다고 합니다.
평양산원: 린저는 막 개원을 앞둔 평양산원을 방문합니다. 린저가 묘사한 평양산원의 모습을 보면 "김일성의 아내가 1947년 일찍 죽어야 했던 사실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여성들의 건강보호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였다. 평양시내의 커다란 여성전용병원의 건설은 그의 발의에 의한 것이다. 독실도 있고 2인용 3인용 병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한꺼번에 수용하는 병실은 없다. 여성환자는 입원할 때 혼자 있을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은 돈이나 사회계층이 문제가 되어서가 아니라 각자의 특별한 희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것이다. 회랑에는 텔레비젼과 전화를 통해서 환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방문자용 방이 있었다. 출산과정에 남편의 입회가 허락되지는 않았지만 출산 후 신생아는 신생아실로 보내지 않고(금지라고 함) 산모와 함께 지내도록 하고 있다." 라며 그 시설의 현대성과 모자동실과 같은 친생태적 시스템에 놀라워 했습니다. 이 병원에서 때 맞춰 쌍둥이를 낳은 모인사의 경험담이 오버랩이 되긴 합니다.
평양 어린이궁전: 린저가 북한 사회에서 가장 높게 평가하는 부분은 어린이 양육입니다. 비록 평양의 대표적 어린이 시설인 어린이 궁전에 대한 인상이 대부분이긴 합니다만, 궁전의 여러 방에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벗고, 하얀 겉옷을 입고 손을 소독해야만 했다며, 어린이를 보호하는 것에 대해 매우 놀라워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어린이들은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 그들은 원초적인 신뢰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말아라, 낯선 사람이 주는 것은 받지 말아라, 독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말을 걸거나 손을 대지 못하게 해라, ..., 추행범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여기 북한에서는 이러한 말도, 이러한 현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보니 거리에서 경찰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비행이나 폭행따위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어린이의 뺨을 때리는 부모나 교사는 처벌을 받는다고 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돌보는 여의사, 간호사, 보모 등 대단히 많은 사람들 중 남성을 찾기 힘들다며, "젊은 남자들은 유치원 보모가 되기를 원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아직 해방이 덜 된 것 같았다."고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지방병원: 린저는 지방의 병원을 방문하게 되는데 병원내의 약국에는 말린 약초다발들이 매달려 있었으며, 약서랍에는 순식물성의 약들이 구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의사는 그것들을 조그마한 손저울에 달아 약을 제조하였답니다. 화학약품은 없냐는 질문에 물론 있으며 중증인 경우에는 페니실린같은 항생제를 쓴다고 의사는 답하였답니다.
그런데 시골의사는 "그러나 되도록이면 그것을 안씁니다. 우리나라의 의학은 일단 발병한 병의 치료보다 질병의 예방에 더 힘을 씁니다. 우리는 의무검진을 실시하는데 특히 어린이나 임산부들은 자주 검사를 받게 하고 주부들은 반녀에 한 번씩 받게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받게 되지요. 그래서 유아 사망률이 굉장히 낮답니다. ... 나병같은 것은 전혀 없어요. 말라리아나 매독도 없고요. 암은 조기에 발견하고요." 하면서, 예방의학 중심임을 강조하였다고 합니다.
그 의사는 자기의 의학공부에 대해 의학전문학교에서 4년간 공부하였으며(아마도 일반의로 추정됩니다.),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더 오래 공부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특이한 점은 김일성종합대학에는 의대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정신병을 다룰 필요가 없으며 신경의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명확하게 쓰고 있지는 않지만 정신병을 자본주의적 환경의 부산물로 보는 편견이 일부 느껴졌습니다. 어쨌든 린저도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없다는 점을 높게 사고 있습니다. (린저의 글에는 없지만 국내 모 정당의 간부가 동성애를 자본주의적 이상 증상으로 언급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학교: 지방학교에는 3백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한 학급에 40명씩 있었다고 합니다. 교사는 12명이 있었는데 그 중의 10명은 여선생들이었으며, 북한의 소녀들 역시 여성적이고, 애교있게 자신을 추스리고, 우아하게 행동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도록 교육받는다는 점에서 남한의 소녀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답니다.
