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욱의 맥락] 팔레스타인 민족국가는 왜 불가능할까? < 국제정치/국제경제 < 이·팔 전쟁 < 세계와 경제 < 기사본문 - 피렌체의 식탁
[박정욱의 맥락] 팔레스타인 민족국가는 왜 불가능할까?입력 2023.10.19 06:50
✔ 초창기 UN, 이스라엘 국가 성립 표결… 압도적 찬성 가결
✔ 분리와 탄압은 인티파다(봉기)를 부르고, 계속되는 유혈 투쟁
✔ 서안지구의 파타, 가자지구의 하마스 그리고 더 많은 분파들
✔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분리와 배제, 또 끝없는 투쟁, 언제까지?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 한반도 남부를 장악한 미군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인 1948년까지 한반도 일부에 일본인이나 중국인의 국가 건설을 허용하거나 추진했다면 어땠을까? 도발적인 상상이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영국의 유대인 국가 건설 허용이 문제적인 건 바로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타의에 의해 종교나 역사-문화적 측면에서 이질적인 유대인들과 동거하게 되고, 점점 힘에서 밀려 극히 제한된 삶을 살아야 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형편은 20세기와 21세기 내내 처참하다. 특히 외부를 향한 분노에 보태 내부의 분열이라는 약자 특유의 쌍곡선이 뚜렷하다.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의 주도 정파가 다르며, 그 안에서도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따라 재분열이 심각하다.
정상 국가가 아닌 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배제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배제 이후의 프로세스에서는 유혈만 있을 뿐이다. 국외자의 눈에는 지배집단인 유대인 사회, 이스라엘 국가 내부에서부터 팔레스타인인 문제에 대한 최종적이고 책임있는 입장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때문으로 보인다. [편집자 주]
1945년 한반도에 외국인 난민 정부 수립이 허용됐더라면
영국은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여러 곳 여러 민족에 공수표를 날렸다. 밸푸어 선언을 통해 유대인 국가의 창설을 허용했다면, 시리아의 하심 가문에게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대한 반란을 전제로 왕국 설립을 약속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유대인들이 동유럽과 중동 각국에서 팔레스타인 땅으로 밀물처럼 밀고 들어왔으며 오래전부터 살던 일부 유대인과 합작해 1948년 독립을 선포했다. 이후의 역사는 알려진 대로다. 팔레스타인인이 대대로 살아왔던 땅(이제는 이스라엘 영토가 된)에서 벌어지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간의 갈등이며, 국외적으로는 이스라엘과 아랍의 갈등이다.
이 문제를 팔레스타인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 언제부턴가 유럽인들이 대거 이주를 해오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유대인이라고 밝혔지만, 생김새나 언어나 행동거지가 영락없는 유럽인들이었다. 유럽에서 온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정당하게 땅을 사서 정착했노라고 주장했지만, 오래지 않아 이들이 여기에 유대인들만의 국가를 세우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20세기 초 지금의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 요르단 지역은 오스만제국의 해체 후 영국과 프랑스가 통제하고 있었다. 영국은 현지 아랍인들과 상의 없이 해외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허가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런던 거주 유대인 금융가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 큰 이유다. 19세기 말 영국 보수당의 대표적 정치인인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유대 혈통이었던 것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영국의 방침에 팔레스타인인들―팔레스타인에서 오래 삶을 영위해왔던 현지 주민들은 주권국가도 또 대표자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의사를 구현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유럽의 강대국이 유럽으로부터 낯선 이방인들의 이주를 허가한 것이다. 이를 우리나라의 경험에 비유해보자. 일제가 패망하고 한반도 남부는 미국의 신탁통치 하에 들어갔다. 1948년 8월 이전 한반도에는 아직 한국인들의 주권 국가가 세워지지 않은 상태였고 결정권은 미국과 소련이 쥐고 있었다. 만일 이때 미군정이 외국에서 대거 난민들을 받아들여 한반도에 별도의 독립국가를 세우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면 당대의 한국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이스라엘 국가 건설로 휴지조각 된 대 시리아 단일 국가의 꿈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지역에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를 각각 세우라는 UN의 결정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유대인 이주자들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자신들에게 따로 나라를 세우라는 UN의 결정이 어색했다. 팔레스타인은 원래 '빌라드 알 샴'이라고 불리던 '역사적 시리아'의 일부였다. 오늘날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시나이 반도가 모두 '시리아'였던 것이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자신들이 앞서 건국된 시리아의 일부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유대인들이 UN의 권고를 적극적으로 따랐던 반면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에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데 부정적이었던 역사적 배경이다.
