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3

알라딘: 권보드래,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알라딘: 3월 1일의 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권보드래 (지은이)돌베개2019-03-01


647쪽

책소개

문학과 역사를 넘나들며 근대를 보는 지평을 넓혀 온 고려대 국어국문과 권보드래 교수가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간의 연구와 기록을 한 권에 담았다. 1910년대 전 세계로 무대를 넓히고 당시의 신문 및 잡지, 재판기록, 문학작품, 국내외 선학자들의 연구와 시각자료 등을 재료 삼아 1919년 3월 1일의 한반도를 복원한다.

2000년 초 한 신문조서를 접한 것을 계기로 10년 넘게 변치 않던 3.1 운동에 대한 애정이 방대한 사료를 읽어내는 깊은 눈과 만나 거대한 서사를 일궈낸다. 특히 책을 지탱하는 16개의 기둥(선언, 대표, 깃발, 만세, 침묵, 약육강식, 제1차 세계대전, 혁명, 시위문화, 평화, 노동자, 여성, 난민/코스모폴리탄, 이중어, 낭만, 후일담)은 저자 스스로 3.1 운동을 쉽게 단언하거나 익숙한 틀로 접근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다각도로 그날을 들여다보자는 제안이다.

목차
들어가는 글
3·1 운동 전후 국내외 주요 사건

제1부 3·1 운동 그리고 세계


1장 선언: 현재가 된 미래
1919년 3월 1일 서울, 중앙학교생 채만식/ ‘독립’과 ‘만세’의 선후 관계/ 독립선언서 비교론/「기미독립선언서」의 비밀/ 전염되고 변형되고 증식되는 선언서/ 신문과 격문의 자발적 속전들/ 언어의 힘, 운동의 테크놀로지

2장 대표: 자발성의 기적
강화도 은세공업자, 전 육군 상등병, 34세 유봉진/ “대표로서 소요를 감행하려 하니 사진을 찍으라”/ ‘대표’의 즉흥성과 비체계성/ 우드로우 윌슨의 ‘대표’/ 선교사의 양자 김규식, 조선을 대표하다/ 대표와 인민 사이 ― 유토피아적 직접성의 논리/ 매개 없는 세계 혹은 또 다른 대표

3장 깃발: 군왕과 민족과 대중
경성직뉴주식회사 서기, 24세 이희승/ 3월 1일 서울, 깃발 대신 모자를 휘두르며/ 태극기, 대한제국의 기억/ 왕의 목을 베는 대신 왕을 위해 통곡하고/ ‘공화만세’와 국민주권론/ 독립만세기와 만세 태극기, 대한제국의 비판 혹은 보충/ 공론장으로서의 3·1 운동/ 3·1 만세와 6·10 만세

4장 만세: 새 나라를 향한 천 개의 꿈
천도교구실 소사, 36세 이영철/ 독립했다면 어떤 나라를/ 희망과 요구, 불쾌와 평화의 ‘만세’/ ‘새 나라’, 토지 분배와 생활 개선에의 소망/ “만세 안 부르면 백정촌이 된다”/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일본인들/ 파리평화회의를 논하는 농민들/ 희생의 실체론― “11인 영혼이 씻사오니”

제2부 1910년대와 3·1 운동

1장 침묵: 망국 이후, 작은 개인들
1910년 8월, ‘이상할 만큼 조용한’ 서울/ 뜻밖에 견딜 만한 식민지/ 양민으로서의 생애, 작은 성공과 쾌락/ 운동회와 탐승회, 그리고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만세전’의 풍경 ― 증세, 토지조사사업, 공동묘지령/ 물가고, 동맹파업, 1918년의 쌀소동

2장 약육강식: 진화론의 갱생, 인류의 탄생
윤치호,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 약육강식이 보편법칙이라면 식민지는 왜/ 경쟁하는 우리, 이 구차한 현실을 넘어서/ 걸인과 낙오자를 바라볼 때/ 문명론에서 인류의식으로/ ‘인류적 양심’과 ‘도의의 시대’/ 일본의 보편주의와 조선의 보편주의/ “이 기회가 어찌하여 체코·폴란드만의 기회이겠습니까”

3장 제1차 세계대전: 파국과 유토피아
1915년 10월, 블라디보스톡에서 민스크까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조선인들/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전쟁의 위생학, 죽음이라는 대가/ 전쟁의 도덕화, ‘폐허 이후’의 기대

4장 혁명: 신생하는 세계
메이지대 학생 양주흡, “민중이 회집하여 혁명을”/ 1911년 신해혁명, 중화체제의 종말/ 동아시아 진보 연대/ 『학지광』의 ‘혁명’/ 러시아혁명이라는 새로운 의제/ 3·1 운동과 ‘혁명’

제3부 3·1 운동의 얼굴들

1장 시위문화: 정치, 일상의 재조직
북 치고 나팔 불고 노래를 부르며/ 팔각정·가마니더미·고무신수레/ 산상시위와 봉화/ 물동이 준비한 시민들과 한복 입은 학생들/ 선언과 격문의 테크놀로지/ 유생 송준필, 서당 마룻장을 뜯어내 통고문을 인쇄하다/ 등사기 네트워크와 출판의 법리/ 독립의 비밀, 독립의 자금

2장 평화: 비폭력 봉기와 독립전쟁
마사이케 중위 피살 사건/ 식민자의 목숨과 피식민자의 목숨/ 그들은 왜 무기를 탈취하지 않았나/ “때리고 불 지른다고 해서 만세를 불렀다”/ 구타와 파괴, 때로는 축제 같은/ 3·1 운동 이후의 무장투쟁, 잔혹한 반격 그리고

3장 노동자: 도시의 또 다른 주체
서울 봉래동, 3월 22일 노동자대회/ 밤의 노동자, 대안적 봉기 주체/ 3월 말 서울, 투석과 횃불의 게릴라성 시위/ ‘노동의 레짐’의 변화와 8시간 노동제/ “삼베로 머리띠를 두른” 자들, 광산·농업 노동자/ 3·1 운동의 주체와 한국 사회주의

4장 여성: 민족과 자아
아산보통학교 교사, 15세 박경순/ 서울 대정권번 기생, 21세 정금죽/ 개성 북부교회 전도사, 39세 어윤희/ ‘미친 누이’, 칼 휘두른 백정 아낙들/ 여성이 정치와 조우할 때 / 3·1 운동기 여학생의 소설적 재현/ 이광수와 심훈의 여성 주인공/ ‘팔 잘린 소녀’, 여성과 희생제의

