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권용득 - K-방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성공적인 건 정부의 역할도 크지만, 여러 우연이 겹쳤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권용득
13 May at 01:09 ·
K-방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성공적인 건 정부의 역할도 크지만, 여러 우연이 겹쳤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우연은 파고들면 어느 정도 설명되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초과 근무에도 군말 없는(하지 못하는) 방역 인력, 드라이브 쓰루 선별진료소를 재빨리 생각해내는 순발력, 언제쯤 오냐고 전화하면 이미 출발했다는 만리장성 짜장면보다 빨리 공개되는 확진자 동선, 자유를 사랑하는 미국인처럼 ‘나는 마스크 안 쓸 권리가 있다!’고 개기면 쿠사리 먹는 사회적 분위기, 혹은 어릴 때 의무적으로 맞았던 불주사 효과, 유별난 건강염려증, 각종 혐오, 국뽕 등등 여러 긍정적 요인과 부정적 요인이 복잡하게 상호 작용한 결과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지금까지 온 배경도 지원단체의 역할이 크지만, 여러 우연이 겹쳤다고 생각한다. 프랑스군도 일본군처럼 자신들의 전쟁에 식민지의 가난한 여성을 동원했다. 큰돈을 벌 기회라며 가난한 여성을 꼬드겨 전쟁터로 데려갔고, 일본군과 거의 똑같은 구조의 위안소를 운영했다. 그렇게 동원된 여성은 군의 통제 하에 군수품처럼 관리됐고, 그중에는 미성년자도 있었다. 한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런 식의 여성 착취가 욕구불만으로 가득찬(또는 언제 죽을지 모를 공포에 사로잡힌) 병사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필요악으로 여겼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후방은 매음굴이나 다름없었다. 상당수 베트남 여성이 미군을 상대로 자신의 몸을 팔았다. 미군은 세계 곳곳 주둔하는 곳마다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정자를 뿌리고 다녔다. 과거 한국 정부도 그런 미군을 눈감아줘야 했다. 눈만 감아준 게 아니라 취업 사기 형태로 미군을 상대할 여성을 모집하기도 하고,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의 위생 관리도 주기적으로 실시했다. 말하자면 한국 정부는 비공식적으로 미군을 위한 포주 역할을 한 셈이고, 그와 같은 일에 종사하는 여성은 자국의 경제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애국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어느 나라 군대든 주둔지에 과거처럼 위안소를 차리거나 주둔지 여성을 함부로 대하면 국제 사회에서 왕따 당한다. 이제는 그와 같은 여성 착취가 필요악이 아니라 범죄가 됐고, 국제 사회가 그걸 범죄로 인식하기까지 여러 사람의 희생이 있었다. 피해당사자의 희생은 두말할 것 없다. 그런데 프랑스나 미국은 자신들이 착취한 여성에게 사죄하거나 보상한 적이 없다. 자신들의 어두운 이면을 자라나는 자국 청소년에게 가르치지도 않는다.
반면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자라나는 자국 청소년에게 안 가르치다가 조금 가르쳤다가 다시 안 가르쳤다가 자꾸 이랬다저랬다 한다. 총리가 피해자들에게 사죄 편지도 쓰고 기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했지만, 법적인 책임이 아니라서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 정부가 아직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도 없고 보상한 적도 없는 걸로 여겨진다.
프랑스와 미국에 비하면 일본은 양반 아니냐, 그딴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위안부 문제가 지금까지 온 배경에는 국력의 성장도 한몫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을 뿐이다. 위안부 문제가 가시화된 시점(90년대 초반)은 공교롭게도 급격한 경제 성장 과정 속에서였다.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여성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여성 인권도 덩달아 높아졌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성매매산업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노무현 정부에서는 성매매특별법을 만들어 성매매를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단속했고, 당시 여성단체와 시민사회는 ‘여성 인권을 위한 진일보한 조치’라며 해당 조치를 반겼다. 성매매 관련업 종사자는 생존권 침해라며 강하게 반발했지만(가두시위도 했다), 그들의 생존권은 당사자 말고 대부분 신경 쓰지 않았다. 한때는 제 몸을 팔아 나라를 먹여 살린 애국자였지만, 삼성과 현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면서 더 이상 필요없는 존재가 된 셈이다.
그런 식으로 국가와 사회는 여성을 오랜 시간 착취했다. 그렇게 착취당한 여성은 이등시민 자격도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건 위안부 문제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 아니다. 일본의 우익 세력이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라며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배경에는 창녀 혐오가 깔려 있다. 그 덕분에 한국 사회에서는 강제로 끌려간 어린 소녀가 위안부 문제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순결한 피해자를 상징하는 소녀상이 세워졌고(정의연 측은 소녀상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소녀상은 국제 사회에 일본의 야만적인 범죄 행위를 고발하는데 효과적이었다. 프랑스와 미국 같은 나라는 소녀상 뒤로 숨으면 그만이다. 소녀상을 통해 자신들과 일본을 손쉽게 분리할 수 있을 테니까. 말하자면 위안부 문제가 지금까지 온 배경은 피해당사자의 용기 있는 증언, 지원단체의 활동, 관련 연구, 경제 성장, 여성 인권 향상, 창녀 혐오, 반일민족주의, 국뽕 등등 여러 긍정적 요인과 부정적 요인이 복잡하게 상호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지난겨울 한 심포지엄에서 우에노 치즈코는 약간 농담조로 말했다. 유럽과 미국에서의 전시 성폭력 관련 연구는 긴 세월 공백이 있었고, 관련 연구는 오히려 동아시아에서 앞서가고 있다며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이 웃겨서 웃음을 터뜨린 게 아니라 너무 아이러니해서 말이다. 우에노 치즈코 말대로라면 한국은 방역 선진국일뿐만 아니라 전시 성폭력 관련 연구(또는 운동) 선진국이기도 하다. 그게 가능한 까닭은 어쩌면 과거에 착취와 피착취 관계였던 일본과 한국이 지금은 서로 대등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지금 세대가 해야 할 일은 서구 사회에 비해 앞서간 방역이든 전시 성폭력 관련 연구든(운동이든), 그게 우연이 아니고 필연일 수 있도록 대비하는 게 아닐까. 언젠가 또 새로운 바이러스가 다시 닥칠 테고, 여성을 착취하는 수단은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고(성매매특별법이 있음에도), 우리는 아직 복잡한 것을 복잡한 그대로 얘기할 만큼의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이것의 결과는 저것이라고 쉽게 얘기하고, 우리 편과 적을 나누기 바쁘다. 방역이든 운동이든, 부정적 요인에 기댄 아이러니한 성과를 마치 노오력만으로 이루었다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오력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아무리 노오력해도 만리장성 짜장면은 지가 오고 싶을 때 온다.
137Naran Jung, Insu Bae and 135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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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득
권용득 ※ 베트남전 당시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업에 종사했던 베트남 여성 숫자는 검증된 정보가 아니라서 수정했습니다.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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