팔레스타인은 원래 '빌라드 알 샴'이라고 불리던 '역사적 시리아'의 일부였다. 오늘날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시나이 반도가 모두 '시리아'였던 것이다. / 사진=위키피디아
UN 표결은 이스라엘에 일방적으로 유리했다
게다가 애초에 영국은 1차 대전 당시 히자즈 지역의 통치자인 하심 가문과 밀약을 맺은 상태였다. 하심 가문이 주도하여 레반트 이남의 아랍인들이 오스만제국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다면 전쟁이 끝난 후 이 지역에 하심 가문이 통치하는 아랍 왕국을 세워주겠노라고 거래를 한 것이다.
당대 세계 최강국인 대영제국의 약속은 금세 아랍 전역에 퍼졌고,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통합 아랍 국가 건설의 꿈에 부풀었다. 이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지식인이나 종교지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에 별도의 국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더 커다란 아랍국가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상황에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따로 만든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지 아랍인들과 이주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이 통제불가능한 수준으로 격화되자 골치가 아팠던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UN으로 넘겼고, 앞서 언급한 대로 UN은 팔레스타인을 유대인과 아랍인에게 각각 분배해 두 개의 국가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일이 왜 이렇게 되었던가. 당시의 UN은 지금과 매우 달랐다. 비동맹, 제3세계 이런 개념은 서방의 식민지들이 대거 독립한 1960년대 이후의 얘기다. 일단 UN을 통한 다국간 문제 해결의 전통이 없었으며, 아랍권에서의 가입국은 1945년 기준 이집트 왕국, 사우디 왕국, 시리아, 터키 등 몇 나라에 불과했다. 미, 영, 중(자유중국), 소련, 프랑스 등 상임위 5대국이 좌지우지하는 구도는 지금보다 더했다.
영국이 1948년 위임통치 만료를 앞두고 제출한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안은 1947년 가을 총회에서 찬성 33, 반대 13, 기권 10으로 쉽게 승인되었다. 아랍인들은 이를 거부한 반면 유대인들은 적극 수용했다.
전쟁, 또 전쟁, 작은 도발, 큰 복수의 80년 세월
팔레스타인 주변의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하는 즉시 전쟁을 개시하겠노라고 경고했다. 유대인들은 전쟁을 각오한 채 비장하게 1948년 5월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고, 곧바로 전쟁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어진 세 차례의 전쟁에서 아랍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해 국가를 보존하고 중동에서의 입지를 굳혔다. 이들은 이미 1차 대전 즈음부터 사실상 무장 유대인 민병대로서 무력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아랍인들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난민 캠프에서 생활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은 잘 알려져 있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식민지적 지배로 인해 정상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없었다.
1988년, 수십 년간 참고 참았던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가 일시에 폭발한 인티파다(Intifada, 아랍어로 봉기)가 일어났다. 어린아이들마저 탱크를 향해 겁 없이 돌을 던졌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군은 인명 살상도 가능한 고무 총탄을 쏘아 진압하려 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의 봉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결국 1993년 이스라엘과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오슬로에서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그러나 평화는 일시적이었고 시간이 지나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는 또다시 충돌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무력을 통해 팔레스타인인들의 단결을 막고, 팔레스타인이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제한했다.