제4부 3·1 운동과 문화

1장 난민/코스모폴리탄: 국경을 넘는 사람들
3·1 운동과 망명 문학, 강용흘과 이미륵/ 『초당』과 『압록강은 흐른다』, 이주자의 행로/ 헤이그 밀사 이위종과 몽골의 어의 이태준/ 민족주의 너머의 방랑/ 신분 증명과 여행 증명/ 민족국가와 치안의 경계―국민과 난민

2장 이중어: 제국의 언어와 민족의 언어
조선어를 잡아먹는 일본어/ 식민권력의 유학 정책과 한문 정책/ ‘허약한 제국주의’와 매체의 지형/ 신문관과 최남선, 『매일신보』와 이광수/ 한글운동과 문학운동, 그리고 동인지 세대/ 식민지의 이중 언어/ ‘국어를 상용하는’ 조선인들

3장 낭만: 문학청년, 불량의 반시대성
‘3·1 운동 세대’로서의 『백조』 동인/ 배재고보 3년생, 김기진의 봄/ 휘문고보 3년생, 정지현의 문학과 노동자대회/ 3월 1일 이전, 외롭게 죽어갈 때 민족은/ ‘자유’와 ‘문화’의 관계/ “피동적 문명이 무슨 만족이 있을손가”/ 패션의 정치학과 ‘꿈’의 지도/ 1929년 11월 3일 대구, 시인 이장희

4장 후일담: 죽음, 전락, 재생 그리고 다 못한 말
이토록 많은 후일담/ 배반당한 숭고―「피눈물」과 「태형」 사이/ 「민족개조론」, 변신 또는 배신/ 이광수와 신세대, 시간을 둘러싼 경쟁/ ‘만세후’로서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신세대의 기억, 유년 속 3·1 운동


나가는 글
감사의 말
미주/ 장 표제지 인용문 출처/ 시각자료 출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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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1919년 3월 1일, 당시 중앙학교 2년생이었던 채만식은 2시를 막 넘겨 탑골공원에 도착했다.
3·1 운동은 낮, 장터, 태극기로 표상되지만, 다른 한편 밤의 사건이요 산 위에서 만세 부른 사건이며 독립만세기를 휘날린 사건이다. 어디서는 3월 초로 끝났지만 어느 지역에서는 12월에야 시작된 사건이자, 누구에게는 성대한 평화시위로, 다른 이에게는 면사무소를 습격한 경험으로 남은 사건이기도 하다. 그만큼 3·1 운동의 얼굴은 여럿이다. 하긴 그토록 많은 이들이 3·1 운동에 뛰어들었으니. 식민권력의 통계로도 약 60만에서 100만이 참여했다고 할 정도다. 역시 식민권력의 인구통계 약 1,600만을 적용하면 전 인구의 3.7퍼센트에서 6.2퍼센트 정도가 된다. 이후의 어떤 사건도, 1960년의 4·19혁명이나 1987년의 6·10 민주화운동도 그만한 참여도에 이르지 못했다. 3·1 운동 때는 교통·통신이 미비했고 전국적 조직이나 지도체도 없었는데 말이다(11쪽).  접기 - 묵향
19세기 후반 이래 역사를 지배해온 것이 개별-특수-보편, 나-가족-민족(국가)-인류라는 매개의 변증법이었다면, 3·1 운동은 그 안과 밖을 가로지른 사건이다. 3·1 운동의 그들은 민족(국가)과 탈민족(국가)을 동시에 꿈꾸었고, 대표-의회정치와 자치적 질서를 동시에 지향했으며, 역사-진보와 유토피아적 파국을 동시에 추구해 나갔다(13쪽).  접기 - 묵향
P. 397 박원경은 19세 소녀로 ˝천황폐하께 불경이요 (...) 부모님께도 불효˝ 운운하며 설득하는 심문관에게 ˝내 앞에 천황폐하가 어디 있˝냐고 반박하면서 ˝우리 부모님 생각은 (...) 칭찬해주실 테니까 나는 효녀˝라고 당당히 진술했다는데, 그 소문이 당시 황해도에 파다했다고 한다. - 묵향
P. 431 ˝나는 3·1 운동 없으면 오늘은 없다.˝ -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함석헌 저작집 6』, 한길사, 2009, 164쪽. - 묵향
P. 543 엄상섭의 시각마따나 3·1 운동은 종착점보다 출발점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볼 때 적극적 의의를 갖는다. 3·1 운동은 개인적·민족적 층위에서 공히 불회귀적 사건인 동시, 실패냐 성공이냐의 질문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종류의 사건이다. 그것을 부정한다면 ‘나‘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존재의 기초이자 폭발적 성장의 계기인 것이다. 3·1 운동을 통해 조선인은 비로소 집단적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서의 정체성을, 즉 저항하는 존재로서의 자존을 형성할 수 있었다. 조직망도 통신망도 저발달한 상태에서 사실상 전국 모든 지역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운동은 지금까지도 부동(不動)의 민족적 알리바이다. ‘우리‘는 단연 일제에 반대했던 것이다. 비록 힘이 모자라 짓밟혔을지언정 그것은 식민지시기 내내, 그리고도 오래 더 살아남은 기억이었다. ‘3·1 운동이 없었다면 민족으로서의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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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보드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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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19년 현재 고려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재직 중이다. 190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근현대 문화의 형성을 추적함으로써 ‘지금, 여기’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주력해왔다. 그동안 쓴 책으로 『한국 근대소설의 기원』, 『연애의 시대』, 『1910년대, 풍문의 시대를 읽다』, 『신소설, 언어와 정치』가 있고, 함께 쓴 책으로『1960년대를 묻다』,『아프레걸 사상계를 읽다』, 『미국과 아시아』 등이 있다. 오래 소망했던 ‘3·1 운동의 문화사’를 일단락했으니 앞으로는 좀 더 홀가분하게 공부할 생각이다. 지구문학의 광막한 지평에서 한국문학을 만나고 싶다. 접기
최근작 : <동아시아의 '근대' 체감 (반양장)>,<3월 1일의 밤>,<동아시아의 '근대' 체감 (양장)> … 총 24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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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3·1 운동에 가닿기 위한 10여 년의 기록
16개의 시선으로 복원한 1919년 3월 1일

