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5

손민석 내가 이재명에 관심이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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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재명에 관심이 없어서 띄엄띄엄 알다가 대선후보가 된 다음에 비로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정말 이상한 사람 같다.

한국 학계의 통설은 가쓰라 - 테프트 밀약으로 한국과 필리핀이 교환되었다는 것이지만 적어도 외국 학계나 외교계의 인식에서는 이 밀약 자체가 존재한 적이 없다. 교과서에 올라가 있는 상식적인 얘기라 다들 사실이라 생각하겠지만 학술논문 몇 개만 뒤져보면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1959년 미일관계사 연구의 대가인 에스터스가 반론을 펼친 뒤부터 논쟁이 이어졌다. 에스터스의 논점은 2가지이다.
1) 이미 한국은 러일전쟁의 전리품이기 때문에 필리핀과 교환할 흥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2) 비밀협정 운운하지만 이미 일본 정부 기관지인 국민신보에서 대놓고 이 협정의 존재를 보도했는데 어떻게 "비밀"협정이 되며, 단순한 의견의 교환이 어떻게 "협정"이 되냐는 것이다.
가쓰라 테프트 조약이 밀약이라는 것은 일본 정부의 자의적인 판단을 한국 측이 협정으로 오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전에 추천한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현대사>에서도 미국인인 저자는 전직 외교관의 관점에서 한국인들이 대체 왜 그런 밀약이 존재했다고 생각하는지, 미국이 왜 한국을 '배신'했다고 생각했는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적어도 미국측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현실을 그저 인정했을 뿐이라 생각한다.
잠깐만 더 설명하자면 가쓰라 테프트 협정은 한국과 필리핀의 교환보다는 반대로 국제분쟁의 해결법에 대한 미국과 러시아 간의 의견의 대립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한다. 1899년 헤이그 평화회의의 산물로 나온 헤이그협약에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서로 모순적인 제2항과 제4항이 존재한다. 제2항 거중조정은 외교관의 테이블에서 문제를 다루자는 것으로 러시아가 강하게 밀고 나갔으며, 제4항 중재재판제도는 국제재판소에서 사법적 판단을 통해 해결하자는 것으로 미국이 러시아에 맞서 강하게 밀고 나간 것이었다. 둘다 제3국이 국가들 간의 분쟁에 개입할 수 있는 방안으로 어떤 방법이 더 많은 지역에 적용될 것인가에 따라 미국과 러시아의 이해가 갈라진다. 그런데 이 제4항에는 독소조항이 있다. "국가의 명예", "독립에 관한 일", 그리고 "사활적 이익"에는 개입할 수 없다.
일본은 조선을 일본의 "사활적 이익"에 해당하는 것이라 못박아놓는 것이 필요했고 미국은 그것을 통해 거중조정이 아닌 중재재판제도의 세계적 적용을 꾀해야 했다. 여기서 대한제국은 어떤 선택을 했는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등에 업고 "거중조정제도"를 활용하는, 그러니까 국내적 친러파와 대외적인 러시아의 개입을 통한 외교적 중재로 독립을 유지하고 중립화를 꾀했던 것이다. 미국의 루즈벨트 입장에서 대한제국은 러시아와의 국제법적 논쟁에서 러시아의 편을 드는 국가로밖에 볼 수 없었으며 못해도 중재재판제도의 적용 지역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 중재재판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동맹에 영미일 삼각동맹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일본을 지지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고 중재재판체제를 한반도에 적용하더라도 일본으로서는 문제가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한제국의 고종은 헤이그특사 파견 등을 통해 중재재판제에 일본을 제소하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한다는 점 또한 주요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제국의 차르는 국재재판소에서의 중재재판을 통해 강화를 하겠다고 하고 있었다. 일본으로서는 청일전쟁 이후의 전리품을 삼국간섭 속에서 도로 토했던 악몽이 러일전쟁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는 트라우마가 작동할 수밖에 없었고,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보호국화 하는 방향으로 급박하게 사태를 진행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행위에 대해 미국이 인정해주고 한반도가 일본의 '사활적 이익'에 해당한다는 점을 어떻게든 확정받을 필요가 있었다. 앞서 미국인 외교관들은 그것이 러일전쟁의 승리를 단순히 인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별 의미를 두지 않았음에도 일본이 이것을 어떻게든 협정으로 보이게 하려 노력했다고 말했는데 바로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가쓰라 테프트 밀약이 사실이든 아니든 일본 입장에서 그것은 "사실이어야만" 했다.
지금 한국이 식민화의 과정에서 깨달았어야 하는 지점은 전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고 러시아 쪽에 판돈을 걸었다가 주권마저 잃어버리게 된 과정 그 자체이다. 미국에게 왜 우리를 배신했냐고 따져물을 것이 아니라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지도부의 외교적 감각과 도박이 잘못된 방향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영미일 해양세력의 동향에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한 결과로 식민화되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따져묻고 있으니.. 한심할 지경이다..
역사적 사실관계가 어떻든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미국인 입장에서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역사적 사실과 상관없이 만나러 온 이에게 과거사를 들먹이며 미국이 한국 분단에 책임이 있다고 하는 걸 보면서 대체 무슨 효과를 노리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1. 기본소득제부터 시작해서
  2. 가상화폐,
  3. 부동산이익환수,
  4. 미국의 분단책임 발언 등

