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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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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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에 대한 비판과 논란을 서술한 문서이다.

목차 [숨기기]
1비판
1.1대북정책과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
1.2한일어업협정에 대한 비판
1.3임기중 정치적인 행보에 대한 비판
1.4임기중 IMF사태 처리과정에 대한 비판
1.5기타 비판
2논란과 의혹
2.1지역감정 조장 논란
2.21992년 대선 당시 후보연설에서 유권자에 대한 비판
2.3사생아 존재 여부에 대한 의혹
2.3.1관계자들의 반응
2.4비자금 의혹
2.5성씨에 대한 논란
2.6노벨상 로비설
2.6.1김기삼의 노벨상 로비설 의혹제기
2.6.2김기삼의 의견에 대한 비판
2.7병역 논란
2.8교통사고 관련 의혹
2.9사제폭발물 사건 관련 의혹
3각주
비판[편집]

먼저 후보 단일화 실패와 정계 은퇴 번복에 대한 비판이 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직선제 개헌을 이뤄냈으나, 후보 단일화 실패로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적 기대를 망쳐 17년만에 처음으로 직선제 개헌이 실시된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당선된 것에 대한 비판이 있다.
대북정책과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편집]

일각에서는 햇볕정책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대북 원조는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발발로 인해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북측에 5억달러가 송금된 대북 송금 사건에 대해서도 현대의 대북 7대 사업권 구입을 위한 송금액 중 일부가 정상 회담의 대가로 북측에 현금이 건네진 것으로 밝혀져 햇볕정책에 투명성이 부족했다는 주장이 있다.[1]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막바지에 다다랐던 6월 29일 발발한 제2연평해전에 대한 처우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제2연평해전이 발발했음에도 국가안전보장회의를 4시간 30분여만에 여는 등의 늦장 대응을 했다.[2] 발발 다음날인 30일엔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일본 사이타마로 출국하여 결승전 경기를 관람했지만 부상당한 해군들이 입원해 있던 국군수도병원은 박지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만을 보냈을뿐 직접 방문하지는 않았다. 교전 이틀 후 국군수도병원에서 합동영결식이 열렸을때조차 김대중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으며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등 내각과 군의 핵심 인사들마저 참석하지 않았다. 이러한 까닭에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제2연평해전을 ‘잊혀진 전쟁’으로 부르며 당시 김대중 정권의 처우에 분노하고 있다. 이러한 김대중 정부의 행보에 대해선 당시 남북관계의 원만한 유지를 위해서 였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3]

사실 영결식에 고위 인사가 참석하지 않은 까닭은 다음과 같다. 당시 국방부 측의 해명과 총리실의 해명을 들여다보면 해군참모총장보다 상위의 직급이 참여하는 것은 관례상으로도, 의전상으로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총리 쪽은 출국한 대통령의 대리로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참석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뿐만 아니라, 국방부의 해명자료에 나타난대로 해군참모총장의 상급자인 국방장관은 사전조문을 갔으며, 총리를 포함한 다른 상급자들 또한 관례대로 사전조문을 했다.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전 조문으로 박지원 대통령비서실장을 대리로 보냈다. 7월 2일 돌아온후 국군수도병원에 있는 부상자들을 방문했고, 김 전대통령은 조문 행사에는 위와 같은 이유로(이전의 교전으로 인한 전사자 발생시에도 각 군 참모총장이 영결식을 주도하였고, 대통령이 참석한 경우는 없었다.)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승전 관람의 논쟁에서는, 당시 정부 내부 회의에선 이미 승리한 전투이고 추가 도발 징후가 없으며 폐막식 참가를 안하는 경우 외국에 불안감을 주고 대외 신임도가 하락할 터인데 이는 오히려 북한의 농간에 휘말리는 것이라는 보고가 나왔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 의견에 따랐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이를 두고 의도가 좋았든 말든 안보관을 흔들어 놓았을 뿐 득본 것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는 바, 이는 가치관에 따라 계속 대립할 수 밖에 없는 문제다. 다만 그동안 있었던 여러 국지 도발의 경우 여러 정권에서 알게 모르게 지나간 경우가 많으므로 김대중 정부에만 유독 안보관이 어쩌고 하는 것엔 좀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한일어업협정에 대한 비판[편집]

1998년 1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일본은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여 김대중 정부의 입장을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김대중 정부는 일본의 입장을 수용한 신 한일어업협정을 1998년 9월 25일 타결짓게 된다. 그러나 이 협정은 지금까지 수많은 논란과 비판을 낳고 있다.[4][5] 대표적으로 신한일어업협정으로 인해 발생된 한일간의 독도 영유권 문제를 꼽을 수 있다. 1999년 양국간 신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할 때 자원의 공동관리가 이루어지는 중간수역내에 독도가 포함되었고, 이 협정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에 법적인 근거를 부여하여 일본측 주장을 획기적으로 강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6]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인데도 이를 중간수역으로 설정하면서 일본의 독도강탈 시도를 그대로 받아 들였다는 주장이다. 뉴라이트 계열 인사인 제성호 교수는 “현재 한일어업협정은 영토 훼손의 우려가 포함돼 있고 특히 일본학자들에 독도가 다케시마라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며 이런 중간수역은 일종의 ‘분쟁수역’이라고 평했다.[7]

그러나 김대중 정권때 타결된 신한일어업협정의 문제가 되는 조항을 수용하게 만든 여건은 김영삼 정권이 조성했고 독도가 한일중간수역에 포함되어서 영유권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팽팽히 맞서고 있다. 김영삼은 1995년 11월 장쩌민 중국국가주석과 정상회담 후 가진 공동기자회견에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라는 발언을 하며 감정 일변도의 외교를 벌인 바 있다.[8] 일본이 이 발언에 대한 보복으로 1994년 발효된 유엔해양법협약을 근거로 새 어업협정을 주장하며 기존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는 것이 이 주장의 핵심이다. 1997년 6월 한일정상회담에서 정해진 시간 내에 협상을 종용하던 일본은 '적선영해기선'을 임의로 설정해서 이를 침범한 한국 어선을 나포했고 결국 1997년 10월에 김영삼 정부는 동해의 독도를 포함한 수역에 잠정조치수역을 설정하는 안에 동의하게 된다.[9] 지리한 협상 과정에서 일본은 독도주변수역을 제외하고 협정을 체결하려는 의사를 표하고[10] 김영삼 정부도 독도에 접안시설을 건립해 입지를 확고히 하려는 시도를 했다.[11] 그러나 결국 일본은 1998년 1월 IMF 사태와 정권교체로 인해 한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완전히 파기한다. 또한 독도가 한일중간수역에 들어갔으므로 신한일어업협정을 수정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최낙정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실효성이 없다”라고 일축한 바 있다.[12] 그는 “협상을 다시 한다고 해도 일본이 독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을 것이고, 또 다른 마찰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 “신 한일어업협정은 김영삼 정부 때부터 5년 간 진행되다 김대중 정부 들어 마무리 된 것”으로 “독도 영유권을 훼손했다고 보지도 않는다”라고 새 어업협정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8] 독도가 배타적 경제수역이 아닌 한일중간수역에 놓인 것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빌미를 준 것 아니냐는 질의에 대해선 “어업협정은 영토 영유권 문제와는 무관하다”, “신 한일어업협정 조문에서 이 협정은 영유권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고 밝히고 있고, 헌법재판소나 국제사법재판소 역시 어업협정은 어업 문제에만 국한됨을 판시했다”라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이루어진 1965년 한일협정독도밀약이 독도가 우리땅임을 사실상 포기한 것”이라고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덧붙였다.[13]
임기중 정치적인 행보에 대한 비판[편집]