1988년 참고 참았던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가 일시에 폭발한 인티파다(Intifada, 아랍어로 봉기)가 일어났다. 어린아이들마저 탱크를 향해 겁 없이 돌을 던졌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군은 인명 살상도 가능한 고무 총탄을 쏘아 진압하려 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의 봉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 사진=셔터스톡
이스라엘 아랍 관계는 일면 공존으로, 팔레스타인은 계속 탄압
이스라엘이 UN에서 팔레스타인인들 몫으로 준 서안지구에 유대인들의 정착촌을 늘려나가면서 그 땅을 잠식하고 있는 것도 팔레스타인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다. 이스라엘의 억압에 대해 팔레스타인인들이 힘으로 저항할 경우 이스라엘은 10배 이상의 잔혹한 피해를 입혀 감히 도전을 꿈꾸지 못하도록 막는 비대칭적 확대보복으로 응수한다. 물론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럼에도 여전히 사슬을 깨뜨리기 위한 싸움에 나선다.
여기서 하나 짚고 싶은 것이 있다. 이스라엘 영토 안에서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 간 갈등은 이처럼 골이 깊어졌지만 큰 틀에서 아랍과 이스라엘은 1973년 제4차 중동전 이후 공존을 모색하기 시작한 점이다. 1979년 미국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가 캠프 데이비드 회담을 갖고 평화공존의 첫발을 내디뎠다. 여러 곡절이 있었지만 대체로 확대의 길을 걸었고 최근 사우디-이스라엘 간 화해 무드까지 전진해오고 있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조인 후 악수하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 / 사진=위키피디아
서안 지구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가자 지구의 하마스로 분열
1993년 오슬로협정 이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이 추진되었다.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인 요르단강 서안지구나 가자지구는 공식적으로 이스라엘과 별개의 영토다. 하지만 서안지구는 허울만 자치정부일 뿐 사실상 이스라엘의 통제 하에 운영되고 있으며, 유대인들의 정착촌 추가 건설에 밀려 조금씩 팔레스타인인들의 영역이 줄어들고 있다. 가자지구는 이스라엘의 봉쇄 하에 이스라엘로부터 들어오는 물자에 기대어 생존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가 다스리는 서안지구와 하마스의 통제하에 있는 가자지구는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을까?
우선 1990년대 중반부터 요르단강 서안지구 일부 지역을 관리해온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PLO의 주도 정당인 파타당이 이끌고 있다. 겉보기에는 정부조직을 갖추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정착촌을 통제하면서 사실상 영토 접근권을 주도하며, 서안지구의 재정에 대한 실권도 쥐고 있는 상태다.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1993년 오슬로협정의 산물로서 원래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과도기 정부의 성격이다. 통치 지역도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동예루살렘을 모두 포함했다. PA를 이끄는 파타는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UN이 제시한 2국가 해법에 따라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세우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런 만큼 이스라엘에 대해 온건한 태도를 보인다. 문제는 PA 지도부가 점점 팔레스타인인들의 지지를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 영역 내 주민에게 권위주의적이기는 매한가지
PLO 의장이자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 이후 2005년 마흐무드 압바스가 선거를 통해 PA의 수반으로 선출됐다. 그런데 압바스 정부는 수립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불투명한 재정 운용과 정실주의 인사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 4년 임기가 끝난 2009년 압바스는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은 채 총선 준비를 위해 임기를 1년 더 연장하겠다고 발표를 한다. 여기에 하마스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래도 압바스가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자 하마스는 PA와 결별을 선언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민심도 하마스를 향했다.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수반. / 사진=연합뉴스
2010년 총선에서 하마스는 압바스가 속한 파타당을 밀어내고 승리했다. 하지만 PA 지도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PA와 하마스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그 결과 PA는 서안지구를, 하마스는 가자지구를 각각 통치하는 현재의 상태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후 PA는 지금까지 어떠한 선거도 치르지 않은 채 권위주의적인 통치로 일관하고 있다. 특히 서안지구에서 활동하는 반이스라엘 조직을 체포하는 등 민심과 반대되는 친이스라엘 행보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하마스는 어떠한가? 하마스는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제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결과 형성된 1967년 국경을 받아들여 현재 국경에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1967년 국경을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모순된다. 이러한 태도는 하마스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온건하고 무능한 PA, 강경하고 불안한 하마스
하마스는 여러 파벌로 나뉘어 있는데 이스라엘 말살을 주장하는 강경파에서부터 이스라엘과 싸우되 협상할 부분은 협상을 통해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추진해야 한다는 현실론자들까지 노선상의 여러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이스라엘에 반대하며 투쟁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한편으로 가자지구의 통치 세력으로서 가자지구 인민들의 생활을 보장해야 하는 현실적인 과제도 함께 떠안고 있는 것이다.