문학과 역사를 넘나들며 근대를 보는 지평을 넓혀 온 고려대 국어국문과 권보드래 교수가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간의 연구와 기록을 한 권에 담았다. 1910년대 전 세계로 무대를 넓히고 당시의 신문 및 잡지, 재판기록, 문학작품, 국내외 선학자들의 연구와 시각자료 등을 재료 삼아 1919년 3월 1일의 한반도를 복원한다. 2000년 초 한 신문조서를 접한 것을 계기로 10년 넘게 변치 않던 3·1 운동에 대한 애정이 방대한 사료를 읽어내는 깊은 눈과 만나 거대한 서사를 일궈낸다. 특히 책을 지탱하는 16개의 기둥(선언, 대표, 깃발, 만세, 침묵, 약육강식, 제1차 세계대전, 혁명, 시위문화, 평화, 노동자, 여성, 난민/코스모폴리탄, 이중어, 낭만, 후일담)은 저자 스스로 3·1 운동을 쉽게 단언하거나 익숙한 틀로 접근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다각도로 그날을 들여다보자는 제안이다. 당신에게 3·1 운동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충분히 마주한 적 없었을 이 질문에 더 늦기 전 한번은 답해야 하지 않을까? 1919년 봄, 100년 전 봉기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1910년대의 세계 그리고 1919년의 한반도
한 권으로 읽는 3·1 운동의 세계사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전국 일곱 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 ‘독립선언’을 상징적인 시작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표면적인 사건에는 과거와 미래의 시간이 숨어 있다. 10년간의 식민지기, 평양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발표, 고종 사망 등을 비롯해 제1차 세계대전과 파리평화회의 그리고 중국, 이집트, 헝가리 등 세계 곳곳에서 1910년대 내내 앞다퉈 벌어졌던 혁명들. 3월 1일 이후 수개월 동안 한반도 각지에서 불규칙적으로 이어진, 시작과 끝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봉기들까지……. 20세기 세계 전반을 가로지르던 정의·인도·평화,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가 조선에도 예외 없었다는 점까지 떠올린다면 이 모든 것은 3·1 운동을 설명케하는 연속되고 중첩된 ‘사건들’이다.
『3월 1일의 밤』은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1919년을 만들어낸 전후 시간이 한 권 안에서 병치·교차되며 서술된다.「기미독립선언서」를 설명하다 미국, 아일랜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선언서로 옮겨가 비교하고(제1부 1장), 1910년 침묵으로 가라앉은 식민지기 서울에서 10년 후 역동적인 서울의 가능성을 엿보기도 하며(제2부 1장), 1919년 봄 ‘파리’에 모여든 각국의 대표들과 1919년 ‘한반도’에서 조직도 장비도 갖추지 않은 채 대표를 자임하던 이들을 동일선상에 두기도 한다(제1부 2장). 또한 고종 습의와 태극기를, 박경순, 정금죽 등과 같은 실존 여성과 이광수, 심훈의 소설 속 여성 주인공을, 1915년 10월 블라디보스톡의 조선 노동자와 1919년 10월 러시아의 조선 노동자를 종횡무진 연결시키며 3·1 운동의 세계사를 써내려간다.

난폭하면서 고귀하고, 무지하면서 드높은
3월 1일의 낯선 ‘밤’ 속으로

“3·1 운동의 밤은 다채롭다. 3·1 운동 속 그들은 어스름녘 시내에서 전차에 투석하고, 어둠이 짙어질 때 뒷산에서 봉화 올리고, 밤 깊어갈 무렵 모여서 산 너머 주재소를 향하곤 했다. 그들은 잘 알려진 시공간을 벗어날 뿐 아니라 익숙한 인식론도 동요시킨다.”(들어가는 글, 11~12쪽)

100년이 지난 지금도 3·1 운동은 유관순, 태극기, 민족대표 33인, 「기미독립선언서」 등과 같은 민족주의적 표상론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관련 연구자들이 꾸준히 자료를 발굴하고 논문을 발표해온 것과 별개로 3·1 운동 자체가 대중들에게 역사적 관심을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권보드래는 3·1 운동이야말로 영웅화된 동시에 소외된 영역이어서 편견 및 무지와 싸우는 공부였다고 고백한다. 엇갈리는 기록과 기억들, 수면 위로 오르지 못한 사연들을 우열 없이 전달하는 작업이 가장 필요해 보였다. 가령 3월 1일 서울에서는 그 어디에도 태극기가 휘날리지 않았고, 3월 5일 학생들이 주도한 남대문역 시위에서야 여러 깃발이 등장했다는 점, 3·1 운동기 사망자수 집계가 553인에서 7,509인까지 자료마다 차이가 적지 않다거나, 독립선언서 인쇄 매수가 2만 1,000매인지 3만 5,000매인지 등에 대해 자신이 어떤 쪽이 맞다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그 간극을 전하고 싶었다.
박제된 이미지가 조금씩 걷어지자, ‘밤’의 시간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실제로 3월 1일 이후 9일, 10일, 23일 등의 제법 큰 봉기가 밤에 이루어진데다 그 주축은 도시의 지식인들이 아닌 노동자들이었다. 한낮의 시내보다는 밤의 산등성이에서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대개 어둠 속에서 활활 타오르다가 동이 채 트기 전에 끝나곤 했다(제3부의 1장, 3장, 4장). 그리고 그 속에는 수많은 작은 주체들이 있었다. 친구 따라 만세 한 번 불러본 게 다지만 종생 3·1 운동의 자장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그 어느 역사서에도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 누군가의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삼촌이자 동생이었을 이들 말이다. 김승신, 유봉진, 양봉식, 주시향, 정재순, 황승흡, 김찬석 등 권보드래는 자신이 읽고 만난 존엄한 생과 그들이 꿈꿨지만 가려져왔던 어둠의 시간으로 이 책을 부지런히 채웠다. 감히 단언하자면 『3월 1일의 밤』을 읽고 난 후, 우리는 3·1 운동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고백하게 될 것이다.