김대중은 자유민주연합김종필과의 연정을 통해서 집권했다. 그러나 곧 이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원내 1당을 차지했고 연정상대였던 자유민주연합은 17석으로 원내교섭단체 요건인 20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김대중이 총재(1995.09~2001.11)였던 여당은 의회 과반수를 점유하지 못하자 자유민주연합에 의원 3명(배기선, 송석찬, 송영진)을 입당시키는 이른바 ‘의원 꿔주기’를 통해 원내과반수를 확보했다. 이 때문에 “의회 민주주의의 왜곡”, “정치후퇴”라는 비판을 받았다.[14] 해외에서까지 화재로 가십거리가 되기도 했다.[15] 이에 자유민주연합의 강창희 의원이 꿔주기에 반발하여 출당 당하게 되자 장재식 의원을 추가로 자민련에 입당시켜 끝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였다.[16] 김대중은 의원 꿔주기에 대한 비판에 대해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17] 그가 김종필 등과 연합한 것을 계기로 1960년대부터 그를 지지하던 최기일은 김대중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다.

집권기간 중 차남 김홍업과 3남 김홍걸이 뇌물수수죄로 구속되어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김홍업은 2003년 5월 기업체로부터 이권 청탁 명목으로 25억여 원을 받고, 정치자금 명목으로 22억여 원을 받은 후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김홍걸은 2001년 3월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관련 로비와 공사수주 로비 대가 등으로 36억 9,000여 만원을 뇌물로 받고 2억 2,000여 만원의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수감되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아·태평화재단 부이사장을 지낸 김홍업은 기업으로부터 금품을 받고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징역 2년이 확정돼 1년 6개월간 복역 중, 우울증 등의 증세로 형집행정지 결정을 받고 석방됐다. 김홍걸은 ‘최규선 게이트’와 관련해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청탁 등의 대가로 기업에서 금품을 받은 혐의로 2007년 8월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 등 집권기간 중 아들들이 비리혐의로 수감되어 청렴성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18] 국회의 정쟁과 파쟁을 김영삼, 김대중의 대리전 내지는 유산으로 보는 비판도 있다.[19]
임기중 IMF사태 처리과정에 대한 비판[편집]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고, IMF사태가 터졌던 1997년 12월 당시 한국의 실업률은 3.1%로 전년동월의 2.3%에 비해 무려 0.8%포인트나 높아져 있었고 4년6개월만의 최고치를 기록한 상태였고.[20] 서울지역의 노숙자도 97년 12월 IMF사태 초기 5백여명으로 전년도 200명비 폭증한 상태였고, 전국노숙자 숫자는 1200명, 5월 추청노숙자는 5000명으로 폭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21] 또한 IMF는 예상보다 가혹하게 구조 조정 요구를 해왔으며, 2%대의 저성장을 권고했고, 일부 부실 종금사와 은행을 파산시키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22] 김대중당선자가 98년 초 신년사에서 민주적 시장경제 정착과, IMF의 협약이행, 사회경제적 안정 등의 목표를 발표했다.[23] IMF 요구에 의한 구조조정의 본격화로 실업률은 98년 5월에 7%로 폭등하였다. [24] 1998년 6월 29일,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대동은행, 동화은행, 동남은행, 경기은행, 충청은행에 퇴출명령을 내려 5개 은행들이 제거당한다.[25] 공무원도 98년 당시 5만명 감축계획을 발표하여 실행에 들어갔다.[26]

실업률은 99년 2월, 10%에 달해 사상 최악의 수준까지 폭등했지만 [27] 이후 99년 10월엔 4.6%까지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이를 반갑고 다행한 현상으로 여겼지만 자만하지 말고 고용구조개선에 관심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28]

김대중은 1997년 12월 외환유동성 위기 속에서 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한국경제가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는 와중에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3년만인 2000년 12월4일 김대중 대통령이 IMF 외환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공식 선언했으며, 2001년 8월23일에는 IMF 구제금융 자금 총 195억 달러를 완전히 상환하고, IMF 관리체제를 공식 '졸업'했다. 이는 사상 유례없는 조기 위기 극복으로 세계의 주목을 끌었으며, 이는 김대중 대통령의 큰 업적으로 기록됐다. [29]

IMF가 강도 높은 기업 구조조정 실시를 요구하게 되면서 많은 기업들에 공적자금이 투입됐고 그중 하나은행, 국민은행 등 대형 은행들만이 공적자금 투입으로 인해 부도를 면할 수 있었다.[30]그러나 유수의 국내 은행들이 미국계 금융기관 등에 헐값으로 매각되었다.[31]

이런 미국계 금융기관들은 다시 몇 배의 차익을 남기고 다른 외국계 은행에 되팔아 결과적으로 국내 금융시장에서 미국자본의 종속화를 만들었고, 일부 대형은행만 살아남고 지방 중소형 은행들(강원은행 충청은행 경기은행)에는 강제해체 명령을 내려 지방경제를 파탄시키고[32] 대형은행들만 살렸으며 그 과정에서 외국 투기세력들의 배를 불려줘 "은행권 말살"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논란의 정점에는 98년 제일은행의 뉴브리지캐피탈 매각 건이 있었다.[31] 1999년 뉴브리지캐피탈은 8조 4,00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제일은행의 지분 48.56%를 5000억원에 구입하여 이를 5년 뒤인 2004년스탠다드차타드 은행에 3조 4,000억에 되팔아 1조 5000억의 차익을 남기게 된다. 1999년 매각 당시 김대중 정부는 지분 70% 구입 의사를 보였던 HSBC의 제안을 거절하고 지분 48.56%를 5000억원에 구입하겠다는 뉴브리지캐피탈의 제안에 맞추기 위해 대규모 유상 감자와 액면 병합을 거쳐 제일은행의 총 자본금을 4조 4806억원에서 9806억원으로 줄였으며 매각 후 3년 내 발생하는 모든 부실 여신에 손실이 있을 경우 정부가 손실을 보전해 주는 풋백 옵션까지 추가하였다.[33]

