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7

릴레이 인터뷰 - 좌우 극한 대결, 해법을 묻다 ②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 - 중앙일보

릴레이 인터뷰 - 좌우 극한 대결, 해법을 묻다 ②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 - 중앙일보

릴레이 인터뷰 - 좌우 극한 대결, 해법을 묻다 ②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
[중앙일보] 입력 2009.07.21 02:05 수정 2009.07.21 02:41 | 종합 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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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갈등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선 바닥 모를 끔찍한 대립과 지독한 증오만 넘쳐난다. 이러다 공동체의 틀 자체가 깨지는 건 아닌지, 두렵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여기서 벗어날 해법은 없는가. 이런 문제의식의 소산인 중앙일보의 기획인터뷰가 이번엔 윤평중(53) 한신대 철학과 교수를 만났다.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에 이어 두 번째다. 윤 교수는 ‘급진적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사회철학자다. 그는 “제발 총론이 아닌 각론을 놓고 싸우라”면서 논쟁의 구체성을 강조했다. 인터뷰는 16일 본사 편집국에서 있었다.







‘진리 정치’ 앞세우지 마라
민주화 운동에는 도움 됐지만 민주화 이후엔 굴레와 멍에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의 존재”라고 지적했다. 일그러진 이기주의와 집단주의가 추악하게 착종된 상황에서 내 편, 네 편만 따질 뿐 사실에 근거한 합리적 논의의 설 자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박종근 기자]




- 그동안 지역감정으로 인한 고통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게 좀 나아지나 했더니 이젠 좌우 갈등입니다. 왜 이런 상황이 이어지는 겁니까.



“갈등의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이해관계의 다툼, 즉 밥그릇 싸움의 측면이 있죠. 그건 인간사회 어디나 있는 건데…, 우리 사회에선 특유의 문화적 습속 같은 것도 반영되고 있어요. 원리주의적인 태도로 이념과 명분을 포장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타협과 조정이 굉장히 힘들어지죠.”



-사실은 별 차이도 없는데 명분론·원칙론으로 공격하면서 충돌이 가열된다는 건가요.



“이건 좀 조심스러운데…, 우리 민족에 정치·사회·문화적으로 분열의 DNA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유교문화의 영향도 있고. 정강·정책이 서로 크게 다른 것도 아닌데 정권 획득을 목표로 설정한 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움에 매진합니다. 이때 동원하는 민심·민주주의·효율성·산업화·세계화 등의 명분은 포장에 불과한 측면이 있습니다.”



-요즘 국회 상황이 정확히 그런 것 같습니다.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제이고 간접민주제일 수밖에 없어요. 한데 지금 보세요. 의회 안에서 절차와 법을 무시하는 ‘폭력의 관행화’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이해가 충돌하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제도적 절차가 이미 마련돼 있지 않습니까. 그럼 거기에 따라야지요.”



-폭력 행사가 민주주의와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요.



“어떤 민주주의냐고 물어봐야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민심 또는 여론을 앞세우는데, 옳지 않습니다. 여론은 중요한 참고 자료지만,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게 민심입니다. 여론조사는 질문 구성에 따라 결과를 윤색할 수도 있고요. 따라서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는 어디까지나 보완재인데 진보진영에선 직접민주주의가 거의 물신화(物神化)돼 있어요. 물신화된 레토릭(수사)으로 남용되고 있는 겁니다.”



-증오의 정치가 횡행하는 건 결국 이해관계 때문입니까.



“저는 그걸 ‘진리 정치(politics of truth)’라고 봅니다. 정치행위 자체를 진리의 실현으로 보는 겁니다. 이 경우 자신은 ‘진리 주체’가 되지요. 거기 반대하는 사람은 비(非)진리와 허위를 옹호하는 세력이 되고. 유교정치에 이런 전통이 강합니다. 마르크스주의적 정치관도 마찬가지고요. 우리 사회에서도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의 밑바닥에 깔린 게 ‘진리 정치’ 같습니다. 민주화되고 다원화된 세상에선 그게 오히려 정치적 상상력에 굴레와 멍에로 작동합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1980년대엔 민주화의 물꼬를 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죠. 하지만 다원주의 사회가 된 뒤에도 자신들이 옳은 정치의 길을 제시하고, 판단하고, 평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거든요.”



