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권용득 -김군자 할머니가 꼽은 자기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권용득
23 May at 11:01 ·
아래 공유한 포스팅 내용 모두 공감하며 덧붙이자면...
김군자 할머니가 꼽은 자기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아마도 이용수 할머니와 함께 미국 갔을 때 아닌가 싶다. 미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채택됐을 당시 이용수 할머니 곁에는 김군자 할머니도 계셨다. ‘증언 한다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비행기도 타보고 할 얘기 다 하면서 참 재밌었다’는 김군자 할머니 말씀은 그만큼 외부 활동이 피해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얘기인 듯.
반면 <나눔의 집>에서 자원봉사하며 피해자의 증언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현상에 관한 논문을 쓴 사카모토 치즈코에 의하면, 역사박물관처럼 ‘한 곳’에서 증언을 되풀이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상당한 피로감을 유발했다고 한다. 똑같은 증언을 한 곳에서 반복함으로써 트라우마에 빠지게 만든 경향(피해자를 피해 상태에 머물도록 억압한 경향)도 있고, 증언을 거부한 피해자도 있었다고.
사카모토 치즈코뿐만 아니라 몇몇 식자들(우에노 치즈코, 박유하, 정유진 등등)이 이미 지적한 대로 피해자는 증언을 반복하면서 사람들이 어떤 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고, 자신의 증언이 때때로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증언을 한 곳에서 하는 것(박제되는 것)과 돌아다니면서 하는 것(시설로부터의 해방)은 큰 차이가 있었던 듯. 수요집회도 그런 면에서 피해자에게 활력이 됐을 것 같다. 물론 육체적으로는 힘드셨겠지만.
영화 <아이 캔 스피크> 마지막 장면은 위안부 피해자 나옥분이 한강을 뛰면서 누군가에게 전화로 ‘다음(으로 증언할 곳)은 어디야?’라는 식으로 물으며 끝난다. 과장되긴 했지만, 나옥분 같은 피해자가 현실에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나옥분은 이용수 할머니를 가공한 캐릭터였기도 하고. 다만 그건 정의연의 운동 방향에 동의하고 협조한 피해자에게만 가능한 외부 활동이었을 뿐이다. 나머지 대부분은 아래 묘사한 것처럼 시설에서 방문객을 맞았다.
이들이 정말 원했던 건 무엇일까. 있는 그대로의 일상을 누리지 못한 것, 어쩌면 그게 그 무엇보다 원통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피해자 부고 기사에서는 그와 같은 얘기를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의 사과를 받지 못해 원통한 채로 돌아가셨다는 얘기뿐이다. 피해자의 증언을 가려들으며 피해자를 길들인 우리 사회의 책임은 얘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피해자로 하여금 ‘고맙다’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인사치레, ‘사과받을 때까지 사셔야죠’라는 말은 한편으로 폭력이다.
*사카모토 치즈코의 한국어 논문은 아래 링크 따라가서 우측 상단 파란색 박스 클릭하면 전문을 다운받을 수 있다.
https://www.researchgate.net/…/282606272_The_Politics_of_th…

Gio Choi
23 May at 04:31
몇 해 전 작가들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애사를 촉각동화로 만드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때문에 당시 잠시잠깐 나눔의 집을 오갔었다.
나눔의 집에서 받은 내 인상은 시설의 낙후가 아니라 시선의 낙후였다.
할머니들의 하루는 아침을 먹고 방문자들을 맞이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어느 초등학교 학생들이 할머니들을 위해 리코더를 불러 온다. 어느 부녀회에서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며 점심 준비를 하러 온다. 어느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봉사활동을 온다. 어디선가 그렇게들 오고 그렇게들 갔다. 그들 속에는 작업땡! 하러 온 나같은 사람도 있었다.
방문자가 오면 각자 방에 있던 할머니들이 거실로 나온다. 창가 쪽에 일렬로 놓인 의자에 할머니들이 앉고 방문자들이 맞은 편에 앉아 30~40분 정도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고작 30여분 남짓에 유대가 생길리는 만무했다. 그날 기분에 따라 억양만 바뀔 뿐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됐다. 매번 엇비슷한 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일본에 대한 분노였다. 방문자들이 하는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필요한 건 없는지, 불편한 건 없는지, 잡숫고 싶은 건 없는지 사람만 다를 뿐 엇비슷한 이야기의 끝은 거의 ‘사과받을 때까지 사셔야죠’ 였다.
할머니들은 하루에도 고맙다는 말을 수십 번씩했다. 방에서 나오면서, 의자에 앉으면서, 소개를 하면서, 이야기 중간 중간 쉼표처럼, 방문자가 돌아갈 채비를 할 때. 언제든 할머니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공허하게 오가는 말들 속에 그 단어는 어찌나 콕 들리던지, 또 어찌나 듣기 싫었던지. 돌아서 잊은 듯이 다시 하는 그 말이 참 싫었다.
나눔의 집에선 방문자들이 건네는 그 시혜와 동정의 시선을 거둬들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삶, 그날 당신 기분이 어떻든 언제든 분노를 쏟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삶. 반 백년도 더 된 이야기를 하루하루 복기해야 하는 삶. 살아있는 유물.
김군자 할머니는 당신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2000년대 초중반쯤 증언 다니던 때라고 말씀했었다. 증언 한다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비행기도 타보고 할 얘기 다 하면서 참 재밌었다고. 당신 다리가 아파 나가지 못하는 설움이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의 절반이었으니 거기 앉아 보내는 세월이 얼마나 한스러웠을지 감히 짐작도 힘들다.
피해자지원을 생계지원으로만 연결하여 문제제기하는 일부 언론과 사람들을 보면서 시혜와 동정으로 바라볼때 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왜곡되고 박제되고 배제될 수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본다. 그 시선이 위안부 문제를 총체적 난국으로 만든 씨앗이 아닌가 하고. 지금도 문제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가리개가 되는 것 같고.
어쨌거나,
30년의 사정을 나로서는 알 수 없으나, 정의연과 나눔의 집이 비판 받아야 한다면 할머니들을 거기 그렇게 박제시켜놓은 게으름이 아닐까. 문제의 출발은 거기부터가 아닐까싶다.
덧,
언론은 진짜 게으름을 넘어 나태하고 악질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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