“북 치고 나팔 불고 노래를 부르며”
식민지의 공론장과 문화정치

3·1 운동은 대중들이 각성하고 자아를 형성해가는 과정이었다. 물론 유럽의 경우처럼 함께 모여 대화와 토론으로 붐비는 세련된 장은 아니었으나 다채로운 언어를 짓고 말과 행동이 하나 되는 식민지의 공론장을 개척했다. 「기미독립선언서」를 일부만 떼어내거나 이름만 빌리는 식으로 변주·변형된 선언서들을 만들었고, 몰래 구한 등사기에 인쇄를 하고 자발적으로 배포를 하는 일은 비일비재했으며, 홀로 선언서를 쓰고 배포한 1인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만세 선창 시에는 도시에서는 쌀가마니, 고무신수레 등으로, 농촌에서는 산상(山上)으로 높은 곳을 찾아 오르고 올랐다. 1900년대를 소생시켜 전진의 곡조를 만들기도 했고 농촌에서는 “북 치고 나팔 불고 노래를 부르며” 축제 분위기가 이어졌다. 3·1 운동을 두고 부재하는 중심, 직접성과 즉각성, 불확실성을 논하는 것은 이러한 시위문화에서 기인하기도 할 터인데 권보드래는 이 현상이 동시대 다른 국가의 혁명에서는 볼 수 없는, 유례없는 사건이라 평한다.
『3월 1일의 밤』을 통해 1910~1920년대 발행된 잡지들과 문학작품들을 다수 접할 수 있는 것도 행운이다. 『각성회화보』, 『각성회』, 『자유신보』 그리고 『소년』,『청춘』『백조』, 『금성』 등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다종다양하다. 특히 이 책의 제4부 4장에서는 저자 본연인 국문학으로 돌아가 그간 3·1 운동 이후 1920년대 문학을 ‘퇴폐와 절망’으로 수식하는 데 물음표를 던지며 이광수, 채만식, 심훈, 김동인, 한용운, 임화 등을 다시 읽어낸다.

천 개의 욕망과 평화의 꿈

100년 전 사람들은 독립에 각인각색의 열망을 투영했으나 때로는 자신이 외친 만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한다. 뜻도 모른 채 경작할 땅을 되찾고 훈장이 될 수 있는 말을 믿으며 만세를 따라 불렀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어느 순간 옆 마을에서 만세성이 들리면 변소에 다녀오다가도 술 취한 귀갓길에도 습관처럼 외치고, 때로는 식민지도 죽음도 잊은 채 마을 축제를 즐기듯 빙글빙글 춤까지 추며 희열을 느꼈다. 결사대를 자처하고 만국의 공덕을 빌며 바닷가에 뛰어드는 일가 11인이 있었는가 하면, 자신이 누리던 모든 권력과 명예를 버린 채 러시아나 만주로 떠나는 이도 있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욕망과 결심을 제대로 설명하고 해석하기란 거의 불가능할지 모른다. 기껏해야 모두 한 마음으로, 더 이상 지배와 폭력이 난무하지 않은 평화로운 새 나라를 꿈꿨다는 정도로 말할 수밖에.
최근 3·1 운동에 대한 활발한 해석이 진행되며 3·1 운동에 혁명성을 주목하는 경향이 짙다. 또한 100주년을 맞아 3월 1일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들도 풍부해질 것이다. 권보드래는 이러한 논의에서 한걸음 물러서 있다. 3·1 운동을 10여 년에 품고 완성한 『3월 1일의 밤』이 16개의 병렬적인 키워드로 구성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날을 한 문장으로 결론 내릴 수 없음을 진작 알았기 때문 아닐까. 대신 3·1 운동의 빛나는 나날이 그리고 이 책이 지금에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가령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폭력의 반대가 비폭력인지 평화인지, 배제와 차별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저마다 다른 욕망을 지닌 채 모여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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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길고 잡다한 내용이 첨가되었지만, 3.1운동의 정신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훼손시킨 책.
저자에게 ‘친일인명사전‘과 장호철의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을 권한다.  구매
미남 2019-06-24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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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마이리뷰] 3월 1일의 밤 새창으로 보기 구매
전국 방방곡곡, 여러 해외 거점에서 그토록 오래 지속된 울림이, 단순히 일시에 뛰쳐나와 태극기를 흔든 평면적 사건이었을 리 없다.

구체제를 남김없이 애도하면서 도래하지 않은 유토피아를 꿈꾸고 아예 선포까지 해버린 이 무매개적 대중봉기는 세계사적, 보편주의적 맥락에서 다시 독해되어야 한다. 18, 9세기의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처럼, ‘있어야 할 세계‘를 둘러싼 20세기의 사상과 윤리가, 가장 순도 높게, 전 인류, 전 지구적 규모로 토론되었다는 차원에서...

권보드래 교수께서 귀한 작업을 해주셨다. 어느덧 우리도, 여러 분야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연구를 스스로 해나갈 수 있는 역량과 거리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판단한다. 이제 3단계를 함께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세계 각국 연구자들이 한국을 다양하게 연구하고, 한국 학자들과 경쟁하며 교류하는 단계이다(김두얼, ˝연구의 선진화˝, 매일경제신문, 2019. 6. 8. 자 http://m.mk.co.kr/news/opinion/2019/394933 참조). 이 책도 영어로 번역되면 좋겠다.

책이 워낙 훌륭하고 감동적이지만, 아래 첫 번째 인용 문단 마지막 문장과 관련하여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작년 5월 재정학회 월례세미나에서 명지대 경제학과 김두얼 교수께서 3·1 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철도‘가 크게 기여하였다는 통계 분석 연구를 발표하신 바 있다. 아직 논문으로 출간되지는 않은 듯하나, 식민지배와 경제적 이익을 위해 건설한 철도가, 저항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2단계에서 3단계로 나아가면서는, 논리의 빈틈을 상상력과 유려한 글발만이 아니라, 할 수 있는 한에서 숫자로 채워보려는 노력과 분위기가 조금 늘어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여전히 성리학자인 한국의 인문주의자들은, 통계는 기본적으로 조작이요, 거짓말이라는 내심 혹은 무의식적 저항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시행착오는 곧 인민의 고통으로 귀결되는 정책결정에서라면 더더욱 그래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 빈틈은 보통, 진영에 터 잡은 선명성이 채우곤 한다... 이도 결국은 성리학주의의 연장 아닐지... 진정성이라는 수사는 가려들어야 하고, 그것이 면죄부가 될 수도 없다. 모두가 똑같은 도둑놈에 사기꾼이라 여기는 항간의 시각에 비하면 묵묵히 최선 다하는 담백한 진국이 꽤나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대중에 정의의 사도로 알려진 분 중에도 재선 등 자신의 이해가 걸린 문제 앞에서는 언제라도 보이지 않게 누군가를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있는 분들을 숱하게 보았다. 대의를 위한 여우의 간계라 정당화하면서... 명분을 강하게 논거 삼을수록 그 명분을 위해 반대증거를 억압하고픈 유혹에도 쉽게 빠진다. 반대진영뿐 아니라 나도 이미지에 속고 있을 수 있고, 내 편이라 해서 무조건 믿을 수 있고 늘 선인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익숙함과 사이다에 중독되어 사고를 중지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스스로를 경계해야 한다.]