-진리를 독점하는 태도가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낸다는 거죠?



“우리는 내면의 진실, 결단, 양심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어요. 정치와 역사는 여러 사람이 어울려 상호작용하는 세계거든요. 주관적 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평가하고 평결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백범 김구 선생의 남북합작 시도와 전쟁을 막으려는 충정, 그리고 장렬한 산화는 그의 진정성을 한결 빛나게 합니다. 하지만 세계적 냉전구도와 남북 분단구조가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백범의 희망은 현실적으로 무망한 일이었다고 저는 봅니다. 천성산 터널 공사를 반대하며 단식했던 지율 스님은 종교인의 양심과 진정성에 따라 저항했겠죠. 생태보호라는 명분도 갖췄고, 불자(佛子)로서의 생명존중 사상도 있었고요. 그런데 이는 전형적인 감정 정치의 표출입니다. 이게 한국사회라는 정치공동체의 다른 시민들에게 과연 얼마만큼 공감대를 얻을 수 있으며, 객관적 사실에 얼마나 부합되는 행위였느냐는 엄밀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 그런 기준으로 2008년 촛불시위를 분석하면 어떻습니까.



“내 양심의 결단이 자기위안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그게 객관성과 사실성의 기준에 부합하는지 검증해 봐야 합니다. 촛불시위가 벌어진 건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시위의 원점과 종착점은 결국 인간 광우병 위험성에 대한 분노와 공포였거든요.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과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 입장에선 자기 진정성이 극대화된 경우였어요. 애들을 위해서 나왔다, 먹거리 문제이니 간과할 수 없다는 거였죠. 하지만 그게 객관적인 사실과 합리성의 테스트를 통과하느냐는 거지요. 지난해 촛불시위 때 진보 지식인들은 집단 열광에 빠질 만큼 흥분했었어요.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분들에게 자기 진실성의 표출이라는 ‘진정성(眞情性)’은 있었지만 그 시위가 사실과 합리적 판단, 다시 말해 ‘진정성(眞正性)’을 갖춘 성숙한 민주사회의 정신을 반영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순수한 마음으로 길거리에 나섰던 분들은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겁니까.



“광우병 공포는 대부분 과장됐어요. 촛불시위는 자기 진실성의 표출이었지만 객관성과 사실성의 잣대를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중요한 의의들이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죠. 이 부분에 대한 뼈아픈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시민들 개개인의 차원에서도요. 믿음이란 게 사실의 잣대에 위배될 때 오래 지속될 순 없다는 건 분명하죠.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정치의 지평에서 양심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어요. 자칫 오해받을 수 있는 얘기지만 주관적 희망이나 느낌, 진실만 갖고서 역사와 정치세계에 대응하는 건 지극히 미약한 것입니다.”



- 교수들의 시국선언도 ‘진리 정치’에 대한 열망이 개입한 걸까요?



“그분들의 표현의 자유를 존중합니다만 어떤 성명서에는 ‘진리 정치’ 색채가 물씬 보이거든요. 이명박 정권은 독재고, 반(反)민주적이고, 남북관계를 파탄시킨다면서 자신들의 진리와 선은 민중이 원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명박 정권과 그 주변 사람들은 악과 위선 세력으로 간주되죠. 거기에 동참하지 않으면 기회주의자나 회색분자로 보일 수도 있고요. 그렇게 많은 교수가 서명한 건 아마 처음일 겁니다. 하지만 왜 시국선언이 서민들의 질박한 삶의 지평에서 큰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하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 인간광우병 때문에 큰일날 것처럼 외치던 분들이 지금은 잠잠합니다.



