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권력집단인 성리학자들, 왕권조차 제약 정치 외교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종교 교육 통제"
K스피릿
입력 2020.12.17
국학원, 16일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초청 제206회 국민강좌 온라인으로 진행
국학원은 12월 16일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전 고조선단군학회 회장)를 초청하여 제206회 국민강좌를 온라인으로 개최했다. 윤명철 명예교수는 “조선 유교체제의 명암”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사진=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사단법인 국학원(원장 권나은)은 12월 16일 오후 7시 30분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전 고조선단군학회 회장)를 초청하여 제206회 국민강좌를 온라인으로 개최했다.
이날 윤명철 교수는 “조선 유교체제의 명암”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국학원은 윤 교수의 강연을 국학원 유튜브 채널을 통해 실시간으로 스트리밍 중계했다.
윤 교수는 먼저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점은 상당부분 조선의 유교체제에서 비롯된 만큼 성리학자들이 어떤 성격의 집단이고 그들이 주도했던 조선과 정치 및 사회사상을 알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홍익인간 등 우리 사상, 유교 또는 성리학에서 공존의식, 공동생명체 의식 등을 회복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윤 교수는 성리학은 남송에서 발전했는데, 고려말의 사회적 모순, 즉 건국 이래 존재한 문벌 귀족들, 무신정권의 잔재들 등 정부의 요직과 대농장을 소유한 권문세족, 부패하고 타락한 불교의 대안 세력으로 성리학을 활용했다며 새 질서 구축의 주역인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개혁의 이론적 토대와 명분 제공, 구조적인 모순 해결의 사상과 방략으로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정도전이 1394년 태조에게 바친 <조선경국전>에는 국가의 목표, 정책의 대강과 방법론을 제시하여 성리학 사상으로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했고 <경국대전>을 전범으로 하여 조선은 끝까지 성리학의 정치사상, 경제사상, 사회사상을 추구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 사회에는 성리학 체제가 성립하는데, 윤 교수는 “조선 성리학자들은 과거라는 통과의례를 거쳐 모든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학자이자 실현하는 관료로 학자적 관료, 관료적 학자였으며, 유일한 생산수단이며 재화인 토지를 소유한 경제인, 불교를 대체한 유교를 관리하는 종교인, 시서화(詩書畵)를 창작하는 문화인,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왕권조차 제약하고 사적인 법집행도 가능한 사회권력을 소유한 절대적인 권력집단으로 변신했다”고 설명했다.
성리학 체제에서는 신분제의 고착, 차별정책이 철저해진 것도 특징이다.
윤 교수는 “조선은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4단계로 구분하고 신분간 이동 전환이 불가능한 체제로 고착하고 신분을 사농공상어업 등의 직업과 연결하여 경제적 차별까지 명문제도화했다. 선비는 정통론과 명분론으로 장자상속제와 적서차별을 하고, 남녀 차별 등의 사회체제를 구축했다.”며 “조선은 양반을 정점에 둔 견고한 ‘서열(rank)사회’ ‘계급사회’로 전환했다.”고 말했다.
셋째로 조선은 농업 위주 정책을 강행했는데, 윤 교수는 “벼농사를 중시했는데, 낮은 산, 들판, 길고 느린 강물이 발달한 자연환경에 적합했지만, 조세 징수, 백성의 조직적 관리에 편리한 점이 있었다. 농민들을 법령으로 토지에 묶어두면서 주거 이전의 자유를 속박했다. 그리고 공업, 상업, 광업, 어업, 무역을 억압하고 천시했다”고 설명했다.
넷째로 조선은 쇄국정책를 강화하여, 멸망할 때까지 고수하여 역사발전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 윤 교수는 “조선은 건국 초기 ‘사대교린’을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 완벽한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유구국은 40회 이상 사절단을 조선에 파견했으나 조선은 2회만 파견했다. 명나라는 해금정책을 추진하고 일본은 쇄국의 기조 속에서 부분적인 개항을 허용한 것과 대조가 된다. 일본은 센다이번의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1613년 180여명의 유럽 파견사절단을 이끌고 멕시코, 스페인, 로마에 도착하여 교황 바오로5세를 알현하고 1620년 귀국한 일도 있다.”며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신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국제관계의 파악과 외교술이 능력부족으로 국제정세를 파악할 능력이 없었다. 국방, 주변국과 관련된 사업(무역)에 등한시하여 임진왜란, 병자호란에 대비하지 못했다”고 성리학체제를 비판했다.