린저는 "거기서 교육교재나 학습교재를 보지 못했다.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학습의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 여선생이 먼저 말하면 아이들은 그것을 따라 말했다. ... 아마도 아이들에게 비판적 사유를 가르치지는 않고 단지 말하는대로 순순히 따르도록 교육시키는 것은 전체주의적 국가의 원리에 속할 것이다."며 비판적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체벌이 전혀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큰 인상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벌이라는 것은 없다."우리는 행복합니다. 우리는 천국에 살고 있답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어린이 문제에 대한 등한시, 문제학생의 퇴학, 청소년 범죄, "어린이 학대, 어린이에 대한 성폭행, 학생들의 자살같은 것들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서구의 반공적, 보수주의적 정당들이 용감한 젊은이들을 원한다면 북한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며 어린이 청소년 문제에 있어서 북한사회를 높게 평가하였습니다. 60-70년대 서구 사회의 범죄율 급증과 청소년 문제의 심각성 그리고 1931년 개봉한 영화 M이 유행하였던 독일 사회를 생각하면 린저가 북한 학교와 청소년 교육에 높은 점수를 주는게 일견 이해는 갑니다.
예술: 린저가 북한 사회에서 가장 아쉬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예술분야 입니다. 그녀는 원산에서 오페라(집단 가극으로 보입니다.)를 보았는데 무대 좌우에는 형광자막판이 걸려 있었는데, 영어와 러시아로 극의 내용과 노래가사가 수시로 형광자막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오페라(집단가극)는 한국전쟁 당시의 1211 고지 결전을 다루고 있는데 한 여성이 자신의 남편과 아들이 전사하고 딸이 빨치산이 된 후 장마로 불어난 강을 가로질러 탄약과 무기를 건너게 한 무용담으로 그 여성의 유일한 재산인 결혼예물 비단과 결혼함을 이용해 성공했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숭고한 내용이라고 해서 그 자체로 예술이 될 수는 없다며, 오페라 중에서 김일성에 대한 찬사가 너무 많은 것 같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서구에서 터무니 없는 개인숭배라고 비난해도 변명할 길이 없는 것들로 이름뿐인 신대신에 김일성을 숭배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고 합니다.
종교: 한국전쟁 이전 북한의 카톨릭 교도들은 소수였으나 한때 베네딕트 교단이 활발히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추방당했는데 린저는 남한의 서양 신부 파비안 담 신부로부터 집단수용소 생활의 잔혹성에 대해 이미 들었다고 합니다.
린저는 북한 당국에 요청을 하여 평양에 있는 개신교도 2명과 면담합니다. 한명은 남한으로 도망을 오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때를 놓쳤다고 말하고 있지만 후회는 없다고 합니다. 3명의 자녀를 키우고 있는데 이제 자식들은 의사, 고등학교 교사들이 되어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들은 북한에서는 교육에 돈이 안든다고 자랑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이들에 따르면 부족한 것 없이 살아가는 북한 아이들은 더 이상 종교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고 하면서, 아버지는 일제시대 혹독한 시기를 겪었기에 종교가 필요했지만 자신들은 자유롭고 행복해서 종교가 필요 없다고 했답니다.
평양에는 1980년 당시 800명의 개신교도만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도 없는데 그렇다고 서방의 지원에 대해 반겨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올 것 같지 않아서 교회 건축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 주요 이유였습니다.
북한인의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보면 "미국인들에 의해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교육된 기독교인들은 이 나라에서 제5별동대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이데올로기 기적 이유에서 그들에 의해 주입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때문에 ... 그들은 우리의 배반자였으며, 우리에게 자본주의 이념을 주입하려 했으며... 대지주라는 봉건계층에 가담하고 미국의 편에 서서 싸웠습니다."