하마스의 강경노선은 이스라엘의 강경대응을 불러오고 가자지구가 장기적으로 침체되는 데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온건 노선을 따르는 PA의 서안지구가 압도적으로 더 나은 환경을 누리는 것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은 내부에서 커다란 분열을 겪고 있다.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PA와 강경노선 위주로 불안정한 상황을 이어가는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통합의 실마리를 좀처럼 찾지 못하고 있다. 별 소득 없이 끝나는 통합 논의만 지지부진하게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배제된 자의 분리 노력은 정당한가, 부당한가?
이스라엘은 높은 출산율로 인구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갇혀 유대 민족국가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팔레스타인은 자신들의 정상적인 국가를 세울 수 없도록 막는 이스라엘로 인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다. 이 둘 사이에 어떤 해법이 가능할까.
다시 앞부분으로 돌아가보자. 민족국가 건설은 폭력을 수반한다. 누가 ‘우리 민족’이냐를 가려내는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누군가를 배제한다는 의미이며, 배제된 자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저항하거나 아예 분리독립을 추구한다. 그러면 주류 ‘민족’은 분리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무력으로 응징한다. 분리독립 운동은 이에 대응해 또다시 싸움을 벌인다.
유럽은 배제와 분리의 과정을 거쳐 민족 단위로 국가를 이룬 사례다. 반면 중동의 여러 나라들은 여전히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여러 나라에 걸쳐 살고 있는 쿠르드족의 문제다. 특히 튀르키예 같은 경우 오랫동안 군부가 힘을 유지해온 근거로 쿠르드 반군의 존재를 꼽을 수 있다. 쿠르드 반군을 국가 안보에 치명적인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군부의 확대가 필수적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군부의 잦은 쿠데타와 정치 개입을 정당화한 것이다.
이라크와 시리아, 레바논의 내전도 모두 이러한 배제-분리의 문제로 인해 일어났다. 민족 형성이 이뤄지지 못했기에 국가 내 종족집단 간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유대 민족국가인가, 이스라엘 민족국가인가…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이스라엘도 결국 이러한 문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유대 민족국가’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국가’로 진화하지 않는 한 폭력의 악순환은 그치지 않을 걸로 보인다. '이스라엘 민족국가'란 이스라엘 영토 내 아랍계 시민권자들을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대하여 이스라엘 국민으로 통합해내고, 국제사회가 인정한 영토를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팔레스타인과의 관계에서 누적해온 증오의 질량이 너무 커서 신뢰를 바탕으로 한 팔레스타인 분리 독립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데다가, ‘유대교’를 구심으로 형성되는 유대 민족 정체성이 이스라엘을 유대 민족국가라는 덫에 묶어두고 있다.
힘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이스라엘이 이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한 팔레스타인의 선택지는 두 가지 밖에 남지 않는다. 굴종하거나 저항하거나. 누군가는 굴종을 택하지만, 누군가는 도저히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수십 배의 보복을 감수하면서 싸움에 나서는 것이다. 그 현장을 지금 또다시 전 세계가 생생하게 지켜보고 있다.
글쓴이 박정욱은
직업은 라디오 PD이나 역사책을 읽는 것이 최고의 취미인 역사덕후. 특히 중동과 러시아, 인도 등 '아시아의 서쪽, 에덴의 동쪽'이 어찌 돌아가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종교와 정치가 만나는 역사를 흥미롭게 공부하고 있다. 9·11 테러 이후 국제 정치의 핵심에 서 있는 중동에 대한 안내서가 부족하다고 느끼던 중 직장이 6개월간 장기파업에 들어가면서 시간이 주어진 것을 계기로 중동 역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2018년에 <중동은 왜 싸우는가?>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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