의 일련의 발언들을 보면 이 사람이 최소한의 정치적 감각이라는 걸 갖고 있는건지 의문스러울 때가 많다. 저런 주장에 호응하는 인간집단이 한국에 그리 많은가? 내가 일반적인 한국인 집단과 그정도로 유리됐다 생각하지 않는데.. 여러모로 이상한 사람이다.
YoonSeok Heo and 10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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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호
    외국에서온 교수님이 실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 같은게 없었다고 해서 자세한 내막이 궁금했는데 이 글 읽고 알게되네요.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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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성우
    덕분에 더욱 자세히 알게되네요.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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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장규
    말씀대로 밀약이랄 게 있었느냐 자체가 논란인 것으로 압니다. 그냥 비망록 내지 의견확인 수준이란 게 더 사실일 듯하구요.
    다만 당시 대한제국의 선택지가 그리 많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국제적으로는 가장 파워가 큰 영국은 조선에 애초에 큰 관심이 없었고, 그나마 믿을 건 미국이나 러시아라고 생각했겠죠.
    물론 지나치게 러시아 쪽으로 경도되거나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서 영미일의 신뢰를 잃은 건 판단미스였지만, 당시 상황에서 일본과 동등한 자격 내지 적어도 대한제국의 최소한의 독립은 보장받을 정도로 영미를 설득할 수 있었는지는 사실은 회의스러운 생각도 많이 듭니다. 좀 더 일찍 움직였다면 몰라도, 이미 타이밍이 늦었던 것 아닌가 싶기도.
    사실 일본은 쇄국이라지만 네덜란드와의 교역은 유지하는 등 실용적이었던 반면 한국은 북벌 등 대중국 관계에만 매몰되어 있었으니까요. 특정 시기의 외교감각 이전에 그 이전부터 축적된 요인들이 더 강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그에 관계없이 오락가락하다 러시아에 판돈을 왕창 건 게 잘못임은 확실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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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민석
      고전적인 대립구도를 가져오자면 내부적 역량과 외부적 압력 중 어느것이 우위에 있는가의 문제이겠으나 핵심은 결국 내부적 역량과 외부적 압력 중 내부적 역량이 더 커져야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고 봅니다. 베트남처럼 근대화가 상당히 진행된 경우도 프랑스제국주의의 집요한 공격에 식민화되지 않았는가 할 수 있겠으나 그것도 결국에는 외교적 수단을 통해 외부 압력을 줄이지 못한 것이겠죠.
      이러한 구도를 한반도에 적용한다면 한국에는 갑신정변 이후 개화를 추동할 역량이 상당한 정도로 훼손되었으며 일본의 후원 속에서 이뤄지는 1894년의 갑오을미개혁의 추동력도 상당부분 상실해버렸습니다. 고종의 대한제국은 사상사적으로 정약용의 조선사회개혁론에서 기원하는데 정약용은 근대성과 별 관계가 없는, 중국식 황제권화를 지향했다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적 맥락 위에서 당시 조선왕조가 행정적 기능이 분산되어 주권sovereign이 기능하지 못하는 "자연상태"에 버금가는 놓여있었다는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대한제국이 전제국가였던 것은 맞으나 군주권이 주권의 중심이 되어가는 과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개화파의 갑오개혁적 근대국가 건설이 실패한 이상에는 사상사적으로 중국식 황제권을 지향하던 실학적 맥락과 현실적으로 국가의 주권이 위협받아 형해화된 상황에서 황제를 중심으로 주권을 재정립해야 할 현실적 필요성(이태진 식의 절대군주론은 이런 점에서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습니다)이 결합한 정치적 기획이 대한제국의 성립이라 봅니다.
      문제는 고종이 그러한 주권의 확립을 통해 근대사회를 지향하기보다는 국가재정을 왕실재정에 종속시키는 등 일종의 국가의 가산제화家産制化, 사유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10년을 날려먹었다는 것이겠죠. 저는 대한제국이 러시아 차리즘 제국을 모델로 삼았다는 허동현의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지만 곱씹어볼만한 구석이 있다 봅니다. 물론 그는 그것을 이유로 이태진 등의 국사학계와 민주당 등의 진보세력 전체를 대륙지향적 세력=공산주의적 성향이라 몰려 했던 것이지만 세계사적으로 영미식 의회주의와 러시아식 전제주의 간의 이념적 대립 속에서 대한제국의 사상사적 위치가 어디쯤이었는지 가늠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전근대적인 조공질서 속에 놓여 있는 사회, 민족은 칸트 그 자신도 주장했듯이 사실상 무권리의 종족입니다. 이들이 주권을 형성하는 과정이라는 맥락 속에서 대한제국의 역사적 경로를 음미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대한제국의 대내외적으로 주권을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내부역량을 끌어모으는데 있어 실패했고 영미일 해양세력과 척을 지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주권형성을 위한 군주권의 강화가 근대국가의 내실을 형성할 내적 개혁과 연동되기보다는 여전히 성리학적 세계관 속에서 유교적 근대를 탐색하는 것에 멈추며 군주 개인의 사익추구로 치달으며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내적으로도 양반사족의 귀족화 성향이 동학에서 기원한 대중운동과 격렬하게 충돌하며 귀족정과 인민정 간의 투쟁 속에서 내부 역량을 소진해버렸고요.
      차라리 일본의 식민지가 아닌 후원을 받는 국가, 즉 일본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했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반일성향이 강한 한국에서 먹힐 얘기는 아니지만 일본의 아시아주의와의 연대 속에서 한국이 지금처럼 러시아의 만주진출을 가로막는 교두부로 활동하겠다며 근대화를 위한 지원을 영미일로부터 얻는 방향을 택했더라면 식민화까지는 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10년도 채되지 않은 1919년부터 식민지해방이 시대적 흐름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런 점에서 내부역량과 함께 외교적 감각이 중요했다고 봅니다. 외교적 감각 자체가 내부 역량이지요. 지금도 이재명이 미국에 하는 짓을 보면 내부적 역량이 여전히 없는 것이라 봅니다.