IMF 사태로 위축된 국내 경기 증진을 위한 정책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국내 경기 증진을 위해 의욕적으로 실시한 정책으로는 코스닥벤처산업육성 정책과 신용카드 발급 기준 완화로 대표되는 소비 증진 정책이 있는데, 먼저 벤처산업 육성 정책의 경우 신성장동력을 키운다는 명분하에 무차별적인 기업 지원 정책 남발 및 1995년 이래로 확산된 미국의 닷컴 버블과 맞물리며 벤처기업에 과도하게 투자금이 몰려 과열 양상을 띄게 된다.[34] 벤처 기업과 연루된 정경유착 비리도 발생했다. 윤태식 게이트, 진승현 게이트가 대표적인 사건으로 신성장동력을 찾는다는 당초 명분과 크게 동떨어진 양상을 보이던 벤처업계는 결국 2003년 새롬기술 사태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35]일련의 사태들로 인해 IT기업들이 주류를 이뤘던 벤처기업들은 시장의 신뢰를 상실하고 활로가 막혀 결과적으로 국내 IT산업을 파괴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코스닥의 경우 2000년 3월, 294포인트까지 폭등했던 코스닥 지수가 불과 9개월만에 무려 80%가까이 폭락하여 120조원을 허공에 날린 사태가 벌어졌다.[36] 2000년 하반기 IT붕괴사태가 시작되자 주식시장과 코스닥은 거의 파괴되었고 그 이후에도 코스닥은 2001년에 50포인트선을 밑돌게 된다. 투자자들은 2000년 하반기의 IT붕괴사태와 "진승현 게이트"[37] 로 피눈물을 흘리게 되었다.[38]

소비 증진 정책의 핵심이 되었던 신용카드 발급기준 완화 정책은 1999년 2월 카드사의 현금대출 비중 50% 제한을 폐지하고 5월엔 신용카드의 현금 서비스 한도인 70만원을 전격적으로 폐지하면서 실시되었다. 2001년엔 카드사의 영업자유권 침해를 들어 길거리 회원모집을 허용하는 등 신용카드 발급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 내수 경기 진작을 도모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는 사람들이 대거 신용카드를 사용하게 되면서 신용불량자가 속출했고 카드사의 재정상황도 악화되어 LG카드가 부도 위기에 몰리는 등 카드 대란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결국 2003년에 다시 카드사의 현금대출 비중을 50%로 제한하는 등의 규제 정책을 실시하여 수습에 나섰지만 많은 시민들의 가정들이 파탄난 뒤의 일이었다.[39]
기타 비판[편집]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용납 못한다는 비판이 있다. “누가 그에게 비판적인 말을 하면 그는 얼굴에 불쾌감을 나타낼 것이다. 우호적인 충고도 작별의 키스임을 그는 분명히 했다”라는 것이다.[40]“사람들을 이용하고는 쓸모가 없으면 저버린다”[41] 는 비판도 있다.

한때 그를 지지했던 최기일은 “미국에 왔을 때 김대중은 이근팔과 강대양 형제와 악수조차 하지 않았다. 김대중을 계속 지지한 교포를 무시하고 그는 미국 사람들만 자기의 파티에 초대했다”라고 말했다.[42] 대통령으로 당선 이후 자신이 미국에 있을 때 도와주던 사람들을 외면한 것을 지적하였다.

1999년 12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소학관출판사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진시황오다 노부나가를 "성공한 지도자"라고 칭송해 논란이 일었다.[43] 한나라당은 "독재자를 칭송한다"며 즉각 비판했고 당시 한나라당 정태영 부대변인은 "국가원수의 역사관이 이렇다면 걱정을 넘어서 분노할 일이라며 자라나는 2세들의 교육에 염려스럽다"며 강력 비판했다.[44]
논란과 의혹[편집]
지역감정 조장 논란[편집]
대한민국의 지역 감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69년 당시 신민당과 3선 개헌 반대 범투위 소속으로 유세에 참여한 김대중은 다른 연사들과 더불어 "영남 지방은 고속도로까지 개설해주는 정부가 호남선은 복선마저 제대로 않고 푸대접하고 있다."며 경상도 정권 타도를 주장한 바 있다.[45] 여기에 1987년 야권 후보 단일화 합의를 깨고 통일민주당을 탈당,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것도 지역감정에 기댄 정치적 행보라는 비판이 있다. 당시 단일화 합의를 했던 김영삼은 “지역 감정의 원인은 김대중이 제공했다”라고 최근까지도 주장하고 있다.[46] 또한 87년 대선에 평화민주당 김대중은 4자 필승론을 주장하며 대선에 출마하였는데 이는 노태우(TK 대구경북), 김영삼(PK 부산경남), 김종필(충청), 김대중(호남)이 각자 그 지역을 가져가면 수도권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후보인 자신이 당선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대선 결과 수도권에서 노태우, 김영삼 후보에 이어 김대중 후보가 3위를 차지하였고 전국 투표수에서도 3위를 차지하여 4자 필승론은 무위로 끝났다.[47][48]

정치학계 일각에서는 근대 이전의 전통 사회에선 지역주의란 존재하지 않았으나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 후보의 출신지가 호남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지역 감정을 부추겼다고 한다.[49] 1971년 대선에서는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건을 사지 않기로 했다”는 식의 흑색 선전이 영남 지역에 나돌았다.[50] 1992년 대선을 앞둔 12월 11일 오전 7시 부산 초원복집에서 부산 지역 유지들이 모여서 민주자유당 후보였던 김영삼을 당선시키기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김대중 등 야당 후보들을 비방하는 내용을 유포시키자는 등 관권 선거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51]
1992년 대선 당시 후보연설에서 유권자에 대한 비판[편집]

1992년 대선에서 민주당김대중후보는 농촌 유권자의 친 민자당(현재 한나라당) 친 노태우성향을 비판하며 유권자의 책임을 지적했다. 이로 인해 그의 발언에 수긍하지 않는 청중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미 30년전인 1992년 대선때부터 계급배반투표의 논리가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52] [53]
사생아 존재 여부에 대한 의혹[편집]

2005년 4월 19일, SBS의 시사 프로그램인 ‘뉴스추적’은 김대중의 ‘숨겨진 딸’이라고 주장하는 30대 여성에 대해 특종 보도했다. 이 여성은 제작진과의 인터뷰를 통해 “어머니는 ‘대하’라는 고급 한정식 집에서 당시 김대중 신민당 국회의원을 처음 만났다”며 “자신은 7-8세 무렵부터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김 전 대통령의 동교동 사저를 찾아가 생활비를 타오곤 했으며 조풍언을 통해 아파트를 받았다”라고 증언했다.[54] 또한 제작진은 진승현 게이트도 이 여성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를 제기하며 진승현 측근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국정원 일부 관계자들이 대통령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이른바 ‘특수사업’을 진행하면서 진승현씨에게 3억 5,000만원을 받았으며, 이 돈의 전액이 김 전 대통령의 딸과 그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모녀의 입을 막기 위해 김씨 모녀에게 전해졌다고 주장했다.

