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06
김덕홍 회고록에 5.18 이야기 왜 빠졌나? - 자유 대한민국 수호자 - 뉴스타운
김덕홍 회고록에 5.18 이야기 왜 빠졌나? - 자유 대한민국 수호자 - 뉴스타운
김덕홍 회고록에 5.18 이야기 왜 빠졌나?김일성, 김정일 관련 비공개 사료들로만 집필..차후 증언 관심 증폭
손상대 대기자 | ssd5178@hanmail.net
승인 2015.10.19 16:49:41
▲ ⓒ뉴스타운
지난 1997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함께 한국에 망명한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 출신의 김덕홍(67세 '제72광수') 국가안보전략연구소 비상근 고문이 최근 자신의 회고록 ‘나는 자유주의자이다’(집사재)를 펴냈다.
화고록은 1장 가족이야기, 2장 사회생활의 시작점에서, 3장 20년간 몸담았던 김일성 종합대학, 4장 김일성 족속 신격화에 얽힌 비공개 이야기, 5장 노동당중앙위원회에서, 6장 김일성족속이 망친 북한경제, 7장 대남적화 통일야망에 얽힌 김일성 족속의 한, 8장 김일성 족속의 범죄야망의 산물들, 9장 김일성의 말년 스토리 몇 가지, 10장 김일성 급사 후 액 1년간의 김정일, 11장 정치망명의 길에 오르다, 12장 지금에야 이해되는 황장엽, 그리고 그리움, 13장 여권발급을 위한 법정소송 4년, 14장 나는 자유주의자이다, 15장 비운의 세습지도자 김정은 등으로 구성돼 있다.
19일 현재 김 고문의 회고록은 국내 유명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그는 현재 서울 강남의 안가에서 칩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 졌다. 김 고문은 그동안 외부활동을 극도로 자제해 왔는데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양쪽 귀가 잘 안 들리는 등 건강이 악화한 상태라고 한다.
그는 책에서 “나는 북한 정치 망명자로서의 사명과 절박한 마음을 안고 여권발급을 위한 4년간의 법적소송에서 정신적 육체적 진력을 거의 모두 소진했다”고 밝혔다.
그의 측근들은 이번 회고록과 관련 김 고문이 “죽기 전에 꼭 남기고 싶은 메시지를 책에 담았으며, 유고를 남기는 심정으로 썼다고 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회고록에는 김정일이 ‘저팔계 외교’로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를 속인 사실, 김일성이 1988년 군수공장을 시찰하면서 교시한 내용, 김정일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날벼락을 맞은 일화, 정치망명 결의, YS가 친서로 장·차관 대우 약속한 사실, 핵 개발과 관련한 정보, 국정원과의 불편한 관계 등 다양한 북한 정권의 비화들이 수록돼 있다.
김덕홍씨는 황장엽 망명을 기획·실행한 인사다. 두 사람의 직접적인 망명 동기는 황장엽씨가 1996년 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주체사상 국제토론회에서 “주체사상은 김일성·김정일이 아니라 내가 만든 것”이라는 발언이 도화선이 됐다.
황장엽의 발언은 그날로 러시아주재 북한대사관 요원들에 의해 김정일에게 직보되었고, 그 시각부터 황장엽을 대하는 김정일의 태도가 냉랭하게 돌병했다고 한다.
즉 김정일의 분개가 망명을 결심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망명이 아니었으면 황장엽은 독약을 먹고 자살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당시 황장엽은 김 고문에게 “자살할 수 있게 독약을 구해 달라”고 부탁한 사실이 있다는 것.
김 고문은 1997년 1월10일 중국에 나와서 황장엽의 정치망명 준비를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1월20일 재차 평양에 들어갔을 때 황장엽이 망명 선언을 했다고 한다.
당시 황장엽은 “네가 같이 가지 않으면 남조선에 망명하지 않겠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김덕홍 동생이 같이 가야만 남조선으로 가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두 사람은 망명을 결심했다. 김 고문은 책에서 “그 후 내가 황장엽 비서의 정치망명을 성사시키기 위해 진행했던 많은 비밀공작들은 현재까지도 진행형에 있는 많은 이유와 사정들 때문에 아직은 공개할 수가 없어서 생략하려 한다”고 적었다.