다섯째 조선의 성리학체제는 외세의존적 성격과 체제를 강화했다. 윤 교수는 “조선은 건국과정에서 국호의 선택, 임금의 즉위 등에 명나라의 허락을 구했고, 명나라 연호를 수용하는 외세의존적이었다. 정치적인 선택과 외교관계의 기본 성격 결정에 명나라의 간섭과 영향이 있었고, 조공품의 양 증가, 금 등 특산물의 요구가 심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며 “외세 의존적인 정권은 상실된 자주성을 감추거나 왜곡시킬 의도로 내부를 더 억압하는 경향이 있고, 내부의 정통성이 허약하여 내부의 정치적 도전이 심각할수록 외세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윤 교수는 이로 인해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모화사상이 심화되고 사회 전체가 자율성과 활력이 약해지고, 문화는 사변적이고 창조성이 떨어졌다. 정치와 정책이 실종하고 성리학의 해석을 빌미로 내부 정치 권력투쟁이 심화되었다”고 말했다
여섯째 조선은 양반들의 문화와 예술 독점 현상이 강했다. 윤 교수는 “전국에 설치한 향교와 사당, 정자 등을 네트워크화 한 후에 거점으로 사용하여 유교를 종교와 사회윤리로 교육하고 생활화했다. 전통신앙과 불교, 습속 등을 억압하여 우리 고유의 것이 많이 상실되었다. 예술은 사대부와 양반들이 주축이 되어 송나라와 명나라의 문화를 모방한 ‘시서화’라는 장르를 생산, 평가, 향유 등 예술을 독점했다. 실생활에 기초한 문화 및 평민들이 참여한 놀이와 예술은 천시했다. 그들이 즐긴 산수화에는 우리의 강산이 아닌 중국의 강산,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중국인을 그렸다. 중국인이 아닌 우리들이 그림에 등장한 것은 18세기 중반 이후이다”라고 말했다.
윤 교수는 조선 성리학 체제를 이렇게 설명하고 “조선의 역사에서 공동체 의식의 구현, 미풍양속의 보존, 국난 때 의병장들의 활동 등 긍정적인 면이 있고, 조선 사회의 한계, 긍정적이지 못한 면들이 있다. 이러한 것을 인식하여 오늘날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국학원 제207회 국민강좌는 2021년 1월 13일(수)에 열릴 예정이다.
정유철 기자 npn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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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성리학 #장자상속 #남녀차별 #시서화 #정도전 #조선경국전 #경국대전 #쇄국정책
이 기사와 관련된 기사 성리학은 조선을 어떻게 지배했나
사단법인 국학원(원장 권나은)은 12월 16일 오후 7시 30분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전 고조선단군학회 회장)를 초청하여 제206회 국민강좌를 온라인으로 개최했다.
이날 윤명철 교수는 “조선 유교체제의 명암”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국학원은 윤 교수의 강연을 국학원 유튜브 채널을 통해 실시간으로 스트리밍 중계했다.
윤 교수는 먼저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점은 상당부분 조선의 유교체제에서 비롯된 만큼 성리학자들이 어떤 성격의 집단이고 그들이 주도했던 조선과 정치 및 사회사상을 알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홍익인간 등 우리 사상, 유교 또는 성리학에서 공존의식, 공동생명체 의식 등을 회복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윤 교수는 성리학은 남송에서 발전했는데, 고려말의 사회적 모순, 즉 건국 이래 존재한 문벌 귀족들, 무신정권의 잔재들 등 정부의 요직과 대농장을 소유한 권문세족, 부패하고 타락한 불교의 대안 세력으로 성리학을 활용했다며 새 질서 구축의 주역인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개혁의 이론적 토대와 명분 제공, 구조적인 모순 해결의 사상과 방략으로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정도전이 1394년 태조에게 바친 <조선경국전>에는 국가의 목표, 정책의 대강과 방법론을 제시하여 성리학 사상으로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했고 <경국대전>을 전범으로 하여 조선은 끝까지 성리학의 정치사상, 경제사상, 사회사상을 추구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 사회에는 성리학 체제가 성립하는데, 윤 교수는 “조선 성리학자들은 과거라는 통과의례를 거쳐 모든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학자이자 실현하는 관료로 학자적 관료, 관료적 학자였으며, 유일한 생산수단이며 재화인 토지를 소유한 경제인, 불교를 대체한 유교를 관리하는 종교인, 시서화(詩書畵)를 창작하는 문화인,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왕권조차 제약하고 사적인 법집행도 가능한 사회권력을 소유한 절대적인 권력집단으로 변신했다”고 설명했다.