절에서 만난 스님... 정신적 면모는 없고 문화재 관리인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시골 면장과의 대화와 감옥의 존재: 시골 면장과의 대화에서 린저는 결혼제도에 대해 물어봅니다.
결혼은 부모가 결정합니까? 대부분은 가족의 동의하에 결혼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가족들과 함께 삽니다. 결혼은 일찍하는 편입니다. 미혼모는 없습니까? 어떻게 그럴수가 두 사람이 동거하면 그것이 결혼한 것입니다.
간통은 없나요? 있기는 한데 발생하면 그 사람은 잠시 다시 정신을 차릴 때까지 다른 곳에 보내집니다.
살인범은? 살인자는 전쟁 중에나 있겠죠. 평화시에 다른 사람을 죽이겠습니까?
사람들 사이에 적대감은? 싸우기야 하겠지만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강도나 도둑은? 5년간이나 면장을 지냈지만 그런 경우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도둑은 어떻게 처벌받는가? 우선 설득한다. 그런 모습은 혁명을 후퇴시키고 있음을 환기시킵니다.
재발하면? 노역소로 갑니다.
노역소는 감옥의 일종인가? 우리는 감옥이 없습니다. 법률상 제일 긴 형벌은 1년입니다.
감옥이 없다고요? 김일성 수령은 억압은 억압을 낳고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고 가르쳤습니다. 갈등은 무기나 처벌로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60년대의 갈등상황에서 김일성 수령이 취했듯이 대화로써 푸는 것입니다.
린저의 방북기에서 의외로 집착하고 있는 주제가 감옥의 존재입니다. 당시 북한 당국은 감옥이 없다고 홍보했는데 앰네스티 등의 국제 인권단체에서는 북한의 정치범이 주로 갇혀 있는 집단수용소에 대해 서서히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린저는 나름 여러차례 감옥에 대해 알아보지만 결국 당국이 주선한 교화소(울타리도 제대로 없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를 방문하고 나서 북한 당국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즉, 북한에는 서구적 의미의 감옥이 없으며 가뜩이나 없는 죄수들도 김일성의 면담에서 그가 한 말 대로 끊임없는 교화와 설득을 통해 사회에 복귀시키고 있다고 믿게 됩니다.
하지만 다음에 소개할 앰네스티가 1979년 북한의 양심수로 확인한 베네주엘라인 라메다 사건(특별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 태업을 했다는 명목으로 20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가혹한 수형생활을 경험한 사건)을 보면 감옥이 없다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으로 보입니다.
북한 사회에 대한 평가: 린저는 일반적 북한 사회에 대해 성역할의 존치와 수준 낮은 예술 등 일부 요소를 제외하면 극찬에 가까운 찬사를 보냅니다.
"북한 인민들은 확실히 침착하고 쾌활하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도 없고 우울증에 걸려있는 사람도 없다고 하였다. 그것은 확실하다. 북한에서는 어떤 사람들이든 어떤 집단과 인민 공동체에 속해있다. 통신두절이라는 것은 없다. 여기 사람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행하고 즐거이 함께 지낸다. 누구도 도움받지 못한 채 혼자 있도록 내팽겨쳐져 있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을 감안하면 어떤 이가 북한의 사회주의 모델에 대해 적대감을 갖는다 할지라도 이러한 것들이 서구 기독교 국가에서도 잘 되어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독때문에 자살하는 노인들, 약물중독, 청소년 범죄 등은 서구에서 한탄만 하고 있지 근절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북한은 이 문제를 거의 해결하였다."