3·1 운동은 낮, 장터, 태극기로 표상되지만, 다른 한편 밤의 사건이요 산 위에서 만세 부른 사건이며 독립만세기를 휘날린 사건이다. 어디서는 3월 초로 끝났지만 어느 지역에서는 12월에야 시작된 사건이자, 누구에게는 성대한 평화시위로, 다른 이에게는 면사무소를 습격한 경험으로 남은 사건이기도 하다. 그만큼 3·1 운동의 얼굴은 여럿이다. 하긴 그토록 많은 이들이 3·1 운동에 뛰어들었으니. 식민권력의 통계로도 약 60만에서 100만이 참여했다고 할 정도다. 역시 식민권력의 인구통계 약 1,600만을 적용하면 전 인구의 3.7퍼센트에서 6.2퍼센트 정도가 된다. 이후의 어떤 사건도, 1960년의 4·19혁명이나 1987년의 6·10 민주화운동도 그만한 참여도에 이르지 못했다. 3·1 운동 때는 교통·통신이 미비했고 전국적 조직이나 지도체도 없었는데 말이다(11쪽).

19세기 후반 이래 역사를 지배해온 것이 개별-특수-보편, 나-가족-민족(국가)-인류라는 매개의 변증법이었다면, 3·1 운동은 그 안과 밖을 가로지른 사건이다. 3·1 운동의 그들은 민족(국가)과 탈민족(국가)을 동시에 꿈꾸었고, 대표-의회정치와 자치적 질서를 동시에 지향했으며, 역사-진보와 유토피아적 파국을 동시에 추구해 나갔다(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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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2019-06-20 공감(1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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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근대’를 사랑하는 법: 『3월 1일의 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진부하다, 세상에 널리고 널린 연애소설만큼.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낡은 말에 기꺼이 속아주는 이유는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정말로 첫눈에 반해서라기보다는, 그럴 수 있는 상대방이 나타나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마치 주문처럼 저 말을 되뇌고 또 되뇐다. 하지만 그런 마법 같은 일이 과연 실제로 벌어질까? 설사 처음 만난 누군가에게서 강렬한 스파크가 튄다 해도, 그걸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보지 않은지라 이런 말 꺼내기 민망하지만, 사랑이란 익숙한 존재가 문득 낯설게 느껴질 때 비로소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생전 처음 느끼는 낯설음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도 잠시, 나는 어떻게든 그를 알아보려 아등바등한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만 늘어갈 뿐임에도 이 공부가 전혀 헛되게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알아가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고,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 그를 만나면 만날수록 나는 이전과는 다른 빛깔로 채워져 간다.

낯설음에 놀라워하고, 알아감에 기뻐하는 이런 사랑은 비단 사람만을 향하지 않는다. 사람은커녕 생물도 아니고, 심지어는 형체조차 없다 해도 우리는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출간된 권보드래의 『3월 1일의 밤』 역시 3.1 운동이라는 사건을 이렇게나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권보드래의 오랜 팬으로서, 나는 그가 언제쯤 자신의 숙제라 이야기하던 3.1 운동의 문화사를 퍼낼지 늘 애가 달던 터였다. 책을 읽고 나서야 나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음을, 그가 이런 글을 쓰려고 그토록 오랜 시간 공을 들여왔음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저자 본인도 이야기하듯 『3월 1일의 밤』은 3.1 운동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앎”을 더하고자 쓰인 책은 아니다. 학술서가 아니기에 서술은 때때로 중구난방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의 목소리에 감정이 한껏 실려 있는 대목도 적지 않다. 하지만 감히 이야기하건대, 이 책의 가장 훌륭한 점은 바로 이러한 두서없음이다. 저자는 기존의 미끈한 내러티브를 답습하는 대신, 3.1을 둘러싼 복잡하고 모순적인 목소리들을 모두 끌어안는다. 고작해야 유관순 ‘누나’에 머물러 있던 우리의 3.1 이해는 불안과 희망, 냉소와 기대, 욕망과 숭고가 뒤엉킨 무수한 꿈들 앞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3.1 운동을 새롭게 알아가기 위해, 그럼으로써 그를 보다 깊게 사랑하기 위해 저자는 렌즈를 돌려가며 줌아웃과 줌인을 반복한다. 세계사의 맥락 속에 3.1을 위치 짓는 동시에, 개개인의 삶 속에서 3.1이 어떤 의미였는가를 파고드는 것이다. 오지 않은 미래를 끌어와 이 자리에 펼쳐 보이는 1부 1장 <선언>에서 이미 지나간 과거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4부 4장 <후일담>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세계와 개인을 분주히 오고가며 3.1 운동에 너비와 깊이를 부여한다.

저자에 따르면 1910년대는 세계적인 혁명의 시대였다. 1910년 멕시코혁명을 시작으로 1911년 신해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핀란드와 독일, 헝가리혁명에 이르기까지 세계각지에서 기성체제를 타파하려는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운동이 잇따라 발생했다. 또한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당시 사람들에게 단순한 종전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문명’을 자임하며 전 세계에 오만하게 군림하던 유럽은 누구보다 추하게 자멸했다.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른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유의 제국과 정의의 제국을 자임했다. 체코, 아일랜드, 인도, 이집트 등 세계 각지의 식민지와 속령에서 독립의 움직임이 들끓었다.

