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31

아파르트헤이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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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르트헤이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89년 더반 해변의 영어, 아프리칸스어, 줄루어로 된 "백인종 집단의 구성원들만 사용할 수 있도록 예약되었습니다"라는 표지판

아파르트헤이트(아프리칸스어Apartheid)는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프리카너 주도의 극우 국민당 정권에 의하여 1948년에 법률로 공식화된 인종분리 즉, 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정권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정책을 말한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 벌인 남아공 백인 정부와 흑인 대표인 아프리카 민족회의와 넬슨 만델라 간의 협상 끝에 급속히 해체되기 시작했고, 민주적 선거에 의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넬슨 만델라가 1994년 4월 27일에 완전 폐지를 선언하였다.[1][2]

개요[편집]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비(非)백인에 대한 분리와 차별정책을 말한다. 1960년 독립 이래 소수파인 보어인과 영국계 백인이 아프리카너(Africaner)에 대한 절대적 지배와 국민당(國民黨:집권 백인 정당)의 영구집권 기도 과정에서 이론화·조직화·제도화되었다. 유색인에 대해서는 정치적 권리는 물론 거주·영업·교육 등 사회 전분야에 걸쳐 제약을 가하고 있는데, 1976년 아프리칸스어(Afrikaans:공용 네덜란드어) 교육 문제로 소웨토 행동위원회(SAC)가 중심이 된 인종차별반대 흑인운동이 발생했고, 1978년 아자니아 인민조직(AIAPO)이 이를 계승하였으나 백인정권의 탄압으로 강제 해산되었다. 소수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정책은 OAU를 중심으로 한 급진·사회주의 주변국과 마찰을 일으켜 양측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하는 등, 이 지역 정세불안의 주요 원인이 되어 왔다. 1974년 국제연합에서의 총회 의결권 박탈을 시작으로 한 국제기구와 EC제국·미국 등 서방진영에서의 대남아공 금수(禁輸)·제재 조치에도 불구하고 백인정권은 강경입장을 고수하여 오고 있으며, 1983년 흑인 이외의 유색인에 대해서는 투표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 1984년 유색인종회의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제외된 흑인들의 파업·시위와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무장항쟁은 더욱 가속되었고, 백인정부는 비상사태 선포와 동시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 비극적인 유혈참사 사태가 일어났다.[3]

아파르트헤이트의 성립[편집]

인종분리와 아파르트헤이트 성립이전의 식민주의[편집]

아파르트헤이트란 단어는 1917년 보어인 얀 크리스티앙 스뮈츠(2년 후에 총리가 됨)의 연설에서 처음 등장한다. 비록 아파르트헤이트가 보어인이 주축이 된 정부가 주도했지만, 그 뼈대는 영국 식민지주의가 케이프 식민지와 나탈 식민지 등지에 도입한 통행법(pass law)의 유산이라는 사실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법률은 영국 당국 통제 하에 있는 백인과 유색인종의 거주구역으로 흑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 차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 칼레도니아에도 비슷한 법률이 있었다.

법률은 흑인들의 백인구역 출입을 제한했을 뿐 아니라,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이동하는 데도 인증된 통행증이 없으면 이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흑인들은 케이프 식민지나 나탈 식민지에서 일몰이후 거리에 있는 것이 불허되었으며, 따라서 한꺼번에 그들의 장소를 옮겨야 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비폭력투쟁으로 유명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영국령 인도의 젊은 변호사였던 그가 남아공에서 동족들의 법률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1년간 머물렀을 때, 그는 변호사 신분임이었음에도 유색인이라는 이유로 온갖 수모를 당했다. 재판정에서는 터번을 벗으라는 행정장관의 명령을 거부하여 법정에서 쫓겨났고, 기차에서는 1등석 표를 샀음에도 3등석으로 옮겨앉으라는 백인의 말을 거부하여 기차에서 내던져졌으며, 마차에서는 백인승객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내려서 걸으라는 명령을 거부해 구타당했다. 이러한 폭력은 일상적인 것이었으며, 간디는 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비폭력주의를 남아공에서 처음 전개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당시 총리인 얀 스뮈츠와 집권 연합당은 엄격한 인종분리 정책의 강제를 완화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연합당의 정책이 점진적으로 서로 다른 인종간의 동화를 촉진하고 말것이라는 두려움이 기득권 백인 사이에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소어 위원회가 이 문제에 대해 설치되었고, 이러한 정책은 모든 인종집단의 존재상실로 이어진다고 단언했다.

영어,아프리칸스어,줄루어로 표시된 소 아파르트헤이트 표지판(1989)

아파르트헤이트의 실행은 많은 점에서 초기 분리주의자들의 정책과 행정적 특징들을 유지하고 있다. 일례로 1913년에 재정된 토지법과 컬러바와 같은 많은 작업장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아파르트헤이트를 만들어낸 학자인 베르너 아이젤렌은 인종분리와 백인우위가 그때까지의 방식으로는 더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주장했다. 1948년에는 정치적 분할정책으로서의 아파르트헤이트는 완전한 인종분리에 비해 유리한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즉, 흑인과 백인이 하나의 국가의 한 국민으로 묶여 있는 한 소수백인에 의한 지속적인 흑인분리 및 통제는 비용이 많이들고 지속하기 어렵기 때문에 백인국가와 흑인국가로 분할해 버리자는 것이다. 이 두 정책은 정치적 분할(대(大) 아파르트헤이트)과 인종분리(소(小) 아파르트헤이트)로 구분되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정치인은 헨드릭 페르부르트이다.

