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易地思之] ‘지방소멸’을 막을 최후 카드는 ‘지역정당’이다
기자명 강준만
입력 2022.06.14
"각 정당들은 그들만의 놀라운 철옹성을 쌓는 데 성공했다. 시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당원은 모든 정파를 다 합해도 최대 36만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프랑스 국민의 0.5퍼센트에 불과한 숫자다. 이런 상황임에도 그들은 모든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후보 선정의 독점권을 쥐고 있다!"
프랑스 정치학자 로맹 슬리틴이 ‘시민 쿠데타: 우리가 뽑은 대표는 왜 늘 우리를 배신하는가?’(2016)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후보 선정의 독점권’이란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속된 말로 하자면, 세상에 이런 ‘대박 장사’가 어디에 있겠는가. 정당의 공천이 곧 당선으로 통하는 지역이 많은 거대 양당제 국가에선 정당이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고 무엇이랴. 어느 나라에서건 정치혐오 정서가 강함에도 정치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바로 정당이 제공할 수 있는 ‘권력’ 또는 ‘이권’의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일 게다.
양당제 국가에서의 정치는 조폭들의 패싸움과 비슷하다. 불가리아 출신의 영국 작가이자 문화인류학자인 엘리아스 카네티는 이미 60여년 전 ‘군중과 권력’(1960)에서 "현대 의회의 양당 제도는 서로 적대하는 군대의 심리적 구조를 이용하고 있다"며 "그것은 전쟁의 경우처럼 의지와 의지의 대결이다"라고 했다.
양당제 체제에서 선택이 양자택일의 문제로 축소되면 정당의 후보자들은 유권자의 지지를 얻을 필요가 없어진다. 미국의 작가 레베카 코스타는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우리가 단 하나뿐인 대안, 즉 그들의 경쟁자로부터 등을 돌리도록 하는 것뿐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쩌면 자유로운 선택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우리가 하는 일은 한 후보자를 반대함으로써 자동적으로 다른 유일한 대안에 지지를 보내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두 세기가 넘도록 양당제에 정체되어 있는 이유이자, 우리가 앞으로도 수 세대에 걸쳐 이 방식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최근 한국에선 ‘팬덤정치’의 폐해가 논의되고 있지만, ‘팬덤정치’는 정확한 이름은 아니다. 대중문화 분야의 팬덤에게 결례일 수 있다. 정치 분야의 팬덤은 처음부터 누굴 좋아하거나 사랑해서 형성된 집단이라기보다는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증오하거나 혐오하기 때문에 그 반대편에 있는 정당이나 후보에게 지지를 보내는 집단이라고 보는 게 옳다.
내가 증오하거나 혐오하는 사람을 누군가가 대신 응징해준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고맙고 예뻐 보이겠는가. 그래서 집단적으로 보내는 지지와 감사의 표현이 팬덤처럼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동기 자체가 불순하다는 점에서 대중문화 팬덤보다는 격과 수준이 크게 떨어진다. 어느 나라에서건 특정 후보에 대한 증오나 혐오가 정치적 선택의 동력이 되는 응징 투표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한국은 그로 인한 부작용이 매우 심하게 나타나는 나라다. 무엇보다도 바로 그런 응징투표가 지방소멸의 위기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6·1 지방선거(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끝난 후 감명 깊게 읽으면서 내심 경의를 표한 기사가 하나 있다. 6월 2일 ‘무등일보’에 게재된 "충격의 37.7%…민주당 염증 극에 달했다"는 제목의 기사다. 이 기사는 "불과 85일 전에 치러진 3·9대선에서 전국 최고 투표율(81.5%)을 기록한 광주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37.7%로 역대 모든 선거와 모든 지역을 통틀어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했다"며 "어차피 민주당 후보가 될 것이 뻔한 데 안 찍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는 심리였다"고 개탄했다. 이 기사의 주요 내용을 압축해 소개하자면 다음 다섯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불공정·불투명으로 상징되는 민주당 경선과 공천만 받으면 끝이라는 안일한 선거운동은 ‘일당 독점의 염증유발 정치’를 초래했다. 둘째, 민주당을 당원들에게 돌려준다는 구실로 탄생한 ‘권리당원제’는 기존 기득권 정치를 유지시켜주는 보호막으로 전락했다. 셋째, 지역위원장의 계보정치가 극성을 부리면서 할 말을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며, 사실상 민주당의 자정 기능은 멈춘 지 오래다. 넷째, 이미 기획된 싸움판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는 신인들은 정치를 포기했고 이는 민주당 후보들의 무더기 무투표 당선과 유권자들의 무더기 투표 포기로 이어졌다. 다섯째, 기성 정치인들은 머리를 숙이면 품고, 대들면 파내는 ‘의리 정치’와 인연에 매몰된 ‘품앗이 공천’으로 정치판 자체를 오염시켰다.
이런 ‘일당 독점의 염증유발 정치’가 어찌 광주에만 국한된 것이겠는가. 전남·전북의 사정도 비슷하며 정도는 덜할 망정 영남지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게다. 사실 이건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이미 8번째 반복된 일이다. 아니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일이다. 놀랍지 않은가? 아니, 놀랍게 생각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별로 놀라지 않는다. 모두 다 체념의 달인이 되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불편할망정 진실을 직시하자. 지방은 서울의 식민지다. 지방에서의 정치란 서울에서의 지역간 패권경쟁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서울 권력의 힘을 빌어 보다 많은 자원을 지역으로 가져오겠다는 게 최대의 발전 전략일 뿐 지역 내부에서 스스로 발전과 혁신을 꾀하는 일엔 관심이 없다. 적극성도 없고 자발성도 없다. 선거가 다가오면 무조건 서울에서의 지역 패권 경쟁을 벌이는 우리편 정당에 지지를 보내야 한다. 그 모습은 무기력한 좀비를 방불케 한다.
서울에서의 지역 패권 경쟁은 정치를 직업으로 삼은 엘리트들의 밥그릇싸움일 뿐, 지역발전과는 무관하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민주화 이후 모든 대통령들과 국회의원 대부분이 지방출신이었음에도 지방소멸의 위기가 나타난 걸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기존 시스템으로는 지방소멸을 막을 수 없다는 건 충분히 입증되었다. 이제 생각해볼 수 있는 마지막 카드는 기존 식민지 체제에 굴종하지 않는 ‘지역정당’의 출현과 활성화 뿐이다. 이를 위해선 서울에 중앙당을 두고 5개 이상의 시·도당을 설치해야 정당 등록을 받아주는 기존 정당법을 바꿔야 한다. 기존 식민지 체제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거대 양당이 반대하겠지만,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지방소멸을 잠자코 앉아서 당할 수는 없잖은가. 비명이라도 질러야 하지 않겠는가.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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