“전문가나 언론인에게 신성불가침의 잣대는 사실(fact)일 겁니다. 그런데 사실 자체가 다층적이고 복합적이거든요. 인간광우병을 고발하고 경고했던 부분도 과학적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미소한 부분을 한도없이 부풀린 거죠. 0.1%의 사실을 99%인 것처럼 강조하고 과대포장하면 분명한 왜곡입니다. 당시엔 잘 몰라서 그런 주장을 했어도 시간이 지나 감정이 가라앉은 뒤엔 자신의 주장이 무리였다는 걸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장을 바꾸면 변절하거나 망신당하는 게 아닌가 여기죠.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훼손되는 양 받아들입니다. 여기엔 유교의 권위주의적 문화, 토론과 투명한 경쟁에 승복하지 못하는 문화가 복합적으로 결부돼 있어요.”



-신자유주의는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사회주의는 역사적으로 실패했고요. 그럼 제3의 대안이 있다고 보십니까.



“좀 더 겸허해져야 할 것 같아요.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이자는 겁니다. 신자유주의는 한계지만 그럼 자유주의도 동시에 한계인가?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 없듯이 자유주의도 인류의 보편사적 호소력을 갖는다고 봅니다. 자유주의의 역사에서 ‘신자유주의’는 일종의 변종, 극단적 왜곡이었습니다. 경쟁 일변도의 ‘정글 자본주의’와 경제적 효율성만을 중시했죠. 하지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영속적인 생명력을 가질 겁니다. 자기 성찰적이고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자유주의의 필요성과 효용성을 확신합니다.”



-북한 핵개발을 어떻게 보십니까.



“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는 ‘진실의 순간’이 지금 드러나고 있습니다. 북한이 공개적으로 밝혔듯 그들은 미국과 국교를 맺든 말든, 경제지원을 받건 말건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핵보유국일 뿐만 아니라 강성대국 꿈을 향해 달려가는 북한과 우리가 어떻게 대면해서 살 수 있는지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 사회의 좌·우파에 대해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명사(冥빅) 중심으로 실체화하지 말고 동사(動詞) 중심으로 생각하자는 겁니다. 개별적 사안 중심으로 구체화하자는 거죠. 총론이 아닌 각론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는 겁니다. 한번 진보면 영원한 진보인 게 아니잖아요. 서구 사회의 진보가 자동적으로 한국 사회 진보가 아닌 것이고요. 계속해서 변화한다는 의미에서 이념을 ‘동사 중심’으로 보자는 겁니다.”



-법과 질서를 조롱하는 게 민주주의고, 그게 지식인인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입니다.




“흔히 1987년 이후에 절차적 민주주의는 확고해졌지만 내용적 민주주의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많은 경우에 절차가 내용과 실질을 구성합니다. 절차의 핵심이 법이지요. 최선은 아니지만 우여곡절 끝에 도달한 87년 헌법이 있지요. 그게 이해관계 당사자들이 합의해 만든 법이라면 바뀌기 전까지는 일단 지켜야 합니다. 절차는 공허하고 진짜 민주주의의 내용과 실질은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닙니다. 법과 질서로 이뤄진 절차 자체가 민주주의의 내용을 형성합니다. 그게 인류사회의 역사적 통찰입니다.”



대담=김종혁 문화스포츠 에디터

정리=배노필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윤평중 교수=1956년생.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했고 미국 서던일리노이주립대에서 사회철학 및 정치철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버클리) 역사학과, 미시간 주립대 철학과, 뉴저지 럿거스대 정치학과 연구교수를 거쳐 한신대 철학과 교수 및 대학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계간지 ‘비평’과 ‘철학과 현실’의 편집위원. 『급진자유주의 정치철학』 『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 『담론이론의 사회철학』 『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 등의 저서가 있다.



[출처: 중앙일보] 릴레이 인터뷰 - 좌우 극한 대결, 해법을 묻다 ②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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