"타락한 서구에 어떻게 건전한 도덕의식을 일깨울 수 있을까? 북한은 나에게 자극이 되었다. 서구에서는 어떤 기독교적 가르침으로도 그리고 교회도 사람들에게 간통과 절도와 살인강도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랑의 종교라는 기독교는 북한에서 유교와 사회주의가 이룬 것(친절함, 자비심, 개인이기주의의 극복 등)을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공산주의 국가에 테러도, 약물중독도, 은행강도도 없다는 사실이 우리의 보수주의자와 도덕주의자들에게는 매력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장점을 위해 몇가지 불편을 받아들이라고 그들을 설득할 수는 없을까? 조금 가난하지만 대신 억압당하는 일이 없지 않은가? 여행을 할 수 없지만 대신 젊은이들이 집단적으로 자살하는 일도 없지 않은가? 자본축적이 없지만 대신 빈민굴도 없지 않은가?"
위 글에서도 나타나지만 린저는 비록 북한 사람들이 여행의 자유가 없고, 수령에 대한 일인숭배가 강하지만 물신주의에 물들어 범죄와 마약으로 병들어 가는 서구 사회의 비극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불편은 감내할 수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정치/외교/통일 이슈
1956년 정변과 처리과정: 김선생(역사학자,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국장)과의 대담 "당시 공산주의자들 사이에는 친소 레닌주의적 경향과 친중국 마오주의적 경향의 두 정파가 있었습니다. 양정파는 서로 우위를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한편 그들은 서로 적대적이면서도 한 가지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즉, 김일성이 제시한 사회주의형태를 바꿔버리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김일성의 실각을 꾀했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이 유럽을 방문한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그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불러 그들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 보았던 것입니다. 토론이 벌어지고 마오주의자들 리더는 중국으로 망명하였지만 소련파의 리더는 자신의 오류를 명확히 인식하게 됩니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수령은 폭력을 거부하고 설득하려 했지, 결코 억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반대하는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정치적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잡아가둘 감옥도 없고, 고문도 강제 자백도 없습니다. 대화가 있을 뿐입니다."
비록 김선생의 주장은 정치범도 없고 감옥도 없다는 이야기지만 한편 56년 정변이 제법 규모가 컸고 자칫 김일성이 외유중 쿠데타로 실각할 뻔 했던 큰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친중파와 친소파와의 갈등이 위험수위였으며 이는 스탈린 사후 후루시초프 정권과 사이가 벌어졌음을 보여 준 사건이 아닐까 합니다.
소련과의 관계: 북한 당국자에 따르면 북한은 전쟁 중에는 무기와 자금을 소련으로 부터 원조 받았으며 전후에는 무역상대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소련은 북한에서 철 등의 원자재를 수입해갔고 금속공업제품을 수출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북한의 소련 의존도가 커져갔고 소련화될 위험(소비에트 방식 채택?)을 안고 있었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이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고자 하였답니다. 그 와중에 60년대 중반 소련이 북한을 종속시키려 했고 이로인해 북한에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어 김일성의 위치가 위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한은 유고의 선례에 따라 비동맹국가가 되기로 결정하였고, 김일성은 티토와 동맹을 맺었다고 합니다. 사실 린저의 1차 방북시점은 광주항쟁이 진행 중이던 시점이었고 김일성이 티토 장례식 참석을 마치고 막 귀국한 이후이기도 합니다.
