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
윤석열의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전체주의: 친일파 척결 못한 후과와 홍범도 흉상 철거
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
올 여름 ‘3폭’으로 몹시 힘들군요. 폭염과 폭우로 몸이 고통스러운데다 윤석열의 폭정으로 맘이 괴롭고 속이 터지거든요. 밖으로는 미국과 일본에 대한 예속과 굴종이 한없고 안으로는 억지와 횡포가 끝없잖아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속담처럼, 외교든 내치든 모든 걸 무식하게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전체주의로 나누고 용감하게 돌진합니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가치는 개인의 자유입니다. 자유의 기본은 양심과 사상 및 표현과 언론의 자유이고요. 윤석열이 자유민주주의를 앞세우면서도, 이러한 기본적 자유조차 억누르고 훼손하는 건 얼마나 허망하고, 제왕처럼 군림하는 게 얼마나 가증스러운가요.
‘공산전체주의’는 40-50년 정치학을 공부하면서도 처음 들어봅니다. 아마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를 합쳐본 것이겠지요. 정치이념이나 사상을 이렇게 맘대로 만들어내는 것도 무지와 만용의 소치겠고요. 윤석열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공부해보지 못하고 무조건 반공.승공.멸공만 외쳐왔기에 설명 좀 곁들여야 하니 전체주의부터 얘기하렵니다.
전체주의는 글자 그대로 전체를 최고 존재로 삼습니다. 개인은 국가 같은 전체를 위해 복무하는 존재이니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철저하게 제한당할 수밖에 없고요. 윤석열이 이전 정권을 맘대로 비난하거나 조롱하면서도, 반대 세력은 기어이 쳐내며, 비판 언론은 탄압하고, 다른 의견이나 이념을 가진 국민은 반국가적이거나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하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걸 보면 그의 통치는 자유민주주의 보다 전체주의에 가깝습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병폐인 노동력 착취와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토지와 공장 등 생산수단 사유화를 막고 자본가 계급을 없애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분배받자는 사상입니다. 실현 과정에서 자본가 계급 타도를 위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노동자 계급 독재를 미화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고, 궁극적 목표가 너무 이상적이라 실현하기 어려운 게 큰 흠이죠. 1848년 공산당선언에 따라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연해주와 만주 지역에서 항일 독립운동하던 우리 조상들이 자연스레 또는 당연히 공산주의자가 됐습니다. 이동휘와 홍범도 등이죠.
홍범도는 요즘 흉상 철거 문제로 널리 알려지고 있으니 이동휘에 관해 몇 마디 덧붙입니다. 1907년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자 의병을 일으키려다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해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벌였습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유배당한 뒤, 1913-14년 연해주에서 이상설 등과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우고 각지에 군대를 편성하며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관학교도 설립했고요. 1917년 러시아혁명에 영향 받아 1918년 <한인사회당>을 만들고 <한인적위군>을 편성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고, 대한임시정부 군무총장에 취임해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됐지요. 1921년 이승만 등과의 갈등으로 국무총리를 그만두고 상해와 연해주를 오가며 꾸준히 민족해방투쟁에 헌신하다 1935년 사망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계몽운동가요 치열한 독립운동가가 업적을 인정받는 데는 무려 70여년이 걸렸습니다. 공산주의자였다는 이유로요. 헌법에 상해임시정부 법통을 이어 받는다고 명시해놓고 있으면서도, 그 정부에서 국무총리까지 지낸 사람에게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에야 건국훈장을 준 거죠. 그의 공산주의운동은 철저하게 항일 민족해방투쟁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고, 그는 해방되기 10년 전 죽었기에 1945년 남북분단이나 1948년 북한정부 수립 그리고 1950년 6.25전쟁과는 전혀 관계없었는데도 말입니다.
참고로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의 공산주의운동이 연해주와 만주 등 해외에서만 일어난 건 아닙니다. 식민지 조선의 서울(경성)에서도 1925년 <조선공산당>이 결성됐으니까요. ‘타도 일본제국주의’와 ‘조선민족해방 만세’ 등의 기치를 내걸고 독립운동을 펼치며 1926년 ‘6.10만세운동’ 등을 주도하다 일제에 체포되고 탄압받으며 해체되기도 했고요. 아무튼 그 무렵엔 공산주의 운동이 항일 독립운동의 수단이었는데,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글줄이나 읽은 사람치고 공산주의에 빠지지 않으면 지식인이 아니라는 말도 떠돌았다고 하잖아요. 1945년 해방 후 1948년 극우 이승만이 정권을 잡기 전 38선 이남 미군정 아래서조차 70-80% 민중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정부 수립을 선호하고, 기껏 10-20% 지주나 자본가 계급이 자본주의 정부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미군정 정책에 따라 해방 후 친일파가 척결되기는커녕 다시 득세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은 구실이 반공이었지요. 일제 때 일본군 앞잡이였다가 해방 후 공산주의자로 변신했던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 잡을 때 맨 먼저 내세웠던 것도 바로 ‘반공’이었고요. 1945-48년 미군정 영향으로 해방 후 친일파를 처벌하거나 제거하지 못한 비참한 후과가 70-80년이나 지속되는군요. 윤석열 일당이 아직도 반공을 빌미로 독립운동가 홍범도를 모욕하고 있으니까요. 참 끔찍한 세상에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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