이처럼 혁명의 에너지가 넘쳐나던 1910년대, 일본의 지배에 놓인 조선만은 유독 고요하고 안온했다. 뜻밖에도 식민통치는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총독부는 조선인에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기쁨을 누리는 소박한 양민(良民), 개인과 가족 외에는 일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착실한 선민(善民) 되기를 요구했다. 게으르고 불결한 조선인이라는 모욕을 받아들인다면, 공적인 일에 목소리를 내려는 욕구를 억누른다면, ‘내지’가 위험에 처할 경우 가장 먼저 내쳐질 신세라는 사실에 눈을 감는다면 충분히 괜찮은 세상이었다.

그러나 침묵은 결코 무기력한 순응을 의미하지 않았고, 지난 10년간 차곡차곡 쌓여간 저항의 에너지는 결국 1919년 3월 한꺼번에 폭발했다. 조선의 사람들은 처음으로 자신과 가족을 넘어 다양한 타자들과 연대했고, 비로소 ‘사회’를 상상할 수 있었다. 식민권력은 일체의 사회단체를 허용치 않았기에 운동을 지휘할 지도부가 부재했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대표자 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전달했다. 바야흐로 너도나도 대표를 자임하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오직 자신만이 자신을 대표하는 세계의 문이 열리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저마다의 꿈을 그야말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화정을 지지했지만, 독립을 지키고 정국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선 왕정복고가 불가피하다 여기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공화정이라 해도 그 구체적인 모습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을 것이다.

비단 정체(政體)에 대한 이야기만 오고간 것이 아니다. 제 1차 세계대전을 근거로 서구문명의 종언을 고하는 거대담론과 공동묘지가 아닌 선산에 부모를 묻겠다는 소박한 요구가 같은 시공간에 나란히 존재했다. 사람들은 ‘일제의 폭력’과 ‘근대의 폭력’ 모두에 저항했고, 양자를 굳이 구분하려 들지 않았을 뿐더러 그럴 수도 없었다. 독립(獨立), 개조(改組), 도의(道義), 공존(共存), 균분(均分)과 같은 말들이 희망과 불안을 머금은 채 거리를 부유했다.

물론 가능성은 가능성으로만 남았을 뿐, ‘개벽’은 결코 도래하지 않았다. 조선은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고, 세계 역시 공존공영의 길로 나아가지 못했다. 3.1 운동과 함께 터져 나온 무수한 말과 글들도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3.1이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중심’과는 다른 ‘주변’의 근대를 개척하고자 고군분투한 생생한 증언록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랫동안, 주변의 근대는 ‘수탈’과 ‘개발’이라는 이항대립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주변이 황폐화되었든 윤택해졌든 간에 이를 실현한 x변수는 결국 중심이라는 점에선 ‘수탈’과 ‘개발’이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주변의 ‘모던함’에 주목하는 문화사나 중심(제국)과 주변(식민지)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제국사라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긴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중심의 역사를 그대로 주변에 이식한 것 아니냐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권보드래는 이 x(중심/제국)→y(주변/식민지)라는 도식 자체에 손을 대지는 않는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는 게 보다 정직한 표현일 것이다. 중심의 그림자를 애써 걷어내려는 시도는 결국 꼴사나운 자기연민이나 광기에 찬 폭주로 이어지기 마련이므로. 대신 그는 y가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벡터에 주목한다. x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해서 y가 이를 그대로 답습하는 건 아니다. y, 즉 주변이라는 위치 자체로부터 비롯된 힘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변은 거의 언제나 중심에 비해 미숙하고, 중심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위치 덕에 주변은 중심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3.1을 전후해 터져 나온, 설익었지만 생생히 살아 있는 목소리들이야말로 한반도의 근대인 것이다. 김수영의 말마따나 우리는 이 근대에 거대한 뿌리를 박아야 한다, 제3한강교의 철근기둥도 좀벌레의 솜털로 느껴질 만큼 거대한 뿌리를.

아울러 다른 주변과의 접점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단순히 3.1 운동이 5.4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식으로 x→y의 도식을 그대로 반복할 게 아니라, 세계 각지의 y들이 만들어낸 변화무쌍한 벡터를 넓은 시야로 아울러야 한다. 저자가 3.1에 닿기 위해 프랑스혁명과 아이티혁명,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 라틴아메리카와 인도차이나의 역사를 공부한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친구가 그랬던 것 같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결국 그와 함께 있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친구도 필시 어느 소설이나 영화에서 들었던 것이겠지만, 이제 와서 출처는 그리 중요하지 않지 싶다. 『3월 1일의 밤』을 읽으며 나는 한반도의 근대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다. 물 수 없으면 짖지도 말라던 윤치호나 민족개조를 외친 속물교양 이광수뿐 아니라, 일제가 나무를 꺾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무명씨까지 말이다.

잘못 쓴 거 아니냐고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겠다. 부끄럽지만 제대로 쓴 게 맞다. 그동안 내가 마음을 주고 관심을 쏟아온 대상은 어디까지나 윤치호나 이광수 같은 사람들이었다. ‘트랜스내셔널’한 코스모폴리탄으로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는 내 모습이 이들 식민지 지식인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아, 물론 윤치호와 이광수는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라 나랑 비교하는 게 실례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윤치호와 이광수는 물론이고, 이들을 좌절케 하고 끝내는 ‘흑화’시킨 식민지 조선 역시 사랑하려고 한다. 주변이라는 좌표로부터 비롯된 가능성과 한계를 낯설게 봄으로써 한반도의 근대를, 나아가 한국어 화자로서의 나를 조금 더 좋아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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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근 2019-04-28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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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식
17 May at 06:45 · 
[서평] 3월 1일의 밤

1.

“삼일운동은 고종 인산일에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으로 시작된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대한 비폭력 불복종 저항운동이었으며, 이 일로 인해 수많은 동포들이 고초를 당하였고,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대한민국의 기틀을 이루었다. 우리 헌법은 전문에서 이 정신을 이어받아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것이 알고 있는 전부이기도 하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는 있으나, 일찍부터 배워온 삼일운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아는 것이라고는 고작 그것뿐인데도 삼일운동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삼일운동은 우리 국민의 정신적인 버팀목이라고 생각한다.