1948년 선거와 집단지구 법령[편집]

1948년 선거의 준비단계에서 국민당(the National Party)은 아파르트헤이트를 공식정책으로 내걸었다. 국민당은 얀 스뮈츠의 연합당(Union Party)에 근소한 차이로 승리, 개신교 성직자인 다니엘 프랑수아 말란의 리더쉽에 의해 아프리카너 정당(AP)과 연정을 구성했다. 이들은 즉시 아파르트헤이트의 이행을 서둘렀다. 인종간 혼인금지법안이 통과됐고, 개인은 인종에 따라 분류되었으며, 의심쩍은 경우 확인할 수 있는 인종분류표가 만들어졌다. 1950년의 집단지구법령은 아파르트헤이트의 핵심으로서, 인종별로 거주지역을 나누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1953년에는 인종별 시설분리법이 만들어졌는데, 인종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해변, 버스병원학교 및 대학교 등을 분리시켰다. 이미 시행중이었던 통행법은 더욱 강화되었다. 모든 남아공 국민들은 신분증명서류를 휴대하도록 강요되었다. 흑인에게 이러한 신분증명서류는 백인지구로의 출입을 통제하는 "여권"과 같은 구실을 했다. 흑인은 백인거주지역에서 "이주허가"가 없는 한 체류가 금지되었다. 흑인의 도시거주는 고용된 노동자에 한했고, 그들의 가족은 제외되었으며, 따라서 흑인 남성은 배우자와 자식들과 생이별해야 했다. 데이빗 유델만이나 헤르만 길료메 같은 몇몇 저자들은 아파르트헤이트 시스템이 1907년의 영국 및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노동운동과 이에 따른 정부대책의 선례에 따른 잔재라고 주장한다.

유색인종 유권자의 공민권 박탈[편집]

말란에 이어 수상이 된 J.G.스트레이돔은 케이프 주에서 유색인종과 흑인의 투표권을 박탈하기 시작했다. 전임정부는 1951년부터 인종별 분리투표를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그 법률효력은 법원에 의하여 연합당에 의해 지지된 네 명의 투표자들때문에 바뀌었다. 케이프 상급법원은 법률유지 입장을 드러냈지만, 상급법원에 항소되었고, 실효성이 별로 없다고 판단되었다. 이는 국회 양원의 2/3에 해당하는 의원들이 동의해야만 헌법을 개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회에 법원보다 월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법안을 상정하였다. 이것은 케이프 고등법원과 상급법원에서 모두 실효성이 없다고 선언되었다. 1955년 스트레이돔 정부는 최고법원의 대법관 수를 다섯에서 열하나로 늘렸고 국민당 성향의 판사들을 신임법관자리에 속속 앉혔다. 같은 해에 그들은 상원의 정원수를 49명에서 89명으로 올리는 상원법률을 제출했다. 국민당 소속 의원들이 89석 중 77석을 장악하도록 조정이 이루어졌다. 마침내 1956년 남아공 국회 양원에서 인종별 분리투표 법안이 통과하여 케이프에서 유색인종은 일반적 투표권을 박탈당했다.

주요 아파르트헤이트 입법[편집]