제작진은 끝으로 “특수 사업에 사용됐다는 돈이 김씨에게 전달된 구체적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며 “검찰이 이 사건을 원점에서 재수사할 것을 촉구한다”라고 밝혔다. 2001년 진승현 게이트를 수사했던 검찰 관계자는 “당시 국정원의 정성홍씨는 진씨로부터 ‘현금’을 받았는데 무슨 계좌추적이 필요하느냐”며 “당시 정씨는 돈을 부 운영비 등으로 썼다고 진술했다”라고 말했다. 국정원측은 예산 항목에 특수사업이라는 항목 자체가 없으며 정 전 과장 등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부인했다. 어떻게 독재 정권하에 감춰질 수 있었냐는 의문에 대해서도 당시 중앙정보부 관련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의 사생활 관련 보고를 하면 ‘남자의 아랫도리 부분은 말하지마’라며 일축했다. 이후 대통령들도 이상하게 그런 문제에 대해 관대했다”라고 설명했다.[54]
관계자들의 반응[편집]

이듬해인 2006년 4월 16일, 김대중의 숨겨진 딸로 알려진 김 모씨는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김대중의 사생아라는 주장을 부인했다. 김씨는 김 전 대통령의 숨겨진 딸이라는 얘기를 듣고 자랐고, 지난 2000년까지 김 전 대통령측으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어머니가 자신에게 돈을 받아오게 시켰다고 한다. 그는 “김 전 대통령 집에 가면 아주머니(이희호 여사)가 ‘너 우리집 자식 아닌데 왜 또 왔니? 제발 오지마’라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어린 꼬마였던 나에게 이런 일을 시킨 어머니가 지독하다고 생각한다”며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숨기지 않았다. .

김씨는 인터뷰 내내 “김 전 대통령이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그는 “내가 (김 전 대통령과)닮았느냐”라고 되묻기도 했다. “언론에서 내 얘기는 안 하고, 이모 얘기만 전했다”라면서 언론에 대한 불신도 내비쳤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놀랍게도 박정희 정권 당시 고위 인사 A씨의 이름을 꺼냈다. 김씨는 직접 메모지에 그의 이름을 적으면서 “이 사람이 의심스럽다”라고 했다. 그는 “(이 사람이) 어머니에게 (자신을 DJ딸이라고 주장하라고)시켰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어머니와 함께 A씨 집에 자주 놀러다녔다”라고 말했다. 그는 “A씨는 악랄한 사람”이라며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냐”라고 반문했다. 그는 “30년 동안 어머니 등에게 속아 살아왔다”라며 지난 인생에 대한 회한을 드러냈다.[55]

‘뉴스추적’ 보도에 대해 김 전 대통령 쪽은 거듭되는 확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숨겨진 딸’이란 없다고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사실과 다르다”라고 밝히고 “국정원 부분은 방송에 나온 국정원 당사자들조차 모두 부인하지 않았느냐”라며 “그런데도 진승현씨 쪽의 일방적인 말만 듣고 마치 뭔가 있는 것처럼 보도하는 게 과연 정확하고 공정한 보도라고 할 수 있는지 유감”이라고 덧붙였다.[56] 정치권에서는 사생활에 관한 문제라는 점을 감안해 언급을 회피했으나 일부는 “이제 와서 그런 문제를 끄집어내는 게 도움이 되겠느냐”며 보도에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다.[57]
비자금 의혹[편집]

1995년, 노태우의 비자금이 폭로되자 김대중에게도 의혹의 눈길이 쏠렸다. 그때 그는 국민회의총재의 신분으로 중국을 방문하던 중이었다. 기자들과 만난 “귀국 후에 밝히려 했으나 언론에 터무니없는 일이 자꾸 보도돼 어쩔 수 없었다. 또 연희동측이나 여권이 화살을 나에게 돌리려 해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라며 노태우에게 20억 원의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분명히 20억 원 외에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처음에는 받지 않으려 했으나 아무 조건도 없으니 받으라고 했다”라고 밝혔다. 당시 대통령 김영삼은 김대중이 노태우의 돈 20억원을 받았다고 먼저 발표했으나, 지금까지도 금액이 20억인지 200억인지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김대중은 이와 관련 “김영삼 대통령 먼저 자신과 관련한 모든 정치자금 의혹을 명백히 밝혀야만 한다”며 “나는 20억 원을 받았지만 김대통령은 당시 노씨는 물론 각계로부터 엄청난 돈을 지원받았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여권과 일부 언론에서는 초점을 나에게 맞추고 김 대통령의 대선자금문제를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여권의 강삼재 등은 ‘20억+알파’를 밝히라고 요구하며 추가 수뢰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검찰은 '20억+알파'설도 김대중의 관련성은 부인했다.[58]

진로그룹 전 회장인 장진호는 2013년 월간조선의 박희석 기자와 가진 인터뷰를 통해 80년대 5공화국 시절 자신이 “전두환-김대중 간 거래의 보증인 역할을 하면서 10여 년간 주식과 정치자금을 DJ에게 전달했다”며 “규모는 500억~600억원”이라고 주장했다. 거래가 성사된 배경에 대해서는 "전두환 정권은 5공 초창기에 DJ를 사형시키려고 했지만 미국의 반대로 실패했기 때문에, DJ가 정치활동을 재개할 경우 광주 등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DJ의 발목을 잡을 장치가 필요했고, DJ도 살려면 모르는 척 잡혀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라고 설명했다. 장진호가 밝힌 바에 따르면 거래의 내용은 진로가 보유한 회사 주식의 절반을 담보로 제공하고 매년 일정액의 정치 자금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논의는 김대중이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인 1982년부터 시작됐고 주식과 돈이 전달되기 시작한 시점은 1984년으로, 정치 자금의 전달은 정계 입문을 희망하던 당시 상아탑학원 원장 임춘원이 담당하여 1992년까지 전달이 되었다고 한다. 김대중이 거래 내용을 인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임춘원이 "DJ와 의논하고 합의해서 진행하는 일이며, DJ가 너무 많이 요구해서 힘들지만, 내 선에서 줄이는 노력을 하고 있다" 라는 언질을 받았고 임춘원이 주선하여 우연을 가장해 조우하는 형식으로 김대중과 만났으며 이때 김대중은 '고맙다'며 사의를 표했다고 밝혔다. 김대중에게 정치 자금이 제공됐는지 확인했냐는 질문엔 "임춘원이 당시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지만 비자금 제공을 담당한 후 거액의 공천 헌금을 내고 전국구 2번을 받았다"라고 주장하며 간접적으로나마 확인을 거쳤다는 답변을 했다. 이 거래의 대가로 장진호는 5공화국 동안 진로의 경영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동교기업·한림장학회 진로 주식 인수 검토안’에 따르면 당시 진로는 비계열사 우전석유, 우신공영, 개인 명의 등을 통해 동교기업과 한림장학회 보유 지분을 매입한 뒤 최종적으로 진로문화재단에 출연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인터뷰를 한 박희석 기자는 장진호에 대해 갑자기 김대중 비자금에 대해 밝히겠다는 이유가 탐탁지 않았고, '과거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장진호는 호감이 가는 인물이 아니었다'라고 평가했다. 장진호는 당시 야당이었던 김대중에게는 이정도로 전달했지만 노태우에게는 100억, 김영삼에게는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회창에게도 지급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회창의 동생이 관련된 '세풍 사건'에 1억원, 이회창의 지지율을 올리기 위한 '총풍 사건'에 공작금 7천만원을 지급한 것으로 밝혀졌다.[59]
성씨에 대한 논란[편집]