삼일운동 백 년째 되는 날 고려대 권보드래 교수가 펴낸 ‘3월 1일의 밤’을 읽고서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의 근현대문화를 연구하는 권보드래 교수는 1900년대 초 문학 형성과정에 대한 박사 논문을 마친 후 이후의 사회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삼일운동에 대한 자료를 읽기 시작한 이래 이십 여 년 가까운 세월을 삼일운동 연구에 쏟아 부었고, 마침내 삼일운동이 시작된 지 백 년째 되는 날 ‘3월 1일의 밤’이라는 육백오십 여 쪽에 이르는 저서를 열매로 내놓았다.

2.

저자는 삼일운동이 많이 이들에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기억되는 사건이라고 했다.

“삼일운동은 낮, 장터, 태극기로 표상되지만, 다른 한편 밤의 사건이요 산 위에서 만세 부른 사건이며 독립만세기를 휘날린 사건이다. 어디서는 3월 초로 끝났지만 어느 지역에서는 12월에야 시작된 사건이자, 누구에게는 성대한 평화시위로, 다른 이에게는 면사무소를 습격한 경험으로 남은 사건이기도 하다. 식민권력의 통계로도 약 60만에서 100만이 참여했다고 할 정도다. 인구 1,600만의 3.7~6.2%에 이른다. 교통 통신이 미비했고 전국적 조직이나 지도체도 없었는데 말이다.”

“봄철 내내, 낮에 장터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3월 1일 밤 서울에서는 수백 명의 노동자가 만세를 불렀고, 평양에서는 수천 명이 낮보다 성대하게 악대를 앞세우고 등불 손에 든 채 시내를 행진했다. 그들은 어스름녘 시내에서 전차에 투석하고, 어둠이 짙어질 때 뒷산에서 봉화 올리고, 밤 깊어갈 무렵 모여서 산 너머 주재소를 향하곤 했다.”

그래서 저자는 삼일운동 한복판에 서있던 축보다는 ‘3월 1일의 밤’에 가까운 덜 알려진 사람, 즉, 만세 한 번 불러보지 못하고, 시위행렬을 따라다닌 게 고작인, 돌 한 번 던지곤 다시는 역사에 떠오르지 않은 수많은 무명씨들을 우선 다루었다.

3.

삼일운동은 조직화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본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조선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조선이 독립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한 사람도 적지 않았고, 그래서 3월 1일 오후에 평양집회는 ‘독립축하회’로 열렸다. 독립은 이미 현실이 되어 경찰과 헌병이 이를 방관하는 가운데 독립선언서가 붙고 태극기가 휘날렸다. 이런 ‘예언적 소문(prophetic rumor)’으로 인해 일부 지역에서는 일시적으로 해방구가 조성돼 ‘대한독립운동 준비사무소’가 생기고, 자치적으로 행정을 집행하기도 했고, 면사무소의 비품과 자금을 압수하기도 했다. 가히 독립되었다고 믿기에 부족함이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소문이 오보인 것이 밝혀지면서 군중의 희생이 뒤따랐다. 그러나 인명피해에도 불구하고 소문은 끈질기게 퍼져갔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조선이 독립되었으나 일본이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젊은 유생이 일본 국왕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경고하기도 했다. 좀 더 사정을 자세히 짐작하는 사람들은 한창 진행 중인 파리평화회의에서 조선 독립이 긍정적으로 검토되고 있으므로 곧 나라를 되찾으리라 기대했다.

삼일운동은 근 십여 년간 일체의 정치 사회적 조직이 금지된 상황을 뚫고 나온 봉기였으나, 대부분은 외부와 어떤 조직적 네트워크도 없는 상태에서 일어났다. 인산에 참여했다가 얻은 독립선언서나 각처에서 일어난 만세 소문 외에는 어떤 배후도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촌락 단위 동원을 한 경우가 많기는 했어도 지위가 특별할 것 없는 소수가 문서와 깃발을 준비해 시위를 일으킨 경우 또한 많았다. 결국 일본정부에서 우려한 ‘조선으로 하여금 신독립국을 건설할 목적으로 각 지방 봉기를 조직 지휘한 중심체’는 삼일운동을 통해 존재하지 않았다.

4.

조선 독립을 꿈꾼 이들이 생각한 독립은 놀랍게도 무너진 왕정을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정, 공화정이었다. 손병희는 어떤 정체의 나라를 세울 생각이었냐는 검찰의 신문에 “민주정을 할 생각이며,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진술했다. 유럽 전쟁이 끝나면 세계의 상태가 일변하여 세계에 임금이라는 것이 없어지게 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4월 23일 종로 보신각에서 열린 국민대회에서는 ‘공화 만세’라는 깃발이 등장했다. 3대 만세 지역으로 꼽히는 황해도 수안에서는 3월 3일에 이미 “공화정치는 세계의 대세이니 속히 분대를 명도하고”고 외쳤고, 평북 선천에서는 “우리 조선민족은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의 신국가를 건설하려고 한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보다 신중한 측은 왕정과 공화정 양쪽 다 가능성을 열어두고 “독립이란 황제 또는 대통령이 나와 조선을 통치한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일부 유생은 “이조의 부활을 희망하지는 않으나 결국은 왕정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이조는 유생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하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삼강의 가르침에 임금이 있고 신하가 있는 법인데 공화제가 되면 유생의 입장이 없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의병장 한 사람은 “선거제는 자칫 외세에 의존하기 십상인 반면 왕정은 국민 통합과 정치 안정에 보다 유리하다”는 실리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왕정을 주장하였다.

어찌 되었든 대다수가 삼일운동을 통해 독립하고자 했던 나라는 공화정, 민주정이었으며, 왕정으로 돌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5.

예나 지금이나 움직이면 돈인데, 그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곳에서 움직이려면 상당한 자금이 드는 건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삼일운동의 자금에 대해 들어본 일도, 생각해본 일도 없다. 독립선언서나 휘두를 태극기를 만드는 데도 돈이 들었을 것이고, 밤에 시위 벌일 때 횃불 봉홧불은 그냥 피울 수 있는 것인가. 당시 격문도 적지 않았고 지하신문도 다수 발간되고 배포되었다. 독립선언서나 격문을 지방으로 배포하는데 여비로 지불된 돈도 그렇고, 제등행렬도 적지 않았고,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 물마시게 하고 요기하게 하는 것도 거저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사무원 월급이 25원 남짓이었는데 독립선언서 한 장 붙이는데 1원을 지불했다는 기록도 있다.

