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권용득 - 이 또한 아래 공유했던...:
권용득
23 May at 12:26 ·
이 또한 아래 공유했던 포스팅(https://www.facebook.com/yongdeuk77/posts/4388000607892729)과 같은 얘기. 한 인간의 생애를 어떤 역사적 해석에 고정시키려는 시도의 부작용. 정의연의 운동과 우리 사회가 미처 고민하지 못한 지점. 정의연 대표 이나영 씨가 받들어 모시는 가와다 후미코(『빨간 기와집』 저자이자 재일 조선/한국 여성의 개인사를 기록한 저자)가 가장 경계했던 일도 앞에 말한 그 시도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이 고민부터 다시 시작하면 어떨까 싶다. 특히 마지막에 인용한 쇠렌 키르케고르의 말은 뼈를 때린다.
*이나영 씨가 가와다 후미코 받들어 모시는 줄 어떻게 알았냐면요... 작년에 『빨간 기와집』 배봉기 할머니 얘기했다가 너 따위가 함부로 입에 올릴 분이 아니라는 쿠사리를 먹었... 그래서 원한이 남은 건 아니고요... 진짜예요.

Dong Jik Lee
10 May at 09:47
조직이 조직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이런 저런 비용을 사용한 것이 뭐가 문제겠어? 더군다나 그 조직이란 것이 나쁜 짓하자고 모인 것도 아닌잖어? 선한 마음으로 기부한 분들도 그 정도는 인정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 큰 대의를 위해 감내해야할 현실조건도 있는 것이고.... 중요한 건 지금 떠드는 것처럼 기부액 중 몇 퍼센트만 할머니들에게 돌아갔느니 하는 부분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계속 꺼림직 했던 것이 현실화 한거야. “순수한 소녀”라는 이데아. 소녀상으로 대상화되어 동굴속에 웅크리고 있어야만 했던 사물이 알고 보니 사람이었던거야. 사람은 본래 틀리기도 하고, 다른 말도 하고, 심지어 모순된 말도 하는데, 지금까진 자신의 언어를 가지면 안되는 거였지. 삶이 의미가 되기 전에 이미 의미가 그분들의 삶이였던거잖어. 명확한 공적 해석이 불명확한 사적 기억을 주조해내야만하는 역사적 대의.
역사적 해석은 다양한 것이고, 사료가 서로 충돌하면, 역사도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권력이란게 그런 불명확을 허락할 리가 없지. 그건 어쩔 수 없는 권력의 속성이니 ....... 근데 그냥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겠어. 이데아를 끌어다가 현실화하는 것은 자기 삶의 주체로서의 인간에게는 안어울려..... 가끔은 잔혹해.
인간은 해석을 위해 살거나 대의를 위해 살지 않으니, 그분들도 해석의 대상인 ‘소녀상’이 아니라, ‘옆집 할머니’ 같은 주체로 살 수 있으면 좋겠어. 실수도 하고..... 역사적 해석을 고정시키려는 욕구가 그분들의 나머지 삶도 고정시키지는 말았으면 하는거지. 누구에게나 인생은 아직 불가해 아닌가?
"Life can only be understood backwards; but it must be lived forwards." Soren Kierkega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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