김대중의 성씨가 김씨가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김대중의 성씨에 대한 논란은 1980년 5월 경주에서 열린 김유신 장군 추모제 김산대제(金山大祭)에서 ‘윤대중은 물러가라’라는 현수막이 걸리고 유인물이 배포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도 “김대중씨는 대통령은 고사하고 자기 성씨나 찾도록 하라”라는 발언을 하는 등 김대중의 성씨에 대한 비화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된다. 김대중 가계에 대한 내막은 이후 김대중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겠다는 일념하에 김대중의 가계 조사를 시작한 손창식의 증언과 제6공화국 시절 안기부가 작성한 김대중 조사 자료 비밀 문건을 통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손창식은 김대중의 본래 성씨가 제갈(諸葛)씨라고 주장했는데, 이같은 내용은 1997년 대선 당시 손창식이 편집인으로 지내던 《한길소식지》에 보도되어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였던 김대중 측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1년과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손창식은 항소를 포기하였다.[60] 한편 안기부 비밀 문건에선 마을 주민들이 김대중의 실제 아버지가 윤(尹)모 씨라고 증언한 것을 들며 출생 혈통이 불분명하다고 기록되어 있다.[61] 이러한 성씨 논란에 대해 김대중 본인은 생전에 발간된 자신의 저서 《나의 삶 나의 길》을 통해 호적이 불분명한 것은 당시 행정이 미흡했던 것이고 모친의 재가로 인한 성씨 문제에 대해선 외할아버지가 재가를 인정한 만큼 구술하기 어렵다고 해명했지만 2010년 사망 이후 발간된 자서전인《김대중 자서전》에선 '내 어머니는 평생 작은댁으로 사셨다'라고 고백하며 서자인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
노벨상 로비설[편집]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비서였던 최규선이 노벨상 수상을 위해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이 뉴스위크 한국판에 보도되면서 ‘노벨상 로비설’이 제기되었다. 김대중 정부 당시 국정원장을 지냈던 이종찬도 노벨상 수상 자체를 도우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62] 하지만 노벨위원회의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은 노벨상 로비설에 대해 “매우 무례하며, 위원회의 심사 절차 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김대중 측이 아닌 오히려 김대중의 정치적 반대자 등으로부터 상을 주면 안된다는 로비가 있었으며, 반대자들의 편지가 왔다”라고 말했다. 가이르 룬데슈타트 노벨위 사무국장은 2001년 8월 방한, KBS와의 대담에서 “노벨상은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살 수 없다”라고 로비설을 일축했다.[63]

동티모르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조제 하무스 오르타가 로비설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 월간조선 기자에게 “멍청한 소리 하지 말라고 하더라"라고 전하기도 했다.[64] 한국일보문화일보는 노벨상 로비설에 대해서 “국가적으로 환영하고 축하해야 할 일을 노벨상 반납까지 운운하며 로비설을 흘리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65][66]
김기삼의 노벨상 로비설 의혹제기[편집]

일요서울은 김대중 정부 청와대와 국정원이 1998년부터 2000년 중반까지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을 위해 공작을 했다는 김기삼의 주장을 보도했다. 일요서울은 김기삼이 노벨상 로비설을 내부고발을 한 일로 인해서 미국 법원에 의해 정치적 망명이 허용된 상태라고 덧붙였다. [67][68][69][70]

하지만 일요서울은 "확인 결과 김기삼에 대한 미국법원의 망명 허용은 DJ정부의 비리 의혹을 인정한 것과는 별도의 사안인 것으로 밝혀졌고 위 김기삼의 주장은 지금까지도 명확한 근거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며 정정보도문을 발표했다. 또한 일요서울은 DJ노벨상 공작은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개인적 주장이며 앞서 보도됐던 김기삼의 기사는 잘못된 것으로 확인됐다며 정정보도 한다고 했다.[71]
김기삼의 의견에 대한 비판[편집]

일각에서 제기된 노벨상 로비설에 대해서 노벨재단은 "노벨상위원회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같은 로비가 있더라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72] 노벨재단은 또한 노벨상 로비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 한국으로부터 로비가 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김대중 정부로부터의 로비가 아니었다.
정치적 반대자 등으로부터 상을 주면 안된다는 로비가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노벨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73]

김기삼의 기자회견 후 일각에서는 “노벨상 수상을 위한 일종의 노력일뿐 로비라고 보기 어렵다”라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또 김기삼이 공개한 문건이 실제 국정원 친전인지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야권의 한 인사는 “김 전 대통령이 노벨상 수상을 위해 반역을 했다고 김씨는 주장하지만 반역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찾기 어렵다”라며 “국가적인 차원에서 노벨상 수상을 위해 이정도의 활동은 어느 나라마다 하는 것이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 로비활동은 더 치밀하고 규모가 크다”라고 말했다. 전직 국정원 고위 간부 출신인 한 인사도 “김씨가 공개한 문건만 보면 노벨상 수상을 위한 반역이 있었다는 김씨의 주장은 오버센스”라며 “로비를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반역행위가 있었는지에 대한 입증이 턱없이 부족하다”라고 지적했다.[74]