북한은 소련과 떨어진 후 장차 다가올 통일에 대비하면서 남한에 대해 미국의 감독하에서 벗어날 것을 제의했다고 합니다. 남한은 이전의 일본의 식민지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식민지에 지나지 않지만 북한은 소련의 속국이 아니며, 어떤 동맹관계도 맺고 있지 않으며, 또 중국에 종속된 것도 아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비동맹외교: 린저는 박정희가 쓴 책들도 읽어봤다고 합니다. 그녀에 따르면 1960년대 박정희는 그의 저서에서 상황이 남한에 불리하게 되었다고 불평을 했는데 많은 3세계 국가들이 UN가입으로 인하여 UN에서의 세력관계가 뒤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정희는 할 수 없이 3세계 국가들과 더불어 북한에게도 호의를 보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또한 남한에 우호적이었던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제 한국문제에 관심을 잃어 버렸거나 한국에 대한 UN의 결정에 반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22회 총회에서 대부분의 회원국가들이 한국문제를 UN에서 다루지 말고 앞으로 설치할 위원회에 이관하는데 찬성하였고 남한에서의 UN군 철수가 제안되었습니다. 또한 적당한 시기에 남북한을 동시에 UN 회원으로 초청하자는 의견이 지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북한의 비동맹외교 노선은 서구 식민지에서 갓 해방된 신생독립국들과의 연대를 통해 국제무대에서 소리를 내보자는 생각은 정말 획기적 외교노선의 전환이었습니다. 김일성으로서는 한국전쟁에서 UN군의 참전을 아주 뼈아픈 패착으로 봤을 텐데 총회에서 한표를 행사하는 신생국과의 연대강화로 한반도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미국으로서도 골치가 아팠을 듯 합니다. 대미외교 말고는 변변한 외교노선이 없던 당시 남한 당국은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을 듯 합니다. 결국 돈과 무기 또는 고유의 발전모델 등으로 신생국들의 환심을 사려는 남북한의 극한 외교경쟁이 아프리카 등지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개인독재: 린저는 북한 방문 후 그 정치체제에 대해 매우 우호적으로 변화합니다.
"나는 북한을 어두운 독재국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밝은 독재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주석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또 모든 것을 감독하는, 그래서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하며 모든 생활양식을 규정하는 가장이자 어버이로 여겨집니다. 서구민주주의 사람들 역시 자유롭지 못합니다. 정권측이 만들어낸 사실상의 강제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국력은 소진되고 있고, 의회내에서 서로 무질서하게 욕이나 하고 비방이나 하는 형편입니다. 결국 현실적으로 인민의 복지증진에는 아무런 기여도 못하고 마는 것이지요."
즉, 린저가 보기에 서독을 포함한 서구국가는 교묘하게 기득권의 지배논리를 위장할 뿐 사실상 강제하고 있고 서로 싸우는 모습도 그 실익이 없다는 평가하고 그런 점에서 보면 북한의 독재는 오히려 밝은 독재라고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주체사상: 린저의 방문기에서 북한 당국자가 주장하는 주체사상 이야기를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체사상은 혁명과 국가재건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외국의 영향이나 도움을 받지 않고 해결함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여타의 국가에서 이루어진 사회주의혁명의 경험과 맑스 레닌주의를 우리나라의 특수한 역사적/물질적 조건들을 고려하여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주체사상은 독창적 이데올로기이다. 타국에 대해 정치적으로 종속되지 않는다. 즉, 비동맹주의이다. 자주국방, 소련이나 중국 등과 군사적 동맹을 맺을 필요가 없다."
결과적으로 보면 주체사상은 소비에트 방식(강제적 집단농장화, 중공업 올인, 대규모 굴락 조성을 통한 공포 등)과 일정 거리를 둔 북한의 전후 재건 및 자립형 경제개발의 자신감, 중소(특히 소련) 의존의 탈피와 비동맹외교가 중요한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합니다. 사실 비동맹외교를 추진하면서 각국에 주체사상 연구소 설립을 지원하기도 하였습니다.
통일: 린저가 보기에 당시 남한 사람들은 그들의 민주주의 보다도 북한체제가 훨씬 더 좋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수십년간이나 대부분 일본을 통한 북한에 대한 긍정적인 정보도 공산주의 선전이라 여기며 불신감에 쌓여 있었지만, 이제는 북한이 평화스럽게 살 뿐만 아니라 평화통일을 원함을, 게다가 공산주의의 기치를 내걸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나마 로빈슨 교수처럼 대놓고 북한으로 흡수통일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광주항쟁이 아직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0일 그녀가 김일성과 단독으로 만나면서 왜 광주항쟁에 개입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장면입니다.