      이장규
      예, 사실은 저도 대한제국이 일종의 보호국 형태라도 한 20년쯤 버텼으면 또 달라질 수도 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러시아혁명과 민족해방 등 시대적 흐름이 바뀌었으니까요. 근데 그래도 일본의 이후 행보를 생각해보면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내부 역량을 모을 시간은 좀 더 벌 수 있었겠지요. 실제로 그렇게 하는가는 또 별도 문제지만요.
      뭐 어차피 다 가정이고 지난 일이니까, 지금 잘 하는 게 더 중요한데 말씀대로 걱정입니다. 이재명만이 아니라 윤석열도 그렇고 양쪽 다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듯해서요. 관료들이라도 잘 해야 하는데, 그것도 잘 모르겠고.


  • Jinhwan Eugene Lee
    카츠라-태프트 회담 내용이 어떻든 간에 방문한 손님에게 뜬금없이 저런 말을 던진다는 게 무례하고 격이 없는 거죠…관련 페북 댓글들 중 속이 시원했다는 댓글들이 보여서 더 뜨악…

    Author손민석

    그렇죠.


  • 가쓰라 - 테프트 협정(THE TAFT-KATSURA AGREEMENT)에 관한 해석은 협정 당사자 간에도 다를 수 있고, 특히 이런 협정처럼 외부에 공개되었을 때 협정 당사국에 대한 국제적 신뢰도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협정에 대한 해석은 물론 그런 협정이 과연 존재하였는가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견해가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검색한 바에 따르면, 한국 측에서는 1945년 5월 이승만이 구미위원부 위원장의 자격으로 얄타 회담에서의 한반도에 대한 비빌 협약에 반발하여 당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 협정에 관해 처음 언급했던 것으로 나옵니다. 해당 서한에서는 가쓰라-태프트 협정이 비밀리에 체결되어 20년이 다 지나기 전에 공개되었다고 언급하였는데, 실제로 해당 협정의 내용은 1924년 10월 발행된 "The current history magazine" 의 15쪽 "루스벨트가 일본과 체결한 비밀 협약(ROOSEVELT'S SECRET WITH JAPAN)"에 실려 공개되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또 이와 관련하여 루스벨트는 자기 자서전에서 "카츠라 백작과의 대화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옳다. 가쓰라에게 당신이 한 모든 말을 내가 확인한다고 진술해 주었으면 좋겠다..."(1905) 고 하면서 한국이 "자치를 위해든 자기 방어를 위해든 완전히 무력함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는 것을 승인했다"고 쓰기도 했습니다.