김기삼은 추천을 받기 위해 공작을 벌였다고 주장했지만 김대중은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 이전부터 국내외 다양한 인사들로부터 노벨 평화상 후보에 15번 추천되었으며,[75] 2000년 실제로 김대중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한 사람은 김기삼의 문건에서 공작의 대상으로 이름이 오른 동티모르의 오르타가 아니라 노르웨이의 솔하임 전 환경부 장관이다.[76] 또한 역대 노벨상 역사에서 로비로 수상했다는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김기삼의 의견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노벨재단에서 50년간 일해온 유일한 동양인 한영우 노벨재단 특임고문은 "노르웨이 정계에서는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 운동을 했을 때부터 관심이 있었지요. 옥중(獄中)에 있을 때는 노르웨이 정부가 한국 군사정부에 석방을 탄원하기도 했어요"라면서 "당시 김한정 청와대 부속실장이 나서 DJ 수상 로비를 했다고 하는데 청와대와 외교관들이 나서 로비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됐어요"라며 로비설을 일축했다.[77] 박경서 전 인권대사는 "노벨상은 로비를 할수록 수상이 멀어지며 금전의 개입은 어불성설이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미 1987년에 강력한 노벨 평화상 후보였다"라고 말했다.[78]
병역 논란[편집]

김대중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에 20대를 보냈기 때문에 군 복무를 하지 않은 것이 크게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7년 대선을 앞두고 6·25전쟁 동안 군 복무를 기피했다는 신한국당 측의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김대중은 TV 토론회에서 출연하여, 6·25전쟁 당시 병역법에 따르면 1930년생부터 징병이 됐기 때문에, 1925년생인 자신은 소집영장조차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79]

이어 해군 경비대 소속 목포해상방위대 전남지구 부대장을 맡아 당시 자신의 해운회사에서 보유하고 있던 선박을 동원해 참전했다고 증언했다.[80] 그러나 신한국당은 목포해상방위대가 유령 군부대라고 주장했고, 국민회의 측에선 해상방위대는 1950년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호와 국방군사연구소에서 발행한 국방사연표에 분명히 근거가 있다고 반박하는 등 양측의 공방이 이어졌다.[81]이후 국민회의 천용택 의원이 미국에 거주중인 해병대 예비역 준장 송인명을 만나 그의 증언록과 직접 쓴 증명서 등을 가져와 공개하고,[82] 송인명은 전 목포경비부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때 군과 경찰만으로 공산세력의 잔당소탕과 안녕질서 유지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목포시내 청년단과 여성청년단 등 애국단체들을 모두 동원해 작전을 보조하게 하였으며, 특히 해상작전이 중요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당시 지역유지 오재균에게 지시, 해상방위대를 창설해 김대중에게 부대장을 맡겼다고 해명했다.[83]

국방부천용택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해상방위대는 해군목포경비부 연혁사 제39쪽의 기록으로 봐 목포 지역에서 약 1년간(50-51년) 존속됐던 보조기관으로 추정된다.[84] 국방부는 천용택 국민회의 의원에게 "해군 목포경비부 연혁사 39쪽에 '당 경비부 내 보조기관인 해상방위대를 총참모장의 명으로 완전해체하고 건물 일체를 인수함'이라는 기록이 51년 5월 3일자로 나온다"라는 내용의 답변서를 보냈다.[85]

이 논란이 뜨거워지자 한 네티즌이 국방부에 김대중의 병역확인을 요청했다. 이에 해군본부에서는 해당 네티즌에게 다음과 같은 답변이 왔다.
해군역사기록관리단


수신
(경유)
제목 국민신문고 민원회신


1. 해군발전에 관심을 가져주신 귀하께 감사드립니다.

2. '故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해군복무 사실여부'에 대한 귀하의 민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드립니다.
가. 민원내용 : 김대중 전 대통령님이 정말로 목포 해군경비부에서 복무한 것이 사실인지 알고 싶습니다.

나. 답 변 : 해군역사 및 관련 자료상에 故 김대중 전(前) 대통령이 해군 목포경비부에서 복무하였다는 기록이 없어 복무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3. 본 민원과 관련하여 추가로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신 경우 해군역사기록관리단에게 전화주시면 성심껏 답변 드리겠습니다. 끝.


해군역사기록관리단장.
???님 귀하
먼저 민원인과 민원인의 가정에 행운이 가득하시길 기원 드리며, 민원인께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병역사항이 궁금하여 민원을 제기하셨습니다.우리 해군은 1945.11.11 해방병단을 결성한 이후 1948.9.5 대한민국 해군으로 정식 발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질문하신 김대중 전 대통령 께서는 해군에 입대하여 복무하신 적은 없습니다. 또한 민원인께서 보내주신 증명서는 해군에서 작성된 문서는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목포해상방위대와 관련하여서는 해군역사기록관리단 확인결과 보관된 자료가 없어 부대의 창설시기나 규모, 지휘관, 기타 등의 확인이 불가하였습니다. 다시한번 민원인과 민원인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드리며, 추가 문의사항이 있으신 경우 042-553-6733으로 전화주시면 성심성의껏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10년 5월 28일

5급 박남식

[86] 바로 위의 주석에 링크된 뉴스 기사는 1997년도에 발행된 신문으로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기 직전의 일이며 그 아래의 증명서는 김대중이 퇴임한 이후 해군본부에서 직접 작성한 문건이다. 해군본부측은 김대중이 해군으로 복무했다는 사실은 물론 김대중이 복무한 부대인 목포해상방위대라는 부대에 대한 편제조차 기록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담당자는 해군본부 군무원 5급 박남식이다.

일각에서는 이에 반박하기 위해 해군소령 정복을 입은 김대중의 사진을 개재하기도 했으나 얼굴을 오려서 붙인 조작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김대중이 해군으로 복무했다는 증명서류에는 그냥 예비역 해병대 준장의 명의로 기록만 되어있을 뿐인 반면 김대중이 해군으로 복무한 적이 없다는 쪽에서는 정식 해군본부 공문을 증명서류로 내세우고 있다.
교통사고 관련 의혹[편집]

김대중은 총선 직전인 1971년 5월, 영등포 지역 지원유세를 위해 서울로 가던 도중 전남 무안군 국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으며 그 후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당시의 이 교통사고에 대해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훗날 그의 자서전과 평전을 통해 두고두고 회자되었고 사후 공개된 그의 2009년 6월 2일의 일기장에서도 '박 정권의 살해음모로 트럭에 치였다'라고 기록해놓은 것이 확인되는 등 김대중은 교통사고를 명백한 당시 정권의 살해 음모로 지목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1985년 조갑제 월간조선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교통사고가 암살 음모라는 증거로 교통사고가 났던 트럭의 소유주가 공화당 전국구 의원이라는 것과 트럭 운전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며 사건을 처음 담당한 검사가 갑자기 교체된 후 단순 교통사고로 결론지어졌다는 3가지 이유를 제시했는데, 이는 언론의 취재 결과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87]