김일성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과거에 한 번 조국을 해방시키면서 나의 손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결코!" "광주학살에서 그렇게 용감한 젊은이들을 도우러 가지 않은 것은 나로선 내리기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내가 자신들을 위험속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느꼈지만 난 폭동을 야기하지도 않았고 개입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무력을 쓰거나 유혈사태 없이 통일을 달성하는 것이 나의 확고한 결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김일성이 광주항쟁에 결국 관여하지 않았고, 박정희 암살 전후의 혼란도 침공의 기회로 삼지 않음으로서 그의 진실함을 보여 주었다며 평화주의자로 그를 추켜 세워주고 있습니다. 사실 방북기에는 1976년 8.18 도끼만행 사건에 대해서도 남한 병사의 무력도발(도끼로 북한 병사를 먼저 공격한)로 사태가 시작되었다고 그 책임을 남한에 돌리고 있습니다.
남북혐상에 대한 기술도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남한은 북한에 외국인 자유통행지구 설립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린저는 이에 대해 남한에서는 군부대가 있는 서울과 부산이 창녀도시가 되어 기생들이 들끓으며, 그에 상응하여 향락호텔과 나이트클럽이 즐비하여 외국의 유수한 기업가들이 몰려든다고 평판이 나 있다. 따라서 도덕관이 엄한 김일성은 부패의 온상이 될 수 있는 이런 제의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며 김일성을 거들고 있습니다.
이제 북한의 통일구상인 고려연방제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한때(지금도?)는 고려연방제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국보법 위반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한번쯤은 그내용을 알 필요도 있고 린저도 소개하고 있기에 간단히 요약해 봤습니다. 고려연방제는 1980년 10월 10일 노동당 6차 전당대회에서 고려연방제안이 결정되면서 알려졌습니다.
통일의 첫단계는 남북한의 정치적 사회적 주요 기구의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이 단체들이 공동전선을 이루어 결집하며,
세번째는 남북 양측에서 인구수와는 상관없이 동수의 투표권을 갖는 민족의회를 구성 남북한 정부형태는 유지하지만 상위기관인 민족의회의 통제를 받는다. 양국군대의 명령권은 민족의회에 넘겨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핵심 10개 원칙을 살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은 완전한 독립국이다.
2. 이 공화국은 자유와 민주를 소중히 여기며 모든 종류의 독재를 배격한다. 그리고 인간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한다. 정당과 사회단체의 결성과 자유로운 활동의 보장, 종교와 언론의 자유, ...
3. 이 공화국은 자립경제를 이룰 것이다.
4. 경제, 문화, 스포츠, 교육부문에서 통일된 계획에 따라 협력
5. 파괴된 모든 통신 및 교통수단 복구
6. 이 공화국은 모든 인민에게 일자리를 찾아주고, 특히 중소기업을 육성할 것이다.
7. 국토방위를 위해 단일군대로 민족연합군을 만들 것이다. 남북한의 군인수는 동일해야 한다. 10만내지 15만... 민족 연합군의 비용은 양측 부담
8. 외국거주 한국인을 보호하며, 자유로운 귀국과 처벌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자유로운 직업활동을 보장한다.
9.이해관계가 배치되는 사회체제라 하더라도 현재의 관계를 발전시킬 것이다. 남한에 투자된 외국자본은 몰수되지 않을 것이며, 기업활동은 계속 허가될 것이다.
10. 이 공화국은 외국에 단일대표를 파견할 것이며, UN에도 공동대표를 보낼 것이다. 대외정책은 평화적 입장을 취할 것이다. 한국은 비핵지대가 될 것이며 핵무기의 생산 및 수입은 금지될 것이다.