  • Author손민석


  • 그게 1924년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가쓰라 테프트 비밀조약이 존재했다고 최초로 주장한 타일러 데넷의 주장입니다. 1924년에 미국 의회도서관을 뒤지다가 외교문서를 하나 발견하는 게 그게 태프트와 가쓰라의 대화록이었고 그가 이것을 1924년에 "비밀협정(secret Pact)"로 규정했습니다. 

  • 여기서 필리핀 - 한국교환론이 나온 것이고 위의 글에서 언급했던 에스터스가 그것을 1959년에 반론한 겁니다. 내용이 길어져서 언급하지 않았는데 위의 일을 기획한 게 루즈벨트였습니다. 미일중재"조약"의 체결을 통해 루스벨트가 자신의 아시아전략을 관철시키려 했는데 미국 상원 등에 의해 막히자 협정이 조약을 대신하는 효력을 내게 하기 위해 그런 식으로 말을 한 겁니다. 좀더 검색해보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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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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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ungsei Lee

    아, 그런 배경이 있었군요. 이번 기회에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Author손민석

    Youngsei Lee 최정수의 "미국의 세계조약체제와 한국문제 1905-1946"이라는 논문이 이 문제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전체적인 시각을 제공해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루즈벨트의 대한정책은 사실상 "불법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합법적인 기반이 없이 한미조약, 미국헌법, 그리고 본인이 관철시키려 한 세계조약체제를 모두 위반한 것입니다. 

  • 일본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고려 때문이지요. 루즈벨트는 을사조약 등을 옹호했지만 법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1905년에 한국을 매개로 하여 체결된 조약, 협정 등은 모두 원상복구 되어야 하고 한국의 근대국가로서의 주권 또한 회복되어야 했습니다. 

  • 즉 우리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쓰라 태프트 '밀약'은 조약이 아니어야 합니다. 일본도 이것을 알기에 한일병합 등의 조약체제의 "합법성"에 대해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고 지금도 그런 입장의 연장에서 1965년 체제를 지지하고 있다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 실제로 1920년대 이후의 미국의 대한정책은 이런 법적 관점에서 불법적으로 이뤄진 것들을 회복하는 것이었고 그 귀결이 카이로선언을 통한 한국의 독립 보장이라는 게 최정수의 논문의 요지로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본 지가 좀 돼서 정확한지는 다시 찾아봐야 할 듯합니다. 하하. 혹시 틀린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아무튼 저는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들이 이것을 미국의 "배신"이라고만 보고 밀약이 실존했다고 하는 것은 이후의 역사의 복잡성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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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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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ed



    Youngsei Lee

    저 역시 가쓰라-태프트 협정을 두고 이것을 미국의 "배신"이라고 보고, 한국에 대한 일제 식민 지배에 미국의 책임이 있다고 하는 이재명의 단순 무식한 인식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 1905년의 상황에서나 또 현재의 상황에서나 정치 지도자들이 국제 정치의 냉혹함을 깨닫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주변국에 의존하고, 악화된 상황에 대해 반성하기보다는 주변국에 그 책임을 떠 넘기며 남탓을 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짓이라 생각합니다. 

  • 그러한 인식의 연장선에서 볼 때, 가쓰라-태프트 협정이 국가 간의 정식 조약이냐 아니야 하는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1차 대전 후 윌슨의 평화 원칙 14개조의 제1조에서 비빌 외교의 폐지를 주장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에는 강대국들 간에 비밀 조약이 일반적이었음을 감안할 때, 가쓰라-태프트 협정이 그저 두 나라 장관 사이의 사적인 대화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고 해도, 당시 대통령이 대화에서 오고간 내용에 대해 승인을 해 주었다면, 그것은 어쨌든 한일 관계에 대한 미국의 공식적 입장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  사실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그 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나 중국과 세계의 패권을 다투는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과 일본은 장기의 졸이나 포 혹은 차에 해당하고, 러시아나 중국의 세력 확대를 막는 데 한국과 일본 중 어디가 더 쓸모 있느냐에 따라 한국이 졸로 보이고 일본이 차로 보이면 일본을 살리기 위해 한국을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 따라서 현재의 우리로서는 과거의 가쓰라-태프트 협정을 가지고 미국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가쓰라-태프트 협정에서 드러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기본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여 대일본 관계는 물론 대중국, 대러시아 관계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미국에게 뒤통수를 맞는 일이 없도록 치밀하게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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