당시 사고가 났던 트럭은 범한화물 소속으로, 범한화물은 당시 공화당 전국구의원 후보였던 홍승만의 아들 홍국태의 소유였으므로 공화당 국회의원 소유가 아니었다. 사고를 냈던 트럭 운전사 권모씨는 1985년, 1998년의 취재기사를 통해 생존하여 부산에서 버스 운전사로 일하다 재혼하여 야간 경비직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는 당시 교통사고는 김대중이 타고 있던 차량이 교통법규를 어겨 발생한 사고라고 증언했다. 마지막으로 사건의 담당검사인 허경만은 중간에 교체되는 일 없이 당시의 사고 수사를 종결될 때까지 담당했으며 본인도 당시 수사에 어떠한 외압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허경만은 1980년에 김대중 변호인단에 합류, 야당 국회의원을 역임하다 1999년엔 전남도지사에 취임하였다.[88][89][90]

문제는 김대중이 오른쪽 다리를 절다가 어떨 때는 왼쪽 다리를 저는 등 도대체 다리를 다친 것이 맞는지 일관성이 없는 증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사제폭발물 사건 관련 의혹[편집]

대선을 앞두고 후보자 유세가 한창이던 1971년 1월 27일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 마당에서 사제 폭발물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91] 경찰이 폭발물 잔해를 분석한 결과 완구용 딱총 화약을 담배갑 은박지로 싸서 도화선을 연결해 제작한 사제 폭발물로 생명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수준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정치테러가 발생한 것으로 받아들인 야당의 분위기는 급속히 얼어붙었고 국회는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한다. 그리고 사건 발생 14일째인 2월 10일, 경찰은 가정부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김대중의 조카인 당시 15세의 김홍준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총포화약류 단속법 위반으로 구속했다.[92] 김홍준은 처음엔 명절을 맞이해 장난으로 꾸민 일이라며 범행을 자백했으나 구속 하루만인 2월 11일엔 범행 사실을 부인하며 감기몸살을 호소해 입원하게 된다.[93] 경찰 역시 폭발물을 감싼 담배갑 은박지가 청소년이 구하기 힘든 영국제 로스만스에서 나온 것이고 도화선은 군수품이라는 이유로 김홍준의 우발적인 장난이 아닌 배후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김홍준은 15일 법원의 구속적부심 결과 검찰의 구속 소명 자료 미흡을 이유로 석방되었다.[94] 하루 뒤인 16일 경찰이 동교동에서 배출된 쓰레기가 집하된 구로동 오물처리장에서 로스만스 담배갑을 발견하긴 했으나, 이 오물처리장이 마포구 내 17개동 33만여 주민의 쓰레기를 가져다 땅을 메우는 곳이고 사건 전후에 배출된 동교동 42가구의 쓰레기는 다섯 군데가 넘는 곳에 40여차례에 걸쳐 나눠서 버려졌기 때문에 찾아낸 담배갑이 폭발물에 쓰인 담배갑이라고 할만한 근거가 없었다.[95] 이 사건은 결국 미제로 남게 되었는데, 당시 유세 기간동안 김대중 후보를 비롯한 신민당 측에선 정일형 선거대책본부장 집 화재사건과 김상현 의원 집에 협박편지가 배달된 사건과 더불어 명백한 박정희 정권의 정치테러라고 주장했다.[96]
각주[편집]