즉, 민족의회가 최고 권력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1980년 상황에서 김일성은 북한의 실상이 제대로 알려진다면 남한 민중으로부터 의미있는 지지를 받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지난 글에서 썼듯이 1974년부터 대외부채의 결제불이행이 나타나면서 자립경제 모델의 허약한 기초체력이 한계에 달했지만 자신이 구축한 사회시스템에 대한 우월감은 매우 높았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현재 남한인들이 보편적으로(주사파를 제외한 보수/진보 모두) 느끼는 체제 우월감을 당시에는 북한 사람들이 향유하고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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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저의 북한에 대한 종합평가
마지막으로 방문기 중간 중간에 그녀가 쓴 북한에 대한 총평을 가져와 봅니다.
"북한의 사회주의는 인간적 면모를 띤 사회주의이다. 이러한 사회주의는 두브체크가 체코슬라바키아에서 시도했었으나 소련에 의해 좌절되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그것을 계속 발전시키고 있다. 그의 사상과 그의 실천, 그것은 대안이며 제3의 길이다. 서구는 그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해야만 할 것이다."
(1989년말과 1990년초 사회주의 불럭의 몰락국면에서 한겨레 독일통신원으로 이 사태에 대해 사실은 인간적 사회주의의 회귀라며 사실을 호도하던 모 인사가 떠오릅니다. 귀국 후 국민의 정부시절 이데올로그로 활동을 하며 한때 잘나갔지만 더 이상 인간적 사회주의 이야기를 떠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김일성은 원자력발전소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작금의 상황과 대비되는 이야기 입니다.)
"1953년 이래로 모든 물가는 똑같고 인플레문제는 없다. 서구생태학자들의 때늦은 요구를 많이 실현에 옮겼다. 즉 도시들은 녹지대로 채워지고 화학공장들은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 차량통행은 최소한도로 제한되며, 자가용 차가 없다. 언덕과 산은 숲이 우거져있다. 수년전부터 벌목이 금지되어 있다." (인플레가 없는 세상이라...벌목이 금지된 생태주의 나라라... 지금 북한 상황과 대조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최근 일부 생태주의자들이 쿠바에 대해 보내는 연대감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북한사람들에게는 집세, 세금, 사회보장비, 교육비, 의료비 등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특별한 요구도 갖고 있지 않다. 소비를 자극하는 광고도 없고,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도 갖지 않는 것이다." (세금이 없는 것이 꼭 최선일까 하면 원유판매로 모든 재정을 감당하는 중동의 국가들에서 정치적 반대자의 국적을 박탈함으로써 이들을 탄압하는 것을 보면 회의적입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설사 나중에 사회보장 등으로 돌려받을지라도 조세를 부담하는 것은 누군가가 제공하는 시혜로 살고 있는게 아님을 명확히 해주는 것 같습니다.)
"세금을 걷지 않고 모든 시민에게 사회보장을 제공할 수 있는 배경에는 철, 석탄, 비스무트 같은 지하자원을 갖고 있으며 중공업과 경공업이 균형있게 발전하였다고 한다. 외국에 상품도 수출하고 수입에는 조금만 돈을 쓰며, 외화는 결코 허비하지 않는다고 한다. 외화를 낭비하며 여행하지도 않고, ... , 한 개인에게 자본이 집중되지도 않는다. 섬유제품을 자체 생산하며 합성수지도 만들고, 반면 사치품 생산에는 자본을 절대 투자하지 않으며, 일본과 미국에 부채를 많이 진 남한과는 달리 외국에 부채도 없다고 한다." (이전 글에서 북한의 대외부채 문제와 채무불이행 이슈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 채무불이행이 1974년이므로 린저의 방북시점 이전이지만 린저가 만난 당국자들은 거짓을 말했거나 아예 관련 사실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외부에 자국 경제통계를 공개하지 않는 국가가 내부적으로는 정확한 통계를 가공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극히 회의적입니다.)