천도교에서는 거금 5천 원을 부담했고, 이밖에도 교섭과 회의에 필요한 자금과 인쇄 배포에 소용되는 자금 대부분을 책임졌다. 해외로 대표를 파견하고 관련자들 옥살이를 돌보는 자금도 댔으며, 교인들이 밥 지을 때 성미를 한 숟가락씩 덜어 모았으며, 천도교회당 신축기금을 걷었다 반납을 지시받은 것을 허위 영수증에 날인만 받은 후 다시 거둬들여 쓰기도 했다. 도쿄 2.8 독립선언 때 정노식이 2천 원을 지원했는데, 2.8 독립선언서를 번역해 파리 평화회의에 타전하는 데만 거금 720원이 들기도 했다. 평남 용강에서는 격문 만들 종이를 사기 위해 참여자들이 2전씩 갹출했다. 경기 가평에서는 깃발 제작비용을 동리에서 공동 지출했다. 경남 합천에서는 만석꾼 김홍석이 거금을 희사해 독립선언서를 찍어내고, 서울 경성고보에서는 학생이 집에서 붙여온 학비 10원을 털어 격문을 제작했다.

저자는 “구차할 수밖에 없는 세목들 - 천과 물감과 종이와 잉크와 등사기, 게다가 담뱃값과 식사대와 교통비 등의 항목은 삼일운동 관련 자료를 통해 반복적으로 출현한다. 누구든 싫도록 목격해왔듯 돈이 많은 것을 의미하고 여러 가지 일을 가능케 한다. ‘2.8 독립선언서’와 ‘기미 독립선언서’의 언어적 수행성도 돈 없이는 무용지물이었을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6.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삼일운동은 비폭력 저항운동이었다. 그런데 그 비폭력 저항운동이 어떻게 펼쳐졌는지, 비폭력은 그럴 힘이 없었기 때문인지 힘이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은 건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평남 강서군에서는 시위대에 발포한 일본 경찰의 총을 빼앗고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내려쳐 일본 경찰 이 몇 명 사망했다. 시위대가 폭력을 행사할만한 기구를 갖고 간 것도 아니었고, 돌맹이조차 들지 않고 주재소로 향했으나 일본 경찰은 이를 관청기물을 파괴하려는 세력으로 간주하고 응대해 시위대의 저항을 촉발한 것이었다. 일본 경찰과 군대가 출동해 남성 4백 여명을 무차별 연행, 혹독하게 고문했다. 그러나 이런 저항조차 극히 일부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일운동을 통해 목적의식적 무기 확보가 시도된 일이 없었다. 우발적 탈취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집단적 목적의식적 탈취가 없었다는 것이다. 광산 노동자들이 봉기했을 때에도 화약 탈취는 일어나지 않았다. 삼일운동 당시 총기 입수가 불가능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평남, 평북, 경북 등지에서 총기를 탈취한 경우가 있었지만 다음날 순순히 총기를 반납했다.

저자는 “삼일운동의 결정적 특징 중 하나가 공포와 희망 사이를 분노가 매개하는 가운데 대중은 ‘폭력이 된 권력’을 휘두르는 식민권력에 맞서 줄기차게 ‘폭력 너머의 힘’을 추구하고 실천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 원동력이 무엇인지, 무엇이 그들이 비폭력을 고수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선명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다.

7.

3월 1일 독립선언서 발표와 함께 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3월 5일 아침 남대문역 시위 후 학생이 중심이 된 시위는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학생들 상당수가 등교를 거부하고 귀향을 택했거나 주도 세력 대부분이 검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시위를 이어간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3월 8일 용산 인쇄국 노동자 200명, 9일 동아연초 노동자 500명, 같은 날 철도국과 경성전기회사 직공과 차장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파업하거나 영업을 거부하였다. 3월 22일 열린 노동자대회에서 도시노동자의 존재를 각인시켰으며, 이후 노동자는 시위를 계획할 때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삼일운동은 노동자라는 존재를 사회화시켰고 노동문제를 전 사회적 문제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인들의 삶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는 조선에서 공장 노동자의 비중이 전체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수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막 제기되기 시작했던 노동문제는 아직 ‘독립 만세’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8.

삼일운동은 한국사의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는데도 우리는 3월 1일 당시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어떻게 언제까지 진행되었고, 그 운동을 통해서 회복하고자 했던 나라의 정체는 무엇이었는지, 그 정체는 어떤 과정 어떤 배경을 통해 형성되었는지, 삼일운동은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알지 못한다. 막상 알고 있는 것은 독립선언서,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 유관순 열사와 같은 특정한 이미지 몇 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3월 1일의 밤’은 삼일운동이 그저 역사책에 실려 있는 옛날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치르고 이루어낸 아주 구체적인 우리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었기에 적지 않은 자금이 소요되었고, 그 자금은 재산가의 거액의 후원금으로부터 시위 참여자들이 격문을 제작하기 위해 갹출한 2전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기도 하다.

다만, 삼일운동으로 대중들이 복구하고 싶었던 국가는 왕정이 아니라 공화정이었으며, 이러한 목표는 소수의 지도자들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시위 참여자들의 광범위한 공감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 결정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설명이 충분치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무기를 갖출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굳이 비폭력운동을 고수했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는 것 또한 아쉽다.
3·1 운동에 가닿기 위한 10여 년의 기록16개의 시선으로 복원한 1919년 3월 1일 문학과 역사를 넘나들며 근대를 보는 지평을 넓혀 온 고려대 국어국문과 권보드래 교수가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간의 연구와 기록을 한 권에 담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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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의 밤
3·1 운동에 가닿기 위한 10여 년의 기록16개의 시선으로 복원한 1919년 3월 1일 문학과 역사를 넘나들며 근대를 보는 지평을 넓혀 온 고려대 국어국문과 권보드래 교수가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간의 연구와 기록을 한 권에 담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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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崔明淑, 권용득 and 1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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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득
권용득 어마어마한 책에 어마어마한 서평이로군요. 사실 저도 이 책 연초에 정말 재밌게 읽다 다른 일로 바빠서 중간에 덮었는데, 다시 읽어야겠네요. 선생님 서평 읽은 것만으로 이미 다 읽은 것 같지만요ㅎㅎ
아무튼 서평 정말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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