이동↑ 특검, 5억달러 정상회담 대가 결론 YTN 2003.06.25
이동↑ "침몰원인, 어떤 경우든 단호히 대응" 조선일보 2010.04.08
이동↑ [제복이 존경받는 사회]제2연평해전 6인의 용사도 잊지 않겠습니다 동아일보 2010.05.24
이동↑ 일본,한일 어업협정 일방 파기 선언-정부 강력 대응 MBC 1998.01.23
이동↑ 韓-日 새 어업협정 타결
이동↑ 한일 어업협정, 그 치명적인 실수 《한겨레21》제608호
이동↑ 제성호 중앙大교수, 중간수역제도 폐기해야 경북매일 2007.07.31
이동:가 <데스크 시각> 현명한 분노 표출법문화일보 2005년 3월 22일자
이동↑ 독도 영유권 문제에 관한 국가 기본입장의 재정립, 김영구
이동↑ 日 '새 어업협정 독도 제외'제의 경향신문 1997.10.22
이동↑ 독도접안시설 정부,日(일)에 강력대응 경향신문 1997.11.08
이동↑ 前 해수부장관 "新한일어업협정 수정, 실효성 없어" 노컷뉴스 2008.08.04
이동↑ [박정희 정권 "독도도 사실상 포기" 폴리뉴스 2005.01.18
이동↑ [민주당 3인 자민련 입당]'의원 꿔주기' 쇼크 동아일보 2000.12.31
이동↑ [워싱턴 저널] 한국의 '의원 꿔주기' 한국경제 2001.01.04
이동↑ [장재식 자민련 이적] 자민련 교섭단체 등록 매일경제 2001.01.10
이동↑ [어경택칼럼]국민은 세 번 속았다 동아일보 2001.03.28
이동↑ 로열패밀리=비리종합판 악순환 언제까지? 브레이크뉴스 2008.12.10
이동↑ 엽기국회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유산 조갑제 닷컴
이동↑ 97년 12월 실업률 3%돌파 65만8000여명, 1998년 01월 31일 문화일보
이동↑ 갈곳 없는 실직자들,노숙자 실태 취재 1998년 3월 30일 mbc뉴스데스크
이동↑ IMF 구조 조정 요구, 예상보다 가혹 시사저널, 1997년 12월 11일
이동↑ 경제살리기 국민대통합 총력 김대중당선자, 1998년 1월 1일 경향신문
이동↑ 실업률 사상 최악 6.9%로 15년만에 최고 1998년 6월 24일 경향신문
이동↑ 대동 국민 동남 주택 동화 신한 경기 한미 충청 하나 퇴출—인수銀(은) 확정 오늘새벽 업무장악, 1998년 6월 29일 동아일보
이동↑ 경찰. 교육공무원 제외,공무원 2년내 5만명 감축 1998년 1월 30일 mbc뉴스데스크
이동↑ 실업대책 實效(실효)없다 1999.3.5 경향신문
이동↑ 실업률은 떨어졌다지만 1999.11.25 매일경제
이동↑ 역사는 김대중 전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KBS
이동↑ 퇴출은행 떠맡은 국민등 5개은행에 공적자금 9조 6,747억 투입 1999.11.3 경향신문
이동:가 제일은행 미국 뉴 브리지 GE 캐피털에 매각 1998.12.31 mbc뉴스데스크
이동↑ '설상가상'지역경제 휘청 지방은행 퇴출로 기업들 큰타격 1998.7.1 경향신문
이동↑ 국세청, 뉴브리지캐피탈 세무조사 경향신문 2006.04.24
이동↑ ‘리얼아이디’ 전신 ‘패스21’ 어떤 회사 동아일보 2008.12.04
이동↑ 새롬기술 오대표, 각종 탈법으로 출국금지 프레시안 2002.10.21
이동↑ [1] 코스닥 60선 붕괴 사상 최저치 2000.12.20 mbc뉴스데스크
이동↑ [2] 진승현 불법대출사건 이후 리젠트종금 최종 부도 2000.12.22 mbc뉴스데스크
이동↑ [3] 올해 증권시장, 우울한 폐장 2000.12.26 mbc뉴스데스크
이동↑ 재경부·금감위·금감원 카드대란 '합작' 조선일보 2004.07.12
이동↑ 최기일, 《한·미·일 3국인의 삶을 산 최기일 박사 자서전: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 (생각의 나무, 2002) 431페이지
이동↑ 최기일, 《한·미·일 3국인의 삶을 산 최기일 박사 자서전: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 (생각의 나무, 2002) 436페이지
이동↑ 최기일, 《한·미·일 3국인의 삶을 산 최기일 박사 자서전: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 (생각의 나무, 2002) 452페이지
이동↑ “가장 성공한 지도자는 진시황” 金(김)대통령 평가 매일경제 1999.12.10
이동↑ "중국 진시황은 전형적 독재자" 동아일보 1999.12.11
이동↑ 푸대접을막자 新民,光州 유세 경향신문 1969.10.13
이동↑ [대담] 김영삼 전 대통령: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 계간 시대정신 2007년 겨울호
이동↑ 새 정치의 열망, 부동산 넘지 못했고 세대만 가르다. 2012년 12월 28일 미디어스
이동↑ [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49> '2단계투쟁론'에 따라 김대중의 양보 촉구] 한국일보, 2010년 6월 20일 작성, 2013년 1월 23일 확인.
이동↑ 박상훈, 《만들어진 현실: 한국의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 후마니타스, 2009년, p.9-10
이동↑ “[분수대] 흑색선전”.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이동↑ 초원복집 "안 좋은 일로 회자돼 유감" 오마이뉴스 2005년 7월 30일자
이동↑ 후보가 유세장서 유권자 비판 1992년 대선 김대중후보 1992.12.5 동아일보
이동↑ 표 잘못찍어 제 발등도 찍었다, 민주당 유권자 책임강조 1992.12.5 경향신문
이동:가 “아버지 김대중 전대통령 호적에”…DJ ‘숨겨진 딸’ 방송 동아일보 2005.04.20
이동↑ < People in the News > “DJ 가 내 아버지라고 생각 안해” 문화일보 2006.03.16
이동↑ DJ쪽 “숨겨진 딸, 사실과 달라” 한겨레 2005.04.21
이동↑ 정치권 ‘DJ딸·국정원개입 논란’ 반응 한겨레 2005.04.20
이동↑ 김삼웅의 김대중 평전 221회 노태우 돈 20억원 수수 도덕성 상처
이동↑ [격돌인터뷰] 張震浩 前 眞露그룹 회장이 생애 첫 인터뷰에서 밝힌 政經 유착 20年 “나는 金大中 정권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월간조선 2013년 4월호
이동↑ 生前의 유일한 인터뷰 -「金大中 출생 비밀 10년 추적자」孫昌植씨 죽다 월간조선 2005년 1월호
이동↑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안기부 문건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이동↑ DJ 노벨상 수상 막전막후 동아일보 2003.03.26
이동↑ 한 "자진 반납해야" 靑 "명예걸고 대응" 한국일보 2002.10.10
이동↑ 세계가 개탄하는 보수집단의 도넘은 노벨상 모독 브레이크뉴스 2008.05.07
이동↑ 노벨상 시비 지나치다 한국일보 2002년 12월 13일
이동↑ 한국의 비참 문화일보 2002년 10월 15일
이동↑ DJ정부 시절 노벨평화상로비 실제로 있었다 문건 파장일 듯 일요서울 2010.09.13
이동↑ 안기부 불법 도·감청 폭로 김기삼 씨 정치적 망명 허용 YTN 2008.04.17
이동↑ 김대중과 대한민국에 대해 말한다:전직 국정원직원의 양심선언
이동↑ 김기삼씨, 김대중 전대통령 노벨상 수상을 위한 '공작' 주장 뉴시스 2008.05.04
이동↑ 정정보도문 일요서울 2009년 3월 23일
이동↑ 노벨상위원회, 김대중 대통령 평화상 로비설 일축 연합뉴스 2002년 10월
이동↑ DJ '노벨상 로비설'은 무지의 소치외부로비 있을 땐 해당자 제외해" 오마이뉴스 2002년 10월
이동↑ 전직 국정원 직원 김기삼씨 국정원 극비문서 ‘공개’ 일요서울 2010.09.13
이동↑ 김대통령과 노벨상 후보 15번만에 영광 한국일보 2000.10.13
이동↑ 노벨평화상의 나라 노르웨이 '추모 물결' 연합뉴스 2009.08.19
이동↑ 한국인 노벨상 후보, 고은 외 여성정치인 1명 더 있다" 조선일보 2011년 2월
이동↑ DJ는 이미 1987년에 강력한 노벨평화상 후보였다" 프레시안 2011년 3월
이동↑ 金大中총재 TV토크쇼 출연 이모저모《연합뉴스》1997년 8월 5일
이동↑ [97대선 제2차 TV 합동 토론회] 병역 공방 치열 MBC 1997.12.07
이동↑ 국민회의 金大中총재 병역의혹 반박《연합뉴스》 1997년 7월 29일
이동↑ 아태평화재단, <아태평화포럼>, 1997년 8월호
이동↑ 국민회의 金총재 사상시비 반박자료《연합뉴스》1997년 8월 22일
이동↑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해명 자료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이동↑ DJ 복무 해상방위대 실재 확인
이동↑ 김대중 군복무에 관련된 해군본부측의 사실확인증명서
이동↑ 한 운전기사를 암살기도범으로 모는 데 평생을 바친 노벨평화상 수상자 조갑제닷컴
이동↑ 김대중 대통령의 승용차와 충돌한 트럭 운전기사 권중억씨의 27년간 숨어지내는 인생 "대통령님, 오해를 푸십시오" 월간조선 1998년 9월호
이동↑ 1盧3金의 약점 월간조선 1985년 11월호
이동↑ 미공개 자료를 中心으로 쓰는 金大中 연구(3) 「암살기도」라는 金大中 교통사고 30년 만의 현장 검증 월간조선 2002년 5월호
이동↑ 金大中씨宅 마당에 私製爆發物터져 경향신문 1971.01.28
이동↑ 爆發物사건 金大中후보 조카(15세) 拘束 경향신문 1971.02.11
이동↑ 金大中후보宅 爆發物사건 金군 自白 번복한듯 동아일보 1971.02.12
이동↑ 金弘準군 適否審서 釋放 동아일보 1971.02.15
이동↑ 金大中후보宅 爆發物사건 로스만스 담배갑 發見 동아일보 1971.02.16
이동↑ 金候補 光州유세 士兵服務 2年으로 매일경제 1971.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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