"북한이 제3세계국가이고 1945년에 완전히 황폐된 국가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북한이 이룩한 수준은 놀라운 것이다. 북한에서 헐벗고 굶주린 사람은 없고, 또 의료 혜택이나 직장을 갖지 못한 사람 없이 모두 잘 산다는 것을 간단히 말해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소유하고 어느 누구도 노후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결코 후진국이 아니다. 한 나라에 과잉이란 것이 필요할까?" (린저는 서구사회의 과잉이 과연 필수적인가 하는 회의를 가지며 필요에 의해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꿈꾸며 그 단면을 북한에서 찾고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필요에 의한 노동과 소비는 사실 생산력이 아주 높지 않다면 수렵채집 시대와 같은 상시적 결핍과 폭력의 일상화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북한 주민들에게도 명백히 자율성이 존재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상부의 지시없이도 운용이 잘되는 비교적 큰 공장은 여분의 노동자를 보내거나 잉여이윤에서 다른 공장의 지원을 위해 자금을 전용하면서 보다 작은 공장들을 도와준다. 그와 같은 것은 자율성이 허용된다는 지표이다."
"물론 나는 여기 사람들이 낙원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여기 사람들은 마음대로 외국을 여행하지도 못하며 명령에 의해서만 밖으로 나갈 수가 있다. 일자리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가 없으며 일자리를 정부에 의해서 배당 받는다. 개인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골라서 공부할 수 없다. 필요에 따라 개인이 공부할 것이 정해진다. 무위도식은 허용되지 않는다. 항상 함께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 사람들은 또한 자기가 쓰고자 하는 것을 마음대로 쓸 수 없다. 검열은 없으나 작가들은 혁명정신에 입각하여 자기가 쓸 글의 주제와 문체를 강요받게 되며 글에 주석의 뜻을 반영할 것을 강요받게 된다. 거기에서는 공동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에 우선한다." (여행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받지만 수령이 결정한 공동의 이해가 우선이 된다면 이 또한 감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3세계의 어떤 나라도 북한처럼 그렇게 긍정적인 면들을 많이 갖고 있는 나라는 없다. 즉, 실업이 없고, 무주택자가 없고, 마피아가 없고, 부패도 없고, 어떠한 빈곤도 없고, 약물중독도 없고, 윤리적 인간적 가치의 파괴도 없다." (린저와 같은 서구 지식인의 범죄, 약물, 슬럼이 없는 사회에 대한 동경이 엿보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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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250페이지의 시점별로 나열된 기행문 형식의 글을 제가 임의로 몇 개의 주제로 재요약을 하다보니 원문의 내용이 온전히 전달되었는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1980년대 후반 서독 국적의 한국인 남북한 연구자(남한 당국이 친북인사로 분류하였던)가 안기부의 감시를 받는 조건(?)으로 남한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연구자의 이름은 가물가물하지만 그 분이 이야기한 것 중 2가지가 아직 기억에 남습니다.
하나는 서독에서 받아보는 북한 노동신문의 값이 수십년동안 한번도 인상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 였습니다. 지금과 같은 인터넷도 없이 북한에서 일일이 항공편으로 서독에 배달해야 하는데 구독료를 올리지 않는 것은 받아보는 처지에서는 좋았지만 정말 괜찮은 것인지걱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린저의 방문기에 언급된 53년 이후 인플레가 없다는 이야기가 결코 허튼 소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제한적이지만 국제교류로 인한 가격인상은 모두 사회적 부담으로 버텼다는 것인데 과연 그 비용 부담에 대한 적절성은 누가 어떤식으로 관리를 했는지 구성원들은 알았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두번째로 그는 당시 남한과 북한을 각각 지옥과 감옥에 비유했는데, 그 비유는 한동안 설득력이 꽤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만 더 첨언을 하면 적어도 1980년대까지는 남한 정치경제는 북한 영향력을 배제하고 논하기는 매우 어렵지 않았을까 합니다. 전쟁이라는 극한 형식으로 통일 시도를 벌이기도 했지만 남북한 민중에게는 체제선택의 이슈가 늘 상존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다음 글은 촘스키 교수의 북한에 대한 평과 함께 1970년대 앰네스티에 의해 북한 양심수로 확인된 베네주엘라 시인 라메다 이야기를 소개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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