그는 또 1997년 2월 망명 때 김영삼 대통령은 친서를 보내 황장엽을 장관급으로, 자신은 차관급 예우를 해주고 북한 민주화 활동을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지켜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특히 황장엽은 생전 김대중 정부의 국가정보원을 ‘적’이라고 지칭했고, 국정원이 자신을 살해할 것이란 위기감에 미국 망명까지 고려했다고 밝혔다.
회고록에는 이어 김일성이 1988년 군수공장을 시찰하면서 교시한 내용에 “내가 박정희에게 속았다. 박정희는 7·4 공동성명에 도장을 찍자마자 ‘미군이 남조선에 주둔해 있는 이상 우리가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경제성장의 길로 나갔다”고 분개했다는 내용도 소개돼 있다.
전두환 대통령과의 비사와 관련해서는 김정일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날벼락을 맞았다는 일화를 소개됐다. 1984년 북한적십자회가 서울·경기 지역의 폭우로 생긴 남한 수재민에게 쌀 5만 석, 시멘트 10만t 등을 보내겠다고 제안하면서 남한 정부가 이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는데, 예상을 뒤엎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김정일이 개탄했다는 내용이 수록돼 있다.
김정일은 당시 비공개회의에서 “전두환이 그걸 덥석 받아들일 줄 몰랐다”며 “그때부터 (북한)경제가 허리를 펴지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1976년 8월18일 발생한 판문점 도끼사건에 대해서도 밝혔다. 당시 북한정권은 즉시 이를 ‘미국이 제2의 조선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감행한 어중한 군사도발행위’라고 규탄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북한 당국은 준전시상태 선포, 전시동원체제로 전환 명령을 하달했다고 한다.
판문점 도끼사건이 일어나자 당중앙위원회와 인민군대 책임일꾼들은 “이번 기회에 쭉 밀고 내려가서 남조선을 통일하자고 김일성께 간곡하게 제기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일성이 “우리 후방인 중국의 인민대회당 안에서 총소리가 울리고 있는 조건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해 전쟁이 일어나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결국 훗날 판문점 도끼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김정일이었다고 책은 밝히고 있다.
김 고문은 이 책 머리말에서 회고록과 관련 “나는 북한관련 연구책자, 회고록, 체험기 등이 넘쳐나는 작금의 상황을 고려해서 김일성 족속, 특히 김일성과 김정일 관련 비공개 사료들을 많이 넣는 방향으로 회고록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아직도 밝히지 못한 것이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 ⓒ뉴스타운
김 고문은 이 회고록을 “유고를 남기는 심정으로 썼다”고 했다. 그렇다면 김일성과 김정일이 행한 5.18 광주사태의 진실을 여전히 말 못하고 있음도 밝혀야 한다.
그는 북한이 매년 기념하는 5.18, 또 탈북자들이 증언한 5.18의 실체에 대해 여전히 함구하고 있음이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 책 어디에도 5.18과 관련한 대목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남한으로 망명한 황장엽과 함게 1998년 7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기 때문이다.
▲ 김덕홍 : 북한 통일전선부에서는 분기에 한 번씩 강연을 하는데 광주문제를 자기네들이 한 것으로 이야기 합니다.
▲ 황장엽 : 북한 내부에서 대남사업 내용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상식화돼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생활수준이 높아가는 한국에서 왜 데모나 운동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모두 북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남정책의 두 가지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는 남로당때와 같이 조직을 노출시키지 말라는 것. 그래서 지하당을 이중 삼중으로 만들어 누가 지도하는지 모르게 합니다. 둘째, 노동자나 군인보다는 학생들 속으로 들어가라는 겁니다.
▲ 김덕홍 : 김일성종합대학 옆에 3호청사가 있습니다. 광주운동 이후에 3호청사 사람들이 표창을 많이 받았습니다.
▲ 황장엽 : 동생, 그런 얘기 했다가 또 혼이 나려고 그래?
▲ 김덕홍 : 형님, 우리가 이런 얘기 하자고 남한에 온 것 아닙니까. 여기 남한에 와서 꼭 하고 싶은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3호청사에 소속돼 있던 사람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후 일제히 훈장을 받았습니다. 내 친구들이 그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들도 광주민주화 운동 후에 훈장을 탔다고 축하 술을 함께 마시면서 그들에게 직접 들은 겁니다.
이제 김덕홍 고문은 회고록에 이어 마지막 증언으로 광주 5.18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한다. 그가 앞으로 밝힐 역사적 증언에 많은 국민들의 관심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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