성리학 체제에서는 신분제의 고착, 차별정책이 철저해진 것도 특징이다.
윤 교수는 “조선은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4단계로 구분하고 신분간 이동 전환이 불가능한 체제로 고착하고 신분을 사농공상어업 등의 직업과 연결하여 경제적 차별까지 명문제도화했다. 선비는 정통론과 명분론으로 장자상속제와 적서차별을 하고, 남녀 차별 등의 사회체제를 구축했다.”며 “조선은 양반을 정점에 둔 견고한 ‘서열(rank)사회’ ‘계급사회’로 전환했다.”고 말했다.
셋째로 조선은 농업 위주 정책을 강행했는데, 윤 교수는 “벼농사를 중시했는데, 낮은 산, 들판, 길고 느린 강물이 발달한 자연환경에 적합했지만, 조세 징수, 백성의 조직적 관리에 편리한 점이 있었다. 농민들을 법령으로 토지에 묶어두면서 주거 이전의 자유를 속박했다. 그리고 공업, 상업, 광업, 어업, 무역을 억압하고 천시했다”고 설명했다.
넷째로 조선은 쇄국정책를 강화하여, 멸망할 때까지 고수하여 역사발전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 윤 교수는 “조선은 건국 초기 ‘사대교린’을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 완벽한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유구국은 40회 이상 사절단을 조선에 파견했으나 조선은 2회만 파견했다. 명나라는 해금정책을 추진하고 일본은 쇄국의 기조 속에서 부분적인 개항을 허용한 것과 대조가 된다. 일본은 센다이번의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1613년 180여명의 유럽 파견사절단을 이끌고 멕시코, 스페인, 로마에 도착하여 교황 바오로5세를 알현하고 1620년 귀국한 일도 있다.”며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신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국제관계의 파악과 외교술이 능력부족으로 국제정세를 파악할 능력이 없었다. 국방, 주변국과 관련된 사업(무역)에 등한시하여 임진왜란, 병자호란에 대비하지 못했다”고 성리학체제를 비판했다.
다섯째 조선의 성리학체제는 외세의존적 성격과 체제를 강화했다. 윤 교수는 “조선은 건국과정에서 국호의 선택, 임금의 즉위 등에 명나라의 허락을 구했고, 명나라 연호를 수용하는 외세의존적이었다. 정치적인 선택과 외교관계의 기본 성격 결정에 명나라의 간섭과 영향이 있었고, 조공품의 양 증가, 금 등 특산물의 요구가 심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며 “외세 의존적인 정권은 상실된 자주성을 감추거나 왜곡시킬 의도로 내부를 더 억압하는 경향이 있고, 내부의 정통성이 허약하여 내부의 정치적 도전이 심각할수록 외세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윤 교수는 이로 인해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모화사상이 심화되고 사회 전체가 자율성과 활력이 약해지고, 문화는 사변적이고 창조성이 떨어졌다. 정치와 정책이 실종하고 성리학의 해석을 빌미로 내부 정치 권력투쟁이 심화되었다”고 말했다
여섯째 조선은 양반들의 문화와 예술 독점 현상이 강했다. 윤 교수는 “전국에 설치한 향교와 사당, 정자 등을 네트워크화 한 후에 거점으로 사용하여 유교를 종교와 사회윤리로 교육하고 생활화했다. 전통신앙과 불교, 습속 등을 억압하여 우리 고유의 것이 많이 상실되었다. 예술은 사대부와 양반들이 주축이 되어 송나라와 명나라의 문화를 모방한 ‘시서화’라는 장르를 생산, 평가, 향유 등 예술을 독점했다. 실생활에 기초한 문화 및 평민들이 참여한 놀이와 예술은 천시했다. 그들이 즐긴 산수화에는 우리의 강산이 아닌 중국의 강산,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중국인을 그렸다. 중국인이 아닌 우리들이 그림에 등장한 것은 18세기 중반 이후이다”라고 말했다.
윤 교수는 조선 성리학 체제를 이렇게 설명하고 “조선의 역사에서 공동체 의식의 구현, 미풍양속의 보존, 국난 때 의병장들의 활동 등 긍정적인 면이 있고, 조선 사회의 한계, 긍정적이지 못한 면들이 있다. 이러한 것을 인식하여 오늘날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국학원 제207회 국민강좌는 2021년 1월 13일(수)에 열릴 예정이다.
정유철 기자 npn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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