  • 인종간 혼인 금지법 개정(1949년)
    • 이 법률은 서로 다른 인종에 속한 개인간의 혼인 관계를 전면금지하고 있다. 인종적으로 원주민에 흡수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 외에도, 모든 법률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 배덕(背德)법 개정 (1950년)
    • 이 법은 백인이 유색인종과 갖는 성관계를 부도덕한 범죄행위로 처벌한다.
  • 주민등록법 (1950년)
    • 이 법은 만 16세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신분증을 만들 것을 의무화한다. 국민의 인종정보는 등록증에 표시된다.
    • 이 법률은 모든 시민들이 흑인백인컬러드인도인 중 하나의 인종그룹에 속하도록 규정한다.
  • 반공법 (1950년)
    • 이 법은 남아프리카 공산당(South Africa Communist Party;SACP) 및 정부가 공산주의 정당이라고 규정한 모든 정당의 활동을 금지한다. 이 법률은 남아공 공산당원에게 최대 징역 10년형을 규정하고 있다. 법무장관 C.R. 스와트가 법률을 고안했는데, 이 법은 흑인들을 탄압하는 데 악용되어, 남아공 백인 경찰들은 흑인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살해하고는 시체를 불태워 증거를 인멸하였다.[4]
  • 집단지구법 (1950년)
    • 이 법률은 국토를 인종에 따라 특정 인종만 이용 및 거주할 수 있는 인종구역으로 나눈다. 이 법은 아파르트헤이트의 핵심법률로 간주되는데, 이 법률의 시행에 따라 인종별 정치적, 사회적 분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 반투자치법 (1951년)
    • 이 법률은 흑인들만의 분리된 정부를 규정했다. (반투스탄이라고 불리는 불모지 땅에 흑인들을 집단거주시키고, 남아공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혜택을 완전히 박탈하여, 흑인 노동자를 외국인 근로자로 만들려는 의도로 시행되었다.)
  • 불법거주금지법 (1951)
    • 이 법률은 정부가 대도시의 흑인 슬럼가를 합법적으로 철거하기 위한 법률이다.
  • 건축원주노동자법 및 원주자징수법(1951)
    • 이 법률은 대도시(백인 지역)에 노동자로 합법 거주하는 흑인 노동자가 거주하는 집의 백인 건물소유주가 흑인 노동자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법률이다.
  • 시설분리보존법 (1953년)
    • 이 법률은 서로 다른 인종이 같은 공공편의시설(식당, 수영장, 화장실 등)을 이용하는 것을 금지한다.
  • 반투교육법 (1953)
    • 이 법률은 모든 흑인아동의 취학을 정부통제하에 둔다.
    •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인종별 분리교육에 큰 중점을 두었다. 한 나라에 무려 인종별로 17개 이상의 분리된 교육시스템이 있었다. 흑인에게 제공되는 교육시스템은 백인, 컬러드, 인도인에게 제공되는 교육에 비하여 질이 낮았다.
  • 반투도시지구법 (1954)
    • 이 법은 흑인인구의 대도시 이주를 삭감, 통제했다.
  • 광산노동법 (1956)
    • 이 법은 고용에서 인종차별을 정형화시켰다.
  • 흑인자치정부촉진법 (1958)
    • 이 법은 홈랜드 또는 반투스탄이라고 불리는 흑인집단거주지를 남아공에서 분리된 독립국가로 만들고, 흑인들에게 해당 홈랜드안에서 투표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홈랜드가 사실상 독립한 후에도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한 홈랜드에 남아공 정부는 강한 영향을 미쳤다. 국제사회는 홈랜드의 독립을 남아공에 의한 인종차별적 괴뢰국으로 보고 인정하지 않았다.
  • 반투투자법인법 (1959)
    • 이 법은 홈랜드 내부에 고용을 창출하기 위한 법이다.
  • 대학교육확장법 (1959)
    • 이 법은 대학을 흑인, 컬러드, 인도인 등 인종집단별로 분리시켰다.
  • 천연자연이용법 (1967)
    • 이 법은 정부가 백인도시의 산업발전 대신 그러한 산업시설을 홈랜드 국경 근처에 옮기도록 한 법률이었다. 법률의 목적은 홈랜드의 흑인들이 홈랜드 근처에서 자리를 잡아 흑인의 노동력을 이용하고 홈랜드를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시키도록 하는 것이었다. 백인 소유의 기업과 자본들은 백인 도시외에서도 문제없이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법의 결과, 홈랜드에 바발레기, 템바, 마보파네, 가란쿠와, 음단차네, 만다데니등의 홈랜드 도시가 형성되었다.
  • 홈랜드 시민권법 (1970)
    • 이 법은 홈랜드 거주 흑인들에게서 남아공 국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여 외국인으로 간주했다. 법률의 목적인 남아공에서 소수인 백인들이 흑인지구를 독립시킴으로써 인구 대비 우위를 견지하기 위한 책략이었다.
  • 아프리칸스어 매개 법령 (1974)
    • 이 법령은 홈랜드 외에서 아프리칸스어와 영어의 사용을 50대 50대으로 균등하게 규정하는 법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스템[편집]

아파르트헤이트 시스템은 남아공을 백인국가와 흑인국가로 완전 분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대 아파르트헤이트와 국가내에서의 분리 및 차별을 가리키는 소 아파르트헤이트로 구분한다. 집권 국민당은 1980년대 들어 소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폐지하기 시작했으나, 1990년대까지 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집착했다.

대 아파르트헤이트 (홈랜드 시스템)[편집]

홈랜드의 위치
홈랜드(반투스탄)의 하나인 치스케이의 농촌지역

소위 분리발전정책은 베르부어드 박사가 1958년에 권력을 획득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분리발전의 초석으로서 홈랜드 시스템의 구축을 구상하게 된다. 베르부어드는 이 홈랜드들에 궁극적으로 독립을 부여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백인 남아공과 홈랜드의 산업시설과 반투투자법인이 홈랜드의 발전과 고용을 위해 추진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Repeal of Population Registration Act”. C-Span. 1991년 6월 17일. 2018년 6월 1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6월 7일에 확인함.
  2.  Myre, Greg (1991년 6월 18일). “South Africa ends racial classifications”. Cape Girardeau: Southeast Missourian. Associated Press. 2020년 6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3월 1일에 확인함.
  3.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아파르트헤이트〉
  4.  실제로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과거사에 대해 고백할 경우 사면한다는 정책을 실시했을 때, 남아공 경찰관들은 아파르트헤이트시절 반공법을 악용한 경찰의 흑인들에 대한 살인이 있었음을 시인하였다.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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